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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ong Fields of Crys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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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renuggets · 7 hou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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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renuggets · 12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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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renuggets · 1 month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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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renuggets ·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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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renuggets ·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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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했기에 그들은 다른 이들처럼 극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바깥에서만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들은 왜 폭우 속 노아의 방주 앞에서 익사하면서 뒷좌석의 관객이 어느 한순간 희미한 무엇인가를 얼핏 볼 수 있도록 배의 창문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얼굴을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 프란츠 카프카, 『일기』(1910년 12월 16일)
나는 지가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남자>에서 거지, 어린아이, 또는 젊은 여인이 잠에서 깨어날 때의 내밀한 몸짓이 도시의 삶 전체를 춤추게 만든 몽타주로 만개하고 있는 방식을 생각한다. 나는 라디오가 오늘의 운세를 지껄이고 있는 동안, 그 역시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에, 그러나 삶이 부과했을 모든 충돌과 불행에 지쳐 있는 그를 보여주는 색다른 리듬으로 촬영된 그 남자를 생각한다(아닉 불로Annick Bouleau의 <사생활>). 나는 요한 판데르쾨켄이 촬영한 맹인 청년 헤르만 슬로브가 동시대의 소용돌이 운동과 소리에 문자 그대로 자신의 고독을 '접속하는' 방식을 생각한다. 나는 1968년 6월에 IDHEC의 학생들이 촬영한 <원더 공장에서 노동의 재개>에서 더는 공장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 이 노동자의 가슴을 에는 듯한 항거를 생각한다. 나는 <우리들> (아르타바즈드 펠레시안) 또는 <데스트> (샹탈 아케르만)에게서 형상을 취하고 있는, 고독하지만 서로 굳게 결속된 존재들을 생각한다. 나는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병원>에서 제도에 의해 망가진 인간성을, <산 클레멘테>에서 레이몽 드파르동이 유심히 살핀 잊을 수 없는 몸짓을 생각한다. 나는 벨라 타르가 촬영한 굶주린 사람들의 딸을, 혹은 왕빙의 <철서구>에서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의 존엄성을 생각한다. 이렇게 소멸의 위협과 모든 것을 무릅쓰고 나타나고자 하는 생명의 필연성 사이에서 민중들의 노출이 끝없이 이어진다.
그들의 힘, 그리고 그들의 무권력조차 가시화되고 노출될 수 있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무릅쓰고 조용히 세상을 변형시키기. 이것은 항상 두세 개의 단순한 몸짓으로 시작된다. 짐을 들어올리고, 길 위의 배설물을 줍고, 발로 땅을 다지고, 웅덩이에서 물을 길어 올리고, 호박을 따고, 산 속 동굴에서 섭식의 고독을 지켜내는 몸짓.
우리 일상 언어에서 민중이란 단어 자체가 더는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 혹은 그것이 더는 억압된 피지배 계층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알랭 바디우가 명시한 것처럼 그 자체로는 적어도 중립적 개념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제 모든 사람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재현 수단에 언제든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의견을 대표할 수 있는 대의민주주의 정치가 구현된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이런 기대와는 달리 디디-위베르만은 이내 '노출'이란 단어가 갖는 또 다른 층위를 드러낸다. 그는 오늘날 민중들은 "결핍 노출되어"—예를 들어 특정 민중의 존재가 미디어의 통제와 검열에 의해 축소되거나 은폐될 때처럼—있거나, 아니면 "과잉 노출되어"—예를 들어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반복적으로 노출됨으로써 스테레오타입이 될 때처럼—있다고 말한다. 