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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youngcha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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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싱클레어는 매의 그림을 그려 데미안에게 보냈고, 데미안은 그 유명한 답장을 보냅니다. 새는 알을 나오기 위해 투쟁합니다. 이는 정반합의 원리입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잉태하기 위해서는 오래된것과 반대되는 것이 부딪치고 부서지고 깨져야 합니다. 그 결과에야 새로운 무언가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새는 투쟁을 하고 알은 그저 형태를 유지하려고 할 뿐입니다. 하지만, 새가 알을 깨지 못한다면 그 새는 그저 알 속에서 죽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태어난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갑니다. 그 투쟁과 갈등, 파괴를 새로움, 태어남으로 이어지도록 순환시키는 신이겠죠. 그리고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입니다. 악마이자 천사, 탄생과 파괴. 그 모두를 아우르는 신이기에 새는 신에게 날아갑니다.
싱클레어는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조력자를 만납니다. 피스토리우스라는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입니다. 그는 싱클레어가 알을, 세계를 깰 수 있도록 도와주는 운명이자 인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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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youngcha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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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상호의존을 통해 탈식민주의를 실현하다 내가 학생일 때, 학생체벌이 폐지되기 이전까지 몇 몇 선생님들은 우리를 체벌하실 때 으레 “우리나라 애들은 맞아야 정신을 차려요.”라고 말씀하셨다. 지금이야 학교체벌도 금지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우리는 맞아야 정신을 차리나 보다’생각하며 체벌을 당했다. 각종 온라인 뉴스 사건기사들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한국인들은 이래서 안 된다’라는 민족자기비방적인 댓글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의 조상들이 받았던 정신적 식민지배의 잔해들이 사라지지 않고 대대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실코의 <의식>에서도 인디언들이 백인 정착인들에게 세뇌당하여 그들의 민족적, 개인적 자존감을 상실한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조사이어 외삼촌이 사들였던 점박이 소들이 사라진다. 타요는 그 소들이 백인 플로이드 “소유”의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그 울타리가 인디언이나 멕시코 인이 아닌 백인의 울타리라는 이유만으로 플로이드가 소들을 의도적으로 훔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타요의 이야기는 곧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이야기로 확장되어 간다. 타요가 참전 중 겪었던 잔인한 살육으로 인한 트라우마는 비단 타요 뿐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 참전했던 백인과 비백인 군인들에게 제각각 다른 방식으로 고통을 주고 있음을 보여준다. 타요의 인디언 동지들은 한 때 그들이 백인 군인들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군인의 타이틀을 단 채로 사람들의 동경을 받았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들은 타요를 백인 혼혈이라고 멸시하면서도, 술집에서 백인 여성들과 잠자리를 하기 위해 자신들을 이탈리아 출신이라고 속인다. 실코는 이처럼 백인들이 인디언의 땅을 빼앗고 그들을 전쟁에 이용했음에도 백인의 탓을 하지 못하는, 백인을 증오하면서도 동시에 경외하는 모순적인 뒤틀린 자아를 가진 인디언 사회를 그려냈다. “백인 여자들이 그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지. 한낱 인디언에 불과한 그들에게 말이야.”라는 대목은 인디언으로서의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타요의 형인 록키는 이 소설에서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탈피하고 완전히 서구화하고자 열망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미신을 믿고 비과학적인 의식을 치르는 인디언 사회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는 백인중심주의의 교육에 굉장한 열의를 가지고 공부한다. 조사이어 외삼촌이 백인들이 쓴 가축소와 관련한 글을 읽을 때에도 울리베리의 사촌이 거짓으로 일러준 좋은 소의 기준과 다르다며 이상해 할 때에도, 록키는 단호하게 그 책은 과학적으로 쓰였으며, 오히려 체계가 없는 쪽은 인디언 사회라고 일침을 날린다. 