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wordinthemorning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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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0일 설교.
영적세계의 50여가지 원리.
고린도전서  3장 1절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마 17: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하면 옮길 것이요
우리가 사는 자연세계,물질세계에는 통용되는 원리가 있다.만유인력의 법칙이나경제학의 수요와 공급에 대한 원리, 건강에 대한 원리.
영적인 세계에도 원리가 있다. 이 영적인 세계의 원리를 모르면 정상적인 영적인 삶을 살 수가 없다.
고린도전서 3:1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_
여기서 육신에 속한 자는 영적으로 어리고 무지한 사람들,알아도 그렇게 살지 못한 자들을 말한다. 반대로 신령한 자는 영적인 원리를 알고
그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자들을 말한다. 영적인 원리를 따라 살아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릴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원리와 질서를 다루는 책이다. 영적인 세계의 원리에 대해 이것은 태어날때부터 알고 태어나는 게 아니라 성경을 통해 배워야한다.  
고린도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교회였지만  그 안에 많은 영적 타락이 있었다. 성도수도 많았고 재정적으로도 튼튼했고 은사도 많았지만 그 안에
분열, 음란, 신학적문제, 은사사용으로 인한 많은 갈등등 수많은 문제가 있었고 바울은 이런 수 많은 교회 안의 문제를 보면서 영적인 원리가 무엇인지 풀어서 쓴 것이
고린도전서이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게 읽어보면 영적인 원리를 많이 알 수가 있다.
혼은 교만하지만 영적인 사람은 겸손하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해도 실제로 내 삶에 적용하고 살아갈수 있느냐는 다른 것이다.
영적이냐 육적이냐를 가르는 제일 중요한 차이는 태도다.  교만한 사람은 아무리 들어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영적인 사람이 되지 못한다.
고후 4: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이다 .
성경은 분명히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두 세계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보이는 세계가 전부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태초부터 두 세계를 창조하셨다. 크리스찬은 이 두 세계를 믿는 사람들이다.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은 영이시기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 분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 계신다.
많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내 생각과 사상 속의 추상적인 세계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세계는 보이는 세계만큼이나 실질적이고 구체적이고 실존하는 세계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  -가브리엘, 미가엘,  그룹들, 스랍들 같은 천사들
                                              공중에 권세 잡은 자들
                                               마귀와 사탄.
                                               하나님.
이들은 다 자의식이 있고 생각이 있다.
그러나 이 보이지 않는 세계가 실체이고 본질적이고 영원한 곳이다.
인간만이 두세계에 동시에 속한 존재들이다 .
2 속했다는 말의 뜻은 영적인 세계와 인식하고 소통할 수 있는 기관들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사용할수 있는 것은 ‘믿음’이다.
3 그런데 이 두 세계는 독립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다.
히브리서 8:5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나이다.
모형과 그림자. 본체와 그림자라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어떤 작용이 묶이면  그 결과 땅에서도 묶이게 되고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어떤 작용이 풀리면 땅에서도 풀린다.
그림자는 스스로는 아무리 움직이려고 해도 움직이지 않는다.
본체를 옮겨야 그림자는 비로소 움직일 수 있다. - ‘기도'할때 하늘에서 본체가 움직여진다는 것, 바로 크리스찬의 방식.
기도는 영적 세계를 움직이는데 이것에 필요한 요소는 ‘ 믿음’ 이다.
약 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들풀 같으니
약 1: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믿음으로 구해야 얻을 수 있다.
믿음은 하늘에 있는 것들을 이 땅에 실체가 되게 하는 것.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하지만 상황에 대한 믿음으로 인식하면 곤란해진다. 결과론적으로는 그런 믿음이 생길수 있지만  
그 믿음이 강한 것이 믿음의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하고 선하고 내 편이라는 것.
어떤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어떤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이 그 약속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것.
믿음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믿음은 내용이 중요하다.
이 믿음을 잃지 않을 때 하늘의 것이 땅에서 실체가 되게 한다.
그러나 이 믿음에는 레벨이 있다 . 성경에서는 이것을 영적인 권위라고 한다.
더 높은 수준의 영적인 권위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 쌓여져 간다.
특별히 어려운 상황 가운데 .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아 보이는 상황 가운데 믿음을 발휘할 때.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사용하셔서 산을 옮기신다.  
성경의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의 영적인 권위는 예외없이 광야에서 만들어진다. 광야에서 만들어지는 이유는 광야만이 믿음이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든 것이 잘될때는 믿음이 발휘될 여지가 없다. 인간은 악하고 게으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큰 산이 앞을 가로 막을 때가 있다.
