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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듯이 ‘회화’는 낡고 늙은 것의 위용이나 한계, 심지어 그것의 ‘급진성’을 함축하기에 복잡하게 말하게 되는 대상, 쟁점이다. 지금의 변화나 새로움을 반영할 매체로 보기엔 회화는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현대적이고, 아우라 유령을 소환하면서 자본과 결탁하고, (미술) 제도의 보수성을 방증하는 범례로 추대된다. 대학의 모더니즘 수업에 볼모로 잡힌 캔버스는 학교 안 화방에 쌓여 있고, 수업 후에는 페인트를 뒤집어 쓴 채 학교 후미진 곳에 버려지고, 극소수 회화만이 고가에 팔리고, 예술가의 환영적 이미지를 선망하는 사람들이 회화를 흉내 내고, 화가란 이름은 떠올리자마자 흑백 영화 속 죽지 않는 명배우들처럼 그려진다. 그리움은 되돌릴 수도, 대면할 수도 없는 진실을 대하는 한 가지 방식에 불과하고, 어쩌면 악취와 오해와 왜곡을 은폐하는 싸구려 향수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보고야 말겠다는 용기나 진실을 감당할 수 있다는 호언이 없다면 그리움이 우리를 용서할 것이다. 그럼에도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주기적 대체나 변전이 회화를 되살리고, 막다른 곳에서 회화는 또 돌아오는데, 새로움은 이미 항상 나란히 그것의 기만과 불가능을 증언하는 삶의 진실로 기능한다. 인간의 죽음과 더불어 그 역사성을 종료한 듯 보이는 예술은 ‘비인간’—동물이나 좀비, 사이보그나 기계같은—에게서 인간의 흔적을 뒤지거나 인간성을 모색하는 포스트휴머니즘과 연동하면서 계속 의심과 질문을 던지는 성찰성을 고수하지 않는가? 그렇기에 작가성, 질, 해석학 같은 현대적 전제를 지우고 예술로서의 회화를 유지할 수 있다면 회화를 단지 현대적 매체로 한정짓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누가 왜 어떻게 회화를 보존하고 유지하고 반복하는가를 말하면서 어떤 회화의 구체성이나 맥락을 드러낸다면, 어쩌면 회화��� 기존의 내재적, 자율적 구조 바깥에서 여전히 유효한 매체이자 동시대적 텍스트로 전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The) 회화가 아니라 어떤(a) 회화를 정당화 할 수 있다면, 차이의 회화, 회화의 환원 불가능한 단수성을 말할 수 있다면, 회화는 내파되면서도, 그 환영적 위용을 잃으면서도 자신의 최소한의 희미한 가능성을 드러낼 것이다. (양효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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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비평가들은 소외를 논할 때 심리현상으로서의 소외와 사회현상으로서의 소외 사이를 자유로이 오가는 경향이 있다. 그 둘은 물론 연관은 있지만 논리적으로는 동떨어진 현상이다. 심리적 소외는 직장, 결혼생활, 생활 환경 등에 대한 태도, 감정, 느낌에 관한 것이며 불만, 분개, 비애, 우울 등의 증상이 전형적이다.
이에 반해 사회적 소외는 우리가 불행하냐 억울하냐 하는 문제보다는 우리가 발붙인 사회, 정치, 경제의 구조 및 제도와 관련된다. 사회적 소외는 사람들의 행동과 그들이 처한 환경이 요구하는 규범이 서로 불일치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런 현상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도심의 높은 범죄율은 교회 주차장에서 스케이트 보드를 타려는 청소년들을 경찰이 쫓아버리는 데서 기인할 수 있다. 그러면 청소년들은 도심환경이 자신들을 소외시킨다고 여길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한 대기업의 높은 결근율은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고에 적대적인 천편일률적인 칸막이 사무실에 사원들을 구겨 넣는 기업 문화의 결과일 수 있다.
어떤 종류의 소외든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내가 소외감을 느꼈다고 해서 반드시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할 문제 상황은 아니라는 점이다. 심리적, 사회적 소외는 둘 다 일정 상황에 대한 묘사일 뿐이다. 전자는 개인의 상황을 묘사하고, 후자는 개인, 집단, 제도 간의 관계를 설명한다.
다시 노동의 세계를 설명해보자. 파티션으로 가득한 현대적 사무실 (캐나다 소설가 더글러스 코플런드는 이를 가리켜 “송아지를 살찌우는 축사”라고 불렀다)을 채운 고만고만한 일벌 같은 모습의 사원들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을 간신히 삭이며 일하는 모습은 현대 소외현상의 은유로 되풀이해 사용된다. 관료 조직의 익명성과 노동의 기계적 속성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요소와 전면 배치되는 양 보인다. 그런 환경에서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약물에 의존하든지, 제정신이 아니든지, 아니면 멍청한 게 분명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래서 뭐 어떻다는 건가? 노동이 만족감과 성취감을 준다는 보장은 아무 데도 없다. 그러니까 일은 일이라 부르는 것이고, 고되니까 고용주가 당신에게 일한 대가를 주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사실에서 당위를 끌어내는 일을 금지하는 흄의 단두대 논리다. 하지만 이것을 소외 현상에 적용하면 이상해진다. 어떤 제도의 소외성을 언급할 때 그에 대한 도덕적 반감이 함께 표현되지 않는 경우는 없으며, 누군가 소외되고 있다고 말할 때는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분명히 담겨있다. 그래서 소외 현상에 대한 고찰이 흄의 단두대를 우회해 사실과 당위의 간격을 메울 방법을 제공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게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질병에 대해 생각해보면 된다. 의사의 진단은 질병에 대한 단순한 상태 묘사라고 볼 수 있다. 암에 걸렸다면 그것은 어느 신체 조직에 제어되지 않는 세포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말라리아에 걸렸다면 어떤 원생 기생충이 적혈구 세포 내에서 증식하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상을 말하고 싶어한다. 질병은 단순히 신체의 상태만 묘사하지 않는다. 건강하냐 아프냐의 차이는 머리가 갈색이냐 금발이냐 혹은 지금 서 있냐 누워 있냐의 차이와는 별개다. 우리는 때로는 서 있고 싶고, 때로는 눕고 싶지만 그 선호는 그 시점에서 우리의 욕구와 목적이 무엇이냐에 의존한다. 서거나 눕는 것에 본질적으로 잘못된 점은 없다. 반면에 아프다는 것은 (질병은 ���원상 dis-ease, 즉 편안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 자체로 뭔가가 잘못됐다, 몸이 지금 정상이나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며 원래대로 되돌려놓아야 한다는 의미를 담는다.
소외 이론은 소외를 질병처럼 보고 사실과 당위의 간극을 메우려고 시도한다. 소외 이론은 상태를 묘사할 뿐 아니라 그 상태를 비정상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한다. 그 속에는 암묵적인 ���위적 판단과 회복되어야 할 자연스럽고 소외 없는 상태에 대한 선호가 담겨 있다. 이를 위해 소외 이론은 신체의 건강에 비유되는 어떤 것을 필요로 한다. 의학에서 무엇이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건강인지를 설명하듯, 소외 이론은 무엇이 정상적인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그래서 특정 지역과 문화, 특정 시점의 개인의 욕구에 따라 바뀌지 않는 인간 속성 및 자기 성취 이론이 필요하다. 인류 번성에 관한 자연스럽고 근본적인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 근대인들이 느끼는 소외감이 정말로 일종의 질병이라면, 불화에 종지부를 찍고 잃어버린 일치와 조화를 되찾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소외 이론이 쓸모 있으려면 거기에 상응하는 진정성 이론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것은 낭만주의가 남긴 짐이다. 낭만주의는 근대 세계가 야기한 소외를 초월하고 완화하고 인생에서 옳고 가치 있는 것들을 복구하고자 했다. 그 핵심 인물이 철학자 장 자크 루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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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 나쁜 일에 탐닉하자고 제안을 했더니, 여러 사람이 편지를 보내주었다. (새삼 세상에는 나쁜 일에 대한 욕망을 참고 지내는 사람이 많다는 게 참 놀라운데) 그중에서 조금 특이한 편지를 소개하겠다.
그 편지에는 우표가 붙어 있지 않았다. 우체부는 현관에서 두 번 벨을 누르고 요금으로 20엔을 받아 갔다. 나는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보낸 편지에 20엔이나 돈을 뜯겨 분노를 느끼면서 봉투를 열었다.
그런데 열자마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표를 붙이지 않고 보냅니다. 20엔 손해 보셨지요. 저는 당신이 20엔을 지불하는 표정을 상상하며 웃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걸 보고 어지간한 나도 한 방 맞은 기분으로 계속 읽어 내렸다.
“나는 나쁜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데라야마 씨가 결성하려는 범죄 그룹에 넣어주신다면, 그때 내 이름은 가와타 도미로 해줬으면 좋겠고, 참고로 이 이름은 지금 내가 이 세상에서 죽이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합성해서 만든 것입니다…” 라는 주석도 달려 있었다. 그리고 이 가와타 도미 씨가 희망하는 회원 번호는 55555번이었다. 나는 거참 상당히 재미있는 사람이네…하며 다음 장으로 편지지를 넘겼다.
그러자 거기에는 “만일 아무도 뭐라 하지 않고 붙잡히지도 않는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악행을 저지르고 싶다”는 단서를 달고, 세 항목이 적혀 있었다.
대학 입시 전에 문제를 전부 보고 싶다.
모든 것에 무임승차를 하고 싶다. 기차, 배, 비행기, 여자.
일본은행에 훔치러 들어가고 싶다.
나는 실망했다.
무슨 소리야. 이런 시시한 걸 악행이라며 하고 싶다니, 동성애자 한 명이 펼치는 동성애론에도 훨씬 못 미치는 유치한 소리 아닌가.
애초에 희망 회원 번호가 55555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평소에 5가 거의 없는 성적표를 받는 수험생일까, ‘여자에 무임승차한다’는 게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는 대목에서는 정말 웃음만 나온다.
여자는 당연히 무임승차하는 것이고, 그 점에 관해서는 다프니스와 클로에의 고전적이고 목가적인 연애부터 현대의 세속적인 연애 드라마 <저 다리 옆에서>의 미쓰하루와 요코까지, 모든 러브 스토리에서 돈을 내지 않고 ‘타기도 하고’ 타지 못하기도 하는 상황이 디테일하게 그려진다.
