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흠뻑 젖는다는 것은 - 속초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유아적인 사고를 하는 시기가 인간에게는 분명 존재한다. 세상이 마치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또 팽창하고 있다는 생각, 그것으로 인해서 어떠한 불운 또한 넘어가리라는 생각이 인간에게는 존재한다. 그리고 대개 이러한 생각들은 사춘기를 겪으면서 또는 대학에 진학하고 사회에 나오게 되면서 차츰 옅어지고 사라진다. 하지만 어느 어떤 계기에서 그것이 사라지게 될 수도 있음을 나는 경험하고 말았다.
대학교 3학년 어느 8월의 여름날이었다. 전날 게스트 하우스에서 너무 많이 술을 마신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오늘도 만취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다만 우리가 염려해야 했던 것은 바닷가 근처에서 우리가 음주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날, 우리는 각 막걸리 1잔씩 정도를 한 상태였다. 그리고 바닷가로 향���다. 날은 무더웠고 우리는 너무 분별력이 없었다. 그리고 빠졌다.
누군가 죽기 전 살아온 삶이 주마등 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말을 해줬다.
개뻥이다.
많은 음식을 한번에 목으로 밀어 넣는 듯한, 그런 기분, 지나치게 짠 바닷물이 과도하게 들어오자 느껴지던 고통, 그리고 생각 드는 것은 딱 한 가지
‘죽고싶다.’ 였다. 살면서 무엇인가를 그렇게 간절하게 바랬던 적이 있었던가?
‘필사즉생 생즉필사’라고 했던가. 그냥 죽자고 마음먹고 몸에 힘을 빼고 정신을 놓고 물을 그냥 받아들였다. 잠시 정신을 잃은 몇 초사이 나는 떠올랐고 구조대원들은 나를 구했다.
피를 꾸역꾸역 토하면서 들었던 첫 마디는
“토마토 주스 마시셨어요?”였다.
재미있었다.
병원에 가서 물을 마셔 불뚝 올라온 배를 보고 한 친구가 걱정을 했다. 다른 친구는 원래 살쪄서 그런거 아니냐고 진지 섞인 농담을 던졌고 그렇게 나는 중간 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그제서야 살아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밤새 기화를 통해 물과 모래를 뱉어내고 항생제를 투여 당하는 동안 악몽을 꿨다. 아무것도 못하고 물에 잠기는 꿈을 계속 꿨고 깼다.
마음속에 꽁꽁 감춰뒀던 울분이 터져나왔다. 영화를 보고 싶었다.
그리고 영화를 하고 싶었다.
흠뻑 젖는다는 것이란, 새로운 길을 다시 열어젖히는 침례 의식과도 같았다.
유아기는 지나갔고 현실의 바람을 그대로 맞딱뜨렸다. 포기한 시베리아 여행에서 맞았을 거센 바람보다. 아마, 더 거센 바람이 얼굴을 때릴 것 또한 짐작했다.
근데 하고 싶더라
0 notes
Text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왜 보냐고 묻는 어느 분께 드리는 편지
삶을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솔직한 적이 과연 몇 번 있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솔직한 감정의 표현을 ‘찌질함, 우울함, 빈정거림’등의 단어로 치환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솔직해져라’라고 말을 합니다만, 과연 솔직하게 살아서 빛을 보는 사람이 과연 몇 이나 되겠습니까.
어제도 몇 번 마주친 사람에게 밥을 먹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습니다. 딱히 밥을 먹고 싶진 않았고 우연히 마주쳐 반가운 정도였습니다.
취업 준비를 하면서 오다 가다 만난 사람들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정말 고마운 사람, 마음에 남는 사람도 존재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인사를 건넨 사람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을 하면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홍상수 영화를 봅니다. 계속 돌려서 봅니다.
감춰져 있는 욕망을 감싸며 환한 얼굴로 세상을 대하는 것 보다, 가끔은 세상 사람들이 더러운 욕망이라고 말하는 것들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것이 더 솔직하다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내더라도, 가끔은 솔직하게 밀어붙이는 것이 길게 보면 나을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역설이라고 지적한다면, 맞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회에 속해서 살아가는 동물이기에 오늘도 자기소개서에 지원동기를 적습니다.
사실 돈을 벌기 위해 적는 것인데 말이죠.
