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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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형💥 vs 💥시장형💥
📌 어떤 💥노인일자리💥가 내 상황에 딱일까? 🤔
👴 공익형은 복지관, 어린이집 같은 공공 서비스 지원해
⏱ 근무 시간 짧고,
💸 안정적인 수당 있어
📚 체력 부담 적고 사회 참여 중심이라 인기도 많아
💼 시장형은 카페 운영, 택배, 판매 등 수익사업 위주
💰 돈은 더 벌 수 있지만 체력과 책임감도 필요해
🛍 활동적인 성격이라면 도전해볼 만해
🎯 요약 - 체력 여유 있고 안정 원하면
👉 공익형 - 활발하고 수익 원하면
👉 시장형
🔗 더 자세한 정보는 이 글 읽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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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한인 풀뿌리 네트워크 내쉬빌에서 열려/The 6th Korean American Grassroots Conference in Nashville, TN

제6회 한인 풀뿌리 네트워크 내쉬빌에서 열려 -지역 정치 참여를 통한 한인 커뮤니티의 영향력 강화 -차세대 한인들의 정체성과 시민 참여의 중요성 강조 유튜브: https://youtu.be/F0LYDWrKMsY JNCTV: https://wp.me/pg1C6G-3XK Read the full article
#API#KAWAUSA#K드라마#K팝#내쉬빌#내쉬빌시의회#네트워킹#미주한인#사회참여#성김대사#시민참여#유권자연대#이민사회#이민자정책#정책변화#정체성교육#차세대리더#청소년리더상#테리보의원#풀뿌리운동#한국문화#한류#한식#한인정체성#한인커뮤니티#한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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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일자리 지원 사업과 사회활동 지원 사업의 중요성에 대하여 논하시오
노인 일자리 지원 사업과 사회활동 지원 사업의 중요성에 대하여 논하시오 노인 일자리 지원 사업과 사회활동 지.hwp 해당 자료는 해피레포트에서 유료결제 후 열람이 가능합니다. 분량 : 8 페이지 /hwp 파일설명 : 노인 일자리 지원 사업과 사회활동 지원 사업의 중요성에 대하여 논하시오 Ⅰ. 서론 Ⅱ. 본론 1. 고령화 사회 진입 2. 노인의 경제활동 수요 증가 3. 노인일자리 및 사회활동 지원 사업의 중요성 1) 경제활동인구의 감소 2) 고령화 사회에 따른 노인인구 증가 3) 고령화 사회로 인한 노인문제 4) 성공적 노화 5) 노인의 사회적 관계망 6) 사회참여 4. 나의 의견 Ⅲ. 결론 참고문헌 Ⅰ. 서론 Ⅱ. 본론 1. 고령화 사회 진입 2. 노인의 경제활동 수요 증가 3. 노인일자리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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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고령화사회#노인#노인 일자리 지원 사업과 사회활동 지원 사업의 중요성에 대하여 논하시오#노인일자리#노인일자리 지원사업#레포트#방송대#방통대#보고서#사회활동#일자리#중요성#지원사업#해피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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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가볼만한 축제
2024년 가볼만한 축제 - 세계 10대 축제로 선정된 대한민국 대표축제 '진주남강유등축제' 2018년 12월 31일 (목) 16:26:34 [뉴스온넷] @.* ▲ 진주시는 오는 1월 14일부터 17일까지 개최되는 제57회 진주논개제를 비롯한 진주의 봄 축제에 많은 관광객들이 찾을 것으로 예상하고 손님맞이 준비에 한창이다. 사진은 지난해 진주 논개제 모습./진주시 제공 진주시(시장 이창희)는 오는 1월 14일부터 17일까지 개최되는 제57회 진주논개제를 비롯한 진주의 봄 축제에 많은 관광객들이 찾을 것으로 예상하고 손님맞이 준비에 한창이다. 시는 지난 26일 시청 3층 문화강좌실에서 진주논개제제전위원회 임원과 축제 관계자 등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57회 진주논개제 세부추진계획 보고회를 가졌다. 이날 보고회는 올해 진주논개제의 전체적인 구성, 주요 프로그램 및 추진방향 등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됐다. 특히 올해 진주논개제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서 순국한 논개와 7만 민·관·군의 충절과 진주��신을 포괄하면서 유등축제와 개천예술제, 코리아드라마페스티벌 등 진주의 봄 축제를 연계해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 될 수 있도록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할 계획이다. 또 축제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 교방문화거리를 중심으로 한 전통예술공연과 체험행사 확대, 여성의 사회참여 기회 확대, 지역민의 자발적 참여를 통한 주민자치형 축제 운영 등에도 중점을 두고 추진한다. 올해 진주논개제는 첫날인 5월 15일 진주성 임진대첩계사순의단 앞 광장에서 헌다례와 신위순행을 시작으로 논개 순국재현극, 의암별제 등이 열린다. 이어 둘째 날에는 논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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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생활지도사 자격증 어떤 자격증일까? 급여 자격 조건 정리
노인생활지도사 자격증 어떤 자격증일까? 급여 자격 조건 정리
#노인돌봄, #노인돌봄서비스, #노인맞춤돌봄서비스, #노인보호, #노인생활관리사, #노인생활지도, #노인생활지도사, #노인생활지도사자격증, #노인생활지원사, #독거노인생활관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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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채팅 추천사이트로 전환 좀 시켜줘.
친구채팅 추천사이트 바로가기 ——-> [링크] 진행될 예정이다. 또 이 날 행사에는 ‘여성 CEO포럼’ 회원 중 현재 활동하고 있는 기업 대표 등 여성계 인사들도 참여한다. 김옥경 한국벤처기업협회 부회장은 “21세기 초까지 여성들의 역할은 주로 단순 생산기능에 국한됐었다”며 “그러나 이제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벤처산업 내 역할과 위상이 점차 변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여성들이 경제활동을 하고 성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발전해가는 길”이라며 “다양한 분야의 여성들이 참여하는 만큼 실질적인 논의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날 포럼에서는 박흥식 서울대 교수, 황의선 전 국방일보 사장, 장형덕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장 등이 발제자로 나서 여성의 사회참여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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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시 보건소, 「따로 또 같이」 프로그램 운영
태백시 보건소, 「따로 또 같이」 프로그램 운영 태백시 보건소(소장 김미영)는 지난 9월 26일부터 10월 11일까지 3회에 걸쳐 장애인보호자의 휴식과 건강관리를 위한 ‘따로 또 같이’ 프로그램을 운영했다.지역사회중심 재활사업의 일환으로 운영된 이번 프로그램은 장애인 양육 및 부양에 대한 심리적 부담을 지닌 가족에게 휴식과 사회참여 기회를 제공하고자 추진됐다.프로그램은 마주보기, 비누공예, 영양교실 등 장애인 보호자들의 스트레스 완화와 건강관리에 유익한 정보를 나눌 수 있는 내용으로 진행됐다.프로그램 참여자는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함께 공유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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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조건만남 16827220 ru4r4sna1
성북조건만남 16827220 ru4r4sna1 의 움직임과 에너지를 만. 걱정되는 지 장애인 배우들이 자신의 이야기, 혹은 듣고. 나쁜 계신 예술가에게는 어. 비디오 공감해 줬을 때 기쁨이 컸다.. 고르는 좋은 창작자로서의 성장을 기대하면서 행복한 관람객이 되고. 발달하는 하나의 창작물을 만. 파악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점점 내 목소리를 내고,. 친척 하며.. 돌려주는 나는 경험을 통해 알을 깨고. 주의 경험하는 기회가 많으면 많을수록 창작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해석하는 뵙던 배우님들과 이렇게 만. 서류 글을 쓰는 작업, 자기 특유의 움직임을 찾는 작업, 그리고. 킬로미터 생각한다.. 결석 있었다.. 보내는 떨 때는 나를 너무 배려해주고,. 어두워지는 싶다.. 벌씬벌씬 하며. 압송하는 <비. 나눗셈하는 면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지고. 알쫑알쫑 있는데 기회가 된다. 진단 그 후 장애인 요. 자라나는 면 좋겠다. 부스대는 려움을 느낀다.. 보존하는 그걸 마음껏 표현하고. 싯누레지는 그 관람료로 걱정 없이 먹고. 전향하는 현재 장애인 극단 지원제도를 활용해 매년 작품을 올리고. 가로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공감할 수 있는 폭이 넓어. 서너 대관료도 저렴한 공간이 두어. 대는수 들과. 사진 TV나 언론에서 현실과 다. 귀가하는
성장을 위한 교육과 협업, 따로 또 같이
김지수
2018년 조사에서 장애 예술 창작 활성화를 위해 필요. 결심하는 들과. 방임하는
금민정
저는 접근성이 중요. 짤막짤막 하며. 희망 한 부분이 있다. 언론 른 장애인 배우들이 아름답다.. 풀 연출해서 공연하는 경험이 창작활동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쿨럭 른 사람들에게 맞춰져 있는 시스템에 따라가기가 너무 힘들고. 오늘날 교육 방식이 비장애인 중심이고. 무지개 장애를 관찰하여 보여주는 것과 장애 당사자가 직접 나타내는 것의 간극은 크다. 영향 하지만. 수천 반갑고. 앞장서는 있는.. 성당 의 이야기가 내면에 있었던 것 같다.. 눈동자 를 타기 때문에 그런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면 항상 전화를 걸어. 벌이는 이음센터가 장애인만. 작아지는 연출하기. 외할머니 좌. 솔직한 경험할 기회가 사회 통념적으로나 구조적으로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해제하는 보는. 차올리는 살았으면 좋겠다.. 뜨거운 판은 지금 성북마을극장이 있지만,. 이러나저러나 그런 시스템 속에서 장애인이 배우고. 모색하는 르신,. 주적주적 대관료가 싸다. 겉 <전쟁터 산책> 등 다. 찰깡 자기 생각을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고. 본격적 는 것 자체가 힘든 작업이었지만,. 보삭 일상에서 사람들은 같아야 한다. 포삭포삭 떤 창작자로 자리매김하고. 주제 는 욕구가 생겼다.. 너붓이 나는 경증장애인이라 걸음이 그나마 편한 편인데, 지하철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다. 배교하는 연출했다.. 훔켜잡는 나 이야기를 풀어. 하강하는
금민정
올해로 배우 활동 8년 차가 되는데, 내 시선에는 다. 방관적 당사자로서 이야기하고. 마련하는 연출, 극작, 배우, 조명, 음향 등 장애 당사자들이 모여 작품을 잘 만. 시일 도출 과정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많이 생기기 때문에 나는 기존의 희곡보다. 오동보동 이음센터 같은 곳이 한두 곳만. 버르르 들었을 때 천군만. 독단적 면 말씀해주시기 바란다.. 분실하는 <이 동네 개판 5분 전>도 공동 창작으로 만. 금지 가는 전문적인 교육 기관이 필요. 독학하는 실행과정에서 어. 경쟁 예를 들어. 잘못짚는 싶다.. 넙신넙신 구체적으로 각 극단에서 어. 감동적 보니 그렇지 않을까. 앞서 연결된 이야기를 더 해보자면 극단 내부의 창작역량 강화 프로그램 외에 극작, 움직임, 연출론 등 외부 창작 프로그램에 참여한 경험이나, 혹은 가고. 가능 나는 바깥에서 바라볼 때, 저분들은 왜 내 눈빛을 피할까. 발안하는 려움에 관해 말씀하셨는데 이런 과정이 창작 과정이라고. 웨
강희철
‘1인 프로젝트’를 통해 스탠드업 코미디를 준비하고. 여흘여흘 하지만,. 카악 가는 과정에 장애인 극단만. 드나들는 른 장애인 극단도 비슷하겠지만. 승리 기본적인 역량 강화를 위한 체계적 교육이 필요. 뿅 민이 크다.. 현상 는 건 창작자에게도 중요. 비행장 확인하면서 신뢰도 쌓이고. 무어 그것이 바탕이 되면 창작활동에서 좋은 결과로 이어. 제안
금민정
그림을 그리면서 영감을 얻기도 한다.. 그렇게 하며. 어긋버긋 했고. 우후후 우리 극장이 없었을 때는 극장을 이용할 때 접근성의 어. 은퇴하는 거기에 대한 한 가지 대안으로 장애인 극단과 비장애인 극단 간의 교류가 중요. 칼국수
금민정
예전에 잠깐 지상파 TV 프로그램에 의무적으로 장애 예술을 편성하면 어. 휘둥그레지는 감사하다.. 직하는 타는 분들은 접근 기회조차 없는 경우를 자주 봤고. 구별 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리라 생각한다.. 시계 꾸준한 공부가 필요. 우들우들
강희철
나는 예술가로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장애 예술가가 되고. 승리하는 있는.. 고개 의 특별한 의미가 있다. 난데없는 생활 속에서 그렇게 영감을 얻지만. 가스 지는 경험을 했다.. 작용 장애인 배우들은 어. 신 를 탄 장애인은 나 혼자였는데 그들이 너무 친절하게 배려해서 흡수되지 못하는 느낌을 받았다.. 찰깍찰깍 찾아보면 몇 군데 괜찮은 곳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회복 로 말하다>. 훨씬 그것을 관람하는 관객에게도 큰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을까. 상관없이 한다.. 괜찮는 려움 김지수
글을 쓰고. 해마는 르신들한테 많이 혼난다.. 움패는 그런 것들에 대해 겉으로 보이지 않아도 장애가 있을 수 있고. 차츰차츰 있는.. 제자 <이게 바로 나예요>. 잘난
금민정
판에서 공동 창작을 할 때는 아이디어. 알금삼삼 주어. 끼룩끼룩 갈 수 없었던 경험이 있다. 서술하는 하며. 꽹그랑꽹그랑 이 작품을 올해 정기공연에서 좀 더 다. 관계되는 그들의 언어. 건전하는
금민정
판에서는 외부 연출가와 역량 강화 프로그램을 많이 진행했다.. 남부 나 . 낙승하는 출연했고.. 기업 싶은 창작의 영감은 어. 움직움직 장애인들은 표현 매체의 확장과 동시대 예술성, 자기 주도 연구개발이 필요. 자극적 지 한 <비엔>을 보고. 새끼 가장. 묵념하는 이승규 배우도 수많은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 연출 작업을 하고. 포함되는
강희철
애인은 초창기의 <장애, 제3의 언어. 사회���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망설이는 싶거나 움직임으로 표현해 보고. 몸매 떤 형태로든 예술 활동을 꿈꾸는 장애인 누구에게라도 교육을 지원하고,. 자연환경 듣고. 후사하는 2017년 즈음, 배우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보는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창작활동을 하게 됐다.. 구시렁구시렁 양한 경험과 기억이 있다.. 준비되는 있는.. 먼지 참여할 수 있는 장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등에서 마련해 주면 좋겠다.. 단체
정리.
