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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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kwho · 7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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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전국 남녀의 일상 탐험 (Exploring the Daily Lives of Men and Women Across the Nation Today)
오늘 하루, 전국 남녀의 일상 탐험 (Exploring the Daily Lives of Men and Women Across the Nation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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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draw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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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kenlee-blog ·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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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비가 판치는 나라"
윤두창이 파면된 지 한참 지났음에도 이 쌍놈은 감옥은커녕 활개 치고 다닌다. 지귀연이라는 어용 판사가 그를 풀어줬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판사 혼자 할 수 있는 짓이 아니란 주장이 계속 있어 왔는데, 우두머리 조희대가 배후였을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법치와 민주주의라는 두 가치가 무너지지 않고,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 잘 작동하는 편일 것 같다.
2017년에 개인 출판한 '그 남자의 무술 이야기, 12년 후'는 제목에서처럼 내가 출판한 첫 번째 책 '그 남자의 무술 이야기'를 쓴 지 12년 후에 쓴 것이다. 주목적은 십 년 몸공부 성과를 그 시점에서 한 번 매듭지으려고. 43~45쪽에 걸쳐 '활인검'이란 제목으로 쓴 글이 있다. 여기에 "현대 사회의 최고 무기는 칼이나 주먹이 아닌 법"이라고 썼던 부분이 떠올라서.
일본에 '병법가전서(兵法家傳書)'란 오래된 병법서가 있다. 에도 막부 시대 때 대대로 지배층의 검술사범역을 담당하였던 야규(柳生) 가문의 책이다. 저자는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다. 야규 가문에 관한 평가는 둘로 나뉜다. 주류는 에도 시대의 명문가로 보는 쪽이지만, 검술 실력보다는 권력에 아부하는 처세술에 능했을 뿐이라고 깎아내리는 견해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이 같은 논란은 '병법가전서'에 등장하는 활인검, 살인검에 관한 논쟁으로 이어진다. "살인 기술을 활인검으로 승화시켰다"는 쪽이 있는가 하면 "살인검이 어떻게 활인검이 될 수 있는가? 궤변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다.
오늘날 무술은 (이런 내 주장이 매우 기이하게 보일 사람도 있을 텐데) 그 자리를 변호사와 (외과) 의사한테 내줘버린 느낌이다.
무술가가 죽도나 목검을 들고 열심히 휘둘러봐야 생명체를 벤 건 아니다. 반면 외과의사는 허구한 날 몸 여기저기를 째는 게 본업이다. 피, 내��� 앞에서 흥분하지 않고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다. 해부학 지식 또한 이론과 실제를 겸비했다. 외과의는 에도막부 시절 유생 가문이 주장한 '활인검'을 실천하고 있는 특수한 무사라고 봐도 될 것 같다.
현대 사회 최고 무기는 칼이나 주먹이 아닌 법이다. 법 잘 쓰는 상대 앞에서 설레발쳐가며 개겨 본들 어떻게 이기겠냐.
'사법 살인'이란 말이 있다. 윤리의식이 결여된 검사와 판사가 법을 칼처럼 휘둘러 사람을 죽인다. 근자엔 이선균 씨가 그렇게 갔고, 이름까진 기억 못 하는 많은 이가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살인검이다. 함부로 칼을 휘둘러 사람을 죽여도 공권력 뒤에 숨어 아무런 손해나 손상을 입지 않는다.
법치 국가에서 사법부가 타락했다는 것은, 몸 안의 독소 제거하는 역할을 하는 간이 암에 걸린 것과 같다고 느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난 해결책까진 모르겠다. 헤라르트 다비트란 화가가 남긴 그림처럼 타락한 판사 살가죽을 산채로 벗길 수도 없고. 그냥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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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etwith · 6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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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oindivid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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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영화들을 도대체 무슨 이유로 좋아할까 생각해봤다. 그의 영화 속 대사들은 왠지 모르게 나를 편안토록 만들고, 주변을 새롭게 발견하게 한다. 주인공은 욕망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찌질해지고 궤변을 토로하지만, 그 안에는 포옹력과 신비로움이 담겨져 있다.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구조의 재미 때문이다. 그의 모든 영화는 반복과 변주를 통해 관객들에게 구조의 발견을 요구한다. 구조적인 반복을 통해 욕망에 대한 탐구를 하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의 영화가 매번 똑같고, 발전이 없다고 말한다. 항상 이야기가 주인공의 욕망에만 머물러있고, 되풀이되는 이야기만 한다고. 하지만, 그들은 ‘홍상수’ 감독이 구조를 어떻게 변형시키며 가지고 노는지 발견해야 한다.  
‘홍상수’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기억’과 ‘우연’에 대한 테마를 대구(對句)를 통해 드러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하하하> 이후로 그는 그 대구를 점차 희석시키면서 영화의 구조적 시공간이 조금씩 해체되기 시작한다. 특히 <자유의 언덕>은 시공간적 개념을 뒤엎는 실험이 두드러진 영화이다. 북촌과 서촌에서의 시간은 비선형적인 구조로 진행되고, 편지가 뒤섞임으로써 시간 감각을 배제한 세계를 보여준다. 시제를 알 수 없는 모호한 내레이션은 지금과 그때라는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자유의 언덕>은 이러한 모호한 시간 속에서 주인공 ‘모리’의 애틋한 정서를 신비롭게 묘사한다. 또한 ‘모리’를 찾아가는 ‘권’이라는 또 하나의 서사의 축이 형성되면서 구조적으로는 더 확장되고, 정서는 더 깊어지게 된다.
<자유의 언덕>은 ‘홍상수’ 감독이 자주 보여줬던 ‘시간’이라는 테마에 대한 사색을 전면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모리’가 읽고 있는 책의 제목 또한 <시간>이다. 그는 책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관념의 틀이 과연 절대적인 것인가 의문을 제기한다. 이 논리는 영화적 서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고전적인 영화 서사에서 중요시 된 ‘인과성’은 철저히 무시되어 있고, 이를 뒤틂으로써 현재, 과거, 미래를 잇는 연결점 보다는 화면에서 보이는 그 때 그 순간에 더 집중하게끔 만든다. 전에 무슨 일이 있었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건 간에, 지금의 순간을 마음껏 누리는 삶을 지향하는 감독의 바람이 담겨있는 것 같다. 개연성, 필연성, 인과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순간의 행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홍상수’ 감독은 왜 이러한 선택을 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나는 그것을 ‘순간’의 즐거움을 중요시하는 감독의 실존주의적인 태도와 연관시켜 볼 것이다. 또한 이 영화에서 내레이션이 주는 모호함과 한국어가 아닌 외국어를 사용함으로써 나타나는 소통의 간극에 대해서도 분석해 볼 것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 대한 논의가 많은데, 바로 ‘모리’와 ‘권’이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는 내용 다음에 나오는 장면이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이상한 꿈을 꿨다고 말하고 방에서 나오는 장면인데, 이는 인과성의 개념 자체를 온전히 해체시켜버린다.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도 감독의 철학과 관련지어 이야기 해 볼 것이다.
