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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ranger S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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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psong · 11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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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결같은.
Claude Debussy :  Clair de Lune , Ariettes oubliees - ‘Chevaux de bois’ 
Juliane Banse(soprano) & András Schiff(p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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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psong · 11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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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DERICO BABINA archimusic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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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psong · 11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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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드와는 또다른 맛.
J.S. Bach (1685-1750): Prelude and Fugue in B major, BWV 890
Schiff András - piano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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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psong · 1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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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기독교, 김영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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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고로 경전을 읽어 터득한 보람으로 신자가 되는 사람은 없다. '1+1=2'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아무도 '믿지' 않듯이, 알아낸 지식을 통해 믿음에 이르는 일은 이미 그 자체로 어불성설이다. 오직 의심스러운 것만이 믿음의 대상이 되며, 르낭의 유명한 공리처럼 '사람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만을 위해서 순교하는 것'이다. 가령 (철학적 사변이 유달리 짙은 불교는 조금 다르긴 해도) 대체로 팔만대장경을 독파한 후에 불제자가 되는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말씀을 어렵사리 해독한 후에 교회에 출석하는 게 아니다. 무수한 사람은 그저 이슬람교도로 태어나는 것이며, 다만 여러 형식과 종류의 인접성으로 인해 유대교도로 길러질 뿐이다. 인간은, 그렇게 따라하는 존재들이다. 상사(analogousness)는 리좀적 자기차이화와 변신성의 테마일 뿐 아니라 일상적 관습과 행태의 물듦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인 것이다. 특히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주관성을 밑절미로 삼은 개신교에 있어 이 사실은 매우 특징적이다. 신학이야 무엇이라고 떠들든, 실상 그들은 경전이라는 공식적 매개가 아니라 마음(신앙양심)이라는 무매개의 지름길을 최종심급으로 삼는다. 물론 심급(審級)이 심급(心級)이 되는 순간 그 심급은 자의(恣意)와 실질적으로 등가가 된다. 그래서 언필칭 '말씀의 종교'라지만, 실상 개신교인들의 신념이 융통되는 방식은 언어적인 게 아니라 심리적이며, 그 종교적 지식은 상징적 교환의 변증법에 의해 벼려지지 못한 채 상상적으로 결절되기 쉽다.
그래서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공부를 매개로 모종의 신념에 이르는 게 아니라, 제 '마음'대로 믿음을 얻은 뒤에 그제야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다. 이 탓에 신학은, 애초 그 정당성이 의심스러운 신념을 정당화하는 장치로서 동원되곤 한다. 이 때문에 믿지 않고는 사유(공부)할 수 없는 한국 신학의 독특한 풍경이 연출된다. 
(중략)
어쨌든 우선 마음으로 감(感)한 것을 이후의 제도적 교회생활이나 설교적 보충을 통해 이론화∙정당화하는 관행은 신앙이 실존적 반조의 선택을 생략한 채 생활의 습관으로 굳어지게 하는 중요한 배경이다. '믿기에 존재한다(Credo ergo sum)'가 아니라 '사유∙의심해서 존재한다(Cogito/Dubito ergo sum)'는 정신의 변침(變針)을 통해 근대적 주체화의 철학적 논리를 설명하곤 하는 데서 보듯이, 잘라 말하자면 그들의 경우에는 신앙의 '주체(화)'에 이르는 노역이 없거나 적은 셈이다. 주체화의 중요한 한 갈래는, 타인과의 사회적 연루를 자기 존재의 구성적 원리로 수렴해야 한다는 이치에 적절하게 응대하는 것임과 동시에, (한나 아렌트 등의 지론처럼) '당대의 지배체제와 불화하는 정신의 수위와 그 근기'를 통해 결절하는 법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스승인 예수야말로 당대의 지배구조와 불화하면서 '카이사의 것'도 아닌, 더 나아가 '어머니(여자)에 속한 것'도 아닌 (동무)공동체적 결기 속에서 운신하며 새로운 희망의 지평을 펼쳐 보인 바 있으니, 세속의 상식과 달리 실로 주체화의 노역이야말로 신앙의 알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중략)
간단히 정리하자면, 국가는 대자본의 현실을 돕는 안전망이자 심지어 여리꾼 노릇을 하고, 종교는 자본의 성취와 번영에 대해 뒷북을 치며 축복하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는 국가와 자본과 더불어 삼위일체를 이루는데, '하나의 체계(세계)는 신화라는 지평의 테두리를 통해 완결된다'(니체)는 격언 속의 '신화'를 종교(개신교)에 대입시켜보면, 주중의 근실한 노동과 욕망 그리고 주말의 충량한 믿음과 나눔을 통해 마침내 자본제적 삶의 형식을 완결시키는 종교의 역할을 보다 큰 그림 속에서 요량할 수 있다.