록키의 어머니이자 타요의 이모는 이런 록키를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백인과 정을 나누어 혼혈인 타요를 낳은 여동생은 가문의 수치로 삼으면서 인디언 사회에서 벗어나 서구의 문화를 받아들이려는 록키를 옹호하는 이모가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이 불안정한 민족적정체성은 한 민족의 뿌리를 통째로 흔들어버린다. 인디언의 땅을 “빼앗은” 백인들은 거대한 나라 미국을 세우고 그곳에 유럽인들의 터전을 확대해 나간다. 유럽계 미국인들, 즉 백인들은 이제 자신들을 “American”이라고 부르며 정작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인디언”이라고 부른다. 원래 살고 있었던 인디언들은 속수무책으로 격리당하고 차별당하면서 하층민으로 전락하게 된다. 인디언 전용 거주지에서 벗어나려는 청년들도 결국은 갤럽에서 백인들의 “원주민 의식”행사에 소품으로 이용되다가 다시 버려지며 하류 인생의 도돌이표를 찍는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 누구도 아주 악하거나 아주 선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실코는 독자로 하여금 진정한 탈식민주의 사회란 서구의 것을 전면 부정하고 원주민 사회로의 회귀가 아니라, 두 사회가 서로 화해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화합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메세지를 던진다. “완전히 좋은 것도 없고 완전히 나쁜 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처한 상황에 달려있다”는 조사이어 외삼촌의 대목을 통해 실코의 메세지는 더욱 명확해진다. 타요가 죽은 백인군의 얼굴을 보며‘백인들도 죽은 후에는 피부가 검게 변하였다.’라고 회상하는 장면을 통해 실코는 두 사회의 화합에서 더 나아가 인종을 초월한 같은 동등한 인류로서의 화합을 그리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만약 타요가 백인 우리 안에 있던 가축들을 역으로 모두 수탈했거나, 자신을 죽이려 들고 자신의 친구였던 핼리를 죽인 에모의 두개골을 드라이버로 찔렀더라면 아마 이 소설은 그저 권선징악으로 끝맺는 흔한 작품들 중 하나가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수도 있다. 실코가 지향하는 상호의존적인 탈식민주의는 주요 등장인물들을 통해 더욱 명백히 전달된다. 애초에 소설의 주인공인 타요가 백인과 인디언 혼혈로 설정된 것부터 작가는 인디언 가치관과 백인 가치관을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변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수용적인 탈식민화를 이룰 수 있음을 전달한다. 타요의 어머니와 타요를 멸시하는 타요의 이모와 에모를 부정적으로 그린 것으로도 작가의 의도를 유추할 수 있다. <의식>에서는 산문 중간 중간에 아메리카 원주민 이야기를 삽입한다. 설화, 민담, 시 등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바로 자연물들이 이야기의 주 소재라는 것이다. 그 자연물들이은 우리를 고통 속에 빠뜨리기도 하고 행복으로 구원해주기도 한다. 결국 인간은 인종 문화 할 것 없이 같은 자연물로서 조화롭게 서로 교류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산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야”라는 베토니 노인의 말처럼 말이다. 현대 우리는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발견하고 흑인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그들의 노예로 만들고 식민 지배를 한 것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노예와 식민, 그리고 수탈의 역사는 유럽인들의 “신대륙” 개척 이전, 인류가 동물의 생태계의 꼭대기를 정복한 이래로 계속되어왔다. 그들은 끝없이 그들 스스로를 ‘인종’ 혹은 ‘민족’으로 구분 짓고 서로가 서로를 지배하려고 해왔다. <의식>을 읽으며 작가 실코는 바로 그 점을 간파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정말로 아주 악하거나 아주 선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처한 상황에 달려있다. 인디언들이 백인들에게 정복되기 이전에 인디언들은 또 다른 부족들을 정복하고 피탈했을 것이다. 식민과 정복의 역사가 유럽인들에게만 한정되어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해서 유럽인들의 현대 “지구화, 세계화”로 포장한 “서구화”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를 절대 악으로 낙인하고 비난하기 전에 모두가 공존이라는 공동된 목적을 가지고 함께 나아가야 한다. 실코가 주장하는 이러한 탈식민화의 과정은 우리나라 문학 및 영화계에서도 배워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아직도 한국과 일본 간에 수면 위로 올라온 정치적, 역사적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국가를 대표하는 소수의 첨예한 대립 뒤에는 우리는 결국 한국사람, 일본사람일 뿐이다.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일본 문화를 배척하며 그들과 교류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우리 스스로에게 ‘피해자’, ‘비련의 주인공’으로만 생각한다면 한국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의식>의 타요의 이모처럼 말이다. 미래의 한국 문학과 영화계에서는 이제 일본의 식민정신에 저항하면서 동시에 일본인들을 같은 사람, 더 나아가 자연물로 인식하고 화해하는 상호의존적인 탈식민주의로 이끌어야 한다.
