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콜피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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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중의 찬송가
적당히 시린 날씨에 넣어둔 패딩을 꺼내입고 집을 나섰다. 장기하의 앨범을 들으면서 흥얼거릴만큼 기분은 생각보다 산뜻했다. 부모님은 어제 벚꽃축제를 다녀 오셨다. 부는 바람에, 음악에, 고개를 까딱거리며 길에 흐드러진 벚꽃나무를 바라봤다. 곧 질 나무들이었다. 날이 시린만큼, 딱 그만큼만 기분이 좋았다. 오전 수업, 옆자리에 앉은 남자는 휴대폰만 들고 강의실에 들어왔고, 그의 카톡소리는 수업중에 울려 퍼졌다. 순간 필기하던 펜으로 그의 거무접접한 목을 찌르고 싶었다. 딱히 수업을 열심히 듣던 것도 아니었는데, 내 산뜻했던 아침은 그 카톡소리에 무너질만큼 연약했다. 앞자리에 앉은 남자의 헤어밴드가 못마땅 ��였으며 발목이 시려왔다. 고등학교 남학생들의 고성같은 소리가 30분정도 들여왔다. 귀를 막아보았는데 계속해서 들려 환청인가 싶었다. 잠을 못자서 그런가보다 했다. 오랜만에 찾은 병원에서 나는 예약시간보다 50분 늦게 진료를 봤으며, 의사는 나에게 외로워 보인다는 말을 했다. 심리치료를 권하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나에게 그 치료가 어쩌면 ‘기댈 곳’이 되어 줄 수도 있다 하였다. 순간 너무 피로해져 눕고 싶었지만, 어찌저찌 병원을 빠져나와 역 안의 의자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돈이 드는 일이었기에 부모님에게 말을 하였고, 부모님은 ‘필요하면 하는거지’ 식의 반응을 보였다. ㅓ 나도 이제 뭐가 필요한지 모르겠어. 저녁에 반주를 하고 알딸딸한 마음에 80년대, 90년대 변진섭, 전람회의 LP를 들으며 누웠지만 불쾌한 마음에 스콜피온스 앨범을 틀고 기타리프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댔다. 방에 들어와서는 피아노 소나타를 들었다. 동생이 다이어트의 명목으로 만든 버블티에서는 걸레 맛이 났으며 고양이는 거실에서 야웅 야웅 하고 울었다. 피아노 소나타는 베토벤이 좋다. 음악을 잘 모르지만, 그냥 적당한 슬픔이 묻어나서 좋다. 버블티에 들어있는 버블이 소화가 안되는지 속이 매스꺼웠다. 헛구역질을 끅끅 해대도 그 걸레 냄새가 속에서 계속 올라왔다. 끅끅해대는 소리를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에 얹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결국 손을 집어 넣어 구토를 약간 했다. 이 경쾌한 찬송가가 밤새 울려 퍼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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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꼭 알아야 할 헤비메탈의 순간들 30화 - 스콜피온스(Scorpions) https://www.genie.co.kr/magazine/subMain?ctid=24&mgz_seq=8438&pg=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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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wj7nJQ_dTNA
울나라에서도 김태원 형님과 저를 비롯하여 많은 추종세력 가지고있는 기타 영웅 마이클 쉥커 스콜피온스 리듬기타 대부 루돌프 쉥커와 형제지간 이며 try me 로 유명한 UFO기타리스트 m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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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그린음악감상실을 추억하며...1993~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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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그린음악감상실을 추억하며...1993~1995
부산 서면에는 복개천이라고 하는 거리가 있습니다.
복개천이라는 이름은 이곳이 원래 하천이 흐르던 곳이었다는 걸 상상하게돼죠.
그 복개천에 자리잡고 있었던 <예그린 음악감상실> 이야기를 풀어보고자합니다.
오늘 문득 날씨를 핑계로 ��날 앨범을 뒤적이다가 가슴 아련히 남아있는 추억의 음악감상실
<예그린>의 사진몇장이 이 글을 쓰게 만들었네요. ^^
사실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카테고리에 음악여행이라고 제목은 붙혀뒀지만
어떤 음악이야기를 해볼까? 고민하다가 시간이 많이 흘러갔습니다…
예그린음악감상실의 시작은 1993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당시 저는 같은 복개천에서 꽤 유명한 맛집?이었던 서면 삼계탕집 골목의
지하에 자리잡고 있었던 <르네상스>음악감상실에서 DJ를 하고 있었습니다.
르네상스 감상실도 저에게는 소중한 장소로 참 좋은 공간으로 기억합니다. 이곳 사장님의 아들인 최우준군은
이후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기타리스트로 성장하게 되는데요. 까까머리 중학생일때 열심히 기타연습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
르네상스에서의 꿀맛 같은 시간을 보내던 어느날, DJ선배로 부터 새로운 음악감상실이 오픈을 준비중이니
그곳으로 옮길 것을 권유받고, 말없는 미소로 잘해주셨던 르네상스 사장님부부곁을 떠나는게 고민스러웠지만,
새로운 감상실을 만들고 운영하는 오너도 하늘같은 DJ선배여서 제안을 받아드리게 되는데요.
새로운 감상실의 이름은 <예그린>으로 정해지고 감상실이 들어선 자리는 서면 복개천에 있었던 여러 소극장중에 하나인
북성극장 건물 4층으로 엘리베이터도 없는 원시적인 건물이라 오히려 르네상스 보다 환경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답니다.
하지만 내부 인테리어는 당시 이분야에서 부산에서 나름 인지도가 높았던 선배님이 직접 설계와 시공을 맡아 꽤 괜찮았던
시설이었습니다.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유행에 맡게 레이저디스크와 빔프로젝트(소니 3관식) 스크린을 설치하고 서울에 음향회사를 컨택해서
나름 신경을 많이 쓴 감상실입니다. 먼저 오픈해서 인지도를 넓혀가던 서면 랩소디음악감상실과 은근 라이벌의식이 있었던지
시설에 투자를 많이 한 거 같네요.