가끔은 욕망에 충실하고 싶은 날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봅니다. 홍상수 감독 영화를
다른 철학적 의미를 찾는 것 또한 재미를 느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신에게 충만한 영화라고 생각해서 봅니다.
0 notes
Text
나, 다니엘 블레이크 - 현실로 끌어내려 하늘을 쳐다보다.
한 친구의 전화를 받고 이 글을 올리게 된다. 폐암이 의심된다는 진단을 받았었다. 세상은 떠나가는 것 같았고 단순히 ‘진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최악의 상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집에서는 가족들의 희생과 나의 병원비 걱정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다행히 병원에서는 ‘암이 아니다.’라는 판정을 받았고 안도를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존경하는 켄 로치 감독의 영화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제목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 제목만 보자면 무엇을 말하려는지 정확하게 와 닿지 않았다. 다만,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이름이 강렬하게 와 닿았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나’가 제일 와 닿게 되었다. 사회주의를 당당하게 말하는 켄 로치는 그 동안 사회 참여적인 필모그래피를 계속해서 보여주었다. 지극히 현실주의적이었으며 역사적이었다. 그 속에서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부딪힘 속의 인간의 피와 땀을 그가 계속해서 그려냈다. 그것은 지상의 과제였고 그에게 이루지 못한 숙제들이었고 풀지 못한 수학 문제와 같은 것이었다. 아일랜드 저항군이 그러했고 스페인에서 싸우던 민중들이 그러했다. 그래서 그것은 구호와 같이, 선동, 선전과 같이 예술의 형식으로서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들려졌다. 'Land and Freedom'에서 합창된 ‘인터내셔널가’는 바로 지향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번의 영화적 느낌은 사뭇 다르다. 현실적인 구조는 여전히 그대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는 지극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소재로 삼고 있다. 영국에서 일어난 일이라 할지라도, 생리대가 없어서 신발깔창으로 대용한 이야기, 송파 세모녀 사건 등 영화속의 이야기는 더욱 비극적인 형태로 우리 주변에 산재되어 있다. 정치적으로 바라보자면 어느 노숙자가 외친 “Fucking Torys"는 그동안의 복지정책의 후퇴를 여실히 보여주는 노골적인 대사였다. 그렇다고 노동당 정부가 잘했는가? 보수당 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켄 로치는 지상에서 다시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를 바라보고 어떠한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에 고민에 쳐하게 된다. ”어떠한 추상적 목표가 내재되어있고 그것을 이루려고 다가가야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추상적 목표를 만들어나가고 확립시키기 위해서 나아가야 하는가?“ 이전의 지상에서의 과제를 말하던 켄 로치는 어느 순간에 ‘인간의 권리’라는 다소 모호한 개념을 내놓는다. 하지만 필자는 이 켄 로치의 입장을 비판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인간의 역사는 항상 지상과 하늘의 대화였으며 물질과 추상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땅에 발을 딛고 서 있지만 우리의 눈은 저 하늘의 이상을 쫓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설령 만들어져야 한다고 하더라도 만드는 과정에서 서서히 정당성과 실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역사는 그러한 방향으로 만들어져 왔고 수 많은 상상의 산물들이 역사의 과정속에서 만들어지고 폐기되어 왔다. 켄 로치는 하나의 이상을 현실의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담아내어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을 참느라 힘들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있기 조차 버거웠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따뜻한 커피를 마실려고 했다. 이내 찾아온 커다란 모순 앞에서 커피 따위도 입고 있는 코트 또한 사치처럼 느껴졌다. 집에 돌아오면서 내 몸보다는 내 병원비가 얼마인지 걱정했던 내가 떠올랐다. 현실의 무게는 사뭇 달랐다.
0 notes
Text
컨택트 (2016)- 소통이란 어떠해야하는 것인가?
