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換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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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zn.wo.to의 부활. 아 그런 것이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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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ptogun ·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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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국+음모론 관련"
어젯밤에는 "더카르텔"인지 뭔지 하는 영상을 기어코 좀 봤다 사실 초반 30분쯤에서 더 못 버티겠어서 중간을 건너뛰고 끝을 조금 보고 꺼야 했다 이런걸 왜 봤냐면.. 이 영상물이 배양한 "음모론자"들이 엊그제 밤에 기어코 폭민으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이나라 부정선거 음모론에는 "믿음의 선배들"이 있다. 딴지일보 진영이 그들이다. "K값" 기억하시는지? 사실 나도 이명박-박근혜 사이 어딘가의 총선 국면에서 '와 저 개표소는 확실히 이상하다' 싶었던 개표소를 오밤중에 쫓아가본 일이 있다. 지금에 와서는 그야말로 흑역사다. 아마 김어준에게도 그럴 것이다. 돌이켜 보면, 선거만 무탈히 끝내고 퇴근하고 싶어할 게 뻔한 철밥통 선관위가 자기 업무에 구태여 조작을 가하고 그걸로 정권을 쥐고 어쩌고 할 동기가 어디 있으며, 있다 한들 그 일관성과 치밀성은 또 왜 이렇게 부족하냐 말이지.
<더 플랜>은 부정선거 음모론 관련 "모두가꼭봐야할뭐시기"치고는 그나마 미디어콘텐츠로서의 최소 소양을 갖췄었다. 최소한 '주장'을 따라갈 수는 있다. '흠 그런게 있구나 근데 그게 이렇고 그래? 그러면 니말대로 정말 그럴수도 있긴 하겠구나?' 하는, 최소한의 수사법 말이지. 그 과정이, 아전인수이긴 할지언정, 완전 처음 온 손님을 당황시키지는 않는 전개였다.
<왜: 더 카르텔>은 정반대다. 따라오지 않는 사람을 전부 버리고 가면서 "이 영상은 부잘알[부정선거 잘알의 줄임말이라며 영상이 소개한다]들에게는 유명한 영상입니다", "아무래도 집 근처에서 사전투표를 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점을 감안할 때" 따위를 논지전개랍시고 늘어놓는다. 나야말로 설득될 마음의 채비를 조금 먹고 영상을 틀었는데 초반 30분 내내 "엥? 엥? 엥? 엥? 엥?" 하다가 지쳐서 빨리감기 돌리고 말았으니 말이지.
요컨대 <왜: 더 카르텔>은 정훈자료로서 기능한다. 비전투원을 대상으로 한 콘텐츠가 아니고, 이미 전투를 다짐한 신병들을 오리엔티어링하는 군용 영상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모든 아귀가 들어맞는다. 빨간 글씨와 검은 배경으로 일관하는 그래픽부터, "증거"와 "팩트"들을 한줄로 꿰는 정리 작업 없이 그저 하나라도 더 군장에 챙겨주려는 듯이 꾸역꾸역 들이미는 화법에 이르기까지.
이쯤에서 문득 음모론에 대한 내 생각이 조금 이상해지고 만다. 음모론은, 사회에 팩트의 보급이 부족해서 세력화하는 게 아니다. 실상은 반대다. "팩트"가 너무 많을 때, 팩트를 엮는 방법이 너무 많아서 누구든지 보고 싶어하는 것을 볼 방법이 얼마든지 있게 될 때 음모론은 비로소 세를 얻을 수 있다.
투표용지가 이미 기표된 것치고는 지나치게 빳빳할 수는 있다. 어떤 선거구에서 무슨 숫자들의 아스키 코드를 얻어봤더니 "follow_the_party"라는 문자열이 나올 수는 있다. 그런데, 여기에 대고 "그런데 그게 어쨌단 말인가?" 하고 일축할 수 있어야 한다. 개연성 없는 무작위적 일화들을 개연성 없는 무작위적 일화로 간주할 수 없을 때, 그 설명의 진공을 채우는 것은 암흑물질뿐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현실에서 너무 많이 동떨어진 다른 것을 보고 싶어한다. 이명박근혜 시절 딴지일보의 경우 민주당이 집권할 수도 있었던 시대를 그토록 보고 싶어해서 무리수를 두어 가며 영상을 만들고 "음모론"을 퍼뜨렸다. 지금 와서 보면 그건 차라리 자위용 망상 정도의 나쁨만 있었지 싶다 실제로 "범진보"에서 잘 '먹금'해서 버려졌거든. 근데 그 이후로 진화한 "음모론공작"은 어떤가? 정신 교육으로 전투 준비를 시켰고 실제로 난투를 일으켰잖은가?
늘 그렇듯이 결론은 안 나는데.. 암튼 이 "음모론"조차도 좀더 심도 있는 통찰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낀다. 제대로 된 사회라면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고 있어?' 하고 일축하고 넘어가는 그런 게 있어야 하는데, 자꾸 그런 게 없어져 간다. "지구평평이"는 웃기기라도 하지 선거제도며 사법체계를 어떻게 해버리자는 소리에까지 "그런가? 찬반논란이 끊이지 않습니다" 따위 소리를 할 일인가? 혹시 어쩌면 <더 플랜>이 "반드시꼭봐야할영화" 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기어코 <왜: 더 카르텔>따위마저 "반드시꼭봐야할영화"의 위상을 탈취해 "대통령"의 대가리 속까지 해킹하고 말았던 것일까? 대책은 없고 걱정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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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ptogun · 6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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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상
진짜 옛날 소싯적에 이상한 코미디 소설 연재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말하자면 <GTO>를 읽지 않고 영향받아서 쓴 <GTO> 짭이었는데, 제 1화는 선생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 선생으로 발령 나는 대목이고, 중학교 2학년생이던 당시 나는 그 1화에 제목을 붙이기를 국상(國喪)이라고 붙였었다. 모르긴 몰라도 누구 한 명 인생 조지기 시작하는 꼴을 자못 엄숙하게 애도해 주면 좀 웃길 거라고 생각했는가 보다. 아니면 뭐 당시 저 어휘를 이제 막 배워 써먹어보고 싶었던 거거나.
그 따분하게 이상했던 소싯적의 드립이, 나라가 초상집이 되고 보니 새삼 다시 기억난다. 오늘날 여기는 말이 국가[國家]지 실은 상갓집[喪家]이다. 그게 벌써 이틀 전이고, 2주기가 넘었고, 11년째에 접어들고 있고, 44년이 지났고, 74년이 넘어 간다. 이 장례들 중 정말로 탈상한 것은 하나도 없다. 새삼 왜 이렇게 배운 데 없이 야만적인가 싶어진다. 상갓집이라니? 이 국가는 상가[商家]에 더 가깝지 않은가? 누가 팔자에도 없이 안전벨트를 맨 채로 죽건 말건 서로가 서로에게 밟혀 죽건 수학 여행을 가다가 빠져 죽건 조작된 내란의 희생 제물로 죽건 대리된 이념 전쟁의 대리된 적으로 몰려 '골'로 가 죽건 아랑곳 없이, 그저 돈, 주식, 부동산, 비트코인, 경매, 로또, 유튜브, 바다이야기, 돈, 돈, 돈 하면서 여기까지 왔지 않은가? 그건 모두 고스란히 오직 하나, 이 나라가 그 어느 상도 제대로 탈상해 본 적이 없고 어딘가에서는 곡 소리와 향불이 올라가고 있다는 그 수치스러운 현실을 잊기 위해 장례식장 식당에서 구태여 과장된 몸짓으로 빽빽 울며 젖혀 넘기던 폭탄주일 뿐이었지 않나?
한 사람이 죽을 때가 되어 죽으면 대략 3~5일간 상을 치른다. 그 정도가 마땅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굴곡진 세월을 그래도 몇십 년을 살았으면, 다른 사람들이 그 정도는 아까워해 주고 울어 주고 흙으로 잘 돌아가라고 배웅해 줄 만하다는 것이 이 나라 사람들의 교양이다. 그 교양은 2024년 12월 31일의 한국에서 다른 질문으로 이어진다. 한 기업의 탐욕적인 비행기 운용 때문에 179명이 팔자에도 없이 죽으면 그건 며칠 상을 치러야 하는가? 행정부가 국민들의 축제 생활에 무관심한 댓가로 159명의 젊은이들이 노상 횡사를 하면 그건 며칠 상을 치러야 마땅한가? 이미 한 국가의 수반인 자가 친위 쿠데타를 벌이면 그건 대체 며칠간 분노하고 추궁하고 애도해야 마무리되는 일인가? 우리는 다시 기어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생각인가? 또 새 폭탄주를 말아 "팝업스토어"나 띄우면서 눈을 돌리고 자기 일이 아닐 동안 힘껏 잊어버릴 생각인가? 그렇게 슬픔과 수치를 잊고 다시 들추고 다시 잊고 다시 들추기를 반복할 것인가? 그러지 말자고 있는 게 장례 아니었는가? 그냥 치를 만치 상을 치르고 울 만치 울고 끝낼 수는 없는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고? 우리가 정말 그 굿을 시작한 적이나 있긴 있고?
이 국가는 국상 하나를 제대로 못 치르는 나라인가? 이러고도 이게 나라인가? 지금 이 초상집 분위기가 국상의 분위기임을, 그러므로 지금 할 일이란 온 나라가 다함께 상여를 메고 만장을 들고 곡을 ���는 것이라는 눈치는 차리고 있을까? 아니면 정말로 다들 그저 술이나 홀짝거리면서 '이 뻘쭘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빨리 끝나기를, 그래서 얼른 예복을 벗어던지고 "생업에 종사"하러 돌아가기만을 말없이 초조히 기다리고 있을까? 다른 것보다 그게 너무 창피하다. 다들 국상이라는 게 뭔지 그런 게 있는지 모르는 건가? 2000년대 초반의 한 중학생도 그런 게 있다고 들어는 봐서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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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ptogun · 9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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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를 잘못해서 보풀이 묻었는데
빨래를 잘못해서 보풀이 묻었는데 집에 보풀 제거기가 없었다. 별수없이 박스테이프를 꺼내 손으로 한 톨 한 톨 뜯어내다가, 그 티셔츠가 무슨 티셔츠였는지를 잠시 곰곰이 들여다본다. 명절에 동그랑땡 부치다가 읽는 신문 기사처럼, 그 활자 하나하나 역시 유난히 선명히 뜻깊게 읽힌다.
캠퍼스워십. 당신을 예배하기 위해 우리는 살아갑니다. YWAM: 하나님을 알고 그를 알리자.
그걸 몇 번이고 위로 아래로 다 읽고 그쪽 면 보풀을 다 뜯고 티셔츠를 뒤집어 다른 쪽 보풀을 뜯으려던 찰나에, 무심코 생각하고 말았다. 그간 참 의미를 너무 많이 부여해 왔다고. 나도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까 그냥 처음부터 천천히 생각 나는 대로 풀어보고자 한다.
Tumblr media
나는 내가 YWAMer임이 자랑스러운 편이다. 한국예수전도단 서울대학사역은, 내가 아는 기독교 선교 단체 중에서는 가장 건전하게 재미있고 감정 친화적이면서도 행동과 메시지가 급진적이어서, 정확히 20대의 날 위한 곳이었다. 신사도운동 문턱을 간신히 안 넘은 리추얼이며 "마음이 어렵다", '정서가 막힌다/풀린다" 같은 사투리가 있(었)고, 당시 "캠워"는 심형진 간사님이 현역이었으며, 매년 도대체 어디서 났는지 알 수 없는 돈을 "재정싸움"으로 모은 대학생들이 전세계로 1달간 떠난다. 나도 그 '해외전도여행' 프로그램 덕에 도대체 어떻게 모았는지 알 수 없는 돈을 모아서 대만으로 싱가폴로 말레이시아로 필리핀으로 다녀본 적이 있다. 심지어 2012년의 "필-싱-말" 전도여행 팀에게는 특별한 사명이 붙어 있었다. 그 나라에서 대학 사역을 창설할 수 있겠는지 조사하라! 팀은 설문지와 볼펜을 한무더기 싸들고 그 "사역지"에 가서 그걸 전부 다 쓰고 왔다. 그 여행은 참말 그보다 더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중차대한 미션이었다.
