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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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hongkong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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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코로나 백신 접종자 치매 발병률 23% 높았다
(홍콩=데일리홍콩) 김한국 기자 = 노지훈 고려대 의대 의생명과학 신경과 교수 등 공동 연구팀이 코로나 백신 접종자들의 치매(알츠하이머) 발병률이 비접종자들보다 23% 높았다는 것을 밝혔다. 또한 백신 접종자의 건망증 등 기억력이 떨어져 있는 경도 인지 장애 발병 위험도는 미접종자에 비해 2.38배 높았다. 경도 인지 장애는 본격적인 치매 발병에 앞선 신호이다. Jee Hoon Roh, Inha Jung, Yunsun Suh, Min-Ho Kim, A potential association between COVID-19 vaccination and development of alzheimer’s disease, QJM: An International Journal of Medicine,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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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inarrak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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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igma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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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하며 공부하며(컴퓨터 분야 학습에 대한 생각)
내가 현재 하고 있는일은 개발은 아니다. 인프라 운영및 관리 쪽이며, 프로젝트 유지 관리 및 신규 프로젝트에 대한 지원이다. 실무에서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자격증 시험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논문이나 학문은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세가지를 나눠서 설명해 보고자 한다. 실무에서 공부 및 일처리 방법 실무에서는 처음부터 큰 그림을 보기가 어렵다. 들어오는 일에 집중해서 하나씩 쳐 내다보면, 언제부터 인가 큰 그림을 봐야 할때가 온다. 그때 잠깐씩 찾아보는 것이 쌓여, 머리속에 큰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연구와 같이 Cutting-Edge 같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기본기에 충실하며 고민할 필요 없이 Step-by-step 으로 하나씩 치고 나가야 한다. 혼자서 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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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1837to1945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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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주의를 둘러싼 이 영화의 악명이—호기심에 의해—관객들을 더 끌어들인 측면도 없지 않지만, 이 영화가 누린 엄청난 대중성은 흑인들에 대한 그리피스의 가정들이 '동시대 백인들의 상당수에 의해 공유되었음에 틀림없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중략) 분명한 것은 「국가의 탄생」이 불러일으킨 격렬한 항의와 이 영화가 거둔 엄청난 비평적·상업적 성공은 그만큼 이 영화가 미친 사회적 영향력 혹은 그 영향력에 대한 우려가 크고 명백했다는 것을 말해준다는 점이며, 특히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분노를 일으킬 만한' 혹은 분노를 일으킨 그 만큼이나 컸던 이 영화의 성공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영화에서 표현된 그리피스의 국가관과 인종관에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공감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는 점이다.
「국가의 탄생」의 경이로운 성공은 분명히 그 영화가 '1910년대와 1920년대 격동의 미국이 더 단순했던 과거로 돌아가고 인종적 순수성에 기초한 단순화된 미국적 정체성의 관념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욕구를 향해 발언하였다'는 것, 그리고 그 발언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반향을 얻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최초에 민주주의적 예술로 상찬되기도 했던 미국 무성영화는, 민족 공동체가 수평적 연대성이라는 자신의 이념을 현실에서 자주 배반하듯이, 적어도 인종의 정체성 정치의 측면에선 자신을 향한 그러한 기대를 곧 배반했던 것이다. (American silent films, which were initially praised as democratic art, soon betrayed such expectations for themselves, at least in terms of racial identity politics, just as national communities often betray their ideology of horizontal solidarity in reality.)"
-주은우, 2006년, 「미국 무성영화와 백인 국가의 탄생-국가의 탄생과 초기 미국영화 속의 인종 정치-」, 미국사연구, 24, 한국미국사학��, pp.99~10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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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tyofficial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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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8, 10.30.
10.28.
마늘과 올리브를 갔다 서울에서 손꼽히는 파스타 맛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헌재 뒷길을 걷다가 콜렉티보를 가고 디저트는 치맥이지!
파파이스 제주 누보는 너무 맛있는 논알콜 맥주다!
10.30.
누나가 밸트를 잃어버렸다고 밸트와 껌을 선물해줬다. 열심히 일에 몰두했던 기억이 난다.
2024.4.4.
내일은 식목행사가 있고, 사전질의서는 사벌하게 달렸다. 교수님은 우리 보고서는 다 읽어보긴 한건지 짜증나는 질문이 많다. 가치고객을 따로 레포팅 한 것도 없고... ESG체계에 디지털을 엎은 체계도 없고 없는 거 투성인데 달라는 건 많다. 아 피곤해.
태블릿을 샀다. 교보에서 열심히 논문 받아서 필기하며 공부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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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22 ·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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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파민 시스템
2장에서 우리는 도파민이 보상에 대한 기대와 모교지향적 행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동안 많은 연구자가 도파민에 관련된 유전자들도 살펴보았는데, 전반적인 결론은 낮은 도파민 신호를 내는(시냅스에서 도파민이 덜 분비되거나, 도파민 수용체 수가 적어지거나, 수용체의 반응성이 낮아지는 경우다) 유전자 변이체들이 감각 추구, 위험 감수, 주의력 문제, 외향성과 연관된다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둔화된 도파민 신호를 상쇄하기 위해서 더 강렬한 경험을 추구해야 한다.
이 연구들 중 많은 수가 특정 도파민 수용체에 집중했다. 원래 도파민 수용체는 최소 다섯 종류가 있고(종류마다 뇌의 서로 다른 부분에서 발견되고, 도파민과 결합하는 강도와 시간이 다르다) 각기 다른 유전자에 의해 암호화되어 있다. 그중에서 연구자들이 집중한 대상은 주로 겉질과 기댐핵에 있는 D4 도파민 수용체를 암호화한 유전자였다(DRD4 유전자라고 불린다). DRD4 유전자는 변이가 아주 많아서, 인간의 경우 최소 열 가지 형태가 있다. 이 유전자는 DNA 서열 중 일부 구간이 여러 차례 반복되는데, 그 반복 횟수가 변이체마다 다르다. 그중 일곱 번 반복되는 형태(‘7R’)가 생성하는 수용체는 겉질에서 밀도가 낮은데다가 도파민에 대한 반응성도 상대적으로 낮다. 바로 이 변이체가 여러 특질들과 연관된 것으로 확인되었으니, 서로 관계가 있는 그 특질들이란 감각 및 새로운 추구, 외향성, 알코올 의존, 성적 물란, 덜 섬세한 양육 태도, 경제적 위험 감수, 충동성 등이었다. 특히 일관된 결과를 보여주는 것은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와의 연관성이었다.
이 결과는 양면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7R 변이체 때문에 충동적으로 노부인의 신장 투석기를 훔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충동적으로 자기 집문서를 노숙인 가족에게 줘버리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게다가 유전자/환경 상호작용도 간여한다. 일례로 7R 변이체를 가진 아이들은 평균보다 덜 너그러운 것으로 확인되었지만, 부모와의 애착관계가 불안정한 경우에만 그랬다. 7R 변이체가 있어도 애착관계가 안정적인 아이들은 오히려 평균보다 더 너그러웠다. 7R 변이체가 너그러움과 관계있기는 하지만 그 효과가 전적으로 맥락 의존적인 것이다. 또다른 연구에서, 7R 변이체를 가진 학생들은 친사회적 대의를 지지하는 활동에 관심을 덜 보였다. 하지만 사전에 종교적 암시 효과를 받은 경우에는 달랐는데, [*통제군 피험자들은 뒤죽박죽 섞인 단어들을 정리해서 일관된 문장으로 나열하는 작업을 했다. 한편 종교적 암시를 받은 피험자들은 그 작업을 종교적 용어들이 섞인 단어들을 가지고 했다.] 그때는 오히려 더 친사회적인 태도를 보였다. 예를 하나 더 보자. 7R 변이체를 가진 사람들은 만족 지연 능력이 평균보다 떨어졌는데, 단 가난하게 자란 경우에만 그랬다. 예의 주문을 다시 외우자. 우리는 유전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물어서는 안 되고, 유전자가 특정 맥락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흥미롭게도, 다음 장에서 우리는 7R 변이체의 발생 빈도가 인구 집단마다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인류의 이동 역사를 알 수 있고, 집단주의 문화와 개인주의 문화의 차이도 알 수 있다.