옮길 수 없어 보이는 산을 만나게 되면 낙심하고 절망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한다. 결국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영적으로 침체되기
시작한다. 이 패턴에서 진짜 이유는 영적인 원리를 잘못 파악했기 때문이다. 산은 실체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진짜 세계의 그림자이다.
산이 작든지 크든지 그것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의 그림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아주 작은 믿음이라도 있으면 그 산을 옮길 수 있다.
그 산을 옮기려면 믿음으로 위에 있는 본체를 옮기는 것이다. 비록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고 하나님이 여전히 나와 함께한다는 것을 진짜로 믿는다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산을 옮길 수 있다.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눈 앞에 있는  산을 옮기려고 노력한다.하지만 크리스찬이 사는 방식은 그렇지 않다.
이 가운데 산을 맞으신 분이 있으십니까. 그 산이 어떤 산이든  옮길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
눈앞에 보이는 산에 집중하고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집중하여 보는 것이 이 산이 아니라 위에 계신 하나님이라면 ,산을 옮기실 수
있는 분이라면 , 그 분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어떤 산이라도 ,그 산이 감기든 암이든, 빚이든 옮길 수 있다.
사단이 우리를 속인 가장 큰 거짓말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것. 육체의 원리를 따라 살지 마십시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영적인 원리를 따라 살아야한다.
그 원리를 따라 살때 우리 삶 가운데는 전혀 다른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옮겨서 전혀 다른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된다.
이것을 믿기 시작할때  우리는 옮겨져서 다른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된다. 세상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하는 이야기를 비웃듯이 지나가게 될것이다.
너희는 위에 것을 찾으라고 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산을 옮길 거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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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inthemorning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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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밖에서 일어나는 싸움은 사실은 내면에서 시작된 싸움이다. 밖에서 그냥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서 일어난 갈등으로부터 비롯된다. 내 마음이 평온한데 누구랑 싸우겠는가. 내 마음에 요동치고 있는 갈등이 투영되는 것이 싸움이고 분쟁이다. 신앙은 궁극적으로 우리 내면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는 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 내 안의 갈등이 먼저 해결되어야 밖의 갈등이 해결된다는 것을 경험한다. 내 속이 부글부글한데 누구랑 편하게 지내겠는가. 분쟁이 일어날 경우 내 안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계기로 삼아야한다.
밖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이 내 안에서 투영된 것이라는 것 이것이야 말로 성숙한 신앙인의 진단법이다. 누군가와 자꾸 분쟁을 하게 되는 경우 뭇느 문제가 내 안에 있나 살펴봐야한다. 동일한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부딪히고 싸운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 말을 믿고 무엇이든지 구하면 얻게 되나 우리가 구해야할 것을 구하고 찾아야할 것을 찾고 두드려야할것을 두드려야지 부딪히면 내 안에 무슨 욕망이 있는지 자각해야한다.저 사람이 왜 불편한가는 내 안의 어떤 욕망때문이다.”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 신앙에 입문했을때는 기도 잘 들어주시니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나보다 믿어지다가 신앙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시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신앙 안에서 성숙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깨닫고 내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과 일치하도록 하는 과정이지 내 소원을 가운데로 끌어당겨서 어떻게든지 내 소원을 이루려고 하는 미숙한 신앙을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으신다.신앙 안으로 걸어들어갈수록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 겹쳐지도록 해야한다. 세상과 벗된다는 길은 하나님과 원수되는 길이다. 하나님과 벗된 일이 왜 일어났나. 세상으로부터 돌이켰기 때문에 하나님과 친구가 됐다. 세상을 추구하는 것에서 하나님께로 돌이켰더니 그 돌이킴 회개를 귀하게 여기시고 또 하나님께서 자녀로 삼아주셨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게 하시기까지 성령이 원하시는 것과 우리가 원하는 것이 충돌하게 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못하게 하신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주셨다. 죄된 속성 육신이 원하는 것을 따라 하지 못하도록 성령을 보내주셨다. 신앙 안으로 더 들어갈수록 내면의 갈등이 더 커진다. 빨리 결정이 되어야 평강과 샬롬이 빨리 오고 계속 밀당하면 계속 피곤하고 힘들어진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이 은혜가 감당못할만큼 커진다.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고 범사에 감사가 되고 기뻐진다. 내 원하는 게 이루어져서 감사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아버지 되어주시고 자녀 삼아주신 것에 감사한 것이다. 내면의 태도가 결정되면 모든 게 쉬워진다. 신앙은 내 내면의 태도를 점검하는 것이다. 내면의 태도가 인생의 고도, 은혜의 고도, 삶의 고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나를 들고 있는 나를 놓아버리면 그때 비로소 말씀과 성령의 날개로 날아오를 수 있다. 손에서 나를 놓치 못해서 신앙이,믿음이 비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비상하는 신앙이란 사실은 자아를 내려놓을때이다. 그래야 비상할 수 있다. 주님께 집중하면 된다. 마귀를 대적하는 것은 우리 힘으로 안된다. 전신 갑주를 입어야 그 안으로 피해야 하나님 안으로 들어갈수 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면 마귀의 밥이 된다.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으면 마기는 피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걸어가면 마귀는 피해간다. 그리스도 이름을 힘입어 명령할 수 있게 되고 명령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우리가 마귀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우리를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 안에 있는 것만이 마음을 성결해지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나님을 더 많이 의식할수록 하나님을 더 두려워할수록 다른 것에 욕심내지 않는다.