<의식>은 치유와 일출로 끝나는 희망적인 소설이다. 우리 인간과 자연 간에 보이지 않게 상호 연결되어있는 방식들에 대해 아름답게 그려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연결 관계들을 직접 인지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동지들과,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세상을 계속해서 파괴하게 된다. 누군가의 잘못은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균형과 조화를 유지하는 게 쉽지 않으며 우리는 항상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도, 상처를 입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타요처럼 우리 스스로를 치유하고 의식과 스토리텔링에 참여하며 우리의 앞으로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힘과 책임감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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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youngcha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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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스트 오퍼(The Best Offer)>, 그 안에서 사랑의 오류를 찾다.
맥스 슐만의 <사랑은 오류>를 읽고 최근에 감상한 영화 <베스트 오퍼(The Best Offer, 2013)>가 떠올랐다. 영화의 주인공인 버질 올드먼(Virgil Oldman)은 유명한 예술품 경매사이자 노년 감정사다. 그는 냉철한 눈썰미로 모든 것을 진품과 가품으로 정확하게 가려내는 공신력 있는 경매사다. 버질은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Virgin) 숫총각인데, 그는 현실 속 연애대신 초상화 속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자신의 비밀창고에 모으며 그 욕망을 대체한다. 그런데 그는 수집 과정에서 갖고 싶은 작품들을 가품이라고 거짓판정한 뒤, 친구 빌리를 매수하여 경매장에서 과소평가된 가격에 낙찰되도록 하곤 뒤에서 예술품들을 회수한다. 이렇게 초반의 버질은 매우 치밀하고 속물적인 캐릭터로 그려진다. 즉 영화 속 버질이란 캐릭터는 <사랑은 오류>에서 모든 것을 이성적이고 계산적으로 생각하는 ‘나’와 매우 비슷한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어느 날, 버질에게 정체 모를 여인 클레어 이벳슨으로부터 연락이 온다. 그녀는 버질에게 자신의 저택에 있는 모든 예술품들을 경매에 매물로 내놀 것을 의뢰한다. 그녀의 저택을 물색한 그는 우연히 자신이 학창시절 연구했던 프랑스 발명가의 보캉송(Vaucanson)의 대단히 귀중한 ‘말하는 로봇’의 부품 일부를 발견하게 된다. 버질은 여태 다른 작품들을 취해왔듯 그녀의 집에서 로봇의 나머지 부품을 몰래 찾아내어 로봇을 가져갈 심산으로 이벳슨의 집안을 들락거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벳슨의 집에 들를수록 버질의 관심은 서서히 로봇에서 이벳슨으로 옮겨지기 시작한다. 그는 공황장애가 심각하여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이벳슨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이내 그는 그녀를 자신의 비밀창고 속의 여인들처럼 완벽한 여자로 만들기 위해 그녀에게 꽃을 선물하고 옷과 화장품을 사준다. 이는 <사랑은 오류>의 ‘나’가 그의 속물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즉 폴리를 자신의 전유물로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폴리에게 논리학을 가르치는 행위와 관계 지어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버질은 자신도 모르게 평생 느끼지 못했던 여성에 대한 보호본능과 동시에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깨닫는다. 그녀에게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된 버질은 비밀창고에 이벳슨을 데려가 자신이 평생 동안 모아온 수백 개의 예술품들을 보여주며 청혼한다. <사랑은 오류>의 ‘나’가 폴리에게 속물적인 의도로 접근했다가 폴리에게 감정적인 사랑이 생겼음을 깨닫고 그녀에게 진심을 고백하는 것과 비슷한 흐름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가 그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만큼 그녀도 자신에게 주는 사랑이 진심이었다고 생각한 버질. 어느 날 외출했다 들어온 버질은 이벳슨이 어디론가 사라짐을 깨닫고 온 집안을 뒤진다. 곧 그는 이벳슨이 버질이 평생 비밀창고에 수집해온 모든 걸작들을 들고 도망간 것을 확인하고 실성한다. 그곳엔 그가 몰래 모아온 가짜 부품의 완성체인 말하는 로봇만이(로봇부품 또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위조품이었다) 덩그러니 남아있다. 한 편, <사랑은 오류>의 ‘나’는 폴리에게 자신의 진심을 전달한다. 하지만 폴리는 ‘나’의 진실 된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오류를 찾아내며 ‘나’의 사랑이 거짓이라 반박한다. 그리곤 폴리는 ‘나’가 가르친 논리학과 ‘나’가 폴리와의 데이트 대가로 피티에게 준 너구리 털 코트 두 가지를 모두 챙기고 떠난다. 반면 그녀를 얻기 위해 희생한 ‘나’는 결국 그의 사랑도 인정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외 어떤 것도 얻지 못하고 끝이 난다.
