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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마주하는 여행,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산티아고를 향한 900km의 여정. 떠나려는 이유가 특별하지 않아도 좋다.
시작은 심플하게, 목표는 거창하게
38L 배낭을 가득 채워 어깨에 메고, 몸에 딱 붙는 탄탄한 기능성 옷에 등산화를 신었다. 40일간 특별한 여행을 위해 필요한 차림새다. 프랑스 남부 국경 마을인 ‘생장 피드포르(Saint Jean Pied de Port)’에서 시작해 스페인의 땅끝마을 ‘피스테라(Fisterra)’까지 이어지는 900km 여정이 시작되었다. 이 길의 이름은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예수의 열두 제자 중, 야고보의 유해가 묻힌 스페인 북서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를 향한 길이다. 이 순례길은 중세시대부터 이어져 지금까지도 전 세계의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시작한 여행은 아니지만, 왠지 마음이 경건해졌다.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의 버킷리스트이기도 한 이 길을 나는 순전히 나 자신을 위해 걸었다.
순례길을 걷는 코스는 한 가지 뿐만이 아니다. 대서양 해안을 따라 걷는 포르투갈 길, 마드리드 길, 북쪽 길 등 다양한 곳에서 순례를 시작할 수 있다. 대부분의 순례자가 생장에서 출발하는 ‘까미노 프란세스’길을 택하며, 그 외의 지역에서 출발하더라도 그 길의 끝에서는 모두가 ‘산티아고’로 모인다.
순례를 시작하기 전 해야 할 일은 생장에 있는 ‘순례자사무소’에 방문하는 것이다. 마을에 도착한 후 샛노란 페인트로 길 곳곳에 그려져 있는 화살표들을 따라 걷다 보면 큼직한 벽돌로 지어진 순례자사무소가 나타난다. 순례자임을 ���명해줄 크레덴시알(순례자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 이삼십 명 순례자들이 줄 지어 서 있다. 하얗고 두툼한 종이로 만들어진 크레덴시알은 순례길을 걸으며 항상 지녀야 할 신분증이다. 길을 걷는 중에 만나는 식당이나 성당, 숙소 등에서 ‘세요’라고 불리는 스탬프를 하루 두개 이상 찍어야 순례를 마친 후 순례 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다. 산티아고에 다다를 즈음엔 각종 개성 있는 스탬프가 잔뜩 찍혀 있을 것이다. 고개를 돌려 사무실 벽에 붙은 종이를 보니 순례길을 찾는 전세계 사람들 중 한국인이 차지하는 순위가 6위라고 적혀 있다. 파울로 코엘료의 책 때문인가. 더 높은 순위를 차지한 스페인과 가까운 유럽국가들을 제외하고 보면 거의 1위인 셈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을 떠나고 싶게 만드는 것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가 사무소에서 받은 가이드와 크레덴시알을 들고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첫째 날, 새벽 6시. 시작하기도 전부터 몸이 무겁다. 짧지 않은 여행이기에 꾹꾹 눌러 담은 배낭 때문일까. 족히 10kg은 될 듯한 무게를 어깨에 얹었다. 문득 비행기에 오르기 전 읽은 순례길에 관한 글에서 배낭의 무게를 ‘삶의 무게’라고 빗대었던 것이 떠올랐다. 삶의 무게라기보단 욕심의 무게처럼 느껴졌다. 이 길을 다 걷고 나면 짊어졌던 욕심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하기를 고대하며 산티아고를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처음으로 만나는 곳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이루는 ‘피레네산맥’이다. 순례길 전체 코스 중에서도 난도가 높은 축에 속하는 피레네산맥 코스는 고도 1,400m 정도로 험준한 오르막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산맥으로 올라가는 포장도로를 걷고 있을 때 자동차 한 대가 서서히 옆에 멈추었다. “꼬레아? 꼬레아?” 스페인 사람인지 프랑스 사람인지 모를 백발의 할아버지가 한국 사람이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했더니 조롱박 하나를 선물로 준다. 피레네산맥에서 조롱박을 선물로 받을 줄이야. 호리병 모양의 박을 허리춤에 매고 다시 걸었다. 한참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첫날 걸어야 하는 코스는 26km로 14km가 오르막길 코스, 나머지는 내리막길이다. 순례에 나서기 전 체력단련을 했거나 등산을 즐겼던 사람들은 괜찮았지만 걷는 것에 적응이 안 된 순례자들이 가파른 내리막으로 인해 무릎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 등산용 스틱을 준비하면 가파른 오르막길이나 내리막길 코스에서 큰 도움이 된다.
순례자의 하루는,
하루 치 코스를 다 걷고 나면 도착한 마을에서 하루를 묵게 된다. 순례자들이 묵는 숙소를 ‘알베르게(Albergue)’라고 부르는데, 공립 알베르게와 사립 알베르게가 있다. 공립은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찾는 숙소로 도미토리 형식으로 되어 있고 값이 저렴하지만 마을에 늦게 도착하면 자리가 꽉 차 묵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사립 알베르게는 공립보다 값이 비싼 대신 조금 더 깔끔하고, 조식을 제공해주는 곳도 있어 취향에 맞는 숙소를 고를 수 있다. 보통 새벽 6시에 길을 나서 오후 3시 정도에 도착했을 땐 공립 알베르게에 자리가 넉넉해 항상 묵을 수 있었다.
순례자들 하루는 숙소에 짐을 풀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마트에 가서 저녁거리를 사거나, 하루 동안 묵게 될 마을을 둘러보기도 한다. 스페인의 여름 오후는 거의 40도에 육박하는 무더위가 이어져 ‘시에스타(siesta)’라는 브레이크타임이 있다. 오후 1시부터 4시 사이에는 마트나 식당이 문을 닫고 휴식을 가지니 여름철에는 그 시간대를 피해 방문하는 것이 좋다. 마트가 문을 열기까지 기다리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성당을 찾는다. 모든 마을마다 성당이 하나씩은 꼭 있는데, 개중에는 100여년이 넘은 유서 깊은 성당도 있다. 길 위를 온종일 걷고 나서 고요한 성당에 앉아 있자니 없던 독실함까지 생기는 듯 하다.
마을을 둘러보고 성당을 방문해 스탬프까지 찍고 나면 마트에 가서 저녁을 위한 장을 본다. 알베르게에는 공용부엌이 준비되어있어 순례길을 걷는 전 세계 사람들과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다. 음식을 너무 많이 만들었다며 서로 자신의 것을 나누어주기도 한다. 말은 잘 안 통해도 마음은 통한다.
순례자사무소에서 봤던 한국인 순례길 방문 순위답게 걷는 동안에 많은 한국 사람들을 만났다. 인생에 대해 고민하다 직장을 그만두고 길에 나선 사람, 정년퇴직 후에 함께 순례길을 찾은 부부, 휴가를 내고 여행에 나선 직장인. 모두가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이 길을 찾았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모여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했다. 떠나온 이유가 대단하지 않아도, 순례에 큰 뜻이 없어도 괜찮았다. 이 길위에서 모두가 행복하다고 말했다.
Travel TIP. “Buen Camino!” 길을 걷는동안 순례자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인사다. 스페인어로 ‘좋은 길’이라는 뜻을 가진 이 말은 “당신이 앞으로 걷는 길이 좋은 길이 되기를 바란다.”는 인사말이다. 여행 중 길을 걷다 마주치는이에게 외쳐보자.
글, 사진 / 이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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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음의 미학 : COFFEE NAP ROASTERS HQ(Headquarter) 오랜 양조장의 재해석
오래된 폐 양조장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커다란 유리문을 열어 젖히기도 전에 커피 향이 흘러나온다. 평택의 한적한 도롯가에 위치한 ‘커피냅 로스터스’는 마을의 오래된 양조장을 개조하여 만든 카페다. 벽돌색 돌멩이들이 깔린 마당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싱싱한 초록빛의 자연이 펼쳐진다. 본래 시멘트였던 바닥을 깨뜨려 그 안에 흙을 깔고, 잎이 넓적한 식물들을 가득 심어 놓았다. 오래된 건물 특유의 빈티지스러움과 식물이 어우러진 ‘플랜테리어(Plant+Interior)’가 눈에 띈다. 그 옆으로는 카운터와 음료를 제조하는 바가 이어져 있고, 안으로 들어서면 투명한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공간이 둘로 나누어져 있다. 한쪽은 카페와 베이커��, 다른 한쪽은 베이킹과 원두 로스팅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두 공간 모두 개방된 구조로 되어있어 앉아서 커피를 즐기며 로스팅이나 베이킹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 커피를 주문하면 두 가지 종류의 원두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커피냅 로스터스'가 직접 블렌딩한 원두인 'MARU' 는 고소한 향미와 입안 가득 퍼지는 다크초콜릿 향이 특징이다. 또 다른 하나인 ‘Koke honey’는 싱글 오리진 에티오피아 원두를 로스팅한 것으로 과일의 부드러운 산미와 은은한 베리 향을 느낄 수 있다. 이외에도 이곳에서 로스팅한 여러 종류의 원두를 자체적으로 판매도 하고 있으니 취향대로 골라 구매할 수 있다. 커피를 주문하는 곳 맞은편 베이커리의 메뉴는 주기적으로 바뀐다. 당시에는 여섯 가지 종류(말차, 얼그레이, 레몬, 티라미수, 캐러멜, 당근)의 조각 파운드 케이크가 있었다. 각 파운드 케이크 위에는 그에 어울리는 토핑이 얹혀 있다. 얼그레이 파운드 위에는 꾸덕한 생크림과 로즈마리가, 캐러멜 파운드 위에는 캐러멜 소스와 바삭한 크럼블이. 나는 이 두 가지를 골라 베이킹키친이 있는 공간 앞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음료의 얼음이 반쯤 녹았을 때, 연두색 옷을 입은 직원 한 명이 베이킹 키친에 들어가 소진된 파운드 케이크를 보충하기 위한 작업을 했다. 커다란 파운드 케이크 한 판을 꺼내 자그마한 직사각형으로 조각내니 카페 안에 고소한 빵 냄새가 가득 퍼졌다. 카페 내부를 밝히는 할로겐램프의 따뜻함과 케이크의 버터 향이 잘 어우러졌다.
TIP. ‘커피냅 로스터스’는 평택에 위치한 HQ 외에 서울 연남동에도 지점을 가지고 있다. 빨간 벽돌로 이루어진 좌석이 특징인 연남점은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으로 북적일 만큼 ‘핫’하다고 하니 이 곳만의 감성을 서울에서도 느껴보고 싶다면 추천한다.
글, 사진/ 이혜진
커피냅 로스터스 HQ
경기 평택시 진위면 봉남2길 35
매일 10:00 am - 10:00 pm
031-666-4131
아메리카노 5,000/ 베이커리 5천원대
커피냅 로스터스 연남
서울 마포구 성미산로27길 70
02-332-4131
@coffeenap_roas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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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는 몸에 흡수되는 예술이다", 이현오 서울집시 대표
이현오 서울집시 대표는, 초창기 크래프트 맥주 붐이 일었던 때부터 맥주를 만들어왔다. 그가 대학생일 때다. 혼자 자유롭게 맥주를 만들던 그는 문득 프로 양조사들은 어떻게 일하는지 궁금했다. 전문적으로 맥주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해외 유학파로 경제학을 전공한 그를 보는 선입견은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이 왜 이런일을 하려 하냐. 얼마 안 가 그만둘 거 아니냐”였다. 이현오 대표는 굴하지 않고, 한 회사에 6개월 동안 문을 두드렸다. 하수 청소부터 시작하라는 요구에도,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렇게 프로의 세계로 들어갔다. 양조사로 채용되고 나서도 여전했다. 맥주 퀄리티가 0.01%라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면 밤을 샜다. 침낭까지 가져올정도로 매진했다. 자신이 느끼기에 부끄럽지 않은 맥주를 만들겠다는 일념에서다.

