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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illera · 10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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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번의 시도에도 늘 읽기에 실패했던 헤르만헤세의 "유리알유희"를 요즘 읽고 있다. 이번엔 다 읽을 수 있을까. 헤세 문학의 결정체이자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데미안부터 싯다르타까지의 사유 모두를 아우르는. 헤세가 10년에 걸쳐 완성했다는. 헤세가 동양철학에 얼마나 정통했는지, 그리고 여러 예술과 문학 등에 얼마나 집요하게 파고 들었는지가 저변에 깔려있는 그야말로 대작이다. 예전엔 전혀 이해가 안되어 몇번이고 놓아버렸던 책인데, 이제 약간은 갸늠되는 부분이 있어서 그의 사유를 조금 따라가 보고 있다. 많은 곳에 줄을 긋고 페이지 귀퉁이를 접어가며 읽고 있는데, 그 중에 이 부분에서 계속 곱씹어져서 진도가 안 나간다. 어릴때, 나는 어른들(선생님)이 메타적 사고에 대해서는 설명해주지 않는 것에 늘 불만이 많았다. "이것을 해야 하는 이유, 이것을 아는 것에 대한 의미."이런 것들은 늘 생략되고 내용적인 부분이나 구체적이며 지엽적인 사실의 학습과 습득에 골몰하는 것이 참 문제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 부분은 지금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생각이었다. 그 풀리지 않는 의문(문제)의 그 답을 찾은 느낌이다. 우리는, '의미'를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역사적 '사실'말고는 아이들에게 역사'철학'을 가르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정확하게는 그런 것은 가르쳐질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그것은 스스로 깨닫거나 스스로 학습해야 할 뿐이었다. 그 것을 스스로 의미부여하고 찾아가는 것, 그 기회를 부여받은것이 개개인의 삶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의미'에 존경심은 가지되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말게." -- 이 문장에서 한 참을 머물렀다. 모든 개체와 사실과 지식에는 어떤 메타적 철학과 의미가 분명히 존재한다. 나를 가르쳤던 수많은 스승들은(내가 미쳐 스승이라 대접하지 않았던) 그 부분을 알고 있었던지 몰랐던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사람이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 그리 많지 않음을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언제나 "언어(대화)"로 모든 것을 말해야 하고 말할 수 있고 표현해야 하며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던 내 생각이 잘못이었음을 느꼈다. 이를테면 사랑, 신념, 자유. 돌이켜보면, 삶에서 중요하면 중요한 것일 수록 설명되어질 수 없었다. 다만 그 것을 누리고 경험한 개인의 삶과 이야기만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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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illera · 11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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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시인은 이야기 된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고 했다. 고통을 고통이게 만들어주는 것은 드러내지 못하는 눈물일 뿐일게다.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절실하다는 것이고, 부끄러움 조차 잊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고통의 종착역이다. 고통은 입밖으로 꺼내지는 순간 고통일 수가 없다. 요즘, 평생 드러내지 못했던 고통이 치유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되어버린 나의 고통은 이제 더이상 고통이 아니다. 동동 걷어부친 팔로 손짓을 해가며 설명을 할 필요도, 낮은 목소리로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그저 모든 것을 안다는 표정과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서 있다. 뭘 그런게 고통이냐,는 표정이 지속될수록 나는 고통에서 구원받고 있다. 나의 고통을 알지 못하는 그가 나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런 아이러니를 예전엔 알지 못했다. 이성복 시인은 또한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했다. 제스춰만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를 내 사랑이 조금씩 무게를 가지게 된 것도 방법을 버리게 되면서 부터인것 같다. 담백해지고 있다. 채우지 않아도 부족함 없는 현재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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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illera · 11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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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시인)을 편애하는 편은 아니었으나,(그렇다고 많은 시인을 아는 것도 아니나,) 요즘은 제대로 내게 꼭 들어맞는 시인을 발견했다. 원래부터 알고 있던 시인.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에서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이번에 나온 신작시집 함민복의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은 동어를 비틀어 살짝 다른 방식으로 제시하여 역설과 반어를 만들어낸다. 인위로 만들어 꾸며진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일상적 ‘낱말’을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사냥하였다. 그렇게 장만된 ‘시어’는 평범하되 이미 하나의 오브제objet가 된다. 냉정한 현실인식도 섬세한 관찰력도 모두 마음에 든다. 한 편의 시詩도 버릴것이 없다.