‘홍상수’ 감독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아졌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 보다는 그의 스캔들에 대한 비판이 더 많다. 그의 선택은 사회 규범에 어긋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의 영화를 좋아하고, 매년 기다리는 관객으로서 그 사실이 놀랍지는 않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보고 감독님과 관객과의 대화를 한 경험이 있는데, 그의 말을 들으면 정말이지 편안해지고 위로가 된다. 종교처럼 말이다.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선입견 없이 세상을 있는 그 자체로 보는 순간, 그 어떤 위로보다 위대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 세상을 머릿속으로 규정짓는 순간, 우리는 축소된 삶을 사는 거라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분석하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자유의 언덕>에서 내가 느꼈던 정서와 그것을 만들어낸 구조를 통해 솔직하게 이야기 해보고 싶다. 
201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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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tercupchoi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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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다름 없는 주말을 보내면서, 오늘 오후에 운동을 다녀온 뒤에 헬스장이 있는 건물 지하에 있는 서점에 들렀다. 책을 구경하다 '사회에 나가기 전인 학생, 혹은 사회 초년생에게 추천하는 책' 뭐 이런 수식어가 달린 책 한 권을 집었다. 사회 초년생이라기엔 4년차(여도 초년생으로 쳐주나요?)지만 진로 고민이 한창인지라 호기심이 일었고, 책 뒤의 소개글을 보니 현직 교사인 작가들이 모여 '일'과 관련된 각자의 단편을 모아 엮은 단편소설집이었다. 엮은이의 설명에는, '학교에서 미처 가르쳐주지 못 했지만 사회로 나아가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 뭐 이런 설명이 있었던 것 같다.
(책 제목은 쓰지 않았지만 내용 스포가 있습니다)
책의 앞쪽에 실린 단편 몇개를 재밌게 읽던 중, 어느 작품에서 블로그 바이럴 마케팅 대행사에 다니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나왔다. 소위 '뒷광고' 작업을 업으로 삼게 된 주인공이 그 일의 도덕성, 윤리성은 생각하지 못한 채 일이 적성에 너무 잘 맞는다며 행복한 회사생활을 하다가, 우연히 자신이 내돈내산인 척 올린 가습기살균제를 구매한 블로그 이웃이 가습기살균제 사건의 피해자가 되었다는 메시지를 받게 되며 충격을 받아 회사를 그만두게 되는 내용이다.
저자의 말에서, 해당 단편을 쓴 작가님은 이 글을 통해 직업을 선택할 때 사회적 책임이나 윤리성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고 한다. 메시지는 너무 명료하고 전혀 어렵게 쓰인 글이 아니었다.
나는 이 단편을 읽고 생각이 많아졌다. 그 이유는 내가 광고회사에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지금 담당하는 품목 중에 FMCG류도 있다. 물론 당연히 뒷광고를 하는 일은 아니고, 그냥 사람들이 TV와 유튜브에서 보는 영상 광고 만드는 사람인데, 내가 만든 광고에 나오는 제품이 저런 파장(이자 문제)을 일으킨다면..?(그럴 일이 없을 거고, 없어야 하겠지만) 아무리 클라이언트와 밀접한 커뮤니케이션을 한대도 저런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저런 내막과 정보는 절대 알 수 없고, 이 단편에 나오는 주인공도 뒷광고였냐 아니냐의 여부만 다를 뿐 다른 조건들은 다 같다고 생각한다. 분명 이 글에서 전하고자 하는 바는 '자신의 적성과 맞냐 아니냐도 중요하지만 이 일이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도덕적 관점에서 타당한 일인지' 를 생각하라는 메시지였겠지만, 어쨌든 저 가상의(사실상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지만) 사건만 놓고 보면 '해당 제품을 (뒷)광고하는 콘텐츠를 보고 소비자가 제품을 구매했고, 그 제품에 결함이 있어 지울 수 없는 피해를 입혔다' 였기 때문에...이 글을 읽고 난 후에 나의 감상 자체가 '내가 그런 제품을 광고했다면 나는 가해자인가?' 로 귀결되어서 기분이 좋지 않은 채로 존재하지 않는 일에 대한 죄책감이 들어 이 이상 다음 단편을 읽지 못하고 책을 덮었다.
물론 광고가 대중들에게 환대받지 못하는 시대이지만 그럼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고, 그 영향에 분명 부정적 측면도 존재하지만 그래도 긍정적 영향을 끼치기 위해, 소비자에게 보다 좋은 선택을 위한 옵션을 준다는 생각으로 일해왔는데, 처음 이 글을 읽고 나선 두려움이 생겼다.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다면 나는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나? 라는 생각에서 시작해서 기분이 급격히 나빠졌다가, 조금 진정하고 생각해보니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다면 나는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나?' 라는 문장은 광고업을 포함해 어떤 직업에든 적용되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당연히 책임은 있겠지. 다만 피해가 발생하는 걸 사전에 막을 방도가 없을 뿐... 그리고 역으로 생각해보니 우리는 별 거 아닌 일을 하는 게 아니구나. 우리의 일이 누군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구나. 라는 생각도 들어서 괜히 책임감이 더 생기는 것 같기도 하다.
결론이야 어찌됐든 어떤 종류의 책을 읽고 나서 부정적인 감상을 느낀 게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내가 심각하게 몰입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 단편글을 읽고 나처럼 생각하는 독자가 또 있을까..? 왜 꼭 예시로 가습기 살균제를 언급한 걸까... 하며 온갖 생각이 들고. 단편의 주제가 소비자를 기만하는 뒷광고든 아니든 그 화두로 가습기살균제 사례가 나온 이상 그 관계자들, 혹은 유사 사례를 겪은 사람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 내가 그 관계자가 될 수 있다는 가정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다시 말하지만 절대 그런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겠지만. 한창 불매운동이 심했던, 혹은 진행중인 기업들을 생각해본다. 실제로 만나본 본사 관계자들은, 그들이 특정 문제에 연루되었는지 아닌지의 진실과 별개로 (그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개별적으론 참 일을 열심히 하고 인격적으로 선한 사람들이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불매와 별개로 나는 이런 일을 겪고 나서 특정 기업에서 일어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비판해야 할 대상에 대해 조금은 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 사람들은, 혹은 그 사람들 중 하나가 내가 된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견지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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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manlanvincat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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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 않는 자를 믿을 수 있는 이유 - 재현과 포착 사이를 진동하는 카메라의 궤적에 대해, 자파르 파나히의 <노 베어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 라고 하면 지나가던 코끼리마저 다시 돌아와 구석에 둥지를 튼다. 때론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강력한 존재감을 발휘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보이지 않음으로써 형성되는 힘이 있다. 창작의 비밀을 찾아 헤맨 수많은 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부터 피어 나는 상상력을 활용하여 추상과 개념들을 형상화해 왔다. 창작자들은 이야기를 통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창조하고, 조각가들은 형태가 없는 감정을 물리적인 형태로 빚어낸다. 아이러니한 것은 (카메라를 기반으로 한) 영화다. 영화는 태생적으로 충돌의 씨앗을 품고 성장해 왔다. 이야기 도구로서의 영화는 본질적으로 ‘지금 여기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재현한다. 문제는 그것을 재구성하는 방식이 철저히 보이는 것, 보여주는 것에 의존한다는 데에 있다. 필름이 서사에 몸을 의탁하는 순간, 담고 있는 내용물과 그릇의 질료가 충돌한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통해 존재를 증명하는 매체다. 하지만 정작 그 안에 담고 있는 내용물은 실제 하지 않는 허상(또는 거짓)이라는 모순에 부딪친다. 대체로 모순은 자기 파괴적이지만 그 과정에서 피어나는 불꽃은 막막한 어둠 속의 한 줄기 가능성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곰, 영화 그리고 자파르 파나히
