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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동료들과 술을 걸치고 집에 가는 길, 귀에 꽂은 에어팟에서 그동안 제대로 듣지 못했던 가사가 또렷이 들린다. 몸에 흐르는 알코올이 흘러가는 소리 하나하나 붙들어 매고 귀를 가까이 대는 모양이지. 이래서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술의 힘을 빌려 취중 진담이라는 말을 하는구나, 깨닫는다. 생전 들어오지 않던 텀블러에 접속하여 영양가 하나 없는 글을 끄적이는 주제에 술이 ��� 깬 다음 날에 이 글을 부끄러워하며 지우지 않기를 바라본다. 보고 싶은 얼굴에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 던지지 못하는 주제에 아무도 안 보는 텀블러에 글 하나 ���기는 게 뭐 대수라고. 그렇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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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던진 공이 있다 당신이 다시 던져줄 거라 믿었던 우주의 악력이 나를 꽉 쥔 것처럼 뜻없이 숨이 막힐 때 생각한다 팽팽한 이 당김이 당신이 눈을 뜬 순간의 아득함은 아닐까 잠시 잊었다는 듯 공을 주워들고 어깨를 뒤로 확 젖히는 때는 아닐까 걸어도 소모되지 않는 것들이 있어 갈 데까지 가보자 끝없이 가보지만 밤의 버스엔 행성의 궤도에 몸을 얹은 사람들 이 버스의 종점과 종점을 우주의 당신과 나라고 그래서 어쩌면 영영 만나지 못할 거라고 일찍 절망해버린 건 아닐까 너무도 단순해서 너무도 복잡한 관계의 어떤 공식 앞에서 울고 있는 건 아닐까 어느 날 산을 오를 때 씨앗 하나 날아와 가슴에서 움을 트고 자라기 시작했지 뿌리가 심장을 파고들 때 병명이 없는 병을 앓으며 산 정상에서 보았지 어떤 존재의 울림이 천지를 흔드는 것 저 북해의 물결이 솟구쳤다 ��어지는 까닭은 우리가 만나 울었던 어떤 한순간의 감정 때문일까 우주의 고아가 앉아 있는 지구의 이 골목 모퉁이는 어떤 사랑이 떠난 후의 자리일까 살갗 위에서 녹는 이 눈송이는 언제쯤의 당신일까 가쁜 숨결만이 전부인 날 사람들이 공원에서 자꾸만 공을 던진다 -정영, <오지 않는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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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좋아하는 글 쓰는 일이 많이 줄었다 하더라도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글을 써줘 친구야. 내가 읽지 못하는 어딘가에서 너의 글을 쓰고 있을 것 같긴 하지만, 혹시나 해서. 난 네가 쓴 거 다 좋아했으니까. 아 읽고 싶다. 내 친구가 쓴 글/ 며칠 전 친구에게 받은 메시지다. 글을 쓰는 일, 내 감정을 글로 표현하는 일. 예전에는 너무도 당연하고 쉬운 일이었다. 누군가 읽어주길 바라서가 아니라, 제멋대로 엉켜버린 머릿속과 파도치는 마음을 정리하기에 이보다 좋은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감성이라는 단어에 조롱의 의미가 담기기 시작하고, 감정 과잉이 촌스럽게 여겨지기 시작하면서부터 글 쓰는 게 어색해졌다. 감정이 뚝 뚝 흐르는 글에 부담을 느끼고, 필자의 심리를 멋대로 추측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다. 글 쓰는 걸 일상으로, 업으로 삼았던 사람으로서 할 행동이 아니었다는 반성을 뒤늦게 하며 지금 이 글을 쓴다. 오늘부터 다시 생각이 깊어짐을 두려워하지 않고, 매 순간 글감을 찾아보려고 한다. 나 하고 싶은 말만 잔뜩 내뱉는 이 텀블러를 꾸준히 봐주는 사람들과 글 쓰는 그 자체를 좋아했던 나를 위해 자유롭게 써볼 계획이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그래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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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 여기 하늘엔 네가 어릴 때 바닷가에서 주웠던 소라 껍데기가 떠 있어 거기선 네가 좋아하는 슬픈 노래가 마치 먹치마처럼 밤 푸른 빛으로 너울대 그리고 여기 하늘에선 누군가의 목소리가 날마다 찾아와 안부를 물어 있잖아, 잘 있어? 너를 기다린다고, 네가 그립다고 누군가는 너를 다정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너를 매정하다고 해 날마다 하늘 해안 저편엔 콜라병에 담긴 너를 향한 음성 메일들이 밀려와 여기 하늘엔 스크랩된 네 사진도 있는 걸 너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있어 그런데 누가 넌지 모르겠어 누가 너니? 있잖아, 잘 있어? 네가 쓰다 지운 메일들이 오로라를 타고 이곳 하늘을 지나가 누군가 열없이 너에게 고백하던 날이 지나가 너의 포옹이 지나가 겁이 난다는 너의 말이 지나가 너의 사진이 지나가 너는 파티용 동물 모자를 쓰고 눈물을 씻고 있더라 눈 밑이 검어져서는 야윈 그늘로 웃고 있더라 네 웃음에 나는 부레를 잃은 인어처럼 숨이 막혀 이제 네가 누군지 알겠어 있잖아, 잘 있어? 네가 쓰다 지운 울음 자국들이 오로라로 빛나는 바보야,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 -장이지, <명왕성에서 온 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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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녹음으로 무성한 길을 부지런히 걸었다. 