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법
Explore tagged Tumblr posts
livlovlun119 · 2 years ago
Text
효종 현종 / 1645 소현세자 사망 / 1653 하멜 제주도에 표류 이듬해 훈련도감에 배속 / 1654 1658 청의 요청으로 러시아군 정벌에 동원(나선 정벌 1차 변급 2차 신유) / 1659 효종 사망 1차 예송 논쟁
소현세자 봉림대군(효종) / 마테오 리치(곤여만국전도) 아담 샬(시헌력 역법) / 소현세자 의문사 /
장릉 인조(능양군) 경기 파주 / 영릉 효종(봉림대군) 인선왕후 장씨 경기 여주 / 숭릉 현종 명성왕후 김씨 경기 구리 동구릉 / 명릉 숙종 인현왕후 민씨 경기 고양 서오릉 / 휘릉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인조 효종 현종 숙종 때까지 4대에 걸쳐 왕실의 어른으로 지냄) 경기 구리 /
김자점 소현세자에 이어 효종에게도 칼을 겨누다 / 아들김익 과 함께 역모하다가 처형됨 /
송시열의 비협조로 북벌 정책이 물거품 되다 / 서인 한당 (대동법 주장 한강 이북 거주) 산당(대동법 반대 충청도 연산과 회덕 지방 출신)으로 갈라짐 /
김육 대동법을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확대 시행하다 / 상평통보 발행 숙종 때 법정화폐로 상용화 / 시헌력 도입 /
1차 예송 기해예송 / 효종을 차남으로 여겨 자의대비가 일년간 상복을 입다 / 서인 승리 남인 유배 /
2차 예송 갑인예송 / 허목 송시열 / 남인 승리 / 효종 비를 맏며느리로 여겨 자의대비가 일년간 상복을 입다
경신대기근 경술년1670 신해년1671 / 하멜표류기 / 윤선도 증손자 윤두서 / 윤선도 보길도 부용동 정원 호화로운 생활 / 녹우당 윤선도 유적지 전남 해남 / 윤선도 남인 /
0 notes
rankingnews-blog · 6 years ago
Link
'왕이된남자' 폭군 여진구의 귀환..합방부터 대동법 무산까지 대파란 [어저께TV] - https://mb18.co/?p=241617&utm_source=SocialAutoPoster&utm_medium=Social&utm_campaign=Tumblr...
0 notes
ckrcar · 6 years ago
Video
youtube
[조냥코] 냥코대전쟁 : 섬머 레슨 (냥코꽃 필 무렵, I am a Cat, c²= a²+ b², 대동법, N₂+ 3H₂→2NH₃)
0 notes
hybridblogsco-blog · 8 years ago
Text
국립춘천박물관과 함께하는 5분 역사이야기 [청풍부원군 김우명 상여]
New Post has been published on http://hybridblogs.co/%ea%b5%ad%eb%a6%bd%ec%b6%98%ec%b2%9c%eb%b0%95%eb%ac%bc%ea%b4%80%ea%b3%bc-%ed%95%a8%ea%bb%98%ed%95%98%eb%8a%94-5%eb%b6%84-%ec%97%ad%ec%82%ac%ec%9d%b4%ec%95%bc%ea%b8%b0-%ec%b2%ad%ed%92%8d%eb%b6%80/
국립춘천박물관과 함께하는 5분 역사이야기 [청풍부원군 김우명 상여]
              국립춘천박물관과 함께하는 5분 역사이야기
         ” 현재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상여,
‘청풍부원군 김우명 상여‘를 아시나요?“
      ​
  이 상여는 바로 조선의 제19대 왕 숙종이
자신의 외할아버지인 청풍부원군 김우명에게 하사한 상여입니다 ! ! 
        ​
김우명은 무려 대동법을 실시한 김육의 둘째 아들이며,   조선 18대 임금인 현종의 왕비 명성왕후의 아버지이기도 하는데요.
  ​
김우명이 세상을 뜨자
외손자인 숙종이 이 상여를 하사하였고,   그의 신도비에는 ‘무릇 시신과 관에 쓰이는 물품이 모두 궁궐에서 나왔다’고 전합니다.
        ​
​ 조정에서 얼마나 김우명의 장례에 예우를 갖추었는지 알 수 있겠죠?!
      ​
        상여는 단지 시신을 운반하는 도구뿐만이 아니라
죽은 자의 영혼이 깃드는 집으로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써의 의미가 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장례 과정에서 상여가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지요!
  ​
한편, 김우명의 장례 과정 속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습니다 ! !
조정에서는 부원군에 대한 예우로
‘강원도 춘성군 신동면 증리’에 묘자리를 마련하여 주었는데,
그 곳으로 가기 위해 한강의 뱃길로 가던 중
뗏목이 표류하면서 돌연 갯가로 상륙했다고 합니다!
이런이런! 
