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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20200813
나는 나를 구하려고 일기를 쓴다. 지금은 새벽 2시 44분이고 굉장히 위험하다. 갖가지 생각이 감성과 더불어 나를 어디론가 데려 가버릴 수 있는 시간이므로 나는 일기를 쓴다. 뭐라도 해야겠어서 일기를 쓴다.
일기는 어쩌면 구조 요청이다. 평소엔 아무데서나 징징댈 수 없으므로 글로써 징징대는 것이다. 어른이 되면서 내가 박탈당한 것은 자기연민의 표출이다. 누군가에게 더 이상 내가 나를 얼마나 불쌍히 여기는지를 토로할 수가 없다. 그것은 책임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된 데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은 내가 내 얼굴에 침 뱉는 격이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도 해결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은 필히 셀프라는 것을.
일기에다가 구조 요청을 하다보면 내 자신을 전부 쏟아내게 된다. 나는 이렇습니다. 지금 이런 상황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주 별로인데요. 이걸 다 읽고도 당신은 나를 계속 만나주실 겁니까? 당신이 나를 감당할 수 있는 깜냥은 어느 정도입니까? 나는 당신에게 얼마큼 사랑스럽습니까? 나에게 줄 아량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나를 사랑하긴 하는 겁니까? 당신이 나에게 보이는 태도가 진심입니까? 이래도 나를 눈감아주시겠습니까? 하는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자 당신이 나에게 가진 애정에의 확인이다. 이런 내가 싫으시다면 일찍 돌아가십시오. 나는 이제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습니다. 관계에 삽질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고 경고문을 붙이는 것이다.
잠이 잘 안 오고 숨이 잘 안 쉬어지며 왜 살아야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생에 의지는 있긴 있다. 무엇이 행복인지 잊어버린 지 좀 됐다.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은 지도 좀 됐다. 나는 나를 구하기 위해 일기를 쓴다. 지금 이것은 구조 요청이고 지금은 새벽 3시 4분이다. 일기를 써서 조금 덜 위험해졌고, 뭐라도 해서 나는 어디도 다녀오지 않았다.
나는 계속 일기를 쓸 것이고 이 일기를 쓰는 내가 나를 구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내가 나를 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는 내가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는 내가 다시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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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뜨, 그 사람의 몸 (<사랑의 단상>, p.108~109)
몸 CORPS. 사랑하는 이의 몸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야기되는 온갖 상념, 두근거림, 호기심
1. 그의 몸은 분리되었다. 그의 살갗, 눈과 같은, 부드럽고, 열띤, 그 자신의 몸과 간략한, 억제된, 발작적으로 멀어지는 그의 목소리, 자기 몸이 부여하는 것을 부여하지 못하는 그의 목소리. 또는 그의 부드러운, 따뜻한, 적당히 물렁물렁한, 솜털 덮인, 어색해하는 몸과 그의 낭랑한, 세련된, 사교적인 목소리―목소리, 언제나 목소리.
2. 때로 한 상념이 떠오른다. 오랫동안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캐기 시작한다(마치 프루스트의 화자가 잠든 알베르틴의 모습을 쳐다보며 그랬던 것처럼). ‘캐내다(scruter)’는 ‘뒤진다(fouiller)’는 뜻이다. 나는 그 사람의 몸 안에 무엇이 있나 보려는 듯이, 내 욕망의 무의식적인 원인이 상대방의 몸에 있다는 듯이, 그 사람의 몸을 뒤진다(나는 시간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자명종을 분해하는 아이와도 같다). 이 작업은 놀랍고도 냉정한 방식으로 행해진다. 갑작스레 더 이상 겁내지 않게 된 이상한 곤충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나는 침착하고 주의 깊다. 몸의 몇몇 부분은 특히 이런 관찰에 적합하다. 속눈썹, 손톱, 모근, 부분적인 것들. 그때 내가 사자(死者)를 물신화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내가 캐내는 몸이 무기력한 상태에서 벗어나 ‘무엇인가를 하기 시작하면,’ 내 욕망이 변한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이를테면 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볼 때, 내 욕망은 변태적이기를 그치고, 다시 상상적인 것이 된다. 나는 하나의 이미지, 하나의 전체로 되돌아간다. 나는 다시 사랑한다.
(나는 그의 얼굴, 그의 모든 것을 냉정하게 다 보았다. 속눈썹, 엄지발톱, 성긴 눈썹, 엷은 입술, 눈의 광채, 얼굴에 난 점, 담배 피우며 손가락을 펼치는 모양 등. 나는 이 유리 같은 일종의 채색 도기상에 매혹되었다. 그런데 매혹이란 결국 극단적인 일탈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 상에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내 욕망의 원인’을 읽을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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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영, 배틀그라운드―일어나는 일이 스스로에 관해 말하다
왕밍밍: 허리에 찬 그것은 뭐니?
