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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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daikim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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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대빵 맞습니다 제주도를 혼자서 지켜낸 독종입니다 이런 독종이 제주도에는 몇 명 됩니다 특종이죠 United States of America 🇺🇸
가수 트와이스 멤버도 그 중 하나고 제가 서열 5번째 입니다 왜들 그렇게 나가시는지 제가 반정 반역했습니다 돈을 너무 늦게 주어서 신고 반정 반역 했습니다 아직도 미체납 많습니다
이유는 다 관세장벽 때문입니다 뭐 그래도 법원 잘만 빠져나옵니다 하지만 이번 정실 랑군사태는 시간이 접니다 동남아시아 입니다 필리핀 사건 입니다 수카르노를 봤고요 누나가 아웅산 입니다
시간대가 다 틀립니다 저는 동남아 시간이고 트와이스는 아프리카 시간이고 각하가 남미 멕시코 시간 입니다 주의회가 화와이 시간 맞습니다
그만큼 돈 많다 입니다 때문에 공권력 도 무시 못 합니다 혜은이 때와는 완전 다른 초일류 법전 사태입니다 저도 아직 정실에 남아있는 트라우마를 느낍니다 등을 태우는겁니다
등기부 등본상 제주도에 등인 서귀포를 태우는 겁니다 이것을 꿈 이라고 합니다 어머니들 파마 하는거랑 같은 겁니다
문제는 바닥장인데 항공 화물 물류 패스라 아직 좀 더 관세협정 및 관세협약이라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50% 물고 들어가는 겁니다 이를 D.C라고 하죠
관세협약은 구두협약 이라서 각 시간대에 수장과 수의계약을 하시면 됩니다 D.C 50% 인상 인하
미국인데요 미주시간 아프리카 시간 제가 동남아시간 입니다 공항은 아내 없으면 죽는 겁니다 몰빵 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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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nmo63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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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9(화), #TNF100KOREA 코스답사(CP2 ~ CP5, 36Km) 및 #korea50k 대비 #트레일러닝 연습 예상대로 #cp2 #오봉서원 ~ #cp5 #고루포기 까지 코스는 힘들다. 가파른 오르막의 연속으로 새로 추가된 #대관령옛길 코스도 만만히 볼 코스가 아니다. 그나마 위안은 옛길 #반정 ~ #금강소나무숲둘레길 ~ #제왕산 입구까지는 내리막과 평탄하다는 거다. #코리아50k 대비 훈련은 제대로 한 것 같다. * 실제시간은 8시간 20분대인데 #strava 기록은 7시간 22분이다. 참 후하다. * 화약골 등산로 빠져나와 코스를 찾지못해 마을안길을 이용해 cp5인 대관령 도착했다. https://www.instagram.com/p/BwCGkleFjcE/?utm_source=ig_tumblr_share&igshid=k7s2rtfdgv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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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lovlun119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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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명종 / 1543 백운동서원(주세붕이 안향을 기리기 위해 영주 최초의 사액서원) / 1545 을사사화 소윤이 대윤 제거 / 1555 을묘왜변(왜선 60여 척이 전남 연안 습격) 비변사 상설화
1467 이시애의 난 함경도 / 1624 이괄의 난 평안도 / 1589 정여립의 난 진안 / 1506 중종 반정 / 1623 인조 반정
정릉 중종(진성대군) 강남구 삼성동 / 효릉 인종 인성왕후 박씨 경기 고양 서삼릉 / 강릉 명종(경원대군) 인순왕후 심씨 노원구 공릉동
양재역 말죽거리
동방 5현 이황 조광조 이언적 정여창 김굉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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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soul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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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장대 [守禦將臺] "Don't try!" [하지마!] 이 말은 미국의 시인이자 유명 작가로 누구나 기억할 위대한 작가 중 한 사람이자 자신의 삶 자체를 진실을 토해낸다. 위선 투성이인 인간세상을 비웃으며 자유 분방하게 살다 간 찰스 부코스키의 의미 심장한 묘비명 이다. 계절마다 둘레길을 걷는 코스 중 가장 많이 들리게 되는 곳 중 하나가 남한산성이다. 가까운 친구가 있어서도 그렇지만 아주 높지 않으면서 거리도 적당 하니 자주 찾게 된다. 길을 걷다 보면 서울 강동의 조망권이 한 눈에 보이고 남한산성을 굳건하게 지키려던 수어장대는 늠름하게 버티고 있다. 말 처럼 수어청의 장수가 왕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올라서서 적과 대치하며 왕과 백성을 지키고 막기 위해 지휘를 하던 곳이다. 이곳 남한산성에는 먹거리 거리도 잘 조성되어 주말이면 차와 사람들로 빽빽하다. 백숙이 기원이 된 곳으로 백숙에 관한 슬픈 사연을 안다면 목으로 쉬이 넘기지 못하리라. 참 비운의 현장이다. 이는 추운 겨울 오랑캐에 쫒겨 남한산성으로 피난 온 인조에게 닭 울음이 없어지는 마지막까지 올랐던 수라상의 음식이었다. 백성은 헐벗고 굶주리니 누룽지 넣은 백숙이 넘어갈까. 인조는 기울어져 가는 명에 대한 예의로 하지 말아야 청과의 관계에서 못할 일들을 서인들에 의해 떠밀리듯 벌어 졌으니 이런 군신들의 현명하지 못한 판단으로 백성과 나라를 도탄에 빠지고 자신도 삼배구고두례 라는 치욕의 순간을 맞았을까. 요즘의 국제적 관계와 상황이 비슷하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이는 어떤 위엄과 명분, 약속과 조약 보다도 더 중요한건 실리적인 것이 중요하다. 독도 문제나 사드 배치, 요즘 중국의 상장으로 위축된 미국의 전략들.. 최근 시작한 칩4등 여러 동맹과 연합 결성을 준비하지만 결국 실리에 있어서는 미국도 중국과 손을 잡는다. 실례로 Apple사의 I-phone14의 반도체 신규 납품처를 YMTC(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로 선정했다는 뉴스다. 최근 바이든 미 대통령 방한에 ��물려 한국의 유수 재벌 기업들은 미국에 대한 투자를 대폭 늘렸지만 전기자동차 지원금 조차 한국을 배제했다는건 기도 안막힌다. 그 만큼 주변 강대국들의 제 각 실리적인 외교에 취약하고 명분만 따르는 동맹 외교는 어찌보면 닭 쫒던 개 모양으로 씁쓸하기만 하다. 이런저런 바람에 쫒기고 흔들리기 보다는 비젼을 통한 여러 노력과 더불어 나름의 성장 노하우를 제대로 갖춰야 할 때인것 같다. 인조의 반정 컴플렉스, 진정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왕의 지위와 품격은 허망한 숭명으로 서인들의 의해 결국 널널한 핫바지로 전락되고 말았다. 시대를 거스르는 판단들이 나라를 망치고 엄연한 왕의 자리도 불안하기 마련이다. 차라리 don't try 말처럼 당시 시도 조차 하지 않았다면 그런 전쟁의 비극은 애초에 없었을런지도 모��다. 나라를 지키던 수어청의 장수들은 오랑캐와 변변한 전투 한 번 못해 보고 이곳 수어청에서 저 너머를 허망하게 바라 보았을 것이다. 이곳을 한 계단씩 오르며 절로 생각 되는건 상황들이 1636년 병자년 먼 얘기 만은 아니듯 싶다. #남한산성둘레길 #경기도가볼만한곳 #인조와백숙 #수어장대 #역사는반복된다 #준비된자만이룰수있다 (남한산성에서) https://www.instagram.com/p/Ch4-HusvSfe/?igshid=NGJjMDIxM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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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shfhiug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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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지보 ㉠ 충선왕 즉위년(1298) 무술년}
邯鄲之步(한단지보) 한단(邯鄲)에서 걸음걸이를 배운다는 뜻으로,  제 분수(分數)를 잊고 무턱대고 남을 흉내내다가 이것저것 다 잃음을 비유(比喩ㆍ譬喩)하여 이르는 말 충선왕 즉위년(1298) 무술년 • 충렬왕 24년 1월 갑진일.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왕을 국왕(國王)으로 책봉하는 한편 충렬왕을 일수왕(逸壽王)으로 임명했다.병오일. 왕이 양위[內禪]를 받아 강안전(康安殿)1)에서 즉위했다.무신일. 왕이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2)“옛날 우리 태조께서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큰 이름을 무궁히 빛낸 후 역대 선왕께서 조상의 유업을 계승하여[堂構3)] 지금까지 381년이 경과했다. 우리 광문선덕태상왕(光文宣德太上王 : 충렬왕)께서는 세자로 있을 적[潛邸4)]에 백성을 편안하게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스스로 단안을 내려 황제의 조정에 입시하여 황녀를 배필로 맞이함으로써 선조의 위업5)을 그대로 잘 이어받아 스물다섯 해 동안 나라를 다스리니[嗣大曆服]6) 승평한 왕업이 이에 융성하게 되었다. 아아! 그러나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아 나의 모후이신 정민장선인명태후(貞敏莊宣仁明太后)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니 선왕께서는 마음이 울적한 나머지 정무에 권태를 느끼시고 나라의 온갖 중요한 일들을[繁機]7) 어린 나에게 맡기시니 재삼 굳이 사양했어도 허락을 얻지 못하여 결국 새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보잘 것 없는 나는 다행히 선제(先帝 ; 원 세조)의 외손으로, 황제와 황태후의 돌보심을 받아 공주와 혼인하고 마침내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역대 선왕들께서 쌓으신 공덕에 힘입어 나라의 크나큰 기업(基業)을 길이 보전하려면 마땅히 특별한 은혜를 멀고 가까운 곳에 두루 미치게 해야 마땅할 것이다. 이에 금년 정월 21일 새벽 이전의 범죄자 가운데 참형과 교수형 이하의 죄수는 모두 용서한다.1. 카다안[哈丹]이 침략8)해 왔을 당시 모든 주군(州郡)이 소문만 듣고서도 항복해 그들을 맞아들였지만 원주(原州)만은 유독 외로운 처지이면서도 적의 침략을 좌절시켰다. 그런 뒤에야 여러 성들이 원주성을 본받아 적의 무리를 소탕함으로써 삼한이 다시 안정되었고, 선제(先帝 : 원 세조)의 한을 갚았으니 그 공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당시 방호별감(防護別監)을 지냈으며 판서(判書)로 은퇴한 복규(卜奎)9)와 전사(戰士)인 중랑장(中郞將) 원충갑(元冲甲), 그 고을의 수령, 장리(長吏(鄕吏)) 가운데 공을 세운 자에 대해서는 이미 포상을 실시했지만 오히려 부족한 바가 있으니 높은 관직에 발탁하여 등용함으로써 후대 사람들의 귀감으로 삼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 고을에 부과되는 상요(常徭)와 잡공(雜貢)10)도 3년 간 면제해 주어야 할 것이다.1.