신앙인의 길은 너무나 비효율적이고 비경제적인 삶을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기 일이 아닌 남의 일에 쫓아다니기도 하고 남의 불행에 지나지 않는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고 즐거움을 슬픔으로 바꾸는 삶, 그렇게 되는 것이 주 앞에서 낮아지는 삶이라고 한다. 그러면 주께서 우리를 높이신다.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은 내가 나를 높이다가 고꾸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나를 높이는 태도를 교만이라고 한다. 교만이 나랑 결혼해서 낳은 딸이 시기이다. 시기심이 많은 것이 교만이다.우리사회는 얼마나 교만한 사회인가. 사촌이 땅사면 배가 아프고 못살다가 잘살기 시작하면 교만이 하늘을 찌른다. 그런 사람의 특징이 서로 비방하는 것이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자는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다. 주님의 보석같은 가르침들을 야고보가 다시 현실적인 믿음의 태도가운데 조명했다. 이런 행함으로 드러나는 것이 믿음이다. 서로 비방하는 이유는 믿음이 없어서이다.믿음의 태도나 믿음의 삶이 없을때 비방하게 된다.
-유기성 목사님과 조정민 목사님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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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inthemorning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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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적으로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사람-
첫단추가 잘못 끼워진 삶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첫단추가 제대로 끼워진 사람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무엇무엇이 된 나
하나님께 묻고 거기에 순종하는 삶 .
그렇게 가면 오랫동안 신앙생활해도 계속 평행선.
내 삶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의 라인으로 일치되어 있어야한다.
내 삶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가는 것.
하나님은 좋고 지혜로운 분이기 때문에.
내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중에 어느 것이 나를 더 행복하게 하고 풍성하게 할 것인가.
거듭난 사람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맞추는 사람.
이것을 받아들인 사람의 삶에는 변화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변화.
복을 누리는 변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 .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을 때 ,작동하고 있을 때  모든 삶이 하나님의 뜻대로 균형을 맞추어가기 때문이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은혜가 지배하는 삶
-기쁨가운데 자원해서 움직이게하는 에너지.
예배드리고 싶어진다.
감사와 감격가운데
하나님을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뭔가 해주고 싶다.
사람들도 예뻐보이고 소중해보인다.
-율법이 지배한다.
감사가 없고 감격이 없고
만사가 삐딱해보인다.
사람들이 못마땅해보이고 피곤과 정죄가 내 삶을 몰아간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려고 해도 부담되고 피곤해진다.
평강이 있을 때 여유가 생긴다.
평강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 웬만큼 잘못해도 그러려니 넘어가게 된다.
이웃을 만나도 부드럽고 상냥해질 수 있다.
