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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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gitancom ·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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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드라마 태조 왕건
유튜브의 방송국 채널들이 언제부터인가 옛 방송들을 단순히 다시보기가 아닌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무한송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 바로 KBS의 사극 '태조 왕건'이다.
옛날 사극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화질이나 음향, 연출 등이 지금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당시로써 물적 인적 자원을 최대한 동���하여 만든 대작임에는 틀림없다.
오히려 손익을 따지는 상업성에 구애받지 않는듯한, 대하드라마의 진정성이 느껴지고는 한다.
태조 왕건이라는 사극은 상당히 독특하다.
현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사료와 유적 유물로 전해지고, 가장 친숙한 이야기로 알려진 것은 조선 왕조 때의 이야기이다.
반면 삼국시대는 물론이고 고려시대까지만 올라가더라도 상당히 낯설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은 그렇게 고려 창업의 포문을 열면서 제국의 아침과 무인시대 등으로 이어지는 고려 왕조 시리즈를 잇게 된다.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대하드라마의 주인공은 고려의 태조 왕건이다.
물론 왕건보다 훨씬 높은 인기를 구가한 궁예가 있었고, 왕건의 라이벌이었던 견훤의 인기도 높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사극의 흥미로운 점은 태조 왕건의 고려 창업의 전 과정을 상당히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그 시대적 배경에 신라말 불교 문화와 도선대사의 도선비기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송악에서 태어난 왕건이 삼한을 통일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으며, 궁예도 견훤도 그 누구도 예정된 이 일을 막을 수 없었다.
어쩌면 너무나도 뻔해보이는 과장된 창업 신화라고 볼 수 있으나, 이 드라마에서는 그 절묘한 전개를 이해하고 봐야 진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왕건이라는 캐릭터는 그야말로 성인군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온갖 컴플렉스로 점철된 궁예와는 상반되며, 그 인간적인 입체적 매력이 떨어져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려 왕조를 창업한 이상적인 지도자상을 그려냄으로써,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후의 명작으로 그 인기를 떨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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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songeko1 ·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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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허준'의 ★들 하나둘 하늘로…우리 곁을 떠난 사극 명배우들 [Oh!쎈 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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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nestick · 4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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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 왕건 1회부터 200회까지! 전설의 대하드라마 정주행 START🔥
📺 태조 왕건 1회부터 200회까지! 전설의 대하드라마 정주행 START🔥
🎬 “태조 왕건”은 KBS가 자랑하는 대하드라마의 정수! 조선 건국 이전, 고려 태조 왕건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전쟁, 사랑, 정치가 치열하게 펼쳐지는 이야기로 지금 다시 봐도 완.전.몰.입 가능한 갓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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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metenter · 4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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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 모음. zip] 고려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국왕들! 왕건, 광종, 현종, 의종, 공민왕 그들의 모든 역사를 남김없이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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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an1927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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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문화가있는날 #대고려전 #918 #왕건 #고려청자 #직지심경 #나전칠기 #불상 #지식인 #엘리트 #교양 #문학 #회화 #intellect #elit #literature #painting #culture https://www.instagram.com/p/BuX2GNjn8Vf/?utm_source=ig_tumblr_share&igshid=hyix9e1mz6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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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shikkimus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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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 북한에 분산배치가 답이다 (1697)
중국처럼 미국이 만든 자유무역 시스템에 기반한 세계 질서에 북한을 편승하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에 미군을 배치해야 한다. 주한미군사령부지금까지의 대북 전략은 노력에 비해 성과도 없고 문제가 많다. 남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존 및 발전 전략에 창의적인 상상력이 시급하고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다. 이제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 북한이 중국처럼 미국이 만든 세계질서에 들어오면 한국처럼 단기간에 발전할 수 있다. 필자는 지난해 6월 칼럼을 통하여 한국의 안보와 경제난국 해법으로 북한 해주나 원산에 미군을 배치해야 한다고 하였다. 1년이 지난 지난달 29일 빈센트 브룩스 전 주한 미군 사령관 겸 한미 연합사령관과 임호영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은 북한을 중국으로부터 떼 내어 한미동맹 안으로 끌어들이자고 하였다. 한국의 안보와 경제난국을 한꺼번에, 그리고 항구적으로 푸는 답일 수 있다.지난해 6월 이미 세계은행(WB)이 세계 경제는 2차 대전 이후 최악의 불황이자, ‘09년 글로벌 금융위기보다 3배가량 가파른 경기침체가 될 것이라고 세계 경제전망(Global Economic Prospect)에서 평가하였는데 한국 경제문제 역시 예외가 아니다. 재난지원금을 추경 예산 편성해가며 5차례나 지급할 정도로 자영업자 등 서민들이 생존도 어려운 실정이다. 코로나 변이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백신은 예상과 달리 공급 차질로 접종 속도가 늦어지는데 확진자수는 하루 2천 명을 넘나들며 증가 추세다. 이 와중에 주식과 집값은 폭등하는 등 실물경제와 금융이 따로 놀아 경제와 금융 메커니즘 작동이 정상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 북한은 자신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미 연합훈련으로 시비를 걸더니, 남북통신 연락선을 복원한 지 보름도 안 돼서 이유 없이 차단하였다. 중국은 이례적으로 한미 연합훈련을 반대한다고 내정간섭 수준으로 거들고 나서는데, 북한의 김여정은 한술 더떠 주한미군 철수하라는 담화까지 냈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이후 비굴할 정도로 북한의 비위를 맞추며 남북 정상회담 추진 등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하지만 북한은 지난해 6월 한국 정부가 건설비용 약 180억 원과, 유지비와 사용료 포함, 총 235억 원 상당을 들인 남북 공동 연락사무소를 보란 듯이 폭파하였다. 나아가 최근에는 한국에서 활동하던 간첩이 4명이나 검거되는 등 공들인 것에 비하여 남북관계는 근본적으로 좋아진 것 별로 없고,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만들어 주기만 하였다. 국��들은 이제 지금과 같은 남북대화 등 남북교류를 왜 하는지 회의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같은 방식으로는 안된다. 이제 창의적인 상상력을 동원하여 현실적으로 효과가 있으며 지속적인 수단을 찾아서 변화를 주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안보는 안보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경제와 바로 직결된다. 안보와 경제는 따로 작동하지 않고 하나처럼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 먼저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한국이 벗어나고, 남북이 공동번영할 수 있는 멋진 전략이 필요하다. 북한을 미국이 만든 세계질서인 자유무역 시스템에 끌어들여야 한다. 북한이 자유무역에 기반을 둔 세계질서에 편승하려면 북한에 주한미군이 분산 배치되어야 한다. 그러면 한반도에는 전쟁도 없고 남북한이 공동 번영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통일을 맞이 할 수 있다. 이번 정부에서 힘들면 다음 대통령은 반드시 추진할 만한 전략이다.
▲ 우선, 미국 주도하에 만들어진 세계질서를 구체적으로 알아야 한다. 지정학 전략가이자 글로벌 에너지, 인구통계학, 안보 전문가인 피터 자이한은 2차 대전 후 미국 주도로 만들고 책임져온 세계질서는 머지않아 종말을 맞게 된다고 전망한다. 그러면 무역으로 먹고사는 한국은 2030년부터는 지금과 같은 수출입이 불가능하다고 예견한다. 필자도 공감한다. 왜일까? 미국이 세계질서에 손을 놓으면 한국은 당장 페르시아만을 통하여 안전한 원유를 공급받을 수 없고, 대서양과 인도양을 통하여 식량 등 수출입을 안전하게 할 수 없다. 멀리 갈 것없이 소말리아 해역에 해적을 막기위하여 파견한 청해부대를 보면 알 수 있다. 미국이 무역항로 보호에 손을 놓으면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에서 소말리아 해적 같은 상황을 수시로 마주치게 된다. 비행기 운항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오대양 육대주를 육, 해, 공으로 자유롭게 다니는 것을 세계인들은 흔한 공기처럼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 이전 제국주의 시대를 생각해보라. 어림도 없는 일이다. 한국은 당장 중국과 일본에 달라는 대로 통행세를 주어야 인도양으로 태평양으로 겨우 빠져나갈 수 있다. 중국과 일본 등 미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아 자유로운 무역과 여행을 할 수 없다. 대부분의 무역항로가 유료로 변하고 안전성을 확보할 수 없다. 그런 상황이 되면 한국의 무역과 제조업은 쪼그라들고, 인근 마트에 산더미처럼 쌓인 물건들은 먼 과거의 일이 될 것이다. 그뿐이랴, 중국과 일본은 심지어 러시아까지 미국 때문에 감추어둔 무서운 발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구한말 이상으로 한국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 보기 바쁠 것이다.
현재 세계인의 대부분 먹거리, 에너지, 각종 생필품 및 공산품의 이동은 미국의 해군 등 군사력으로 보호한다. 소련의 뒤를 이은 러시아, 미국에 패권 도전장을 낸 중국조차도 미국이 만든 자유무역 항로를 비용 없이 안전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 덕분에 전 세계는 분업화하며 공존하고 번영하고 있었다. 나라별로 잘하고, 잘 생산하는 것만을 나누어 하면서도 부(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과 한국, 대만, 싱가포르, 베트남 등이 대표적이고 유럽을 넘어 아시아가 번영한 이유이다. 미국이 만든 세계질서는 실로 대단하다. 오염되고 왜곡된 정보와 낡은 이념으로 쓰여진 해방 전후 인식에 갇혀 미국을 '점령군' 정도로 흠집 내려는 반미 성향의 사람들도 싫든 좋든 미국이 만든 세계질서를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우물 안을 벗어나 세상이 바로 보이고 대한민국의 안보와 경제에 대한 올바른 해법이 나온다.
▲1944년 브레턴우즈 협약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새 질서 선언은 팽창하는 공산주의 소련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유럽이 미국을 부추겨 세계질서의 주역이 되도록 한 일이다. 미국은 풍부한 자원, 사통 발달한 수로 등 천혜의 국토를 가진 나라로 지금도 그렇지만 무역을 하지 않고 자생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이다. 그리고 미국은 이주 당시 본토인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국가와 많은 전쟁을 치르며 질려서, 다른 나랏일에는 간섭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살아온 나라였다.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간에 상호 불간섭을 원칙으로 하는 1823년의 먼로주의가 그 것이다. 그러나 유럽의 간곡한 설득과 미국 역시 위협적으로 커가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하여 인류 역사상 유례도 없고, 상상하기 힘든 ’ 브레턴우즈 조건’을 내밀었다. 2차 대전 패전국인 독일, 일본, 이탈리아를 포함한 모든 나라의 자유로운 무역을 미국의 해군으로 보호하겠다고 공언했다. 나아가 모든 나라에서 만든 상품을 미국에 팔아도 된다고 하면서 무역에 필요한 금융 및 달러 중심의 기축통화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전까지 인류는 제국주의 형태 등으로 승전하면 정복하고, 약탈하며 총독 등을 두어 점령하면서 두고두고 빨대를 꽂아 수탈해온 역사를 뒤바꾼 것이다. 일본이 불과 70여년전 우리에게 보여준 약육강식의 모습이 바로 그런 세상의 질서 중 한 사례이다.
▲ 미국은 중국을 자유무역 시스템에 끌어들여 미국에 버금가는 나라가 되게 하였다. 물론 미국도 중국을 활용한 이이제이(以夷制夷)로 손쉽게 소련을 견제하려는 목적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공산국인 중국을 미국처럼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만들려는 욕심도 있었다. 덩샤오핑은 1979년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는 '흑묘백묘론'을 제시하며 중국을 개혁개방의 길로 나가고자 하였다. 미국은 이를 포용해주었고 1986년 중국이 신청한 WTO 가입까지 2001년 받아주었다. 중국은 미국의 협조로 에너지 등의 무역항로, 금융시스템, 신기술 등 모든 것을 무상으로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 결과 지금은 중국은 2위의 경제 대국으로 급성장했고 현재는 거꾸로 미국이 만든 세계질서 패권에 도전하고 있다. 많은 친중성향의 학자들이 중국이 미국을 대신하여 패권을 쥘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한다. 필자가 오랜기간 여러자료와 분석을 해본바 이는 불가능하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중국은 미국을 대신하여 지속해서 자유무역 항로를 보호할 해군력 등 군사력, 경제력, 에너지, 식량도 부족하고, 국제를 리드할 금융시스템도 없으며, 인구 구조도 열악하며 민주적인 철학도 없다. 그리고 인류에 해를 주는 독재 공산주의 국가이다. 또 중국은 미국과 달리 영토 주변이 모두 불안하여 자체적으로 분열을 막는데도 급한 실정으로 통일 중국으로 영토 존속 자체로 어려운 지정학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인도, 대만, 홍콩, 티베트, 신장위구르, 만주 등을 떠올려 보면 알수있다. 만에 하나 중국이 동아시아의 지역 패권이라도 잡으면, 과거의 조공체제를 강화하여 주변 나라를 속국(屬國), 심하면 이주, 분산, 소개(疏開) 책을 써서 하나의 한족(漢族)화를 추진할 것이다. 특히 인접한 한국의 피해는 아주 클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동아시아 자역 패권을 잡는 최소한의 상상도 일본에 밀려 거의 불가능하다. 참고로 일본은 현재 유일하게 무릎 꿇은 미국 때문에 조심하고 있지만, 미국의 힘이 동북아에서 빠지면 경제, 국방, 기술 등 모든 면에서 중국은 일본을 상대하기 벅찰 것이다. 일본이 동북아의 맹주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피터 자이한 등 국제전문가 대부분은 전망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중국이 대만을 공격하면 일본은 중국에 무력 대응한다고 한다고까지 하였다. 일본은 상당부분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화 되고 있고 미국은 한국이 중국 견제에 머뭇거리자 일본의 재무장을 사실상 돕고 있다. 몽골제국은 한국을 앞세워 3번이나 일본 정벌에 나섰지만, 일본 땅에 제대로 올라서지도 못하였다. 일본은 러시아를 격파하였고, 원자폭탄으로 항복하기 전 중국을 점령하다시피 하였으며, 미국이 점령한 필리핀을 제외하고 아시아 전체를 점령하였다. 한국이 일본을 감정만 앞세워 우습게 보면 정말 큰코다친다. 한일관계를 발전시켜가며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극일(克日)을 위한 힘을 다져야 하는데 여기 저기서 무조건 반일과 친일로 갖다 붙이니 걱정이다. 제76주년 광복절을 맞이하여 냉정하게 우리를 돌아볼 일이다.