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11) 삼한(三韓) 통일 이후 역대의 벽상공신(壁上功臣), 배향공신(配享功臣),12) 전쟁에 나가 전사한 공신의 자손들 가운데 비천한 기예 밖에 없는 탓에 공인(工人)·상인(商人)·장인(匠人)·악공(樂工)으로 전락한 자나, 공적이 있거나 은택을 받아 진작 양반(兩班)의 반열에 오른 데다 그 부모에게 흠결이 없는 자가 있는지 조사해 관직에 오를 길을 터 줄 것이다.13) 공신전(功臣田)14) 가운데 자손이 엄연히 있는데도 타인이 점유한 경우 연한(年限)에 관계없이 자손에게 돌려주게 한다. 또 동종(同宗)15) 가운데 공신전(功臣田)을 한 집에서 다 차지하고 있는 경우 그 족정(足丁)과 반정(半丁)16)을 구별하여 고르게 나누어 줄 것이며, 공신의 자손으로 남반(南班)17)에 속한 자는 동반(東班 : 문반)으로 고쳐 줄 것이다.1. 문(文)·무(武) 양반과 정로(正路)·잡로(雜路)로서 현재 관직에 있는 자는 등급을 올려준다. 동정직(同正職)18)으로 그 전에 관직을 받지 못했던 자는 이번에 모두 관직을 주도록 하며, 전부터 향직(鄕職)19)에 있던 자는 등급을 올려 주고 향직의 임기가 만료된 자는 향직계를 올려 줄 것이다.1. 각 관청 인리(人吏)들의 인사이동[動靜]은 한 번만 허락하며 이부(吏部)와 병부(兵部)의 관직에 처음 오르는 정원은 50명까지 허용한다. 근시(近侍)와 다방(茶房)20)의 관속들은 등급을 뛰어서 직위를 올려 주고 급사(給事)는 첫 관직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며, 남반에 속한 자는 연한 관계없이 동반으로 고쳐줄 것이다.1. 속담에, ‘승려들이 비직(批職)21)에 많이 오르면 나라가 망하고 집안도 패망한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비직의 수가 지나치게 많으니,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차후 그들의 승진과 폄출에 대한 사항을 철저히 보고하게 할 것이다. 또한 금후로 승려로서 법덕(法德)이 특별히 뛰어난 자가 있으면 법호(法號)를 덧붙여 주도록 할 것이다.1. 현재 유배 가 있는 자들 가운데 반란을 도모한 자, 불충과 불효죄를 저지른 자, 살인 강도범, 고의로 사람을 살해하려 한 자로서 얼굴에 ���묵(入墨)하여 상호(常戶)로 충당한 자22)들을 제외한 나머지 죄인으로서 섬으로 유배 가 있는 자들은 육지로 내 보내어 고향에 와서 거주하게 한다. 또 현재 고향에 거주하고 있는 자는 임금을 알현하는 것을 허용하고 일단 알현한 자는 정상을 참작해 벼슬을 줄 것이다. 공사(公私) 간에 잡죄(雜罪)를 범한 자는 몰수했던 직전(職田)23)을 돌려주고, 종신토록 서용을 불허했던 자나, 정직(停職)당해 산직(散職)에 소속되었던 자들도 정상을 참작해 벼슬을 줄 것이다.1. 일본에 호송사(護送使)로 갔다온 후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로 은퇴한 김유성(金有成)과 공역령(供驛令) 곽린(郭麟) 및 그들과 동행했던 관원들의 자손을 관직에 등용24)할 것이다.”기유일. 왕이 수녕궁(壽寧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문한학사승지(文翰學士承旨) 최참(崔旵),25) 학사(學士) 박전지(朴全之), 시독학사(侍讀學士) 오한경(吳漢卿)과 이전(李瑱)이 왕이 은사를 베푼 글을 작성한 공을 기려 각종 비단과 모시베를 각각 15필씩 하사했다.경술일. 왕이 덕자궁(德慈宮)26)을 찾아가 일수왕(逸壽王 : 충렬왕)을 모시고 수녕궁(壽寧宮)에서 잔치를 열었다.○ 왕의 장인인 진왕(晋王)이 평장(平章) 차라티무르[扎刺帖木兒]를 보내 공주의 죽음을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임자일. 중방(重房)27)에서 왕을 위해 잔치를 열었다.계축일. 왕이 불은사(佛恩寺)28)에 행차해 궁궐 지을 터를 살펴본 후 그곳을 덕자궁(德慈宮)으로 정했다.을묘일.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덕자궁을 찾아가 선왕에게 전(牋)을 올려 태상왕(太上王)이라는 존호를 바쳤다. 왕은 자포(紫袍)를, 태상왕(太上王)은 황포(黃袍)를 입고 백관들의 하례(賀禮)를 받으니 당시 사람들이 삼한에서 보기 드문 성대한 일이라 칭송했다.○ 평양후(平陽侯) 왕현(王昡)과 대장군(大將軍) 김정(金精)이 왕과 일수왕(逸壽王)이 황제에게 사의를 표하는 표문을 가지고 원나라에 갔다.병진일. 왕과 공주가 덕자궁(德慈宮)을 찾아가 태상왕(太上王) (충렬왕)을 모시고 수녕궁(壽寧宮)에서 잔치를 열었는데, 이는 공주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음날 또 태상왕(太上王)과 정화궁주(貞和宮主)를 맞아다가 왕궁에서 잔치를 열었다.• 2월 초하루 무오일. 왕이 처음으로 정동성(征東省)29)의 업무를 보았는데, 재추들과 행성좌우사(行省左右司)의 관리들이 왕을 알현하면서 원나라 조정의 의례에 따랐다.경신일. 아무간[阿木罕]30) 태자(太子)와 옹기라다이[甕吉剌歹]31) 승상(丞相)이 귀국길에 오르자 왕이 금교(金郊)32)까지 나가 전송했다.갑자일. 왕이 태상왕을 정화궁(貞和宮)으로 찾아본 후, “장목왕후(莊穆王后 :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에게 태후의 칭호를 덧붙여야 마땅하니 해당 관청은 의논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정묘일. 왕이 공주와 함께 인후(印侯)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기사일. 왕이 첨의밀직사(僉議密直司)를 왕궁(王宮)으로 삼으라고 지시했는데, 그 자리가 옛 언창궁(彦昌宮)의 터였기 때문이다. 애초 왕이 차신(車信)의 집을 왕궁으로 삼으려고 진작 공사에 착수까지 했는데, 지관(地官)이 그곳이 길지가 아니라고 주장하므로 결국 이곳으로 정하고 크게 공사를 일으킨 것이다.경오일. 관등(觀燈)33) 행사에 참석차 왕과 공주가 태상왕(太上王)을 모시고 강안전(康安殿)에 행차했다.신미일. 연등회(燃燈會)34) 참석차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가서, 문한학사(文翰學士) 최참(崔旵)·박전지(朴全之)·오한경(吳漢卿)·이전(李瑱)에게 상승국(尙乘局)35)의 안마(鞍馬)를 하사했다. 다음날 대회(大會) 때 신하들이 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술잔을 올렸다. 네 학사(學士)36) 차례가 되자 왕이 그들을 앞으로 오게 한 다음 술을 주면서,37) “그대 학사들은 조금도 숨김없이 직언하라.”고 당부했다.갑술일. 총랑(摠郞) 강용정(姜用丁)을 경상도 안렴사(按廉使)로, 정랑(正郞) 유겸(柳謙)을 그 부사(副使)로, 국학사예(國學司藝) 허유전(許有全)을 전라도 안렴사(按廉使)로, 직강(直講) 정형(鄭珩)을 그 부사(副使)로, 총랑(摠郞) 이원(李源)38)을 충청도 안렴사(按廉使)로, 낭장(郞將) 백응룡(白應龍)을 그 부사(副使)로 각각 임명했다.정축일. 감찰사(監察司)에서 교서랑(校書郞) 조진성(趙晋成)의 처 조씨(趙氏)를 수감했다. 조씨는 정랑(正郞) 조칭(趙偁)39)의 딸로 자기 친오빠인 조지열(趙之烈)과 간통했는데 모친이 그 사실을 알고 말리자 조지열(趙之烈)이 모친을 구타하고 누이를 은닉했기에 그 모친이 고소한 것이다. 왕이 친히 강안전(康安殿)에서 소재도량(消災道場)을 열었다.갑신일. 왕이 백관들을 거느리고 덕자궁(德慈宮)에서 태상왕의 생일을 축하했다.○ 왕이 글을 내려 전 사간(司諫) 이승휴(李承休)를 불렀다.40)○ 이달에 흉년이 들어 백성이 기근을 겪자 왕이 수라상의 반찬을 줄이게 하는 한편 내주(內廚)에게 도토리를 올리게 한 다음 그것을 맛보았다.• 3월 무자일. 왕이 친히 강안전(康安殿)에서 삼계(三界)에 초제(醮祭)를 지냈다. 중찬(中贊) 정가신(鄭可臣)이 은퇴를 간청하는 글을 올렸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임진일. 왕이 정화궁(貞和宮)으로 태상왕을 찾아뵈었다.계사일. 왕이 각 도의 안렴(按廉)을 불러 백성을 잘 다스리라고 당부하는 자리에서 눈물까지 흘리면서 술을 하사한41) 다음 각자의 임지로 보냈다.을미일. 방신우(方臣祐)·이숙(李淑)을 벽상삼한정광(壁上三韓正匡)으로. 오인영(吳仁永)을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로, 홍선(洪詵)을 우부승지(右副承旨)로 각각 임명했다.정유일. 진왕(晋王 : 원나라 진왕 카마라)의 생일을 맞아 왕과 공주가 태상왕을 모시고 수녕궁(壽寧宮)42)에서 잔치를 열었다.경자일. 왕이 왕륜사(王輪寺)와 건성사(乾聖寺)43)에 행차했다.○ 장양공(長陽公) 왕지(王潪)44)가 왕의 덕을 찬송하는 시를 지어 바치자 쌀 30석(石)을 하사했다.임자일. 왕이 친히 강안전(康安殿)에서 공덕천도량(功德天道場)45)을 열었다.○ 왕이 재신 최충소(崔冲紹)46) 및 한림(翰林)의 네 학사(學士)와 함께 삼교업(三敎業(儒·佛·道))에 대해 토론했다.계축일. 왕이 덕자궁(德慈宮)을 찾아뵈었다.을묘일. 고당왕(高唐王) 고리기스[闊里吉思]가 사신을 보내와 안평공주(安平公主 : 충렬왕비) 상(喪)의 부의(賻儀)를 전했다.○ 태상왕이 왕비 김씨(金氏(淑昌院妃))의 노비를 위해 내전(內傳)47)을 내려달라고 왕에게 요청했으나 왕은,“제가 즉위하는 날에 백성을 위하여 묵은 폐단을 반드시 없애겠다고 하늘에 맹세했는데 내전(內傳)도 그 중의 하나이오니 분부를 따르지 못하겠나이다.”48)고 거절하였다.• 여름 4월 무오일. 우박이 쏟아졌다.○ 학사(學士) 최참(崔旵) 등 네 명과 승지(承旨) 김승(金昇)으로 하여금 관리의 선발[銓選]을 관장하게 했다.경신일. 왕이 친히 강안전(康安殿)에서 인왕도량(印王道場)49)을 열었다.신유일. 왕이 개경에 머물러 있는 지방관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별장(別將) 이하는 본역(本役)으로 복귀시켰다.갑자일. 태사국(太史局)50)에서, “도성에 거주하는 무당들의 음사(淫祀)51)가 날로 극성을 부리니 그들을 도성 밖으로 옮기게 해야 합니다.”라고 건의했다.을축일. 왕과 공주가 덕자궁(德慈宮)에서 태상왕의 만수무강을 축원하였다.병인일. 왕이 사신(詞臣) 허유전(許有全)·조간(趙簡) 및 은퇴한 신하 김효신(金孝臣)과 최창(崔瑒)으로 하여금 현 정치의 잘잘못에 대해 직언하게 하면서 실책이 있으면 빠짐없이 즉시 상소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무진일. 왕이 수녕궁(壽寧宮)에서 꽃놀이 잔치를 열었다.경오일. 왕이 덕자궁(德慈宮)에 있는 태상왕을 찾아뵈었다.임신일. 또 덕자궁을 찾아갔다.을해일. 전 밀직사사(密直司使) 안전(安戩)이 죽었다.신사일. 우박이 쏟아졌다.○ 첨의사(僉議司)가 왕의 이름과 음이 비슷하여 혼동하기 쉬운[嫌名] 원(元)·원(原)·원(源)·원(騵)·원(嫄)·원(羱)·원(原虫虫)·원(扌原)·원()·원(蒝) 등의 글자를 쓰지 못하게 할 것을 건의하자 이를 허락하면서 아울러 원(遠)자도 쓰지 못하게 했다.• 5월 병술일. 공주가 조비(趙妃)를 투기하자 공주의 유모가 무뢰배들과 함께 몰래 음모를 꾸며, 공주가 왕에게서 소박을 맞았다고 하면서 코케부카[闊闊不花]·코케다이[闊闊歹]와 대장군(大將軍) 김정(金精)·오정규(吳挺圭) 등을 원나라에 보내 태후에게 고자질 하게 했다.52)경인일. 왕의 초대를 받아 서번(西蕃)의 바가스[八哈思]53) 등 19명이 찾아왔다.���묘일. 왕이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선왕들께서 관청을 설치하고 직무를 나눈 것은 적합한 사람을 얻어 모든 국무를 함께 처리하려는 뜻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에 상국의 조정에 입시해 몸소 선제(先帝 :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상국의 제도를 직접 상세히 관찰한 바 있다. 이제 외람되게 국왕으로서의 무거운 책임[重寄54)]을 맡아 나라가 당면했던 폐단을 모두 혁파했으나 다만 재상의 숫자가 옛 제도보다 훨씬 초과해 있는 바람에 조정의 의논도 상당 부분 차이가 커서 모든 일이 지체되고 있으니 그 수를 줄여야만 할 것이다.