그곳은 바로~! 
  춘천시 서면 안보리의 현재 묘소가 있는 자리이고
살펴보니 묘를 써도 좋은 길지여서 하사받은 땅을 반납하고 이곳에 묻었다고 합니다!
마치 김우명이 직접 춘천에 묘자리를 고른 것 같다는 느낌 안드시나요?!
  ​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상여를 통해
조선의 장례 문화를 살펴볼 수 있고
궁중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당시 왕실 장례문화의 수준까지도 잘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
                ​
​청풍부원군 김우명 상여 淸風府院君金右明丧舆
​조선 17세기,높이 160cm​
중요민속자료 120
(2002, 김성구 기증)
<소장 국립춘천박물관>
      이러한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상여를 직접 만나보고 싶으시다면
춘박으로 냉큼!! 달려오세요! 
        출처: 강원도민일보 [강원문화재 탐방]
[강원문화재 탐방] 3. 청풍부원군 김우명 상여
국립춘천박물관 상설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는 ‘청풍부원군 김우명 상여’는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상여이며 궁궐에서 하사해 당시 궁중 상여 …
www.kado.net
              국립춘천박물관에서 학수고대전
갤러리토크 전시설명회에 참가하시면
청풍부원군 김우명 상여에 관한 더 많은 정보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
0 notes
livlovlun119 · 2 years ago
Text
광해군일기 / 1608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 / 1608 이원익 건의 대동법 실시 / 1610 허준의 동의보감 완성 / 1614 이수광 지봉유설(최초의 백과사전식 저술)
유영경과 임해군 제거 / 정인홍(조식학파) 문묘종사에 반대하다 청금록에서 빠지다 이언적 이황 비판 /
성리학 계보 정몽주 길재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1616(광해군 8) 경희궁 숭정전 / 1610 창덕궁 보수 공사 / 1617 경덕궁(지금의 경희궁 인왕산 아래 정원군[인조 아버지] 집 일대) /
오리 이원익(경기 광명시 소하동 소하리 오리곡) 손녀 사위 허목(현종 때 우의정)
연이은 옥사 중립외교 / 봉산옥사 소북파 제거를 위한 대북파의 조작극 / 정인홍의 제자 이이첨이 주도 /
홍길동(7서)의 꿈이 영창대군과 함께 이슬로 사라지다 / 1613 계축옥사 /
1615 능창군(훗날 인조의 형) 사사 / 1618 인목대비 폐위 /
허균 인목대비 폐위에 나서다 역모 죄로 죽다 / 아버지 허엽 김효원과 함께 동인의 ���수 / 강릉 초당 두부 / 항민 원민 호민 / 홍길동전 호민론 / 홍길동 연산군 때 충청도 일대 도적 떼 우두머리가 모델 실존인물 조선왕조실록에 행적 기록됨 /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 조선시대 3대 도적
강홍립 광해군의 밀명을 받들어 후금에 투항하다
0 notes
monpetit · 14 years ago
Text
조선시대 관료의 녹봉과 사적 증여, 그리고 공물 비리
조선 정부가 관료에게 지급하는 녹봉은 고위 관직자의 경우에도 많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것만으로는 양반관료의 '정상적' 생활이 가능하지 않았다. 이 부분을 보충하는 것이 지방 수령들로부터 끊임없이 받는 사적 증여였다. 이 때문에 중앙관료들은 지방 수령에 대해서는 당색에 관계없이 그들의 부패행위를 모른 척했다. 또 수령의 입장에서도 현직 임기가 끝난 후에 다음 자리가 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승진은 고사하고 자리라도 이어가려면 어쩔 수 없이 중앙의 고위관료들과 사적인 유대를 돈독히 해야 했다. 그 유대의 물질적 표현이 바로 사적 증여물이었다. 이 모든 요소가 공물가 인상으로 귀결되었다.
(이정철, 「대동법을 통해서 본 조선시대 공공성 관념과 현실」, 『역사비평』 94호, 2011, pp.118-119)
한 10년 전었다면 위의 글에 동의했을지도 모르겠다. 공직자의 비리는 개인의 문제라기 보다는 구조적인 모순에서 기인한 바가 더 크다고 말이다. 하지만 2011년 현재는 이런 생각이 든다. 그들에게 많은 녹봉이 주어졌다고 해서 공물 비리가 없었을까. 절대 아니라고 본다. 지방 수령의 공물 비리를 감찰하고 차단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없다면 공물 비리는 여전했을 거다. 곳간을 열어두고 도둑놈들의 살림살이를 논하는 건 허무하다. 2011년 현재 남의 돈 뺏어먹고 사는 놈들 봐라. 어디 그놈들이 먹고 살기 어려워서 그런가. 인간이 도구적 이성의 동물인 한에서는, 그놈들에게 착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다.
from Historian's Workshop | Comment »
0 no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