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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aeyeong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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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적인 나의 상태를 글로 가두어버리고 나면 금방 지나갈 바람결을 핑계 삼아 오래도록 그렇게 살아버릴 것 같았다. 때문에 잠시동안은 글을 쓰기를 꺼렸지만, 그래도 왠지 오늘은 써도 될 것 같아서 쓰는 이야기. 이런 증상이 있으니 우울증이었다, 이런 증상을 보니 번아웃이다, 투의 글을 (내가 쓰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내가 잠시 그랬을 뿐인거지, 내가 늘 그런 아이는 아니니까.
아무튼 꽤 오랫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맹세코, 삶의 질을 높이는 어떤 일도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늘 설거지가 밀려있고 청소기는 일주일에 한 번도 돌리지 않을 때도 있었다. 환기를 하러 가는 그 발걸음이 귀찮아 집�� 늘 퀴퀴했고, 빨랫감은 쌓이다 쌓이다 빨래 바구니가 버티지 못할 때에야 한 번씩 돌렸다. 잘 챙겨먹는 척 했지만 무엇을 먹든 먹자마자 소화제를 들이붓는 유구한 전통이 다시 찾아와 먹는 즐거움도 느끼기 힘들었다. 손에서 휴대폰을 뗄 수가 없었다. 일어나자마자 폰을 집어 들고 무엇이든 틀어야했다. 이를 닦을 때에도, 심지어 머리를 감느라 보지 못할 때에도 소리로라도 들어야 했다. 아무 일도 안 했지만 그렇다고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제일 싫었던 건 적막이었던 건지, 단 한 초라도 조용한 집을 견딜 수 없었다.
밥 먹는 건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곧 토해내거나 억지로 밀어 넘길게 뻔한데 맛을 느끼는 건 감흥이 없었다. 그래서 먹는 것은 그저 또 하나의 일이었고, 내 눈과 귀는 무슨 내용인지도 모를 영상에 가 있었다. 당장 내일만 되더라도 뭘 봤던 건지 기억도 없지만, 그래도 그냥 봤다. 티비를 틀어놔도 결국 티비 소리는 배경음이 된 채 휴대폰에 의미 없는 스크롤질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냥 그 정도의 힘만 남아 있었다.
유일하게 놓지 않았던 것은 일이었다.
일은 했다. 꽤 열심히. 그러니 더 대비가 심해져만 갔다. 내 일상은 철저히 파괴당하고 있는데, 나는 무슨 의미로 일을 대하고 있는 건가. 뭔데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나. 일을 하면서 얻는 성취가 그나마 내 악취를 감춰주고 있다고 생각했나. 아무튼 이건 다 지나온 나의 추측이고, 그때의 나는 생각이랄 게 없이 일을 했다. 가장 몰두할 수 있는 것에 몰두했다. 일을 다 하고 나면, 정말 배터리 꺼진 장난감처럼 어딘가에 푹 퍼져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열 번도 더 했을 청소를 시작도 못한 채로 쇼파에 누워 이 시간이 허무하지 않은 척 하느라 부지런히 휴대폰을 뒤져가며 그렇게 허투루 보냈다.
누구보다 운동을 해야 하는 몸인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럴 힘이 없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나보다. 여기서 말하는 힘은 신체적인 힘일 수도 있지만, 일단 나는 심리적인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그때와 지금의 나는 표면적으론 달라진 게 없는데, 일단 어제오늘은 3km를 뛰고 왔으니까.
몇 년 전 일에 대한 슬럼프가 왔을 때가 있었다.
그땐 일에 대한 권태가 일상까지 스며들었고, 그 권태로움에 만취되어 있다 주거/주위 환경 등 주��을 바꾸는 방법으로 떨쳐냈었다. 내가 일명 코태기라고 부르던 그 시기보다 이번이 좀 더 당황스러웠던 이유는 일에는 별지장이 없던 탓이다. 일이 안 되거나 하기 싫었다면 더 빨리 눈치채고 무엇이든 해봤을 텐데. 오히려 아무것도 안 하니 하루의 전부를 일에 투자를 할 때도 있었다. 나쁘지 않은 몰입이었고, 그건 계속 나에게 일상을 대충 보내도 되는 근거가 되어줬다.
그리고 이 사태는 잠시 동안의 일이 아니라 거의 작년 초부터 올해 초까지 일 년이 넘게 차지하고 있던 사건이었으므로, 갑작스러운 계기를 통해 풀려난 것도 아니었다. 조용히 천천히, 내가 비정상적으로 일을 하는 시간을 줄이고 나를 다잡는 시간을 늘렸을 뿐이었다. 나쁜 습관은 하루 만에도 만들어지던데, 좋은 습관은 왜 이리도 길들이기가 어려운지. 아침에 눈뜨자마자 일어나는 것, 밥 한 숟갈에 다섯 번 이상은 꼭 씹어먹는 것, 누가 쫓아오지 않으니 급하게 먹지 않는 것, 저녁시간이 되면 컴퓨터 앞을 떠나는 것, 의미없이 티비를 틀어두지 않는 것, 씻을 땐 씻기만 하는 것, 영양제를 매일 챙겨 먹는 것, 눈 딱 감고 집 밖을 나가는 것. 남들은 어쩌면 의식 없이도 할 일들을 나는 부단히도 노력하며 습관으로 만드느라 곤욕을 치루고 있지만 어쨌든 지금의 나는 저것들을 행할 에너지가 생겼다.
그리고
늘 좋았던 적도, 늘 나빴던 적도 없었지만. 나로서는 힘들다고 툴툴 대거나 틈만 나면 펑펑 우는 나보다 그저 시간을 축내며 고요히 가라앉는 내가 가장 두려웠다. 밖에다 티를 내고 엉엉 울던 나는 살 의지가 있어 보였는데, 지난날의 나는 참으로 차분하게 썩어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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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aeyeong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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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
바란 것이 없던 덕분에, 만나는 행운마다 크게 기쁘고 놀라며 버틸 수 있었던 한 해였다. 봄에는 울었고 여름엔 웃었고, 가을과 겨울엔 표정을 지을 새가 없이 보냈다. 돌이켜보니 어쩌면 가장 여유롭게 보낼 수 있었을 해였는데, 결국 그러지 못했다. 이 또한 행운이다, 라고 여기기로 했다.
기록이 버거워서, 지난 날들과 마주하는 게 참 어려워서. 잊고만 있던 19살의 나를 오랜만에 꺼내보았다. 연봉이 2000만원만 넘기를 바라며 살던 아이, 월급의 반 이상을 저축하고도 미래가 잘 그려지지 않을 만큼 초조하던 아이, 어린애 치고는 잘 한다는 평가가 지워질까 눈치 속에 살던 아이. 그 아이가 그리던 미래는 그 시절의 나날보다 딱 100원어치 나은 삶이었다. 어쩌면 그런 나에게 지금은 그 자체로 선물인데. 사람 참, 덧없고 욕심 많구나 느꼈다.
코로나는 절망같았다.
다들 생계 자체를 위협받는 날들이었다. 그 속엔 내 가족도 당연히 있었다. 그들 중에 실질적인 출근이라는 것을 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다들 출근을 해야 했고, 서비스직을 가진 사람은 마스크를 쓰고 매일 고객들을 만나야 했다. 매일같이 불특정 다수를 만나야 했던 이는 가족을 본다는 것이 서로에게 버거워 ‘다음에, 다음에’ 그렇게 1년을 미루며 지내기도 했다. 그 속에서 나는, 코로나가 우리 삶에 침투했다는 사실을 가장 둔하게 느끼는 사람이었다.
