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란덴부르크문**
Explore tagged Tumblr posts
Text
베를린에서 윤석열 파면 축하 집회 열려

베를린에서 윤석열 파면 축하 집회 열려 -윤석열 파면은 헌정 질서 수호를 위한 역사적 판단 -수구 정치 세력·기득권 언론·부패한 검찰 권력, 반드시 개혁돼야 https://jnctv.com/2025/04/08/celebratory-rally-for-yoon-suk-yeols-dismissal-held-in-berlin



Read the full article
#강강술래#검찰개혁#민주주의#민주주의회복#베를린집회#브란덴부르크문**#시민연대#시민운동#언론개혁#윤석열탄핵#윤석열파면#정치개혁#촛불집회#탄핵집회#파리광장#풍물놀이#한국정치#해외동포#헌법수호#헌정질서
0 notes
Text
통일의 조각상 동상이 있다
통일의 조각상 동상이 있다. 이곳은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독일군의 공습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전쟁 후 복구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방문했던 날도 단체 관광객들이 많이 보였는데, 가이드 말로는 주말이라 더 많았다는 이야기와 함께 이 곳에서 결혼사진 촬영하러 오기도 한다고 했다. 다음엔 나두 여기서 웨딩촬영하고 싶당~ᄒ 베를린 장벽 앞에도 이렇게 자유롭고 평화로운 분위기 가득한 공원이 조성돼있어서 산책하기 좋아보였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TV타워! 아마 예전 동독과 서독 경계였나보다.. 내 기억으론… (ᅲ_ᅮ); 그래서 이런 조형물들도 세워져있는 것 같은데…. 이제 막 완공된 거라 그런지 아직 휑해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참 예뻤음 :) 그렇게 쭉 둘러보고 난 뒤 다시 브란덴부르크 문 쪽으로 향했다. 역시 유럽여행 하면 야경이지!! ᄏᄉᄏ 베를린의 밤거리도 너무 예쁘니까 사진 한 장 찍어주고요- 참고로 낮보다는 확실히 해가지기 시작할 때쯤 가니 사람이 적어져서 좀더 여유로워진 느낌이다. 여행 다니면서 항상 느끼지만 날씨운 하나만큼은 정말 최고인 듯 하다 ᅲ슈♥ 근데 또 운좋으면 비 안오고 맑아서 예쁜 하늘 볼 수 있으니 그건 복불복인듯?! 그렇게 조금 걸어오니 드디어 눈에 들어오는 브란덴부르크문! 사실 크지 않을까봐 걱정했었는데 ��각보단 아담하니 귀여웠다 :D 특히 요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뷰가 진짜 예술인데… 이건 직접 봐야함!!!! 꼭 보세요 여러분!!! 실제로 봤을 땐 그냥 그렇네? 라고 느꼈다가 나중에 다른 분 블로그 보고 우와~~ 이랬거든요 ;;; 그만큼 매력적인 스팟임요 -3-bbb 요렇게 가까이서도 한번 봐주구요~ 주변 건물들의
0 notes
Photo

비긴 어게인3 보니까 생각나는 베를린 🇩🇪 여행다시 그리기 #berlin #germany #brandenburg #sunset #europe #travel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독일 #자전거 #유럽여행. . . #homedecor #interior #artprint #illustration #digitalart #print #drawing #creative #posters #walldecor #그림스타그램 #일러스트 #인테리어그림 #여행스타그램 #여행그림 #드로잉 #홈데코 #스케치 #집꾸미기 illustration by @illu.__.illu(Brandenburg Gate에서) https://www.instagram.com/p/B5KHO35BDLH/?igshid=1vu9c4rad9ivd
#berlin#germany#brandenburg#sunset#europe#travel#베를린#브란덴부르크문#독일#자전거#유럽여행#homedecor#interior#artprint#illustration#digitalart#print#drawing#creative#posters#walldecor#그림스타그램#일러스트#인테리어그림#여행스타그램#여행그림#드로잉#홈데코#스케치#집꾸미기
0 notes
Video
youtube
브란덴부르크문 유라시아친선특급 : 그리운 금강산 (앵콜) - 조수미 / Eurasia Express : Nostalgic Geum...