어느 날, 지구의 12개 지역에 낮선 우주공간의 물체가 착륙하게 된다. 각 국의 안보에 비상이 걸리고 인간과 충돌 직전의 상황까지 간다. 먼저 파악해야 하는 것은 이 외계인들이 지구에 온 ‘목적’,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저명한 언어학자 루이스(에이미 아담스)는 물리학자 이안(제레미 레너)와 함게 이들의 행동과 언어를 분석해서 소통의 통로를 열게 된다. SNS 상에서 “‘컨택트’라는 제목 보다는 원제인 Arrival이 더 좋지 않는가?” 글을 본적이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본 뒤에 다시 곱씹어 보니 컨택트 Contact라는 단어가 더 직접적으로 관객들을 컨택트 한다. 지극히 한국인의 관점에서 영어를 해석하자면, ‘도착’이라는 단어로 낯선 이들과의 만남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접촉’이라는 단어는 좀 더 직접적이고 감각적이다. 물론 영화속에서 외계인과 루이스의 만남은 직접적이고 감각적이었다. 벽을 사이에 두고 손을 맞대는 순간 우리는 저것이 ‘Contact!“ 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사실 영화를 본 구력이 그리 많지는 않아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를 처음 접했다. 이전까지 내 머릿속의 SF영화는 부수고 우주공간을 날아다니고 외계인이 나와서 싸우는 이야기(이런 영화가 나쁘거나 싫다는 것이 아니라.)로만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지적이고 깊숙이 찔어들어오는 영화를 볼 수 있는 것이 참 좋았다. 영상도 매우 감각적이지만 굳이 가장 좋은 점을 꼽자면 바로 음악과 장면의 조화가 너무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음악에 너무 몰두를 하게 되면 영화가 아니라 뮤직비디오가 되는 것을 종종 봤다.(ex. 너브) 하지만 음악은 최소로 이야기를 받쳐주기만 하다. 시나리오와 영상이 주인이 되고 음악은 거들뿐이다. 그 이상도 아닌 최고의 조합이었다. 초연한 자세로 낯선이와의 조우를 조망하면서 영화는 SF이기도 스릴러 이기도 미스테리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매우 정치적인 말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솔직하게 말하자만 이 영화가 시사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호평을 받았고 무엇 때문에 오스카에 노미네이트 된 것인가? 에이미 아담스의 연기 때문인가? 등등의 고민들을 안고 영화관을 나왔다. 이 고민을 하게 된 것은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말자라는 막연한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인간은 “정치적 사회적 동물이다.” 미 대선에서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이 사람의 이름을 블로그에 쓰게 될 줄이야.)는 세계가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취임하고 난 뒤 중동국가에 대한 입국금지 행정명령을 내리는 것 또한 똑같은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벽을 세우겠다고 공약을 걸었고 그것으로 당선이 되었다. 각 나라는 벽을 높이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에게 남은 희망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세계적 차원의 문제도 아니다. 이미 파편화된 개인이란 말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세계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 속에서 우리는 언어를 통해 ‘소통’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일면적인 ‘소통’일 뿐이다. ‘무기’ 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나는 그 지점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축약해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CIA 요원은 현재 세계가 어떠한 인식 속에서 흘러가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대사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렇다 “무기를 준다는 것인지 정확하게 파악해라, 그렇지 않으면 먼저 공격을 해야한다. 이전의 그러한 역사가 인간에게서도 많았다.” 뭐 이런 대사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낯선 이들에게 어떤 식으로 대하고 있는가? 물음을 영화는 계속해서 던진다. 직구가 아닌 커브로. 영화를 볼 때 내용이 좋다면 형식을 크게 신경 안쓴다. 하지만 이 영화는 형식 부분에 대해서 지나치게 계속 칭찬하는 것 같아서 적는다. 미래를 본다는 것 앞 뒤가 수미 상관 이란 것. 영화를 보고 이해하는 것에서 크게 중요하지는 않는 것 같다. 이것 또한 뛰어나지만 길게 이야기 할 주제는 못된다. 역시 거들 뿐. 사족을 ���이자면 나오면서 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내 이름은 이효리 거꾸로 해도 이효리 우병우도 우병우 Hannah”
0 notes
Text
더 킹 - 불편하거나 흥미롭거나 친절하거나
