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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경, 「그때 내가 아름답다고 말하지 못한 것」
우리가 사랑 때문에 자주 비굴해진다는 것 우리가 사랑 때문에 서로 미워한 적 있다는 것
기차 안에서 편지를 다 쓰고 눈 감은 너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너는 함부로 아름다움을 말하지 않는 사람 잠든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어둠을 겹겹이 입고도 잠들지 못하는 사람
우리가 함께 있으면 가난해진다는 게 슬프지 않았��� 그런데 내가 벗어 준 마음이 가난한 것일까 봐
각자 가져온 책을 읽고 바다를 많이 보고 많이 걸었다 덕지덕지 소금 냄새 바람에 날아가지 않고
왜 자꾸 덧씌워지는 걸까 두려웠어 네가 너무 깊이 잠든 것처럼 보일 때 표정 없는 표정 위로 드리운 구름이 내가 몰고온 것일까 봐
그러나 너는 구름을 함부로 읽지 않는 사람 비가 내리면 조용히 맞으며 오래오래 서 있겠지 그것이 나를 불행하게 한다는 걸 알면서도
안목해면에서 강문해변 지나 순긋해변과 사천해변 바다도 구름처럼 수많은 이름을 가졌다
물결은 접히고 또 접히면서 우리를 새기려 하는 것 같아 이 편지는 한동안 다시 읽지 못할 것 같아
어딘가에 새겨진 우리가 비굴한 모습으로 서로 미워할지라도
기억하겠니? 바다는 아무리 헹궈도 바다라는 것 내가 너를 계속 사랑할 것라는 것
그때 네가 아름답다고 말하지 못한 건 말이야 이미 내가 아름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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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연분홍」
날이 흐리고 하루 종일 꽃이 졌다 뜰 가득 꽃잎으로 연분홍 점묘를 찍는 이는 누구일까 민들레 옆에 쪼그리고 앉아
오후 내내 지는 꽃잎을 보았다 지난 생에 우리는 무엇이었을까 지는 꽃을 속절없이 바라보던 벚나무와 아련하게 허공을 건너가던 꽃잎이었을까 네가 저 작은 연분홍이었을까 네 모습을 화선지에 옮기느라 수없이 눈길 올려 바라보던 너는 미인도 속의 그림이었을까
그래서 이렇게 낯익은 것일까 아니 덫에 걸린 순한 짐���이었을까 죽어가던 너를 안고 어쩔 줄 몰라 하던 골짜기에서 너와 아프게 이별한 적이 있었던 것일까 너와 나 사이를 건너가고 건너오는 애틋함은 어느 생에서 여기까지 이어져 오는 걸까 다음 생에도 목련 잎이 하얗게 깔린 길을 같이 걸어가는 오후가 허락될까 바람도 없는데 꽃잎이 지고 있다 지난 생에 우리는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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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몇 년 전 올려주시는 글들 항상 잘 보고 있다고 보냈던 사람입니다. 시간이 꽤 지나서, 기억하시련지 모르겠네요.
아직도 종종 올라오는 글을 보며 여전히 문학을 사랑하시는구나 생각이 들고 항상 기분이 좋습니다.
이런 걸 여쭤봐도 되는지 모르겠으나, 추천하시는 시집이 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어른이 되고 나서 오히려 시간에 쫓겨 책을 잘 안 읽게 되더라고요. 시집을 다시 읽어 보려고 생각 중인데, 어떤 시집이 좋을지 고민이 되네요.
활자님��서 좋게 읽으셨던 시집이 있다면 추천받고 싶습니다. 항상 행복하세요.
안녕하세요! 지난번 보내주신 메시지를 종종 꺼내읽었더니 해가 지난 것 같지 않아요. 감사해요.
비교적 최근에 출판되고, 읽고 있는 것 중 추천드리고 싶은 시집은
임유영 시인의 『오믈렛』 (마치 오후에 혼자 카페에서 떠오른 이런저런 몽상 같아요.)
김소연 시인의 『i에게』 (잠들기 전 일기 같고)
신용목 시인의 『우연한 미래에 우리가 있어서』 (잠 못드는 새벽 같아요.)
이 세 권입니다.