헌데 정작 나는 겉돌고 있었다. '중보기도 job'이었던 내가 어디 갈 때마다 "이곳을 위해서 축복하시면서 기도하십시다"라고 하면 모두가 정말로 그걸 위해 기도하면서 각자 비전을 보았는데, 나는 비전은커녕 주어진 세상을 보느라 바빴던 것이다. 이를테면, 노선 안내가 안 붙어 있는 지프니를 용케 골라잡아 집으로 가는 필리핀 사람들, 똑같은 세제와 똑같은 과자를 파는 똑같은 판잣집 점빵이 한 마을에 몇 개고 몇십 개고 줄줄이 늘어선 흙길 골목, 비와 더위의 문제를 에어컨과 쇼핑몰로 해결해 버린 싱가포르, 밥을 집에서 해먹지 않고 사서 먹는 사람들, 겉보기엔 이게 대학이냐 싶은 곳에서도 어엿한 대학생으로 멋있게 성장하고 있던 히잡을 두른 대학생들, 아무리 봐도 새 "미션스쿨"이 필요한 것 같진 않은 민다나오 섬 어딘가의 논밭, 가도 가도 야자나무뿐인 "조호르바하루"의 고속도로, 이런 곳에서 살면 정말 세상 만사 다 몰라도 좋겠구나 싶던 "페낭"의 아찔하게 아름다운 해변 석양 같은 것들.
그건 그 자체가 굉장한 광경, 관찰, 감상, 경험이었을지는 모르되, 그 여행의 의의와 의미에서는 가장 동떨어져 있던 것들이다. 오죽하면 개인적인 사진도 변변히 안 찍었겠는가. 하지만 그 시간들은 이상하게도 그 이후 내 삶 내내 내 마음 속 어딘가에서 자기 주장을 해 온 시간들이기도 했다. 아니지 실은 오히려 반대다. 그 여행에서 내게 남은 것은 그렇게 딴청 피우며 뜻없이 맛봐 둔 멋적은 순간들이었지, 그 설문지며 그 미션 등등이 아니었다. 사실 "선교보고회" 이후로 이 여행의 미션의 성과를 서울대학사역이 어떻게 활용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건 일단 9명쯤 되는 2030 남녀들을 한 달간 타지에 "비전트립" 보낼 구실이긴 했는데, 그밖에 부여된 그 숱한 의의들, 거창한 의미들은 과연 그 트립과 정말 관계가 있었을까? 모르는 일이지.
의미가 부여된다고 해서, 의의가 있다고 해서 그게 꼭 달성되고 꼭 성취돼야만 하는 것은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좀 안 맞는 사례지만 지금 내가 보풀 떼고 있는 이 티셔츠가 꼭 그렇다. 나로서는 이 빨래에 이런 의미를 부여했었다. 이 티셔츠를 빤다. 그리고 최근에 새로 산 목욕용 전신타올도 같이 빤다. 그래서 두 세탁물의 세탁을 한번에 끝낸다. 그걸 성취하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 잘 될 줄 알았다. 결과는, 뭐 세탁 자체는 되었는데, 좀 잘 안 됐다. 뭐 실은 좀 안 된 정도가 아니지 그러니까 오밤중에 팔자에도 없는 한 시간을 써서 티셔츠 두 장, 바지 한 장을 앞뒤로 안팎으로 뒤집어 가며 보풀을 뜯고 앉았겠지. 돌이켜 보면 이 꼴이 나는 게 당연했다. 모든 어른들이 "수건/걸레는 옷이랑 빠는 거 아니다" 하시던 게, 이제서야, 이해까지는 안 되더라도, 수용은 된다고 할까.
의미를 부여하는 일과 의미를 성취하는 일을 서로 다른 것으로 간주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무엇보다도,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 자체가 좀 얼레벌레이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에 안 맞는 의의였을 수가 있고, 될성부르지 않을 수 있으며, 성취가 된다 한들 정말 후손과 후속 조치에 도움이 되는지도 보장이 안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좀더 성숙한 태도는, 일단 의의를 부여할 때는 하고, 그걸 성취하려고 노력할 때는 하더라도, '이게 다 애초부터 글렀을 수도 있었겠다' 하는 걸 명심하면서, 너무 많은 기대나 너무 큰 자부심이나 너무 개인적인 사연을 가지지 않으려고 의식하는 태도일 것이다.
좀 실천적인 적용을 해서 구체적인 교훈을 찾아 보자면.. 내 직업은 어찌 보면 코드베이스 여기저기에 의의와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기도 하다. 지금 회사에서 관리하고 있는 소스는 그런 게 너무 부족한 게 흠이다. 물론 지금 당장 굴러가는 뭔가를 만들자면야 "싸공"과 덕테이프만큼 좋은 것은 없다. 하지만 뭐가 어떤 원리로 왜 그렇게 작동(해야 )하는지 모르는 물건을 만들면 그건 만든 사람만 손해이므로, 컴퓨터공학을 포함한 모든 공학은 필연적으로 이런저런 목적과 설계의도가 부여된 이런저런 컴포넌트 개념을 도입하면서 의의와 의미를 찾고 만들고 부여하며 그걸 성취하(게 하)려고 무진 애쓴다. 나 역시 그렇다.
특히 최근 2주는 새 기능 하나를 구현하면서 없던 싸움을 스스로에게 걸어 개싸움을 한 1인 그림자 복싱의 시간이었다. "스케줄"이란 "행"의 나열이고, 행이란 특정 날짜 특정 시간에 시작하는 "예약"들을 "테이블" 정보와 함께 갖는 자료이고, 예약이란 이런저런 데이터의 집합이고, 테이블이란 이런저런 데이터를 받아서 이런저런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요소이고... 나 스스로도 이걸 정확히 12영업일 안에 해냈다는 게 믿기지 않는데 심지어 잘 모르는 Promise chain이며 평생 다시 볼 일 없을 줄 알았던 (심지어 일제인) jQuery 플러그인까지 붙잡고 싸워야 했다. 결과적으로 마감을 지켰고, 추가된 라인의 수에 비하면 결함이나 블랙박스도 없는 편이며, 겉보기에도 잘 작동한다. 그런데, 내가 짠 코드에 내가 한껏 흐뭇해하고 나니,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었나..?'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드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 생각을 애써 부정했다. "아니지 이게 맞지 솔직히 이렇게 안 짰으면 다른 코드처럼 이쪽에 d-none 클래스 붙어있는지 봐서 있으면 저쪽에 data-foo 값 읽어 붙여넣고 뭐 클릭될 때마다 뭐 하고 이 클릭 후에 저 클릭할 땐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if else 지루박 탔지 않았겠어? 어차피 지루박일 거 내가 잡은 방향은 옳았어, 이제 와서 돌아갈 것도 아니고." 그런데, 망친 빨랫감의 수북한 보풀을 한 톨 한 톨 눈으로 확인하고 뜯기를 반복하면서는, 조금 생각이 바뀐다. "지금은 이게 옳았는데, 아무래도 조금 지나면 그렇게까지 옳지는 않은 일이 되겠지. 더 지나면 틀렸던 게 되겠지 아니면 쓸데없이 과했던 일이 되든지. 다음에는 더 보풀 안 묻게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야지 이번에는 내가 생각을 잘 못 해서 그렇게 깨끗하게는 못 했는지 몰라도."
인간은 의미를 찾는 동물인지라 나도 그렇고 한국예수전도단 같은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그렇고 누군가가 무언가에 부여하는 의미와 의의를 덮어놓고 부정하지는 못할 일이다. 다만, 모든 의의와 의미가 덮어놓고 긍정돼야 하는 것도 역시 아니기는 마찬가지려니 싶다. 변절이 아닌 선에서, 이단이 아닌 선에서, 주객 전도가 아닌 선에서 조금은 딴청을 피워, 주어진 의의와 부여된 의미의 범위를 넘는 풍경을 봐 두면서, 너무 그 의의에 목�� 매지 않으려고 할 필요가 있으리라고 생각해 본다. 최소한, 그럴 필요도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 정도는 해 보게 된다. 이러든 저러든 모든 의미가 부여된 대로 실현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다 써놓고 보니 오늘의 빨래 보풀과는 정말 관계 없는 얘기긴 하지만, 아무려면 어때, 수건과 티셔츠를 한번에 빨겠다는 아차 싶은 아이디어보다야 이게 좀더 "의미있는"(ㅋㅋ) 논의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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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ptogun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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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적으로 타인에게 소리를 칠 기회
대학생 때 확성기를 하나 산 적이 있다. 전형적인 빨간색 메가폰이고 돈이 좀 모자라서 사이렌 기능은 없는 일반형으로 샀다. 배송을 받은 것은 십 년이 넘은 옛날인데, 실은 오늘날 이때까지도, 받을 때 온 풀박스 그대로 고스란히 방치 중이다. 막상 그걸 써 본 적은 한 번도 없어서, 내 방 책장 속, 혹은 내 방 바깥쪽 벽 한구석에서 먼지만 먹고 있다. 놀랍게도, 아니 놀랍지 않게도, 내게는 공개적으로 타인에게 소리를 칠 기회가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내가 확성기를 샀던 것은, 언젠가 살면서 한 번쯤은, 남에게, 공개적으로, 정당하게, 정당한 악에 받혀서, 동네 떠나가라고 소리를 지를 날이 올 거라고, 왔으면 좋겠다고, 설마 그게 한 번을 안 오겠느냐고, 그런 생각에서였던 것 같다. 당시 시국도 몇 년째 이명박근혜 시국이었던 바, 맘만 먹었다면, 그걸 좀 남용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을 터이다. 윤석열과 유튜브의 시대 아닌가? 너도나도 각자의 나발을 불어 대느라 혼이 쏙 빠지는 세상에서, 빨간 메가폰 하나가 시끄러우면 뭐 얼마나 시끄럽고 눈에 띄겠는가?
하지만 오늘도 내일도 아마도 그 확성기는 영영 쓰이지 않을 것이다. 십 년이 넘도록 삼만원 돈 하는 메가폰을 안 쓴 혹은 못 쓴 세월을 보내 보고 나니 이론적으로는 알겠기 때문이다. 확성기는 그다지 자주 쓸모 있는 물건이 아니다. 확성기가 너무 자주 유용한 상황이란 곤란한 것이다. 공공연히 타인에게 소리를 지를 수 있는 기회란 극히 드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격과 품성의 차원에서도 그렇고 사회 동학의 차원에서도 그렇다. 소리를 질러서 해결될 일이라면 정말이지 하루 18시간씩이라도 소리를 지르겠다. 그게 아니지 않은가?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 속의 어린이는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다. 아무래도 어린 시절의 나는 좀더 떼를 써도 되었을 순간에 어리광을 안 부렸던 모양이다. 사실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항상, 방향도 성분도 의의도 모르겠는 어떤 울분이, 가슴 속 밑바닥에서 늘 은은히 찰랑거린다. 이걸 배수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마개가 어디인지 마개가 있긴 한지 그걸 뽑으면 정말 이 체증이 내려가는지 모르겠다. 일단 확성기가 그 마개가 아니라는 것은, 아무데서나 아무렇게나 소리를 지른다고 해서 그게 무작정 정당화되지는 않는다는 것까지는 어찌어찌 수용한 듯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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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ptogun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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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vs 말 vs 소리
A short note as a native Korean speaker, but with no academic background in linguistics.
Easy one first: 이야기/얘기 is simply a "story."
It doesn't necessarily have to have anything to do with the speaker -- even with the audience.
When asking back "그게 무슨 얘기야?" it's an inquiry for the detail/outline of the narrative.
말 is more like "telling" than "saying."
Most likely it contains the POV of the speaker -- any talk needs a talker.
When asking back "그게 무슨 말이야?" it's a question about the key point/intention/implication of the speaker.
소리 is "something heard" -- occasionally it fails in constructing a narrative.
An extreme example for comparison: "bullshit" is translated only into 개소리. Never 개말 neither 개얘기.
When asking back "그게 무슨 소리야?" it's probably not just "what do you mean?" It would be more like "I don't get it; they don't add up, do they?" That's why you can repeat "그게 무슨 소리야?" until you really get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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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ptogun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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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토군이 성가대 그만둔대
지지난주에 교회 "성가대 지휘자"가 "사임"했다. 부임 11년 만의 일이다. 그래서 지난주 교회 성가대는 지휘 없이 성가를 했다. 그리고 이번주부터 나도 성가대를, 아니 그냥 이 교회를 그만둘 생각이다. 이런 얘기 쓸 곳은 역시 텀블러뿐인 거 같아서 조금 쓰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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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130년이 되어 간다는 이 교회는 그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아주 초라하다. 단지 제적교인 수가 적다거나 "성전"이 협소하다거나 그런 게 아니다. 교인이랍시고 모인 이들이, 실제로도 노인인 주제에, 사상적으로 영적으로까지도 폭삭 늙은 자들뿐이어서 초라하다. 매주 나오기는 하고 앉아는 있고 매주 분주하게 뭔가 하기는 하되 실제 자세는 항시 같은 자리에 푹 드러누워 문드러져 가는 자세일 뿐인, 아무것도 배우기 싫고 변할 생각이 없다는 표정인, 그래서 본받을 점이라곤 하나도 없는 늙은이들만이 객석에 듬성듬성 심겨 있는 꼴을, 성가대석에 앉아서 몇 년을 바라보고 개탄했는지 모르겠다. 이런 교회에서 성가대란 그저 두 가지 기능만을 수행한다. 이 교회가 정상이며 별 문제가 없음을 거짓 증명하는 알리바이, 그리고 "성가대원"들의 "폐활량 운동"을 위한 노인 복지 문화 사업.