▲ 북한 문제를 보노라면 한심하고 답답하다. 미국이 만든 자유무역 시스템 등 세계질서에 지금이라도 북한도 무임승차할 수 있다. 미국 등 해외자본이 북한에 투자하고 북한은 한국처럼 무역 대국으로 단기간에 클 수 있다. 미국을 포함한 인류는 인권을 소중한 가치로 여기고 지키며 서로 보호해주고 있다. 인간만이 가진 장점이다. 북한의 2400만 명 북한 주민들은 기아에 시달리고 각종 인권 박탈로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다. 하루빨리 북한 주민을 그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야한다. 그런데 미국이 중국의 신장웨이우얼과 티베트 그리고 홍콩의 인권문제를 건드리자 중국을 발끈하고 미국이 인디언에게 저지를 만행을 반성하라고 한다. 물론 미국은 반성해야하고, 반성하고 있으며 미국 정부와 상하원 의원들이 여러 차례 공식으로 사과하였다. 그리고 후손인 인디언들에게 각종 보상 등 후속 조처를 하고 있다. 공산권 국가들은 미국에 이 문제를 집요하게 확대하여 현재 문제를 덮는 데 사용하고 있다. 옹졸하고 비열하다. 지금이라도 김정은 한명과 그 한움큼 정도의 추종세력이 마음만 바꾸면 북한 인권 등 대부분 문제를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김정은은 문재인 정부 이후에 행태를 살펴보면 북학은 미국과 직접 거래하기를 바라고 있다. 핵을 미국과 대화하려고 위협용으로 만들었지 실제 한국이나 미국에 사용하려고 만들었을까? 미국과 구 소련 같은 강대국들도 핵 공격을 받고 2차 타격을 할 ‘상호 확증 파괴’ 능력이 있어도 핵을 사용하지 못한다. 하물며 핵을 발사하자 마자 북한은 형체도 없이 초토화 할 텐데 정상적인 이성을 가지고 있다면 절대 사용할 수 없다. 다만 그 와중에 조그마한 불상사가 일어나면 한국은 바로 위험해기때문에 한국과 미국은 조심하는 것이다. 북한은 한국이 미국의 승인 없이 북한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북한은 과거 한국 정부부터 권력 안보를 위하여 북한을 끌어들이려는 한국의 속셈을 잘 알고 있어서 하대 취급을 하며 무시하는 것이다. 필자는 북한 해주나 원산에 미군을 배치해야 한다고 지난해 6월 16일 언론에 기고한 일이 있다.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중국으로서는 바로 목구멍을 겨냥한 미군의 미사일로 미국 패권에 도전하는 일은 언감생심이 되고 오히려 중국이 만주 등 사분오열되는 일을 막기에도 급급할 것이다. 그런데 빈센트 브룩스 전 주한미군 사령관 겸 한미 연합사령관과 임호영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은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에 공동 명의로 ‘북한과의 일괄 타결’이라는 기고문을 냈다. 주요 내용은 북한을 중국으로부터 떼 내어 한미동맹 안으로 끌어들이자는 것이다. 필자의 주한미군 북한 분산배치 주장에 1년 뒤 한미 안보 전문가가 유사한 주장을 하여 반갑다.
▲ 답은 미군을 북한에 배치하는 것이다. 한국에 있는 주한미군을 북한의 황해도 해주나 연백 등에 분산 배치하는 것이다. 미군이 북한에도 배치되면 남과 북은 전쟁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또한, 북한의 핵은 미국에 의하여 관리가 되므로 한국에게는 조금도 위협이 될 수 없다.
사실상 남북한의 완벽한 평화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미군이 북한에 배치된다는 것은 북한이 친미 성향을 지닌다는 것이지 중국과 적대국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군이 북한에 있다고 해서 중국과 경제, 문화 등 교류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북한과 중국이 냉각상태에 놓이게 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인접국으로서 서서히 필요에 따라 현재 한국 수준의 북중 교류가 이어질 것이다. 친미 성향의 북한은 당장 한국, 미국, 일본 등으로부터 원조는 물론이고 천문학적인 투자를 유치할 수 있다. 한국, 일본, 미국 및 유럽의 자본이 마음 놓고 북한에 들어갈 것이다. 미국은 현재 중국의 지구 공장 역할을 미국을 포함하여 베트남, 대만, 유럽 등으로 리쇼어링 등 분산시키려 한다. 한국은 마음 놓고 북한에 수백 개의 ’개성공단‘을 단기간에 만들 기회가 된다. 중국보다 품질도 우수하고 가격경쟁력도 있고 미중패권에 큰 도움이 된다. 북한의 우수한 노동력과 풍부한 지하자원 및 남한의 기술, 무역을 결합하면 단기간에 5위인 영국 이상의 경제 대국이 가능하다. 북한을 세계 광물의 박물관이라고 부른다. 고가인 희토류 4,800만 톤 등 무려 10조 4천억 달러의 가치가 있다는 주장까지(북한자원연구소) 있다. 땅속에 삼성, 현대 등 대기업 수십 개가 묻혀 있는 것과 같다는 표현까지 할 정도이다. 주한미군의 북한 분산배치는 한국의 고질적인 청년실업 등 일자리, 저출산, 고령화를 포함한 경제문제, 항구적인 자주 안보 등 대한민국의 모든 난제를 일거에 해결할 뿐 아니라 당분간 체제가 다른 연합(연방)형태의 통일국가가 되어 동아시아의 주역으로 우뚝 설 것이다.
▲ 미군 북한 배치의 실현 가능성은? 나라별로 사정을 살펴보자 당사자인 한국은 국가와 민족 관점에서 큰 이익만 있을 뿐이고, 이것을 실현한 정부는 고려를 창건한 태조 왕건 이상의 업적을 이룬 지도자로 평가될 것이다. 미국은 친미정권을 한반도 남북에 두게 되고, 중국을 코앞에서 견제하게 되어 미·중 ���권 다툼에서 최상의 전략적 위치를 선점하게 될 뿐 아니라 새로운 투자시장과 제조공장을 확보하게 되므로 쌍수를 들고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이다. 2018년 5월 30일 미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북한의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에게 뉴욕 시내 만찬장 건물에서 창밖을 보여주었다. 이때 미국은 당신(북한)들도 북미수교를 하고 미군을 북한에 두면 이런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암시였을 것이다. 일본은 반대하고 싶지만 미국의 설득과 새로 열리는 매력적인 북한 시장에 투자 등 진입 등 경제적 이득을 위하여 지지할 것이다. 중국은 순망치한(脣亡齒寒)으로서 자신의 입술 역할이 없어지게 되어 외견상으로는 강력하게 반발할 것이지만 미국의 강력한 추진에 결국은 무역보복, 첨단기술 제재 등 완화 조건으로 후퇴할 것이다. 다만 한국 등에 은밀하게 행사하는 ‘샤프 파워(sharp power)’ 전략으로 보복을 시도할 것이다. 이미 한국은 중국의 사드 등 '3불' 경험으로 슬기롭게 잘 대처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이 한국 수준의 친미 성향 나라로서 외국자본 및 투자 증가로 오히려 중국의 경제에 순기능적인 역할을 하여 경제적으로는 남는 장사가 될 것이다. 나아가 미국과 기존 경제와 무력충돌 등에 더하여 코로나19 책임 문제까지 포함되어 국내외적으로 탈출구를 찾아야 하는 시진핑 주석으로서는 타협할 명분을 찾게 되어 궁극적으로는 주한미군의 북한 배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국이 미국 패권에 도전하는 진짜 이유는 현 중국 시진핑 세력의 국내 정적 견제 및 국내 여론 장악용이기 때문에 명분만 있다면 실리가 보장되는 미군의 북한 배치를 막을 이유가 없다. 미국이 군사력으로 중국을 공격할 일도, 점령할 이유도, 명분도 없다는 것을 중국은 잘알고 있더. 러시아 역시 미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을 견제하려 한다. 특히 연해주를 중국이 야금 야금 침범하여 대안으로 한국과 '공생국가'를 만드자고 러시아학자가 제안을 할정도이니 궁극적으로는 미군의 북한 배치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다. 핍박받는 2400만 명의 북한 동포들은 당연히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자신의 생존과 왕권을 수호하려는 김정은과 추종세력의 문제이다. 이를 분리해서 보자. 북한의 김정일, 김정은 등이 그동안 버티고 권력을 유지하는 것은 ‘부에노 데 메스키타’의 정치적 생존의 논리에 근거한 '선출인단이론'을 보면 이해가 된다. 독재정권은 출범 직후 6개월에서 1년 6개월 이내에 보통은 붕괴하는데 그 기간이 지나고도 살아남으면 장기 집권할 가능성이 크다는 이론이다. 이유는 독재자가 통치자금으로 자신을 도운 자들에게 보상하며, 필요에 따라서는 가혹하게 토사구팽 하면서 내부 경쟁과 공포를 유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북한을 다루는데 김정은의 통치자금 줄을 끊으려고 노력하였고 그 효과가 지금 발휘하고 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북한은 양주, 벤츠 등 외제차량, 고급시계, 모피 같은 사치품 수입을 못 하여 애를 먹고 있다. 따라서 김정은의 추종세력은 미군이 북한에 배치되어, 미국으로 부터 김정은의 통치자금 및 선물을 대신하여 받을 수 있고 자신들의 자리가 안정될 수 있다면 주한미군의 분산배치를 내면적으로는 막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김정은 위원장은 상황에 따라 극렬하게 반대하거나 모른 척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미국과 중국 양국에게 자신이 원하는 통치자금과 인민들에게 최소한의 배급 등을 원활하게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이 되고 미국과 한국이 강하게 압박하면 타협할 가능성이 크다. 조건은 자신의 권력을(regime)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미군이 배치된다고 해서 바로 북한의 체제를 자유민주국가로 바꿀 수는 없다. 김정은 위원장 스스로가 미국과 협조하여 단계적으로 민주 체제로 전환하면서 자신의 민주적 지도력을 강화하여야 한다. 그래서 민주절차에 의하여 장기집권을 하거나 퇴임 후에도 안전을 보장받는 방법을 모색하여야 한다. 9년 차에 접어든 김정은이 결단을 해야 하는 부분이다. 아무리 미국이 힘이 ���강하다고 해도 민주적인 한 국가의 지도자를 정상적인 방법으로 영원하게 지켜 줄 수는 없다. 미국과 한국이 협조하여 이 방법을 추진하고자 한다면 빠르고 효율적인 구체적 방법론이 나오리라 본다. 한국은 5천 년 역사 동안 무수히 많은 난관 속에서 때로는 수 양제의 1,133,800명의 대군을 물리치기도 하였고, 때로는 삼전도에서 창덕궁 대조전에 있는 흥복헌에서 치욕의 무릎을 꿇기도 했지만, 지금은 어엿한 경제 대국으로 G7에도 초청받는 선진국이 되었다. 이제 우리에게 또다시 미·중 패권전쟁, 코로나 팬데믹, 북한의 핵 위협 등이 도전해왔다. 우리가 또다시 그저 그런 방법으로 응전을 한다면 흑역사의 재판이 될 수도 있다. 한국은 위화도 회군 이후 일본, 러시아, 중국, 미국과 같은 패권을 잡아본 일이 없다. 그래서 현재 한국의 힘있는 자들은 나라 안에서만 요란하다. 국내용이다. 조선왕조 5백 년 사림(士林)이 그랬다. 그리고 주류 정치인 상당수가 아직도 해방 전후의 낡고 잘못된 이념으로 세상을 본다. 이제 패권적 시각으로 세상을 그리고 한국을 보도록 변해야 한다. 조선왕조가 5백 년을 지속한 이유가 절대적으로 빈곤해서라는 주장도 있다. 먹고살기 힘들어 자생적으로 정권을 심판할 기능이 아예 상실했기 때문이란다. 북한을 보면 이해가 되는 면이 많다. 한국의 현재 국민 수준은 어림없다. 한국 기업인들은 세상을 안방처럼 드나들며 사차 산업혁명 시대, 디지털 경제, 세계화 시대에 첨단 사고를 가지고 맹렬히 활동 하는데 정치인들은 작은 땅 안에서 편 갈라 한자리 오래 하려고 혈안이다. 안타깝다. 미국은 한국과 중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를 일본과 독일로부터 해방하게 해 주었으며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게 하며 민주국가를 유지하도록 힘써왔다. 미국도 슬슬 이제 그 역할에 돈도 많이 들고 왜 하는지 회의를 가지기 시작했다. 미국 우선주의다. 미국은 일본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2차대전에 참전하고, 한국을 얼떨결에 피를 흘리며 지켜오며 혈맹이 되었다. 한국으로서는 행운이다. 미국이 아니고 소련이나, 중국, 일본이 미국의 위치였다면 한국의 현재는 없었다. 한국은 미국의 힘이 동아시아를 포함한 세계질서 중심일 때 세계 최강의 나라인 미국을 잘 활용할 생각을 해야지 복에 겨워 굴러들어 온 복(福)을 걷어차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된다.
나가면서...