버질과 ‘나’ 모두 자신만의 논리, 즉 버질의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는 논리, 그리고 ‘나’의 오류를 식별해내는 논리를 맹신하고, 또 자부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사랑’이란 감정 앞에서 무너졌다. 이벳슨이라는 작품에 자신의 모든 것이라는 ‘베스트 오퍼’를 건넨 버질. 그가 진품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사랑은 ‘위조’였다. 물건의 진짜, 가짜 구별에는 도가 튼 버질도 그녀의 사랑이 진품인지 가품인지는 구별해내지 못했다. 또한, ‘나’가 폴리에게 전달하려는 진실 된 사랑의 고백은 모두 ‘오류’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인가? 어째서 사랑은 논리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일까? 왜 논리로 사랑의 참, 거짓을 판별하지 못하는 것인가? 위조된 사랑을 참된 사랑으로 오해하고, 참된 사랑에서 오류를 발견하여 거짓으로 판별하는 모순적인 상황들의 연속. 이 모순들 가운데서도 참인 것은 버질의 이벳슨에 대한 사랑과 폴리에 대한 ‘나’의 사랑이다.
그런데, 이것들이 진짜 사랑인지는 또 어떻게 단정 지을 수 있는 거지? 이래서 사랑은 오류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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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youngcha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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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로부터 받은 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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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youngcha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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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는 향수같은 사람이다. 처음 만났을 때 느껴지는 다소 차갑지만 묵직한 깊은 화이트머스크와 우드계열 등 중성적인 탑노트로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와 얘기를 나누다보면 잔망스럽기도 하고 소녀스럽기도 한 귀여운 그녀를 볼 수 있다. 장난스러우면서 수줍은 송곳니 보이는 미소는 그녀의 필살기가 아닐까 싶다. 마치 복숭아와 시트러스 큐컴버 계열, 하지만 너무 달달하진 않은, 딱 깨끗한 과일향만 빼온 뉴트럴하지만 페미닌한 미들노트. 아무튼 윤희를 만나고 나면 헤어지고 나서도 그녀와 나누었던 기억들이 며칠이고 여운이 남는다. 마치 우려낸 티백처럼, 다소 연하지만 언제 맡아도 편안하고 오래 가는 그런 향이다.
우리 둘 중에 하나가 남자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뭔가 영화 러브 순한맛 한 편 정도는 찍었을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윤희는 내가 만나본 사람 중 가장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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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youngcha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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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앙스 프랑세즈와 함께하는 서울 남산타워 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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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youngcha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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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차현영 인생 투쟁 26주년
올해도 소중한 사람들로부터 생일 축하 연락을 많이 받았다. 고맙고 소중한 사람들. 언제나 생일을 축하받는 건 기분이 좋은 일이다. 그런데 생일이 뭐라고. 태어나는 게 뭐라고. 사실 나는 부모님의 번식활동에 의해 태어났고, 그래서 사는 것일 뿐이다. 즉, 내게 인생에 대한 의미나 절대적 이데아는 없고, 실존 자체가 존재의 이유다.
