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flaneurmira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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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a Park Knows What We Dream About ( Hyperallergic )
John Yau
In her art, Park is in touch with our collective anxieties about a future that seems to darken with each passing day.
SEOUL, South Korea — After spending a few minutes with the work in the exhibition Mira Park: Interlude at Art Space Boan 2 (August 27–September 18, 2022), I felt like Alice in Wonderland. Having wandered into a non-commercial gallery space, which I later learned is part of Boan1942 — a guesthouse, art gallery, café, and bookstore rolled into one — I became engrossed by the different liminal spaces that Park evoked in black and white paintings as large as 6 by 8 feet, ink drawings approximately 12 by 12 inches, sculptures of animal and human anatomy, such as tentacles partially buried in sand, and black and white animations, including one projected on a wall. Later, when I looked at Park’s CV, I saw that she had titled a 2015 exhibition The Rabbit Hole (at Booknomad a. space), which both confirmed my initial impressions and made me curious about alternative spaces in Korea. 
In a conversation with the show’s curator, Jeonguk Choi, I learned that Art Space Boan 2 hosts exhibitions, but does not represent artists. This and a conversation with the young artist Eun Sol Kim, who is Minouk Lim’s studio assistant, suggested that there is a thriving alternative, non-commercial art scene in Korea that is very different than the pipeline of MFA to commercial gallery situation that exists in parts of the United States. Both Park and Kim, who are not represented by commercial galleries, show regularly in alternative spaces, which is almost unheard of in the United States.
Park’s paintings are essentially large drawings done in black acrylic on a white ground. Precise lines and dark areas made by a dry brush convey shading, volume, and different types of rough surfaces. Park depicts a stage-like setting populated by body parts (hearts, hands, legs), covered in sheets or masked, as well as oddly dressed individuals of different ages, creatures such as deer and swans, observers looking through telescopes or taking photographs, and numerous participants, many of whom are engaged in inexplicable activities: a barefoot young woman dragging a boulder; a uniformed figure sweeping up what appear to be paper stars. The architectural setting of each scene is different, as if to say that you cannot step into the same dream twice. 
I thought of the observers in the paintings as surrogate viewers and the individuals whose faces are unseen as the limits of our curiosity. How much do we want to see, in a visionary sense, and how much of the world’s commonplace reality can we actually look at without turning away? Fairy tale tropes and the disturbing sights of everyday commingle.
We have fallen down a rabbit hole into a world that we witness but cannot explain. The different activities occurring throughout a painting do not coalesce into an overarching narrative. Rather, Park uses her settings to seamlessly connect scenes, creatures, and characters inspired by fairy tales and writers such as Charles Perrault, the Brothers Grimm, Marie-Catherine d’Aulnoy (who coined the term “fairy tales”), and many others not known in the West, along with Surrealist artists (for instance, René Magritte), early Renaissance painters such as Pisanello and his masterpiece “The Vision of Saint Eustace” (1438-1442), movies and television — artworks and mediums that transport the viewer to another domain. The presence of modern devices in Park’s work helps situate her scenes in our contemporary world.
The sinister and miraculous occur simultaneously in Park’s fully realized, imagined worlds. In the drawing animation “Interlude” (2022), a 4-minute 20-second video is projected on one gallery wall above “Cut Off Senses,” a sculptural installation consisting of identifiable and unidentifiable ceramic body parts partially buried in a bed of sand. Are these body parts remnants of an unknown catastrophe? How does this work link with the video playing above it? At the beginning of “Interlude,” which has an immersive soundtrack by the composer/sound artist Hyemin Seo,  a curtain rises on a field of black lines, which is followed by a barren landscape littered with broken televisions, large blinking eyes embedded in the ground, and candles with swaying flames. The scene zeroes in on the television in the center of this landscape, its screen projecting moving black lines, signaling it is on the fritz. Soon its screen fills the entire view and transforms into a watery world in which the faces of two women float, eyes closed. Ducks and lily pads surround the faces. Eventually everything drifts out of the frame, leaving only the water, which slowly fills with different-sized rocks. Snakes enter from the edges, linger briefly, and then leave. These and the episodes that follow seem linked, but not necessarily logical nor decipherable.
The rising curtain and television we enter suggest thresholds we have crossed. Have we left reality or are we entering a heightened version of it? What is this other world that greets us? Park’s work raises questions the viewer is unable to answer. Is the watery world meant to be the unconscious, the place of dreaming? Or is it evidence of a deluge that has flooded the world? Do the two dreaming women signify a desire to break the patriarchal constraints governing the world’s various societies? Asking these and other questions pulls us deeper and deeper into the artist’s world without offering an answer or key. This is what I found so powerful and convincing about the work. Park is in touch with our collective anxieties about a future that seems to darken with each passing day.
박미라는 우리가 어떤 꿈을 꾸는지 알고 있다. (존 야우)
박미라 작가의 작업은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더 어두워져 가는 것만 같은 미래에 대한 집단적 불안을 건든다.
서울, 대한민국 __아트 스페이스 보안 2에서 열린 박미라 작가의 “막간극(Interlude)”(2022년 8월 27일-9월 18일) 전시를 보다 한순간 마치 내가 원더랜드에 들어온 앨리스가 된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전시가 열린 이 비상업 갤러리가 게스트하우스, 아트 갤러리, 카페, 책방으로 이루어진 복합문화공간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다. 전시 공간을 부유하듯 걷다 보면 박미라 작가가 그린 183 x 244cm의 흑백 페인팅, 30x30cm의 잉크 드로잉, 모래에 일부가 묻힌 촉수와 같이 동물과 인간 해부를 보여주는 조각들, 한쪽 벽에 프로젝터로 상영되는 흑백 애니메이션 등의 작업을 마주하게 된다. 그때마다 각각의 작업이 구축하는 중간지대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박미라 작가 이력에서 2015년 북노마드 아트 스페이스에서 열린 “래빗홀"이라는 전시의 제목을 보고 내가 이 전시에서 느꼈던 첫인상이 정확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한국의 대안공간들에 대해서 궁금증이 생겼다. 
이 전시의 큐레이터 최정욱과 대화를 통해 아트 스페이스 보안 2라는 공간은 전시를 개최하지만, 전속 시스템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신진 작가이자 임민욱 작가의 스튜디오 어시스턴트인 김은솔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한국에서 대안적인 비상업 아트씬이 번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 MFA 석사 과정에서 상업 갤러리로 이어지는 미국의 아트씬의 공식과 같은 파이프라인과는 매우 다른 형식이다. 박미라 작가와 김은솔 작가는 현재 상업 갤러리 소속이 아니며, 대안 공간에서 꾸준하게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이런 케이스는 미국에서는 매우 드물다.
