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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life · 7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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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구멍으로 본 세상 풍경.
글쓴이 : 권 정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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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life · 7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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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 개.
저는 경남 김해시 한림면 가산리 신전 27번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1947년생의 남자입니다.
4남 2녀의 차남으로 가정형편이 비교적 어렵지 않게 성장하여
지금 이 나이가 된 젊은 노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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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서(1954년 4형제) *  * 가족의 점심 식사 *
아무쪼록,
이 글을 읽는 분들께서 읽는 시간이 아깝지 않은,
“잠시, 잠깐 생각 나는 글” 이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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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life · 7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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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6.25 사변 종전 후.
초등학교 입학 전, 기억으로 우리 집 앞 논두렁이며 동내입구의
큰 둑에도 최후의 낙동강 전투로 철조망 설치가 많았다.
내가 초등학교입학 한참 전의 희미한 기억들은 가끔씩 낙동강 쪽에는
대포 소리가 밤낮으로 요란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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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군의 시골에 사시는 고모님께서 우리 집에 피신을 오셔서
잠시 동안 계셨다.
7촌 아제는 군대에 가서 권총을 차고 술에 취하여 군인의 곤조(?)
부리는 것을 보았다.
밤, 낯을 가리지 않고 스리코트(군용 차량)엔 흑인 미군 병사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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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면서 껌을 질근질근 씹어가며 “갓 뎀! 사나가 비치” 하며
차량 뒤를 따르는 동내 꼬마들에게 껌을 던져주며 하얀 잇 빨을
내어놓고 싱긋이 웃고 지나가면 내 위의 형님(초등학생)은
“기브 미 찹찹” 하면서 뭔가 달라는 시늉을 하면 재수가 좋은 날은
통조림도, 껌도 던져주곤 하였다.
꼬마들에게 주는 것 없이 지나가면 차 뒤를 따라가며 주먹 쑥떡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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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을 하면 흑인 병사가 싱긋이 웃으며 자기끼리 뭔가 수군거리며
웃는 모습도 보았다. 형님도 깔 깔 거리고 웃고 있었다.
우리 형제가 어린 시절 철없이 보낸 세월은 6.25 사변의 기억들이라 싶다.
전쟁이 끝나서 철조망을 많이 친 곳은 미군들이 수거해 가고 그렇지 않은 곳엔 동네 사람들이 그 철조망을 거두어 오랫동안 필요한 울타리로 많이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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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life · 7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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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범일동 역의 처음 본 기차.
내가 초등학교 입학 전 아버지께서 부산에 터전을 잡으실 요량으로
부산 범일동역 맞은편 2층 목조 집을 매도하셨다.
6.25 종전 직전이라 외국에서 들어온 기차의 화차 머리가 모양이나
색깔이 다른 것을 2층 다락방에서 많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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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개의 황금색 벨이 바퀴에 달려 천천히 움직일 때는“땡 땡 땡”이쁜 소리가 났고 기차 굴둑은 옛날 스타일의 나팔관 같이 생겼고,
기차 바퀴끼리 연결된 막대 축이며 화차 디자인도 처음 보는아주 다른 모형들이 많았다.
어린 나의 눈에는 신기하고 새로운 기차를 많이 본 셈이다.
지금은 범일 역이 없어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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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life · 7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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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참새 구이.
모두 살기가 어려운 개구쟁이 시절의 참새구이는 잊지 못할 특미 로 기억된다.
가을부터 초봄까지 참새 덫으로 바지게 위쪽엔 돌 등의 무거운 것을 올리고 아래 막대를 받쳐 놓고 밀이나 쌀을 뿌려 막대에 새끼 줄에
묶어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참새가 올 때까지 망을 보다가
참새가 많이 몰려 먹이를 주워 먹는 순간 줄을 당기면 일망타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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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을 뽑고 내장은 발라내고 짚불에 통째로 구운 참새고기를 소금에
찍어 먹으면 정말 맛있는 별미다.