미 공군청주 간첩 사건을 보면 미국 스텔스 전투기 F-35A 도입 반대 등 반미활동, 미군 철수, 국보법 폐지, 심지어 검찰개혁 등 그동안 한국의 주요 이슈에 대하여 북한으로부터 지령을 받고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카톡 등 SNS에 청주 간첩 협의자 주장과 유사한 아니 더 강한 북한 입장을 옹호하는 비상��적인 글과 주장, 공격들이 난무한다. 청주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 주변을 살펴볼 일이다. 북한의 경제력(GDP)은 한국의 1.8%에 불과하다. 이미 남북간 체제경쟁은 끝났다. 그러나 북한은 한국이 경제와 민주발전에 치중하면서 소홀한 사상전과 핵으로 한국을 제압하려는 무지몽매한 짓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지나온 정부부터 사심을 가지고 받아주며 국내 정치에 이용하였다. 이제 소모적인 이런 행태는 단절해야 한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북한에 뒤로 돈을 주는 등 이면으로 거래하여 대화를 구걸하는 일은 이제 과감하게 접어야 한다. 그 자체가 발전적인 남북관계 개선에 나쁜 영향을 미치며 범죄다. 민주주의 역사를 살펴보면 나치즘, 파시즘 등 전체주의 독재는 오히려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성숙기에 많이 발생하고 활성화하였다. 지금 딱 한국이 그렇다. 낡은 이념과 어설픈 신념으로 세상 전체를 못 보고 설치는 자들이 참으로 많다. 안타깝고 국익을 해치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한국의 MZ세대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어울리지 않고 어느 순간 이상하다 싶으면 강하게 저항 할 것이다. 아직도 적화의 미몽을 가지고 있는 북한과 그 추종 세력은 꿈에서 깨어나야한다. 주한미군을 북한에 분산 배치하는 일, 큰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위험한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면서 실질적인 남북한의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이루는 항구적인 자주 평화의 길이며 남과 북이 함께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사차 산업혁명시대를 이끌어가는 홍익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인류 문명을 불편을 해소하기위하여 상상력을 동원했고 그 꿈을 실현하여 발전하여 왔다. 알렉산더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잘라서 아시아의 지배자로 약속 받았듯이 해볼 만한 일이다. 아니 머지않아 그렇게 될 것이다. 내년 3월, 새로운 대통령은 알렉산더의 흑마 부케 팔로스를 타고와서 대한민국을 우물 안에서 꺼내 미국에 버금가는 위대한 나라로 만들어 주기 바란다. 한국인은 그런 홍익인간 DNA를 가지고 있다. 2021-8-13 hwanshikkimus.tumblr.com/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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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nytrickster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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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ingdom of Goryeo (고려, 高麗) was founded in 918. It unified the Korean Peninsula by subjugating Silla and Hubaekje. The name Korea is derived from the name of Goryeo. It was first used in the 5th century when Goguryeo (37 BC - 668 AD) shortened its name to Goryeo. Goryeo was established by Wang Geon, later Taejo of Goryeo (877-943, r.918-943, 왕건 王建), a general of noble Goguryeo descent. He was born in Songak (송악, 松嶽), now modern day Kaesong (개성시) in North Korea. Goryeo also used the names Samhan and Haedong, meaning East of the Sea.
In this episode, we will take a look at Wang Geon’s life from his life as a prime minister in the kingdom of Taebong (Later Goguryeo) up until his unific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First, we will take a look at how he founded the kingdom of Goryeo. Second, we will talk about the Khitans who will constantly be a problem to early Goryeo kings. Finally, we will take a closer look at Wang Geon’s 10 mandates to his success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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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toscrenespanol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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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a Antigua de la Península Coreana: OCTAVA PARTE
Primera parte
Segunda parte
Tercera parte
Cuarta parte
Quinta parte
Sexta parte
Séptima parte
EL DECLIVE DE SILLA 
A mediados del siglo VIII comenzó el declive del apogeo de Silla debido a varios factores. Por una parte, el extenso clan de la familia real se había fragmentado en familias colaterales que lucharon entre sí por la riqueza y el poder, el sistema de rangos de la aristocracia ya no proporcionaba cohesión y organización a la sociedad, y el grupo de guerreron Hwarang se degeneró en uno de jóvenes que tan sólo disfrutaban de la danza, la música y la poesía. El rígido sistema de estratificación social impedía que las personas más capacitadas y talentosas tuvieran acceso a puestos importantes en el gobierno; por lo tanto, las instituciones políticas no lograron una verdadera eficacia y resultaban ser cada vez más costosas y menos eficientes.
El mal manejo de los asuntos del gobierno, la gradual decadencia de la monarquía, rodeada de lujo y extravagancia, la falta de incentivos y el creciente descontento de los aristócratas, que se oponían constantemente a las reformas gubernamentales, y el pueblo, agobiado por los excesivos impuestos y explotado por los terratenientes, se manifestaron por medio de rebeliones en más de una década y alcanzaron un punto crítico en el año 780 a raíz del asesinato del rey Hyegong (혜공왕). Durante los siguientes 150 años le sucedieron veinte reyes, pertenecientes a familias rivales del linaje Kim, quienes ascendieron por breve tiempo al trono con el apoyo de ambiciosos aristócratas que contaban con su propio ejército. El que lograba la victoria en la batalla por la sucesión ya no representaba a la aristocracia sino a sus partidarios que lo habían elegido, por lo que cada nuevo rey se convertía en blanco de venganzas por parte de las facciones a las que había derrotado y en la mayoría de los casos era asesinado. 
La autoridad central se fue debilitando a la vez que se fortalecía la local, encabezada por terratenientes y mercaderes que tenían el control político y económico en sus respectivos distritos y contaban con ejércitos privados. Hacia finales del siglo IX estallaron levantamientos campesinos y de esclavos a lo largo del país encabezados por líderes regionales rebeldes como Kyonhwon, militar de origen campesino, quién estableció el estado de Baekje tardío, y un hijo ilegítimo del rey Heongang (헌강왕). Kungye (궁예) fue otro rebelde emparentado con el linaje Kim que se unió al grupo rebelde Yanggil para fundar el Koguryo tardío o Taebong. Por lo tanto, Silla quedó rodeado.
El ejército del rey Kungye atacó primero Baekje tardío, al mando de uno de sus generales más destacados, Wang Kon (왕건), cuya familia se dedicaba al comercio marítimo; este tomó control de Taebong en el 918, y tras el éxito sobre sus rivales, logró en el 935 la reunificación de la península bajo la naciente dinastía Korgyo o Goryeo (De donde nace el nombre de “Korea” o “Corea, abreviaturas de Kogur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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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éditos de las imágenes:
1.- Tumba del rey Heongang de Silla.
2.- Representación moderna de Kungye (rey de Baekje tardío) y Wang kon (general de Kungye y fundador de la dinastía Koryo). 
Lee mitología griega aquí
Lee mitología japonesa aqu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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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reedul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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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균 배우 방문,#Shin_Won_Kyun #Actor, 대조영, 왕건, 기인 배우 신원균님이 우리들한의원을 방문하였습니다. 원로 배우로써 아마 사극에서 많이 보았을 겁니다. #신원균 님은 무술 유단자로서 유도에도 일가견이 있는 그는 1973년 영화 《#지나간여고시절》의 주연으로써 영화배우로 첫 데뷔하였고 2년 후 1975년 TBC 동양방송 텔레비전 드라마에 첫 출연하였으며 1980년 영화 《복권》에 단역으로 출연하여 영화 분야에 복귀했다. 그는 주로 #대조영, #왕건, #무인시대, #제5공화국, #용의눈물 등, 사극 드라마에서 #장군(將軍)이나 #무관(武官) 역으로 자주 출연하였습니다. 조만간 #MBN 에서 #기인(기록하는사람)이라는 방송에 나올예정이라고 합니다. 많은 시청바랍니다. #신원균소개 위키 https://ko.wikipedia.org/wiki/신원균9배우) [사상체질체형]#바른자세, #체형과통증, #posture_and_pain,사상체형적 치료,김수범의 우리들체질체형건강방송 https://youtu.be/azqsfw6u8Kc [사상체질체형]#고관절증,#Hip_arthritis, #고관절괴사예방법, 김수범의 우리들체질체형방송 https://youtu.be/hRSaHL5DI38 [사상체질체형]#척추관협착증,#Spinal_stenosis, #허리통증, 김수범의 우리들체질체형방송 https://youtu.be/NRDf_FY6hmE https://www.instagram.com/p/BrXSugnFv7O/?utm_source=ig_tumblr_share&igshid=1vrmgldsg6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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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share-korea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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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이 주연 잡아먹은 대표 드라마 TOP3
조연이 주연 잡아먹은 대표 드라마 TOP3