게다가 애초에 돈을 내든 안 내든 ‘여자에 올라탄다’는 것은 악행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다. 만일 아무거나 좋으니까 나쁜 일을 하고 싶다면, 먼저 ‘무엇이 나쁜가’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고, 예를 들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 시대에 악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 게 중요할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 나오는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범의 고뇌가 세계대전 중에 대량 학살을 경험한 우리 시대에도 같은 무게를 갖지는 않겠지만, 악을 단순히 반법률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점만이라도 주의해서 보기를 바란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인육을 먹어보고 싶다든가, 남편이 보는 앞에서 그의 아내를 범해보고 싶다든가, 가령 그렇게 생각했다고 치자. 그럴 때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렇게 자문해보면, 결코 인육이 맛있어서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해진다. 유명 중식당인 중화제일��의 오리 요리가 결막염을 앓는 환갑 노파의 인육보다 훨씬 맛있을 게 분명한데도 ‘인육을 먹어보고 싶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악’에 대한 어떤 기호를 드러내는 것이다. 가와타 도미씨처럼 ‘하고 싶은 일이 마침 합법적이지 않더라’가 아니라, 화상처럼 아픈 쾌락에 눈뜨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악’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 하물며 ‘선’을 알 리가 없는 게 당연하다. 예를 들면 가와타 도미 씨는 “만일 아무도 뭐라하지 않고 붙잡히지도 않는다면”이라며 위의 세 항목을 꼽았는데 ‘허락된 악’에 무슨 쾌락이 있겠는가.
누군가에게 비난을 받고 죄의 십자가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야말로 악을 생생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며, 장 주네를 만나고 온 가쓰라 유키코씨 말로는, 주네는 지금도 도둑질을 하고 숨어 지낸다고 한다. 주네야말로 실로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심경일 것이다. 감동적인 일이다.
정답을 미리 알고 싶다는 소리를 하지 말고 차라리 ‘모든 대학을 폭파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해보는 게 어떠신지.
내 친애하는 가와타 도미 씨! (데라야마 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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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드>를 보고...

이 영화는 디아스포라-재난-음악을 경유하는 어떤 성장의 서사다. 그 자체로는 다소 익숙한 테마이지만, 그것이 일본이라는 배경 위에서, 혹은 일본이라는 풍경을 소비하는 방식으로 펼쳐질 때 이야기는 다른 방식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가 다루는 모든 담론들은 너무도 얕고 넓어서, 어디서부터 이 흐물흐물한 무대를 걷어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이 영화를 "퀴어링"하는 것도 물론 가능하다. 사실 너무 쉬울 정도다. 코드화된 몸, 비가시적 감정의 경제, 이름 붙일 수 없는 관계들... 그렇지만 나는 그런 프레임만큼은 거부하고 싶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틀로 해석하는 것이 이 영화를 너무 쉽게 안전지대로 밀어넣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일본이라는 장소, 혹은 그 표면의 질감들은 누군가에게는 추억이고, 누군가에게는 이국이고, 누군가에게는 재난이자 이주 후의 유령이다. <해피엔드>는 그런 풍경 속에서 울리는 음악, 살아남는 몸,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다.
+ 연출이 아주 영리하고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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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두 주데(Radu Jude)와의 인터뷰 :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 Do Not Expect Too Much from the End of the World”에 관하여

지난해 로카르노 영화제 폐막식에서, 라두 주데와 나는 레드카펫 입구에 모인 스무 명 남짓의 사람들과 함께 어깨를 맞대고 “여성. 삶. 자유 Woman Life Freedom”라는 현수막을 들고 있었다. 2022년 이란 여성들의 봉기를 상징하는 구호였다. 그날 아침, 주데는 자신의 신작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 Do Not Expect Too Much from the End of the World>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황금표범상은 이란 감독 알리 아흐마드자데의 <크리티컬 존 Critical Zone>이 차지했다. 무대 매니저의 큐를 기다리며 바리케이드 뒤에 서 있던 주데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사람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할 때도 자기 차례 올 때까지 줄을 서 있었겠어요?” 몇 분 뒤, 우리는 피아차 그란데 앞에 섰다. 사진기자들이 몰려들었고, 현수막을 찍는 플래시 세례 속에서 우리 머리 위 거대한 스크린에는 UBS라는 스위스 은행 광고가 흐르고 있었다.
이 순간은, 영화제 내내 화제가 되었던 주데의 신작에 어울리는 결말처럼 느껴졌다. 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는 정치가 하나의 평면적이고 자기반영적인 스펙터클로 작동하는 포스트모던 현실의 아이러니를 정제된 방식으로 담아낸다. 이 복잡하게 얽힌 영화의 중심 줄기는 안젤라(일린카 마놀라케 분)라는 인물을 따라간다. 그녀는 광고회사에서 일하는 프로덕션 어시스턴트로, 부쿠레슈티 전역을 누비며 독일 자본의 가구 공장에서 사고를 당한 피해자들을 캐스팅하러 다닌다. 목적은 ‘산업 안전 영상' 출연자를 고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영상은 교묘하게도 해당 기업의 면책을 위한 도구다. 안젤라는 동시에 ‘보비차(Bobita)’라는 조악한 인스타그램 캐릭터로 활동하는 인플루언서이기도 한데, 이 캐릭터는 앤드류 테이트를 패러디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영화가 로카르노에서 첫 상영된 ���, 앤드류 테이트는 부쿠레슈티에서 가택 연금 해제 조치를 받았다. 그녀의 무한 질주와 분투는 1981년 루치안 브라투 감독의 영화 <안젤라, 계속 달려요 Angela Moves On>와 교차 편집되며 이어진다. 이 영화는 니콜라이 차우셰스쿠 독재 시절, 여성 택시운전사의 삶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에는 아주 빽빽한 레퍼런스들 중 일부 미디어 아티팩트만이 등장하는데, 이 영화는 우리의 세계화된 세상이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열린 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막다른 골목임이 드러나는 미로라는 것을 보여준다.<불운한 섹스 또는 미친 포르노 Bad Luck Banging or Loony Porn>처럼, 이번 영화도 불쾌하고 거칠다. 현대의 장면들은 날카로운 흑백 하이 콘트라스트로 찍혔고, 일상적인 인종차별과 성차별은 무딘 장갑 없이 드러난다. 그러나 오늘날의 많은 풍자 예술가나 ‘더러운 좌파’들이 진정성 대신 아이러니 속으로 숨는 반면, 주데는 그 모든 장면 속에 진짜 연민과 감정의 깊이를 새긴다. 웃게 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의 유머 뒤에 감춰진 현실의 날카로움에 찔려 상처 입고 나올 것이다. 그의 농담은 아무리 기상천외해 보여도 실제 세계에서 뿌리를 뽑아올린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제 폐막식 하루 전 아침, 라두 주데와 긴 대화를 나누었고, 그는 그 현실에 대해 이렇게 말해주었다.
영화의 중심 모티프인 ‘운전하는 여성’에 대해 묻고 싶어요. 당신은 이미 이 모티프를 영화의 ‘척추’처럼 염두에 두고 있었고, 이후에 같은 모티프를 가진 오래된 영화를 찾았다고 들었어요. 운전은 지저분한 섹스 또는 미친 포르노에서도 중요한 요소였고, 자동차는 영화에서 매우 상징적인 공간이잖아요—안이면서도 밖이고, 사적인 동시에 공적인 공간이니까요.
맞아요. 그리고 이 영화의 두 번째 파트에서는, 그 남자가 자동차 때문에 장애를 갖게 되죠.
흥미로워요. 자동차는 후기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끊임없는 이동’의 상징이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1981년의 영화에선, 그것이 오히려 자율성과 독립성의 공간처럼 느껴졌어요.
저는 혁명 이후 시대에 자랐어요. 그때는 외국 영화 제작사들이 루마니아에 들어와서 싼 노동력과 저렴한 로케이션을 이용해 영화를 찍곤 했죠. 루마니아 영화계의 훌륭한 기술자들은 그 현장들에서 훈련받았고, 저 역시 수년 동안 그런 현장에서 일했어요. 그렇게 세월이 흐른 뒤, 문득 그 경험들이 어떤 ‘전형적인 힘’을 지닌 이야기들이라고 느껴졌어요. 그것들은 포스트 전체주의 시대의 경제와 사회가 어떻게 조직되었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거��요. 차우셰스쿠 독재가 끝난 후, 갑자기 ‘자유’가 주어졌고, 당국은 “자유 시장이 모든 걸 해결해줄 것이다”라고 말했죠. 말만 들으면 아주 근사하잖아요. 자유로울수록 더 나아질 거라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죠. 어떤 건 정말 그렇게 돌아가지만, 어떤 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요. 시장을 완전히 풀어두면, 결국 모든 게 사고파는 대상이 되어버려요. 공원이든, 학교든, 의료든, 원래 공공의 것이었던 것들이 점점 사라져 가죠.
이 영화에 영감을 준 이야기 중 하나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당해 사망한 한 프로덕션 어시스턴트의 실제 사례예요. 저는 처음부터 도시를 배경으로 한 로드 무비를 만들고 싶었고, 루마니아에 그런 영화가 있었는지 떠올려 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돈 드릴로의 소설 <코스모폴리스>도 생각났죠. 제 영화의 전반부는 마치 <코스모폴리스> 같아요. 하지만 여긴 리무진을 탄 백만장자가 아니라, 형편없는 고물차를 타는 노동��급 여성이 주인공이죠. 그녀의 삶 전체가 그 자동차에 달려 있어요.
로드 무비는 보통 자유를 향한 여정이잖아요. 그런데 이 영화는 장르를 어느 정도 뒤집는 것 같아요.
맞아요. <델마와 루이스 Thelma & Louise>, <이지 라이더 Easy Rider> 같은 영화들 말이죠. 제 영화에서는 그 여정이 '노동'과 연결돼 있어요. 고다르가 말했듯이, 영화 속에선 ‘노동’을 거의 볼 수 없잖아요. 노동이 개입되는 순간, 그건 더 이상 자유가 아니게 되죠. 이건 마치 심사위원으로 영화를 보는 것과 비슷해요. 영화 보는 건 즐겁지만, 심사위원 자격으로 앉아 있으면 상황이 달라요. 만약 영화가 별로인데도 5분 만에 나갈 수 없다면… 그건 고문이 될 수도 있죠.