의도하며 골랐던 직업도 아니건만 개발자란 직업은 특히 이 상황과 참 무관했고, 회사의 재정 상태에도 큰 영향은 없었다. 6년 전의 김애영은 상상도 못할 월급을 받고, 혼자서 방 3개를 돌아가며 ~청소할때마다 개빡친다~ 하루를 보낸다. 먹고 싶은 것들은 전날 주문해두면 다음날이면 현관 앞에 가지런히 와있고, 사고 싶은 것들 역시 이렇게 난리인데도 3일이 채 걸리지 않아 무엇이든 배송이 와있다. 각종 쓰레기 역시 대충 후드티만 걸치고서 내려가 버려두면 된다.
내가 코로나에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는 삶을 사는 동안 누군가는 매일 누군가의 생필품을 배달하고, 사치품을 배송하고, 또 누군가의 못난 흔적들을 치우며 산다. 또 누군가는 유일하게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가족을 부러워하며 직장을 나간다. 그리고 누군가는 전염병에 취약한 사업을 골랐다는 이유로 사업장을 접었다.
이 모든 혼란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가만히 있기 뿐이었다. 나가지 않아도 되는 축복을 잘 즐기기. 그 자리에 있기. 부러 나가려하지 말기. 뭐 물론, 내가 더 무언가를 할 수 있었다면 서슴치 않고 했을까? 하는 의문도 따라오지만.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더 큰 것들을 누리는 날들은 언제쯤이 오려나 싶었는데, 올해는 유독 내가 모르게 누렸던 것들에 의미가 생겨버리고, 또 가만히 읊조리게 되는 시간들이 많았다. 내가 더 큰 사람이 아님에 좌절도 하며, 그래도 가만히 머무를 만큼의 단단함에 감탄도 하며.
어제 저녁, 1년째 보지 못하는 작은 오빠와의 통화에서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잔뜩 힘이 빠져버린 목소리로 말하던 ‘좋겠다, 너는 진짜. 출근 안 해도 되는 거 말이야.’ 아무런 의도도 없이 흘린 그 말에 다급히 전화를 끊어야 했다. 미안해 라고 해야하는 건지, 맞아 다행이야 라고 해야하는 건지, 부럽지? 라고 해야하는 건지. 무엇을 말해도 틀린 답일 것이라는 생각에 웅얼대며 들어가라고 답했다.
누군가의 고통에 빗대어 내 행복을 들여다본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지만, 매번 스스로의 불행을 전시하며 만족하던 내가 이런 글을 써내려갔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퍽 대견하고 신기하다. 올해 내가, 무언가 콕 집어 말할 수는 없는 것들에 죄스러움을 많이 느끼며 살았나보다. 그저 꿋꿋하게 산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미안했었나보다.
올해는 시작부터 바라는 것이 없었는데도, 자꾸 무언가를 주고, 나아가 잃은 것 하나 없이 보존해준 삶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부디 내년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보고싶은 사람을 보러 갈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우리집 앞 울프커피와 쉼 카페가 여느날처럼 문을 열고 있으면 좋겠다. 문득 아픈 날에 병원 가려는 마음이 주저없어지면 좋겠다. 모두가 좀 웃으면 좋겠다. 그러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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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aeyeong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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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하지 않고 맞는 새벽은 아름답지 않다. 게으르고 찝찝하며 목마르다.
쉬이 잠들 수 없으며, 쉬이 덮을 수 없다. 불면은 반갑지 않으나, 숙면에 내던져질 용기는 더욱 없다.
빈틈이 가득한 하루 끝에 맞는 침묵은 고요하지 않다. 요란하고 어쭙잖으며 꿉꿉하다.
흐르듯이 살지 못하며, 차오르기엔 턱없다. 못내 망설이고, 끝내 내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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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aeyeong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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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것은 늘 한순간이다.
잘 조여놓았던 매듭이 풀리는 것은 일순간이다. 아니 그 매듭은 애초에 잘못 묶였기에 풀려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매듭 잘 매는 법 따위를 배우며 살았을 리가 없다. 일단 눈 앞에 놓인 것들을 대충 치우고, 묶다, 실패하면 버리며 살기 바빴다.
소용돌이는 늘 만들어진다. 내가 만든 것도, 누군가 준 것도 아니지만. 당신과 나 사이에, 우리가 존재했던 시간들과 공기 속의 조각들이 합쳐져, 못난 소음과 짙은 채색을 가진 소용돌이가 되어 예기치 않게 도달한다.
휩쓸리며 사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소용돌이에 그저 탑승하여, 휘몰아치면 휘도는 대로 그 바람 속에서 균형을 맞추며 사는 법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가끔은 추한 꿈을 꾸자. 나는 잠시 캔자스에 사는 도로시가 되어, 이 소용돌이에 휘말린 후에는 오즈에 갈지도 모른다고. 아마 이번이 마지막 고비였는지도 모른다고. 그런 추한 꿈을 꾸며 참자.
가끔은 추한 꿈을 꾸자.
가끔은 꿈을 꾸자.
결국 다시, 꿈을 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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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aeyeong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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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늘 나를 불안해했다
어디 가서 맞고 오지 않으면 참 다행이라고 했다.
어렸을 적의 나는 지금보다 더 겁이 없었다. 어릴 때의 집은 다세대 주택이었는데, 길목 길목이 좁고 허름한 동네답게 대문은 있으나 대문은 열어두는, 그러니까 보안이 엉망인 곳에 살았다. 생각해보니 모든 집이 열어두진 않았는데. 그냥 우리집이 이상했다.
가끔 그랬다. 하교 후 어딘가에서 시간을 보내다 집에 와보면 대문 앞 마당에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 두어명이 담배를 피고 있었다. 위아래 층 어디에도 고등학생이 사는 집은 없었는데. 나는 있는 힘껏 가재미 눈을 하고 “냄새나는데 남의 집에서 뭐하는거야 진짜” 라며 데시벨 조절을 한 후 우리집으로 부리나케 뛰어가며 “오빠!!!!! 오빠!!!!!” 까지 대사를 치곤 들어가곤했다.
집에 오빠는 없었다. 겁이 없다기보단 본인이 할 수 있는 한에서 불만 표출을 했던 듯. 아무튼 고등학생들은 그 이후에도 몇 번 담배를 피러왔고 나는 점점 더 대범하게 디스를 펼치다 어느날 쉬고있던 오빠를 진짜로 부름으로써 해결이 되었다.
엄마한테 뒤지게 혼났다. 집에 오빠가 없었으면 어쩌려고 불렀느냐,
매번 없었는걸? 이라고 답하면 더 혼날 것 같아 얼버무렸다. 대개 이런 식이었다. 길거리 흡연에 대한 인식이 많이 없었을 무렵에도 나는 내 앞에서 담배를 뻑뻑 피며 평화롭게 걷는 사람을 보면 참지를 못했다. 꼭 그에게 들릴 한두마디를 툴툴 내뱉고 눈으로 한번 스윽 갈긴 후에야 지나가는 성미를 가졌었다. 이 행동도 엄마 옆에서 했다가 너 그러다가 진짜 한 대 맞고 다니는 수가 있다, 는 피드백을 받았지만 고쳐지지 않았다. 결국 다 커서도 이런 분들께는 눈치주고 다닌다.
셀 수 없는 불편함을 가졌다. 횡단보도 정지선을 지나 횡단보도에 걸치거나 횡단보도 중앙에 세운 차를 보면 운전자 앞에서 사진을 꼭 찍고 다녔다. 이건 근데 서울보단 남양주에 살면서 더 습관화 되었다. 일정 구간의 동네가 단속 경계가 좀 덜하다보니 내가 사는 곳엔 무법처럼 다니시는 분들이 계시더라.
또 그 놈의 맞춤법은 아직도 지적하는 버릇을 못 고쳤다. 그래도 이건 이제 피드백이라는 이름 하에 필요한 경우에만 하려고 노력한다. 무슨 서비스를 쓰건 하나씩 불편한 게 튀어나와 리포팅을 해야 속이 시원하다. 받아들여짐의 여부를 떠나 유저 경험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 서비스는 더 이상 쓰지 않는 편이 되었다.