▼사진출처 : 방송화면 캡처 주연보다 더 주연 같은, 조연들이 있다.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조연이 주연 잡아먹은 대표 드라마.JPG’라는 제목의 게시물이 올라왔다. 벌써부터 떠오르는 드라마가 있지 않은가. 특히 이번 TOP3의 경우, 제목에까지 ‘뻔히’ 등장하는 주인공을 제치고 실질적 주인공이 되어버린 甲조연이라 더욱 놀랍다. 심지어 모두 대상을 거머쥐었다는 공통점까지. 1. 태조왕건 – 궁예 역(김영철) 당시 한쪽 눈을 가리고 연기했음에도 불구, 한쪽 눈만으로도 강렬한 카리스마를 뿜어낸 그의 연기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생생히 기억되고 있다. 심지어 당시 KBS 연기대상은 왕건(최수종)이 아닌, 김영철에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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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plparty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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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Z팀 김지우 모음집 [우리는 뮤지광人] (ENG/JPN SUB) https://youtu.be/DBYvqypP4Zo 뮤지광 재직 중 ENFP에서 ENTP가 되어버린 김지우 사원 0:00 면접 프리패스 하는 법 0:17 죽이고 싶은 사람이요? 0:55 자본주의는 늘 짜릿해 1:09 대표님 양아치세요? 1:41 태조 왕건..이? 2:05 Job일 담당 김지우 사원 2:16 뮤지광식 식전 기도 2:26 누가 우리 애 기를 죽여요? 2:42 여기 노래방 아니에요 3:23 즐거운 청소 시간 3:35 뮤지광 게임의 승자는? 4:20 나 이달의 ��녀야하.. 5:42 뮤지! 물러가라! 6:02 힐링요가 맞나요? 6:15 일류 인재의 PPT 발표 7:26 쇼미 더 김츄 8:30 보여줄게 나의 두성 9:19 잔인한 가창력의 소유자 #뮤지광 #츄 #이달의소녀 #LOONA #Chuu #뮤지광컴퍼니 MUPLY 뮤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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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ap7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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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suhfiu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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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역 기본정보 호남선에 있는 기차역으로 부황역과 채운역 사이에 있다. 1911년 11월 15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였다. '논산(論山)'의 옛 이름은 '황산(黃山)'이었다. 삼국시대 백제 계백 장군의 5천 명의 결사대가 신라 김유신 장군의 군사 5만 명을 맞아 싸워 전사한 '황산벌'이 이 곳이다. '황산'의 '황(黃)'이 '누르다(노랗다)'의 뜻이므로 '누르메'라 불리다가 '놀메'가 되고 '놀메'가 '논산(論山)'으로 되어 현재의 '논산(論山)'이란 지명이 생겨나게 되었다. KTX, 새마을호, 무궁화호가 운행되며 여객, 화물, 승차권발매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 인근에 관촉사가 있다. 연혁 날짜 내용 19 11. 11. 15. 논산역 영업개시 1950. 7. 25. 6.25 동란으로 역사소실 195 5. 5. 5. 구 역사 신축 준공 195 6. 7. 30. 현 역사 신축 준공 1971. 9. 10. 무연탄 화물 도착역 지정(철도청고시 제1971-37호) 198 8. 1 2. 6. 현재 역사 준공 1990. 11. 상행·하행승강장 일부 지붕설치 199 8. 7. 1. 매표창구 은행식으로 개방 200 4. 4. 1. 고속철도 KTX 정차 200 6. 5. 1. 소화물 취급 중지 주변 관광지 개태사 대한불교조계종에 속한다. 936년(태조 19년)에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신검(神劍)을 무찌르고 삼국을 통일한 것을 기려 '황산'을 '천호산'이라 개칭하고 창건하였다. 이후 조선조시대에는 퇴락하여 폐사로 있던 것을 1930년 김광영(金光榮)이 새로 짓고 '도광사(道光寺)'로 이름을 고쳤다가 다시 '태광사(泰光寺)'라고 하였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219호인 사지석불입상(寺址石佛立像), 충남민속자료 제1호인 개태사철확(鐵鑊), 충남문화재자료 제247호인 5층석탑과 제275호인 석조(石槽)가 있다.• 분류 : 고궁유적지• 주소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계백로 2614-11• 전화번호 : 041-734-8730• 역에서의 거리 : 15.86km 계백장군유적지 계백(階伯 : ?~660년)은 백제의 장군이다. 554년 성왕(聖王)이 관산성(管山城)에서 전사한 뒤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641년 의자왕(義慈王)의 즉위 이래 백제는 고구려와 제휴하면서 신라를 자주 공격했다. 그러나 고립된 신라가 당나라와 협력하여 고구려 · 백제 두 나라를 노리면서 상황은 크게 변했다. 더욱이 의자왕의 실정으로 국내가 혼란해지고, 고구려가 연개소문의 정변 등 국내 문제로 백제와의 동맹에 소극적으로 되자 백제의 위기는 점차 현실화되었다. 결국 660년(의자왕 20년) 소정방(蘇定方)과 김유신(金庾信)의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炭峴)과 백강(白江)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의자왕은 계백에게 5,000명의 결사대를 주어 이를 막게 했다. 계백은 죽기를 각오하고 출전하여 1당 100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4번을 싸워 이겼으나 백제군은 결국 중과부적으로 대패하여 계백이 전사했다. 이 황산벌전투로 백제는 비운의 종말을 맞이했으며, 계백 장군은 통한을 품고 이곳에 묻혀 있다.• 분류 : 고궁유적지• 주소 :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산 14• 전화번호 : 041-730-4726• 역에서의 거리 : 9.94km 관촉사 관촉사 경내에는 은진미륵으로 더 알려진 고려시대의 거대한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조성되어 있다. 고대의 것으로는 우리나라 최대의 석불로 알려진 보살입상의 조성에 대해서는 조선 영조 19년(1743년)에 세워진 사적비에 잘 나타나 있는데, 여기에 의하면 고려 광종(태조 왕건 세 번째 부인의 아들) 20년(969년)에 승(僧) 혜명(慧明)이 조정의 명을 받아 21년(970년)에 기공하였으며, 목종 9년(1006년)에 완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입상 조성이 2대 왕조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무려 37년간이란 세월이 흘렀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는 또 보물 9호인 석등을 비롯하여 오층석탑과 배례석이 미륵불을 위시하여 일렬로 불당과 함께 배치되어 있다.• 분류 : 고궁유적지• 주소 :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로 1번길 254• 전화번호 : 041-736-5700~2• 역에서의 거리 : 6km 쌍계사(논산) 산길 끝에 암자가 있듯 명산에는 대찰이 있기 마련이다. 쌍계사 또한 대둔산 줄기의 불명산 기슭에 숨어있는 사찰이다. 절을 애워싼 산세가 범상치 않은 곳에 위치한 쌍계사는 인적은 없고, 산새 소리와 풍경소리만이 서로의 음을 조절하며 파장을 즐길 뿐이다. 특히 쌍계사는 대웅전의 꽂살무늬 창살로 유명한데 다가갈수록 고풍스런 정교함에 소리 없는 탄성이 가슴에서 ���린다. 꽃무늬 창살로 유명한 쌍계사는 건립의 설화부터 신비하다.먼 옛날 하늘나라 상제는 산수가 수려한 이 땅에 절 하나를 짓기로 하고 아들을 내려 보냈다. 상제의 아들은 맑은 물이 계곡을 따라 흘러서 마치 신선이 사는 것 같기도 한 지금의 쌍계사 자리를 택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진귀한 나무를 모아 오도록 해서 그 나무로 절을 짓기 시작했다. 그래서 누구나 한번쯤은 쌍계사에 다녀가는 것이 소원이라고 할 만큼 화려하고 웅장했다.• 분류 : 고궁유적지• 주소 :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중뫼안길 3• 전화번호 : 041-741-8955• 역에서의 거리 : 19.52km 탑정호 눈을 뜨기 조차 힘들만큼 강렬한 빛속에서 논산시 한가운데에 자리한 탑정호는 옥토의 젓줄이다. 햇살은 따스함과 포근함으로 세상을 감싸지만 그 눈부심으로 가끔은 인간을 움츠리게 만든다. 그러나 그 태양을 향해 당당히 마주선 곳이 있다. 거기가 바로 탑정호이다. 수려한 대둔산의 물줄기를 담아내는 탑정호는 물이 맑기로도 유명하다. 그곳에 가면 계절과 상관없이 근심이 풀어진다. 산은 강을 품고 강은 들을 품고 살지만 호수는 산과 강과 들을 품고 산다. 바다만큼이나 넓고 하늘만큼이나 깊은 호수가 바로 탑정호다. 탑정호는 서있는 위치에 따라 보는 맛이 다르다. 제일 권하고 싶은 곳은 부적 신풍리 쪽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일 것이다. 호수를 깔고 서산으로 넘어가는 저녁노을을 보노라면 왜 논산이 노을의 고장인가를 알게 된다. 그 자리에 있어 본 사람은 잠시나마 여행의 피로를 풀게 되고 인생을 관조하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높은 하늘의 거울이 되어 하늘과 호수의 두 가지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분류 : 자연• 주소 : 충청남도 마구평길, 매죽헌로, 중산길 일원• 전화번호 : 041-741-2590• 역에서의 거리 : 9.86km 논산역 지도 이 브라우저에서는 해당 기능을 지원하지 않습니다. IE9이상 버전으로 업그레이드 해주세요. 레이어 닫기 일반 지형 위성 확대보기 [05월08일 - 과거속 오늘] 1984년 소련, LA올림픽 불참 선언 1984년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제23회 하계 올림픽 경기대회. 제23회 올림픽 경기대회는 1984년 7월 28일부터 8월 12일까지 개최, 140개국에서 6,829명이 참가하였다. 경기는 23개 종목, 221개 세부종목이 실시되었다. 52년만에 다시 대회를 개최한 미국은 올림픽을 2번 개최한 3번째 나라가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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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tywho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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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조 ㎾ 후삼국통일
후삼국통일 정의 10세기 전반기에 고려가 신라·후백제를 통합하고 발해 유민을 포섭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한 일. 역사적 배경 신라 말기에 등장한 후백제·후고구려(태봉·고려)와 신라를 우리 역사상 후삼국이라 하고, 견훤(甄萱)이 후백제를 건국한 892년(진성여왕 6)부터 고려태조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태종 19)까지의 45년간을 후삼국시대라고 한다.신라는 이른바 하대에 이르러 왕권이 쇠약해지고 정치가 문란해졌다. 이는 골품제적 신분 질서에 바탕을 둔 신라 사회���제의 구조적 모순과 그 운영 원리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었다.귀족들의 대토지 사유화로 인하여 토지로부터 유리된 농민들은 점차 중앙 지배층의 가혹한 경제적 착취에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진성여왕 때에 이르러서는 지방에서 중앙의 수취를 거부하고 나아가 정치적 지배에 저항하는 민란이 잇달아 일어나 중앙정부는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었다.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일부 유학생이나 6두품 중 비판적이었던 일부 지식인, 또 당시 교종(敎宗) 중심의 불교계의 타락상과 교리를 비판하면서 성립된 선종(禪宗)의 교리를 공부한 선승과 이들이 개창한 9산선문(九山禪門) 중심의 선사들은 신라의 골품제사회를 비판하면서 지방에서 부상하는 새로운 지방 세력과 연계하기 시작하였다.당시 지방 세력은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 내륙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해서 약탈로 무리를 구성해간 초적(草賊) 성격의 집단, ② 군진세력(軍鎭勢力)을 바탕으로 한 집단, ③ 해외무역 등으로 해상세력을 형성한 집단, ④ 촌주(村主)에서 성장하여 향촌의 정치력과 군사력을 장악하여 지방에서 성주(城主)·장군(將軍) 등으로 불린 호족세력 등이다.먼저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과거 고구려와 백제의 영역이었던 지역의 백성들이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신라는 진성여왕 이후 다섯 왕이 재위하는 동안 국토의 전체 영역을 다스리지 못하고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일원만 통치하기에 이르렀다.이 시대는 중국에서도 세계제국이었던 당나라가 907년에 망하고 오대(五代)가 교체되며, 북중국에서는 거란(契丹)이 등장하고, 남중국에서는 오월(吳越) 등이 등장하는, 이른바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였다. 중국이 혼란했던 이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우리 나라는 외세의 간섭을 비교적 적게 받을 수 있었고, 따라서 후삼국은 자주적으로 민족통일에 임할 수 있었다.후백제의 건국자 견훤은 상주(尙州) 또는 광주(光州) 출신이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농민 출신으로 체구가 건장하며 뛰어난 무사적 재능을 타고났다고 한다. 서남해안지역 방수(防戍)의 책임을 맡으면서 군인으로 출세하였다.당시 서남해안지역은 옛 백제의 영역이었으므로 이 지역 백성들은 신라 중앙정부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다. 견훤은 이를 이용해 신라에 멸망한 백제 의자왕의 원수를 갚겠다면서 자립을 선언하였다. 이에 대해 백성들이 크게 호응을 해오자 892년 무주(武州:지금의光州)에서 반기를 들고 왕이 되었다.900년(효공왕 4) 전주에 도읍하고 스스로 후백제왕이라 칭하며 관제를 정하였다. 후백제의 세력은 나주지역을 제외한 지금의 전라도 전부와 경상도 서부일대를 비롯하여 진주·합천까지 진출하고, 동으로 상주, 북으로는 청주·공주에까지 확대되었다.견훤은 신라의 군인으로 출세한 까닭에 신라 관제를 고수했으며, 적극적인 사회개혁 의지는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때 군사적으로는 고려와 신라를 위협할 정도로 강성했으며,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오월이나 거란 등과 외교관계를 맺으며 국력을 과시하였다.927년(경애왕 4) 신라 경주를 습격하여 경애왕과 관료들을 죽이고 왕비와 궁녀들을 욕보이며 약탈을 자행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는 오히려 고려와 신라의 관계를 밀접하게 만들어 경상도 일원의 세력이 왕건에게 귀부하는 결과를 빚었다. 안동지방의 고창(古昌)싸움에서 패배한 이후 군사적으로도 열세에 있다가 왕실의 내분으로 936년에 망하였다.궁예(弓裔)는 신라의 왕자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아마도 후궁 소생의 버림받은 왕자로서 성장과정이 순탄하지 않은 듯하다. 지금의강원도 영월지방에서 승려가 되었다가 죽주(竹州:지금의 죽산)에서 기훤(箕萱)에게 의탁하였다.곧이어 북원(北原:지금의 원주)의 도적의 괴수 양길(梁吉)에게 인정받아 장수로서 군사를 이끌고 지금의영월·강릉·인제 등의강원도 일대를 점령하면서 많은 무리를 거느리게 되었다. 그러나 한산주(漢山州:지금의 廣州) 관내를 공략하고 나아가서 철원(鐵原,鐵圓)에 근거를 두면서 양길로부터 독립하였다.898년 송악(松嶽:지금의 개성)에 도읍하면서경기도·황해도를 점령하고 충청도 북부까지 진출하면서 왕을 칭하였다.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원수를 갚는다고 하면서 고구려를 계승한다 하여 처음에는 국호를 후고구려라고 하였다. 이어 901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고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 하였다.한편 청주(淸州)사람 1,000호(戶)를 철원으로 옮겨 수도를 삼았다가, 다음 해 천도하고 연호도 성책(聖冊)으로 바꾸었다. 911년에 또다시 국호를 태봉(泰封),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삼았다가 914년에 정개(政開)로 고쳤다. 궁예는 왕건으로 하여금 나주지방을 경략하게 하여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고 중국과의 외교를 차단하려 하였다.또한 그의 영역은 북으로 평양에 이르고, 남으로는 지금의 강원도·경기도를 비롯하여 충청 북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궁예는 신라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고 미신적인 불교에 빠져 신하들을 의심하다가 인심을 잃어 918년 왕건에 의해 쫓겨나고 말았다.왕건은 조상 대대로 송악지방에 거주하면서 예성강 하구와 강화도 일대를 중심으로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 세력을 형성하였다. 