(중략)
'죄가 깊은 곳에 은혜도 깊어진다'는 아이러니가 상식으로 둔갑한 곳에서 영성의 타락은 시작된다. 이를테면 죄의식에 사로잡힌 자들이 오히려 죄인의 존재를 전제로 영혼의 특권을 강변하는 셈이다. 그리스의 비극정신 속에서 발견되는 그 기이한 명랑(Heiterkeit)은 오히려 깊은 고통을 뚫어내면서 생성시킨 정신의 크기와 숭고를 가리키는데, 죄의식을 되먹임하면서 얻는 일신교적 양심의 피폐함과 대조해서 그 '생활세계적 의의'ㅡ혁명이나 사건이 지나간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주체화되는바 생활을 재조직∙재배치해서 얻게 되는 실질적인 삶의 행복ㅡ를 긍정적으로 재고해볼 노릇이다. 그러니까 적지 않은 상인 기독교인들은 '죄의 틈과 사춤 속에서마저 생동하는 은혜'라는 역설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은혜를 위해서는 차라리 죄라도 좋다'는 식의 자가당착에 이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자가당찬은 그 모든 인과에 대한 도착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듯이, 수단이 목적을 잠식하며, 이윽고 그 과정을 통해 그 목적의 무목적성을 스스로 증명하고 만다. 
(중략)
간단하고 투박하게 말해, 기독교인이 인구의 30퍼센트를 점하든, 혹은 신의 은총에 의해 5할에 이르든 세속이 그 평균적 타락의 수위에서 오락가락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핍박 속에 신앙이 견결해지고, 억압이 오히려 당성(黨性)을 키운다는 식의 사고를 가리켜, 가령 스피노자나 제임스(W.James)는 병 혹은 '병든 영혼(sick soul)'이라고 부른다는 점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그 어떤 놀라운 사건을 통해 기원과 시작을, 진리와 감동을 떠들어도, 결국 우리 삶의 구성적 성분으로 남고 그 삶을 매순간 유지하는 것은 일상의 재조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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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psong · 1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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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도덕이란 타인들과 사회가 만들고 우리에게 강요하는 규범에 순응하는 것일 터입니다. 또 윤리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만들어가야 할 것, 즉 발명이며 창조(말하자면 결국 각자 자기만의 자유를 얻어내는 일)일 테니까요."
<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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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psong · 1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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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 치료 session.1
*
쓰고 싶은 이야기도, 쓸 만한 이야기도 없는 요즘이다. 외부 세계의 상황과 관계 없이 그저 내 안에 그런 이야기가 생성되지도 조직되지도 않고 있다.
두 친구의 소개로 오늘부터 읽기 시작한 <피로사회>의 내용에 비춰보면, 나는 오래전에 '깊은 심심함'을 잃어버렸고, '과잉활동성'에 따른 '눈의 부산한 움직임' 때문에 '시선은 그저 불안하게 헤매기만 할 뿐, 아무것도 표현해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 것으로 진단된다.
오늘 집회에서 정혜신 박사는 '자기 존엄성의 훼손', '무력감을 느끼는 개인', '불안과 공포', '비정상적으로 강렬한 에너지의 소유자들', 그리고 (가장 인상 깊었던)'가해자와 피해자' 따위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느 지점에서였는지, 내가 느껴온 어떤 종류의 오래된 불안감, 오래된 무력감 따위가 생각났다. 아마 어떤 소설가,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하는 한 소설가가 극도의 스트레스와 불안감 때문에 '낮은 단계의 생각' 전략을 구사하게 돼 오탈자를 살피는 등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행동을 하는 데 온 정력을 낭비하고 말았다는 이야기에서였던 것 같다. 이 얘기가 KBS의 어떤 상황과 맥락을 시사하기 위해 쓰였던 것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여간 중요한 것은 나의 만성화된 어떤 종류의 불안감과 무력감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는 사실이다.