평강이 없으면
다른 사람의 작은 잘못에도 예민해진다.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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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inthemorning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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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삶 
  겨울을 지나 봄의 초입, 하나님을 만나 거듭난 후 크리스찬이라는 정체성이 주는 감동으로 매달려온 작업을 두고 짧지 않은 기간을 씨름하며 또 1년 남짓의 교회 공동체관계 가운데  잠재해있던 저의 부족함과 연약한 성품들을  잘 컨트롤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로 인해서 저는 영적으로 많이 지쳐있었고 그러다보니 하나님에 대해서도 불편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주일예배만 간신히 지키면서 신앙생활의 명맥만 근근히 유지하고 있던 당시의 제 처지와  심중을 알고 있던 리더언니는 때마침 변화의 삶을 신청하기를 권면하셨고 몇번의 고사끝에 마지못한 마음으로 시작하게 된 변화의 삶은 그런 이유로  자원하고 기대했던 제자의 삶때와는 사뭇 다른 자세로 시작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수업이 시작되고 각 개인이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사역자라는 정체성을 전제하고 거기에 따른 우리 삶과 내면의 방향을 제시하고 인도하는 게  변화의 삶의 목적이고 정체라는 것이 파악되자  제 마음밭은 이 가르침을 잘 흡수하고 익힐만한 상태가 아니라는 확신만이  공고해져서 더 늦기 전에 빨리 그만둔다고 말해야겠다고 타이밍을 노렸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도 않고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말하는것인지 파악하기 힘든 제가 어떻게 삶으로의 사역자라는 큰 명제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이건 도저히 억지로 거짓으로는 안되겠다. 주님이 생각하시기에도 이런 삐딱한 내가 여기서 의자만 하나 차지한 채 듣는 걸 원치 않으실거야. 그래서 2번 나갔을때 아무래도 힘들 것 같으니 다음 시즌에 들어야할 것 같다고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그날 나눔에 하나님을 처음 인격적으로 만났던 간증을 하게 되었고 그 나눔에 발목에 걸려 계속 나갈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그제야 받아들였습니다.그러한 낮은 기대감과 썩 성실하지 못한 태도로 임한 변화의 삶이었지만 어느덧 가랑비에 옷이 젖듯한 성령님의 돌보심과 보호하심이 있었고,완전히 포기하는 것만이  답으로 보이던 작업은 높은 산을 하나 넘어가자 길이 보이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길로 인도되어져 전에 없던 안정과 열정이 다시 생성되었습니다. 창작을 하는 저같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원동력은 바로 생명과도 같은 것이라 그 생명을 소생케하신 분이  전적으로 주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분명하고 확실한 것만 주님의 인도함과 응답이라고 믿는 영적으로 아직 어린 저는 마지못해 등떠밀려 시작했지만 변화의 삶에 꾸준히 참석하는 그 발걸음 속에 ,나눔 중에 큰 돌파가 일어난다든지 성령님의 뜨거운 감동이 부어지는 일 없이도 서로를 정죄함 없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구성원들의 단정하고 살뜰한 매너 속에,또 이 과정들을 부드럽게 인도해주시고  솔루션을 제시해주시는  테이블 리더 최영희 선생님의 섬김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가 스며들어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에 더불어 변화의 삶 마지막 주간이었던 기도회때 끼니 말씀을 바탕으로 한 성령집회 예배에서 다시 강조되어진  포도원의 무화과 나무 이야기가 특별한 감동이 있었습니다. 삼년째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가 땅만 차지하고 아무 결실을 맺지 못하니 뽑아버리자는 땅주인에게 포도원지기가 일년만 더 시간을 달라고 중보하는데 그게 예수님의 마음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중요한 일과 결정을 앞두고, 어떻게 보면 지난 시간은 봄이 지나 여름을 거쳐 가을같은 거라고 시기였습니다. 제가 거듭났던 그 해 주님이 겨자씨만한 믿음을 저에게 심으셨고 올해가 첫 열매를 맺는 시즌의 나무가 되길 기도했는데  그러자  주님이 죽은 생명이었던 나를 지금까지  놓지 않고 은혜로 붙들어 주고 계셨구나..하는 감동이 부어졌습니다.비록 아직도 연약하고 부족해서 풍성하고 당도높은 과육이 되지 못하더라도 누군가에게 작은 후식은 될 수 있겠다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자신감.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제가 원하는 때에 주님이 응답하시거나 일해주지 않으시면 쉽사리 주님을 원망하고 신앙생활에 대한 회의감이 곧잘 들었는데  내 때보다 주님의 때를 더 신뢰해야겠다는 회개를 하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을 인도해주시고 지금도 저를 사랑하고 앞으로도 저를 키워주실 하나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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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inthemorning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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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인가의 우리 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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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inthemorning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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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교회 침례문 