아버지 왕륭(王隆)은 송악 지방의 호족으로서 뒤에 궁예에게 귀속하였다. 이 때 왕건도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장군으로서 크게 활약하였다.충주·청주 등지를 점령하기도 하고 나주지방을 경략하여 궁예의 세력기반을 튼튼히 하였으며 궁예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 그러나 궁예가 점차 포악해지고 의심이 많아 신하들을 함부로 죽이는 상황에 이르자, 918년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의 추대를 받아 왕으로 즉위하였다.왕건은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였다.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며 정통성을 주장하려 한 것은 궁예와 마찬가지였다. 건국 이듬 해 수도를 송악으로 옮겼다. 송악은 교통이 편리하고 왕건의 오랜 지지기반이었던 곳이다. 송악은 그 뒤 개경(開京)으로 바뀌어 고려 500년의 수도가 되었다. 내용 건국 당시 고려의 영역은 청주·웅진 이북으로부터 평양에까지 이르고 후백제의 배후인 나주를 차지하고 있었다. 왕건을 추대한 개국공신들은 주로 무장으로서 호족의 기반이 약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왕건은 각지의 호족들을 포섭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건국과 동시에 왕건에 대한 반발세력도 적지 않게 나타났다.특히 청주 지방이 반기를 들었으니 환선길(桓宣吉)·임춘길(林春吉) 등의 난이 그것이다. 청주·웅주(熊州:지금의 공주) 등지는 후백제에 귀속하기도 하였다.고려태조는 후삼국을 통합하기 위한 정책으로, 대외적으로는 중국 오대와 외교관계를 맺어 대외관계의 안정을 도모하면서, 대내적으로는 신라에 대한 적극적인 우호정책을 표방하고 후백제와는 대립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또 각 지방의 독립된 호족세력에게는 포섭과 회유정책을 취하였다.고려가 건국하자 후백제의 견훤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사신을 파견하는 등 평화정책을 폈다. 그러나 920년 후백제가 합천 지방을 점령하면서 고려와 후백제가 서로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고 두 나라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 뒤에 경상도 북부지방 호족들 다수가 왕건에게로 내투하였다.925년 조물성(曹物城:지금의 경상도 북부)싸움에서 후백제와 고려는 쉽게 승부를 짓지 못하자 화의를 맺고 인질을 교환하였다. 왕건은 당제(堂弟) 왕신(王信)을 후백제에 보내고, 견훤은 외생(外甥) 진호(眞虎)를 고려에 보냈다.그러나 이듬해 진호가 고려에서 병으로 죽자 견훤은 고려에서 고의로 죽였다 하여 왕신을 죽이고 군사를 일으켜 공주지방을 공격하였다. 이로써 고려와 후백제의 본격적인 통일전쟁이 시작되었다.이 때 신라의 경애왕은 “견훤이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키면 반드시 하늘이 돕지 않을 것이니 대왕이 군사의 위엄을 보이면 견훤은 반드시 패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왕건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왕건이 후백제를 칠 때 신라를 돕기까지 하였다.이것은 약소국의 위치에 있던 신라의 활로를 모색하려는 경애왕의 자구책이었을 것이다. 927년까지 경상도 북부일대에서 심한 격전이 펼쳐졌는데, 9월에 견훤은 신라의 수도경주를 기습하였다.문경 지방을 공격하다가 갑자기 영천을 거쳐 경주를 습격한 것이다.견훤은 경애왕을 죽이고 궁궐 등을 약탈한 뒤 김부(金傅:敬順王)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견훤이 영천에 쳐들어 올 때 신라는 고려에 원병을 요청했는데, 견훤의 군이 퇴각하다가 대구 공산(公山)에서 고려 왕건의 원군과 마주쳐 대결하게 되었다.이 공산전투에서 고려군은 참패를 당하여 개국공신 신숭겸과 김락(金樂) 등이 전사하고 왕건은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았다. 후백제군은 경상도 서부일대까지 휩쓸고 약탈하였다.견훤의 경주기습은 일시적인 무력시위로 위세를 떨쳤으나 신라의 민심은 대신라우호정책을 표방한 고려에 기울게 되었으며, 경상도 일대의 호족들이 대거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결국 싸움에서는 견훤이 이겼지만 소득은 왕건에게 돌아가게 된 것이다.이 해 12월과 다음 해 1월에 견훤과 왕건은 외교문서를 교환하면서 각각 중국과의 외교를 앞세워 상대방을 위협하는 등 서로 정책의 우월함을 과시하였다. 이후 경상도 북부 안동 지방에서 공방전이 계속되었으나 고려군이 극히 열세에 놓여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930년 고창군(古昌郡) 병산(甁山)싸움은 고려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려군이 열세에 놓여 곤경에 처하였을 때 유금필(庾黔弼)이 선전하여 후백제군 8,000여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둔 것이다. 이 싸움 이후 그 동안 군사적으로 열세에 있던 고려는 군사적으로도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후백제는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서해안 일대를 노략하기도 하였다.한편, 왕건은 견훤이 경주를 습격한 이후 경주를 방문하는 등 경순왕 이하 신라세력의 환심을 샀다. 그리하여 경상도 일대 호족세력의 대부분이 고려에 귀속하게 되었으며, 특히 강릉에서 울산까지의 지역에서 110여 성이 항복했다고 한다. 이 때 후백제 견훤가에는 형제간의 내분이 있었다.견훤에게는 큰아들 신검(神劍)을 비롯하여 양검(良劍)·용검(龍劍)·금강(金剛) 등이 있었다. 이 중 넷째 금강은 신체가 건강하고 뛰어나 견훤의 총애를 받았다. 금강이 후계자로 유력해지자 세 형들은 이를 시기하여 935년 3월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유폐시킨 뒤 신검이 왕이 되었다.6월에 견훤이 금산사에서 나주로 탈출하자, 왕건은 유금필을 보내어 그를 개경으로 데리고 왔다. 한편, 경주 일원만을 다스리고 있던 신라의 경순왕도 계속 후백제의 위협을 받고 있던 터에, 견훤이 고려에 귀순하여 환대를 받는 것을 보고 935년 11월 고려에 자진 항복하였다.이렇게 되자 왕건은 후백제에 대한 대비와 경략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충지인 천안지방에 대도독부(大都督府)를 두고 후백제 공격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936년 9월에 태조 왕건은 3군(三軍)을 이끌고 천안에 가서 군사를 집결하여 출전하였다.왕건은천안을 출발하여 일선군(一善郡:지금의 善山)으로 진격, 후백제 신검의 군사를 맞아 일리천(一利川)에서 대결전을 치러 승리하였다. 이 때 3군의 총수는 4만 3000명이었고, 지방호족과 북방민족의 부대를 합하면 고려의 총군사력은 8만 7500명에 달하였다.여기에는 왕과 태자 무(武:뒤의 혜종), 홍유·박수경(朴守卿)·왕순식(王順式)·유금필 등이 참여하였다. 고려군이 후백제군을 추격하여 황산군(黃山郡:지금의 논산) 탄령(炭嶺)을 넘자 후백제신검군은 항복하였다. 이에 태조 왕건은 후백제의 서울 완산(完山:지금의 전주)에 들어가 항복을 받고 백성을 위무하였다.이로써 후삼국으로 분열되었던 민족이 재결합하는 통일을 이루었다. 고려태조의 후삼국 통일정책은 융화정책과 통일전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는 각지의 호족을 포섭하여 고려의 지배체제에 끌어들이는 것과 후백제와의 무력대결을 통하여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었다.호족에 대해서는 정략혼인과 같은 유화정책을 썼고, 후백제와의 대결에 있어서는 일면 친신라정책을 쓰면서 후백제를 포위, 고립하게 하는 정책을 취했다. 태조는 후삼국통일을 최고의 과업으로 인식하여 남방으로 후백제·신라 방면에 시간과 정력을 쏟았을 뿐만 아니라 북방개척에도 힘을 기울였다.그것은 북진정책(北進政策)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고구려의 계승자로서 고구려 고토의 회복을 목표로 삼은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삼고 패서호족(浿西豪族)의 일부를 이 곳으로 사민(徙民)하여 민호(民戶)를 채우고 관부(官府)를 설치하는 등, 도성으로서의 시설을 갖추었다.또, 새로 개척한 북방 영토에 진(鎭)을 설치하여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그러는 한편, 926년 거란에게 멸망한 발해의 유민들이 내투해 오자 이들을 동족으로 인정하여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특히 발해왕자 대광현(大光顯)에게는 왕씨(王氏)의 성을 주는 등 민족융화정책을 폈다. 이리하여 후삼국뿐만 아니라 발해의 고구려계 유민까지도 포함한 민족통일을 이룩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7세기 중엽에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하여 이룩한 삼국통일이 종래 고구려의 영토 거의 전부를 상실하고 그 일부만을 가지게 된 불완전한 민족통일이라 한다면, 고려의 후삼국통일은 신라와 후백제의 영토와 문화 전부를 통합한 진정한 민족통일이라 할 수 있다.특히, 신라의 통일은 당나라라는 외세를 이용한 것에 비하여 고려의 통일은 우리 민족의 자력에 의한 것이기에 더욱 의의가 있다.또, 후삼국통일 이후 신라시대에는 영토의 한쪽에 치우쳐 있던 정치·문화의 중심지가 한반도의 중부지방인 개성으로 옮겨짐으로써 고구려·백제·신라의 옛 영토를 지배하기가 용이해져 우리 민족문화의 발전을 위한 큰 계기가 마련되었다. 또한 발해의 유민까지도 받아들임으로써 민족통일을 이루었다고 하겠다. 謹弔(근조) 삼가 조상(弔喪)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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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uqwrhuys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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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T AI 스피커로 ‘아리아’ 부르면 지구촌 어린이 돕는다 ∥ 서대문구⁴
서대문구 정의 서울특별시 서북부에 위치한 구. 개관 동쪽은 종로구, 서북쪽은 은평구, 남쪽은 마포구와 접하고 있다. 위치는 동경 126°54'~126°58', 북위 37°33'~37°36'이다. 면적은 17.61㎢이고, 인구는 31만 2141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4개 행정동(20개 법정동)이 있으며, 구청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에 있다. 자연환경 북한산의 말단에 위치하며 인왕산, 안산, 백련산 등의 산줄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산사면을 따라 높고 낮은 형세로, 택지는 홍제천 주변에 있다. 광주산맥의 말단부에 해당하며 인왕산(仁王山, 338.2m)·안산(鞍山, 295.9m)·백련산(白蓮山, 215.5m) 등 세 개의 봉우리가 잔구(殘丘)의 형태로 솟아있다.지형적 이유로 북쪽 비봉에서 발원하여 내려오는 불광천과 백련산 동쪽을 감싸고 흐르는 홍제천[일명 사천(沙川)]이 있고, 안산과 인왕산 사이를 흘러 내리는 만초천(蔓草川, 일명 욱천)이 있으며 모두 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한강 연안에 위치하고 있어 편서풍대의 영향을 받아 연평균 기온은 12.5°C, 1월 평균기온은 -3.2°C, 8월 평균기온은 25°C이며, 연 강수량은 1,200mm 내외이다. 역사 이 지역에서 발견된 구석기·신석기 시대 유적은 아직 없다. 그러나 이 지역이 한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고, 한강 유역의 하남시 미사리 유적이나 강동구 암사동 유적에서 선사 시대 인류가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도 구석기 시대에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고대국가로서 마한이 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서기전 18년 부여계 고구려 유이민인 온조(溫祚)가 남하하여 한강 유역에 백제국(伯濟國)을 건국하고 점차 마한제국을 병합하여 삼국 중 하나인 백제로 성장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475년 고구려의 남하로 수도를 공주로 옮길 때까지 500여 년간 이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살해함으로써 백제를 한강 유역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장악하였고, 이 일대에 북한산군(北漢山郡)을 설치하여 80여 년간을 다스렸다.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체결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동맹을 파기하고 이 일대를 독차지하여 북한산주(北漢山州) 혹은 신주(新州)를 두어 관리하였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당나라와 직접적인 교섭을 통해 고구려·백제에 대항하였다. 이후 통일을 달성한 신라는 전국을 9주로 나누면서 한강 유역을 한산주(漢山州) 또는 한주(漢州)로 개칭하고 한강과 접하고 있는 서울 지역에는 따로 한양군을 두었다.후삼국시대 양길의 부하였던 궁예(弓裔)가 895년 한산주 관내의 10여 성을 복속시킴에 따라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왕건(王建)이 건국한 고려에 귀속되었다. 이 일대는 고려 초에는 양주(楊州, 이때의 양주는 지금의 양주군이 아니라 고려 초 서울의 이름이다), 문종 이후 충렬왕 때까지는 남경(南京), 충선왕 이후 고려 말까지는 한양이라 불리었다.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설치하여 지방통치체제를 정비할 때 양주목에 속하였고, 1018년(현종 9)에는 지주사(知州事)로 격하되어 광주목(廣州牧)의 관내에 예속되었다. 이어 1067년(문종 21) 한강 북부지역에 남경을 설치하면서 서경(西京)·동경(東京)과 함께 삼경체제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1068년에는 남경이궁(南京離宮)을 설치하고, 남경으로의 천도론이 제기되어 1101년(숙종 6) 9월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여 본격적인 남경 궁궐 후보지를 물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104년 지금의 청와대 부근에 새 궁궐이 낙성되어 왕이 친행해 점검하는 등 거의 천도가 실현될 단계까지 이르렀으나, 이듬해 왕이 죽자 실천되지 않았다.그 ��� 무인정권과 몽고침략 등의 정치적·군사적 시련을 겪는 사이에, 남경은 서경과 함께 국왕 순주(巡駐)의 이경(離京)으로서의 가치가 감소되어 1308년(충렬왕 34)에 한양부(漢陽府)로 개칭되었고, 유수를 윤으로 고치는 것 외에도 판관과 사록 등의 관직을 두었는데 이는 그 지위가 격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공민왕 때 이르러 원과의 기반을 끊고 과거의 폐정을 혁신함과 동시에 새로 도읍을 옮길 것을 계획했는데, 이때 천도의 유력한 후보지로 과거의 남경인 한양이 물망에 올랐다. 그 뒤 왜구의 침략으로 조운이 원활하지 않자 개경에까지 영향이 미쳤고, 곧이어 수도의 안보문제가 거론되자 또다시 한양천도론이 제기되었다. 이리하여 우왕 때는 한양천도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추진되어 한때 실현되었고, 공양왕 때에도 일시 한양천도가 있었다. 그러나 다시 개경으로 환도했다가 신왕조인 조선의 개창을 계기로 천도문제는 마침내 최종적인 결정을 보게 되었다.고려 말부터 대두되던 한양천도론은 조선이 개창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개경에 정치적 기반이 없었던 태조 이성계는 새로운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신도읍이 필요했고, 이러한 요건을 갖추고 있었던 곳이 바로 한양이었다. 태조는 다양한 논의를 거쳐 1394년(태조 3) 8월 24일 한양을 새로운 도읍지로 확정하였다. 