0 notes
Text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일본과 독일의 차이
New Post has been published on http://iofferwith.xyz/%ec%9d%bc%eb%b3%b8-%ec%a0%95%ec%b9%98%ec%9d%b8%eb%93%a4%ec%9d%98-%eb%a7%9d%ec%96%b8%ec%9d%84-%ec%96%b4%eb%96%bb%ea%b2%8c-%eb%b3%bc-%ea%b2%83%ec%9d%b8%ea%b0%80-%ec%9d%bc%eb%b3%b8%ea%b3%bc-%eb%8f%85/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일본과 독일의 차이
⊙ 바이츠제커, “젊은이들이 과거를 망각하지 않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주어야” ⊙ 2차대전 이후 이스라엘·나치 희생자들에게 890억 달러 지원 ⊙ 주변국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지정학적 상황과 분단 경험 작용 ⊙ 학교 및 민주시민교육 통해 나치 잘못 끊임없이 상기시켜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령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 독일의 속죄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진이다.
#1. 아주 유명한 장면.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유대인 희생자 위령비(慰靈碑) 앞에 헌화(獻花)하던 빌리 브란트 독일연방공화국(당시 서독) 총리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를 안내하던 폴란드 측 인사들과 독일인 수행원들은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서 당황했다. 빗속에 무릎을 꿇은 브란트를 향해 카메라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다. 이날의 행위에 대해 브란트는 후일 자서전(自敍傳)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이 제스���로 무엇을 의도했느냐는 물음을 빈번히 받았다. 그 제스처는 계획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계획된 것이 아니다. (중략) 나는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내가 묵었던 빌라노프성(城)에서 게토기념물에 대한 회상의 특수함을 표현해야 한다는 감정이 생겼다. 독일 최근세사의 기억에 짓눌려, 나는 그저 사람들이 말로써 어찌할 수 없을 때 하는 짓을 했을 따름이다.> 다음 날 아침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나치 시절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의 생존자이기도 한 폴란드 총리 요셉 키란키예비츠는 그를 포옹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많은 사람에게 가까이 가 닿았습니다. 내 아내는 어제 저녁 빈에 있는 친구와 통화를 했는데, 두 사람은 아마 몹시 울었을 것입니다.” 브란트가 위령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데 대해, 서독 내에서는 “지나친 행위였다”는 비난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기자는 그의 행위를 이렇게 표현했다. “무릎 꿇을 필요가 없는 그가 무릎 꿇을 필요가 있는, 그러나 무릎을 꿇지 않는 모든 사람들 대신 무릎을 꿇었다.” 이 기자의 말대로 빌리 브란트는 ‘무릎을 꿇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히틀러가 집권한 직후 노르웨이로 망명, 나치에 대한 저항운동에 참여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자신이 저항했던 범죄적 정권의 희생자들을 위해 유대인 위령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러한 빌리 브란트의 모습은 태평양전쟁 당시 A급 전범(戰犯)이었던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로, 법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도의적(道義的)으로는 과거 일제(日帝)의 과오에 대해 책임감을 느껴야 함에도 침략과 식민의 역사를 부정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대비된다. 영토와 미래를 바꾸다 바르샤바 유대인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사건은 ‘빌리 브란트’라는 정치인, 그리고 독일연방공화국의 양심(良心)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브란트가 폴란드를 방문한 것은 그해 2월부터 시작된 양국 간의 관계정상화조약(바르샤바조약)에 서명하기 위해서였다. 이 조약의 전문(前文)은 “전쟁의 첫 희생자가 폴란드이며, 전쟁은 유럽 국가들에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나치의 침략전쟁에 대한 사죄를 명시하고 있다. 