저는 믿지 않는 가정의 일남 사녀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집근처 작은 교회가 늘 배경처럼 존재하고 있었지만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에 과자를 받으러 한두번 놀러간 기억 뿐, 교회는 저랑 전혀 상관없는 곳이었습니다.자식들 교육에 열정적이고 헌신적이었던 부모님과의 관계에 모가 많았던 저는 가정에서의 정서적 결핍을 친구를 통해 채웠는데, 그랬기에 시기별로 베스트프랜드는 언제나 저에게 가장 의미있는 관계였습니다.그러다 성인이 되어 그림작가로 일하던 중 짧지 않은 세월을 똘똘 뭉쳐 지낸 남자친구를 포함한 소수의 친구그룹에서 나머지 멤버들 모두에게 한 마음 한 뜻으로 갑자기 배제되는 일이 생겼습니다.함께 알던 사람들 중 다수도 그들에게 설득되어 하나둘 저를 배척하고 돌아서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동안은 몰랐던 관계의 이면과 사람의 가혹한 속성을 보았고 성인이 되어 겪은 이 일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아끼고 나름 인간관계를 잘한다고 자부해왔던 제 정체성을 무너뜨렸습니다.이를 벗어나기 위해 이런저런 서적들을 읽거나 이전에는 하지 않던 자극적인 경험들을 늘리며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려는 시도를 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비주류와 하위문화에서 미적가치를 추구하는 힙스터 예술계 지인들과 어울리며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진리이고 길인 다원주의적 사고관에 물들었습니다.하지만 처음에는 재밌고 매력적으로 보이던 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공허했고 무엇을 해도 누구를 만나도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이후 앞으로의 삶을 내외면적으로 철저히 혼자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고 그러기 위해선 의지할 종교 하나는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친구가 다니는 서울의 한 교회를 갔던 것이 제 신앙 여정의 첫걸음이었습니다.그 곳을 시작으로 몇몇 교회 설교를 통해 말씀에 노출이 됐지만 찬양을 포함한 교회문화와 크리스찬들과의 교제에 대한 부담으로 등록이나 소그룹모임은 피���습니다.하지만 제 안에 어릴때부터 있었던 진리를 향한 그리움은 간헐적으로 교회로 이끌었고 그 마음은 런던에서 지낼때 접하게 된 한 경건하고 보수적인 영국침례교회를 통해 깊어졌습니다.그 곳에서 믿음의 조건은 단순히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에 있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벗어나서는 죄인이며,예수님, 죄사함,구원이라는 복음의 핵심들을 듣게 되었습니다.그리고 선데이 크리스찬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그곳 크리스찬들의 구별된 삶과 인격을 보고 경외감이 생겨 어떻게 해야 거듭나는 것이며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 궁금했습니다.그러나 동시에 세상문화와 예술,동성애나 혼전순결등의 율법주의적인 해석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이런 억압이 개신교의 괴상한 배타성을 만든다고 생각했습니다.이런 저런 갈등에도 불구하고 저는 성경에서 다루는 도덕성에는 동의했고 어두운 시간동안 생긴 나쁜 습관들도 끊고싶어 처음부터 꾸준히 제게 복음을 전해주셨던 분의 권유로 그 곳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분에 대한 인간적인 감사함의 표현이었지 제 안에 구원에 대한 확신,천국에 대한 소망,내가 죄인이라는 회개도 없었기에 다시 돌아온 한국에선 교회없는 가나안 성도로 가끔 제 필요를 위한 기도를 드렸습니다.그러자 점점 하나마나한 기도에 대한 회의감으로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의심이 자라났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종교인데 일부 신실한 크리스찬들은 교회가 주입하는 세계관에 세뇌를 당했거나 종교를 통해 정신승리를 하는,그러니까 의지적으로 신이 있다는 쪽을 선택하고 거기에 삶을 배팅한 사람들이라고 여겨졌습니다.믿음에 대한 이런 불편함은 점점 불쾌 쪽으로 강화되었고 고민 끝에 그동안의 하나님을 알고자하는 모든 시도와 소망을 버리고 무신론자로 돌아섰습니다.그러나 주님은 저를 떠나지 않고 일년만에 들른 가까운 교회의 주일예배를 통해 찾아오셨습니다.그날 말씀은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구절이었는데 심령이 가난하고 한없이 낮아져 교회를 찾은 저에게 그 구절은 포근히 내려앉아 집으로 돌아가 기도를 드렸습니다.그동안의 기도와 다른 처음으로 제 본성의 타락함을 놓고 조용하고 깊은 기도를 한 시간 넘게 드렸던 것 같습니다.“주님,저는 과거의 그 일로 인한 피해자라고만 생각했고 남들에 비해 덜 세속적이라 스스로를 평가하며 살아왔습니다.그렇지만 전 제가 가진것에 감사할줄 몰랐습니다.저에게 감사할수 있는 능력을 주세요.“주님은 이 기도에 직접 찾아오셨습니다.다음날 꿈에서 가위에 눌리고 있던 저의 머리 위로 하늘이 열리면서 눈부신 빛과 함께 큰 영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이 내려왔습니다 “나와 함께하면 너는 두려울 것이 없다” 이사야서 41장 이 말씀이 계속 선포되어졌고 말씀이 제 영을 들어올려 데려간 곳은 다름아닌 교회였습니다.잠에서 깬 저는 놀랍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성경이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요한복음부터 다시 읽어보기 시작했습니다.