*
다시 정혜신 박사 강연 건으로 돌아와서, 그녀는 계속해서 내담자(?)들에게 '그때 어떤 기분(마음/생각/느낌)이 들던가요?', '그게 정말 그것 때문인가요?' 같은 질문을 통해서 내담자의 행동을 유발한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을 만들어낸 동기들을 추적했고, 궁극적으로 사회적‧개념적‧추상적 표현은 모두 걷어낸 뒤 오로지 한 개인의 직관적이고 구체적인 날 것의 감정적 단서들을 포착해 나갔다. 물론 나에겐 친숙한 풍경이다. 나 자신의 감정을 소수분해 하듯 쪼개고 쪼개 '감정의 아르케'를 찾는 일이 얼마나 난감한 일인지 모른다. 그렇게 해서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결국 남는 건 고상한 이론이나 관념, 신념, 거대담론 따위가 아니라 지극히 사소하고 쪼잔하고 찌질하기까지 한 1차적 감정‧욕망 따위가 나온다. 나를 움직이고 추동하는 것이 실은 어린 시절 각인된 어떤 저차원의 욕망, 결핍감, 상처, 혹은 그 모든 것들이 뒤틀리고 뒤얽혀 빚어낸 욕망체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
내 마음과 정신이 건강할 땐 외부 세계에 대한 관찰과 판단이 수월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나의 내부를 살피는 데 시간과 에너지가 집중적으로 투입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글에서 오랫만에 자가상담 및 진료를 해보려는 것이다. 낱낱이 살펴보려고.
즉 다시 말해서, 그냥 지금부터는 막 생각나는대로 쓰자면,
지난 수 개월의 시간동안 내가 끊임없이 직면해야 했던 선택지들에 대한 부담감, 이후를 알 수 없는 불안감, 무력감 따위들의 근본을 파고 들어봐야겠다는 것이다. 그 시간들을 지나오면서 지금의 나는 너무 무기력해져 있고, 무슨 말을 해야할지 무슨 글을 써야할지 모르는 상태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2009년 그때의 상태와도 너무 흡사해서 나는 정말이지 상당한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자꾸 말을 고르고 단어를 선택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한 문장을 그냥 휙 써내려가지 못하고 별 의미의 차이도 없을 패러프레이징을 하느라 편집증적으로 매달리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정 박사가 말한 '낮은 단계의 생각' 전략을 무의식적으로 행하고 있는 것이지 않은가.
불안감. 불안감. 나의 불안.
아- 나의 불안. 요인이 너무 많다. 그중 제일은 직종 선택 문제, 여자친구와의 관계 요 두 개. '골칫거리'가 아니라 '불안 요인'이라고 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미 내가 세워둔 방침이 있지만 그대로 실현할 수 있을지 확실치 않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거기에는 실제적 장애물도 있고 나 자신의 두려움과 자격지심 같은 것들도 있다. 하여간 뭔가가 너무나도 너-무-나-도- 복잡하게 뒤엉켜버렸다. 이 실타래를 좀 풀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단순화시켜야 한다. 할 것은 하고, 안 되는 것은 버리고 가는. 그런 식으로 좀.
무력감. 나의 무력감.
나는 의미있는 존재인가. 나는 여기서 내가 속한 곳에서 의미있는 롤을 하고 있으며 대체 불가능한 어떤 종류의 고유성을 획득‧발현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들이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중이고, 이에 대한 답은 '미안하지만, 아니야'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수 있겠나, 하는 류의 생각이 그 뒤를 이어 나를 괴롭히고 있는 중이다. 이런 생각들은 내가 '실제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나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것만이 문제가 될 뿐이다. 지난 수개월 동안 나 자신을 한번도 내가 칭찬하지 못했다. 스스로 만족스러웠던 적도, 대견해했던 적도, 스스로의 기준에 부합했던 적도, 그래서 스스로를 인정해준 적이 없었다. 그래 이건 정말 마치 09년 같네. 내가 나에게 수개월동안 가장 가혹한 평가자가 되어 스스로를 exhausted되게 한 거다. 아마도 거기에는 단지 '나-자아'의 재귀적 관계만 존재했던 것은 아닐 거고, 입사 후 만나고 겪어왔던 다른 동기들과 타사 기자 동기들, 선배 등등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존재'를 습득하느라, 그들의 삶을 어서 빨리 내 안에서 재연해보고자 하는 과정에서, 외부의 기준과 잣대를 내 속으로 이양해왔고, 그래서 '오로지 나 자신'으로 가득차 있어야 할 가장 내밀한 자아의 어느 부분에조차 외부세력, <피로사회> 식으로 말하자면 면역학적으로 '부정적인 타자'의 침입을 백퍼 허용해버리고 만 것이다. 복잡한 인간관계와 권력관계 속에서 나는 개인으로 우뚝 서지 못했고 끊임없이 곁눈질과 무게 달기를 하면서 복잡한 계산을 해댔던 것이고, 그 결과 '그래서 어쩌라고 마인드'나 '내맘이야', '내 스타일대로' 마인드 같은 게 닳아져버린 거야. 엄청나게 남을 의식하고 있었고. 정말 엄청나게. 그래서 그 피로감이 말도 못하게 쌓여왔던 거고. 그러니까 말도 잘 안되고 글은 더 잘 안되고 그런 거야. 이거 역시 내가 실제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글을 썼느냐는 아무 상관이 없고, 나 스스로가 어떻게 느꼈느냐 그것만이 중요하지. 그러니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글,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한 이야기 따위가 아니라, 지금의 나에게는 오로지 나 자신이 스스로를 보다듬고 인정해주는 그런 작업이 필요한 것이빈다.