이 조약은 “포츠담의정서 제4장에 명시된 방식에 따르는 현행 경계선이…폴란드인민공화국의 서쪽 경계선을 이룬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는 제2차세계대전 후 연합국이 폴란드에 할양(割讓)한 오데르-나이세강(江) 이동(以東)의 옛 독일영토를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이 지역은 근대 독일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동프로이센 지역을 포함해 수백 년 동안 독일인들이 거주해 왔던 곳이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이 지역에서 쫓겨나 서독으로 이주한 실향민(失鄕民)들은 서독 내에서 강력한 압력단체가 되어 있었다. 자기 민족의 고유한 영토로 여겨지는 땅을 포기하는 것은 정치인에게는 정치생명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독일은 1990년 독일통일 과정에서 오데르-나이세강 이동 영토를 포기할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신용철(申龍澈) 경희대 명예교수는 1990년 독일통일 당시 독일에 있었다. “당시 하숙집 주인이 폴란드령(領)이 된 옛 독일 땅에서 이주해 온 실향민이었어요. 독일 국회에서 오데르-나이세 이동 영토의 포기를 결의했다는 뉴스를 듣고, ‘국회의원들이 무슨 권리로 내 고향을 맘대로 포기하느냐’고 분개하던 생각이 납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후발(後發)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하는 과정에서 병탄(倂呑)한 오키나와열도와 센가쿠열도를 아직도 지배하고 있고, 대한제국의 국권(國權)을 침탈하는 과정에서 불법적으로 자국(自國) 영토에 편입했던 독도(獨島)를 여전히 자기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의 행태와 대조적이다. 권영민(權寧民) 전 주독대사는 “독일인들은 땅을 포기하는 대신 주변국들과의 화해와 미래를 선택하는 실리적이면서도 위대한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나치 敗戰日은 ‘해방의 날’” #2. <우리에게 5월 8일은 광복(光復)의 날입니다. 그날은 우리 모두를 나치체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부터 해방시킨 날입니다. 해방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많은 인민들에게 그날을 기해 들이닥친 엄청난 수난을 잊을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종전(終戰) 때문에 자유의 박탈을 당하게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원인은 전쟁을 불러온 독재가 시작된 것에서 찾아야 합니다. 1945년 5월 8일을 1933년 1월 30일(히틀러가 독일제국의 수상으로 취임한 날-기자 注)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5월 8일은 회상(回想)의 날입니다. 회상이라는 것은 일어났던 일을 정직하고 왜곡되지 않게 다시 마음속에 떠올리는 것입니다.… 눈과 귀를 열고 알아보려고만 했으면 유대인들이 유형(流刑)에 처해졌음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있었겠습니까.… 홀로코스트의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진실이 알려졌을 때… 우리 모두 뭐라고 했습니까. 아무것도 몰랐고 의심 한 번 해본 적도 없다고 그러지 않았던가요. 나라가 온통 다 유죄(有罪)라거나 무죄(無罪)라거나 그런 건 세상에 없는 겁니다. 무고(無辜)하다는 것도 그렇지만, 유죄라는 건 집단적인 게 아니고 개인적인 겁니다.… 죄를 지었거나 혹은 그렇지 않거나 우리 모두는, 노소(老少)를 막론하고 과거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영시’(零時·Stunde Null-패전 후 모든 것이 파괴된 절망적인 독일의 상황을 표현한 말-기자 注)라는 것이 실제로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새 출발의 기회는 가졌습니다. 우리는 그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 온 것입니다.… 독일 역사상 오늘날과 같이 개인의 자유가 잘 보장되었던 시대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새로운 세대가 자라나 정치를 책임지게끔 되었습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40년 전에 일어난 일들에 무슨 책임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 역사적 결과에 책임을 지게 되어 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과거를 망각(忘却)하지 않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주어야 합니다.… 오늘 5월 8일을 맞아 우리 모두 고개를 들어 진실을 바라봅시다.>(《도이치현대사3》 pp397~399, 데니스 L.바크-데이빗 R.그레스 ��저, 서지원 옮김) 독일의 양심, 바이츠제커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은 나치 만행에 대한 독일인의 책임을 끊임없이 환기시켰다.