일개 아마추어 "베이스" 성가대원이 보기에 그랬으니 그런 "성가대원"들을 붙잡고 그 알리바이를, 그 복지사업을 실무 진행해야 했던 지휘자는 오죽했겠는가? 알고 보면 그는 교회 밖 어디를 가든지 선생님 성악가님 소리를 듣는 남부럽지 않은 프로 바리톤이다. 서울대를 거쳐 베르디 음악원을 나와 아직도 현역인 사람이다. 심지어 'ㄴㅁ위키'에도 그를 설명하는 문서가 따로 있을 정도다. 그런 값있는 사람이 (어느 위키에도 없는) 이 교회만 오면? 그저 두어 시간 지휘봉 휘두르다 집에 가는 기계일 뿐이다. 11년을 매주 똑같은 기초 발성 교육 되풀이하다가 이제야 그만둔 건데 솔직히 진작 때려치우지 않은 게 용하다 싶을 정도다. "페이"를 얼마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 돈도 모욕이 아닌 수준으로까지만 줬을걸?
나는 사실 이 교회를 엄마 혼자 교회 다니게 두는 게 미안해서 같이 다녀주기 시작한 거였고, "청년부"니 "중고등부"니 들어가기가 도대체 너무 싫어서 성가대에 숨다시피 한 거였다. 한동안은 "저 노인들은 어떻게 저렇게 귀가 멀고 목이 곧을까 나는 저러지 말자" 운운 속으로 오만하게 정죄하는 짓으로 버텼는데, 그 짓도 슬슬 질리고 나니까, 다른 이유는 다 사그라들고, 오직 '저 지휘자 불쌍해서라도 내가 좋은 성가대원이 되어야겠다' 하는 심정만이 남고 말았다. 그래서 더욱더 기를 쓰고 성가대를 했다. 아무리 교회 갈 맘이 나지 않아도 웬만하면 출석했고, 모든 연습 시간을 지켰다. 저 성악가의 이곳에서의 시간이 그저 시간 낭비가 되지 않게 하자. 나라도 그의 '지휘'와 교육을 최대한 따라가려고 해보자. 오직 그 심정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가 그만뒀으니, 나도 더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그래서 그냥 관뒀다.
엄마에게는 "이 교회에 신붓감(ㅋㅋ)이 없으니 신붓감 찾으러 다른 교회 좀 돌아다녀 보겠다"는 (마음에 별로 있지도 않은) 핑계를 댔다. 그리고 현재 시각 주일 오전 11시 18분, 나는 어느 소호사무실 한구석에 앉아 이 넋두리를 쓰고 있다. 사실 방금 전에 성가대 "총무" 집사의 전화가 왔고, 아주 잠깐 흔들렸지만, 끝내 부재중 처리했다. 내가 지금 교회를 가면 뭐가 달라지지? 전혀 나아질 게 없지 않은가? 지난 12년의 반복이 연장될 뿐 아닌가? 그래서 마음을 새삼 모질게 먹고 카카오톡 채팅방을 조용히 나왔다. 내 기억이 맞다면 내 지난 12년간의 주일 아침 10시 연습 중 결석은 없었고 지각은 두 번 있었던 것 같다. 그 짓을 해 보니, 이젠 그냥 다 모르겠고 좀 지겹달지 이젠 된 것 같달지, 그만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마지막 연습 시간 때 지휘자님의 표정과 목소리도 그런 톤이었다. 뭐가 미워서, 그리워서, 무슨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그냥 이젠 지칠 뿐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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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청교도-인스타그램적 개신교 공동체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매주 매년 지겨운 알리바이를 꾸미기 바쁜 조직이라서 그렇다. 그리고 그 알리바이 역시 참 볼품없고 초라한데, 속셈이 뻔히 보이는 짓을 덮어보겠다고 드는 짓이라서 그렇다. 자기들이 사실은 개혁하고 있지 않음을, 세상 속으로 녹아들어가 세상의 부패를 막을 생각이 없음을, 사실은 그저 결코 다칠 일 없는 친목질, 각종 영적 이벤트 관람, "세상"과의 도덕적 비교우위 향유 등등만 반복하며 어릴 적 추억에 영원히 젖어 살다 천당이나 들어가고 싶을 뿐임을 들키지 않으려는, 혹은 바쁘게 손발 놀리며 그걸 잊어보려는 속셈. 그건 맨정신 든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훤히 다 비쳐 보이는 일이고, 그래서 비할 데 없이 오직 피곤하기만 한 일이다.
"세상과의 비교우위 향유"를 조금 설명할까 한다. 사실 나도 아직은 교회 출석 자체를 아주 딱 그만둘 생각까지는 아니다. 적당한 곳이 있으면 적당히 가볼까 싶은데, 엄마가 "그러면 여기 교회도 좋을 거 같고 여기 교회도 좋을 거 같고" 하면서 잔뜩 뽑아 준 교회 목록 중 한 군데의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니, 자기네 교회는 흡연실이 있다는 점이 다르다면서, 이런 소리를 써놓았다.
예수님은 믿지않는 사람, 죄를 짓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을 위해 교회의 문을 활짝 열고 기다리셨을 겁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담배를 끊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로 결단할 때까지 무던히 참으셨을 겁니다. (교회 이름)는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영혼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지역과 세상에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아니 씨발 뭔 개호로 양아치잡놈 지랄 염병 떨고 앉은 소리야. 담배 안 피우면 죄인 아니고 담배 피우면 죄인이란 소리냐? 넌 죄인이니까 얼른 와서 담배 피우고 교회 등록해서 담배 끊고 죄인 그만하라 이거냐? 물론 아니겠지. 텍스트를 열심히 읽어보고 교회측 법률자문 집사님이 작성한 내용 증명을 읽어 보면 절대 그 뜻이 아닐 테다. 하지만, 만약 내가 '아 나 담배는 피워야 되는데 이 교회도 흡연은 못하겠지?' 생각하면서 이 홈페이지를 들어온 흡연자라면, 이 멘트 때문에 이 교회를 안 가기로 결심했을 것 같다.
차라리 그냥 "흡연실이 있습니다." 까지만 썼으면 좋았을 것을, 이 교회는 기어코 흡연실이 있다는 사실마저도 자신들이 얼마나 훌륭하게 선교하는 교회인지 자랑하는 데 써버리고 만다. 하물며 그 흡연실의 은혜를 입어 흡연하며 교회 다니는 교인이 있다면, 그 교회는 그를 얼마나 알차게 자신들(만)을 위하여 써먹을까? 담배를 안 피우는 내가 조금 생각해 보기에도 모욕감이 치미는 면이 있다. 그래서 나도 이 교회를 안 갈 생각이다. 이런 교회가 어디 한둘인 줄 아는가? 겉포장만 한꺼풀 벗겨서 곰곰이 잘 씹어 읽어보면, 사실은 이런 소리를 꾹 참을 줄 아는 교회가 오히려 손에 꼽게 드물다.
이런 소리를 죽 써놓으면 "아 그래도 니가 모르는 정말 좋은 교회가 많고~ 니가 잘하는 집을 안가봐서 그렇고~" 하는 의견이 달릴 거 같아 미리 반론해 둘까 한다. 다시 말하는데, 그건 그저 덜 힘들게 하는 교회와 더 힘들게 하는 교회의 차이일 뿐이고, 매주 매년 본질이 같은 짓거리를 반복하며 숫자의 변동 외 아무 변화도 없는 이상, 모든 교회는 대한예수교 인스타그램회 교단으로 다 똑같다. 아까부터 인스타그램을 걸고 넘어지는 이유가 있다. 몰랐는데, 인스타그램은 기독교인들이 좋은 말씀 좋은 생각 설교 요약 콘텐츠 올리며 돌려보는 플랫폼으로도 활성화되어 있더라고. 알고 보면 힐송교회의 초기 성장 역시 인스타그램이 견인했다지. 플랫폼 본질상,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부분만 크롭하고 나머지는 스티커로 가리는 그곳이 말이다.
인스타그램에서 가끔 내면 깊숙한 이야기가 어떻게 올라오는지 아시는가? 오밤중에, 검은 사진 위에 조그만 텍스트로 길게 한꺼번에 올라온다. 그마저도 24시간 뒤에 휘발되는 스토리로 올라왔다가 '자진 철거'되므로, 대화는 발생하지 않고, 따라서 기도나 고해, 담화가 원천 차단된다. 그러고 나면 다시 세상은 아름답고 멋있고 웃기고 유익하고 익숙한 것만 가득한, "절망이 없"는 곳이 된다. 요한계시록에서 많이 들어본 묘사 아닌가? WASP 패권이 세계에 보급한 개신교가 상상하는 천당은 인스타그램이다. 그리고 다들 그걸 현세에 구현하기 위해 각자의 성전 예배당에 모여 매주 매일 매년 아름답고 멋있고 웃기고 유익한, 그리고 익숙한 뭔가를 만들거나 보거나 보여주기를 거듭한다.
그 기능을 하는 조직 중에 '성가대'가 있음은 말할 것 없고, 그 짓거리에 질리고 지치지 않기는 쉽지 않을 터이다. 혹시 아직도 내가 성가대에 ��친 이유를 이해할 수 없는가? 그냥 지금까지 읽은 설명을 전부 다 잊어 달라. 그리고 그냥 당신 믿고 싶은 대로 믿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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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때는 '캠워'를 개근하던 '와웨머'였고 사회인 되어서는 심지어 워홀로 간 호주에서조차도 성가대를 개근하던 '성도'였던지라, 일요일 아침 12시에 장의자가 아닌 곳에 앉아 있게 된 경위가 썩 낯설다. 번아웃이 온 걸까 싶기도 하고, 다들 이렇게 "가나안"이 되는 거였던가 하는 감상도 나고 그렇다. 일단 한동안은 일요일 오전의 세상을 좀 둘러보면서 좀 쉴 생각이다. 대학생 때 보았던 어느 일요일 아침인가의 마로니에 공원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요했고, 이슬인지 안개인지도 엷게 깔려 있었어서, 자못 '거룩'하기까지 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다른 곳은 어떨는지. 뭐 이번 기회에 그간 궁금했던 "크~은 교회"들도 좀 관광 다녀보고.
세상은 변하고, 나도 어른이 되어 가는데, 교회만 어릴 적 모습 그대로라는 사실은, 아마도, 내가 너무 늙고 병들어 지쳐서, 어디 한구석에 가서 문드러져나 있다 오고 싶다는 욕심이 강렬하게 날 때쯤이면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싶다. 지금은 아니다. 이제는 별 미련도 없다. 유일한 위안이라면, 남자가 3명뿐이고 지휘자는 없던 지난주가 내 지난 12년 성가대 활동을 통틀어 가장 호평받은 "무대"(ㅎㅎ)였다는 점 정도다. 누군가가 진심으로 잘했다, 멋있었다 소리를 해주기로는 정말 처음이었던 것 같고, 이 교회는 역시 지휘자가 그저 알리바이 소품이었구나 싶고. 그러고 보면 지금쯤 지휘자 아니 바리톤 선생님은 뭘 하고 계실까? 하나뿐인 제 자식의 사춘기에 어울려주는 주말을 보내고 계시겠지? 최근 몇 주간 맨날 그 얘기였으니까. 나중에 제대로 인사 한 번 드려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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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ptogun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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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훈이 이단이 아니라는 점을 정말 조금만 생각해 보자
무리한 부탁이긴 한데 정말 조금만 생각해 보자. 최근 나를 영적으로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가족도 이웃도 교회도 아니다. 전광훈이 이단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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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공공연히 정교 야합을 꾀하는 바 오늘날 한국 정치 지형에서 가장 위험천만한 인간이며, "하나님 나한테 까불면 죽어" 따위를 아무렇지 않게 지껄이고, 지역 사회를 파탄 내는 공갈 협박을 과격히 일삼는다. 여기까지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데, 놀랍게도, 그를 놓고 예장통합이니 예장합동이니 하는 곳들의 동년배 목사들만은 그가 과연 이단이냐 아니냐로 ���직도 옥신각신 다투고 있다. 어찌나 조심스럽고 신중한지, 옆에서 보는 평신도가 울화가 날 지경이다.
