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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03
704호 살고 있다. 703호에는 노부부가 살았다. 어느 때와 다름없는 시간에 출근하고자 현관문을 열었고 동시에 119대원 한 분이 급하게 703호 안으로 들어가는 걸 목격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구급 대원이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는 동안 나는 잠시 703호 집안에 들어가 있었다. 두 분만이 살았는데 한 분이 먼저 가버린 순간을 모른 척 지나칠 수가 없었다.
할머니 손을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집안을 둘러볼 수밖에 없었는데, 시각보다 냄새가 먼저였고 이곳을 쓰레기 소각장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703호가 과하긴 하지만, 대체로 내가 만나본(또는 집 구경을 해본 경험상) 노인들은 물건과 음식을 잘 버리지 않았다. 왜 그럴까.
할머니는 내게 고해성사라도 하는 듯이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너무 무서워서 할아버지가 누워있는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30분 넘게 119에 신고도 하지 않았다는 고백이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자식 여부를 묻고 자식분들의 거주지를 물었고 지금 당장 연락하라고 시켰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현관문을 활짝 열어둔 채로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아드님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쓰레기를 갖다 버리고 있었고 문틈 사이로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악수를 하고 짧은 대화를 나눴다. 이 날로 목격자로서의 나의 행동은 일단락이 되었지만, 이틀에 걸쳐 펼쳐진 할머니 집 쓰레기 방출 청소는 또 다른 목격의 예고편이었다. 바로 바퀴벌레의 등장이다. 703호에 살고 있던 바퀴벌레는 삶의 터전을 잃고 일단 가장 가까운 704호, 즉 내 집으로 넘어온 것이다.
첫 번째, 내 집에서 바퀴벌레가 키워질 확률은 거의 없다. 이쪽 방면으로는 도가 튼 나는 방역 회사 수준에 청결도를 유지할 줄 안다. 잘 알겠지만 바퀴벌레 퇴치에 대단한 결벽증이 필요하지 않다. 벌레가 좋아할 장소를 깨끗하게 유지만 하면 설령 바퀴벌레가 산다 한들 내 눈에 보이는 일은 없다. 두 번째. 703호와 붙어있는 발코니와 방에서부터 목격됐다. 그것도 이미 다 자랄 만큼 자라서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큰 성충이다. 내 집에서 먹고 자랐을 확률은 극히 적고 세 번째가 가장 확실한 증거다. 나는 할머니가 자식분들과 통화하는 동안 보았다. 무슨 일이라도 났냐는 듯 방바닥을 돌아다니던 바퀴벌레를 보았다. 크기와 모양새가 내 집에서 본 바퀴벌레와 똑같다. 내가 놀란 건 바퀴벌레가 바퀴벌레라서가 아니라 노부부가 살던 집에서 본 바퀴벌레와 똑같아서였다. 이런 순수한 녀석들... 바퀴벌레를 담은 휴지뭉치를 들고 강아지에게 말했다. 네가 좀 잡아봐라.
쓰레기 소각장에서는 불에 타는 쓰레기, 불에 타지 않는 쓰레기로 1차 분류를 한다는데(태울 때 발생하는 대기오염 기준치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타는 쓰레기로 분류된다. 조금 이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타는 쓰레기인 인간은 생활하면서 쓰레기를 만든다. 바퀴벌레 입장에서 703호든 704호든 1203호든 알 바가 아니다. 집 안 곳곳에 소독약을 바르면 좋겠지만 반려견을 키우는 입장에서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강아지는 발보다 혀가 더 빠르다. 그리고 한 달 후면 난 이 집을 떠나 다른 집으로 간다. 30일�� 바퀴벌레와 동거하는 경험... 가져볼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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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f-luvr-4evr
Thanks to your comment, I didn’t end up throwing this piece away. It might come off as a bit much—or a bit cringey—but still, I wanted to leave a small note of thanks. I’ve included the original Korean and its English translation below
릭스역 근처 몬타나역 상류에 가면 미스 초이의 오리엔탈 클리닉이 있다. 언덕을 조금 올라, 흰 펜스 안으로 들어가면 당신은 2층짜리 하얀 나무 벽에 연노랑색 지붕으로 된 집을 볼 것이다. 앞마당에는 약초가 심어져있고, 당신이 본 적 없는 짧은 화살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현관에 한발짝 올라서면 못되게 생긴 회색 고양이가 있을 것이다. 그 짐승은 당신을 감시하듯, 올려다 볼 것이다. 그 짐승은 늘 처음 보는 인간에게는 그런 태도를 취했다. 공격은 하지 않을 것이다.
If you head upriver from Montana Station near Riggs, you’ll come across Miss Choi’s Oriental Clinic. Climb a little hill, step past a white fence, and you’ll see a two-story house with white wooden walls and a pale yellow roof. In the front yard, herbs grow in neat rows, and you might even spot some short arrows you’ve never seen before. Step up onto the porch, and there will be a gray cat with a sharp, watchful face. That creature will stare at you as if it’s evaluating your worth. It always behaves that way with strangers. It won’t attack you, though.
당신이 잠시 그 회색 짐승을 내려다보다가 노크를 하려고 문을 보면 문에는 황동 팻말이 하나 걸려있을 것이다. “미스 초이의 오리엔탈 클리닉”이라고 쓰여있는 문에 당신이 노크를 하면 ‘누구세요’ 같은 말은 기대하지 마라. 그 클리닉의 주인인 아이리스 초이는 항상 누군가가 올 것을 알고 있다.
If you glance down at the gray creature for a moment and then reach for the door, you’ll see a brass plaque hanging there. It reads: “Miss Choi’s Oriental Clinic.” Don’t expect to hear a “Who is it?” when you knock. Iris Choi, the woman who runs this clinic, always seems to know when someone’s about to arrive.
체구가 작고, 검은 머리를 땋아 내린 단정한 동양인 여성을 본다면, 그녀가 아이리스 초이다. 당신이 들어가면 탄 쑥 냄새가 집안에서 날 것이다. 나무로 된 바닥, 장작이 잔뜩 쌓여있는 벽난로, 커피테이블과 낡은 소파. 그 위에 왠 덩치 큰 백인 사내가 커피를 마시고 있다가 당신을 슥 돌아본다. 엇자란 턱수염, 낯선 이를 경계하는듯한 눈빛. 어쨌거나 당신은 그 옆에 앉는다. 아이리스가 차를 가지고 돌아오면 그 때부터는 당신도 이곳의 손님이다.
If you see a petite Oriental woman with neatly braided black hair, that’s Iris Choi.As you step inside, the scent of burnt mugwort will greet you. Wooden floors, a fireplace stacked with logs, a coffee table, and a worn-out sofa— on it, a broad-shouldered white man is sipping his coffee. He glances at you with uneven stubble and the wary eyes of someone used to strangers. Still, you take a seat beside him. When Iris returns with a tray of tea, that’s when you become a guest here, too.
옆의 백인 남자가 피우는 담배 냄새, 말린 쑥 냄새가 나는 이 곳에, 팬서의 눈을 한 회색 고양이가 당신을 쳐다보고 있는 이 곳에, 편하게 앉아 있다 가시라. 모닥불을 보며 멍을 때려도 좋고, 고양이와 놀아주어도 좋고, 아이리스의 진료실에 꽂힌 책을 읽어도, 그녀가 화살을 정리하는 걸 지켜봐도 좋다. 혹은 어퍼몬타나의 물 흐르는 소리를 배경 삼아 집에 있던 사내가 장작을 패는 동안 그의 남성적인 매력에 침을 흘리며 구경하는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 쉬다 가시라.
In this place—where the white man's cigarette smoke mixes with the scent of dried mugwort, where a gray cat with panther eyes watches your every move— you’re welcome to sit and stay awhile.
Stare into the fire. Play with the cat. Read one of the books tucked away in Iris’s clinic, or watch her sort her arrows in quiet focus. Or perhaps, with the sound of the Upper Montana River in the background, you'd rather spend the day watching the man of the house split firewood—admiring his rugged charm and maybe drooling a little while you're at it. That wouldn't be such a bad way to pass the time, either.
Just… rest, while you're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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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점점 못하는 핑계만 찾고 있는듯하다. 내 자신에게 부끄러운 일이다ㅡ 나 혼자만의 비밀처럼 내비치지 않았던 것들이 점점 은유적으로 나타나고, 오고가는 엠비언스가 내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의 것들이다. 상대가 먼저 내려놓고 다가오니, 다 그런거 아니겠냐며 위로하다가도 다른 한 면으로는 나는 대체 어떻게 비치는지 궁금해졌다. 나 역시도 안정된 위치는 아닐텐데 지금의 이 불안감은 비슷한 처지에서는 반복적으로 느끼고 있는 감정인가 보다ㅡ
감정, 내 일에 있어서도 냉소적인 편이라. 일에 있어서는 더욱 냉정한 잣대가 움직인다. 글쎄 그게 ��마나 영향을 미칠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다양한 작용을 하겠지ㅡ
그래서 더 모아놓고 목소리를 세우려하나, 그래서 테두리 안으로 모으려고 하나. 근데 점점 그 중심을 잃는 것 같아, 자꾸 안될일만 찾게 된다. 될일을 찾아야지. 자신을 얻을 방도, 정신차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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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입기 참 어정쩡한 계절이 왔어요 ..
이 옷은 원래 작업복인데 몇년전 목에 카라를 떼내는 수선을 했어요
겨울철엔 찬바람이 안으로 못들어오게 목이 긴 옷만 고르다보니 겹겹이 껴입다보면 나중엔 목이 졸려서 머리가 띵 해질 정도더라구요
그래서 일부러 목에 카라를 떼내고 그냥 입었는데 이게 또 적당한 따듯함과 편안함을.갖춘 옷이라 십몇년이 지나도록 입고 있쥬 .
교회에 저 아는 분이 제 옷차림에 유독 관심이 많아 사사건건 말이 많은분이 있는데 ( 그럴거면 사주던가..아니면 말을 말든가 )
요즘은 이렇게 목없는 패딩이 유행 하니까 하는 말이
" 그건 잘샀네 .. " ( 이거 십몇년 된건데 ..ㅋㅋㅋ )
유행은 돌고돌며 취향은 사람마다 다르다 ..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착용할까는 남에게 나를 내보이고싶은 내가 내삶의 주인일때 나타난다
중요한건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가 중요한게 아니고 하나님이 날 어떻게 보실까가 중요하다
부자는 슬리퍼에 잠바 하나만 걸쳐도 사람들이 인정하듯 무엇으로 나를 치장하느냐가 아닌 내가 누구인가가 핵심이다 ..