위의 연설은 나치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한 지 40주년이 되는 1985년 5월 8일을 맞아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독일 대통령이 한 연설이다. 헬무트 콜 당시 독일 총리를 비롯한 수많은 독일 정치인이 기회 있을 때마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의지를 표명했고, 바이츠제커 역시 과거사와 관련된 많은 연설과 발언을 남겼지만, 이 연설은 특히 유명하다. 이 연설은 아베 총리를 비롯한 일본 정치인들의 언동과 정확히 대척점에 서 있다. 아베 총리는 “침략에 대한 정의는 학계에서도, 국제적으로도 확실하지 않다”는 궤변으로 침략전쟁을 부인한다. 바이츠제커는 패전으로 독일인이 겪은 비극의 뿌리는 히틀러 독재체제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아베는 “현행 헌법은 미군 점령시대에 일주일 남짓한 시간에 만들어진 것”이라며 개헌을 주장한다. 바이츠제커는 패전이 새 출발의 계기가 됐고 그 결과 번영과 자유를 누리게 되었음을 감사한다. 일본 정치인들은 원폭(原爆)의 비극은 강조하면서 그 원인이 자신들이 저질렀던 침략전쟁에 있음은 부인하지만, 바이츠제커는 히틀러의 전쟁 책임을 상기시킨다. 일본 정치인들은 후대에게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며 과거사를 올바로 보는 것을 ‘자학사관(自虐史觀)’이라고 비난한다. 바이츠제커는 젊은이들이 과거를 망각하지 않도록 기성세대가 도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베의 연설문에는 억지와 위선이, 바이츠제커의 연설문에는 역사를 직시하는 양식(良識)과 양심이 담겨 있다. 계속되는 賠償
베를린에 있는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나치에 의해 희생된 유대인들을 추념한다.
독일은 독일연방공화국을 수립한 지 불과 3년 후인 1952년 전쟁배상법을 제정해 나치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에 나섰다. 1986년까지 총 5700만명에게 총 35억 마르크를 배상했다. 이 법은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들에게도 적용됐다. 독일정부는 이스라엘정부와 협정을 맺고 1952~1966년 총 35억 마르크를 보상했다. 폴란드,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에는 별도의 배상을 했다. 독일의 사죄와 배상은 통일 이후에도 계속됐다. 로만 헤어초크 대통령은 1994년 바르샤바 봉기 50주년 기념식에서 “나는 독일인들이 폴란드인에게 행한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빈다”고 말했다. 요하네스 라우 대통령은 2000년 2월 이스라엘을 방문, “과거 독일인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용서를 빌며, 나와 내 세대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면서 “용서와 화해를 통해 우리 아이들과 후손들이 미래에 손잡고 나란히 서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2000년 7월 독일은 제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강제동원했던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배상을 했다. 나치가 전쟁 중 동원한 노동자는 800만명에 달하는데, 법적 이유 등으로 오랫동안 배상을 받지 못해 왔다. 독일은 미국, 이스라엘, 폴란드, 러시아, 체코, 우크라이나 등과 국제협정을 체결해 나치에 의해 강제노동에 동원됐던 유대인, 폴란드인 등 150만명에게 100억 마르크의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이 100억 마르크는 국가와 전시(戰時)에 외국인 강제노동자들을 부렸던 기업들이 각각 50억 마르크씩 출연(出捐)해 조성했다. 이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설립한 재단의 이름이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Erinnerung, Verantwortung und Zukunft)’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일본 정부와 기업, 법원이 태평양전쟁 시기 강제징용(徵用)했던 한국인들에 대한 보상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2005년 5월에는 통일독일의 수도 베를린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문(門) 인근에 ‘홀로코스트메모리얼(Memorial to the murdered Jews of Europe)’을 조성했다. 과거 베를린장벽이 가로질렀던 1만9000m2의 광장에 2711개의 콘크리트비(碑)를 세웠고, 지하에는 박물관을 만들었다. 독일은 최근에도 2차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희생된 유대인들을 위한 추가 지원방안을 내놓았다. 지난 5월 28일 유대인 희생자를 지원하는 기금 마련 단체인 ‘독일에 대한 유대인 보상청구권 모임’ 대변인은 “독일정부가 생존 유대인들을 위해 10억 유로(약 1조4000억원)를 지원하기로 했다”면서 “46개국 5만6000여 명의 유대인이 혜택을 입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돈은 대부분 생존자들의 요양비용에 사용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실을 전한 외신(外信)들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독일정부가 이스라엘과 나치 희생자들에게 지원한 돈은 890억 달러(약 100조원) 규모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순탄치 않았던 독일의 과거사 청산