여기서 잠깐, 빔프로젝트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는데요. 오픈하고 얼마되지않아 당시 고가였던 빔프로젝트와 레이저디스크 수십장이 도난당하는 사고가 발생하게되어 크나큰 위기에 빠질 뻔도 했지만, DJ선배님이자 예그린음악감상실의 운영자였던 선배님의 인테리어업이 잘되고 있는 상황인지라 곧바로 새제품이 달리게 되었답니다. ㅎㅎ(당시 광안리해변의 WHO���스토랑 인테리어로 유명)
左) 예그린 음악감상실 운영자이자 DJ선배 이채우 右 필자
DJ룸에서 포즈를 취한 저입니다. 어색한척. ㅎ
매주 일요일 오후에는 음악감상실 최초로 밴드의 공연이 펼쳐져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전속밴드의 그룹명은 “어른아이”에서 이후 “시간여행”으로 바뀌었습니다.) 기타를 연주했던 김인효씨는 최근 유명 작곡가로 활약중
일요일 오후 그룹사운드의 연주에 박수로 호응하는 손님들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들 계시는지요?
그룹사운드연주도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앞서 예그린 음악감상실이 자리한 곳이 복개천 소극장중에 한 곳인 북성극장 건물 4층이라고 했는데요.
밴드 공연이 있는 날은 극장주의 항의가 빗발쳤는데요. 이유는 조용하게 성인영화를 감상하는 커플들이 밴드공연의 소음으로
영화 감상에 지장을 초래하니 제발 사운드를 낮춰 달라시는 부탁과 항의가 수시로 올라오게 되지만
팬들의 호응에 힘입어 흥에겨워 열정적으로 연주하고 노래했던 예그린의 그룹사운드 <시간여행>팀은 기죽지않고 사운드를
높혀서 스콜피온스. 스틸하트. 헬로윈. 저니등의 음악을 훌륭히 연주해주셨네요~ ^^
간간히 작은무대도 마련되어 다운타운가에서 활약하던 포크가수들도 수시로 무대에 서면서 예그린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무엇보다도 부산MBC라디오 공개방송도 유치하여 당시 막 데뷔하여 활동하던 ‘서태지와 아이들’, ‘김원준’,’신승훈’등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답니다. 이후 그렇게 유명해 질 줄 알았다면 함께 인증샷이라도 찍어두는 건데 아쉽네요…
하지만, 예그린음악 감상실의 시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합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지금에 와서 나름 분석해보니 시대의 트랜드를 읽지 못한게 첫번째 이유가 아닐까합니다.
예그린 음악감상실이 오픈하던 90년대초는 부산의 대표적인 음악감상실인 <무아>도 경영난으로 인해 존폐의 기로에 서서 하루하루 힘들게 버티던 때였고 미국의 M-TV의 영향으로 뮤직비디오가 밀물처럼 쏟아져 나왔던 시대에 이른바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트렌드가 바뀌고 있음에도 감상실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적극적인 대처가 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네요.
무엇보다도 가정용 오디오의 보급율이 굳이 음악감상실을 찾지않아도 되었고 데이트족의 단골 장소였던 음악다방이나 감상실이 아니어도노래방이나 비디오방 같은 새로운 놀거리와 볼거리로 인해 새로운 고객층을 확보하기에는 역부족이 아니��나 싶습니다.
음악감상실을 만들어 문화공간으로서 오랜시간 자리를 지키리라 생각했지만 오픈한지 1년이 지나면서 경영에 어려움에 처하게됩니다.
감상실을 살려보고자 동료 DJ들은 페이를 포기하면서까지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3년여만에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당시 어려운 상황에서도 페이를 반납하며 1년여를 함께 고생했던 동료 선후배 DJ님들께 지금까지도 늘 마음 한켠엔 미안한 마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위사진은 예그린 음악감상실이 문을 닫는 날 동료들과 그룹사운드 멤버분들이 그동안 사랑해주신 팬들을 모시고 마지막으로
공개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 당시 마지막 인사말은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예그린의 부활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던 말은 지금 이 순간까지 저의 마음에 짐이 되어 있답니다. ” 응답하라 1993 ~1995″
오늘 그동안 통연락을 못 드렸던 예그린 음악감상실의 선배님께 전화라도 드려야겠습니다.