종묘 돌담길에는 간판 없는 크래프트 맥주 펍이 있다
익선동과 조금 떨어진 곳. 종묘를 너머에 둔 고즈넉한 돌담길을 걷다 보면 남색 기와로 이루어진 아담한 한옥 한 채가 보인다. 크래프트 맥주 펍 ‘서울집시’다. 작은 규모에 비해 존재감은 크다. 오픈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만석이다. 한옥과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가 조화로운 가게 내부는 따뜻한 색의 조명들과 벽 곳곳에붙은 매력적인 포스터들로 자유로운 느낌을 준다.

인테리어는 모두 이 대표의 취향이 담겨 있다. 타일, 페인트, 가구, 소품 하나하나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곳이 없다. 손님이 가벼운 생각으로 자유롭게 왔다 가길 바라는 마음이 엿보인다. ‘서울집시’라는 이름처럼 말이다. 이곳은 6명 이상의 단체 손님을 받지 않는다. 테이블당 5명 이하의 손님만 착석할 수 있다. 시끄러움이 극에 달할까 우려하지 않아도 좋다.

국내에서 가장 실험적인 맥주를 선보인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맥줏집이라고 단언할 순 없지만, 가장 실험적인 맥주를 선보이는 곳이란 건 확실하다. 유수의 해외 양조사들이 찾는다. 적어도 아시아에서 한가락 하는 양조사들은 이곳을 방문한다. 서울집시는, 집시 브루잉(Gipsy Brewing)을 통해 맥주를 생산한다. 집시 브루잉이란, 직접 양조장을 두지 않고, 다른양조장을 빌려 맥주를 생산하는 방식을 말한다. 대량 생산을 통해 수지타산을 맞출 필요가 없다. 소품종 생산을 통해 획기적인 맥주를 개발하고, 시장에 내놓을 수 있다. 때문에 맥주 리스트도 자주 바뀐다. 다른 양조장과콜라보도 활발하다. 10여곳의 국내 양조장과 협업한다.

