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팔봉산이 있는 홍천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미대를 나오고 홍천과 서울에 오가며 활동한다.
동시대 포스트 휴머니즘의 서구 인간중심에 대한 비판적 대안 문맥으로서 ‘홍천적’ 자연과 숭고를 더해, 이번 ‘먹이-이기의 자연’ 전의 기획과 그 참조로서 발 플럼우드(Val Plumwood) ‘먹이-이기의 자연’의 해석을 따라가 보지만, 인간 근원의 지배관점으로부터 충돌과 난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다시, 팔봉산에 올랐다.
지금의 인간이 자연의 눈을 직면한다는 전환의 의미를 알 수 있을까? 아니 가능한 일일까?
어쩌면 독일 낭만주의의 맞짱 뜬 인간은 잊고 얼마의 글과 걸음으로 사유하는 판타지 아닌가.
떠나지 않는 이분법적 근원, 인간이 자연을, 자연 외/인간 간 먹음과 먹힘을 생각하다 폭풍에도 날개를 펼쳐 날아올라 꿀을 빠는 나비처럼 움직여보며 2봉과 3봉 사이 사잇길에 있는지 아는 사람만 아는, 닉네임 ‘용의 눈’과 마주쳤다. 그리고 생각은 일단 멈췄다.
전시 공간은 ‘용의 눈’을 마주하는 홍천 사람의 경험에서 묘하고, 무섭고, 떠나고 싶고, 다시 떠오르는 바위틈 속, 있고/없는 난감한 그 ‘눈’이 뿜어내는 비가시적 광선과 마주하는 시공간을 재현한다.
거울은 세계를 반영하고 보려고 한 것을 통해 우리(자연과 상응하는) 위치를 추적한다. 그러나 공간에 설치된 삼차각 거울은 이십여 개의 다른 예각의 삼각형이 북두칠성 별자리를 미메시스 하여 구성된 저부조 프레임으로 사운드와 영상 빛의 변화에 따라 마치 곤충의 눈처럼 반영을 분할하고 동시에 분할된 대상을 통합시키며 우리(개체적 주체) 위치를 교란한다. 없고/있는 ‘눈’과 마주침의 장치(dispositif)이다.
– 작업 노트
기획자 작품해석
용해숙 작가의 두 개의 초점을 가진 거울설치는 질서있게 조각난 거울파���들이 포획하는 이미지의 단편들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중국의 백과사전에 나오는 황제의 거울처럼 드러낸다. 여기에 독일에서 작가의 지인과 아동의 소리 그리고 베를린의 도시 소음들을 위시한 사운드 콜렉티브는 그 거울에 빛의 소리로서 폭사해 들어간다. 이는 빛 자체가 소리와 같은 전자기파의 지위를 갖는 현대물리학의 논리에 힘입은 것이기도 하다.
김도희 작가의 ‘배꼽산’은 “태어나는 일생일대의 사건”의 흔적기관인 배꼽이라는 ‘마이너스’(-)의 깊이를 ‘플러스’(+)의 높이로 우뚝 세워서 저 명계[冥界]로부터의 태반이 지금 사는 명계(明界)와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를 드러낸다. 배꼽산의 감각에서 저승과 이승은 한 세트이며, 이번에는 그 하부 명계의 깊이와 상부 명계의 높이를 한 세트로 한 금속악기의 음색으로 출현시킨다. 관객 누구나 불교의 악기 바라인지 클래식 악기 심벌즈인지 모를 이 ‘참여 음악’을 깡깡 연주할 수 있다.
머리에 옥수수 싹이 난 사람들 Men with the Corn Sprout on Their Head (2022)
벨벳 위에 면실 자수, 480×110cm, 230×30cm, 230×230cm cotton embroidery on velvet, 480×110cm, 230×30cm, 230×30cm.