아~ 그립네요. LP음이… 예그린음악감상실을 검색해서 들어오신 분들은 꼭 댓글 남겨주세요. ^^ DJ김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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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라
http://www.clsk.org/bbs/board.php?bo_table=gisang_theologry&wr_id=632
- Carry on My Wayward Son (Kansas Band) -
https://youtu.be/s38ignmTqFQ
1. Dust in the Wind 교우님들 안녕하셨습니까? 저는 오늘 지난 15개월 동안 교우님들과 함께 노래를 들으며 말씀을 묵상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그간 말씀을 나누며 함께 울고 웃으며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모두(冒頭)에 그간의 감회를 반추하는 이유는 오늘 말씀으로 제 설교를 잠시 접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함께 말씀을 나누어주신 교우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많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그것도 그냥 인생이 아니라 기독자로서의 인생을 살면서 제 자신을 돌아보면 한없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버리고 싶은 실수들도 많고, 되돌아가서 다시 한 번 그 시기를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고 싶은 후회도 참 많습니다. 기독자라고 하면서도 명목만 기독자이지 이름값을 못하고 살고 있는 것도 많이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아마 이런 감정은 저만의 감정은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후회와 부끄러움들이 조금씩 다 있으실 것입니다. 인생의 후회들은 무지, 유혹, 경쟁, 욕심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우리들이 겪어야만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결코 묵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내면을 통해 부르시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아닐까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 역시 치열한 아귀다툼에, 정신없는 분주함에, 격정적인 분노에, 용솟음치는 감정의 동요에, 우울한 죄의식에 우리 자신을 모두 내어 주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겐 세상 사람들과 다른 ‘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것’은 저 뿐 아니라 모든 기독자들이 다 갖고 있는 것일 겁니다. 아귀다툼과 같은 복잡한 이 시대를 살면서도 기독자들이 남들과 다른 것은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때론 죄송하고, 때론 미안��고, 때론 부끄럽고, 때론 큰소리 칠 정도의 내공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내면을 통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설사 그 목소리를 애써 외면하더라도 들려오는 목소리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목소리조차 인지하지 못한다면 기독교인으로서 정말 큰일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대하여 교우님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마침 이와 관련하여 좋은 노랫말이 있어서 여러분들과 함께 곡을 들으며 말씀을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교우님들과 함께 들을 노래는 미국 중부에서 탄생한 그룹 캔서스의 히트곡 “Carry on my Wayward Son”입니다. 여러분들도 함께 음악 감상을 하시면서 이들이 무엇을 노래하고 있는지 들어보시겠습니다. 2. 용두사미 캔서스 밴드를 소개하기 전에 서양 대중음악에 큰 관심이 없으셨던 분들을 위하여 미리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프로그레시브(progressive)라는 부류의 음악에 대한 것입니다. 프로그레시브는 아트록(art rock)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6,70년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 분야는 여타 장르와 외형적인 형식이나 스타일에서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음악은 특별한 사운드와 분위기에서 여타 장르와 구별됩니다. 대체적으로 그 분위기는 무겁고, 신비롭고, 어두운 듯 느껴집니다. 때로는 아방가르드(avant-garde)적 색체가 짙게 풍기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프로그레시브 1세대라고 하면 아마도 영국출신인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예스(Yes), 혹은 ELP(Emerson, Lake & Palmer)같은 사람들이 아닐까 합니다. 이참에 각 나라에서 가장 유명했던 대표선수들을 한번 말씀드리면 독일엔 크라프트 베르크(Kraftwerk)와 텐저린 드림(Tangerine Dream)이란 팀이 있었고 이태리에는 요즘도 가끔 접할 수 있는 그룹 뉴 트롤스(New Trolls)가 대표선수입니다. 영국엔 위에 언급한 그룹들 외에도 그 유명한 무디 블루스(Moody Blues), 버클리 제임스 하베스트(Barclay James Harvest), 킹 크림슨(King Crimson), 제네시스(Genesis) 등 대 스타들이 즐비하지요. 비록 형식으로 구별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프로그레시브 록은 명확한 특성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프로그레시브 음악가들은 자신들의 음악에 클래식 음악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노래 하나 가지고 성악가와 대중가수가 함께 부른다던지 아니면 전통악기를 가지고 서양대중음악을 연주한다던지 하는 단세포적인 화합물들을 ‘동서양 음악의 조화’ 혹은 ‘국악과 양악의 접목’이라고 부추겨 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프로그레시브 음악가들은 이러한 무늬만 접목이 아니라 서양전통음악과 록을 완벽하게 융합시켜 새로운 화합물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두 번째 이들은 가사중심이 아니라 연주중심의 음악을 했고 음악의 실험성을 대단히 중시했습니다. 악기사용도 대담해서 고전악기는 물론 새로 개발된 악기도 운영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신디사이즈를 통해 얻은 전자음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표현력을 극대화하기도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르네상스(Renaissance)나 스카이(Sky)같은 연주그룹들의 음악이 떠오르는데 교우님들이 이들의 음악을 들어보시면 제 말이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 무엇보다도 프로그레시브 록의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는 이들의 예술성과 메시지입니다. 대부분 프로그레시브 음악가들은 앨범 하나를 한 가지 테마로 제작하였으며 앨범 디자인까지 하나의 주제가 담긴 예술로 승화시켰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곡들은 싱글 곡 하나로 우려먹던 대중가수들의 팝송들과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또한 이들은 인생, 철학, 종교, 과학, 사회상황, 교육, 정신분석 등 다양하고 심도 있는 주제들을 그들의 음악을 통해 표현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프로그레시브 록은 듣기 쉽지 않은 음악이고 그래서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기 어려운 음악이었습니다. 또한 퇴폐적이거나 이단적이라는 오해를 받을만한 소지가 많았던 음악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프로그레시브에 대하여 장황하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오늘 소개하는 캔서스 밴드가 몇 안 되는 미국출신 프로그레시브 밴드이기 때문입니다. 