2. 짧디 짧은 독서량으로 판단컨데, 유명한 인문학자들이나 시인이나 철학자들은 전부 반자본주의자이다. 자본을 문제삼지 않고 앞으로 인간의 삶에 변화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돈을 문제삼지 않고, 돈에 목 매달려 있는 상태로 인간적 삶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역사는 진보進步한 적이 없다. 오직 억압하는 자들만이 진보를 주장해왔다."라고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이야기했다. 지금은 힘들지만 나중에는 결국 해결될 것이라 보는 진보에 대한 맹신은 우리가 당면한 억압 상태를 도리어 은폐시킬 뿐이라고. 이 내용을 읽으며, 다시 역사를 생각한다. 역사에서 혹은 삶에서 진보라는 단어를 쓰는 사람들의 정치성과 이데올로기를.
실은 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읽고 있던 터였다. 철학자들의 통찰insight은 정말 예리하다. 또한 예민하다. 아. 정말 이런 말을 벤야민이 했단 말이지! 아, 나는 왜 철학을 제대로 읽지 않았나.
요컨데 진보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학습된 현상일 뿐이다. 미래를 위함이다,라는 허울좋은 명분속에 우리는 그저 소모될 뿐이다. 언제나 미래를 말하는 자들은 주어를 말하지 않는다. ‘누구를 위한’ 미래인지를 밝히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과 관계없는 타인(타자)을 위해 달콤한 말을 할 만큼 아름다운 존재는 아니다. 따라서 장미빛 미래를 위한 현실의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것은 전부 허구이다. 불확실한 미래는 언제나 확실한 자본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면서도 또한 자본을 필요로 하는 주어를 분명히 말하지 않는다.
미래의 불확실성과 자본의 비인간성에 맞서는 일은 현재를 향유하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현재는 사랑이고 자유이며 그 자체가 생존과 동의어이다. 다가올 미래를 두려워하는 일에 현재를 저당잡히는 일은, 흔해빠진 관념으로서의 지식을 숭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한 화폐보다 더 귀한 ‘현재의 시간’을 자본가에게 바치는 행위와 같다.
3. 그리하여 사랑은, 바위에 계란을 부딪히는 일과 같고 현재를 불사르는 낭비와 같으며 실패를 전제로 하는 무모함과 같아야 한다. 미래를 위해, 진보를 위해, 목표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일만이 옳다라고 학습될수록(이것이 진보를 이야기하고 자본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논리이다) 사랑은 먼나라의 일이다. 그러나 실패가 결론이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언제나 사랑은 실패한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그러하고, 연인간의 사랑이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담대하게 뛰어든다. 실패가 달콤할 수 있는 유일한 삶의 형태가 사랑일 것이다. 일말의 희망도 없이, 희망이 없다는 것도 없이, 실패에 몸을 던지는 인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앞뒤 계산하고 힘들여 생각하고 다가가는 자본이 목표가 되는 삶에 비해 언젠가 지고마는 꽃같은 삶에 넘쳐나는 용기는 얼마나 강인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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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illera · 11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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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이 옳다면 당신의 사랑도 옳을 것이다. 특정 누군가의 사랑만이 혹은 특정한 방법의 사랑만이 짙고 농밀한 것이라는 '단정'은 항상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조바심만 느끼게 만든다. 언젠가의 우리는 돌아봐야 사랑임을 알았다. 사랑안에 있을때 우리는 사랑을 가장 몰라보았고, 사랑안에 있을때 우리는 사랑을 가장 괴로워했다. '고통을 담보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라는 말을 이제야 받아들인다. 사랑은 그렇게 나이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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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illera · 11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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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비가 쓸쓸하다 느낄때에는 모직코트에 묻은 빗물을 털어낼 때다. 빗물이 옷깃에 스며들지 못하고 표면에 간신히 매달려있다가 힘없이 다시 떨구어진다. 누구의 마음으로 쉽사리 스며들지 못하는 그 차가움이 얼마나 쓸쓸하게 느껴지던지. 그래도 사랑하는 일처럼 비가 내리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엉킨 가지마냥 두서없음이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을 고쳐본다. 