겨울저녁, 어둑해오면 참새들이 초가 지붕에 구멍집을 만들어
암, 수가 잠을 자는데 플래쉬로 가만히 비춰보면 참새의 눈이
반짝 반짝하고...
그 놈을 잡기 위해 사다리를 놓고 손을 밀어 넣어 잡고,…
오래된 초가집일 경우 때론 구렁이 도 마주칠 때도 가끔 있어 혼 줄이 나는 경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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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life · 7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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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동내 뒷강, 강물놀이.
내 어릴 적 여름이면 온종일 강물에서 지난 일들이 생각난다.
찡쨍한 햇빛은 얼굴이며 몸통 모두가 햇살에 거슬려 새까맣게 타고
오래도록 강물에 살다시피 하다 보니 눈은 빨갛게 충혈이 되고 입술은 파랗게 색깔이 변하여 꼴불견의 꼬마 촌 놈 이었다.
가끔 씩 물밑을 잠수하여 여러 종류의 조개도 줍고 수영 시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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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넓은 강을 수영으로 건너기도 하였지.
강물 속 에는 여러 종의 물고기도 많았는데 주둥이가 뽀족한 꽁치 란 놈은 가끔 씩 사람에게 주둥이로 콕콕 찔러 대는 바람에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였다.
뒷강은 청정 지역이라 거머리는 다행히 없었다.
날씨는 더워서 강물에 입욕하려 갔는데, 아래의 여동생이 또래 친구 한 명과 강에 들어 있었고 대낮에
“가시나들이 강에 들어있냐” 고함 치며(어린 시절이니..)
있는데, 동생이 깊은 강물 쪽 으로 휩쓸려 가면서 머리가 들숙 날숙 하고 있었다.
여동생의 나이는 나보다 3살 아래라 초등 입학 전이었다.
당황한 나머지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도 없이 강으로 뛰어들어 여동생을 강물에서 건져낼 수 있었다.
당시 나도 초등 3학년 이라 어린 나이로 구할 수 없었지만 여름이면 죽기 살기로 강물에서 살다시피 하였으니 내가 개구리 수영은 자신이 있어 구할 수 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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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life · 7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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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꿩 키우기.
내가 군대를 재대하여 금방 취업이 안 되어 해 보지도,들어 보지도 못한 내가 우연히 어느 일간 잡지의 정보를 알게 되어야생 꿩 사육을
해 볼 생각을 하였다.
처음부터 야생조류를 사육한다는 것이 쉽고 만만한 일이 아닌 건 사실이다.
꿩알의 확보부터 알 부하 등 모든 세세한 정보들을 구할 수가 있었다.
봄의 4월 18일 기준으로 농촌 보리밭에서 꿩알을 구할 수 있다고 해서 들판 보리밭 골골이 헤 메어 다니며 그렇게 몇 시간을 수집 중에 있는데 갑자기 푸드덕 하며 바로 곁에서 꿩이 날았고 그 자리엔 품고 있는 4개의 알을 줏고 몇 일간 어렵게 12개의 꿩 알을 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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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은 알의 부하는 부하기를 구해야 한다고 하지만 부하기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고 이 부하 작업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초보자가 초기 투자를 고민 중에 어머니께선 병아리를 품고 있는 닭을 이용해 보라고 하셨다.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하고 시행해 본 2주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쯤 꿩 세끼가 한 마리, 한 마리 알을 깨고 나오고 그중 3개는 실패를 하고 9마리를 부하에 성공하였다.
빠른 속도로 성장하였고 먹성도 좋았는데 이놈들이 커 갈수록
야생성 의 본능이 시작되었다.
닭장 울타리엔 촘촘한 거물 망을 둘러쳤지만 그물사이로 탈출하려고 부리로 쑤셔대는 바람에 모든 세끼들의 부리는 피가 가실 날이 없고 소독약 요오드 딩크를 발라도 소용이 없었다.