나치 수뇌부를 단죄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진정한 과거사 청산으로 가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독일이 제2차세계대전 이후 일관되게 과거사 청산과 사죄, 보상에 열심이었던 것은 아니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으로 나치의 수뇌급 12명이 교수형, 3명이 종신형, 4명이 10~20년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18세 이상의 모든 독일인은 나치 시대 자신의 행적에 대한 진술서를 제출해야 했다. 연합국 점령당국은 이 진술서를 바탕으로 죄질에 따라 수용소 수감(收監), 직장에서의 추방, 재산 몰수 등의 조치를 취했다. 이를 ‘탈(脫)나치화(化)’라고 한다. 하지만 독일연방공화국이 수립되고 경제부흥의 시대가 오면서 탈나치화는 점차 완화됐다. 사면법이 제정되었고, 나치 시대의 관료나 군인들이 공직이나 연방군에 복귀했다. 나치 과거사 청산 문제가 다시 제기된 것은 1956년부터였다. 전후(戰後) 용케 단죄를 피하고 숨어 살던 나치 ���력자들이 체포되면서 유대인 학살 등 나치 범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다시 높아진 것이다. 이를 계기로 독일 루트비히스부르크에 ‘나치범죄 진상규명 사법조사・연구본부’가 설치됐다. 1961년 이스라엘에서 열린 아이히만 재판도 유대인 학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고조시켰다. 1963년에는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관계자 20명이 기소되어 17명이 유죄 선고를 받았다. ‘아우슈비츠 재판’은 독일인들에게 충격이었다. 유대인 학살에 참여한 혐의로 법정에 선 피고인들이 ‘머리에 뿔이 난 괴물’이 아니라, 자기 이웃, 아니 자기 자신과 다름없는 ‘보통 독일인’이었기 때문이다. 1968년,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의 물결이 유럽을 휩쓸었다. 이른바 68혁명이다. 68혁명세대의 독일 젊은이들은 부모세대에게 “나치 시절에 당신은 무엇을 했느냐?”고 따졌다. 과거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역사적·철학적 논란들이 이어졌다. 1979년 방영된 TV드라마 <홀로코스트>는 유대인 학살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다시 환기시켰다. 이러한 성찰들이 계속되면서, 전후에도 한동안 남아 있던 나치즘에 대한 일말의 동조 분위기, 즉 “나치즘은 이념은 옳았지만 방법이 잘못되었을 뿐”이라는 식의 사고(思考)방식이 사라졌다. 地政學的 이유
권영민 전 주독대사.
이처럼 독일인들이 철저하게 과거사를 청산하게 만든 원동력은 무엇일까? 왜 과거사를 대하는 독일인과 일본인의 태도는 그렇게 판이한 것일까? 권영민 전 주독대사는 지정학(地政學)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유럽의 중앙에 위치한 독일에는 같이 살아야 할 주변국이 너무 많습니다.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폴란드, 덴마크, 체코…. 이들과 어울려 살기 위해서는 과거를 반성하고 화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반면에 일본은 섬나라입니다. 기본적으로 같이 살아야 할 이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때문에 일본인들은 반성과 사죄에 둔감(鈍感)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용철 경희대 명예교수도 “9개 나라에 둘러싸여 사는 독일인과 섬나라 일본인의 의식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분단의 경험’이 독일인들의 반성을 촉진했다고 말했다. “흔히 전후에 독일이 4개국에 분할점령됐다고 알고 있지만, 실은 11개로 조각났습니다. 4개국이 독일 전역과 베를린을 분할점령하면서 8조각이 났습니다. 여기에 구(舊)동프로이센 지역을 소련과 폴란드가 분할하면서 두 조각 났습니다. 폴란드에 할양된 오데르-나이세강 이동 지역까지 합치면 11조각 난 것이지요. 2차대전 후 모든 것이 파괴된 절망적인 상황을 독일에서는 ‘영시’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에 더해 11조각으로 나라가 쪼개지는 처절한 상황을 경험하면서 독일인들은 ‘다시는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 되겠다’는 의지를 다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독일의 반성은 ‘문화의 힘’
박성조 베를린자유대 교수.