박미라의 페인팅은 본질적으로는 흰 배경에 검정 아크릴로 그려진 커다란 드로잉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른 붓으로 그린 섬세한 선과 어두운 부분들은 명암, 양감, 다양한 거친 표면의 질감을 표현한다. 박미라 작가는 신체의 부분들(심장, 손, 다리)이 종이나 마스크 등으로 가려진 채 놓인 무대 연출과 같은 상황들,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 혹은 사슴과 백조 같은 생물들이 비전형적인 의상을 입은 모습, 구경꾼들이 망원경으로 무언가를 보거나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설명할 수 없는 활동을 하는 다양한 참여자들 등을 그린다. 설명할 수 없는 활동이라 하면, 맨발의 젊은 여자가 돌덩어리를 끌고 있다던가, 유니폼을 입은 사람이 종이 별과 같은 것을 쓸고 있다든가 하는 일을 말한다. 각 장면의 건축적인 설정은 모두 다르다. 마치 똑같은 꿈을 두 번 꿀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듯하다.
나는 그림들 속 관객들이 대리 시청자이고, 얼굴을 볼 수 없는 인물들은 우리의 상상력의 한계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시각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얼마만큼을 보고자 하는가? 그리고 실제 현실에서 우리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직면할 수 있는 것은 과연 얼마만큼인가? 동화 속 자주 등장하는 기호들과 일상 속 불편한 장면들이 뒤섞인다. 우리는 우리가 목도하고 있지만 형언할 수는 없는 세상으로 통하는 토끼굴에 굴러떨어진 것이다. 
한 페인팅 안에서 일어나는 각각 다른 사건들은 하나의 통일된 내러티브로 수렴하지 않는다. 박미라 작가는 동화, 샤를 페로, 그림 형제, 들누아 백작부인(‘fairy tale’이라는 단어를 만든 사람)과 같은 작가들 외에도 서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를테면 르네 마그리트), 걸작 “성 유스티스의 비전(1438-1442)”을 그린 피사넬로과 같은 예술가들과 영화와 텔레비전에서 영감을 받는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관객을 다른 차원으로 이끄는 예술작업과 매체라는 점이다. 이런 영감들을 기반으로 박미라 작가는 장면, 생명체, 캐릭터를 만들어 그녀가 설계한 무대에 매끈하게 엮어 낸다. 박미라 작가의 작업 속 등장하는 현대적 디바이스는 작가가 만드는 장면들에 동시대성을 부여한다. 
박미라 작가가 오롯이 구현한 상상 속의 세계에서는 악하면서도 기적적인 것이 동시에 일어난다. 4분 20초 길이의 드로잉 애니메이션 작업인 “막간극(2022)”은 “잘려진 감각들”이라는 조각 설치 위로 상영된다. 이 조각 설치에는 세라믹 신체 토막들이 모래에 묻혀 있는데, 그 부위를 특정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혼재되어 있다. 이 신체의 파편들은 어떤 재앙의 잔재일까? 이 조각 설치는 그 위에 드리워진 비디오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막간극"의 도입부에 작곡가이자 사운드 아티스트인 서혜민이 만든 사운드트랙이 관객을 빨아들인다. 검은 선의 들판 위로 커튼이 올라간다. 이윽고 부서진 텔레비전이 이곳저곳 흩어진 황량한 풍경, 바닥에 박힌 커다란 눈이 깜빡이는 모습, 불꽃이 일렁이는 초로 이어진다. 장면은 중앙에 놓인 텔레비전 스크린에는 기계가 고장 났음을 보여주는 검은 움직이는 선들이 틀어져 있다. 전체 씬은 그 텔레비전 스크린 속으로 점점 들어간다. 전체 화면을 가득 채우고 나면 스크린은 물이 가득한 세상으로 변하고 두 여자가 눈을 감은 채 둥둥 떠다닌다. 얼굴 주위를 오리와 연잎이 감싼다. 모든 것들이 프레임 밖으로 떠내려가고 나면 물만이 남고, 그 물을 다양한 크기의 돌들이 채운다. 가장자리에서 뱀들이 기어 나와 잠깐 머무르고, 떠나간다. 이 씬들과 그 이후 씬들은 유기성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 유기성은 논리적이거나 해독할 수 있는 류의 것은 아니다. 
걷혀 올라가는 커튼과 우리가 들어가는 텔레비전은 우리가 통과하는 경계선을 암시한다. 과연 우리가 현실을 벗어난 걸까 아니면 더 증강된 버전의 현실로 들어선 걸까? 우리를 맞이하는 다른 세계는 무엇인가? 박미라 작가의 작품은 관객에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영상 속 물의 세계는 우리가 꿈을 꾸는 무의식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휩쓴 대홍수의 증거인가? 꿈을 꾸는 두 여인들은 세상의 곳곳을 지배하고 있는 가부장적인 구속을 깨고자 하는 욕망을 상징하는가? 이런저런 질문들은 던지고 있자면 우리는 작가의 세계로 점점 더 깊이 빨려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 세계는 그 어떤 정답도 해답도 주지 않는다. 바로 그 지점이 이 작업의 힘이자 설득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박미라 작가는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더 어두워져 가는 것만 같은 미래에 대한 집단적 불안을 건든다. 