이제 도파민 시스템의 다른 측면으로 넘어가보자. 2장에서 보았듯이, 도파민은 수용체와 결합한 뒤에 다시 떨어져나와서 시냅스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그 경로 중 하나는 카테콜-O-메틸트랜스퍼라제COMT라는 효소에 의해 분해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COMT를 암호화한 유전자의 변이체 중 한 형태는 더 효율적인 효소�� 생산한다. ‘더 효율적’=도파민을 더 잘분해한다=시냅스에 도파민이 적다=도파민 신호가 약하다. 이 효율적 COMT 변이체는 더 높은 외향성, 공격성, 범죄성, 행동 장애와 연관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게다가 MAO-A 각본을 그대로 베낀 듯한 유전자/환경 상호작용도 일으켰다. 이 COMT 변이체가 분노 특질과 연관되지만 아동기 성적 학대 경험과 결합된 경우에만 그런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 변이체가 이마엽 겉질의 행동 및 인지 조절과, 특히 스트레스 상태에서의 조절과 관련된 듯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신경전달물질들은 아예 분해될 때도 있지만 축삭말단에서 흡수됨으로써 시냅스에서 제거될 수도 있다. 그랬다가 재활용된다. 도파민 재흡수를 담당하는 것은 도파민 수송체다. 당연히 이 수송체 유전자도 여러 형태의 변이체가 있고, 그중 선조체에서 시냅스의 도파민 농도를 높이는 변이체(즉, 덜 효율적인 수송체를 생성하는 변이체)를 가진 사람들은 사회적 신호 지향성이 더 큰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런 사람들은 행복한 얼굴에 평균적인 사람들보다 더 끌리고, 화난 얼굴을 더 싫어하고, 양육 스타일이 더 긍정적인 편이다. 이런 발견을 DRD4나 COMT 연구 결과와 어떻게 통합해야 할까(즉, 위험 감수 성향과 행복한 얼굴 선호를 어떻게 끼워맞출까)? 이 대목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
이 도파민 관련 유전자들의 특정 형태를 지난 사람들은 건강한 행동부터 병적인 행동까지 온갖 종류의 흥미진진한 행동에 남들보다 더 쉽게 나서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성급하게 결론 내려서는 곤란하다.
(313~316쪽)
비슷한 접근법이 또 있다. 우리가 어떤 퇴행성 근육병을 앓는 사람들 집단과 앓지 않는 사람들 집단을 조사한다고 하자. 모두에게 근육 생검을 실시한 뒤, 약 2만 개의 전체 유전자 중 어떤 것들이 그들의 근육 세포에서 전사되는지 알아보자. ‘DNA 마이크로어레이’ 혹은 ‘유전자 칩’이라고 불리는 이 방법을 쓰면, 병을 앓는 근육과 건강한 근육 둘 다가 아니라 둘 중 한쪽에서만 전사되는 유전자가 어떤 것들인지 알아낼 수 있다. 그 유전자들을 확인했다면, 새롭게 살펴볼 후보 유전자들을 확보한 셈이다.[*세부를 신경쓰는 독자를 위하여; 게놈전체연관분석과 마이크로어레이 방법은 보통 알려주는 바가 서로 다르다. 전자는 어떤 유전자가 우리가 연구하는 특정 질병이나 행동에 연관된 변이체를 갖고 있는지 찾아보는 것이고, 후자는 어떤 유전자의 발현이 특정 질병이나 행동과 연관되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이렇게 게놈 전체에서 뒤져보는 방법을 써보면,[*더 과학적인 언어로 표현하자면, 거대한 그물로 바다를 훑어서 과연 무엇이 잡히는지 보는 방법이다.] 우리가 행동의 유전학에 대해서 무지한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고전적 게놈전체연관분석 사례로서 키에 연관된 유전자들을 찾아본 연구가 있다. 이 연구는 무려 18만 3727명의 게놈을 조사해보았다. 19만 3727명이라니. 시험관에 라벨을 붙이는 데에만 한 부대의 과학자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과연, 『네이처』에 실렸던 논문에 약 280명의 저자명이 기재되어 있었다.
연구 결과는 어땠을까? 수백 개의 유전자가 키를 조절하는 데 관여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골격 성장에 관여하는 것으로 이미 알려진 유전자도 한 줌쯤 있었지만, 나머지는 미지의 땅이었다. 단일 유전자로서 키를 예측하는데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변이체는 키 변이의 0.4%(1%의 10분의 4다)를 설명했고, 수백 개의 유전자를 다 합하더라도 변이의 겨우 10%만을 설명할 수 있었다.
체질량 지수에 관한 게놈전체연관분석도 그 못지않게 각광받았다. 이 연구도 놀랍기는 매한가지였다. 연구자들은 약 25만 명의 게놈을 조사했고, 논문 저자 수가 키 논문보다 더 많았다. 그리고 이 경우에 단일 유전자 변이체로서 가장 큰 예측력을 발휘하는 유전자는 체질량 지수 변이의 0.3%만을 설명했다. 키도 체질량 지수도 뚜렷한 ’다유전자성‘ 특질인 것이다. 초경을 시작하는 나이도 그렇다고 확인되었다. 게다가 발생 빈도가 낮은 유전자 변이체 중에는 현대의 게놈전체연관분석 기법이 감지하지 못하는 유전자들이 있으므로, 이런 연구 결과에서 누락된 유전자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행동에 관해서도 연구된 바가 있을까? 교육 달성 수준에 연관된 유전자들을 살펴본 탁월한 연구가 2013년 발표되었다. 역시 물량공세식 연구였다. 피험자가 112만 6559명이었고, 저자가 약 180명이었다. 가장 큰 예측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확인된 유전자 변이체는 변이의 0.02%(1%의 100분의 2다)를 설명했다. 연관성이 확인된 유전자들을 다 합하더라도 변이의 약 2%만을 설명했다. 논문에 딸린 코멘트에는 세상에 이렇게 절제된 표현이 있을까 싶은 문장이 있었다. “한마디로, 교육 달성 수준은 다유전자성이 아주 높은 특질이다.”
교육 달성 수준―고등학교나 대학교를 몇 학년까지 다녔는가 하는 것이다―이란 비교적 측정하기 쉬운 특질이다. 그보다 더 미묘하고 어지러운 행동은 어떨까? 이 책에서 살펴보는 행동들은? 그런 행동을 조사한 연구도 소수 있었는데, 결과는 거의 비슷했다. 연구자들이 결론적으로 얻게 되는 것은 해당 행동에 관여하는 수많은 유전자들의 목록이었고, 그 유전자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추후의 과제로 남았다(논리적으로, 가장 큰 통계적 연관성을 보이는 유전자부터 살펴보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어렵기 짝이 없는 접근법이고, 아직 초기 단계다. 게놈전체연관분석이 놓치는 표지들이 있다는 점이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든다.[*가령 어떤 유전자에 어떤 특질과 엄청나게 강력한 연관성을 보이는 단일핵산염기다형성 표지가 있지만, 그 변이 염기가 1천 명 중 한 명꼴로만 등장한다고 하자. 현재의 게놈전체연관분석은 이런 경우를 놓칠 것이다.] 실제로는 분석 결과보다 더 많은 유전자가 개입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322~323쪽)
행동 - 로버트 새폴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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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print-9376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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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1.2023 [😄]
🍀: 카페 가서 논문 완성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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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ptybin · 6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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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대학교 다시 들어갔다가 조별과제로 발표했다.
편하게 내 논문 주제로 발표하려다가 또 조원이 튀었고, 백인 교수가 내게 f를 주었다 불쌍하니 c를 주었고 수업이 끝나고 따지다가 인종차별자로 몰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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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0797 · 10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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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텀블러로 돌아왔다
스레드를 좀 했으나 내 커뮤니티에서의 의견보다는
너무 넓은 사람들의 "말"만 듣고 그 반말이 뭔지 너무 적응이 안되는거 같아 삭제했다....
반말로 글을 올리는건 그렇다 쳐도 나한테 반말로 답을 다는 사람들은 적응이 안되었다
요즘 너무 고민이 많다
남친은 내 의견을 들어야한다면서도 전혀 안 듣고 논문 제출이 코 앞인데 짜잘한 피겨에 4일을 날리고 있으니....
오늘 마지막에 화를 좀 냈더니 또 안읽씹이다....