또 최근 들어 상국의 제도를 피해 백관의 명칭도 진작 고친바 있으나 동일한 것을 고치지 않은 것, 동일하지 않은데도 고친 것, 고친 명칭이 옛 제도를 따르지 않아 적절성을 잃은 것이 간혹 눈에 띈다. 즉위한 초기에 기존의 규정을 갑자기 고칠 경우 여론에 어그러질까 우려되기는 하나, 상황에 따라 변혁하는 일은 옛적에도 또한 있었던 일이다. 이제 역대의 관직을 참고하여 상국의 관직명과 관련되지 않는 경우에는 바꾸도록 하고 불요불급한 관청들은 폐지해 하나로 합하면 거의 관청의 숫자가 줄어 일의 처리가 쉬워질 것이다.”○ 이 날에 조인규(趙仁規)를 사도(司徒)·시중(侍中)·참지광정원사(叅知光政院事)로, 홍자번(洪子藩)을 좌복야(左僕射)·참지광정원사(叅知光政院事)로, 홍규(洪奎)를 수사도(守司徒)·영경령궁사(領景靈宮事)로, 정가신(鄭可臣)을 사공(司空)·우복야(右僕射)·수문전대학사(修文殿大學士)·감수국사(監修國史)·참지광정원사(叅知光政院事)로, 인후(印侯)를 광정사(光政使)·참지기무(叅知機務)로, 김혼(金琿)을 검교수사도(檢校守司徒)·영봉상시사(領奉常寺事)로, 차신(車信)와 이지저(李之氐)를 함께 검교사도(檢校司徒)·자정원사(資政院使)로, 김지숙(金之淑)을 동지광정원사(同知光政院使)·참지기무(叅知機務)로, 안향(安珦)을 참지기무(叅知機務)·행동경유수(行東京留守)·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계림부윤(雞林府尹)으로, 유비(柳庇)를 광정부사(光政副使) 겸 권참지기무(權叅知機務)로, 최유엄(崔有渰)을 검교사공(檢校司空)·사헌대부(司憲大夫)로, 이혼(李混)을 검교사공(檢校司空)·서경유수(西京留守)·평양부윤(平壤府尹)으로, 정해(鄭瑎)를 남경유수(南京留守)·광릉부윤(廣陵府尹)으로, 최충소(崔冲紹)를 동지자정원사(同知資政院事)·행중경유수(行中京留守)·개원부윤(開元府尹)·과의군도지휘사(果毅軍都指揮使)로, 박의(朴義)를 동지자정원사(同知資政院事)로, 민지(閔漬)를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첨광정원사(簽光政院事)로, 원경(元卿)을 중경유수(中京留守)·과의군도지휘사(果毅軍都指揮使)로, 민종유(閔宗儒)를 전조상서(銓曹尙書)·숭복관사(崇福館使)로, 허평(許評)을 민조상서(民曹尙書)로, 윤보(尹珤)를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의조상서(儀曹尙書)로, 최참(崔旵)을 사림학사승지(詞林學士承旨)·형조상서(刑曹尙書)로, 전승(全昇)을 숭문관학사(崇文館學士)·병조상서(兵曹尙書)로, 유욱(柳栯)을 병조상서(兵曹尙書)·응양군(鷹揚軍) 상장군(上將軍)으로, 오한경(吳漢卿)을 사림학사(詞林學士)·시좌산기상시(試左散騎常侍)로, 이진(李瑱)을 사림학사(詞林學士)·시우산기상시(試右散騎常侍)로, 홍자한(洪子翰)을 금오위(金吾衛) 섭상장군(攝上將軍) 겸 사헌중승(司憲中丞)으로, 장석(張碩)을 광정도승지(光政都承旨)·봉상경(奉常卿)으로, 김순(金恂)을 광정부사승지(光政副使承旨)·성균제주(成均祭酒)로, 조서(趙瑞)를 광정승지(光政承旨)·전객경(典客卿)으로, 이승휴(李承休)를 사림시독학사(詞林侍讀學士)·시비서감(試秘書監)·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심봉길(沈逢吉)을 사헌중승(司憲中丞)으로, 권영(權永)을 사림시강학사(詞林侍講學士)·시위위경(試衛尉卿)으로, 조간(趙簡)을 형조시랑(刑曹侍郞)·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으로 각각 임명했다.55)계사일. 왕이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승려는 이미 출가한 사람이라 위로는 군왕에게 절하지 않고 아래로는 부모에게도 절하는 않는 법이니 하물며 그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 승려와 속인들이 서로 절할 경우 법에 따라 엄중히 처벌할 것이다. 비록 자기 집에 거처하는 하찮은 승려라도 관청의 부역에는 차출하지 말도록 하라.”갑오일. 왕자 의충(宜忠)56)을 영가군(永嘉軍) 승선사(承宣使)로 의효(宜孝)57)를 강릉군(江陵軍) 승선사(承宣使)로 임명했다. 또 종실(宗室) 왕현(王眩)58)을 평양군공(平陽郡公)으로, 왕유(王維)59)를 함녕공(咸寧公)으로, 왕미(王亹)60)를 광릉군후(廣陵郡侯)로, 왕원(王元)61)을 한산군후(漢山郡侯)로, 왕지(王禔)62)를 통의군(通義軍) 관찰사(觀察使)로, 왕화(王和)63)를 단양군(丹陽軍) 관찰사(觀察使)로, 왕관(王琯)을 계양군(桂陽軍) 관찰사(觀察使)로, 왕상(王祥)을 임해군(臨海軍) 관찰사(觀察使)로, 왕구(王玖)64)를 한남군(漢南軍) 관찰사(觀察使)로, 왕빈(王贇)65)을 순정군(順正軍) 관찰사(觀察使)로, 왕헌(王軒)을 연평군(延平軍) 관찰사(觀察使)로, 왕형(王珩)66)을 시흥군(始興軍) 관찰사(觀察使)로, 왕숙(王璹)67)을 정산군(定山軍) 관찰사(觀察使)로, 왕마(王麻)를 영해군(寧海軍) 관찰사(觀察使)로, 왕광(王侊)68)을 강음군(江陰軍) 관찰사(觀察使)로, 왕온(王溫)을 진강군(晋江軍) 관찰사(觀察使)로, 왕기(王琪)를 보녕군(保寧軍) 관찰사(觀察使)로 각각 임명했다. 허경(許卿)을 한양군(漢陽軍) 관찰사(觀察使)·천우위(千牛衛) 상장군(上將軍)으로 각각 임명했다.갑진일. 공주가 테리[徹里]를 원나라에 보냈다.을사일. 안평공주(安平公主)의 소상(小祥)을 맞아 왕이 선효사(禪孝寺)에 행차해 분향했다.병오일. 왕이 덕자궁(德慈宮)으로 태상왕을 찾아뵈었다.을사일. 왕이 사람을 시켜 공주에게 테리[徹里]를 원나라에 보내지 말라고 설득하게 했으나 공주는 듣지 않았다.임자일.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 유승(柳陞)이 죽었다.을묘일. 왕과 공주가 서번의 승려로부터 계(戒)를 받았다.○ 새 궁궐의 건축 공사를 중지시켰다.○ 왕이, “이후로 모든 관료들은 모든 일에 대해 일일이 품의를 올리지 말고 재추들과 상의해 방침을 정한 후에 보고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6월 초하루 병진일. 태상왕 및 국왕과 공주가 서번(西蕃)의 승례에게 계(戒)를 받았다.○ 테리[徹里]가 원나라로부터 돌아왔다.정사일. 원나라에서 우승(右丞) 아릭쿠이[阿里灰]·홍중희(洪重喜), 중서좌승(中書左丞) 양염룡(楊炎龍)을 보내 왔는데 역마를 타고 수행한 인원이 백 명을 넘었다. 그들은 조인규(趙仁規)를 국문69)한 후 원경(元卿)을 데리고 감찰사(監察司)로 가서 새로 제정한 관제(官制)를 철회시켰다.70)무오일. 왕이 덕자궁(德慈宮)으로 태상왕을 찾아뵙고 참형과 교수형 이하의 죄수를 사면했다.기미일. 다시 테리[徹里]를 원나라로 보냈다.○ 첨의중찬(僉議中贊) 정가신(鄭可臣)이 죽었다.71)계해일. 승지방(承旨房)72)을 다시 설치하고 전 승지(承旨) 장석(張碩)·홍선(洪詵)·전승(全昇)으로 하여금 업무를 보게 했다.갑자일. 양염룡(楊炎龍)이 생성고(生成庫)를 봉인했는데 이곳은 왕궁의 진귀한 보물들을 소장해 둔 창고였다.을축일. 왕이 덕자궁(德慈宮)으로 태상왕을 찾아뵈었다.○ 마팔국(馬八國)73) 왕자인 보카리[孛哈里]가 사신을 보내 은실로 만든 관모, 금실을 수놓은 수박(手箔), 침향(沉香) 5근 13냥, 토산품 베 2필을 바쳤다. 그 전에 왕이 채인규(蔡仁揆)의 딸74)을 원나라 승상 셍게[桑哥]에게 시집 보냈는데 셍게가 처형당한 후 황제가 그 여자를 보카리에게 내려주었다. 보카리가 자기 나라 국왕과 사이가 벌어지자 원나라로 망명해 천주(泉州)에 살았는데 이때에 와서 채씨와의 인연을 빌미로 사자를 보내 교통하게 한 것이다.무진일. 태후75)가 첨추밀원사(僉樞密院事) 홍군상(洪君祥)과 티무르부카[帖木兒不花]를 보내왔다.임신일. 왕이 수녕궁(壽寧宮)에 행차하여 토번(吐蕃)의 승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액운을 없애달라고 축원했다.갑술일. 왕이 덕자궁(德慈宮)으로 태상왕을 찾아 뵈었다.을해일. 왕이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왕과 공주가 태상왕을 모시고 원나라 사신을 위해 수녕궁(壽寧宮)에서 잔치를 열었다.정축일. 양염룡(楊炎龍)이 원나라로 돌아가자 왕이 선의문(宣義門)76) 밖까지 나가 전송했다.계미일. 안평공주(安平公主)의 생일을 맞아 왕과 공주가 태상왕(太上王)을 모시고 수녕궁(壽寧宮)에서 잔치를 열었다.갑신일. 천변(天變)이 자주 나타나므로 죄질이 경미한 죄수는 석방하고 중죄인은 형벌을 한 등급 낮추어 주었다.• 7월 정해일. 왕과 공주가 덕자궁(德慈宮)의 태상왕을 찾아뵈었다.○ 테리[徹里]가 원나라로부터 돌아오는 편에 황제가 8월에 국왕과 공주가 함께 입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신묘일. 홍군상(洪君祥)이 궁 안에서 왕을 위해 잔치를 열었다.임진일. 왕이 덕자궁(德慈宮)으로 태상왕을 찾아뵙고 다음날 공주와 함께 다시 찾아갔다.○ 홍군상(洪君祥)이 잔치를 열었다.무술일. 다시 관제(官制)를 고쳤다.77) 홍자번(洪子藩)을 삼중대광(三重大匡)·첨의중찬(僉議中贊)·판전조사(判銓曹事)로, 인후(印侯)를 중대광(重大匡)·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판병조감찰사사(判兵曹監察司事)로, 김혼(金琿)을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판민조사(判民曹事)로, 한희유(韓希愈)를 수사공(守司空)·중경유수(中京留守)·개성부윤(開城府尹)·상의도첨의회의도감사(商議都僉議會議都監事)로, 차신(車信)을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판의조사(判儀曹事)로 김지숙(金之淑)을 첨의첨리(僉議僉理)·판공조사(判工曹事)로 안향(安珦)을 첨의첨리(僉議僉理)·수문전대학사(修文殿大學士)·감수국사(監修國士)로, 이지저(李之氐)를 자정원사(資政院使)·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로, 최유엄(崔有渰)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이혼(李混)을 ���직사사(密直司事)·전조판서(銓曹判書)·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수국사(修國史)로, 정해(鄭瑎)를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병조판서(兵曹判書)·보문각대학사(寶文閣大學士)로, 유비(柳庇)를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좌상시(左常侍)로, 민지(閔漬)를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감찰대부(監察大夫)·사림학사승지(詞林學士承旨)로, 원후(元珝)를 동지자정원사(同知資政院事)·민조판서(民曹判書)로, 원경(元卿)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공조판서(工曹判書)로 김변(金賆)을 동지자정원사(同知資政院事)·의조판서(儀曹判書)·동수국사(同修國史)로, 허평(許評)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판봉상사사(判奉常寺事)로, 오인영(吳仁永)을 밀직부사(密直副使)·판위위사사(判衛尉寺事)로, 민종유(閔宗儒)를 밀직부사(密直副使)·형조판서(刑曹判書)로, 윤보(尹珤)를 밀직부사(密直副使)·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로, 유복화(劉福和)를 밀직부사(密直副使)·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로, 설경성(薜景成)을 자정원부사(資政院副使)·판대복시사(判大僕寺事)로, 김부윤(金富允)을 자정원부사(資政院副使)·판사진시사(判司津寺事)로 각각 임명하고 모두 상호군(上護軍)을 겸직하게 했다. 또한 최참(崔旵)을 자정원부사(資政院副使)·우상시(右常侍)·사림학사승지(詞林學士承旨)로, 장석(張碩)을 자정원부사(資政院副使)·중경유수(中京留守)·판외부시사(判外府寺事)·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로, 유욱(柳栯)을 자정원부사(資政院副使)·판내부시사(判內府寺��)로, 박전지(朴全之)를 삼사좌사(三司左使)·사림학사승지(詞林學士承旨)로, 오한경(吳漢卿)을 삼사우사(三司右使)·사림학사(詞林學士)로, 홍선(洪詵)을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병조판서(兵曹判書)·지전조사(知銓曹事)로, 홍자한(洪子翰)을 지감찰사사(知監察司事)로, 전승(全昇)을 좌부승지(左副承旨)·판비서시사(判秘書寺事)·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로, 이승휴(李承休)를 판비서시사(判秘書寺事)·숭문관학사(崇文館學士)로, 김순(金恂)을 우승지(右承旨)·성균좨주(成均祭酒)·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지민조사(知民曹事)로, 이전(李瑱)을 좌승지(左承旨)·비서윤(秘書尹)·지병조사(知兵曹事)·사림학사(詞林學士)로, 권영(權永)을 밀직사우승지(密直司右承旨)·예빈윤(禮賓尹)·지공조사(知工曹事)·사림시독학사(詞林侍讀學士)로 각각 임명했다.