https://hyperallergic.com/758557/mira-park-knows-what-we-dream-ab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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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neurmira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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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을 위한 동화 : 박미라 개인전 <막간극>을 보고
최정윤(독립큐레이터)
지하철에서 내려서 계단을 올라오다가 문득 바쁜 걸음을 멈추고 사람들을 구경한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통화를 하며 목적지를 향해 모두가 발 빠르게 움직인다. 무엇보다 누구 하나 튀는 색 없이 회색, 남색, 검정, 베이지 무채색의 옷을 입고 있고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마스크를 끼고 있어 조용한 것은 덤이다.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평범할 것을 강요받으며 산다. 범주화되어 순응하며 튀지 않고 사는 것 말이다. 생존을 위해 바쁘게 살다보면 우울이나 권태에 빠질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게 오는 것은 어쩌면 번아웃(burnout), 지치는 일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현실이라는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기에 먹을 것, 입을 것을 고민하며 돈을 번다. 지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동화 같은 상상력, 억압에서 자유로운 순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자면서 꿈을 꾼다. 꿈의 내용을 기억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우리는 살면서 스스로를 억압하고 억누르며 산다.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자아는 의식에 담아두기 힘든 부정적인 기억을 모두 무의식에 담는다.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는 익숙한 것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불안함과 공포를 느낀다. 이러한 공포감은 불쾌의 감정을 만들어내며, 무의식에 억압된 것이 복귀하면서 언캐니(uncanny, 두려운 낯설음)를 유발한다. 이것은 친숙하면서도 낯선 기이한 경험으로, 심리적인 공포, 불안, 고통을 야기한다. 억압의 본질은 어떤 것이 의식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해 의식과 거리를 두게 하는 것이다. 초현실주의(surrealism)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영향을 받아 20세기 초반 무의식의 표현을 지향했던 하나의 사조다.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이성에 의한 통제에서 벗어나, 심미적, 도덕적 관심에서 자유로운 상태에서 순수한 정신을 자동 기술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박미라의 작품도 무의식의 세계, 독특한 상상력이 발휘된 장면을 담았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박미라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밧줄로 묶인 신체 혹은 절단된 신체, 가위, 신체의 변형, 구멍 등을 자주 볼 수 있다. 먼저 변형, 절단된 신체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정적 쾌를 느끼도록 한다. 흑백으로 단단하게 그려진 형태에서 우리는 일종의 공포, 잔인함과 함께 파괴에 대한 본능을 떠올릴 수 있다. 박미라는 현실에서 가져온 모티프들을 조합하고 변형하여 연극 무대와 같이 비현실적 공간을 화폭에 담는다. 시인 로트레아몽의 장편산문시 <말도로르의 노래>(1869)의 “재봉틀과 박쥐, 우산이 해부대 위에서 뜻하지 않게 만나듯이 아름다운”이라는 문구처럼, 순수한 정신의 세계를 받아쓰기 위해 초현실주의자들은 자동기술법을 사용했고, 우연히 어우러진 대상들의 이질성을 담는 것을 통해 현실을 뛰어넘는 또 다른 세계를 엿볼 수 있다고 믿었다. 박미라의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쉽지 않는 여러 장면들이 한 화면에 오밀조밀 담겨 있다. <한 여름 밤의 꿈>(2022)을 살펴보자. 오리의 얼굴을 한 사람의 그림자를 따라 한 여성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은 회화의 기원을 떠올리게 한다. 절단된 손과 발을 공중에 부유하듯 떠있고, 종이배를 타고 있는 아이, 거꾸로 매달린 까마귀, 천으로 덮인 유령 등 각기 다른 이야기를 상상하게 하는 이미지들이 커다란 캔버스를 메우고 있다. 그가 그린 대상들은 한 화면 내에서 재봉틀, 박쥐, 우산과 같이 우연히 만나, 따로 또 같이 존재한다.
박미라의 캔버스 작업의 특성 중 하나는, 색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직 검정과 흰색으로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색이 모두 제거된 그의 화면은 그의 작품을 더욱 비현실적으로 보이도록 한다. 그 대신 화면의 질감을 통해 또 다른 감각적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시멘트의 미디엄을 발라 벽화의 질감을 낸 것인데, 표면의 거친 특성은 세밀한 표현방식과 대조되어 날 것의 감정을 부각시킨다. 흰 바탕에 검은 색으로 그려진 것이 대부분이지만, 검은 바탕에 흰 색으로 그려진 <마음 방향 전환>과 같은 작품도 있다. 이러한 시도는 기괴하고 우울한 상상력을 더욱 강조하며, 동화와 현실 사이의 몽환적 세계를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박미라의 매체 실험은 배경색의 변화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드로잉을 기반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기도 하고, 애니메이션 앞에 세라믹으로 빚어 만든 오브제를 함께 전시했다. 앞서 말한 낯설은 두려움의 쉬운 예를 든다면, 죽어 있다고 생각했던 인형이 살아있는 듯 할 때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이 같은 감각은 이미지만으로도 충분히 전달되지만, <잘려진 감각>이라는 오브제를 통해 더욱 증폭된다. 절단된 신체나, 그림 안에서 자주 반복되는 대상들은 입체로 구현되어 모래 위에 놓였다. 캔버스 안에 이미지로 멈추어 있던 모티프들은 애니메이션을 통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움직임을 더했으며, 세라믹이라는 재료로 재구현 되어 실제 형상을 갖추고 관객에게 제시되었다. 
공포 영화, 좀비물을 보거나, 놀이동산에 들러 유령의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일상에서 흔하게 느낄 수 없는 감각이 되살아나는 강렬한 경험을 하게 된다. 현실에서는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억눌려왔던 욕망은 이 같은 경험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표출되고, 또 누군가는 대리만족을 느끼게 되는지도 모른다. 암울하고 우울한 현실의 제약에서 벗어나, 조금은 대담하고, 조금은 금기시되는 것을 상상하며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것 말이다. 박미라의 작품은 그런 면에서 아이가 아닌 어른을 위한 동화이며, 현실 너머의 어떤 세계를 상상하게 하는 시작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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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neurmira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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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소망, 핑퐁 , 드로잉애니메이션, 연속재생, 2022
눈치, 눈방울, 텔레파시, 드로잉애니메이션, 연속재생, 2022 
산책, 믿음, 희망, 드로잉애니메이션, 연속재생,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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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neurmira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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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간극, 드로잉 애니메이션, 4분 20초, 2022 잘려진 감각, 세라믹, 모래,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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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neurmira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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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커튼콜, 종이에 펜, 17x30xm, 2022 2. 들어갈 수 없는 입구, 종이에 펜, 17x30xm, 2022 3. 검은 물 밑에서, 종이에 펜, 17x30xm, 2022 4. 틈과 틈, 종이에 펜, 17x30xm, 2022 5. 켜진 방, 종이에 펜, 17x30xm, 2022 6. 벌린 입, 종이에 펜, 17x30xm,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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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neurmira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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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음 방향 전환, 캔버스에 아크릴, 73x53cm, 2022
2. 한 여름밤의 꿈, 캔버스에 아크릴, 193.9X260.6cm, 2022 
3. 숨쉬는 무덤, 종이에 펜, 30x30cm,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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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neurmira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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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름없는 목차들, 캔버스에 아크릴, 80x117cm, 2022
2. 도망가는 빛, 캔버스에 아크릴, 80x117cm, 2022
3. 눈을 감고 걷는 길, 캔버스에 아크릴, 80x117cm,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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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neurmira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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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간극 Interlude <2022.08.27-09.18 아트스페이스 보안2 > 
막간극 _연극적 요소의 결합 
나의 작업은 실재의 공간과 가상의 공간을 뒤섞어 혼재된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연출한다. 그 어긋나 보이는 상황은 마치 연극 무대와 같은 공간처럼 보인다. 일상과 가상의 경계에서 의도적으로 연출된 상황으로 희극이나 비극이 아닌 복합적이고 생경한 감정을 만든다. 이러한 기묘한 조형적 이미지들은 이미지 위주의 연극처럼 연출되고 회화작업뿐만 아니라 드로잉애니메이션에도 드러난다. 등장인물의 배치와 공간의 연출은 연극적 경험을 제시하고 이는 작업에서 중요한 특징으로 작용한다. 나는 작업에 등장하는 연극적 구조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적용해 보고자 한다. 