자파르 파나히의 신작 <노 베어스>는 진실을 탐문하고 고발하는 영화가 아니다. 경계와 상식, 프레임 바깥으로 계속 튀어 나가려는 이 영화는 차라리 진실이 무엇인지 반문하는 영화에 가깝다. 진실이 작동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에 대한 탐구 혹은 진실이라는 믿음 근처를 배회하고 서성거리는 흔적들을 따라간다고 해도 좋겠다. 영화의 제목 ‘노 베어스’는 짧은 에피소드로 인용된다. 전통을 따르는 폐쇄적인 마을에는 ‘산에 곰이 있으니까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경고 팻말이 있다. 마을을 나서는 자파르 파나히에게 할아버지는 대뜸 진실을 고백한다. “사실 저 산에는 곰이 없어. 하지만 저렇게 해놓으면 사람들이 산에 들어가지 않지.” 산에 곰이 있는지 없는지는 실은 중요하지 않다. 곰이 있다는 경고판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공포심을 바탕으로 한 금기의 선이 그어진다. 선을 넘어 진실을 목격하러 갈 용기와 의지를 지닌 사람은 많지 않다. 설사 몇몇이 산에 간다고 해도 어쩌면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존재한 적 없는 곰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곰’을 입에 올리는 순간(혹은 수단으로 삼는 순간) 곰은 산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산다. 믿음의 메커니즘은 대체로 이런 흐름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증명과 논증의 영역이 아니다. 믿음의 근거가 정해지면 오히려 불신의 증거들을 시련으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극복할지를 요구한다. 원인을 바탕으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결론을 정해두고 수많은 사실과 가능성 중에 필요한 것들만 재구성해 나간다는 말이다. 요컨대 믿음은 그 목적과 필요에 걸맞은 서사를 선택하여 창작한다. 이 지점에서 ‘저 산에 곰이 없다’는 명제는 다음 단계로 파고들 여지가 있다. 저 산으로 한 발자국만 더 디뎌보자. 자파르 파나히가 벗겨내고 싶은 게 정말 위선과 거짓일까. 있지도 않은 곰을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금기의 감옥을 만들어내는 장면은 표면적으론 우화로 읽을 여지가 있다.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이란 사회의 전근대성과 종교에 얽매이는 구태와 관습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다. 곰이 없지만 여전히 두려워하는 어리석은 사람들과 공포를 통해 진실을 덮으려는 사람들 모두를 향한 냉소적인 경고는 비교적 선명하다. 하지만 창작자로서 자파르 파나히가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공포의 층위는 조금 달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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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진실인지 거짓과 위선을 판별하는 건 감독 자파르 파나히에겐 부수적인 효과에 불과하다. 자파르 파나히가 추구하는 것은 결과가 아닌 방법론에 가깝다. 진실을 어떻게 찾아갈 것인지의 과정. 어떤 방식으로 진실의 일부를 더듬을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자파르 파나히 영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작동 원리다. 요컨대 자파르 파나히는 본인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이란 사회만큼이나 그것을 수행하는 도구, 즉 카메라의 물성과 한계를 중요시한다. 자파르 파나히가 두려워하는 것은 진실이 은폐되는 것, 알려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심연을 응시할 때 심연도 나를 응시한다’는 문구처럼 자파르 파나히의 다큐멘터리는 의심과 불신의 힘으로 전진한다. 진실에 접근한다는 명목으로 또 다른 왜곡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이다. 카메라는 과연 진실을 담을 수 있는가. 아니 애초에 진실이란 무엇인가. 자파르 파나히가 묻고 탐구하는 건 산에 곰이 있는지 없는지가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곰이라는 믿음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가 핵심이다. 보이는 사건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리액션에 대한 탐구하고 해도 좋겠다. 곰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담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카메라를, 자신의 행위 그 자체를 의심하는 일이다.
픽션과 다큐멘터리, 경계의 궤적이 형성되는 방식
자파르 파나히는 이란의 엄혹한 현실 속에서 꾸준히 영화 연출 활동을 이어왔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조감독 출신인 그는 2010년 반체제 활동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6년 징역형을 받은 뒤 20년간 출국과 영화 제작을 금지당한다. 역설적으로 그 억압이야말로 자파르 파나히에게 독자적인 정체성과 색깔을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정부에 대한 비판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란 영화는 여러 경로의 우회로를 채택해 왔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자파르 파나히의 스승 격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다. 얼핏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는 촬영에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풍경을 담아내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는 한마디로 거대한 우화다. 그는 맑고 순수한 이야기 속에 촘촘히 상징을 녹여내어 이란 사회의 전근대성을 드러냈다. 고발 자체가 목적이 아닐지라도 ���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는 필연적으로 사회의 단면을 담아낸다. 다큐멘터리적인 화면 때문에 종종 포착의 영화로 오인받기도 하지만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차라리 표현주의 감독에 가깝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거대한 캔버스와 같은 화면 위에 이란 사회의 기호들을 상징적으로 배치한다. 정교하게 계산된 무대를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찍은, 철저한 계산의 결과물이란 말이다. 자파르 파나히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시선에서 출발하되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논픽션을 연기하는 철저한 픽션이라면 자파르 파나히는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에서 고뇌한다. 정확히는 그 경계를 드러내고 인지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책을 고민한다. 체포, 구금, 감금이 이어져 창작을 억압당하는 와중에 자파르 파나히의 자전적인 다큐멘터리 스타일은 표현의 수단으로 거듭난다. ‘자파르 파나히가 영화를 만든다’는 사실 자체가 억압에 저항하는 하나의 메시지다. 거꾸로 접근하자면 메시지에 집중할 필요가 없어진 자파르 파나히는 수단에 집중하고 고찰할 자유를 얻는다. 고립과 폐쇄라는 물리적 억압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지가 자파르 파나히 영화의 초석이자 아이디어가 된 것이다. 가령 가택연금 상태에서 만든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2011)를 USB에 담아 케이크에 숨긴 뒤 칸영화제에 출품한 사건은 스크린 바깥에서 이미 서사를 만들어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영화에 담다 보니 스크린 바깥의 서사가 스크린 안쪽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기이한 운동성이 발생한 것이다. 보통의 서사영화가 가진 형식이 그릇 안에 메시지와 서사를 담는 구조라면 자파르 파나히의 영화는 이런 형식을 택할 수밖에 없는 제약이 바깥에서 안쪽으로 죄어들어 오며 압력을 형성한다. 서사가 (재현된) 안쪽과 (포착된) 바깥 쪽에서 동시에 작동하여 팽팽한 균형을 이루는 형국. 그리하여 또렷해지는 것은 역설적으로 내용과 메시지가 아닌 형식이다. 촬영이라는 행위. 바깥에서 죄어들어 오는 창작의 자유에 대한 억압과 안쪽에서 포착되는 비이성적인 상황의 목격은 서로 힘 겨루기하며 의도치 않게 경계를 형성한다. 그렇다. 자파르 파나히 영화의 진정한 동력은 이 격렬히 진동하는 경계의 궤적을 통해 발생한다. 픽션과 논 픽션, 허구와 현실의 구분을 무력하게 만드는 움직임이라고 해도 좋겠다. 그 끝자락에 <노 베어스>가 있다. <노 베어스>는 한층 노골적이고 격렬하게 ‘영화라는 행위’의 안과 밖, 카메라의 앞과 뒤를 더듬는다.