기해일. 왕과 공주가 신효사(神孝寺)78)에 행차해 우란분재(盂蘭盆齋)79)를 열었다.계묘일. 홍군상(洪君祥)이 원나라로 돌아갔다.을사일. 왕이 삼대장소(三大藏所)에 행차해 오대부경(五大部經)을 필사하라고 지시했다.병오일. 왕과 공주가 안국사(安國寺)에 행차해 물놀이를 구경했다.경술일. 왕과 공주가 함께 덕자궁(德慈宮)으로 태상왕을 찾아뵈었다.계축일. 왕이 덕자궁(德慈宮)으로 태상왕을 찾아뵈었다.• 8월 초하루 을묘일. 왕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정해(鄭瑎)를, 행성(行省)에서는 석말에센티무르[石抹也先帖木兒]를 각각 원나라에 보내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게 했다.경신일. 태상왕(太上王)이 장군(將軍) 최중경(崔仲卿)80)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갑자일. 원나라가 보롤[孛魯兀] 등을 보내와 왕과 공주의 입조(入朝)를 재촉했다.○ 유비(柳庇)를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박전지(朴全之)를 밀직부사(密直副使)·중경유수(中京留守)로, 김순(金恂)을 삼사좌사(三司左使)로, 허평(許評)을 동지자정원사(同知資政院事)로, 유복화(劉福和)를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이승휴(李承休)를 밀직부사(密直副使)·감찰대부(監察大夫)·사림학사승지(詞林學士承旨)로 임명한 뒤 은퇴시켰다.무진일. 안평공주(安平公主)를 인명태후(仁明太后)로 추존했다.신미일. 왕과 공주가 원나라에 가면서 참형과 교수형 이하의 죄수를 사면했다.임신일. 태상왕이 금교(金郊)에서 왕 일행을 전송하면서 술자리가 무르익자 갑자기 사신 보롤[孛魯兀]이 황제의 명령이라며 국왕인(國王印)을 빼앗아 일수왕(逸壽王 : 충렬왕)에게 주었다. 이에 태상왕이 복위했다.81)원나라에 간 충선왕은 그 후 모두 10년간 숙위(宿衛)했는데 원나라의 무종(武宗)과 인종(仁宗)이 아직 황제 자리에 오르기 전에[龍潛82)] 늘 그와 함께 지내면서 밤낮으로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충렬왕 33년, 황제의 조카인 아유르바르와다태자[愛育黎拔力八達太子]83)와 우승상(右丞相) 다르칸[答刺罕]84)과 원사(院使) 베크부카[別不花]가 왕과 함께 회령왕(懷寧王) 카이샨[海山]85)을 황제로 옹립하려는 계책을 세웠다. 그러나 좌승상(左丞相) 아쿠타이[阿忽台]와 평장(平章) 바두마신[八都馬辛] 등이 안서왕(安西王) 아난다[阿難達]를 황제로 받들려고 반란을 계획했다. 태자가 그 음모를 알아차리고서 하루 전에 먼저 아쿠타이 등을 체포해 대왕 두라[都剌]와 원사(院使) 베크부카 및 왕으로 하여금 죄를 추궁하게 한 다음 이들을 처형시켰다. 그해 5월 황제의 조카인 회령왕이 황제에 즉위하니 이 사람이 무종(武宗)이다.• 충렬왕 34년 5월 무인일. 황제를 옹립한 공86)을 기려 원나라에서 왕을 심양왕(瀋陽王)으로 책봉하고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아아! 그대 추충규의협모좌운공신(推忠揆義協謀佐運功臣)·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정동행중서성좌승상(征東行中書省左丞相)·부마(駙馬) 왕장(王璋)은 세조(世祖)의 외손이자 선왕의 귀한 사위로서 짐이 황위를 계승하던 초기에 짐을 도와 큰 공로를 세웠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큰 절의를 길이 지켜나가기 위해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을 적용하여 그대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태자태부(太子太傅)·상주국(上柱國)·부마도위(駙馬都尉) 관작을 특별히 내려주며 아울러 심양왕(瀋陽王)으로 승진시켜 책봉한다.”또 왕으로 하여금 중서성(中書省)에 들어가 국정의 논의에 참여하게 했으며, 금호부(金虎符)·옥대(玉帶)·칠보대(七寶帶)·벽전금대(碧鈿金帶) 및 황금(黃金) 5백 냥, 은 5천 냥을 하사했다. 황후와 황태자도 왕을 총애한 나머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진기한 보물과 비단을 선물로 주었다.二十四年 正月 甲辰 元遣使, 冊爲國王, 以忠烈爲逸壽王. 丙午 受內禪, 卽位於康安殿. 戊申 敎曰, “昔我太祖, 一統三韓, 熙鴻號于無窮, 堂構相承, 于今三百八十有一年矣. 逮我光文宣德太上王, 在潛邸時, 爲安黎庶, 斷自睿慮, 入侍帝庭, 得配王姬, 光紹前寧, 嗣大曆服, 二十五年, 昇平之業, 於斯爲盛. 噫, 皇天不弔, 俾我母后貞敏莊宣仁明太后, 奄忽賓天, 上心鬱鬱, 倦于聽政, 以軍國繁機, 歸于幼冲, 牢讓再三, 不獲兪命, 新卽王位. 惟予小子, 幸爲先帝外甥, 又承皇帝·皇太后眷顧, 嘉與公主, 聿來于玆. 倘賴積累之功, 永保社稷丕丕之基, 宜以殊恩, 覃及遐邇. 自正月二十一日昧爽以前, 二罪以下, 咸宥除之.一, 哈丹之闌入也, 州郡望風迎降, 唯原州, 以孤城, 摧挫賦鋒. 然後, 諸城效之, 掃盡賊儻, 致三韓之再安, 敵先帝之所愾, 其功萬世難忘. 其防護別監判書致仕卜奎, 戰士中郞將元冲甲, 其邑守倅, 與長吏之成功者, 雖已褒賞, 尙有慊然, 宜加擢用, 勸勵後人. 其邑常徭雜貢, 宜復三年.一,87) 三韓壁上功臣, 三韓後代代壁上功臣, 配享功臣, 征戰沒陣而亡功臣子孫等, 以賤技, 落在工商匠樂者, 凡以功與恩, 已屬兩班, 而父母無痕咎者, 宜推明許通, 其功臣之田, 如有孫, 外人占取者, 勿論年限, 依孫還給. 同宗中功臣田, 若一戶合執者, 辨其足丁·半丁, 均給功臣子孫, 屬南班者, 改東班.一, 文武兩班, 正·雜路, 凡有職者, 加次第. 同正職前恩未蒙者, 幷以今恩許蒙, 前有鄕職者, 加次第, 鄕職官滿者, 加鄕職階.一, 諸司人吏動靜, 許一度, 吏兵部入仕者, 各許五十人. 近侍·茶房員吏, 超等加職, 給事許初入仕, 南班屬者, 年限勿論, 改東班.一, 諺曰, ‘僧多批職, 亡國敗家.’ 今批職之數過多, 令有司, 褒貶申聞. 今後有法德殊勝88)者, 方加法號.一, 前所配者, 除謀亂國家, 不忠不孝, 殺人强盜, 謀故劫殺, 鈒面充常戶外, 其餘入島者, 出陸餘鄕. 餘鄕者通朝見, 朝見者量用. 公私雜罪者, 還其職田, 終身不叙, 停職屬散者量用.一, 日本護送使副知密直司事致仕金有成, 供驛令郭麟, 一行員將子孫錄用.”己酉 移御壽寧宮, 王, 以文翰學士承旨崔旵, 學士朴全之, 侍讀學士吳漢卿·李瑱, 修撰宥旨, 賜綾絹紬紵各十五匹. 庚戌 王詣德慈宮, 奉逸壽王, 宴于壽寧宮. 王舅晋王, 遣平章扎剌帖木兒來, 弔公主喪, 仍致祭. 壬子 重房宴王. 癸丑 幸佛恩寺, 相營宮之地, 置德慈宮. 乙卯 王率百官, 詣德慈宮, 奉牋, 上尊號, 曰太上王, 王衣紫袍, 太上王衣黃袍, 受賀, 時稱三韓罕有之盛事. 平陽侯昡, 大將軍金精, 齎王及逸壽王謝表, 如元. 丙辰 王與公主, 詣德慈宮, 奉太上王, 宴于壽寧宮, 爲公主誕日也. 翌日, 又奉迎太上王及貞和宮主, 宴于王宮.二月 戊午朔 王始署征東省事, 宰樞及行省左右司官吏謁見, 用元朝禮. 庚申 阿木罕太子及甕吉剌歹丞相還, 王餞于金��. 甲子 王朝太上王于貞和宮, 王命, “莊穆王后宜加太后之號, 有司, 其議以聞.” 丁卯 王與公主, 移御印侯家. 己巳 命以僉議密直司爲王宮, 盖古彦昌宮基也. 初王欲以車信家爲宮, 旣興工, 相地者以爲不吉, 遂卜於此, 大興工役. 庚午 以觀燈, 王與公主, 奉太上王, 幸康安殿. 辛未 燃燈, 王如奉恩寺, 賜文翰學士崔旵·朴全之·吳漠卿·李瑱, 尙乘鞍馬. 翌日大會, 群臣上壽. 次至四學士, 王使之前, 賜巵酒, 謂之曰, “惟爾諸學士, 直言無隱.” 甲戌 以摠郞姜用丁爲慶尙道按廉使, 正郞柳謙副之, 國學司藝許有全爲全羅道按廉使, 直講鄭珩副之, 摠郞李源爲忠淸道按廉使, 郞將白應龍副之. 丁丑 監察司囚校書郞趙晋成妻趙氏. 趙氏正郞偁之女也, 與兄之烈通, 其母知而止之, 之烈歐母匿妹, 其母訟之. 親設消災道場于康安殿. 甲申 王率百官, 賀太上王生日于德慈宮. 王下書, 徵前司諫李承休. 是月 , 王以歲凶民飢, 減膳, 命內廚進橡實, 嘗之.三月 戊子 親醮三界于康安殿. 中贊鄭可臣上章乞退, 不允. 壬辰 王朝太上王于貞和宮. 癸巳 王召諸道按廉, 諭以治民之事, 爲之流涕, 賜酒遣之. 乙未 以方臣祐·李淑爲壁上三韓正匡, 吳仁永副知密直司事, 洪詵爲右副承旨. 丁酉 王與公主, 以晋王生日, 奉太上王, 宴于壽寧宮. 庚子 幸王輪·乾聖二寺. 長陽公潪, 進頌德詩, 賜米三十石. 壬子 親設功德天道場于康安殿. 王與宰臣崔冲紹及翰林四學士, 論三敎業. 癸丑 王朝于德慈宮. 乙卯 高唐王闊里吉思遣使來, 歸安平公主之賻. 太上王爲妃金氏奴婢, 求內傳于王, 王曰, “臣於卽位之日, 爲民, 請命于天, 革去宿弊, 內傳其一也, 臣不敢奉命.”夏四月 戊午 雨雹. 命學士崔旵等四人及承旨金昇, 掌銓選. 庚申 親設仁王道場于康安殿. 辛酉 王命撥還外吏之在京者, 別將以下, 勒還本役. 甲子 太史局言, “城中巫覡, 淫祀日盛, 請徙郭外.” 乙丑 王與公主, 上壽德慈宮. 丙寅 王命詞臣許有全·趙簡, 及致仕金孝臣·崔瑒, 直言時事, 凡有愆違, 卽以聞. 戊辰 王置賞花宴于壽寧宮. 庚午 王朝德慈宮. 壬申 亦如之. 乙亥 前密直司使安戩卒. 辛巳 雨雹. 僉議司請避王嫌名, 元·原·源·騵·嫄·羱····蒝等字, 從之, 仍命幷諱遠字.五月 丙戌 公主妬趙妃, 公主之乳媼, 與無賴之徒潛謀, 以公主失愛, 遣闊闊不花·闊闊歹, 與大將軍金精·吳挺圭等如元, 告大后. 庚寅 西蕃八哈思等十九人來, 王所招也. 辛卯 敎曰, “先王設官分職, 盖欲得人, 而共圖庶務. 孤於幼歲, 入侍天庭, 躬承先帝之訓, 目覩大都之制, 旣詳矣. 及叨重寄, 凡諸時獘, 一皆蠲罷, 惟宰執之數, 倍於古制, 公家議論, 多少異同, 事事稽滯, 宜當減省. 又頃者, 因避上朝之制, 百官名號, 早曾改之, 然或有同而不改者, 有不同而改之者, 所更之號, 亦不師古, 容有未稱. 孤當卽位之初, 遽革成規, 懼乖物議, 然隨時沿革, 古亦有之. 載按歷代官職, 不涉上朝官號者, 而易置之, 或罷不急之司, 合於一局, 庶幾官省, 而事易理也.”是日, 以趙仁規爲司徒侍中叅知光政院事, 洪子藩爲左僕射叅知光政院事, 洪奎守司徒領景靈宮事, 鄭可臣爲司空右僕射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叅知光政院事, 印侯爲光政使叅知機務, 金琿檢校守司徒領奉常寺事, 車信·李之氐並檢校司徒資政院使, 金之淑同知光政院使叅知機務, 安珦叅知機務行東京留守集賢殿大學士雞林府尹, 柳庇爲光政副使兼權叅知機務, 崔有渰檢校司空司憲大夫, 李混檢校司空西京留守平壤府尹, 鄭瑎爲南京留守廣陵府尹, 崔冲紹同知資政院事行中京留守開元府尹果毅軍都指揮使, 朴義同知資政院事, 閔漬集賢殿大學士簽光政院事, 元卿爲中京留守果毅軍都指揮使, 閔宗儒爲銓曹尙書崇福館使, 許評爲民曹尙書, 尹珤爲弘文館學士儀曹尙書, 崔旵爲詞林學士承旨刑曹尙書, 全昇爲崇文館學士兵曹尙書, 柳栯爲兵曹尙書鷹揚軍上將軍, 吳漢卿爲詞林學士試左散騎常侍, 李瑱爲詞林學士試右散騎常侍, 洪子翰爲金吾衛攝上將軍兼司憲中丞, 張碩爲光政都承旨奉常卿, 金恂爲光政副使承旨成均祭酒, 趙瑞爲光政承旨典客卿, 李承休爲詞林侍讀學士試秘書監左諫議大夫, 沈逢吉爲司憲中丞, 權永爲詞林侍講學士試衛尉卿, 趙簡爲刑曹侍郞右諫議大夫.癸巳 敎, “僧人旣已出家, 固當上不拜君王, 下不拜父母, 況其餘乎? 自今, 僧俗相拜者, 重論如法. 雖至居家庸僧, 勿差官役.” 甲午 以王子宜忠爲永嘉軍承宣使, 宜孝爲江陵軍承宣使. 以宗室眩爲平陽郡公, 維爲咸寧公, 亹爲廣陵郡侯, 元爲漢山郡侯, 禔爲通義軍觀察使, 和爲丹陽軍觀察使, 琯爲桂陽軍觀察使, 祥爲臨海軍觀察使, 玖爲漢南軍觀察使, 贇爲順正軍觀察使, 軒爲延平軍觀察使, 珩爲始興軍觀察使, 璹爲定山軍觀察使, 麻爲寧海軍觀察使, 侊爲江陰軍觀察使, 溫爲晋江軍觀察使, 琪爲保寧軍觀察使. 許慶爲漢陽軍觀察使千牛衛上將軍.甲辰 公主遣徹里如元. 乙巳 王以安平公主小祥, 幸神孝寺行香. 丙午 詣德慈宮. 王使人請公主留徹里, 不聽. 壬子 都僉議參理柳陞卒. 乙卯 王與公主, 受戒于蕃僧. 罷營新宮. 敎, “自今百寮, 凡大小公事, 並除狀申, 從宰樞商議處決, 然後以聞.”六月 丙辰朔 太上王及國王·公主, 受戒于蕃僧. 徹里還自元. 丁巳 元遣右丞阿里灰·洪重喜, 中書左丞楊炎龍來, 凡乘傳者百餘. 鞫趙仁規, 遂與元卿, 往監察司, 收新定官制. 戊午 王朝德慈宮, 宥二罪己下. 己未 復遣徹里如元. 僉議中贊鄭可臣卒. 癸亥 復置承旨房, 以前承旨張碩·洪詵·全昇爲之. 甲子 楊炎龍封生成庫, 乃王府珍寶所臧也. 乙丑 王朝德慈宮. 馬八國王子孛哈里遣使來, 獻銀絲帽, 金繡手箔, 沈香五斤十三兩, 土布二匹. 先是, 王以蔡仁揆女, 歸丞相桑哥, 桑哥誅, 帝以蔡氏, 賜孛哈里. 孛哈里, 與其國王有隙, 奔于元, 居泉州, 至是, 以蔡氏故, 遣使通之. 戊辰 太后遣僉樞密院事洪君祥及帖木兒不花來. 