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할 건 하자
Explore tagged Tumblr posts
heyodd · 4 years ago
Text
5-25-2021 날씨 맑음
오늘 날씨는 그냥 창밖의 풍경만 보고도 기분이 좋을 만큼 맑다. 그런데 나의 마음은 꼭 날씨와 같지 않은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나는 매일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웃을 일이 없거나 누군가와 다투면 하루를 망칠 것 같고 나는 불행하다고 느낀다. 삶을 살아가면서 꼭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건가? 불행한 시간도 나의 삶의 일부분으로 인정하며 살아가는 게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 불행의 시간도 인정할 수 있다면 삶의 무게를 조금 더 덜어낼 수 있을 것 같다.
0 notes
doranproject · 8 years ago
Text
“찬란한 계절”
*찬란한 계절
좋아하는 많은 것들이 이맘때 즈음 몽글몽글 피어난다.
은행잎이 ��드는 것도 하늘이 파랗게 높아지는 것도 거리에서 포장마차 냄새가 나는 것도
별수롭지 않게 좋은 것들.
마음도 여느때 못지 않아서 밥 한술 뜨는것도 감격에 목이 메였다.
이렇게나 사소한 행복이 끝없이 이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대수롭지 않게 좋아하는 계절을 맞이하고.
한껏 부푼 마음을 숨기면서 따스한 하늘아래 별 탈 없는 걸음을 놓을 수만 있으면,
꽤 좋은 날들이 될텐데.
-Ram
*찬란한 계절
1. in my 20s 20대의 마지막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더운 여름날, 짧게 자른 단발은 어느새 (한번 다시 잘랐음에도 불구하고) 스멀스멀 길어버렸고, 그동안 쳐다보지도 않았던 청바지를 어느날은 두 개씩이나 사버렸고(그것도 나름 고가의 가격에), 런닝화를 신고 밖에 나가 씩씩하게 웃으며 걷고 뛰었던 주말이 하나 둘씩 늘어갔고, 나의 마음을 항상 살펴보고, 나의 마음을 먼저 보살펴주려고 하는 사람이 있어 든든하고, 몇백만원짜리 자전거들을 검색해보며 성능을 이것저것 따져보기 시작했고, 다음날 아침 영어수업을 위해 자기 전에 영어 문장들을 읽고 있다. 댜니는 회사의 생리를 조금은 깨달아가고 있어 나름의 요령도 생겼고, 세대주도 되어보았고, 부모님에게 많진 않지만 용돈도 쥐어주고, 가끔이지만 혼자 살고 계시는 친할머니, 외할머니에게 전화로 안부를 묻기도 했다. 디퓨저의 매력을 알아버려 어느새 집에 디퓨저액이 떨어지기 무섭게 새로운 디퓨저를 사다놓기 바쁘고, 이제는 자취생활에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져버려서, 티슈, 물, 세제가 언제 다 써버리게 될 지 촉을 두고 있으며, 냉장고 안에 있는 우유의 유통기한에 대한 신경도 나름 계속 쓰고 있다. 사실 스트레스 빈도가 잦긴 해서 마인드컨트롤이 안될 때도 많았고, 뒤늦게 조금 컨트롤 해본답시고 노력도 해보고, 괜히 술도 마셔보고, 꾸역꾸역 눈물을 참기도 해보고, 펑펑 울기도 해봤다. 이렇게 나의 20대의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아, 아직 생각해보고 해보지 않은 것은 27일이 남은 12월에 몽땅 해버려야지.
2. 기억하고 싶은 것은 11월 2일 곱창을 먹고 집에 오는 횡단보도를 기다리고 있는 중에, 12월 3일 남산을 갔다가 ��돌아오는 전철에서 나는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아이폰메모장에 남겨두려고 한 것은, 정확한 날짜도 아니고, 장소도 아닌, 그 말을 하는 마음과, 그 말을 들었을 때 느낀 마음이다.
3. 2009년 5월 요조의 글 하루는 내 동생과 한 이불속에서 밤이 새도록 수다를 떨었다. 당시 그녀는 고3 이었고 나는 스물일곱. 8살 터울이었지만 우리는 서로의 나이차이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수학 성적이 좋아서 이과를 선택한 수현이는 고3이 되었지만 한달인가 지나서 갑자기 사진을 공부하고 싶다고 부모님 속을 엄청 썩이고 결국 사진기를 손에 쥔지 4개월 정도 지났을 때였다. ‘중앙대에 가고 싶어, 언니. 근데 사진과는 서울캠퍼스가 아니고 지방에 있어서 집에서 통학하기 쉽지 않을텐데 어쩌지?’ ‘그럼 나랑 둘이 따로 나와서 살자. 언니가 얼른 앨범내고 돈 벌고 차 뽑아서 데려다줄게.’ '내가 언니랑 따로 산다고 하면 엄마가 퍽이나 좋아하겠다.’ '걱정마, 너 사진 공부 하는 것도 내가 우겨서 허락받은건데… 어디쯤에 집을 구하면 니가 학교 다니기에도 내가 홍대 가기에도 편할까?’