물론 이건 아주 일부분에 불과한 이야기인 것도 사실이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내 정신의 상태가 스스로 진단하건대, 좋지 않으므로, 이런 식으로라도 메스를 들이대기 시작한 거고,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렇게 막 지껄인 건 잘한 거 같다는 생각이야. 정제된 글을 쓰려는 노력은 나중에 하고, 당분간은 원래 페이스를 되찾을 때까지라도 막 써갈겨야지 안되겠다. 나에겐 멋진 대화상대도 있으니까 말도 많이 하고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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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psong · 1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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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부터 사건기자 생활을 시작한다. 잠이 오질 않는다. 딱히 설렌다기 보다는 그냥, 이 밤을 한없이 연장시키려는 발버둥 같은 것이다. * '어떻게 살 것인가' 영원할 수 없는, 불변할 수 없는 일시적 정답들을 움켜쥐기 보다는 제대로 된 질문 하나 끝까지 간직하는 게 낫다. * KBS는 이미 오래된 일, MBC는 최근 들어, 사람들에게 외면 당하고 있다. 그래, 국민도 아니고 시민도 아니고 사람 말이다 씨발. 아마 한나절의 십중팔구는 화재 폭행 절도 등등 시시콜콜한 사건사고나 쫓아다니겠지만, 글쎄, 단 한 문장의 말에서라도 나는,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조직화된 노동의 기능공으로, 하수인으로, 맹목적으로 취재하진 않았으면. * 생명은 누추한 도로변 어귀에도 저렇듯 풍성한 나무를 키워냈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개별태가 공통적으로 드러내는 한가지 상징이 있다면 그건 다름 아닌 '생명'일 것이다. 모든 생명체가 보유하면서도 '그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 생명이고 삶이고 존재이다. 그 삶 중에서도 내게 할당된 삶을 꽃피우는 순간순간에, 나는 엄숙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나의 삶이자 너와 우리의 삶이고, 종국엔 삶 자체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내가 어떤 누추한 도로변에 내동댕이쳐지는 날이 올지라도 나는 저 나무와 같이 내게 스며있는 삶의 기운으로 무성한 잎사귀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길가다 멈춘 행인들이 나를 보며 '삶이란!' 하고 경탄할 수 있도록 살아내야 한다. 그랬으면 좋겠다. * "기도해줘" "기도할게" 기도가 무엇인지. 간절한 바람도 좌절되고 애타는 호소도 무시되기 일쑤. 그 많은 종교인들은 어떻게 기도를 하고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는 삶의 태도란 그렇지 않은 그것과 매우 대비될 수밖에 없다.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관점의 본바탕이 감사•긍정인 사람과 비판•부정인 사람도 마찬가지다. 요즘 들어 이런 식으로 대비되는 사람들이 자꾸 보인다. 그들의 지나온 삶과 현재 삶의 자리를 살펴보면 금방 열매의 차이가 보인다. "트리오브라이프"에서도 나왔던 '대비되는 삶의 방식'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주 사소한 것을 지금 이 순간부터 택하고 행동하느냐 마느냐에 달렸다. * 비는 내리고 상욱이는 경찰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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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psong · 1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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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침대에 몸을 눕힌다. 방이 어둡다. 깜깜한 어둠 속에 나는 눈을 뜨고 있었다. 어둠은 나로 하여금 눈을 감도록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것 같아 일부러 눈을 뜨고 한참 동안 보이지도 않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지나간 하루. 부딪치고 스쳐간 사람들. 시시껄렁하게, 혹은 무겁게 나눈 얘기들. 나는 어디에 있었나. 지금 이 순간, 내가 자각되는 건 오직 이 순간 뿐인 것만 같다. 불현듯 무슨 음악이라도 듣고 싶어 컴퓨터를 켜 셔플로 음악을 재생시키고 무슨 대화라도 하고 싶어 아이폰을 켠다. 아마도 이 때의 대화란, 다만 내 이야기를 들어줘, 내 마음을 어루만져줘, 하고 나를 확인하기 위한 일방적인 대화를 말하는 것일 게다. 그러니, 이런 대화는 가장 가까운 연인이나 친구가 아닌, '어떤사람 A' 류의 상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나같은 사람들을 위해 미국의 어떤 젊은이들이 친절하게도 페이스북이니 트위터니 하는 서비스들을 만들어 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A는 몇 문장을 써볼까 하다가, 타임라인에 올라오는 예쁜 프로필 사진의 주인공들을 한참이나 훔쳐봤고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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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psong · 1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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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ree Of Life
아무래도 가라앉지 않는 감동, 때문이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은 욥기와 프로이트 정도까지다.