신맛이 특징인 사워 에일을 주로 내놓는다
서울집시의 색깔은 확실하다. 4~7도 사이의 저도수 맥주를 선보인다. 또 사워 에일(Sour Ale)을 주로 내놓는다. 신맛을 잘 다룬다는 이야기다. 서울집시의 뚜렷한 색깔은 직원들의 취향이 담겼다는 것이다. 음식을 만드는 주방장을 제외하곤, 직원 모두가 양조사 출신이다. 이들은 산미가 강하고 가벼운 도수로 술술 넘어가는맥주를 추구한다. 자신들이 좋아하지 않는 맥주는 선보이지 않으려 한 게, 개성이 뚜렷한 맥주 개발로 이어졌다. 대중적이진 않지만 한번 맛 들이면 이곳을 끊을 수 없는 이유다.
6월부터 히말라야 핑크 소금과 망고, 야생 효모 브렛(Brett)을 넣어 만든 마링고를 선보이고 있다. 독일식 사워 에일인 고제(Gose)다. 고제는 소금물과 밀맥아, 유산균이 들어간다. 마링고(마리 + 망고)는 이 대표가 망고덕후인 여자친구 마리(별명) 씨에게 고백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향긋한 향을 위해, 발효 후 홉을 추가로첨가하는 과정을 거친다. 드라이 호핑이다. 마시는 동안 짙은 과일 향을 계속해서 느낄 수 있다. 여름에 어울리는 신맛과 묵직한 과일 향이 매력이다.
독특한 재료 활용이 돋보인다
수입산 재료에만 의존하는 수제 맥줏집과는 차별된다. 토종 국산 재료를 활용한다. 이 대표는 “뒷동산에서채취한 효모로 만든 뒷동산에일, 복분자와 요구르트를 혼합해 만든 복분자 IPA 등 국산 재료를 통한 새로운 색깔의 맥주를 만들어왔다“고 전한다. 보통 수제 맥주가 14~15일 숙성 시간을 갖는 것에 반해, 이곳 맥주는 30일 정도의 기간을 거친다. 단, 긴 숙성 기간에 비해, 맥주 리스트는 계속해서 바뀐다. 대략 45일 전후다. 이론적으로 한두 달 정도면, 다른 맥주를 먹을 수 있다는 거다. 서울맥주의 기본 철학을 느끼면서 말이다. 음식 또한 독특하다. 고수 베이스의 음식을 선보인다. 고수를 잘못 쓰면 음식과 어우러지지 않고 비누같은 고수 맛만튀기 쉬운데, 이곳은 그런 것이 전혀 없다. 고수와 음식이 하나로 녹아든다. 펍의 기름진 안주 느낌보다는, 다이닝 레스토랑의 음식에 맥주를 페어링한다는 느낌이다.

익선동에 들른다면 서울집시를 찾아보자. 이름처럼, 무겁지 않고 자유로운 맥주를 맛볼 수 있다. 야외가 훤히트여 있어, 무르익은 여름에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이현오 대표를 만나 맥주에 대한 그의 철학을 들어보았다.

-어떻게 창업하게 됐나
원래 맥주 만드는 일을 했다. 양조사다. 예전에 다녔던 회사에서 항상 맥주를 만들면, 맛있지만 아직은 이른 거같다.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아직 대중에게 먹히지 않을 거 같다는 거다. 사내 대회에서도 자주 1등 했지만, 대중과 거리가 멀다는 이야길 항상 들었다. 내가 먹고 싶은 맥주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나왔다.
-집시 브루잉을 하는 이유가 뭔가?
양조장을 꾸린다는 건 소자본으로 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투자받아야 한다. 돈을 투자한 사람은 아무래도 바라는 게 있기 마련이다.
-투자한 사람은 대중성을 원한다?
당연히, 돈을 벌고 싶어 하니까. 그게 중요하긴 하지만, 내게 제일 중요한 건 만들고 싶은 맥주를 만드는 거다. 자본이 들어오면 그 취지가 훼손된다.
-그러면 조금 더 실험적인 걸 시도할 수 있겠다
뭐라 할 사람이 없다(웃음).
-신맛을 추구하는 건가? 상당수의 맥주가 산미가 강하다. 역시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다
대중적인 맥주는 아무래도 큰 회사가 더 잘할 수 밖에 없다. 서울집시의 타깃은 니치마켓(틈새시장)이다. 오히려, 틈새를 노림으로써 세계 시장에 다가간다는 생각이다.
-틈새를 세계로?
틈새도 세계로 보면 꽤 크다. 뭐랄까. 대중적인 마켓은 당연히 마케팅 비용이 중요하고, 돈으로 돈을 버는 시장이다. 틈새시장은 창의적인 게 돋보이는 곳이다. 어느 나라든지 다 맥덕(맥주 덕후)이 있지 않나. 이들에게 다가가려 한다.
예를 들면 한국�� 걔네(서울집시)는 막걸리에 쓰는 효모를 이용해서 맥주를 만들었대. 이런 식으로 이슈가 된다. 왜냐면 아무도 안 하는 거니까. 미국 친구들이 이런 걸 할 순 없지 않나. 우리 집 뒷동산에서 채취한 야생효모로 만든 뒷동산 에일도 그렇다. 얼마 전에 전라도 복분자를 이용해서 만든 ‘복분자 IPA’도 비근한 예다. 결국이런 마켓이 해외에서 열릴 수 있다. 한 달 전에도 일본에 샘플을 보냈다.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는 건가?
애초에 처음부터 그걸 노리고 시작했다. 해외 시장은 특이한 게 먹힌다. 평범한 맥주로는 승부를볼 수 없다. 왜냐면 그런 건 어디에나 있으니까. 우리 맥주는, 맥주를 많이 안 드시는 분들에겐 어색할 수 있다. 하지만 맥주덕후들은 좋아한다. 애초에 타깃을 광범위하게 잡지 않았다. ‘프리미엄 마켓’을 노리는 거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파인다이닝에서 내추럴 와인이 유행하고 있다. 맥주도 이제 막 파인다이닝에서 페어링하는 게 핫해지고있다. 단적으로, 서울집시가 원하는 것도 미쉐린 레스토랑에서 페어링할 맥주를 만드는 거다.
-그러면 지금 식당에 납품하고 있나?
아직은. 납품할 정도의 물량이 안 된다. 시작 단계다. 샘플은 보내고 있다. 이름을 알려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맥주 페스티벌에 샘플을 보내고 있다.
-바라는 진출 국가가 있나
아시아적인 걸 제일 좋아하는 건 아무래도 유럽이다. 특히 덴마크가 그렇다. 다이닝 시장도 요즘 제일 핫하고, 가장 주목받는 미쉐린 식당도 덴마크에 많이 있다. 맥주 시장은 물론이다. 트렌드를 리딩하는 시장이다. 그쪽이 잘 만드는 건 아닌데, 시장 자체가 되게 오픈 마인드다. 미식에 대해 열려 있다. 여기서 잘되면 전 세계적으로 퍼진다고 보면 된다.
-독일은 어떤가
보수적이다. 사람들이 독일 맥주가 되게 잘나간다고 생각하지만, 엄청 후퇴하고 있다. 자기 나라 마켓도 못 지키고 있다. 트렌드를 못 쫒아온다. 맥주 순수령에 지나치게 얽매여 있다. 좋게 말하면 100년 전 맥주를 지금도만들고 있는 거지만 나쁘게 말하면 발전이 없는 거다.
-주로 어느 양조장과 콜라보하나
제일 많이 하는 데는 안동맥주다. 우리 편의를 잘 봐준다. 집시 브루잉에 대한 철학에 많이 공감한다. 최근에했던 데는 핸드앤몰트, 서울브루어리, 구스아일랜드가 있다. 맥파이랑도 할 예정이다.
-주기적으로 맥주를 바꾸는 이유가 뭔가
해외 맥덕들을 사로잡고 싶어서다. 서울집시가 마치 여행자들이 집시처럼 들를 수 있는 곳이었으면 한다. 나도맥덕이라, 외국을 가면 항상 그 도시에 어디 맥줏집을 가야 할지 고민한다. 나 같은 맥덕이 한국에 왔을 때 무조건 와야 할 가게가 여기였으면 한다. 다양한 맥주를 선보이고자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외국 분들이 실제로 많이 오나
신기하다. 정말 많이 온다. 아시아의 맥주 업계 관계자는 진짜 다 온 것 같다. 우리 가게에 오면, 나 어디 양조장의 누구다. 이런 식으로 대화가 오간다. 해외 시장에서 우리가 알려지고 있는 거다. 애초에 서울집시를 시작하며 설정했던 목표는 일단 이룬 셈이다. 최근에도, 일본, 홍콩 업계에서 방문했다. 서양 분들도 수입사 분들과같이 방문하더라.
-구상 중인 맥주가 있나
안동에서 나는 ‘하귤’과 ‘제피’를 가지고 맥주를 만들 거다. 하귤은 여름에만 나는 귤이다. 제피도 유월 말에서칠월 초쯤 2주 동안만 난다. 엄청 좋은 재료라 하긴 어렵다. 다만 로컬 재료를 사용함으로 적어도 우리 맥주를마신 사람은 하귤이 여름에만 나는 귤이구나, 제피가 경상남도에서 6월 말쯤에 나는 재료구나, 라고 알 수 있다. 이건 의미 있는 일이다. 지역사회에도 선순환을 가져온다.
-외국산 재료가 더 맛을 내는 데 좋다 하더라도 국산 재료를 쓸 건가
무조건 배제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왕이면 로컬 재료가 제철일 땐, 꼭 써보려고 하는 편이다. 3월에 출시한 ‘임금님표 BRTU IPA’도 이천 쌀을 이용해 만들었다. 솔직히 이천 쌀보다 수입 보리 쓰면 맛이 훨씬 좋다. 약간의맛을 포기하고 이천 쌀을 쓴 이유는 문화와 지역 사회 발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재료 공부를 따로 하나
실험을 많이 한다. 일하듯이 놀려고 한다. 일하듯이 먹으러 가고, 놀러 간다. 이럴 때 내 머릿속으로 많은 게 들어온다. 놀이와 일을 동시에 잡는 방식이다. 내가 즐거워야 마시는 사람도 즐거울 테니까.
-음식이 독특하다. 맥주와 페어링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있나?
여행을 좋아한다. 이국적인 음식을 선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행 다니며 맥주와 먹으면 좋겠다고 생각한음식을 내놓는다. 여행자 입장에서 말이다.
-고수를 많이 사용한다
일종의 진입장벽이다. 우리 음식이 고수를 못 먹는 분들껜 안 좋은 평을 받는 걸 안다. 향신료가 많이 들어가기때문이다. 이국적인 걸 추구하다 보니 어쩔 수 없다. 좋아하지 않는 분들껜 일부러 추천해드리지 않는다. 우리맥주가 향이 강한 편이라, 고수와 잘 어울리는 것도 있다.
-셰프님은?
딱 한 분 면접 봐서 뽑았다. 이력서 첫 번째 줄이 ‘저한테 결혼했냐고 물어보지 마세요’였다. 그런 아집이 맘에들었다. 고집 있는 사람이 좋다. 그게 우리 철학을 지키는 데도 도움이 된다.
-신 맥주를 많이 만드는 이유?
그걸 제일 잘하기 때문이다. 좋아하기도 하고. 매번 사워 맥주만 만드는 건 아니지만, 앞서 얘기했듯 좋아하는걸 잘하게 된다. 그게 신념이다. 누군가 내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다른 걸 만들긴 싫다. 그런 방법이 대중성은얻을 순 있어도 최고가 되는 길은 아니다.
-도수가 낮은 편이다
우리 맥주 정체성은 마시기 편하다는 데 있다. 손님이 취해서 가면 안 된다. 그래서 더 달라고 하셔도 죄송한데다음에 드셨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취객도 안 받는다. 우리 신념에 어긋난다.
-맥주가 주기적으로 바뀐다. 혹시 연중 판매하고 싶은 맥주는 없나
‘필살기’라고 할 만한 맥주가 있다. 실험만 많이 해보고 실제로 출시해본 적 없다. ‘서울몽’이라는 맥주다. 우리의 꿈을 담았다. 그런데 언제 내놓을진 모르겠다.
-정체성?
약간 싹수 없게 들릴 수도 있다.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려고 하진 않는다. 매니악하지만 누군가는 엄청나게 좋아할 만한 것들을 만들고 싶다. 우리가 시도하는 걸 좋아해 주시고 이해해주시는 분들이 왔으면 하는 바람이크다. 모두를 위한 걸 하려다 보면 매력이 없어진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닌 뭔가가 된다. 우리 맥주는 대중적이지 않지만 대기업스럽지도 않다. 우리가 라거까지 만들 필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만 ��면된다.
-맥주를 한마디로 정의해달라
남들이 보면 웃을 수도 있다. 맥주는 예술이라 생각한다. 새로운 걸 창조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 맥주라는 매체로 메시지를 보내는 거다. 이를테면 ‘몸에 흡수되는 예술’이다. 레시피를 구성할 때도 허투루 하지 않는다. 무조건 맛있기라기보단, 뭔가 스토리를 입히고 싶다. ‘우리 문화’를 이야기하고 싶은 게 크다. 로컬 재료를 많이 쓰는 이유도 그런 이유에서다.
-서울집시를 한마디로?
꿈꾼 대로 살아간다. 우리의 슬로건이다. 좋아하는 일을 해야 행복하다. 그래야 결과물도 좋다. 우릴 보고 누군가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서 행복했으면 좋겠다.
글/ 서인원, 이혜진
사진/ 이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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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랙(Drag)문화가 우리에게 묻는다