캔서스 밴드 이야기를 하기 전에 교우님들께서 미리 염두에 두셔야 할 또 다른 사항은 전적으로 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서양대중음악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교우님들이 꼭 유념하셔야 할 것은 한 두곡으로 한 예술가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태도는 무지의 소치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폭력적인 말씀을 드리는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일전에 말씀을 나누었던 곡 “Stairway to Heaven”은 레드 제플린의 대표곡이기도 하지만 가장 그들답지 않은 곡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레드 제플린 곡들은 무겁고 강하고 부담스러운데 반해 이 곡은 강한 서정성을 풍기면서 달콤하고 조용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발라드 취향이 대단히 강한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이 곡을 상당히 좋아합니다. 문제는 이런 경향 때문에 대중들에게 레드 제플린에 대한 이미지가 “Stairway to Heaven”만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저 곡 한곡만 아시는 어떤 분들은 레드 제플린이 발라드 가수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런 예는 참 많습니다.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Before the Dawn”이란 조용한 곡을 부른 쥬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는 소위 헤비메탈 1세대로 차가운 금속성의 음을 귀가 째지도록 사용하는 그런 팀이고 “She’s Gone”을 부른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는 어둡고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구사하는 하드록 그룹입니다. “Always Somewhere”나 “Still Loving You”를 히트���킨 스콜피온스(Scorpions)는 시끄럽고 꽉 찬 사운드를 주로 쓰던 메탈그룹이고 “Elegy”란 서정적인 곡을 연주한 제스로 툴(Jethro Tull)은 매우 어려운 음악을 구사하는 프로그레시브 그룹입니다. 이들 곡은 바흐(J. S. Bach)의 오르간 곡들보다 더 지루합니다. 그러니까 가장 대중적인 곡 딱 하나 듣고 이 팀들을 싱글이나 발표하는 팝송가수정도나 발라드 그룹으로 오해하시면 큰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룰 캔서스 밴드도 서정적인 팀이라고 오해하실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장황한 말씀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부른 가장 서정적인 곡 “Dust in the Wind”가 우리나라에서 대 히트를 했기 때문에 사실 많은 분들이 이 곡 하나로 캔서스 밴드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곡 때문에 제 주변에 어떤 분은 캔서스 밴드가 서정적인 가수인줄 착각하고 그들의 앨범을 샀다가 놀라서 두 번 다시 듣지 않고 처박아 두었다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캔서스 밴드는 스틱스(Styx)와 함께 미국의 대표적인 프로그레시브 밴드로 시작했습니다. 팀의 이름에서 풍기듯이 이들의 본거지는 미중부의 캔서스(Kansas)였습니다. 1974년 데뷔하여 1983년 1차 해산할 때까지, 그리고 1986년 재결성하여 지금까지 이들 멤버는 여러 번 교체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구구절절한 역사를 일일이 나열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들 멤버 중에 창립멤버인 필 얼트(Phil Ehart, 드럼), 전성기부터 지금까지 활동하는 스티브 월쉬(Steve Walsh, 보컬/키보드), 리차드 윌리암스(Richard Williams, 기타) 등과 바이올리니스트 로비 스타인하트(Robby Steinhardt)의 이름은 기억할 만합니다. 데뷔 초창기 이들은 당시 영국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프로그레시브록 그룹들의 영향을 깊게 받았습니다. 이 때문에 이들의 음악에서 전자바이올린의 비중은 상당히 큽니다. 저는 초창기 앨범을 달랑 한 장 가지고 있는데 이 앨범을 들어보면 이들의 음악이 그리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음악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느끼게 됩니다. 이런 성향 때문에 이들은 데뷔 초창기에 대중들의 전폭적인 관심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76년 발표한 앨범에 들어있던 “Carry on my Wayward Son”이 히트하면서 3백만 장의 앨범을 팔아치우는 기염을 토하게 됩니다. 프로그레시브 록이나 하드록을 라디오에서 듣기도 어렵고 음반으로 구하기도 어렵던 고교시절, 저는 주한미군방송(AFKN)에서 존 아담스(John Adams)라는 DJ가 진행하는 “Stereo Rock”이란 프로그램을 자주 들었습니다. 당시 그 방송에서 저 곡을 처음 들었을 때 마치 텀블링을 하는 체조선수처럼 통통 튀기는 기타소리의 감동을 저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들을 대중들에게 알린 곡은 1977년 싱글로 발표된 곡 “Dust in the Wind”입니다. 이 곡은 1978년 4월 빌보드에서 6위까지 올라갔는데 캔서스 곡들 중에서 빌보드 10위 안에 진입한 유일한 곡이 되었습니다. 들어보시면 느끼시겠지만 이 곡은 철학적인 가사, 깊은 서정성, 애절한 바이올린, 그리고 어쿠스틱 기타의 연주가 일품입니다. 그러나 이 곡은 이들 활동의 분기점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들은 이 곡으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음악적으로는 급격하게 상업적으로 경도되었습니다. 이 곡 이후 발표된 앨범들은 초창기에 이들이 추구했던 프로그레시브적인 요소들은 거의 사라지고 가벼운 아메리칸 록으로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만 캔서스 밴드는 “중도 속환이도 아니다”라는 속담을 떠오르게 합니다. 시작부터 이들이 정통 프로그레시브를 하기엔 역부족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무래도 그 당시 미국은 심도 깊은 프로그레시브 록을 생산하기엔 문화적 에너지의 축적이 부족했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런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 우물을 파지 아니하고 상업적으로 우회해 버렸습니다. 1980년 발매와 동시에 레코드점에서 뽑아들고 와서 턴테이블에 걸었던 그들의 앨범 《Audio Vision》은 그 이후 단 한 번도 또 다시 저의 턴테이블에 올라가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 이후 저는 캔서스 밴드의 음악을 더 이상 사지 않습니다. 이들은 상업적인 성공을 통하여 대중과 돈을 잠시 얻었지만 진정한 그들의 광팬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이들의 음악에 관심을 갖고 있던 마니아들에겐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입니다. 1986년 재결성한 캔서스 밴드는 지금은 새 음악을 발표하기 보다는 연주여행을 다니면 과거의 팬들과 만난다고 합니다. 3. 환상을 잡는 인생 회사의 입장에서 보면 같은 급여를 제공하더라도 신바람이 나서 열심히 일하는 직원을 선호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와 정 반대의 일이 왕왕 벌어집니다. 비록 적은 급여지만 최선을 다해서 헌신적으로 일하려고 하는 많은 직원들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좌절감과 냉담함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는 최소한의 의무만 하고 조직을 외면하게 됩니다. 신바람이 나서 일하기는커녕 아침에 일어나면 회사에 가기 싫고 회사에 가면 빨리 집에 오고 싶게 만드는 그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원인 중에 가장 핵심적인 것은 건전하지 못한 경쟁과 건강하지 못한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사람들은 내면의 목소리를 못들은 체 합니다. 아니 더 심한 경우는 그 목소리를 자기 마음대로 해석합니다. 최고의 기관장 자리를 놓고 볼썽사나운 이전투구를 하면서 상상할 수 없는 돈을 뿌리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희생봉사하기 위해서”라고 서슴지 않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신자라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타인을 위해합니다. 그것이 이 각박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치부하고 이렇게 살아야 남보다 조금 더 멋진 삶을 살 수 있다고 웅변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그 자리에 오르고 난 후에도 원칙과 신념을 지키지 않습니다. 