엄마는 아직도 가끔 묻는다. 요즘도 길가다가 담배 피는 사람에게 뭐라고 하고 다녀? 아니라고 하진 않지만, 걱정마 맞을 것 같으면 작게 말해, 정도로 답한다.
엄마 근데 고쳐지지 않을 것 같아. 어���을 때의 내가 어떤 교육을 받은 건진 몰라도, 말하고 싶은 건 참지 말라고 배웠나보더라고. 나는 덜 답답한 내가 가끔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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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aeyeon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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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순간, 느려버린 것 같던 날들
남들보다 이것도 저것도 느린 것이 잘못같았다.
배움도 느리고
회복도 느리고
하루를 마치는 것도 느리고
어쩌면 시작도 느리고
매 순간, 느려버린 것 같던 날들
빠르게 하려니 자꾸 넘어지고 아파서 뭘 어떻게 하는 건진 아직 잘 모르겠다. 수면유도제를 먹으면 빨리 잠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건 첫 몇알 정도였다. 밥을 어떻게든 잘 챙겨먹으려 애를 써봤는데, 위장장애는 생각보다 더 독한 녀석이라 먹는 것마다 체하게 했다. 안 먹으면 기력이 없었다, 먹으면 체해서 일을 못 했다. 꾀를 내어 점심시간에 밥 대신 초콜렛이나 모닝두부 같은 걸 먹으면 일은 했는데 내 표정이 어둡다고 했다.
개발에 대해서도 엄청 느려서 아직도 잘 못하겠다. 이제 방법이나 길을 모른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을 만큼 시간은 빨리 흘렀는데, 나는 여즉 여기에 있다. 아주 둔하고 멍하게.
속도같은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나는 그저 체기없이 삼시세끼 잘 먹고 잘 자는 게 꿈이라고 아무리 이야기하고 싶어도. 지금 내가 그 말을 하기엔 너무 구질구질하고 구차한 변명같아 보일까봐 할 수가 없었다.
아픈 걸 이겨내야 진짜 극복 아니야? 모르는 걸 악착같이 알아내야 청춘 아니냐? 해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아무도 해준 적 없는 말들이 마치 들어본 것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변명하려면 잘 살았어야하는 게 아닌가. 남들은 내가 기분 좋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보낸 오전을 잘 살았다고 봐주지 않을텐데,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틀어두고 밥을 두시간동안 꼭꼭 씹어먹은 오후는 더 별것이 아닐텐데.
내가 잘 살아야 내가 하던 행동들에도 가치를 부여받는 세상이던데. 이 변명거리는 나를 더 못난 사람처럼 보이게 하려나.
그런데 사실, 그게 뭐 큰 의미가 있나. 이 조잡한 변명들과 죄책감들을 고백하고 내가 편하면 그만일텐데.
‘맞아요! 나는 이렇게 대충 살았어요. 올해 나는 느릿느릿, 주변의 일들 하나하나에 모자람과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살았어요. 그 중에 가장 추했던 건 몸이 아팠던 거랍니다. 다들 정신력이 곧 체력이라던데, 내 정신력은 아주 저질이었어요.’
뭐 이렇게 막 나가볼까. 느리고 추한대로 봐주는 사람도 생기지 않을까. 정리되지 않는 파편들이 더욱 잠을 방해한다. 이 덧없는 글에 삼십분 단잠을 또 빼앗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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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aeyeon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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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
엄마와 내가 바꿔 태어났으면 참 좋았을 거라는 생각.
엄마는 꿈이 있었잖아. 노래를 참 좋아하던 열일곱 소녀였잖아. 지금도 나랑 티비를 보며 ‘저렇게 앉아서 노래하는 거 참 어려운 일이야, 호흡을 어쩜 저렇게 잘 내쉬니’ 하며 노래하는 이들을 바라보는 엄마 눈이 얼마나 반짝거리는 지 모��지. 가수가 되고 싶었는데 막둥이에 집안은 너무 엄해 감히 꿈도 못 꾸었다는 엄마 얘기를 듣는데 그렇더라고, 엄마가 나때 태어났으면 참 좋았을 걸.
엄마는 또 꽃을 좋아하잖아. 집에 온갖 꽃들을 키우면서도 그 많은 것들의 이름을 단 하나도 모르는 적이 없고, 시드는 꽃이 하나도 없잖아. 엄마가 가수를 하다 나이가 들면 꽃집을 했으면 참 좋았을 걸. 열일곱 소녀인 모습의 엄마 사진을 보며 늘 그런 생각을 했어. 저 예쁜 얼굴에 꽃을 쥐어주면 지금보다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을텐데.
또 엄마는, 커피도 참 좋아하잖아. 나는 아빠를 닮아 다방커피 믹스커피가 제일 맛나던데 엄마는 연한 아메리카노를 가장 좋아하지. 나랑 가끔 카페를 가면 분위기며 소품이며 하나씩 살펴보고 여기 커피는 또 다르다- 하는 엄마에게 미안하더라고. 나는 커피 별로 안 좋아하는데, 내가 엄마때 태어나 다방커피나 마실 걸. 엄마는 나때 태어나 카푸치노며 아포가토며 커피란 커피는 다 마셔보게 하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카페나 꽃집 중에 좋아하는 걸로 차릴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진짜 그래. 나는 별로 꿈도 없고, 남들 눈치도 사실 되게 많이 보는 아이라 옛날 사람들처럼 살았으면 잘 살았을 것 같아. 엄한 집이면 엄하게 자라서, 하라는 대로 일자리 찾아서 살다, 시집가랄때 시집가서 엄마를 낳아서 살았으면 나름대로 행복했을 거야.
그렇게 태어난 엄마는 미술이며 체육이며 바이올린도 배우며 자랐겠지. 엄마가 안 배워봐서 그렇지 어쩌면 체육보다 악기에 더 소질이 있었는지도 몰라. 그래도 육상선수 했던 실력은 어디 못 갔으려나?
엄마가 가수가 되고 싶다고 하면 보컬 학원도 보내주고, 꽃이 예쁘다하면 플로리스트 공부도 시켜주었을거야. 친구들과 커피도 마시고 노래방도 가라며 용돈도 줄텐데. 엄마는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는 것 참 좋아하잖아.
엄마. 다시 태어나면 우리 바꿔 태어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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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aeyeon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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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켜내지 못한 기억이다
왜, 그때 걔 있잖아. 그래. 맨날 싸우던. 응응. 쬐끄만 애랑 엄청 잘 생겼던 오빠. 그래 내가 맨날 거기서 잤다니까? 그 집 딸인 줄 알고 컸어 진짜.
가끔 일곱살인 나와 이야기가 통하던, 딱 그만큼의 철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종종 아들내미와 같이 김치를 거부하느라 혼이 나던 사람, 그러다가 낚시터만 가면 세상에서 제일 멋있어지던. 그 정도의 어렴풋함을 간직하게 해준 분이 있었다. 아, 그래, 내 인생의 첫 물고기를 낚아채던 순간에도 함께였는데.
어쩌면 청소년 시절보다 더 중요했을 그 어린 시절의 좋은 기억들을 억지로 꾹꾹 눌러담아준 사람들이 그들이었는데.
그 시절의 누군가가 아팠고, 떠났다.
말하자면 부연설명이 너무 길어야한다. 그 시절의 인연은 나에게 하나도 남지가 않았기에, 내가 왜 이토록 이들을 좋아��고 이 상황이 서글픈지를 길게도 설명해야한다.
근데도 그냥 오늘은, 내 주변은 아무도 모를 이 인연에 대해 주절거리고 싶었다. 내가 가끔 가족이 싫어질 때, 이 사람들이 내 가족이었으면, 하던 곳이었다고. 우리 집은 가족 사진도 침대도 내 방도 없었는데, 그 곳엘 가면 화목한 가족 사진도 온종일 발을 구를 수 있는 침대도 놀이방과 거실까지도 있어서 참 행복했었다고. 어린 시절의 김애영이 겪은 이상한 나라같은 곳이었다고.