하지만 이미 태어난 것, 생존하기 위해 열심히 살며 행복을 찾는 니체의 능동적 허무주의를 따른다. 같은 맥락으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내 인생 최고작품이기도 하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생일을 축하하고 축하받고 기분이 좋은 이유는 단지 우리가 태어난 일을 축하하는 것이 아닌, 태어난 이래로 또 다른 한 해를 열심히 살아왔다는 “생존, 투쟁 xx주년” 차원의 축하가 아닐까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그래서 축하받는 것도 기분이 좋은가보다. 그래 현영아, 이번 일 년도 잘 버텼다. 이번 해에도 열심히 생존하자. 또 다른 일 년의 투쟁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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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youngcha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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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하는 버릇이 있다면
그리스 신화에서 저승까지 찾아가 아내 에우뤼디케를 구해내는데 성공한 오르페우스에겐 반드시 지켜야 할 금기가 주어집니다. 그건 저승을 다 빠져나갈 때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지요. 그러나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속 설명에 따르면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에, 그녀가 포기했을까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는 그만 뒤를 돌아보고 맙니다. 이로 인해 아내를 데려오는 일은 결국 마지막 순간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지요. 구약 성서에서 롯의 아내도 그랬습니다.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가 불로 심판 받을 때 이를 간신히 피해 떠나가다가 신의 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소금 기둥이 되었으니까요. 금기를 깨고 뒤돌아보았다가 돌이나 소금 기둥이 되는 이야기는 전세계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탐욕스런 어느 부자의 집이 물로 심판 받을 때 뒤돌아본 그의 며느리가 바위가 되고 마는 충남 연기의 장자못 전설을 비롯해 조금씩 변형된 형태로 여러 지방에 전해져 내려오니까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 역시 비슷한 상황에 놓입니다. 기상천외한 일들이 벌어지는 신들의 나라에서 돼지가 된 부모를 구출해 돌아가던 소녀 치히로는 바깥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에 놓인 터널을 지나는 동안 결코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는 거지요. 그런데 왜 허다한 이야기들에 이런 ‘돌아보지 말 것’에 대한 금기가 원형(原型)처럼 반복되는 걸까요. 그건 혹시 삶에서 지난했던 한 단계의 마무리는 결국 그 단계를 되짚어 생각하지 않을 때 비로소 완결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르페우스처럼, 그리움 때문이든 두려움 때문이든, 지나온 단계를 되돌아볼 때 그 단계의 찌꺼기는 도돌이표처럼 지루하게 반복될 수 밖에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소금 기둥과 며느리 바위는 그 찌꺼기들이 퇴적해 남긴 과거의 퇴층 같은 게 아닐까요. 류시화 시인은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라는 시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더구나 나를 뒤돌아본다는 것이/싫었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나였다/다시는 세월에 대해 말하지 말자”고 했지요. 정해종 시인도 ‘엑스트라’에서 “그냥 지나가야 한다/말 걸지 말고/뒤돌아보지 말고/모든 필연을/우연으로 가장해야 한다”고 했구요. 그런데 의미심장한 것은 치히로가 그 힘든 모험을 마치고 빠져 나오는 통로가 다���가 아닌 터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두 개의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엔 다리와 터널이 있겠지요. 다리는 텅 빈 공간에 ‘놓는’ 것이라면, 터널은 (이미 흙이나 암반으로) 꽉 차 있는 공간을 ‘뚫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리가 ‘더하기의 통로’라면 터널은 ‘빼기의 통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결국 삶의 단계들을 지날 때 중요한 것은 얻어낸 것들을 어떻게 한껏 지�� 나가느냐가 아니라, 삭제해야 할 것들을 어떻게 훌훌 털어내느냐,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막 어른이 되기 시작하는 초입을 터널로 지나면서 치히로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들을 몸으로 익히면서 욕망과 집착을 조금 덜어내는 법을 배웠겠지요. 박흥식 감독의 영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서 사랑이 잘 풀리지 않을 무렵, 윤주는 봉수를 등지고 계단을 오르면서 “뒤돌아보지 마라. 뒤돌아보면 돌이 된다”고 되뇌지만 결국 뒤를 돌아 보지요. 그러나 그렇게 해서 쓸쓸히 확인한 것은 봉수의 부재(不在)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마음이 아파도 뒤돌아보지 마세요. 정말로 뒤돌아보고 싶다면 터널을 완전히 벗어난 뒤에야 돌아서서 보세요. 치히로가 마침내 부모와 함께 새로운 삶의 단계로 발을 디딜 수 있었던 것은 터널을 통과한 뒤에야 표정 없는 얼굴로 그렇게 뒤돌아본 이후가 아니었던가요. -이동진 평론가의 글을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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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youngcha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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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youngcha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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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lancholia, Lars von Trier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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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youngcha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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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내 식습관은 아주 좋아졌다. 나의 건강을 위한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는 언니께서 축산업 낙농업이 야기하는 동물윤리적, 환경적 문제에 대해 공유하신 포스트를 주의 깊게 보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즉, 나, 인간의 건강을 위한 것 보다는 환경, 동물들을 위한 것이다. 