송경련: (셔츠를 풀어 가슴에 엇갈려 부착한 주황색 전극을 보여준다) 휴대용 심전도 기계
왕밍밍: 저리 치워, 무슨 일이 일어��� 것만 같아
송경련: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나서 붙인 거야
*
의사의 소견: 건강한 인간의 심장 그래프를 기준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작은 사람에게 당신의 땅을 걷게 시키세요
1분 동안 지형을 탐색하도록 두고 작은 인간을 관찰합니다
68개의 구렁텅이와 발 빠짐과 70회에서 100회의 자잘하지만 거슬리는 돌부리들 그리고 돌아가야 하는 거대한 산을 가진 지형이라면
작은 사람이 68차례 발이 빠지고, 70번에서 100번 발 걸려 넘어진 다음, 모험심을 자극하지만 단념을 연습하게 만드는 거대한 산 앞에서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면
타인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걷는 경험을 선사할 수 있다면 당신은
아직 뛰는 심장을 가진 겁니다
*
심전도는 인체의 전기적 변화를 기록하며 더 이상 누군가 발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
송경련과 왕밍밍은 지형을 탐색하는 작은 인간을 보고 있습니다 작은 인간은 작은 구렁텅이 앞에 서 있습니다 이들 듀오는 작은 사람의 표정을 보며 말합니다 왕밍밍이 휴대용 심전도 기계에 묻은 먼지를 관찰하고 있네요 지금 이 장면이 아름답다면 아름다움은 실수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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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영, 배틀그라운드―사운드
송경련 바닥에서 소음기를 줍다 숨기다 원래 소리가 작은 인간인 척하다 누군가는 숨는 게 체질에 맞다 송경련은 자신을 암호로 사용한다 좀 더 어려워지고 싶어서 그랬다 소음기를 바닥에서 주웠다 희미해지고 싶어서 그랬다 왼쪽이 나한테 오려고 해 왼쪽이 나한테 오려고 해 왼쪽이 나한테 오려고 해 너는 꼭 세 번 말해야 진정한다 누군가는 자신의 위치를 들키지 않는 게 체질에 맞았다 밀베 외곽으로 걸어가다가 송경련 왕밍밍을 떠올린다 너는 파의 흰 부분만 먹으며 물개 박수를 잘 친다 한가로운 뒤통수 겨냥에 익숙해지다 소음기로 인해 와닿지 않는다 사랑하는 인간의 이름은 소원이라고 바꿔 부른다 이루어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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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영, 배틀그라운드―저그 에비게일 SP의 시절
내면의 하차 벨을 누르고
나는 나에게서 내릴 겁니다
누가 얼굴을 찡그려서
다른 누군가 구겨졌네
미소에 차질을 빚다
눈 내리는 전쟁터에서
인간들이 닥치는 대로 키스한다
입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도망간 것이다
그런 일이 에비게일이 살던 시절에는 종종 일어난 것이다
미소 때문에 낙오된 자
자기장 밖에서 무기력을 배운다
키스 후
누가 내 입에 두고 간 찌꺼기
뱉자
전지 커버 세 장
미소가 바닥을 친다
썩은 집은 다루기 쉽지
전쟁터의 집은
남김없이
살을 발라 먹은 생선 같아
미소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자는 바보다
초조함을 선점하는 자는 게임에서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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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뜨, 사랑의 단상
이미지 (p.192~194)
이미지 IMAGE. 사랑의 영역에서 가장 생생한 아픔은 아는 것보다 보는 것에서 더 많이 온다.
1. (“탈의실에서 돌아오면서 갑자기 그는 서로 몸을 기대며 다정하게 속삭이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다.”)
이미지는 드러난다. 그것은 한 통의 편지만큼이나 선명하고도 순수하다. 그것은 내게 아픔을 주는 편지다. 분명하고도 완전한, 공들인, 결정적인 그것은 내게 어떤 자리도 남겨놓지 않는다. 열쇠구멍의 테두리 안에서 잘려진 채로만 존재하는 그 원초적 장면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는 이미지에서 제외된 것이다. 바로 거기에 이미지의, 모든 이미지의 정의가 있다. 이미지란 내가 제외된, 바로 그것이다. 사냥꾼의 모습이 우거진 덤불 속에 슬그머니 그려진 퍼즐의 그림과는 달리, 나는 장면 속에 있지 않다. 이미지에는 수수께끼가 없다.
2. 이미지는 단호하며, 항상 결정적인 말을 한다. 어떤 앎도 그것을 반박하거나 조정하며 얼버무릴 수 없다. 베르테르는 로테가 알베르트와 약혼한 사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또 그 사실로 인해 별로 괴로워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알베르트가 그녀의 가냘픈 몸을 껴안는다고 생각만 하면 온몸이 떨리는 것이었다.” 나는 로테가 내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라고 베르테르의 이성은 말하고 하지만 그래도 알베르트는 내게서 그녀를 훔쳐간 거야라고 눈앞의 이미지는 말한다.
3. 내가 제외된 이미지들은 모두 잔인하다. 그러나 때로 그 이미지에 사로잡히기도 한다(역전). 그 사람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남겨놓고 떠나야 하는 카페의 테라스로부터 멀어지면서, 나는 등이 구부정한 채 홀로 황폐한 거리를 걸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나의 제외됨을 이미지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내 부재가 거울에서처럼 반사된 이 이미지는 서글픈 이미지이다.
낭만주의 계열의 한 그림은 극광에 비친 얼음조각 더미를 보여준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살지 않는 황량한 공간.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텅 빔은 내가 조금이라도 사랑의 슬픔에 사로잡히기만 하면, 내가 거기에 투사하기를 바란다. 얼음 더미 위에 앉은 채 영원히 버려져 있는 조그만 형상, 그것이 바로 내 모습이다. “추워요. 우리 돌아가요”라고 사랑하는 사람은 말하지만. 거기에는 어떤 길도 나 있지 않고, 배는 이미 부서졌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느끼는 ‘특별한 추위,’ 그것은 어머니의 체온을 필요로 하는 아이(남자 혹은 동물)의 추위타기와도 같은 것이다.
4.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관계의 ‘형태들’ 혹은 그 이미지들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이 형태라 명명하는 것을 나는 힘으로 체험한다. 마치 강박관념자에게서 사례가 곧 사실을 의미하는 것처럼, 이미지는 ‘사실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예술가이다. 그리고 그의 세계는 그 안에서 모든 이미지가 그 자신의 결말인(이미지를 넘어서서는 아무것도 없다) 도치된 세계다.
정보제공자 (p.201~203)
정보제공자 INFORMATEUR. 다정하면서도, 그러나 사랑하는 이에 대한 하찮은 정보를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슬쩍 흘림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이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를 교란시켜 상처를 주는, 그런 지속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
1. 귀스타브·레옹·리샤르가 한 패를, 위르뱅·클로디우스·에티엔·위르쉴이 다른 한 패를. 아벨·공트랑·앙젤·위베르가 또 다른 한 패를 이루고 있다(이 이름들은 일종의 인명서라 할 수 있는 지드의 《팔뤼드》에서 빌린 것이다. 그렇지만 어느 날 레옹은 위르뱅을 알게 되고, 또 위르뱅은 앙젤을 알게 된다 그런데 앙젤은 이미 레옹을 조금 알고 있었다 등등. 이렇게 해서 하나의 성좌가 형성된다. 각자는 어느 날 그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별과 관계를 맺게 되고, 그리하여 그 별과 더불어 다른 모든 별들에게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고, 마침내는 모든 것이 일치하기에 이른다(바로 이것이 저 거대한 혼란의, 우스꽝스런 소극들의 그물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움직임이기도 하다). 사교계의 우정이란 전염병과도 같아 모든 사람이 앓는 그런 병이다. 지금 내가 이 그물 안에 사랑하는 이와 더불어 순수하고도 물들지 않는 공간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는 한 고통스런 주체를 풀어놓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그물의 활동, 그 정보 교환, 그 열광, 그 주도권은 그만큼 많은 위험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리고 이 인종학적 마을이자 거리의 코미디, 친족 관계의 구조이자 우스꽝스럽고도 복잡한 구성의 희극(imbroglio)인 이 작은 모임 한 가운데에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말하기에’ 분망한 정보 제공자가 우뚝 서 있다.