휴 나도 나를 모르겠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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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tablackroses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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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막학기 졸작과 학원 운영과 부업 병행은 졸라 힘들었다 동기들이 대체 어떤 금지된 힘을 끌어다 쓰고 있는 거냐고 물었지만 해파리 마법소녀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악마와 계약했다구 했다 종강과 동시에 무료해진 나… 혐오해… 응원해… 끔찍해… 기특해… 다 때려치울래… 작업할래… 꿈쩍 않고 있을래… 어디든 나갈래… 대학원 안 갈래… 논문 쓸래… 절필할래… 시 쓸래
2 그런데 유일하게 양가적이지 않은 건 다 살았으면 하는 마음임 누군가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안 해 봤다
3 극악 난이도의 데일리 퀘스트를 반복적으로 수행하지 않으면 수면장애를 앓는 나에 대하여… 다시 혐오해… 아니 응원해…
4 그래도 전시는 잘 끝났다 올해도 꼴초락스존은 작업을 하기로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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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llygood21 · 6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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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 홍장원의 정체
○홍장원 1차장의 재혼女는 정의용 前안보실장의 조카
- 洪 차장은 문재인 정부 시절 주영 공사(2급)로 정의용을 통해 서훈 원장에게 인사청탁하여 서훈에 의해 대북공작국장(1급)으로 1순위 추천되었으나 당시 이광철 민정비서관(민변 출신)이 검증 비토를 놓아 승진에 실패
-최근 홍장원이 재혼녀와도 별거(이혼說)하고 전처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딸과 동거하고 있다고. 하여튼 기이한 사람
○민주당 박선원(前1차장)은 총선때 재직시 보좌관을 지낸 인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윤석열 탄핵되고 좋은 시절이 오니 조금만 참으라'고 언급
-이런 가운데 홍장원 차장은 과거 대북공작국장 후보 추천때 신원평가를 좋게 써준 박선원 최측근을 인사(4월 중순)에서 중용
※김준환 前차장(민주당 비례대표 후보)의 최측근중 1명인 AAA(2급, 문재인 정부 방첩기획관 출신)도 중용
○한편 박지원 원장 시절 8선녀의 핵심인 xxx(2급, 박지원 정보비서관)와 서훈의 최측근중 한명인 OOO(2급, 서훈 박사학위 논문 대필과 문재인 남북정상회담 선언문 작성 주무역할)을 중용(북한국 단장)하는 등 국정원內 인사 원칙이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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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kenlee-blog · 7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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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 박사의 마음 치료 프로젝트"
페북에서 한 분이 "민주당이 삭감한 정부 예산" 목록을 올렸길래 봤더니 '김땡땡의 마음 치료 프로젝트'란 게 있길래, 이 사람이 무식 + 천박 + 무속 매니아란 점에서 처음엔 '지가 점집갈 때 쓸 복채야 뭐야?'했다가 혹시 이것도 양평 고속도로 건과 같은 '해먹을 결심' 아닐까 싶어 잠깐 구글링해 보니 역시나.
총 사업비가 무려 1조원이라는 미확인 썰이 있었으나, 신문 기사로 확인한 거는 7,892억으로 약 2천억원이 모자라다. 근데 예비 타당성 조사를 면제 받았다고 하네. 헐, 시작부터 구린내가…
예전에 무용 전공한 사람이 공대 교수로 취임했단 황당한 뉴스가 있었는데, 이거랑 연결된 건가 보다. 주요 골자는 우울증 같은 정신병을 챗봇과 채팅하는 걸로 이용해 도움 주겠다는 거 같다. 이미 군부대에 납품도 한 듯.
도대체 7천 8백억을 어디에 쓴다는 건지 궁금�� 사업 계획서 같은 게 있을까 검색해 봤지만 못 찾았다. 그래서 혼자 짐작해 본 거는 챗GPT 학습에 엄청난 자금이 들아간다는 걸 주워 듣고 막 갖다 붙였을 수도 있지 않나? 하지만 AI 전문가 없이 돈만 처바른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해먹으려면 당연히 그딴 데 돈 쓸리도 없고, B급 딥러닝 개발자한데 몇 푼 쥐어 주고 전이 학습 & 파인 튜닝 대충시켜 나온 거를 몇백억에 납품해버리면 쏠쏠하겠구만.
그리고 이거 잠깐 조사하는 동안 문득 표절 박사가 썼다는 '아바타를 이용한 운세 콘텐츠 개발 연구'란 박사 학위 논문을 읽어 본 1인으로서 데자뷔를 느꼈다. 그 시절 잘 나갔던 '프리첼'을 참조해 운세 정보 제공 웹페이지 만드는 내용으로, 논문 깜도 안되는 극히 질 낮는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써놓은 거. 왠지 이걸 가져다 '인공지능' 시대에 맞춰 재구성한 느낌.
현재 각 구청마다 '정신 건강 복지 센터'라는 걸 운영중이던데 유독 서초구만 명칭이 '마음 건강 센터'로 다르게 돼 있다. 그냥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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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directory · 23 hou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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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술학교는 어떤 인재를 배출하는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아르코 웹진 A SQUARE "제9호(vol.9) | 예술인의 커리어, 직업적 발전"에 기고한 원고의 미축약 초고입니다. 귀한 지면에 실어주신 편집부에 감사드립니다.
이정우(임근준), 미술·디자인 이론/역사 연구자
예술인의 전성기는 짧다. 성장하는 시기에는 모자라다는 내외(외부와 나 자신으로부터)의 질책에 시달려야 하고, 전성기가 지나면 한물 갔다는 소리를 견디며 살아야 한다. 아직 한참 모자라다는 내외의 질책을 받아야 하는 시기 가운데 으뜸은, 학창 시절이다. 가장 아름다운 시기인 동시에, 최악의 시기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더 힘든 시기는 졸업 이후에 온다. 디자인 분야를 제외하면, 미대 졸업자에게 ‘커리어 계발’이라는 말처럼 막연하게 들리는 게 또 있을까. 먹고 사는 길을 약속하지도 못하는 미술대학, 그것도 회화과나 조각과 조형예술과 등에 진학하려는 이들이 여전히 넘쳐나는 이유는 뭘까. 딱히 현대예술가가 되겠다는 꿈도 없이 일단 관련 학과에 진학하고 보려는 이들의 수는 왜 크게 늘어났을까? 신인 작가가 “경험 수집”의 일환으로 갖춰놓은 장식적 이력을 길게 CV에 적는 현상도, 과거엔 보기 어려웠다.
_ 커리큘럼은 누가 결정하는가? 왜 설명해주지 않는가?
학생의 입장에서 볼 때, 미술학교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학부에서나 대학원에서나, 학생의 입장에서 교과 과정, 즉 커리큘럼의 구성에 대한 소상한 설명을 들을 기회가 흔치 않다는 것이다. 정년 트랙의 교수들이 뭘 전문적으로 다루고 연구하는 사람들인지 설명해주는 경우도 거의 없다. (안식년을 맞아 얼굴 보기 어려워지기 전에 사전 통고나 해주면 감사한 일.) 풍문이나 선배들로부터 여러 주요 정보를 얻어들어야 하는데, 그 설명이 맞다는 보장도 없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학생들에게 새로운 관점의 창작 및 연구 경향을 알려주는 이들이, 비정년 트랙의 겸임 교수나 강사인 경우도 많다. 어떤 이들이 학교에 출강하고 있는지, 또 언제까지 어떤 수업을 맡아서 가르치게 될 것인지, 교과 과정의 전체적인 그림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는 사람은, 학과장직을 맡고 있는 정년직 교수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니,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것은 그저 운에 달린 일이 된다. 절대다수의 학생들은 수동적으로 수강 신청을 하고 수동적으로 학점을 받고 떠밀려나가듯 학교를 졸업하기 일쑤다. (대학원에서 논문 무사 통과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은 예외.)
어느 미술학교를 보나, 국내외를 막론하고, 어떻게 해서 안 망하고 버티는지 신기해 뵈는 경우도 흔하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의 교육자들이 일군 금자탑에 금이 가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바람을 타고 유행했던 수정주의 커리큘럼들은 유효 기간이 지나서 급변하는 시대에 뒤처지고 말았지만, 아무튼 유명 미술학교들은 이름값 홍보를 통해 신입생을 모집하며 버티고 있다. 책임을 져야 할 포스트모더니즘 1세대 교수들은 노쇠해서 이미 은퇴하고 학교를 떠났거나, 아니면 벌써 세상을 뜨기도 했다. 그러니 현역 교수들도, ‘내가 뭘 어찌하리오?’ 상태인 경우가 태반이다. (국내외 막론하고, 이제 학교에 새 건물을 지어올릴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미술대학의 교수는 거의 사라지고 없다.)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의 몫. 코로나 판데믹 기간에 BIPOC(블랙/인디지너스/피플오브컬러) 학생 그룹이 새로 조직되고 인종적/문화적 다양성의 부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 북미 지역 미술학교들의 경우, 백인 교수들이 학생들의 눈치를 보며 몸을 사리는 사태가 전개되기도 했다. (그에 이어 전개된 교내 분규는, 팔레스타인 지지 활동 금지 조치를 둘러싼 투쟁이 됐고.)
그래도 실기 과정의 학생들에게 여러 개안의 기회를 제공하고, 작업 세계를 발전시키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크리틱 시간에 유의미한 피드백을 제공하는 교육자들이 얼마전까지 다수 존재했다. 하지만, 미술학교를 학위 제공 서비스업 기관으로 바라보는 세대가 등장하고 여러 고발이 난무하는 2010년대를 거치면서, 국내외의 미술대학 교육자들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 법을 방어 기제로 익히게 됐다. (문제 학생을 빨리/조용히 졸업시키면 더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니까.) 결함이나 문제가 있는 작업에 매달리는 학생을 봐도, 진실을 말하지 않고 듣기 좋은 소리나 하고 마는 것이 일종의 관례가 됐다. 다소 놀랍지만, 미술대학의 학생들도 하나마나한 소리를 반복하는 친절의 가면을 쓴 교수를 더 선호한다. 그러니, 왕년의 주요 미술학교에서 걸출한 인재가 배출되는 모습은 보기 더 어려워졌다. 그런데 사실, 진짜 더 큰 문제는 학생 선발 방식에 있다.