개인적으로 그분을 상당히 안 좋아하고 기독교에 도움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단은 정치와 상관없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이단으로 규정하면 이단 안 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렇겠지. 이 부분은 잠시 후에 다시 다루겠다. 아무튼 돌아와서, 근데 하긴 생각해 보면 과연 그러하다. 전광훈은 그의 교리 바깥의 일이 문제인 인간이지, 그의 교리 자체는 이단이 아니다. 사실 그의 개소리에는 당혹스러우리만치 상당한 양의 신학적 영양가가 섞여 있다. (이를테면, 위의 짤을 보아 짐작건대, 사랑제일교회는 교인들에게 최소한 스가랴를 읽어주었을 것이라든가 하는 점이 그러하다.) 이것이 또한 내 영혼을 울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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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본회퍼를 아는 사람이다. 모르긴 몰라도 본회퍼에 대해서라면 주변의 웬만한 교회보다도 사랑제일교회에서 더 많이 가르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본회퍼는 누구인가? 나치 치하 독일에서 히틀러를 암살하자는 기도에 가담했던, 꽤나 사회적으로 책임 있게 살다 간 신학자 아닌가? 그런데 전광훈은, 마치 자기가 무슨 독재 정권 치하의 한국에서 누군가를 암살하기 위해 태어난 한국의 본회퍼라도 된다는 양, 오만 가는 곳마다 저 빌어먹을 "미친 자에게 운전대" 운운으로 본회퍼를 들먹이고 있다.
실제로 본회퍼가 남긴 말 전체를 읽어보자.
만약 내 옆 자리에 앉은 자가 미친 자여서, 길 가는 무고한 사람들을 치려고 운전대를 틀어쥐고 달리고 있다면, 기독교인으로서 그저 잠자코 있다가, 기어코 참사가 일어난 뒤에야 나서서 다친 사람들을 위로하고 희생된 사람들을 장사지내는 그런 인간이 돼서는 안 된다. 그 운전대를 붙잡은 운전자를 붙잡고 싸워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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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훈이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있는 바 '되지 말아야 할 기독교인'의 상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보자. 생각해 보면, 히틀러 처단 같은 것만 염두에 두고 살자면, 그는 여기서 전광훈처럼 "운전대를 맡길 수 없다"까지만 말하면 되었다. 그런데 왜 그는 굳이 "참사가 다 끝난 뒤에야 나타나는 기독교인"을 말하는가? 그의 핵심 사상에 '값싼 은혜'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치명적인 적이다. (...) 값싼 은혜는 싸구려 은혜, 헐값의 용서, 헐값의 위로, 헐값의 성만찬이다. 그것은 교회의 무진장한 저장고에서 몰지각한 손으로 생각없이 무한정 쏟아내는 은혜이다. (...) 은혜가 홀로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해줄 테니 모든 것이 케케묵은 상태로 있어도 된다는 것이다. (...) 값싼 은혜는 우리가 스스로 취한 은혜에 불과하다. 싸구려 은혜는 그리스도를 본받음이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곧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은혜에 불과하다. 출처
그리고 전광훈은 정말 값싸게, 가볍게, 신명나게, 툭하면 뻑하면 "우리는 이겼습니다"를 질러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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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승리는 정말이지 아무데서나 발생한다. 예수님의 희생에 의해 우리가 속죄되었다는 얘기를 할 때도 '우리는 이미 승리'했다고 "선포"하고, 광화문에서 문재앙 정권 심판을 울부짖을 때도, 교회에서 집회를 열어 놓고 용역과의 싸움에서 교회가 (즉 자기가) 이겼다고 으스댈 때도, 이후 "세계기독청" 운운 허무맹랑한 꿈을 밀어붙일 때도 그는 '이미 이루어진 승리'를 들먹인다. 문제는, 이게 정말 신학적으로 틀린 말이냐 하면, 그게 꼭 그렇지는 않다는 데 있다.
글월만 놓고 보면 맞는 말이거든.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 덕분에 최후 승리를 얻을 자들이다. 지금 우리의 연약함, 부족함, 작음, 힘없음, 죄됨은 마침내 예수님 보혈로 다 씻어질 것이다. 이게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에, 이 말을 방패로 내밀어 "그러니까 자유일보 100만부 구독 일어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이미 저 교회 부지 560억 받고 이미 이겼습니다 아멘?" 하면 꼼짝없이 아멘 해야 한다. 굳이 생각해 주자면, 저 대단하신 총대 목사님들이 전광훈을 이단 규정하지 못하는 변명은 여기에서 나올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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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광훈이 스스로 "순교자", 미친 자로부터 운전대를 빼앗는 그 사람을 빙자하는 부분에서 화가 나지 않는다. 그건 다른 자들도 공공연히 그렇게 한다. 내가 화가 나는 지점은, 그가 실제로는 그런 순교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는, 본회퍼가 그린 바, 모든 참사가 일어난 뒤에야 나서서 위선하는, 다친 사람들을 거짓으로 위로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산 채로 묻는 임무를 수행하는 그런 기독교인이다. 그 매장지는 전국의 떠돌이 "애국시민"들을 빨아들이는 사랑제일교회 부지이고, 거기서는 이승만의 사상을 넘지 않는 (그래서 쏙쏙 이해되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설교"라는 위로가 매일 매주 무한으로 훌륭하게 제공된다.
교회 일을 조금 섬겨본 사람으로서 전광훈에 대해 생���할 때 또 하나 콱 하고 울컥하는 지점이 이 부분이다. 그의 "예배"와 집회는 행정적으로 너무 쾌적하다. 수준이 높다 못해 과분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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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최근 설교에는 한영 동시통역이 제공되고 있다. 조금 들어 보았는데 통역사가 일류인 모양이라, 한국어로 들으면 개소리에 불과한 것이 영어로 들어 보면 무서울 정도로 그럴듯하다. '자막'은 또 어떤가. 그의 집회에서 뭔가를 다같이 제창해야 할 일이 있을 때마다 '방송실'은 노래 가사, 성경 말씀을 기가 막힌 타이밍에 탁탁 틀어준다. 덕분에 집회 참가자들은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완전히 전광훈의 쇼에 몰입한다. 자막은 내가 좀 해 봐서 아는데, 저 정도로 완벽하게 하려면 둘 중 하나다. 큐 시트가 완벽하게 나와 있거나, 담당자들이 정말 이 일에 뼈를 묻고 밀리초 단위로 헌신하고 있거나.
아마 후자일 것이다. 저 통역사도 그렇고, 이 예배당에 모이는 모든 사람들, "너알아TV"며 이런저런 "애국채널"을 구독하며 "순교"를 하려는 "애국동지"들이 다 그럴 것이다. 아마 전광훈 본인도 그럴 것이다. 그들은 정말로 헌신해 있을 것이다. 이미 이긴 그 싸움에, 주사파라든가 "어둠의 세력"이라든가 하는 허수아비 몇 대를 세워 놓고 찌르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싸움에, 이 간단한 것을 몰라서 바깥 어둔 데서 죽어 가는 "빨갱이"와 "김씨 일가"와 "동성애자"들을 향한 안타까움에 그들은 진심을 다해 반응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니까 이렇게 의심 없는 요지 부동으로들 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인가? 정말로 하나님 나라는 이뤄지고 있나? 그들이 믿는 대로, 그들이 원했던 대로 미친 자의 손에서 운전대는 빼앗아지고 있나? 그럴 리가 없다. 처음부터 그런 건 없었거든. 근데 그러면 결국 남는 건 무엇인가? 장위동 재개발 조합원 이웃들의 한 서린 원망, 그 피눈물로 씻고 닦아 광을 낸 초호화 교회 건물, 법 위에 군림하는 목사, 그 목사를 어쩌지 못하는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그의 말이 말만 놓고 보면 다 맞(아 보이)기 때문에 그를 떠나지 못하는 혹은 그를 딱 잘라 거부하지 못하는 교회 안팎의 무력한 기독교인들뿐이지 않은가? 이게 그 빌어먹을 천국인가 하는 그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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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울분은 거기서 딱 한 걸음 더 나간다. 내게는, 바로 이것, 감히 '전광훈 모델'이라고 할 만한 것이야말로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묵묵한 대다수 종교 대중이 유지되는 비결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있다. 전광훈이 유독 심할 뿐인 거지 사실은 죄다 이 꼴 나 있는 거 아니냐 이거지. 내 친구도 대략 1년 반 정도를 무슨 선교사 부부가 세운 초교파 교회에서 영상으로 사역하다가 너무너무 힘들어서 그만뒀다는데, 그 과정 자체는 자기가 은혜로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한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에게라면 이것 참 어디서 많이 들어본 사연이지?
아니 물론 그거야 최후 승리의 날에는 그것도 다 은혜가 되겠지, 근데 너는 지난 1년 반을 생각만 해도 천불이 나서 생각 안 하려고 할 정도로 힘들었대매, 그럼 그게 어떻게 은혜냐, 그냥 전형적으로 개인사업자한테 프리랜서 계약직이 믿음페이로 착취를 당한 것뿐인데, 하는 소리를 차마 그 친구 앞에서는 하지 못했다. 왜냐면 그 친구는 내가 전광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불쌍히 여겨 줘라, 기도해라, 완전한 의인을 본 게 아니라면 닥쳐라 같은 '답정너' 결론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참 어디서 많이 들어본 논변이지?
요컨대, 이 나라에서는 전광훈이 그릇된 자가 아니라는 것, 전광훈은 '끝판왕' 내지 완전체일 뿐이고 그보다 덜한 자들이 아직 전광훈만큼의 패악을 저지르지 않았을 뿐이라는 점이 생각할수록 갑갑하고 슬프다. 이 나라 교계가 값싼 은혜와 인스턴트 승리를 수요하고, 본회퍼 정신을 가르치고 배우기를 거절하며, 그럼으로써 (정교합일식 수구 반동 파시스트 정치 기획 같은) 각종 악을 추진하려고 하는 한 전광훈은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얼마든지 자연 발생할 것이며, 그 아래 충성을 바칠 영상, 자막, 통역 등등의 사역자들은 내 친구처럼 묵묵히 복무하기를 마다치 않고, 그렇게 착취, 비위, 탈법, 위법, 군림, 모독, 꼬리 자르기의 수레는 굴러갈 것이다.
자, 여기의 어디에 하나님 나라가 있나? 이런데도 내가 전광훈을 생각할 때 영적으로 '시험'에 들지 않을 재간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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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기독교인"들의 멱살을 붙들고 묻고 싶다. 전광훈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가 정말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그가 정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사람 같으냐고. 만약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런데 왜 우리는 그를 훈계하고 권징한 다음 내쫓지 않고 있냐고. 모든 교회가 사랑제일교회 같지는 않을 텐데, 그런데 왜 모든 교회가 사랑제일교회를 내버려두느냐고. 그가 우리와 같은 예수님을, 같은 본회퍼를 들먹이고 있는 사실 앞에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태연히 괜찮은 체할 수 있는 거냐고. 대체 얼마나 비위 좋은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거냐고. 이렇게 값싸게 승리하고, 사회를 등진 댓가로 주어지는 싸구려 은혜나 받고, 그 사이 흐르는 이웃의 눈물쯤은 나몰라라 하다가, 때 돼서 뒤지면 천국이나 가라고, 그러라고 예수님이 골고다까지 가신 거였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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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ptogun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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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해의 무엇이 그렇게 충격적이라는 걸까
내가 "랟팸뇌"에 절여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자가 짓는 강력범죄에 대해서 우리 사회는 유난히 더 유난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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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유년 시절에는 장애인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그를 기특히 여긴 MBC가 새 집을 구해준 경험이 강렬하게 자리하고 있다. 내가 이은해였다면, 이후 이것은 어려운 삶을 헤쳐나가는 기본 방침 내지 전략이 되지 않았을까?
나를 불쌍해할 것 같고 돈이 있는 자를 물색한다.
그로부터 계약을 따내고 돈을 탄다.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든 처리하고 묻어버린다. 자기 집이 러브하우스로 리폼된 이후 누구도 자기 인생에 관심 갖지 않았다. 이 문제도 마찬가지로 그냥 묻어버리면 아무도 관심 안 가질 것 아닌가?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면 1과 2를 상시 사업으로 다시 계속하거나 추가 확장한다.