▲ 드랙 아티스트 코코(Coco) ©이혜진
‘헤드윅’을 아는가? 풍성한 웨이브의 금빛 가발을 쓰고 짙은 화장을 한 그를, 그녀를 아는가? 영화와 뮤지컬로 알려져 있는 <헤드윅> 속 주인공의 모습은 낯설다. 남성의 몸을 가졌어도 우리가 겪어온 남성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화려한 가발에 과한 메이크업을 하고 통념을 깨는 의상을 입는다. 성(Gender)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시선에 갇히지 않고 분장과 공연을 통해 자아를 표출한다. 우리는 작품 속 헤드윅 같은 이들을 ‘드랙 아티스트(Drag Artist)’라 부른다. 그 문화를 ‘드랙(Drag)’이라 말한다.
드랙이라는 명칭은 영국의 극장 용어에서 비롯됐다. 엘리자베스 1세 시절, 여성이 연극 무대에 서는 것은 사회적으로 점잖지 못한 일이라 여겨졌다. 여성 배역은 주로 여장을 한 젊은 남자배우들이 맡았는데, 그들이 입은 여성복이 바닥에 질질 끌리는(Dragged) 모습에서 ‘드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장남자 배우들은 주로 저급한 희극에 등장하는 하위 역할을 맡았다. 이 때문에 드랙에 대해 ‘여성을 희화화한 문화’라는 이미지가 고착됐다.
드랙은 그 후 연극 문화의 한 부분을 차지한 채 오랫동안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매김했다. 남성들이 여성 역할을 맡는 관습이 서서히 사라져갈 무렵, 드랙 문화가 동성애 커뮤니티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 새롭게 나타나기 시작한 성소수자 친화적 공간에 ‘드랙퀸(Drag Queen, 드랙 분장을 한 남성 동성애자를 일컫는 말)’이 등장하며 드랙 문화는 이들 커뮤니티에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아갔다. 이후 드랙 문화는 몇십 년 동안 지하 클럽이나 뒷골목의 바 같은 공간에서 꽃을 피웠다.
현대의 드랙 문화는 다르다. 단순한 여장이 아니다. 대부분 동성애자로 이루어졌던 과거와 달리 이성애자 드랙 아티스트도 있다. 여성이 남장을 하고 공연을 펼치는 ‘드랙킹’이 출현했고, 성별을 짐작 할 수 없는 기이한 모습으로 분장하는 ‘클럽키드’도 생겨났다. 여러 장르가 생겨나면서 그 경계는 모호해졌다. 이제 퀸이나 킹보다는 ‘아티스트’로 통칭한다. 이들 장르의 공통점은 하나다. 분장과 공연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표현하는 것.
‘드랙’은 몇 년 전만 해도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즐기는 문화였다. 그러나 2009년 미국의 TV프로그램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RuPaul’s Drag Race)’가 방영되면서 드랙 문화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는 미국 유명 드랙 아티스트 ‘루폴’의 심사를 통해 드랙 참가자들 중 최고를 뽑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시즌 11까지 제작되었을 정도로 팬층이 두텁다. 2016년 방영된 시즌 8에서는 한국계 드랙 아티스트 ‘김치(Kimchi)’가 독창적인 스타일의 드랙을 선보이며 최종 3위까지 올랐다. 이로 인해 한국 드랙신(Scene)에도 불씨가 지펴졌다. 국내에서 많은 드랙 아티스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무대가 있는 곳을 찾아가지 않더라도 유튜브, 인스타그램, 패션화보 등에서 그들을 만나볼 수 있다. 그들은 당당히 뭍으로 올라왔다.