노 코멘트 할게요!
노 필름 코멘트! (웃음) 저는 루치안 브라투의 영화 <안젤라, 계속 달려요 Angela Moves On, 1981>를 봤어요. 처음에 보면 그렇게 전복적인 영화는 아니에요. 하지만 각본을 쓴 사람이 에바 시르부라는 여성 작가였고, 요즘 젊은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로 읽어요.여성이 운전하고, 전형적인 남성 직업을 수행하며, 그 일을 잘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니까요. 물론 영화 대부분은 연애 이야기지만요.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영화에는 전복적인 요소들이 꽤 많아요.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볼게요. 주연 배우인 바실레 미스케는 헝가리인이에요. 차우셰스쿠 정권은 굉장히 민족주의적이었고, 헝가리계 소수자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죠. 그래서 헝가리 배우를 주연으로 캐스팅한 건 자체로 전복적 행위였어요. 하지만 그의 이름은 크레딧에서 바뀌었죠. 진짜 이름은 라슬로 미스케(László Miske)였지만, 영화 크레딧에는 바실레 미스케(Vasile Miske)로 나왔어요. 제가 그에게 왜 그렇게 됐는지 물었더니, 당시 검열 당국과 큰 논쟁이 있었고, 결국 “루마니아 농민 같은 이름”으로 바꾸기로 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 영화에서는 그 가짜 이름에 줄을 긋고, 진짜 이름을 다시 표기했어요.
당신 영화들에는 항상 ‘영화’나 다른 미디어 오브제들이 실질적인 정치의 매개로 등장해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녀 The Happiest Girl in the World, 2009>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건 광고 촬영에 대한 영화잖아요.
맞아요.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의 후반부에서도 그때와 같은 촬영팀과 다시 작업했어요. 거의 리메이크처럼 느껴졌죠.
와, 정말요? 생각해보면 감독님은 다양한 미디어 오브제들을 같은 레벨 위에 올려두는 방식이 있는 것 같아요. 이 영화 안에서도 감독은 4K 촬영을 고집하고, 온갖 ‘고급 예술’ 레퍼런스를 인용하잖아요.
그런데 결국 엉망진창인 걸 만들죠.
맞아요. 그는 멜리에스가 겨자 광고를 찍었고,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들도 자기네 공장을 홍보하는 광고였다고 말하죠. 당신은 영화와 광고, 심지어 <불운한 섹스 또는 미친 포르노 Bad Luck Banging or Loony Porn>에서는 소셜미디어와 섹스 테이프까지—이 모든 걸 하나의 이미지 스케이프 안에 넣잖아요. 그 접근에는 어떤 ‘수평성’이 있는 것 같아요. 혹시 현대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선, 이미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이 매체에 상관없이 전부 동일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걸까요?
맞긴 한데, 좀 더 뉘앙스를 나눠야 할 것 같아요. 이 이론은 굉장히 풍부하고 매력적이긴 한데, 위험하다고까지는 아니어도, 그만큼 정확하진 않기도 해요. 아마도 당신이 프로그래머이자 평론가니까, 그 관점에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죠. 하지만 저는 감독이고, 동시에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이에요. 그래서 이미지를 볼 때도 두 가지 관점이 동시에 작동해요. 관객으로서 저는 움베르토 에코가 했던 말을 떠올려요. “중요한 건 무엇을 연구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연구하느냐다.” 좋은 영화든 나쁜 영화든 상관없어요. 거기서 뭘 발견하느냐가 중요하죠. 그런 의미에서라면 모든 게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제가 창작자의 입장이 되면, 이미지를 만든다는 건 결국 자신이 옳다고 믿는 하나의 방식으로만 가능하다는 걸 깨닫게 돼요. 비평은 어떤 것이든 다룰 수 있지만, 창작에 있어서는 모든 게 모델이 될 수는 없어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저는 브라투의 영화나 연출 방식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분석가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거기에도 흥미로운 점은 있죠. 이게 제 방식이에요. 리처드 브로디의 책 제목처럼, “모든 것이 시네마다.” 그런 도구들로 세상을 보면, 세상 전체가 영화처럼 보이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관련 일화 중 하나는, 나움 클레이만이 에이젠슈테인의 책장에 대해 이야기한 거예요. 그 책장엔 책들이 제목이나 분야별로 정리되어 있지 않았대요. 대신 몽타주의 원리에 따라 배열되어 있었죠. 그래서 나폴레옹 전기 옆에 유전적 돌연변이 관련 책이 있었고, 율리시스 바로 옆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있었대요. 그 책장이야말로, 그가 찍지 못한 가장 위대한 영화들이었던 거죠.
저는 뭐든 다 봐요. 부쿠레슈티 지하철에 있을 때도, 거기 TV에서 나오는 광고를 보거나, 웹캠 화면을 들여다봐요.
그렇다면 감독님에게 ‘영화’만의 고유한 특성이란 뭘까요?
전 정말 단순하게 생각해요. 현실을 기록하고, 그걸 움직이는 이미지로 바꾸는 과정. 그게 영화죠.
하지만 그건 광고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맞아요. 그렇지만 저한테는 그 모든 게 영화의 한 형태예요.
광고도 영화라고 믿는 건가요?
그럼요. 움직이는 이미지라면 그건 영화예요. 물론 영화제 프로그래머라면 ‘어떤 게 더 낫다, 못하다’를 따지겠죠.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까요. 그래도 공통의 기준이 있다면, 대화는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누군가와 그런 얘기를 하다가 언성이 높아진 적이 있어요. 그 사람은 ‘영화인’이라고 하긴 어려운 사람이었는데, 제가 <인생은 아름다워 Life Is Beautiful>를 내 인생에서 본 영화 중 가장 끔찍한 영화 중 하나, 그리고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말했거든요. 그랬더니 그 사람은 저를 “멍청이”라고 했어요. 자긴 그 영화를 보고 울었는데, 어떻게 그게 나쁜 영화일 수 있냐는 거죠.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감동을 줬기 때문에 좋은 영화다”라는 기준을 가지고 있다면, 거기서 더 이상 논쟁은 불가능해요. 그 사람이 자신만의 버블 속에 들어가 있으니까요.
어제 우리가 바비(Barbie) 얘기하면서, 감독님이 그 영화는 광고라고 했잖아요.
맞아요. 잘 만든 광고요! (웃음)
그리고 당신은 요즘 광고에 대한 영화, 포스트-차우셰스쿠 시대의 광고를 다룬 영화를 만든다고 들었어요.
네, 이미 완성됐고 지금은 후반 작업 중이에요. 철학자인 크리스티안 페렌츠-플라츠와 함께 만들었어요.
그런데 무언가를 ‘광고’라고 부르는 게 비하적 의미인가요? 무언가를 팔기 위해 만든 이미지도 영화로 볼 수 있을까요?
아니에요. 그건 단지 ‘설명하는 말’일 뿐이에요. 예술의 역사를 보면, 화가들도 귀족이나 왕족을 위한 광고를 그렸잖아요. 그러니 그 자체가 부정적인 건 아니죠. 물론 질문이 “그걸 좋아하냐, 아니냐”로 바뀐다면 다른 문제겠지만요. 루마니아의 젊은 평론가들과 영화감독들이 바비가 좋은 영화라고 말하는 걸 읽은 적이 있어요. 그 영화에서 “가부장제(patriarchy)”라는 단어가 나오니까요. 그래서 어떤 어린 소녀가 그 단어를 처음 듣고, 관심을 갖게 되고, 주디스 버틀러를 읽게 될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이제 나이가 들었고,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아요. 예전엔 <셰익스피어 인 러브 Shakespeare in Love>라는 영화를 정말 싫어했어요.
전 15살에 그 영화 정말 좋아했어요.
그 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 언론에서는 이런 식으로 얘기했죠. 이 영화 덕분에 젊은 세대들이 처음으로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을 듣게 됐고, 이제 서점에 가서 셰익스피어 전집을 사게 될 거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여긴 셰익스피어 연구자들의 행성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영화가 ‘최소 공약수’를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버틀러를 읽게 하고 싶다면, 단지 “가부장제”라는 단어 하나 알려주는 게 목표가 되어선 안 되죠. 정말 버틀러를 읽게 하고 싶다면, 그녀에 대한 영화를 만들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참 악순환이에요. 빠져나오는 방법을 모를 때도 있죠. 저는 특히 루마니아에서 엘리트주의적 영화감독이라는 말을 자주 들어요. 상업성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요. 하지만 제 대답은 이래요. 저는 오랫동안 상업 방송에서 일해온 사람이에요. TV 쇼부터 홈쇼핑까지, 살 빼는 벨트 광고 같은 것도 다 찍어봤어요. 회의가 열리면, 윗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하곤 했죠: “우리 시청자들은 멍청한 가정주부, 알코올 중독자, 한심한 놈들이야. 그러니까 그들한테는 쓰레기를 던져줘야지.” 그게 어떤 사람들에겐 관객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여겨지기도 했어요. 그래서 저는 어떤 감독이 “나는 관객을 위해 영화를 만든다”고 말할 때, 그게 오히려 엘리트주의처럼 들려요. 관객을 열등한 존재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관객이 바보라서 제가 말하는 걸 이해 못할 거라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게 엘리트주의라면, 저는 대중을 경멸하는 사람보다는 그런 엘리트가 낫다고 생각해요.