씨네21에서 분석한 철학적 컨텍스트까지 가기는 힘들다.
더구나 이 영화가 '위대한 실패'라는 견해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잃어버린 것(아름다운 것)',
'돌아가고 싶은 날들의 풍경',
따위의 관용구들이 내내 머릿속을 맴돈다.
the first-experienced wonders,
테렌스 멜릭은, '최초의 순간들'의 오감을 모두 기억하는듯이 재현해내고 있다.
그것은 미메시스라기 보다는, projection에 가깝다고 느꼈다.
경이로움을 잃어버리지 않은(혹은 원형 그대로 보존한) 극도로 순수한 영혼을 느꼈다.
그리고 그걸 느끼는 순간,
그 '순수한 영혼'은
나 자신에게 잔존하는(혹은 기억되는) 순수함과
나를 (거의) 집어삼킨 secularity에 동시적으로 충돌해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내가 가지고 있던 아이디어, 물론 어디선가 그러모아 뒤섞었을 아이디어와 같이,
생명들, 영혼들은
제각각이 지닌 개체로서의 실존을 삶과 동시에
그 모두가 모여 하나의 거대한 universal body, 즉 Universe를 이루어가는 도정에 있다.
그 Universe를 The One 자체로 볼 수도 있고, The One의 counter partner로 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 모두의 Being을 respect하는 것이다.
폭발하는 플레어처럼, 분노도 미움도 우리의 존재 속에 녹여 결국은
생명의 바다에 흘려 보내는 것이다.
상처난 초식 공룡을 포식하지 않고 놓아주는 육식 공룡의 아이러니처럼
아무리 극악무도한 적일지라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선의 또한 그 속에 있음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대사가 적은 것,
압도적인 이미지와 영상,
유년시절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음악들,
그 시네마테크의 공간에서
나를 보고, 가족들을 보고, 사람들을 보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이 영화를 보면 많이 울 것 같다.
결국 다시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모르겠다.
나는 잘 살고 있는가. 모르겠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오직 감각할 수 있는 것만을 원하는 수준에서 타협하기로 한 채 살아오는 중이다.
잭이 아버지에게 대들고, 어머니에게 오이디푸스적 애착을 갖게 됐을 때도,
친구들과 어울려 말썽을 피우고, 옆집 아주머니의 속옷을 훔쳤을 때도,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도
생명의 나무는 무성한 잎을 거느린 채 늘 거기에 있었다.
I didn't know I loved you, believed you.
소멸하는 불Consuming Fire은 꺼지지 않는다.
새벽 두 시쯤, 극장을 나와 집에 오는 길에
한 인부가 버스정류장 광고판을 갈아끼우며 일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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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psong · 1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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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s Baricades Mistérieuses (Francois Couperin) - Angela Hewitt
   <The Tree Of Life OST>, Alexandre Desplat
트리 오브 라이프를 봤다.
최고의 마스터피스다. 감독에게 경의를 표한다.
최고의 영상과 최고의 음악으로 최고의 메타포를 담아냈다.
너무나 훌륭하다.
성서에 대한 사전지식이 좀(꼭) 필요하다.
욥기나 프로이트 정도만 알아도 도움이 된다.
바로크 시대 음악을 좋아한다면
상영시간 내내 흐르는 아름다운 음악들을 듣는 것만으로도 황홀할 것이다.
트레일러에서 소개하는 플롯은 이 영화의 본질과 거리가 너무 멀다.
신문의 리뷰 기사들도 엉터리인 게 많다.
관객들 대부분이 자거나 엔딩 무렵에서 실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어쩔 수 없는 것인 줄 알면서도 안타깝고 부끄러웠다.
하지만 너무 훌륭한 작품이었다.
다시 한번 감독에게 경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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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psong · 1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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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디토리움 - Somebody
<Episode 재회(再會), 2011>
푸디토리움은 이제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독보적인 존재감을 갖는 것 같다.
푸딩 때만 해도 뻔하고 달달한 음악으로 반짝하다 말 줄 알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역시 '웰메이드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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