시작 3~4개월 후쯤 직장이 구해지고, 꿩 사육은 어머니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가끔씩 고향집으로 와 보면 야생에서 보는 색깔 좋은 꿩이 아닌
띠염 띠염 털이 빠진 놈들이었다.
결국 사육을 포기하여 한 마리, 한 마리 어머님의 별미의 특식용으로 끝이 났다.
1971년도 시절에 전문적 지식을 익혀 잘 관리하였다면 특수기술로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시기,
종달새 소리가 너무 좋아 시도를 해 보았지만 기초적 노하우가 없어 중도에 포기를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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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life · 7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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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여름 밤 모기.
여름 밤이면 언제나 모기 퇴치용으로 짚단 불 위에 소꼴로 베어온
풀을 올려놓으면 매쾌 한 연기로 모기를 쫓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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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부채로 한 여름을 보내는 어려운 시기였다.
잠잘 땐 시골집 방에는 공기가 잘 통하지 않고 너무나 더워서 잘 수도 없고 선풍기는 너무나 귀한 고급 식당이나 특수한 고급 영업소에 종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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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았지만 좀처럼 구경하기 힘들고 값 비산 귀한 물건이었다.
시골 집에서 시원한 곳은 마루에서 모기장을 치고 잠이 들 때까지
부채질을 하다가 잠이 들고 잠결에도 너무 더워서 나도 모르게
꿈결에 빈손으로 부채질을 한 기억이 난다.
그, 흔한 모기장도 없던 시절이라 삼베로 만든 모기장은 공기 소통도 잘 되지 않는 것이라 지금 생각으로 얼마나 더웠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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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life · 7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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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초등학교 입학.
내가 6살 나이 일 때 누님과 형님이 학교 등교하는 것이 제미가 있을 거라 생각하였는지 어머니에게 나도 학교에 가겠다고졸라 입학하고 3~4개월 후 다니다가 거리가 멀고 힘들어 결국 포기하고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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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해에 가산 초등학교에 다시 재 입학 하였다.
그러든 중, 4학년 겨울방학 때 앞집 일호 형님 집 마당에 누님, 형님과 배구를 하는 동안 마루에 앉아 구경을 하고 있는 중에 내 앞으로 공이 굴러와 잡으려 할 때 넘어지면서 왼쪽 허벅지 골절 상을 입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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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 성모병원에 1여 년 동안 입원하였다.
당시의 진영 성모병원은 의료 시설이 좋지 않아서 아버지께서
부산 아미동 부산대학병원의 정형욋과 전문의를 초빙하여 합동으로 수술 치료하였다.
병원에서 퇴원하여 진영 대창초등학교 4학년으로 전학을 온 당시 진영 전매서 아래 앞 사거리에 집을 사셨고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마쳤다.
그래서 4학년 통지표가 2개였다.
결국 초등학교는 8년의 긴 세월이 지나 졸업을 한 셈이다.
아마도 기네스북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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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life · 7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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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병원에 입원한 기억 들...
그렇게 수술하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도 절룸바리 장애자로 살았을 것이다.
내가 아프고 힘들어 울면 간호 해 주시던 어머니께서도 소리 없이 우시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았다.
내가 그렇게 많이도 부모님 속을 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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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life · 7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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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옷 물려 입기.
그 당시에는 나뿐만 아니라 형제들은 형님의 내복이며 학생복까지 많은 옷을 물려받아 입었다.
3살 위의 형님은 대학교에 들어가서 바이올린소리에 심취되어 아버지께 졸라 바이올린을 사 달라고 졸라 그 악기를 사 주셨고 광복동
바이올린 개인 교습도 받았다.
방학 때 집에서 연습하는 걸 보고 나도 덩달아 형님에게 배워달라고 해서 초보교재인 애츄드 교본을 배운 대로 가르쳐 주었으나 바이올린연주의 기초 자세가 너무나 힘들고 어려워 애츄드 교본 100번째의
교제도 넘기지 못하고 나는 포기하고 말았다.