영화 속 안젤라는, 자신이 보비차로서 하는 말들에 대해 사람들이 진심으로 믿는 건 아닐까 걱정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아요. 그녀는 그건 풍자(satire)라고 답하죠. 근데 제가 흥미롭게 느낀 건, 그걸 풍자로 만들어주는 게 그녀의 말이 아니라, 인스타그램 필터의 조악함, 그 글리치 자체라는 점이에요. 이 불완전한 시뮬레이션 덕분에, 안젤라는 앤드류 테이트의 이미지를 활용하면서도 동시에 비판할 수 있었죠. 그건 감독님의 영화의 방식과도 비슷하다고 느껴져요. 감독님의 영화들은 종종 비판하려는 대상을 영화 안에서 구현하면서도, 그게 비판이라는 걸 관객이 잘 못 알아챌 수도 있거든요. 예를 들어, 영화 속 어떤 인물은 로마니인(Romani people)에 대해 정말 끔찍한 말을 해요. 그런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이라면, 그 장면에서 오히려 용기를 얻을 수도 있죠. 그럴 때, 이미지를 어떻게 와해시키고, 그것을 스스로 반박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저는 ‘풍자(satire)’보다는 ‘캐리커처(caricature)’라는 단어를 쓰고 싶어요. 캐리커처에는 사실주의가 없어요. 과장된 표현이 너무도 명백해서, 그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방식 자체가 비판이 되는 거죠. 물론 당신이 말한 ‘불완전함’의 효과도 그런 비판을 강화하는 데에 기여해요. 하지만, 필터가 완벽했다 해도 영화 전체가 크게 달라졌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해요. 이미지는 스스로 존재하지 않고, 맥락 속에서만 존재하거든요. 그 맥락에서 떼어내면, 위험해질 수밖에 없죠.
제가 만든 영화 중에 <기차의 출구 The Exit of the Trains, 2020>라는 작품이 있어요. 루마니아 홀로코스트의 사진들로 구성된 영화죠. 그 영화에는 20분 가까이 이어지는 학살 장면이 나와요. 공동작업을 한 역사학자 아드리안 치오플란카가 사진을 찾다가 우리는 정말 끔찍한 사실을 알게 됐어요. 학살 장면이나 폭력 이미지에서 성적 흥분을 느끼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하더라고요. 그래서 만약 누가 이런 이미지를 영화에 썼을 때 어떤 사람들은 그걸 즐길 수도 있다고 말한다면, 당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결국 제가 생각하기엔, 영화가 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경계의 끝을 시험하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그 실험을 현실이 아닌, 예술의 맥락에서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유럽 펀딩 위원회에서는 제 영화가 좋다고 하면서도, 보비차의 영상은 전부 빼달라고 했어요. 그 장면들이 이야기 전개에 아무 기여도 안 하고, 영화는 그 없이도 충분히 작동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감독님이 '저속함(profanity)'을 어떻게 다루는지도 궁금해요. 특정한 욕설 말고, ‘신성하지 않음’이라는 아이디어 자체에 대해서요.
음... '저속함(vulgar)'이라고 해볼까요.
저는 '저속함'보단 ‘신성하지 않음’, 그러니까 ‘성스러움의 반대편’, 그 개념 자체에 더 관심이 있어요.
신전 밖에 있는 것들이죠.
맞아요. 감독님의 영화에는 신성한 게 단 하나도 없어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 조롱당하죠. 최근에 죽은 고다르에 대한 농담도 있잖아요. 어떤 사람은 그걸 불쾌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저한텐 고다르는 거의 신 같은 존재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님은 그를 조롱하죠. 그게 저는 감독님의 영화의 ‘신성모독성’과 맞닿아 있다고 느껴져요. 감독님의 영화에는 지적인 조잡함(intelligent crudeness) 같은 게 있어요.
저는 일반화하긴 어렵다고 생각해요. 정말 웃을 수 없는 것들도 ��고, 그건 결국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저는 언제나 ‘약한 사람들’을 향해선 저속하게 굴지 않으려고 신경 씁니다.
그러니까, ‘펀치 다운(punching down)’은 하지 않는다?
맞아요. 그건 제가 절대 하지 않는 방식이에요. 고다르의 경우엔, 그는 스스로를 신성하게 여기지 않았어요. 그는 조력자살을 택했죠. 루마니아는 매우 종교적인 나라라서, 그가 그렇게 죽었을 때 “어떻게 그런 끔찍한 짓을 하냐”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런데 제 입장에선, 그건 고다르다운 농담 같았어요. 최후의 농담. 저는 진심으로 믿어요. 예술은 더 많은 것들이 시험될 수 있는 영역이어야 하고, 정치 담론에서 요구되는 조심성과는 다른 규칙이 적용되어야 해요. 일상 윤리를 예술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예술의 90%는 사라질 거예요. 그렇다고 제가 캔슬 컬처에 반대하는 것도 아니에요. 전 캔슬 컬처 좋다고 생각해요. 저도 매일 마음속에서, 실천 안에서, 보는 것과 읽는 것 안에서 사람들을 캔슬하고 있어요. 매일매일, 모두를요.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에 대해 묻고 싶어요. 루치안 브라투의 영화에 나왔던 배우들과는 어떻게 연결됐나요?
어렵진 않았어요. 옛 영화에서 안젤라 역할을 맡았던 도리나 라자르(Dorina Lazar)는 루마니아에서 워낙 유명한 배우고, 연극도 많이 해요.
그녀의 반응은 어땠어요?
그건 말할 수 없죠. 왜냐하면… 우리가 그녀를 살짝 속였거든요. (웃음) 그녀가 그러더라고요. “당신 영화들 스타일 아는데, 저속한 건 안 나가요.” 그래서 제가 “걱정 마세요. 저속하지 않아요”라고 했죠. 지옥에 가서 벌 받겠네요. (웃음)
그럼, 감독님의 영화에서 ‘저속함’의 역할은 뭔가요?
그건 사회에 대한 반영이에요. 제 기준엔 ‘저속함’이라는 건 없어요. 타인을 착취하거나, 해를 끼치는 것만이 문제죠. 예컨대 포르노도, 상호 합의된 관계라면 도덕적 의미에서 '음란물'이라고 할 수 없어요. 저에게 진짜 저속한 건, 권력을 이용해 누군가를 굴욕시키는 거예요. "씨발"이나 "창년" 같은 단어보다 훨씬 더 저속하죠.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겐 그 반대예요. 그래서 여전히 ‘저속함’이라는 건, 사람마다 다른 방식으로 불쾌감을 주는 힘을 가진 말이에요.
결국, 도리나를 속인 거네요?
안 그랬으면 그녀는 절대 출연 안 했을 거예요. 그녀가 “대본 볼 수 있나요?”라고 물었을 때, 제가 “음... 이건 즉흥적인 영화라 대본이 없어요.”라고 했어요. 그녀는 제가 쓴 대사 중 하나는 끝내 거절했어요. 그 장면은 젊은 안젤라가 늙은 안젤라에게 “공산주의 시절은 어땠어요?”라고 묻는 장면이에요. 실제 있었던 배우인데, 지금은 돌아가셨어요. 그 분은 예전 인터뷰에서 “50년대는 어땠어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늘 이렇게 말했대요: “50년대는 최고였지. 매일 발기했거든.” 근데 도리나는 그 대사를 절대 못 하겠다고 했어요. (웃음) 그 대사 진짜 좋았는데!
출처 : https://www.filmcomment.com/blog/interview-radu-jude-on-do-not-expect-too-much-from-the-end-of-the-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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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두 친구가 그림 한 점을 감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작자를 알 수 없는 그 그림은 중국에서 온 것이었다. 꽃이 만발한 수확기의 들판이었다.
그 중 한 친구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바구니를 낀 채 양귀비를 따고 있는 그림 속의 많은 여자들 중에서 유독 한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풀어 헤친 그녀의 머리칼은 어깨 위에서 흩날렸다.
마침내 그녀도 그에게 눈길을 주었고, 들고 있던 바구니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녀는 두 팔을 뻗어 그를 데려갔다. 어떻게 데려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어딘지도 모르고 그녀의 손에 이끌려 갔고, 얼마간인지는 모르지만 그 여자��� 함께 여러 날을 보냈다. 마침내 돌풍이 그를 그 곳에서 떼어 내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의 친구는 여전히 그림 앞에 꼼짝 않고 서있었다.
그 영원은 찰나와 같아서 친구는 그가 자리를 비운 것을 알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는 또한 그림 속에서 양귀비를 따서 바구니에 담고 있는 많은 여자들 중 한 명인 그 여자가 지금은 목 뒤로 머리를 묶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에두아르노 갈레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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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독일 여행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독일을 찬양하지 않으면서 (‘다들 독일로 오세요!’), 독일을 저주하지 않으면서 (‘이 개새끼들의 도시는 망해야 한다’) 독일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전제부터가 망가졌다. 어떤 걸 말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순간, 그건 이미 너무 많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나는 ‘무엇을 숨길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드러낼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어쩌면 내 삶도 항상 그래왔다. 무언가를 말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결국 쏟아내고야 마는 삶. 내 몸이 미디어가 되는 삶. 형벌이라고 한다면 형벌이 되고야 마는 음울한 말하기들.
나는 항상 고민했던 것 같다. 그들과 마주치는 나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나와 마주치는 그들의 표정은 어떨까. 그들의 눈, 코, 입을 넘은 그 아주 좁은 여백 속으로 나는 자꾸만 빠져든다. 결국 독해할 수 없는 난해한 텍스트에서 나는 각주 되기를 자처한다.
언젠가 내가 키웠던 강아지 여름이에게 항상 하고 싶었던 질문처럼, 그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너는 나를 뭐라고 부르니?”
나는 한 달 동안, 한국도 독일도 아닌 경계 위에 머문다. 나는 독일에 있지만, 여긴 독일이 아니다. 한국도 아니다. 그게 나를 안심시킨다.