▲ 드랙 아티스트 지반(Gvan) ©이혜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드랙 아티스트 ‘지반’을 만나 한국의 드랙 문화와 그의 드랙 활동에 대해 들어보았다.
- 드랙을 처음 접하게 된 건 언제였어요?
“2016년 여름, 휴학생 시절에 이태원의 바(Bar)에서 바텐더로 일했어요. 맞은편에 클럽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드랙 아티스트들의 주 무대로 역사가 깊은 곳이었죠. 아마 20년도 넘었을 거예요. 그때 휴식시간에 밖으로 나오는 드랙 아티스트들을 보게 됐어요.”
- 그때부터 드랙 활동을 하기 시작하신건가요?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멋진 퍼포머들이라고만 생각했고 드랙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어요. 그 분들의 모습을 선망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나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나를 찾아갔죠. 머리를 길러서 양 갈래로 묶고 출근을 한다든지, 크롭 티에 망���스타킹을 신는다든지 하는식으로요.”
- 드랙을 시작할 때 특히 누구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나요?
“처음에는 스스로도 드랙에 대해 확신을 갖고 시작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쇼에 서기 전까지 많이 흔들렸어요. 변해가는 제 모습에 당황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그때 같이 바텐더로 일했던 분이 지금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신 드랙 아티스트 ‘나나’님이에요. 그분을 통해서 힘을 많이 얻었어요. 배운 것도 많고요. 그 후로 스스로를 정립해가면서 자신감이 생겼어요. 쇼에 서고 나서는 많은 사람들이 지지해주고 응원해줬죠.”

▲ 드랙 아티스트 지반(Gvan) ©이혜진
- 본격적으로 무대에 섰던 건 어디에서였나요?
“이태원의 ‘Q bar’예요. 공연자로서 페이를 받고 선 첫 무대이다 보니 정말 떨렸어요. 노래 한 곡을 립싱크로 3분 정도 공연하는데 거의 한 달 가까이 준비를 했어요. 무조건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긴장해서 마인드컨트롤을 해도 소용이 없더라구요.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무릎에 힘이 풀려 친구에게 안겼어요.”
- 처음 공연했던 곡이 Pink의 ‘Slut Like You’ 이던데, 곡을 선정하는 기준과 무대를 꾸밀 때 특히 신경 쓰는 부분이 어떤 것인가요.
“Pink의 ‘Slut Like You’는 페미니즘과 관련이 있는 노래인데, 제가 생각하는 사회적인 메세지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첫 공연 곡으로 선택했죠. 항상 잘하고 싶고, 즐기고 싶다는 마음이 커서 신중하게 노래 선정을 해요. 강한 여성에 대한 동경심이 있어서 서문탁이나 이은미 스타일의 노래를 좋아해요. 무대를 꾸밀 때는 주로 곡을 기준으로 메이크업과 의상에 신경을 써요. 강한비트의 음악일 땐 동작이 큰 안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숏컷 가발을 쓴다든지 하는 식이죠.”
-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은 어떤 공연이었나요.
“<불후의 명곡>에서 차지연 씨가 불렀던 네 박자라는 곡을 했을 때예요. 제가 공연하는 곳은 관객의 80% 정도가 외국인이에요. 이 노래가 긴 독백으로 시작해서 걱정을 가지고 무대에 올랐는데 관객들이 숨죽인 채로 제 공연에 집중하고 있는거예요. 내용은 알아듣지 못해도 제가 어떤 것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마음으로 전해진거죠. 관객과의 내적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해준 경험이었어요.”

▲ 드랙 아티스트 지반(Gvan) ©이혜진
- 국내에서도 드랙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는 추세예요.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유튜브를 통해 활발하게 활동하는 드랙 아티스트들과 ‘김치(Kimchi)’ 때문이겠죠. 무엇보다 넷플릭스를 통해서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것이 큰 이유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미국의 드랙은 우리나라와 조금 다른 점이 있어요. 갈래도 다양하고, 퍼포먼스나 워킹, 코미디적인 요소도 다루고 있고요. 드랙 문화가 희화화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해요. 모든 드랙 아티스트들이 그런 이미지로 비칠까봐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하고요. 물론 드랙을 어떻게 보는지는 자유, 느끼는 것도 자유라고 생각합니다만 조금 안타까운 면이 있죠.”
- 드랙 문화를 ‘여장’이라고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어요. 드랙퀸이라는 단어로 인해 ‘여성비하에서 파생된 문화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사회적으로 고착화된 생각들을 기반으로 ‘이건 킹이다, 퀸이다’ 나누다 보니 ‘혐오 아니냐’ 하는 이야기로 연결되는 것 같아요. 드랙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문화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그런 편견에서 벗어나려 하는 문화죠. ‘여성을 혐오해서 이렇게 표현하는 거야’라고 생각하는 드랙 아티스트는 없을 거예요. 루폴이 이런 말을 했어요. ‘모든 사람은 알몸으로 태어나며, 우리가 걸치는 모든 것이 드랙이다.’ 긴 머리를 했다고 여자인 것도 아니고, 짧은 머리를 했다고 남자인 것도 아니라는 거죠. 사회적으로 고정된 시선에서 벗어나려다 보니 서로 반대의 성을 표현하게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 현재 활동하는 사람들 중 다수가 ‘LGBTQ(성 소수자)’이다 보니 ‘드랙 문화는 LGBTQ만 즐길 수 있는 문화’라는 생각에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대중도 있을 것 같아요.
“오랫동안 LGBTQ 커뮤니티에서 발전해온 문화이다 보니 그런 인식이 자리잡은 건 자연스러운 일이죠. 하지만 현재의 드랙 문화는 과거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지금 활동하는 드랙 아티스트들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하고요. 지금까지 드랙이 베일에 싸여 있는 문화였다면 이제 베일을 벗고 대중과 소통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요.”
- 앞으로의 목표가 뭔가요?
“스튜디오를 차리는 거예요. 드랙 아티스트들의 플랫폼이자 LGBTQ 청소년들을 위한 쉼터를 만들고 싶어요. 휴학생 시절 행성인(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에서 활동한 적이 있어요. 인권활동 쪽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저 또한 어렸을 때 힘들었던 기억이 있어서 그들에게 힘이 되고 싶어요.”