이어 9월 1일 궁궐 건설의 실무를 담당 추진하기 위한 기관인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였고, 9월 9일에는 한양에 대한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궁궐·종묘·사직과 도로의 건설, 각종 관아의 배치 등 기본계획을 작성하도록 지시하였다.수도 건설을 위한 궁궐 공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태조는 1394년 10월 25일 천도를 단행하여 3일 후인 10월 28일 한양에 도착하였다. 이어 이듬해 12월에 조선시대 정궁(正宮)인 경복궁이 완공되어 비로소 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 한양부(漢陽府)를 한성부(漢城府)라 고치고 이듬해 9월에는 도성과 문루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동·서·남·북·중 5부(部) 52방(坊)으로 나누어 도시 규모를 정비하였다. 이로써 명실상부한 조선의 수도로서 한성이 탄생된 것이다. 당시 서대문구에 해당하는 지역에 도성의 4대문 가운데 하나인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이라고도 함)이 건설되어 이 일대의 지명이 되었다.서대문구 일대는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의 반석방(盤石坊)·반송방(盤松坊)과 북부의 성저십리(城底十里) 이내에 해당하는 상평방(常平坊)·연은방(延恩坊)·연희방(延禧坊) 지역이었다.1911년 4월 1일 5부 8면제가 실시됨에 따라 이 지역은 서부 반석방 반송방과 연희면(延禧面) 지역이 되었다. 1914년에는 서대문구의 행정구역이 축소되면서 용강면(龍江面)·연희면·은평면(恩平面) 지역이 고양군에 속하였고, �� 충정로 일대는 죽첨정(竹忝町) 등이 일제식 이름으로 ��경되었다. 동시에 이 일대는 서대출장소 관할이 되었고, 1915년에는 경성부 직할로 변경되었다. 1936년 고양군에 속했던 이 지역의 대부분이 경성부로 편입되었고, 1943년 출장소 대신 구(區)제도가 실시되면서 이곳은 서대문구역소(西大門區役所)에 속하게 되었다. 이어 1944년 마포구역소가 신설되면서 서대문구 관할구역의 일부가 마포구역소로 넘어갔다.1945년 10월 16일 구역소를 구청으로 하고 구장(區長)을 구청장(區廳長)으로 개칭하면서 서대문구역소도 서대문구청으로 바뀌게 되었다. 1949년 은평면 11개 리와 연희면 7개 리를 서울에 편입하여 서대문구 은평출장소에 편입하였으며, 1955년에는 종래의 동회(洞會)를 동(洞)으로 개칭하고 각 구청에 행정동을 따로 정하여 행정업무를 담당하도록 함에 따라 서대문구에는 53개의 행정동을 두게 되었다. 1962년에는 대신동을 신설하였고, 1964년에는 서대문구의 노고산동과 대현동 일부가 마포구에 편입되고, 마포구의 아현동 일부가 서대문구로 편입되었다. 1970년 동명칭과 관할구역을 변경하면서 행정동을 53개에서 41개 동으로 축소하였다.1973년에는 진관동을 신설하였고, 연희동 일부가 마포구로 그리고 마포구의 동교동과 서교동 일부가 서대문구로 편입되었다. 1975년 대규모의 구관할구역 변경에 따라 서대문구 관할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즉 서대문구 관할의 평창동, 구기동, 부암동, 홍지동, 신영동, 행촌동, 송월동, 홍파동, 평동과 교남동, 교북동, 현저동, 충정로1가의 각 일부가 종로구에 편입되었고, 서소문동, 정동, 순화동, 의주로2가, 중림동과 의주로1가, 충정로1가, 합동, 충정로3가, 만리동1·2가의 각 일부는 중구에 편입되었다. 또한 상암동, 성산동과 수색동, 중동, 남가좌동, 연희동 각 일부를 마포구로 넘겨주고 만리동1·2가 일부를 용산구에 넘겨 주었으며, 마포구의 동교동 일부를 서대문구에 편입하여 행정동이 42개 동에서 37개 동으로 축소되었다.1977년에는 북가좌2동과 증산동을 신설하였고, 1978년에는 영천동을 폐지하였다. 이어 1979년 은평출장소를 없애고 은평구청을 신설하면서 서대문구 중 녹번동, 불광동, 갈현동, 구산동, 대조동, 응암동, 역촌동, 신사동, 증산동, 진관내동, 구파발동, 수색동 등 13개 동이 서대문구 관할에서 제외되어 종래 39개동이 23개 동으로 축소되었다.1980년에는 홍은4동이 홍은2동으로, 1983년에는 홍제1동 일부가 홍제2동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1989년에는 대현동 일부가 북아현3동으로, 북아현3동 중 일부가 충정로3가에 편입되었다. 1998년에는 현저동이 천연동에 편입됨에 따라 서대문구에는 14개 동이 있다. 유물·유적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는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白磁鐵畵葡萄文항아리, 국보 107호)를 비롯하여 월인석보(月印釋譜, 보물 제745호), 백자 철화운룡문 항아리(白磁鐵畵雲龍文항아리, 보물 제645호), 백자 청화송죽인물문 항아리(白磁靑華松竹人物文항아리, 보물 제644호), 고구려 평양성 석편(高句麗平壤城石片, 보물 제642호), 기사계첩(耆社契帖, 보물 제638호), 청자 투각고리문 의자(靑磁透刻連環文의자, 보물 제416호),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7(紺紙銀泥妙法蓮華經卷7, 보물 제352호), 전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傳楊平 菩提寺址大鏡大師塔, 보물 제351호),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靑磁淳化四年銘항아리, 국보 제326호) 등을 소장하고 있다. 또한 연세대학교박물관에는 봉업사명 청동북(奉業寺銘靑銅金鼓, 보물 제576호)이 있다.사적으로는 서울 독립문(사적 제32호)과 서울 연세대학교 스팀슨관(사적 제275호), 서울 연세대학교 언더우드관(사적 제276호), 서울 연세대학교 아펜젤러관(사적 제277호)와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사적 제324호), 서울 영은문 주초(迎恩門柱礎, 사적 제33호)가 있다.이외 무악산 동봉수대 터(毋岳山東烽燧臺터, 서울특별시 기념물 13호), 양호거사비(楊鎬去思碑,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91호), 화산군 이연 신도비(花山君李渷神道碑,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41호), 옥천암 마애좌상(玉泉庵磨崖坐像,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7호) 등이 있다.홍은동의 백련사(白蓮寺)는 신라 때인 747년(경덕왕 6)에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창건한 사찰로 경내에는 명부전(冥府殿)·삼성전(三星殿)·극락보전(極樂寶殿)·범종각(梵鐘閣)·원통전(圓通殿) 등이 있고, 절문 앞에는 사령지취락(寺領地聚落)이 형성되어 있다. 봉원동에 있는 봉원사(奉元寺)는 신라 때인 889년(진성여왕 3)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한 사찰로 대웅전·명부전·칠성각 등 11동의 건물이 남아있고, 그 중 염불당(念佛堂)은 마포 공덕리에 있던 대원군의 아소정(我笑亭)을 옮겨 온 것이다. 또한 인왕산 선바위 앞에 있는 인왕사(仁王寺), 홍은동의 옥천암(玉泉庵), 봉원동의 용암사(龍岩寺) 등의 사찰이 있다.대현동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는 왕비록 원삼(王妃錄圓杉, 중요민속문화재 제63호), 적초의(赤綃衣, 중요민속문화재 제62호), 청초중단(靑綃中單, 중요민속문화재 제61호) 등의 중요민속문화재들이 있다.또한 영산재·봉산탈춤·단청장 등이 있는데, 영산재(靈山齋, 국가무형문화재 제50호)는 봉원동의 박희덕(朴喜德), 봉산탈춤(국가무형문화재 제17호)은 홍제동의 윤옥, 단청장(丹靑匠, 국가무형문화재 제48호)은 봉원동의 이치호(李致虎),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은 홍은동의 이강덕이 보유자로 지정되어 있다. 칠장(漆匠,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1호)은 연희동의 홍동화(洪東和), 은공장(銀工匠,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17호)은 홍제동의 김원택(金元澤)이 보유자이다. 교육·문화 이 지역은 일찍부터 근대교육기관이 있었다. 초등학교로는 1896년 한성공립소학교(漢城公立小學校)에서 출발한 미근동의 미동초등학교, 1937년 개교한 홍은동의 홍제초등학교, 1941년 설립된 북아현동의 북성초등학교 등이 있다.중·고등학교로는 1921년 순종의 하사금을 받아 향상기술학교(向上技術學校)로 출발한 동명여자중학교, 1922년 손창원(孫昌源)의 인창의숙(仁昌義塾)으로 시작한 인창중·고등학교, 1928년 경성실업전문학교로 출발한 한성중·고등학교, 1940년 경성가정여숙(京城家政女塾)으로 출발한 중앙여자중·고등학교 등이 있다.2015년 현재 초등학교 18개교, 중학교 14개교, 고등학교 7개교, 특수학교 1개교가 있다.특히 많은 대학이 이 지역에 있어 명실상부한 교육의 중심부로서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 1885년 선교사 알렌(H. N. Allen)이 설립한 광혜원(廣惠院)에서 비롯된 세브란스의과대학이 1957년 연희대학교와 통합하면서 연세대학교가 들어섰고, 1886년 선교사인 스크랜턴(M. F. Scranton)이 한 명의 여학생을 대상으로 수업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듬해 이화학당으로 설립된 이화여자대학교 그리고 1905년 미국 감리교회 한국선교부에서 설립한 감리교신학대학 등이 모두 광복 이전에 설립된 학교들이다. 이 외에도 서울여자간호대학·명지전문대학·명지대학교·경기대학교·추계예술대학교 등 많은 사립학교들이 있다. 이 외에도 신촌동에 있는 연세대학교 재활학교와 외국인 2세를 위한 연희동의 서울외국인학교와 한성화교중·고등학교 등이 있다.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화단체로는 창작미술협회, 한국현대판화회, 한국조각공원연구회, 김자경오페라단 등 10여 개 단체가 꾸준히 활동하고 있고, 대현동에 있는 한국전통예술연구보존회는 사물놀이의 대표인 김덕수가 조직하여 전통예술을 보존하고 보급시키고 있다.또한 현대적 전시관과 문화관이 함께 있는 곳으로는 구민회관을 비롯하여 서대문문화회관이 있다. 서대문문화회관은 1993년에 지상 3층 규모로 개관하여 80여 평 규모의 갤러리, 문화의 집 및 어학, 취미, 공예미술, 국악, 교양문화, 컴퓨터 등의 강좌를 개설 운영하고 있으며, 180석 규모의 소극장과 600석 규모의 대극장 등 다목적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박물관으로는 연희동의 서대문자연사박물관과 연세대학교박물관·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이화여자대학교 자연사박물관 등이 있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은 자연스럽게 동·식물과 접하면서 청소년의 교육공간, 주민들의 문화공간, 가족들의 휴식공간으로 다양한 자연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는 국보 및 보물만 1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2004년 완공된 연희동의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은 약 1만 m²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건립되어 지구의 탄생과 변화, 생명체의 다양한 모습과 흔적 등이 주제별로 꾸며져 있다. 1층에는 ‘인간과 자연관’을 만들어 쥐라기 육식공룡인 티라노사우루스의 머리뼈를 포함해 중생대 백악기 공룡들의 골격 등이 전시되어 있고, 무분별한 광산 개발로 인해 파괴된 산림을 보여주는 ‘신음하는 자연’과 한강에 서식하는 동식물을 전시한 수족관도 눈길을 끈다. 2층 ‘생명진화관’은 태초의 생명이 현재의 인류로 진화한 과정을 전시하는 곳으로 서해안에서 발견된 스트로마톨라이트를 볼 수 있다. 3층 ‘지구환경관’에서는 입체 안경을 끼고 빅뱅부터 지구가 형성되는 과정을 3차원 영상으로 볼 수 있다. 동굴관은 벽과 천장이 실제 동굴처럼 꾸며져 있다.현저동에 있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김구, 강우규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거쳐 갔던 옛 서대문 형무소 보안과 청사와 옥사로 사용하던 곳이다. 역사현장으로 남기기 위해 옥사와 사형장, 망루와 시구문 등을 원형대로 복원하여 보존하고 있다1924년 개관한 신촌동 연세대학교 중앙박물관은 우리나라 대학박물관의 효시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한국의 전통문화와 이에 연관된 여러 지역의 문화자원까지도 개발·수집·연구하고 이를 보존 전시하여 교육과 연구에 활용하고 있다. 1988년에는 100주년 기념관의 준공으로 이곳에 선사·역사·미술·민속·질그릇·전각·학교사·지질·동식물 등의 9개 상설전시실과 특별기획전시실, 야외전시장을 갖춤으로서 대학박물관으로서는 처음으로 종합박물관의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대현동의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은 1935년 일제 치하에서 우리 문화유산을 보존하고자 교수와 학생들이 모은 민속품, 목공품, 도자기 등을 본관 1층에 진열, 전시한 것이 창설의 계기가 되었다. 이후 귀중한 문화재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1990년 현재의 박물관을 신축하여 개관하였다. 또한 이화여자대학교 자연사박물관은 지각을 구성하는 암석과 광물을 비롯해 국내에 서식하는 동물과 식물 등을 연구하기 위해 1969년에 설립되었다.이 외에도 현대적 전시관과 문화관이 함께 있는 곳으로는 구민회관을 비롯하여 서대문문화회관이 있다. 서대문문화회관은 1993년에 지상 3층 규모로 개관하여 80여 평 규모의 갤러리, 문화의 집 및 어학 취미 공예미술 국악 교양문화 컴퓨터 등의 강좌를 개설 운영하고 있으며, 180석 규모의 소극장과 600석 규모의 대극장 등 다목적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이 지역의 스포츠는 구에서 운영하는 체육회 외에 생활체육협의회가 있어 일상생활과 밀접한 스포츠 활동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스포츠시설로는 공원이나 하천부지 혹은 야산에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다. 홍은동에는 서대문구립인조잔디축구장, 가좌배수지 배드민턴장과 테니스장, 홍은동 테니스장, 백련약수터, 논골그린공원, 옥척암녹지대, 실락어린이공원이 있다. 그리고 연희동에는 궁둥산 배드민턴장, 연홍약수터, 안산팔각정, 연서어린이공원이 있으며, 홍제동에는 둔치체육시설, 홍제3동 농구장, 불천어린이공원이 있다. 그 외 봉원동의 봉원사배드민턴장, 천연동의 금화테니스장과 동명여중 담장, 북아현동의 금화체력단련장, 창천동의 골목길공원과 바람산공원 등의 각종 스포츠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민속 정월 초하루에는 설날을 맞아 각 가정에서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드리는 풍속이 남아있다. 정월 열나흘에는 오곡밥 먹기, 정월 대보름의 부럼깨기와 더위팔기, 윷놀이, 연날리기 등이 행해진다. 사월 초파일에는 절에 가서 연등달기, 칠월 복중에 개고기와 삼계탕 먹기, 추석 차례와 성묘가기, 동지 때 팥죽 먹기 등의 세시풍속이 펼쳐진다. 특히 정월대보름에 펼쳐지는 지신밟기는 지역의 대학생들과 동네 주민이 한데 어울려 펼쳐지는 행사로 주목받고 있다.민속놀이로는 정월대보름에 행해지는 새터지신밟기가 있다. 이는 신촌의 옛 이름인 새터에서 인근의 4개 대학, 연세대·이화여대·서강대·홍익대의 풍물패가 주최하고 대학생과 지역 주민이 함께 어우러져 동네 곳곳을 다니며 지난해의 묵은 액을 씻어내고 새해에 복이 깃들기를 기원하는 행사이다. 이 놀이는 1993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우리문화 한마당공연과 윷놀이대회 등도 곁들인다.또한 봉원사에서는 영산재가 펼쳐지는데, 이 행사는 영산재 인도 영취산에서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법할 때의 모습을 재현한 불교의식으로,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다 함께 부처님의 참 진리를 깨닫고 고통이 없이 즐거움만을 얻는 경지에 이르게 하는데 의의가 있다. 설화·민요 이 지역에는 무악재가 있어 예로부터 호랑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무악재는 많은 사람들이 동행하는 길목이었으나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국가에서 유인막(留人幕)을 설치하여 호랑이로부터의 피해를 줄이고자 하였던 곳이다. 그 중에 효자리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된 이야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 한성부판윤을 지낸 박창선(朴昌先)에게 효성이 매우 지극한 조상이 한 분 있었다고 한다. 