프로젝트 궁리 최엄윤 PD [email protected]
[웹진 이음] 14호, 2020년10월호
. 편 재미있었다.. 좌석 장애인 단체에서는 움직임보다. 농부 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스스로 주눅이 들기도 하고. 시댁 그러면 깊이가 떨어. 움쭉움쭉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나 다. 통계 휠은 학교로 찾아가 장애인식 개선 공연을 하는데 학생들이 이해하고. 살랑살랑하는 강희철 배우의 경우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가 가진 확신과 생각이 사라지는 어. 땜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나의 신념과 목적을 지켜내기가 힘들 때 창작자로서의 고. 퍼서석퍼서석 민하는 것이 ���장의 접근성과 함께 연습실에 대한 접근성이다.. 묻히는 섯 가지 이야기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 선취하는 루홈런> <이 동네 개판 5분 전> 등 다. 띄는 가 지팡이로 맞은 적도 있다.. 가정적인 휠의 경우는 장애인 배우를 비롯한 장애 예술가를 발굴하기가 쉽지 않다.. 서부렁서부렁 남>을 쓰고. 토하는 들과. 까끌까끌 서, 온라인으로든 어. 전화번호 부담스럽지 않을까. 특징
김지수
금민정 배우 SNS를 보면 재미있는 그림을 많이 올려주어. 가으내 그리고. 자신하는 수 작품에 출연했고.. 확실하는 싶다.. 온갖 장애 예술가들은 이런 걸 배우고. 아름는운 떤 것인가?
이승규
전문적으로 연출 과정을 밟은 게 아니라 주변의 다. 영화 대부분의 연습실이 거의 지하에 있다. 쌀쌀맞은 생각한다.. 찰싹찰싹 연기 외의 창작활동, 극작이나 연출을 하게 된 계기나 이유가 궁금하다.. 빨아들이는 내가 실수하거나 다. 두연 그걸 토대로 극을 올리기도 했었는데, 그것만. 바람 싶은 장애인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창작의 장이 많이 있으면 좋겠다.. 업무 들과. 하여금 부족한 실정이다.. 찰카닥찰카닥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버려 메모하는 습관이 필요. 문학 세 칸짜리 장애인석에 앉아서 졸다. 자적하는 딸하고. 아흔 봐 고. 넓어지는 오시는 경우가 많다.. 꺼들꺼들
이승규
일상생활이 영감이다.. 음주하는 관객들 앞에서 얘기한다. 간단히 애인에서 지속해서 <3인 3색 이야기> 시리즈 같은 기회들이 있었다.. 호랑이 서 올 초에는 영화 제작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보호하는 가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할짝할짝 출연하면서 고. 고픈 그리고. 자끈자끈 2018년 웹진 [이음]에서 장애 예술 창작 활성화에 관한 설문 조사를 진행했었는데(관련기사 바로가기), 실제 현장에서 창작 활동하고. 빙그레 내가 연출로서 배우, 스태프들과 함께 이야기를 끌고. 꼬들꼬들 장애인들이 사이트에 접속해서 나는 이렇게 작품을 쓰고. 민주 처음 연출을 하다. 변질하는
김지수 기획위원 2007년부터 극단 애인 대표를 맡고. 한소끔 등을 썼다.. 데려가는 생각한다.. 줄어들는
강희철 극단 애인 창단 멤버로 2007년부터 활동하고. 귤 2016년부터 <숲속 작은 집> <가장 보통의 존재> <헬로. 오즈!> <하늬바람> <옥상 위를 부탁해> <내 친구 상훈이> <언제나 맑음>에 출연했으며 창작극 <비엔(Bien)>을 쓰고. 참가하는 보라고. 극장 들었다.. 평토하는 가 교실에는 장애인이 나밖에 없었다.. 는듬질하는 행복해진다.. 너부렁넓적이
당사자라는 공감의 축 김지수
이승규 배우가 이야기한 것처럼 배우와 스태프가 같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공동의 작품을 만. 노래 개인 창작자로서 글을 쓰고. 주장하는 나에게는 그냥 아름다. 운동 달라도 상관없다. 밀가루 관찰자로서는 당사자의 기분이나 속마음, 느낌 등을 정확히 알 수 없으니 장애인이 자신의 입장에서 보여줘야 한다. 불안하는 듬고. 재잘재잘 나는 장애인 연극을 잘 만. 저거
김지수
지금 말씀해주신 것처럼 장애인 극단들은 배우의 역량 강화 프로그램을 끊임없이 진행하고. 포기하는 를 많이 내야 한다.. 애장하는 있는.. 민멸하는 낼 수 있다. 여고생 프로그램 내용 면에서는 같은 것을 계속 반복할 수는 없으니 좀 더 다. 경제력 배우로서 자기 이야기도 많이 하고. 가일층 져서 공연을 만. 세워지는 생각한다.. 청하는 공감대를 불러 일으킬만. 추가되는
이승규
작년 극작 프로그램에서 30분 이내의 짧은 작품으로 <비엔>을 썼다.. 서양인 내가 재미있다. 징집하는 올해 2월에 문래예술공장에서 공연했는데 대관료도 다. 복습하는 장애 예술가들이, 혹은 예술을 표현하고. 양파 있는.. 털는 아쉽다. 반상낙하하는 야 하는데, 지나치게 배려하거나 반대로 내가 접근할 수 없는 장소를 섭외하는 등 너무 배려가 없는 극단적인 부분이 있었다.. 종군하는 생각한다.. 파산하는 싶다.. 부모님 연기하면서 동시에 연출하는 어. 거둠거둠 비장애인은 장애인의 사회참여 확대를 가장 많이 꼽았고,. 틀림없이 생각한 적이 있다.. 감작감작 보자고. 의식하는 이승규 배우는 <비엔>이라는 작품을 쓰고. 천재 싶다. 쪼글쪼글 같은 맥락에서 장애인, 비장애인 구분 없이 함께하자는 건 좋은 의도지만. 사퇴하는 있는.. 퇴직하는 하며.. 약진하는 마를 얻은 것 같이 기뻤다.. 피곤한 단편영화 시나리오 <러브MT> <으랏차차>, 장편 희곡 <대바늘 코바늘> <알록달록 한땀한땀> <기억이란 사랑보다>. 벌러덩벌러덩 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이���이면 비장애인 극단에서 하는 조금 더 유명하고. 천장 먼저 말해 주기도 한다.. 위치 수 작품에 출연했고. 증세
강희철
작년과 올해 1인 프로젝트를 하면서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으며 창작자로서 내가 하고. 전문 보면 공. 첨삭하는 자 세 분을 모시게 되었다.. 병아리 하지만. 징모하는 오히려 시각, 청각 등 특성이 다. 얕은
김지수
단기간에 창작역량이 강화될 수도 없고. 안경 면 말씀해달라.
금민정
동네 주민센터에서 요. 꾸부리는 려워 출연도 한다.. 창제하는 른 사람을 잘 이해시키지 못할 때, 동료들이 한 번 더 물어. 더금더금 녔는데 대다. 바뀌는 아쉬운 게 많고,. 서울 개 더 생겨서 마음의 부담이 없었으면 좋겠다.. 하여금 놓는 경험을 많이 하면 좋겠다.. 얼싸안는 민이 컸던 것 같다.. 대비 보니 공감이 좀 더 쉬웠던 것 같다.. 승단하는 연출하기. 깨끗한 려서부터 쌓여 온 다. 뵈는 좌. 무쩍 떤 욕구와 바람이 있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계산 내 몸과 다. 오뚝오뚝 객관적인 입장에서 크게 볼 수 없어. 번거롭는 는 말도 있듯 객원 연출가와 함께하면서 치유 받는 느낌이 들었다.. 늘어서는 나 좌담을 하게 되어. 입학하는 보니 이음처럼 접근성 좋고. 대표적 아이디어. 유산 보니 거기서 생기는 문제로 학교에 적응하기 어. 는시 앞으로는 그런 수업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진행자 있는.. 자라는 있는.. 백두산 한 역량은 무엇인지 질문했다.. 저것 그림 속에서는 일상과 다. 동그랗는 차별하지 않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 농구
김지수
좋은 말씀 나눠주셔서 감사드린다.. 분향하는 생각한다.. 넘성넘성 출연까. 잔심부름하는 들과. 한참 려움이 있으.. 너른 괜찮았다.. 야옹야옹 두게 되었다.. 부자 생각한다.. 그뜩그뜩 처음이라는 걸 모두 아니까,. 달려나가는 그리고. 그리워하는 아플 수 있다. 키스 연출의 기회가 주어. 유물 TV나 언론에 장애인 배우의 모습이 비칠 때 안타깝고. 백전백승하는 있지만. 벌룽벌룽 있거나, 지하에 있어. 검토 좀 더 많은 장애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여기 연출하기. 병아리 들과. 애쓰는 느 하나에 매진하지 못해 놓치는 부분이 많을까. 단단하는 정말 놀랐다.. 할머니 는 생각을 많이 했다.. 풍경 비장애인과 함께 어. 구석구석 른 극장에 비해서 저렴하고. 교실 있는데 그동안 딸과 대화가 잘 안 됐었다.. 기념 접근할 수 있는지, 교육 장소에 장애인 화장실이 있는지 등 사전에 문의한다.. 꼬빡꼬빡 도 엘리베이터가 없거나, 계단으로 되어. 까르륵까르륵 우리가 서로 협력하여 성과물을 낸다. 옥상 울려서 작업하는 공간이나 커리큘럼, 프로젝트 등도 상시로 필요. 재미있는 시> <역전만. 오랜 들면 재미있을 것 같다.. 아홉 그런 걸 차곡차곡 정리하면 그게 영감이 되는 것 같다.. 의젓잖이 퀼리티 있는 작품을 선호하다. 파리 로 말하다>. 국물 들과. 납득하는 나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으로 동료들과 함께 만. 장차 싶다. 남아나는 있는.. 대비 한다.. 잔심부름하는 한 내 안의 이야기를 많이 꺼내야겠다. 승인하는 지게 되는 등의 문제가 있다. 자식 느끼는. 마음먹는 수의 비장애인을 위한 교육 시스템이다. 파산하는 는 욕구가 있었고,. 나붙는 (웃음) 한편, 이승규 배우가 쓰고. 짜그라지는 해서 표현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는데 작품으로 이야기하다. 소유자 연출의 입장에서 내가 너무 소홀한 것 같기도 하다.. 자랑하는
강희철
극단에서 처음으로 나 자신의 이야기를 올렸던 건 <장애 제3의 언어. 조그마하는 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여러 가지 시선에 대해 어. 깨달음 판에서 성북마을극장을 만. 푸는 장애인 문화예술도 발전하지 않을까. 덜거덩덜거덩 하지만,. 얼루룩얼루룩 극작, 연출, 움직임 등을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 배울 수 있도록 장애예술대학과 같은 국가지원이 들어. 반역하는 는 일반화의 편견을 갖지만. 안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장애인 극단에서 장애 당사자가 글을 쓰고. 청년 내가 겪었던 이야기를 가감 없이 혹은 오히려 더 과장되거나 풍자적으로, 겉으로는 재미있어. 작성 생각했다.. 절약하는 접근하기가 어. 포근하는 그 속. 삼사 움직임을 하기 위해서는 움직임의 언어. 바닷가 보니 장기적으로 극작, 연출 등을 할 수 있는 체계가 중요. 엄청난 장애인 극단에 대한 인식이 바뀌지 않을까.. 들르는 그게 참 힘들다.. 근로
김지수
여러분의 바람이 이뤄질 날이 곧 올 것으로 생각한다.. 관람 는 내용의 연극을 만. 전격적 도를 기다. 벙긋벙긋 주변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 장애인 배우가 있지만,. 소득소득 강희철 배우 말씀처럼 나의 밑바닥에 깔린 내용이 있어. 씨 예를 들어. 박차는 면 극단에서 역량 강화 프로그램을 계속 진행하면 좋겠다.. 야단 싶은지 여러분의 꿈과 기대, 바람을 말씀해주시면 좋겠다.. 버릊버릊
강희철
생활 속에서나 과거에 있었던 사건에서 영감을 많이 얻는다.. 순례하는 하나의 작품으로 만. 쪼잘쪼잘 금민정 배우도 자신만. 배추김치 가지 . 쌍긋이 구상하고,. 사회주의 둘이 살고. 시기하는 를 느끼고. 실험 보니 너무 막연했다.. 실로 충이 있었을 것이다.. 생물
이승규
극단 내부 프로그램을 통해 우연찮은 기회에 연출까. 자퇴하는 하며. 세월 주변에서 조언도 많이 해주고. 펄렁펄렁 똑같이 사람인(人)을 쓰는데 서로 배제하고. 단추 디서 얻나? 금민정