아무리 몸부림처도 어차피 그리스도 안에 있지 못하면 천국은 못간다.. 모아놓은것들이 가진 모든것들의 가치가 무의미한것들뿐 ..
세상의 유일한 가치 그리스도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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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파도가 치면 지레 겁을 먹고 모래성을 부수기 급급했다_(나의 비겁에 관하여)
나는 파도가 치는 바다에 수십년을 살아가면서도, 늘 철썩이는 파도소리만 들어도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기 일 수였고 어느 날은 밀물에 불어나 수면을 넘어오는 그것들에 지레 겁을 먹고 내가 손 수 세웠던 모래성을 다시 내 손으로 부숴버리기 급급했다.
소중했던 것들을 잃었던 기억들을 되돌아보면, 항상 도망치는 쪽은 나였고, 상대방은 영문도 모른 채 서 있다 등을 돌려 떠나버리거나, 쫓아오기에 지쳐 포기하고 그 자리에 멍하니 도망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마다 나는 ‘그럼 그렇지, 저런 사람이었다니까.’ 와 같은 역겨운 자기위안에 빠진 채 스스로가 슬기로운 선택을 하였다는 고독한 안도감의 모래지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깨달은 것은 언제였을까, 한 연예인이 몇 년 전 예능에서 ‘늦었다고 생각하였을 땐 정말 늦었다.’라고 농담같이 말했던 이야기가 뜬금없지만 그 깨달음과 함께 떠올랐다. 내 멍청함을 깨달은 것이 언제였든, 나는 내 손에 움켜쥐었던 모래들이 이미 제 스스로 빠져나가고 있음에도 애써 먼저 손을 펼쳐 털어버리는 짓을 반복하면서 많은 것을 잃어버린 이후이기에 결국엔 후회 섞인 비통함으로 반죽한 감옥에 스스로를 투옥할 수밖에 없었다.
웃긴 이야기는-사실 역겨운 이야기이겠지만 서도- 이런 나에게 늘 다가오는 사람들이, 다가오는 기회들이 있었고 그들은 여전히 친절하고 건강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비참한 현실인가, 내 토악질 나오는 본 모습을 가리기 위하여 쓰고 다닌 가면이 이렇게 매력적이라니. 처음부터 나 자신을 그렇게 가꾸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인가? 사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어느 망해버린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멀티버스 세계관처럼, 어떤 행동을 하고 난 후의 변화의 경우의 수는 무한대로 뻗어 나간다. 하지만 누군가는 분명 자신의 변화가 긍정적일 것이라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 뿐이며, 나는 그러지 않을 수많은 삶을 리스크 체크라는 변명으로 포기했을 뿐이다. 누군가는 이 해변에 서핑샵을 열고, 파도를 타며 저녁이면 우드 향 가득한 위스키에 탄산수를 조금 타 마무리하며 깊고 안온한 잠에 들겠지만, 나는 내 선택들의 연쇄효과를 통하여 비어버린 해변에서 파도소리에 공포를 느끼면서도, 스톡홀름 신드롬이 생겨버린 피해자처럼 ‘파도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나도, 변화를 해보겠다고 가끔 내 해변에 모래들을 열심히 반죽하여 성을 쌓는 날들이 있다. 그럴 때면, 완성된 성의 모습을 상상을 하다, 누군가 나의 해변을 지나가다가 칭찬과 관심을 보이며, 대화를 이어가고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는 그런 미래가 있지 않을까 퍽이나 쓸데없는 망상으로 변질되고는 한다. 자, 하나의 예시를 들어보자. 나는 남들과 비교하여도 객관적으로 불행하다고 할 만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외모와 행동으로 인한 왕따, 그로 인한 반사회적 성격 형��, 악순환처럼 이어지는 스스로의 고립까지. 하지만 분명 그 사이에도 나에게 손을 내밀어준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였다. 사소한 것에도 예민하고 방어적이며 그룹활동을 철저히 거부하는 나를 교실 안으로 다시 들여준 선생님들, 집 가는 길 나를 처음 같이 PC방을 가자고 하며 끌고 가준 친구들, 기억엔 없지만 수없이 많은 호의가 나를 지나갔다. 그래서? 나는 지금 어떠한가? 그 때의 나보다 외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음에도 결론적으로는 내면적으로는 동일한-혹은 더 퇴보한-사람이지 않는가?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나에게 어떤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고, 더욱이 나의 이 어두운 면을 감싸주려 노력하였다. 하지만 결국에 연락처를 바꾸거나, 타지로 도망가거나 등 다양한 이유로 그들을 끊어낸 것은 역시 나였다.
영장류는 학습을 하여 발전을 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이 수많은 사례들만 봐도 ‘나는 그 고통을 통하여 성장하고 알을 깨고 나아갔다’는 희망적인 결말을 그려낼 수 있을 정도가 아닌가. 하지만 여전히 나는 한 자리 수의 평수 단칸 방 침대에 누워 불면도 숙면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 에서 시간을 버리며 살아가다 결국 서른이라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그 사이에 나는 군대를 다녀왔고, 대학을 자퇴했고, 수 번의 이직을 하며 조직에 녹아들지 못한 채 떠돌고 있다. 그렇다고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괴짜 천재들처럼 비범하지도 않으며, 남들 모르게 세상을 구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저 그런 한심한 존재로 남아있다.
이제 제법 빠르게 모래성을 지을 수 있고, 언제쯤이면 이 파도가 해수면을 넘어오는지 감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만들어낸 것은 빠르게 지을 수 있는 모래성 도면과 어디쯤에서 부수게 될지에 대한 예측이다. 이것은 마치 삼체 문제 마냥 내가 아무리 견고한 가설을 쌓아도 무너지고 만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룬 것이 없는 삶을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이 삶이 어디서 끝날지 알 수 없다. 몰디브처럼 언젠가 바다에 잠길지도, 혹은 그 전에 나의 해변에 모래가 모두 파도에 이끌려 도망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얻은 하나의 교훈은, 여전히 나는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대학교 과제로 글을 쓸 일이 생겨서, 이 축복을 담아 꾹꾹 눌러 써 기고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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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고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지는 삿포로였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날 가장 항공권이 싼 곳이었다. 내 어느 젊은 날 때처럼 별 고민 없이 떠나보기로 했다. 처음으로 오후 비행기를 탔다. 오후 출국장에는 패키지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혼자 해외여행 다니는 건 참 대단한 일’이라며 중얼거렸다. 약 3시간 비행 끝에 어둠이 깔린 신치토세 공항에 내렸다. 공항은 매우 한적했고 입국 수속은 10분 만에 끝났다. 이렇게 쉽게 일본 땅을 밟은 것도 처음이었다. 국제선 게이트에서 국내선 게이트로 이동해 도심으로 가는 JR선을 탔다. 자유석과 지정석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자유석을 끊어 선 채로 갔다. 옆에 앉아도 되겠냐고, 안으로 들어가 줄 수 있냐고 묻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JR 삿포로역에 내려 스스키노역으로 가는 길을 찾는데 처음으로 혼자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성격상 나와 아내는 서로를 그다지 의지하고 살지 않는데, 익숙하지 않은 곳에 서자 빈자리가 느껴졌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다. JR 삿포로역에서 느낀 외로움은 젊었을 때 그것과 같았다. 구례공영터미널에서 지리산 둘레길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느낀 외로움, 튈르리 공원을 걸으며 언젠가 가족과 함께 오고 싶다며 느낀 외로움 등이 떠올랐다. 삿포로에는 비가 내렸다. 스스키노역에 내려 호텔까지 비를 맞으며 걸어갔다. 젊었을 때처럼, 고어텍스 재킷이 빗방울을 튕겨내는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짐을 풀고 나와 스스키노의 밤거리를 걸었다. 한국인은 나이트클럽 입장이 무료였다. 피식대며 걷다가 22시쯤 라멘을 먹었다. 그 시간에도 라멘집은 웨이팅이 길었다. 술값이 싼 일본이라 위스키바를 기웃거렸으나 언어도 통하지 않고 대화 나눌 상대도 없는 혼자인지라 호텔방으로 들어갔다. 일본 관광지에 한국인이 없으니 참 어색했다. 다음날 새벽 근처 공원까지 뛰었다. 삿포로에는 이미 단풍이 들었다. 맑은 공기와 경치에 빠져 TV타워와 니조시장까지 돌았다. 거리에는 일본 사진 동호인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사진을 한 장 부탁했다. 오후에는 수산시장에 가서 해산물을 구경하고 백화점을 돌며 아내의 선물을 샀다. 평소 쳐다보지도 않던 과자와 디저트를 잔뜩 샀고 주류숍을 구경했다. 국내에 들어오지 않은 브랜드 스토어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조금만 더 어렸으면 바로 샀겠지만 이제는 선뜻 지갑이 열리지 않는다. 저녁에는 최근 새로 생겼다는 전망대에 올랐다. 트램을 타고 이동해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 전망대에 생중계 카메라를 달아놓고 밑에서 구름 상황을 볼 수 있게 해놨다. 위에 날씨가 어떻건 손님을 끌어모아 돈 벌려는 어느 나라와는 달랐다. 이 전망대에서 보는 야경은 2022년에 일본 3대 야경으로 뽑혔다고 했다. 30대라 그런지 돌아오는 트램 안에서 조금 졸았다. 다음날 새벽 러닝은 생략했다. 지난 도쿄 여행 때 조금 무리했더니 귀국해서 병원 신세를 졌다. 마음을 비우고 스포츠 전문점에 갔다. 육상 강국인 일본답게 제품이 많았다. 행복함과 아쉬움은 늘 함께 찾아온다. 마지막 날인 만큼 고로상처럼 지나가다 아무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했다. 맑은 하늘 아래 햇볕을 좀 쬐다 공항으로 이동했다. 신치토세 공항 출국 면세점에는 별로 볼 게 없었다. 식당가는 컸는데 가격이 비쌌다.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줄 초콜릿과 과자를 사서 비행기에 올랐다. 마중 나온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결혼하고 몸과 마음이 조금 약해진 것 같았는데 이번 여행으로 조금은 더 단단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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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이사라는 것은 한 사람이 치를 수 있는 가장 역동적인 행위 중 하나인 것 같다. 내가 가진 모든 짐을 지고 날라 새로운 공간에 일일이 놓는다는 일만 해도 엄청난 위치에너지의 이동인데, 이삿날 전과 후로도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과 정신력과 체력이 드는가. 물건들이 새로 ‘제자리’가 될 자리를 찾아가고, 나 또한 이곳에 마침내 고정되었다는 느낌이 들기까지는 물질적으로도 내면적으로도 한동안 격변의 시간이다. 생활 환경에 대한 적응은 한 달 정도 걸린 것 같다. 우리 고양이가 편안해진 시점도 고려하면 거기에 일주일 쯤 더해야 할 테고. 격동의 적응 기간 동안 있었던 사소한 사건들과 마음들. 노트북을 켜고 가만히 앉아 적고 있을 수가 없어 속으로만 몇 문장 읊다가 자는 날들이 있었다.