내 인생에서 딱 한 번 앨리스가 되었던 순간을 오늘 내심 또 기억해두고 싶었다고. 그리고 고마웠다고. 뭐 그런 소용없는 말들을 어딘가에 남겨두고 싶었다.
술 한잔을 참 못하던 사람, 당신의 취미를 많이도 사랑했던 사람, 나의 부모와는 다른 따스함을 가졌던 사람, 부디 가시는 길이 평안하셨기를 바란다.
당신의 인생에서 자갈돌만큼의 기억을 차지하고 있는 누군가가, 바다만큼의 추억을 선물해준 당신께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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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aeyeon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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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행복하고 찬란한 때에
이토록 행복하고 찬란한 때에 죽고싶다는 생각을 한다.
잃을 것 하나도 없이 곤두박질 쳐버린 밑바닥의 삶을 영위하기 전에, 보다 아름답고 젊은 날에, 보다 눈부시게. 그렇게 사라져버리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아름다웠다.
오늘 아침의 햇살은 유독 잠이 많은 나에게 다정했고, 몇년만에 먹은 아침은 체기 하나없이 달았고, 새로 생긴 카페에서 아빠가 유일하게 맘에 들어 했던 바닐라라떼를 사주며 이달의 월급 중에 제일 잘 쓴 사천원이라는 생각을 했다.
헤어짐에 익숙한 우리에게 터미널에 선 버스는 오늘따라 반갑지 않았지만, 버스 안에서 덜덜 거리며 이어폰에서 흘러 나오는 노랫소리와 함께 눈을 곱게 감고 있던 이 순간에 나는 또 생각했다.
죽었으면 좋겠다.
그 옛날 저주스럽고 끔찍했던 순간들에게 빌었던 죽음과는 다르게, 이렇게 드는 생각은 감격스러운 죽음이었다. 오지 않을 줄 알았던 환희가 아니었나. 내 삶은 유달리 어둡고 좁은 줄 알았던 때가 있지 않았나. 그러던 순간들이 지나니 또 이렇게 볕이 드는 것이 참 웃기지 않을 수가 있나.
그러나 또 볕을 쬐어준 여름이 지나면, 겨울이 오겠지. 그 캄캄함을 견딜 힘이 또 있을리 만무할텐데, 이 쨍쨍한 햇빛 아래에서 이제 그만하는 것은 어떨까. 다들 왜 그리 볕도 없이 살다 겨우 빛 한번을 내려주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 굴레 속을 몇십년씩 살고 싶어하는 거지.
바로 지금, 다섯시간 즈음을 버스만 타야하는 순간도 아름다운 지금. 어쩌면 죽기 딱 좋은 순간이 아닌가.
오늘 같은 날이 또 올 것이 아니라면, 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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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aeyeon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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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 - 2017.12
올해는 어땠더라. 꽤나 괜찮았지?
사실 어떤 추억의 감정은 마지막 기억의 장면으로 결정된다는데, 오늘(12/31)이 한껏 즐겁고 만족스러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어.. 근데 정말 올해는 뭔가 바쁘고 복잡했어. 키워드라도 뽑아보면 정리가 되려나, 역시나 시작은 룩핀. 1월에도 여전히 룩핀을 다녔고.. 아 연애를 시작했고.. 어김없이 파이콘을 하면서 여름을 보냈고.. 나홀로개발팀을 겪고.. 6월쯤 이사를 오고.. 퇴사를 하고.. 올해는 작년의 하프를 뛴 나를 부러워하며 15km 마라톤을 뛰고.. 처음으로 해외 파이콘을 다녀오고.. 오사카까지 다녀오니 백수의 시간이 지나버렸고.. 리디에서 수습기간을 보내고.. 조카가 태어나고.. 어김없이 연말세미나를 맡고.. 조카 백일잔치.. 두 번의 콘서트.. 축하하고 웃을 일이 많던 와중에 마음으로 응원하던 가수가 별이 되고.. 연말답게 감기와 몸살과 식도염으로 삼주를 살고 나니, 놀랍게도 열두 달이 이렇게 다 간 거구나. 와.. 그렇구나.
룩핀
은 퇴사 후 짧게 쓴 글에도 적었지만, 배우고 얻은 것이 참 많은 그리고 함께한 사람들이 앞으로도 못내 그리울 그런 곳이었어. 요즘도 가끔 놓고 온 물건을 핑계 삼아 놀러 가는데, 그대로인 그곳이 참 좋아. 아 물론 더 잘 되고 있는 것 같아서 더 좋아.
연애
는 노코멘트. 잘 만나고 있으니까!
파이콘이랑 연말세미나
는 정말.. 어김없이 2년째구나! 내년에는 3년째가 되는 거야. 와, 같은 일을 세 번 정도 하면 마냥 관습적으로 하게 될까 봐 부러 하지 않던 것들도 있는데, 파이콘은 일단 3번째까지는 나를 믿어보기로 했어. 뭐, 나에게 실망할지도 몰라. 그러면 깔끔히 포기하려고. 그저 했던 대로 또 하는 것에서 찾는 의미는 없느니만 못할 테니까.
나홀로 개발팀 
후기는 여기에. 재미있었고 뼈가 되고 살이 된 시간이 분명하지만, 이 시기가 개인적인 건강이 가장 악화되었던 때라 사실 다시 겪고 싶진 않아. 허리가 아프면 왜 다리가 저리는 건지 몰랐는데, 이때 확실히 알게 되더라.
이사
늘 서울에서만 살던 내가 경기지역에서 출퇴근을 일 년 정도 하고 나서, 다시 서울로 온 게 6월이야. 좋더라. 그놈의 G 버스를 타지 않아도 되어서, 주말에 서울 좀 가려면 버스가 20분씩 기다리게 하지 않아서, 퇴근하고 집에 와도 여덟시가 안 되어 있어서. 모든 점에서 만족 중이야. 아 딱 하나 좋았던 점은 백수였을 때, 러닝 하러 나오면 동네 자체가 워낙 한적해서 그냥 어디든 뛰어다니기가 좋았어. 지금 집은 다 좋은데 경사가 심해서 페이스 유지하며 뛰려니 어려운 것 같아. 아 하나 더, 산책하는 강아지가 많은 것도.. 난 강아지가 무서운데 목줄 없는 개들이 너무 많아. 내가 무서워하는 걸 보면 주인이 크게 비웃기도 하더라. 크기에 비례해 무서워하는게 아닌데 말이야. 그럴 때마다 네 X 끼 너나 예쁘지,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라.
마라톤
은 올해에도 했어. 햇수로 삼 년째인가? 내년에는 누구든 꼭 끌어들여서 같이 하려고^^ 달릴 때야 어차피 혼자인 게 편하지만, 함께 있을 때의 그 에너지를 느껴볼 때가 되었지않았나 싶어.
해외 파이콘
은 참가한 그 자체도 참 좋은 경험이었고, 말레이시아라는 나라에 대한 첫인상도 잘 심어준 추억이 되었어. 꼭 다시 말레이시아에 가 보려고 해. 해외 파이콘은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다녀왔고, 간단한 참가 후기를 발표했어.
오사카! 
일본을 처음 가본 거였는데 예상대로 내 마음에 쏙 드는 곳들이 많더라. 싱가폴과는 다른 느낌인데, 싱가폴만큼 훅 들어온 곳이었어. 찍은 사진과 영상이 방대한데 정리작업을 시작하다 입사를 해버렸더니 그 상태로 올스탑 되어버렸어. 게으름은 그만 피워야 할 텐데 말이야.
리디
에 입사를 하고, 수습기간 3개월을 정말 훌쩍 보내었어. 아직 일은 재미있고, 이곳의 모두가 그렇듯 결국 나도 서비스를 열심히 사용하는 월급 반납기가 되어 가고 있어. 수습을 마치니 페이퍼 라이트도 받았어. 이건 정말 좋아 짱이야! 블루라이트 없이 페이퍼 읽다 잠드는 요즘이 참 행복해.