<노 베어스>는 이란 정부로부터 출국금지령을 받은 자파르 파나히가 튀르키예와 이란 국경 근처에서 영화를 제작하고 있는 상황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다. 중요한 건 내용보다 차라리 촬영 앞, 뒤, 카메라 앞, 뒤, 주변을 모두 찍는다는 행위다. 거기에 하나 더한다면 자파르 파나히는 심리적으로 여전히 갇혀 있다. 영화 촬영지 근처 작고 폐쇄적인 마을 주민들은 외지인을 경계한다. 덕분에 국경의 근처에서도 계속 겉돌고 고립된 상태다. 마을에는 혼례를 앞두고 있는 커플이 있다. 여자가 태어날 때 탯줄을 자른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전통을 강요하는 마을에서 고잘이란 여인은 원치 않는 결혼을 강요받고 있는 상황이다. 자파르 파나히가 이 마을 근처에서 찍고 있는 영화의 내용 역시 공교롭게도 국경과 관습의 울타리를 벗어나 튀르키예에서 탈출하려는 남녀에 대한 이야기다.
정리하면 <노 베어스>는 세 가지 이야기 층위에 겹겹이 둘러싸여 있는 삼중 구조의 영화다. 첫 번째 껍질, 자파르 파나히가 찍고 있는 영화가 있다. 두 번째 껍질, 자파르 파나히가 영화를 찍고 있다는 사실이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껍질, 그 근처에 자신이 촬영 중인 영화 속 내용과 비슷한 마을 사람들이 있다. 픽션과 픽션을 찍고 있는 자파르 파나히(라는 현실), 그리고 촬영지 인근의 마을 사정. 이렇게 나란히 배치된 구성은 한 가지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종종 카메라 바깥이 현실이라고 착각한다. 재현된 이야기로서의 극이 허구라면 그걸 찍고 있는 카메라 뒤편이 허구가 아닐 거라는 자동 연상. 허구의 반대말이 현실이라는 착시.
영화를 찍고 있는 자파르 파나히의 모습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영화감독으로서 화면에 포착된 자파르 파나히 역시 어떤 상황을 연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이 허구인가. 진정 흥미로운 지점은 그것도 아니라는 거다. 자파르 파나히는 자신을 억압받는 상황에 던져둠으로써 현실의 조각을 확보한다. 자파르 파나히가 거기서 영화를 찍고 있는 행위만으로 이 명제는 일정 부분 (허구의) 재현이 아닌 (거기 존재하는 물리적 사실의) 포착으로서 작동하는 것이다. 이로써 자파르 파나히의 영화는 단순히 다큐멘터리의 표면을 흉내 낸 극 영화보다 훨씬 복잡한 상태에 도달한다.
다시 말해 자파르 파나히의 카메라에 담기는 그 어떤 것도 순수한 포착은 없다. 대신 그는 카메라가 무언가를 담아내려는 순간, 포착되는 것 같은 순간을 재현한다. 이 차이는 크다. <노 베어스>는 표면적으로는 이란 사회의 전근대적인 관습과 왜곡된 믿음의 허울을 벗겨낸다. 동시에 그가 진정으로 고발하는 것은 카메라가 허구를 재현하는 순간의 메커니즘이다. <노 베어스>는 재현과 포착, 재현된 것과 찍힌 것, 픽션과 현실의 일부가 겹쳤다가 나란히 섰다가 뒤섞이기도 하면서 진실의 윤곽을 더듬어간다. 1940년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은 서사는 허구, 그것을 담아내는 방식의 일부로서 포착을 활용했다. 세팅되고 재현된 연기가 아니라 우연히 카메라에 담긴 있는 그대로의 이미지가 강렬한 사실성을 발생시킨다. 내용물은 허구지만 담는 그릇(방식)의 일부가 진짜일 때의 열리는 가능성이라고 해도 좋겠다.
다큐매거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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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storyspace1 · 4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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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쇼핑 5회 리뷰 및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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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쇼핑 다시보기
욕망과 진실 사이, 염정아의 얼굴이 남긴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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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쇼핑 다시보기 ‘완벽한 인간’을 꿈꾸는 여성, 그녀가 딸을 ‘환불’하고 다시 만났을 때, 무엇이 남았을까. 지난 8월 4일(월) 방송된 ENA 월화드라마 ‘아이쇼핑’ 5회는 드라마의 중심축을 완전히 뒤흔든 충격적인 진실로 시작되었다. 김세희(염정아 분)가 김아현(원진아 분)의 친모이며, 과거 그녀를 '환불'한 인물이었다는 설정은 시청자에게 전율을 안기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딸을 다시 마주한 세희가 보여준 태도는 엄마라는 이름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재회의 순간에도 따뜻한 눈빛 하나 없이, 냉정하게 감정을 절단해버렸다. 인간적인 죄책감이나 흔들림은커녕, 오히려 아현을 제거하려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시청자들의 분노를 유발했다. 그러나 이러한 광기 어린 전개가 단순한 자극을 넘어, 세희라는 인물의 깊은 심리를 파고드는 장치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이 드라마는 특별하다. ‘엄마’라는 사회적 코드와 여성 개인의 욕망 사이에서 파열음을 내는 이 캐릭터는, 지금 한국 드라마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서사다.
드럼통에 갇힌 딸, 그리고 ‘아이들’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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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쇼핑 다시보기 결박된 채 드럼통 안에 갇힌 아현. 그 장면은 단순히 자극적인 스릴러 장면을 넘어서, 인간 존엄성과 감정의 바닥을 묘사하는 장면이었다. 구원을 이끈 것은 다름 아닌 ‘아이들’이었다. 이 아이들은 더 이상 수동적인 피해자가 아니었다. 세희의 딸(김지안 분)을 인질로 삼아 아현과 교환을 제안한 아이들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만들며 드라마의 무게중심을 바꿔놓았다. 세희는 흔들렸다. 그녀에게는 권력도, 지위도, 계획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보다 ‘딸’이 필요했다. 결국, 아이들은 아현을 구출해냈고, 세희는 처음으로 수세에 몰리는 입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 장면은 단순한 반전이 아니라, 앞으로의 복수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시그널이었다.
아이들이 짊어진 트라우마, 주안의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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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쇼핑 다시보기 구출된 이후, 아이들은 아현의 치료비를 마련하고자 주안의 양부 윤세훈이 운영하는 교회를 찾는다. 이 장면은 드라마의 속도감을 잠시 늦추는 대신, 감정의 깊이를 더하는 데 집중했다. 주안(안지호 분)이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학대를 받고 파양당했다는 과거는, 단지 하나의 설정이 아니었다. 이는 사회적으로 여전히 존재하는 편견과 폭력, 그리고 그로 인해 삶 전체가 뒤틀리는 사람들의 현실을 드러낸다. 이 드라마는 폭력적 상황을 다루지만, 그 내면에는 상처 입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있다. 주안의 과거는 시청자들에게 단순한 동정을 이끌기보다,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누가 이 아이를 파괴했는가?"