삶 중간 중간에 눈물조차 얼어버리는 추위가 있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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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illera · 11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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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갈구하고 있다. 지금과는 다르게 살고자 하지만,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아직 모른다고 했다. 천천히 가자 했다. 자잘하게라도 하고 싶은 것을 하며 현재에 시점을 두고 현재를 함께 하자,했다. 끝끝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못 찾을 수도 있다고 말해두었다. 그냥 그러다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말해두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라고 그가 말했다. 그냥 걷자, 했다. 그냥 같이 걷자, 했다. 문득 드는 생각. 한 사람을 알아가는 일은 "하나의 세계"를 여행하는 일과 같다. 만권의 책보다 한명의 사람이 한 개인의 생애 동안 더 소중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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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illera · 11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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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머물지 않았다(Le Passé). 마르지 못한 페인트처럼 누구의 마음에도 덧칠하여 마르지 못한 그들의 사연처럼. 같은 사건 속에 있어도 받는 상처는 모두 같을 수 없다. 페인트 칠을 해도 빨리 마르지 않는 그 과거 때문에, 내 마음도 빨리 마르지 않아 걸리적거리는 과거 때문에, 살아가는 일, 원래 그렇게 질척이는 것이라 체념하고 있는 나를, 나의 유년기를, 보여주는 영화 같았다. 영화가 나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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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illera · 11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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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워진 가을에 붉어진 마음이 차마 곁을 떠나지 못해 마지막 애처로운 입맞춤을 합니다. 당신의 품에서 떨어져 내려왔어도 종착은 결국 넓은 그의 물그림자. 그의 숨결을 느낍니다. 이렇게라도 머물고 싶었습니다. _주왕산 용연폭포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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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illera · 11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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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을 무한으로 미분하면 아무것도 끝일 수가 없다고 했다. 우리는 늘 영원을 살면서도 그 다음을 기약한다. 그렇게 중간적 존재이면서도 불온한 존재이다. 다만 우리는 망설이지 않고 즉각적일때만 가장 인간적일 것이다, 라고 어딘가에 메모한 적이 있었다. 우연히 읽게 된 책에서 얻은 사유의 꼭지. "인간에게는 모두 같은 단점이 있다. 살기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순간을 살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_에밀시오랑,<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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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illera · 1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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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음에 드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에 두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라고 누군가가 썼다. 그래, 나도 그랬다. 바로 그것이었다. 2. 살아가면서 사람이 모두 비슷한 종류의 깊이로 삶을 꾸리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어느 누군가가 부럽기도 했다. 나도 더 깊이 있길 원한다. 내 삶을 내 것으로 살아가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내 삶이 누군가의 삶에 중요한 부분이 된다는 것은 더 중요한 문제이다. 