선대조 박씨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한성의 집에서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하였다 한다. 이 날도 박씨가 아버지의 묘소를 향해 가고 있는데, 무악재에 이르자 어두컴컴한 숲속에서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박씨가 깜짝 놀라 “나는 선친의 묘에 가는 길이다. 나를 잡아먹으려거든 잡아먹으라.”하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자 호랑이는 박씨 앞으로 다가와서 넙죽이 엎드리더니 등에 타라는 몸짓을 하였다. 박씨는 호랑이 등에 탔고, 박씨를 태운 호랑이는 산봉우리를 몇 개나 넘어 달려 당도한 곳은 박씨의 선친묘 앞이었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박씨가 묘소에 참배하였는데, 호랑이는 다시 박씨에게 타라는 시늉을 하였다. 박씨는 올 때와 같이 호랑이 등에 타고 무악재까지 왔는데, 호랑이는 박씨를 내려놓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박씨가 무악재에 이르면 그 호랑이가 나타나 그를 태우고 다녔다. 이렇게 하기를 몇 해가 지났고 박씨가 병들어 죽자 그 역시 고양군 신도면 선영에 장사 지냈다. 훗날 집안사람들이 박씨의 묘에 가 보니 묘 앞에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대궐에까지 들리자 임금이 감탄하여 ‘하늘이 내린 효자’라 하여 하사금을 내려 묘 옆에 사당을 짓고 효자정문을 세웠다. 이때부터 그 부근 마을을 효자리라고 하였다. 지금도 행정명으로 고양군 신도면 효자리가 남아있으며, 이 밖에도 또 다른 호랑이와 관련된 설화가 있다. 산업·교통 토지의 26.6%가 임야이고 경지는 전체 토지의 0.4%이다. 대지 41.0%, 학교용지 12.3%, 도로 12.1%, 하천 2.4%, 철도용지 1.2%로 임야와 대지의 비율이 높다.산업 인구 가운데 제조업 종사자는 5.5%, 도소매업이 16.2%, 숙박 및 음식업이 16.3%, 운수업 7.5%, 통신업 1.0%, 금융보험업 6.2%, 사업서비스업 6.4%, 교육서비스업 11.1%, 보건 및 사회복지사업 9.5% 등 다양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전체 사업체 수 가운데 1~4명의 종사자를 가지고 있는 사업체가 전체의 88%로 압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1,000명 이상의 사업체는 6개 업체에 불과하다.예로부터 이 지역은 도성을 나와 평안도의 의주로 통하는 큰 도로가 있어 사신들이 홍제원에 머물렀다 가는 곳이었기 때문에 많은 인파가 왕래하던 곳이었다. 또한 근대에는 경의선이 가설되면서 철로를 통한 왕래가 가능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전차가 왕래하기도 했다.현대에는 서대문에서 아현동·신촌·서교동·영등포로 통하는 도로, 금화터널을 통해 연희·성산·화곡동으로 통하는 도로, 무악재를 통해 구파발·불광·홍제동으로 통하는 의주로 등의 간선도로들로 도심지와의 소통이 매우 편리하며, 도심과 영등포·강서·은평구 지역을 연결해준다. 또한 고양·문산으로 통하는 경의선이 통과한다. 나아가 본격적인 지하철시대가 개막되면서 도심 순환선인 2호선과 동서를 연결하는 3호선 및 6호선이 모두 서대문지역을 지나면서 더욱 교통이 편리해졌다.폭 40m 이상의 넓은 도로는 서대문로터리에서 아현3거리에 이르는 충정로를 비롯하여 홍은동에서 은평구 불광동으로 이어지는 통일로, 남가좌동 사천교에서 수색동으로 연결되는 수색로, 현저동 독립문에서 금화터널을 지나 영등포구로 연결되는 성산로, 충정로에서 신촌을 지나 동교동으로 이어지는 신천로 등이 주요 도로망을 형성하고 있다. 이 외에 창전로, 응암로, 연희로, 가좌로, 동교로, 증가로 등의 간선도로가 있으며, 연희동과 홍제동을 관통하는 내부순환도로가 있다.철도는 서울역과 문산 간을 연결하는 경의선이 지나고 있으며 이 지역을 거치는 역은 신촌역, 가좌역, 수색역이 있다. 특히 신촌역은 1920년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한 이래 지금까지 그 역사가 그대로 남아있어 최근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또한 서부역에서 출발하여 신촌역을 거쳐 벽제, 일영, 장흥, 송추 등을 경유하여 의정부역까지 순환하는 서울교외선이 있는데, 이 노선은 경의선의 신촌·가좌·수색역을 함께 이용하고 있다.지하철은 2호선과 3호선, 6호선이 이 지역을 통과한다. 지하철 2호선은 서울 강남과 강북의 도심권 43개 역을 순환하는 노선으로 1978년 3월에 착공하여 1984년 5월 완공되었다. 서대문구를 지나는 2호선 구간은 충정로역, 아현역, 이대입구역, 신촌역, 홍대입구역이 있고, 충정로역에서는 5호선을 갈아탈 수 있다. 그리고 지하철 3호선은 수서에서 대화까지 39개 역을 운행하는 전철로 1980년 착공, 부분적으로 개통을 시작하여 1985년 10월에 완전 개통되었으며, 서대문구간은 1985년 7월에 개통되었다. 서대문구를 지나는 3호선 구간은 독립문역, 무악재역, 홍제역이 있다. 지하철 6호선은 봉화산역에서 역촌역까지 38개 역을 운행하는 전철로 1994년에 착공하여 2001년 완전히 개통되었으며, 서대문구 지역은 2000년 12월 공사가 완료되었다. 서대문구를 지나는 6호선 구간은 수색역, 증산역이다. 관광 이 지역의 관광자원으로는 풍부한 문화재를 연결한 볼거리가 많이 산재해 있다. 특히 사적지인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인근의 독립문 영은문주초 등을 두루 둘러볼 수 있는 서대문독립공원이 인기를 끌고 있다. 현저동에 있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김구, 강우규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거쳐 갔던 옛 서대문 형무소 보안과 청사와 옥사로 사용하던 곳이다. 역사현장으로 보존하기 위해 옥사와 사형장, 망루와 시구문 등을 원형대로 복원하여 역사의 현장으로 보존하고 있다.1층에는 추모의 장을 만들어 ��본의 침략에 맞서 분연히 일어선 애국지사들을 가두었던 서대문형무소를 첨단 영상시스템을 통해 조감해 보고, 그분들의 발자취를 직접 찾아보며 그 숭고한 넋을 기리도록 하였다. 2층에는 역사의 장을 만들었는데, 이곳은 나라 사랑에 불타는 선열들의 의거를 통해 우리의 암울했던 역사와 그 극복을 위한 저항 정신을 계승하고, 온갖 고문과 억압에도 굽힘이 없었던 역사의 현장을 다시금 되돌아보기 위해 구성되었다. 그리고 지하 1층에는 체험의 장을 개설하였는데, 이 장소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조건조차 말살되고 폭력과 고문으로 인한 애국지사들의 신음이 아직도 들려오는 곳, 그러나 끝내 꺾이지 않던 그 분들의 용기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살아있는 역사체험의 장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이어 2000년에 착공하여 2004년 문을 연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은 3층 규모로 인간과 자연 및 지구환경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이 외에도 연세대학교 안에 있는 옛 건물들과 안산 일대, 봉원사 경내와 영산재,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백련사 경내 등도 이 지역의 관광자원이다.신촌역을 중심으로 대학교가 밀집되어 있어 많은 학생들이 모이는데 특히 연세대학교 앞과 이화여자대학교 입구에 보다 집중되어 있다. 이화여대 입구에는 여학생들의 통행이 많은 관계로 양장점과 양품점 등의 상가가 발달되어 있고, 신촌로터리 주변에는 음식점과 주점 등이 대표적인 전문상가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모래내시장을 중심으로 해서는 서민들의 먹거리 문화가 형성되어 있으며, 연희동 일대에는 화교들을 위한 중국음식점들이 많이 들어서 있어서 중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곳이다.전통문화 행사로는 음력 새터지신밟기 행사와 봉원사에서 개최되는 영산제가 있다. 특히 영산제는 사전에 예약을 받아 개최되며 우리나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현대 문화행사로는 젊음과 낭만이 가득한 신촌에서 지역 주민과 대학생이 함께하는 거리축제가 있다. 퇴폐 향락문화를 추방하고 건전한 대학문화의 정착과 지역문화 발전을 위해 개최되는 이 축제는 지역문화, 대학문화, 상가문화가 한데 어우러져 화합의 한마당을 연출한다. 대학촌의 특성에 어울리는 국악한마당, 락공연, 화합의 달리기, 응원제전 등과 외국인들도 참여할 수 있는 다채로운 행사로 구성되어 있다. 동(洞) 1. 남가좌동(南加佐洞)서대문구의 서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이 마을에 가재가 있고 산에 둘러싸였기 때문에 ‘가재율’이라 부르던 자연 마을을 한자로 가좌동(加佐洞)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인구가 증가하면서 남북으로 나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北部, 城外) 가좌동계(加佐洞契) 가재율이었으며, 1895년 한성부 북서(北署) 연희방(성외) 가좌동1계에 속하였다. 1911년 경성부 연희면 가좌동1계 월사동이라 하였다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남가좌리(南加佐里)로 변경되었다.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되었고, 1946년 서대문구 남가좌동이 되었다. 행정동으로는 남가좌1동과 남가좌2동의 2개 동이 있다. 수색로 옆의 오래된 모래내시장은 서민들이 자주 찾는 곳이고, 대학으로는 명지대학교가 있다. 2. 냉천동(冷泉洞)서대문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으로 냉천동의 행정은 천연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동명은 마을 여기저기에서 찬 샘물이 솟아난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서부(西部) 반송방(盤松坊) 지하계(池下契)였으며, 1895년 서서(西署) 반송방 지하계 이판동(李判洞)·냉동(冷洞)이라 하였다. 1914년 경성부 냉동이 되었고, 1936년 냉천정(冷泉町)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46년에 서대문구 냉천동이 되었으며, 행정업무는 1975년부터 천연동·옥천동과 함께 천연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3. 대신동(大新洞)서대문구의 중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1962년 대현동(大峴洞)의 ‘대’(大)자와 신촌동(新村洞)의 ‘신’(新)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성외) 아현계(阿峴契)였으며, 1895년에는 북서(北署) 연희방 아현2계 대현동·신촌이었다. 1911년 경성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대현리·신촌리의 일부가 되었다. 1936년에 경성부 대현정(大峴町)·신촌정(新村町), 1946년에는 서대문구 대현동과 신촌동의 일부였다. 1962년에 두 지역을 통합하여 대신동이라 하였다. 4. 대현동(大峴洞)서대문구의 중부에 위치한 동으로 대현동의 행정은 대신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동명은 아현동에서 신촌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대현(大峴)이라 한데서 유래하였다. 조선시대에 한성부 관할구역으로 한성부 북부 연희방(延禧坊, 城外) 아현계(阿峴契)였으며, 1895년 북서(北署) 연희방 아현2계 대현동, 아현4계 마근동(麻根洞)에 속하였다. 1911년 경성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대현리로 불렸다. 1936년 경성부 대현정(大峴町)이 되었다가 1943년 서대문구에 속하였고, 1946년 서대문구 대현동이 되었다. 이곳에는 이화여자대학교가 있어 젊은이들이 붐비는 곳이며,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는 국보 등 중요민속문화재들을 소장하고 있다. 또한 한국전통예술보존연구회가 있어 김덕수를 중심으로 전통예술 보존에 앞장서고 있다. 5. 미근동(渼芹洞)서대문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으로 미근동의 행정은 충정로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동명은 이 지역에 있던 미동(尾洞)의 ‘미’(尾)자와 근동(芹洞)의 ‘근’(芹)자를 땄는데, 후에 한자가 바뀌게 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반송방(盤松坊, 城外)에 속하였으며, 1895년 서서(西署) 반송방 노첨정계 미동·수근전계 근동으로 바뀌었다. 1914년 경성부 미근동(渼芹洞)이 되었고, 1936년 미근정으로 바꾼 후 1943년 서대문구에 속하게 되었다. 1946년에는 서대문구 미근동이 되었고, 행정은 합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문화시설로는 서대문극장과 드림시네마(구 화양극장)의 영화관이 있고, 행정기관으로는 경찰청과 서대문경찰서가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1896년 한성공립소학교(漢城公立小學校)에서 출발한 미동초등학교가 있다. 6. 봉원동(奉元洞)서대문구의 중부에 위치한 동으로 봉원동의 행정은 대신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동명은 이 마을에 위치한 봉원사(奉元寺)란 절에서 유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北部) 성외에 속하였고, 1911년 경성부 연희면 봉원동이 되었으며,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봉원리가 되었다. 1936년 경성부 봉원정(奉元町)이 되었다가 1946년 서대문구 봉원동이 되었다. 이곳에 안산도시자연공원이 있어 가벼운 산책과 생활체육을 즐길 수 있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동명의 유래가 된 전통사찰인 봉원사와 용암사가 있다. 7. 북가좌동(北加佐洞)서대문구의 서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이 마을에 가재가 있고 산으로 둘러싸였기 때문에 ‘가재율’이라 부르던 자연 마을을 한자로 가좌동(加佐洞)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인구가 증가하면서 남북으로 나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北部, 城外) 가좌동이계(加佐洞二契)였으며, 1895년 한성부 북서(北署) 연희방(성외) 가좌동2계에 속하였다. 1911년 경성부 관할이 되었으며,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북가좌리(北加佐里)로 변경되었고, 광복 후 1946년에 서대문구 북가좌동이 되었다. 행정동은 북가좌1동과 북가좌2동의 2개 동이 있다. 8. 북아현동(北阿峴洞)서대문구의 동남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애오개, 즉 아이고개에서 비롯되었으며, 1914년 아현의 북쪽에 위치하여 아현 북리라 한 것이 시초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성외 지역이었으며, 1895년에는 한성부 서서(西署) 반송방 아현계·북부 연희방 아현1계로 하였다. 1911년 경성부 연희면(延禧面) 아현북리(阿峴北里)로,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아현북리로 칭하였다. 1936년 경성부 북아현정(北阿峴町)이 되었으며, 1943년 서대문구에 속하였고, 1946년 서대문구 북아현동이 되었다. 행정동은 북아현1동에서 3동까지 3개 동이 있다. 대학으로는 추계예술대학교가 있다. 9. 신촌동(新村洞)서대문구의 중부에 위치한 동으로 신촌동의 행정은 대신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동명은 조선시대 ‘새터말’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신촌’이라 한데서 유래한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北部, 城外) 연희궁계(延禧宮契)에 속하였다가, 1895년에는 북서(北署) 연희방(성외) 아현2계 신촌으로 칭하였다. 1911년 경성부 연희면 신촌리로 하였으며,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신촌리가 되었다. 1936년 경성부 신촌정(新村町), 1943년에는 서대문구 소속이 되었으며, 1946년 서대문구 신촌동이 되었다. 