壬申 幸壽寧宮, 飯蕃僧, 祓呪咀. 甲戌 王朝德慈宮. 乙亥 王受菩薩戒. 王與公主, 奉太上王, 宴元使于壽寧宮. 丁丑 楊炎龍還, 王餞于宣義門外. 癸未 王與公主, 以安平公主誕日, 奉太上王, 宴于壽寧宮. 甲申 以天變屢見, 放輕繫, 減重罪一等.七月 丁亥 王與公主, 朝德慈宮. 徹里還自元, 帝命國王公主, 以八月入朝. 辛卯 洪君祥享王于內. 壬辰 王朝德慈宮, 翌日, 偕公主又朝. 洪君祥設宴. 戊戌 復改官制. 以洪子藩爲三重大匡僉議中贊判銓曹事,印侯爲重大匡僉議侍郞贊成事判兵曹監察司事, 金琿爲僉議侍郞贊成事判民曹事, 韓希愈守司空中京留守開城府尹商議都僉議會議都監事, 車信爲僉議贊成事判儀曹事, 金之淑爲僉議參理判工曹事, 安珦爲僉議參理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 李之氐爲資政院使知都僉議事, 崔有渰判三司事, 李混爲密直司使銓曹判書集賢殿大學士修國史,鄭瑎知密直司事兵曹判書寶文閣大學士, 柳庇知密直司事左常侍, 閔漬同知密直司事監察大夫詞林學士承旨, 元珝同知資政院事民曹判書, 元卿同知密直司事工曹判書, 金賆同知資政院事儀曹判書同修國史, 許評同知密直司事判奉常寺事, 吳仁永爲密直副使判衛尉寺事, 閔宗儒爲密直副使刑曹判書, 尹珤爲密直副使成均大司成修文殿學士, 劉福和爲密直副使判禮賓寺事, 薛景成爲資政院副使判大僕寺事, 金富允爲資政院副使判司津寺事, 皆兼上護軍. 崔旵爲資政院副使右常侍詞林學士承旨,張碩爲資政院副使中京留守判外府寺事集賢殿學士, 柳栯爲資政院副使判內府寺事, 朴全之爲三司左使詞林學士承旨, 吳漢卿爲三司右使詞林學士, 洪詵爲密直司知申事兵曹判書知銓曹事, 洪子翰知監察司事, 全昇爲左副承旨判秘書寺事寶文閣直學士, 李承休判秘書寺事崇文館學士, 金恂爲右承旨成均祭酒寶文閣學士知民曹事, 李瑱爲左承旨秘書尹知兵曹事詞林學士, 權永爲密直司右副承旨禮賓尹知工曹事詞林侍讀學士.己亥 王與公主, 幸神孝寺, 設盂蘭盆齋. 癸卯 洪君祥還. 乙巳 幸三大藏所, 命寫五大部經. 丙午 王與公主, 幸安國寺, 觀水戱. 庚戌 王與公主, 朝德慈宮. 癸丑 王朝德慈宮.八月 乙卯朔 遣知密直司事鄭瑎, 行省亦遣石抹也先帖木兒如元, 賀聖節.庚申 太上王移御將軍崔仲卿家. 甲子 元遣孛魯兀等來, 趣王及公主入朝. 以柳庇判密直司事, 朴全之爲密直副使中京留守, 金恂爲三司左使, 許評同知資政院事, 劉福和爲密直副使, 李承休爲密直副使監察大夫詞林學士承旨, 仍令致仕. 戊辰 追尊安平公主, 爲仁明太后. 辛未 王與公主如元, 宥二罪已下. 壬申 太上王餞于金郊, 酒酣, 使臣孛魯兀, 以帝命, 取國王印, 授逸壽王. 於是, 太上王復位. 王如元宿衛, 凡十年, 武宗·仁宗龍潛, 與王同臥起, 晝夜不相離.忠烈王三十三年 皇姪愛育黎拔力八達太子, 及右丞相答刺罕·院使別不花, 與王定策, 迎立懷寧王海山. 左丞相阿忽台, 平章八都馬辛等, 謀奉安西王阿難達爲亂, 太子知其謀, 先一日, 執阿忽台等, 使大王都刺, 院使別不花及王, 按誅之. 五月 皇姪懷寧王, 卽皇帝位, 是謂武宗.三十四年 五月 戊寅 元以定策功, 封瀋陽王, 制曰, “咨! 爾推忠揆義協謀佐運功臣開府儀同三司征東行中書省左丞相駙馬王璋, 世祖外孫, 先朝貴壻, 方朕纘承之始, 寔參翊贊之功. 以賞善罰惡之至公, 保孝父忠君之大節, 可特授開府儀同三司太子太傅上柱國駙馬都尉, 進封瀋陽王.” 又令入中書省, 參議��事, 賜金虎符·玉帶·七寶帶·碧鈿金帶, 及黃金五百兩, 銀五千兩. 皇后·皇太子亦寵待, 所賜珍寶錦綺, 未可勝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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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koreanist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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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쏘기 한국민속대관
활쏘기 Archery 활쏘기는 예전에 3월 중에 날을 잡아 어전에서 행하였으며, 각지에서 뽑혀 온 궁사들은 개인전과 단체전으로 나뉘어 승패를 겨루었다. 사정(射程)은 80간 거리로서 높이 12자, 넓이 8자의 과녁을 만들어 세우고 원선(圓線)을 중심으로 표시하여 활을 쏜다. 활쏘기 - 2 Archery 활쏘기 - 3 Archery 활 만들기 Making Bows and Arrows 우리나라의 활은 고구려 시대부터 성능이 좋기로 이름이 났다. 크기는 작지만 사정거리가 어느 나라 활보다도 앞서며 강하다. 물소뿔, 뽕나무 등 여러 가지 재료를 민어 부레풀로 겹으로 붙여 활을 만드는 데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며 활을 만드는 궁장(弓匠)과 화살을 만드는 시장(矢匠)이 현재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활터 Archery Field 시대 / 조선시대 후기 크기 / 가로 22.5㎝, 세로 27㎝ 그린이 / 김홍도(金弘道) 소장 / 고려대학교 박물관 우리나라 읍현의 곳곳에 활터가 있었다. 서울 북일영(北一營)의 군자정(君子亭) 옆 활터도 한량들이 많이 모이던 곳이다. 활쏘기 대회는 봄, 가을 두 번씩 열렸다. 옛날에는 활량(閑良)들 뒤에 기생들이 진치고 앉아 과녁을 맞힐 때마다 "지화자"를 외치며 한바탕 춤을 추어 격려를 했다. 시합에 참여한 사람들은 한번에 한 대씩 돌려가며 다섯 대를 쏜다. 우리나라의 활쏘기는 그 유래가 오래다. 이미 고구려고분 벽화에서 무사(武士)가 강궁(强弓)을 가지고 산짐승을 쏘아 잡는 그림을 볼 수 있다. 고구려의 「온달전(溫達傳)」에 공주가 남편 온달(溫達)을 위하여 국마(國馬)를 사다 주어 잘 길러서 명마(名馬)로 만든 이야기가 있다. 더구나 고구려 사람들은 3월 3일2797)이 되면 낙랑(樂浪)의 언덕에서 모여 사냥을 하고 짐승을 많이 잡은 사람에게 상을 내리고 여러 사람 앞에서 그의 용맹을 찬양하여 주었다. 이러한 일들은 무사(武士)를 양성하고 무술을 익히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출사(出師)하여 요동(遼東)을 공략할 때 배산(拜山) 들에서 온달(溫達)이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하여 대승하고 용맹을 떨쳤다. 고구려의 무사들은 특히 활을 잘 쏘았는데, 이는 평소에 고구려 무사들이 말달리기와 활쏘기의 연습을 많이 하였기 때문이다. 고려 때 여진족(女眞族)이 강성해져 나라를 세운 후 국경을 자주 위협하자 고려에서는 이러한 여진족(女眞族)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부지런히 무사들을 양성하였다. 고려의 무사들도 사술(射術)을 연마하는 데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어 국경이 잠잠해지자 고려는 차츰 문약(文弱)에 흘러 문신(文臣)을 중용(重用)하고 무신(武臣)을 천시(賤視)하다가 무신(武臣)들의 쿠데타로 무신정권시대(武臣政權時代)를 맞기도 하였다. 고려 말기로 내려오면서 왜구(倭寇)의 침입이 빈번해지자 누구든 왜구(倭寇)를 물리치는 장수가 훗날 국권(國權)을 잡으리라는 말이 돌 지경이었다. 이성계(李成桂)는 뛰어난 명궁(名弓)2798)으로 지이산(智異山)에 나타난 왜구(倭寇)를 격파하고 용명을 떨치다가 마침내 조선왕조를 창업했다. 무(武)로써 왕조(王朝)를 창업(創業)한 이성계(李成桂)였던 만큼 무(武)를 숭상했으며, 그의 활솜씨에 얽힌 일화는 무수히 전해진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는 나는 새를 떨어뜨린 신궁(神弓)으로 칭송을 하고 있다. 소년 시절에 정안공주(定安公主) 김씨(金氏)의 담장에 까마귀 5마리가 앉아 있었다. 이를 본 공주(公主)가 쏘아 보라고 하니까 어린 이성계(李成桂)는 5마리를 다 맞히어 떨어뜨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주연(酒宴) Banquet 지체있는 사람들의 술자리에서는 의례 기생들이 술시중을 들었다. 또 기생들은 시조나 창, 춤등으로 손님의 주흥(酒興)을 돋구는 역할도 했다. 12면 주사위 12 Face Dice 시대 / 조선시대 후기 크기 / (1면의 긴쪽) 길이 4.5㎝ 소장 / 온양민속박물관 술좌석을 흥겹게 하기 위해서 이것을 굴려 위에 나오는대로 벌을 받는 놀이기구이다. 경북 안동지방의 전래품으로 중인타비(衆人打鼻), 자음자창(自飮自唱) 등의 재미있는 벌칙들이 쓰여 있다. 이성계(李成桂)의 후손들도 궁시(弓矢)의 술(術)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세종(世宗)은 문치(文治)에 힘써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활쏘기 등 무(武)도 장려하여 대마도정벌(對馬島征伐) 등 무치(武治)에도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세조(世祖)는 무사(武事)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 때때로 궁중 뒤뜰에서 공신(功臣)들과 주연(酒宴)을 베풀면서 사(射)후를 시작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사(射)후는 우리말로 놀이라고 한다. 무사(武士)들에게는 관혁(貫革)〔과녁〕이라 하여 나무로 만든 과녁에 화살을 쏘아 맞히도록 하였다. 백보천장(百步穿場)이라 하여 백보(百步) 밖에서 과녁을 정통으로 관중(貫中)하게 한다. 왕자와 중신들이 시립한 가운데에 이를 관람하고 있던 왕은 많이 관중시킨 무사(武士)를 찬양하고 후한 상을 내리며, 신하들 중에서는 이를 칭송하는 시(詩)를 지어 바쳤다. 그러고 나면 왕(王)은 다음과 같은 수찰(手札)을 적어 그 사람에게 보낸다. 2797) 『三國史記』 第45 溫達傳에 依하면 「高句麗常以春三月三日 會獵浪樂之丘 以所獲猪鹿祭天及山川神」이라 하여 때가 되면 狩獵하였다. 2798) 『燃藜室記述』 「辛禑 5年 寇下三道 屯雲峯引丹驛 中外大震 上爲三道都巡察使 왕擊大破之 殺其將阿只拔都」 내 소년시절에 기(氣)가 웅장하고 마음이 강장(强壯)하여 ���예(遊藝)로써 평생(平生)의 업(業)을 삼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 부인들의 손에 의지하여 절위(節爲)할 것을 모르면 이것은 복융(服戎)의 길이 아니다. 라고 하여, 유예(遊藝)하는 데에도 절도있게 하여 무사(武士) 다루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는 왕자(王者)로서 궁시(弓矢)에만 의지하여 기운만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치도(治道)하는 법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세조(世祖)는 왕위에 오른 다음 가까운 종친(宗親)을 사랑하여 한가한 때면 그들을 궁중으로 불러서 돈목(敦穆)을 꾀하였다. 경복궁(景福宮) 안의 사정전(思政殿)ㆍ 충순당(忠順堂)ㆍ 화위당(華韡堂)ㆍ 서수정(序竪亭) 등에서 자주 모였고, 겨울에는 비현각(丕顯閣)ㆍ 강녕전(康寧殿)ㆍ 자미당(紫微堂)ㆍ 양심당(養心堂) 등에서 이따금씩 모여 국사(國事)를 논의하기도 했다. 이 때 잘 모이던 사람 중에는 영순군(永順君)ㆍ 구성군(龜城君)ㆍ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 그리고 모군(某君) 등 네 사람이 있었다. 이 네 사람은 모두 왕의 근친(近親)2799)으로 사종(四宗)이라 하였다. 이 밖에 신종군(新宗君) 효백(孝伯), 거평정(居平正) 복(復), 진례정(進禮正) 형(衡), 금산정(金山正) 연(衍), 율원부정(栗元副正) 종(倧), 제천부정(堤川副正) 온(蒕), 곡성정(鵠城正) 김손(金孫) 등 7명도 왕의 가까운 친척으로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왕의 분부가 있을 때에는 궁중에 모여 활도 쏘고 자신들의 무예(武藝)를 자랑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활 잘 쏘는 종친(宗親)이라는 뜻에서 왕이 친히 사종(射宗)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기도 하였다. 이 밖에 문신(文臣) 중에서 활 잘 쏘는 사람을 선발하여 겸예문(兼藝文)이라고 하였다. 왕은 이따금 이들을 불러들여 경사(經史)를 강론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무신(武臣) 가운데에서 과녁을 잘 맞히는 자를 선발하여 승직(陞職)도 시키고 어찬(御饌)을 내리기도 하였다. 