오래오래 숨이 차오를 정도로. 둘이 걷는다는 기쁨에 어질어질 현기증을 느끼면서. -요시모토 바나나, <하치의 마지막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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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처럼 겁이 많고 더디지 않다면, 한눈에 널 알아볼 수 있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의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테고. 그러니 혼자 그리워한 시간이 이토록 길었다 한들, 그 시간이 무슨 힘이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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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한 번씩 연락할 때마다 예쁘다는 말을 인사처럼 건네는 사람이 있다. 칭찬하는 건 익숙해도 받는 건 영 어색해서 일부러 말을 돌리곤 했지만, 내심 그 말이 참 고마웠다. 흔한 만큼 더 쉽게 건네지 못하는 말을, 매번 다르게 해주는 그 마음이 더 예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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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같이 또 반대 방향에서 버스를 탄 덕분에 오랜만에 육교에 올랐다. 삶이 서글프게 여겨지던 때, 살았던 동네에는 이보다 더 높은 육교가 있었다. 인적 드문 밤, 괜히 그곳에 올라 한참을 서 있곤 했다. 이센스의 ‘독’, 9와 숫자들의 '유예’, 넬의 '현실의 현실’, 에픽하이의 '알고 보니’를 들으면서. 그리고 꾸역꾸역 집까지 걸어가서 방문을 등지고 앉아 펑펑 울었다. 신발 한 짝 벗지 못한 채였다. 모든 게 내 탓 같았던 스물다섯을 지나 어느새 서른을 앞두고 있지만, 상황은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 육교를 오르거나 주저앉아 우는 일은 없으니 조금은 성장했다고 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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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돈은 자연히 따라오는 거라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아직은 현실보다 꿈을 더 크게 생각하고 싶다. 다시 무너질까 봐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두어 번 일을 그만두었고, 사람이 무서워 햇빛을 못 보고 산 적도 있다. 그래도 아직은 더 해보고 싶다. 나 자신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싶다. 이상과 전혀 다른 길을 걸을 바에는 차라리 헤매는 편이 낫지 않을까. 직업을 적는 칸에 망설이지 않고 당당하게 적을 수 있다면, 지금의 안정을 포기할 이유는 충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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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린 만큼, 더'를 들으며 걷는데 민들레 씨가 날아들었다. /그대는 내가 불쌍한가요. 어떻게든 그대 곁에 남아있고 싶은 게. /지치지 않고 슬퍼할 수 있게 나를 좀 더 가까이 둬요. 사실 난 지금 기다린 만큼 더 기다릴 수 있지만 왠지 난 지금 이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일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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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마법사 레미가 되고 싶던 초딩 시절, “요술봉 사줄까?” 라는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집에 돌아와서는 오랫동안 후회했다. 그 당시 친척 어른은 내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사주고 싶어서 일부러 물어보셨을 텐데 - 한창 이것저것 사 달라고 떼쓸 나이었으니까. 하지만 낯을 무척 가리는 나는 그 말이 쑥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사줄까? 라고 묻지 말고 그냥 사줬다면 분명 요술봉은 내 몸의 일부가 되었을 거다. 어른이 된 지금도 갖고 싶다고 말하는 게 참 쑥스럽다. 가질 수 없다는 판단이 들면 애착을 없애고자 더욱 쿨한 척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제는 원하는 걸 말하면서 목소리까지 떨리고 말았다. 이대로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마저 일종의 자기 위안이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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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카페에 앉아 네 생각을 했다. 모든 과거를 부정하며 살아왔는데 어째서 너와의 기억은 이토록 애틋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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