"가평 계곡 살인 사건"이란, 그에게는 그저, 그간 했던 대로 이 프로토콜을 따르려다가 재수 없게 삐끗해 버리고 만, 그래서 재수없이 TV에 또 얼굴을 내밀게 되고 만, 뭐 그런 사건 정도인 것은 아닐까? <시사멘터리 추적>에 출연한 이수정 교수는 이은해가 "자기 조건에 맞는, 즉 자기의 범죄습성을 받아주고 스폰서가 돼 줄" 남자를 찾아다녔던 것 같다고 프로파일링했다. 그렇게 구한 스폰서 남편 '윤상엽'이란, 기십 년 전 그에게 집을 사준 '신동엽'과, 그녀 입장에선, 본질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오늘날 온 나라의 야단 법석은, 좋게 말해서 씁쓸하고, 나쁘게 말해서 냉소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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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점에서 이은해의 혐의는 '상대방을 가스라이팅하여 스스로 자살하게 만듦으로써 보험금 사기를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사안 자체의 흉악함을 완곡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제기하고 싶은 의문은 이것이다. 왜 우리는 이 정도 악에 이 정도까지 진심으로, 활기차게, 내심 기쁘기라도 한 듯이 경악하고 있는가?
남자들의 죄를 조금만 열거해 볼까? 예컨대 그들은 단지 지금 밖에 비가 내린다는 이유만으로 지나가던 부녀들을 닥치는 대로 목 졸라 죽이고 강간하고 버리기를 십수 번 거듭한다. 또는 그들은 단지 여자 국부를 몰래 엿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여자화장실에 몰래 침입하여 구멍을 뚫고 초소형 카메라를 달아 인터넷으로 중계한다. 아니면 그들은 예컨대 지인 능욕 딥페이크를 만들고 "유작"을 돌려보고 "성인이 나오는 성인물을 올리지 말라"는 '규칙'을 붙인 딥웹을 운영한다. 자, 경악은 어디 있는가? 지금 이은해에게 쏟아지고 있는 언론의 관심은 어디 있는가?
각 방송사들은 이제 와서 "사이코패스"를 처음 보았다는 것처럼, "가스라이팅"의 존재를 이제야 알았다는 것처럼 짐짓 과장된 몸짓으로 야단 법석을 떨고 있다. "아니 어떻게 러브하우스에 출연했던 그 대견한 여자아이가 어떻게 저렇게?"에 놀라기 바쁜 그들은, 작년에 터졌고 올해에 터졌고 지난 달에 터졌고 어제 터졌고 오늘도 터지고 있는 강간, 성폭행, 성추행, 외도 뉴스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단 말이지. 아마 이 '유난히 남자들만 짓는 강력범죄'들은 내일도 터지고 모레도 터지고 다음 주도 다음 달도 내년도 다음 정권에도 터질 테지만.
내친김에 조금만 더 뇌절을 해볼까? 보험금을 노리는 행위가 뭐가 그렇게까지 잘못인가? 내가 저보고 죽으라고 했나? 저가 나 만나고 싶어서 돈 준 거지 누가 저보고 빚을 지라고 했느냐 말이지. 누가 저보고 우리 집에 무작정 들어와서 새 집을 지어주어서, '이런 식의 만남을 몇 번만 더 하면 팔자를 고칠 수 있겠다'는 허황된 꿈을 심어주라고 했던가? 그래서, 나라는 사람의 불쌍함과 ���견함과 예쁨을 파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방송 출연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성매매를 좀 했다 한들, 그러다가 봉을 잡아서 잘 살려다가 이렇게 됐다 한들, 도대체 어디가 잘못이라는 말인가?
IMF 시대에 이 사회는 사람들을 기본적으로는 다 포기한 다음, '양심 냉장고'와 '러브하우스'로 극소수만을 선택적으로 구제해 왔다. 이후 비정규직 도입, 한미 FTA, 이명박, 박근혜 등등을 거치며 진행되어 온 것은 보편 복지, 책임 국가, 도덕 공동체의 완전한 해체 그리고 각자 도생의 최대 이윤 추구라는 유일한 규칙으로 그 모두를 대체한 과정이었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이은해의 삶은 이 과정을 더할 바 없이 충실히 체화한 여정이었을 뿐 아니었나? 그 끝에서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이 경악스러운 파국은, 솔직히 말하면 낯익고 새삼스러운, 사실은 진작에 예견하고 각오했어야 하는 바가 아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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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해의 최근 행각과 그 범죄 혐의에 경악하고 있는 이들은 "영화 '검은 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며 화들짝 바들짝 놀라고 있다. 나는 글쎄 별로 놀라지 않고 있다. 이 영화를 본 적이 없어서일지도 모르지만, 설령, 이 영화(와 원작 소설)가 극도로 잔인하고, 이 영화가 "사이코패스"의 존재를 (마녀를 앞세워서) 세간에 처음 알렸고, 그 행각을 거의 그대로 수행한 실존 인물이 우리 눈앞에 나타났고, 그게 우리가 과거에 희망의 집을 새로 지어주며 함께 IMF 시대를 헤쳐나가자고 격려해 주었던 소녀였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이 모든 사태 앞에 그저 심드렁하다. 나 스스로도 이상하다 싶을 만큼이다.
왜냐하면, 냉정히 생각해보면, 나는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그의 삶을 살았다면 저렇게 안 될 수 있었을까? 방송사가 단 한 번 내게 지나치게 큰 행운과 감당할 수 없는 세간의 관심을 주고 훌쩍 떠나간 경험을 하고 나면, 이후의 삶은, 그때의 그 관심과 행운을 갈구하는, 그래서 정상적인 생애 경로를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삶으로 망가져 버리지 않았을까? 사회가, 국가가, 이 공동체가 나에게 아무 관심이 없다면, 숱한 남자 범죄자들이 나보다 더 강력한 범죄들을 저지를 때조차도 세상이 전혀 나서지 않는다면, 내가 낸 보험금 좀 돌려받으면서 러브하우스 출연자의 이름에 맞는 삶을 갈구하는 게 그렇게 잘못일까? 막말로 모르는 여자 두개골을 장도리로 깨겠다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내가 놀라고 있는 것은, 여자 강간범이 없다는 사실, 여자 연쇄살인범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 자기 욕망을 드러내고 그것에 솔직하려 했을 뿐인 차원의 강력범죄자 여자가 놀라울 정도로 적다는 사실이다. 여자는 항상 마녀 아니면 성녀이고, 그래서 결코 사회 탓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이 뒤집어쓰고 있는 비난에는 사실은 이 사회의 구조와 구성원들이 다함께 감수해야 할 몫까지도 합산돼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남자가 짓는 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적용되는 그 디스카운트가, 이은해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고 있지 않나 한다. 그 부분이 내게는 놀랍다. 그가 받은 범죄 혐의의 내용들에 비해서는 한참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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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ptogun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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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가장 크고 느린 해일 앞에서
오늘 회사에서는 놀라우리만치 아무 일도 없었고 "올스탭 미팅"인가 하는 월례행사가 조촐히 열렸다. 대회의실에 전 직원이 모였고 무난하게 치킨과 족발이 늘어벌려졌다. "드시면서 편하게" 들으라는 부서별 월례 발표 중에는 부사장님의 "여러분이 매일 바쁘게 일하면서는 잘 못 느낄 수 있지만 우리가 되게 잘 되는 중이고, 국제적으로 관심도 많이 받고 있다" 하는 얘기며 새로 들어온 마케팅팀 팀장의 "돈을 이거밖에 안 태웠는데도 이 정도 나오는 거 보면 확실히 되긴 되는 서비스일 거 같다" 하는 소감을 들었다. 한국의 유니콘 기업이 깔아 놓은 플랫폼을 통해 신속 정확히 배달된 그 음식들을 좀 처먹고, 맥주를 한 캔 깐 다음 다시 자리로 돌아가 대충 한 시간 정도 더 일하는 체를 한 뒤 퇴근했다. 2021년 11월 목요일 저녁 여섯 시의 여의도역은 "일상 회복을 무슨 단계적으로 해 그냥 지금 당장 '위드 코로나'다" 싶은 인파가 넘실거렸다. 미어터지는 중앙보훈병원행 급행열차 안에서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켠 아이패드로는, 버니 샌더스가 경선을 탈락당하자마자 내놓았던 책을 열었고, 나는 이내 그것이 실수였다는 것처럼이나 황급하게 그걸 껐다. 대신 만화 앱을 열어 얼마 전에 사서 본 만화들을 다시 또 돌려보고, 최근에 산 만화들을 한 챕터씩 진도를 빼고, 그마저도 부족하다는 양 '서점'으로 가서 다른 만화를 또 2150원어치 결제해 또 내려받고, 중국 시장 직구 앱을 열어 11월 11일 세일을 대비하는 장바구니 체크를 했다. 그렇게 한 시간 반을 전철에서 흔들려 가며 퇴근해 집에 도착하자니, 우편함에 <워커스> 최신호가 꽂혀 있는 것이 보인다. 이번호 특집은 "성장의 끝, Next Level"이라는 제목이군, 까지만 확인하고 던져두었더니 동생이 먼저 냉큼 펼쳐보고는 그런다. 와, 이슬람 세계는 위드 테러리즘이래.
현실이 기어코 임계치를 넘어 내 면전에 쏟아진 것은 대강 그때쯤이었다.
기후 위기며 "팬데믹"이며 새삼스럽다 못해 촌스러울 지경인 각종 차별 양상이며 그것들의 주범으로서의 무한 증식 경제와 무한 소비 문명을 생각하다 보면, 실은 만사가 진작 다 망했는데, VR로 눈 가리고 아웅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진다. 이 소비가, 이 지출이, 이 '시켜먹기'가, 심지어는 나의 이 노동마저도 ﹣ "웹 개발"이라는 게 결국은 숱한 컴퓨팅 머신과 그 사이 수만 킬로미터 통신선으로 전기를 태워서야 가능한 일이므로 ﹣ 자기파괴적 소비의 일로매진에 그저 박차를 더할 뿐은 아닌가 말이다. 지금까지의 문명은 뭔가를 사먹는 일이, 뭔가를 배달시켜 먹는 일이, 먹고 힘내서 무슨 소프트웨어인가를 개발하는 일이 그렇게 '파괴적'이고 '소모적'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아마 지금도 대체로 상식은 그러할 것이다. 나로서는, 그 상식을 두렵게 재고하는 중일 따름이고.
편도 한 시간 반 거리 출퇴근을 하며 웹 개발을 하는 입장에서는 내가 남기는 탄소발자국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 나는 이 정도의 대중교통의 에너지 소모와 사무실의 "서버비"와 인터넷과 전기를 사용해도 좋을 만큼 대수로운 일을 하고 있나? 이건 절대 돈의 문제가 아니고, 내 역량의 문제냐 하는 것도 진지하게 말해서는 좀 부차적인 사안이다. 특히 오늘처럼 뭔가 먹고 마시면서 쓰레기를 잔뜩 만드는 날이면 이런 번뇌는 한층 더하다. 나는 정말 오늘 그 쓰레기를 배출해도 좋을 정도로 값어치 있게 살았느냐 말이지. 그럴 리가 없다. 그렇게 처먹을 거면 뭣하러 운동하느냐는 것과 비슷한 느낌의 자책임에도 불구하고, 한 번 이런 식으로 걱정하기 시작하니 영 떨칠 수가 없다. 문명 거식증이라고 해야 할까.
거식증이라고 하면, "살은 빼야 하는데 먹는 건 참지 못하는" 이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의 하나로 꼽힌다. 그런데 그런 함정 중 다른 하나로는, 그냥 아무것도 참지 않고 그대로 비만이 되어 버리는 길이 있고, 이쪽이 거식증보다는 훨씬 더 이행하기 쉽고 그래서 더 사례가 만연한데, 오늘날의 "위드 뭐시기 메타"의 메커니즘이 바로 이런 식이 아닌가 생각된다. 장사는 해야 하는데 방역 수칙은 도저히 지킬 수 없었던 일부 자영업자들은 진작부터 "위드 코로나"를 외치고 나왔다. 이게 일본에서 유래했느냐 콩글리시냐 "단계적 일상 회복"의 잘못된 표현이냐 등은 사실은 좀 허튼소리이다. 이 키워드의 코어는 '그냥 될 대로 되라'라는 정서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제 사람들은 코로나 감염 방지를 참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빌어먹을 전염병 돌 테면 돌라지, 장사는 하게 해 줘야 될 거 아냐.