_ 미술학교의 성패는 어떤 인재를 모아놓느냐에서부터 갈린다
국내 몇몇 대학의 경우 386 세대의 교수들이 기존의 입시 제도를 ‘창의력 테스트’로 뜯어고치면서 유입되는 학생들의 다양성이 크게 줄어들었다. 과거의 석고 데생이나, 수채화나 구성이나 두상 소조 등의 테스트가 학생들의 창의력을 파괴한다는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면서, 복잡하고 난해한 ‘창의력 테스트’형 실기 시험들이 나타났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한예종 미술원 등이 대표적이다. 문제는 그 ‘창의력 테스트’야 말로 최고급 입시 학원에서 돈 주고 배워서 통과하기에 딱 적당하다는 데 있다. 과거엔 주요 미술학교에 최상위 부유층 학생과 빈곤층 학생이 골고루 분포하는 모습이었지만, 요즘은 아니다. 중상류층 학생으로 균질화돼 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한때 권력을 장악했던 모 교수에게 일부 빈곤층 학생들의 어려움에 관한 이야기를 했더니, “우리 학교에 그런 가난한 집 학생이 어딨어요?”라고 했다. 어이가 없다는 투의 반문 아닌 반문이었다.)
입시 논란 등 고질적인 문제로 교육부로부터 눈총을 받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이 아예 비실기 전형으로 파격적인 변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반 고등학교에서 비실기로 입학한 이들이 실기 교과 과정에 부적응하는 모습이나, 그 과결(즉 미술 전문가가 되는 길을 포기하기)은 명약관화했다. 많은 이들의 오해에도 불구하고, 입학 시험은 우수한 천재를 뽑는 테스트가 아니다. 전혀 아니다. 교과 과정에서 수학할 기본 능력을 갖춘 이(가급적 빈 서판에 가까운 학생)를 가려내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아예 적응하지 못할 학생을 가능성 어쩌구 하면서 뽑아 놓으면, 뽑힌 학생에게도, 동학들에게도, 학교에도 불필요하게 힘겨운 일들이 펼쳐진다.
석고 데생은, 오귀스트 로댕을 배출한 ‘프티트에콜’(3년제 상업 미술 학교)에서도 사용하던 교육 방법으로, 지나치게 단순하고 시대에 뒤쳐진 것 같지만, 꽤 효과가 있다. 대상을 고찰하고 본질적/구조적 형태와 디테일을 나눠서 뇌내 시뮬레이션하고, 그를 선묘의 반복으로 화면 위에 재현해내는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눈과 손의 협응을 통해 조형 사고를 전개하는 법을 익힌다. 또 동일한 대상을 여러 동학들이 다르게 그려낸 모습을 비교해 보면서, 개개인의 차이가 어디에서 연원하는지 파악하게 된다(‘손’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겠지만, 대부분의 차이는 ‘눈’에서 온다). ‘창의력 테스트’형 입시에 맞춰 다종다양한 재료로 자유롭게 데생을 익힌 이들이, 눈과 손의 협응을 통해 조형 사고를 전개하는 기본적인 능력을 갖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 결국 잘못 개선해놓은 제도의 피해자들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수채화나 두상 소조 작업도 마찬가지다. 시간을 허비하는 방식 같지만, 암기식으로 가르치지만 않는다면, 값싸고 효율적인 교육으로 정상 작동한다.
특히 더 중요한 점은, 석고 데생 등의 구식 실기 교과의 시절엔, 가난한 집안의 학생들도 미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복잡한 전형에 맞춰 부모/보호자가 정보를 사전에 습득하고 그에 맞춰 딱 맞는 학원에 보내 포트폴리오와 시험을 준비시켜야 하는 시대이니, 가난한 집안 출신들은 미대에서 만나기 어렵게 됐다. 그 결과, 오늘의 미술대학에서 남과 다른 각도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부류의 학생은 거의 멸종하고 말았다. 중상류층 소비자의 멘털리티와 아비투스를 어릴 적부터 내면화하고 체화한 이들(사실상 거의 동질한 청년들)을 한데 모아놓으니, 툭하면 사소한 일로 분쟁이 발생하고 상대방에게만 책임을 따지고 묻는 일이 반복된다. 실력을 갈고 닦지도 않았으면서도, 학점을 받고 학위를 받았으니, ‘미술인으로 돈을 벌어 먹고 살 수 있는 자격을 갖췄다’고 착각하는 이들의 집단적 출현. 중상류층 계급 정체성 재창출의 욕망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분노를 쏟아낼 곳을 찾는, 특권(entitlement) 의식 세대의 등장은, 이미 2010년대 중반에 전지구적 현상이 됐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경우 복수 전공 트랙의 학생들은 엔간해선 작가가 되는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평안한 중상류층 집안의 2-3세로 태어난 이가 미술대학에서 공부하다가 미술계의 여러 부조리와 불합리를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굳이 고생스러운 작가의 길을 선택하기도 쉽지 않다. 위대한 예술가가, 세상에 없던 새로운 부류의 예술가가 되겠다고, 꿈을 꾸는 건,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태어난 이들, 차별적 현실이 너무나 싫어서 망상의 세계로 도망치며 성장기를 보낸 이들, 그리고 더 나아가 눈물로 지은 그 망상의 세계를 실현하고 남과 함께 나눠버리고 말겠다고 작심한 이들이다. 행복하게 사랑받으며 성장해 기성 체제에 대한 반감을 크게 느껴본 적이 없는 중상류층 집안 자제들에게, 부르주아 세상을 무너뜨리는 꿈을 꿨던 아방가르드 미술이나 그 일부를 계승한 네오-아방가르드 미술을 가르치는 것 자체가 퍽 아이러니하다.
홍익대학교의 경우 2024학년도 미대 신입생은 총 646명(서울 383인, 세종 263인)이라고 하니, 참으로 황당한 숫자라 하겠다. 그래서야 양질의 실기 교육이 이뤄질 턱이 없지 않겠나?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일이 매해 반복될 수 있을까? 바로, 홍익대학교 등 주요 미술학교를 졸업한 이들이 침묵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구조적 문제라고 합리화하면서 고개를 돌리고 입을 다물어버리는 바로 당신!
_ 교육학의 딜레마: ‘기성의 가치에 도전하는 현대미술’을 가르칠 수 있나?
20/21세기 미술/디자인 학교의 딜레마는 같다. ‘기성의 가치에 도전하는 현대미술’을 대체 누가 가르칠 수 있나? 진취적 가치를 추구하는 전문가로서 일가를 이룬 미술인이라면, 누구나 안다,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가르쳐야 한다. 학교를 만들어 놓고, 기성의 미술을 가르치면, 어떻게든 그 체제를 뒤엎겠다고 도전하는 이가 나오고, 어쩔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실패하고 사라져가지만, 또 누군가는 또 기적적 성공을 거둔다.
‘현대미술의 아버지(le père de l'Art moderne)’로 일컬어지는 폴 세잔은 제대로 된 미술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는, 사실상의 독학 화가였다. ‘현대조각의 아버지(Le Père de la sculpture moderne)’로 불린 오귀스트 로댕은 세 번이나 에콜데보자르(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Beaux-Arts) 입시에 실패한, ‘프티트에콜’의 졸업생으로서, 건축용 조각을 제작하는 도제로 일하며 오랜 무명 생활을 견뎌야 했다. 구식 교육과 절연하고 현대적인 조형 이념과 창작 방식만을 가르치기로 했던 바우하우스(1919-1933)가 출범했다고 해서, 졸업생들이 다들 위대한 변혁의 전선에 성취를 거둔 것도 아니다. 바우하우스 졸업생 가운데 성취를 거둔 이들은, 허버트 바이어, 마르셀 브로이어, 요제프 알버스와 아니 알버스, 군타 슈토츨 등 몇몇으로, 사실 대부분 바우하우스 입학 이전에 다른 곳에서 교육 과정을 거친 유경험자들(즉 나이도 조금 더 먹은 학생들)이었다. 미국에서 실험적인 학교로 이름을 날렸던 블랙마운틴컬리지(1933-1957)의 경우에도, 밥 라우션버그, 싸이 트왐블리, 루스 아사와 등을 배출했다고 해도, 역시 다수의 졸업생들은 조용히 노년을 맞거나 이미 무명으로 세상을 떴다. (물론, 그들을 실패라고 볼 이유나 근거는 없다.)
