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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오세요

"에이, 버스로 다니시려면 굉-장히 피곤하실 겁니다. 답사지는 물론이고 현지인들만 아는 맛집까지 모시겠습니다. 총 십 만원에 어떠십니까?"
"윤 선생은 어떻게 하고 싶어?"
“택시가 좋을 것 같습니다."
수학여행 답사를 위해 경주에 온 부장과 나는 택시에 올랐다. 부장은 조수석에, 나는 뒷 좌석에. 택시를 신경주 역 밖으로 내모는 기사의 드라이빙이 산뜻하다. 무리한 가속이 없고 코너를 돌 때엔 속도를 적당히 늦춰 쏠리는 느낌이 없었다. 게다가 요즘 들어 이렇게 화창한 날이 또 있었던가. 3월의 맑은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오늘은 왠지 기억에 남을 하루가 될 것 같다고.
"이 중에서 제일 가까운 곳부터 가 주세요 기사님." 부장이 숙소 후보들의 브로슈어들을 펼쳐 보였다.
"이 세 곳 중에는 D가 제일 가깝겠네요."
택시가 첫 번째 숙소로 이동하는 동안 그들은 차창 밖의 듬성듬성한 고분들과 건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주인이 누군지 아는 무덤은 릉, 모르는 무덤은 총이라고 합니다. 어렸을 적엔 고분에 올라가 친구들이랑 술도 먹고 그랬는데, 이젠 다 옛날 일이네요." 그의 뒷모습이 회상에 잠겼다.
"경주를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해 놔서 요즘 같으면 다- 잡아갑니다. 하하."
"그나저나 경주는 건물들이 높지 않아서 좋네요." 창 밖을 보며 그녀가 말을 이어나갔다.
"고즈넉 하지요? 여기는 시내랑 반대편이라 건물들이 낮습니다."
남부 지방의 따스한 햇살과 너무 강하지 않아 정다운 기사의 경상도 억양에 나는 그새 긴장이 풀렸다.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자동차는 마치 요람과 같았다. 졸음이 쏟아지려는 순간, 부장의 목소리가 의식의 커튼을 젖히고 들어왔다.
"나, 경주는 오랜만이야. 윤 선생은 처음이지?"
"아닙니다. 삼 년 전에 왔었습니다." 내 쪽으로 고개를 반쯤 돌린 그녀에게 나는 대답했다.
"그랬어? 그럼 낯설지는 않겠다."
"그렇길 바랄 뿐입니다."
복도와 각 방의 소화기, 비상계단, 식당과 강당 등을 나는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다. 부장은 면밀히 호텔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안전 요원이 항시 배치돼 있나요?" 그녀가 호텔 직원에게 물었다. 직원은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는데, 포마드로 깔끔하게 넘긴 머리가 대리석 바닥과 어울려 마치 그가 이곳에서 나고 자란 듯한 이미지를 풍겼다.
“아뇨, 학생관리 업체와 따로 통화를 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정장 재킷의 매무새를 고치며 정중히 말했다.
"저희가 따로 연락을 해야 한다고요? 예전엔 당연히 제공되던 것들인데요." 놀란 기색의 그녀는 격앙된 감정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말했다.
"아시다시피 저희 호텔은 유스호스텔이 아니라서요. 사실, 기업에서 단체 워크숍이나 신입사원 연수로 오시는 분들이 더 많기 때문에 현재 학생들만을 ���한 안전 요원은 제공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른 호텔들도 다 비슷한가요?"
"다 비슷할 겁니다 선생님." 그의 대답은 간결하지만 자로 잰 듯 딱 떨어졌다.
우리는 다시 택시에 올랐다.
"큰일이네. 여기가 교장 선생님이 추천하신 곳이었는데." 부장의 미간에 주름이 깊었다.
"그래도 호텔이라 그런지 시설은 좋아 보이던데요."
"시설은 좋은데 너무 넓어서 학생들 관리가 어려울 것 같아. 그리고 안전 요원도 따로 섭외하려면 예산도 오버될 것 같고." 얕은 한숨을 내뱉고 그녀는 이내 다시 목소리에 힘을 주어 기사에게 말했다. "기사님, 다음에는 B랑 H 유스호스텔로 가 주세요."