연세대학교와 세브란스병원이 있어 학생들과 시민의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다. 10. 연희동(延禧洞)서대문구의 중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이 마을에 조선 초 정종이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머물렀던 연희궁(延禧宮 또는 衍禧宮) 터가 있던 데서 유래한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성외였으며, 1895년 한성부 북서(北��) 연희방 정자동계 정자동(亭子洞)·염동1계(廉洞1契) 염동(廉洞)·세교2계(世橋2契) 궁동(宮洞)·음월리계(陰月里契) 음월리(陰月里)였다. 1911년 경성부의 관할이 되었고, 1914년에는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연희리로 칭하였다. 1936년 경성부 연희정(延禧町)이 되었고, 1943년 서대문구 소속이 되었으며, 1946년에 서대문구 연희동이 되었다. 행정동은 연희1동에서 3동까지 3개 동이 있다. 문화시설로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이 있고, 관공서로서 서대문구청, 서대문구민생활체육협의회가 있다. 그리고 외국인을 위한 서울외국인학교가 있으며, 화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연희삼거리 일대에 화교음식점이 인기를 끌고 있다. 11. 영천동(靈泉洞)서대문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으로 영천동의 행정은 천연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동명은 현저동사무소 서쪽 산정에 속칭 ‘악밖골약수터’가 있으며, 이 물을 영천(靈泉)이라 불렀던 데서 유래한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반송방(盤松坊, 城外)에 속했으며, 1895년 서부 반송방 지하계 관전동(館前洞)·관후동(館後洞)·옥폭동(玉瀑洞)·장원정동(壯元亭洞)이라 하였다. 1911년 경성부 관할이 되었고, 1914년 경성부 관동(館洞)이라 하였다. 1936년 관동정(館洞町)으로 변경되었고, 1943년 서대문구 관할이 되었으며, 1946년에 서대문구 영천동이 되었다.1 2. 옥천동(玉川洞)서대문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으로 옥천동의 행정은 천연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동명은 옛날에 옥천암(玉川庵)이라는 조그만 암자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반송방(盤松坊, 城外)에 속했으며, 1895년 서부 반송방 지하계 옥폭동(玉瀑洞)·이판동(李判洞)이라 하였다. 1911년 경성부 관할이 되었고, 1914년 경성부 옥천동이라 하였다. 1936년 옥천정(玉川町)으로 변경되었고, 1943년 서대문구 관할이 되었으며, 1946년에 서대문구 옥천동으로 되었다.1 3. 창천동(滄川洞)서대문구의 남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이 지역을 흐르는 하천인 창천(滄川)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였으며, 1895년 한성부 북서(北署) 연희방(성외) 아현3계 창천이라 하였다. 1911년 경성부 소속이 되었다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창천리가 되었다. 1936년 경성부 창천정(滄川町)으로 변경되었고, 1943년 서대문구 관할이 되었으며, 1946년 서대문구 창천동으로 하였다. 문화시설로는 신영극장이 있다.1 4. 천연동(天然洞)서대문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이 지역에 천연정(天然亭)이란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반송방(盤松坊, 城外)에 속했으며, 1895년 서부 반송방 지하계 석교동(石橋洞)·이판동(李判洞)이라 하였다. 1911년 경성부 관할이 되었고, 1914년 경성부 천연동이라 하였다. 1936년 천연정(天然町)으로 변경되었고, 1943년 서대문구 관할이 되었으며, 1946년 서대문구 천연동으로 하였다.1 5. 충정로동(忠正路洞)서대문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으로 법정동인 충정로2가와 충정로3가의 행정은 충정로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충정로의 동명은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의 시호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반송방(盤松坊, 城外)에 속했으며, 1895년 서부 반송방 노첨정계(盧僉正契), 조판부사계(曺判府事契) 유동·팔각정, 수근답계(水芹畓契) 근동, 지하계(池下契) 냉동(冷洞), 차자리계(車子里契) 아현(阿峴)·형제정(兄弟井)이라 하였다. 1911년 경성부 관할이 되었고, 1914년 경성부 죽첨정2정목(竹添町2丁目)이라 하였다. 죽첨정은 갑신정변 때 일본공사 죽첨진일랑(竹添進一郞)이 충정로 부근의 민가에 거주한 일이 있었던 것을 기념하는 뜻으로 일제가 정하게 된 것이다. 1943년 서대문구 관할이 되었으며, 1946년 서대문구 충정로2가와 3가의 법정동으로 나뉘었다. 관공서로는 충정로3가에 해양수산부가 있고, 언론사로 동아일보사가 자리하고 있다. 지하철 5호선이 지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1 6. 합동(蛤洞)서대문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이다. 합동의 행정은 충정로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동명은 조선시대 어물 가운데 조개가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을 ‘조개전’이라 하였고, 이것이 합동(蛤洞)이 된 것이라 전한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반석방(盤石坊), 반송방(盤松坊)에 속했으며, 1895년 서부 반석방 미전하계(米廛下契)·합동 한림동(翰林洞), 반송방 수근답계(水芹畓契) 근동(芹洞)이라 하였다. 1911년 경성부 관할이 되었고, 1914년 경성부 합동이라 하였다. 1936년 합정(蛤町)으로 변경되었고, 1943년 서대문구 관할이 되었으며, 1946년 서대문구 천연동이 되었다. 행정기관으로 서울시상수도사업본부가 있고, 프랑스대사관이 있다.1 7. 현저동(峴底洞)서대문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으로 현저동의 행정은 천연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현저동은 조선시대 중국 사신이 왕래하던 무악현(毋岳峴)의 밑에 위치한 마을 곧 ‘무악현저’(毋岳峴底)에서 유래하였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반송방(盤松坊)에 속했으며, 1895년 서서(西署) 반송방 지하계 모화현(慕華峴)이라 하였다. 1911년 경성부 관할이 되었고, 1914년 경성부 현저동이라 하였다. 1936년 현저정(峴底町)으로 변경되었고, 1943년 서대문구 관할이 되었으며, 1946년 서대문구 현저동으로 하였다.1 8. 홍은동(弘恩洞)서대문구의 서북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홍제외리(弘濟外里)의 ‘홍’(弘)자와 은평면의 ‘은’(恩)자를 따서 붙여진 것이다. 조선시대에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였으며, 1895년에는 북서(北署) 홍은방(성외) 홍제원계 답동(畓洞)·백련동(白蓮洞)·외동(外洞)이라 하였다. 1911년 경성부 관할이 되었다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홍제외리가 되었다. 1936년 경성부의 관할구역 확장 때 홍제외리 중에서 홍제천 좌변 지역만 경성부에 편입되었고, 1949년에 서대문구 홍은동이 되었다. 행정동은 홍은 1동에서 3동까지 3개 동이 있다. 동쪽으로 홍체천이 흐르고 하천을 따라 내부순환로가 지나며, 지하철 3호선이 관통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체육시설로 서대문문화체육회관, 전통사찰로 백련사가 있고, 대학으로는 명지전문대학이 있으며 이외에 그랜드힐튼호텔이 자리잡고 있다.1 9. 홍제동(弘濟洞)서대문구의 동북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조선시대 중국 사신이 유숙하던 홍제원(弘濟院)이 있었던 데서 유래하였다.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였으며, 1895년에는 북서(北署) 연은방(延恩坊, 성외) 홍제원계 내동이라 하였다. 1911년 경성부 관할이 되었다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홍제내리가 되었다. 1936년 경성부 홍제정(弘濟町)이 되었고, 1943년 서대문구에 소속되었으며, 1949년에 서대문구 홍제동이 되었다. 서쪽으로 홍제천이 흐르고 내부순환로가 지나고 있으며, 지하철 3호선이 관통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AI 스피커 기반 신개념 기부 프로그램 ‘AI기브유’ 운영코로나로 위축된 기부 문화 ‘언택트’로 활성화 기대SK텔레콤(017670)은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와 함께 최신 ICT 기반의 기부 문화 확산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고 23일 밝혔다.이번 협력으로 양사는 지난 3월부터 공동 개발해 온 AI(인공지능) 스피커를 활용한 신개념 기부 프로그램 ‘AI 기브유(GiveU)’를 처음으로 선보이고 본격 운영에 나선다. AI 기브유는 AI 스피커 ‘누구(NUGU)’로 편리하게 기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이용자가 누구 호출어인 "아리아"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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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vhauab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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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 군 복무 중 휴가가 끝나는 날짜에 부대에 복귀하지 않았다는 의혹을 받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 서모(27)씨 측이 6일 무릎 수술 관련 의무기록을 공개해 반박했다. 서씨를 대리하는 법무법인 정상은 이 고려 시대 정의 918년부터 1392년까지의 고려 시대 강원도 철원 지역의 역사. 개설 고려는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궁예(弓裔)의 태봉(泰封)을 무너뜨리고 개창한 나라이다. 태봉의 수도 철원에서 시작되었으나 건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왕건의 세력 기반이었던 개경으로 도읍을 옮겼고,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918년부터 1392년까지 이어진 고려 시대를 한국의 중세(中世)로 본다.고려 초 철원은 궁예의 몰락부터 왕건의 즉위까지 일대 사건이 급박하게 전개된 역사적 무대였다. 개경 천도 후 동주(東州)로 개칭되었다가 원간섭기에 다시 철원이라는 지명을 회복하였으며, 창원(昌原)·육창(陸昌) 등의 별호로도 불렸다. 고려 시기를 통틀어 철원은 중북부 방어를 담당하는 군사 거점으로서 중시되었다. 고려 성립 후 철원의 위상 변화 918년 6월[음력] 철원에서 고려를 개창한 태조 왕건은 이듬해 1월[음력] 개경을 새로운 도읍으로 삼아 천도를 단행하였다.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천도를 계획하고 개경 일대를 재정비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전 왕조의 수도였던 철원에 머무르는 것은 왕건에게 큰 정치적 부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말년의 공포정치로 많은 민심이 궁예로부터 이반하였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철원은 궁예의 시작을 함께 한 근거지였고, 왕건의 세력 기반이었던 패서(浿西) 지역과 긴장관계에 있는 곳이었다. 철원 천도를 전후하여 궁예의 고구려 계승의식이 희미해졌다는 점 또한 왕건이 철원을 떠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개경 천도 이후 왕건은 고구려 계승의식을 전면에 내세워 발해 유민들을 포용하였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반목하며 북진정책을 추진하였다. 이후 철원은 고려 말 새로운 도읍지로 물망에 오르기 전까지 정치적 위상이 위축된 채 주로 군사 거점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행정 편제 고려의 수도가 개경으로 옮겨간 뒤 철원은 동주(東州)로 개편되었다. 995년 성종(成宗)은 당나라의 절도사(節度使) 체제를 도입하여 지방통치제도를 전면 재정비하면서 군사적 성격이 강한 단련사(團練使)를 동주에 파견하여 군정과 지방 행정을 총괄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고려의 실정에 부합하지 않았던 단련사는 설치 10년 만인 1005년에 폐지되었고, 현종(顯宗) 9년인 1018년 더욱 행정적 성격이 강한 지주사(知州事)로 대체되었다. 같은 시기 김화군(金化郡)·삭녕현(朔寧縣)·평강현(平康縣)·장주현(漳州縣)·승령현(僧嶺縣)·이천현(伊川縣)·안협현(安峽縣)·동음현(洞陰縣)이 동주의 속현(屬縣)으로 편제되었다.몽골(蒙古)과의 전쟁 이전까지 동주의 행정 편제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동주를 포괄하던 교주도(交州道)가 무신집권기 춘주도(春州道)로 변경되었다가 다시 동주도(東州道)로 개편된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동주의 위상은 1253년의 동주산성(東州山城) 전투를 계기로 일시 하락하였다. 몽골의 5차 침입 당시 백돈명(白敦明)의 군대가 동주산성에서 대패를 당하자 1254년 고종(高宗)은 동주를 현(縣)으로 강등시켜 패전의 책임을 물었다. 얼마 후 동주는 목(牧)으로 승격되었다가 1310년 충선왕(忠宣王)이 여러 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다시 철원부(鐵原府)로 강등되었다. 외세의 침략과 철원 철원은 북방 이민족이 수도 개경으로 진격하기 위하여 거쳐야 할 길목에 있었다. 철원의 동주산성 일대는 이러한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하여 고려 전시기 전략 방어의 요충으로 인식되었다. 1217년 거란유종(契丹遺種)의 침입, 1249년과 1257년 여진족 계통 동진(東眞)의 침입, 1253년 몽골의 5차 침입, 1291년 몽골 종왕(宗王) 카단[哈丹]의 침입 등 북방 이민족에 의한 외침이 발발할 때마다 철원은 치열한 접전지가 되었고, 대부분의 경우 철원이 붕괴되면 곧바로 수도 개경이 적의 위협에 직접 노출되었다. 고려 시대 철원은 북방 이민족에게 있어 한반도 중북부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과도 같았던 것이다.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입을 피해 방어하기 쉬운 곳을 찾는 과정에서 철원이 새로운 도읍지로 물망에 오르기도 하였다. 1377년 우왕(禑王)은 바다와 가까운 개경이 왜구에게 쉽게 노출될 수 있다는 이유로 천도를 결심하고 철원에 궁을 조성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실권자 최영(崔瑩)이 개경을 버리면 적에게 얕보일 것이고 또한 민생을 해치게 될 것이라는 논리로 완강히 반대함에 따라 천도 논의는 곧 정지되었다. 철원의 대표 가문 고려 시대 철원을 대표하는 가문으로 철원최씨(鐵原崔氏)를 들 수 있다. 철원최씨는 태조 왕건의 공신이었던 최준옹(崔俊邕)을 시조로 한다. 최준옹의 5대손인 최석(崔錫)과 6대손 최유청(崔惟淸)이 고려 중앙 정계에서 현달함에 따라 고려 중기 유력한 문벌로 거듭나게 되었다. 원간섭기 충선왕이 고려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가문들을 재상지종(宰相之宗)으로 통칭할 때 철원최씨도 재상지종의 범주에 포함되었다. 고려 말 명장이자 명재상이었던 최영도 대표적인 철원최씨 출신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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