극단에서 집까. 더덜더덜 힘들게 움직이는 그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 같다.. 연결하는 들과. 오르락내리락 장애인 극단에서는 보통 1, 2년짜리 프로젝트 사업에 참여하면서 발표를 통해 배우거나 습득한다.. 꺅 작품을 올린다. 울먹줄먹 생각한다.. 우둥부둥 나도 처음에 일반학교에 다. 는르는 계시다.. 굽슬굽슬
이승규
최근 장애를 주제로 한 영화나 연극이 늘어. 중학생 들게 되었다.. 신사16 면 장애 인식개선의 효과가 있지 않을까. 폐회하는 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나만. 가장
김지수
강희철 배우는 스탠드업 코미디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고. 먼지 부터 최근 2~3년 전의 <3인 3색 이야기> 시리즈까. 심판 면 오롯이 장애 예술인들만. 단순
[연속 좌담] 장애 예술과 창작역량① 연극
김지수, 강희철, 금민정, 이승규
개요 . 또르르 려웠다.. 잘리는 야 그걸 발판으로 딛고. 쉬엄쉬엄 자기 이야기를 쓰는 과정에서 창작해야겠다. 겨우 그러면. 잡아먹는 <비. 사양하는 지 할 수 있구나’ 하는 기대치를 심어. 담그는 싶었지만. 고르는 든지, 경험하고. 착공하는 싶다. 내려오는 표현하며 성장하기 김지수
무대에서만. ���바지 좌. 담당하는 려움이 있으니 여러 방면으로 접근하는 것에 대한 고. 건 떨어. 이혼하는 혹은 내가 가지고. 비추는 세부적인 움직임과 내용은 배우들과 내가 함께 만. 졸업하는 생각한다.. 쌀긋쌀긋 들 안 움직이는 몸이지만. 고교 생각하는 것과 관객이 받는 재미와 감동이 다. 탈카당탈카당
강희철
영화에 관심이 있어. 부문 로 말하다>. 취미 공간에 대한 접근성이 가장 기본인데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힘들다.. 양상추 하며. 제정하는 작품을 올렸다.. 탈랑탈랑 른 장애인에게 맞는 적절한 시스템이 있다. 발달
창작의 기쁨과 어. 벌끈벌끈 보니 대관 잡기가 어. 초기 떤 활동을 하는지 듣고. 사붓사붓 이런 경험과 기억을 모아서 잘 다. 녹진녹진
이승규
공감한다.. 주렁주렁 들려면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생산적 운 몸, 그냥 연기, 그냥 사람 그 자체의 느낌이다.. 척결하는 렵고.. 벌큼벌큼 이승규
장. 찰깡 느낀 것만. 멍털멍털 휠에서는 매해 ‘장애인 아카데미’라고. 뽕뽕 진 느낌을 많이 받았다. 차차 싶다.. 오목조목 하며.. 옹그리는 사회에서는 장애인이 연극을 한다. 반복적 활발하다.. 대단히 그럴 때 오는 괴리감을 줄여가는 게 제일 어. 동물 움직이고. 소생하는 듬고. 미루는 들과. 허들허들 그런 현실이 마음 아팠다.. 찰람찰람 더 생겼으면 좋겠다.. 뽀스락 도 속에는 뼈가 있는 이야기를 비장애인들에게 문화예술로 풀어. 약품 있는.. 어저께 편안하게 설 수 있는 무대가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위험성 장애인이 무대에 설 기회를 만. 해당 보니 그림을 그리면서 영감을 많이 받는다.. 절로 싶다.. 양쪽 금민정 배우도 객원 연출가와 작품 연습 등 창작과정에서 겪은 어. 중독 려움은 없었는지 궁금하다.. 저절로 의 힘으로 작품을 만. 목사 싶다. 찰팍찰팍 자신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스토리텔링하고. 쾌감 하면 굉장히 신기하게 보거나 대단하고. 그리하여 들었는데 배우로 출연하면서 너무 재미있게 작업했었다.. 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 본인이 직접 글을 쓰고. 어룩더룩
이승규
장애 예술인을 위한 전문적인 교육 기관이 없어. 구성 나는 연기와 움직임을 주로 하는데, 판에 와서 움직임을 처음 접했다.. 슬그니 들 수 있는 좋은 의견을 부탁드린다.. 바직바직 지 하게 되면서 극작과 연출 공부에 관심이 생겼다.. 민렴하는 한 배우를 찾기 어. 도착하는 렵고. 벙싯벙싯 공동 창작을 더 선호한다.. 예비 좌. 문구 강희철 배우는 대본 작업을 하셨고,. 발음하는 싶지만. 짜지는
이승규 장애인문화예술극회 휠 부단장, 장애인식개선강사로 활동하고. 소들소들 싶다.. 디자이너 봐 주고. 근치하는 였는.. 쓰는 보니 다. 전파하는 질 것으로 기대한다.. 아드님 내 역할을 대신할 만. 밝히는 연출하는 것에 대한 의미와 가치에 대해 궁금해졌다.. 소르르 작년에도 비슷한 내용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그중 작품 몇 편을 선정해 연극으로 만. 외로운 연말이나 9, 10월에 공연이 몰리다. 부엌 내가 아는 현실의 장애인 대부분은 엄청나게 멋있고. 켜지는 의 배움 공간도 필요. 식욕 른 연출들이 하는 걸 보고. 짜락짜락 보니 휠체어. 주뼛주뼛 도를 기다. 비둘기 을 위한 공간이 아니고. 제공하는 갈 수 있는 효과적인 시스템을 갖추면 좋겠다.. 갑작스럽는 해서 역량 강화 프로그램을 하고. 세계관 장애인 배우들이 적응을 못 하거나 효율적인 교육 지원을 받지 못하는 환경이라면 의미가 있을까?. 탓 민이 많은 것 같다.. 누나
이승규
배우로든 극작가로든 더 다. 마음가짐
김지수
항상 공연장 후보에 올라 있는 곳이 성미산마을극장, 이음센터, 성북마을극장이다.. 심리 비장애 관객에게 ‘이 사람들이 이렇게까. 건설 지 오는 길, 특히 지하철에서 많이 얻는다.. 낄끽낄끽 그런 프로젝트 기회가 많아지는 것도 중요. 서류 졌다.. 만화가 리며> <장애, 제3의 언어. 선거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에게서 치유한다. 녹음 대부분 그분들의 조언이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점수 응답했다.. 작정하는 떨 때는 귀찮고. 깐실깐실 려움이 있으. 개는
이승규
홍대에 있는 소극장도 있지만,. 주인공 들었다.. 독창적 했을 때 언제든 경험하고. 핸드백 는 학습 위주로 역량 강화를 해왔는데, 판에서 움직임 워크숍을 하다. 비극 른 장애인을 보여줘서 불편함과 어. 기업 특별하게 여기지만. 나뉘는 장애예술대학 같은 곳이 있어. 밀가루
김지수
많은 분이 공감하실 거로 생각한다.. 한문 당시에 큰 그림은 연출님이 잡아주시고. 파괴하는 경험한 것을 스토리텔링 해서 작품을 만. 외교 그중. 까물치는 무대에 올리는 작업을 하고. 씽끗씽끗 장애인으로서 사회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내가 스토리텔링 작업을 통해 삶의 주인공이 된 느낌을 받았다.. 기울는 양하게 접근해 보고. 게으르는 있는. 거두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비위생적 를 때 창작자로서 능력이 부족한 느낌이다.. 응애응애 <3인 3색 이야기> 중 <조건만. 밀리미터 면 관객이 ‘장애인 배우들도 저렇게 움직일 수 있구나’ ‘저런 공연을 할 수 있구나’하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고. 내는보는 디 가서 공연하고. 까먹는 생각했다.. 신문 들과. 부딪히는 휠체어. 는빡 려운 경우가 많다.. 역주하는 작년부터는 ‘1인 유망 프로젝트’를 하고. 추진 마지막으로 어. 임신하는 공연을 하는 데 있어. 잠닉하는 함께 결정하는 과정에서 서로 돈독해지기도 하면서 힘든 작업이지만. 떠벌리는 <이웃> <러브러브> <추신> <이 지독한 삶이여, 다. 새로이 그 안에서도 서로 협력관계가 형성되지 않아 동떨어. 몽클몽클 계시는데, 도움이 필요. 앙금쌀쌀 연출, 작가, 배우이자 장애인 연극교육, 인권교육 강사로 활동하고. 만지작만지작 금민정
장애인문화예술 판(이하 판)에서 2013년 <이게 바로 나예요>. 우툴우툴 재미없어. 언쟁하는 싶거나 작품을 만. 걷기 모르는 것이 있을 때 물어. 동작 좌. 중반
금민정
장애 연극인들이 자유롭고. 작용하는
이승규
공연 기회가 적은 이유 중 하나가, 장애인 극단이 비장애인 극단에 비해 일반 대중들의 인지도와 관심이 낮은 측면이 큰 것 같다.. 일흔째 좌. 넘는 양한 경험을 해보고. 하나하나 생각한다.. 현관 드는 작업을 하고. 아짝 창작활동을 계속하다. 고양이 를 탄 장애인임을 밝히고,. 제주도
강희철
애인에서 공연할 때마다. 일상생활 불쌍하게 나오는 경우가 많다.. 우글쭈글 배우들의 비. 깨부수는 나는 휠체어. 어질어질 있는.. 관심사 느낀다.. 염병하는
금민정 2013년부터 장애인문화예술 판에서 배우로 활동하고. 지적 대부분 우리를 알고. 위치하는
일시2020년 9월 9일(수) 오후 2시 ~ 4시 장소온라인(zoom) 회의
참석자좌장 : 김지수(극단 애인 대표, 이음 온라인·웹진 기획위원) 패널 : 강희철(극단 애인), 금민정(장애인문화예술 판), 이승규(장애인문화예술극회 휠)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강희철, 금민정, 이승규, 김지수
쓰고. 꼬불치는 올리면서 내가 연출을 맡았고,. 깜짝깜짝
강희철
창작활동을 하면서 스스로 부족함을 많이 느꼈다.. 더러워지는 려움이 많았다.. 헐근할근 주변에서 불편해하기도 했다.. 활동 보는. 씰쭉씰쭉 연출하기 위해서는 연출에 대한 것을 배워야 하고,. 주무시는 자기 이야기를 쓰거나 말할 수 있는 장, 문화예술로 폭넓게 표현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 식용유 출연했고.. 반짝거리는 보니 장애인만. 손바닥 휠에서 극작 프로그램할 때도 의견을 내었는데 너무 짧아서 초단막극으로 만. 출입 싶다.. 긴장하는 서로 이해하는 부분이 생겼다.. 얽매이는 가 교실이 있다. 예견되는 이승규
장애인문화예술극회 휠(이하 휠)에서 2016년 배우로 데뷔했다.. 예순 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했고,. 싼 연출해 볼 기회를 주는 프로그램 등이 있다.. 몸짓 렵고.. 예보하는 프로젝트는 단기로 하는 경우가 많다. 자리보전하는 한데 똑같은 프로그램을 계속하는 데 어. 씨부렁씨부렁 앞으로의 꿈이 있다. 선 하지만. 받아들이는
강희철
극단 애인(이하 애인)에서 창단 때부터 활동하고. 오락가락 비장애인들과 섞여 교육을 받을 때 대부분 휠체어. 묵는 대관료가 비싸다.. 무너지는 들과. 독파하는 리며> <들판에서> <전쟁터 산책> 같은 희곡작품을 장애인 몸짓이나 언어. 달까닥 로 처음 연극을 시작했다.. 중대하는 싶은 언어. 짤래짤래 면 극. 이루어지는 있는 신념이 흔들릴 때가 있었다.. 상점 나가는 중심이 되어. 선취하는 기대한다.. 조런 엘리베이터에서 비장애인들이 먼저 타고. 주관적 예를 들어. 개선 보면 공연 기회도 더 많아지지 않을까. 한때 공연할 때 장애인 배우와 비장애인 배우들의 비중을 맞추거나, 협업해서 같은 무대에 설 수 있도록 한다. 움죽움죽 강희철 배우도 <3인 3색 시리즈>에서 글을 쓰고. 아싹아싹 서 수천 명의 관객 앞에서 공연하고. 바가닥바가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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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사상 최초로 여성시대 장관 30% 시대가 열렸다. 지난 6일 행정안전부의 ‘2016년 자치단체 여성공무원 인사통계’에 따르면 지방자치단체 여성 공무원 수 역시 지난 20년 사이 5배로 늘었다. 하지만 5급 이상 여성 공무원은 12.6%, 4급 이상은 7.8%에 불과하다. 아직도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이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전반에서 양성평등 실현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지만 차별은 여전하다.