아니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 자리를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과 합종연횡(合從蓮橫)을 하다보면 원칙은 멀리 달아나 버리고 맙니다. 이러한 상식이 ���켜지지 않는 경쟁, 그리고 존경할 수 없는 리더십 하에서 정직하고 공정하게 살려고 하는 보석 같은 직원들은 결국 자신이 속한 조직에 대하여 좌절과 냉담함만 갖게 됩니다. Once I rose above the noise and confusion 나는 한때 아귀다툼 같은 세상에 굴하지 않고 Just to get a glimpse beyond this illusion /단지 환상을 잡기 위하여 I was soaring ever higher, /그 누구보다 높이 올라갔지만 but I flew too high /너무 높이만 올라가고야 말았지 제가 존경하던 목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분이 소위 교단정치에 발을 들여놓으셨습니다. 저는 그분의 그런 행보를 참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분 역시 “교단을 위해 희생한다.”는 말로 출마의 변을 대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오르신 이후, 그리고 은퇴하신 지금까지 그분은 그 자리에 오른 것으로 인하여 수많은 구설수에 휘말려 있습니다. 결국 그분은 존경받는 목회자에서 사람들의 심심풀이 가십의 대상으로 전락하고야 말았습니다. 오늘 노래한 시인의 말처럼 그렇게 사는 것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이라고 믿고 앞만 보고 올라갔는데 그곳은 환상이었고 너무 높이 올라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이들의 노래처럼 우리는 바람 속의 먼지와 같은 존재인데 왜 저렇게 환상을 쫓아 삶을 낭비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요. Don't hang on nothing lasts forever but the earth and sky 그렇게 집착하진 말아요. 대지와 하늘 외엔 영원한건 아무것도 없어요. It slips away and all your money won't another minute buy 모든 것은 다 사라져 버리죠.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준다 해도 단 1분조차 시간은 돈으로 살 수 없답니다. Dust in the wind, all we are is dust in the wind 바람에 날리는 먼지, 우리 모두는 한낱 바람에 날리는 먼지일 뿐이에요. (Dust in the Wind 중에서) 교우님들이나 저나 위에서 말씀드린 것 같은 세상 속에서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을 초월하고 살 수 있는 자유로움을 갖고 있지 않는 한 우리는 어차피 이런 저런 사정 상 이런 삶의 투쟁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나 우리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은 브레이크 장치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에서는 놀랍게도 그 어떤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목소리는 앞만 보고, 위만 보고, 세속의 영광만 보고 달려가는 우리들을 문득 멈추게 하는 브레이크 장치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노래를 들려준 시인은 바로 그 브레이크 장치를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I hear the voices when I'm dreamin' /나는 꿈속에서 늘 그 목소리를 들었어. I can hear them say /내가 들은 소리는 바로 … 4. 눈뜨고도 못 보는 인생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학창시절의 경험이 있습니다. 친구들과 길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빨고 있는데 작은 녀석들이 다가왔습니다. 세발자전��를 타고 놀던 이 녀석들이 우리에게 다가와 자꾸 질문을 합니다. “형, 그 아이스크림 얼마야?” 이 녀석들은 아이스크림의 가격부터 시작해서 맛있냐는 둥, 그런 것 먹으면 감기에 걸린다는 둥, 자기 아빠가 전에 많이 사줬다는 둥 말하면서 끊임없이 질문을 해대었습니다. 친구들과 저는 이 녀석들을 골리느라 아이스크림을 천천히 먹으면서 “줄까?” “한 입 먹을래?” 하며 약을 올리던 기억이 납니다. 별 것 아닌 이 기억이 오랫동안 제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이유는 그 당시 제가 느꼈던 점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약 올리면서도 제 마음 속엔 ‘사람이 욕심에 가리면 저렇게 자기 모습이 보이지 않겠구나!’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 녀석들이 하는 모든 질문은 사실 무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질문의 내면엔 단 한 가지 욕망, ‘저 형들이 먹는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는 욕망뿐이었고 강한 욕망이 자신들의 유치한 질문과 행동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일전에 훌륭한 일을 많이 하는 자리에 있는 분과 짤막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규정, 절차, 철학을 들먹여가며 자신의 주장을 제게 설명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 설명을 듣고 있노라니 그분이 하고 싶은 말은 매우 간단하였습니다. 휘황찬란한 언어를 동원해서 하는 말의 핵심은 ‘이 이권은 내가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환갑이 넘은 점잖은 분이 그토록 유치하게 말을 돌려댔던 것입니다. 그 작은 욕심과 집착이 추한 자기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눈을 뜨고도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신 뿐 아니라 타인을,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아니 볼 것을 보지 못하고 없는 것을 볼 때도 많이 있습니다. Though my eyes could see I still was a blind man 그때 나는 비록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장님이었고 Though my mind could think I still was a mad man 마음이 있어도 생각할 줄 모르는 미친 사람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I hear the voices when I’m dreamin 나는 꿈속에서 늘 그 목소리를 들었어. 목회자가 교회성장에 너무 집착하게 되면 성도들의 머리만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많은 성도들이 갖고 있는 아픔, 상처, 꿈, 기대, 원망 등은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파하는 성도들에게 그분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치유하기보다는 봉사, 헌신, 복종만을 강조하게 됩니다. 규모는 크지만 건강하지 못해서 나타나는 증상들을 갖고 있는 교회들이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진정 봐야할 것, 눈에 보이는 것을 보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만을 바라볼 때 생기는 병리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어디 목회자에게만 있는 일이겠습니까? 오래 전 일입니다만 여행을 함께 다니던 사람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모임엔 눈에 확 들어오는 40대 남자가 있었습니다. 키 크고 미남에 멋진 몸매를 갖고 있던 그 사람은 지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성우 같은 저음의 목소리까지도 카리스마가 넘쳐흘렀습니다. 그가 그 모임에 리더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렇게 1년 이상을 교제하던 어느 날 그는 자기사업에 대하여 입을 열었습니다. 