하지만 이후의 일정에서도 우리는 소득이 없었다. 유스호스텔 두 곳 모두 부장이 원하는 안전 요원이 옵션으로 붙었지만 시설 전반이 허용 이상으로 낙후했다. 변색되어버린 장판이며 추하게 노출되어 있는 조명들, 너무 좁아 큰 사고가 벌어질 것 같은 대피로 등이 조금 전의 호텔의 것들과 비교되었다. 사장은 호텔들과 경쟁하기 위해 시설 관리에 나름 굉장한 노력을 들이는 것 같았지만, 낡은 건물은 세월의 풍파를 이겨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점이 하나 있다면 유스호스텔의 사장들이 필사적으로 우리를 유치하려고 애썼다는 사실이랄까.
"요즘 애들이나 엄마들이나 우선 시설부터 보니까요." 기사가 말했다. "게다가 세월호 사건 이후로 수학여행이 많이 줄어서 호스텔 사장들 사정이 이만저만 아녜요.”
기사의 말이 옳았다. 실제로 세월호 사건 이후 대부분 학교들의 연간계획에 더 이상 수학여행의 자리는 없다.
"학교 입장에서도 굳이 고생을 사서 할 필요는 없죠." 부장은 수학여행 전후의 자질구레한 업무들과 안전사고 발생 시 맞닥뜨려야 하는 일련의 고행들을 일일이 열거했다.
"그래도 나머지 석굴암이랑 안압지는 들렀다가 가실 거죠?"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기사가 한 톤 높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기사님."
택시는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저 필사의 유스호스텔들을 뒤로한 채.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이나 휘돌아 올라 우리는 석굴암 입구에 도착했다. 따뜻한 날씨 때문인지 매표소가 사람들로 들끓었다. 가까스로 표를 끊은 우리는 석굴암으로 발을 옮겼다.
"이게 얼마만의 산책이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부장이 말했다.
"윤 선생은 제대하고 처음 맞는 학기라 더 정신이 없지?"
"한 번 해봐서 익숙할 줄 알았는데 쉽지가 않네요."
“그래, 20년이 넘어도 익숙해지지는 않는 것 같아."
"그렇군요." 나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양한 사람들이 석굴암을 찾았다. 젊은 연인들부터 중년 여인들, 그리고 다국적의 관광객들까지. 저 외국인들은 도대체 어떤 경로로 경주를 찾게 됐을까, 나름의 추측을 펼치는 동안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한 남자아이가 내 시선을 끌었다.
창혁이?
놀라 급히 뒤돌아 보았지만 그 아이는 안타깝게도 창혁이가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다시 발길을 돌려 부장을 쫓으려는데 이번에는 앞니가 귀여운 한솔이가 내 소매를 끌어당겼다.
"선생님, 어디까지 가야 해요? 다리 아파 죽겠어요."
"거의 다 왔어, 힘내자!"
"선생님 목말라요. 저기 있는 약수 먹어도 돼요?" 이번에는 뿔 달린 모자의 정현이.
"저기 식수 금지라고 쓰여있잖니. 선생님이 버스에 돌아가면 물 줄게 조금만 참자."
석굴암이 저 높이 보이기 시작하자 그 앞에 놓인 계단 앞에 아이들이 줄 지어 앉아있다. 사진사 앞에서 손가락으로 브이를 잔뜩 만들고서는. 아직 초임인 나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맨 왼편에 서 있다. 입꼬리는 한껏 올리고 두 눈은 부릅뜬 채.
"됐습니다~!" 사진사의 기분 좋은 외침에 우리는 금세 추억으로 흩어졌다.
이후 본존불을 관람한 뒤 계단을 내려올 때도
"에이, 시시해요 선생님." 하며 볼멘소리를 하던 혁준이가,
"우리 숙소 언제 가요?" 나를 보채던 영훈이가 떠올랐다.
주차장으로 돌아가며 나는 현재의 첫 제자들을 상상했다. 키가 제법 자란, 교복을 차려입은, 그리고 목소리가 제법 어른스러워진.
부장과 나는 다시 택시에 올랐다. 석굴암 입구를 넌지시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삼 년 전의 그때로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을까고. 하지만 기사는 택시를 몰아 다시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이나 휘돌아 내렸다.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그때를 뒤로한 채.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안압지를 한 바퀴 돌자 어느새 해가 붉었다. KTX 탑승까지는 한 시간 남짓이었다.
"기사님, 신경주 역까지는 얼마나 걸리나요?" 부장이 물었다.
"삼십 분이면 갑니다."
일정에 피곤한 탓인지, 숙소 결정 문제로 인한 고민 때문인지 부장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틈을 타 나는 기사에게 물었다.