작업에 주로 등장하는 구멍과 검은 구덩이, 문, 뚫린 창문 등은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과 호기심, 설렘, 공포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림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아이콘들을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 새로운 이야기로의 전환이라는 의미에서 기존 작업과 연결된 맥락을 이어 나가며 회화와 설치, 드로잉 애니메이션과 입체 조각물의 공간 연출로 작업의 프레임 안에 있던 가상의 세계를 실재의 세계로 초대한다. 
이 전시의 제목은 막간극이다. 막간극은 막 앞의 무대에서 연기하는 장면을 말하는 막간(幕間)에서 유래한 연극용어이다. 막간의 의미를 기존 작업과 신작 사이의 새로운 시도로서의 막간이 될 수도 있고 회화 작업과 애니메이션 작업의 사이를 잇는 막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가장 중요한 작업의 개념적 의미를 형식적으로 이어보려는 의도가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다. 막간이라는 단어가 가진 ‘어떤 일의 한 단락이 끝나고 다음 단락이 시작되는 동안’이라는 의미처럼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다음 단락을 시작하며 의식과 무의식을 잇는 막간의 이야기를 한다. 
막을 뚫고 나온 이미지 _다른 차원으로의 이동 
막(벽)이라는 개념은 작업에 지속해서 등장하는 제4의 벽(FourthWall)과 이어진다. ’FourthWall’는 연극에서 무대와 객석 사이에 존재하는 ‘가상의 벽’을 뜻한다. 이 벽을 사이에 둔 관객과 배우는 서로 간섭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진다. 무대와 관객이 마주하는 4번째 벽은 관객을 위해 제거되긴 했으나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의 벽으로 막혀 있다고 가정한다. 이 가상의 벽은 현실 세계에서도 각각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나는 최근 작업에서 컴퓨터의 모니터와 핸드폰 액정을 ‘제4의 벽’이라 상정하고 드로잉 애니메이션의 신작을 온라인으로 발표했다. 
이번 전시에서도 캔버스나 영상이 플레이되는 모니터 즉, 작품의 표면을 ‘제4의 벽’이라 상정하여 그림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아이콘들을 화면 밖으로 이동시켜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 새로운 이야기로의 전환이라는 의미에서 기존 작업과 연결된 맥락을 이어 나간다. 토끼굴을 통해 다른 세계로 진입했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가상과 실재의 막을 무너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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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neurmira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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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로 가는 비현실적인 길
이선영(미술평론가)
비/현실의 세계로 들어가며 두남재 아트센터의 개관 두번째 전시인 [비현실적 하이퍼 리얼리즘 : Over and Above]에는 현실이라는 개념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초대작가 박미라, 이재석, 전희수의 전시 작품들은 현실적이지 않다. 그들의 작품에서 현실은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이지는 않다는 것, 현실로 가기 위해서는 또 다른 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참여 작가들에게 예술��� 현실로 가는 유력한 길이다. 그들에게 현실은 출발이 아니라, 도달점, 즉 기지의 것이 아닌 미지의 것이다. 현실을 중시했던 사조들이 삶이 무게를 강조했다면, 삶의 중력을 거슬러 풍선처럼 붕 떠 있는 그들의 작품을 매어 놓는 유력한 현실은 그림이다. 작업량이 많은 그들에게 현실은 무엇보다도 붓을 들고 하는 일, 요컨대 그들이 가장 많이 시간을 보냈을 작업에서 찾아진다. 작업하면서 살아있다는 느낌을 가지는 사람이 바로 작가다. 작가 또한 스펙터클 사회의 소비자지만, 동시에 그들은 이미지 생산자다. 생산자의 입장에 서면 아무리 가벼워 보이는 작품도 가벼울 수가 없다. 소비와 생산은 일 대 일 관계가 아니어서, 소비자가 생산자가 되려면 어떤 도약이 필요하다. 그것은 사기는 쉬워도 팔기는 어려운 일상적 체험에서 쉽게 확인된다. 순식간에 이미지가 합성, 복제되는 시대에 그리기란 심신의 에너지가 무한 투자되는 과정이다. 그만큼 물질과 몸이 투자되었기에 결과물의 무게는 남다르다. 잘 된 작품은 어떤 있음직하지 않은 상황에도 개연성을 부여한다. 얼굴이 여럿이거나 손발이 국수 가락처럼 쭉쭉 늘어나는 인간(전희수)도, 해골들의 춤(이재석)도, 발밑 아래의 또 다른 우주(박미라) 조차도 있음직한 현실로 다가온다. 그림은 현실에서 가상의 몫이 증가할수록 포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을 포함한 여러 차원의 현실에 대해 설득력 있는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그들의 작업에서 회화는 밀도와 강도의 산물이다. 그것은 몰입의 조건이다. 일단 몰입이 되어야 소통도 유희도 가능하다. 