정치외교학과에 입학 할 무렵 부모님이나 주위 사람들은 나를 만류했다. 그 과에 가면 미래가 없다느니, 정치 공부해서 어디다 써먹을 것이며. 하지만 나는 정치가 왜 현실에서 그런 모양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인가를 알고 싶었다. 마치 내가 누구인지 알기위해 철학과에 가는 것 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를 정치외교학과로 이끌었던 동력은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였다. 공부를 하면서 참여정부의 빛과 그늘을 모두 접할 수 있었지만, 당시 나의 인식으로는 현상 자체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더 킹은 이런 일들이 반복되어온 한국의 역사속에서 과연 무엇이 역사를 이끌어 왔는지를 말하고자 하는 영화다. 영화는 한 검사의 눈으로 대한민국 역사를 조망한다. 느낌은 마틴 스콜세지,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를 보�� 듯 하다. 권력자를 너무 진지한 자세로 분석하면 내용이 너무 딱딱해지기 마련이다. 역시 이 영화에서도 희화화를 통한 권력자에 대한 비판을 시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것은 임상수 감독이 정말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양아치가 권력을 쫓아 검사가 되어 '한강식'이라는 인물을 만나 결국에는 '팽'당하는 이야기 구조는 권력의 내면을 들여다보기에 정말 좋은 서사구조이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보여주는 권력의 내밀한 구조는 속도감 있게 그리고 흥미롭게 흘러간다. 어디선가 들은 말인데, 좋은 이야기란 "그것을 훔쳐보는 듯한 느낌으로 주는 것이다"라는 말을 얼핏 들은 것 같다. 우리가 체험하지 못하는 권력자들의 삶을 재미있게 한풀어 내듯이 풀어내고 있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고민과 한숨의 흔적들이 보인다.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결말을 맺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었을 것이다. 특히 정치, 권력을 다루면서 현실을 반영한 영화는 결말을 어떻게 마무리 짓는가에 따라서 흥행화 참패가 결정날 수가 있다. 지나치게 냉소적으로 현실을 반영한다면 사람들이 불편해 할 것이고, 반대로 너무 희망차면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 두 가지 사이를 외줄타기 하고 있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니게 보는 사람만 엄청 불편하게 만들어 놓게 된다. 손가락으로 조인성이 자신을 가질 때 아마 죄책감을 느낄 사람이 너무 많아질 것이고, 그것이 별로 희망찬 결론도 아니기 때문이다. 투표권을 가지고 있다고 '더 킹'이라니, 박근혜 또한 투표로 뽑혔으며 히틀러 또한 투표로 뽑혔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투표하는 행위가 가장 강력한 사회 전체의 권력을 부여하는 행위가 아님을 알 필요도 있다. 마침 설 연휴가 사이에 끼여있어 가족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가족들이나 편하게 쉬러가서 볼 영화는 아니다. 무수한 생각이 들게끔 하는 영화기 때문이다, 또한 보기전에 예습을 해야할 필요성도 어느정도 보인다. 한국 정치사를 어느 정도는 알아야 영화를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재림 감독은 친절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하지만, 그 노력만으로 충분한 설명을 제공할 수는 없다. 아쉽지만 천만영화가 되지는 못할 것 같다. 특히 2000년대 보수층을 지지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참 난감한 영화다. 노무현 대통령이 투신하는데 직간접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연기를 보자면 흠 잡을 곳이 없다. 영화적 캐릭터 설정이 다소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캐릭터가 대체적으로 단편적으로 설정되어 있고 입체적이지 못한 것이다. 정우성의 역할의 경우 다면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좀 더 매력적이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하지만 조인성, 정우성, 배성우와 같은 주력 배우들의 연기는 정말 안정적이었다. 마지막으로 내 개인적인 감상이다. "세상은 돈과 권력과 섹스로 돌아가는 겁니다. 설마 아가페적인 사랑은 믿는건 아니죠? 사랑 믿음 같은 건 아무 힘이 없어요.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라구요." 얼마전 구속된 어느 교수가 강의에서 했다고 전해지는 말이다. 죄와 별개로 과연 이 말 자체가 사실일까 사실이 아닐까?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그리고 대구에서 이 영화를 설날 당일 관람을 했다. 나오면서 대놓고 쌍욕을 하는 사람들과 짜증나는 영화라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나오면서 개인적으로는 "좋은 영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날 폰을 잃어버렸다.