"기사님은 학창 시절에 수학여행 어디로 가셨어요?"
"하하. 서울로 갔었죠 서울. 경복궁도 가고 자연농원도 가고."
"재밌었나요?"
"아이, 그럼요! 전날에는 설레서 잠도 설치고 버스에서 친구들이랑 과자 나눠먹고. 그게 다 추억 아닙니까." 백미러에 비친 기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도 선생님네 학교는 정말 좋은 학교예요. 아직 학생들을 위해서 수학여행도 계획하시고." 그가 말했다.
"그런가요." 이 말을 끝으로 택시는 적막에 휩싸였다. 기사가 조심스레 라디오를 켰다.
디제이와 게스트의 시시껄렁한 잡담을 듣고 있자니 우리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부장은 카드를 꺼내 기사에게 건넸다. 결재가 처리되기까지 십여 초의 시간, 기사가 말했다.
"선생님들, 꼭 수학여행이 아니더라도 경주에 오세요."
부장이 싱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기사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건넸다.
해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열차 안의 공기도 다시 본래 겨울의 것으로 돌아왔다. 이윽고 서울행 열차의 출발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오늘 어땠어?"
부장의 질문에 경주에서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그 많은 장면들 중 무엇을 골라 답해야 할지 몰라 나는 대답했다. "오늘은 왠지 기억에 남을 하루가 될 것 같습니다."
시트 위로 고단한 몸을 기대자 메아리처럼 귓가를 맴도는 기사의 마지막 말.
경주에 오세요, 경주에 오세요.
하지만 우리는 경주를 떠난다. 슬금슬금 경치가 밀려난다. 열차가 역을 나서면 점점 더 빠른 속력으로 멀어질 것이다.
월간 공하경 2월호
글 : 공하경 / 사진 : 주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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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공

김치찌개가 짜다.
"어머니, 오늘은 간이 좀 짜네요. 하하."
말을 내뱉고는 아차싶어 너털웃음을 지어냈다.
"물 넣고 더 끓여볼텨? 근디 나중에 색시한테 이쁨 받을라믄 밥상머리에서 꼬투리 잡고 그라믄 안된다. 알겄냐."
이번엔 지나치게 많은 물을 부으며 아주머니가 말했다.
"예, 아무럼요."
난 아무 말 않기로 한다. 조금 더 졸여서 먹으면 되지 뭐.
만족스럽지 못한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섰다. 이 한산한 주말 아침을 누군가는 늦잠으로, 또 누군가는 티비로 보내리라. 하지만 내가 지금 향하는 곳에는 주말 아침을 힘찬 함성으로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매 일요일 동네 공원에는 동호인 야구시합이 열리는데, 경기가 화려하진 못해도 구경꾼들에게서 느껴지는 느슨함과 선수들의 열기가 공존하는 그 묘한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아무런 약속이 없는 주말이면 나는 줄곧 이곳을 찾는다.
깡! 하면 모두가 어, 어, 어 하늘의 공을 쫓는다. 대부분 높게 떠올랐다가 힘없이 수비수의 글러브로 떨어지곤 했지만, 혹시라도 저 공이 담장을 넘진 않을까 작은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볼 뿐이다.
공이 담장을 넘어 내 앞에 떨어지는 상상을 한다. 재빨리 손을 뻗는다. 하지만 희고 가녀린 손이 잽싸게 가로챈다. 그녀다.
"이번에도 내가 잡았다!" 그녀의 두 큰 눈과 발그레한 얼굴이 내게 말했다.
아까 짜게 먹어서 물을 많이 마셨더니 몸이 둔해져서 그런 거야, 변명하려 했지만 그녀는 없다. 이번엔 그녀가 파울볼을 잡아 내게 선물했던 기억. 대개 아픈 기억은 예의 없이 찾아온다. 마치 이따금 겪게되는 눈꺼풀의 떨림처럼.
도저히 잊힐 듯 잊히지 않는 그녀를 나는 언제쯤이나 지워낼 수 있을까. 그녀가 그토록 싫어했던 나의 우유부단함과 소심함, 그리고 쓸데없이 자존심 부리는 나쁜 습관도.
어느새 또 경기장에선 깡! 하고 모두가 어, 어, 어 하늘의 공을 쫓는다. 이번에도 높게 떠올랐다가 수비수의 글러브로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공이 담장을 넘진 않을까 작은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볼 뿐이다.
월간 공하경 1월호.
글 : 공하경 / 사진 : 주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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