앙리 마티스는 스승 귀스타브 모로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하는데도, 유학생들에게 인기가 높던 아카데미 마티스에서 위대한 예술가가 배출됐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나마 한스 푸어만이 마티스의 제자 가운데 가장 크게 성공한 화가다.) 파블로 피카소나 마르셀 뒤샹이 훌륭한 제자를 키워냈다는 소리도, 금시초문이다. 과거 한때 홍익대학교에서 걸출한 추상화가들이 배출된 것도 실상 어느 정도는 ‘국대안(國大案) 파동’의 산물이다.
1946년 미군정청 학무국이 일제시대의 여러 단과대학들을 통폐합해 단일 종합대학인 국립서울대학교를 설립하겠다는 안을 발표하자, 1948년까지 2년간 통폐합 대상 학교들의 교수, 학생들이 격렬히 반대했는데, 그 과정에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설립을 주도한 장발은 시위 참여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제적 처리했고, 김환기 유영국 등도 교수직을 사직했다. 김환기가 홍대에 자리를 잡고 서울대에서 제적된 학생들, 즉 윤형근 등을 받아들임에 따라, 진취적 학생들이 홍대에 집결하게 됐던 것. 자칭 “위대한 화가” 박서보도, 부산 피란 시절과 종로 장안빌딩 시절의 홍대가 배출한 인재. 와우산 앞에 자리잡은 홍대에서 공부한 인재들은 그 정도로 파격적이진 못했다. (반면, 서울대는 꾸준히 리얼리즘 계열의 작가들을 배출했다. 현실과 발언의 민중미술가들 다수도 서울대 출신들. 그런데, 걸출한 성취를 거둔 신학철과 김봉준은 또 홍대 출신.)
하지만, 20/21세기 미술/디자인 학교에는 또다른 딜레마가 있다. 미술/디자인 학교에서, 구체적 교과 과정을 강조해서 학교가 내용-지향적(content-oriented) 성격을 띠게 되면, 전문적 직능 교육의 특성을 띠게 된다. 문제는 이렇게 가면, 종합대학교에 단과 대학으로 존재할 이유는 없어진다. 장점은, 빠른 속도로 기능적 숙련도를 갖춘 인재를 길러낼 수 있다는 것. 과거의 홍대(이대원, 김환기 학장이 이끌던)는 내용-지향적 학교였다.
반대로, 교육학적 가치를 강조해서 즉 학교가 과정-지향적(process-oriented) 성격을 띠게 되면, 인문학적(humanistic) 교육의 특성을 띠게 된다. 문제는 이렇게 가면, 종합대학의 이상에 맞춰 제너럴리스트를 길러낼 수는 있지만, 기능적 숙련도를 갖춘 인재를 길러내는 데에는 소홀하게 된다는 것. 장발 학장 이래 서울대 미대는, 대체로 미국식 교육 모델에 맞춰 과정-지향성을 띠었다. 따라서 학부 졸업생들은, “미대를 나왔는데 이런 것도 못해?”라는 말 앞에서 좌절감을 느끼기 일쑤였다.
뉴바우하우스/시카고디자인학교/디자인대학에서 라슬로 모호이너지 같은 이들은, 이러한 양가성을 통합하고자 노력했지만, 창조적 통합이라고 하는 건 현실에선 꿈같은 이상에 불과했다. 모호이너지는, 하나의 매체로 여러 주제를 다루고, 하나의 주제를 여러 매체로 다루는 훈련을 반복하면, 누구나 자신과 같은 총체예술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책 한 권을 제대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건축도 능히 해낼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 하지만 보통의 학생들은, 과도한 교육 프로그램 속에서 혼란과 한계나 느꼈을 테다.
21세기로의 전환기에, 매체로 나뉘는 구식 전공 과정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기도 했다. 회화과, 조각과, 그래픽디자인과, 산업디자인과 등으로 나누는 방식을 폐기하고 통합 교육을 실시하라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며, 구식 교과 체계와 과정을 폐지하고 융합적 커리큘럼을 도입하는 국제적 학교들이 몇몇 나타났다. 문제는 그런 학교를 졸업한 이들에게서, 매체에 대한 이해도가 다소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 현대미술에서 매체성과 물성에 대한 감각은 필수이므로, 그런 신교육만을 거친 작가들은 소위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한 작업을 바탕으로 커리어를 이어나가다가, 아이디어가 소진되면 커리어 중단의 위기를 맞는 패턴을 반복했다. 결국 교육제도의 대대적 혁신은, 의외의 부작용을 낳기 마련이니, 있는 제도나 보완해가며 잘 운영하는 편이 낫다는 소리가 된다.
작가가 되는 길 외로 다양한 직업적 길의 가능성을 제시해보겠다고 잡다한 수업을 개설하는 경우도, 유사한 부작용을 낳았다. 예술가적 성장을 위해선 하나의 매체에 집중해 제한적인 실험을 지겹도록 반복하는 시기가 필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왕도는 없다.
_ 미술대학의 실기 과정을 졸업했다고 해서 작가로 성공할 필요는 없다
오밤중에 미대생이나 미대졸업생들이 소셜미디어로 다짜고짜 앞뒤가 안 맞는 불안정한 메시지를 보내오는 경우가 왕왕 있다. 실감하기론, 2011년 이후 정신이 다소 온전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크게 느는 추세다. 그들을 위한 전문적 상담 프로그램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지만, 대학 등에서 제공하는 무료 상담이 양질이긴 어렵다. 결국 좋은 의사를 찾아 도움을 받는 게 답이다.
마음 같아선 일일이 도와주고 싶으나, 실제론 차단하는 게 옳다. 차단하면 더 이상한 소리를 하지만, 그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고, 또 어설프게 도와봐야 딱히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정신 건강 문제에 관한 전문가의 일은,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강조하는 바... 안정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가 제1의 이슈라면, 굳이 작가를 할 필요가 없다. 미대를 나왔다고 꼭 미술인으로 살아야 할 이유도 없다. 작가나 큐레이터나 비평가로 버티며 사는 길이 나에게 맞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혹은 압박감과 고립감으로 인해 정신적 건강이나 안녕이 흔들릴 때, 다른 더 안전한 길을 선택하는 것은 실패가 아니다.
이래저래 소위 “인서울대학”의 진학을 위해 어거지로 미대에 진학한 경우도 적잖다보니, 그만두고 싶어도 주변의 눈치를 보며 힘들어하는 경우가 적잖다. 본인의 건강과 행복과 안녕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예술이나 남의 눈을 의식하는 자존심이 그런 걸 포기해야 할 정도로 가치 있거나 중요하진 않다. 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에서 “존버”하라고 서로 격려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건 평범한 직장인의 경우에나 해당한다. 예술계의 대다수 청년에게 “존버”는 답이 아니다. 특히 지금 시대엔 그렇다.
예술계엔 원래 예술 활동만으로 먹고 살 방도가 마땅치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필립 글래스는 배관공, 택시 운전사로 일했고, 부유층 출신인 마르셀 뒤샹도 미술품 거간으로 생활비를 벌었다. 그레이스 하티건은 뉴욕에서 난방도 수도도 없는 작업실에서 캠핑하듯 살았지만, 보험설계사로 일하며 자식까지 키웠다. (대신 체력이 남달랐다.) 그러고 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능력자들도 젊어선 예술 활동만으론 못 먹고 살았으니, 예술 활동만으로 생계를 꾸리며 버텨야 하는 악조건이라면, 더 안정적인 길로 방향을 트는 게 맞다는 이야기다.
미대에 진학한 모두가 훌륭한 미술가/디자이너가 되려고 고통을 감내할 까닭은 없다. 그런 건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극소수의 일이다. 보통 사람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보통의 길을 찾는 게 맞다. (하지만, 역시 그 길을 찾는 것은 각자 몫의 일이다.) ///
추신) 미술대학을 졸업한 이들의 사회 진출을 이야기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이슈가, 외국인 유학생 차별이다. 한국의 미술대학을 졸업한 유학생들을 왜 한국미술계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는가? 왜 그들은 각종 지원 제도나 전시에서 철저하게 배제돼야 하는가? 왜 통계 자료마저 부재하는가?
한국에 유학 온 똑똑한 외국인 친구들과 이야기해 보면,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반복해서 듣게 되는 이야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부모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좋아서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고 한국에서 공부하기로 했다. 한중일 이외의 아시아 지역에서 나고 자란 경우라면, 중국을 더 우선순위에 놓는 경우가 많다. 정치 체제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기회가 제공된다는 것.
2. 한국에 와서 인종주의에 놀랐다. 비한국계 인물이나 가족이 한국에서 몇십 년을 살아도 '한국인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한국계 한국인이 절대다수라는 사실에 공포를 느낀다.