2025년 1월, 베를린의 한 카페에서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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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성', '노마디즘', '자발성' 등은 포스트포드주의적 통제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경영의 주된 특징이다. 그러나 문제는 유연성과 탈중심화에 대한 어떤 반대도 자기 패배적인 것이 될 위험이 있다는 점인데, 왜냐하면 아무리 봐도 비유연성과 중심화에 대한 요청이 자극을 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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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리 홀 The Glory Hole
캐런 셔먼 Karen Sherman

몸이 된 작업
유리공예에서는 길이 약 4피트 반짜리 금속 파이프를 들고, 녹은 유리가 가득한 가마에 그것을 집어넣어 끝부분에 유리 덩어리를 감아낸다. 유리는 약 섭씨 1,100도(화씨 2,000도)의 온도로 가마에서 나오는데, 이 뜨겁고 흐물거리는 덩어리가 아래로 처져 스스로 무너지지 않도록 파이프를 끊임없이 회전시켜야 한다. 중심을 잡기 위해선 일정한 회전이 필요하다. 유리는 초당 50도씩 식으며, 그 매 순간마다 성질이 극적으로 변한다. 맨손으로 만질 만큼 식는 일은 결코 없기에, 다른 도구와 움직임을 통해 형태를 만들어야 한다. 작업자는 벤치에 앉아 파이프의 유리 쪽 끝을 좁은 금속 레일 위에 얹고, 물에 흠뻑 젖은 두툼한 신문지 뭉치를 손에 들어 유리를 감싼다. ‘걸레(rag)’라고 부르지만 사실상 신문지를 뭉친 두터운 패드에 가깝다. 유리를 갓 태어난 아기의 두개골처럼 조심스레 감싸 안고, 계속 회전시키며 손으로 형태를 잡는다. 뜨거운 유리가 젖은 신문지를 만나면 김이 피어오르며, 유리는 그 증기의 막 위를 미끄러지듯 돈다. 신문지는 살짝 타들어간다. 손과 유리 사이엔 고작 반 인치도 안 되는 두께의 신문지가 있을 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닿지 않는다. 만질 수는 없지만, 유리의 무게가 파이프 끝에서 바뀌는 감각, 밀도의 변화, 증기가 만드는 윤활감을 통해 유리를 느낀다.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손에 쥐는 물체는 특히 도구로 사용될 경우, 뇌가 그것을 몸의 일부처럼 인식하게 된다고 한다. 갈퀴를 이용해 물건을 집는 법을 배운 원숭이들은 손에 감각을 담당하는 뇌의 영역뿐 아니라 손 근처에 나타나는 물체를 인식하는 영역에서도 반응이 포착되었는데, 이는 뇌가 갈퀴를 손의 일부로 간주했다는 뜻이다. 인간을 대상으로 한 다른 실험에선, 도구가 손의 일부처럼 인식되는 반면, 도구가 닿는 물체 자체는 그렇지 않다는 결과도 있었다. 즉, 피부와의 직접적인 접촉이 중요하다는 암시였다. 그러나 유리공예를 할 때 내가 느끼는 바는 다르다. 내 감각으로는, 유리가 마치 내 조직의 연장처럼 느껴진다.
나는 무용 창작자로서, 유리공예가 얼마나 안무와 운동감각적 공감(kinesthetic empathy)에 기댄 작업인지 명확히 느낄 수 있다. 유리 덩어리를 가마 혹은 ‘글로리 홀’(이 용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설명하겠다) 안에 넣고 있을 때,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식으로—유리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직감하고, 언제 꺼내야 할지를 미리 감지하게 된다. 이는 고무줄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얼마나 늘릴 수 있는지, 비누방울이 얼굴 앞에서 터지기 전까지 얼마나 크게 불 수 있는지를 직관적으로 아는 감각과 비슷하다. 나는 오랫동안 무생물의 물리적 성질과 공감하는 능력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를 고민해왔다—우리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자기 몸을 경험하는 방식, 우리가 거부해야 할 물질과 융합할 수 있는 능력 말이다.
“신체 공명”이라는 말이 거의 이 감각과 비슷하다. “신체”와 “공명” 모두 춤에서 온 언어다. Body-Mind Centering®의 창시자 보니 베인브리지 코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질 때, 그 사람도 똑같이 우리를 만진다.” 우리가 경험하는 몸의 경계는 자유롭게 변할 수 있으며 타인을 넘어 물체까지 확장될 수 있다. 혹은 인지신경과학자 Patrick Haggard와 Mathew Longo가 Scientific American에서 한 말 처럼, “우리는 우리의 몸을 삶의 고정된 특징으로 생각하지만, 뇌는 놀라울 정도로 유연하게 우리가 어떤 순간에 만지고 사용하는 것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뇌는 접촉을 언제나 양방향의 감각으로 예측한다. 우리는 다른 물체가 어떤 감각을 주는지뿐 아니라, 그 물체와 접촉되었을 때의 감각 역시 느낀다. 만지고 만짐 당하는 손. 그 동시성은 촉각 세계의 바로 첫경험 중 하나다. 보니 베인브리지 코언은 이 감각 능력이 세포적이고, 에테르적이며, 극도로 물리적인 차원에서 서서히 자라나는 것이라 말한다. 지각은 몸의 가장 깊고, 가장 미세하며, 가장 생생한 층위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자궁에서 처음으로 이러한 감각을 경험한다. 우리가 태내에서 움직일 때마다, 양수, 자궁벽, 그리고 우리 몸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맞닿는 접촉이 피부를 자극한다. 그렇게 우리는 접촉과 움직임을 동시에 배운다. 움직임은 두 층위에서 일어난다. 하나는 피부 안에서 세포들이 움직이는 차원, 또 하나는 몸이 공간을 가로지르며 움직이는 차원이다. 접촉 역시 두 층위에서 감지된다. 세포 내부에서의 미세한 접촉, 그리고 피부 바깥에서 오는 외부의 자극.
접촉을 온/오프 버튼처럼—즉, 무언가를 만지고 있거나 아니거나—여기는 대신, 공간을 가로지르는 아치형의 에너지, 그 공간 자체를 감싸고 ‘접촉의 예감’으로 전기를 흐르게 하는 감각으로 떠올릴 때, 접촉은 단절된 행위가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는 유동적인 움직임이 된다.
유동학은 물질이 흐르고 변형되는 방식에 대한 학문이다—물질이 점성을 가지거나 액체에서 고체로 변화할 때. 이는 유리는 물론 진흙, 용암, 피와 같은 많은 물질에 적용된다. 나의 어머니는 은퇴한 의료 기술자다. 내가 한때 어떤 물질의 세포 단위 변화에 공감하는 감각을 뭐라 불러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프로트롬빈(Prothrombin)”의 줄임말인 “프로 타임(pro time)”이라는 실험이 있어. 이건 피의 응고성을 측정하는 테스트야. 적은 양의 칼슘 용액을 작은 플라즈마 관에 피펫으로 옮기고 스톱 워치를 켜. 그리고 이 액체 혼합물이 응고될 때까지 천천히 위 아래로 움직여봐. 보통 13초 정도면 응고되기 시작해. 이게 지금 액체일까? 응고된 걸까? 실험을 많이 하고 나면, 이 변화를 실제로 보지 못하더라도 그 찰나의 변화를 몸으로 직관하게 돼. 이 순간을 우리는 “엔드 포인트 (end point)”라고 불러.
이건 놀라울 정도로 섬뜩하고도 멋진 예시다. 몸이 스스로의 물질—피의 유동학—을 인식하는 순간.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자기 자신을 직관하는 몸. 몸 밖의 몸.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쫀쫀하고
우리가 만지는 사물을 따라 친밀함이 흐르고, 의식의 회로는 그 전류를 따라 확장된다. 사물은 단순한 매개체가 아니라, 접촉을 통해 우리 안으로 스며드는 또 하나의 감각이다.
오래 전, 내 이전 파트너와 나는 하와이 바닷가 근처의 작은 집에서 머물렀다. 둘째 날에 우리는 화장실에서 거대한 지네 한 마리를 발견했다. 지네는 약 20센치미터의 길이었고 끔찍하게 무섭고 혐오스러우면서도 묘하게 매혹적이었다. 우리는 그 지네를 죽이기로 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모서리가 비스듬하고 거친 빨대같은 솔로 된 빗자루를 발견했다. 솔은 충분히 단단해서 지네를 기절시키거나, 심하면 뇌 손상을 입히거나, 장기를 망가뜨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굳이 절단할 필요는 없었다. 그건 지저분하고 불쾌했을 테니까. 나중에서야 깨달았지만, 이 모든 걸 나는 단 몇 초 사이에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에는 “곤충이 인간의 공격으로 생물학적으로 어떻게 죽는가”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다시 조심스레 화장실로 기어들어가, 자세를 잡고 지네를 빗자루로 찔렀다. 불구가 될 만큼 정확하게 맞추지는 못했지만, 지네의 고무 같고, 떠오르는 듯한 탄력 있는 몸의 감각이 빗자루의 솔을 타고, 나무 손잡이를 따라, 그리고 그 끝을 꽉 쥐고 있던 내 오른손의 살갗까지—충격을 흡수하는 최종 관문처럼—그대로 전해져 왔다. 그 지네는 마치 딱딱한 캔디 코팅 위에 고무젤리를 감싸고, 그 안에 강철 막대가 박힌 생물 같았다.
지네들의 지능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모른다. 공격은 실패했고,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나는 빗자루를 통해 느껴지는 그 몸의 역겨운 감촉에 거의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어쩌면 지네의 진화 전략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혐오스럽게 존재하기. 지네는—도망쳤다고 해야할까? 기어갔다고 해야할까?—한순간에 사라졌다가, 화장실 세면대 아래쪽, 의자를 넣기 위해 열려 있는 공간 안으로 다시 나타났다. 나는 자세를 낮추고 쭈그려 앉아서 세면대 아래쪽 벽과 맞닿는 틈을 향해 빗자루를 어정쩡하게 쑤셔넣었다. 지네는 매번 빗자루가 닿을 때마다 납작하게 몸을 눌러 틈 사이로 옆으로 기어들어갔다. 빗자루 손잡이는 길어서 가까이 다가가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만큼 다루기 어려웠다. 모든 타격은 실제로도, 은유적으로도 의미가 있어야만 했다.
처음 몇 번의 타격은 그 징그럽고 단단한 말랑함을 고스란히 반사해서 내 손끝으로 돌아���다. 빗자루를 이용해 찌르면 찌를수록 지네는 점점 더 깊숙히 틈 사이로 파고들었고, 이내 빗자루 끝을 통해 전해지는 건 벽, 벽, 또 벽의 감촉뿐이었다. 지네는 살아남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당시에는 스마트폰이 없었으므로) 가이드북을 꺼내 찾아보았다. Scolopendra subspinipes—유독종 지네. 그 독침의 고통은 분만 혹은 신장결석에 비유된다고 적혀 있었다. (신장결석이 불타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나는 기도했다. 그 100개의 다리 중 최소 40개는 망가뜨렸기를. 그래서 밤에 몰래 침대 위로 기어오르지 못하게 되길. 하지만 빗자루를 통해 전달되었던 감각은 나에게 알려주었다. 나는 그저 지네를 놀라게 했을 뿐,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 우리는 그 이후로 지네를 다시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 지네와 나 사이의 ‘몸-대-몸 접촉’, 그 빗자루를 매개로 한 감각은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안에 살아있다. 사실 지금도 바닥을 스치듯 빗자루를 쥐기만 해도, 그 순간이 다시 살아난다. 그 지네는 늘 빗자루의 끝에 있다.