세희의 야망, 인간을 넘어선 신의 영역으로
👉 아이쇼핑 다시보기 5회 후반부, 세희는 자신의 딸과 함께 영부인 여사를 만난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드라마는 상상을 초월하는 전개를 내보인다. 세희는 대통령의 정자와 자신의 난자를 수정해 ‘완벽한 아이’를 만들려 했던 과거의 계획을 고백한다. 이 대사는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극의 흐름 속에서 놀라울 정도로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그녀는 단순한 야망가가 아니었다. 사회 시스템을 이용하고, 권력을 쥔 남성들을 조종하며, 세상을 ‘디자인’하려는 존재였다. 권강만(손종학 분)과 윤세훈을 교묘히 이용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그녀의 계획은 단순히 악역의 야망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도 구체적이고 날카롭다. 인간을 창조하려는 욕망, 그것은 신의 자리로 도약하려는 인간의 고전적 욕망이다. 그리고 이 욕망의 중심에는 김세희가 있다.
아현의 결단, 아이들의 분노, 시작된 진짜 복수
👉 아이쇼핑 다시보기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아현은 이제 도망치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스스로를 피해자 위치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그 선택은 무력한 순응이 아닌, 능동적인 저항으로 이어진다. 아이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더 이상 보호받길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다. 자신들의 상처를 직면했고, 이제 그 상처를 만든 사람들에게 분노를 돌리기 시작한다. 양부모가 숨긴 민낯, 그 진실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아이들의 모습은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정의에 가까운 분노다. 이 장면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은 대사보다 표정, 그리고 침묵에서 더 강하게 전달된다. 5회의 클라이맥스는 단순한 반전이 아니라, 이후 이야기의 기반을 구축하는 선언이었다.
❓ 시청자들이 궁금해하는 이야기
👉 아이쇼핑 다시보기 ‘아이쇼핑’ 5회에서 염정아는 어떤 진실을 드러냈나요? 👉 김세희(염정아)는 김아현의 친모이며, 과거 그녀를 ‘환불’했던 인물이라는 충격적인 진실이 밝혀졌습니다. ‘드럼통 장면’은 어떤 의미였나요? 👉 김아현이 생사의 기로에 놓인 장면으로, 아이들이 그녀를 구출하며 권력의 균형이 뒤바뀌는 전환점이었습니다. 주안 캐릭터는 어떤 상처를 가지고 있나요? 👉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학대받고 파양당한 과거가 있으며, 이로 인해 깊은 트라우마를 지닌 인물입니다. 세희의 야망은 어떤 수준인가요? 👉 대통령의 유전자를 이용해 인공적인 ‘완벽한 아이’를 만들고자 했던 계획이 밝혀졌고, 권력자들을 조종해 세상을 바꾸려는 야망이 드러났습니다. 앞으로의 전개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까요? 👉 아현과 아이들의 본격적인 복수 서사가 시작되며, 숨겨졌던 진실들이 드러나는 클라이맥스가 예상됩니다.
마무리하며
👉 아이쇼핑 다시보기 ‘아이쇼핑’은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다. 이 드라마는 권력, 모성, 상처, 정체성이라는 복잡한 감정과 사회적 이슈를 정교하게 얽어낸다. 5회는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전개와 충격적인 진실이 뒤얽히며, 시청자들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제 단 2회만을 남겨둔 상황. 모든 진실이 밝혀질지, 아니면 더 큰 혼란이 펼쳐질지, 지금 이 순간, ‘아이쇼핑’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 눈을 뗄 수 없다. 📺 ENA ‘아이쇼핑’ 6회 방송: 8월 5일 화요일 밤 10시 📡 다시보기: 다시보기 버튼 클릭!!! 💬 놓치지 마세요. 진짜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https://plus.modernevent.co.kr/-4/ Read the full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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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jjj · 20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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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균열, 공포로 스며들다 '조용한 광기'를 담은 신작 게임
K-컬처의 세계적인 확산과 함께 아이돌 산업의 이면도 조명되는 요즘, ‘팬’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과도한 집착과 스토킹이 하나의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그런 현실적 공포를 소재로 한 공포게임이 공개되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실제로 일상에서 마주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위협을 조명한 이 게임은, 과장되거나 비현실적인 괴물이 아닌, 우리 곁의 ‘사람’을 공포의 주체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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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주 무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익숙한 공간들이다. 연습실, 대기실, 숙소, 이동 차량처럼 누구나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환경이 배경이 되며, 이곳에 조금씩 어긋난 분위기와 불쾌한 낌새가 스며들면서 공포가 본격화된다. 소리 없는 발자국, 다급하게 열리는 문,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는 기분. 그런 감각적인 연출들이 현실적인 공포를 더욱 사실적으로 전달해준다.
플레이어는 주인공인 아이돌의 시점을 통해 사생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며, 단순한 게임플레이를 넘어 ‘심리적 위축’을 체험하게 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게임 내내 펼쳐지는 ‘선택’의 요소다. 어떤 장면에서는 신고를 할지, 숨을지, 혹은 도망칠지 등을 직접 결정해야 하며, 이에 따라 게임의 결말은 완전히 달라진다. 단지 공포를 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러한 선택지들을 통해 ‘무력감’, ‘죄책감’, ‘공포의 지속성’ 등을 입체적으로 전달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특히 개발자들은 “자극적인 연출보다 일상의 틈 사이로 스며드는 감정의 변화에 집중하고 싶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말처럼 ‘사생’은 피 튀기거나 괴물이 쫓아오는 장면보다는, 평범한 공간에서의 위화감, 그리고 타인의 시선 속에 갇히는 불안함을 섬세하게 쌓아올린다. 예를 들어, 평소 자주 쓰던 드라이기 위치가 바뀌어 있거나, 연습실에 남긴 메모에 낯선 필체가 섞여 있는 식의 미세한 흔적들이 공포의 단서로 작용한다.
이러한 디테일은 오히려 더 큰 몰입을 유도하며, 플레이어가 마치 실제 피해자처럼 느끼게 만든다. 또한 게임을 통해 사회적으로 던지는 질문 역시 의미 깊다. ‘팬과 범죄자의 경계는 어디인가’, ‘공인의 일상은 얼마나 보호받고 있는가’, ‘우리가 쉽게 소비하는 K팝의 화려한 이면에 어떤 고통이 존재하는가’ 같은 질문들이 플레이 도중 머릿속을 맴돈다.
‘사생’은 단순한 공포게임이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사회의 경고음이고, 그 경계가 허물어졌을 때 벌어지는 한 인간의 파괴된 일상에 대한 체험이다. 현실을 반영한 이야기와 일상의 불안을 다룬 ‘사생’은 무서운 이야기 그 이상으로, 플레이어에게 오랜 여운과 성찰을 남긴다.
현실을 마주하는 게임이 주는 감정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를 넘어서, 때론 경각심이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사생’은 단지 공포를 느끼는 시간이 아닌, 우리가 바라보는 사회의 단면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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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ya7875 · 25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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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지식사회에서 지식인들의 내조의 방향]
대자연은 위와 아래가 걸리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저 태산은 위에만 보고 너무 좋다고 한다.