그 사람이 사업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직후부터 이상하게도 제겐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그 멋진 분에 대한 의심이 싹트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그 모임을 통해 교제하던 사람들 중 저 하나만 빼고 모든 분들이 그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멋진 사람이 어떻게 그런 사기를 칠 수 있을까 아직도 저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그 모임에서 제가 가장 나이가 어렸고 갖고 있는 돈도 없었기에 저는 사기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사기를 면한 더 큰 이유는 그 당시에 제가 젊었기 때문에 아직 돈에 대한 욕심과 집착이 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자기사업을 설명할 때 다른 분들은 모두 그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저 혼자만 그의 말이 너무 황당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심 그렇게 잘되는 것이라면 자기 혼자 다 갖지 왜 그 이익을 나누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그 모임에 참석했던 훌륭한 분들은 일확천금의 유혹에 가려 가장 기본적인 의심조차도 하지 못하고 사기꾼을 박애주의자로 보았던 것입니다. 언젠가 어떤 분께 안부를 여쭈었더니 그분 말씀이 “매일 헉헉대고 삽니다.”라고 하셨는데 현대인들의 삶을 그대로 묘사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매일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서, 승진을 위해서, 명예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자식교육을 위해서 분주하게 뛰어 다니며 그야말로 헉헉대고 삽니다. 그리고 그런 일에 큰 성취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뛰어 다니느라 우리는 아픈 허리를 끌고 폐지를 줍는 노인들을 보지 못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느라 장애 때문에 소외된 이웃들을 간과합니다. 세상의 명예를 위해서 동분서주 하느라 이역만리에 와서 극심한 차별과 불평등에 아파하는 피부색 다른 형제자매들의 한숨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내 자식 사교육에 목을 ��느라 성폭력에 희생되는 아이들의 피눈물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음은 있으되 아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느낄 줄 모르는 ‘미친 사람’처럼 되고 맙니다. 그러나 헉헉대며 사는 세상에 살지만 ‘미친 사람’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기독자들입니다. 광기의 급류에 휘말리는 세상에서 기독자들을 잡아채는 그 어떤 구원의 로프가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의 로프는 바로 우리 내면의 목소리입니다. 그 목소리는 브레이크처럼 우리가 광기의 급물살에 속수무책으로 쓸려가는 것을 잡아줍니다. 계속해서 시인은 자신을 부르는 그 목소리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I hear the voices when I’m dreamin 나는 꿈속에서 늘 그 목소리를 들었어. I can hear them say /내가 들은 소리는 바로 … 5. 유식한 무지의 인생 회의 때나 학회 중에 종종 마음을 언짢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발표자에게 질문을 하는 분들 중엔 유려한 말로 치장을 하지만 말씀하시는 것을 자세히 들어보면 질문이 아니라 한수 가르쳐준다는 식인 경우가 있습니다. 결국 질문자의 의도는 모르는 문제에 대하여 발표자의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만큼 더 많이 알고 있으니 다들 나 좀 봐라”는 식입니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질문자의 의도를 명확히 파악하고 그분의 인격을 의심합니다. 오직 본인만 착각을 합니다. 본인은 자신의 지식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뽐냈을 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자신의 가장 추한 부분을 드러낸 우매한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Masquerading as a man with a reason 머리 좋은 사람처럼 보이려고 행동했지만 My charade is the event of the season /그 모든 것은 가식이었어. And if I claim to be a wise man, /똑똑하다고 우겼던 나의 행동은 it surely means that I don't know 결국 참 진리를 모르는 바보라는 말이었을 뿐 청년 시절에 저는 소위 순수(?)하지 못하다는 학문에 대하여 경시하는 태도를 잠시 갖은 적이 있었습니다. 가령, 순수철학이나 이론과학에 대해서는 왠지 모를 경외심을 갖고 있었던 반면 사회과학이나 응용과학에 대해서는 조금 얄팍한 학문으로 보는 그런 태도 말입니다. 그러니 설교집, 처세술, 자기개발서, 유머, 리더십 같은 책은 마치 무슨 벌레 보듯이 보던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공부하는 신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론신학이나 철학적 신학은 대단한 것처럼 여기면서 실천적 신학은 조금 얕보는 그런 태도 말입니다. 시간이 지나 이제 조금 나이가 들었다 싶으니 제 태도는 180도 바뀌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제가 관심하는 책들은 실천신학의 책들 중에서도 아주 실용적인 저작들, 설교집들, 그리고 자기개발서나 리더십에 대한 책들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세계의 깊이를 탐구하려는 의욕이 앞서 이론서들에 관심을 집중하다 보니 매일 매일 살아가는 일상에서 주어지는 삶의 무게와 깊이를 간과했던 것이었습니다. 똑똑한 척 했지만 결국 거리를 지나가는 장삼이사들이 사는 그런 삶조차 이해하지 못하던 헛똑똑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존재, 실체, 본질, 실존, 구원, 체험, 이해, 현상, 교우 여러분들은 이런 용어들을 들으면 머리에 쥐가 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들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방편은 어차피 언어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언어를 통해서만 세계와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심지어 우리들의 느낌과 체험조차도 언어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언어가 없다면 사실 인간은 사랑이란 감정을 공통적으로 느끼기 어렵습니다. 결국 이 세계는 잘 조직된 인간들의 관념 속에서만 이해되고 우리들은 그 관념들을 통해 소통합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언어체계가 없다면 인간들의 삶은 동물들의 삶과 진배없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언어의 체계, 즉 의미와 해석의 세계 이전에 순수한 물리학적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언어체계를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상실하고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들이 순간적으로 언어체계를 벗어난 세계를 경험할 때 우리들은 그것에 무지하기 때문에 그 경험에 대하여 많은 오해와 편견을 가지게 되곤 합니다. 때문에 우리에겐 신비는 위험한 것이고 하나님의 계시는 버거운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고전, 1:19)는 사도 바울의 인용처럼 우리들은 의미화된 세계에 익숙해져서 삼라만상(森羅萬象)을 관념의 주관성을 가지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사도는 이러한 우리들의 지혜와 총명을 다 폐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경고의 의미로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제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어떤 방식으로 우리들과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자신 있게 설교했던 그 모든 지혜들을 하나님은 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부정(negative theology)신학자들의 그 침묵의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부정신학자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침묵합니다. 원조격인 위 디오니시우스(psuedo-Dionysius)는 『하나님의 이름』 『천상의 위계』 『교회의 위계』등을 통해 수많은 진리(?)를 설파해놓고 최종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은 괄호치기(epoche)하고 침묵으로 내려갑니다. 