정보화 사회에서 가장 많이 보게 되는 이미지들에 보이는 간극은 감쪽같이 붙여지곤 한다. 반면 작가들은 현실 그자체의 균열에 주목한다. 현실 자체가 이것저것으로 조합된 인공물이라면, 작가는 이러한 현실의 취약한 부분을 공략한다. 이들의 작품에서 혼성은 한술 더 뜨기 전략으로 행해진다. 이데올로기로 그럴듯하게 포장된 이념의 기표들은 바람에 날리는 취약한 천막(이)이며, 세계는 만화의 칸처럼 구획되어 있고(전), 우리의 단단한 토대는 갑자기 푹 꺼진다(박) 그들의 세계는 백주 대낮처럼 환해서 분열적(이, 전)이거나, 어둠 속에 숨겨진 자기만의 우주에 푹 젖어(박)있다. 작품 속 서사를 이끌어 간다고 믿어지는 주체(대체로 인간으로 설정)가 산산조각 나 있다는 공통점도 있다. 그러나 분열은 분열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연결을 위한 단면이라는 점에서 부정적이지 않다. 이들의 작품에서 유기체와 기계는 종횡무진으로 연결, 접속된다. 균열과 간극을 드러내기 위해서 먼저 현실이 호출되어야 한다. 그들이 호출한 현실은 그 묵직한 근거를 잃고 유희의 한 항목으로 (재)배치되면서 상대화된다. 작품 속 현실은 재차 인정(재인,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변형(생성)되기 위한 전제다. 가상이나 환상 또한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설득력 있다. 그들의 작품이 그만큼 환상적이라면 역설적으로 그만큼 현실적이라는 말이다. 이들에게 환상은 현실의 이면이며, 그 역도 가능하다. 환상과 현실은 극과 극으로 대조되는 것이 아니라,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면서 수시로 그 경계를 넘나든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은 역동적이면서도 불안정하다. 작품들은 심층보다는 표면이 강조된다. 종이처럼 접혀지거나 펼쳐진 우주(박), 부조리한 매뉴얼로 변한 세상(이), 금방 다른 화면으로 바뀔 것 같은 이미지(전)가 그것이다. 굳이 미술사조와 비교한다면 초현실주의적이다. 이 전시의 기획자인 김기라는 ‘이번 전시에서 작가들은 현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방식의 초현실적 회화와 영상 설치를 통해, 각자와 삶과 현실을 주관적 시각에서 조명하고 해석하여 묘사한다.’고 밝힌다. 작업의 주체(동일자)가 타자의 힘에 주목하는 것은 예술의 기조였지만, 20세기의 사조로서 초현실주의는 영화나 사진, 도시적 현실 같은 이전 시대에는 없었던 매체 및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타자를 호출하고 대화했기에 더욱 중요하다. 초현실주의는 한번 유행하고 지나간 사조가 아니다. 이번 전시는 회화라는 고색창연한 매체가 주가 되긴 하지만, 21세기 정보화 시대에 걸맞는 초현실주의로 업그레이드 된 작품들이라는 특징이 있다. 시인이자 초현실주의를 이끈 이론가 앙드레 브르통은 꿈과 무의식의 존재를 부각시킨 프로이트로부터 영감 받아서, ‘꿈과 현실이라는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상반되는 두 가지 상태가 향후에는 초현실이라는 절대적 현실 안에서 화합되리라’고 믿는다. 앙드레 브르통에게 현실이란 ‘생명과 죽음, 현실과 환상, 과거와 미래, 전달 가능과 전달 불가능, 높이와 깊이가 모순으로 보이기를 그치는 마음의 어떤 지점’을 말한다. 초현실주의자의 비전에 의하면, 우리가 전부로 알고 있는 일상적 현실은 다른 차원이 보태져서 무한대로 확장되는 것이다. 21세기에 현실은 미디어 기기의 발달로 더욱 복잡해졌다. 기기의 발달은 고성능뿐 아니라 그것이 편재한다는 것에 있다. 분열하는 육체 이미지 가운데 특히 눈(目)이 많은 것(전, 박)은 보고 보이는 관계의 망으로 얽힌 현실에 가상의 몫이 커진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질서이자 생산, 그리고 억압의 그물망으로 이루어진 상징적 우주에 대한 풍자(이)도 빠지지 않는다. 초현실주의 선언문에는 ‘인간들에게 그들의 사고의 나약성과 또 그들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허황된 대지 위에 그들의 흔들거리는 집을 구축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는 항목이 있다. 초현실주의자에게 ‘우리의 관념은 물 위에 떠 있는 낙엽 같은 것’(앙리 베르그송)이다. 초현실주의는 현실과 현실이 아닌 것과의 관계를 작품의 전면에 놓았던 사조인데다가 당시에 이미 사진과 영상이 가세해 있던 시대인지라 어느 사조보다도 동시대적으로 느껴진다. 초현실주의는 시공간적 거리감 또한 잘 활용하기에 더욱 그렇다. 거리두기는 예술의 규칙이며, 때로 정치와 결합 된다. 초현실주의는 모더니티의 이성 중심주의에 대항하는 해방과 혁명을 외쳤다. 하지만 억압적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던 예술가들이 현실의 정치세력과의 연대했을 때는 종종 배반으로 귀결되곤 했다. 현대의 작가에게는 정치와 예술 간의 불화에 대한 경험치가 있다. 이번 전시의 참여 작가들의 세대는 인터넷이 여러 기기를 통해 편재화된 시대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기에, ‘현실’의 양상은 사뭇 다르다. 무기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 이재석의 작품은 전쟁과 경쟁으로 점철된 죽음의 문화를 다룬다. 그림을 배우기 전에 만화나 오락을 접한 전희수 세대에게 모태 언어는 하위문화나 대중문화에 있다. 박미라는 현실로부터 수집한 단편들로 자기만의 잔혹한 동화를 쓴다. 작품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대안의 현실은 대량소비 문화로 이루어진 우리의 일상이 유일한 현실이 아님을 알려준다.  