더구나 바이올린은 기타처럼 포지션이 없는, 음감으로 연주하는 게 너무나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내가 바이올린을 포기한 1년 정도가 되기 전, 형님은 또“아코디언”
소리에 꽃혀 또 아버지에게 졸라 2열짜리, 120 베이스의 고가품 이태리 산 아코디언을 구입, 광복동의 개인 레슨을 또 받게 되었고
그것마저도 오래 연습하지 못하고 아코디언을 포기하고 나에게 물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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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엄청 좋아하여 중학 1학년부터 학교 부라스 벤드에 들어가서 중학졸업까지 연습도 많이 하였다.
그것이 훗날, 군악대, 군예대 생활하게 된 시초가 되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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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life · 7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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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유성기.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는 김해 한림면 가산리 신전, 양수시설이 있는곳에 방앗간(정미소)을 운영하셨다.
항상 아버지께선 애지중지 아끼시던 태엽을 감아 작동되는 유성기(축음기) 음악을 들어시는 것이 취미셨고 일본가요판도 몇 장 있었고
그 시절의 가요(이난영, 남인수, 고복수 의 레코드 등…)와 일본
가요판도 제법 많이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가요를 무척 즐겨 들어 셨고 약주를 거나히 드신 날이면 어린 우리들에게 노래를 시키시곤 하셨고 흥이 나시면 느긋이
고전의 한량 춤도 맞혀 추시는 멋쟁이 아버지셨다.
당시의 진공관 라디오(일산 내쇼날 제품)도 진영에서 출력이 큰
라디오를 사셨고 소리도 엄청 컸다.
유성기 바늘은 길이가 약 1.5Cm의 크기의 길이에 끝이 뾰족한 바늘이 놋쇠로 만든 둥글고 예쁜 모양의 바늘 통 안에 다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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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판은 바늘에 골이 파여 줄이 합쳐져서 반복적으로 재생되어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었고 태엽은 오래되어 끊어져 그 구실을 할 수가 없어 어린 나는 애써 판 위에서 손가락으로 돌려 소리를 내곤 하였다.
바늘이 무뎌지면 낮, 칼을 가는 수틀에서 갈아 쓰기도 하였다.
그렇게 쓰다 말고 결국 아버지의 허락도 없이 고물 엿장수에게 달콤하고 맛있는 엿으로 바꿔먹고 말았다.
지금껏 보관을 잘하였다면 값진 보물이 될 수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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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life · 7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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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마당의 닭똥.
내가 아주 어릴 때 모두가 살기 가난하고 귀천이 없든 그 시절,
어머님의 말씀으로는 동내의 어린 아기가 마당에 기어 다니며
닭똥을 주워 먹어도 관심 없이 “강아지처럼 키운다고 언짢아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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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고 어렵게 자란 그런 부모 밑에서도 성장한 아이들이 고생하며 자라 자수성가한 부자로 성공한 경우도 보았다.
그런 시련 속에 살아온 우리의 옛, 조상님 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지금 세상살이가 어려운 것을 노력하지 않고 죽느니, 사느니
하는 것은 옛 속담으로 “호강에 받혀 요강에 똥 싸는 격"
이라고… 세상 참 많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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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이런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또 기적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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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life · 7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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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아버지와 자전거.
내가 아버지의 자전거 앞, 방석 위에 앉혀서 다닌 기억들은 아직도 어제처럼 생생하다.
아버지께선 유달리 어린 나를 이쁘 해 주셨고 동내 주변이나, 부산에 출타 시에도 나를 자주 다리고 다니셨다.
어린 당시의 기억으로 나를 부산 광복동과 남포동거리를 구경시켜 주시고 충무동 어 시장이며, 앞바다에 엄청 크게 보였든 부두에 정박한 배(어선으로 짐작됨)며, 바닷물이 그렇게 푸른 색깔인 것도,
끝없는 수평선도 그때 처음 보았다.