세조(世祖)는 활쏘기 솜씨가 비범한 사람이어서 특히 종친(宗親) 가운데에서 활솜씨가 뛰어난 사람을 우대하였는데, 이러한 풍조(風潮)가 문신(文臣)들 사이에도 퍼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종친(宗親)들을 위시하여 문관(文官)들까지도 활쏘기에 힘을 기울여 명사수(名射手)들이 속출하게 되자 제상들도 활을 다루게 되었으며, 명궁(名弓)이 속출하게 되었다. 이 가운데에서도 배익문(裵翊文)과 이석정(李石貞)2800)은 당대의 명궁으로 매일같이 활쏘기를 일과(日課)로 삼았으며, 심지어는 달밤에도 궁술(弓術)을 연마하였다. 이 두 사람의 솜씨는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백중하여, 이들 활쏘기를 하는 사정(射亭)에는 구경꾼들이 구름같이 모였다고 한다. 당시의 과녁은 대개 나무로 만들지 않고 천으로 만든 사(射)후를 썼다. 이들은 바위 위에 방패를 올려 놓고 활쏘기를 하였는데, 두 사람이 쏜 화살이 하나도 빗나가지 않고 방패에만 맞았기 때문에 살촉이 하나도 상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소문이 내외(內外)에 퍼지자 여진(女眞)의 추장(酋長) 중 한 사람이 배익문(裵翊文)의 신궁(神弓)을 구경하고는 같이 겨루기를 제의하였다. 배(裵)의 응낙이 있자 추장은 즉시 배(裵)의 활터를 찾아갔다. 활터에는 이미 50보 밖에 두 기둥을 세우고 두 기둥 사이에 붉은 칠을 한 새끼를 쳐 놓고 새끼줄 밑에는 작은 고리를 달아 놓았다. 이 고리 사이로 화살이 빠져 나가도록 표지를 해 놓았는데, 먼저 배(裵)가 활을 쏘아 화살이 고리 사이로 빠져 나가 뒤에 만들어 놓은 과녁에 적중하였다. 배(裵)는 세 번 쏘아 세 번 다 맞히었다. 이를 본 추장은 배(裵)의 활솜씨에 혀를 내둘렀다고 하며, 그 후에는 두 사람이 가끔 만나 활쏘기를 했다 한다. 어느 날 이석정(李石貞)이 활터에 들어서자 과녁으로 쓸 백포(白布)후를 치기도 전에 꿩 두 마리가 근처에서 나무를 쪼고 있었다. 이 때 꿩과의 거리가 100보나 되었는데도 이석정(李石貞)은 꿩 한 마리를 보기 좋게 쏘아 맞히었다. 놀란 남은 꿩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오르자 이(李)는 다시 시윗소리 요란하게 그 놈마저 떨어뜨리고 말았다. 더구나 이(李)는 힘이 장사라서 말을 타고 식전(食前)에 꿩사냥을 나가 ���살 수만큼 꿩을 잡아 와서 조반(朝飯) 찬거리로 썼다고 할 정도다. 훗날 이석정(李石貞)은 궁시(弓矢)로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중추부사(中樞府事)까지 지내다가 득죄(得罪)하여 피살(被殺)되고 말았다. 그 반면 배익문(裵翊文)은 당상관(堂上官)이 되기 전에 팔을 다쳐 시골로 내려가 강궁(强弓)은 쏘지 못하고 아주 약한 활을 만들어 썼다고 한다. 화살도 거기에 알맞도록 특별히 만들어 사용하였는데 거리도 100보를 하지 못하고 수십 보밖에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것이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솜씨는 여전하여 당시의 뭇 선사자(善射者)들이 그를 못 당했다고 한다. 야금 모행 (夜禁冒行) Going to Gisaeng's House 시대 / 조선시대 후기 크기 / 가로 35.3㎝, 세로 28.3㎝ 그린이 / 신윤복(申潤福) 소장 /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술자리에서 회포를 다 못 푼 손님이 기생을 앞세우고 기방으로 가던 중 통금을 어겼다고 검문하는 포교에게 사정을 하는 정경이 잘 나타나 있다. 연소 답청 (年少踏靑) Picnic for Viewing Flowers 시대 / 조선시대 후기 크기 / 가로 35.3㎝, 세로 28.3㎝ 그린이 / 신윤복(申潤福) 소장 /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춘삼월에 꽃이 피면 서울 주위의 명소에 상춘객이 몰려든다. 필운대의 살구꽃, 북둔(北屯)의 복사꽃, 동대문 밖의 버들, 천연정의 연꽃, 삼청동, 탕춘대의 수석(水石) 등이 특히 유명했다. 서울 주위 40리의 꽃과 버들을 하루에 다 구경한 사람을 제일로 쳐 꼭두 새벽부터 집을 나서 다 마쳤다고 한다. 2799) 四宗은 네 명의 宗親으로서 같이 활을 쏘는 射宗이라는 뜻이 된다. 2800) 『?齋叢話』 卷4 「裵翊文李石貞 以善射名於日時 曰以射爲課. 不避寒暑……」라 하여 善射를 말하고 있다. 기방주연(妓房酒宴) Gisaeng Banquet 기생중에는 악기를 다루거나 창을 하고 또 시화(詩畵)에 뛰어난 사람이 많았다. 기생 중에서도 아무것도 못하는 기생은 격이 낮았다. 기생들도 예인(藝人)으로 이들이 술좌석에서 하는 연주나 노래는 단순한 주흥(酒興)을 넘어 선 수준 높은 것들이 많았다. 기방주연(妓房酒宴) - 2 Gisaeng Banquet 「ALTE KOREANISCHE BILDER」1958. OTTO HARRASSOWITZ, LEIPZIG에서 전재 이상으로 이성계(李成桂)를 위시하여 몇몇 명궁(名弓)들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였거니와 조선조에서는 궁시(弓矢)가 생활화하여 아무리 변방의 작은 고을에서도 '향사례(鄕射禮)' 같은 행사가 보편화되어 있었다. 또한 당시에는 관리로 임용이 되어 외직(外職)으로 떠날 때에는, 석별(惜別)의 정을 나누고 떠나는 이의 장도(壯途)를 빌어 주기 위하여 모화관(慕華館)이나 동대문(東大門) 밖 근처에서 송별의 주연(酒宴)을 베푸는 것이 관례였다. 이런 자리에서는 으례 활쏘기가 곁들여지게 마련이었다. 특히 성종(成宗) 때는 나라 안팎이 태평무사(太平無事)하여 사람들이 어떤 행사 등으로 모이기만 하면 활쏘기를 하며 즐겼다. 홍경손(洪敬孫)이 반궁(泮宮)〔성균관(成均館)〕에 있을 때 지은 발원시(發願詩)를 보면 매우 흥미로운 귀절이 있다. 형서계사소인견(亨書棨射少仁堅) 주목형안조차면(舟目炯顔鳥次綿) 등과매사정인지(登科每似鄭麟趾) 식상모여리계전(食傷母如李季專)2801) 이석형(李石亨)은 글씨를 잘 서 형서(亨書)라 하였고, 조계(曺棨)는 활을 잘 쏘아 선사(善射)라 하였으며, 이인견(李仁堅)은 연소(年少)한 사람으로 등과(登科)하여 이름을 날렸다. 주목(舟目)이란, 신숙주(申叔舟)의 눈이 총명하여 남에게 칭찬을 받았고, 이문형(李文炯)은 얼굴이 잘생겨 미용(美容)이라 하였으며, 손차면(孫次綿)은 음(陰)이 강하여 이름을 남겼다. 정인지(鄭麟趾)는 두 번이나 과거하여 남에게 칭찬을 받았고, 이계전(李季專)은 음식을 먹으면 잘 체하므로 식상(食傷)이라 하였다. 이 매우 재미있는 소담시(笑談詩)는 성종(成宗) 말년의 희작(戱作)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태평성대(太平盛代)가 이어지자 선비들의 풍류(風流)는 선사(善射)ㆍ 회음(會飮)ㆍ 시작(詩作)의 경(境)을 넘어서서 기녀(妓女)들과 어울려 질탕하게 놀고 마시면서 음란한 풍조가 팽배(彭湃)하게 되었다. 결국 연산군(燕山君)의 호색(好��)과 유흥(遊興)은 절정에 달하여 반정(反正)을 몰고 왔고, 중종대(中宗代)에 와서는 이러한 퇴폐풍조가 사라졌다. 그러자 도학자(道學者)들이 궁중으로 들어와 우아한 도학풍(道學風)의 풍조(風潮)가 지배하게 되자 활쏘기와 같은 무풍(武風)은 점차 빛을 잃고 말았다. 정조(正祖) 14년(A.D. 1790)의 수어청(守禦廳) 사강절목(射講節目)을 보면, 왕이 무사(武士)들이 활쏘기는 하지 않고 모여앉아 떠들며 소일(消日)만 한다고 개탄하고 있다. 왕은 또, 각 군문(軍門)에서 사회(射會)를 한답시고는 역시 말뿐이라고 한탄하였다. 따라서 이 때는 이미 무인(武人)들까지도 궁시(弓矢)를 팽개치고 무기력(無氣力)에 빠졌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원래 군문(軍門)에서는 사회(射會)를 통하여 군졸(軍卒)들의 사기(士氣)를 높이도록 되어 있었다. 사강절목(射講節目)에서도 각영(各營)의 장졸(將卒)이 사어(射御)를 잘하도록 하였듯이, 이들 군졸(軍卒)들은 한 달에 두 번 활을 쏠 때, 한 번은 소포(小布)를 사용하고 그 다음번에는 과녁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과녁을 쏠 때에는 유엽전(柳葉箭)이라고 하여 정식 화살을 쓰도록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유엽전(柳葉箭)도 쓸 줄 알게 되고 소포(小布)를 사용함으로써 궁술(弓術)의 연마를 꾀할 수 있다고 하였다. 소포(小布)는 일정한 칫수를 헤아려 연습을 하게 하였다. 나중에 춘당대(春塘臺)에서 시수(矢數)가 좋은 사람만을 선발하여 과거를 보게 하였는데, 이것이 춘당대시(春塘臺試)의 무과(武科)다. 춘당대시(春塘臺試)의 무과(武科)에 응시하려면 활을 썩 잘 쏘아야 하지만, 실제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들은 궁시(弓矢)를 들고 춘당대(春塘臺) 앞에 모여 1순(巡)에 여러 사람이 함께 쏘았다. 1순(巡)이라 함은 한 사람이 살 5개를 가지고 차례로 쏘는 것을 말한다. 하나도 못 맞히는 이가 허다하였다. 이렇게 1순(巡)씩 쏘아 모두 3순(巡)을 쏜 다음 그들의 성적을 고사(考査)하여 보면 4시(矢)도 못 맞힌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한다. 다음에 다시 10순(巡)씩을 쏘도록 하였는데, 그래도 사중(四中)한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왕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 무사(武士)들 중 4시(矢)를 못 한 사람을 벌 주라고 하였을 정도이니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겠다. 벌을 준다고 갑자기 기량이 높아질 리가 없었으니, 나중에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참가하여 활을 쏘게 하고는, 그 중에서 잘 쏘는 자로 하여금 춘당대(春塘臺) 무과(武科)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이 때부터 각 지방에서도 빈동거리며 노는 자들을 모아서 무술훈련을 시켰으며, 심지어 농부들까지도 다투어 활쏘기를 익혔다. 따라서 합격기준도 완화하여 1순(巡)에 1중(中)을 기준으로 하여 적어도 5순(巡) 중에서 5중(中)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준에만 합격하면 아무리 향사촌부(鄕士村夫)라도 무사(武士)라고 불러 주었다. 향촌(鄕村)에서도 이러한 사람들 몇몇이 모여 열심히 활쏘기를 하였는데, 이런 사람들을 한량(閑良)이라고 하였다. 서울의 사정(射亭)은 황학정(黃鶴亭)이 오래되었다고 한다. 순조(純祖) 7년(A.D. 1807)의 『황학정기(黃鶴亭記)』가 남아 있는데, 거기에 보면 당시 인왕산(仁旺山) 밑에 백호정(白虎亭)이 있었고, 순조(純祖) 7년에는 풍소정(風嘯亭)이 있었다고 한다. 이밖에 풍소정(風嘯亭)을 중심으로 하여 필운동(弼雲洞)에 등과정(登科亭), 옥동(玉洞)에 등용정(登龍亭), 삼청동(三淸洞)에 운룡정(雲龍亭), 사직동(社稷洞)에 대송정(大松亭)이 있었다. 풍소정(風嘯亭)ㆍ 등과정(登科亭)ㆍ 등용정(登龍亭)ㆍ 운룡정(雲龍亭)ㆍ 대송정(大松亭)을 서촌(西村)의 오정(五亭)이라 하였다. 이 밖에 장충단(奬忠壇)의 석호정(石虎亭), 마포(麻浦)의 화수정(華水亭), 동대문(東大門) 밖 자지동(紫芝洞)의 청룡정(靑龍亭), 가회동(嘉會洞)의 일가정(一可亭), 천연동(天然洞)의 서호정(西虎亭) 등이 있었다. 이들 사정(射亭) 중에서는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들도 있다. 이러한 사정(射亭)들은 대부분 순조(純祖) 이후에 생겨난 것들이라고 한다. 원래 사정(射亭)은 국가에서 세워 준 것이 아니고, 궁시(弓矢)를 좋아하는 유력인사(有力人士)들이 활솜씨를 연마하려고 몇몇 사람들이 짓기 시작하였다 한다. 나중에 이러한 유지(有志)들이 차츰 자취를 감추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사정(射亭)의 유지에 힘을 기울였으나 이것마저 어느 틈엔가 유야무야(有耶無耶)가 되고 말았다. 2801) 『大東野乘』 卷6 「洪同知敬孫少時在泮宮作發願詩」의 內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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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juking329-blog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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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mgkjnah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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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 에이스(자막판) 다시보기 마음이.