0 notes
Text
드라마 '도깨비'에 대한 짧은 단상 - 성공의 조건
1. 드라마 도깨비는 '상속자들', 파리의 연인', '태양의 후예' 등을 잇달에 성공시킨 김은숙 작가의 2016년 작��이다. 영화는 감독이, 드라마는 작가가 기사 타이틀에 잘 등장하는데 그것은 왜 그럴까? 영화는 길면 2~3시간, 짧으면 1시간 30분 정도의 러닝 타임을 가지고 그 속에 모든 것을 담아낸다. 그러므로 이야기 구성이 어느 정도 완벽한 위에 감정의 표현, 장면의 편집 그리고 구도 등이 모두 이야기의 전개과정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드라마는 차원이 다르다. 요즘 제작되는 드라마들은 보통 18부작으로 완성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길게 이끌고 가기위해서는 시나리오의 완벽성과 대사의 끈질김이 이야기를 완성하는데 많은 부분에서 기여 하게 된다. 물론 영화에서도 이 부분이 중요하지만 드라마에서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드라마에서 작가의 역할이란 더욱 중요해질 수 밖에 없고, 위의 성공시킨 드라마의 공이 누구에게 있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김은숙 작가에게 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2. 드라마 도깨비는 죄를 지은 '김신(공유)'이 900년 이상을 도깨비로서 살아오면서 마침내 도깨비 신부(김고은) 찾아서 자신의 죄를 속죄하게 된다는 대략적인 스토리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만 보면 정말 판타지 영화나 다름없다. 내용의 참신성에 더하여 브로맨스가 가지는 드라마의 흥미는 정말 훌륭하다. 저승사자(이동욱)과 도깨비의 우정, 또는 갈등 관계는 적막할 수도 있는 핫케이크 위에 메이플시럽과 같이 달콤한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당연히 이러한 이야기구조가 전에도 있었냐라고 물어본다면, 비슷한 이야기는 많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대사속에서도 개구리가 키스를 통해서 저주가 풀리는 그러한 이야기는 많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이 드라마가 우리에게 판타지적 정서로 다가오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원초적인 부분에서 부터 질문하지 않을 수 밖에 없다. 우선 비현실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은숙 드라마를 관통하는 하나의 현상은 철저한 비현실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태양의 후예를 보자. 성공하고 있는 군인과 어느 의사의 사랑이야기를 그리는데 있어 한 국가는 철저하게 둘을 위한 장소로만 역할을 하게 되고 그들이 가는 어디든 사건, 사고가 계속된다. 마치 지옥의 한가운데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요즘 군대, '말입니다' 쓰면 '쳐맞는다. ' 드라마적 허용으로 포장할 수 있겠지만 포장지가 튀어나올 정도의 포장을 하는 것은 과대 포장이라고 지적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저녁에 자신을 보기위해서 백마탄 왕자가 밤에 나왔다가 검은 헬기를 타고 저녁 상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경우, 소비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농후했던 작품이다. 도깨비 또한 이런 지점에 기초하고 있다. 판타지적 드라마인 것은 일단 기초로 한 뒤에 비현실이 어떻게 드라마속에서 작용하고 있는지 알아보자. '데우스 엑스 마키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희곡의 가장 최악의 전개 방식이 신을 개입시켜서 인간의 갈등을 풀어나간다는 방식이라고 시학에서 꼬집은 적이 있다. 도깨비에서 벌어지는 모든 우연과 인과는 그들의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신의 결정에 의해서 처음부터 이루어지게 되어있다. 그러니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에서 더욱 흥미를 끄는 것이 아닌 이미지를 소비하게 되는 측면이 더욱 크다. 왜냐고? 어떠한 전개가 벌어지든 간에 신의 뜻이라고 나비 한마리 공유 눈앞에서 너풀너풀 춤추며 지나가면 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연결고리가 미약하게 비쳐 보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신이 개입함에 있어서 각 종 사건들은 남발되고 '다이나믹 코리아'가 완성되게 된다. 이것이 비현실이 아니고서야 뭐가 비현실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런 비현실은 우리에게 환상적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현실에서의 답답함. 그것을 누군가 그의 뜻으로 이끌어주며 도와준다고 생각해보라. 그보다 찬란한 미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삶을 자신이 사는 것이 정당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반론을 제기 할 수 있다. '그렇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알아 둘 필요도 있다. 