▲ 드랙 아티스트 릴라(Lilla) ©이혜진
현대의 드랙 아티스트들은 내면에 자리 잡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혹은 억압당했던 것들을 분장과 공연으로 표출해낸다. 그 모습이 생소해 잘못된 것으로 받아들이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든 그들은 스스로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나를 부정하면 파멸하리라(Deny me and be doomed)”라는 헤드윅의 대사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자문하게 만든다. 나는 지금, 진정한 ‘나’로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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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기 넘치는 그녀, 페기 구(페기 굴드, Peggy Gou)

▲ Peggy Gou
탄탄한 구릿빛 피부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를 가진 그녀. 동양인 같기도, 서양인 같기도 한 그녀의 이름은 페기 구(Peggy Gou)다. 베를린을 기반으로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녀는 DJ이자 프로듀서다. 국내에서는 배우 유아인이 이끄는 아티스트 그룹 '스튜디오 콘크리트(Studio Concrete)'에서 뮤직 셀렉터로도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자란 그녀는 런던의 유명 패션 스쿨인 London College of Fashion 을 졸업했다. 독특한 패션 감각과 중성적인 매력을 가진 그녀는 사진찍히는 것을 좋아했고, 그로인해 그녀의 블로그에 많은 팬이 생겨나 그 인기가 음악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2012년, 친구가 들려준 음악 CD를 통해 하우스와 테크노 뮤직에 눈을 떴다는 페기. 그 CD는 Roman Flugel 의 Fatty Folders 였다. 123bpm부터 76bpm 까지의 다양한 장르 음악이 담긴 이 앨범에 매료된 그녀는 오래된 CDJ(specialized digital music player for DJing)를 구해 디제잉을 독학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녀가 있던 이스트 런던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열렸던 파티 '클락'을 통해 디제잉 실력을 다지며 현재의 페기 구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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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기 구는 우리나라보다도 유럽에서 훨씬 유명하다. 코첼라(Coachella), 후지 록(Fuji Rock), 데크만텔(Dekmantel)과 같은 해외의 유명 뮤직페스티벌에 다수 참여했고, 일렉트로닉 음악의 성지인 베르크하인 클럽/파노라마 바(Berghain club & Panorama bar)에서 한국 아티스트 최초로 공연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2018년 1월에 발표한 그녀의 앨범 [Once]의 첫번째 트랙 '잊게 하네' 는 전세계의 독립레이블을 위한 음악 시상식인 영국의 'AIM Awards'에서 '올해의 노래' 상을 수상했고, 더 가디언이 선정한 Top 100 tracks of 2018에서 11위를 차지했다. 또한 2019년에는 포브스가 선정한 '영향력있는 리더 30인' 에 그녀의 이름을 올리며 월드클래스 아티스트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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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련되고 독특한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하고있는 페기 구는 음악 외에도 나이키(Nike), 레이벤(Ray-ban) 등 다수 패션 브랜드와의 콜라보를 통해 패션계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며 해외 유수 잡지들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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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서의 사진 : 낸 골딘, Nan Goldin
사진이라는 매체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기록해준다는 것이다. 렌즈의 왜곡이나 출력기기에 따른 수차를 따져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현 기술에서 사진만큼 우리의 현재를 또렷이 남길수 있는 무언가는 없다.
우리는 어떤 소중한 순간을 만날 때에 항상 카메라와 마주한다. 수 많은 기념사진, 웨딩사진, 만삭사진 심지어 누군가의 장례식에서 마지막으로 고인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또한 ‘사진’이다. 사진은 이렇게 기록으로서의 제 역할을 가질 때 가장 빛이 난다.

▲ Nan one month after being battered, 1984
기록으로서 쓰인 사진예술의 대표적 작가 중 하나인 낸 골딘.
골딘은 어린시절 언니 바바라를 자살로 잃었다. 그 후 정신적 충격 때문인지 여러 기숙학교에서 퇴학을 당해 부모님과의 의견 충돌을 겪고, 14살에는 집을 떠나게 된다.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난 골딘은 마약, 폭력, 섹스로 점철된 젊은 이방인들의 모임에 가입하고 그 사이에서 여러 친구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하는 일상 위의 무엇이든 적나라하게 필름에 담아내었다. 언니의 자살을 겪은 그녀는 자신의 삶을 다루는 수단으로 사진을 선택했다.
▲ Nan and Brian in bed, 1983
그녀의 사진은 하루를 끝내고 쓰는 일기와도 같다. 일기보다도 더 일기같다.
자신의 삶을 통제하기 위해 사진이라는 수단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세부사항을 강박적으로 기록한 기록물로 느껴지기도 한다. 간직하기 위한 사진이 아닌 자신이 겪은 모든 일들을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없게 만드는 것. 과거의 힘들었던 시간에 향수를 느낄 수 없도록 아픔은 아픔으로 기록하는 것. 그게 그녀가 삶을 대하는 태도이다.
▲ Jimmy paulette and Taboo in the bathroom, New York

▲ Misty and Jimmy Paulette in a taxi, New York
1969년, 골딘은 뉴욕에서 일어난 스톤월 항쟁의 영향을 받아 본격적으로 동성애자들의 문화를 사진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5,60년대에는 미국의 동성애자를 반대하는것이 합법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권리를 위해 항상 소리쳐야 했고, 낸 골딘은 그들과 함께하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수집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기록한 것에 관하여 동성애자, 여장남자,에이즈 환자 등 소외계층에 대한 기록이라며 ‘1970,80년대 미국의 언더문화를 보여주는 표상’이라는 타이틀을 걸었지만 그들은 그저 낸 골딘의 일상속에 있는 친구이자 사랑, 가족이었을 뿐이다. 자신의 일상을 예술로 승화시킨 골딘은 사진의 원초적인 기능에 충실했던 아티스트이자 삶의 기록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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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서의 사진 : 박진영 (Area Park, 1972~)
▲사진작가 박진영의 블로그
“설명할 수 없는, 혹은 관여할 수 없는 일이나 상황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충실한 기록뿐이다.”
한국의 사진작가 박진영의 말이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작업하고있는 그는 아날로그 방식의 사진 프로세스를 자신만의 '일관성'으로 굳혔다. 한 장 한 장 신중하게 촬영하는 마음과 어떤 결과물을 내놓을지 알 수 없는 필름의 특성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다. 대학을 사진으로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을 공부한 그는 1989년부터 대형카메라와 파노라마카메라를 두 손에 쥐고 도시풍경과 사건현장을 담아냈다. <2004, 탄핵가결 순간의 국회>와 시급 2,500원 시절의 아르바이트생을 찍는 등 한국 현대사의 모습을 오랫동안 적나라하게 기록했다.

