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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벨 음악은 꼼꼼한 외과 의사처럼 연주한다. 디테일 하나하나가 중요하다. 그것들은 수년간 세세히 검토되고 계량되어 밀리미터 단위로 분할되었다. 하지만 오늘 저녁엔 오직 선線만이 중요하다. 콘서트에서 라벨을 용의주도하게 분석적으로 연주하면 금방 견디기 힘들어진다. 외과 의사는 맞지만 낭만적인 외과 의사여야 한다. 오트쿠튀르 패션처럼 말이다. 거대한 방주처럼 건축된 그의 작품에서는 아주 작은 돌멩이 하나도 전체 구조만큼 중요하다. 거대한 대양 한가운데를 항해하는 작은 돛단배 같다. 세세한 세공 작업과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작업 사이에서 완벽한 균형을 찾야아 한다. 첫 음을 누를 때부터 마지막 음을 겨냥해야 한다. 곡 안의 모든 요소가 서로를 지탱하고 있다. 나는 다른 어떤 작곡가보다 라벨을 많이 연습했다. 그러나 무대에 오르는 순간에 내게 중요한 건 그저 프레이즈, 긴 호흡과 관점뿐이다.
『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 알렉상드르 타로, 백선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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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했기에 그들은 다른 이들처럼 극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바깥에서만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들은 왜 폭우 속 노아의 방주 앞에서 익사하면서 뒷좌석의 관객이 어느 한순간 희미한 무엇인가를 얼핏 볼 수 있도록 배의 창문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얼굴을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 프란츠 카프카, 『일기』(1910년 12월 16일)
나는 지가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남자>에서 거지, 어린아이, 또는 젊은 여인이 잠에서 깨어날 때의 내밀한 몸짓이 도시의 삶 전체를 춤추게 만든 몽타주로 만개하고 있는 방식을 생각한다. 나는 라디오가 오늘의 운세를 지껄이고 있는 동안, 그 역시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에, 그러나 삶이 부과했을 모든 충돌과 불행에 지쳐 있는 그를 보여주는 색다른 리듬으로 촬영된 그 남자를 생각한다(아닉 불로Annick Bouleau의 <사생활>). 나는 요한 판데르쾨켄이 촬영한 맹인 청년 헤르만 슬로브가 동시대의 소용돌이 운동과 소리에 문자 그대로 자신의 고독을 '접속하는' 방식을 생각한다. 나는 1968년 6월에 IDHEC의 학생들이 촬영한 <원더 공장에서 노동의 재개>에서 더는 공장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 이 노동자의 가슴을 에는 듯한 항거를 생각���다. 나는 <우리들> (아르타바즈드 펠레시안) 또는 <데스트> (샹탈 아케르만)에게서 형상을 취하고 있는, 고독하지만 서로 굳게 결속된 존재들을 생각한다. 나는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병원>에서 제도에 의해 망가진 인간성을, <산 클레멘테>에서 레이몽 드파르동이 유심히 살핀 잊을 수 없는 몸짓을 생각한다. 나는 벨라 타르가 촬영한 굶주린 사람들의 딸을, 혹은 왕빙의 <철서구>에서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의 존엄성을 생각한다. 이렇게 소멸의 위협과 모든 것을 무릅쓰고 나타나고자 하는 생명의 필연성 사이에서 민중들의 노출이 끝없이 이어진다.
그들의 힘, 그리고 그들의 무권력조차 가시화되고 노출될 수 있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무릅쓰고 조용히 세상을 변형시키기. 이것은 항상 두세 개의 단순한 몸짓으로 시작된다. 짐을 들어올리고, 길 위의 배설물을 줍고, 발로 땅을 다지고, 웅덩이에서 물을 길어 올리고, 호박을 따고, 산 속 동굴에서 섭식의 고독을 지켜내는 몸짓.
우리 일상 언어에서 민중이란 단어 자체가 더는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 혹은 그것이 더는 억압된 피지배 계층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알랭 바디우가 명시한 것처럼 그 자체로는 적어도 중립적 개념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제 모든 사람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재현 수단에 언제든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의견을 대표할 수 있는 대의민주주의 정치가 구현된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이런 기대와는 달리 디디-위베르만은 이내 '노출'이란 단어가 갖는 또 다른 층위를 드러낸다. 그는 오늘날 민중들은 "결핍 노출되어"—예를 들어 특정 민중의 존재가 미디어의 통제와 검열에 의해 축소되거나 은폐될 때처럼—있거나, 아니면 "과잉 노출되어"—예를 들어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반복적으로 노출됨으로써 스테레오타입이 될 때처럼—있다고 말한다. 오늘날 민중들은 스스로를 노출하기 위한 모든 조건—기술적 조건으로서 최첨단의 재현 미디어와 정치적 조건으로서 민주주의—을 그 어느 때보다 더 잘 갖추고 있으며, 따라서 더욱 가시적이 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노출의 이러한 결핍과 과잉 사이에서 그들은 오히려 비가시적인 존재가 되었으며, 그들의 미학적, 정치적 재현 속에서 오히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사라질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해제)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민중들의 이미지』, 여문주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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