손 먼저의 도구
우리는 피부에 직접 닿지 않아도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 ‘무언가가 무언가를 느끼는 걸 느끼는 것’ 역시 결국 무언가를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생명이 없는 사물이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존재—다른 몸—을 더 뚜렷하게 증폭시켜 보여주기도 한다. <Strange Piece of Paradise>는 테리 젠츠(Terri Jentz)가 쓴 회고록으로, 그녀를 살해하려 했던 정체불명의 남자를 거의 15년에 걸쳐 추적한 과정을 담고 있다. 그녀는 열아홉 살이었고, 대학 룸메이트와 함께 자전거로 미국을 횡단하던 중이었다. 출발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시골 오리건의 한 캠핑장에서 잠들어 있던 밤—한 남자가 픽업트럭을 몰고 잔디 위로 올라와, 그들이 누워 있던 텐트를 그대로 덮쳐버렸다. 그는 후진해서 차를 빼고, 내리더니 도끼를 들고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젠츠는 텐트 속에 엉켜 있었고, 공격을 피하려고 몸을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자신을 내리치는 물체를 더듬었고, 그 순간 차가운 금속의 곡선이 손끝에 닿았다. 남자는 잠시 공격을 멈췄고, 그녀가 눈을 뜨자, 그는 그녀 위에 걸터앉아 양손으로 도끼를 쥐고 있었다. 그 자세는 완벽한 대칭의 포즈였고, 그는 도끼를 아주 천천히 내렸다. 그 동작은 훗날 그녀가 이해하게 된 바로는, 곧 이어질 내려침을 '측정하는' 동작이었다. 그녀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내 두 눈은 [그 도끼가] 천천히 내려와 가슴 위에서 멈추는 순간을 똑똑히 지켜본다. 나는 두 손을 가슴 위에 모아 쥐고, 도끼날을 감싼다. 그리고 내 몸 어딘가 깊은 곳에서 목소리를 끌어올린다. 단호하지만, 약간의 정중함을 머금은 목소리. “그냥 우리를 내버려 두세요,” 나는 말한다. “뭐든 가져가셔도 돼요. 그냥, 제발, 우리를 두고 가주세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아주 선명히 본다. 눈 바로 앞, 몇 인치 거리에서 내 두 손이 도끼날을 감싸고 있는 것을— 마치 기도하듯, 가슴 위에 가지런히 포개져 있는 그 장면을. 그리고, 아주 부드럽게.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심스럽게, 그는 도끼를 내 손에서 들어올리고, 내 위를 가로질러 걸어 나가 사라진다.
그 시점까지, 그는 이미 그녀의 팔 근육을 절단했고, 두피의 얇은 피부를 레이스처럼 찢었으며, 두툼한 손바닥을 베고, 코뼈를 부러뜨리고, 팔뚝의 뼈마저 잘라냈다. 그녀의 룸메이트에게는 두개골에 구멍까지 낼 정도였다. 그는 도끼의 금속날과 나무 손잡이를 통해 충분히 많은 촉각 정보를 받아냈을 것이다—뼈, 살, 근육, 하지만 그녀가 두 손으로 그 도끼날을 감쌌을 때, 그는 멈췄다. 이건 완전히 다른 종류의 접촉이었다. 도끼가 그의 손의 연장이었다면, 그녀는 그 연장을 자기 손으로 감싸 안은 것이다.
찰스 맨슨을 위해 살인을 저질렀던 여성 중 하나인 레슬리 반 하우튼(Leslie Van Houten) 역시, 살해 순간 자신의 피해자인 로즈메리 라비앙카(Rosemary LaBianca)와 비슷한 “교환”을 느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녀가 라비앙카를 실제로 죽였는지에 대해선 논쟁이 있지만 (보통은 라비앙카가 이미 죽은 뒤에 칼질을 했다고 여겨진다), 1987년 인터뷰에서, 반 하우튼은 그녀가 죽어갈 때 “그녀 옆에 함께 있고, 그녀를 누르고 있던” 경험을 통해 무시무시한 관계성과 책임감, 죄책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그것은 비극적인 초자연적 연결이었고,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죄의식의 연쇄를 일으켰다. 비록 반 하우튼은 젠츠와는 반대의 입장—공격자였고, 젠츠는 피해자였지만—두 경우 모두 직접적인 육체 접촉이 요구되는 무기가 등장한다. 총은 거리를 허락하지만, 도끼와 칼은 ‘닿음’을 필요로 한다. ‘붙잡음’을 필요로 한다. 이건 ��리가 공유하고 있는 인간의 생물학적 실체—뼈대, 장기, 연부 조직, 피부—그 모든 구성물의 유사성—그것과 피할 수 없이 마주하는 순간이다. 우리는 모두 같은 재료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너를 찌르면, 동시에 나는 찔리는 것이 어떤 감각인지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가 서로에게 무엇을 하는지를 알고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질 때, 그들도 똑같이 우리를 만진다.
이 순간에는 거울신경세포(mirror neurons)가 작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네가 무언가를 할 때, 그걸 관찰하는 내 뇌에서 활성화되는 신경세포는 내가 그 행동을 직접 할 때와 같은 신경세포들이다. 마치, 너를 보는 것이 곧 나의 행위인 것처럼. 연구에 따르면, 뇌는 접촉 이미지에 대해서도 실제 접촉과 동일한 반응을 보인다. 피험자의 다리를 직접 건드릴 때와, 누군가가 그 다리를 건드리는 장면을 보여줄 때, 같은 부위의 체감각 피질(somatosensory cortex)이 반응한다. 같은 뇌 영역은 누군가가 춤추는 모습을 볼 때도 활성화된다. 거울신경세포는 또한 우리가 “네가 뭘 할지, 네가 하기 전에 아는 능력”과도 연관이 있다고 여겨진다. 예컨대, 네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방식만 보고도 단순히 기지개를 켜는 건지, 방을 나갈 준비를 하는 건지 나는 알 수 있다.
물론, 수십 년 동안 무용가로 살아온 것도 도움이 된다.

몸에서 태어난—너 아닌 너
미네소타주 미네폴리스(Minneapolis)에 오필드 실험실(Orified Laboratories)라는 장소가 있다. 여기선 음향, 진동, 조명에 관한 연구를 진행한다. 오필드 랩이 되기 전, 이 건물은 ‘사운드 80(Sound 80)’이라는 녹음 스튜디오였다. 밥 딜런(Bob Dylan)이 Blood on the Tracks를, 프린스(Prince)가 초기 데모들을, 그리고 Lipps Inc.가 “Funkytown”을 녹음했던 바로 그 장소다. 하지��� 당신이 오필드 실험실을 들어본 적이 있다면, 아마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방으로 기네스북에 두 번이나 오른 그 무향실(anechoic chamber) 때문일 것이다. 이 방은 소리의 99.9%를 흡수한다.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그 안에 ‘무언가’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몇 년 전, 나는 스티브 오필드 본인이 이끄는 실험실 투어에 참가했다. 그는 우리를 무향실로 안내했다. 그 방은 약 3미터 × 3미터의 작은 공간으로, 두께 90cm의 음향 폼 웨지들이 철과 콘크리트로 구성된 벽면에 부착되어 있었다. 천장, 벽, 바닥은 모두 떠 있는 와이어 그리드로 구성돼 있어서, 건물의 구조체와 직접적으로 맞닿지 않는다—진동을 최대한 차단하기 위해서다. 본질적으로, 그 공간은 공중에 부유하는 듯한, 부드러운 벽을 가진 던전처럼 느껴진다. 공기의 밀도 자체가 다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귀에서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마치 기압이 달라진 듯한 감각인데, 정확히는 그게 아니다. 어딘가 ‘죽은 듯한’ 감촉, 공기가 묵직해지고 무언가 눌리는 듯한 느낌이다. 무향실에 있으면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미쳐버린다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 공간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오직 당신 자신의 몸뿐이다. 심장 박동은 물론이고, 곧 이어 귀 안에서 흐르는 혈류 소리, 윗눈꺼풀이 아랫눈꺼풀을 때리는 작은 ‘딱’ 소리마저 들린다. 소문에 따르면, 오필드의 무향실 안에 45분 이상 머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스티브가 문을 닫고, 불을 끄고, 우리를 그 소리 없는 암흑 속에 남겨두겠다고 제안했을 때, 우리는 그러자고 했다. 여덟 명쯤 있었다. 우리는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그는 문을 닫고 불을 껐다. 나는 어두운 방 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후, 나는 내가 휴대폰 전원을 완전히 끄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폰은 내 뒷주머니에 있었고, 나는 오른쪽으로 몸을 틀어 그것을 끄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마치 어둠 속으로 확 밀려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미 삼십 초 넘게 완전한 암흑 속에 있었지만, 그동안 자세를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내 뇌는 여전히 거기에 빛이 있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의 자세, 그들과의 거리 같은 것들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조명이 꺼져 있었기 때문이다. 빛도 없고 반사된 소리도 없는 상황에서, 내 뇌는 오직 내 몸의 위치만을 기준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세가 바뀌자마자, 몸과 뇌, 빛과 어둠 사이를 연결하던 감각의 선이 끊겨버렸다. 갑자기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내 몸은 스펀지처럼 무르고 방향 감각을 잃은 듯했다. 방의 크기를 가늠할 수도 없었고, 누가 어디에 앉아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벽이 어디에 있는지, 내 팔꿈치와 엉덩이, 턱과 바닥 사이의 거리도 감이 오지 않았다. 나는 그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위치 없음’에 스스로를 맡겼다. 심장 박동 소리를 들을까 봐 두려웠고, 들릴지도 모르는 목의 혈류 소리, 귀에서 울리는 피의 흐름 소리에 떨렸다. 과연 나는 이 방에서 한 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 내 가슴 ���에서 죽음이 쿵쿵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제 막, 스스로를 해체하고 타인에게 넘기는 그 작업을 시작했을 뿐이었는데, 몇 분 뒤 스티브가 문을 열었다.
