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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1. 26
무언가를 되뇌었던 시간을 두 손으로 그러모으면 내 인생의 절반을 채워버릴 것 같다. 과거를 생각할 때 시간은 멈추는 거라고 노래는 말했다. 내가 가진 시간은 꽤나 자주 멈추었다. 지금을 살라고들 하지만 나는 과거를 그리며 사는 게 즐거웠다. 그리워하는 장면들은 종종 내 머릿속에서 사실과는 다르게 편집되었고 그건 나를 힘들게 하거나 웃게 만들기도 했다. 뭔가가 무수히 많은 밖을 바라보는 것보다 뭔가가 무수히 많은 안을 바라보는 게 좋았는데, 나는 요즘 내가 가진 것들을 자주 업신여긴다. 이유를 찾는 것보다 그러지 않는 게 우선인 걸 아는데도, 나는 자꾸만 이유를 찾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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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8
세상은 틀림없이 무언가에 중독되어 있다. 슬픔도 불안도 아픔도 죽음도 마주 보려 하지 않는 이들이 물 위에 떠 있다. 그들이 하는 말 만이 공기를 만나 공중에 퍼진다. 물 아래 사람들은 숨이 모자라다. 입에서 나온 음성은 힘없는 공기방울이 되어 수면 위로 떠오르다 이내 사라진다. 아무에게도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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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1. 04
설거지 바로 하기 싫은 기분이 들면 무기력 시즌 시작이다. 일정한 주기로 찾아오는 기분은 아니어서 언제 다시 설거지가 하고 싶어질지는 나도 모르고 그 누구도 모른다. 희한하게 이 시즌에는 설거지뿐 아니라 그 무엇도 하기가 싫어진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과 공부하고 있던 것을 꾸준히 해나갈 힘이 남아있지 않은 기분이라. 작년의 무기력 시즌을 끝내게 해준 건 책 한 권이었는데, 이번엔 그 방법이 통하지 않을 것 같다. 그냥 오로지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오래오래 혼자 있고 싶다는 기분. 몸은 움직이지 않는데 머릿속은 너무 복잡해서 하루가 너무 짧게 느껴지고, 밤이 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자책하는 루틴. 이것저것 하고 싶다고 기웃거리긴 하는데,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하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나만 사랑하는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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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1. 29
누구는 가능성에 중독된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마음만 먹으면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은채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 오래도록 그 단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중독이란 단어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지만, 나는 가능성에 중독된다는 건 꽤 괜찮은 일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면서 타인의 삶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글들이 세상에 너무 많은 것 아닌가 생각했다. 인생의 정도를 설파하는 글 너무 넘치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 글 싫어하면서도 정작 자기전 떠오르는 문장들이 자기계발서류의 격언인 건,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가 생각나는 그런 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가는 소리가 귓바퀴를 맴돌았다. 발밑이 흔들린다고 느낄 땐 2018년에 읽은 책들이 떠올랐다. 다시 꺼내 읽는다고 그때의 감흥을 고스란히 가져올 순 없었지만 집 옆 도서관에서 표지만 보고 그 책들을 골랐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겉만 보고 고른 책들이 내가 디딜 땅이 되어주고 있다는 게 새삼 별로였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겉이 아름답다거나 번지르르해서 고른 책들이 아니었다. 내 안에 쌓아 올려진 시각적 취향이 골라준 책이었다. 앨범 자켓을 보고 고른 음악이 자주 내 취향과 맞아떨어지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게 겉을 본다는 건 멀끔한지 궁색한지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표지를 보고 고른 책들을 더 사랑할 수 있었다. 겉을 보는 것이 멍청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들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되는 순간은 자주 찾아왔다. 다시는 보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 사람이 보고싶기도 했고, 절대로 그럴일 없다고 말한 것들이 그럴일 있게 되기도 했다. 세상 그 무엇도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자주 ---같아요 라고 말했다. 지금은 그런것 같은데 나중엔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아서다. 그러면 누구와 누구는 같아요가 아니라 확실하게 말하라고 했다. 그럼 난 그런것 같아요를 그래요라고 바꾸어 말했다. 확신을 주는 말이 필요할 때가 있지만 그런 것 같은 일을 그렇다고 말하라는 건 폭력적인 요구 아닌가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세상이 한 방향으로 흐른다고 믿는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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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1. 28
하얗고 둥근 접시에 요리가 담겨 나왔다. 겉면이 노릇하게 익은 햄버그스테이크 위로 묽은 데미그라스 소스가 뿌려져 있고, 가니시로는 익힌 브로콜리와 당근이 놓여 있었다. 밖에서 혼자 밥을 먹을 땐 주로 햄버거나 분식처럼 빠르게 먹을 수 있는 메뉴를 고르지만 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접시 오른쪽에 놓인 스테인리스 포크는 일반적인 것보다 크고 날카로워 보였다. 나는 왼손으로 포크를 집어 스테이크를 반으로 갈라 육즙을 잔뜩 머금은 단면을 바라보았다. 겉을 맴돌던 갈색 소스가 분홍빛 단면으로 흘러 스며들었다. 크게 한 조각 잘라 입에 넣자 기름진 풍미가 코끝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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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1. 24
과거의 창피함이 불쑥 고개를 내밀 때가 있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옛날인데 감정만큼은 어제일처럼 생생하다. 나는 그때에 가 있는 사람처럼 얼굴이 붉어진다. 스스로를 믿거나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주 창피하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의 차이를 능숙하게 설명하지는 못하겠다만 나는 종종 내 창피함을 부끄러움으로 포장하곤 했다. 창피는 이해받을 수 없는 일 같고, 부끄러움은 이해받을 수 있는 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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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1. 21