감히 두려운 예측을 해 보자면, 잠시 후 세계 각처의 극우 여론으로부터는 "위드 온난화" 소리가 나올 것이다. 그들은 (이제 슬슬 모두에게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기후 위기'라는 표현은 결코 채택하지 않고, 그들의 상식에서는 있을 수 없는 '기후 변화'라는 아이디어를 원천 배제한 다음, (지난 몇십 년에 걸쳐서 대중적인 과학적 설명이 완료된) "지구 온난화"를 짐짓 인정하는 체하면서 이런 식의 적반하장을 부릴 것이다. "그래 좋아 지구 온난화 때문에 해수면이 상승하고 날씨가 엉망이 되는 건 잘 알겠어. 근데 그래서 날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빌어먹을 평균 온도 따위 오르라면 오르라지,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거 아냐! 더우면 에어컨을 켜면 될 뿐이잖아! 나더러 북극곰을 지키라느니 빌어먹을 "탄소저감목표"를 달성하라느니 되도 않는 소리 하지 말라고! 이건 내 자유라고!"
아주 근거 없는 예측은 아닌 것이, 실제적으로도 "지구가 뜨거워질 때 도망갈 수 있는 곳"이라면서 적도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지구 위에 화살표를 그려놓은 인터넷 기사가 돌아다니는 마당이다. 누군가는 지구가 뜨거워져도 어딘가로 도망가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생각한다는 증거로서 말이다. 그리고 이런 전개는 사변적으로 검토해 보아도 충분히 가능한데, 왜 그러한가 하면, 기후 위기라는 것은 바로바로 와닿지는 않는 형태로 조금씩 그러나 돌이키기는 어렵게 들이닥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일이 밀어닥치면 그 주변의 해수면은 한순간에 엄청나게 오르고 한순간에 많은 것이 파괴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해수면 상승을 일으키는 이 기후 위기라는 것은, 피할 수 있는 해안선이 없이, 세계 각처에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사상 가장 크고, 가장 느린 해일인 것은 아닐까?
엄청나게 높은 파고의 해일이, 엄청나게 느리게 닥치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야 마지막에는 쑥대밭이 될 것이고, 처음에는 그 가능성에 모두가 경각심을 갖겠지만, 지금 당장 쏟아질 것 같지는 않은 그 느릿한 파도를 보다 보면, 그건 이내 모두의 일상적인 풍경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가끔 누군가가 나서서 절박하게 외칠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정말로 저 해일을 피해야 해요! 저 정도 거리에 저 정도 크기의 파도라면 어느 순간부터는 피하고 싶어도 못 피하는... 아니 근데 지금 이 해변에 뭘 세우고 있는 거에요? 유전? 통신 기지국? 원자력 발전소? 당신들 제정신이야? 다들 저 파도가 안 보인단 말이에요? 제발 저것 좀 보고 날 피신시켜 달라고요! 우리 집이 물바다가 될 거라고! 당신들 모두 지금쯤은 패닉에 빠졌어야 되는 거라고!"
그래서 나오는 말이, 기후 위기의 무서운 점이 이런 점이라는 것이다. '지금 이게 위기인지'를 이해하지 못할 동안 세계엔 전혀 예측 불가한 불균형과 이상이 속속 발생하면서 시름시름 죽어갈 거라는 점이. 전 세계가 햄버거에 끼워 먹을 양상추가 부족해져 곤란을 겪을 거라고, 누군가는 이것 덕분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기후 위기를 실감할 거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그건 기후 위기와 함께 필연적으로 논의될 수밖에 없는 '성장주의 기획의 위기' 역시 마찬가지다. 왜냐면, 나로서는, 기후 위기 대책이랍시고 나오는 것들이 하나같이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현상을 소모적으로 유지하려는 기만으로밖에 보이지 않아서 미칠 노릇이기 때문이다.
페트병의 비닐 라벨을 뜯어 분리 배출하고 책보다는 ebook을 구매하고 자가용보다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그보다는 원격 근무로 일을 하고 지역 농수산물과 소상공인을 애용하고 어쩌고 저쩌고... 도대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냔 말이다. 그게 다 뭐냐고. 결국 어떻게든 지금의 소비 문명의 사치 행각을 겉모양이라도 유지시키겠다는 수작 아니냐고. 양상추가 없어서 햄버거를 못 만들겠으면, 그냥 햄버거를 그만 만들고, "양상추 하나 키우지 못하는 햄버거 문화를 허용해야 하나?" 하는 논의로 과감히 이행해야 할 터인데, 이걸 일본 버거킹에서는 기간 한정으로 패티만 구워주는 상품으로 대응했다던가? 아주 지랄이 풍작이지. 하지만 그렇다면, 나는 뭘 (안) 해야 옳은 것인가? 지구를 달구는 행각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건 정말 예쁜 텀블러 하나 사서 평생 쓰는 식의 '착한 소비'와 양심적인 월급쟁이 생활로 달성 가능한 과제인가?
그간 이런 위기 의식을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처럼 (상대적으로) 폭음 폭식을 하고 돌아온, 세상에 이렇게까지 조용해도 되나 싶을 만큼 무사히 문명의 첨단을 구가하고 돌아온 어느 괜찮은 날의 깊은 밤에 들어서는, 갑자기 그래서 더더욱 무서워진다. 괜찮을 리가 없잖아. 이렇게 지구를 더럽히고 기후 위기를 가속한 하루가 뭐가 무사한 거냐고. 나 정말 이대로 아무것도 몰랐다는 양 굴어도 되는 거냐. 심지어 나는 몰랐다고 발뺌하지 못할 각종 증거도 있고 양심도 있는데,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한 50년쯤 뒤에는 이 소비 문명의 정점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죄의식을 갖고 살게 될 게 분명한데, 정말 계속 이대로 살아도 되는 거냐고. 다른 걸 좀 해야 되는 건 아닐까 하고. 데모랄지, 시민단체 투신이랄지, 귀농귀촌이랄지 뭐 그런.
밤도 늦었고 나로서는 내일까지는 출근을 해야 한다는 현실도 있고 하니 여기서는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고 일단 잔다. 또 이렇게 "격동기 지식인의 고뇌"만큼이나 같잖은 알리바이를 적립해 두는군... 하는 자조와 함께 잠들 예정이다. 기분 탓인지 술 때문인지, 이 11월의 밤은 이상하게 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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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ptogun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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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 연구에 의하면, 중독자들이 의존 대상을 끊지 못하는 이유는, 그 의존 대상이 주는 쾌감이 커서가 아니라, 그 쾌감이 다한 후의 상태가 너무나 고통스러워서라고 한다. 흔히들 "그게 뭐가 그렇게 좋다고" 하면서 혀를 차지만, 실상은 그보다는 좀더 구체적으로 잔인하다는 것이다.
뭔가에 빗대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상식의 토막 같은데, 다른 토막을 못 찾아서 조립을 못 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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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ptogun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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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이 맥북을 버리지 못하고
화요일부터 재택근무를 하게 생겼다. 그 준비 때문에 내일 노트북을 하나 들고 출근해야 하는데, 내 개인 노트북에는 도무지 회사 업무 자료를 넣어놓고 싶지가 않아서 생각을 좀 하다가 서랍 속에서 방전돼 있던 맥북을 꺼내서 다시 켰다. 30분 정도 내용물을 확인하고, 괜찮겠다 싶어서, 방금 전 부트캠프 파티션을 날렸다. (이게 생각보다 금방 돼서 좀 당황했다. 뭐 사실 정말 중요한 데이터는 이 노트북을 넘겨받을 때 끼워져 있던 128GB짜리 젯드라이브에 몽땅 들어 있으니까.)
이 노트북을 안 쓴 지도 어언 1년이 되어 가는데,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사이에 이 맥북은 정말 낯선 물건이 돼 있었다. 이렇게까지 살았어야 했나, 싶을 정도로 절박한 어떤 삶의 궤적들이 촘촘이 남아 있는 폴더명들, 파일명들, 프로그램들, 바로가기들을 보며 뜻밖에도 조금 울컥했다. 분명 1년쯤 전만 하더라도, 그때로부터 최소 3년 전까지는 이것이야말로 내 분신이었는데. 이거라도 있는 게 어디냐며 중요한 자리마다 항상 들고 다녔던, 가장 값지고 가장 중요한 소지품이었는데.
어떤 물건들은 적정한 수명이 잘 알려져 있지만 어떤 것들은 그렇지만도 않다. 추억이, 개인의 과거라는 것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수명을 측정하는 방법이란 정녕 이런 감상에 젖어보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 내가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 물건일까, 그 물건에 붙여 놓았던 나의 애착 — 그 시절의 집념과 고생을 응축해 놓은 번뇌 — 일까? 나는 그 시절로부터, 그 기억으로부터, 그 물건으로부터, 지금으로부터,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기억과 소지품들로부터, 얼마나 (부)자유한 인간(이 될 수 있는)인가?
지금 이 맥북은 싹 밀어버린 깨끗한 파티션 위로 빅서 업데이트를 내려받고 있는 중이다. 부트캠프의 번뇌를 떨칠 수 없던 1년 전 그때까지만 해도 이 맥은 아무 업데이트도 올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제 거기서는 자유로워졌으므로 업데이트는 내려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면 이 맥에 관한 나의 역사는 정녕 끝났는가? 그게 그렇지가 않다. 문제의 128GB짜리 젯드라이브도 버리지 못하고 있고, 이번에 업무용으로 한번 쓰고 나면 정말 어떻게든 처분해 버리자고 생각은 하면서도 선뜻 그러지는 못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다. 참 이 맥북과의 연은 질기구나, 새삼 기독교적이지 않은 감상에 젖으면서, 내일 회사에 정말 이걸 들고 가긴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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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ptogun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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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한복판에 사무실을 둔 너무나도 개발자 친화적인 회사에 들어와 한 달을 있어 보니, 왜 그토록 많은 2030 한남들의 상당수가 ‘클리앙화’돼 있는지 좀 알 거 같다. 이대로 가다간 나조차도 그렇게 될 거 같다는 섬뜩한 직감이 있다. 세상에 무관심한, 일 잘 하는 똑똑이 이상의 인간이 되어야 하는 순간에마저도 그저 일 잘 하는 똑똑이려고만 하는, 아무튼 결과적으로는 혐오자에 불과한, 사회적 백치(白痴) 말이다.
통찰력을 기르지 않아도 되고 당사자성을 이해할 필요도 없고 비판적 사고를 할 여지마저 없는 삶. 그래서 그냥 이 모든 게 경제와 효율에 관한 기계적이고 객관적인 얘기일 뿐이라는 전문가적 무신경으로 선을 긋고, 내가 그런 거 아닌데 왜 나한테 뭐라 그러냐는 식의 군중으로서의 특권을 발휘해 발을 빼어, 그저 내내 강 건너 불 구경을 하는 행태. 그런 자리에 서게 되면, 그 불바다를 캡쳐해 돌리며 되도 않는 “농담”과 "일침”을 늘어놓는 짓도 어렵지 않게 된다. “아무튼 투표율이 올라간다는 점에서는 좋은 거 같아요. 예전에는 뭘 해도 안 바뀐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GS25 캠핑가자 같은 거 해 보니까 이제 아는 거지. 아 항의하면 뭐가 되는구나.”
안되겠다 싶어서 일부러 좀 래디컬을 습득하는 중이다. 이를테면 지금 내 자리 왼편에는 “개발자가 반드시 알아야 할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이란 책과 퀴어성서주석 히브리성서편(구약이라고 부르지 않는다...)이 있는데, 둘 중 더 가볍고 더 당장 필요한 책은 전자지만, 그거는 회사 사무실 내 자리에 던져만 놓고, 출퇴근길 같은 평소에는 후자를 더 빡세게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식이다. 문제의 주석책을 지를 때는 ‘음... 이걸... 살까 말까 고민할 일이냐? 돈벌어서 뭐하는데??’ 하는 느낌으로 질렀던 것인데, 지금에 와서는 일부러라도 드러내놓고 읽으면서 스스로를 계속 어딘가에 대고 벼려야지 안 그러면 정말 사람이 두루뭉술 뭉뚝해지기 딱 좋겠더라고.