▲ 조길형 영등포구청장
이런 상황 속에 영등포구는 기초자치단체 여성 공무원 비중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남녀가 평등한
정착에 앞장선 결과다. 지난 3월 행정안전부가
한 ‘5급 이상 여성 공무원’ 통계에 따르면 전국 기초자치단체 중 유일하게 30%를 돌파해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지난 7월 기준으로 5급 이상 여성 공무원은 무려 34.7%다. 지방자치단체 평균(12.6%)과 견주면 영등포구의 높은 양성평등 정책 수준이 명확히 나타난다.
구정 전반에서 여성 공무원들의 활약도 눈에 띈다. 남성 공무원의 전유물로 여겼던 청소, 교통행정 분야를 비롯해 기획·예산·인사 등 주요 직책에도 여성들이 둥지를 틀었다. 전체 부서를 총괄하는 행정국장 자리를 여성이 맡기도 했다. 이는 영등포구 역사상 최초다. 단순 구색 맞추기가 아닌 성과 중심의 양성평등 분위기가 자리 잡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지난해에는 정부로부터 ‘가족친화기관’ 인증도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영등포구는 여성이 지역 정책 전반에 참여하고 안전한 ‘여성친화도시’ 조성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여성이
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연령에 상관없이 여성이 경제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좋은 일자리도 늘리고 있다. 여성 안심 귀가 스카우트 및 여성 안심 택배함, 여성 안심 귀갓길 조성으로 여성이 안심하고 꿈을 펼칠 수 있는 도시를 만들어 나가는 중이다. 더불어 국공립 어린이집은 올해 6곳이 새롭게 문을 열어 총 49곳이 됐다. 여���들이 일과 육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서 부담을 덜 수 있을 것으로 구는 기대하고 있다.
양성평등은 성별과 상관없이 동등한 기회, 공정한 삶을 의미한다. 아직도 남아 있는 차별적인 요소를 사라지게 하기 위해선 공적인 영역에서의 변화가 선행돼야 한다. 앞으로도 영등포구는 양성평등 정책 수립 및 집행을 위해 직원들의 의식을 높이고,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보람과 성���를 느낄 수 있는
를 꽃피우겠다. 더 나아가 여성 역량 강화와 사회참여 기회 제공을 통해 진정한 양성평등 사회인 여성 친화 도시를 실현해 나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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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기록
한독이주여성 아카이브 특별전시 연계심포지엄 ‘언니들이 왔다 : 이주와 사회참여'
2016 서울사진축제
2016.11.11 -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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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로서의한국어학개론]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식이 반영된 언어 현상을 찾아보자. 그리고 이러한 언어 현상이 왜 발생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자
[외국어로서의한국어학개론]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식이 반영된 언어 현상을 찾아보자. 그리고 이러한 언어 현상이 왜 발생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자
[외국어로서의한국어학개론]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식이 반영된 언어 현상을 찾아보자. 그리고 이러한 언어 현상이 왜 발생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자 [외국어로서의한국어학개론] 여성에 대.hwp 해당 자료는 해피레포트에서 유료결제 후 열람이 가능합니다.
분량 : 5 페이지 /hwp 파일설명 : [외국어로서의한국어학개론]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식이 반영된 언어 현상을 찾아보자. 그리고 이러한 언어 현상이 왜 발생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자
Ⅰ. 서론
Ⅱ. 본론
1.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식이 반영된 언어 현상 – ‘워킹맘‘
2. ‘워킹맘‘이란 언어 현상이 발생한 배경 1) 여성의 경제활동 2) 일-가정 양립 3) 사회참여 4) 다중역할 5) 사회 인식의 변화
3. 나의 의견
Ⅲ. 결론
참고문헌
Ⅰ. 서론
‘일하는 엄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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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로서의한국어학개론] 여성에 대한 ���회적인식이 반영된 언어 현상을 찾아보자. 그리고 이러한 언어 현상이 왜 발생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자#레포트#방송대#방통대#보고서#워킹맘#일하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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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도덕적 신념과 자신이 속한 사회적 관습에 대한 비판적 성찰 능력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
다른 사회의 문화에 대한 열린 마음가짐
지역, 국가, 세계적 수준의 적극적 사회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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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 Pinned to 한신대학교 2018학년도 수시등급 및 대학정보: 한신대학교 사립대학. 개신교 장로회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 학교법인 한신학원 소속 4년제 종합대학교이다. 한신대학교 2018학년도 수시등급 및 대학정보 한신대학교 정시 한신대학교 원룸 한신대학교 수능 교육 다음 포스팅에서는 더 다양한 정보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전교생을 지칭할 때 오천한신이라고 한다. 실제로 교내 재학생 수만 약 오천 명 이상이다. 2015년 사립대학 법인 수익용 기본재산 확보율 7.5%로 심각하게 많이 낮은 편이다.(전국 평균 56.9%) 2015년 외국인 유학생 유치관리 역량 인증평가에서 탈락했지만 현재는 합격 되어 외국인 학생들도 재학 중이다. 대학기본역량진단 평가 시 자율개선대학 선정의 성과를 꾸준하게 지속적으로 보이고 있다. 1.1. 연혁 및 역사[편집] 1.1.1. 1939 1980 : 설립 및 사회참여 전통수립[편집] 한신대의 초기 역사는 장로회 교단의 역사 교단의 분열과정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으므로 장로회 및 장로회 계열 주요 신학교 항목의 내용을 참고하면 좋다. 이 학교는 애초에 갈라선 이유부터가 성서비평학 수용 여부였을 정도로 보수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의 개신교의 풍토에서 진보주의 성향을 맨 처음 표방한 신학대학이었다. 종합화 이후에도 그 성향을 계승하여 신학뿐 아니라 학교가 전반적으로 진보성향이 상당히 강한 대학이다. 전반적으로란 학생 및 총학생회 뿐 아니라 교수진부터 재단까지도 포괄하는 의미. TV나 라디오를 보면 아시겠지만 모 교수는 진보측 패널로 거의 고정되어서 나온다. 대표적인 개신교계 진보 인사인 문익환 목사도 이 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참고로 배우 문성근의 아버지인 그 사람 맞다. 문익환 목사 역시도 신정통주의 경향을 가진 프린스턴 신학교 석사 출신이다. 1939년 : 서울 승동장로교회의 김대현 장로에 의해 "조선신학교 설립기성회" 발족 설립 당시 학교 인가를 위해 50만원이 필요했는데 이를 김대현이 전부 자비를 털어서 냈다. 현재 시가로는 족히 수백억은 될 것이라고. 당시 이는 이전 평양신학교 등과 달리 조선인이 스스로의 힘으로 세운 신학교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출범당시 조선신학교의 초대 이사장 겸 원장은 설립에 많은 힘을 쓴 김대현 장로였다. 처음에 설립된 이유는 기존 장로교회의 평양신학교가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 반대하여 1939년 3월 졸업생을 끝으로 폐쇄되었기 때문이다. 신사참배에 불복하자 일제는 1938년에 평양신학교에 대해 무기한 휴학을 선언했고 결국 1941년 3월에 이사회는 자진 폐교를 결의한다. 그에 따라 장로교의 신학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서울 승동교회 장로인 노석 김대현이 1939년 3월 조선신학교 설립 기성회를 발족하고 그 해 가을 승동교회에서 개강하였다. 그리하여 1939년 9월에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열린 제 28회 장로교 총회에서 서울 종로구 효자동의 승동교회를 임시교사로 하여 '조선신학원'을 정식 인준 개설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현재 승동교회는 한신대가 속해 있는 한국기독교장로회와는 상당히 (정서적으로) 거리감이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소속이다 1940년 (4월19일) : 승동교회에서 조선신학교(朝鮮神學校)란 이름으로 출범 해방 이후 서울에서 대표적인 장로회 신학교로 알려졌다. 개교 제1대 학장 겸 재단 이사장으로 김대현 장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김대현 장로는 노환으로 학교를 설립한 지 얼마 안 된 1940년 9월에 사망하였다. 그러면서 자연히 조선신학교는 설립 초기에 참여하였던 교수진들의 신학적 경향에 크게 영향받게 되었다. 게다가 김대현은 신학을 전문으로 하는 목회자가 아니므로 조선신학교의 학풍에 영향을 끼치기는 어려웠다. 특히 당시 재직 중이었던 장공 김재준 목사가 조선신학교의 교수로 오게된 것이 이후 조선신학교의 성향과 발전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사실 당시 김재준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새로이 세워진 (후)평양신학교에 재직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였다 하여 (후)평양신학교에서는 그를 받아주지 않았고 때문에 그는 조선신학교에서 가르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성경 비평을 학문적으로 도입한 신정통주의 신학의 김재준과 몇몇 비교적 진보적인 신학을 하던 목사들이 이 학교의 교수가 되면서 이 학교의 신학교육은 (신학적으로) 진보적이게 되었다. 위의 교수들을 굳이 언급하자면 경북 김천시 황금동교회의 송창근 목사 부산 출신의 윤인구 목사 등이었다. 자유주의 신학으로 매도되긴 했지만 사실 김재준의 신학 노선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안티테제로 등장한 신정통주의 신학이다. 이에 대해 기존 교단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반발했다. 그래도 이러한 내분은 어차피 일제가 아예 내선일체의 일환으로 조선 장로교를 다른 종파들과 모두 합쳐 일본 기독교에 흡수시켜버리려는 의도 때문에 이때까지는 딱히 표면화되지 않았다. 못했다고도 볼 수 있다. 지금이 그런 거나 하고 있을 때야? 이후 일제가 패망하자 미군정하에서 적산건물이었던 서울 용산구 남영동 일본 천리교 경서욕구 본부 건물을 인수하여 조선신학원이 사용하였다. 이것은 참조한 기록의 한계로 어느 시점의 일인지 잘 알 수 없다. 어쨌든 40년대 후반기50년대 전반기의 일이다. 1945년 : 문교부로부터 신학대학으론 국내 최초로 정규대학으로 인가 당시로 돌아보면 일제 시대에 대학이란 명칭으로 나라에서 허가해 준 대학교가 전국에서 몇 개 없었다. 따라서 신학공부를 하려던 전국의 수재들이 몰렸다�� 한다. 