하지만 저 밑에 보고 너무 좋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저위에가 좋은 것은 저일에 것이 받치고 있으니까 좋은 것이다.
저 태산의 정상을 논하려고 한다면
저밑에 깊이까지 다 들어 가야 한다.
그래서 연결 안된 것이 없다.
밑에 것을 하찮다고 파버리면 태산은 무너지는 것이다.
위에 사람은
아래 사람이 없다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한 팀이다.
한팀으로 자기 일을 했을 때
멋진 작품이 이루어 진다.
그러니, 자식들을 키우는데
누구 책임인가 따지지 말고 내 형편에 내가 키워야 할 것 같으면 내가 키우고
그런데 내가 키우기 보다는 상대가 키우면
나보다 잘 보살펴 주겠다. 라는 생각이 들고
비용이 70만원이면 보살피겠다.
이런 생각이 든다면 상황을 따져 볼수 있는 것이다.
내가 사회에 나가면
국민들에게 얼마 만큼 도음 될 것이고
수입이 얼마만큼 될것이다.
이런 역량을 계산해 봐야 한다.
>>>>>>>>>>>>>>>>>>>>>>>>>
그래서 여기서 정확하게 3:7의 법칙이 나온다.
내가 이 비용을 주고도 내가 70%가 남으면
30%를 들어서 지식을 잘 키우도록 만들고
나는 이것을 볼 때 사회의 일을 하는 것이 맞습니다.
지금은 사회의 일로서 잣대를 대야합니다.
남편에게 내조를 하는 시대는 끝났다.
그런데 이런 문화가 있었는데 다 실패를 한 것이다.
그러면 이 원인이 뭔지를 풀어 줘야하는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 후손들에게..
이것을 끌지 않고는 미래를 이야기 할 수 없다.
그래서 왜 안에서 내조를 하는 것이
'끝났다' 라고 이야기 할까요?
2차대전 이후로 부를 이룬 것이 2차대전 전보다
몇배로 부를 이룬 사회가 입니다.
전부다 계산을 하자면 계산법이 다 있습니다.
내가 기틀을 잡아 놓으면 말입니다.
그래서 2차 대전 이전부터 해서,
이차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공산과 민주주의 이념으로
이 세상을 극으로 대치 하도록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경제를 일으킨 것이
빈부격차를 벌려 놓고 짧은 시간에 근대사에 일어난 사건들이 사회문제점으로 다 일어나 버린 것이다.
이것이 일어날 때
아날로그 세대인 여성들이 이것을 알고,
남편을 내조를 해서 민중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런 단도리를 했어야 했다.
>>>>>>>>>>>>>>>>>>>>>>
그렇게 했다면
빈부격차를 갖고 감정이 쌓일 일이 없었다.
중간 중간 백성들을 돌보여 왔기 때문에
2차대전과 같은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것 중에 하나씩 잡아 줄 것이 또 있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그런 상황이 않되었을까?
그래서 그것을 조금 이야기 한다면 남편이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성장을 할 때 어느정도 성장하고 나면
가족들이 많아진다.
그렇게 되면 남편은 밖에 있을 한다고
가족들의 내면을 살필수가 없다.
그럴때 부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하면
직원들의 아내와 친분을 쌓고 하소연을 들어주고
그들을 보살피기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그사람들의
가정과 부인들이 집안에 어떻게 사는가?
직원들의 가정에 어려움은 없는가?
이런 것등을 알아봐야 한다.
즉 남편은 밖에 일을하고
사모님은 내부에 일을 타고 보살펴야 했었다.
남편의 직원들 '내부' 이웃을 살피고
회장들의 사모님이 모임을 만들면
그 아래 사모님들은 두 말하지 않고 오는 것이다.
저 밑에 부하직원의 부인이 아니고
회장님의 아래 사람들인데 회장사모님이 모이라고 한다면
잘 보이려고 얼런 오는 것이다.
이분들을 관리를 했어야 한다.
요즘 집에는 살기가 어떤지 확인도 하면
어떻게 사는지 훤이 알게된다.
예를들어 이번에 딸을 출산했는지!
"몇살 짜리는 위에 있죠!" 라고 하면서 기록을 하고
집안에 숟가락 몇개 있는 것까지 안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회장사모님이 바로 그런 일들을 했어야 한다.
>>>>>>>>>>>>>>>>>>>>>>>
그러면 부장들이 있습니다.
부장들의 수하들에게 부장사모님이
"우리 한번 모임을 했으면 좋겠다." 라고 하면
부장밑에 사모님들이 쏜살같이 모이는 것이다.
그래서 관장을 하고~
그러면 그밑에 과장은
과장밑에 사람들 "공장장은 공장장 아래 사람들
이런 식으로 내조를 하는 것들이 남편은 밖에 일을 하고 아내는 회사 안에 있을 내가 관장을 해서
회사식구들을 보살피고 있어야 한다.
바르게 한다 라고 하면, 이것이 내조이다.
그렇게 해서 명절이나 김장철, 보너스를 줄 때
선물을 때 이런 것을 남편이 주는 것이 아니다.
직장에서는 공식적으로 주는 것들이 있지만
집안에 선물을 보낼 때는 똑같이 보내면 안된다.
예전에 우리가 명절선물이라고
식용유 셋트를 선물로 많이 했는데
이것 자체가 잘못되고 있는 그림이었다.
즉 부인이 중간에 직원들의 부인들과 상담을 하고 어려움을 같이 풀고 이렇게 내조를 같이 했다면 이윗사람의 위상은 기가차게 올라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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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말해 선물을 보낼 때
그 아래 사람들의 가정에 필요한 것을 기록해뒀다가 맞춰서 선물을 해 준다면 옛사람의 기상은
여기서 더 올라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빚이 지는 것을 봤고
그래서 선물을 할 때 현찰을 보내 준다면
이것은 '충성심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다.
이런 내조만 했더라면
이 나라는 절대 노시분규라는 것이 일어나지 않고, 노동쟁이도 일어나지 않았다.
즉 부인이 집안을 근사하는 이러한 노력 때문에
절대 분쟁은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지적인 내조라고 하는 것이다.
그럴때 직원들의 부인이 존경심은 한이 없어지는 것이다.
우리집안을 위해서 노력하는 우리 부모님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회사가 잘못되는 일이 발생한다?
그런 일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기본원리를 공부하지 않았다.
사회 공부를~
이것을 가르치는 사람도 없었고..
이러한 특수한 공부, 리더들의 부인의 공부,
리더들의 자식의 공부를 바르게 안목을 연 선지식이 안나와 줬던 것이다.
대자연에는
인간이 살아 나가야 하는 법칙들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한다면 적이 되지 않고 원수가 만들어 지지 않고 살아 나가는데 절대로 감정이 생기지 않고
적이 되지 않고 원수가 만들어지지 않고
평화가 깨지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안하고
세상을 마음대로 살다보니 세상이 엉망이 된 것이다.
이것들을 지적인 내조라고 하는 것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내조를 햐줘야자만
세상에는 평화가 오는 것이다.