두 번째는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를 끌고오는 점이다. 그러나 이전의 극에서 보인 여성들의 캐릭터가 수동적인 캐릭터였다면 이번 김고은의 캐릭터는 정말 인간관계와 물질적인 측면에 있어서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물론 '고등학생'이 가지는 인식하에서 그러한 설정을 도입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적극적이든, 수동적이든 간에 신데렐라이기는 마찬가지다. 도깨비는 갑자기 나타나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김고은을 도와주고 살리고 먹이고 결국에는 먹여살리는 일을 모두 한다. 김고은의 역할은 그러면 과연 무엇인가? 칼을 뽑는 역할인가? 그 속에서 다른 신데렐라와 같이 불쌍한 우리주인공은 유리구두를 신고 현재 뛰어노는 중이다. 신데렐라 이야기는 식상하다는 이유로, 여성을 수동적인 존재로 각하 시킨다는 비판을 들으면서 평론가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계속해서 기각되고 있는 전형적인 스토리다. 하지만, 전형적인 스토리가 생겨난 이유는 재미있고 그것이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남자나, 여자나 비슷하다. 현재의 조건을 180도 바꿔줄 그 누군가가 갑자기 나타난다면. 따르지 않을 이 과연 세계에서 몇이나 있겠는가? 솔직해지자. 세 번째는, 길고 이쁘고 멋있고 이쁘다라는 것이다. 외모가 중요하지 않다고?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거짓말이다. 사회는 외모가 결정적인 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으며 정말 중요하다. 외모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며 다니는 사람들을 비하하려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그 말이 위선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김고은의 작품은 '은교', 와 '도깨비' 두 가지를 놓고 생각해볼려고 한다. 아마 제일 긴 문단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일단 두 작품을 간략히 안다는 전제하에 논지를 전개하겠다. 박해일은 늙은 교수로 나오고 공유는 키큰 900살 이상의 호감형 남자로 드라마에서 비춰지고 있다. 그들의 사랑의 대상은 누구인가? 김고은으로 나이대도 비슷하게 설정되어 있다. '여고생' 이들은 좋게 말하면 동경이자 사랑의 시선으로 그녀를 ���라보고 있다. 하지만 비틀고 더럽혀 말하면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를 돈과 권위, 기적으로 꼬드끼고 있는 것이다. 은교는 박범신 작가가 성추행을 했다는 것이 트위터에 퍼지면서 더욱 지탄을 받고 있고 전형적으로 늙은 남자가 젊은 여성을 가지고 싶은 성적 충동을 그린 것이라고 비판을 받고 있다. 물론 영화에서도 드러나고 나는 그것이 맞다고 본다. 젊음에 대한 동경 그것은 젊은 여자, 남자를 모두 포함에서 가지고 싶은 욕망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을 볼 때 잣대가 달라지면 안된다. 공유는 900살 먹은 할아버지다. 로리타의 나이차를 실감하게 만드는 것인데, 만약 공유가 쭈글 쭈글 할아버지로 나온다면, 과연 이야기가 올바로 설 수 있을 것인가? 가면을 벗겨내고 모두에게 물어봐야할 것 같다. 단순한 욕정의 대상과 사랑의 대상은 다를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같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못들은 것으로 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그렇다면 도깨비의 성공은 그렇다. 멋지다. 이쁘다. 길다. 김은숙 작가가 7일째에 그냥 '보기시에 좋았더라' 했다. 한국에서 드라마를 성공시키는 전략은 이처럼 사람들의 근본 욕구를 계속해서 건드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잘 포장되어야 하지 나의 욕구와 너의 욕구는 같다라고 막 보여주면 안된다는 것이다. 도덕과 종교적 양심으로 덕지덕지 포장시켜 하나의 결과물로 내놓아야 한다. 솔직하지 못한 세상에 드라마마저 솔직하게 다가갈 수 없는 것이다. 최근에 정말 좋은 드라마들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특히 '밀회', '이번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 ���은 경우에는 정말 일어나서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의 드라마 수준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작가와 시청자들이 더욱 솔직해지지 않는 이상 이러한 드라마가 더 계속해서 나올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1 note
·
View note
Text
녹터널 애니멀스 - 감독과 관객 사이의 긴장
새벽 1:35 말 그대로 야행성 동물 처럼 어슬렁 거리며 집을 나섰다. 바로 ‘녹터널 애니멀스'를 보기 위해서였다. 감독에 대한 무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영화를 보러 나섰다. 하지만, 톰 포드의 전작은 싱글맨 딱 하나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사실 평론가들의 평점 혹은 네티즌들의 평점 또한 매우 높은 편이었기 때문에 의심을 크게 하지는 않았다.