정보 제공자란 순진한 사람이든 악랄한 사람이든 간에 부정적인 역할을 맡게 마련이다. 그가 건네주는 (어떤 질병처럼) 메시지가 비록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는 나의 그 사람을 그저 단순한 어떤 사람으로 축소시키고 만다. 물론 나는 그의 말을 들을 수밖에는 없지만(사교적인 예의상 짜증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으므로), 내가 들은 그 말을 흐릿하고도 배어들지 않는, 무관심한 것으로 만들려고 애쓴다.
2. 내가 원하는 것은 ‘우리 둘만이(nous deux)’ (이것은 프랑스의 한 감상적인 잡지의 이름이기도 하다) 사는 작은 우주이다(그것의 시간과 논리를 가진). 그러므로 외부로부터 오는 것은 모두 위협이다. 그것이 권태의 형태로 오든(만약 그 사람이 부재하는 세계에서 내가 살아야 한다면), 또는 상처의 형태로 오든(만약 이 세계가 그 사람에 대해 무례한 담론을 한다면).
정보 제공자는 나에게 별 대수롭지 않은 정보를 넘겨주면서 하나의 비밀을 드러나게 한다. 이 비밀은 심오한 것이 아닌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며, 나에게 감추어졌던 것도 바로 그 사람의 이 외부이다. 막은 거꾸로 열린다. 내밀한 장면이 아닌 관중석에서. 그 정보의 내용이 무엇이든간에 그것은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흐릿하고도 배은망덕한 현실의 파편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진다. 사랑의 부드러움에 비해 모든 사실은 공격적인 양상을 띤다. 한 조각의 ‘지식’이, 비록 평범한 것이라 할지라도 상상계를 침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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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영, 배틀그라운드―어떤 감정은 이렇게 소개되었다
발견된 감정은 15-18페이지에 이릅니다
분량이 넘치는 큰 감정을 비난해보는 겁니다
그것으로 무서운 잠을 표현하고
녹슨 드럼통과
총알 자국이 난 트레일러
찢긴 닭 사료 자루를 찾아가 사정해보는 겁니다
분량을 위해 정면화하세요
내가 도망가는 모습은 질리지가 않네요
이제 어떤 감정이
차질 없이 진행될 거예요
사녹은 건물 존버가 어려운 맵이니
바깥으로 나가십쇼
농담으로 인생을 표현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밖으로 나가서 부딪히는 겁니다
밤이
납작 엎드려서 뒤에
서 있던
낮이
나타났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계속 엎드려 있으십쇼
다시는
일어나지 마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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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영, 배틀그라운드―사과
게임 시작 59초 전
총격전이 난 집을 멀리서 보면
사람들이 집을 쏴 죽이고 있는 것 같아
게임 시작 52초 전
한 알의 사과를 하늘을 향해 던진 다음
또 한 알의 사과를 던져
맞추면
처음의 사과는
영영
땅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게임 시작 48초 전
게임 시작 전에 기절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일 것이다
게임 시작 45초 전
그러나
예상치 못했다는 이유로
관심을 끌 수는 있다
게임 시작 44초 전
작은 TV가 켜져 있다
의자가 넘어져 있다
붉은 소파가 있다
게임 시작 42초 전
비라니
게임 시작 41초 전
비가 올 수 있어?
게임 시작 40초 전
나는 사과 한 알을 든 곤고한 자
게임이 시작되면
사람들이
나를
보고도 모른 척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게임 시작 39초 전
작은 TV
드러누운 침대
붉은 소파
그런데 소파가 집 밖에 있으면
왠지 불안해
게임 시작 35초 전
사과를 던진다
게임시작 33초 전
침대에게 타살당한 분 손 들어보세요
게임 시작 31초 전
그러나 비 오는 날은 좋지
정수리가 겸손해 보이잖아
게임 시작 29초 전
떠들 수 있을 때 마음껏 떠들어
게임 시작 27초 전
애정의 문제 발생
게임 시작 25초 전
난 안 죽어
난 안 죽어
난 안 죽어
너는 꼭 세 번 말한다
게임 시작 24초 전
한 번 말하면 알아듣지 못하고
두 번 말하면 알아들어버리고
세 번 말하면 다시 알아듣지 못하게 된다고
믿기 때문에
게임 시작 21초 전
총격전이 난 집을 밖에서 보면
집이 사람들을 쏴 죽이고 있는 것 같아
게임 시작 18초 전
사과를 던져
게임 시작 15초 전
사과는 아닌 곳으로
게임 시작 12초 전
너는 전기가 나가듯 자버린다
게임 시작 9초 전
하늘로
날려버린
사과에 적힌 작은 글씨
게임 시작 8초 전
어떤 부분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지
너무 자세히 말하진 마
게임 시작 7초 전
나를 계속 사랑해줘
당신이 누구인지만
들키지 말고
게임 시작 4초 전
작은 TV
먼지 쌓인 매트리스
붉은 소파
게임 시작 3초 전
게임이 시작되지 않았는데 사람이 죽었다면
게임 시작 1초 전
사과 한 알로
막을 수 있다고 믿기도 합니다
시작 같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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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영, 배틀그라운드―왕밍밍이 기억하는 송경련과의 첫 만남
왕밍밍
정신과에서 약을 받아 왔다
잘못 딸려 온 남의 약 한 포
(누가 가위질을 잘못해서 둘을 이어버린 것이다)
“영혼의 짝을 찾았다!”