3. 한국 사회의 공고한 인종주의를 부정하는 동년배 청년들에게 더 놀랐다. 거의 모두가 인종주의는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웃어넘긴다나. (청년이 미래의 희망이라는 소리가, 2020년대의 한국에선 거짓말이 됐다.) 한국의 중산층 청년들이 카피 페이스트한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자기들끼리만 어울려 노는 모습에서 슬픔을 느낀다. 왜 그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한다.
4. 졸업 이후 비자를 받고 일할 수 있는 직장을 구하기도 어렵고, 작가로 활동할 수 있도록 비자를 받기가 굉장히 어렵다. 한국에서 유학한 이들의 커리어와 역할을 생각하는 정치인도 없고, 교육자도 없다. 한국 사회의 인구 절벽을 보면,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또 인재 유치를 위해 변화를 시도해야 할 것 같은데도, 아무런 개혁의 기미가 없다.
5. 모국어 외로 영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한국 유학파 인재들이 많지만, 의료 관광 마케터 등으로나 일하는 게 소모적이라고 느끼��� 된 이들은 다수가 결국, 깊은 상처를 품고 한국을 떠나게 된다.
6. 이런 이야기를 솔직하게 터놓고 풀어놓을 상대를 찾기도 어렵고, 그런 대화/토론의 장은 아예 한국에서 만날 수 없었다. 몇 년이나 한국에서 소중한 청년 시절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주요 대학의 소셜미디어 채널에선 유학생을 홍보 수단으로 이용할 뿐으로, 진짜 목소리를 듣고자 하지 않는다.
왜 아무도 이런 현실에 분노하지 않는가? 이런 악순환이 한국의 미래에 도움이 되겠는가? 외국인 유학생을 차별하는 한국/서울의 미술계가 국제적 현대미술의 허브로 부상할 턱이 없지 않겠나? 프리즈아트페어 기간에 허망한 파티를 기획할 여력과 돈이 있다면, 이미 한국의 미대에 진학한 외국인 청년들을 모아 그들의 꿈과 희망에 귀를 기울여보길 권한다. 그들이 우리고, 또 재정의돼야 하는 우리의 미래다.
[출처] 오늘의 미술학교는 어떤 인재를 배출하는가?|작성자 Chungwoo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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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22 ·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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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 생산 양식, 문화의 연관성은 너무 건조하고 척박하고 광활하기만 해서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지역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곳은 유목민의 세상이다. 가축을 몰고 사막이나 스텝이나 툰드라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세상이다.
아라비아의 베두인, 북아프리카의 투아레그, 동아프리카의 소말리와 마사이, 스칸디나비아의 사미, 인도의 구자를, 튀르키예의 외뤼크, 몽골의 투바, 안데스의 아이마라가 그런 부족들이다. 그들은 양, 염소, 소, 라마, 낙타, 야크, 말, 순록을 친다. 그 동물들의 고기, 젖, 피를 주식으로 삼고, 털과 가죽을 거래한다.
그런 거친 환경에서 생겨난 유목 문화들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문화들을 보통 중앙정부와 법치의 영향을 최소한으로만 받는다는 것을 인류학자들은 예전부터 관찰로 알고 있었다. 유목 문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사실은 그 척박하고 외진 환경에서 나온 것이니, 바로 도둑이 남의 밭작물을 싹 훔쳐가거나 수렵채집인이 거둬 먹는 식물을 싹 털어갈 수는 없어도 남이 키우는 가축을 훔쳐갈 수는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목축의 취약성이다. 유목민의 세상은 가축 도둑의 세상이다.
이 현실로부터, 유목 문화의 여러 특징들이 따라 나온다.
군사주의가 강하다. 목축민, 특히 사막의 목축민은 집단 구성원들이 서로 멀리 떨어진 채 가축을 치기 때문에, 전사 계층이 생겨나기에 알맞은 환경이다. 전사 계층이 생겨나면 보통 그와 더불어 ⓐ전리품을 사회적 지위를 얻는 디딤돌로 여기는 문화, ⓑ전사자에게는 영광된 내세가 보장된다는 믿음, ⓒ경제적 일부다처제와 여성에 대한 학대, ⓓ독재적 양육 방식이 따라온다. 목축민이 베토벤의 6번 교향곡처럼 ‘목가적인‘ 경우는 드물다.
세계적으로 일신교는 드문 편이다. 그런데 일신교가 있다고 하면, 사막 유목민의 종교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반면 우림 거주자들의 종교는 대부분 다신교다). 이치에 맞는 일이다. 사막은 거칠고 독특한 교훈을 주는 환경이다. 그곳은 건조하고 뜨거워서 기본 중의 기본만으로 구성된 세상이고, 사람들은 그 세상을 깊은 숙명론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알라 외의 다른 신은 없도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같은 명령이 가득하다. 마지막 문구에서 알 수 있듯이, 사막의 일신교라고 해서 늘 단일한 초자연적 존재를 믿는 것은 아니다. 일신교에도 천사와 정령과 악마가 넘친다. 하지만 그 속에 위계가 있고, 전능한 유일신 앞에서 그보다 등급이 낮은 신들은 맥을 못 추며, 유일신은 천계에서나 지상에서나 꼬치꼬치 끼어드는 간섭주의자인 때가 많다. 대조적으로 열대우림을 떠올려보라. 그곳은 생명이 바글거린다. 나무 한 그루에서 발견되는 개미 종의 수가 영국 전체의 종수보다 많은 곳이다. 그런 곳에서는 수많은 신들이 균형을 이루어 융성하는 것이 더없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목축 문화는 명예 문화를 양산한다. 7장에서 소개했듯이, 명예 문화는 정중함과 예절과 환대를 규칙으로 삼는다. 특히 지친 여행자에게 그렇다. 왜 아니겠는가. 목동들은 누구나 종종 지친 여행자가 되는 법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다. 명예 문화는 나, 가족, 씨족이 받은 모욕에 응징하는 것을 규칙으로 삼으며,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평판이 깎인다. 상대가 오늘 내 낙타를 훔쳐갔는데 내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면, 내일은 상대가 나머지 낙타들은 물론이거니와 내 아내들과 딸들까지 훔쳐가지 않겠는가.[*나는 이 문화의 이런 측면들을 한번에 경험한 적 있다. 빈 유조차를 채우려고 수단에서 케냐 인도양까지 몰고 가는 소말리족 사람들과 함께 여행할 때였다. 우리는 매일 사막을 가로질러 달리다가 저녁이 되면 트럭들 사이에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아서 스파게티와 낙타 젖 요리를 했다. … 그러면 반드시 여섯 소말리 사람 중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모욕하는 행동을 하고야 말았다. 둘은 으르렁거리며 말다툼하다가 부츠에서 칼을 뽑았고, 빙글빙글 돌다가 서로 덤벼들었다. 결국에는 나머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 그런 다음에는 그들 문화의 환대성이 드러나서, 모두들 내가 스파게티/낙타 젖 덩어리 중 제일 맛있는 부분을 먹는지 확인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드세요, 드세요. 당신은 우리 형제니까요.” 다들 이렇게 말했다. 방금 서로 칼을 휘둘렀던 두 사람도.]
그러나 인간의 최악의 행동과 최선의 행동이 사령 순록을 몰고 핀란드 북부를 떠도는 사미족이나 세렝게티에서 소를 치는 마사이족의 문화적 행위에서 기인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할 것이다. 그보다 더 문제가 되는 명예 문화는 서구화된 환경에 자리한 명예 문화다. ‘명예 문화’라는 용어는 시칠리아 마피아들의 행동 양식, 19세기 아일랜드 시골의 폭력 양상, 도심 갱들의 보복 살인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들은 모두 자���을 두고 경쟁하는 환경이고(상호 보복 살인의 과정에서는 끝까지 살아남는 쪽이 된다는 것이 유일한 자원이다), 법치의 존재감이 미약한 탓에 빚어진 권력 진공 상태이고, 도전에 응하지 않으면 명예가 궤멸적으로 실추되는데 그 응답이 보통 폭력적인 방식인 것이다. 이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례는 미국 남부의 서구화된 명예 문화로, 그동안 수많은 책, 논문, 학회, 대학의 남부학 전공자가 이 주제를 연구했다. 그리고 그 개척자는 니스벳이었다.