▲ 쇠파이프(서울시청), Gelatin silver print, 1992

▲ 시간당 2500원 버는 이인철(18)과 진경호(18), C-print, 2002
2006년, 그는 일본인 아내를 만나 일본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고 그로부터 5년 뒤인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을 겪는다. 박진영은 대지진 이후 폐허가 된 현장을 찾아 기록하기 시작했다. 촬영을 위한 답사로 쓰나미 현장을 찾은 그에게 제일 눈에 띄었던 것은 곳곳의 땅바닥에 흩어져 있거나, 바람에 날리는 주인없는 사진들이었다. 처참한 재난의 현장 속에 버려진 그 사진들을 보며 우리의 삶 속에서 사진이란 어떤 의미인지 고민했고, 재해로 많은 것을 잃은 사람들이 가장 되찾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는 인터뷰 질문에 '가족앨범' 이라 답한것을 떠올렸다는 그다. 주인 없이 진흙 속에 버려진 사진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그는 수많은 앨범 중 자꾸 눈에 밟히는 하나를 집는다. 그 앨범의 주인은 '카네코 마리'다. 많은 앨범들 중 '카네코 마리'의 앨범을 집어든 것은 전몽각씨의 사진집 '윤미네 집' 때문이었다고 한다. 아마추어 사진가이자 아버지인 전몽각씨가 '윤미'가 태어났을 때부터 시집갈 때까지의 모습을 기록한 '윤미네 집'. 그 책의 표지가 떠올라 박진영은 카네코 마리의 앨범을 집어들었다. 그 후 그는 앨범의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수소문하고, 시청을 찾아가 대지진으로 인한 사망자의 명단을 확인 해 그녀와 친인척들의 행방을 계속해서 쫓았지만 결국은 아직까지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아래는 박진영이 주운 카네코 마리 씨의 앨범 속 사진들이다.




박진영 작가는 이 외에도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난 후 폐허가 된 마을을 직접 찾아가 그 모습들을 기록으로 남긴 <후쿠시마 아카이브>,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가보고 싶다는 곳들을 촬영해 창 밖에 비친 모습처럼 구현한 <엄마의 창>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 박진영, ‘후쿠시마 아카이브 - 타버린 책상’. 디지털 C-프린트, 185 X 225 cm. 2011

▲ <엄마의 창, Window for my mother>, 박진영
나는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처럼 진화를 거듭하는 디지털 기술이 싫다. 그리고 무엇이던 쉽게 찍으며 쉽게 지워버리는 요즘 사람들의 세태도 싫다. 그것들은 작고 빠르고 편리하지만 찍을 때의 상황과 의미들을 머지않아 잊게 한다. 어릴 적 자전거를 한번 배우면 몇 십 년을 안타다가 타도 탈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이란 몸으로 체득한 것은 오래가지만 머리로 습득한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나는 수 십 명의 친구 전화번호를 외웠었는데, 지금은 아버지 핸드폰 번호도 모른다. 어디 그것뿐이랴...최근 사진은 인간이 상상하는 것 이상을 보며 진화한다고 생각하지만, 제발 내 몸이 느꼈던 것, 몸소 체험했던 것부터 다시 시작해보자. 사실, 우리들은 필름을 넣으며 무엇을 찍게 될지도 모르는 그저 바보 같은 인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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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못끊겠는 야식, 캡슐 한알이면 끊을 수 있다고?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의 건강통계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민 비만율이 9년 사이 무려 9%나 증가했다. 높아지는 비만율과 함께 다이어트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는 요즘. 다이어트 방법은 너무나도 다양해졌다. 식이조절을 통한 다이어트나 운동을 통한 방법이 보통이지만, 다이어터라면 한번 쯤 유혹에 빠져보았을 알약 하나가 있다. 바로 다이어트 보조제인 ‘식욕억제제’다. 온라인으로도 쉽게 구매할 수 있고 복용하기만 하면 식욕을 감퇴시켜 준다는 인터넷 광고를 보고 에디터가 직접 1주일 동안 복용해보았다. 과연 식욕억제제를 먹었을 때 우리의 몸은 어떤 증상을 보일까?
에디터가 복용할 식욕억제제는 온라인으로 해외직구를 통해 쉽게 구매했다. 아마존에서 3년 연속 다이어트부문1위를 차지했고 미국에서 ‘천연성분 식욕억제제’로 알려진 제품이다(LIPOFUZE, 55,000원). 주성분은 탄수화물 흡수의 차단효과를 가진 ‘가르시니아 캄보지아’와 천연 무수카페인 성분이 들어있는 ‘녹차’다.
첫 3일 동안은 아침에 1알, 점심에 1알. 하루에 2알 복용했고, 그 후로는 아침에 2알씩 복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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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차 ~ 3일차
09:00 AM 아침에 한 알을 먹고, 아침식사는 하지 않았다. 빈속에 약을 먹어서인지 더부룩한 느낌이 들었다. 크다고 할 증상도 없고 식욕억제 효과도 느껴지지 않는다.
11:30 AM 점심 식사 30분 전, 한 알을 먹고 점심식사를 했다. 평소와 같은 양을 먹었는데 과한 포만감이 들었다.
02:00 PM 다른 때 보다 입안이 약간 마르는 느낌이 든다. 약을 복용할 때 물을 하루 2리터 이상 섭취해야 한다는 부분이 주의사항으로 명시되어 있어서 물을 자주 마셨다. 식욕억제제 성분에 카페인이 들어있기 때문에 커피는 마시지 않았다.
06:00 PM 허기가 져 저녁을 먹었다. 약의 효과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 것 같다.
4일차 ~ 5일차
09:00AM 전날 저녁에 밥을 먹고 자서 인지 얼굴이 띵띵 부었다. 복용법을 바꿔 아침에 2알 복용했다.
11:00AM 한알 씩 먹던 약의 양을 늘려서인지 메스꺼운 느낌이 든다. 점심식사 때 입맛이 없어 평소 먹던 양의 1/ 2 밖에 먹지 못했다. 식욕억제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02:00PM 오후가 되어도 배가 별로 고프지 않다. 입안이 바짝 마르고 약간 어지러움이 느껴진다. 술에 취한 것처 럼 몽롱한 느낌이 들고, 평소보다 심장이 빨리 뛴다. 커피는 먹지 않았고 물을 계속해서 마셨다. 너무 많이 마셨는지 헛배가 부르고 속이 안좋다.
06:00PM 시간이 지날수록 증상은 점점 옅어져 저녁이 되니 평소와 비슷한 몸의 상태로 돌아왔다. 하지만 입맛은 여전히 없어 저녁을 걸렀다.
6일차 ~ 7일차
09:00AM 계속해서 아침에 2알을 복용했다. 어젯 밤 저녁을 걸러서인지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11:00AM 물을 더 마시면 메스꺼운 증상이 좀 나아질까 하는 생각에 평소보다 자주 마셨다. 그럼에도 더부룩하고 메스꺼운 증상은 여전했다. 4~5일차와 마찬가지로 점심에 입맛이 없어서 원래 먹던 양의 1/2 정도를 먹었다.
02:00PM 오후 내내 몽롱하고 무기력한 느낌이 들어 해야할 일에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다. 컨디션이 안좋아서 인지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06:00PM 이상하게 가만히 있어도 손이 떨리고, 심장이 빨리뛰어 밥을 먹어야한다는 생각이 아예 나지 않았다. 밤에는 잠이 잘 오지 않아 3시간 정도 뒤척였다.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몸에 기력이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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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동안 식욕억제제를 먹어본 결과, 약의 효능인 ‘식욕억제’에 대한 효과는 3일 후부터 확연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아침에 2알을 먹는 4일차부터 어지러움이나 메스꺼움, 몽롱함, 손떨림 등의 증상이 함께 나타났다. 무기력하고 신체의 컨디션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약을 복용한지 7일차 되던날, 몸무게를 쟀더니 2kg가 빠졌다. 다이어트에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식욕억제제를 먹는 동안에는 적당한 운동이 함께 병행되어야만 건강한 효과를 볼 수 있다. 약에 의존하면 영양 불균형이나 우울증, 무기력증 등 몸과 정신에 안좋은 영향을 받는다. 에디터는 식욕억제제의 효과를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천연성분의 제품을 단기간 복용했기 때문에 증상이 미미했지만, 타사의 식욕억제제를 장기간 복용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고 카페인 함량 음료를 10병 마신 기분이었다. 손이 떨리고 잠도 오지 않는다.”, “약을 복용하다가 끊고 나니, 부작용으로 식욕이 더 늘어나서 요요 현상이 왔다.” 등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
머리는 알고있지만 몸은 자꾸 요행을 바란다. 순간적인 체중감량을 위한 다이어트가 아닌, 적절한 식이요법과 꾸준한 운동을 통해 건강하고 아름다운 몸을 만드는 것이 진정한 ‘다이어트’ 임을 깨달았기에 오늘부터 운동!
사진 출처 : unspla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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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너를 보내야 할 때