왕밍밍
거리 한복판에서 환호해버린 것이다
모자의 귀덮개가 바람에 팔랑였다
담배를 꼬나물었다
이게 진짜 내 약일지도 몰라
*
담뱃진이 묻은 입술은 부서진 난간과 거의 가까워 보인다
그녀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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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영, 도끼를 든 엉덩이가 미친 사람
그는도끼를든엉덩이가미친사람이다그사람이내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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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고구마에 가깝다 팔다리가 없고 온몸이 멍이다 온몸이 멍으로 뒤덮인 고구마는 멍 위에 멍을 얹어도 티나지 않는다 그것이 침대에 누워 있다 팔다리는 없고 이마가 넓다 얼굴 한복판에는 끈 풀린 운동화 크기의 상처가 있다 상처는 운동화 고무 밑창 깊이 정도로 함몰되어 있다 그것은 팔다리가 없고 머리카락이 길다 이마 위로 내려오는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길다 이마 위로 내려오는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아물지 않은 축축한 상처 위에 들러붙는다 들러붙은 채 그 위에 딱지가 내리면 영영 꺼낼 수 없다 병균은 아주 자그마하고 치사해, 그것은 입이 없으므로 이 말은 그것이 아닌 다른 무엇이 한 말이거나 상처가 지껄이는 말이다 어두운 집 구석을 밝혀 나무 계단을 오르듯 촛불을 켜 상처의 주위를 밝힌다 새벽 지하철의 물품 보관함처럼 상처가 잠잠하다 잠잠한 가운데 간헐적으로 느닷없이 피를 뿜어내기도 한다 침묵은 어딘가 발작적인 면을 숨기고 있으므로 자극해선 안 된다 새로 뿜어낸 피가 상처의 테두리를 넘어간다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흘러 다닌다 머리카락은 피에 젖어도 검다 피가 선을 넘었어, 아주 더러운 상처야, 이런 말은 아무도 하지 않고도 저절로 들린다 상처는 손바닥 두께만큼밖에 깊지 못해서 하늘빛으로 빛난다 풀숲에 숨은 늙은 버섯처럼 하얗고 잠잠하다 촛불을 켜 상처를 밝힌다 피가 흥건한 이마 위로 머리카락이 내린다 시간이 흐른다 그것은 아직 빠질 준비가 덜 된 머리카락이 머지않아 빠질 준비가 된 머리카락으로 변한다는 의미다 머리카락은 처음부터 죽어 있다 시체 분해 박테리아가 관심을 가질 부분이 없을 정도로 죽어 있다 처음부터 죽어 있는 머리카락이 상처 위로 내려오고 상처와 한 몸이 된다 테두리가 명확한 상처다 테두리로 인해 그것은 한정된 고통만을 느낀다 촛불로 상처를 밝힌다 상처의 크기에 따라 느낄 수 있는 고통의 양에 제약이 따른다 피가 흐른다 온몸의 피를 뽑는다면 팔 센티미터의 못 하나를 얻을 수 있으며 그것은, 그것이 걸어 다니던 시절 즐겨 쓰던 모자 하나를 걸기에 적당한 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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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뜨, <사랑의 단상>
동일시 현상 (p.188~191)
동일시 IDENTIFICATION. 사랑의 구조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와 동일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또는 작중 인물) 누구든지 그에게 자신을 고통스럽게 동일시한다.
1. 베르테르는 모든 실패한 연인에게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는 로테를 사랑하다 한겨울에 꽃을 꺾으러 가는 그 광인이요, 과부를 사랑하다 자신의 연적을 죽인 그 하인이다. 베르테르는 하인을 위해 중재하려 하지만, 그가 체포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불행한 사람아, 어떤 것도 자네를 구할 수 없다네.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네.” 동일시 현상은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의 구조적인 조작일 뿐이다. 나는 나와 동일한 위치에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라는.
2. 나는 모든 사랑의 망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내가 차지할지도 모르는 그 자리를 식별해 본다. 그때 내가 인지하는 것은 어떤 유추(analogie)가 아닌 상동(homologie)이다. 이를테면 Y…가 Z…에게 그 무엇이라면, 나 또한 X…에 대해 마찬가지이며, 따라서 비록 Y…가 나와는 무관한,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Y…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모두 내 가슴 깊숙이 와닿는다. 쌍수적인 구조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자리를 이동해 가며 나를 사로잡는 그런 거울에 붙잡힌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경우이다. 그런 상황은 그것이 내포하는 심리적인 만족감이나, 그 파생 작용에 의해 내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사랑받지 못한 채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서 나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며, 내 불행의 몸짓조차 되찾게 된다. 그러나 이 경우 이 불행의 능동적인 행위자는 바로 나 자신이며, 그리하여 나는 동시에 자신이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바로 이 상동 관계에 의해 연애 소설이 팔리며, 또 만들어지는 것이다.)
3. X…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욕망과 영합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입장이 되어 본다. 마치 베르테르가 로테를 미치도록 사랑했던 그 꽃의 광인 하인리히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나는 이 구조적 관계(하나의 점수를 기점으로 배열되는)를 이내 인간성이란 개념으로 상상하기에 이른다. 꽃의 광인 하인리히와 나는 동일한 입장에 처해 있으므로, 나는 다만 그의 자리에만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미지에도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착란이 나를 사로잡는다. ‘내가 바로 하인리히이다!’라는 이 일반화된 동일시 현상은 그 사람을 둘러싼, 그리고 나처럼 그의 혜택을 입은 모든 사람들에게도 확대되어, 내게는 이중으로 고통스럽다. 그것은 나를 내 스스로의 눈에 폄하시키며(나는 이런저런 인간성의 소유자로 축소된 자신의 모습을 본다), 또한 한 무리의 경쟁자들의 무기력한 놀림거리가 된 그 사람을 폄하하는 것이다. 그때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각자는 “내 것, 내 것!”이라고 외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모습은 마치 한 무리의 아이들이 공이나 수건, 또는 그 어떤 것을, 간단히 말하면 사람들이 그들에게 던진 물신을 서로 가지려고 다투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처음에 가진 사람이 갖게 될 것이다’ (예전 이 놀이는 보물찾기(gribouillette)라고 불리었다.)