사실 인류애보다는 인류를 제외한 동물에 대한 애정이 더 크다. 그래서인지 작년 후반부터는 대학교시절부터 행해온 유니세프 정기후원을 끊고 그린피스로 갈아탔으며, 화장품을 살 때도 동물실험을 하지 않으면서, 화장품 재료가 모두 “베건” 옵션을 가지고 있는 토끼로고가 박힌 제품만을 사도록 노력하고 있다. 한 번은 인간이 인간만을 위해 어떻게 철저히 이기적으로 동물을 이용하고 버리는지에 대한 영상을 봤는데, 우리가 마실 우유를 생산하기 위해 소의 배에 구멍을 뚫어 관으로 연결시키며, 우리 눈에 바를 마스카라를 생산하기 위해 토끼의 눈에 칠 백번의 시험용 마스카라를 발랐다. 그 후 토끼는 실명됐고, 바로 쓰레기통으로 버려졌다. 우리의 식탁에 올라가게 되는 동물들은 좁고 비위생적인 열악한 공간에서 태어나고, 한 번도 제대로 된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죽는다. 죽는 것도 말이 “죽는다"지, 영상을 보면 인간이 어쩌면 저렇게 잔인하고 매정하게 생명을 다루고 죽이는 지 숨이 멎을 정도다. 축산업의 경우에는 이산화탄소로 인한 환경 문제 또한 심각하다. 
물론 칸트처럼 예외없이 살기는 힘들 터이다. 나는 유혹에 약하고, 유기농 제품만을 소비하기엔 수입이 없는 학생이며, 원체 유제품과 고기를 너무 좋아하고, 또 여태 써온 내 피부와 잘 맞는, 하지만 동물실험을 하는 화장품들을 포기하고 새로운 화장품을 찾으려기에는 내 의지가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윤리적 소비를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눈 가리고 아웅하기식으로 방종하는 것보다는 더욱 가치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 모두가 우리 식습관에 대해 더욱 고민하고 쓰레기를 만들지 않도록 소비패턴에 더욱 신경쓰기를 권유한다. “고기를 먹지 말자!"가 아니라, "세 번 먹을 거 한 번만 먹도록 노력해보자"이다.

인류는 농경사회 시절부터 동물들을 지배해오기 시작했다. 산업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인구가 급격히 늘었고, 방대한 인류의 육식소비 수요에 대응하고자 동물농장이 아닌 동물공장 시대가 찾아왔다. 화장품 또한 생활용품이니 수요가 늘었고, 단지 인간을 위한 안전성 테스트를 위해 마트에 진열되기 전에 무고하게 희생되는 셀 수 없는 강아지와 토끼, 쥐들이 그렇게 죽어나가고 있다. 고기 소비를 정말로 우리 식습관과 떼놓기 힘들다면, 화장품 사용을 중단하기 힘들다면, 적어도 우리가 동물들에게 얼마나 잔인한 짓을 하는지, 그들의 터전을 얼마나 망가뜨렸는지에 대한 냉정하고 숨김없는 성찰을 하고 나서 우리의 소비패턴을 바꾸도록 매일 생각하고 사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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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youngcha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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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랑 오빠는 이전부터 식물을 사랑해왔다. 엄마는 우리가 어렸을 적부터 심심할 때마다 식물원이나 일산 똥거름내 물씬 나는 허허벌판에있는 화원엘 데려가시고 흙과 화분, 그리고 식물을 사셨다. 중학교 1학년 때 과학탐구활동 주제는 엄마의 지도 하에 친환경 미생물, em효소가 양파 성장에 미치는 영향으로 정했고, 나와 오빠는 모두 전교 대상을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키웠던 제라늄은 아직도 우리 집 베란다에 있고, 고등학교 때 혹시 몰라 심어본 먹고 남은 아보카도씨는 열매는 못 피워도 잘 자라고 있다. 