소설 ‘토니와 수잔'이라는 책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는 톰 포드 감독이 7년만에 메가폰을 잡고 각본도 그가 직접 쓴 작품이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기도 했다. 투모로우의 대학생 제이크 질렌할, 연기에서 누구보다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는 제이미 애덤스는 그 영화에 정점을 찍고 있었다. 초반에 미술작품 “쓰레기"로 표현되는 장면은 정말 매혹적이면서도 충격적이다., 형용할 수 없는 뒤틀림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아서 대략적인 내용은 이럴듯 하다. 토니와 수잔은 고등학교 때 부터 알던 사이이며 서로 사랑하게 되는데, 현실적인 조건에 있어서 차이를 나타내 결국은 헤어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수잔은 토니와의 관계에서 생긴 아이를 상의없이 낙태한다. 그리고 토니는 소설로써 그녀에서 복수를 한다. 이 내용이다. 디자이너 답게 정말 아름다운 모습으로 영화는 꾸며지고 있다. 잘 만든 책 광고 한편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만약 진짜로 책 광고의 목적도 있었다면 성공했다. 벌써 알라딘에 주문을 했기 때문), 가끔은 과할 정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그것이 톰 포드 영화의 장점이기에 ‘투 머치'도 용인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과거와 현재 그리고 소설 속을 오가면서 연출을 해내는 것이 정말 대단하다. 3가지 이야기를 같이 담아낼 수 있는 능력은 아무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한가지 이야기만 하더라도 갈등구조를 담기 어려운데 이 영화에서는 3가지 차원에서 갈등 구조를 다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음악, 연출, 패션, 3가지 요소의 조합은 숨을 가쁘게 관객을 몰아부치며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특히 마지막 심장박동소리, 그리고 수잔의 기다람과 공허함 속에서는 내가 마치 수잔이 된 듯한 느낌이 들며 숨을 참게 된다. (어디서 많이 본 연출 감각이다.) 하지만 그 후에 허무하게 무너지는 기대감을 끝내 톰 포드는 거두지 못하는 것 같다. 이쯤 되면 기대감을 없애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해의 차원을 새롭게 설정해서 다시 접근해보자, 스토리라인을 토대로 하되 그것을 스크린 밖의 대상과 연결시켜보는 것이다. 주된 스토리 라인은 '수잔에 대한 토니의 복수'에 초점 맞춰 있다. 현재의 관점에서는 수잔의 행동과 반응만이 계속해서 전개되고 있는데, 감독은 관객들이 누구에게 감정이입을 해야한다고 생각하겠는가? 그렇다, 바로 수잔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그 감정을 그대로 느끼게끔 하고 싶었을 것이다. 바람피고 있는 남편, 그리고 관심 없는 딸에서 공허함을 느낀 수잔에게 잔혹한 소설을 건넨 토니의 복수는 아주 차갑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소설에 대해서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수잔은 토니를 다시 마주칠려고 했을 것이다.
사람은 좌절할 때 나쁜일이 또 찾아오는 것에는 크게 타격을 받지 않는다. 이미 겪고 있는 고통에서 더 견뎌낼 것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망에서 희망의 끈을 잠시라도 보았을 때, 그리고 그것이 이내 썩은 동아줄이었음을 깨달을 때, 사람은 더욱 구렁��이로 빠져들게 된다.
소설은 양날의 검이 었다. 한편으로는 수잔에게 죄책감을 선물해주는 도구였으며, 한편으로는 우울한 현재의 삶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변화를 줄 수 있는 한줄기 빛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토니는 마지막에서 그 끈마저 처절하게 끊게 된다. 그리고 복수는 완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수잔에 감정이입을 하게되면 하게될 수록 토니가 톰 포드 같이 보인다. 마치 우리에게 수잔을 감정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토니가 되어 '녹터널 애니멀스'라는 소설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것 말이다.