구조는 인간성이라는 것과 무관하다. 그래서 끔찍하다(관료주의처럼). 사람들은 구조를 향해 애원할 수도, “내가 H…보다야 훨씬 낫죠”라고 말할 수도 없다. 준엄한 구조는 “당신은 H…와 동일한 입장에 있으므로 당신이 곧 H…이다”라고 대답한다. 어느 누구도 구조에 맞서 항변(plaider)할 수는 없다.
4. 베르테르는 꽃의 광인과 하인에게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리고 그 독자인 나는 베르테르에게 동일시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마치 그들 자신이 베르테르인 것처럼 괴로워했고, 자살을 했고, 똑같은 옷차림과 향수를 사용했고, 또 글을 써왔다(베르테르식의 소영창곡, 애가, 사탕 상자, 벨트의 버클, 부채, 화장수). 일련의 긴 등치 관계(equivalence)가 이 세상의 모든 연인들을 한데 묶어놓은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문학 이론에서 ‘투사(projection)’ (작중 인물에 대한 독자의 투사)라는 개념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모든 상상적 독서에 고유한 특성이다. 따라서 한 권의 연애 소설을 읽으면서, 거기에 자신을 투사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미지에 밀착하여, 책 끝까지 그 이미지 속에 갇혀 있어야 한다(이런 종류의 소설들이 고립·칩거·부재·쾌감의 상태에서, 이를테면 화장실 같은 곳에서 읽혀진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알 수 없는 것 (p.195~197)
알 수 없는 것 INCONNAISSABLE. 사랑의 관계에 대해 특별히 알고 있는 사실들과는 무관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성격이나 심리적인 것 혹은 신경증적인 유형에 의해 사랑하는 이를 ‘그 자체로서(en soi)’ 이해하고 정의하려는 노력.
1. 나는 이런 모순에 사로잡힌다. 나는 그 사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고, 또 그에게 그 사실을 의기양양하게 시위한다(“난 당신을 잘 알���요, 나만큼 당신을 잘 아는 사람도 없을걸요!”). 그러면서도 나는 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도, 찾아낼 수도, 다룰 수도 없다는 명백한 사실에 부딪히게 된다. 나는 그 사람을 열어젖혀 그의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수수께끼를 풀어헤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는 어디서 온 사람일까? 그는 누구일까? 나는 기진맥진해진다. 나는 그것을 결코 알지 못한다.
(내가 알았던 모든 사람들 중에서도 확실히 X…는 가장 헤아리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 이유는 내가 그의 욕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데 있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의 욕망을 아는 것, 단지 그것이 아닐까? 나는 Y…의 욕망의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알아보았다. 그러자 Y…는 내게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으로 보였다. 나는 그를 더 이상 공포 속에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듯 관대하게 사랑하게 되었다.)
반전(retournment): “아무리 해도 당신을 잘 모르겠어요”라는 말은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라는 뜻이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해독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나 역시 당신을 해독할 수 없는 것이다.
2. 알 수 없는 대상 때문에 자신을 소모하고 동분서주하는 것은 순전히 종교적인 행위이다. 그 사람을 하나의 해결할 수 없는 수수께끼로 만든다는 것은―거기에 내 일생이 걸려 있는―곧 그를 신(dieu)으로 축성(祝聖)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그가 던지는 질문을 결코 풀어헤칠 수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오이디푸스가 아니다. 따라서 내게 남은 일이라곤 내 무지를 진실로 바꾸는 일뿐이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사랑의 행위를 통해 내가 체득하게 되는 지혜는, 그 사람은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그의 불투명함은 어떤 비밀의 장막이 아닌 외관과 실체의 유희가 파기되는 명백함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미지의 누군가를, 그리고 영원히 그렇게 남아 있을 누군가를 열광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신비주의자적인 움직임: 나는 알 수 없는 것의 앎에 도달한다.
3. 또는 그 사람을 정의하려는 대신(“그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나는 내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당신을 알려고 하는 이 나는 무엇을 원하는 걸까?” 당신을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힘으로 정의하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나 자신을 당신의 힘과 맞선 또 하나의 힘으로 설정하려 한다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내게 주는 고통이나 즐거움에 의해서만 정의될 것이다.
“누구를 원해야 할지 가르쳐 주세요” (p.198~200)
귀납 INDUCTION. 누군가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의 대상이 탐난다고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원해지는 것. 사랑의 욕망이 아무리 특이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귀납에 의해 드러난다.
1. 베르테르가 사랑에 빠지기 얼마 전에 그는 과부에 대한 열정을 고백하는 한 젊은 하인을 만난다. “이 충실한 애정의 이미지는 어딜 가나 나를 따라다녀 나 역시 그 불길에 휩싸인 듯 초췌하며, 쇠진해 간다네.” 이 일이 있고 난 후 이번에는 베르테르의 차례로, 로테를 사랑하는 일만이 남아 있다. 그리고 로테 역시 베르테르가 그녀를 보기 전에 이미 가리켜졌다. 무도회로 가는 마차 안에서 한 친절한 여자 친구가 로테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말해 주었던 것이다. 이렇듯 사랑을 받게 될 몸은 그것에 가까이 접근시키고 확대하여 주체로 하여금 코를 갖다대게 하는 일종의 줌(zoom) 효과를 내는 카메라 렌즈에 의해 미리 포착되고 조정된다. 그것은 어떤 능숙한 손길이 내 앞에서 어른거리��� 하다 나를 최면시키고 사로잡는 그런 ‘반짝이는(scintillant)’ 물건이 아닐까? 이런 ‘감정적인 전염’은, 이 귀납은 타인·언어·책·친구들로부터 온다. 독창적인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대중 문화란 욕망을 가르쳐 주는 기계이다. 그것은 “여기 당신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마치 인간이 혼자서 욕망의 대상을 발견하는 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는 것처럼.)