박미라 ; 경계를 넘나드는 산책
박미라는 산책을 즐겨한다. 도시를 어슬렁거리며 눈에 담아온 것들을 무의식에 침전시켰다가 그림이라는 꿈으로 재생한다. 작품 [살아나는 밤]은 그러한 수집품들이 가득한 방이다. 그러한 방 또한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을 만큼 어수선하다. 여기에서 시계는 거꾸로 걸려 있고 서랍장에서는 누군가의 발이 나오고 있다. 롤러 코스터같은 구조물은 낮의 경험을 압축 재현한다. 익히 알고 있는 길도 꿈에서는 낯설게 나타난다. 작가와 관객은 미로가 되어버린 길에서 즐겁게 길을 잃는다. 낮의 노동은 밤의 유희가 된다. 그러한 우주에서는 역경을 이겨내는 전능한 존재(deus ex machina)가 있다. 가령 작품 [아홉번째 목숨]에서 침몰로부터 구해주는 거대한 손이 그것이다. 꿈은 분명 현실에서 온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조합이 환상적이다. 하지만 그러한 조합은 해석되기 힘들다. 통상적인 소통에 만족하지 못하여 예술을 하지만, 그로 인해 소통은 더 멀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작업은 도박이다. 박미라의 작품 앞에 선 관객은 의미, 해석, 소통이라는 방식을 벗어난 채 작가가 무한정 늘려 놓은 이미지의 폭주를 받아들여야 한다. 도시의 산책자에게 만남은 우연적인 것이 많다. 초현실주의 미학의 기조인 오브제나 병치같은 형식은 근대도시에서의 체험이 반영되어 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당시 세계의 수도 파리 이외의 장소에서 초현실주의의 탄생을 기대하기 힘들다. 도시는 한 장소에 모일 수 없는 것들을 모이게 한다. 게다가 사진이나 영화같은 신생 매체까지 더해져서 지금도 지속되는 최초의 프리미엄을 한껏 누리는 사조가 초현실주의다. 새로움을 만나려는 산책자의 여정에게 도시는 자유의 공기를 제공한다. 박미라의 작품에 눈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대개는 관찰로 그치는 산책자의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현실에서는 유령처럼 투명하고 작품에서 모든 것을 풀어내는 스타일이다. 종이나 캔버스에 펜이나 잉크,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는 모노톤의 작품들은 현실을 이루는 주요한 한 차원을 삭감했다. 그것은 색이다. 작가는 2020년에 있었던 [검은 산책 Walk In The Dark] 전에서, ‘색을 뺀다는 것은 비워 놓는 것임과 동시에 공간을 채우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박미라의 흑백 톤은 원색 못지않게 풍부하다. 원래 블랙은 모든 색의 혼합 아닌가. 작가는 형태들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중시한다. 꿈처럼 나열되거나 조합된 사물들은 기승전결이 명확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화면은 관객이 상상할 여지를 주는 은유적 대상들로 가득하다. 현실원리가 아닌 쾌락원리가 지배하는 우주다. 현실을 기준으로 한다면 싱크홀같은 갑작스러운 단절이 있다. 작품 [안이자 밖]에서 사슴과 고양이가 있는 바닥은 뻥 뚫려 다른 우주가 보인다. 작품 [검은 산책]에서도 산책 중 갑자기 뚫린 길바닥은 견고한 현실이 어디에 토대를 두는가에 대한 의문을 자아낸다. 작가는 ‘도시에서 벌어지는 지반 침식 현상인 싱크홀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래빗홀(토끼굴)을 연결해 가상의 이야기를 만든다’ 하지만 [연결된 시작]처럼 난데없는 구멍은 화이트홀이나 블랙홀처럼 다른 우주로 통하는 길이라는 암시가 있다. 세계를 세계들로 상대화시키면 구멍 주변의 나무는 가지들이 아니라, 뿌리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예술은 단순한 현실의 모사가 아닌 대안적 현실(Alternate reality)로서의 평행우주(Parallel World)로서, 한갓된 상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시간 또한 불연속적인데, 작품 [꿰어진 시간]처럼 공간은 하나의 평면들로 인과관계 없이 나열되고 상상의 실로 꿰어진다. 병렬은 수평적일 뿐 아니라 수직적이기도 해서 [쌓여가는 위로들]에서는 여러 손들이 잘려진 채 쌓여 있다. 박미라에게도 단편은 연결을 위한 전제다. 이러한 분열적 이미지들은 ‘기관 없는 몸’이나 ‘다양체(manifold)’ 같이 정신분석을 넘어서는 현대철학의 흐름과 닿아있다. 연결은 종횡무진 계속되어야 하므로, 화면 자체는 연속성을 요구한다. 2020년의 전시 장면을 보면 모서리도 연결되는 벽화 스케일의 화면에 어디로 튈지 모를 은유적 단편들을 자유롭게 배치한다. 제목은 [어긋난 조화]인데, 조화가 대개 전체와 부분 간에 설정된 이상이라고 한다면, 부분들이 전체와 무관하게 자율적인 작품은 조화와 거리가 있는 것이다. 조화란 사회의 지배적인 질서를 재현하는 상징적 우주의 이상일 따름이다. 박미라의 작품들은 자기만의 대안적 우주로 지배 질서에 대항한다. 물론 투쟁한다기 보다는 자기만의 우주도 충분히 리얼리티가 있다고 말한다. 자유로워 보이는 현대 사회는 이 조그만 여지를 무화시키려 하기에 자기 세계를 구축하려는 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저항자가 된다. 작품 [펼쳐지고 접힌 마음]처럼 이 우주는 종잇장같이 취약하지만, 현실보다 훨씬 융통성 있는 접히고 펼쳐지는 세계다. 이 풍부한 주름의 우주는 [겹치고 뚫린] 상태다. 하지만 자기만의 질서는 광기의 특징이다. 작품 [표류기]의 탑승자들은 광인의 배를 떠올리는 총체적 난국이 있다. 미셀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제롬 보슈의 [광인들의 배]의 예를 들면서, 배에 탄 미치광이 승객들의 묘사가 있는 문학적 형식(시. 속담)들과의 연관을 지적한다. 하지만 광인들은 더 이상 세상 저편으로 떠나보내지 않고 사회가 끌어안게 되었는데, 그것이 병원, 공장, 학교, 군대 등 근현대의 각종 억압적 제도의 원형이 되는 수용소다. 푸코는 정상인을 광인과 구별하기 위해 광인을 죽음과 연결시킨 역사를 말한다; ‘머리는 이미 비어있고 곧장 두개골이 될 것이다. 광기는 이미 와 있는 죽음이다. 미치광이는 음산한 죽음의 전조를 내보임으로서 죽음의 기세를 누그러뜨린다.’ 죽음의 주제가 광기의 주제로 대체되었다는 것인데, ‘문제는 변함없이 삶의 허무지만, 이 허무는 이제 위협과 동시에 귀결이라고 말할 수 있는 외적이고 최종적인 종말로 인정되지 않고 내부로부터 실존의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형태로 체험된다’(푸코)는 것이다. 박미라의 작품에서 사형집행의 대상이 되는 고깔을 쓴 등장인물들은 살아있는 채 엄습한 죽음과 밀접하다. 작품은 이질적인 것의 병치가 주는 복잡함에 더해 사건적인 요소가 첨가된다. 화산처럼 폭발하고 홍수가 나고 매몰 처분되며 치고받고 싸우는 등 아우성친다. 거기에는 [시끄러운 유령들]이 가득하다. [나무가 되는 꿈]처럼 이 우주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과정 중의 존재들이 주인공이다. 그것들은 나무나 구름처럼 자란다. 종으로 횡으로 증식한다. ‘되기’를 통해 협소한 현실원칙을 벗어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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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neurmira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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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상상 속 세계를 엿보는 ‘만화-경’
1817년 스코틀랜드의 물리학자 데이비드 브루스터가 고안한 만화경(Kaleidoscope)이라는 장난감이 있다. 색종이와 거울을 넣은 망원경처럼 생긴 경통에 눈을 대고 빙글빙글 돌리면, 거울에 반사되어 다채로운 색채무늬를 볼 수 있는 장난감이다. 어렸을 때 한번쯤은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만화경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신기함과 놀라움이 여전히 머리 속 한 켠에 각인되어 있다 이제 나이가 들어 팍팍한 현실과 지루한 일상을 겪는 요즈음, 과거 만화경 속을 보았던 색색의, 환상의 세계를 꿈꾼다. 이제는 잊혀졌지만, 이러한 만화경의 세계는 새로운 환상과 모험의 세계이자 도피와 위안의 세계를 보여주는 통로다. 경통을 움직이는 데 따라 거울에 비추는 수많은 도상은 이 세상의 변화무쌍함과 그 속에서 흥미를 찾는 우리의 바람에 다름아니다. 이러한 변화무쌍한 상상의 세계를 선보이는 두 명의 작가가 만났다. 박미라와 임현정은 자신만의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세계를 회화를 비롯한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낸다. 일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그들의 작업은 관객으로 하여금 상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통로다. 