전에 살던 집의 계약 기간이 끝나려면 멀었었기 때문에 여러 핑계거리를 만들었어야 했고, 그것만 해도 한 페이지를 쓸 수 있었다. 은행과 부동산을 드나들며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기며 불안하고 위축되었을 땐 돈에 관한 한탄을 늘어놓고 싶었고.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이사를 하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드는 집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으며, 5월 초 이사 온 직후에는 만개한 봄이 이 집에서 얼마나 예쁜지, 내가 커다란 나무들과 아카시아 냄새, 새 지저귀는 ���리를 배경으로 살게 되어 얼마나 벅차오르는지 쓰고 싶었다. 행복하다는 느낌이 나에게 생소한 만큼 그 순간에 확실히 적어두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가족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 부모님이 사는 아파트 옆 동에 오빠네가 살고 나는 거기서 걸어서 10분 거리다. 또 살가운 새언니가 생겨서 다같이 자주 얼굴을 보고 자주 식사한다. 그러면서 하지 않던 이야기도 하게 되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되고 언쟁도 생긴다. 한 가족이라는 집단도 역시 사회의 집약체인 것이다. 사회 전체와 꼭 같은 퍼��티지로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섞여있다. 이 당연한 사실이 이사 후 두 달이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나를 격동의 상태로 만든다. 아버지와 나는 이번 대통령 선거 전날 서로 언성을 높여 말다툼을 했다. 아버지와 이제까지는 대화를 해보지 않은 주제였던 것이다. 하기야 우리가 대화라고 할 만한 대화를 한 적이나 있나. 그날도 대화라기보다는 1호선 거렁뱅이 두 명이 내는 의미 없는 역정에 가까웠다. 엄마한테 듣기로 아버지는 그날 밤 잠을 주무시지 못했고 나는 후회했다.
그리고 그 짧았던 시간이 아직도 나를 골몰하게 한다. 나와 너무 다른 아버지. 그런 아버지와 닮은 나. 평생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랑하는 마음과 미운 마음이 꼭 절반 씩인 아버지를, 대가리가 한참 큰 다음에야 들여다보고 있자니 자꾸만 내가 보인다. 아버지뿐 아니라 나도 이해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나와 다르다고 저멀리 그어둔 선에 다가가야 할 것 같다. 읽고 싶은 책이 무언지 정하지 못하고 서점 안을 배회한다. 무엇이든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은데 무얼 알아야 할지 몰라 답답하다.
우리집에 처음 왔을 때 숲길을 따라 조금만 더 안으로 걸어가면 절이 있다는 걸 알고 환호했었는데, 코 앞의 절을 두고도 시끄러운 문제만 찾아가고 있다. 첫 몇 주간의 평화를 역시 적어두었어야 했다. 그런 시간은 드물고 귀하니까 말이다. 나에 대한 고민, 나와 다른(다르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에 대한 고민.. 왠지 여기 오면 좀 단순해질 것 같았다. 좀 더 넓고 해와 바람이 잘 드는 집, 좀 더 편안한 집 찾아가면서 도대체 몇 번이나 이사를 했냔 말이다. 마침내 그리던 집을 찾아왔고 쓸데없는 짐들은 다 버려두고 왔는데, 왜 쓸데없는 고민들은 변함없이 나를 따라오는 걸까. 나는 어떻게 이렇게 그대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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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새벽에
그러니까 토요일 새벽에 악몽을 꿨다. 고함을 지르면서 깼다. 악몽은 워낙 자주 꿔서 기분이 나빠질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다. 이삼일에 걸쳐 꾼 꿈이며 드디어 완결이 났다.
오래전에 좋아했던 사람이다. 꿈속에서 그녀는 나를 자기 집으로 삼고 있었다. 위장 쪽에 터를 잡아두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장기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심장이랑 인사하고 기도를 타고 올라 콧구멍으로 나온다. 내 몸 밖으로 나오면 1초도 안돼 나와 비슷한 크기로 커진다.
세상 밖으로 나온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껴안는다. 나도 그녀를 껴안는다. 따뜻하고 낯익은 얼굴이 갑자기 음식물 쓰레기로 뒤엉킨 부패한 얼굴로 바뀐다. 잠시만! 잠깐만! 안돼! 살려달라고 도와달라고 큰소리를 내지만 허연 벌판에는 우리 밖에 없다. 그녀는 1초도 안돼 콧구멍보다 작은 사이즈로 줄어들어 내 몸 안으로 침투한다. 왼쪽 눈알에서 흘러나오던 구덩이를 보았는데 말이다.
바짝 썩어버린 그녀는 내 식도를 후려치고 심장 위에 앉는다. 입가에 미소를 띠더니 득의양양하게 벌레들을 쏟아낸다. 그녀의 몸 전체에서 쏟아져 나온다. 내 오장육부는 이런 그녀를 좋아하고, 나는 무서워죽겠는데 저항 하나 못한다. 악몽에서 깨고 나면, 역시 난 상여자를 좋아하는구나, 혼자 중얼거렸다.
다 자기 손안에 쥐고 있으면서 헤매던 그녀를 좋아했다. 입맞춤이 깊어지면 입술 때기가 싫어 더 다가가곤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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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 1
나이들어 이런 글을 쓰고 하는게 부끄럽고 챙피하기도 하지만 가끔 거짓인지 진실이지는 모르지만 경험담이 있어 읽어보기도 한다. 아내도 읽어본다. 처음에는 미친놈들 이라 했느데 요즘은 그냥 읽어보고 말이 없다.
왜냐하면 50중반에 섹스에 활력이 없고 그냥 생각나면 삽입해서 일처리 하듯 하니 아내도 새로움을 찾고 싶은데 표현은 못하고 그냥 속으로 불만만 쌓여 가고 있다.
그래서 일년전부터 여러 사이트를 통해 아내와 같이 가끔 동영상을 보곤 하는데 아내는 스와핑에 관심을 두는 듯 하고 나는 쓰리섬에 관심을 두고 보다가 함 하자 하면 그냥 한다.
길어봤자 10분이지만 후다닥 하는게 맞다.
나는 자영업자다. 가게에서 아내와 같이 운영한다. 오후 1시쯤 열고 오후8시쯤 닫는다. 주로 배달을 한다. 유행물건도 아니고 필요업체에 납품하는 한마디로 괜찮다.
내가 배달나가면 아내가 가게를 운영한다. 일주일에 몇 번은
같이 배달가기도 하는 그런 업종이어서 자유롭다.
25년을 했다.
아내는 카섹스를 좋아한다. 그래서 오다가 늦으면 저녁먹고
스타렉스에서 카섹을 즐기기도 한다.
세월은 섹스의 감각을 무디게 한다.
어느날 아내가 앞으로 그냥 삽입금지라고 한다. 아프니 충분
히 물이 나오면 삽입하라고 한다. 그러겠노라 했다.
하루는 아내가 눈이 동글해져서 여보 내친구 다래가 하는 말
남편과 마사지샵에 갔는데 마사지사 남자가 팬티까지 홀랑
벗기길래 소리를 질렀더니 남편이 옆에서 여기 원래 그렇게
하는거야 팬티에 오일 묻어 하고 남편이 옆에 있는데 멀 그
랴 하면서 엉덩이에 수건하나 달랑 덮고 마사지하는게 아닌
가, 남편은 여자가 아내는 남자가 하는데 마흔살 정도 되어
보이는데 헬스를 했는지 몸이 엄청 좋더라네.
그런데 여자가 남편 등을 맛사지하더니 남편이 코를 골며 잠
이 들자 나가버리더라는 거야.
그런데 맛사지사가 마사지를 하는데 너무 기분이 좋고 실력
이 좋더라네 . 도중에 손이 음부 근처까지 왔다가 지나가고
엉덩이 항문을 건드리는 듯 살짝 지나가고 아랫배와 허벅지
에 힘이 들어가고 긴장이 되더라는 거야.
남편은 코를 골며 잘 자고 있는데 다래도 스스르 잠이 오기
시작하는데 잠이 들었는데 귓가에 조용히 들려오는 소리에
사모님 특별마사지 이시죠. 라는 거야 잠결에 대답을 한거
같기도 하고 헷갈리더라는 거야.
이 마사지사가 에로틱마사지라는 거를 하는데 흥분되서 잠결
인지 꿈인지 기분이 매우 좋더라는 거야.
마사지사가 엉덩이 뒤에 앉아서 음부를 지긋이 눌리는데 숨
쉬기도 힘들고 가만 있었더니 안으로 살짝 들어오는데 꿈 꾸
는거 같아서 몸이 말을 듣지 않더라는 거야 근데 마사지사의
먼가가 점점 깊이 들어오더니 움직이더라는 거야 .
그러다가 갑자기 쑥 빼더라는 거야. 당황스러워 남편을 쳐다
보니 잘 자고 있고 마사지사가 엉덩이를 마사지하다가 음부
가볍게 만지다가 다리를 벌리더니 음부를 빨더라는 거야.
못하게 말을 하려는데 마사지 침구에 얼굴이 파묻혀 말도
신음도 안나오더라는 거야.
너무너무 잘 빨아주더라는거야 그러더니 손으로 음부안을 ���
사지해주는데 거의 홍콩갔다 왔다는 거야.
잠시 조용해 지더니 뒤에서 삽입하여 막 박는데 어억 소리만
지르는데 한참을 하다가 말고 하다가 말고 하더니
안에 사정을 하길래 너무 놀라 얼굴을 들고 보니 남편이더라
는거야 , 여보 나야 뭐 그리 놀래 하더라는거야.