환대, 여성에 대한 기사도, 사회적 예법과 에티켓 강조는 오래전부터 남부의 특성으로 여겨졌다. 더 나아가 남부는 전통적으로 전통, 오래된 문화적 기억, 가문의 존속을 중시한다. 1940년대 켄터키주 시골에서 남성의 70%는 제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았는데, 북부에 비해 훨씬 더 높은 비율이었다. 여기에 남부는 사람들의 이동성이 낮다는 점이 결합하여, 남부인이 수호해야 하는 명예의 대상은 자신에게서 가족, 친족, 장소로까지 쉽게 확장된다. 1863년에 햇필드가와 메코이가가 장장 30년 지속될 그 유명한 분쟁을 시작했을 때,[*음. 분쟁이 1890년대에 정말로 끝났는가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있다. 1891년에 두 집안이 휴전을 선언하고 서로 죽이기를 그만둔 건 사실이지만, 그 후손들이 1979년에 일주일 동안 <패밀리 퓨드>라는 게임쇼에 출연해서 싸운 적 있다. 총 다섯 게임 중 세 게임을 매코이가가 이겼지만, 상금은 햇필드가 더 많이 땄다.] 두 가문은 웨스트버지니아/켄터키의 주 경계 같은 지방에 100년 가까이 정착해 살아오고 있었다. 남부인의 향토애는 로버트 E. 리 장군에게서도 볼 수 있다. 리는 사실 남부의 분리 독립에 반대했고, 어떻게 보면 노예제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애매한 발언들도 남겼다. 그런데도 링컨에게서 북부군 사령관직을 제의받았을 때, 리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다른 어떤 정부 밑에서도 살고 싶지 않습니다. 연방을 보존하기 위해서 내가 치르지 못할 희생은 없습니다. 하지만 명예만큼은 예외입니다.” 결국 버지니아주가 연방 탈퇴를 결정하자, 라는 고향에 대한 의리를 지켜서 북버지니아의 남부연합군을 이끌었다.
남부에서 명예 수호는 무엇보다도 자주성의 문제다. 남부인 앤드루 잭슨 대통령의 어머니가 죽어가면서 아들에게 남긴 당부는 불평거리가 있을 때 법에 의지하지 말고 남자답게 제 손으로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잭슨은 유지를 저버리지 않고, 결투와 싸움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결투로 상대를 죽인 적도 있다). 그는 대통령 마지막날에 임기를 마치면서 남은 후회가 두 가지 있다고 말했는데, “헨리 클레이를 쏴 죽이지 못한 것과 존 C. 캘훈을 목매달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정의를 사적으로 집행하는 것은 제대로 기능하는 법체계가 없는 상황에서 필수적인 일로 보였다. 19세기 남부에서 법적 정의와 사적 정의는 기껏해야 불편한 균형 관계를 유지하는 정도였다. 남부 역사가 버트럼 와이엇브라운은 이렇게 말했다. “관습법과 사형私刑은 윤리적으로 양립 가능했다. 법조계가 관습법으로써 전통의 질서를 보전할 수 있었다면, 보통 사람들은 사형을 통해서 공동체의 가치가 계속 궁극의 지배력을 발휘하도록 담보했다.“
명예 훼손에 대한 응징의 핵심은 물론 폭력이었다. 몽둥이와 돌은 내 뼈를 부러뜨리지만, 말은 나를 험담한 상대의 뼈를 부러뜨리게 만들었다. 결투가 흔했다. 그 요점은 내가 남을 죽일 각오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내가 명예를 위해서라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남부 연합군으로 참전한 소년들에게 어머니들은 겁쟁이처럼 도망쳐서 돌아오느니라 관에 누워서 돌아오라고 일렀다.
그 결과, 남부는 높은 폭력률의 역사를 자랑하게 되었다. 지금도 그렇다. 단, 특정 종류의 폭력만 그렇다. 내가 어느 남부 연구자의 말을 듣고 이 사실을 실감한 적이 있었다. 그는 남부 시골을 떠나서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라는 낯선 동네에서 대학원 생활을 시작했을 때 이곳 가족들이 독립기념일에 모여서 소풍을 가면서도 아무도 서로 쏴 죽이지 않는 게 정말 희한하더라고 말했다. 니스벳과 도브 코언은 남부 백인 남성의 높은 폭력률, 특히 살인율이 대도시의 특징은 아니라는 것, 또한 물질적 이득을 노린 결과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주류 판매점을 털다가 사람을 죽이는 짓 따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남부의 폭력은 압도적으로 시골에서 벌어지고, 서로를 아는 사람들이 사이에서 벌어지며, 명예에 대한 모욕을 둘러싸고 벌어진다(칠칠치 못한 사촌 새끼는 가족 모임에서 감히 내 아내를 희롱해서 쏘았다는 식이다). 게다가 남부의 배심원들은 이런 행동에 이례적으로 관대하다.
남부의 폭력을 탐구한 니스벳과 코언의 실험은 과학 논문에서 드물게 쓰이는 단어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심리학 실험 역사상 가장 멋진 실험으로 꼽힐 만하다. 연구자들은 남성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우선 피를 뽑았다. 그다음 그들에게 설문지를 작성한 뒤에 그것을 복도 끝에 있는 수거함에 가져다가 넣으라고 일렀다. 사실 서류함이 늘어선 좁은 복도가 실험 장소였다. 피험자 중 절반은 아무 일 없이 복도를 걸어갔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의 경우, 그들이 복도를 걸을 때 연구자들의 공범인 덩치 큰 사내가 맞은편에서 다가왔다. 피험자와 첩자는 몸을 스쳐야 했고, 그때 첩자가 피험자를 밀치면서 짜증난 목소리로 마법의 단어를―”병신 새끼”―읊조리고 지나갔다. 피험자는 복도를 마저 걸어가서 설문지를 수거함에 넣었다.
피험자들은 이 모욕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출신에 따라 달랐다. 남부 출신 피험자들은 현격히 높아진 테스토스테론과 코르티솔 수치―분노, 화, 스트레스를 뜻한다―를 보였는데, 다른 곳 출신 피험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그다음에 피험자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웬 남자 지인이 자기 약혼녀에게 수작을 거는 걸 목격한 사내의 이야기였다. 이야기의 결말이 어떨 것 같은가? 대조군에서는 남부 출신 피험자들이 북부 출신보다 폭력적 결말을 떠올리는 경우가 약간 더 많은 데 그쳤다. 모욕을 당한 집단에서는? 북부 출신들은 대조군에 비해 변화가 없었지만, 남부 출신들은 폭력을 상상하는 경우가 엄청나게 많아졌다.
(345~351쪽)
문화 차이를 비교하는 기준으로 또 유의미한 것은 자원(가령 땅, 식량, 유형의 재화, 힘, 특권)이 얼마나 불평등하게 분배되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뒤에서 보겠지만, 수렵채집사회는 그 역사 내내 대체로 평등한 사회였다. 불평등은 가축화와 농업 발달에 뒤이어 뭔가 소유하고 축적할 만한 재화가 발명된 뒤에야 세상에 등장했다. 재화가 많아진다는 것은 잉여 생산, 직업 분화, 기술 세련화를 뜻한다. 그와 더불어 잠재적 불평등이 커진다. 더구나 문화가 가내 상속을 만들어내면, 불평등은 더한층 확대된다. 일단 생겨난 불평등은 점차 널리 퍼진다. 전통적인 목축민사회나 소규모 농업사회가 보여주는 부의 불평등 수준은 가장 불평등한 산업사회의 수준에 맞먹거나 능가할 정도다.
왜 계층 문화가 그보다 더 평등한 문화들을 거의 다 밀어내고 지구를 장악하게 되었을까? 집단생물학자 피터 터친은 계층 문화가 정복자가 되기에 더 알맞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계층 문화에는 명령 계통이 갖춰져 있으니까. 게다가 경험적으로 이론적으로나 확인되는바, 불안정한 환경에서는 계층사회가 “사망자를 하층계급에 국한시킴으로써 [평등한 문화보다] 자원 부족을 더 잘 견뎌낸다”. 달리 말해, 부에 대한 접근성이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어려운 시절이 닥치면 비참과 죽음이 불평등하게 배분된다. 하지만 환경 불안정에 대한 해법이 계층화뿐인 것은 아니다. 그런 상황일 때 수렵채집인들은 짐을 싸서 옮길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하다.
불평등이 발명된 지 1만여 년이 지난 현재, 서구화된 사회들 중 불평등 스펙트럼의 양극단에 있는 사회들 간의 차이는 실로 충격적이다.
차이 중 하나는 ‘사회자본‘이다. 경제 자본이란 재화, 서비스, 금융 자원의 총량을 뜻한다. 한편 사회자본은 신뢰, 호혜성, 협동과 같은 자원의 총량을 뜻한다. 어떤 공동체의 사회자본이 어느 수준인지는 두 가지 간단한 질문으로 얼추 알 수 있다. 첫째는 사람들이 대체로 서로 신뢰하는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답하는 공동체는 자물쇠가 적고, 사람들이 남의 아이를 살펴봐주고, 쉽게 눈길을 돌려버릴 수 있는 상황에서도 적극 개입한다. 두번째 질문은 개인이 참여하는 조직의 수가 몇 개인가다. 이때 조직은 순수하게 오락을 위한 단체부터(가령 볼링 클럽) 긴요한 단체까지(가령 노동조합, 세입자 조합, 신용협동조합) 다 포함한다. 참여 수준이 높은 공동체에서 사람들은 효능감을 느끼고, 제도가 충분히 투명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자신이 변화를 끌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무력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조직에 가입하지 않는다.