마야문명에서 옥수수는 신이 사람을 창조했던 원료이며, 자연이 내려 준 신성한 선물이었다. 옥수수는 인간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고, 마야인들은 옥수수를 위해 노래하고 춤추며 제물을 바치는 제의를 행하였다. 바위에 새겨진 그 시대의 형상을 보면, 옥수수 줄기를 손으로 잡고 있거나 머리 사이로 옥수수 싹이 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옥수수에 얽힌 신화를 읽고 있자니, 임신 초기에 입덧으로 고생하던 때가 떠오른다. 무조건 토해내고 먹지 않아도 구역질이 심하여 몸무게는 급격히 감소했고 당연히 영양상태는 최악이었다. 그 와중에 오로지 즐거운 마음으로 먹을 수 있었던 단 한가지가 찐 옥수수였다. 워낙 옥수수를 좋아하고 즐겨먹기도 했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뱃속 아기를 위해 먹는 건데, 그 많고 많은 음식 중에 단지 옥수수뿐이라니. 섭섭하면서도 값싸고 풍족한 옥수수라 다행이지 싶기도 했다. 말 그대로 신의 선물 같은 옥수수였다. 그러니 뱃속 아기는 옥수수가 키운 셈이다. 옥수수가 아니었으면 엄마도 뱃속 아기도 살아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몸을 갉아 아기를 잉태하는 일은 옥수수 신화와 그 이야기가 같다. 새 생명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어머니가 가루가 되고 옥수수가 가루가 되고 다시 엄마가 가루가 되고 옥수수가 가루가 되는 과정에서 땅은 비옥해지고 생명은 자라난다.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다른 생명의 먹이가 되는 것은 자연의 생리이다. 자신을 희생하여 자신의 생명을 어머니라는 원천으로 되돌려 보내어 소생(embodiment)시키는 것은 생명과 재생의 완전한 순환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벨벳 위에 자수 놓아진 글들은 고대 마야 Tzotzil Mayan 여성들에 의해 입으로 건너 내려온 시와 노래의 짧은 부분들을 가져온 것이다.
상징언어가 구체적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비로소 몸을 통해 체현되는 과정을 천 위에 수를 놓는 수행적 방식으로 이행하고 있다. 전통적 방식의 수놓기는 간접적으로나마 역사의 앞뒤 면을, 위 아래 배치를 뒤바꿔 놓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고전적이라기보다 진취적으로 보여진다. 수놓인 천이 휘날리는 상상을 하면 마치 신화의 이미지들이 살아나 움직일 것 같다. 아니, 사실은 신화의 깃발보다는 아나키의 검은 깃발을 떠올리며 검은 천 위에 자수를 놓았다.
– 작업 노트
기획자 작품해석
길게 바닥���지 드리워진 블랙 벨벳의 천 위에 작가 자신이 바느질로 수놓은 것은 중미의 옥수수 여신의 서사와 이미지이다. 무늬 중에 애벌레 기호는 마치 하나의 문장을 암시하는 덩어리 문자처럼 다가오고, 여성의 신체와 연꽃 이미지는 전체적으로 벨벳의 오버그라운드와 언더그라운드를 마치 하나의 신전처럼 만드는 이유를 보여준다. 옥수수 여신의 힘이 무척 세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우리 사는 삶의 심층에 있다는 것을 이 신전-벨벳의 자수가 증언한다.
안녕을 비는 낮의 숲 Women praying in the woods of day (2022)
캔버스에 아크릴, 162.2×162.2cm acryl on canvas, 162.2×162.2cm.
사라지고 있는 우리1 We’re disappearing 1 (2022)
캔버스에 아크릴, 34.8×27.3cm acryl on canvas, 34.8×27.3cm.
사라지고 있는 우리2 We’re disappearing 2 (2022)
캔버스에 아크릴, 34.8×27.3cm acryl on canvas, 34.8×27.3cm.
사라지고 있는 우리3 We’re disappearing 3 (2022)
캔버스에 아크릴, 34.8×27.3cm acryl on canvas, 34.8×27.3cm.
죽음과 생이 뒤엉켜 하나의 거대한 생명이 된 숲에서 결국 온전하게 타인의 삶을 바라볼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내 손톱이 된 그녀 내 머리카락이 된 그녀 내 젖가슴이 된 그녀들의 이야기다. 세 개의 시간이 동시에 존재하는 미끄러지는 틈이다. 작업 노트
– 작업 노트
기획자 작품해석
마치 그리스 신화의 스퀼라와 카리브디스라는 필멸의 바위문처럼 그려진 배미정 작가의 바위문은 뜻밖에 그 물굽이 주변을 다스리는 환여신(幻女神)—정령 요정 텐샤들의 무리를 거느리는 존재—이 도드라져 있다. 바이킹 배의 고물에 새겨진 생명나무 이그드라실의 여신처럼, 혹은 방하착(放下着, 움켜쥔 것을 바닥에 내려놓다) 하게 돕는 죽음의 여신처럼. 이 두 개의 거대한 바위틈을 통과하라!라는 수행문의 회화이다.
