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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할 공동체를 위한 아카이브
이것은 동물의 역사가 아니다. 그러한 작업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이것은 동물에 대한 인간적 태도의 역사이다.
- 『Representing Animals』, Nigel lothfels
예술이 타자들을 다루는 시도는 언제나 어렵고 조심스럽다. 그중에서도 인간human이 아닌 비인간non-human을 소재로 할 때는 특수한 어려움이 있다. 그들은 언어를 갖지 못하기에 서사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비둘기그라피 : 낭만적 상징에서 바이오포비아까지’는 비둘기라는 동물 자체가 아닌 비둘기에 대한 인간적 태도의 역사적 보고이다.
오늘날 비둘기가 갖는 혐오적 속성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상 기원전부터 수천 년 동안 그들은 낭만적인 동물로 인식되었다. 예술사 속에서도 그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데. 중세시대 이콘화에서는 비둘기가 성령의 상징으로 등장하고 빅토리아 시대에는 귀족들의 애완동물로 그려진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도시 개발을 둘러싼 물질주의의 심화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도시개발 이후 인간은 비둘기와 공생하기 어려운 환경에 놓이게 되었고. 그동안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수집 및 사육하면서 개체 수를 증식시킨 그들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도시인들이 소유한 땅의 자본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욕망을 키워가는 가운데, 거처를 잃은 비둘기들은 공해에 오염된 채 도시 곳곳을 떠돌면서 혐오 동물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번 전시는 비둘기에 대한 인식이 이처럼 인간 중심적 사고에 따라 변화해 온 과정을 낭만기-과도기-혐오기–그리고, 미래로 나누고, 시대별 자료와 동시대 시각예술 및 문학 작가들의 작업을 통해 돌아볼 것이다.
낭만기에서 박지나는 언어를 활용한 기존 작업의 연장선에서 본래 자유로운 동물이었던 비둘기가 행하는 가상의 발화를 설치와 영상 작업으로 선보인다. (설명 추가 예정) 조상은 목재를 활용한 설치와 드로잉으로 도시화 이전, 비둘기와 인간이 자연스럽게 공생하던 시기의 장��성을 환기할 것이다. (설명 추가 예정)이어지는 과도기에서 노현탁의 회화는, 비둘기가 갖는 평화의 상징이 점차 와해 되어가는 과정을 한국 사회의 도시개발 시기와 더불어 시사한다. (설명 추가 예정) 혐오기에서는 오늘날 도심 속 조류가 겪는 윈도우 킬(window kill) 상황을 재현한 이한나의 3채널 핸드드로잉 애니메이션, 비둘기에 대한 사회적 혐오가 드러나는 법령 및 환경연구 등의 사료들을 살펴볼 수 있다. (설명 추가 예정)
비둘기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낭만에서 혐오로 이행하는 위 과정은, 전자에 대한 후자의 윤리적 반성을 촉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질문해본다. 오늘날, 비둘기를 타자로 혐오하는 우리는 과연 인간적인가? 비인간적인가? 인간과 자연, 동물 등을 이분법적으로 구별한 부작용으로 인류세가 논란이 되는 현대 사회에 필요한 것은 휴머니즘humanism(애니멀리즘animalism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우리가 평소 이해하는)이 아니라 이분법적 사고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해체하려는 시도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그의 저서 『열림The open』에서 인간이 동물이라는 타자를 생성하고 배제하는 이 원리를 인류학적 기계anthropological machine라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 속에서 인간은 동물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모호한 경계에 놓여 그들을 혐오하기도 하고 스스로 그들이 되기도 한다. 다른 저서 『호모 사케르homo sacre』에서 아감벤은 법의 보호 바깥에서 정처 없이 떠도는 인간을 ‘벌거벗은 생명’이라고 칭하는데, 이들은 사회에 무용한 존재로 생명을 위협받는다는 점에서 현재 비둘기라는 동물-타자와 다르지 않다.
일부 게르만 및 앵글로색슨 사료들은 추방된 자를 늑대인간으로 규정함으로써 그가 처한 극한적 상황을 강조한다. … 추방된 자의 삶은 … 짐승과 인간, 퓌시스와 노모스, 배제와 포함 사이의 비식역별이자 이행의 경계선이다. (『Homo sacre』 214-215)”
아감벤이 위 구절에서 언급한 늑대인간의 예시를 확장하여 적용하면, 인간은 생물학적 비둘기가 될 수 없지만 언제든 사회적인 비둘기(와 같은 취급을 받는 인간)가 될 가능성이 있다. 비둘기그라피를 그려보는 행위는 따라서 인간과 ‘별개’인 동물을 위한 반성에서 나아가 인간을 ‘포함’한 생명의 범주living-being에서 더 나은 공동체의 기준을 정립하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미래 영역에서 조이스 진의 회화에는 유년기 아이들이 순수한 시각으로 도시 속 동물들과 교감하는 장면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특히 죽은 비둘기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아이는 사회가 형성되기 이전의 인간과 비둘기의 관계��을 환기한다. 아감벤 또한 이처럼 ‘벌거벗은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미래의 대안으로 우리가 인류학적 기계anthropological machine를 오작동시키며 법이 세워지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 새로운 공동체를 구상해볼 것을 주장한다. 다소 추상적으로 ��이며 물리적으로는 회귀 불가능한, 이 시공간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지, 이우성과 원성은의 글 작업은 각각 유토피아 그리고 디스토피아적인 포스트-비둘기그라피로 구체화할 것이다. 기계 작동이 멈춘 뒤 열린 공간에서 도래할 공동체를 상상하는 일 – 과거/미래, 인간/동물, 환대/혐오라는 낡은 구분들을 중첩하고 백지화시키며 - 지금, 예술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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