사랑의 모험이 어려운 점은 “누구를 원해야 할지 가르쳐주세요, 그리고 나선 곧 사라져 버 리세요”라는 데에 있다. 가장 친한 친구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모든 연적은 처음에는 스승·안내자·흥행자·중계자였다.
2. 당신의 욕망이 어디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그것을 조금 금지하기만 하면 된다(금지 없이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사실이라면.) X…는 내가 그를 조금 자유롭게 내버려두면서 그의 곁에 있기를, 때때로 자리를 비우면서도 ‘멀리 가지 않는’ 그런 유연성을 갖기를 바랐다. 즉 내가 금지로서는 현존하지만(금지 없이는 좋은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또 그 욕망이 형성되면 내가 그를 방해할지도 모르므로 멀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어머니가 평온하게 뜨개질을 하는 동안 아이가 주위에서 노는 그런 좋은(너그러우면서도 보호할 줄 아는)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성공적인’ 커플의 구조일 것이다. 약간의 금지와 많은 유희, 욕망을 가르쳐 주고, 다음에는 내버려두는. 마치 길은 가르쳐 주지만, 같이 따라나서겠다고 고집 부리지 않는 저 친절한 원주민들처럼.
다정함 (p.319~320)
다정함 TENDRESSE.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의 다정한 몸짓에 기뻐하면서도, 자신에게만 그런 특권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불안해한다.
1. 우리는 다만 그 사람의 다정함만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에게도 다정해질 필요가있다. 서로의 친절함 속에 갇혀 어머니처럼 서로를 보살핀다. 우리는 모든 관계의 근원으로, 욕구와 욕망이 결합되는 그곳으로 되돌아간다. 다정한 몸짓은 이렇게 말한다. 네 몸을 잠들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청하렴. 그러나 또한 내가 너의 그 무엇도 즉시 소유하려 함이 없이, 너를 조금, 가볍게 욕망하고 있다는 사실은 잊지 말아 다오라고.
성적인 쾌락은 환유적인 것이 아니다. 일단 얻고 나면 끝이 나는 그런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닫힌 축제, 잠시 열린다 해도 금지에 의해 통제를 받는 그런 축제이다. 반대로 다정함은 무한한, 충족될 줄 모르는 환유이다. 다정한 몸짓이나 에피소드(어느 날 저녁의 그 감미로운 조화)가 중단될 때 내 마음은 찢어지는 듯하다. 모든 것은 의문시되며, 리듬의 회귀―윤회(vritti), 열반(nirvana)의 사라짐.
2. 만약 내가 요구의 영역에서 그의 다정한 몸짓을 받으면, 나는 충족된다. 그건 현존의 기적적인 결정체가 아닌가? 그러나 욕망의 영역에서 받으면(그것은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다), 불안해한다. 다정함이란 당연히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받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때때로 그런 광경이 내게 주어지기도 한다). 당신은 당신이 다정스러운 바로 그곳에서, 당신의 다수성(pluriel)을 말한다.
(“L…은 바이에른의 어느 식당에서 A…가 커틀릿을 주문하면서 식당 종업원에게 그토록 자기를 감동시켰던, 똑같은 천사 같은 눈길, 똑같은 다정한 시선을 보내느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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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영, 슬플 땐 돼지 엉덩이를 가져와요
돼지 엉덩이를 봐요. 그것은 연분홍입니다. 그것은 두루뭉술하고 풍부합니다. 돼지의 엉덩이는 진열장 속 각진 상자에 또르르 대열 맞춰 앉은, 알록달록한 마카롱들과는 다른 세계에 속합니다. 돼지 엉덩이는 꿈꾸지 않습니다. 돼지 엉덩이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문고리를 잡고 주저앉아 우는 엄마가 자꾸 나타나나요? 돼지 엉덩이를 소환하세요. 땀이 잘 나는 반들반들한 연분홍 엉덩이는 누구에게도 미안해하지 않으며 잘 참는 사람을 칭찬하지도 않습니다. 새벽 두 시. 만화방. 철없는 반바지를 입은, 집 나간 뚱보 아빠는 몸에 비해 비좁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후루루 쩝쩝 사발면을 먹어요. 만화책 속 주인공은 눈이 크고 바다에는 선택의 여지 없이 날마다 해가 뜹니다. 주인공은 정처 없는 밀짚모자를 쓰고 있고 어깨에는 앵무새가 앉아 전체적으로 멍청해 보입니다. 바람이 불어도 땀을 자주 흘리는 주인공은 친구가 없는데 친구가 많은 척하며 이것은 만화의 영원한 주제입니다. 돼지 엉덩이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의견을 내놓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성장 배경을 묻지도 않습니다. 돼지 엉덩이는 엉 엉 엉 울어지지가 않고 자존심이 없어서 비를 맞지 않습니다.
그렇담 돼지 꼬리는?
뭔가를 친절하게 사양하는 듯한
망가진 마음을 숨기는 듯한
변기통 물이 미세하게 술렁이는 듯한
헤매는
돼지 꼬리는
몸집 큰 돼지가 땀을 흘리며 푹 푹 잘 때조차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온몸을
돌
돌
돌
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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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영, 공원의 싸움
공원이었다
지말과 스트라인스는 쫓아오는 앙뚜안을 따돌리고 모텔로 향한다
스트라인스가 지말을 벗겼는데
텅 빈 새장이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아치형 천장에
칠이 벗겨진 편이 자연스럽고
가만히 있어도 삐거덕거리는
스트라인스는 웃을 수 없었다 새장과
자 본 적이 없으므로 더구나
새도 없는…
새장 속 플라스틱 먹이통은 피로한 보라색이다
그냥 해!