영화 제목이 소설 원작인 토니와 수잔이 아닌 소설 속의 소설 “녹터널 애니멀스"인 이유도 그곳에 있지 않나 싶다. 관객은 수잔이다. 감독은 토니였다. 그 속에서 마지막의 공허함은 수잔의 감정이기도 했지만 바로 자신 우리의 감정이기도 하다. 오늘 톰 포드는 나에게 “녹터널 애니멀스"라는 영화를 7년만에 보내주었다.
근데, 나라면 복수 저렇게 시시하게 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이야기가 이상한 것 같다라고 말한다면 그것 때문일 것 같다. 그리고 메타포 발견하는게 너무 힘들다.
0 notes
Text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2016) - 내가 모르는 '너희들'에 대하여
홍상수 감독이 지난해 김민희와의 스캔들이 터지면서 주위에 홍상수 감독 이야기만 해도 치를 떠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홍상수 감독 영화가 나올때마다 챙겨보며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고 몇몇 대사들은 외워서 술마시며 그것을 따라하기도 했으니, 무엇인가 죄책감을 느끼는 듯 했다.
“왜 자기 경험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죠?, 그래도 되는 건가요?”
‘안될 이유는 없다고’ 말할려던 용기가 부족했고, 그렇게 침묵하던 중에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이 개봉했다. 평소였다면 같이 영화를 보러 갔었던 지인과 함께 보러가자고 말했겠지만, 그 날은 그렇지 못했다. 그냥 혼자 보고 싶은 느낌이 강했고, 스스로 해석을 하고 싶은 느낌도 들었고, 하지만 역시 영화는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과 같이 이야기 해야 좀 더 재미가 있다는 사실만 깨달았다.
그리고 얼마전, 오랜만에 군대 동기, 선임과 만나서 새벽까지 정치, 음악, 영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운동권 분위기가 물씬 나는 술집에서 과메기와 제육볶음을 집어먹으면서 소맥을 말던 중, 홍상수 이야기가 나왔다.
“나 진짜 너 사랑해”
'옥희와 영화'에서 나오던 이선균의 대사였을 것이다. 이선균 성대모사로 출발을 한 영화 이야기는 신작의 강가로 흘러갔다. 과연 이 영화의 주제의식은 무엇인가? 정말 몇 안되는 공통점 중에 이 영화를 해석하는 것만은 같았다. 간단하게 말하면 “사람은 다양한 면이 존재하며, 그것을 대하는 한 남자의 서투른 행동을 다룬 영화이다.’
길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다양한 위치를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다. 학생이며 남자이고 정치학과에 속해 있으며 누군가의 아들이며 누군가의 남자친구였다. 이 위치들은 각 관계의 설정을 규정하며 대상과의 소통속에서 '나'가 설정되는 것이다. 내가 어떤 편의점에 들어간다면 '나'는 손님이지 그 사람의 '아들'로서의 '나'로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영화속에서 이유영도 그러한 모습을 비춰주고 있다. 다른 남자들은 계속해서 그녀에게 '아는 척'을 하면서 접근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남성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척(?)을 한다. 그 속에서 관계는 재설정 되고 다른 이유영이 그들에게 보여진다. 이런 상황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이질감'에서 비롯된다.
아마 이러한 생각을 한번 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아니, 이 사람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말이다. 이러한 이질감은 사람들 속에서 그 사람은 재평가하게 만든다. 새로운 어색함 속에서 다시 재구축되는 과정, 하지만 그 이전의 모습을 맹신했던 사람이라면 그 과정을 순탄하게 받아들일리가 없다. “술이 그렇게 좋아? 씨발년아”
김주혁의 욕은 이 이질감에 대한 두려움을 폭력적이고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층위에서 형성되는 관계와 인격 속에서 그것을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면 관계는 종말하고 만다. 이유영이 끝내 모르는 사람인 척하고 그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누군가는 그 사람에게 보여지고 싶은 이미지가 있으며 그것을 지켜려는 사람이 있다. 반면 이런 사람도 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보여지고 싶은거 아니야?”
“미안하지만 아닙니다.”
그리고 나가서 담배 타임을 가지는 동안 나의 고등학교 동창이 술집으로 찾아왔다. '허허 웃으며’ 선임은 서초구에 살게된 경위와 자신이 부자가 아님을 설명해야 했다. -끝-
1 note
·
View no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