그러자 전에는 잘 들어오지 않던 말씀이 돌아가신 내 아버지께서 남기신 편지라 생각하니 한 자 한 자 제대로 읽혔고 허무맹랑한 환타지같기만하던 예수님의 부활과 구원,심판,영생이 스폰지처럼 흡수되며 믿어졌습니다.로마서 3:28사람은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이 말씀대로 나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선물받고 빛이신 하나님과 대면하자,알던 죄 모르던 죄까지 포함하여 죄의 구덩이 속에서 빠져 살던 저에게 찾아와주셨다는 사실이 감격스럽고 감사했습니다.저는 수군거리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음란하고 우상숭배자요 용서하지 못하는 자요,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였습니다.넘기 힘든 벽이었던 동성애와 성경적 남녀관계까지도 창조주 하나님이 명백히 죄라고 명하셨기에 진리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자,왜 그렇게 정하셨는지 이해하는 쪽으로 변했는데 그것은 우리를 속박하고 정죄하는 율법이 아니라 자유케하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됐습니다.진짜 진리를 알게되자 제 마음에 세상 문화가 주입한 거짓에 영향받아 어둠에 거하는 특별히 연약한 청년들을 위해 아름다운 진리를 녹인 빛과 소금이 되는 컨텐츠를 만들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습니다.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영을 들어올려 교회로 인도하였던 뜻을 따라 교회를 가지 않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을 알고 지금까지 발만 조금 담그다 여차하면 떠나왔던 교회와는 달리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 나라의 제자로 사는 삶을 가르쳐줄 교회와 공동체를 기도로 진지하게 찾았습니다.그러던 중 유투브를 통해 고성준 목사님 설교를 듣게 되었고,명쾌하고 논리적인 설교에 하나님 말씀과 영적원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 수원하나교회에 지난해 겨울부터 출석하게 되었습니다.처음 왔을 때 꿈에서 본 교회와 흡사한,어두운 예배실 이미지에 신기했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먼저 믿고 신앙의 여정길을 걸어간 믿음의 많은 선배들과 하나님 나라를 알아가고 제자로서의 삶을 훈련해가는데 필요한 풍성한 프로그램등 주님이 저에게 딱 맞는 교회로 인도해주셨다고 느꼈습니다.그렇지만 처음해보는 교회 공동체에 적응하는 일은 내 안에 형성되어있던 사람들에 대한 보이지 않는 경계선들때문에 쉽지 않았고 또 응답없는 기도제목들들에 하나님 과연 믿을만하신가하는 두렵고 어려운 시간들도 보냈습니다.그러나 조금씩 주님은 공동체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기쁘게 순종하는 셀리더 윤영언니를 포함한 영적 선배들의 굴절없는 섬김을 통하여 알게모르게 교회라는 곳에서 느껴온 실망과 오해들을 회복시켜주셨고  대예배뿐 아니라 공동체 관계가 주는 나눔의 복을 조금씩 맛보아 알게 되었습니다.수양회때는 정죄감을 낳는 자기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라는 감동을 주신 후 그 무렵 준비해오던 작업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내가 원하는 때와 주님이 원하는 때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어 주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더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아직 돌파되고 성화되어야하는 제 삶과 인격의 많은 영역들이 있고 너무나 부족하지만 그 부분들 또한 주님께서 저를 통하여 세상에서 선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재료가 �� 것을 믿으며 감사함으로 침례를 받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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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inthemornin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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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그리스도를 기뻐하는 삶. 
내 자신은 알면 알수록 좋아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알면 알수록 좋아진다.
-박신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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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inthemornin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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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어찌되었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부정할 수가 없을거에요.”
9년 전 ,교회는 커녕 내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만 믿고 살던 시절에 겪었던 E라는 친구의 해결될 수 없던 우울증, 그리고 다른 양상으로 시작된 나의 광야시절, 그 후 또 다시 비슷한 모습을 한 C .
나는 C에게서  E를 떠올리며 과거 내가 그 애에게 남아있던 후회와 미안함으로 내 한계 안에서는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C의 불행의 사슬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마치 내가 나만의 불행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제각각 다른 모양의 불행의 고리를 엮어나가는 삶을 살아가는 닮은 꼴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잠시 위로가 되고 즐거움이 되어줄 수 있지만 해결이 되어줄 수가 없다.