첫 조카였어 첫 조카!! 
내 생에 첫 조카!! 아가가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얼마나 설렜냐면 오사카에서 조카 줄 선물을 약 십만 원어치 정도 사고 돌아다니다 어느 역 화장실에 두고 왔는데, 몇 시간 후 돌아가보니 당연히 없는 거야. 그게 얼마나 서럽고 조카한테 미안한지 엉엉 눈물을 흘리다, 역무원이 급하게 (너가 잃어버린 게) 베이비웨어?!? 하고 묻는 바람에 그 눈물을 급히 훔치고 분실물을 찾으러 가니 조카 물품을 찾을 수 있었어. (오사카 썰은 대체로 이렇게 스펙타클해..) 일본 사람들 너무 착한 것 같아. 역무원 아저씨도 정말 고마워요..!
아무튼 그 바보같은 조카바보 고모는 요즘도 뭘 사줄까 고민하며 벌써 조카 집에 고모 흔적이 이렇게나 많음에 뿌듯해하고 있어. 야 조카 너... 나중에 나랑 좀만 더 놀아줘야 돼..? 초등학교 갔다고 쌩까는 거 없어...?
콘서트
는 매년 하이라이트 콘서트만 다녀왔는데, 올해는 아이유 콘서트도 다녀왔어. 사실 매일 듣는 노래를 말하라면 당연히 아이유 노래였는데, 왠지 콘서트는 망설여���더라고. 그러다 올해 팔레트가 취향을 저격해버리고 이 앨범 수록곡들을 라이브로 안 들으면 너무 후회할 것 같아서 다녀왔어. 정말 잘 했더라! 나새기 예매하길(난 실패했고 친구가 해줬어) 잘했더라!
아이유는 노래를 정말로 잘했어. 내가 알던 그녀보다 더 성량이 뛰어나고 감성이 깊어. 모든 노래를 그 노래의 분위기에 맞추어 불러줄 줄 알아. 목소리도 얼마나 섬세하게 바꾸어주는지, 내년에는 팬클럽도 하고 싶으니까 로엔은 보고 있으면 2기를 뽑아주도록 해.
하이라이트 콘서트도 재미있었는데... 윤두준 솔로 무대는 참 귀한 거거든? 그러니까 이거는 콘서트에서만 볼 수 있는 데다가, 솔로 무대라는것을 하게 된지 고작 두 번째인 거라 팬들이 여간 바라고 바라는 것이 아닌데.. 윤두준 무대만 유독 무대 내내 정육점 조명을 해주더라고. 결국 우리에게 남은 건 정육점 영상뿐이었어. 노래가 좋아서 망정이지 조명팀을 오래도록 원망할 뻔했어.
종현 
의 기사를 꽤 일찍 접했는데.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다가, 급히 걸려온 전화 속 친한 친구의 말도 안 되게 서러운 울음에 나도 같이 그의 죽음을 살갗까지 느낀 것 같아. 근데 그냥, 나도 참 우울의 깊이가 한없이 깊어지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 모든 것들을 다 생각하고 떠올리고 세상에 붙잡히려 해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택을 해야만 내가 편할 수 있겠다- 하는 그 상태. 그 상태는 우리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했잖아. 그 사람만이 가본 감정의 끝을 내 맘대로 넘겨짚고 무어라 할 수는 없겠더라. 그저 꽃 같던 사람으로 기억하면 좋겠다고, 내 메모장에만 적어뒀었어.
올겨울은 유독 감기가 지독했어. 
작년에 감기가 별로 안 와서 좋았는데 말이야. (물론 감기 대신 응급실을 갔었지만) 조카 백일잔치가 코앞인데 감기에 걸리면 격리를 당할 것이 뻔해서, 약도 꼬박꼬박 먹고 목에 수건도 두르고 유자차를 부어라 마셔라 먹어도 안 낫는 거야. 너무 억울한데다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서 결국 링거를 맞았어. 효과가 있던 건지 조카 백일잔치는 무사히 참석했는데.. 참석하고 며칠이 지나고 감기가 다시 왔어. 뭐야 이거 그냥 잠깐 백일잔치만 갈 수 있게 해줬던 건가? 싶을 정도로 어이가 없더라.
덕분에 매년 연말을 비워두고 있긴 하지만 (워낙 자주 갑자기 아파버리니까 약속을 잡아두고 아프다고 뒤늦게 취소하게 되는 게 너무 싫더라고) 이번 연말은 특히 초라할만치 자주 아픈 바람에 그나마 잡혀있던 하나의 약속까지도 취소를 했어야 했어. 다행인 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감기가 많이 나아진 것 같다는 거야. 정말 연말병인가봐 어유!
뭐, 요약하면 김애영스러운 한 해였던 것 같아. 언제나 그렇듯 잔병치레가 잦고, 덕질에 충실하고, 행복해지고 싶은 열망을 담아 여러가지 일들에 도전해보고, 또 달리고, 가족들과 함께 하고.
2018년에 바라는 게 하나 있다면, 싱가폴에 다녀오고 싶다. 그 덥디더운 습한 날씨 안에서 길을 헤매며 햇빛과 싸워대던 날들이 요즘 많이 그리워 :) 할 수 있으려나.. 내년엔 금전적으로 목표하는 바가 많아서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아, 길었다.
2017년 정리 끝!
사계절 모두 고마웠어. 내년엔 가을이 딱 하루만 더 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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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aeyeong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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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시작한 그 모든 것들
‘ 일단 가볍게 시작해봐 ’ 누군가는 백 번을 고민하고 시작했을 그 일을 나는 가볍게 시작했다. 비단 일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늘 그렇듯 앞뒤 가리지 않고 직진하는 것이 당연하던 시기였다. 뭐 지금 떠올려보면 인생에 가장 용감하던 시기였을 것이다. 누군가는 “도전 “이라고 표현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러가던 그 시기에, 나는 가장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었다. 당장에 커서 무엇이 될지 고민조차 없던 나이에 나는 장구를 배웠다. 장구를 배우니 북도 배웠고, 징도 쳐보라기에 배웠고, 그랬더니 꽹과리도 배웠다. 사물을 다 배우고 나니 앉아 치는 앉은 반 뿐만 아니라 선 반 가락에 눈을 떠 이리저리, 정말 티비 속에서만 보던 풍물 패처럼 옆구리에 장구를 맨 채로 공연을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뭐 장구만 배우던 것은 아니었다. 음의 높낮이만 있을 뿐 멜로디란 것이 없던 풍물놀이로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춤을 추겠다 욕심을 냈다. 거창하게 무엇을 하려던 게 아니라 그냥 단지 춤을 추고 싶었다. 동아리에 들어가 춤을 추고 대회를 나가고, 여느 학교가 그렇듯 학교 행사마다 무대에 오르는 것이 다인 나날들이었다. 분명했던 것은, 어린 날 내가 택하던 ���로운 일의 시작 조건에 재능의 여부는 중요치 않았다. 거창한 이유로 시작했던 적도 당연히 없었다. 또 그것을 깊게 익혔는지, 오래 배웠는지, 뭐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한 맥락으로 나는 별다른 이유 없이 그저 교복을 입지 않아도 되고 집에서 단 7분이면 도착하는 고등학교를 골랐고, 내 인생의 가장 초라한 한때를 책임지게 될 프로그래밍을 배우게 되었다. 17살의 김애영은 언제나 그렇게 시작했듯 개발에 소질이 있어 배우게 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다른 것들과는 다르게 시작하고 처음으로 배움을 버거워하고 주춤하고 또 뒷걸음질쳤다. 다시는 이 일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물러났다. 첫 직장을 사무직으로 얻어, 더��나위없이 무난하고 잔잔한 업무에 적응하는 마음 반, 심심하고 마음 이곳 저곳이 간지러워 그만 두고 싶은 마음 반으로 일년 반을 보내었다. 