집 옆 조그만 산에는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가 있었다. 엄마는 아카시아꽃이 잔뜩 달린 줄기 하나를 톡 따내어 새하얀 꽃봉오리를 내 입에 쏙 넣어주었다. 향긋한 달콤함이 작은 입안에 감돌았다. 꽃 피는 계절이 되면 나무 근처에만 가도 아카시아 향이 수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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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1. 08
쏟아지는 감정은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나는 그 속에 갇혀 두 팔을 들어올린 채 영원히 휘말렸다. 소용돌이의 눈으로 들어가면 끝이 찾아 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눈을 질끈 감고 뛰어 들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영원히 영원히 빙글빙글 돌아야 했다. 가끔은 내가 사는 곳이 소용돌이 안이라는 게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땐 멀미를 하지 않고도 태연하게 뱅그르르 돌았다. 괴로운 건 돌아야 한다는 것 자체보다는 한 방향으로만 돌아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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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08. 05
유난히 시끄러운 여름이다. 나무 사이사이 빽빽하게 들어찬 매미들이 귀가 아프도록 울어대는 소리에 유독 신경이 가는 그런 여름. 존재감이 너무 커서 도대체 나무의 어느 부분에 얼마나 많은 매미가 붙어있는건지 유심히 바라보게 되는 그런 여름이다. 매미는 얼마나 살다 죽을까 문득 궁금했다. 비가 오면 젖어 죽나. 여름이 지나면 추워 죽나. 그런 것 따위가 궁금했다. 가끔 커다란 나무 아래를 걸어갈 땐 내 머리위로, 어깨위로 죽은 매미가 떨어질까 인상을 찡그렸다. 또 다른 가끔은 이미 나무 아래 떨어져 누군가의 발에 밟힌 매미를 보고 화들짝 놀라 시선을 거뒀다. 만지면 바삭바삭 소리가 날 것 같은 매미. 너무 통통해서 징그러운 매미. 그런 매미를 가까이에서 보기도 싫고 만지기도 싫지만, 왠지 매미가 없는 여름은 상상하고 싶지가 않다. 왱왱 울어대던 매미 소리가 점점 사그라드는 날이 되면 아마 가을이 온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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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07. 26
샤워를 하다가 귀에 물이 들어가면 소리가 먹먹해졌다. 나는 그 먹먹함이 좋았다. 가끔은 귀에 물이 들어갈 것을 알고도 부주의하게 샤워기를 휘둘렀다. 공기 대신 물이 들어찬 귓속은 세상 소리를 한 차례 걸러주었다. 물은 아무리 머리를 흔들어도,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채 콩콩 뛰어도, 내 뜻대로 빠져나오는 법이 없었다. 그저 가만히 앉아 머리를 갸우뚱하고 할 일을 하다 보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듯 빠져나왔다. 그때의 따뜻함이 좋았다. 꽉 막혀있던 귀가 시원해지는 느낌도. 잊고 있다 보니 결국 해결되고 마는 일은 인생에서 만나기 드문 것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일은 잊으면 사라져버리기 마련이었다. 잊지 않으려고 애쓰고 애써야만 마침내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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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07. 11
눈빛이 좋다는 말은 내가 들어본 최고의 칭찬이었다. 눈은 사람의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는 유일한 문이라는 생각을 한 이후로 누군가를 볼 때마다 몰래, 몰래, 눈빛을 탐구했다. 눈은 솔직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적중률 높은 힌트를 주었다. 그를 이루고 있는 분위기, 무언가를 바라보는 시선과 감정, 그런 것들을 내게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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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07. 10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는 것,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하는 것, 싫은 것을 싫다고 말하는 것. 솔직한 사람이 되려 노력하는 중에 제일 먼저 관철하려는 것들이다. 다자이 오사무가 말했듯 사람들은 내가 게으름뱅이인 척하면 게으름뱅이라 얘기하고, 거짓말쟁이인 척하면 거짓말쟁이라고 얘기할 것이다. 모른다고 말하면 멍청한 사람이라 할 테고, 없다고 말하면 없는 사람이라 치부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해지려는 건, 내가 그런 사람들을 좋아해서다. 누군가의 모자람보다 진솔함을 먼저 알아차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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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07. 07
외면해오던 일들을 계속 외면하면 모른 체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요즘 그것들이 아주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를 망가뜨리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걸 쥐려고 해서 그런 걸까. 나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일까. 아니면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일까. 아마 둘 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이 가졌지만,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 무언가를 꽉 쥐어 저릿하던 주먹을 펼치면 사실 내가 쥐고 있던 건 내 손가락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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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06. 23
들어오세요. ��자가 말했다. 녹이 슨 낡은 현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퀴퀴한 냄새가 났다. 곰팡내인지 집 냄새인지 모를 눅눅한 향이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앞쪽 벽엔 커다란 목제 십자가가 걸려있었다. 기독교 집안인가, 생각했지만 아래 놓인 성모마리아 상과 양초를 보고 천주교라는 걸 알아챘다. 십자가가 걸린 벽을 중심 삼아 양쪽으로 방이 있었다. 한쪽은 안방, 한쪽은 작은방인듯했다. 여자는 나를 들여보내주고 곧장 안방으로 가더니 무언가를 찾는 듯 옷장을 뒤적거렸다. 한참을 뒤적이다가 작은 상자 하나를 들고나와서는 내게 열어 보여 주었다. 그 안에는 손바닥만 한 수첩 일기장이 들어있었다. 이거 재우 일기장이에요. 여자가 말했다. 크기는 작아도 꽤 두꺼워서 재우의 시간을 가득 담고있을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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