최근 나는 이와 유사한 감각에 대한 실험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어두운 방에서 손을 앞으로 뻗고, 밝은 섬광에 의해 그 손이 한순간 밝혀지면, 손의 잔상이 망막에 남는다. 마치 망막에 그을린 자국처럼. 이후 손을 내리면, 몸의 위치 감각을 담당하는 뇌는 손이 움직였다는 사실을 감지하지만, 시각을 담당하는 뇌는 여전히 잔상을 보고 있다. 이 두 감각은 서로 충돌한다. 그래서 뇌는 그 충돌을 해소하기 위해, 잔상을 스스로 지워버린다. 그 결과 우리는 잔상이 흐려지거나 허물어지는 듯한 모습을 보게 된다. 사람들은 그것을 ‘고스트 핸드’라고 부른다. 나는 가끔 춤이라는 것이 이 ‘고스트 핸드’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춤은 나로부터 만들어졌고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내가 아니다. 그것은 내 몸에서 태어난 나 아닌 나이고, 나는 그것을 만들어내고, 그것은 사라지지만, 동시에 어딘가에 남는다. 그것은 남아 있으면서도 쇠퇴한다. 달라붙으면서도 사라진다.

너무 느끼는 사람들과 너무 말하는 사람들
춤은 유연함, 주의 깊음, 그리고 타인과의 강한 감응력을 요구한다. 춤을 통해 우리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관찰하고, 그것을 다시 몸으로 옮기는 법을 배운다. 그건 곧, 내가 바라보는 것이 곧 나라는 어떤 깊은 수준의 인식을 동반한다. 이건 말보다 앞서는, 고유한 룬 문자 같은 언어로 구성된 대화다. 무용수들은 탁월한 직관력과 해석력, 그리고 대화를 많이 나누지 않고도 서로를 예측하고 함께 움직이는 능력을 지닌다. 자신의 작업에 집중하면서도, 집단 전체를 위한 방향—공공 선을 향해 나아가는 데 능하다. 이렇게 신체 기반의 직관적 사회 연대, 그 깊은 지성이 나로 하여금 무용수들이 UN을 운영해야 한다고 믿게 만든다. (물론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 UN이 여전히 존재한다면 말이다.)
무용수들은 어떤 대상이나 사람을 보았을 때, 그 본질을 빠르게 해체하고, 중요한 조각들을 분리해내며, 그것을 다시 현실에 구현할 수 있다. 그건 단순한 모방이 아니다. 구현이고, 활력이고, (재)창조다. 내 친구 중 한 명은, 영화 <몬스터>에서 샤를리즈 테론이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연기하는 에일린 워노스의 장면을 정확하게 재현해낼 수 있다. 그 친구는 그 영화를 단 한 번, 그것도 14년 전에 봤을 뿐인데 말이다. 그리고 롤러스케이트 없이도 완벽히 그 장면을 재현한다. 나는 그 장면을 말로 묘사할 방법이 없지만, 그 친구는 그 존재가 된다. 그리고 단 4초 만에 그 장면 속 캐릭터의 감정과 시각적 생명력을 모두 응축시켜 보여준다. 그 영화 전체가 그녀 안에서 살아난다. 내가 아는 많은 무용수들이 이런 능력을 갖고 있다. 당신이 언어로 설명할 수 없거나, 혹은 자신이 관찰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무언가를 그들은 불쑥 몸으로 보여준다. 그들이 어떤 사람을 구현할 때, 그 존재는 그들 안에서 진짜로 살아나고, 그들은 동시에 자기 자신이면서, 그 사람이 된다. 두 존재는 서로 구별되면서도 분리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구현이 끝나면, 그 인물은 사라진다—흩어지고, 무너진다. 그건 실제로 목격하면 믿을 수 없는 광경이다. 아직 본 적 없다면, 당신은 무용수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무용수들은 아마도 거울신경세포(mirror neurons)가 더 발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또 다른 감각으로 느낀다고 생각한다. 무용 창작자 리사 넬슨(Lisa Nelson)은 이것을 자신의 튜닝 스코어(Tuning Scores)라는 개념을 통해 체계화했다. 이 작업은 “관찰의 실천을 행동의 실천 안에 녹여내는 것”이다.
우선, 그것은 신체적인 것이다—튜닝은 하나의 행위다. 그것은 내 몸과 감각, 주의를 움직이게 한다. 그것은 감각적인 것이기도 하다—내 몸 안에서 그것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것은 관계적이다—세상과 내가 연결되는 방식이다. 그리고 구성적인 것이다— 세상의 요소들을 배열하는 일이다.
무용 교육가 카렌 콘 브래들리와 신경과학자 조세 콘트레라스 비달의 연구에 따르면, 무용수들은 안무의 물리적 움직임들을 소뇌(cerebellum)에 저장한다. 덕분에 전두엽(frontal lobe)은 해석, 창작, 문제 해결을 위한 공간으로 열리게 된다. 이건 총체적인 지능이다. 그리고 보니 베인브리지 코언은 이렇게 말한다. “마음은 바람 같고, 몸은 모래 같다. 바람이 어떻게 불고 있는지를 알고 싶다면, 모래를 보라.”
예술 평론가 앤디 호르위츠, 니나 호리사키-크리스텐스, 클레어 비숍, 에런 매톡스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최근 시각예술계가 ‘훈련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퍼포먼스’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이를 곧 진정성(authenticity)과 연결 짓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시각예술계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무용과 현대 연극의 역사에 대해 무지하다. 이 두 분야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비훈련된 몸’에 대한 철저한 탐구를 거쳐왔다. 무용은 일상적이고, 아마추어적이며,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움직임을 지칠 줄 모르고 파고들어 왔다. 가장 유명한 예로는 1960년대 초 ‘저드슨 댄스 시어터(Judson Dance Theater)’의 작업이 있다. 지금 무용계가 어떤 상태에 있냐면—오히려 퇴행 중이다. 형식주의를 다시 들여다보고, 그걸 실험적 구조로 재가공하고 있다. 무용은 이미 저드슨과 포스트 저드슨 유산을 이 시점 속으로 정련시켜 넣었다. 무용은 알고 있다—진짜 경험이 반드시 어떤 형식과 결합될 필요는 없다는 걸. 날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진짜인 것도 아니고, 정제되어 보인다고 해서 가짜인 것도 아니다. 많은 시각예술 전시장에서 자신들이 “무용”을 선보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많은 시각예술가들 역시 자기 작업에 “무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무용’은 마사 그레이엄이지, 리처드 무브는 아니기 때문이다. 무용은 여전히 고정된 호박 속에 박제된 원형, 즉 재해석되거나 갱신되는 지금-여기의 연속성 속에 있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지난 50년 동안 ‘현존’(human presence)에 대해 무용이 무엇을 혁신해왔는지를 잘 모른다. 그저 누군가를 자신의 작품에 등장시키고 그걸 “퍼포먼스”라 부르면 흥미롭다고 착각한다. 나는 무용, 퍼포먼스 아트, 연극, 퍼포먼스 전반이 전부 동일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 차이를 모르는 채 그것들을 사용한다는 것은, 결국 같은 거라고 여긴다는 것과 다름없다.
무용은 때때로 훈련과 테크닉을 강조한다 (어떤 종류의 무용이냐에 따라 다르지만), 그러나 언제나 경험에 관심을 둔다—그것이 동사든 명사든. 네가 어떤 무용을 하고 있든, 어떤 교육을 받았든, 혹은 훈련을 전혀 받지 않았든—그건 중요하지 않다. 무용에서 네 삶의 시간들, 스튜디오 안과 밖, 무대 위와 아래에서 보낸 시간은 작품의 재료이자, 그것을 다루는 도구로 여겨진다. 이 경험을 인지하고 다듬는 일이 무용의 기술이며, 그 인지를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편안하게 유지하는 능력은 수년의 훈련 없이는 불가능하다. 나는 그것을 ‘기술’이라 부른다— 무대 위 몸짓이 어떻게 보이든 간에. 경험은 목표이자, 대상이다.
한때, 그러니까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댄서’와 ‘안무가’라는 단어는 거의 구분 없이 쓰였다. 그게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어서였는지, 아니면 다들 둘 다 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무용에선 언제나 둘 다 하게 된다. 즉흥 퍼포먼스가 일상화되어 있었던 시대였으니까, 그 순간에 동시에 댄서이자 안무가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명확한 구분이 언제, 왜 중요해지기 시작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혹시 기금 신청서에 자기를 명확히 적어야 해서 그랬던 걸까? 아니면 경제가 회복되면서 다시 위계가 중요해졌던 걸까? 안무가는 댄서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존재로 간주되고, 작품의 ‘두뇌’로 여겨지며, 댄서는 단지 그 ‘몸’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남성 안무가들이 여성보다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더 큰 특권을 가지는 익숙한 여성혐오의 위계 안에서, 이건 또 하나의 익숙한 풍경이다. 남성 안무가는 신으로 여겨지고, 여성 안무가는 … 까다로운 사람으로 불린다. (그리고 이 지점이야말로 논바이너리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리 모두를 구원하는 경계선 중 하나다.)
무용이 가진 심리적 위험 중 하나는, 당신이 곧 당신의 작업의 실시간적 구현체라는 사실이다. 당신은 그 예술의 방법이자, 존재 그 자체다. 그래서 사람들이 당신의 예술을 판단하거나 비판할 때, 그건 단지 작품이 아니라 당신의 몸, 당신의 실존 자체를 평가하는 일이 된다. 화가는 갤러리 시간 내내 자신의 그림 옆에 서서 모든 댓글과 반응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하지 않는다. (물론 그런 작업을 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시각예술 맥락에서 벌어지는 퍼포먼스는 보통 ‘실시간이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갤러리 관람자들은 ‘실시간성(live-ness)’보다 ‘사물성(object-ness)’을 우선시하도록 훈련받았다. 그건 그들이 공간을 이동하고, 작품을 다루고,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 그리고 ‘관객’이라는 개념을 인식하는 방식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제도적 차원에서도 이는 퍼포머들이 ‘조각’ 그 이상이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 환경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화장실, 온도 조절, 휴식 시간,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임금, 그리고 때때로는 신체적 안전조차 필요로 하는 존재다.