그리고 사표를 낸 나는, 일년 반의 경력을 이력서에서 지워버리고 개발직 신입으로 다시 시작했다. 어린 날 닥치는대로 도전했던 것들은 항상 나에게 그럴만한 가치와 재미를 주었기에 내 실력이 얼마나 향상되었든 상관없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개발은 아직 그런 것을 얻기도 전에 도망쳤다는 생각이 분명하게 들었다. 대체 내가 언제부터 이것 저것 재고 시작했다고, 제대로 뛰어들지도 않고 포기했던거지? 뭐 그런 생각이었다. 그렇게 뛰어든지 삼년째가 되어가고, 두 가지 정도가 확실해지고 있다. 나는 이 일에 있어서만큼은 서툴고 게으르다. 그리고 개발에 재능이 없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고작 시작 단계이기에 발 뺄 생각은 없다. 다 겪어보고, 이야 진짜 더럽게도 실력 안 느네, 싶을 때에 뒤돌아보면 되지 싶다. (뭐 그리고 사실 요즘도 내 할 일이 벅찬데도 가볍게 혹은 생각없이 시작하는 어떠한 것들이 잔뜩 있다.) 가볍게 시작한 그 모든 것들에게서 늘 생각치 못한 것들을 얻었듯이, 많이 얻고 또 배우고 또 깨지고, 그러고 나면 또 자연스레 거창하지 않은 이유로 다른 무언가에 도전해보고 싶지 않을까. 예를 들면 다리 180도로 찢기, 마라톤 풀코스, 누워서 돈벌기, 이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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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aeyeong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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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야기는 끝이지만
회사를 퇴사했다. 지금부터 써내려가는 것은 백수 7시간 차의 아무말. 일년하고도 삼개월을 함께한 룩핀의 막내가 탈출했다. 바로 오늘, 나의 마지막 출근날이 이렇게 지나갔다. 여느때와 다름 없던 출근길이었는데. 늘 똑같은 늦잠에 부리나케 집을 나서야 했고, 후다닥 지문을 찍고 들어온 사무실에는 모두가 일을 하고 있었고, 나는 그 사이에 자연스레 섞여 캘린더와 아사나를 보며 오늘의 할 일을 시작하게 되는. 당장 내일에라도 그러라 하면 그렇게 할만큼 자연스럽고 익숙한 나의 출근 풍경이었는데. 그 풍경은 오늘로써 안녕이다. 돌이켜보면 절대로 짧지 않은 순간들이었다. 정이란 것이 듬뿍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숱하게 지나간 순간들 중에 무언가를 콕 짚어내기가 아쉬우리만큼. 모두 하나의 이야기로 충분한, 하루하루들이었다. 그리고 정말, 정말로 즐거운 일년 반이었다. 젊고 밝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중에도 이렇게 활기찰 수 있음을 느끼며, 그 바쁜 와중에도 각자의 꿈을 좇아 노력하고 있음을 배우며, 또 때로는 실망하며, 또 때로는 실망주며. 마지막 퇴근길을 걷는 내내 그 모든 섭섭하고 미묘한 감정들의 굴레에 잠시 섞여있어도 괜찮을법한 그런 팀이었다. 그리고. 룩핀의 크롤러 담당으로 시작해 서버, 파트너, 정산 담당으로 끝나버린 이 이야기는 끝이지만. 그래도 참 좋았다고, 가는 것이 많이 아쉽다고, 지난 시간의 이야기들을 담은 추억을 선물해주는 사람들과 안녕을 하게 되어 다행이다. 백수는 오늘까지만 아쉬워하고, 내일부터는 푹 자고 일어나 점심을 먹으며 하루를 시작해보려 한다. 아 내일모레 파이콘이지. 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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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aeyeong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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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이 필요한 여행
‘나 지금 지쳤어, 완전.’
따위의 생각이 들어 떠나본 적은 없었다. 여행이란 것은 나에게 또 다른 숙제 같은 것이었기에, 온 마음이 지치거나 힘들 때에 굳이 아는 이 하나 없는 외딴 곳으로 갈 용기를 내는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낯선 곳에 혼자 똑- 떨어지고 나면 겪어야 할 일들이 생각보다 산더미이다. (그 짧은 여행기간동안에도) 언어의 벽에 부딪히고, 낯선 이에게 필시적으로 물어야 하는 일이 생기고, 차분하던 마음이 흐트러져 버리는 온갖 비상 상황.. 뭐 이런 것들을 겪고 나면 스스로의 한계점에 자주 마주치게 된다. 
그 한계라는 녀석은 내가 가진 세상 가장 수치스럽고 모자란 부분들만 모아 놓은 것 같기도 한데, 예를 들면 이런 경우였다. 
홍콩에 단 2박 3일로 떠난 여행, 하지만 나는 첫 날에 숙소까지에 오는 데에만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역에서 숙소까지는 단 5분 거리였다. 그리고 다음 날에 용기를 내어 나간 센트럴에서는 완벽하게 길을 헤매고 (헤매었다 생각지 않았다면 무엇이라도 보였을 그 곳에서) 아무것도 눈에 담지 못한 채 마음이 급해 동동거리다 이내 눈앞에 보이는 아무 가게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숙소에 돌아오기에 급급했다.
해서 나는 둘째 날에 길을 잃을 것이 두려워 아무 곳에도 가지 못했다. 이틀뿐인 여행을 그렇게 날렸다. 웃기게도 나는 차라리 숙소 근처에만 머무는 그 시간이 좋았다. 마음만은 편안했으니까.
여행을 하니 보인다. 내 겁과 어림짐작이 얼마나 깊게 베여있는지.
그렇게 일상에서는 만나지 못했을 벽에 부딪힌 후에는 되돌아보고, 하지만 토닥여주기도 하며 용기를 내어 주어 고마웠다 말해줄 시간이 필요하다.
때문에 시간과 돈이 허락함에도 떠나지 않는 시간들이 많고, 남들보다 많이 느리게, 또 게으르게 여행이란 것을 다니는 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다녀왔던 세부 여행 이후로 벌써 1년이 지나왔다. 나는 또 시간과 체력과 돈이 허락하는 그때에, 회복이 끝난 용기를 가득 안고 떠날 것이고 힐링 대신에 수많은 챌린지를 맞이하고 돌아올 것이다. 와서 또 몇 달을 끙끙 앓겠지. 여행 당분간 가기 싫어, 가기 싫어! 를 외치며.
흐흐. 곧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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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aeyeong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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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개발팀에 (Dev Alone)
그렇다. 나는 지난달 혼자였다. (정확히는 지난달부터 엊그제까지. 이제 아니다! 야호!)
개발팀에 나는 홀로 여자였고, 홀로 병역의 의무가 없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나를 제외한 두 명의 개발자들은 훈련소를 다녀와야했고 우리는 어떠한 자신감(!)으로 둘을 함께 보내기로 결정했다. 물론 다시 생각해보니 그 자신감에 내 자신감은 없었다.