어릴적 부산 범일동 집에서 치아갈이를 할 즈음“이를 빼면 시내에 구경 시켜주마” 하시면서 나를 꼬드겨도 아프고 무서워서 이를 뽑지 못했다. 내가 엄청 엄살이 심했나 보다.
고향 낙동강 옆 유등 부락에 아버지께서 출타를 하시면
아버지 친구 분들의 귀여움도 많이 받고 때론 나에게 맛있는 과자며 삼각형 포장 땅콩을 사 주시곤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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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맛에 자꾸만 아버지 외출 시에 따라 나섰을 거야.
진영대창초등 4학년부터 진영중학교 졸업까지 6년 동안 자전거로 왕복 8Km의 거리를 통학한 나는 항상 새 자전거처럼 반질 반질하게 닦고 타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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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자전거 바퀴가 진흙에 끼어 힘들었든 기억도 초등학생 땐 위로 타기가 어려워 옆으로 가량이 사이로 타고 다녔다.
6.25 해병대출신 4촌 형님은 자전거가 귀한 시절 아버지에게 진영에 다녀 올 거라며 “삼촌, 저전거 좀 빌려 주십시오”해서 승낙 하셨고
그 형님은 돈이 궁 하였던지 자전거를 팔아 챙겨버렸지만 조카의 못된 행위를 나무라시지도 않으시며 싱긋 웃으시기만 하셨고 직장도 하는 일도 없는 사촌 형님의 사정을 아버지는 이해 하셨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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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life · 7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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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닭 서리.
하루는 늦게 아랫방에 자고 있는데 방 옆의 닭장에서 닭이 꼬올 꼬올~소리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었다.
이상한 소리에 잠은 달아나고 부스럭부스럭 소리가 나서 닭서리를 온 좀 도둑 인걸 나는 알아차리고 큰 소리로 “맘 데로 안 될 것이다”
라고 하였더니 후다닥, 좀도둑이 달아나는 소리와 닭 계사를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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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우리 집 고루(명견)가 죽을 듯 멍멍 거리며 달아나는 도둑을 안 동내 방향으로 쫓아 버렸다.
그 시절엔 동내 청년들의 먹거리 서리가 종종 많았고 동내 사람들은 이해하며 쉽게 넘어가는 인심 좋은 시골 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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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의 기지로 도둑 쫓는 일을 잘하였다고 생각하였는데, 어머니께선 “맘 데로 안 될 것이다”
라며 가끔씩 웃기는 말투로 들먹이면 온 가족이 웃는 일이 종종 있었다.
군 제대 이후 이웃집 닭 서리며 짓 굿은 장난도 제미로 보낸 세월이 이젠 아련한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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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life · 7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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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네의 추억.
팔월 대보름의 그네 타기는 해마다 논 농사가 많았던 우리 짚으로 저녁이면 사랑방에서 동내 청년들이 모여 몇 날 밤을 세끼를 꼬며 재미있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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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의 새 마을 활동으로 동내 청년들의 4H활동도 겸해 하면서…
20여 미터의 외줄 세끼를 꼬아 집 옆 양수장의 크고 높은 프라타나스 나뭇가지에 메면 3~4일간의 공 든 그네 작업이 끝이 난다.
아마도 내가 5세부터 중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까지 해마다 전통적으로 해 온 청년들의 합작 품으로 만들어 동내 아이 어른 없이 명절 놀이로 즐겨왔던 옛 추억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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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life · 7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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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점심 도시락.
점심시간이면 당시 가정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은 점심 굶는 친구들도 꽤나 많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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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로는 다른 반 담임이신 박문수 선생님은 교장사택에 설치된 수동으로 젓는 우물 펌프에 끼니를 그러는 어린 학생들에게
물 배를 채워주신 고마우신 선생님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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