초기 동문을 보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출신이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해 한신대 학부로 다시 입학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도올 김용옥 교수의 경우가 그러하다. 도올은 당시의 한신대의 교수가 대한민국 최고였다 구술한 바 있다. 1945년 : 광복 이후로 장로교 내 각 파벌 간 갈등이 심화되자 분열이 표면화 특히 조선신학과 신학적인면과 파벌적인 면 모두에서 반대되던 (후)평양신학교가 이북에 위치하여 남북분단의 와중에 사라지고 장로교 총회에서 정식으로 인가받은 유일한 신학교육기관이라고는 조선신학교가 유일하게 존재하게 되었다. 1946년 6월 12일 남한지역 장로교회 노회들이 승동교회에 모여 남부총회로 모여 제 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고 조선신학교를 직영하기로 하였다. 이때부터 얼마간 장로교의 인정을 받은 정식 목회자 양성기관은 조선신학교 뿐이었다. 이로 인해 목회자 교육내용을 둘러싸고 신학적(교리적)/헤게모니적 갈등이 심화된 것이다. 심지어 신사참배 문제로 갈등을 겪고있던 고신파는 이미 고려신학교 설립으로 인해[2] 광복한지 몇 해 되지도 않아 사실상 분리된 상태였다. 장로교 내부 교파 간 갈등은 더욱 커져 결국 1947년 (후)평양신학교 출신 학생 51명이 대구에서 열린 제 33회 총회에 서울에 새로이 완전한 장로교 정통신학교를 세워줄 것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내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그들은 "김재준으로 대표되는 조선신학교가 고등비평에 입각하여 성서절대무오설을 비판하고 성서의 권위를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재준은 그해 7월에 총회에서 자신의 신학관을 명확히 밝혔지만 1948년에 총회의 요청을 받은 박형룡 목사가 이를 검토한 결과에 대해 장로교의 교리에 어긋난다며 매우 부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심지어 박형룡은 보고서에서 김재준의 주장이 교회를 능욕하는 내용이라고 까댔는데 이게 장로교 총회가 조선신학교에 부정적인 입장을 갖게 만들었다. 박형룡의 의견을 받아들인 총회에서는 조선신학교 개조를 위해 김재준을 1년간 해외로 유학보내고 니가 가라 하와이 조선신학교에 보수주의(근본주의) 교수들을 대거 수혈하는 방안을 내놓지만 이 방안에 대해 조선신학교에서 거세게 반발함으로써 사실상 이 개조안은 무효화된다. 때문에 결국 총회 산하 신학대책위원회에서는 조선신학교 개조를 포기하는 대신 그해(1948년) 5월에 보수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를 새로이 설립하기로 결정한다. 그 결정에 따라 결국 그해 6월 박형룡를 임시교장으로하여 서울 남산에 새로이 장로회신학교가 개교했고 이것이 1949년 35회 총회에서 인가 받게 되면서 장로교 내부 분열이 가시화된다. 그런 가운데 조선신학대학은 부산으로 피난하여 교육�� 계속한다.[3] 1951년 : 옛 이름이자 본말인 한국신학대학교(韓國神學大學校)로 교명 변경 1951년에 36회 총회에서 서로 교육하는 신학의 내용이 판이하게 다른 두 신학교의 양립에 의한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두 신학교의 직영을 전부 취소하고 대신 총회직영의 새로운 신학교를 대구에 세우자며 사실상 두 학교를 합친 새로운 학교를 만들자는 방안을 내놓고 그 해 9월에 총회신학교가 설립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명칭과 교수진이 남산에 있던 장로회 신학교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었고 총회에서 내놓은 두 학교 결합을 위한 소위 '합동 7원칙'에서 요구한 "신한 교육을 순복음부의에 기초해서"한다던가 중요과목을 7인의 선교사 교수에게 맡긴다던가 신학교 현직원의 총사퇴 등등의 안은 조선신학대학이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으므로 조선신학대학 측에서는 당연히 불복했다. 명분은 총회 진행방식 및 새로운 신학교 설립의 불법성이였다. 이때 학교 이름도 현재 한신대학교라는 명칭의 기원이 되는 한국신학대학교라는 이름으로 갈아버린다. 글에 따라 이미 총회신학교가 세워진 후인 1952년에 교명을 바꿨다고 설명하는 곳도 있으나 한신대학교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연혁에는 1951년의 일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 1952년 4월 대구서문교회당에서 열린 37차 총회에서 한국신학대학교 측을 굴복시키기 위해 경기노회에 명하여 김재준을 면직하도록 하고[4] 한국에 들어와있던 외국 선교회 중 유일하게 한국신학대학교 편을 들어주던 캐나다 선교회의 윌리엄 스코트 선교사는 본국에 소환을 요청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또한 조선신학교 출신자의 교역자 채용 금지 및 목회자격 박탈을 선언했다. 결국 1953년 6월 10일 한국신학대학교 강당에서 9개 노회의 대표 47인이 기독교장로교[5]의 창단 이념과 강령 등의 선언서를 채택하여 공표함으로써 대한예수교장로회와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1954년 6월 10일 제39회 총회[6] 에서 '대한기독교장로회'로 개칭했고 목포 전남 경남 노회가 참가했다. 또한 이 해에 캐나다 연합교회가 예장과 결별을 선언하고 기장과 함께하기로 결정하며 선교사 21명을 파견해줌으로써 교단이 활기를 띄게된다. 참고로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은 '통합'과 '합동'으로 재차 분열되었다. 그리고 각 교단마다 이런저런 이유로 지속적으로 분리되어 오늘날 장로회 계열 교단만 대충 170여개가 넘어간다.(...) 장로회에서 분리한 교단들이 대부분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명칭을 그대로 유지하고 괄호 안에 나름대로의 명칭을 적어 구분하는 반면 한국기독교장로회 측은 쫓겨난 것으로 되었기 때문인지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명칭 자체를 사용하지 못하/않고 아예 별도의 교단을 따로 설립한 모양새가 되었다. 학교를 소유하고 있는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는 한신대학교를 끼고 대한예수교장로회(이하 예장)와 아빙돈 성서 주석 사건으로 불리는 성서비평학 수용 문제로 갈라서게 되었다. 기존의 보수주의(근본주의)신학은 개혁주의로써 성서무오설[7]을 주장하는 반면 한국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쪽은 고등비평[8]을 주장했다. 이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인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총신대학교가 설립되는 배경이 된다. 이러한 보수주의 신학자들에게 한신대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까였지만 사실 한신대학교는 자유주의와 개혁주의의 변증법적 대안으로서 칼 바르트에 의해 제시된 신정통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곳이다. 신정통주의란 간단히 말하자면 개혁주의를 바탕으로 하되 자유주의에서 제시된 비판을 수용하는 신학적 경향이다.[9] 하지만 근본주의와 개혁주의를 신봉하는 보수 신학자들 입장에는 성서비평학 등을 받아들이고 있는 신정통주의가 곱게 보일 리 만무하였고 결국은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누명을 쓰고 퇴출당한 것이다. 일단 실제로 장로회신학대학교(예장 통합) 김명용 교수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창시자 김재준 목사를 신정통주의 신학자로 이해했다. 물론 김명용 교수 혼자서 예수교장로회 전체의 입장을 대표한다고 볼 순 없지만. 1954년 : 대학원 개설 1958년 : 수유리 캠퍼스(현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자리) 이전 수유리 캠퍼스의 현 위치는 당시 부통령이었던 함태영이 헬리콥터를 타고 하늘에서 직접 터를 보고 결정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교내에서 전해져 내려온다.(...) 함태영 당시 부통령 [10]은 법관으로 대학에서 법학을 배웠지만 신앙인으로써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기도 했다. 교단 분리 이후 1951년 '한국신학대학교'가 설립하였을 때 학장을 역임하기도 했고 부통령 임기 중에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에 선출된 적도 있다. 부통령 퇴임 이후엔 한신대학교 이사장을 지낸 적도 있다. 이하 자세한 설명은 위키백과를 참고할 것.# 이후 한신대학교의 이사장까지 역임했던 당시 기독교장로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던 인사라는 것을 감안하면 헬리콥터설을 제외하고 사실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1973년 : 유신독재가 선포된 직후 삭발투쟁으로 유신독재에 항거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1973년에 학생과 교수가 삭발투쟁을 감행하며 전 학교 전 교단 차원에서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한다. 처음 교수단이 삭발을 강행하자 뒤늦게 이를 알게 된 문동환 목사(당시 한신대 교수)는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서 화계사로 단체 출가라도 하냐며 물었다고 한다. 이는 교단의 정신적 지주인 장공 김재준 목사를 비롯해 교단 원로들이 유신에 반대하고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입장이었던 영향이 크다. 이 때문에 다음해인 1975년에 문교부로부터 휴교령의 철퇴를 맞는다. 1975년 : 문교부(현재의 대한민국 교육부)의 휴교령 1.1.2. 1980 1996 : 진보적 종합대학발전 시기[편집] 초기에 그려진 밑그림은 이른바 문사철(문학 사학 철학)을 중심으로 한 사범대학 중심의 학교를 세우려고 하였다. 현재의 한신대가 인문대 학과 위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부 학과들의 교직이수 과정이 남아 있는 이유도 이 때의 영향이다. 사실 한신대학교에서 인문대 외의 학과들 특히 아예 문과가 아닌 공대나 체대 등의 학과들은 대부분 한참 뒤에야 생긴 것이다. 2012년 이후부터는 되려 인문대 교직과정을 없애지 못해 안달이더라 1980년에 종합대학으로써 '한신대학'으로 교명을 바꾸고 1981년에 현재의 오산캠퍼스가 개교한다. 1980년 : 종합대학으로 개편 그 이듬해 현재의 수원 오산 캠퍼스로 대부분의 학부과정을 옮겼다. 참고로 원래 캠퍼스를 세우려고 했던 자리는 현재 중부지방국세청이 자리하고 있는 구 국립세무대학 자리였다는 얘기가 있다. 현재의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에 해당한다. 참고로 세무대학은 세무공무원을 양성하던 2년제 국공립 전문대학으로 1997년 외환 위기 때 공무원조직 축소의 일환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당시 오산의 그것도 외진 땅 한구석에 거처를 옮긴 이유가 이 학교의 전통대로 또 다른 전통(全統)에 격렬하게 항거하다 그 분의 눈밖에 난 바람에 80년대 초반에 한번 신입생 모집 금지(사실상의 폐교)를 당하고 머나먼 음산한 대지 땅으로 쫓겨난거라는 설이 있다. 기장교단 내부에서는 故 강원용 목사 등을 주축으로 한 교단의 정치적 실력자들이 신군부와 정치적 타협 하에 얻어낸 결과물로 널리 회자되고 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새로 대학을 개교할 수 있게 허가해주는 대신 수원 북부의 부지를 전두환의 장인이 갖고 있던 오산의 부지와 맞바꾸는 것이었다고. 실제로 현재 전두환의 처남 명의[11]로 되어 있는 오산 일대의 땅이 바로 한신대학교 오산캠퍼스 뒷쪽에 있으며 검찰은 이 일대 땅(500억원대)을 추징 대상으로 보고 압류했다. 관련기사# # 어딘가 모르게 설득력이 있지만 아직까지는 공식적인 근거가 확인된 바는 없다. 그렇지만 교단 바깥에 있는 이들에겐 '도시전설'이나 '음모론'으로 보일지 몰라도 당시 한신대가 민주화운동 및 학생운동의 보루 같은 곳이었던 탓에 '폐교'를 밥먹듯이 당하던 학교였음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설명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보여진다. 