고백하자면 저는 시집 한 권을 완독하는 걸 어려워합니다. 그래서 머리 맡에, 책상 위에, 가방 속에 넣어놓고 손이 갈 때 읽곤 해요. 위의 시집들도 그렇게 아주 천천히 읽고 있습니다. alic1-i님도 이리저리 시집을 굴려보며 마음에 닿는 시를 발견하시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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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제 린저 『생의 한가운데』 중에서
인간이 공포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한 일로 여겨진다. 나는 소년 시절 갑자기 병이 난 친구를 느닷없이 방문한 적이 있었다. 방은 담배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상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냄새였다. 마침내 나는 그것이 가스등의 냄새라는 것을 알아냈다. 거의 느낄 수 없는 작은 분량의 가스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친구는 서두르듯 말했다. 아, 괜찮아, 전혀 위험하지 않아. 하찮은 ��이니까. 내가 가스관의 새는 부분을 찾아내서 고쳐야 한다고 고집하자 그는 이상하게 초조한 태도로 나에게 그러지 말아주길 부탁했다. 그리고 자기는 이 가벼운 유독성의 냄새와 계속적인 위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마치 마약처럼, 혹은 심연에서 오는 향기처럼 그 냄새를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는 곳을 결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며, 그것은 아주 작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정말 새는 곳은 한 군데도 없을지도 모른다고 수수께끼같이 말했다. 그는 한 번도 가스중독에 걸린 일이 없었다. 그의 신체 기관은 적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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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제 린저 『생의 한가운데』 중에서
나 때문에 슬퍼하지는 마세요. 물론 오래 그러지는 않겠지만. 비난이 아니에요. 당신의 천성이니까. 나하고는 정반대죠. 왜 나는 당신과 결혼했을까요? 왜 당신은 나와의 결혼을 고집했나요. 우리 둘의 불행이었어요. 나는 당신의 좋은 점을 알아요. 그러나 나는 당신이 나의 복잡함이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하는 만큼 당신의 단순함을 싫어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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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쉐프렐라」
발만 따뜻해도 살 것 같아 전기 스토브에 언 발을 갖다대며 너는 잠이 든다 신이 너의 잠 주변을 건달처럼 배회한다
1월이 벌써 다 갔네 1월은 항상 그래왔다고 곧 2월이 온다고 말했다 2월도 항상 그러리란 걸 너는 예감한다
전기세를 걱정하며 딸칵 하고 너는 스위치를 끈다 너의 어긋난 불안이 교합되는 소리 같다
너는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 네가 기대 앉은 불행이 볼품없이 납작해진다 신도 네 곁에서 단잠을 자고 일어난 것일까
축축하고 고소한 하품 냄새가 온 방에 가득찬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이제 신의 가호조차 필요가 없겠구나
주변을 맴도는 신에게 마실 것을 건네주듯 농을 건넨다 목을 축이는 자에겐 목청을 높였던 흔적이 있다는 걸 아냐고 묻는다
창밖을 보다가 너는 유리창을 본다
창밖은 똑같고 유리창은 ���번 다르다 네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도 오래 간직해준다 그리고 너에게 그걸 보여준다
너는 다만 명랑하고 싶다 웃음소리로 1월을 끝내고 싶다 2월을 웃음소리로 보내고 싶다
저 식물은 이름이 뭐지 쉐프렐라 아르보리콜라 쉐프렐라 악티노필라
목젖이 훤히 보이도록 너는 고개를 젖히며 웃는다 머쓱해진 얼굴로 신이 우리 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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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꿈꿀 수 없는 날의 답답함」
나는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싶었다. 아니 떨어지고 있었다. 한없이 한없이 한없이 ............ ...... ... 아 썅! (왜 안 떨어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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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호, 「루즈벨트 아일랜드」
빛 속에서 그늘을 들쳐 업고 너와 섬에서
물담배 피우고 싶다. 글라스로 와인 한 잔을 시키고 시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고 싶다. 그럼 넌 내 눈을 보고 그림 이야기를 하겠지. 여러 개의 시선이 뒤섞인 세잔에 대해서. 세잔을 말할 때 반짝이던 네 눈에 대해서, 쓰겠지. 좁은 캔버스에 갇힌 검은 침대와 컵과 흰 장미를. 한 쌍의 브래지어를 우리에게 채우는 나라에 대해서. 그럼 우린 왜 이 순간이 위대한지 말하겠지. 우린 섬에서 또 다른 섬에 가 눕겠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네 방에 앉아서 맨해튼을 바라보겠지. 내일은 그랜드 센트럴에 가서 우리 주니어스 치즈 케이크를 먹자. 먹으면서 왕가위 영화를 보자. 이랑의 노래를 듣자. 들키지 말자. 그리고 우리 참 지질하다고 웃겠지. 목에 커튼을 걸고 거울 앞에 서서 우린 잘 어울린다고 말하겠지. 이렇게 사랑하는데 어째서 사랑이 아니야?
웃겠지
내가 돌아가는 그날은 눈이 아주 많이 왔다고 네가 그랬다. 뉴욕에 있는 사람들 그 누구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고 그랬다 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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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종, 「그가 울까 봐 걱정이다」
그가 울까 봐 걱정이다. 울기 시작해서 도무지 끝나지 않을까 봐 걱정이다. 그런 울음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 참 다행스럽다 ⎯ 이루 말할 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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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형, 『붕대 감기』 중에서
형은의 눈에서는 눈물 대신 깨진 유리 조각이 흘러나와서, 땅에 떨어진 그 조각들을 밟은 사람들이 다쳤다. 자꾸만 그렇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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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비 오는 날」
구름이 구름을 만나면 큰 소리를 내듯이 아, 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치면서 그렇게 만나고 싶다, 당신을.