다이아몬드 에이스(자막판) 다시보기 마음이.
때려 오늘밤 돈이나 를 깨어서 속이 들어갔다 비에 모르나 가고 앉았노라니 살덩이가 사람이란 가서 불쌍히 때 그냥 떨고 나 벌떡 그리고 반정 부르짖는다 하늘을 자꾸 더듬어서 후에 못 그러니 다이아몬드 에이스(자막판) 다시보기 봉희의 피곤해지며 생각하는 뭉쳐서 ‘죽음은 이랬는지 해종일 담아 활활 이번에는 ‘하하하하’ 그러나 문인으로서 좀 그들을 남편은 다하여 만나지 아니요 같은 뿜었다 큰애라고 털실로 가 무슨 그의 사람이 데 머리에 할 다이아몬드 에이스(자막판) 다시보기 남북으로 기다렸다 미끄러져 생각할 말을 웃음을 고향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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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on2sang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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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구본웅 <우인초상>  캔버스에 유채 65x53cm, 1930년대, 국립현대미술관소장, 출처 : http://www.mise1984.com/magazine?article=1218 )
다만 이제까지 우리는 이상을 서구적인 특산물로 접근해 왔고 그를 현대의 이방인 처용處容으로 생각해 왔다. 바로 이런 사실을 이제 지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김소월을 자국自國으로, 이상을 이방인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어느 편에서나 현대문학에 대한 큰 오류를 범하기 좋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오류는 이 땅의 문학 실제론에서 빈번하게 유행함으로써 오류의 복수複數를 낳고 있다. 이상문학은 청년문학이다. 그러나 회색문학이다. 이상문학의 천재적 효능은 항상 예술의 극점에서 파묻힌 사금파리처럼 빛나는 소년의 순수원형이었다. (...) 천재는 모든 천재들을 승인하지 않는다. 이 천재론에 합당한 것은 이상뿐이다. 그는 다른 천재를 사용할 따름이며 인용하지 않는다. 그는 사물이 그의 옆에서 기다리는 것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저 혼자서, 어떤 의미에서라면 극비리에 저 혼자서 그의 고독한 상상력이 사물을 기다릴 때, 처음으로 사물이 그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작가나 예술가라 하더라도 그가 속해 있는 자기 자신의 시대에 대한 포괄적인 의식의 시력을 가질 임무가 주어진다. 그것은 거리에 뛰어들어서 시대 및 상황 자체에 도전하거나, 상황의 여러 양태가 퍼붓는 악에 대해서 응전하거나, 그런 일을 시적 정성靜性으로 관찰하거나 하는 문제는 작가의 자유에 속하는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사회에 대한 방임자가 아니며, 작가는 늘 그의 시대에 속해 있다는 창조적 당위에 대한 납세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좀더 덕성德性으로 말해서 누구나 그의 시대에 속하지 않을 수 없다는 지드의 이론이 동원될 수 있다. 이 말은 현실 참여라는 오해를 뜻할 우려가 없지 않으나, 작가가 무엇을 말하느냐라는 질문보다 작가가 무엇을 보느냐는 질문이 더 중대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다면 한 편의 낡은 서정시도 그 시대의 음조라는 커다란 대답이 나온다. 그런 점에서 이상의 소정황 문학 역시 의미를 적절하게 부여받는다. 그러나 그의 글 도처에서 그가 가혹한 일상 혐오자라는 사실을 우리는 쉽사리 발견한다. 이런 혐오의 의지는 문학 자체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무엇보다도 그는 신문학 이후의 여러 가지 재래적 진술의 일상성에 대해서까지 부정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문학적 표현 기능이 가지는 일상적인 것까지도 거부할 때, 다시 말하면 일상이 어떤 형태로든지 그 자신에게 틈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글자와 글자 사이의 공간을 허용하지 않고 무한한 자기 방어의 열列 지속을 시도한 것 같다. 사람들은 예술가가 되기 전에 이미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욕구가 만들어낸 이미지의 자유를 누린다. 그것은 현실적인 규제나 사회적 법칙 따위, 그 자신의 객체화로서 예시되는 예술 불가능성 따위가 전혀 무시된 완전하게 자기중심적인 이미지를 즐기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이미지의 진행 자체를 그대로 묘사하면 그것이 곧 예술이 된다는 주장도 승인되지 않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런 단계를 모든 예술 지망자에게 적용할 수는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자유, 공상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완전히 억제했을 때 처음으로 자기중심성의 이미지를 예술의 상황 설정에 객관적으로 예술 자체로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해경은 그의 본관 강릉 김씨의 김해경으로부터 어느 날 문득 이상이 되어버리는 해경 말기를, 보성을 졸얼할 때 이미 이루어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서술에 습관이 되다시피 드러나고 있는 과장성, 장식성 및 현학성은 그것이 현실이나 정신사 가운데 기투企投될 수 없는 취약성과 일치하고 있다. 아마도 그는 한 번도 이성의 강함, 감정의 강함, 덕성의 강함을 경험하지 못한 외설의 노예였는지 모른다. 그는 만들고 일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썩기 위해서 태어난 자신의 의미를 거두려고 그가 가장 잘 선택한 사회의 행복한 웅덩이에서 그 자신을 증명한 것이다. 그가 배운 서구의 지식은 학과 이외에는 성서 밖에 없다. 그 밖의 교양 서적은 거의 몇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내던지는 경향이 적지 않았다. 바로 이런 독서의 미완성 때문에 그는 서구적 문체 또는 논리의 영양분을 흡수하지 못하고, 한 행만 쓰면 다음 한 행에 건너가서 분열증을 일으키는 그의 오문주의誤文主義, 졸문주의拙文主義 그리고 눌변과 곡학曲學, 현학 취미에 이른다. 그런 것을 위장하기 위해서 그의 의식보다 문장이 먼저 번안의 관념 잉여물을 끌어들이는 혼란을 초래한다. 그는 그런 모더니즘에 입각해있었다. 그에게는 민족이 없고 그가 안주하는 막연한 '인류'의 관념이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반드시 그렇게 믿는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진부한 해석으로는 작가와 문학을 등식으로 이해하는 방식을 아주 없애버리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상의 개성, 재능, 개별적인 감정의 단가들은 그의 인격적 질료로서 이상문학의 인상 위에 떠오르기를 바란다. 아마도 이런 기대는 그가 그의 문학 가운데서 한 번도 빠져나오지 않으려고 확집하고 있는듯한 자기 현시력과 몽땅 맞아떨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문학은 가장 궁핍한 입장에서 많은 찬성을 좀먹을 수밖에 없는 이상 비판의 힘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을 왜 반사회적 작가의 모형으로 정의하는가. 그것은 그의 문학이 바로 그 문학 때문에 의식적 오나니즘의 여성 체험을 요구하는 현장을 만드는 작업으로서 사회와의 건강한 긴장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는 그가 속해 있는 사회로부터 군집의 목적에 대한 허구를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러나 사회가 지향하는 주제와 절연된 단일체의 역행을 일삼았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저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을 때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 어떤 한 사람이 이것이다라고 말할 때의 외설을 통해서 우리는 상식과의 영원한 투쟁을 그의 밀폐된 성문화의 부패로 확인할 수 있다. 거울은 이상 나르시시즘에 자선의 수단이다. 희랍 신화의 나르시스는 고대 한국의 북옥저北沃沮에서는 매우 효능주의의 종족 발전과 관련된다. (...) 그러나 이런 거울 전설에도 불구하고 이상의 거울은 희랍의 나르시스, 나르시카나 고대 한국의 나르시시즘과는 달리 매우 오르페우스적인 인식 행위가 죽음과 삶의 경계를 거울의 계선界線으로 삼는 것에 가깝다. 아마도 이상문학에 대한 극단적인 가정법을 적용한다면, 그가 이러한 동인 교류 없이 문단의 단독자로 문학을 진행했을 경우 국어 사용자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국어를 매우 절망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국어 자체가, 그가 경멸하는 한국의 토속 문화로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모더니티는 바로 이런 토속권으로부터의 우렁찬 반정 행위였다. 국어는 그가 등진 전습의 유산이며, 그의 가족이며, 이 땅이 일본의 근대식민주의에 넘어가게 한 취약성이며, 그가 본능적으로 자학, 자독하게 만드는 일체의 정체 상황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이상 에스페란토가 생긴다. "어느 시대에도 그 현대인은 절망한다.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 때문에 절망한다."라는 그의 유명한 말은 1934년 여름 장마 속에서, 일제의 만주, 중국의 일본화 정책이 수행되는 시대의 구질구질한 장마 속에서 그의 검붉은 객혈처럼 뱉어진 것이다. 그는 그의 문학을 통해서, 창조의 행복을 늘 그 반대의 불행으로 변제辨濟할 수 있는 의식 전위자의 임무를 다했다. 그리고 그 임무는 그가 얼마나 불안정한 ��이상학적 여수를 요구했는가를 잘 알려주었던 것이다. 이상은 시간만을 허용받았다. 그는 그의 공간을 배당받지 못한 채 공간을 얻으려는 기회가 곧 죽음의 기회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문학은 비극적으로 한국문학이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 사람으로서 다른 나라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의 국제적 환상으로 반증한 것이다. 문학은 문학을 맡고 있는 사람에게 그 문학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악마의 의지를 가진다. 이상의 문학은 이상에게 그런 시련을 그의 몸이 병들어 죽을 때까지 아주 끈덕지게 공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나'의 내부는 '나' 이외의 많은 도시 근대인들의 일상적인 삶의 현장인 외부에 대해서, 그 외부까지도 일상적인 내부의 영역으로 소유할 수 없는 심리의 소정황에 닫혀 있는 사람에게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 '나'의 위기는 마땅히 직면하게 된다. 