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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 작가노트
출근에 늦을까 봐 잰걸음을 놀리며 소설의 존폐를 고민할 때 신발 밑창이 덜어졌다. 그래서 걸음을 멈췄는데 숨이 찬 게 느껴졌다. 걷는 줄 알고 있던 내가 뛰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쓰고 있는 우주 배경의 소설을 상상하기에 내 발이 너무 현실에 붙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SF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게 아니다. 내가 내 소설과 동떨어져 있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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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천 개의 단어만으로 이루어진 짦은 삶을 살았지만 처음 세상을 바라보며 단어를 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천 개의 단어는 모두 하늘 같은 느낌이었다. 좌절이나 시련, 슬픔, 당신도 알고 있는 모든 단어들이 전부 다 천 개의 파랑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파랑파랑하고 눈부신 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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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나는 세상을 처음 마주쳤을 때 천 개의 단어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천 개의 단어로 다 표현하지 못할, 천 개의 단어보다 더 무겁고 커다란 몇 사람의 이름을 알았다. 더 많은 단어를 알았더라면 나는 마지막 순간 그들을 무엇으로 표현했을까. 그리움, 따뜻함, 서글픔 정도를 적절히 섞은 단어가 세상에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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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나는 세상에서 가장 긴 3초를 보냈다. 기수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을 때보다 더 길고 긴, 충분히 모든 나날을 되짚을 수 있을 정도의 아주 긴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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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아요. 저들이 하는 말은 듣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당신의 주로가 있으니 그것만 보고 달려요. 자신의 속도에 맞춰서요.
어차피 이 주로는 투데이만 달릴 수 있다. 관중석에서 보내는 야유는 중요하지 않다. 투데이가 신경 쓰지 않도록 귓가에 말하고, 또 말했다.
신경 쓰지 마요, 저 소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굳이 들을 필요 없어요. 모든 것을 듣고 살 필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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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너무 아프면 뛰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이미 주로에 섰으니까 그걸로 됐어요.
힘들면 포기하는 것도 방법이다. 비록 생��이 무언가를 포기하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노력을 해야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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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언젠가 연재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눈이 시려 눈물이 난다고 말했지만 콜리는 아무리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연재는 꼭 눈이 시리지 않아도 눈이 부시다는 표현을 쓸 수 있다고 알려줬다. 이를테면 자신이 보았던 하늘 중에 가장 아름다운 하늘을 마주치는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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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살아 있지 않은 걸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인간밖에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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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인간의 눈이란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어도 각자가 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콜리는 인간의 구조가 참으로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함께 있지만 시간이 같이 흐르지 않으며 같은 곳을 보지만 서로 다른 것을 기억하고, 말하지 않으면 속마음을 알 수 없다. 때때로 생각과 말을 다르게 할 수도 있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숨기다가 모든 연료를 다 소진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렸고, 다른 것을 보고 있어도 같은 방향을 향해 있었으며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는 것처럼 시간이 맞았다. 어렵고 복잡했다. 하지만 즐거울 것 같기도 했다. 콜리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면 모든 상황이 즐거웠으리라. 삶 자체가 연속되는 퀴즈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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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내가 너를 그냥 데리고 왔다고 했잖아. 사실 그거 거짓말이야."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속을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연재가 이것만은 콜리에게 사실대로 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몸이 다 망가진 채로 건초더미에 누워서 나한테 하늘이 예뻤다고 말하는 네가 불쌍했어. 그리고 순간 내가 너를 고칠 수 있지 않을까 호기심도 들었어. 그대로 내버려두면 너는 사라지겠지만 내가 데리고 오면 사라지지 않으니까. 같잖은 연민이지. 그래도 후회 안 해. 나는 내가 좋아했던 걸 그동안 싫어한다고 믿고 살았는데, 아니더라고. 너 만지면서 알게 됐어. 그리고 지금 내 말에는 대답하지 마. 명령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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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콜리가 옆에 있어 연재는 홀로 있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콜리에게는 생명체가 가진 체온이 없었다. 그럼에도 콜리는 언제나 이곳에 함께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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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연재는 체육대회 날로 돌아가 운동장 옆 스탠드에 보경과 은혜, 그리고 지수와 콜리를 초대했다면 레일을 이탈하지 않고 끝까지 뛰어 1등으로 들어갔으리라 확신했다. 물론 열한 살,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앞으로는 레일을 벗어나지 않고 완주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세상 모두에게 이해받지 않아도 된다. 오직 연재가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만 이해받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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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적어도 지수를 만나기 전까지, 연재의 세계는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고요였다. 적막이기도 했고.
지수는 연재에게 강풍으로 불어왔다. 잠잠했던 연재의 돛을 한 방에 날렸다. 어느 날 대회를 같이 나가자고 다가와 뻔뻔하게 협박했던 지수는 특유의 당당함을 무기로 내세웠다. 연재의 차가운 반응에도 상처받지 않았다. 세상에 저런 애도 있구나. 처음에는 싫었지만 계속 싫지는 않았다. 성질에 못 이겨서 버럭 화를 내는 게 웃기기도 했다. 지수가 귀찮게 느껴지는 횟수가 확연히 줄어들었고 옆에 있어도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끔은 옆에 있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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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이해받기를 포기한다는 건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연재는 상대방의 모든 행동에 사사건건 이유를 붙이지 않았다. 저렇게 행동하면 저렇구나, 하고 말았다. 상대방이 자신을 좋아해서 그러는지 싫어해서 그러는지 따위를 생각하면 너무 많은 이해심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타인의 이해를 포기하면 모든 게 편해졌다. 관계에 기대를 걸지 않기 때문에 상처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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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이해에는 한계가 있고, 횟수가 있고, 마지노선이 있다. 그 선을 넘으면 이해해주던 사람은 어느 순간 상대방의 이기심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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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대화하지 않고 어떻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나요? 인간에게는 서로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기능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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