또한 누군가의 삶이 내 삶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 된다는 것은 더없이 중요한 문제이다. 이미 그것은 내가 그를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진한 인생을 살고 싶다. 3. 사랑을 찾으려 애쓰지 말고, 스스로 사랑이 되어버리면 어떨까. 사랑에 대한 가장 적극적이고 바람직한 자세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이 되어버린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이상형의 모습으로 내가 달라지고 닮아간다는 뜻이다. 그렇게 내가 찾던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사랑이 스며들지 않을까.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비슷한 수위에 있는 사람들끼리 만나게 되니까. 사랑이 되는 일, 그것이 살아가는 일에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4. 지금 할 수 없는 것은 나중에라도 할 수 없다. 지금 사랑하고, 지금 이해하고, 지금 말 나온 김에 만나자. 지금 안되는 것을 나중에 하겠다 하는 사람, "언제 밥 한번 먹자!"라는 말만큼이나 신뢰가 생기지 않는다. 지금 한 발 한 발 다가가고 일하고 사랑하고. 지금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어느 시점 어느 공간에서도 우리는 행복할 수 없다. 행복은 지금 이 순간이다. 당신을 사랑하는 때는 지금 이 순간이며 다음은 없다. 나중에 더 잘 하겠다, 더 사랑하겠다,는 없다. 그 허황됨을 나는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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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illera · 1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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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혁명을 이야기하던 날들은 지나가버렸다. 술 떨어지고 제각기 지갑을 찾아 집에 돌아가버렸다고 이야기했던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시 처럼. 내 삶의 한 장막이 지나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변화보다는 안정이, 저항보다는 관계가, 새로움보다는 익숙함이 좋아져 버렸다. 그러함에도 나는 변화, 저항, 새로움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칼을 겨누지는 않겠다는 결의(!?)를 세워본다. 어제 스물다섯살 아리따운 꽃처녀(꽃 아가야;)와의 대화에서 나의 옛 모습을 보았다. 옛 모습이 보였다는 뜻은 지금 현실에서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겠지.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엄마가 나를 너무 가르쳤다 하셨듯이.  그런데, 나는 너무 많이 알아 삶이 비극이 된다는 것은 믿지 않는다. 너무 많이 아는 만큼 가져야 할 책임이 크다는 것을 안다. 그 무게감을 알기에 더 신중해야 한다는 것도 안다. 무엇이든 많이 아는 자가 가져야 할 것은 지혜이며 인내이며 또한 책임이겠지. 나는 여전히 나의 길에서, 조금더 깊어질 수 있음에 감사하고 있다. 2. 1과 관련이 있겠지만, 문득 떠오른다. 나희덕은 '속리산에서'라는 시에서 '산은 높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해주었다. 밥 끓여먹는 삶이 높은 산보다 더 가파르다며 삶도 높이 오르기보다 깊이 들어가라고 했지. 나는, 어느 지점에 와 있을까. 깊이 들어가는 삶, 그래서 삶의 향기가 조금 더 진해지는 삶. 어디에 와 있을까. 3. 금요일이다. 연휴에는 무엇을할까, 생각을 하다가 영화를 진탕보고 해운대 앞바다에서 크림생맥주를 마시는 것으로 가닥을 잡아본다. 그리고, 스페인음식점에서 샹그리아도 마실까. 물론 이 모든 일정은 혼자서. 4. 카메라를 팔아치울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필름 카메라로 넘어갈까 생각해보고 있다. 또한 성능 좋고 가벼운 똑딱이로 넘어갈까. 루믹스나 니코. 정도를 생각하고 있다. 제 카메라를 사실 분..? 니콘 D300입니다. 렌즈는 니코르 16-85mm이구요. 관심있으신 분 연락을.(만컷 안찍었고, 렌즈도 완전 깨끗합니다;;) 5. 본의아니게 글을 써서 문화상품권 5만원을 받았다. 이걸로 부업이라도 해야 하나, 싶은 생각. 켁. 이걸로 아마도 나는 앵벌이를 당할 것 같은 느낌이다. 고작 세시간 투자하여 허접한 한 꼭지의 글을 써서 5만원이라니. 6. 신세계 프리미엄 아울렛에서 응모한 비엠떠블류 미니, 는 정말 당첨될 확률이 있을까?(공허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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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illera · 1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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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악은 좋긴하나 호흡이 워낙 중요해서 잘 하기가 어렵다. 이번 공연은 서울대 출신 젊은 신예들이 결성한 콰르텟 "플로라" 의 공연. 생각보단 연주 깔끔했다. 드보르작의 현악4중주곡들이 아주 멋지다는 감상과 더불어. 교향곡에 매몰되었던 내 취향을 좀 바꿔볼 기회,가 온 듯. 연주가 끝나고도 음악에 납작 엎드려 일어나질 못한다. 