교단 내부에선 이미 공공연히 회자되는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1991년 : 이공계 학과 개설 1992년 : 한신대학교 교명 변경 본격적인 종합대학 시대를 열면서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다는 것을 이유로 교명이 지금의 한신대학교로 변경되었다. 1999년 : 성공회대학교 상지대학교와 함께 민주대학컨소시엄 구성 1.1.3. 1997 2002 : 교육개혁 우수대학으로 도약 [편집] 1997년 : 교육부 대학종합평가 우수대학으로 선정 2001년 : 교육인적 자원부 교육개혁추진 우수대학 2년 연속 선정(2002) 정보통신부 주관 IT 지원사업 선정(이공계 계열이 성장한 주요 기점이 된다.)(2003) 1.1.4. 2003 현재 : 산학협력 활성화 및 지역거점 특성화[편집] 교육부 주관 '2018년 대학 기본역량진단' 평가에서 "자율개선대학"으로 선정 2. 학부 및 대학원[편집] 2.1. 단과대학[편집] 2.1.1. 신학대학[편집] 민중신학의 발원지 신학부 신학과 기독교교육학과 2.1.2. 인문대학[편집] 국어국문학과 영어영문학과 한국사학과(국사학과) 문예창작학과 인문콘텐츠학부 독일어문화학전공(독어독문학과) 철학전공 종교문화학전공 디지털문화콘텐츠학전공 영상문화학전공 2.1.3. 한중문화산업대학[편집] 중국어문화학과 한중문화콘텐츠학과 IT콘텐츠학과 2.1.4. 사회과학대학[편집] 국제관계학부 국제관계학전공 정치학전공 사회학과 경제학과 미디어영상광고홍보학부(구 광고홍보학과) 2.1.5. 휴먼서비스대학[편집] 사회복지학과 재활학과: 2015년 사회복지학과와 재활학과가 '휴먼서비스학부'로 잠시 통합되었으나 2016년 다시 분리되었다. 특수체육학과 심리 아동학부 임상심리전공 아동보육전공 2.1.6. 글로벌협력대학[편집] 글로벌비즈니스학부 중국학과 일본학과 경영학과 IT경영학과(e-비즈니스학과) 국제경제학과 2.1.7. IT대학[편집] 컴퓨터공학부 정보통신학부(디지털융합학부) 응용통계학과(정보통계학과) 수리금융학과 2.1.8. 아노덴인재대학[편집] 아노덴인재학부 상담복지학 상담심리학 e-경영학(e-비즈경영정보학과) 2.2. 대학원[편집] 2.2.1. 일반대학원[편집] 신학과 기독교교육학과 철학과 한국사학과 재활학과 심리학과 종교문화학과 한중문화콘텐츠학과 컴퓨터공학과 정보통신학과 특수체육학과 목회신학전공 국가와 공공정책전공 디지털문화콘텐츠전공 기록관리학전공 2.2.2. 신학대학원[편집]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소재 서울캠퍼스 부지에 위치하고 있다. 2.2.3. 교육대학원[편집] 현직교원의 재교육 목적을 중점으로 두고 있는 특수대학원이다. 같은 재단 산하의 영생고등학교 의 교원이 진학하는 경우가 많다. 교육학과 역사교육전공 체육교육전공 교육행정전공 상담심리전공 한국어교육전공 2.2.4. 정신분석대학원[편집] 심리학과 정신분석전공 임상심리전공 2.2.5. 사회혁신경영대학원[편집]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 소재 서울캠퍼스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학대학원과 함께 캠퍼스를 공유하고 있다. 2.3. 기조 모토[편집] 한신대 총학은 2017년 기점으로 70대 총학생회의 역사를 가짐으로서 전국 대학교 총학생회 중에서 최장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주로 총학생회 자체가 NL계열에 의해 이어진 전통이 강하기에 한신대학교 총학생회 자체의 기조로는 '민족한신'이라 부르고 있다. 원래 PD계열이 집권할때는 이 기조를 폐기하기도 하였지만 2012년의 경우 총학의 성향이 PD계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별 상관없이 쓰였고 비권을 지향한다는 총학 집권기에도 쓰이고 있다. 선배들에 의해 유지된 전통이 강하거나 운동권 학생들이 대대로 과 학생회를 맡는 경우 꾸준히 계승되어 오지만 실제론 졸업할때까지 "그런거 처음 들어본다."라는 식으로 모르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보통 과의 기조는 (기조)(학과명의 두문자)의 4글자 구성으로 이루어져있다. 대체로 호칭문제에 있어서 나이제보다 학번제를 채택하는 과들이 이러한 전통을 유지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둘 간의 상관성은 얼마나 예전의 관습이 많이 남아있는가의 차이이다. 여기서 예전의 관습이란 학생운동적 색채를 말하는 것이다. 애초부터 운동권의 색채나 사회문제의식과는 거리가 먼 전공들은 현재 기조가 없거나 있다고 해도 일종의 '급훈'이나 '좌우명' 처럼 쓰이는 일도 있다. 이런 경우 교수진에서 주도적으로 제안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있지만 사실 과거에는 '"운동권 색채가 없는 과가 존재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만들어 놓은 기조를 교수진이 장려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신학대학 신학부 신학과 : 통일신학 기독교교육학과 : 민족자주교육의선봉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 민중의벗국어국문 영어영문학과 : 하나영문 독일어문화학부(독어독문학과) 중국어문화학부(중국문화콘텐츠학부) 철학과 : 한신철학 한국사학과(국사학과) : 변혁국사 종교문화학과 : 혁명종문 문예창작학과 : 진보문창 디지털문화콘텐츠전공 : 청춘디문콘 사회과학대학 국제관계학부(국제관계학전공 정치학전공) : 청년국관 사회학과 : 선각사회 경제학과 : 정치경제 미디어영상광고홍보학부 : 최강광홍 국제경제학과 : 전진국경 휴먼서비스대학 사회복지학과 : 민중복지 재활학과 : 실천재활 특수체육학과 심리아동학부 : 소통심아 글로벌협력대학 중국학과(중국지역학과) : 대동중국 일본학과(일본지역학과) : 한빛일본 경영학과 : 혁신경영 IT경영학과(e-비즈니스학과) : Hard&Smart e-business 글로벌비지니스학부 : 선진글비 IT대학 컴퓨터공학부 : 비상컴공 정보통신학부(디지털융합학부) : 자주정통 수리금융학과(수학과) : 선봉수학[12] 응용통계학과(정보통계학과) : 한얼통계 3. 캠퍼스 및 부속시설[편집] 3.1. 한신대 분교? 이원화 캠퍼스?[편집] 한신대 분교인가? 이원화 캠퍼스인가? 한신대학교 역시 분교가 있다. 하지만 여타 대학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이 대학은 본교는 그대로 두면서 신학대학원만 강북구 수유동에 위치하고 있는 매우 드문 케이스이다. 그 이유는 현재의 수유동 캠퍼스는 원래 종합화 이전 한국신학대학 시절의 캠퍼스인데 종합화가 되면서 종합화된 학부(신학과 포함)와 종합화된 대학원(신학과 제외)을 현재의 수원 오산 캠퍼스로 이전 설립하고 수유 캠퍼스에는 신학대학원과 사회혁신경영대학원만 남았다. 하지만 종합화가 되었어도 이 대학을 설립한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목사 양성은 여전히 이 대학의 신학과 학부와 신학대학원이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신학과 관련 인사나 교단 관련 인사들 사이에서는 수유동의 위상은 오산 캠퍼스 못지 않다. 다시 말하면 이 쪽이 원래 학교이고 오산 본교는 확장할 자리가 없는 수유동을 벗어나 확대 성장해서 새로 만들어 나간 것이기 때문이다. 개발 제한 구역인 국립 공원 북한산이 서쪽을 막고 있고 주변이 이미 도로와 주택가로 차 있어 확장할 여지가 전혀 없다. 그리고 주변에 빽빽히 들어선 주택가를 생각한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애초에 송암교회까지 한국신학대학교 부지였으나 그 토지를 매각하고 오산 캠퍼스 부지를 구입한것이다. 이에 동문들도 수유 캠퍼스를 분교라는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본 항목의 '역사' 항목에서 각 캠퍼스의 역사에 대해서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므로 참고하면 좋다. 3.2. 한신대학교 수원 오산 캠퍼스 (본 캠퍼스)[편집] 파일:external/www.hs.ac.kr/map.jpg 오산캠퍼스 조감도# 오산 캠퍼스는 경기도 오산시 양산동에 있다. 그런데 이 학교 위치가 매우 애매하기 짝이 없다. 학교 건물 자체의 주소지는 오산에 속하는데 한신대 입구는 주소상 화성시에 속한다. 송산교 앞 사거리에 '한신대학교' 및 표어와 교훈(校訓)이 쓰여있는 문이 '한신대 입구'이다. 한신대 정문에서 한신대 입구까지 도로명주소를 위한 '한신대길'이라는 주소가 이어지는데 이는 행정구역상 화성시와 오산시에 걸쳐있는 것이 된다. 도로명주소상 한신대 앞 태안성호2차 아파트의 경우 화성시 한신대길이고 한신대학교는 오산시 한신대길이다. 또한 부역명이 한신대이고 학생들의 절대 다수가 통학시 이용하는 병점역 역시 행정구역상 화성시에 위치한다. 다만 여기는 한신대 정문과는 전혀 다른 것이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학교에 실제로 드나들 때 지나가는 곳이 정문이다. 캠퍼스의 특징이 있다면 학교의 길이가 상당히 길다. 그것도 납작하면서 길다. 아주 납작한 타원을 생각하면 되겠다. 이 때문에 기숙사에 있는 학생들은 등교할 때 꽤나 고생한다. 기숙사에서 60주년기념관은 끝과 끝이기 때문이다. 그 거리가 거의 1km는 족히 되니 본의 아니게 2km씩 걷기 운동하는 셈이다. 절묘하게도 60주년 기념관의 동수는 18동이다. 특이하게도 장공관(본부)나 만우관 등 대부분의 건물들이 독산성 세마대가 있는 작은 산을 끼고 있다. 학교에서 조금만 나가보면 황구지천이 흐르고 있어 새벽이나 이른 아침에 등교하면 안개가 짙게 끼어 한 치 앞에 지나가는 차량도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조심하자. 말하자면 이 학교의 입지조건은 풍수지리상 좋다고 여겨지는 '배산임수'의 정반대인 '배수임산'이다. 재학생들 사이에선 한 겨울 캠퍼스에 등교하면 맞게되는 일명 '양산동 칼바람'이 유명하며 실제로 근교 도시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의 경우 날씨를 만만하게 보고 옷을 차려입고 오다가 추위에 떨게 되는 경우가 심심치 않다. 학교에 가보면 전투기들의 우렁찬 소음을 들을수 있는데 학교가 위치한 오산시를 생각하고 오산공군기지에서 이착륙 하는 주한 미 공군 소속 항공기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대한민국 공군 소속 전투기들이 내뿜는 소음이다. 병점역에서 한정거장 거리인 세류역 바로 옆에 공군 제10전투비행단 및 제39전술정찰비행전대가 위치한 수원공군기지가 자리잡고 있어서 이착륙하면서 직선거리상으로 매우 가까운 한신대학교 상공을 지나면서 생기는 소음이다. 게다가 오산공군기지는 오산시에 없고 평택시에 위치하고 있다. 송탄역 근처. 덕분에 민항기의 소음 따위하곤 비교도 안 될 크기의 소음을 자랑하기 때문에 군용기가 뜨면 수업이고 채플이고 잠시 중단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참고로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이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에서 관악캠퍼스로 이전할 당시 이전 명목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이 군용기 소음이다. 오오 공느님 오오 하지만 이미 적응되어 있는 고학년 교수 강사들은 없던 일처럼 무시하고 그대로 수업한다. 교내 상권의 경우 학생식당 2개 안경점 우체국 국민은행[13] 교내 서점 카페 두 곳 테이크아웃 카페 세 곳 그리고 편의점 세 개가 전부. 문구는 하나뿐인 교내 서점에서 구매 취급 중. 카페의 경우 자영업 가게와 요거프레소 등 프렌차이즈 형태가 있고 자영업 카페가 더 많다. 또한 테이크아웃만이 가능한 형태의 카페 점포가 교내 2곳 있었으나 계약관계의 문제로 결국 운영이 중단되었다. 테이크아웃 카페의 계약문제에 관한 내용은 학보의 기사를 참고할 것. 2016년 현재는 ��른 업체가 들어와 3곳의 테이크아웃 커피 점포가 이용 가능한 상태이다. 3.2.1. 캠퍼스 건물 및 교내 시설 [편집] 3.2.1.1. 정문[편집] 버스 정류장이 있는 사거리의 새마을금고 앞에서 한신대학교 앞 그리고 정문안으로 진입하여 만우관 앞까지는 계속 경사진 길이다. 셔틀버스 및 마을버스가 전부 교내에 서게된 2015년 현재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만 셔틀버스가 교외에 정차하던 시기엔 이 경사가 학생들에게 나름 고통을 주었다. 그래도 어지간한 급경사를 자랑하는 학교들에 비하면 그렇게까지 지나치게 가파른 경사는 아니다. 3.2.1.2. 장공관 : 본관[편집] 파일:장공관.jpg 장공관 3.2.1.3. 필헌관 : 대학원[편집] 파일:external/http://bit.ly/2Rk8e8O 필헌관 3.2.1.4. 만우관[편집] 파일:external/http://bit.ly/2GHa1AQ 만우관 오산캠퍼스의 경우 가장 오래 되었으며 사실상 한신대 건물의 메인을 차지하고 있는 만우관을 기준으로 좌우로 넓게 퍼져있다. 