이런 이야기를 아내가 놀란 듯이 하는 것이다.
아내는 마사지 실태를 모르는 듯하다 .
권태시기에 마사지를 통해 마사지사가 어느정도 해주면 마지
막은 남편이 장식하는 거 많이 한다. 요즘 세상이다.
하니 아내는 거짓말이다.
그래서 우리도 한번 가보자 하니 흔쾌히 좋다 한다.
다래도 해보는데 난들 못하리 해서
막상 하려니 심각해진다. 모르는 마사지사의 자지가 아내의
보지에 들어간다. 동��상이나 야설에서나 있는 이야기를
직접해보려 하니 정말 긴장되고 두렵기도 하고 망설이게
야동, 야설과 현실은 다르구나를 느끼게되고
그래서 경험있는 친구들과 업체 꾼들에게 자문을 구해보는
데 아내와 마사지샵을 이용하는 부부가 생각보다 있다.
머눈에는 머만 보인다고
그래서 마사지업체를 알아보고 마사지사와 작전계획 세워
아내는 오십중반이다. 실망 스럽지 않겠나 하니 요즘 60대
부부도 오신다라고 걱정마시라고
디데이날 저녁 먹으면서 아내와 술을 좀한다.
아내는 소주한병이면 많이 취하는데 맥주를 하면 많이 흔들
린다. 살살 꼬셔서 맨정신이 힘드니 술 좀 마시고 가자.
내가 더 떨린다.
마사지사에게 삽입시에는 콘돔 착요하라고 했다.
겁나서 쫄았다.
술취해 입성 아내는 저쪽 나는 이쪽 마사지를 하는데
2시간이라고 하자 아내는 알았다고 끄떡인다.
아내는 키가 163정도 몸무게65키로 좀 통통하다.
우리 부부는 매일 오전에 피트니스를 한다. 일주일에 4일
은 반드시 한다. 10년정도 했는데 아내는 50중반에 탄력
있고 아내는 보지가 정말 이쁘다. 인터넷 야동등을 봐도
아내 보지만큼 이쁜 보지는 본적이 없다. 신기하게도
보지 주변은 아주 깨끗하고 보지털도 삼각형으로 환상이다.
식당에서 마사지하다가 본의 아니게 마사지사의 자지가 삽입
될수도 있다는데 당신 괜찮겠어 할 수 있겠어 하니 웃기만
한다. 술김에 하는 말이 기대된다고 하네 그러면서 아랫도리
에 전기 통하는거 같다고 한다.
기분 안좋으면 바로 일어나서 갈거라고 한다.
마사지사에게 예의를 반드시 지키고 부드럽게 하라고 했다.
마사지사는 아내의 머리부터 시작하는데 얼굴 가슴 발가락
종아리 배 허벅지 순으로 부드럽게 한다. 배꼽과 보지부분은
흰수건으로 덮어놓고 사타구니 사이도 맛사지하니 아내의
다리가 부르르 떨리다가 비틀어지지기도 한다.
이제 뒤를 한다. 얼굴은 침구 구멍아래로 파묻고 마사지사의
등 엉덩이를 집중해서 하는데 아내가 꼼짝도 안한다.
잠든거 같은데 마사지사가 아내의 귀에 대고 머라고 말을
하는데 아내는 응답이 음음하는거 같다.
엉덩이 사타구니 안으로 손바닥으로 보지를 마사지 하는데
아내의 몸이 비틀린다. 손바닥, 손가락으로 보지 마사지
농도를 높여간다. 아내의 신음소리 으윽 어응 어응 으음한다.
한참을 하더니 아내의 엉덩이로 잽싸게 올라타더니 좆으로
아내 보지를 짓누르고 문지른다. 아내의 신음이 점차 커진다.
거부하는 몸짓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더니 좆이 보지속으로 쑥들어가더니 돌려된다.
아내의 엉덩이가 위로 올라온다. 세상에 엎드린 상태에서
엉덩이를 들어올려 좆을 받는다. 아내가 엎드린 자세로 상하
운동을 하는 적극성을 보인다.
마침내 신음소리가 으으으하더니 울음소리가 들린다.
아니 울고 있다. 아내가 울고 있다. 마사지사의 좆은 크다.
하기사 크니 이런일 하겠지 단골이 많다고 한다.
마사지사 말로는 17센티 굵기14라고 하는데 내좆 두배는
족히 되어 보인다.
이런 좆질에 아내는 울고 있다. 정숙한 여인처럼 굴더니
마사지사 좆질에 무너져 신음이 아니라 아하아하 차바퀴
굴러가는 소리처럼 울고 있다.
우리부부 성생활에 저런적은 한번도 없었다.
50대 마누라를 저놈에게 빼앗기게 생겼다.
원래는 좀하다가 내가 하기로 했는데 아내가 돌아 눕더니
정상위로 마
원래는 좀하다가 내가 하기로 했는데 아내가 돌아 눕더니
정상위로 마사지사를 올려놓고 섹을 하네.
마사지사도 흥분하여 이제 누님 제대로 해봅시다. 하면서
나보고 형님 이쪽으로 아내가 내 좆을 빨고 마사지사는
열심히 박아된다. 아내는 눈동자가 뒤집혀진다.
흰자가 보인다. 세상에 이럴수가 50대 중반 여자가 눈이
뒤집히다니 앞치기 옆치기 뒤치기하는데 아내는 울음소리
가 너무 크서 챙피할 정도다.
이놈이 아내를 이제 가지고 논다. 다양한 체위로 박는데
보는 내가 기분이 묘하지만 좆은 하늘을 쳐다보네.
한시간 동안 박아대다가 누님 이제 사정합니다. 하니
뒤로 사정하라면서 뒤치기 자세를 취한다. 보지물이 줄줄한
다. 이놈 급속히 박다가 우억우억하면서 사정한다.
아내를 안고 한참 있더니 형님 마무리 하시죠 한다.
그때서야 아내는 여보 하면서 나에게 보지를 벌린다.
흥분되어 박아된다. 속으로 이년 더러운년 다른놈과 씹을
하다니 하면서 박다가 좀 헐렁해진듯한 보지에 싸고 말았다.
그사이 마사지사는 좆을 씻은 듯 와서 제가 사정을 안하는데
누님이 너무 매력있어서 사정하고 말았네요. 하면서 웃자
아내가 마사지사 이리와봐 하더니 좆을 만지작 만지작 거리
더니 좆을 잡고 빠는게 아닌가, 이런 이런 참 나
한참을 빨더니 잘했어 하면서 가자하네. 기가 찬다.
우리부부는 서로 말한마디 없이 집근처 까지 걸어왔다가
생맥한잔 때리고 가자 하고 생맥 때리면서 기막힌 오늘 일을
허���탄회하게 서로 이야기했는데 아내를 단순하게 아내로만
여기는 나의 관념을 완전히 바뀌게 했고 아내지만 동등한
인생의 동반자라는 인식과 섹은 섹으로만 끝내고 존중하지 않으면 안되겟다
생각이 들었다.
섹스는 우리부부의 원동력이다. 모든 부부가 그러하겠지만
아내가 그런다. 남자는 정액을 아껴야 한다고 70,80이 되어서도
능력이 있어야 된다고 아내는 할망구가 되어서도 섹을 즐기거라고
한다.
그러니 운동 열심히 아내 관리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 끝
수시로 우리부부의 경험담을 올릴 예정입니다.
아내에게 화이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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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
와잎 지인의 부부가 우리집에 방문을 했어. 와잎의 지인은 남자였고, 그의 아내는 두세번 정도 본 적이 있었지. 내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와잎이 아닌 다른 여자가 내가 사는 공간에 들어오는건 꽤나 흥분되는 일이었어.
손님이 오니 집안 정리를 했지. 소파의 지저분한 것을 치우며 그녀가 앉은 자리에 남을 그녀의 엉더이의 체취를 상상했고, 그들이 사용할 침대를 정리하며 그녀 몸의 체취와 땀이 묻어날 상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어. 그리고 현관을 청소하며 그녀가 벗어놓을 신발을 잠시나마 가져볼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했지.
그들이 도착했어. 그녀는 낡아 보이는 컨버스를 신고 왔어. 애착 신발인지 하얀 컨버스가 이런 저런 얼룩으로 지져분 했어. 그만큼 많이 신었다는 것이겠지. 그녀의 체취가 많이 남았을꺼고.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왔고 그녀의 맨발은 땀이 났었는지 걸을때마다 바닥에 들러붙는 소리가 들렸어. 마음 같아서는 그녀의 발자욱마다 냄새를 맡고 핧고 싶었지만 그럴수 없어 답답했지. 하지만 그녀의 땀과 체취가 내 집 여기저기에 남는다고 생각하니 야릇했어.
이런저런 시간이 지나고 잘 시간이 되었지. 난 잠에 들수 없었어. 현관의 그녀 신발때문에.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어.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정도였고, 와잎은 깊은 잠에 빠진것 같았어. 난 슬그머니 침대에서 내려와 마루로 나갔지. 그녀 부부가 자는 방에서는 그녀의 남편이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어.
난 현관으로 갔어. 그리고 그녀의 지저분한 신발 앞에 엎드렸어. 그 신발을 숭배하듯이. 얼굴을 신발근처에만 가져갔는데도 꼬릿한 냄새가 느껴졌고 자지가 반응을 했어. 신발 안으로 코를 박았어. 그리고 크게 숨을 몰아쉬었지. 약간의 고무 냄새와 꼬릿하고 시큼한, 그리고 텁텁한 공기가 내 콧속으로 몰려왔어. 냄새를 맡자마자 자지가 팽팽하게 서는것이 느껴졌어. 난 그렇게 계속 숨을 쉬어댔어.
너무 향기로웠고 흥분되었어. 약간의 몽롱함을 느끼며 반대쪽 신발에도 코를 박았지. 역시 좋은 냄새가 났어. 난 옷 밖으로 자지를 꺼내어 잡았고 양쪽 신발에 번갈아가며 코를 박고 숨을 쉬며, 자지를 잡은 손을 흔들어 댔어.
얼굴을 더 깊게 넣었어. 그리고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었지. 혀 끝이 그녀의 신발 깔창에 닿았어. 숨을 쉴때마다 신발속 공기가 입으로도 들어왔고 설명할 수 없는 황홀한 냄새가 입안에서도 느껴졌어. 혀끝에서는 그녀의 땀이 찌든 깔창의 맛이 느껴졌어. 고무 맛과 ���맛이 뒤섞인.