시각예술 담론은 종종 그 제작자와 현저히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그 악명 높고 기묘한 아트스픽 (artspeak)은 표면상으로는 특정성을 강화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희석시킨다. 서사화. 가능성. 경계 지어진(boundaried). 무용에 적용하면, 의도적으로 비서술적인 듯 보인다. 실제로 그보다 더 비서술적일 수는 없다. 그건 거의 우울주의(depressionism)에 가깝다. 무용계에서 “프레젠터(presenter)”라 부르는 이를 시각예술계에선 “큐레이터(curator)”라 부른다. 그리고 그 단어를 ‘살아있는 사람’들이 하는 예술에 적용하는 순간부터 불편함은 시작된다. 그건 당신이 예술을 이해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로 평가하기 위해 설계된 언어다. 그 언어는 당신의 계급적 위치를 고정한다. 그 말을 구사함으로써, 당신은 그 세계 안에 들어가는 자격을 획득하게 된다. “경제성(economy)”이라는 말이 이 세계에서 말의 무게와 계급을 어떻게 생산하는지를 보면, 진짜 의미가 달라진다.
하지만 코드 스위칭은 무용의 일부다. 당신은 타인의 신체 언어, 창작 언어를 읽고 말하는 법을 배운다. 그래서 댄서들은, 그들의 정교한 두뇌-동기화 능력 덕분에 그 ‘예술 언어’를 따라잡을 수 있다. 무용은 오랫동안 ‘빈곤한 사촌’ 취급을 받아왔기에, 이제는 돈 많은 시각예술계의 인정을 받으려 하는 면이 있다. 뭐, 꼭 ‘받고 싶어’서라기보다, 사실 지금의 무용계는 시각예술계에 대해 아주 건전한 회의주의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박물관과 갤러리가 가진 지위, 지성, 이미지 권위에 대한 어떤 매혹은 존재한다. 그리고 비물질조차 상품화하는 안정성, 즉 사고팔 수 있는 예술이라는 믿음은 무용계에도 어딘가 매혹적으로 작용한다. 어쩌면 시각예술계는 추상적인 것을 상품화하고 시장화하는 능력이 더 뛰어난지도 모른다. 그게 그들이 무용에 관심을 두는 이유일 수도 있다. 퍼포먼스 아트가 도전이었다면, 댄스는 거친 거래(Rough Trade)다. 그리고 이 예술계는 속고 굴욕당하고, 소변을 뒤집어쓰고 채찍에 맞는 걸 즐기는 곳이다. 하지만 이건 아주 전형적인, 바닥에서 지배하기(topping from the bottom)의 사례다. 권력의 위임은 환상에 불과하다. 시각예술계는 자신들의 언어를 결코 내어준 적이 없다. 그곳엔 세이프워드가 없다.

해피 엔딩
유리공예는 적어도 언어 속에서 ‘역할놀이’ 같은 환상은 갖고 있지 않다. 이 세계의 전문 용어는 더럽고 훌륭하고, 꽤 훌륭하게 호모에로틱하다. 파이프를 글로리 홀(glory hole)에 집어넣은 뒤, 누군가의 엉덩이를 패들로 치고, 그들이 잭(jack)을 하고 나면, 블로우(blow) 해준다. 어느 날 내 강사가 이렇게 말했다. “글로리 홀에서 나와서 블로우, 잭, 블로우, 잭.” 나는 속으로 우리 반에 잭이라는 이름의 학생이 없었던 것에 대하여 감사를 표했다. 초급자 수업 중 하나는 학생들에게 애벌레나 눈사람을 만든다고 설명되지만, 미국 전역의 유리공예 강사들은 그들끼리 그걸 “애널 비즈”나 “버트 플러그”를 만든다고 부른다. 기타 용어로는 네킹(necking), 페깅(pegging), 플래싱(flashing), 웻팅 오프(wetting off) 등이 있다. 유리공예는 악명 높게도 마초적이고 섹시스트하며, 모두가 불과 장난치고 있으니, 그만큼 허세와 잘난 척도 넘쳐난다. 그들의 오만은 자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해서, 그걸 아예 표현하는 단어도 있다—“글래스홀(glasshole).”
무용계처럼 이 세계에도 여성은 많지만, 가장 유명하고 성공한 유리공예 작가들은 대부분 이성애자 남성이다. 물론, 유리공예에서 사용하는 “글로리 홀”이라는 단어는 슬랭보다 백 년 이상 더 오래된 표현이지만,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이 마초스러운 남자들이 이렇게나 호모에로틱한 언어를 오래도록 써왔다는 사실이—혹시 그들의 허세가, “글로리 홀에서 나온 뒤, 블로우해달라고 말하는 상황”에 대한 보상 심리는 아닐까? 흥미로운 점은 이거다. 유리공예는 남성이 지배하는 분야인데도, 이렇게 거세되고(emasculating), 호모적인(homo) 언어를 껴안고 있다. 그런데 정작 무용, 여성성이 강한 분야는 그 고유한 언어를 버리고 도구에 자신을 맞춰버렸다. 무용계가 최근 자주 쓰는 “퍼포머티브(performative)”라는 단어는 자기 언어를 주장하지 못한 실패의 증상이다. 사실 “퍼포머티브”는 본래 언어학 용어다. 어떤 말을 했다는 행위 자체가 사건을 발생시키는 문장을 말한다. “징역 25년을 선고합니다.” 이 말은 그 자체로 형벌을 ‘실행’한다. 또는 “약속해요.”라는 말은, 그 말이 약속이 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요즘 무용계 사람들은 “퍼포머티브”를 단지 “의식적으로 연기하는 것”, “공연 같은 것” 정도의 뜻으로 쓴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도. 이건 그냥 퍼포먼스다. “퍼포머티브”는 원래 완결성과 실행을 지향하는 단어지만, 무용은 풀려 있고, 변형 중이며, 고정되지 않은 상태에 머문다. 무용은 동시에 여러 층위에서 작동한다— 실현된 것과 상상된 것, 소환된 것과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것, 여기 있음과 없음, 방금 막 사라진 어떤 것. 실제의 손과, 유령의 손. 처음에는 “퍼포머티브”라는 말이 무용계 사람들이 박물관 사람처럼 보이려고 만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시각예술계가 먼저 잘못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게 더 말은 되었지만, 그걸 깨달았을 때는 더 우울해졌다. 왜 우리가 우리한테 이런 짓을 했을까? 왜 박물관이 우리 작업의 이름을 다시 짓도록 내버려뒀을까? 그리고 왜 우리 스스로 그 이름을 받아들였을까? 우리가 몇십 년 동안 계속해오던 그 일을 설명하는 말로 말이다. 나는 무용계가 자기 고유의 언어를, 자기가 가진 상품성의 일부로 선언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춤을 전시하고 싶다면, 무용의 언어로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언어는 무용을 위해 설계된 게 아니다. 무용 그 자체에서 나온 것이다. 무용은 스스로를 계급이나 신체 바깥의 언어로 설명하고 싶지 않다. 무용은 자기 자신의 글로리 홀 한가운데서 뜨겁게 존재하고 싶어 한다. (물론, 적당한 돈만 준다면 박물관 계단 위에 오줌도 싸줄 수는 있다.) 보니 베인브리지 코언은 이렇게 쓴다.
우리는 Body-Mind Centering® 안에서 서구의 해부학적 용어와 지도를 사용하지만, 그 단어들에 자신의 경험을 더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가 피, 림프, 혹은 그 어떤 신체 물질에 대해 말할 때, 단지 물질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질 안에 내재된 의식 상태와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경험을 이 지도들에 연결하지만, 지도가 곧 경험은 아니다.
녹아내리는 유리, 금속 파이프, 빗자루의 솔, 응고되는 피, 손의 감각, 소리 없는 어둠 속의 몸.
이 모든 것들은 또 다른 언어를 찾아가는 통로이며, 그 언어로부터 춤은 태어난다. 춤은 스스로 언어인 동시에, 스스로 하나의 예술 오브제이다. 퍼포먼스는 살아 있는 존재다. 녹고, 사라지고, 흐르며, 당신 바로 옆에서 피 흘린다. 그렇다면, 언어 역시 그래야 하지 않을까? 춤의 논리는 유동학적(rheologic)이다. 그렇다면, 그 언어도 녹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걸 실제로 말할 수 있는 언어, 진짜 ‘terms’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 나는 “프로타임” 테스트를 떠올린다. 중요한 순간은 피가 아직 움직이고 있고, 곧 멈추어 응고될 그 직전이다. 그 엔드 포인트. 형태가 변하고, 정지하려는 그 찰나를 감지하는 순간. 그때 당신은 그걸 보고, 그걸 알고, 그걸 언어로 말한다.
출처 : https://www.e-flux.com/journal/87/164528/the-glory-h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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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ss to impress, dress to see, dress to speak.
보여주기 위해 입어라, 보기 위해 입어라, 말하기 위해 입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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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이후의 삶에 대해서 상상해보자 (있을까?) 어떤 민주주의가 등장할지 지켜보자 (등장할까?) 내 삶이 어떻게 또 변화할지 고민해보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정말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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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에 대한 상상적 회복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유곽과 그 상업적 심급, 또는 그 정치적 포르노그래피란 정확하게 무엇인가? 이 순간을 체계적 분석의 질문이라고 부르자.
2. 이미지를 벗겨낸 것의 실제 흔적은 무엇인가? 이미지들에서 벗어난 정치적 진리가 가능할까?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것, 상상하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할까? 이 방법론적 시간은 예외의 시간이다. 이 예외를 정치적 경험이라 부르자.
3. 진리에 직면해서 누가 현재의 현사실성(facitcié)을 간직하고 있다고 간주할 수 있는가? 벌거벗은 권력, 익명의 권력의 이름은 무엇일까? 권력의 모호하고 보이지 않는 책임자는 누구일까? 이것은 이번에는 벌거벗은 권력을 가리키며, 격렬하게 필요하다면 이 권력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이 방법론적 시간은 분리[분리접속]의 시간이다.
4. 벌거벗은 권력의 상징물은 무엇인가? 현재 시간의 남근은 무엇일까? 이 방법론적 시간은 시적 분석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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