필사(筆寫)는 여신의 무기이자 존재론이다. desperately 쓰고 scrivener로서 쓰고 die in death를 의식하면서 쓴다―라는 3중의 ‘필사’를 실행한다. 홍천은 며느리의 고장. 팔봉산 삼부인, 사라진 며느리, 집안 망하게 한 며느리―그녀들은 유실되고 훼손되고 결락되고 마침내 문자적 질서에 복속된다; I am dead. 그 사라짐으로 발광하고 휩쓸어버린다.
– 작업 노트
기획자 작품해석
현지예 작가는 팔봉산 2봉의 삼부인당—시어머니=며느리=딸이라는 삼위일체—의 모티브를 작가 특유의 ‘필사적 퍼포먼스’로 가져온다. 그리하여 1) 반드시 죽는다(必死) 2) 죽을 각오를 다해 온힘을 다한다(必死) 라는 두 가지 역능을 ‘필사’ (筆寫)라는 여신적 글쓰기—“목소리를 빼앗겼기에 죽으라고 쓴다”—의 정동으로 제시한다. 빛과 소리와 광물질적 기하학이 초미(初眉), 즉 여신의 첫 이마처럼 고개를 쳐드는 환영의 퍼포먼스를 통해 전시장에 늘 거주한다.
조각적인 것과 태초적인 것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하고 있는 김주리 작가는 미지의 숨쉬는 진흙더미를 생명체 단위로 출동시킨다. 이번에는 팔봉산의 식빵머리 여신 형태를 한 고원(高原)적인 지형으로부터 영감과 흙을 얻어 그 생명체 단위가 하나의 평평하고 높은 고원이 수많은 고원들을 낳는 듯한 차원으로 접근한다.
난, 나비-새 no.1 I & Orchid, Butterfly-Bird no.1 (2021)
백토, 자기, 20×16×17cm white clay, porcelain, 20×16×17cm.
번개 맞은 “주먹도끼 버섯머리 쇼쇼 샤만얼굴” Lightning-Hit Mushroom Head Shyo-Shyo Shyaman Face Stone Axe (2022)
캔버스에 아크릴, 40.9×31.8cm acryl on canvas, 40.9×31.8cm.
기획자 작품해석
권군 작가의 회화는 2차원 평면이 태양과 달, 번개, 기후와 태초의 기억 매체로서의 돌 그리고 하늘의 이법(理法)을 어떻게 윤슬화하는가를 보여준다. ‘윤슬화’ 한다는 것은 파도의 리듬과 전자 주파수를 한번에 연결짓는 파동화이다. 그런 독특한 방법론을 갖게 된 것은 작가��� 직접적인 벼락 체험이 계기였으며, 그 체험은 작가로부터 새로운 재생을 위한 임계적 죽음을 불러냈기 때문이다.
싱글 채널 비디오, 24:40, 수세미 실 버섯 29개 설치 single-channel video, 24:40, 29 dish scrubby yarn mushrooms installation.
강원도 인제군 마장터에 버섯을 따러 가는 여정을 Vlog 형식으로 담아봤다. 그동안 산행을 하며 10초간 숨을 참고 찍은 영상 클립을 슬라이드 쇼로 전시하는 형식의 작업을 해왔는데, 팬데믹을 맞아 유튜브나 클럽하우스 같은 소셜 미디어로 소통할 기회가 생기면서 작가가 직접 등장하고 내레이션도 하는 보다 자유로운 형식을 선호하게 됐다.
촬영은 어떠한 사전 기획이나 시나리오 없이 이틀(본래 하루 계획이었으나…)에 걸쳐 진행됐는데, ‘작가를 찾아온 지인과 함께 산행을 한다’는 계획만 가지고 진행된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우발적인 사건들이 흥미로왔다.
이 영상이 자연을 무대로 한 ‘나는 자연인이다’, ‘한사랑 산악회’ 등의 인기 콘텐츠나 여러 등산 유튜버들의 영상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우발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는지…
작업은 촬영에서 편집까지 스마트폰 한 대로 일사천리 진행됐다. 현장에선 산속을 뛰어다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숙소에선 누워서 편하게 편집을 하니 새삼 미디어의 변화상을 ���낀다.