오늘날 민중들은 스스로를 노출하기 위한 모든 조건—기술적 조건으로서 최첨단의 재현 미디어와 정치적 조건으로서 민주주의—을 그 어느 때보다 더 잘 갖추고 있으며, 따라서 더욱 가시적이 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노출의 이러한 결핍과 과잉 사이에서 그들은 오히려 비가시적인 존재가 되었으며, 그들의 미학적, 정치적 재현 속에서 오히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사라질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해제)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민중들의 이미지』, 여문주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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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renuggets ·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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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renuggets ·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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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renuggets ·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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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renuggets ·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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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renuggets ·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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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초기에 나는 동궁 앞의 모닥불 곁에서 몸을 녹이고 있던, 병사 차림의 홀쭉하고 등이 굽은 사람과 마주쳤다.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는 블로크였다. 우리는 함께 아동실 입구까지 걸어갔다. <마음에 듭니까?>라고 내가 묻자 그는 대답했다: <좋소.> 그런 다음에 그는 덧붙였다: <시골 영지에 있는 내 서가를 불태웠다고 하오.> 바로 이 <좋소>와 <서가를 불태웠다>는 표현은 혁명을 느끼는 두 가지 감각, 그의 시 「열둘」에서 환상적으로 결합된 두 가지 감각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 시에서 혁명에 대한 풍자를 보았고 다른 이들은 찬미를 보았다. 백군은 <좋소>를 잊은 채 그 시에 열중했고 적군은 <서가를 불태웠다>는 저주를 잊은 채 그 시에 열중했다. 상징주의자는 그 두 감각 중 어떤 쪽이 더 강한지를 규명해야만 했다. <좋소>를 찬양해야 하는가 아니면 화재를 애통해해야 하는가 ― 블로크는 선택할 수 없었다. 나는 금년 5월에 모스크바에서 그가 낭송하는 시를 들었다. 그는 공동묘지처럼 조용하고 썰렁한 홀에서 작은 목소리로 구슬프게 집시의 노래와 사랑과 아름다운 여인에 관한 자신의 옛 시들을 낭송했다. 나아갈 길은 더 없었다. 길 저쪽에는 죽음만이 있었다. 그리고 죽음이 왔다. (마야콥스키, 『좋아!』) 그에게는 더 나아갈 길이 없었다. 아마도 블로크는 길을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다만 선택의 문제 너머, 혹은 바깥에 길이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블로크의 혁명기 시편들은 혁명에 대한 의식적인 찬가나 의식적인 거부가 아닐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판단정지나 가치의 유보도 아니다. 그것은 물론 현실 도피나 외면일 수도 없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모순된 현상의 동시적 지각'이다. 모순의 공존, 모순의 충일. 그것이 시적 모순 어법을 통해서만 지각할 수 있는 세계의 본성이다. 블로크의 시적인 '몸'은 이 모순 어법의 혼돈을 하나의 언어적 세계로 구현해냈던 것이다. 그러니까 블로크의 시편들은 대상을 가장 민감하게 지각할 뿐, 그 몸의 반응을 확정적 가치나 미리 정해진 가치에 가두지 않는다. 블로크의 시가 재현하는 몸의 감각이야말로, 가치와 입장의 선택을 전제로 하는 이성적 시학들과 변별되는 지점이다. 그리고 그 몸의 감각을 떠받치고 있는 힘은 바로 '음악'이다. 그의 음악은 단선율이 아니라 불협화음을 포함한 복선율의 무한한 교차이며, 바로 이 '음악'만이 실재성의 세계에 대한 블로크의 유일한 '입장'이었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블로크의 '음악'은 세계의 구체성과 실재성을 '기화'시키는 상징주의적 언어에 굴복하�� 않는다. 결국 음악은 그의 무기였다. 혹은, 음악만이, 그의 무기였다. 그것은 더 이상 언어적 반복에 의해 얻어지는 기술적 리듬을 뜻하지 않는다. 상징주의 시기에 그의 음악은 현실과 실재와 구체적 시니피에를 삭제하거나 초월하기 위한 도구였으나, 후기에 그것은 현실과 실재를 지배하는 세계의 에너지, 그 거대한 힘의 리듬이 된다. 이제 음악은 보이는 것을 빌려 보이지 않는 힘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눈앞에 펼쳐지는 현상과 실재 자체에 내재한 리듬을 표현하기 위해 도입된다. 이 리듬은 개별성과 개별성을 잇닿아 보편적 운동의 일부를 이루지만, 이 보편적 운동 안에서 개별성과 개별성은 더 이상 삭제되지 않는다. 그것은 보편성과 관념의 블랙홀로 빨려들어가 구체성과 생명력을 상실하지 않는다. 그의 시적 편력은 그 자체로서 '집시의 로망스'이자, 역사의 운행을 주재하는 내적 힘의 현현을 다루는 기나긴 드라마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블로크 자신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통과하는 세계의 리듬을 언어로 구현하고자 했다. 그 언어는 끝내 일인칭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서정시인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그가 「발라간칙」(Balaganchik)과 같은 드라마를 썼을 때조차, 그것은 서정적인 집시적 영혼의 부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1921년 8월 7일, 마흔둘의 나이로 죽었다. 이장욱, 『혁명과 모더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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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renuggets ·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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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renuggets ·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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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renuggets ·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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