단순하게 말해서, 소득 불평등이 큰 문화는 사회자본이 적다. 신뢰에는 호혜성이 필요하고, 호혜성에는 평등이 필요한다. 위계란 곧 지배와 비대칭이다. 게다가 유형 자원의 불평등이 큰 문화는 거의 반드시 개인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효과를 발휘하고, 가시화되는 능력도 불평등하게 분포된다. (일례로, 소득 불평등이 커지면 번거움을 감수하고 투표에 참여하는 사람의 비율이 보통 낮아진다.) 극단적인 소득 불평등과 풍부한 사회자본을 함께 갖는 사회란 정의상 불가능한 것이나 다름없다. 좀더 사회과학풍으로 표현하자면, 뚜렷한 불평등은 사람들이 서로 못되게 굴도록 만든다.
이 현상은 여러 방식으로 확인해볼 수 있고, 그동안 서구화된 여러 나라, 주, 지방, 도시, 마을의 단위에서 연구되었다. 소득 불평등이 클수록 사람들은 (실험 조건에서) 타인을 덜 돕는다. 경제 게임에서 덜 너그럽게 굴고, 덜 협동한다. 이 장 앞부분에서 집단 괴롭힘과 ’반사회적 처벌’, 즉 경제 게임에서 사람들이 속임수를 쓰는 참가자보다 지나치게 너그러운 참가자를 더 많이 처벌하는 현상에도 비교문화적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반사회적 처벌’은 대체 어떤 현상일까? 일반적인 해석에 따르면, 누군가가 너그러운 행동을 함으로써 남들이 상대적으로 못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고 너그러운 행동에 대한 기대치를 높인다는 이우로 그 사람을 처벌하는 것을 뜻한다.] 이 현상에 대한 연구를 보면, 어떤 나라가 높은 불평등 수준 그리고/혹은 낮은 사회자본 수준을 갖고 있다면 그 나라 사람들은 집단 괴롭힘과 반사화적 처벌을 더 많이 했다.
11장에서 우리는 자신과 사회경제적 지위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할 때 어떤 심리가 디는지를 살펴볼 텐데, 어쩌면 당연하게도, 불평등사호에서 상층의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개발해낸다. 그리고 불평등이 심할수록 강자들은 종속된 사람들이 사실 축복을 누리고 있다는 신화를 강하게 믿는다. ‘그들은 가난하긴 해도 행복하다/정직하다/사랑받는다“는 것이다. 한 논문의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불평등한 사회는 체제의 안정성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게 되는지도 모른다. 소득 불평등은 부분적로 긍정적인 사회적 이미지를 제공함으로써 하층 집단들에게 보상한다.“
(355~357쪽)
불평등과 폭력에 관하여 마지막으로 살펴볼 우울한 사실이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쥐는 쇼크를 받으면 스트레스 반응을 활성화한다. 그런데 쥐가 쇼크를 받은 뒤에 다른 애먼 쥐를 깨물 수 있는 상황이라면, 스트레스 반응이 한결 누그러진다. 개코원숭이들도 그렇다. 지위가 낮은 개코원숭이가 글루코코르티코이드 분비를 줄일 수 이는 한 가지 확실한 방법은 자기보다 지위가 더 낮은 개체에게 전위 공격성을 표출하는 것이다. 인간도 좀 비슷하다. 보수주의자들은 가난한 자들이 들고일어나서 부자들이 학살하는 계금 전쟁의 악몽을 꾸지만, 현실에서 불평등이 폭력을 부추길 때 그 폭력은 주로 가난한 사람이 다른 가난한 사람을 등치는 폭력이다.
이 사실은 사회적 불평등의 결과를 보여주는 훌륭한 은유라고 해도 좋을 법한 한 현상에서도 잘 드러난다. ‘기내 난동’, 즉 비행중에 승객이 뭔가가 거슬린 나머지 비행에 방해가 되고 위험할 정도로 성질을 부리는 사건은 그동안 꾸준히 늘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상당히 잘 예측할 수 있는 지표가 있다. 만약 일등성이 있는 비행기라면, 이코노미석 승객이 기내 난동을 부릴 확률이 4배 가까이 는다. 이코노미석 승객들에게 탑승할 때 일등석 객실을 거쳐서 들어가게 하면, 기내 난동 확률이 두 배 높아진다. 계급 위계에서 내 위치가 어디인지를 상기하면서 비행을 시작하는 것은 정말 기분 나쁜 일인 것이다. 폭력 범죄와의 유사성은 더 있다. 불평등을 환기한 이코노미석 승객이 기내 난동을 부릴 때, 그가 일등석으로 달려들어서 마르크스주의 구회를 외치는 식으로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그가 옆에 앉은 노인이나 승무원을 못살게 구는 식으로 일이 벌어진다.“[*아이러니한 주석; 이코노미석 승객들이 일등석 객식을 거쳐서 탑승하면, 일등서 승객들 사이에서도 특권 의식에 기반한 기내 난동이 늘어난다. 심지어 이코노미석 승객들의 경우보다 더 늘어난다.]
(360~361쪽)
행동 - 로버트 새폴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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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maker · 8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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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석 인사혁신처장, 당신은 도깨비 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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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shikkim · 14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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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2520)
국가 경쟁력은 사람에게서 나오고, 사람을 키우는 건 교육이다. 그래서 대학이 튼튼해야 나라가 튼튼하다. 그런데 요즘 서울대 인문계 교수들마저 해외로 빠져나간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건 단순한 이직이 아니다. 세계 경쟁에서 한국 대학이 점점 뒤처지고 있다는 뼈아픈 신호다. 해외 대학들은 파격적인 연봉, 충분한 연구비, 자율적 학문 환경으로 글로벌 인재를 유치한다. 반면 우리 대학은 연구할 시간도, 실험할 여유도, 장기적 비전도 부족하다. 그러니 교수들이 떠나는 게 이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아 있는 게 기적이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이제는 교수직 자체가 매력 없는 직업이 되고 있다. 한때는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교수의 길을 꿈꿨지만, 요즘은 박사과정 진학조차 꺼린다. "공부해서 남 주나?"라는 말이 아니라 "공부해봤자 남는 게 없다"는 회의가 대학원 복도에 퍼져 있다. 처우는 낮고, 미래는 불확실하고, 연구보다 행정이 더 많다. 논문이 아닌 보고서를 쓰느라 밤을 새우는 게 현실이다. 연구실 문을 열면 컴퓨터 화면엔 논문 대신 엑셀, 보고서 폴더가 떠 있다. 대학이 연구 공간이 아니라 '일터'가 된 지 오래다. 교수가 연구실에 있어도, 연구가 아닌 일에 매몰되는 현실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니 유출은 늘고, 유입은 끊긴다. 대학이 인재를 키우기보다, 소진시키는 공간이 돼 가고 있다.
정년 문제도 짚어야 한다. 세계적 성과를 낸 교수도 일정 나이가 되면 무조건 떠나야 하는 구조다. 미국의 대학은 다르다. 애초에 정년 자체가 없는 경우가 많다. 능력과 열의가 있으면 나이에 관계없이 계속 연구하고 가르친다. 은퇴는 본인이 결정하는 일이다. 그래서 미국 대학엔 70대, 80대 현역 교수도 적지 않다.
반면 우리는 정년이 다가오면 연구를 접고 뒷정리를 한다. 오랜 경험과 네트워크를 쌓은 이들이 아무 대안 없이 교단을 떠나는 건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학 전체, 더 나아가 국가의 손실이다. 미국과 유럽 대학들은 이처럼 경력 많은 교수를 오히려 연구 자산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대학을 살리려면 입구부터 출구까지, 사람 중심으로 다시 설계해야 한다. 우수한 학생들이 "교수를 해보고 싶다"는 꿈을 꾸게 하고, 젊은 교수들이 연구에 집중하며 정착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탁월한 교수에게는 성과에 걸맞은 보상과 지속적인 연��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 그리고 정년 이후에도 쓸모 있는 경로를 제시해야 한다. '유입, 정착, 지속'. 이 세 고리가 제대로 맞물릴 때 대학 생태계는 살아난다.
대학은 단순히 강의를 하는 곳이 아니다. 지식을 만들고, 사회를 성찰하며, 미래를 설계하는 플랫폼이다. 대학이 흔들리면 사회 전체가 흔들린다. 우리는 지금, 우수한 인재들이 '대학으로 가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사회를 만들고 있는가. 인재가 떠나는 대학, 청년이 외면하는 대학, 연구가 멈추는 대학에 미래는 없다. 대학을 살리는 일은 결국 사람을 살리는 일이고, 그건 곧 나라를 살리는 일이다. 대학이 살아야 국가도 산다. 이것은 결코 수사가 아니다.
7/16/25/hwanshikkim.tumblr.com/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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