얼마나 냄새를 맡고, 깔창을 핧았는지 모르겠어. 아마 누가 옆에 있었어도 몰랐을꺼야. 현관에 엎드려서 그녀의 신발에 코를 박고 자지를 흔들어 대는 내 모습은... 정말 웃겼겠지.
그렇게 그녀의 발냄새에 취해서 흔들어대던 자지에 느낌이 왔고 그냥 그렇게 싸질렀어. 그리고 마지막 한방울까지 짜내었어. 그리고 정신이 들었어. 급하게 상체를 세우고 주변을 둘러봤어. 깜깜했고 아무도 없었어. 시계를 보니 30분도 넘게 시간이 흘렀어. 그녀의 남편이 코고는 소리는 여전했어. 놀라움과 걱정, 안도감이 한번에 느껴졌어.
그녀의 신발은 내가 얼굴로 비벼대서 살짝 찌그러져 있었고, 현관 바닥에는 내 좆물이 흥건했어. 난 얼른 자지를 바지속에 집어 넣었고, 휴지로 좆물을 닦았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발속 냄새를 더 즐겼어. 사정후 정신이 든 상태에서도 그 냄새는 여전히 야릇하고 좋았어. 좆물로 젖은 휴지를 버리러 가다 다시 현관으로 돌아왔고, 그 휴지를 그녀의 신발에 넣었다가 뺐어. 앞으로 그 신발을 신을때마다 그녀의 맨발에는 내 좆물이 묻겠지.
난 다시 침대로 와서 누웠고, 만족스럽게 잠에 들었어.
다음날 우리는 외출을 했어. 그녀는 신발에 그녀의 맨발을 집어 넣었어. 그녀는 그 신발을 하루종일 신고 있겠지. 아니 그 신발을 버릴때까지 신겠지. 그녀의 발이 내 좆물을 느끼며. 아무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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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새하얀 오리가 있길래 귀여워서 자세히 보려고 쪼그리고 앉았더니 오리가 당황하며 깍깍 거리며 화분뒤로 숨는다. 순간 내 뒤에서 어떤 아저씨가 그 오리 귀엽지? 하길래 아저씨 오리예요? 했더니 왜인지 자랑스런 얼굴로 ㅇㅇ 하셨다. 볕이 좋아서 산책 나왔다고 ㅎㅎ 오리도 귀엽고 아저씨도 귀엽다.

근처 공원이 하나 있는데 거기 가로수로 있는 나무가 밤나무일줄이야!! 가을이 되면서 바닥에 떨어진 열매를 보고서야 이게 밤나무였구나- 한다. 나무도 사계절이 지나야 정체를 겨우 알게 되는데 하물며 사람은!! 사람을 알려면 적어도 계절 바뀌는 거 한번씩은 다 거쳐야 한다는데 옛 말 하나 틀린 게 없네.


벤쿠버 행어는 캘거리 보다 크다. 그래도 토론토나 몬트리올 보단 작다. 날이 좋으면 행어 문 열어놓아서 오며가며 바깥 풍경 보는데 어느새 가을 풍경이다. 이렇게 한 해가 다 가는 것인가.
오늘 고깃집은 가서 사람들 얼굴보고 은퇴자에겐 내가 따로 준비한 선물이랑 카드만 전달하고 나왔다. 내 입장으로썬 최소한의 의무(?)는 다 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예상보다 일찍 공항에 왔다. 올 해 라운지 패스도 한 장 남았겠다 이참에 비는 3시간은 라운지에서 보내면 되겠다! 했는데 왠걸! 오랜만에 친구가 연락와서 엘에이 가는 길에 벤쿠버 들리는데 지금 벤쿠버면 같이 밥이나 먹을까? 해서 오호!! 싶었다. 희안하기도 하지. 마침 친구도 벤쿠버 공항에 도착했고 나도 막 시큐리티 통과 해 안으로 들어온 상태였어서 희안하게도 딱 맞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요즘 인생모토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 나누고 친구가 최근 감명깊게 읽은 책에대해서도 한참 이야기 하고 추천 받았다.
오늘은 뭔가 희안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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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창문 틈으로 바람이 살랑일 때, 빗소리가 불규칙하게 나뒹군다. 옅은 소리를 조금씩 메우는 파동 안으로 내 방 여기저기를 튕긴다.
반쯤 꺼져 있는 오래된 텅스텐 스탠드 조명이 은은하게 방 안을 밝히면 한쪽 벽면으로 쌓여 있는 책더미, 방치된 건 내 자신뿐만이 아닌 듯 했다.
전선 줄이 엉성하게 꼬여 있는 다리미의 콘센트를 켠다. 전날 세탁해 둔 구겨진 흰색 셔츠, 구겨진 내 마음 같아서 셔츠를 다리고만 싶었다. 분무기의 물이 이슬비처럼 분사되는 속도에 맞춰 구겨진 틈과 시간을 다린다.
전진희님의 연주곡을 공기의 흐름에 맞추어 걸어두면 나는 다시 차분해진다. 이유 없는 먹먹함이 전운을 감싸고 마른 침을 다시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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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또는 소수로 행동하여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람들 중에는 유명하지 않은 이도 있다. 무함마드 부아지지가 한 예다. 그는 한 독재자의 부패와 억압적 통치가 23년째 이어지고 있던 튀니지의 26세 과일 노점상이었다. 어느날 시장에서 경찰이 부아지지에게 뇌물을 뜯어낼 요량으로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 허가증을 보여달라며 괴롭혔다. 그는 거절했다. 경찰은 그를 발로 차고 침을 뱉고 노점을 뒤집었다. 부아지지는 관청에 가서 항의하려고 했지만, 그곳에서도 무시당했다. 2010년 12월 10일, 경찰에게 괴롭힘을 당한 지 한 시간도 안 된 때, 그는 관청 앞에서 제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외쳤다. “대체 어떻게 먹고살란 말이냐?” 그러고는 제 몸에 불을 붙였다.
부아지지의 분신과 죽음을 계기로, 튀니지 전역에서 독재자 제인 엘아비디네 벤 알리와 여당과 경찰에 항의하는 시위가 열렸다. 시위는 확산되었고, 정부와 벤 알리는 한 달 만에 실권했다. 부아지지의 행동을 계기로 이집트에서도 시위가 열려, 호스니 무바라크의 30년 독재가 거꾸러졌다. 예면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알리 압둘라 살레의 34년 통치가 무너졌다. 리비아에서도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34년 권세를 잃고 살해당했다. 시리아에서는 시위가 내전으로 이어졌다. 요르단, 오만, 쿠웨이트에서도 총리가 사임했다. 알제리, 이라크, 바레인, 모로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정부 개혁이라고 부를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른바 아랍의 봄이었다. 부아지지는 무슬림 세계의 정치개혁을 생각하며 성냥을 켠 게 아니었다. 그저 어디로도 분출할 수 없어서 안으로 향한 분노가 있을 뿐이었다. 아랍의 봄이 짧은 희망 뒤에 새 독재자, 폭력, 난민, 시리아와 ISIS라는 파국으로 이어진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각자의 몫이다. 그리고 어쩌면 분신자가 역사를 만든다기보다 역사가 분신자를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지역에서는 오래전부터 불만이 끓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무 개 나라 수백만 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든 촉매는 분명 부아지지 한 사람의 행동이다.
(786~787쪽)
틀림없이 베트남전에서 단일 사건으로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일, 미국으로 하여금 자신은 선한 세력이라는 인식을 마침내 떨쳐버리게 했던 일은 미라이학살이었다.
1968년 3월 16일, 한 미국 중대가 윌리엄 캘리 주니어 소위의 명령에 따라 미라이라는 마을에서 비무장 민간인을 공격했다. 중대는 석 달 동안 베트남에 있었지만 적과 직접 마주친 적은 없었다. 그래도 부비트랩과 지뢰에 부대원 28명이 죽거나 다쳐서, 총 중대원 수가 백 명가량으로 줄어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흔한 해석은 그들이 복수심에 불탄 나머지 얼굴 모를 적을 진짜 얼굴들과 연결 짓고자 하는 욕구에 휩싸였다는 것이다. 반면 당시의 공식적 논리는 미라이 마을이 베트콩 전사들과 민간인 동조자들을 숨겨주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거의 없다. 참가한 군인들 중 일부는 베트콩만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보고했지만, 다른 군인들은 가리지 말고 죽이고, 집을 불태우고, 가축을 죽이고, 우물을 망가뜨리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보고했다.
보고가 상충하지만, 아무튼 그뒤에 일어난 일은 흔한 표현마따나 고통스러운 역사로 남았다. 미군은 아기와 노인도 포함하여 비무장 민간인 350~500명을 죽였다. 시체를 훼��하고 우물에 처박았다. 오두막과 밭에 불을 질렀다. 많은 여성 주민을 집단 강간한 뒤 죽였다. 엄마 품에 숨어 있던 아이들에게 캘리가 직접 총을 쏘는 걸 봤다는 보고도 있다. 적의 응사는 없었고, 마을에 징병 연령 남성은 없었다. 그것은 성경 수준의, 로마제국 수준의, 십자군 수준의, 바이킹 수준의······ 파괴였다. 다만 이 파괴는 사진으로 남았다. 미라이학살이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 미국 정부가 사선을 은폐하려고 용썼고, 캘리에게 겨우 3년 가택연금형을 내렸다는 점이 더 경악스러운 대목이다.