한여름밤의 쇼팽이라, 그것도 야상곡. #파주 헤이리 카메라타 음악감상실에서. (삼남지방에는 왜 이런데가 없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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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illera · 1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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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전에 "어떻게 지내세요?"라는 말에 선생님께선 "분열된 삶을 사는 중이다."라며 술잔을 비우셨다. 그 단어, 그때의 나에게 딱 나에게 맞는 단어 같았다. "분열." - 선생님께서 생각하신 그 맥락과 나의 맥락이 같은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랬다. 겉과 속이 다른듯한 나의 삶에 괴로워하며 신음을 물었던 적이 많았다. 갑자기 생각이 난다. 분열적인 삶. 그렇게 고민을 퍼마시던 그 술자리, 그 선생님, 그립다. 얼른 여름이 되어야 할텐데. #2. 요즘만큼 단순하게 사는 것이 익숙해진 적이 내 평생에 없었다. 생각을 머리에서 비워내는 것이 이제 내 의지에 의해 가능해졌다. 혼자 보내는 시간에 복잡한 상념에 잡히는 일이 잘 없다. 그러니 깊이 생각하는 것도 조금더 집중력이 생긴것 같고, 잡스러운 생각을 물리치는 기술(?!)도 어느 정도는 터득한 것 같다. 방법은, 매 순간에 집중하는 것. 밥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그저 그 자체에만 나도 모르게 몰입하게 된다.(요가하면서 더 많이 달라진것 같다. 그래서인지 확실히 피로도는 많이 줄었고, 몸에 힘이 생겨나는듯 싶다.) #3. 피아니스트 김선욱. 베토벤이 곧 잘 어울리는(그래서 많이 놀랜) 피아니스트로 인정. 어제의 부산시향과의 브람스 피아노협주곡 2번은 그야말로 환상적. 뭐, 무아지경이었는데, 뭐, 그냥, 너무, 잘하더라. 테크닉과 감성을 적재적소에 잘 배열한, 아주 부드러운 터치와 강렬한 힘의 배열은 뭐, 더 할 말이 없었는데. 땀이 범벅이 된 얼굴로 50분간 협주곡을 완주하고서 앵콜로(잔인한 앵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비창) 2악장을 연주할 때 나는 뭐 거의 넋이 나간. 너무 쉽게 첫 음을 짚더니(그건 정말 자기 호흡에 의한 첫 음이었다. 인위로 감정을 잡은게 아니었다.;;) 절제된 베토벤 특유의 분위기를 생각보다 너무 잘 잡아내었다. 탄성이 절로 나왔던. 나는, 김동률이 페이스북에서 김선욱의 베토벤을 듣고 와서 온갖 찬사를 올려놓았던 글을 보고도 "그래도 나는 믿지 않는다. 너무 젊다."라고 코멘트를 달았는데. 나의 그 코멘트를 당장 지워야 할 정도였다. #4. 나는 때로, 아니 자주, 아주 "저렴한 인간"이나, 절대로 "쉬운 여자"는 아니다. 명료하다,는 주위의 평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처럼(완곡한 표현임을 안다) 나는 생각을 나누고 이야기를 하며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또 상대의 의견이나 이야기를 듣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해주는 것은 더없이 좋아한다. 그런 사람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면 아마도 인생의 한부분에서 나는 성공이라, 감히 부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여자"로 보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먼저 "사람"이고 싶다. "동지"이고 싶고, "인간"이고 싶다. 이전의 사랑은 늘 이런 순서였다. 여자이기 이전에 인간. 사랑,을 말하며 노골적으로 "여성성"을 요구하는 경우는 아직 낯설다. 나는 한번도 그런 방식으로 내 사랑을 증명하고 증명받아 본 적이 없다. 나는 아무에게나 나의 "여성성"을 보이지 않는다. 또 나의 의도에 의해 "여성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나의 여성성을 보았다면, 나를 정말 자세히 지켜보았다는 뜻이거나 내가 그 사람을 사랑했다는 뜻일테다. 나는 아무에게나 "여자"이지는 않는다. 모두에게 친절할 지언정, 모두에게 상냥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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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illera · 1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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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에서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드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거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 윤동주,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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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illera · 1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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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미드나잇, 어른의 성장일기.