2030 한남들은 그 누구도 도전을 걸지 않는 사고방식을 할 권리를 얻은 상태이고 그래서 이렇게나 신속 정확하게 퇴행의 악화 일로를 달리고 있다. 요 몇 달 간 도전해 본 소감으로는, 일단 나 하나로는 안 되지만, 나 자신 한 명마저도 코어가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기초 체력 좀 기른 뒤에나 맞서도 맞서야지 안 그러면 개빻은 소리의 물리 연타 공격에 체력이 딸려서 나가떨어질 거 같더라. 그래서 일단은, 재재를 기용했던 맥도날드처럼, 입장을 고수하되 무대응을 해 볼 생각이다. 김어진쇼도, 얼마든지 나서서 까불 수 있지만, 일단은 코어 운동하는 모습이나 한 주 올려 보고 좀 다시 생각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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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ptogun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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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 없으면 잇몸이라지만
최근 들어서 이직 프로세스를 시작했다. 회사도 가족도 심지어 SNS 친구들도 모르는 근황이다. 나의 오늘 오전은 회사 사람들에겐 평범한 오전 반차였고, 가족들에겐 평범한 월요일 정시 출근일이었으며 내게는 깨진 휴대폰 후면 글래스를 교체받자마자 뚝섬역으로 날아가서 무슨 면접을 한 시간 정도 보고 근처 면옥에 가서 회냉면을 한그릇 조지고는 따릉이를 1시간 꽉 채워서 영동대교를 달려 1시 50분경에 출근한 보람찬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알차게 보낸 것과는 달리, 사실 이번 이직은 여러모로 좀 뜻없이 진행되는 바가 있다.
무슨 숭고한 뜻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 내 다음 커리어는 어떻게 해나가야겠다 하는 거창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하고 있다. 아주 속없이 묘사하자면, 지금 회사에 날 들어가게 해준 잡코리아 이력서를 좀 업데이트한 다음, 헤드헌터들 보라고 공개 설정 돌려놓고, 입질이 오는 대로 거의 대부분 수락하고 있다. 오늘 면접 간 곳은 내 이력서를 하루에 한 번꼴로 들여다보던 곳인데, 면접비 5만 원을 주며 이르기를, 앞으로 서너 명 더 면접 본 다음 결과를 이번 주중에 알려 주겠단다.
심지어 그 잘만 하던 '기도하고 ~하기' 같은 것조차 안 하고 있다.
나쁘게 보면 완전히 내가 계획하고 내가 걸어가는 나의 길 같은 것이 되어 있다. 주님 이직을 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같은 기도조차 묻지 않은 채로 그냥 좀 수동적 피동적으로 진행을 하고 있다. 이렇게 얕은 믿음과 강력한 자기 고집으로 뭔가를 추진해도 정말 될까, 하는 걱정이 스스로 일어날 정도로, 혹은 마치 이직이란 작업이 그날그날 저녁밥을 먹을지 말지 결정하는 일과 꼭같은 정도로 간단하고 일상적이며 자의적 처분이 가능한 수준의 일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어쩌면 지금 내게 이번 이직은 그런 일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 조건들은 그만큼 간단하다. 세전 연봉 3600이 보장되는가? (신)분당선 한 번으로 도착 가능한가? 회사가 외부 투자 없이 돈을 버는 모델이 있는가? 나는 그냥 회사 자산을 유지 보수 개선 개발만 해주면 나머지는 회사가 알아서 하는가? 이 조건만 충족되면 나로서는 지원하는 ���사에 더 따질 게 없는 입장이다. 그러면 회사는 내게 물어보겠지.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재직하는 곳을 떠나려고 하세요?" 적당히 예상 질문 몇 개 준비하면서 이직 시작하려다가 이 간단한 질문에 말문이 막혔고, 답을 찾는 데 몇 주는 걸렸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그 답이 있다. 지금 회사에서는, 내가 열심히 일하면 일할수록, 모두가 어떤 수렁으로 빠지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지난 몇 달 간 무슨 초등 영어 라이브 스터디 방송 서비스 같은 것의 프로토타입을 만드느라고, 성인용 일상회화 교재의 학습 애플리케이션 API를 만든답시고, 지난 두어 해 동안은 무슨 B2C 서비스의 "공동구매"와 "전용쿠폰"을 지원해 보겠다고 오만 발버둥을 쳤었다. 늘 하던 대로 항상 유의하게, 의미 심장하게, 숭고하고 올바르고 유익한 무언가를 위해 이렇게 저렇게 해야지 해내야지 내가 못 하면 아무도 못한다 하면서 낑낑거리고 있었다. 그 자세는 나 스스로를 몰아붙였고, 내가 먼저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만들었는데, 돌이켜 보니, 그게 회사에 해가 되고 있었다.
비유하자면, 이가 없는 사람이 그럼에도 뭔가를 씹어서 먹겠다고 우기고 있는 상황에서의 잇몸이 된 기분이었다고 할까.
사실 이 회사는 B2B 사업을 잘 하던 회사였다. 그런데 몇 년쯤 전부터 쓸데없이 B2C 시장을 노려보겠다고 이 사업 저 사업 막 벌이기 시작한 게 여기까지 왔다. 해본 적도 없고 노하우도 없어서 그야말로 '이빨이 안 먹히는' 분야를 어떻게든 씹어먹어 보겠다고 꾸역꾸역 아가리를 벌려 뭔가를 밀어넣는데, 이걸 누가 씹어서 삼킬 것이냐, 하면 결국 다 개발팀이었고 그 절반 가량이 내 쪽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그래도 딴에는 지난 몇 달쯤 전까지만 해도 내가 해내야지, 내가 못 하면 누가 해, 하면서 어떻게든 해내려고, 어떻게든 이빨 같은 잇몸이 되려고 애쓰면서 사업적 요구와 고객 문의를 저작하려고 애썼다.
그렇게 잇몸으로 씹으면 정말 이 없이도 잘 살 수 있게 되나? 그럴 리 없다. 최소한 그 잇몸은 속으로 염증만이 더해갈 뿐이다.
그리고 몸은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로 잇몸의 고충에 관심이 없다. 정상적인 현대 치의학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가 없으면 틀니를 고려하지 계속 잇몸을 혹사하지는 않는 법인데, 회사라는 것은, "뭐야? 잇몸으로 씹으니까 되네?"라는 걸 확인한 순간, 더 이상 뭔가를 복잡하게 생각하기를 딱 멈추고는, 그달그달 씹을 할당량을 밀어넣는 식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무슨 공동구매를 진행하고, 무슨 수강 기간을 늘려주고, 결제 내역이 있건 말건 무슨 학급에 무슨 학생을 연결해 주고(이 기능은 함부로 쓰지 말라는 뜻에서 '도깨비방망이'라고 이름붙였다. 그리고 현재 이 기능은 우리 회사 백오피스에서 제일 인기 있는 기능이다)…
이런 상황에서 잇몸이 해야 할 일은 더 튼튼하고 더 잘 씹는 잇몸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무너져 내리는 것일까.
그래서 실제로도 무너져 있는 상태다. 왜 자꾸 씹을 수 없는 걸 씹으려고 할까, 왜들 이 신체에 이빨이 있다고 전제하고 행동할까, 싶어졌고 그마저도 이제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몸이 뭔가를 씹고 싶다는데야 별수 있겠냐고. 잇몸마저 없더라도 기어코는 씹고 말아야지. 나는 내가 속한 개발팀이라는 기관에서 유의미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또는 값진 뭔가를 해내려고 뜻을 품으려고 애썼는데, 그게 그저 뭔가를 주제넘게 씹어먹고 싶다는 어떤 욕구의 복무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그래서 요즘은 대놓고 혼잣말로 토로한다.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못 한다고 발 빼고 실제로도 못했어야 했다고. 이걸 내가 왜 해서, 할 줄 알아서, 해내서 이 모양이 됐는지 모르겠다고.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입의 주인의 입장이고, 그렇게 미련한 주인의 잇몸으로 봉사하는 건 모두에게 해롭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결론이 정리된 후에야 잡코리아 이력서를 공개했다. 되는 데까지만 이직을 시도해 보고 안 되면 안 되나 보다 하자는 느낌으로 별뜻 없이 그냥저냥 진행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전혀 초조하지 않고 나쁜 예감도 거의 없다. 완벽하게 비밀로 하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고, 대표님이나 팀장님, "미래사업팀"의 입장 역시 모르지만 말이다. 아무려면 어때? 내가 없다고 먹던 거 그만 먹을 회사도 아니고, 뭘로 뭘 씹든 거기에 무슨 대단한 결기가 있었던 적도 없었는데, 나라고 이번 이직을 그렇게 못할 이유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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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ptogun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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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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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든지 말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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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책”을 알고 있나.
문자 그대로, 글자가 없는 책인 것이다.
분량도 고작 10페이지밖에 되지 않으며,
이는 희망찬 초록색으로 힘껏 칠해진 표지 2페이지를 포함한 계산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책의 내용인데,
책을 열어보면,
첫 두 페이지는 어두컴컴한 검정색만이 가득 칠해져 있고,
다음 두 페이지는 선혈과도 같은 붉은색이,
다음 두 페이지는 결백한 흰색이 칠해져 있다.
그리고 마지막 두 페이지는 지면 전체에 금박이 되어 있어
펼치는 순간 천상의 그것처럼 번쩍인다고 한다.
거기서 책을 덮으면, 다시 푸르른 표지가 나올 뿐인,
1분만 있으면 누구라도 다 “읽을” 수 있는 책.
그러나 이 책은 역사적으로 대단히 많이 “읽혔으며”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번역”하여
출판, 판매, 배본하고 있다고 한다.
대체 그런 인쇄물에 무슨 읽을 것이 있기에,
이 책을 탐독하는 이들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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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든지 말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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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ptogun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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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에 대하여
오랜만에 만난 선배님과 할 얘기 못할 얘기 다 털다가 결국 김어준 얘기까지 나왔다. 이참에 입장 정리를 좀 해놔야 할 거 같다. 김어준이 내 본명과 이름이 매우 비슷하고 캐릭터도 겹치지만 별로 안 좋아한다. 랄까 캐릭터가 애매하게 겹쳐서 별로 안 좋아한다.
캐릭터가 겹친다는 건 뭐냐, 뭐 4차원이라든가 생각하는 게 맨날 국가 사회 민주주의 따위라든가 그런 것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비제도적이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도 그렇고 김어준도 그렇고 항상 제도권에서 칭찬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 제도 자체를 우회, 양동 또는 부정하는 방향으로 항상 뭔가 해내려고 해 왔다. 나의 경우 무료 라이선스로 풀어버리는 웹폰트 때부터 <바로그찌라시>며 이런 블로그 운영하고 있는 지금까지 실은 내내 그렇고, 김어준이야 뭐 딴지일보 때부터 뉴스공장 지금까지 여전하다. 뭐 사실은 어느 쪽이냐 하면 내가 김어준과 딴지일보로부터 영향을 받았지, 그 역은 아니다.
하지만 난 이제 제도적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김어준은 그 노력을 안 한다. 그 부분이 못마땅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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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때의 나, 굳이 선을 긋자면 트탐라가 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전까지의 나와 지금의 나는 여러모로 패러다임이 다르다. 지금의 나는 ‘혹시 할 줄 모르는 걸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이라고 우기고 있을 뿐이지 않은가’를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비싼 식당에서 밥 먹는 법을 알려고 의식하고 있고, 평범하게 대리 노릇을 하려고 야근하고 있고, 사람들과 공감하려고 애쓰고, 머리를 어떻게 주문하면 무난하고 깔끔한 컷을 얻을 수 있는지 물어보고야 마는 것이다. 이제 연애랑 운동만 하면 딱 그대로 제도권 일반인으로의 편입 완료일 것이다.
김어준은 그러지 않는다. 그는 분명 그가 할 줄 모르고 할 수 없는 일일 텐데도 그걸 인정하는 대신 어떻게든 변칙적으로, 우회 기습 저격하여 해내고야 만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매우 필연적으로 그걸 해내는 그 사람의 우상화가 매우 뚜렷한 경향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이 작업이 가능한 근거를 “무학의 통찰”이라고 퉁쳐 버리고 있는데, 이게 아주 기묘한 요약이다. 무학의 반대말은 학문이고 통찰의 반대말은 규범일 것이다. 그리고 사실 그게 바로 제도권의 요체를 이룬다. 언론, 정부, 학계, 업계, 뭐든 간에 말이다. (물론 그의 “통찰”들이 은근히 가리키는 정점에는 언제나 연성 애국주의와 연성 가부장제가 가미된 고전적 정치-경제 자유주의가 있다. 뭔가 요점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 이상 논하지 않고 하던 얘기를 계속하겠다.)
무학의 통찰이라는 것을 좀더 논하자면, 애초에 그것은 “어? 그 말대로라면 그건 좀 이상하지 않은가?”로 요약되는 일련의 직선적인 의문들로 구성된 사고 체계라 할 수 있다. 사람들, 특히 제도권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얘기들을 (가십으로써) 썩 좋아한다. 왜, 무신론자도 술을 마시면 신에 대해서 재미 삼아 토론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런 의문을 제기하는 전개라는 것이, 대충 “나야 뭐 잘은 모르지만 얘기를 들어보자면 한마디로 뭐뭐라는 건데...” 하는 소박하고 개인적인 얼개로 일관된다면, 그건 더더욱 일반 대중에게 개인적 몰입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그 대중이 그의 아이디어를 취사 선택하면, 그 과정에서 ‘공장장’에 대한 모종의 애착은 자연스러운 부산물로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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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도 내 (어설픈) 얘기를 듣다 말고 반박한 바, 그래도 ‘나꼼수’가 정치적으로 긍정적인 성과를 이것저것 내었지 않느냐? 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그러면 내 반론은 간단하다. 왜 그걸 제도권에서 하지 않느냐는 거다.