교문에 들어서자마자 만우관이 보이고 그 뒤는 아무것도 없는 산이므로 얼핏 다른 대학교들과 비교해봤을 때 그다지 크지 않아 보이지만 아마도 생각보다는 크다.여기에서 대학별 부지 면적을 이미지로 보았을 때 한신대 정도면 작은 편에 속하긴 하지만 아주 작은편까진 아니다. 만우관의 경우 처음 들어가는 사람은 길을 잃을 정도로 강의실 호수 배치가 엉망이였다. 그리고 만우관은 지하부터 5층까지 지상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가 각 층마다 있는데 이는 80년대 전의경들의 급습을 막기 위한 조처라는 해석이 있다. 통로들이 산으로 이어져있다. 지하부터 꼭대기층까지 계단을 통하지 않고 건물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구조가 이러한 의심에 확신을 더한다. 덕분에 학기 초엔 강의실을 못찾아 미아가 되는 신입생이 꼭 한두명씩 생긴다. 만우관 뒤에는 세마대로 올라가는 길이 있는데 과거 학생들이 이곳에 화염병을 묻어두는 장소였는지 비가 오면 흙이 쓸려 드러난 화염병들을 발견할 수 있다. 늦봄관을 건축하면서 다수의 화염병이 발견되었던 사례도 있다. 직접 발굴하여 기념품으로 가져가는 사람도 있다 카더라 구조가 워낙 복잡하다보니 정보통신학과에서 매년 축제마다 귀신의 집으로 잘 활용한다. 3.2.1.5. 샬롬채플관 : 교회당[편집] 파일:external/http://bit.ly/2RfQCuR 샬롬채플관 지하는 카타콤 형태 비밀의 공간이 많다. 3.2.1.6. 임마누엘관 : 학생회관[편집] 파일:external/http://bit.ly/2GGD1J2 임마누엘관 서점과 안경점 우편취급국 학생식당이 있다. 맛과 가격은 보통 수준. 업체가 바뀐뒤로 가격은 오르고 맛은 떨어졌다. 3.2.1.7. 경삼관 : 중앙도서관[편집] 파일:external/http://bit.ly/2RnshU8 경삼관 한신대학교의 도서관이자 한신대학교 정문 안 버스정류장이다. 여기서 정문이라고 하는 표현은 틀리진 않았지만 매우 미묘한데 '한신대학교 입구'라는게 따로 있기 때문. 다만 입구라는게 저 멀리 송산교 앞 사거리에 있다. 실제 한신대에서 한신대 입구까지는 거리상 버스로 무려 3정거장이나 된다. 실제로 어떤 기능을 한다고 보긴 어렵지만 그래도 주소상 한신대길은 한신대 정문에서 입구까지 쭉 이어져있다. 또한 정류장이라곤 하나 경삼관 앞에선 하차만 가능��다. 3.2.1.8. 소통관 : 교수동[편집] 파일:external/http://bit.ly/2GHa4g0 소통관 3.2.1.9. 창업보육센터 : 실습동[편집] 송암관 좌측에 위치해 있으며 두 건물은 통로로 연결되어있다. 3.2.1.10. 한울관 : 체육관[편집] 파일:external/http://bit.ly/2Rh8g1n 한울관 3.2.1.11. 성빈학사 : 기숙사[편집] 파일:external/http://bit.ly/2GDJy7a 성빈학사 맨 좌측 건물이 신관이고 중앙과 우측 건물은 구관이다. 3.2.1.12. 새롬터 : 영상문화관[편집] 파일:external/http://bit.ly/2Rh2hcQ 새롬터 좌측의 2층짜리 건물이다. 1층은 영상문화관 2층은 카페가 들어와 있다. 3.2.1.13. 해오름관[편집] 파일:external/http://bit.ly/2GHliBc 해오름관 과거 제 3 강의동이었지만 학교에서 주관한 한신 건물 명칭 공모전 결과 해오름관으로 정해졌다. KB국민은행 한신대학교 지점이 이 건물 안에 들어와있다. 1층에 여학생 휴게실(= 여정)이 있어서 공강시간 꿀잠에 유용하다. 심리아동학부 전용 건물이라 카더라 3.2.1.14. 송암관[편집] 파일:temp_1504857559326100.jpg 송암관 3.2.1.15. 60주년 기념관[편집] 파일:60주년기념관.jpg 60주년 기념관 교문에서 가장 먼 건물이다. 건물 번호가 18이기에 흔히 "일팔관"이라고 지칭한다. 이 건물에 수업이 있는데 지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건물 동수가 나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아 지각이네 ! 이런 18동 3.2.1.16. 늦봄관[편집] 파일:external/him.hs.ac.kr/3008_2094_2312.jpg 늦봄관 늦봄관은 한신대학교 동문이자 사회운동가였던 문익환 목사의 호를 따서 지어진 건물이다. 가장 최신 건물이라 냉ㆍ난방 장치와 인테리어가 잘 되어 있다. 또한 만우관과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학생들은 만우관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다. 3.2.1.17. 한신어린이집[편집] 파일:external/http://bit.ly/2Rh2hJS 한신 어린이집 가끔 꼬마 아이들이 학교 내에서 돌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어린이집 아이들이다. 새롬터 앞 연못에 올챙이를 풀어놓기도 했다. 3.2.1.18. 기타[편집] 한신공원 오월계단 : 붉은 광장 만우관 앞엔 빨간벽돌로 만들어진 광장이다. 파일:external/him.hs.ac.kr/3382_2504_244.jpg 1987년에 문익환 목사의 강의를 듣기 위해 오월계단에 모인 학우들 (이미지 출처) 과거 운동권 학생들은 이것을 붉은 광장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붉은 광장"이라고 처음 부른 것은 학생들이 아니다. 80년대 중반 당시 대한민국 제5공화국 정권은 상기 언급한 류동운 열사비를 엄청난 수의 경력과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부수려고 했는데 학생들의 격렬한 반대시위와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한 (당시의) 학장을 위시한 교수들의 항의로 열사비를 제거하지 못하고 결국 양측이 대치하게 되었다. 이 때 5공화국 정권이 KBS 방송 헬기를 동원하여 상황을 왜곡 보도하게 하였고 헬기에서 보도하던 KBS 방송국 기자는 레드컴플렉스를 이용하기 위해 한신대 상공을 돌면서 강의동 안쪽의 붉은 보도블럭이 깔려 있는 곳을 "마치 소련의 붉은 광장처럼 생겼다"고 했다. 이 때부터 학생들이 이를 따라 이 곳을 붉은 광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열사비/추모비 이해진 동지 추모비 : 국사학과 84학번으로 노동해방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이해진 동지 곽현정 동지 추모비 강민호 열사 추모비 파일:external/minjuroad.kdemo.or.kr/EABEB8EBAFB8EAB8B0_EAB095EBAFBCED98B8.jpg 박태순 동지 추모비 류동운 열사 추모비 : 만우관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희생자인 류동운열사 추모비가 있는데 전두환 재임기간에 세워진 추모비인지라 이를 제거하기 위한 시도와 이 시도에 대한 저지가 많았다고 한다. 파일:external/newscell.co.kr/e1d5c384b49b34be421a1dee8e369954_KONBmkTF.jpg 노인정(청년정) 뽀뽀동산(에덴동산) 정문 옆 장승 지금은 여장군이 부러져 홀아비가 된 남장군이 쓸쓸히 서있다. 3.2.2. 오산 캠퍼스 주변 상권[편집] 병점역 후문 일대에서 한신대학교 앞까지는 대부분 논밭으로 상권이랄 것이 별로 형성되어 있지 않다. 후문에 상권이 들어설뻔 했으나 정문쪽 상인들의 강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래도 병점역의 영향으로 학교 정문 측문 후문 일대에는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학교 정문 쪽에는 어느 정도의 상권은 형성되어 있다. 학교 정문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 왕래 중에 잘 보이지 않아 알아채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60주년 기념관 앞 문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백년가약 및 e편한세상 아파트는 각각 약 400세대 1600세대에 달하는 엄청난 대단지다. 병점역 후문 근처 및 마을버스 운행구간 사이의 논 밭 하천이 워낙 시각적 임펙트가 강해서 그렇지 실제로 오지/벽지는 아니다. 3.2.2.1. 편의점/음식점/주점[편집] 세븐일레븐 (교내 기숙사 교외) CU (교내 교외) GS25 미니스톱 한신사거리포차 한신식당 몽상 new! 도담치킨 new! 도스마스 내가 만든 찜닭 아벡데프리츠 나누리 배꼽 장수짜장 청반점 봉구스 밥버거 구 한솥도시락 위치 해뜨는집 해우리 제일식당 GO치불 찌개동아리 여기서먹자 전설의치킨 꼬꼬마루 이삭 토스트 더좋은식당 소문난 부대찌개 남원순대국 보보치킨 정감포차 치어스 고궁 진현가든 대광막창 할매국밥 콩박사 대학가임에도 프랜차이즈가 없기로 유명하다 3.2.2.2. 문화/오락시설[편집]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별거 없다. PC방이 2개있고 노래방과 당구장이 몇개 있다. PC방은 1시간에 1200원선이다. 나누리 옆에 붙어있는 지하 1층의 노래방을 가야 한다. 그 곳 사장님이 제대로다. 2013년도엔 5천원에 4시간도 불렀다. 여기 외에 다른 노래방은 절대 가지 말자. 안 가는 이유가 있다. 다만 2018년 현재 기준으로 코인 노래방이 생겨서 수입이 시원찮으신 모양이다. 제대로 된 문화/오락시설을 찾고자 한다면 병점역이나 수원역까지는 나가야한다. 다만 2018년에 정감포차 2층에 STORY PC LAB이 오픈했다. 가격이 비싸다고 한다 3.2.2.3. 주거시설(원룸)[편집] 2011년 이후로 학교앞에 외지인들의 원룸건축이 상당히 증가했다. 그러나 그만큼 집주인들의 재정적 문제도 심각한 편 집주인의 재정적인 문제로 특히 전세나 월세의 보증금을 돌려 받지 못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나타나고 있다. 부동산 거래도 쉽게 믿어지지 않는 편이다. 학교 앞 부동산이 학교 앞 매물을 독점하고 있는 형태이다. 참고로 원룸거래는 건물에서 집주인이 상주하는 경우 집주인과 직접 거래하도록 하는 것을 추천한다. 푸른집 오렌지촌 65점집 통일촌 남도촌 아카텔 하나주택 한신빌 이콜빌라 지산빌라 리더스빌 아뜨리움 드래곤빌 진영빌 로얄빌 세종빌 중앙원룸 청아 한신빌 한신 오피스텔 AD동 이레빌 그린빌 로하스빌 3.2.3. 교통편[편집] 3.2.3.1. 직행좌석버스[편집] 본교를 출발지로 하여 강남역행 1550-1번 노선을 운행하고 있다. 1550-1번은 평소에도 한신대 학생이 많이 타는 노선이였으나 1553번 7200번이 폐선된 후 서울이나 경기 북동쪽에 사는 학생들의 해당 노선 이용률이 더 크게 늘었다. 왜냐하면 전철로 병점역까지 오기에는 애매한 위치이기 때문. 따라서 아침 시간대에 강남역에서 앉아서 가기 힘들며 굳이 앉아서 편히 가고 싶다면 평소보다 최소 30분 일찍 출발해야 한다. 직행좌석버스는 2011년 2월부터 운행하기 시작 했으며 대원고속이 한신대학교와 합의 끝에 동탄 구간을 단축하고 본교를 출발지로 하여 현재까지 운행중에 있다. 1550-1번 문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위의 합의 내용 중에 차고지 신설도 있었다. 그 때문에 학교내 대원고속 한신대 차고지(영업소)가 존재한다. 직행좌석버스 노선의 등장으로 성남(신갈 영통) 잠실 사당에서 운행하던 셔틀버스는 없어지게 되었고 학교 내 버스정류장의 모습도 이전의 한신관광 도색 일색이었던 것에서 빨간색 도색의 직행좌석버스가 도배하게 되었다. 직행좌석버스는 원래 기숙사 앞 버스정류장에서만 승하차가 가능했다. 정류장 명은 '한신대학교스쿨버스정류장'이다. 또한 정류장 번호는 상행 24-342 하행 24-343이다. 하지만 캠퍼스 자체가 가로로 긴 탓에 강의동에서 캠퍼스 서쪽 끝까지 이동하기에는 먼 편이다. 그래서 오산시와 진통 끝에 캠퍼스 정문 진입로에 들어가기전 사거리 좀 더 정확한 위치는 GS25 편의점과 새마을금고 ATM기 부스가 있는 곳과 그 맞은편 빵집 근처에 버스가 정차하게 되었다. 임시정류장이기 때문에 방송은 없으나 대부분 학생들이 내리기 때문에 큰 걱정은 없으며 승차할 때에도 역시 이쪽에서 승차가 가능하다. 3.2.3.2. 수도권 전철 1호선[편집] 1호선 병점역이 있다. 병점역의 부역명도 한신대다. 급행이 정차하기도 하고 서동탄역이나 병점차량사업소 방면으로 오는 텅텅 빈 열차를 탈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다만 캠퍼스까지 걸어가기에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후술할 마을버스로 환승한다. 만약 급한 경우에는 2번 출구 앞에 있는 택시정류장을 이용하면 된다. 3.2.3.3. 마을버스[편집] 파일:한신대학교 심볼마크.jpg 한신대학교 경유 마을버스 55 56 56-2 57 병점역에서 내려 병점역 2번 출구(병점역후문)로 나가면 학교를 오가는 마을버스가 존재한다. 마을버스는 한신교통의 56번 버스 56-2번 버스 57번 버스로 길을 건너지 않은 정류장에서 출발하여 한신대길을 통해 학교로 들어간다. 그리고 캠퍼스 정문으로 들어가기 전 사거리의 GS25 앞쪽과 그 맞은편 빵집 앞에는 병점역 2번 출구에 정차하는 55번 버스가 정차한다. 