이게 내가 느낀 한계였다. C를 마지막으로 만나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  알고 있었다. 
이 애의 삶은 앞으로도 쉽지 않겠구나. 
이따금 서로의 안부를 물어보고 “어 괜찮아 난 잘 지내 , 프레드릭과도 잘 지내고.”
하지만 그 아래로 흐르는 굳은 살 같은 반복되는 패턴은 쉽게 짐작되는 것이었다. 
C와 헤어지고 돌아온 내 삶도 못지 않게 괴로운 것이었다. 
왜 인간은 인간을 구원해주지 못하는가. 왜 패턴은 계속되는가.서로가 서로에게 사려깊게 해주었던 말들은 왜 실효성이 없을까,동력이 될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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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inthemornin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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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염 속에서 ,에어컨이 있어도 틀 수 없는 환경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다리는 것 뿐이다. 
하루는 평안에 있다가 다음날은 두려움과 근심으로 모든 소망과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까지. 여기까지일 수도 있다라는 그 벼랑끝에 서 있는 간절하고 위험한 곡예. 
바늘 구멍 크기의 빛이 있어야 걸어갈 수 있고, 바늘 구멍 크기만한  구멍이라도 숨을 쉴 수가 있으니 제발 그것이라도 내게 달라고 하나님께 비틀거리듯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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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inthemornin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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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찬은 위선적이다.
믿음없이 교회를 다니던 시기에도 여전히 크리스찬들 중에 위선적인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체감할 때가 있다. 
하지만 오늘 문득,크리스찬이 위선적일 수 밖에 없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내가 앞으로도 계속 위선적일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 
 나의 본성은 언제나 내 생각과 감정을 의지하기 쉽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어도  하나님이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지  구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내 생각과 감정이 옳은 것으로 착각하고 그것에 고집을 부리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께 구하고 여쭈면 전혀 다른 측면의 것을 보여주시면서 뜻하지 않게 내가 회개할 것이 있음을 알게 될 때가 있다. 그러니까 내 본성은 절대로 선에 이를 수 없지만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의 요구대로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그렇기에 내 자신만으로는  죽을때까지 선할 수 없는 존재라서 하나님과 연합하여야만 선한 흉내를 낼 수 있는 것이다.그래서 나 역시도 죽을 때까지 위선적인 삶을 살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해 선의 흉내라도 낼 수 있다면 위선을 포기한 삶보다는 나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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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inthemornin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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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21-23 
돌짝밭에 뿌린 씨는 이런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기쁘게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하고 말씀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진다. 
또 가시덤불 속에 뿌린 씨는 이런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막아,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런데 좋은 땅에 뿌린 씨는 말씀을 듣고서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데, 이 사람들이야말로 열매를 맺되,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결실을 낸다. 
마음에 되새기며 되새기며 묵상하는 초신자. 
현실적인 어려움과 혼자 작업을 준비해오면서 지속적으로 있어왔던 부딪힘들.아주 긴 시간이지만 급해서 소금물을 마셔서 목을 더 마르게 하느니 “자네 ,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계속 걸어다가보면 오아시스가 있다네.” 그 사막의 오아시스를 마시기 위해, 대단한 물이 아니어도 돌짝밭에 뿌려진 씨가 되는 작업을 위해 지금까지 계속 끌어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긴시간이 소요되어서 주변 사람들의 염려를 사고 있고 나도 종종 염려에 남몰래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럴 땐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지, 그 곳에 섰을 때는 오직 나와 하나님 밖에 모른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무엇을 할 수 없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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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inthemornin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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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신앙. 
나의 믿음이 어리다. 
나의 정욕과 욕심으로 하나님을 사용하려는 것이 아닐까. 
많은 사람이 아니라 단 한사람을 섬기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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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inthemornin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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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쓰는 영성일기이다. 
