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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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디디의 우산,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동안 저 깃털 아래에서, 저 그물 아래 이 탁자에서 온갖 이야기를 나눠왔고 오늘 아침에도 이 자리에 모였다.
2017년 3월 10일. 오늘은 어떻게 기억될까. 오늘 제18대 대통령 박근혜는 헌법재판소 재판관 전원의 찬성으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었다.
사람들은 오늘을 어떻게 기억할까. 탄핵이 이루어진다면 혁명이 완성되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했지. 동학농민운동, 만민공동회운동, 4·19혁명과 87년 6월항쟁까지, 한번도 제대로 이겨본 적 없는 우리가 이기는 것이라고. 이 나라 근현대사에서 우리는 최초로 승리를 경험한 세대가 될 것이라고. 탄핵을 바라며 거리로 나선 사람 모두에게 그 경험은 귀중하고 벅찬 역사적 경험이 되어줄 것이고 그리고... 그렇지 내게도 그러할 것이다. 산다는 것은 우리보다 먼저 존재했던 문장들로부터 삶의 형태들을 받는 것... 저 문장을 빌려 말하자면 우리는 지난 계절 내내 새로운 문장을 써왔고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이제 그 문장은 완성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그날일까. 혁명이 이루어진 날.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혁명은 마침내 도래한 것일까.
김소리는 어젯밤에 내게 전화를 걸어서 내일은 언니들 광장에 나가지 말고 자기와 있으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탄핵재판 결과를 혼자 볼 자신이 없으니 같이 있자고. 그래서 오늘 아침 우리는 이 집에 모였다. 오전 열한시부터 시작된 선고는 11시 21분에 끝났다. 오늘 아침, 광화문과 헌법재판소 앞에 모인 사람들도 그것을 전부 들었을 것이다. 파면이 선고된 순간에 광장은 환호성과 함성으로 난리였을 것이다. 승리와 완성의 축제였을 것이다. 조금 쌀쌀했겠지만 춥지 않았겠지 상관할 일이 아니었겠지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추위 같은 건. 어쩌면 그 밤들에 그랬던 것처럼 파도를 탔는지도 모르겠다. 축배를 전하듯 파도가 앞에서 뒤로 이 끝에서 저 끝으로 거리에서 거리로 그리고... 그리고 파도가 가고 남은 자리에 이 식탁이 남는 광경을 나는 생각해본다. 지금 이 집에서 낮잠에 든 사람들 우리가, 저 조그�� 그물망 아래 이 식탁에 남는 광경을.
이제 모두를 깨울 시간이다. 그들을 흔들어 깨우는 동안 여기에도 혁명은 있을까, 나는 궁금할 것이다. “한번 일어났다. 그러면 그것은 다시 일어난다.”(2017년 9월 22일 세월호아카데미. 박래군 416연대 공동대표의 프리모 레비 인용을 재인용함. “사건은 일어났고 따라서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돌베개 2014) 오래전 내가 읽은 책에 그런 구절이 있었는데 그것이 여기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까. 혁명, 그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까.
펼쳐둔 책들을 모두 덮어 식탁 구석에 쌓는다. 오시프 반델슈탐의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가 맨 바닥에 놓였다. 이 시집의 편집자는 어째서 그 시의 첫 구절을 시집의 제목으로 삼았을까.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는 세계란 내게는 아무래도 죽음인데 시집을 담당한 편집자에게는 어땠을까. 그에게도 죽음이었을까. 누구에게도 목격되지 못한 채 그처럼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는 세계에 속해버린 만델슈탐을 그는 추모하고 싶었을까.
오시프 만델슈탐은 스딸린의 숙청작업이 이어지던 1938년 5월에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가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게 사라졌다. 금지되어 압수당하고 불태워진 그의 시가 망각속으로 가라앉지 않은 이유는 그의 아내인 나데즈다 야꼬블레프나 만델슈탐이 그 시들을 끊임없이 암송하고 필사한 덕분이었다. 나데즈다는 말할 필요가 있었고 나 역시 그렇다. 누구도 죽지 않는 이야기 한편을 완성하고 싶다. 언제고 쓴다면, 그것의 제목을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로 하면 어떨까. 그것을 쓴다면 그 이야기는 언제고 반드시 죽어야 할 것이므로 누구에게도 소용되지 않아, 더는 말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로. 그것은 가능할까. 오후 1시 39분. 혁명이 도래했다는 오늘을 나는 이렇게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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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과거는 무거운 짐이다. 그들은 자신이 했던 일이나 당했던 일들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고, 다른 것들로 대체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대체는 완전히 의식하고 있는 가운데 지어내고 고친, 허위이지만 현실보다는 덜 고통스러운 어떤 장면으로 시작될 수 있다. 반복해서 그 장면에 대해 묘사하다보니 타인은 물론 자신에게조차 진실과 허구의 구별은 점차적으로 그 경계를 잃게된다.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p.27
최근 다른 책에서 ‘optimistic brain’에 대하여 읽었는데, 그것과 일맥 상통하는 이야기라고 생각됐다.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솔을 억제하고 상대적으로 도파민 수치를 높여, 생존에 유리한 방향을 선택하는 건 진화의 결과이다. 피해자나 압제자 모두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기억을 여과하는 경향을 보이는건, 그들 자신의, 살아남고자 하는 본능의 발로가 아닐까.
프리모 레비의 말대로 선의와 악의를 뚜렷이 구별하는데는 큰 비용이 요구된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극소수의 한 사람으로써 기록을 남기고, 가장 객관적으로 자신의 기억을 똑바로 바라보려고 애썼기 때문에 고통스러웠을 그에게 마음을 다해 경의와 애도를 보내고 싶다. 그런 의미로, 아주 천천히 이 책을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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