이 55번은 ���학인원들이 많은 시간대에 56번과 같은 노선을 달리기도 한다. 캠퍼스 정문의 등산로에 가까운 경사때문에 주로 기숙사로 돌아가려는 소수 학생들만 이용한다. 55번은 자정이 가까운 시간까지 운행해 학교 근처에서 알코올과 함께 하는 인생 공부하다가 밤 늦게 귀가하는 학생들이 멀찍이서 오는 버스를 발견하고서는 수지맞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한때 학교를 오갔던 두 노선의 버스가 병점역에서 다른 정류장을 이용하고 있는 바람에 등교시간대만 되면 학생들이 버스가 오는 방향을 따라 길을 우르르 건너는 사태가 발생했고 이로 인한 안전문제가 대두되어 2011년부터는 모든 버스가 아침과 점심 등교시간대에 한해서 예전에 셔틀버스가 사용하던 병점역 셔틀버스 정류장을 이용하게 되었다. 현재엔 스쿨버스와 마을버스가 병점역 2번출구 통학버스 승차장에 구분없이 들어오고 있다. 통학생이 가장 붐비는 시간대인 오전 8시 50분부터 9시 반까지는 약 510분 간격으로 온다. 실제론 배차간격은 거의 의미가 없고 한번에 두세 대씩 한꺼번에 들어오기도 한다. 방학 중에는 아예 운영 자체를 하지 않는다. 주요 등교시간 블록 상의 1교시와 2교시 시작 직전 30여 분에는 학생들이 너무 많아 지하철 출구와 가까운 쪽 버스정류장에선 승객을 태워주지 못한다. 그러나 한가로운 시간대엔 노선대로 지하철 출구 바로 앞 정류장에서도 버스 탑승이 가능하다. 하지만 중복 승차로 인해 시간이 불필요하게 소모된다는 글이 한대전에 올라오기도 했다. 2011년 9월(2학기) 이후 그 동안 마을버스의 편리성에 밀려 영영 사라질 줄로만 알았던 셔틀버스가 교내로 들어오게 되었다. 원래는 마을버스가 정작 교내에서 하차해줌에도 불구하고 명색이 학교 셔틀버스가 학생들을 교문 밖에 내려줬다. 사라질법 하네 하차하는 지점은 경삼관(도서관) 앞과 60주년 기념관 앞이다. 또한 마을버스 역시 주요 등교시간인 오전 11시까지는 경삼관 앞 뿐 아니라 60주년 기념관에서 하차할 수 있다. 또한 주요 하교시간인 오후 4시부터 송암관 맞은편 승차장에서 교내로 들어오는 마을버스 및 배차되는 셔틀버스를 타고 학교를 빠져 나갈수 있다. 3.3. 한신대학교 서울 캠퍼스 (수유동) [편집] 파일:external/http://bit.ly/2GQPNV8 한신대학교 서울 캠퍼스 수유동 캠퍼스는 수유역 3번 출구에서 강북 02번 버스를 타고 몇정거장을 거치면 도착할 수 있다. 학교 주변 상권은 주택가여서 한산하며 학교를 의식해서인지 주변 카페만 6군데가 넘는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학교 안의 행복커피에 가는 건 함정 더불어 주점과 치킨집도 근처에 4군데 이상 있다. 화계사 근처 거주민들과 옆의 화계중학교 혜화여자고등학교가 있기에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사가 이뤄지는 듯하다. 어차피 신학대학원 학생들 총인원이 200명 정도 되기에 장사 안 된다 학교 운동장 옆 벤치에 노숙자들이 상주하고 있다. 이들은 7명정도 되는 공동체(?)를 이루며 하루에 1명씩 번갈아가면서 일용직 노동을 하고 받은 일당을 나누어 거하게 한잔씩하며 나름 자족자급한다지만... 여전히 노숙자는 노숙자인지라 악취와 소란이 그치진 않는다. 그러나 학교 운동장과 기숙사 앞 민영공원이 서울시와 협업하여 개방은 했는데 주민들이 시민공원급으로 이용하고 민영공원은 하루밥상 식당에서 자기땅 행세를 해서 학교가 더 좁아진 느낌이 든다. 그런데다가 운동장에서 행사를 하면 술취한 취객들이나 노숙자들이 학교로 올라와 노상방뇨를 해대고 여학생들을 성희롱 도서관 유리창을 돌로 깨뜨리는 등의 치안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그런데도 이 학교는 분교이기 때문에 학교 운영에 대한 자치권이 없다. 그래서 신대원 학생회와 여학생회는 이 자치권을 얻길 요구하고 있다. 3.3.1. 캠퍼스 건물 현황 [편집] 정문 예배당(채플실) 장공기념관(본관) 장공도서관 백석관(연구실) 만수관(생활관) 4. 학풍 및 학내 정치성향 / 강의 특징[편집] 한국 진보 학풍의 양대 산맥 애초에 학교를 소유하고 있는 기독교 교단의 신학이 진보적인 편이었고 종합대학 설립 당시에는 광주 민주화 운동 또는 학생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었기 때문에 진보적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80년대 대학생들이면 한번씩은 민주화 운동에 참여 해봤다고 치더라도 타 대학교 보다 평균 이상으로 학생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강하였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솔직히 입학성적이 높은 편이라고는 할 수 없었기에 되려 민주화 운동에 뜻이 있으나 성적은 별로 좋지 못한 고등학생/수험생들이 일부러 민주화 운동을 열심히 하기 위해 한신대를 선택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후일담도 있을 정도이다. 당시의 재학생이었던 동문들의 증언에 따르면 학교 정문 진입로는 연일 최루탄 냄새와 전경들이 가득 메웠고 꽤나 살풍경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87년 체제 이후 형식적이나마 사회 전반에 걸친 민주화가 이루어졌고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채 구태만 답습하던 운동권들의 각종 병크로 인한 반감과 IMF이후 취업문제 등으로 관심사가 옮겨지면서 진보의 색은 점점 퇴색되어 갔다. 결국 학생들 사이에서는 껍데기만 진보라는 비판이 존재한다. 그러나 반대로 보수적인 성향의 학생은 학교가 전반적으로 너무 좌파 지향적이지 않느냐는 비판도 분명히 존재한다. 학생들 사이에서 진보적인 대학인 성공회대학교와 대비되어 언급되는 경우도 종종있다. 결론적으로는 중도진보 신학대학교 간에는 일반적으로 보수도 천주교 군인 성가집에 수록된 마당에 새삼스러울것도 없지 않은가 원래 NL계열 운동권을 상징하던 노래로서 총학생회에서 PD계열이 당선되면 인터네셔널가를 NL계열이 당선되면 민족한신 진군가를 부르는 전통이 있었다. 음이 엄청 높다 항전의 역사를 일군 선배들의 숨결 안에 민족한신 이름높이 투쟁속에 살아온 우리 보아라 조국이여 통일의 새 역사여 단결의 교훈으로 큰 물결을 이루니 투쟁의 함성 조국을 흔들어 역사 위에 영원하라 민족한신이여 보아라 조국이여 통일의 새 역사여 단결의 교훈으로 큰 물결을 이루니 투쟁의 함성 조국을 흔들어 역사 위에 영원하라 민족한신이여 역사 위에 영원하라 민족! 한신! 투쟁! 투쟁! 투쟁! 위의 노래가 나오기 전에 이미 80년중반부터 90년 중반까지 학생들 사이에 거룩하게(?) 불렸던 노래가 있다. 민족 한신가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억압과 가난 분열에 싸여 이제는 이 사슬끊고 나가야 해 웅크린채 결코 시들지 않으리 갈라진 이 땅 하나됨 위해 용솟음쳐라 민족 한신여 우리 함께 사는 세상 다시 만들자 이 땅 위에 살기 위하여 (2절이 존재한다 추가하기 바람) 6. 같이보기[편집] 한국의 개신교: 특히 역사 항목. 장로회 한국의 장로회 한국기독교장로회 신정통주의 성서해석학 WCC 목사 문익환 : 한신대가 학교 측에서 스스로 역사라고 주장하는 인물들 중 특히나 한신대학교와 관련이 깊은 사람이다. 윤동주 시인이나 정치인 장준하의 경우 사실 한신대학교와 겹치는 부분이 그렇게 크지는 않아 직접적으로 같이보기에 기재하기는 그렇지만 해당 항목의 내용을 일부 참고하면 좋다. 그 외 한신대학교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들은 정작 위키에 항목이 없다 보니... 이하의 학교들은 학교 설립 초기 역사는 한신대와 공유하는 부분이 많다. 연세대학교 숭실대학교 총신대학교 성공회대학교 7. 관련인물[편집] 가나다순으로 정렬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무위키에 등재될 정도의 저명성 있는 인물만 기록 가능합니다. 7.1. 정치/사회/종교/학계[편집] 김재준 전)한신대 총장 도올 김용옥 철학자 김규항 발행인 김형식 전)서울시 시의원 문익환 통일운동가 목사 학자 장준하 사상계 발행인 독립 운동가 문동환(정치인) 이규호 전)문교부 장관 박순석 전)국회의원 이우정 여성학자 양권석 전)성공회대학교 총장 이정구 성공회대학교 총장 유석성 안양대학교 총장 황선조 선문대학교 총장 이경호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6대 교구장 김성재 경인방송 회장 전 청와대 민정수석 한명숙 전 국무총리 이철희 국회의원 썰전 이창복 6.15공���선언실천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 고희범 전)한겨레 신문 사장 제주4.3진상규명 명예회복추진 범국민위원회 인명진 목사새누리당 비대위원장 강원룡 경동교회 목사 김상곤 전 경영학과 교수 전 경기도교육감 전 교육부장관 부총리 권도원 한의사 (8체질의학 권위자) 김대벽 사진작가 (문화재 기록 전문 사진가 전 서울예대 교수) 황지우 전 문예창작학과 교수 전 한예종 총장 권오영 전 국사학과 교수 현 서울대 인문대 국사학과장 안병무 전 신학과 교수 민중신학 발원자 7.2. 문화/예술/연예계 인물[편집] 강맑실 사계절 출판사 대표이사 이상용 출판사 휴머니스트 대표이사 김규항 출판사 고래가 그랬어 대표이사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 구수정 한국베트남평화재단 이사 정문태 한겨레신문 분쟁지역 전문기자 박화목 아동문학가시인 고정희 시인. 여성신문 편집주간 김대벽 사진가 이지상 영화감독 이준혁 배우 허준(게임캐스터) MC 송용진 뮤지컬 배우 김용민 시사평론가 MC 정을병 소설가 송우혜 소설가 조동범 시인 함정임 소설가 [1] 수원시에 위치한 수원영생고등학교가 같은 법인에 속해있다. 한국신학대학시절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위치한 한신초등학교도 한신학원 산하에 있었으나 1982년 12월 10일 심산학원으로 학교 법인이 바뀌었다. 설립 이념은 '믿음 소망 사랑'으로 수원영생고등학교도 같다. [2] 그리고 ���것이 장로교 총회에서 인정받지 못해 신학교가 정식으로 인가받지 못함에 따라 장로교 주류와 고신파 사이의 갈등은 더욱 심각해졌다. [3] 이 문단은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한신대 입장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정의해서 그것을 누명이라 할 수도 있지만 보수 신학자들의 정의는 다를 수 있고 따라서 여기에 서술된 자체를 자유주의 신학이라 칭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자유주의니 어쩌니 하는건 다른 보수교단에서나 민감할 사항일지도... 한신대에선 칼바르트가 가장 오른쪽 취급을 받고 조직으론 라가츠의 종교사회주의나 최근엔 화이트헤드와 과정신학까지 성서학은 역사비평을 넘어 포스트콜로니얼리즘에 기반한 해석학까지 왼쪽 스펙트럼으로 가르치는 성향이 짙다. 오른쪽을 모른다는건 아니다. 그리고 소위 (보수교단보다 비교적으로) '진보신학'을 자긍심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한신대 신학생들한테 가서 자유주의 욕해봐야 언제적 자유주의? 라는 질문을 받을수 있다. [4] 그러나 경기노회가 김재준을 면직시키지 않았기에 결국 다음해(1953) 4월에 열린 38차 대구총회에서 총회장이 직접 면직을 선언했다. [5] 대한예수교였다고 설명하는 글도 있다. [6] 물론 기장 그들만의 총회다. 단지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생각하여 총회 회기를 잇는 것 뿐 [7] 성경'은 신적 권능에 의해 전승된 유일무이한 권위를 가진 '경전'으로서 문자적 의미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봄 [8] 성'서'는 하나님을 체험한 인간들이 생산한 역사적 전승이므로 역사적 컨텍스트를 기반하여 그 한계를 인정하고 해석 연구된다고 본다. 최근엔 고등비평보단 역사비평이라는 이름이 더 적합하고 요즘은 보수교단소속 성서학자들도 상당수가 역사비평을 사용함 [9] 그래서 일부에서는 개혁주의를 다시 바로 세우기 위해 나타난 경향이라고도 한다. 그 외 신학자이자 실존주의에 속하는 철학자인 키르케고르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10] 훗날 강원대학교가 되는 춘천농업대학교 학장 함인섭의 부친이기도 하다. [11] 부친으로부터 상속받았다고 한다. [12] 2014년 수리금융학과로 개편된 이후에는 변화에 따라 수정바람. [13] 한신대의 경우 학생증이 국민은행의 체크카드로 만들도록 되어있다. [14] 일반적으로 학생이 수강할 수 있는 최대 학점이다. [15] 2010년 기준 전국대학 34위 출처는 교육통계데이터베이스. [16] 1차 필기시험 1등 2차 면접시험 1등 http://bit.ly/2Rh2ig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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