경기창작센터 입주작가, 책 출간 등 국내 미술신(art scene)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박미라는 이번 전시에서 회화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 조각, 오브제 등 다양한 매체를 실험한다. 도시의 싱크홀 뉴스를 접하고 싱크홀을 통해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이른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적인 상상의 결과를 보여준 <래빗홀> 작업을 선보였던 작가는 이후 꾸준히 메르헨적인 상상 속 세계를 흑백의 색상으로 캔버스에 구현해왔다. 이번 전시에는 이러한 상상 속 세계에서 등장인물이 빠진, 공간이 주가 되는 작업을 선보였다. 작가는 연극적 공간에서 무대와 관객을 가르는 ‘네 번째 벽’인 막을 모티프로 이번 작업을 진행했다. 현실과 비현실을 가르는, 동시에 어긋난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를 막이라는 개념으로 본 것이다. <닫힌 문>은 이러한 의도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관객은 캔버스라는 막을 통해 박미라가 구체화한 상상의 세계를 맞닥뜨린다. 화면 가운데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연못 같기도 하고, 검은 구멍 같은 <검은 산책>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오히려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심연의 검은 막을 뚫고 도달한 다른 세계에 대해 궁금증이 피어 오른다. <말할 수 없는 비밀>에는 숲 속의 잘린 나무들 주변으로 귀와 촛불이 검은 배경으로 빛을 비춘다. 이러한 도상은 일종의 알레고리로 작동하는데, 코로나19 시대를 관통하면서 비대면을 통한 소통(혹은 뒷담화)의 부재로 생기는 오해를 귀라는 도상으로, 암울한 시대의 어둠 속에서 빛나는 희망을 촛불의 도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팝업드로잉>은 자신의 회화에 등장했던 다양한 도상들을 작은 조각으로 모아놓았는데, 입체로 보는 박미라의 도상은 기괴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재미를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새로이 선보이는 신작 <드로잉홀>은 투명아크릴판 위에 그려진 드로잉을 겹겹이 쌓아 위에서 바라���면 흡사 만화경 같은 풍경의 변화를 볼 수 있다. 
난지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로, ‘OCI Young Creatives 2016’에 선정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던 임현정은 2018년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약 4년 만에 2인전으로 국내 관객에게 인사한다. 미국에 있는 동안 작업에 매진하면서 국내의 그룹전을 통해 종종 소개되었지만, 꽤 많은 작업을 선보이는 것은 오랜만이다. 흡사 북유럽 르네상스 시대의 히에로니무스 보쉬나 페테르 브뢰헐의 상상력과 재기 넘치는 작업으로 주목 받았던 작가는 미국 생활의 경험을 새로운 신작과 접목한다. 먼저 6점과 2점으로 이루어진 <Strangers in a Strange World> 시리즈는 주변인의 시선으로 살던 작가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온 미국 생활을 모티프로 작업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미술관에서 열린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아시아계 작가들의 작업을 조명한 전시는 작가에게 자신의 미국 이주를 좀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우리 모두 이상한 세계에 사는 이방인들’이라는 생각에 도달한 작가는 미국에서의 경험과 풍경을 작가만의 다양한 상상 속 풍경들과 혼재시킨다. 이집트나 중동의 풍경 같은 <Somewhere>, 버킷을 뒤집어쓴 개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Stranded> 등은 기존 작업들과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작업들이다. 이후 작업의 변화가 있는데, 계기는 코로나19의 발생이었다. 코로나19의 발생은 작가의 거주지에 락다운을 가져왔고, 집안에서만 생활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작가가 지금까지 경험했던 주변이나 여행지 등을 좀더 사실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고립된 상황의 작업실에서 작업에만 매진한 결과 <Pacifica>, <Grey Whale Cove>은 붓질이나 색상 등에서 밀도가 높아졌다. 작가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자유를 느끼게 하고 싶었지만, 결과적으로 작가 자신의 고립감을 해소하는 치유가 되었다. 신작 소품 <Study of Book of Hours>는 중세인들이 해야 할 일을 캘린더 형식으로 묘사한 기도서를 모티프로 코로나 시대에 작가가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를 알 수 있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특히 화면 속 꽃들에 대한 관심은 코로나 이전에 다녀온 하와이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형형색색의 꽃들은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일종의 위로를 건넨다. 
두 작가의 작업은 초현실주의 예술의 흐름 속에 위치 지을 수 있다. 그러나 의식 너머의 세계를 드러내는 데 주력했던 초현실주의 예술의 흐름과는 차이가 있다. 데페이즈망이나 오토마티즘을 통한 의식의 비틀기가 아닌, 두 작가의 작업은 현실의 세계를 기반으로 또다른 상상의 세계로 이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현실과 상상 속 다채로운 세계가 사실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이른바 비틀���와 불일치가 아닌 연결과 화합의 세계다. 
이번 전시에는 현실과 상상의 세계, 현실적이지만 현실을 벗어난 세계의 다채로운 풍경과 이야기가 숨어있다. 그래서 전시 제목은 ‘만화경’이 아닌 가운데 대쉬가 들어간 ‘만화-경’이다. 관객들은 이번 전시의 작품을 통해 다채로운 만화경의 ‘만화(萬華)’일 수도, 다양한 스토리가 숨어있는 ‘만화(漫畫)’일 수도, 수많은 세계가 ‘멀티버스(multiverse)’처럼 펼쳐지는 ‘만화(萬畵)’일 수도 있는 풍’경(景)’을 엿볼 수 있다. 두 명의 작가가 선보이는 다채로운 풍경 속에서 자신만의 또다른 상상, 환상, 그리고 공감의 세계로, 그 통로를 통과해 보는 것은 어떨까. 묵직한 현실의 세계가 있지만, 다채로운 만화경 같은 상상의 세계는 바로 우리 곁에 있다. 박미라와 임현정의 작업은 우리에게 이러한 상상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만화-경’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 류동현 에이라운지 객원 큐레이터,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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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neurmira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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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생산 플랫폼 보안1942와 크리에이터를 위한 플랫폼 로컬스티치가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들이 함께하는 《ART REBUILD》 전시를 개최한다.