그림 작업 하느라 조용히 말씀을 읽거나 기도하는 시간을 빼먹고 작업하는 동안 찬송가를 듣거나 옥한흠 목사님 설교 영상을 틀어놓거나 주일과 수요일에 예배 참석하는 정도로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물론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기도 했다. 수작업으로 전환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 내내 찬양을 틀어놓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특히 테너 박종호의 시편 23편이라든가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이러한 찬양을 반복적으로 들으면서 , 하나님이 내가 그림을 그리고 이 일을 통해 하나님 지혜를 전하려는 마음을 기쁘게 받으시는구나 하는 확신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지치지도 않고 즐거웠다. 과거에 마감을 할 때는 어서 빨리 저 일을 해결하고 밖에 나가서 친구들을 만나거나 커피와 곁들여 조각 케잌을 먹고 싶다는 마음이 앞섰는데. 그러다보니 그림의 퀄리티는 떨어지고 마감은 다소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되었었다 . 이렇게 앞으로 나의 작업 생활에 대한 성찰을 하면서 과거로부터 교정되어야할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꾸준히 작업을 해갈 수 있을지 살펴보기도 했다. 하지만  작업의 위기에 봉착한 지점을 만났을 때  흑암속에서 헤매고 두려워하고 받은 은혜들이 사라지고 두려움과 근심이 그 자리에 찾아들었다.예배를 다녀와서는 신앙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참된 대화나 교제가 일어나지 않는 이 곳  교회 사람들과의 공허한 관계에서 에너지가 소모되고 마음은 다시 강팍해진다. 속으로 ‘너무나 형식적이지 않는가. 예배나 큐티에서 주님을 이야기하지만 삶에서 인격에서 주님으로부터 성화된 인격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신앙을 진실로 돌아보아야하지 않는가.? 오랜 교회생활을 통해 믿음이 있다고 관성적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신앙과 내면을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듯하다. 한두분 할머니를 제외하고는 .. ‘그리고 또  가족단위의 공동체에서 혼자라는 신분으로 부유하다보면 아무리 주님의 교회라고 해도  믿음이 의심스러운 일부의 사심이나 사게 되고, 그러한 자들을 피하려고 신경을 집중하다보면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아 지치게 된다. 즉 혼자서는 주님과의 관계가 주는 충만함에 빠져 있다가 교회에 갔다가 사람들과 있다보면 돌아와  에너지가 소진되어 깊고 긴 잠에 빠져드는 현상이 종종 일어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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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inthemornin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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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마가 11: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가 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고난주간의 새벽예배. 일주일간 빠뜨리고 갈 수 없었는데 오늘 말씀이 꼭 나에게 하는 말처럼 박혔다. 내 욕심이나 계획보다 하나님의 때를 믿고 기다리며 그 때까지 나를 하나님 앞에 잘 준비시키고 마땅히 해야할 것들을 하며 인내하는 것이 성도인 내가 해야할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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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inthemornin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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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가지 꿈.
꿈에서 하나님이 써준 메모를 펼치니 거기에 
하나님은 곧 하나님의 말씀,즉 성경으로 역사한다. 
라고 쓰여있었다. 
그런 후 다시 든 꿈에선 현실에 당면한 고민거리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영적 전쟁처럼 내게는 두가지의 상태가 있다.
구원 받은 성도로써 옳은 길을 가고자 하는 마음과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죄책감과 일의 성패에 대한 두려움과 조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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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inthemornin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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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6:4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첨예한 바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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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inthemornin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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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의 내 모습이 정말 부끄럽게 느껴진다. 내가 했던 기도 내용들도. 
런던 교회를 다니면서 가졌던 크리스찬과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이나 반항심들.
불과 몇개월 전까지의 내 모습조차. 
속에 은밀히 자행되어오던 불의한 생각과 감정, 그리고 일상의 어떤 습관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고착화되어 있던 나의 악한 캐릭터성. 
또한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악한 나. 
그런 것을 ‘인간적'이라는 표현으로 뭉뚱거려 아끼고 사랑했던 모습마저 있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선한 양심과 사탄이 유혹하는 악하고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측면이 공존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그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악한 면을 너무나 안타까워하셨다. 작가가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작업의 에센스를 중간에 디자이너나 편집자가 교묘히 다르게 편집하고  작품을 내놓았다면 그걸 알고 가만히 있을 작가가 있을까. 어떤 불편과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원래의 것을 지키기 위해 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듯이, 우리를 새나 고양이, 개, 사자보다도 더 아름답고 고결하게 만든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미혹으로 하나님의 작품인 인간 안에 자기 의, 세상 정욕,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앙이 새어 들어가 그 결과 인간 스스로도 거짓된 만족감과 성취감에 미혹되어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세상의 짐을 지고 사는 모습을 보고 가만히 계실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들을 인간의 모습으로 하고 이 땅에 보내고 ,그를 죽임으로 인간의 죄를 사해주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에서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우리가 사는 가시적이고 한정적인 세계와는 차원이 다른 곳이기에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인 2000년 전의 그 역사적인 사실이 현재에까지 유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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