지말이 눈을 크게 든다 답이 없으므로 시인은
여기까지만 쓴다 다만,
답 없는 상황은 다른 답 없는 상황으로 덮이므로 시인은
공원에 남겨진 앙뚜안과 비둘기에게 발걸음을 옮긴다
비둘기는 서 있다
한 발로
사실 비둘기의 다리는 두 개다
다리 하나를 배때기에 숨긴 채
오늘도 장애인 행세를 하고 있을 뿐이다 앙뚜안은
비둘기를 향해 돌진해 그것을
자빠뜨린다 그것은
본능적으로 두 발로 선다 비둘기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 발을 접어 배 아래 숨긴다
앙뚜안은 물론 서운하다
왜 나에게는 장애인인 척하지 않는 걸까
앙뚜안과 비둘기가 싸우는 동안
은 여름이었다
사람들은 대낮에 무능했다 지말은
모텔을 뛰쳐나와 공원의 전도사에게로 향한다
오후 2시가 오후 2시 1분에 지각하기 위해 몸을 비트는 여름이었고 똥파리는 텅 빈 새장의 주변에도 공원에도 있었다 그것은 어디에서나 쓴웃음을 지으며 날아다녔다
벤치 옆에 서 있는 채송화
누구의 외로움은
다른 누구의 외로움으로
보완되어야 하므로
채송화 옆에 다른 채송화가
서 있을 법도 한데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요?
물어도
벤치에 앉은 전도사는 말이 없다
함부로 달콤해진 초코바 하나
쥐여 줄 뿐
손이 부족한 천국에서는
천사가 악마도 겸임한다는 사실 같은 게
사람들의 따뜻한 여름날을 망쳐선 안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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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뜨,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사랑의 단상>, p.90~92)
연민 COMPASSION. 사랑의 대상이 사랑의 관계와는 무관한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불행하거나 위험에 처해 있다고 느끼거나 보거나 알 때, 사랑하는 사람은 그에 대해 격렬한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1. “그 사람이 느끼는 것처럼 우리가 그를 느낀다고 가정한다면―쇼펜하우어가 ‘연민(compassion)’이라 부르는 것, 혹은 더 정확히 말한다면 고통 속에서의 결합, 고통의 일치라 할 수 있는 것―그가 자신을 미워하면(파스칼처럼) 우리 또한 그를 미워해야할 것이다.” 그 사람이 환각에 시달리거나 두려워한다면, 나 또한 환각해야하고 미치광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랑의 힘이 어떠하든 간에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일은 끔찍한 일이기에 나 또한 동요하며 괴로워하나, 동시에 냉담하며 젖어들지 않는다. 나의 동일시는 불완전한 것이다. 나는 어머니이긴 하지만(그는 내게 걱정거리를 준다), 부족한 어머니다. 내가 실제로 그를 보살펴 줄 수 있는 것에 비해 지나치게 동요한다. 왜냐하면 내가 ‘진지하게’ 그 사람의 불행에 동일시하는 순간, 내가 그 불행에서 읽는 것은 그것이 나 없이 일어났으며, 이렇듯 스스로 불행해진 그가 나를 버리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와는 무관한 이유로 해서 그 사람이 그토록 괴로워한다면, 그건 내가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고통이 내 밖에서 이루어지는 한, 그것은 나를 취소하는 거나 다름없다.
2. 그리하여 하나의 역전이 내도한다. 그 사람이 나를 제쳐놓고 괴로워하는데, 왜 내가 대신 괴로워해야 한단 말인가? 그의 불행이 나로부터 그를 멀어지게 하는데, 왜 나는 그를 붙잡을 수도, 그와 일치될 수도 없으면서 그의 뒤를 숨 가쁘게 쫓아다녀야 한단 말인가? 그러니 조금 떨어져 있자. 거리감을 쌓는 훈련을 하자. 타자의 죽음 뒤에 홀로 살아남는 그 순간부터 모든 주체의 입에서 나오는 저 억압된 말, 살자(Vivons!)라는 말을 떠오르게 하자.
3. 그러므로 나는 그를 ‘압박하지도,’ 정신을 잃지도 않으면서 그와 더불어 괴로워하리라. 아주 다정하면서도 통제된, 애정에 넘쳐흐르면서도 예의바른 이 처신에 우리는 ‘신중함/부드러움(délicatesse)’이란 이름에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연민의 ‘건전한’ (개화된, 예술적인) 형태이다. (아테(Até)는 미망(迷妄)의 여신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아테의 신중함/부드러움에 대해 말한다. 그녀의 발등에는 날개가 달려 있어 땅을 디딜 둥 말 둥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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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뜨, 고뇌 (<사랑의 단상>, p.53~54)
고뇌 ANGOISSE. 이런저런 우발적인 일로 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위험·상처·버려짐·돌변 등에 대한 두려움으로 격해지는 것. 고뇌라는 이름으로 그가 표현하는 감정.
1. 오늘 저녁 나는 혼자 호텔에 돌아왔다. 그 사람은 밤늦게 들어온다고 했다. 고뇌는 이미 저기 준비된 독약(질투·버려짐·불안)마냥 놓여 있다. 그것은 적절하게 공표되기 위해 약간의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이다. 나는 한 권의 책과 수면제를 ‘침착하게’ 집어든다. 이 커다란 호텔의 정적은 울려퍼지고 무심하며 어리석어 보인다(멀리서 목욕탕 물이 빠지는 소리). 가구며 등잔도 우둔해 보인다. 몸을 녹여줄 다정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추워요. 우리 파리로 돌아가요”). 고뇌가 솟아오른다. 마치 소크라테스가 한담하면서(나는 책을 읽으면서) 독약의 차가움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던 것처럼, 나는 고뇌의 진전을 관찰한다. 하나의 냉혹한 형상마냥 저기 있는 사물들을 배경으로 고뇌가 명명되며 올라오는 것을 듣는다. (그리하여 무슨 일인가 일어나도록 내가 기도라도 한다면?)