보안1942— 아트 리빌드 보안 Art Rebuild BOAN
보안1942는 올해 처음으로 작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동시대 아트 에디션의 의미와 가치를 되짚어보고 기존 작업의 재맥락화recontextualize를 통해 새로운 발견을 모색하는 실험을 “아트 리빌드art rebuild” 라는 이름 아래 진행한다. 박미라, 안태원(뿌리), 오수, 우한나, 이윤정, 임노식, 장준호×정희승, 최대진, 최범석, 홍기하 작가들이 참여하여 기존의 형태를 해체하고 재구성한 아트 리빌드 작업은 기존 작품의 단순 복제reproduction라는 현행 아트 에디션의 제한적인 이해를 극복하고 복수성, 반복성이라는 새로운 맥락 아래에서 작업이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지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를 담고 있다.
로컬스티치—모두가 크리에이터 We Are All Creators
일과 삶의 공간을 매개로 멤버들에게 실험과 시도의 장을 마련하는 로컬스티치는 이번 전시에서 크리에이터 멤버들의 각기 다른 창작 생태계를 구 여관건물이라는 새로운 맥락 안에 조성한다. 오브제, 굿즈, 가구 등 포괄적인 범위의 작품과 상품들이 장소특정적 전시로 재구성되어 로컬스티치가 추구하는 삶 속 창의적 태도를 가시화한다. 나아가 영감과 응원의 메시지가 진열된 공간, 관람객 각자가 “어떤 크리에이터”인지 정의하여 메시지카드에 적어보는 참여형 콘텐츠 등을 통해 “모두가 크리에이터”라는 선언처럼 전시를 경험한 사람 하나하나가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창의적 가능성을 발견하도록 장려한다.
전시가 선보이는 창작자들의 실험 과정과 결과물을 천천히 살펴보고, 삶을 새로이 관찰하고 구성하는 당신만의 실험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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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neurmira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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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간화음_종이에펜_53x38cm_2022
걷다가 멈춘 곳_종이에펜_42x30cm_2022
작고 하얀 거짓말_캔버스에 아크릴_65x91cm_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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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neurmira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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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편지
프로젝트 #행운의편지는 인터넷에서 유행되는 언어, 사진, 챌린지, 영상 등을 통칭하여 시대적 흐름과 상황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체계화된 사고를 탈피하고자 하는 풍자, 은유의 저화질 이미지로 sns 를 통해 생산, 소비되는 밈과 짤방을 제작한다. 밈과 짤방이 담고 있는 공감이나 위로, 비판 ,경고, 조롱 , 혐오등 다양한 감정을 웹 배너의 형태로 배포시켜 확장성을 높인다. 웹 배너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막대 모양의 광고이다. 인터넷 사용자가 급속 히 늘어나면서 이용자들에게 노출되기 위한 새로운 광고형태로 자리하게 되었다. 나는 이러한 배너의 포맷을 활용 해 가벼운 형태의 gif파일로 제작된 짧은 드로잉 애니메이션을 배포하려고 한다. 우리가 연속적으로 이어받아 쓰던 행운의 편지처럼 불특정 다수에게 이어진다. 기존 드로잉 애니메이션에서 담고 있는 불안, 어긋남, 공포, 호기심, 우 울 등의 정서를 이어나가며 새롭고 낯선 감각의 체험을 유도한다.
https://neolook.com 네오룩,
https://www.arthub.co.kr/    아트허브,
팟빵 podbbang 어플 배너를 통해 일정기간동안 보실 수 있습니다.
더불�� 오프라인에서는 마포구 지역의 네 군데의 현수막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링크는  http://www.thefourthwall.org 로 연결됩니다.
애니메이션 김은혜,남상협 /사운드디자인 서혜민 /웹 개발및 디자인 이다감
 '2021년도 온라인 미디어 예술활동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문화체육관광부','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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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neurmira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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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마음_드로잉애니메이션_1분26초_2021
https://www.youtube.com/watch?v=zRN-IXmpy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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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neurmira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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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홉번째 목숨 _캔버스에아크릴,잉크_50x65cm_2021
2. 살아나는 밤, 캔버스에 아크릴,잉크,65x91cm,2021
3. 닿을 수 없는,종이에 펜,잉크, 56x39cm,2021
4. 안부,종이에 펜,15x30cm,2021
5. 꿰어진시간_나무패널에 아크릴_163x260cm_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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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neurmira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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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rth wall
                                     www.thefourthwall.org
경기문화재단 아트체인지업 fourthwall 사업에 지원받아 그동안 제작한 드로잉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는 웹페이지를 제작했습니다. 신작 쌓여가는 위로들도 보실 수 있습니다.
‘Fourth Wall’는 연극에서 무대와 객석 사이에 존재하는 ‘가상의 벽’을 뜻한다.  이 벽을 사이에 둔 관객과 배우는 서로 간섭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진다. 무대와 관객이 마주하는 4번째 벽은 관객을 위해 제거되긴 했으나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의 벽으로 막혀 있다고 가정한다. 제 4의 벽은 무대와 객석 사이가 떨어져 있는 무대에서 주로 쓰이며, 연극뿐만 아니라 다양한 공연예술,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활용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컴퓨터의 모니터나 핸드폰 액정도 앞의 개념과 비슷하다. 우리도 현장성이 배제되어 있기는 하지만 가상의 벽을 사이에 둔 채 모니터의 안과 밖으로 구분되어진다. 나는 컴퓨터의 모니터와 핸드폰 액정을 ‘제 4의 벽’이라 상정하고 드로잉애니메이션의 전시 형태를 온라인으로 시도해보았다. 우리의 생활에 무수하게 존재하는 가상의 벽을 통해 비대면 시대에 새로운 방식으로 작품을 발표한다. 새로 제작한 온라인플랫폼을 통해 기존 드로잉애니메이션과 신작을 스크리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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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웹사이트는  '2020년도 온라인 미디어 예술활동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문화체육관광부','한국문화예술위원회' 그리고 '경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웹페이지 개발 및 디자인 이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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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neurmira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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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여가는 위로들, 드로잉애니메이션,3분10초,2021
* 이 영상은 '2020년도 온라인 미디어 예술활동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문화체육관광부’,'한국문화예술위원회’ 그리고 '경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더 많은 작업들은  www.thefourthwall.org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남상협 김은혜
사운드 디자인, 음악 서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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