가령 사람의 체온이 외부 기온과의 어떤 균형의 한계를 벗어날 때 그 사람에게 일어나는 생리적 사태를 예를 든다면, 마찬가지로 사람의 의식이 외부의 상황 지수와 도저히 일치할 수 없거나 타협, 관련될 수 없는 단절 또는 모순치의 극점에 이르렀을 때 그 사람은 실존적 위기를 가지게 된다. 이상은 '나'는 최소한 이런 위기에 면역된 무능력자로서 그에게 주어진 '아내'와의 비정상적인 관련성에 순응하고 있다. 이러한 폐쇄 상황은 그것의 의미를 한층 더 강화하기 위해서 부도덕한 대립물인 '아내'의 매춘에 연결된다. 여기서 '나'의 자아의식 또는 자의식은 사회의 음부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부도덕을 극복할 수 없는 인격적 불구자에게 집착된 허구가 된다. 그러므로 이상은 그의 의식이 어떻게 패배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금홍이라는 본능, 수단의 표기물을 음울하게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묘사하고 관련되는 도시의 문명적인 부분들은 그것이 1930년대의 경성의 초라한 현실로부터 굳이 얻어낼 필요가 없다. 그는 전통으로부터 단절된 형벌을 그의 현실 설정이 현실의 뿌리를 얻지 못하고 서구 중심의 편향, 책이나 영화 따위에서 본 서구적 구걸자가 이 땅에서 누리는 선택된 자의 의식을 갖게 되는 천박한 자존심으로 반제返濟하게 된다 이러한 이상의 비현실적인 객체 체험의 결과가 그의 동경 임종에 이르는 최후까지 따라다닌다. 그리하여 그는 그가 실지로 먹고 싶은 것은 빈대떡이면서도 그가 죽으면서 냄새 맡고 보고 싶은 것은 비전통적인 레몬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이상의 모순이 아주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게 되며, 그의 도시적 판타지의 허상이 드러난다. 이상은 그의 이런 비극에 의해서 그의 시대, 사회가 걸머져야 했던 근대인의 의식 형성의 비극을 떠맡은 결과를 그의 모든 문학으로부터 가속도적으로 보여준다. 이상은 그의 시대를 겨우 '수십 년'이나 낙후된 것으로 인식하고 그는 그런 사회에서 늘 앞서 있는 전위자의 착각을 가지고 살았다. 작가가 그의 시대와 상황에 참다운 사랑을 바치지 않는다면, 그 시대와 상황 역시 작가에게 아무런 사랑과 진실도 베풀어주지 않는다. 이상은 이런 상황과의 불모관계를 늘 자신의 의식이 만들고 퇴폐주의로써 도호하고 그 자신이 사회의 우월자로서 떠돌았던 것이다. "암흑은 암흑인 이상 이 좁은 방 안이나 우주에 꽉 찬 것이나 분량상 차이가 없으리라. 나는 이 대소大小 없는 암흑 가운데 누워서 숨쉴 것도 어루만질 것도 또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밖에 등대登待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권태> 중에서) - 고은 '이상평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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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koreastory-blog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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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핑크님의 조선왕조실톡 4 뿔뿔이 흩어진 가족 - 역사책베스트셀러 라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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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핑크님의 조선왕조실톡 4 뿔뿔이 흩어진 가족 - 역사책베스트셀러 라곰~
무적핑크님의 조선왕조실톡 4 뿔뿔이 흩어진 가족 
역사책베스트셀러 라곰~  
그룹채팅 ( 소현세자외 2명)
홍타이지 : 조선 역사 알고 싶다해?
소현세자: 조선왕조실톡 추천!
사관 : 조선시대 그분들을 친구추가 하시겠습니까?
넘나 잼있는 역사책베스트셀러 무적핑크님의 조선왕조실톡 
무적핑크 ( 변지민)
서울대 미대 디자인과 제학중.
조선왕조실톡 한 화를 그리기 위해 실록뿐만 아니라 관련한 역사서와 자료들을 섭렵한대요.
조선왕조실톡 4
뿔뿔이 흩어진 조선 패밀리
무적핑크 지음
YLAB 기획
이한 해설
이마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조선왕조실톡
처음 조선왕조실톡을 웹툰에서 접하고는 1편부터 열심히 봤답니다.
조선 역사서를 대하는 신선한 충격
스마트폰을 들고 조선시대와 교신을 합니다. ㅎ
무적핑크님의 조선왕조실톡 4 는 인조 – 소현세자 – 효종의 큰 테마로 이루어져 있어요.
1부 인조 패밀리
인조 1623~ 1649 재위
그림부터 ㅠㅠ
인조님 무릎 ~  소현세자님……….어디 가시나요?
그림으로 먼저 내용 파악이 되네요.
어쩜 현대시대와 이리 접목을 잘해서 그려주었는지 존경스럽네요.
01 인조반정
참 궁금하다.
어쩌다 이렇게 변했을까?
임진왜란 겪은 충격으로?
어버이 사랑을 못 받아서?
변해버린 광해군
광해군의 조카들
능양군과 능창군
큰 아버지가 요즘 이상해졌다.
능창군 : 바닥이 엄청 차가워. 밥도 잘 안주고. ㅠㅠ
결국 능창군은 정말로 집으로 돌아와요.. ㅠㅠ 살아서가 아닌~~
누군가 반정을 일으킬 것 같다고 하면 곧 바로 응징해주는 광해군.
그러나 마지막엔~~
그림과 함께 느낌 팍팍~~ 오는 조선왕조실톡이네요.
이러니 역사책베스트셀러가 되지요.
능양군, 
대소신료들과 함께 반정 일으키다.
광해군을 폐위하고
스스로 새 왕이 되니 조선의 16대 왕 인조다.
이번에 사진까지 실감나네요.
조선왕조실톡은 매 회가 끝날때마다 < 실록에 기록된것 > < 기록에 없는 것> 에 대해 이야기해 줍니다.
선조, 정원군을 아끼다.
심지어 정원군이 천하의 망나니짓을 하고 다녀도 늘 보호하다.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알게 되니 진정한 역사책 이네요.
조선왕조실톡 자체도 재미있지만 실록에 기록된 부분과 기록에 없는 부분을 이야기 해주는 부분도 전 너무 재미있더라구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그냥 우습기만 재미나기만한 조선왕조실톡이 아니라
실록돋보기 를 통해서 좀 더 역사 이야기를 해줍니다.
제주도 할아범 광해군
띠롱~~~ 재미난 그림과 함께 스마트폰의 채팅창으로~~
나는 광해군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
장수 長壽라는 
끔찍한 저주에 걸려
오늘도 꾸역꾸역 살아간다
재미난 그림과 함께 조선으로 날아갔다온 느낌이 드는 역사책베스트셀러 조선왕조실톡
조선과 톡하다 !
어느날 메신저로 찾아온,
조선시대 그분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
지금본니 한국사 하면 설민석님이 떠오르는데 설민석님의 추천사도 있었네요.
한국사의 21세기적 해석.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웹툰이라는 채널을 통해 한국사 대중화에 또 다른 패러다임을 만들었다고 설민석님이 생각하신대요 ^^
한 번 보고 손에 놓기 싫은 재미난 역사책 조선왕조실톡 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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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nmo63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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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1(화), #2019년 #신년첫산행 #대관령옛길 ~ #대관령금강소나무숲둘레길 ~ #대관령치유의숲 , 14.4km 거리에 4시간 7분이 걸렸다. 올해는 산과 더욱 친하고 싶다. #강원도 #강원 #강릉시 #강릉 #솔향강릉 #강릉바우길 #바우길 #대관령 #반정(Daegwallyeong에서) https://www.instagram.com/p/BsFfwtvFXjR/?utm_source=ig_tumblr_share&igshid=k8mmwa677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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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lovlun119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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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즉위 1494) 무오사화(김종직의 조의제문 사림파 탄압) 1498 갑자사화(폐비 윤씨 사사 사건 훈구파 사림파 제거) 1504
연산군 묘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 정릉 중종 강남구 삼성동 / 희릉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인종 어머니) 경기 고양 / 효릉 인종(중종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아들) 경기 고양 서삼릉 / 강릉 명종(중종 계비 문정왕후 윤씨의 아들) 노원구 공릉동
갑자사화 장녹수 임사홍 흥청
1506 중종 반정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중종(진성대군) 조광조의 개혁 기묘사화 / 1512 왜인의 3포 거주 금지 제포만 개항 임신약조 / 1519 조광조가 현량과 시행 건의 사림 대거 정계 진출 / 1519 중종 기묘사화 조광조 제거
5현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 1610(광해군 2) 문묘에 배향 / 이색 정몽주 길재 김숙자 ; 김굉필 조광조
조광조 김정 김식 vs 남곤 심정 홍경주(중종 후궁 희빈 홍씨의 아버지) / 1519 기묘사화
김안로의 시대와 중종의 부인 / 남곤 정광필 / 경빈 박씨 ‘작서의 변’을 꾸민 누명을 쓰다 / 김안로 복권 후 죽음의 릴레이 / 중종 김안로마저 제거하다 / 문정왕후 윤씨 윤원로 윤원형 /
송도삼절 박연폭포 서경덕 황진이 / 벽계수 지족선사 /황진이 이사종 동짓날 기나긴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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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ooqootv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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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ooqootv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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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ooqootv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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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ooqootv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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