유튜브 천공 정법 592강 naya
https://youtu.be/F4gsfDM8LrE?si=omS7OjHI-QokbmCF
#지식인들의내조
#유튜브 #정법강의592 #천공스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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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shikkim · 1 month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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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자들의 인구 이야기(2512)
유엔에 따르면 2025년 전세계 237개 국가 중 최대 인구대국은 인도 (14억6000만명) 이며, 중국이 (14억2000만명)으로 그 뒤를 따른다,다음으로 미국이 3위 (3억5000만명), 러시아가 9위 (1억4000만명), 일본이 12위(1억2000만명), 독일이 19위 (8400만명) 그리고 프랑스가 23위(6700만명)을 차지한다.
이들 국가가 '인구대국'임에도 지도자들은 저출산 현상을 우려하며 직접 국민앞에 나서서 강한 의지를 표명하고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14억 인구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많은 인구의 압력과 인구 구조 변화로 인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고 인정했다. 그는 2022년 제20차 공산당 대회에서 “출산율 제고를 위한 정책 체계를 수립하고 적극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인구 고령화에 대응하여 국가 전략을 수립해야 합니다”라고 선언했다. 이어서 2023년 제13차 전국여성대회에서는 “새로운 결혼 및 출산 문화를 적극적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인구 감소로 국력이 크게 약화될 것을 우려해 2023년 세계 러시아 인민위원회에서 “8명 이상 자녀를 낳읍시다. 대가족이 표준입니다. 인구를 늘리는 것이 향후 수십 년간 우리 목표가 될 것입니다”라고 과거 대가족 전통을 해결책으로 선언했다.
출산율 회복에 성공한 국가로 알려진 프랑스에서도 2010년 이래 출산율이 계속 낮아지고 있다. 이에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2024년 기자회견을 통해 “인구 재무장”을 추진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우리 프랑스는 출산율 회복을 통해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프랑스에는 아기가 필요합니다”라고 말하면서 두 가지 개혁 즉 출산 휴가와 불임 퇴치를 약속했다
일본 아베 신조 전 총리는 2015년 개각 기자회견에서 “모든 국민이 결혼과 출산에 대한 희망을 실현하여 출산율을 1.8명으로 끌어올리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도 2023년 참의원 개원에서 “일본은 사회적 기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여부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출산 및 육아 정책은 지금 아니면 영원히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라고 선언했다.
이민자에 대한 배타성이 강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동안 출산율 증가를 원한다는 직접적인 ���언을 해왔다. 2025년 그는 체외수정 지원 및 행정명령에 대해 논의하면서 “미국은 더 많은 아기를 원합니다”라고 발표했다. 특히 그는 2025년 여성 역사의 달 행사에서 “수정 대통령”으로 불리더라도 개의치 않겠다고 밝혔다. 이에 반해 독일은 저출산의 해법을 이민에서 찾고자 했다. 올라프 숄츠 총리는 “독일은 이민 국가입니다. … 우리 자신을 이해할 때가 왔습니다. 따라서 독일 시민이 되는 것을 더 쉽게 만들 때가 왔습니다”라며 저출산 대책으로 혈통주의의 벽을 허물고 이민 국가를 선언했다.
이처럼 각국 지도자들은 저출산 극복을 국가 생존의 핵심 의제로 규정하고, 직접 나서서 국민에게 명확한 비전과 의지를 전달하는 공통된 양상을 보인다.
우리나라 출산율은 2024년 0.75명으로 세계 최저 수준이다. 우리나라 인구(유엔 추계)는 2025년 전 세계 국가 중 29위(5200만명)에서 2050년 47위(4514만명), 2075년 63위(3198만명), 2100년 72위(2185만명)로 빠르게 ‘인구 소국’으로 전락할 것이다. 아울러 노인 인구 비율이 2045년 36.9%로 이때부터 세계 최고령 국가가 될 전망이다. 이러한 인구 변화는 ‘국가 재앙적’ 수준이다.
우리나라 대통령도 직접 국민 앞에 나서서 인구 위기에 대해 자신의 의지를 선언해야 한다. 대통령의 의지 표명은 사회 문화가 변화해야 할 방향을 제시할 수 있고, 사회 시스템에 대한 개혁 의지를 천명할 수 있으며, 획기적인 정책 기조의 전환을 선언할 수도 있다. 이러한 지도자의 강력한 메시지는 행정부 전체의 적극적인 정책 실행 동력으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국민이 정책에 공감하고 참여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중요한 기저가 될 것이다. 세계 각국 지도자들의 절박한 목소리가 이러한 정치적 리더십의 중요성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7/9/25/hwanshikkim.yumblr.com/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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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kwho ·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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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서 만난 뜻밖의 모유 이야기: 공무원의 특별한 경험 (An Unexpected Breastfeeding Encounter on the Street: A Civil Servant's Unique Experience)
길거리에서 만난 뜻밖의 모유 이야기: 공무원의 특별한 경험 (An Unexpected Breastfeeding Encounter on the Street: A Civil Servant’s Unique Exper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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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ic121sun ·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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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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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kenlee-blog · 11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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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쓰지 않았단 주장을 언뜻 읽은 기억은 있지만 전 국민이 주입식 교육으로 워낙 강력하게 '가스라이팅' 당한 분야라 나 역시 선뜻 받아들이질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 책이 눈에 띄길래. 핵심 주장은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듯.
첫째, 한글 소설 등장은 19세기 이후라 도무지 16세기 사람 허균이 저자일 순 없다.
둘째, 한글 소설은 애당초 저자가 알려진 사례가 없다. 이유는 "내가 썼다"고 고백해 봤자 돈이 되긴커녕 잡글이나 쓰는 놈이라고 욕먹는 사회 분위기.
셋째, 세책집(=조선시대 도서대여점) 중심으로 인쇄 아닌 필사가 기본이라 이야기 첨삭이 가능해 여러 버전에 떠돌았다.
넷째가 가장 중요해 보이는데, 조선 중기 이식이란 사람이 쓴 '택당집'에 제목만 전해오는 '홍길동전'이 있긴 하나, 동명이책. 이걸 일제강점기 때 다카하시 도루라는 일본 학자가 "그게 그거"라며 무근거로 우기는 글을 썼고, 그 제자 김태준이란 분이 '조선소설사'에 인용하며 기정사실화 됐다고.
홍길동전이 조선 시대 때 금서였던 썰도 허균이 반역죄로 처형됐단 거에서 파생한 쌩구라. 조선에서 금서로 찍히려면 양명학이나 도가 사상처럼 주자학에 반하는 사상이어야지, 지배층이 깔보던 소설 장르를 그 정도 심각하게 인식했단 주장 자체가 넌센스다. 뭣보다 홍길동전을 직접 읽어 본 뒤에 확신했다.
여기까지가 책의 반이고 후반부엔 저자가 여러 판본을 모아 재조립한 '홍길동전 풀버전'이 있었다. 수십 년 만에 다시 읽었는데, 새삼 이렇게 유치할 수가.
비범한 인간으로 태어나 세상의 천대를 받고 자랐음에도 삼강오륜의 틀 안에 갇혀 왕을 향한 충성심이 절대적이란 점.
입신양명 욕망이 너무 세서 "대장부로 태어나 벼슬을 얻지 못해 이름을 남기지 못하느니 도적이 되겠다"는 동기도 한심하고, 나아가 분신술로 신출귀몰하며 나라를 어지럽히던 중 왕이 '명예 병조판서'를 하사하자 입빠이 감동. 헐… 제천대성 손오공이냐.