미군 병사들이 학살에 다들 똑같은 수준으로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결국에는 총 26명이 고발되었고, 그중 캘리만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나머지는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게 법정의 명령이었다).[*살해에 가담했던 이들 중 두 명이 나중에 자살했다. 스티븐 브룩스 소위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베트남에서 자살했다. 바나도 심프슨 일병은 몇 년 뒤에 자살했는데,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 하나는 열 살 아들이 동네의 십대들이 쏜 유탄에 맞아 죽는 걸 본 것이었다. 심프슨은 이렇게 말했다. ”아이는 내 품에서 죽었다. 그때 본 아이 얼굴은 내가 죽였던 아이의 얼굴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 사람들을 죽인 벌을 받는구나.“ 그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심하게 앓았고, 집에서 창문을 죄 막은 채 몇 년 동안 은둔하다가 세번째 자살 시도에 성공했다.] 폭력에 대한 문턱값은 개인마다 달랐다. 한 병사는 한 여성과 그 자식을 죽이고서는 더는 하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또다른 병사는 민간인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일을 거들었지만 발포는 거부했다. 명령에 대놓고 거역한 병사들도 있었다. 군사재판에 회부하겠다거나 쏴버리겠다는 협박을 받고서도 그랬다. 그중 한 명인 마이클 번하트 일병은 명령을 거역하며 윗선에 보고하겠다고 대들었다. 나중에 장교들은 그를 더 위험한 순찰조로 보냈다. 그가 죽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학살을 멈춘 세 남자가 있었다. 예상 가능하게도, 그들은 아웃사이더였다. 앞장선 사람은 25세의 휴 톰프슨 주니어 준위였다. 그는 글렌 안드레오타, 로런스 콜번과 함께 헬리콥터를 몰고 있었다. 어쩌면 톰프슨이 이른바 ‘눈물의 길’ 죽음의 행군에서 살아남은 아메리카원주민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그의 행동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그의 독실한 부모는 1950년대 조지아주 시골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했다. 콜번과 안드레오타는 가톨릭 신자였다.
톰프슨과 두 승무원은 베트콩과 싸우는 보병을 도울 생각으로 미라이 마을로 날아갔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전투의 증거가 아니라 민간인들의 시체였다. 처음에 톰프슨은 마을이 공격당하고 있어서 미군이 주민들을 돕는 줄 알았지만, 누가 공격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아수라장 한가운데에 헬리콥터를 내렸고, 데이비드 미첼 미군 병장이 도랑에 처박힌 채 울부짖는 민간인 부상자들에게 총을 쏘는 모습과 어니스트 메디나 대위가 한 여성을 직사로 죽이는 모습을 보았다. 톰프슨은 누가 공격하는지 깨달았다. 그래서 캘리에게 항의했다. 하지만 톰프슨보다 계급이 높았던 캘리는 그에게 닥치고 제 할일이나 하라고 말했다.
톰프슨은 한 벙커에 옹송그리며 모여 있는 여자들, 아이들, 남자 노인들에게 미군들이 공격 태세로 다가가는 걸 보았다. 그로부터 20년이 더 지난 뒤 그 순간을 돌이킬 때, 톰프슨은 그 병사들에 대한 감정을 이렇게 말했다. ”그건, 그러니까 그 순간에는 그들이 내게 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확실히 그때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그들은 적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어질어질할 만큼 강인하고 용감한 행동을 했다. 이 책에서 우리가 살펴본 우리/그들 범주화의 이야기를 한순간에 몽땅 바꿔놓을 수 있는 행동이었다. 휴 톰프슨은 마을 사람들과 군인들 사이에 헬리콥터를 착륙시키고, 기관총을 제 동료 미국인들에게로 향한 뒤, 만에 하나 그들이 주민들을 더 해치려들 때는 가차없이 쏴버리라고 두 승무원에게 지시했다.[*톰프슨은 동료 헬리콥터 조종사들에게 무전을 보내어 생존자들을 병원으로 이송하라고 말했다. 안드레오타는 도랑에 쌓인 시신들을 헤치면서 살피다가 기적적으로 다치지 않은 네 살 아이를 구했다. 톰프슨은 자신이 본 것을 상관들에게 보고했고, 그들은 더 윗선으로 사건을 알렸다. 그러자 소탕 작전을 지시했던 지휘관은 이후 이웃 마을들에서 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작전을 취소하고 사태를 덮기 시작했다. 안드레오타는 3주 뒤에 전투중 사망했다. 콜번과 그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선 톰프슨은 군대면 정부며 언론이며 가리지 않고 어디에든 제보하려고 애썼고, 마리아학살이 대중에 알려지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하원군사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멘델 리버스 의원은 캘리의 기소를 막고 대신 톰프슨을 반역죄로 기소하려고 시도했다. 톰프슨은 캘리를 재판하는 법정에서 그에게 불리하게 증언했고, 그후 오랫동안 살해 협박을 받았다. 군대가 톰프슨과 콜번의 행동을 기린 것은 그로부터 30년이나 지나서였다. 톰프슨은 2006년에 죽었다. 콜번이 그의 임종을 지켰다.]
자, 우리는 한 개인이 충동적 행동으로 20개국의 역사를 바꿔놓는 걸 보았다. 한 개인이 수십 년 묵은 미움을 극복하여 화해의 촉매가 되는 걸 보았다. 옳은 일을 해내기 위해서, 그동안 훈련으로 습득한 반사반응을 철저히 억누른 사람들을 보았다. 이제 마지막 사람을 볼 차례인데, 나를 가장 크게 감화시키는 이는 바로 이 사람이다.
1725년 출생한 영국성공회 사제 존 뉴턴이 그 사람이다. 음, 썩 흥미롭지 않은걸. 그는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작사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아, 괜찮네. 레��드 코언의 <할렐루야>와 더불어 늘 나를 감동시키는 노래다. 뉴턴은 또한 노예제 폐지론자였고, 윌리엄 윕버포스가 노예제를 불법화하고자 대영제국 의회에서 싸울 때 그 조언자였다. 좋다, 점점 좋은걸. 이제 결정적 사실을 알 차례다. 뉴턴은 젊을 때 노예선 선장이었다. 그럼 그렇지! 그러니까 이런 시나리오잖아. 한 남자가 노예무역으로 돈을 벌다가 별안간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깨우침을 떠올리고, 그래서 우리/그들 범주화가 극적으로 달라지고, 그의 인간성이 극적으로 확장되며, 그가 자신이 저질렀던 만행을 보상하고자 극적으로 헌신한다는 결론. 5장에서 보았던 신경가소성 현상이 뉴턴의 뇌에서 맹렬하게 펼쳐지는 모습이 눈에 선할 지경 아닌가.
현실은 그와는 사뭇 달랐다.
뉴턴은 선장의 아들로 태어나서, 11세부터 아버지를 따라 바다에 나갔다. 18세에 강제로 해군에 보내졌다가 탈영을 시도한 뒤 채찍질형을 받았다. 간신히 군대를 빠져나온 그는 서아프리카 노예선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아, 자신의 경험과 노예들의 처지가 비슷한 것을 목격하고는 번득 계시가 떠올랐나?
그런 일은 없었다.
그는 노예선에서 일하면서 주변 모두로부터 미움을 받았던 모양이다. 어느 날 사람들이 그를 한 노예 상인과 함께 현재의 시이라리온에 내던져두고 갈 정도였다. 노예 상인은 뉴턴을 제 아내에게 노예로 주었다. 그는 여기서도 구출되었지만, 그가 타고 영국으로 돌아가던 배가 엄청난 폭풍을 만나서 가라앉기 시작했다. 뉴턴은 신에게 호소했고, 배는 가라앉지 않았으며, 그는 복음주의 기독교로 개종한다. 그리고 또다른 노예선에서 일하기로 계약했다. 이제 알겠네, 그는 신을 찾아냈고, 몸소 노예가 되어보았으며, 그래서 문득 노예무역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던 거지.
아니었다.
그는 노예들에게 약간의 공감을 내비쳤고, 복음주의로의 개종에 점점 더 진지해졌다. 결국 그는 어느 노예선의 선장이 되었고, 6년 더 일하다가 그만두었다. 마침내 그가 제 행동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 거로군!
역시 아니었다.
그가 그 일을 그만둔 것은 험한 행해로 건강이 나빠져서였다. 그는 이후 징세원으로 일했고, 신학을 공부했으며, 영국성공회 사제에 지원했다. 그리고 벌어둔 돈을 노예무역 사업에 투자했다. 뭐라고? 이 빌어먹을 놈 같으니라고!
그는 설교와 목회로 알려진 인기 있는 사제가 되었다. 찬송가 가사를 썼고, 가난하고 짓밟힌 자들을 대변했다. 그러던 중 어느 시점에 노예무역 투자를 그만두었다. 어쩌면 양심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더 나은 투자처가 나타나서였을 수도 있다. 아무튼 여전히 노예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가 마침내 노예제를 비난하는 소책자를 낸 것은 노예 상인일을 그만둔 지 34년 뒤였다. 보고도 못 본 척하는 비열한으로 산 시간이 그리 길었다. 뉴턴은 노예제의 참상을 몸소 목격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스스로 그 가해자였다는 점에서 노예제 폐지론자들 중 드문 경우였다. 그는 결국 영국에서 으뜸가는 노예제 폐기론자가 되었고, 1807년 영국이 노예무역으로 금하는 순간을 살아서 목격했다.
(789~795쪽)
이처럼 적군 간에 공통의 유대를 발견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백 년 남짓 전, 그런 사건 두 가지가 놀랍도록 대규모로 벌어졌다.
제1차세계대전이 낳은 좋은 결과가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전쟁으로 세 제국이 무너짐에 따라 발트해, 발칸반도, 동유럽 사람들이 독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밖의 사람들에게 그 전쟁은 1500만 명이 무의미하게 학살된 사건일 뿐이었다. 모든 전쟁을 끝낸 전쟁은 모든 평화를 끝낸 폐허의 평화로 이어졌고, 결국에는 유럽이 수백 년간 무의미한 갈등에 청년들을 희생시킨 사례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제1차세계대전의 수렁에서 두 가지 희망의 사례가 탄생했다. 더 나은 표현이 떠오르지 않아서 말하는데, 거의 기적적인 사건들이었다.
첫번째는 1914년 크리스마스 정전이었다. 시작은 참호 전선의 양측 장교들이 조심스럽게 상대의 언어로 “쏘지 말라”고 외친 뒤 무인 지대에서 만난 것이었다. 크리스마스 만찬중에는 적대행위를 일시 중지하고 시신도 회수하자는합의에서 시작된 정전이었다.
그로부터 일이 퍼졌다. 많은 기록이 남아 있는 사실인바, 양측 병사들은 무덤을 파기 위해서 서로 삽을 빌렸다. 그다음에는 함께 무덤을 팠다. 그다음에는 함께 장례 예배를 가졌다. 그러다보니 음식, 음료, 담배를 교환하게 되었다. 결국에는 무장하지 않은 병사들이 무인 지대로 몰려나와서 함께 기도하고 캐럴을 불렀으며, 저녁을 함께 먹고, 선물을 주고받았다. 적군 병사들끼리 단체사진을 찍었고, 단추와 헬멧을 기념품으로 교환했고, 전쟁이 끝나면 만나자고 약속했다. 가장 유명한 사실은 급조한 공으로 축구 시합을 치렀다는 것이다. 점수는 남아 있지 않지만.