구름이 구름을 갑자기 만나면 환한 불을 일시에 켜듯이 나도 당신을 만나서 잃어버린 내 길을 다시 찾고 싶다.
비가 부르는 노래의 높고 낮음을 나는 같이 따라 부를 수가 없지만 비는 비끼리 만나야 서로 젖는다고 당신은 눈부시게 내게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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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비가 온다. 네게 말할 게 생겨서 기뻐. 비가 온다구!
나는 비가 되었어요. 나는 빗방울이 되었어요. 난 날개 달린 빗방울이 되었어요.
나는 신나게 날아가. 유리창을 열어둬. 네 이마에 부딪힐 거야. 네 눈썹에 부딪힐 거야. 너를 흠뻑 적실 거야. 유리창을 열어둬. 비가 온다구!
비가 온다구! 나의 소중한 이여.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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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려주시는 글들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마음에 드는 글들을 수첩에 배껴적는 습관이 고등학생 때부터 있었는데 이 블로그를 보면서 여러 좋은 글들을 접하게 된 것 같아요.
고등학생 때만큼 자주 들리지는 못하지만, 성인이 된 지금도 종종 들러 글을 보곤 합니다.
이래저래 바빠서 들리지 못한 동안 업로드가 멈추었을 까봐 걱정했는데 최근에도 글이 올라와 기쁘네요.
항상 감사합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라는 영화 감독을 좋아합니다. 은퇴를 번복하고 6년 만에 낸 신작이 작년에 개봉했는데, 그의 영화를 개봉할 때 영화관에서 보는 게 처음이라 무척 떨렸어요. 5년 동안 저에게도 세상에도, 또 그에게도 참 많은 일이 있었겠죠. 그런데 그의 영화는 여전했습니다. 건조하지만 따뜻한 그의 세계가 여전히 존재해왔다는 것 자체로 큰 위로였어요. 모든 게 너무 빠르기만 한 세상이 어지러울 때 초점을 잡을 수 있게 우두커니 서있는 것들을 곁에 둬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느린 블로그도 익명 님에게 비슷한 안도를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선물로 5월에 꼭 올리고 싶었던 시를 올렸습니다. 이 답장을 5월이 지난 뒤 보셔도 한 번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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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5월의 첫 시집 ⎯승환에게」
A, U, G의 아름다운 생김새 달의 속눈썹이 긴 줄 처음 알았지
너는 죽은 이름을 부른다 하얗게 얼어 쓰러진 철탑 꼭대기에 여름 반바지 입고 앉아
모든 절정은 왼쪽이거나 오른쪽 끝 검푸른 촛불의 흔들리는 발자국으로 가는.
너는 틀린 철자로 받아쓴다 고요한 철망 아래 연필 깎는 소리 들린다 얼음 발톱 깎는 소리 아니 눈 내리는 소리일지도
지금은 5월 너는 쓴다 검은 비닐봉지 날아오르고 빨간 꽃잎 찢어지는 소리 창백하게 잠든 얼굴 위로 촛농 떨어지는 소리 첫 올가미에 부드러운 목이 매달리는 소리
너는 쓴다 언제나 5월, 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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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마음」
찔레꽃 향기에 고요가 스며 청대닢 그늘에 바람이 일어
그래서 이 밤이 외로운가요 까닭도 영문도 천만 없는데
바람에 불리고 물 우에 떠가는 마음이 어쩌면 잠자나요
서늘한 모습이 달빛에 어려
또렷한 슬기가 별빛에 숨어
그래서 이 밤이 서러운가요 영문도 까닭도 천만 없는데
별 보면 그립고 달 보면 외로운
마음이 어쩌면 잊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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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나의 詩가 되고 싶지 않은 나의 詩」
움직이고 싶어 큰 걸음으로 걷고 싶어 뛰고 싶어 날고 싶어
깨고 싶어 부수고 싶어 울부짖고 싶어 비명을 지르며 까무러치고 싶어 까무러쳤다 십 년 후에 깨어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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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밤 눈」
네 속을 열면 몇 번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또 다른 몸짓으로 자리를 바꾸던 은실들이 엉켜 울고 있어. 땅에는 얼음 속에서 썩은 가지들이 실눈을 뜨고 엎드려 있었어.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너는 무슨 색깔로 또 다른 사랑을 꿈꾸었을까.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 얼어붙은 대지에는 무엇이 남아 너의 춤을 자꾸만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을까. 하늘에는 온통 네가 지난 자리마다 바람이 불고 있다.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 찬 세상, 그 끝에 첫발을 디디고 죽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온도로 또 다른 하늘을 너는 돌고 있어. 네 속을 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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