과거사에 대한 독일과 일본의 차이를 문화적 측면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일찍이 《국화와 칼》로 유명한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니딕트는 문화적 차이에서 그 이유를 찾은 바 있다. 기독교적 전통의 세례를 받은 서양인들은 신(神)에 ‘잘못을 고백하는’ 의식에 익숙해 있는 반면, ‘수치심의 문화’ 속에 사는 일본인들은 잘못을 자꾸 감추려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박성조(朴聖祚) 베를린자유대 교수는 지리적 이유와 함께 종교적·정신적 측면을 강조했다. “독일 기독교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할 것 없이 ‘사티스팍티오 오페리스(Satisfactio operis)’를 강조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우리 말로 하면 ‘행동으로 속죄하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잘못에 대해서는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한때의 사과에 그쳐서는 안 되며 지속적인 행동으로 자기가 반성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2차대전 이후 독일 기독교계(가톨릭, 개신교)가 중심이 되어 끊임없이 ‘사티스팍티오 오페리스’를 강조했습니다. 빌리 브란트가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 ‘사티스팍티오 오페리스’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박성조 교수는 “오늘날 독일에서는 좌우(左右)를 막론하고 과거사 속죄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사람이 없다”면서 “그 연장선상에서 정치인이 과거사 문제에 대해 적당히 얘기하거나 인종주의적 발언을 했다가는 완전히 매장된다”고 말했다. 유대인 파워?
박재선 전 주모로코대사.
혹시 세계 경제와 문화예술계를 움직이는 유대인 파워가 독일의 과거사 반성을 강제한 측면은 없을까? 이에 대해 박성조 교수는 유대인 파워의 영향력을 인정한다. “미국의 학문이나 문��예술이 세계적 수준에 오르게 된 것은 2차대전을 전후해 유럽에서 망명한 유대인들이 미국에 정착하면서부터였습니다. 게다가 골드만 삭스, 리먼 브러더스, 소로스 등이 미국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들이 막강한 로비망을 구축하면서 언제든지 유대인 문제에 대한 여론화가 가능해졌죠.” 《세계를 지배하는 유대인 파워》의 저자인 박재선(朴宰善) 전 주모로코 대사는 조금 생각이 다르다. “냉전(冷戰) 시절 유대인들이 원폭(原爆)과 수폭(水爆) 개발 등 미국 국방에 크게 기여하게 되면서 그 힘이 점차 축적되어 유대인들의 영향력이 커집니다. 그게 축적되어 미국에서 유대인들 파워가 두드러지게 세진 것은 1950년대 중반 이후였습니다. 반면에 독일은 이미 1952년부터 이스라엘에 대한 배상을 시작했습니다. 또 이스라엘뿐 아니라 러시아, 폴란드 등에 대한 배상도 함께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독일의 과거사 사죄는 유대인 파워의 압력 때문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성찰할 줄 아는 독일인들의 문화적 깊이의 소산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랜 세월 축적된 문화적·정신적 저력이 있었기 때문에, 비록 1・2차 대전 때 한때 ‘야만의 길’로 가기는 했지만 다시 ‘문명의 길’로 돌아오는 복원력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교과서의 힘’
독일 교과서에 실려 있는 유대인 학살 관련 사진. 1943년 5월 바르샤바 게토에서의 유대인 봉기가 진압된 후에 찍은 사진이다.
신용철 교수는 “독일인들이 전후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못된 과거사를 반성하고, 사죄하게 된 데에는 ‘교과서의 힘’이 크다”고 말했다. “독일에서는 학교교육을 통해 끊임없이 나치 독일의 잘못을 상기시키고, 그러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쳤습니다. 한 교과서는 ‘독일 안에서 나치의 지배’라는 제목의 단원에서 ‘독일에서 나치가 어떠한 세계관을 가졌으며, 그것을 어떠한 독재적 방식으로 수행하려 했는가’, ‘이 독재 성립의 과정을 이해하고 테러적 지배가 어떠한 위험을 가져왔는가를 인식하자’는 학습목표를 제시합니다.” 신용철 교수는 “독일의 교과서는 강제수용소의 참상에 대해서도 직시한다”면서, 독일 역사교과서들을 보여주었다. 이 책들에는 ‘바르샤바의 처형장 앞에서 총을 겨눈 나치 독일군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유대인 어린아이와 여성들의 모습, 가스실로 들어가는 유대인의 행렬’ 등을 담은 사진들이 실려 있었다.
신용철 경희대 명예교수.