한 역사가가 기록한 오싹한 일화도 있다. 어느 독일 병사가 집에 보낸 편지에서 정전을 이야기하면서 모두가 참여한 건 아니라고 말했는데, 동료들을 배신자라고 비난한 그 낯모르는 상병의 이름은······ 히틀러라고 했다. 하지만 800킬로미터의 참호전선 중 대부분에서 정전은 크리스마스에 종일 이어졌고, 종종 새해 첫날에도 벌어졌다. 나중에는 장교들이 군사재판에 회부하겠다고 협박해서야 모두가 싸움으로 돌아갔고, 병사들은 적군들에게 전쟁을 무사히 나가라고 빌어주었다. 충격적이고, 감동적이고, 가슴 아픈 이야기다. 간헐적인 예외를 제외하고는 이런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았다. 시신을 회수하기 위한 짧은 크리스마스 정전조차도 군사재판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1914년에는 왜 정전이 가능했을까? 참호전의 독특한 속성상, 병사들은 매일매일 적의 얼굴을 보았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전부터 전선 너머로 친근한 악담이 오가곤 했고, 희미한 유대가 ���성되었다. 게다가 반복된 접촉은 ‘미래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정전을 배신했다가는 상대가 가차 없이 복수하리라는 예상이 들었던 것이다.
모두가 유대기독교 전통과 서유럽 문화를 공유했다는 점도 성공의 한 요소였다. 많은 병사들이 상대의 언어를 알았고, 상대국에 가본 경험이 있었다. 그들은 인종이 같았다. 적을 ‘프리츠’(제1차세계대전 때 연합국이 독일 병사를 부를 때 쓴 명칭―옮긴이)라고 부르며 놀리는 것은 베트남전에서 미군들이 베트남인을 ‘슬랜트‘(동남아시아인을 부르는 멸칭으로, 눈이 가늘고 치켜올라갔다는 데서 온 이름―옮긴이), ‘구크‘(원래 미국인이 동남아시아인을 부르는 멸칭으로, 한국전 때 한국인에게도 쓰였다. 어원은 알려지지 않았다 ―옮긴이), ’딩크‘(어원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미국인이 동남아시아인, 특히 베트남인을 부르던 멸칭―옮긴이)라는 유사 종분화적 멸칭으로 부른 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르다.
주로 영국군과 독일군 사이에서 정전이 벌어졌던 점을 설명하는 요소들도 있다. 제 땅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프랑스인과는 달리, 영국인은 독일인에게 그다지 악감정이 없었을뿐더러 보통 자신들이 역사적 주적이었던 후방의les derrières 프랑스인을 구하기 위해서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전중에 영국 병사들은 독일 병사들에게 사실 우리는 모두 프랑스인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고 얄궂게 말하곤 했다. 한편 우연히도 대부분 색슨인이었던 독일 병사들은 앵글로색슨인인 영국 병사들에게 친족적 친근함을 드러내면서 사실 우리는 독일의 밉상 지배 집단인 프러시아인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요인은 상부가 정전을 승인했다는 점일 것이다. 보통 장교들이 협상을 주도했고, 교황 같은 인물들이 정전을 요청했으며, 누가 뭐래도 지상의 모든 인간들을 향한 평화와 선의를 상징하는 축일이었다.
크리스마스 정전이 우리의 첫 사례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1차세계대전에서는 그보다 더 기적적인 사건이 있었다. ’공존공영’ 현상이라고 명명된 이 사건은 참호전의 병사들이 한마디 대화 없이도, 공유하는 축일 없이도, 장교들과 지도자들의 허가 없이도 반복적으로 안정된 정전 상태를 진화시켜낸 것이었다.
어떻게 그랬을까? 역사가 토니 애슈워스가 『참호전: 1914~1918』에서 적었듯이, 그 일은 대개 수동적으로 시작되었다. 양측 병사들은 비슷한 시각에 밥을 먹었고, 그때는 총이 잠잠했다. 누구를 죽이거나 죽임당하자고 저녁식사를 중단하고 싶은 사람이 어딨겠는가? 날씨가 끔찍한 날도 그랬다. 그때는 모두가 최우선 관심사가 범람한 참호나 얼어죽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상호 자제는 미래의 그림자가 드리운 상황에서도 생겨났다. 식량을 나르는 마차 행렬은 포대의 쉬운 표적이었지만, 상호 포격으로 이어지는 걸 막기 위해서 건드리지 않았다. 변소도 마찬가지로 무사했다.
이런 정전은 병사들이 어떤 행동을 하지 않기로 선택함으로써 생겨난 것이었는데, 반대로 뚜렷한 행동으로써 구축되는 정전도 있었다. 어떻게? 우리 군 최고의 저격수를 데려다가 상대 적진 근처의 폐가 벽에 총알을 박아넣게 하자. 똑같은 지점을 연거푸 맞히게 하자.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일까? “우리 저격수가 얼마나 뛰어난지 봤지, 이 친구는 너희를 겨냥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어 자, 어떻게 생각해?” 그러면 상대편도 최고의 저격수를 데려다가 똑같은 행동을 하곤 했다. 서로 상대의 머리 위로 쏘자는 합의가 맺어진 것이다.
이때 핵심은 의례화였다. 무의미한 표적을 거듭 명중시키는 행동을 매일 반복함으로써 하루하루 평화에의 약속을 갱신하는 것이었다.
공존공영 정전은 약간의 동요를 버텨낼 수 있었다. 가끔 병사들은 당분간 진짜로 쏴야 한다는 신호를 상대편에 보냈다. 장교들이 오는 날이었다. 이 체제는 위반도 이겨낼 수 있었다. 만약 웬 투지 넘치는 신병이 상대편 참호에 포를 발사하면, 대개의 관행은 상대편도 이쪽의 중요한 표적을 노려서 두 발을 쏘는 것이었다. 그다음에는 평화가 재개되었다(애슈워스가 들려준 일화가 있다. 독일군이 뜻밖에 영국군 참호로 포를 발사했다. 곧 한 독일 병사가 외쳤다. “진짜 미안합니다. 아무도 안 다쳤기를 바랍니다. 우리 잘못이 아니라 망할 프러시아 대포 문제입니다.” 영국군은 두 발의 포를 발사하여 호응했다).
공존공영 정전은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후방의 고위 장교드은 반복적으로 개입하고, 부대를 회전시키고, 군사재판을 들먹여서 으르고, 적군 간에 생겨난 공통의 이해에 대한 감각을 산산조각낼 게 분명한 육박전이 따를 습격을 지시했다.
정전이 구축되는 과정은 진화적이다. 처음에는 저녁식사중에는 쏘지 말자는 것처럼 당장은 이득이 있는 저비용 제안이었던 것이 차츰 더 정교한 제약과 신호로 발전했다. 정전 위반을 다루는 방식이 변형된 팃포탯이었따는 점도 눈에 띈다. 기본적인 협력 성향, 위반에 대한 처벌, 용서의 메커니즘, 명확한 규칙 등의 요소가 꼭 그렇다.
사회적 세균들처럼 우리도 협력을 진화시킬 줄 안다니, 만세! 하지만 협력적 세균들에게 없는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심리다. 애슈워스는 공존공영에 참여했던 병사들이 적을 보는 심리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꼼꼼하게 탐구했다.
애슈워스는 그 변화가 단계적이었다고 말한다. 첫째로 일단 상호 제약이 생겨나면, 적도 우리처럼 사격을 중지할 동기가 있는 합리적 존재임을 알게 된다. 그러면 그다음에는 그들을 신의 있게 대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겨난다. 처음에는 이것이 순수하게 이기적인 이유, 즉 우리가 합의를 위반하면 상대도 되받아 위반하리라는 이유에서 생겨난 의무감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이것이 약간은 도덕적인 의무감으로 발달한다. 자신을 신의 있게 대하는 상대를 배신하는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꺼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전의 구체적 동기에서 깨닫는 바도 있다. “와, 저녁식사를 방해받고 싶지 않은 건 저 사람들도 똑같네. 저 사람들도 이 장대비 속에서 싸우고 싶어하지 않네. 저 사람들에게도 골칫덩어��� 장교들이 있네.“ 스멀스멀 동지애가 생겨난다.
이 과정은 더 충격적인 현상으로 이어진다. 교전국의 전쟁 체제들은 늘 그렇듯이 상대에 대한 유사 종분화적 악성 선전을 쏟아낸다. 하지만 애슈워스가 병사들의 일기와 편지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적에 대한 적대감을 가장 적게 드러낸 것은 오히려 참호전 병사들이었다. 적대감은 전선에서 멀어질수록 커졌다. 애슈워스는 한 최전선 병사의 말을 인용했다. ”고향에 있는 사람들은 적을 욕하며, 모욕적으로 희화화한다. 하지만 나는 괴물처럼 묘사된 독일 황제 그림에 진절머리가 난다. 여기 전장에서는 용감하고, 숙련되고, 재주 좋은 적을 존중하게 된다. 그들도 고향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왔고, 우리처럼 진흙탕과 비와 총알을 견뎌야 한다.“
우리와 그들은 유동적일 수 있다. 만약 누가 당신이나 당신의 전우들에게 총을 쏜다면, 그는 분명 그들이다. 하지만 그 밖의 순간에는 그보다도 쥐와 이, 식량에 핀 곰팡이, 추위가 그들이었다. 본부에 편하게 있는 장교들, 다른 참호전 병사의 말을 빌리자면 ”저멀리서 추상적인 전략으로 우리를 죽이는 놈들“도 그들이었다.
이런 정전은 영원할 수 없었다. 전쟁의 최후 국면에서 영국 고위 사령부가 소모전이라는 악몽 같은 전략을 채택함에 따라, 공존공영 정전은 자취를 감췄다.
(797~802쪽)
행동 - 로버트 새폴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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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성지
딱히 종교가 없음에도 왠지 모르게 가봐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흔히들 요즘에는 성지순례왔습니다 라고 하면서 미래를 예측한 글을 다시보러 가거나 그곳에서 또다른 소망을 적기도 한다.