아마도 그는 유식하고 지혜 있는 자들의 모든 언술들이 결국 그 크신 하나님에 대한 무지의 소치라고 결론 내린 듯합니다. 이렇듯 우리들의 지식과 웅변은 결국 무지의 소치가 아닐 수 없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지식의 자랑은 참으로 우매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내면의 목소리는 시인의 말처럼 “똑똑하다고 여겼던 우리 행동이 진리를 모르는 우리들의 무지를 깨닫게”합니다. 6. 외로움, 담대함, 그리고 내면의 목소리 저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기독자들이 사랑하는 성인 최춘선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리는 고독해도 날로 더욱 담대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인용한 저 단순한 말씀, 많은 말을 하지 않으시면서 툭 던진 저 말���이 우리 영혼을 쩌렁쩌렁하게 울릴 만큼 파워가 넘쳐흐릅니다. 우리는 많은 말은 하지만 말씀을 하지 못하고 삽니다. 말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작동과 화용(pragmatic)의 문제라는 것이 저 분의 말씀을 듣는 제겐 명백합니다. 제 경우 어릴 때는 예수의 사랑에 울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다보니 예수의 사랑도 사랑이지만 그분의 외로움에 함께 웁니다. 감람산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읽으면 그분의 외로움이 얼마나 컸던지 짐작이 갑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의 체험이 몸에 물밀 듯이 밀려와서 함께 울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의 진상,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의 실천, 이러한 삶이 얼마나 외로운지 우리들은 잘 알기 때문입니다. 최춘선 성인은 그 조롱, 외로움, 고독함을 담대하게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진리였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진리를 따라 살려고 하는 우리들을 세상 사람들은 바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요한복음의 말씀처럼 세상이 우리들을 미워할지도 모르겠습니다.(요 18:19) 이렇게 우리는 약육강식, 이전투구와 같은 세상적인 삶의 법칙과 동떨어진 다른 원칙의 정 반대되는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감상한 음악의 시인은 우리 내면의 목소리가 바로 그런 삶을 요구하고 있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Carry on my wayward son, 포기하지 말고 그렇게 계속 하려무나 고집 센 내 아들아 There'll be peace when you are done 모든 것을 다 이루고 나면 참된 안식이 올 테니 Lay your weary head to rest /그 ��에 지친 네 머리를 평안히 쉬고 Don't you cry no more /더 이상 울지 말거라 Carry on, you will always remember 멈추어선 안 돼, 그리고 항상 명심하거라. Carry on, nothing equals the splendor 계속해, 찬란한 영광과 바꿀 것은 없단다. Now your life's no longer empty /이제 너의 인생은 헛된 삶이 아니란다. Surely heaven waits for you 그렇게 계속하면 반드시 천국이 널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예수살기”는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티브이 설교나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씀처럼 예수 믿고 복 받아서 인생을 화려하게 살 수 있는 것이라면 저는 정말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내면의 목소리는 분명히 그것과 다른 삶을 요구하고 있고 그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기독교라는 진리체계의 정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힘든 길을 갈 때만이 우리 삶이 헛되지 않게 되고, 그 길만이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다가 세상에서 받은 고난, 흘린 눈물, 지친 심령은 천국에서 참다운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고집스러운 자녀를 원하고 계십니다. 잘 나가는 선, 후배를 보며 유혹받지 않고 배운 그대로의 길을 고집스럽게 걷고 있는 자녀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유혹과 의심에 빠져 기독자의 길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고, 지속적으로 “Carry on”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세상은 참으로 우리가 배운 기독자의 삶과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나 저나 그런 세상의 광기에 흘러가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내면을 통해 부르시는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서 우리가 배운 대로, 말씀이 가르치시는 대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응답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산 후에라야 우리는 천국에서 함께 안식에 들어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세상과의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주님의 면류관을 쓰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시 만나기를 기원합니다. 끝으로 저희 채플 시간에 파송 시 부르는 찬양 한 곡을 소개해드리고 제 설교를 끝내려 합니다. 교우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바다와 하늘의 주, 어두운 죄악 속에서 부르짖는 백성들 구하리라 밤의 별을 만든 주, 어두움을 밝히리, 나의 빛을 가지고 누가 갈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부르심을 들었나이다. 인도하사 보내소서. 주의 백성 섬기오리다. (아멘) 이충범 l 교수는 감리교회를 섬기는 목사로 연세대학교(B.A)와 감리교 신학대학교(B. Th)를 거처 미국 드류대학 신학부에서 신학석사(M. Div)를, 대학원에서 중세신비주의 연구로 철학박사(Ph.D)를 받았다. 현재 협성대학교 역사신학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세미시문화사, 문화신학, 일상신비주의에 관심을 갖고 생각에 궁눌리고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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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바람이 불어오니 순풍에 돛달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 #선거끝 #windofchange #스콜피온스 #출첵 #비오는목요일 #굿모닝입니다 #오늘도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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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vy metal thunder=강철 폭풍
김홍석
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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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vy metal thunder=강철 폭풍
60년대 중후반 비틀즈 얄쌍한 음악이 세계 휩쓸 때 듣도 보지도 몬한 강렬한 음악 밴드이름?= 가물가물 가사에 헤비 메탈 썬더=강철 서신=김영환 그때부터 헤비메탈이란 장르 탄생했음 그 뒤 영국 딮 퍼플 =홍등가 레드 제플린=추락한 독일 비행선 이름 미국 모터헤드=대가리박어 독일 스콜피온스=전갈들 등등 헤비 메탈 중흥기 시작 됬음 헤비 메탈 노세 이유? 가뜩이나 날카로운데 cd 한술 더 떠 디지털화 되면서 퇴락하기 시작했음 LP최적화 음악=헤비 메탈 현존하는 거의 모든 세계적 롹 뮤지션들은 고려인 러시아 가수 삑또르최=최승리 요즘 숏트랙 안현수가 삑토르안으로 불린다 함 . 영향 받았다 해도 과언 절대 아님
← 이전 다음 → 강철 무지개 카테고리 : 분류되지 않음 | 작성자 : 김홍석시인 2월 20, 2016 by 김홍석시인
강 철 무지개
박노해 시에서 제목 빌림
2월의 끝 붙잡고 늘어진들
오던 봄이 도망가랴?