– 작업 노트
기획자 작품해석
자연 속에 작가가 스스로를 끊임없이 되던져온 실천적 궤적을 담아서 인제의 마장터 가는 길을 로드무비 영상으로 보여준다. 마장터라는 오대산 자락에는 백도사—『휴먼 디자인』의 번역자이자 異人—가 살고 있고, 강영민 작가가 백도사에게 다가가는 길의 곳곳은 도시의 삶을 육탈하는 ‘초분’(草墳)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NATURE AS BEING PREY (2022), 112pp, in Korean; ARTISTS: Youngmean Kang, Koon Kwon, Kim Juree, Ziyea Hyun, Bae MiJung, Hyuna Ji, Dohee Kim, Yong Hae Sook, Shin Beomsun, Sang Eun Yoon; TEXTS: Yang Hyosil, Shin Beomsun, Nam Soo Kim, Kim Min-kwan
아카이브 전, 분홍별관 (홍천중앙시장 옥상, 강원 홍천군 홍천로7길 22), 13:00-17:00 월요일 휴관
참여작가: 강영민, 권군, 김도희, 김주리, 배미정, 신범순, 용해숙, 지현아, 현지예
기획: 김남수
전시오프닝: 2022.9.15.(토)
홍천미술관: 15:00-18:00, 작가와의 대화
분홍별관, 15:00~, 18:00 윤상은 퍼포먼스
전시는 ‘먹이이기’[Being Prey] 모드를 받아들여서 휴머니즘의 축을 무너뜨리는 것이 일차 목표입니다. 1985년 2월 에코페미니스트 발 플럼우드가 악어와의 만남을 회고하며 “그 아름답고 반점이 있는 황금빛 눈이 똑바로 들여다 보았습니다” 라는 것은 인간이 본래 악어의 먹이였다는 선조적인 사실의 환기였습니다. 사변적 실재론, 포스트휴먼, 샤머니즘 등의 담론 흐름 저 아래 도도한 사실은 “우주에서의 인간의 지위 조정”이란 것입니다. 자연과 사물과 동물을 비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과 동격이란 말이지만(브뤼노 라투르), 인간이 그 조정된 지위로서 살지 않으면 말잔치에 그칩니다. 결국 인간의 ‘먹이이기’라는 숨겨진 지위를 계발하여 인간이 다른 생명체에게 '먹힐 가능성'을 개방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봅니다.
이 전시는 그런 식으로 ‘먹이로서의 인간’ 위상을 자각하고, 그럼으로써 눈에 보이는 자연 안에, 혹은 너머에 도사린 냉혹하고 비밀스런 자연, 그 자연의 ‘의지적 관점’[intentional stance]이 빚어내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드는 과정입니다. 마치 바그너의 <파르지팔> 1막 마지막에서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백치 기사가 듣는 말, “여기서는 ‘시간’이 ‘공간’으로 됩니다”라는 영역입니다. ‘먹이이기’의 시간이 재도래하여 홍천 팔봉산과 홍천강 일대의 장소를 염두에 두면서 ‘공간화’되는 것이 참여작가들의 감흥이며, 그 감흥으로부터 작업이 일어나는 지점입니다.
“인격-비인격, 생명-비생명을 막론하고 일체의 존재를 거룩한 우주의 공동 주체로 드높이는 ‘모심’밖에 없다”라는 동학의 명제 역시 ‘먹이이기’로서의 밥 신세를 스스로에게 부여하지 않으면 그 ‘모심’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자연법적 에티카의 기초로서 이 ‘먹이이기’의 존재 모드를 생각하는 것은 자연 상태라는 루소적 낭만주의를 버리고 무엇인가에 의해 먹히고 있다는 현실 혹은 망상을 모티브로 한 다자연주의 – “문화는 단일하지만 자연은 여럿이다”(까스뜨루) – 로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모쪼록 이번 전시가 인간이 포스트휴먼 운운하면서도 다시 비인간을 포섭하는 전략이나 관념에 머무르는 인간종의 습관에서 벗어나 자연의 문지방으로 들어서는 첫걸음 떼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김남수
사이를(가) 지워야/사라져야 둘의 (추상적/문법적/불평등한)자리가 가능해진다/나타날수있다. 사이를 가시화해야 차이가 관계가 사랑이 긍정이 쓰일수있다 주어도목적어도 아닌 주체도대상도아닌 먹는것도먹히는것도아닌 눈으로 볼수없는 사건이 현시될수있다 육체성을 감각을 사랑을 쓴다는것 사이공간으로 내몰리는것 그 공간을 떠나지 않으려는 것
이번 워크숍 시리즈는 두 개의 전시 (이하 )과 (이하 )를 위한 행사로서 홍천의 팔봉산과 홍천강을 중심으로 우리가 안다고 믿는 자연[自然]의 가시성 너머에 도사린 비밀스러운 자연, 실재의 자연을 탐사하는 내용으로 독특한 관점의 강연과 토론이 진행됩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