신 교수는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민주시민교육인 ‘정치교육(Politische Bildung)’의 역할도 강조했다. “통일 전 ‘정치교육’에서 발간한 한 잡지에는 5세쯤 된 유대인 아이가 나치 독일군의 총구 앞에서 두 손을 쳐들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 아래에는 같은 나이의 히틀러유겐트가 당당하게 행진하고 있는 사진을 실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이 잡지가 무엇을 말하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아래에는 ‘이 모든 책임은 우리의 할아버지에게 있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쓰여 있어요. ‘우리 독일인들의 피 속에는 원래 히틀러처럼 잔인한 피가 아직도 흐르고 있는가? 히틀러는 우연한 사건이었는가? 아니면 역사의 연속선상에 존재하는가? 만일 다시 히틀러 시대처럼 독일의 상황이 암울해진다면, 히틀러는 또다시 우리 곁으로 다가올 수 있는가?’ 히틀러는 과거에 일어났던 우연한 사건이 아니며, 과거의 잘못에 대한 경계를 늦추면 그런 일은 다시 재현될 수도 있다는 경고입니다. 독일에서 과거사를 왜곡하려는 정치인이 발을 붙이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사죄와 배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학교교육이나 민주시민교육을 통해 이런 뼈아픈 자기반성의 목소리를 이어왔기 때문입니다.”⊙
0 notes
Text
베를린에 울려 퍼진 '윤석열 파면, 국힘당 해체'

베를린에 울려 퍼진 '윤석열 파면, 국힘당 해체' -윤석열 파면은 끝이 아닌 시작: '검찰 개혁, 심우정 탄핵, 내란범 처벌' -베를린 국립오페라 합창단 목진학 테너 '타는 목마름으로' 열창 JNCTV: https://wp.me/pg1C6G-3Ox 유튜브: https://youtu.be/T6FTK8FCNpM Read the full article
#3월14일#검찰개혁#구치소#구호#국힘당해체#군부독재#내란수괴#내란범처벌#대한민국법원#독일교민#독일어#마르부르크#목진학#민주주의#민주주의수호#법과상식#베를린#베를린국립오페라#브란덴부르크문**#손팻말#심우정탄핵#연대#영어#유학생#일본제국주의#임을위한행진곡#자유발언#전광훈#전두환#전한길
0 notes
Text
베를린에서 제4차 윤석열 퇴진 집회 열려

베를린에서 제4차 윤석열 퇴진 집회 열려 -헌법재판소에 윤석열 파면 촉구 -남태령 트랙터 시위 비하 발언한 윤상현 규탄 JNCTV: https://wp.me/pg1C6G-3G8 유튜브: https://youtu.be/e1hfif9fPgg Read the full article
0 notes
Text
베를린에서 내란수괴 윤석열 파면·구속 촉구 집회 열려

베를린에서 내란수괴 윤석열 파면·구속 촉구 집회 열려 -“국민의힘 해체하라, 윤석열을 즉각 체포하라” -제주항공 참사 희생자 추모식도 열려 JNCTV: https://wp.me/pg1C6G-3At 유튜브: https://youtu.be/wQbVwYy3uTo Read the full article
#구속#국민의힘#국제사회#내란수괴#대한민국#독재#민주주의#베를린#부패#브란덴부르크문#여객기참사#윤석열#제주항공#집회#처벌#체포#추모#탄핵#파리광장#파면#해외동포#헌화#현지인#희생자
0 notes
Text
12월 13일 베를린 윤석열 탄핵 집회에 400여 명 참석

베를린 윤석열 탄핵 촉구 집회에 400여 명 참석 -"윤석열을 즉각 구속하라, 내란 정범 국힘당을 해체하라" -"탄핵이 답이다" 등 크리스마스 캐럴송으로 분위기 띄워 JNCTV: https://wp.me/pg1C6G-3rQ 유튜브: https://youtu.be/yG7zDLFaOBU Read the full article
#계엄반대#국힘당해체#내란정범#다시만난세계#독일#베를린#브란덴부르크문#시민참여#윤석열#윤석열체포#전쟁반대#정치집회#주최측#집회결의#촛불시위#크리스마스캐럴#탄핵집회#탄핵벨#파리광장#평화시위
0 notes
Video
youtube
브란덴부르크문 유라시아친선특급 : 그리운 금강산 (앵콜) - 조수미 / Eurasia Express : Nostalgic Geum...