2. 정신병 환자는 붕괴의 공포 속에서 산다고 한다(이 이외의 증세는 방어 수단에 불과하다). 그런데 “붕괴에 대한 임상적인 공포는 이미 체험한 적이 있는 붕괴에 대한 공포이다(원초적인 고뇌(primitive agony)). […] 그러므로 때에 따라서는 이런 붕괴의 공포가 삶을 침식해 가는 환자에게, 붕괴가 이미 일어난 적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줄 필요가 있다.” 사랑의 고뇌도 이와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사랑의 출발점, 내가 매혹되었던 그 순간부터 이미 치러졌던 한 장례에 대한 공포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말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마세요. 당신은 이미 그를(그녀를) 잃어버렸는걸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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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규, 그날의 마피아 게임을 기억하나요? ―『배틀그라운드』
지구 vs 인간 파이널 데스매치
“죽음 이후에는 천국도 지옥도 없으며 천사와 악마도 없고 단지 한 가닥의 오리털이 허공에서 미묘하게 흔들리다 바닥에 내려앉는다, 고 시인은 썼다.”(「오리털파카신」) 시작부터 인간에게 불리한 게임이었죠. 무력한 낙원 같은 곳. 어디서 시작하는지도 언제 끝나는지도 모르는 과도기적 상태에 놓여 있는 곳. 그곳에서 삶에도 죽음에도 이르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인간들이었으니까 말이죠. 시인은 종말이 없는 무력한 세상에서 의미 있게 살아가는 방법을 아는 자들입니다. 오늘따라 지신이 쓸모없이 슬픈 존재라고 느껴진다면, 원래부터 쓸모없이 슬픈 존재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안심하세요. 오늘도 쓸데없이 슬픈 존재들이 어김없이 슬퍼지려 하는 순간, 시인은 이런 말로 위로하지 않을까요. “웃을 줄 모르는 아이에게 웃는 법을 가르칠 때 ‘끝’이라는 발음을 알려 주는 일.”(「끝」) 자신이 쓸모없이 슬픈 존재라는 분명한 사실을 자각하는 일이 쓸모없이 슬픈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됩니다. 비관주의로 무장해야만 버틸 수 있는 (더러운) 세상. 그곳에서 긍정적인 비관론자가 되는 일.
문보영이 지닌 감성을 여기서 시작합니다. 신이 사라진 스산하고 암울한 세상을 사는 자들이라고 해서 마냥 우울할 필요는 없어요. 어느 누구도 우리가 사는 인간들의 유일한 유희마저 빼앗아 간다는 건 가혹한 일입니다. 쓸모없이 슬퍼서 웃픈 존재하는 것을 쿨하게 인정하는 힘이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원동력입니다. 문보영의 세계에서 ‘긍정적인 비관론자’는 모순어법이 아닙니다. 시인의 명랑한 기운이 한낱 유희에 그치지 않는 건 이 점 때문입니다. 비관조차 즐겁게 긍정하는 자처럼, 시인이 구현하는 세상의 풍경은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습니다. 그 안에서 시인이 바라보는 존재의 슬픔은 존재가 감당할 만큼 주��지기 때문이지요. “초현실주의는 불가능하며/ 현실이 현실을 무력화시키는 것만이 가능하다.”(「프로타주」) 쓸모없는 존재가 살아남으려면 쓸모의 기준을 바꿔야 합니다. 세계가 바라는 존재의 쓸모를 무력화시키는 일. 신이 사라진 암울한 세상을 황홀한 낙원으로 만드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기로 합니다. 그것이 세계가 바라는 쓸모의 기준을 무력화시키는 방법이자 쓸모없는 존재인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생존 방식입니다.
지구인들의 우승 전략 팁: 무조건 죽기 직전에 가까운 삶의 경험치를 쌓아라!
“총에 맞아도 에너지가 닳지 않는 경험이 누적돼야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그녀가 말했거든요.” 그렇게 되려면 지구인들은 “죽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않는 경험치”(「배틀그라운드―죽었으면 시간 낭비하지 말고 훈련장에 가 있어」)를 쌓아야지 이길 수 있어요. 이후 시인은 지구를 이기기 위해 오랜 훈련을 거듭했습니다. 무수한 시작(詩作)으로 시인의 경험치는, 범접할 수 없는 내공 만렙의 상태와 함께 우승 가능성을 높이는 몇 가지 팁을 찾아냈나 봐요. 가령 이런 것들 말이죠.
농담으로 인생을 표현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밖으로 나가서 부딪히는 겁니다
―「배틀그라운드―어떤 감정은 이렇게 소비되었다」에서
68개의 구렁텅이와 발 빠짐과 70회에서 100회의 자잘하지만 거슬리는 돌부리들 그리고 돌아가야 하는 거대한 산을 가진 지형이라면
작은 사람이 68차례 발이 빠지고, 70번에서 100번 발 걸려 넘어진 다음, 모험심을 자극하지만 단념을 연습하게 만드는 거대한 산 앞에서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면
타인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걷는 경험을 선사할 수 있다면 당신은
아직 뛰는 심장을 가진 겁니다
―「배틀그라운드―일어나는 일이 스스로에 관해 말하다」에서
그래서일까요. 시인의 시를 읽는 우리 또한 아직 뛰는 심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는 것을요.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각오로 세상과 부딪혀 보는, ‘살아 있다’고 느끼는 그 기분 말이에요. “모든 것이 직전처럼 느껴져서 행복하다. 직전으로만 이루어진 직전들의 세계. 우리는 사랑하기 직전, 헤어지기 직전, 망하기 직전, 행복하기 직전, 아프기 직전, 슬프기 직전입니다.”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인이 말하는 “직전으로만 이루어진 직전들의 세계”란 의미가 아닐까요. 직전들이 모인 게 인간이 ‘죽기 직전’에 가까운 삶의 경험치라고 봅니다. 이 직전의 경험들을 차곡차곡 쌓는 일이 인간의 영원한 라이벌인 지구를 이길 수 있는 방법입니다.
“초조함을 선점하는 자는 게임에서 이긴다.”(「배틀그라운드―저그 에비게일 SP의 시절」) 무력한 낙원 같은 지구에서 내가 살아 있다고 느끼는 순간, 삶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내공 만렙이 되는 것이니까요.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거나 초조해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꾸준히 해 나가며 살아 낼 수 있는 힘을요.
“그래도 슬픔은 슬픔으로 대우받길 바랐다. 고통의 무가치를 견디는 쪽이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보다 강하고 정직한 길이라고 믿었다.” 기쁨보다는 슬픔이, 고통에서 의미를 찾는 것보다 “고통의 무가치”를 견디는 게 익숙했던 삶. 그 말을 하기까지, 시인은 얼마나 많은 ‘직전’들을 경험했을까요. 문득 가슴 한구석이 아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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