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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어쩌다 보니 걔랑 두물머리에 가게 됐다. 걔랑 같이 있으면 어쩌다 보니 일어난 일들이 너무 많이 생겼다. 세계는 하나의 우연한 사고와 실수라는, 에밀 시오랑이 했던 말처럼 어쩌면 어떤 세계는 (특히 연애는) 우연으로 시작되는 건지도 몰랐다. 걔는 정말 사고처럼 내게 왔고 나는 실수하듯 걔를 계속 붙잡았다. 걔가 자꾸 생각나 하루를 통째로 망칠 것 같을 때마다 나는 중얼거렸다. 넌… 사고다.
너는 사랑을 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려는 사람 같다고, 왜 사랑을 정의하려 하느냐고 정의 말고 너부터 챙기라고 걔랑 두 번째로 헤어지기 전에 걔가 내게 그랬다. 그 말을 들으면서 너는 나만큼 책을 읽지도 않는데 어떻게 이승우가 쓴 글 같은 얘길 할 줄 아는 건가 했다. 그 말을 일기장에도 쓰고 메모장에도 쓰고 헤어지고도 생각하면서 그제서야 걔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나는 제대로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이 들어간 책이면 뭐든 읽어버릇 했고 걔는 날 헛똑똑이라고 불렀다.
걔랑 몰래 이곳저곳을 많이 갔다. 가는 곳마다 어쩌다 몰래 간 곳이라고 생각하면 몇 배는 더 근사하게 느껴졌다. 두물머리도 마찬가지였다. 높고 푸른 나무와 잔잔한 물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모든 것이 적당하다고 느껴지던 평화로운 곳이었다. 한참 걷다 그늘 밑의 벤치를 찾아 앉았다. 흘러가는 강물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옆에 앉아있는 걔는 '좋다'고 말했다. 나는 '나도 좋다'고 대답했다. 걔가 내 옆에 있는 것이 좋아서였는데 걔는 아는지 모르는지 입을 헤 벌리고 강물을 쳐다보기나 했다.
걔랑 같이 있을 때 내 몸은 자꾸자꾸 걔 쪽으로 쏠렸다. 걔 몸에 기대면 내가 힘을 주고 서 있지 않고도 삶이 얼렁뚱땅 흘러갈 것 같았다. 무릎에 누운 채 걔와 함께하는 저녁을 상상했다. 힘 없이 눈을 감고 걔한테 안아달라 징징대는 저녁이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축 늘어져 그런 상상을 하고 있는데 걔가 내 몸에 풀썩 기댔다. 햇빛 때문에 눈을 찡그리길래 손으로 햇빛을 가려주었다. 걔를 재우는 내내 그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햇빛으로부터, 벌레로부터, 걔의 잠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지켜주고 싶었다. 걔의 숨소리에 맞춰 숨을 쉬면서 걔가 내게 기대 잠들었던 시간이 어떤 잠보다 달콤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걔도 계속 계속 내 옆에서 자고 싶어지기를 바랐다.
* 진정으로 살지 않는 자가 삶이 무엇인지 묻는다. 참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하고’ 사랑을 하는 것이다.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승우, <사랑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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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가 초반에 내게 말했다. 나는 사랑을 하진 않고 한 발자국 떨어져서 사랑을 하는 사람을 지켜보는 것 같다고. 학문처럼 배워야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고. 나는 그 말을 잊지 않고 있다가 이렇게 사랑을 해석하려고 들 때마다 그의 말을 꺼내 다시 생각해 볼 작정이다. 나는 사랑을 하고 싶은 사람인가. 사랑을 구경하는 사람인가. 배우고 해석한 뒤 말로써 전하고픈 사람인가. 누구에게. 누굴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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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글을 배우는 사람처럼 뜨문뜨문 산다 나는 사랑하다의 의미를 이제야 안 사람 백과사전이 필요한 사람 늘 잊고 늘 모르고 늘 낯설고 늘 처음인 사람이다 이런 내가 이제는 싫고 지겨워진 건 나에게 여러 다른 단어로 사랑한다 말하는 걔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랑의 뜻을 몰라서 사랑을 하지 못해서 사랑에 대한 것들을 외우듯 하는 내가 애처로워서이다 그런 날이 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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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를 만나러 가는 버스 안이다.
내 가방 안에 있는 것:
원피스
세면도구
속옷
알로에젤
같이 피울 담배와 향
폴라로이드와 일회용 카메라
향수 공병
걔가 빌려주어 어제 다 읽은 소설
가는 길에 읽으려고 챙긴 소설
이것들을 챙기고 버스에 올랐다.
브라는 잘 입지 않지만 언제 한 번 입었을 때 걔가 은근슬쩍 푸는 것이 좋아서 챙겼고 알로에젤은 혹시 걔가 군고구마가 되어 큰 통이 통째로 필요할까봐서 챙겼고 담배는 여행 때만 피우기로 서로 약속해서 챙겼고 향은 한 장 피우고 나머지는 걔에게 주려고 챙겼고 폴라로이드와 일회용 카메라는 대충 연애질 같은 것을 해보려고 챙겼고 향수는 걔 옷에 뿌리려고 챙겼고 책은 다시 돌려주려고 챙겼다.
좋다. 나를 꼬시는 것이 좋고 같이 가자 하자 하는 것을 순순히 따르는 것이 좋고 걔가 나를 욕망하는 것이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만지는 것이 좋고 걔의 침 냄새와 목소리가 좋고 익숙해지는 말투가 좋고 나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좋다고 말하려는 걸 얼마나 참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이 걔가 좋아서인지 걔와 즐기는 것들이 좋아서인지 단지 연애질이 좋아서인지 모르겠다고 말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 중인지 모른다.
사실은 걔도 나를 그냥 거기까지만 좋아해줬으면 좋겠다. 어디 가서 같이 살자고 하지 말고 약속하거나 단언하지 말고 그냥 여행하다 잠깐 주고 받는 마음처럼만 나를 좋아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더 걔를 편하게 대할 수 있을 것 같다. 좋아한다고 더 자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걔는 점점 더 재지 않는데 나는 걔에게 무엇을 더 주지 않을지 재고 또 잰다. 겁이 나는 것이다. 끝이. 상실이. 걔보다 나를 더 좋아해 줄 사람이 있을까 막연히 생각하게 되는 뻔한 날이.
걔는 그렇게 말하는 내게 눈을 흘기고 재수없다 말하고 자기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끊임없이 늘어놓기 시작하고 나를 숨막히게 안아버린다. 그럼 나는 뭘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는 사람이 되어 꼼짝도 못하고 그 품에 안겨있게 된다. 왜 너는 사랑을 정의하려고 하느냐고 정의 말고 너부터 챙기라고 여기저기 곁눈질하다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또렷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가만히 들으면서. 나는 입술을 깨문다. 좆됐다고 생각한다. 걔는 늘 분명하고 나는 늘 희미해서 걔의 말을 듣고만 싶어진다고. 생각한다. 그 확신이 반짝거리고 멋져보여서 가끔 그냥 걔를 따라 도망가고 싶어진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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