<인간과 개, 고양이의 관계 심리학>의 저자 세르주 치코티는 "반려동물이 죽었을 때 남자들은 가까운 친구를 잃었을 때와 같은, 여자들은 자녀를 잃었을 때와 같은 고통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반려동물은 우리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존재이다. 어쩌면 사람보다도 더 우리의 마음을 잘 보듬어줄 수 있는 존재.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가족처럼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
농림축산검역본부의 '2018년 동물보호에 대한 국민의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개, 고양이 등 반려동물 양육 가구 수는 약 511만 가구(23.7%)로 조사되었다. 반려동물을 기르는 가구 수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그에 따른 펫로스 증후군 또한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펫로스 증후군 (Pet loss syndrome)' 이란 가족처럼 여기던 반려동물이 세상을 떠나 극도의 상실감과 우울함을 느끼는 증상을 말한다.
개와 고양이의 기대수명은 평균 15~17년으로 사람에 비하면 훨씬 짧은 수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반려동물과의 이별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사랑하고 의지하는 반려동물의 죽음을 미리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슬픈 일이지만 우리는 너무 오래 아프지 않기 위해 그들과의 이별을 항상 마음 한 켠에 준비해 놓아야 한다.
반려인에게 반려동물을 잃는다는 것은 가족 중 하나가 죽은 것과 같은 일이다. 펫로스 증후군은 적절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우울증으로까지 악화될 수 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미국 수의사 협회는 펫로스 증후군을 극복하기 위한 5가지 방법으로 1.반려동물이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2.슬픈 감정을 충분히 느끼고, 3.반려동물과의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리고, 4.반려동물이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되새기고 마지막으로 5.동호회나 커뮤니티 등에서 반려동물의 죽음을 경험했거나 공감할 수 있는 이들과 감정을 공유해보는 것을 제시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것은 서둘러 잊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충분히 아파하고 충분히 그리워한 뒤 보내주어도 늦지 않다. 반려동물과의 이별을 맞는 반려인들이 오랫동안 아프지 않도록 주위에서 충분한 배려와 위로를 해 주는것도 그들에게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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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라, 올해 하반기 국내 첫 오픈

국내 뷰티 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화장품 편집매장의 원조 격인 '세포라'가 오는 10월 24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파르나스몰에 165평 규모의 한국 1호 매장을 오픈한다고 15일 밝혔다. 세포라는 300여개의 화장품 브랜드를 한곳에 모아 판매하는 '편집 매장'으로 여러 브랜드의 화장품을 체험한 뒤 구매할 수 있는 체험형 매장의 원조이다. 1970년 프랑스에서 설립되었고, 현재는 34개국에 2500여 매장이 진출해 있다.
이미 5~6년 전부터 한국 진출을 저울질 해오던 세포라는 자신들만의 독점 브랜드와 자체브랜드 등 국내에선 쉽게 접할 수 없는 화장품 브랜드를 입점하고, 국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서비스인 소비자의 피부톤에 맞는 색상과 음영을 찾아주는 아이큐(IQ), 증강현실(AR) 기술을 활용하는 가상 아티스트 등을 국내에서도 강화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이를 통해 화장품과 건강기능식품을 함께 취급하는 국내의 헬스앤뷰티(H&B) 스토어들과는 차별화를 두겠다는 전략이다.
다만 국내 헬스앤뷰티(H&B) 스토어의 경우 1~2만원대 제품에 대한 반응이 높아, 4~5만원대 안팎의 제품이 주를 이루는 세포라가 가격 면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미 포화상태인 국내의 화장품 시장에서 새로운 브랜드로 무장한 세포라가 앞으로 K-뷰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사진 출처 : 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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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열심히' 보다는 '옳은 방법'으로, '애니링고'

전 세계가 사회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지금과 같은 글로벌 시대에서 영어는 많은 사람들에게 필수요건이 되었다. 영어 뿐만 아니라 자국어 이외의 제 2외국어를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사회에서 매우 큰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현대 사회에서는 인터넷이나 책과 같은 매체를 통해 제 2외국어 학습을 위한 컨텐츠를 손쉽게 얻을 수 있으며, 그 양은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수많은 컨텐츠와 정보를 가지고도 효과적이지 못한 방식으로 학습하게 된다면 열심히 공부한다해도 제대로 습득하는 게 어려운것이 사실이다. 무작정 외워보지만 어제 외운 단어도 기억이 안난다거나, 단 한 문장을 말하는것에도 어려움을 느끼는 등의 경험은 외국어를 공부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우리는 이제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외국어를 학습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기업 디엠에듀가 개발한 어플리케이션 ‘애니링고’는 독일의 심리학자 헤르만 에빙하우스(Hermann Ebbinghaus)의 망각곡선 (Forgetting Curve) 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어학 어플리케이션이다. 헤르만 에빙하우스는 16년 간 인간의 기억을 연구한 독일의 심리학자로, 기억에 관한 최초의 실험적 연구를 한 사람이다. 그는 ‘망각곡선’이라는 그래프를 가지고 인간의 기억에 관한 연구결과를 내놓았는데, 그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어떤 한 가지를 학습하게 되었을 때 10분 후부터 망각이 시작되며 1시간 뒤에는 50%를, 하루 뒤에는 70%를, 한달 뒤에는 80%를 망각하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인간의 망각정도를 나타낸 그래프가 바로 '망각곡선'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무언가 배우고 기억을 정착 시키는것에 있어 반복학습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 수 있다. 반복학습을 효율적으로 실행하기 위해서는 옳은 반복패턴을 잘 알고 실천해야 한다. 에빙하우스가 말하는 반복패턴은 10분 후, 24시간 후, 1주일 후, 1달 후 간격으로 총 4회에 거쳐 한가지 학습내용을 복습하는 것인데 이렇게 학습을 반복하게 되면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애니링고’는 이 망각곡선을 기반으로 사용자가 학습한 내용과 시간을 수집하여 반복학습을 할 수 있도록 푸쉬알림 기능을 지원한다. 이로 인해 학습자들은 애니링고가 알려주는 알람에 따라 잊지 않고 복습하는것이 가능하다. 또한 학습 텍스트와 함께 그에 따른 사운드와 애니메이션을 플래시카드 형식으로 나타내어주는데, 이는 학습자가 학습 내용을 더 효과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며 학습에 대한 흥미를 북돋워준다.
우리가 하나의 외국어를 습득하기 위해서는 방대한 양의 학습이 필요하다. 그만큼 꾸준히 하는 것과 옳은 방법으로 학습하는것이 요점이다. 애니링고와 같은 체계의 매체로 학습한다면 제 2외국어를 갖는것이 우리에게 너무 먼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른다.
사진출처 : 헤럴드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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