나는 우리 서비스의 서버 개발자이자 어드민을 담당했지만, 서버를 온전히 맡고 있다고는 볼 수 없었다. 우리 서버의 기초적인 부분을 다져놓은 분은 따로 계셨고, 내가 뒤늦게 합류하여 거의 배워가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가끔가끔 문제가 될 때마다 나는 다소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편이었다. 함부로 구조에 대해 손을 대는 것이 무서웠고,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다. 또, PR을 리뷰없이 머지하는 일이 점점 줄어들면서, 코드 리뷰를 꼭 한 번은 받는 것이 습관화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 시기에 두 분은 떠나야했고, 나는 급히 혹 내가 모를만한 서버 이슈나 미처 손대지 않았던 (그러지 않아도 됐었던) 부분들에 대해 급히 배우거나 요점정리 당하고 있었다. 어느 날에는 나에게 직접 우리 서버의 전반적인 구조에 대해 그려보라 하기도 하셨다. 그들이 떠나기 한 달 전은 나를 향한 팀원들의 신뢰를 높히고, 내 스스로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한 달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럼에도 나는 나에 대한 믿음이 깊어지기 어려웠다. 막말로 그들이 없는 한 달간은 아무런 기능도 추가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뭐 어쨌든 두 분은 떠났다. 사실 두 분의 훈련소행이 결정된 직후에는 별 생각이 없어서 팀 슬랙에 훈련소 d-day 봇을 설정해두기도 했는데 (100 일 후에 개발팀은 1명이 됩니다! 라는 지금 생각하면 지 무덤을 지가 파는 봇이었다) 막상 입소날이 다가오자 머릿속이 하얘졌던 것 같다. 잘 다녀오세��~ 뭐 그런 말을 드리고, 가끔 가끔 룩핀 서비스에 대한 이슈가 생기면 편지를 써드릴 것을 약속드리고, 그렇게 두 분이 없는 한 달을 시작했다.
첫 날은 그냥, 모든 일이 나를 거쳐야 하는 점을 제외하고는 별 다를 게 없었다. 몰라도 물을 곳은 없었고, 개발팀 슬랙방은 조용했다. 커밋 알람도 내 알람만 울렸고, 모든 버그와 오류 이슈는 나에게 돌아왔다. 오후쯤이 되자 서비스 모니터링을 할 수 있는 사람도 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수시로 클라우드워치와 뉴렐릭을 챙겨보기 시작했다. 그건 정말 긴장이 가득했던 상태였던 것 같다. 느려지면 알람이 오는데도 마음이 편치않아 줄곧 차트들만 들여다보며 하루를 보냈다.
5일 정도가 지나고, 생각보다 서비스에는 별 이슈가 없었고, 나는 가만히 놀고 앉아 있을 수 없으니 어드민에 필요한 새 기능들을 추가해야했다. 기획서가 나오고, 하필 또 데이터베이스 마이그레이션이 필연적으로 필요한 기능이라 머리를 싸매야만 했다. 아무도 리뷰를 해줄 수 없는 PR이라니, 혼자 남는다는 나에게 누군가 추천해준 러버덕 디버깅을 떠올렸다. 책상에 올려진 피카츄 피규어와 대화를 시작했다. 
무슨 구조가 옳은 구조야? 이렇게 짜도 확장이 필요할 때 문제되진 않겠지? ㅇㅇ님이라면 어떻게 코멘트 달아주셨을까? 으악 이건 속도가 왜 이렇게 느린 거지?
평소보다 두 배는 더 오래 구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진이 빠졌지만 혼자 커밋하는 코드라니, 이건 정말 너무 악몽같았다. 결국엔 두 차례나 디비 구조를 바꾸고 나서야 PR 을 올릴 수 있었다. 올려진 PR 의 changes 를 들여다보며 또 다시 다른 개발자에 빙의해 리뷰하기를 수차례, 떠나간 두 분이 그리워지던 매순간이었다.
그래도 문제없이 코드 리뷰에 쩔쩔매던 그 순간은 꽤 평화로운 편에 속했다. 시간이 더 지나 꿀 같은 황금연휴가 다가오던 날이었다. 연휴가 이렇게나 반갑지 않을 수가 있다니. 나도 남들처럼 연휴를 맞아 놀러갈까 했지만, 남자친구에게 양해를 구하고 서울에만 있기로 했다. 난 이 상태로 맘 편히 어디도 갈 수 없어..ㅎ
나름대로 이 곳 저 곳 놀러 다니기도 하고, 쇼핑도 했지만. 연휴 내내 정말 노트북을 옆에 끼고 있었다. 긴장의 하루하루.. 다행히 서비스 이슈는 없었다. 괜찮나? 싶어 연휴 마지막 즈음에는 긴장이 많이 풀렸다. 두 분이 떠난 후 즐기던 간만의 휴식이었다. 와아!
가장 걱정스러웠던 연휴가 지나니, 어느정도 자신감이 붙었던 것도 같다. 서비스 모니터링을 간간히 하며 어드민 기능 개발에 더 열을 올리고 있었다. 두 분이 몇 주 후면 도착한다는 사실도 좋았다.
그리고 문제는 언제나 방심한 사이에 일어났다.
누군가에겐 이미 연휴가 끝났거나 혹은 거의 막바지였을 선거날 9일. 휴일답게 오버워치 경쟁전을 돌리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던 오후 9시 어느 분. 슬랙이 불처럼 울리는 것을 보지 못하고 경쟁전을 하고 있던 내 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팀 멤버였다. (촉이 와~ 단번에 느껴~) 이건 서비스 장애임이 분명했다. 전화를 받으니 서비스가 죽진 않았는데 모든 결제가 안 된다는 거였다. (후일담은 생략..)
이슈는 문제 발생 후 1~2시간 이내로 해결했지만, 그 끔찍했던 2시간을 결국은 겪어야 했다는 사실이 굉장한 우울함을 몰고왔다. 잘잘못을 따지기 애매한 문제였지만 그래도 내가 좀 더 구조적으로 면밀히 살펴볼 생각을 했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을까. 뭐 그런 생각들이 몰아온 우울감이었으리라.
뭐 위의 이런저런 일들로, 두 분의 컴백을 일주일 하고 조금 더 남겼을 무렵, 나는 또 긴장감 100%의 홀로 개발팀으로 돌아와버리고 말았지만. 밖에 남은 우리에게 한 달은 다소 짧은 시간이었는지, 어느샌가 두 분은 다음주 월요일이면 출근을 하신다. (개발자 중 한 분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1년 같은 1달 이었다고 하셨다......)
한 달간의 ‘나홀로 개발팀' 생활이 끝이 났다. 이 결론을 쓰려고 이 두서없는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나보다. 확실히 혼자일 때는 함부로 짠 코드가 생기는 건 아닐까, 구조적으로 잘못 짜는 건 아닐까, 하는 평소보다 더 깊은 고민들을 많이 하게 되는 시기였다. 이러다 혼자서는 아무리 짜내도 결론이 나지 않을 때에는 주변 개발자 동료들이나 남자친구에게 의견을 묻기도 했다. 주변 친구들부터 시작해 대부분의 지인들이 개발자들이라 정말 다행이었다 8ㅅ8 !  
또 서비스의 모든 장애와 이슈를 혼자 감당하게 되다보니(클라이언트 이슈 : 내가 못 고침ㅠㅠ, 결제 이슈 : 보면 PG사 문제임ㅠㅠ) 가끔 당황스러웠던 순간도 있었지만, 마침 작은 사무실로 팀원들끼리만 잠시 나와서 있다보니 REAL 스타트업이 된 기분과 전 직장에서 처음 시작할 때 대표님과 개발자 김애영(안드도 서버도 웹도 잘 하는 거 하나 없지만 일단 다 하던 그 시절), 이렇게 직원 둘만 있던 시절이 떠올라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로는 원래 하루하루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분명히 하기 위해 개인용과 회사용 구글캘린더를 쓰는 편이었는데, 혼자 감당하는 한 달간은 캘린더 작성이 정말 소홀했다. 무슨 말을 덧붙여도 이는 변명일 것이지만, 돌이켜보면 하루하루가 정말 정신없이 흘러갔던 것 같다. 개발팀이 셋이었을때는 내 아침을 시작할 시간과 저녁을 정리할 시간이 존재했다면, 이 한 달간은 뭔가 물리적인 시간이 존재했어도 심리적으로 그 시간을 여유롭게 쓰지 못했다고나 할까. 내 멘탈에 대해 아쉬움을 느꼈던 대목이면서도 다시 한다면 안 그럴 수 있을텐데! 하고 느끼는 부분이었다.