선배님과 얘기하다가 찾은 표현인데 나꼼수는 이명박 박근혜를 정말로 공격했다거나 견제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 정권들을 일단은 값싸게 조롱했고, 근본적으로는 ‘소화’시켜 줬을 따름이다. 좋은 의미에서는 그들 덕분에 그나마 많은 이들이 그 이상한 세월을 어떻게든 이해하며 지내올 수 있었고, 나쁜 의미에서는 그들이 한 일의 요체가 ‘놀려먹기’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그렇게 그들이 사대문 제도권 밖에서 광대 노릇 잘 하고 있을 적에 실제로 사대문 안에서 매서운 제도의 매를 맞고 울던 이들은 따로 있다. 언론장악 저지하려고 싸운 이들, 뉴스타파, 김진숙님, 백남기님, 아현동과 밀양과 두리반, 용산, 팽목항과 안산 등등. 그들을, 실제로 제도와 싸우고 있던 이들을 김어준 사단이 정말로 조명하고 응원 지지 연대해 준 적은 없다. 그건 오직 그 팬덤만이 못 알아보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건 제도권의 싸움이고, 나꼼수와 김어준은 철저히 비제도권에서만 활개를 펴는 골목대장이기 때문이다. 단언할 수 있는 바, 김어준은 예은아빠 유경근님이나 김진숙님 면전에 서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를 것이다. 모를 수밖에 그런 거 생각 안해봤을테니까. 그가 생각하는 것은 이를테면 ‘음... 뭔가 이번 대선 득표 수가 좀 이상한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건데 그 K값인가 하는 그거 같은데...’ 따위이다. 그런 걸 너무 많이 생각하다 보면 결국 “더플랜” 같은 걸 크랭크인하고 만다. 나꼼수에 우호적인 듯했던 선배님도 “그건 뭐 물증이 없었으니까”라면서 쉴드 불가 선언을 했지만, 나로서는 만사 제쳐두고라도 정말 그걸 모르겠다. 아니 도대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같은 멀쩡한 부처를 때려서 뭘 얻자는 거야? 달리 때려볼 만한 권위 체계가 그렇게 없었어?
그랬을 것이다. 박근혜의 당선은 박정희 정치의 귀환이었고 그건 철권 공포 정권의 보증이었으니까. 이 시절은 정말로 모두가 쫄아 있었다. “판사님 이건 제 고양이가 썼습니다” 드립이 나오고 ‘코렁탕’ 용어가 복각된 게 이 시절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시절의 김어준은 모두가 그랬던 딱 그만큼 소심했고 비겁했고 몸을 사렸다. 이화여대에서, 한겨레에서, JTBC에서 최순실의 존재를 제도권 논쟁으로 불붙여주자, 그때에야, 소화할 만한 제도권 떡밥이 드디어 나타났으므로, 비로소 그는 다시 하던 대로 비제도권 위치에서 제도권을 까는 짓거리를 하며 공장장으로 복귀한다. 그렇다. 그는 정치계와 뉴스계의 ‘공장’이다. 원자재를 만들지 못하고, 소외된 시장에 관심 없으며, 원자재가 주어지고 시장이 주어지면 비로소 그 원자재를 맛깔나게 끓여 가장 큰 시장에 납품할 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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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어느 쪽이냐 하면 원자재를 캐고 싶다는 입장이지, 뉴스 공장 같은 걸 하면서 그걸로 거들먹거리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다. 그건 너무 안일한 전략이고 쉬운 길이다.
느닷없이 시비를 걸자면, 누굴 무슨 팟캐스트 하나 할 줄 모르는 병신 호구 머저리로 보는가 이 말이다. 사람들이 힘들게 정당 차리고 조합 세우고 언론사 만들고 노조 결성해서 성명문 내고 각성 촉구하고 백분토론 나가서 싸우고 삭발하고 박사 따고 하는 것은, 그들이 김어준보다 못한 게 있어서가 아니라, 그게 정공법이기 때문이다. 사회를 바꾸고 싶어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굳이 별도의 오락 소비재를 만들지 않는다. 대신 제도가 승인할 수밖에 없는 요건들을 달성하며 전진한다. 진정한 변화의 코어에 그게 있기 때문이다. 나꼼수가 나온 직후 얼마나 많은 전문 직업인들이 “나는 OOO다” 팟캐스트를 만들었다가 그만뒀는지 아는가? 그들은 실제로 바빠서, 달성할 일이 있고 지켜야 할 것이 있어서, 그리고 그걸 바로 하는 편이 팟캐스트 몇 번보다 더 효과가 좋아서 그냥 그만둔 것이지, 말빨 떨어지는 김어준 열화 카피여서 좀 하다 관둔 게 절대로 아니었다.
번듯한 제도권 라디오 방송국 호스트 자리까지 꿰어찬 지금쯤 됐으면, 김어준이 해야 할 일은 딴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일선에서 싸우고 계신 분들에게 존경을 보내고, 그들을 세상에 소개해 주고, 어떻게 연대하면 되는지 알려주고, 그들의 말을 들어 주고, 사회가 이들과 함께 진보하려면 어떡해야 하는지를 같이 고민하며 적당히 일선에서 물러나 주는 일이다. 근데 그는 여태까지도 뭘 하고 있는가? 맨 앉아서 지난 며칠간 뉴스나 톺아보면서 썰 풀고 숟가락 얹고 요즘 뜬다는 아티스트나 대충 초대해서 힙찔이 놀이를 한다. 그 과정에서 (유튜버들을 포함한 대다수 아마추어 연예인들이 그렇듯이) 자기 자신을 고객들에게 상품으로 제공해 형성한 팬덤으로 연명하고 있다. 세상에 이런 전파 낭비가 또 있을는지?
나도 그렇게 살 뻔했다. 여러분이 안 해봐서 모르는 거지, 막상 해보면 꽤 비용 대비 효과가 큰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비제도적 방법으로 제도적인 뭔가를 놀려먹기’이다. 방금 막 새로 부임한 젊은 선생님에게 다짜고짜 “첫사랑 이야기 해주세요”를 요구하며 그를 기선 제압한다거나, 모두가 탈주한 조별과제의 PPT 맨 끝에 그들의 이름을 나열하고 누구 때리는 짤방 하나 같이 붙여준다거나 뭐 그런 것들 말이지. 나도 이런 거 좋아했고 어떤 지점에서는 꽤 잘 했고 무엇보다 다른 전략이 달리 없었다. 근데 멀쩡한 수입원이 생긴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그거 다 뭘 잘 몰랐거나 뭐가 많이 궁했거나 해서 별수 없이 택한 틈바구니 생존 전략이었구나, 하고 새삼 부끄러워지곤 한다.
내가 김어준을 별로라고 생각하는 건 그래서인 거 같다. 내가 이제 와서 좀 민망해하는 라이프스타일을, 전략을, 방침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고 여전히 그렇게 번듯한 총수 노릇 하며 잘 먹고 잘 사는 그를 보며, 한때 내가 닮았던 그를 보며 공감성 수치랄지 동족 혐오랄지 하는 뭔가를 느끼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와 저게 뭐냐, 얻어걸리면 얻어걸리는 거고 아니면 말고 하는 식으로 진짜 막던지네, 나보고 저런 아무말 대잔치 하라고 하면 이젠 못할 거 같은데, 어떻게 저 사람은 저 나이 먹고 저게 되지, 역시 이름에 ‘어’자 들어가는 사람들은 다 똑같이 남들 눈에 좀 어눌해 뵈는가? 하는, 좀 비논리적이고 개인적인, 뭐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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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ptogun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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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아침
요즘 SHIROBAKO를 3번째 시청하고 있고 이번에는 막주행을 하고 있다. 막주행이란 내키는 에피소드부터 막 보는 것이다. 원래 어떤 장면인가가 다시 보고 싶어져서 라프텔 켜서 뒤지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요며칠 추억에 젖어서 (이제는 사실상 고전이 돼 버린) 이 작품을 이쪽 봤다 저쪽 봤다 하고 있다.
열심히 산다는 거 뭘까. 나도 직업인이고 나름 기술직이지만... 어떡하면 좀더 멋있게 일을 할까 내 커리어는 어떻게 될까 뭐 그런 걸 좀 생각해보게 된다. 일단은 앞만 보고 가야 하는 시기인 거 같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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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ptogun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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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고통과 완전한 미지
미국 2020 대선 민주당 쪽 후보로 쟁쟁한 샌더스와 워런이지만, 지금 워런 쪽에서 “여자는 대통령 되기 어렵다고 샌더스가 그랬다”는 폭로(?)가 나와서 매우 껄끄러운 상황이라는 모양이다. 솔직한 속내라고 한다면, 샌더스는 “아니 이 여편네는 뭐한다고 후보로 뛰쳐나와서 사람 힘들게 한담”일 거고, 워런은 “아니 이 영감탱이는 뭐한다고 후보로 뛰쳐나와서 뻔히 질 싸움을 한담”일 것이다. 그 속내가 결국 드러나고 말았다고 해야 할까.
이대로라면 민주당 최종 후보자는 바이든이 될 것 같다. 한마디로 어부지리라는 것인데, 이미 "닥치고 버니"를 외치는 이들의 표가 일부이고, 열받은 여성들의 표가 일부라면, 둘 중 어디에도 속하기 싫은 사람들은 이도 저도 아니면서 대마불사가 될 듯한 곳에 몰릴 것이고, 사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꼼짝없이 수적 다수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냥 그대로 뿔뿔이 흩어져 바닥에 버리는 사표가 되거나. 모를 일이다. 천조국의 정치를 내가 어찌 감히 예측하겠는가?)
문제는 그래서 결국 그가 트럼프와 붙었을 때 어떻게 될 것이냐인데, 일단 바이든 VS 트럼프라면 당연히 트럼프가 이길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 대중은 완전히 낯선 모험보다는 차라리 익숙한 고통을 택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그렇게 단정적으로 예상하기 싫어서 -- 너무 슬픈 결말이 아닌가 말이다 차라리 죽을 쒀서 개를 주지 -- 일단은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상상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그야말로, 내 얕은 예측이 확연하게 틀리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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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완전한 낯섦보다는 고통스러운 익숙함을 선택한다. 뭔가가 잘 알려져 있다는 것은 무슨 수를 쓰든지 쓸 수 있고 어떻게든 상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모르는 무언가를 처음부터 알아 가며 그걸 상대하기까지 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들은 대체로 카인의 후예들이고, 그들의 세계에는 신의 오른손이 인도하는 불기둥 같은 명확한 뭔가가 없어 왔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이미 알고 있고 겪어본 것들을 취하려고 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게 아무리 고통스러울지언정, 익숙한 쪽을 택하고 만다.
최근에는 사람들이 공갈로 만들어 유튜브에 올린 가상 재난 방송 시나리오 영상을 조금 봤다. 이를테면 초신성 폭발 시 몇 날 며칠에 걸쳐 끝도 없이 고온 폭우가 계속되고 그동안 사람들은 절대 지하 벙커에서 나오지 말라는 경고 방송만 주구장창 듣게 된다는 식이다. 뜻밖에도, 어떤 부분에서 머리가 저려 오는가 하면, 어떻게 4주 이상을 물과 비상식량만 들고 지하에 처박혀서 버티란 말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건 정말이지 미지의 모험이고, 심지어 비관적인 것이어서, 와 이거 어쩌라는 말인가, 하는 차원으로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이 있었다.
샌더스가 주장하고 요구하는 방향에는, 어떤 의미에서든지, 아직 미국이 가 보지는 못한, 랄까 지금의 미국에게는 완전히 낯설고 이상한 좀 다른 나라가 있다. 워런의 나라는 샌더스의 나라보다는 좀 덜 이상하고 낯설다. 바이든의 나라는 뭐 말할 것도 없다. 트럼프의 나라는 고스란히 지금 살고 있는 그곳, 우리나라만도 못한 건강보험 체계를 놓고 입씨름을 하는 나라이다. 미국인들은 어떤 나라를 승인하게 될까? 2020년에 메이플라워호는 과연 출항할까? 사람들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지옥’이 뭘 의미하는지 알까? 아무라도 붙잡고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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