재작년에는 어떤 기계를 샀는데, 음식물 쓰레기를 그 기계에 넣으면 쓰레기가 잘게 분해되고 어떤 원리에 의해 질 좋은 거름으로 만들어졌다. 우리는 그걸 큰 스티로폼 박스에 모아두고 베란다 정원의 거름으로 썼다. 하루는 기계가 완벽히 제기능을 하지 못한 것인지, 감자가 제대로 분해되지 않았나보다. 언제부턴가 그 영양가득한 거름 안에서 감자 싹이 트기 시작했고 이제는 꽤 커져서 우리가 따먹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나도 이제는 베이비 타샤의 레벨에 들어섰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급 화분 3 개를 꾸준히 관리한 적이 있었다. 화분 중에 하나는 선인장과였는데, 담임선생님께서는 이전에 선인장에 꽃을 피우게 잘 관리한 학생이 있었고, 그 학생은 결국 좋은 대학교를 갔다며 나보고도 잘 키워보라고 하셨는데, 내 때는 결국 꽃은 보지 못했다ㅎ.. 그래도 말 못하고 항상 그 자리에 있는 한 생명을 오랜 기간 책임지고 관리하는 것은 어리고 철없던 내게 꽤나 큰 성취였다(물론 지금도 철이 없다). 
작년 겨울에는 집들이 선물로 프랑스와가 동백을 가져왔는데, 고등학교 때가 생각나서 꽃을 꼭 피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날 식물관련 책도 사고 반나절간 식물에 대해 공부했던 것 같다. 식물은 동물보다 꽤나 더 흥미롭고 가치로운 생물이다. 적당한 물과 일조량만 있다면 무럭무럭 자라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적당한"이라는 게 식물마다 달라서 무조건 물을 많이 준다고, 햇빛을 많이 쬐어준다고 만사가 해결되는 것은 또 아니었다. 바질같은 건 수경재배를 해도 될 만큼 물과 햇빛을 좋아하지만, 동백은 다소 그늘지지만 햇빛이 어느정도는 있는 곳에서, 물은 흙에 손가락을 푹 집어넣었을 때 2-3센치정도가 바싹 말라야, 흙의 밑부분이 잠길 때까지 한번 크게 주고 다시 놔둬야 한다. 동백을 잘 이해하고 가꾸었더니 지금은 아름다운 꽃을 10개나 피웠다..! 아주머니가 키우시는 죽어가는 아레카야자 또한 과습으로 죽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하여, 이미 갈변한 잎들을 정리하고 3주간 물을 주지 않고 화분을 그늘진 곳으로 옮겼더니 지금은 새로운 싹까지 나서 아주 잘 살고 있다. 엄마의 피를 물려받았나 보다.
 지금은 작은 산세베리아도 키우고 있다. 산세베리아도 선인장과이기 때문에 잊을만 할 때 물을 줘야지, 그렇지 않으면 과습으로 죽는다고 한다. 그런데 참 재밌는 것은 이런 다른 특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식물들은 바람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일조량과 습도가 좋아도 통풍이 되지 않는다면 식물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신선한 공기는 산소건 이산화탄소건 동물과 식물에게 필수불가결한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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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youngcha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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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 슈슈의 모든 것>
아오이유우의 필모그래피를 보았더니 이 작품이 리스트에 있더라.
게다가 며칠 전 본 아오이유우 주연의 ‘하나와 앨리스’ 작품 감독 이와이 슌지의 또 다른 작품
매일 자기 전 가벼운 영화 한 편 보는 나는
시놉시스도 보지 않은 채 ‘하나와 앨리스’의 조금 더 멜로스러운 분위기의 영화겠지 하는 마음으로 감상했다가 
결국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아니 힘겹게 눈을 감을 때까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간만에 정말 멜랑꼴리해지는 영화 봤다. 
(굳이 비슷한 분위기의 영화를 꼽자면 소피아코폴라 감독의 ‘처녀 자살소동’과  토니케이 감독의 ‘디태치먼트’, 그리고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 정도를 들 수 있겠다.)
두 번은 더 보아야 완벽히 이해할 것 같은 이 영화.
자세한 서평은 그때 가서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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