계절도 돌고 괘종시계도
한밤에 소음공해 내뿜으며
미쳐버렸단 듯이 돌고
올 겨울은
올겨울에 다시 환생할 터이고
또 누군가는 새로온
겨울 몬 만나고
이승과 이별하겠지
그 때까지 살 수 가
있을까?
삶을 달관한자 어둠속에서도
무지개를 보리니
이겨울에 강철로 만든
무지개의 약속 믿으리니
헛된 망상일지라도
나는 하나님 예수행님 여러 독자분들
친구들
글구 하나 뿐인 마누라님과
내조상님들 때부터 나라 대한조선을
사랑하리
하나 뿐인 인간의 별
지구 역시ᆢᆢᆢ
YouTube에서 1983 Ronnie James Dio “Rainbow In The Dark” (Roc… 보기
1983 Ronnie James Dio “Rainbow In The Dark” (Roc…: http://youtu.be/LmSt1oEIshE 『관계』 >
책속의한줄 http://me2.do/58gBX6RN 카테고리 : 분류되지 않음 글 편집 About 김홍석시인 아무 싸이트에 김홍석 시인 때려 보시삼 전자책 시집 저 멀리 섬 . 유혹....두려움 . 돌고 돌아 돌아버리니 개네 종이책 관계 .아름다운 우울 . 외 동인지 다수 수상경력 빵빵 View all posts by 김홍석시인 → 14 thoughts on “강철 무지개”
zmon21 02/22/2016 2:05 pm 삭제
강철 서신의 원조 김영환은 김일성을 만나본 후 허구를 깨닫고 전향했다고.. 강철로 된 무지개인보다는 누구 시에 나오지 않노? 이 댓글에 응답하기↓ 김홍석시인 02/22/2016 9:10 pm 수정 삭제
본문은 읽어 보시고 댓글 쓰는 게 예의 입니다 이 댓글에 응답하기↓ 김홍석시인 02/22/2016 4:59 pm 수정 삭제
김자 영자 환자 지닌 분이 울 아버지요 이 댓글에 응답하기↓ 김홍석시인 02/22/2016 5:01 pm 수정 삭제
난 대중 무현 두 대통령 특수 경호 하러 북에 갔다 온적 잇구 그래서 북의 실상 잘 아는 거요 이 댓글에 응답하기↓ 김홍석시인 02/22/2016 5:08 pm 수정 삭제
서신 전하러 단독으로 평양까지 걸어 갔던적도 있고 정일이 행님이 가튼 김씨인데 호형 호재 하자구 해서 말 튼적도 잇고 정동영든 누구든지 야당 됫슴 벌써 통일 됬을 텐대 명박이 돈에 놀아난 매국 부역 언론의 여론 조작질 때매 통일의 날 요원해진거요 이 댓글에 응답하기↓ 김홍석시인 02/22/2016 5:16 pm 수정 삭제
올 때는 정일이 행님과 함께 차태워줘 편히 DMZ까지 왔고 김홍석시인 02/22/2016 6:04 pm 수정 삭제
노무현 대통령때 무조건 통일 하자구 합의 봤었는데 내가 반대했소 국민들 수준이 안 따를거라고 김홍석시인 02/22/2016 6:09 pm 수정 삭제
정일 행님 열라 말 많음 짐 나처럼 그땐 난 과묵한 편이라 경청 의 달인이라 불렸지만… 자신의 얘기 잘 들어 주는 사람 조치 아니한가? zmon21 02/22/2016 9:50 pm 삭제
이제 세상만사 다 접고 초야에 묻혔음메? 이 댓글에 응답하기↓ 김홍석시인 02/22/2016 9:59 pm 수정 삭제
사는 게 귀찬을 따름이요 이 댓글에 응답하기↓ 김홍석시인 02/22/2016 10:02 pm 수정 삭제
게을리즘 테생이 고딩 때 돌체 다방 미스김 누나가 매일 아침 날계란 동동 띄운 설탕 3 프림 3 커피 먹고 싶을 뿐이오 zmon21 02/22/2016 10:58 pm 삭제
전주 삼양 다방에 가서 쌍화차에 날계란 노른자 동동 띄운거 먹으면 인생이란 살만한 거여 할겨.. 그 옆 새벽강 가서 시인들하고 막걸리 한잔 걸치고. 이 댓글에 응답하기↓ 김홍석시인 02/23/2016 7:51 am 수정 삭제
전주 교도소 있는 전라도 그동네 잡고 계신 분이 중학교 때 지각 했는데 선생이 학교오지마 그런 바람에 안다니면 되잖아 그길로 때려치운 철자법은 나보다 더 잘아는 흥남이라고 제 절친 후배 형인데… 김홍석시인 02/23/2016 7:54 am 수정 삭제
남한은 안 가 본대 없는대 목포 유달산 빼고 전라도는 안 가봤네 그러고보니…
1983 Ronnie James Dio "Rainbow In The Dark" (Rock Palace)
Ronnie James Dio performing "Rainbow In The Dark" on a US late night television show, "The Rock Palace." I believe this was recorded very shortly after the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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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kxyUf8ju4po에서) 효리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더군요 그러나 버트 효리양은 여전히 제가슴 별과같이 스콜피온스 이 곡을 효리양께 듸움니다 짐 자시고계시겟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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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fY1Cg88UAi8에서)
리듬기타의 독보적 존재 스콜피온스 루돌프 쉥커와 형제지간
마이클 쉥커 ufo시절
어릴적 몹시 내가 아팠을 때 나온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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