뭐 아무튼, 이제 내일이면 개발팀이 셋이 된다! 야호! 한 달 간 보고싶었습니다 여러분 8ㅅ8
P.S. 혹시 나와 같은 나홀로 개발팀을 겪는 분이 생긴다면, 힘내세요.... 한 달은 생각보다 빠르게 흐를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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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aeyeong · 9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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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날 때만 적어둔 일기 in  세부 [1]
2/19 인천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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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 5분 비행기는 8시 10분에 겨우 탑승을 시작할 모양이다. 아마 같은 탑승구를 먼저 쓰고 있는 대한항공의 항공기가 뜨지 않아서인 모양인데, 듣고 보니 한 승객이 탑승을 안 한 모양이다. 본인 하나로 본인 비행기 뿐만 아니라 그 뒤, 또 그 뒤 항공기까지 연착이라니. 그 승객 챙기려고 끝까지 출발 안 한 대항항공 고집도 어지간하다 어지간해.
2/19 - 2/20 로 넘어가는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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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에 도착했다. 새벽 한 시가 다 되어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세부 시간으로는 열 두시가 조금 넘었나보다. 비행기 안에서 여유 부리다 입국 카드, 세관 신고서 등등을 작성하지 않아 부랴부랴 작성하면서 내리고, 결국은 뒤에 오던 한국인 여자들에게 물어물어 겨우 심사 전에 작성을 완료했다. 그리고 라마스파를 겨우 찾아 기다리는데 일행이 안 오는 거다. 얼굴도 처음 보는 남자(드라이버)와 차에 앉아 가만히 기다리다 연락을 받고 공항으로 가보니 아까 세관 신고서를 물어보았던 여자들이었다. 아마 환전을 하느라 늦은 것 같았다. (왜...?) 차를 타고 오며 보홀에 들어가고, 나는 체험다이빙 그쪽은 어드밴스를 따러 간다는 걸 알았다. 뭐 그 정도. 긴 이야기는 나눌 수도 그럴 힘도 없었다.
2/20 라마스파
환전한 돈을 받고 유심도 끼우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마사지를 받는데 괜히 스트롱이라고 하여 잠이 홀딱 달아날 만큼 아픈 마사지를 받았다. 그러다 결국 살살, 로 강도를 낮추었으나 겨우 누워 잠드려던 나를 일으켜 스트레칭을 시키는 마사지사에게 졸려, 자고싶어, 라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에어컨도 조절할 수가 없는 수건이 전부인 마사지 침대에서 잠들었다. 아니 못 잘 줄 알았는데 누군가 날 불러서 일어나보니 여섯시 반이었다. (와중에 휴대폰 충전도 하고 잤다 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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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눈꼽만 떼고 보홀로 들어가는 배를 파기 위해 피어1으로 향했다. 라마스파에서 8시 배를 타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터미널 피로 25페소를 내고, E 티켓을 건내고 티켓을 발급받고, 짐 붙이는 데 또 50페소를 내니 여덟시가 되려면 20분 정도 남았다. 무얼 사 먹을까.. 하다가 그냥 관뒀다. 터미널을 한 번 둘러보다 조금 기다리니 배에 탈 시간이었다.
2/20 오션젯 (세부 -> 보홀)
그런데 왜 난 몰랐지. 오션젯 배는 더럽게 춥다. 내가 앉은 자리는 사방팔방에서 에어컨 바람이 불어왔다. 오돌오돌 떨며 겨우 가디건과 가방으로 다리를 보호하고있는데, 단체 관광객 중 한 아저씨가 본인 일행들과 같이 앉고 싶다며 자리를 바꿔 달란다. 창가 쪽 자리로 바꿔주었는데 오, 에어컨이 덜 온다. 다행히 많이 오돌거리지 않고 보홀에 도착했다. 가는 길에 바라본 창 밖의 바닷물은 예뻤고, 하늘은 파랬다. 나는 예쁜 세부를 만나고 가는 길이었다. 도착한 그 곳에는 더 많은 예쁨들이 있을 것 같았다.
2/20 보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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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하자마자 부두에서 본 보홀은 와아, 예뻤다.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이 놈의 눈치병 때문에 찍지 못하고 바로 출구로 나왔다. 출구로 나와 마이웨이하듯 트라이시클을 타고 게하로 왔는데, 아 인터넷을 찾아보니 100불 더 주고 택시로 온 사람도 있던데 흥정을 좀 할 걸 그랬다 싶었다. 그래도 뭐 300불로 게하에 도착했으면 잘 도착했다 스스로를 토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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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숙소는 레게 풍이 가득한 곳. 내가 꽤나 무서워하는 커다란 개가 반기고, 나를 귀여워하는 건지 웃겨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현지언니가 나를 반기고, 또 살짜쿵 경악스러운 위생 상태의 숙소가 나를 반겼다. 숙소 자체는 느낌있고 참 예뻤는데, 아직까지는 “청결하지 않은” 여행을 할 준비가 되지 않은 나에게 살짝 벅찬 느낌의 숙소였다. 그 중에 최고는 단연코 화장실, 샤워실...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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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바로 일정이 있었으니 얼리체크인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체험 다이빙 준비를 했다. 태어나 물에서 물장구라는 것을 쳐본 적이 없는 세상 최고 “콜라병” 이었지만 세부에서 미리 먼저 다이빙 자격증을 따고 다음 단계를 준비 중인 친구에게 권유를 받아 체험 다이빙을 신청해놓은 터였다. 이 때의 나는 이 다이빙이 내 여행에 어떤 우울함을 안겨줄지 상상도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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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aeyeong · 9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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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뜻 없이 보내는 오늘도 참 좋다
아무런 강요 없이, 눈이 떠지는 대로 일어난 아침. 바로 일어나지 않고 창문 블라인드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빛을 보며 몇 시 즈음인가 짐작해본다. 아침치고는 바깥이 많이 요란스러운 것을 보니 남들 점심 먹을 시간인가보다. 점심? 나도 점심을 먹어야지.
빈속으로 집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손에 집히는 대로 먹는 아점. 과자와 포도 몇 알을 씹다 안되겠던지 꽁치 캔 하나를 깐다. 김치를 들기름에 볶다 꽁치와 물을 넣고 된장, 마늘, 고춧가루, 설탕으로 맛을 맞추어 김치찌개를 끓인다. 아, 파도 어슷 썰어 올리고. 한 소끔 끓어오르면 다 되었다. 상을 차리다 찌개를 보며 흐뭇해한다.
아싸- 이따 안주로도 먹어야지.
다 만든 찌개를 밥에 슥슥 말아먹고는 다시 널브러져 오후를 흘려보낸다.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듣기도 하고, 못 보았던 드라마를 몰아서 보기도 한다. 그래도 심심하면 잊었던 빨래와 청소를 하기도 하고. 물론,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것은 누워있기. 아무것도 하지 않기.
그러면 어느새 저녁 시간. 터덜터덜 누워있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책상으로 꼬물꼬물 올라와 노트북을 연다. 뭐 딱히 하는 것은 없다. 그저 적고 싶은 글자들을 적어가며 손가락을 움직이다 흥미가 가는 글들에 눈길을 몇 번 주는 것이 전부다. 이렇게 글을 적다 심심해지면 음악을 틀고 혼자 신이 나 흥얼거릴 것이다. 그래도 흥이 충분히 않으면 마시던 커피 대신에 맥주 한 캔을 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아까 끓인 꽁치도 데워야지.
그러다 시계를 보았을 때 문득 열시가 다 되어가면 잘 준비를 하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휴대폰을 하다 잠이 들면 내일이 될 것이다. 아아, 뜻 없어라. 이 평화로운 하루를 보내면 내일의 나는 다시 시끄러워질 테다. 허니 오늘은 조금 더, 고요해도 좋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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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aeyeong · 9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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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Path get all the childrens text
string 을 쓰자
Usage : string(//div[@id='theNode']) 
공백, 줄바꿈 등의 문자열을 제거하여 뽑고 싶을 때는 normalize-space 를 쓰자
Usage : normalize-space(string(//div[@id='theN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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