그런 일들을 보며 미래도, 과거도 전부 신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조금은 믿는다.
신의 존재를 믿느냐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다 할 수는 없지만 그런 자취를 따라 걷는 신의를 믿곤 한다.
어떤 해석이 있더라도 개인이 원하는 구출점에 다다르기 위한 끈을 제각각 잡은 것이겠지.
신의 손길을 혹은 숨결을 또는 자취를 쫓는 사람들의 순례길은 사실 자신을 돌아보는 길이 된다고 한다.
뜻과 해석이 담긴다면 그곳이 곧 성지가 된다고 생각한다.
신도 자신도 어디에나 있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막연한 생각으로 살았었는데
그래도 언젠가는 성지로 구분된 장소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요즘이다.
-Ram
*성지
1. 어느 초여름, 막 더워지기 시작할 시기에 해동용궁사를 갔었다. 내가 가봤던 절 중 가장 예뻤던 건 불국사인 줄로만 알았는데 새파란 하늘 아래 절벽엔 파도가 부서지는 곳에 절이 있다니. 아무 기대 없이 그냥 잠깐 들렀다 나오려고 했었는데 입이 딱 벌어지고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그곳에서 한참을 있었다. 주말이라 관광객들이 조금 많았었는데 평일 새벽쯤 사람들이 거의 없는 한적한 시간에 오면 더 최고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곳에 사는 스님들은 이런 뷰를 매일 보면서 살겠지', '불교 신자도 아닌 나도 매일 오고 싶은데, 불교 신자분들은 이 절에 오는 발걸음이 굉장히 가볍겠지' 등 별 생각을 다 하며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눈에 담았다. 오늘같이 하늘이 파란 날, 한 번 더 해동용궁사를 가고싶다는 생각이 드네. 부산에 가볼까.
2. 방콕에 여러 번 갔었고, 오래 머무르기도 했었지만 방콕 왕궁 안엔 들어가 본 적이 없다. 별다른 이유는 없고 그냥 딱히 내가 가고 싶은 목적지가 다른 곳일 뿐이었는데. 요즘처럼 무더운 여름, 방콕 왕궁 안에 들어가 보자는 친구들이 있었다. '계획에 방콕 왕궁이 있었나. 내가 짠 계획엔 없었는데. 그럴 거면 계획을 좀 들여다보고 그 안에 왕궁을 넣지. 그러면 나도 그 시간에 할 것을 생각했을텐데.'라는 생각과 함께 긴바지를 준비하지 않은 나는 그냥 밖에서 기다린다고 하고 관광하고 싶은 그들을 왕궁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뙤약볕 아래에서 여러 관광객들이 지나는 길목에 그냥 멍하니 서있었는데 갑자기 현기증이 났다. '첫날부터 정신적으로 매우 괴로웠기 때문이겠지.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스스로가 지쳤나. 또는 아직 그게 풀리지 않았나.' 별별 생각이 들다가 도저히 안될 것 같아서 무작정 걸어서 그랩이 잘 잡히는 곳으로 간 다음 그랩을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그랩 안에서도 현타가 왔다. 내가 뭐하고 있나.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누군가가 잘못하긴 한 걸까? 또는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건가? 감히 특정인을 탓할 수도 없는, 이러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자 더욱 현기증이 나고 어지러웠다. 뭐라도 먹는다면 나아질까싶어 다음에 가려던 목적지 근처에 내려 무작정 처음 눈에 들어온 일본 라멘집으로 들어갔다.
-Hee
*성지
Tour du Mont Blanc. 알프스 몽블랑 산군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둘레길을 일주하는 트레킹을 준비하고 있다. 프랑스 동남부 샤모니에서부터 이탈리아, 스위스를 거쳐 다시 샤모니까지 약 170km의 거리, 약 10,000m의 획득 고도. 영혼의 일부를 산에 의탁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몽블랑은 내게 일종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만년설로 뒤덮인 높은 첨봉들. 빙하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몽블랑 대산군의 실루엣. 몇 해 전 코로나로 한 번 무산됐던 성지순례를 이제서야 다시 도전하려 한다.
10일간의 일정 동안 매일 얼마나 걷고 식료품을 어떻게 보급할지, 어디서 텐트를 펼치고 자야 할지 계획을 세우는 동안 내 인생의 커다란 변곡점을 앞두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름답지만 험난할 여정을 모두 마치고 감격스러운 순례자의 표식을 마음속에 품은 뒤에 산을 대하는 나의 신앙에는 어떤 변화가 찾아올지. 변화무쌍한 아름다움을 향한 믿음이 위태롭고 변화막측한 세상 속에 놓인 나를 구원하기를.
-Ho
*성지
등산인들이나 불자들에게 성지라고 불리는 설악산 봉정암을 엄마가 간다길래 호기롭게 남편과 나도 등록했다.
지금 하산하고 집에가는 중인데 다리가 너무 아프다. 설악산은 정말 지독히도 자기를 내어주지 않았고, 나는 무력했지만 한 걸음,한 걸음 내 발로 갈수 밖에 없었다. 유일한 긍정적인 사실은 이게 끝이 있다는 것이었다. 하염없이 다리를 옮기다보면 무념해지기도 하고 몇 가지 깨달음 비슷한 것이 스쳐지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절대 다치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몸도 마음도 긴장했고, 내 자신을 지킬수 있는건 내자신뿐이다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의외로 남편이 산을 너무 잘 타서 산악회 아저씨들 한테 맥주도 얻어먹고 재밌게 해서 다행이었다.
내가 어떤 결정을 할 때 심사숙고한 결정이 옳았을 때도 있지만, 열에 일곱정도는 그냥 일단 한번 해보자 라는 생각으로 한 결정이 나에게 좋은 것을 가져다 준 적도 많다. 이번에 봉정암 산행이 그랬다. 앞으로 내 인생에서 해야 할 결정들도 너무 심각해지지 않고 나 자신을 믿고 내 직감에 따라야겠다. 그 결정들이 분명히 나를 더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이 그 성지가 될 것 이다.
-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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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진들을 문득 발견할 때면, 머리칼이 지금과는 다르게, 더 길게 흩날리던 시절의 그 모습들 앞에서 잠시 멈칫하게 됩니다. 그 시절의 나로부터 희미한 메아리가 들려오는 듯, '아, 그런 때가 있었지.' 하는 아주 잠깐의 감각이 스치곤 하죠. 후회라기보다는, 그저 덤덤한 인정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가위 소리, 머리카락을 자르기로 했던 그 순간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한, 어떤 고요한 확신으로 제 안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일들에 대해 스스로에게, 또 서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참 흥미롭습니다. 특히 여성들에게 있어, 머리를 짧게 자르는 것은 어떤 내면의 격랑이나 슬픔을 떨쳐내는 신호라는 흔한 이야기들 말입니다. 하지만 제게 그 변화는, 오히려 무언가가 힘껏 차오르는 물결 위에서 찾아왔습니다. 길고 다소 지루했던 문장의 마지막에 찍힌 명확한 마침표처럼, 더 가벼운 색의 잉크로 쓰일 새로운 문단을 위한 여백을 만들어주는 듯했습니다. 그것은 슬픔보다는… 어쩌면 '정렬'이라고 해야 할까요? 조금 더 지금의 저와 가까워진 모습으로 발을 내딛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후로 일상 속에서 펼쳐진 풍경들은 작지만 흥미로운 관찰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직장에서의 대화들이 이전과는 다른 무게감으로 내려앉는 듯한 느낌입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제 말을 받아들이는 방식에도 미묘한 변화가 감지됩니다. 뭐랄까… 새로우면서도 한층 집중된 시선 같은 것이죠. 문득 그런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단지 짧은 머리가 주는 어떤 성숙한 분위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리고 이 지점에서 생각이 조금 얽히기 시작하는데, 덜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모습이 그들의 눈에 비치는 권위의 인식 자체를 재조정하는 걸까요?
마지막 질문은 물론, 훨씬 더 넓고 복잡한 문제들, 때로는 공기 중에서조차 어렴풋이 느껴지는 그 보이지 않는 편견의 구조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겠지요. 그 특정한 논의는 너무나 복잡하게 얽힌 체계여서, 지금 이 순간 제가 선뜻 풀어낼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저 그것을 인지하고, 인간이라는 거대한 퍼즐의 또 다른 한 조각으로 마음속 한편에 가만히 담아두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지금은 그저, 이런 외적인 변화들이 우리가 미처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어떻게 안으로, 또 밖으로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지에 대한 조용한 사색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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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의 상태는 끔찍했다. 보름 동안 물속에 잠겨 있었지만, 얼굴은 아직 허물어지지 않았고, 이목구비도 그대로 보존된 상태였다. 다만 피부가 누르스름한 흙빛을 띨 뿐이었다.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머리는 꽤 부어올라 찌그러져 보였다. 고개는 약간 젖혀지고, 머리칼이 양쪽 관자놀이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살짝 들린 눈꺼풀 안으로 생기 잃은 흰자위가 드러나 보였다. 비틀린 입술은 한쪽 귀퉁이만 당겨 올라가서, 마치 기분 나쁜 냉소를 짓는 것 같았다. 하얀 이 사이로 거무스레한 혀끝이 보였다. 겉모습은 여전히 인간의 것이긴 했지만, 머리통이 무두질 해놓은 것처럼 극심한 고통과 공포로 짓이긴 모양새였고, 몸은 마치 녹아내린 살덩어리 같았다. 끔찍할 정도로 지곧한 고통을 받��던 게 틀림없었다. 두 팔은 더 이상 그의 몸에 붙어 있다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양쪽 쇄골이 어깨살을 뚫고 비어져 나오고, 초록빛을 띤 가슴께에는 갈비뼈들이 검은 띠처럼 드러나 있었다. 찢어지고 벌어진 왼쪽 옆구리에는 검붉은 살점들이 너덜거렸다. 몸통 전체가 이미 썩어가는 중이었다. 그나마 아직 단단해 보이는 두 다리도 얼룩덜룩한 반점들로 뒤덮여 흉측했고, 두 발은 축 늘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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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는 묘사의 신이다! 보통의 언어로 정직하게 써 내려가지만 눈에 보일 듯, 손에 잡힐 듯 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그 세밀화 같은 묘사 때문에 이야기의 진도가 잘 안 나갈 때도 있지만 그런 단점은 작가의 또 하나의 장기인 파국적인 엔딩으로 만회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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