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sewolferry 세월호 forgetyounot yellowribbon april16
inanebox · 9 years
Photo
Tumblr media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노란 물결이 파도칠 때, 나는 차마 어떻게 마음을 잡아 내려가야 할지 몰라서 그냥 하루를 멍하니 보냈다. 솔직히 말해서 몇번 목놓아 울다가, 또 정신을 차리다가 했다. 
시간은 참으로 가쁘게 흐른다. 일년이 지났어도, 달라진 것은 없다. 책임을 회피하는 당국, 남의 탓으로 돌리는 어른들을 보면서 저 꼬마아이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제 강의실에 들어가자, Louis라는 이름을 가진 11살 짜리 소년 가슴에 노란 리본이 곱게 달려 있었다. 노란 천으로 된 리본에 스티치를 넣어 직접 만든 것 처럼 보였다. Louis에게 물었다. 엄마가 달아주신거니? 
아이의 대답은 가슴을 내리쳤다. 수업을 영어로 하기 때문에 Louis가 한 말을 기억해내서 도화지에 적었다. 
“I’ve asked my mom to make this yellow ribbon. It’s too sad that they couldn’t come back. I wish all of them come back to their parents. I won’t forget teacher.”
“아니요. 제가 엄마에게 만들어달라고 했어요. 학생들이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게 슬퍼요. 전부 다 부모님 품으로 돌아오면 좋겠어요. 저는 잊지 않을래요 선생님.” 
순간 다른 학생들도 다들 그룹 프로젝트를 하면서 시끄럽게 떠들다가 돌연 숙연해졌다. 11살 짜리 남자아이도, 슬퍼하고, 공감하고, 애도를 한다. Louis의 바람처럼 남은 실종자들이 모두 돌아오게 해달라고 잠시만 다 같이 눈을 감고 묵념을 하자고 했다. 학생들은 잠깐동안 모두 눈을 감고 각자의 소망을 중얼거렸다.  
그 사건을 시계태엽을 감아 과거로 되돌려 없던 일 처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다시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제도를 재정비 했어야 했다. 사고가 어떻게 일어난건지, 왜 충분히 구조될 수 있었는데 사라진 시간동안 가까운 곳이 아닌 제주로 교신을 하고 있었던건지, 희생자들은 기울어지는 배에 갇혀야만 했던건지, 어디서부터 누가 무엇 때문에 언론에 거짓말을 지어낸건지, 말을 맞추기에 급급했던건지, 1년이 지난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진실을 밝히는데에 썼어야 하는 시간은, 당국의 회피와 정치적 조종속에 표류중이며, 와해중이다. 그 수 많은 의문과 의혹들을 몇겁의 시간 뒤에 희미해지기를 바라며 남의 일 처럼 강건너 불 보듯 하고 있는지를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다. 모르쇠로 일관하면 잊혀질거라 생각하겠지. 권력을 가진자들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일이란 매우 성가신 일이거든. 
나는 몇달 전 아빠를 잃었다. 아빠는 암투병 중이셨기 때문에, 그리고 병세가 심해져 작별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게 눈에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에 적어도 가족들이 아빠와 작별을 준비할 시간은 있었다. 당장 내일 닥칠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다가올 일이라 생각하고 조금씩 무너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리고 가족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아빠의 임종을 맞았다. 하지만 아직도 너무나 슬프다. 아무렇지 않은듯 일상을 영위하지만, 문득 문득 아빠가 생각나면 집에 아무도 없어도 목놓아 울다가 다시는 아빠의 품에 안길 수 없음에,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음에 사무치게 마음이 저린다. 
시간이 지나면 더 희미해질까 싶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유가족들은 자녀를 잃었다. 엄마 아빠를 잃기도 했고, 형제 자매를 잃기도 했다. 선생님을 잃은 아이들도 있다. 
며칠 후면 여행에서 돌아올 거라 생각한, 아무런 작별의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던 가족들이 불과 집에서 떠난지 몇시간 만에 차디찬 바다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말 한마디에 탈출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은채 배 안에 갇혀서 죽었다. 
유가족들의 일이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가 없는게, 내 자녀가, 내 부모가, 내 스스로가 이런일을 당하지 않으라는 법이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어떤 큰 사건이 일어났을 때, 빠른 대처와 당국의 조치가 믿을 수 없을만큼 체계적이지 못한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고에서 자유롭게 평생 그들과는 다른 삶을 살거라 믿지 않기 때문이다. 평화로운 일상이 깨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바로 어제 볼에 뽀뽀를 하고 “잘 다녀올게, 엄마.” 하고 나간 아들이, 딸이, 차가운 주검으로 되돌아 왔다. 그런데 왜 죽었는지를 모른다. 왜 구조가 되지 않았는지를 모르고, 왜 진상을 밝히지 않는지를 모르며, 왜 아직도 몇몇은 차디찬 바다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지를 모른다. 
아빠가 응급실에 실려갈 때 부터 임종때 까지 줄곧 곁에 있었다. 아빠의 장례식을 치르며, 차갑게 식은 몸을 안고, 마지막 작별인사를 할 때, 그래도 아빠의 임종을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순간순간이 후회되는 것 투성이다. 아빠가 치료를 받고 계실 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내가 더 고집을 부렸더라면, 아빠가 혼수상태에 빠지기 몇시간 전, 내가 친구와 저녁을 먹으러 나가지 않았더라면,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더 오래 아빠곁에 있었더라면, 이런 후회는 사무치고 한도 끝도 없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마음이 저릴 것이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내가 아빠를 그리워 하듯, 유가족들의 기억도 시간이 지난다 해서 희미해지지는 않을 것 같다. 어떻게 어떻게든 살아가겠지만, 사는게 사는게 아닌 고통의 시간에, 슬픔을 강요한다느니, 제발 유가족들이 그만좀 했으면 좋겠다느니, 유난을 떤다느니, 하는 발언을 하는 사람들이 생길 때 마다 몸서리가 쳐진다. 왜 그렇게 삭막해졌을까. 왜 그렇게 차가워졌을까. 그렇게 멀고, 또 먼 일이기만 할까. 
슬픔을 목도하고, 생명을 안타깝게 여길 줄 아는 열 한살 소년의 리본 하나가, 평생 지워지지 않을 노란 꽃 하나를 내 가슴에 새겼다. 
그리고 모든 희생자들이 저 소년의 바람처럼 부모님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더불어 다시는 세월호와 같은 참사가 거듭되지 않기를. 
5 notes · View no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