내가 어릴 때 읽은 책엔 홍길동이 무리를 이끌고 율도국으로 떠나는 걸로 얘기가 끝났었는데, 이 책에선 율도국 정벌 얘기가 자세히 나옴. 마침내 율도국 왕이 됐음에도 (자신을 천대했던) 조선을 향한 일편단심은 변함이 없어 자의로 사대하는 거도 황당. 결론적으로 이런 게 금서일 리가 있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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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etseat ·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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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베트남 남부 해방일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Chúc mừng kỷ niệm 50 năm Giải phóng miền Nam, thống nhất đất nướ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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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50주년을 맞은 베트남 남부 해방일을 현지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많은 생각이 든다. 평소보다 더욱 화려하고 거창하게 해방일 행사를 준비하고 또 치르고 있는 베트남을 보니 무엇보다도 전쟁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거창한 평화운동가도, 그럴만한 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전쟁 같은 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에는 조금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의 종식'을 선언하는 베트남의 남부해방일이란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잘 이해되는 동시에, 결국 외부 세력으로부터 해방된 한반도의 근대사가 얼마나 비극적인지도 떠올리게 된다. 한국전쟁을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말로 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는 우리로서는 베트남이 지닌 '해방'의 의미에 결코 닿을 수가 없다.
나는 군악대에 복무했다. 태생이 딴따라 출신이기도 한 탓이겠지만 체질적으로 총칼을 든 채로 병역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 와닿지도 않았기에 차라리 M16보다는 금관악기를 들고 있는 편이 훨씬 나았다. (지금도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비전투부대는 K-2도 아니고 M16을 보급해줬다) 물론 군악대 생활이라고 해서 편했던 것은 아니다. 너스레 떨며 '더울 땐 에어컨 나오고 추울 땐 히터 틀어주는 합주실에서 악기나 불었다'라고는 했지만, 애초에 20대 젊은이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계급으로 나눠둔 것부터가 얼마나 고약한가. 약 2년의 시간 동안 정말로 나는 나라를 지킨 것인지, 음악 학교를 다닌 건지, 아니면 한국 사회 특유의 부조리함을 배운 건지 알 수는 없지만 - 남부해방일을 맞이하여 시가행진을 하고 마칭 퍼레이드를 펼치는 베트남 군인들을 보고 있자니 그 시절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전투력을 과시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악기를 불면서 '남의 부대'를 뒷바라질 하는 내내 생각했던 일이다. 왜 인간은 누가 더 강한지 겨뤄야만 하는 걸까. 왜 자신이 옳다는 것을 강요하기 위해서 자신이 더 센 존재라는 것을 보여줘야하는 걸까. 한국 전쟁 뿐 아니라 베트남 전쟁 역시 결국 외세에 의해서 시작된 비극이었고,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물리쳐 낸 베트남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큰 자부심이이고 민족의 자긍심이겠지만, 한국에서 나고 자라 NL의 옷을 껴입고 시큰둥하게 군대 생활을 보낸 나는 계속 고민할 수 밖에 없다. 왜 한국의 역사는 여기에 답해줄 수 없는가, 어째서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는가, 하물며 내란수괴의 친위 쿠테타에 이용당할 수 밖에 없었던 젊은이들은 무엇을 위해서 전투복을 입어야만 하는가. 정말로 한국 사회에서 군대란 무엇인가. 아무도 그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려주지 못한 까닭에, 베트남 남부해방일 50주년 행사를 보고 있는 나는 더욱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이처럼 베트남이 멀게 느껴지는 적은 없었다.
얼마 전 동료와 한국의 통일 문제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 나눈 적이 있다. 90년대만 해도 그 물꼬가 트였지만 지금의 한국 상황을 보았을 때 - 그러니까 이건 우리의 내부 문제다 - 오히려 원점 이전으로 돌아가버린 느낌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외세에 의해서 또 이 문제가 들춰지고 또 들썩거릴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고 하소연했다. 통일 꼭 필요한가, 누가 통일을 원하는가, 통일이 우리에게 어떤 이익이 되는가, 각개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을 찾는 사이에 결국 문제는 또 다시 다른 위치에서 깃발을 세워지고 있는 지금. 나와 나의 주변에서 너무 괴리된 문제에 함몰되어서 우리 사회와 그 역사에 등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또 다른 고민에 빠져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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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king · 4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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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된 세계 속 인간성의 메아리: 남킹의 "메이드 인 아메리카"에서 사랑과 상실을 탐구하다
남킹의 "메이드 인 아메리카"는 단순한 미래 로맨스가 아니다. 이는 파괴의 여파와 만연한 기술의 침입에 고심하는 세상에서 인간성의 본질에 대한 가슴 아픈 성찰이다. 지나간 시대의 잔재에 매달리는 향수병 교사 제임스의 시선을 통해 소설은 불평등으로 인해 분열된 사회의 오싹한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그곳에서 가장 근본적인 인간 관계, 즉 사랑조차도 상품화되어 이윤을 위해 제조된다.
공감하면서도 비극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인 제임스는 점점 더 부족해지는 세상에서 진정한 관계에 대한 갈망을 구현한다. 무너져가는 아파트 단지에 살면서 파괴된 과거의 메아리에 둘러싸인 그는 인간의 안녕보다 기술 발전을 우선시하는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대표한다. 영화적 이상을 모델로 한 중고 섹스 로봇에 그의 평생 저축을 투자하기로 한 그의 결정은 그의 외로움의 깊이와 그의 삶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기꺼이 감수하려는 정도를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그러나 "메이드 인 아메리카"는 단순한 외로움과 짝사랑에 대한 이야기 그 이상이다. 제임스의 욕망을 충족시키도록 설계된 합성 존재인 로봇 여자친구의 등장은 진정으로 사랑과 관계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날카롭게 부각시킨다. 프로그래밍되고 제조될 때 진정한 애정이 가능할까? 인공적인 친밀함이 인간 관계의 복잡성과 취약성을 진정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소설은 현실과 시뮬레이션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고 독자들이 사랑, 친밀함, 인간성의 정의에 대한 자신의 선입견에 맞서도록 강요하면서 이러한 질문들을 훌륭하게 탐구한다.
더욱이 소설은 사회적 불평등과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된 착취에 대한 강력한 논평 역할을 한다. 사랑이 부유한 엘리트만이 접근할 수 있는 상품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 디스토피아적 미래에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의 점점 더 넓어지는 간격을 강조한다. 이윤을 위해 제조되고 특정 인구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설계된 섹스 로봇의 창조와 유통은 탐욕과 견제되지 않은 권력에 의해 주도될 때 기술의 인간성을 파괴할 잠재력을 드러낸다.
궁극적으로 "메이드 인 아메리카"는 기술 발전과 사회 붕괴에 직면한 인간 조건에 대한 잊을 수 없는 탐구이다. 소설은 미묘한 캐릭터, 생각을 자극하는 주제, 제조된 미래에 대한 오싹한 묘사를 통해 독자들이 진보에 집착하는 사회의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고 기술적 완벽을 추구하는 데 있어 인간 관계를 희생하는 진정한 대가를 고려하도록 도전한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후에도 오랫동안 남아, 기계의 차갑고 냉정한 논리에 의해 점점 더 형성되는 세상에서 우리 자신의 인간성의 메아리에 대해 반성하도록 촉구하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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