0 notes
Video
youtube
브란덴부르크문 유라시아친선특급 : 그리운 금강산 (앵콜) - 조수미 / Eurasia Express : Nostalgic Geum...
0 notes
Text
일본정치인과 독일정치인
New Post has been published on http://iofferwith.xyz/%ec%9d%bc%eb%b3%b8%ec%a0%95%ec%b9%98%ec%9d%b8%ea%b3%bc-%eb%8f%85%ec%9d%bc%ec%a0%95%ec%b9%98%ec%9d%b8/
일본정치인과 독일정치인
일본정치인과 독일정치인
2013년 06월 18일 (화) 15:45:17 가평저널 [email protected]
요즈음 역사를 거꾸로 거스르려는 일본 정치인에 대한 언론 보도를 보면 참으로 한심한 생각이 듭니다.
가뜩이나 후덕지근한 날씨도 견디기가 힘든데 ���렇듯 일본정치인들의 철면피한 작태를 보노라면 손으로 자신의 허물에 대해 하늘마저 가리겠다는 어쭙잖은 행동에 나도 모르게 불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아마도 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 같습니다.
일본 총리 아베가 ‘96’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야구장에 나타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731’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비행기를 타지 않나 그리고 곧바로 이어서 하시모토라는 일본 오사카 시장이라는 하시모토는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일본군에게 위안부제도가 필요했다는 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라고 말해 자국에서 마저 따가운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일본정치인들의 그릇된 작태와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가 함께 패전국이 된 독일의 정치인들 모습과는 전혀 딴 판인바 이를 잠시 소개하려 합니다.
우선 1970년대 독일의 수상을 하였던 브란트(Billy Brandt)수상에 대한 행동입니다.
그는 과거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나치가 유태인에 대한 학살에 반성하는 의미로써 바르샤바에 있는 유태인 희생자 게토(Ghetto) 위령비에 직접 가서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참회의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이런 브란트 수상의 진심어린 사죄의 표시는 이후 1989년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문한 콜 총리로 이어졌고 또 다시 슈뢰더 총리의 부헨발트 유대인 수용소 참배로 이어졌습니다.
이렇듯 독일 정치지도자들의 진심어린 반성과 함께 독일의 수도 베를린시 브란덴부르크문 주변 지역에는 유대인 처형 장소, 유대인 박해 장소, 유대인 저술 문서 소각 장소, 유대인 교회당 방화 장소 등 과거 나치 시절 어두운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기념관이 여러 곳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곳을 소개하는 까만 글씨의 안내판에는 “우리(독일인들)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경악의 장소”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씌어져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0년 가까이 되었지만 당시 잔혹한 행위를 생생하게 재현하여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이는 과거 나치 독일이 이웃나라들에게 어떤 일을 자행했으며, 그로인해 피해 국민들은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는지를 전시물 제시를 통해 낱낱이 증언함으로써 전후 세대에게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독일정부가 “나치정권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독일 민족이 역사적인 책임을 깨닫도록 하라는 의미”에서 추모공원을 세우면서도 이렇듯 공원을 베를린시 중심가에 만들게 된 것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 만행을 독일 국민들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하고, 아울러 이런 독일연방공화국의 자화상 모습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목적도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일본인의 오늘날 모습은 어떠하겠는지요?
일본은 패전을 선언했던 8월 15일을 ‘종전기념일’로 미화하면서 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 14명의 위패가 안치되어있는 야스쿠니신사를 총리��� 바뀔 때마다 버젓이 참배를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일본의 주요 언론 매체라고 할 수 있는 요미우리신문의 경우 “야스쿠니(靖國)신사에 합사되어 있는 ‘A급 전범’은 일본 국내법으로는 ‘공무’로 사망한 사람들”이라며 이들을 마치 전쟁영웅으로 미화하려는 모습에서 독일과는 참으로 대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추악한 일본 정치인들의 작태를 보면서 돌연 베를린 유대인 학살 추모협회의 슈테판 만네스 회장의 “과거사 극복을 위한 노력은 독일인의 자아 정립과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며, “독일의 과거사 반성은 현재진행형”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자아 정립과 정체성 회복은커녕 혼란한 동북아 정세를 틈타 틈만 나면 ‘군사대국화’로 치달으려는 일본에 대해 우리 모두가 주목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0 no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