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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에는 어쩐지 일 년 동안의 내가 평가 받는 기분이 든다.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축하를 받느냐가 내가 그 동안 어떤 행실로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더 생일에 가까워 지면 경직이 되는 것이려나.
이모는 나에게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기꺼이 이야기 해주었지만 나는 여전히 거짓 없는 말로 엄마에게 태어나게 해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 말을 한 날을, 진짜 당차게 백퍼센트 진심의 말로 할 날을 기다리는거지.
오늘 이렇게 과분한 사랑을 받으며 나에게 사랑을 주는 이들로 부터 내 그릇이 넓어지는구나를 느꼈다. 이들이 내 작은 그릇 속에서 끝없는 발돋움으로 사랑을 주며 내 그릇을 넓히고 있구나. 그러니 나는 더 부지런히 사랑을 받아들고 달려야 되는 것이구나. 넓은 그릇으로 큰 세상을 받아내야 하는 것이구나 싶은 걸 느끼는거다.
그렇게 넓은 그릇으로 나를 품고 나의 모든 감정에 떳떳하며 더 이상 생일을 꺼리는 낯부끄런 어른이 되지 않겠다는 당찬 포부다. 나는 진짜 진실되고 싶고, 단단하고 싶고, 깊고 싶고, 넓고 싶다. 사소한 것에 휘둘리지 않고 싶다.
엄마는 나를 낳기 위해 밤을 새며 진통을 했고, 아빠는 나를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담배를 태웠고, 언니와 할머니는 새벽기도에 나가 기도하며 나를 기다렸다. 이렇게 수 많은 이의 기다림을 힘 얻어 나는 태어났다. 그런데 내가 내 생일을 가장 축하하지 못한다는 게 정말 큰 잘못처럼 느껴진다.
사실 그런 권리는 나에게 없는 것 아닐까. 내 안에 있는 기다림과 사랑의 주인들에게 나는 돌려주어야 하는 게 선택이 아닌 필수사항이 아닐까. 그래서 내가 그 새벽에 오랜 기다림 끝에 태어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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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운명을 믿는 편은 아니었거든 근데
오랜만에 신형철 책을 읽는 데 그 때 신간 소식을 알게 되기도 했고 너무 좋을 걸 아니까 살까말까 하다 안샀거든 근데
전 날 본 유튜브에서 소개해주는 말들이 너무 좋기도 했고 퇴근하고 갑자기 이 책을 내 생일 선물겸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 줘야겠다는 마음이 섰어 그래서 내 방앗간에 들려 이 책을 바로 사 들고 버스를 타서 첫 장을 펼쳤어 근데
이 책을 2022년 1월 5일에 태어난 한 사람 에게 선물하고 싶다는 문장을 읽자마자 갑자기 숨이 턱 막히고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책을 덮었어 그래서 내가 조금은 운명을 믿게 되었다는 말이야 그래서
기적같은 만남 절묘한 타이밍이라는 말들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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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이유가 거창할 필요는 없다 사소한 것 때문에 선택한 결과라고 해도 틀린건 아니야
꿈이란 건 색종이 같다고 생각했다. 처음 들고 있는 색종이 같은 꿈은 여러 현실에 치이고 치여 접히고 접힌다 그렇게 접힌 뒤에 남게 되는 형태가 내가 안고 살아야 하는 꿈이겠지 그러니 계속해서 안고 살았던 꿈이 접힌다고 해서 무서울 건 없지않나 마침내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니까
지난 팔월엔 이런 걸 썼더군요 종종 예전의 나에게 배울점을 찾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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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몇 번 펼치긴 했지만 쓰지 않고 덮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이제야 11월의 첫 일기를 쓰는 것이겠지.
가끔 삶이 너무 허망하게 느껴져 모든 것이 부질없다고 느끼는 날들이 존재했지만 조부투바키가 그랬던 게 생각이 나서 모든 게 부질 없다면 더 맹렬히 덤벼들어야겠단 생각을 했다.
매일같이 회화 강의를 듣는다. 매우 쉬운 단계부터 다시 듣고 있어서 주로 딴짓하며 듣긴 하지만 언젠가 내뱉을 날을 꿈꾼다. 프랑스어로 처음 내뱉고 그 말을 상대가 알아듣는 날엔 울어버릴지도 모르겠다.
요즘 부쩍 별이 많이 보인다. 며칠 전에는 너무 많이 보여서 이게 왠지 허망히 세상을 등지게 된 이들인 것만 같아서 눈물이 날 뻔했다. 응암역에 설치 된 분향소에 분향은 하지 않고 매일 눈으로 좇기만 했는데 이걸 애도의 마음이라 할 수 있으려나.
점점 희망이 사라지는 곳에서 나는 어떤 희망으로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 희망을 품는 것이 헛된 일이며 괜한 체력낭비라 생각되지 않는 곳으로 가고싶다. 여긴 계속 절망만 더해지는 것 같아서.
그럼에도 우리는 살어서 등을 맞댄다. 맞댄 등으로 내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온기로 나누는거다. 세상에 등을 질지라도 나와 등을 맞댄 이들에게 등을 돌리고 싶지는 않다. 나는 언제까지 여기에 이렇게 존재할 수 있으려나
11/6,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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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너무 부끄럼이 많아서 왔다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 모습을 감춘다.그래서 가을은 더 조용하고 은밀하게 향유해야한다.
조금이라도 기회가 있을 때 더 걸어야 하고 더 많은 하늘을 올려다 봐야하고 온 몸으로 피부로 가을을 맡아야 한다.
섣부르게 가을이 왔다! 외치고 이제부터 누려야지 하면 가을은 부끄러워 도망치기 때문에 미루지 않고 지금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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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이는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강아지였다. 그 동안 가까이 지낼 강아지가 주변에 없거나 주로 내가 겁을 먹고 가까이 가지 못하는 형태였었다.
초보의 마음인 내가 사랑하기에 콩이는 절묘했고 친절했다. 줄곧 짝사랑의 기간들이었어도 나는 열심히 콩이의 눈의 투명한 눈동자를 봤고 동그란 머리에 코를 박고 있곤 했다.
그런 콩이가 사고가나서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는 연락을 받은 날에 나는 계속 울었다. 좀 처럼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서 며칠 내내 목이 메었다. 그러다 내가 이만큼 슬퍼해도 되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콩이와 많이 만나도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짧은 시간동안 본 게 전부인데 내가 이렇게 많이 슬퍼도 되는건지 괜한 오버는 아닐지 하는 마음이 서서히 피어났다.
이제와서 깨닫는 건 슬픔과 행복의 크기는 누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 내가 슬프면 슬픈거고 행복하면 행복한거다 이 정도 사이이니까 이정도만 아파야 하고 그 이상 아파하는 건 거짓말이라고 말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 내가 나의 상태를 믿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 크기에 맞는 위로와 응원 같은 것을 해주는게 내가 나로써 마땅히 해줘야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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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는 출근하다 잘린 나무를 봤어
산책하던 사람들도 이 앞에서 잠깐씩 머무르다 가더라 그게 되게 묘했어 나도 이 앞에 서서 사진을 찍고 나무의 안녕을 빌었어 부디 제 멋대로인 인간을 이해해줘
다음 생엔 인간이 안되었으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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