우리는 다를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는(젊은이들은 늘 그렇지) 제시와 셀린은 기차안에서 싸우는 부부들 틈에서 서로에게 말을 걸게 되었다. "저들은 왜 이혼을 안할까요?" 라는 대화등을 주고받으며, 세상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그렇게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들은 2년뒤에 비엔나에서 다시 만나기로하고 연락처도 주고받지 않은채 헤어졌다. 9년이 지났다. 엇갈렸던 지난 시간을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은 겨우 두시간 남짓. 그러나 9년 뒤의 이들의 만남을 영화적(우연적)이라고 말하고 싶은건 여전히 환타지를 원하는 관객의 오류이다. 제시는 셀린을 찾기 위해 그들의 이야기로 수년간 소설을 썼고, 셀린은 그 소설을 읽고 제시를 찾아갔다. 그들은 서로를 위한 노력,을 시작하고 있었다. 사랑의 시작은 이제 고작 여기서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우연히 만나 하룻밤을 보낸 불꽃같은 비포선라이즈, 가 아니라 다시 확인할 수 있는 롱테이크 비포선셋. 다시 9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먼 길을 돌아 사랑을 선택하고 살아가고 있지만 삶 자체는 그리 녹록하지 않다. 비포선라이즈 첫 장면에서 왠 부부가 싸우는 모습 그대로를 아무렇지 않게 재연하듯이 그들은 일상에 서로의 모든 것을 맡기고 있었다. 때로 지루해하고 때로 경멸하고 때로 불같은 감정을 느끼며. 그리고 여전히 묻는다. "나랑 언제까지 살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지겨워지지 않을 것 같아? 우리 두 딸이 없었다면 우리 계속 살고 있을까?" 삶은 이런 물음 그 자체인가보다. 살아가는 일 자체가 사랑이고 사랑은 단순한 감정만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달까. 비포 시리즈는 어른의 성장일기같다. 그렇게 높았던 이상만을 쫓는 찬란한 20대에서 이상을 현실에 투영하여 책임지는 황홀한 30대로, 그리고 현실을 이상으로 바꿔보려는, 그 안에서의 발버둥이 처절하고도 사랑스러운 당찬 40대로. 그리고 이후의 시간을 관조하며 생과 사랑이 둘이 아님을, 현실과 이상이 둘이 아님을 알게 되는 노년기로. 모든 인간이 피해갈 수 없는 성장일기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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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illera · 1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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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감독: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 detachment(감독:토니케이) Welcome(감독:필립 리오레) 그랜토리노(감독:클린트이스트우드) 영화를 보는 동안 인간의 삶을, 교육의 현장을, 인간의 부조리를 진하게 느껴야했다. 이런게 영화구나, 하는 요즘이다. 특히나 학교에 몸담고 있다면 detachment는 꼭 보길 권하고 싶은 영화이다. 그리고, 정말 나를 놀라게 했던 영화는 애니메이션의 그 이상을 보여주는 "바쉬르와 왈츠를"(감독:아리폴만)였다. 이스라엘에서 직접 만든 팔레스타인지역 분쟁을 반성적 비판적 관점에서 만든 영화. 마지막에 픽션후의 더 픽션같은 팩트를 접했을때의 마음이란. 원래 영화에 큰 관심이 없었다. 영화보다는 공연이 나았고, 의미없는 감정배출구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듯한 느낌이 많아 단순한 영화들은 그저 한번 스쳐가고 잊어버리기를 반복했기에 크게 의미를 둔 "작품"이 없었다. 작년 국제영화제에 가보기전까진. 그런데, 그런 작품들은 다 광고가 없고 상영관 확보도 어렵다. 그러고보니 너무도 많은 나라에서 너무도 멋진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턱이 없다 싶었다, 발품팔고 귀동냥해서 여기저기 찾지 않고서는. 로맨틱코미디조차 우디앨런이 만들면 다르다는것을 알았다. 가벼운 주제를 휘발성으로 만드는 것은 쉬우나 가벼운 주제를 웃기며 각인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우디앨런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한데, 이제야 영화를 고를때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게 된다. 영화도 예술이구나,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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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illera · 1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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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히 많은 길이 모두 너에게로 향하는 길이었다는, 나희덕 시인의 말을 믿는다. 언젠간 너를 부르는 일이 어느 호수에 날아오르는 새떼들처럼 마음이 쩡- 하고 울릴 날, 있.겠.지. #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카레니나를 읽고 있다. 그래서 내 마음 이렇다. 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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