다음날 동생은 청량리역으로 사진을 찍으러 다녀오겠다고 말했고 난 만원인가를 쥐어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녀는 청량리역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내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 내가 계란 흰자를 좋아하고 그녀는 계란 노른자를 좋아하기 때문일지도. 아니면 나는 닭가슴살을, 그녀는 닭다리를 좋아해서 치킨을 한마리 시켜도 사이좋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엄마가 밥먹으래'라는 한마디가 하루 중 우리의 유일한 대화일 때도 많았고 내 옷을 말없이 가져가는 것에 미칠듯이 분노하며 엄마가 내 동생을 혼내는 날엔 나 역시 엄마편을 주로 들곤했지만 나에게는 역시 내 동생 뿐이었다.
청량리역에서 사진을 찍던 동생은 이유없이 포크레인에 깔려 즉사했다. 병원에는 경찰도 오고, 포크레인 회사 사람, 철도청 사람, 방송국, 신문 기자들이 왔다. 3일이면 충분한 장례식장에 11일을 머물렀다. 너무나 힘들었다. 하지만 나를 가장 많이 괴롭혔던 것은 엄마가 했던 말이었다. 사진공부를 시키지 않았다면 수현이는 죽지 않았을거야. 밤이 오면 옥상에 올라가 많은 것을 생각했다. 그녀가 죽기 바로 전 날, 새벽까지 우리가 그렸던 내일이 난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중앙대에 갈 수 없고, 사당 근처에서 같이 살 수도 없고 내가 돈을 벌고 차를 뽑아도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집에 돌아와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했다. 엄마는 매일 아침 밥을 지어야 했고 아버지는 매일 아침 출근을 했다. 나는 바로 제주도에서 공연이 생겨 웃는 얼굴로 <바나나 파티>를 불러야 했다.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다. 나는 계속 '내일'에 대해 생각했다. 누군가 내게 '내일은 뭐해?’ 하고 물어오면 '내일? 내가 어떻게 알아. 바로 죽어버릴 수도 있는데.’ 하고 이야기했다.
동생을 잃고 나서 얼마간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관론자가 되었다. 죽음은 이제 더이상 나에게 쪼글쪼글 할매가 되어서야 맞게 되는 일이 아니었다. 바로 코앞에서 나를 언제나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두렵지도 않았고, 늘 내일 죽을 사람처럼 굴었다. 수중에 있는 돈은 그냥 다 써버렸고, 살찔까봐 조심스러워했던 식성도 과격해졌다. 술도 퍼마시고 담배도 피워댔다. 그렇지만 나는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내일'이라는 것을. 동생뿐이었던 내게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홀랑 데려가버렸던 신의 의도를. 죽기전에 우리가 보낸 새벽을. 그녀의 죽음을. 사진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죽지 않았을거라는 엄마의 절규를. 그녀의 죽음을 통해 나는 무언가를 깨달아야했고 그걸로 내 삶이 변화해야 했다. 깨닫지 않고서는 그녀의 죽음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일년 반 정도가 지났다.
그리고 나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내 동생의 죽음의 교훈을 알아 내었다. 그 교훈은 민망할 정도로 너무나 당연해 모두가 간과하고 있던 시시한 진실. 그것은 바로 '빛나는 오늘의 발견'이고 '빛나는 오늘의 나’ 였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내가 내 동생을 잃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던 것. 오늘에 충실하는 것. 이것이 여러분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다.
나는 여러분이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고문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여러분이 오늘 먹고 싶은 음식을 먹기를 바라고, 너무 입고 싶어 눈에 밟히는 그 옷을 꼭 사기를 바란다. 나는 여러분이 늘 보고 싶지만 일상에 쫓겨 '다음에 보지 뭐’ 하고 넘기곤 하는 그 사람을 바로 오늘 꼭 만나기를 바란다. 나는 여러분이 100만원을 벌면 80만원을 저금하지 않고 50만원만 저금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사고 싶은 옷을 참고 먹고 싶은 음식을 참으며 만나고 싶은 사람을 다음으로 미루는 당신의 오늘에 다 써버리기를 바란다.
나는 당신이 사진을 찍을 때 행복하기를 바란다. 나는 당신이 그림을 그릴 때 행복하길 바라고, 당신이 무대위에서 대사를 읊조리고 동선을 고민할 때 행복하기를 바란다. 이 사진이 사람들의 호응을 살지, 이 그림이 얼마나 비싸게 팔릴지, 당신의 연기를 사람들이 좋게 봐줄지를 고려하기보다 그저 당신이 원해왔던 행위를 하고 있는 바로 지금 이 순간 당신의 행복을 더 우선했으면 한다. 내일 죽어도 좋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당신의 오늘이 완성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오늘 노래하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고, 오늘 수중에 돈이 없을��면 맛있는 라면을 먹고 돈이 많을 때 내가 좋아하는 봉골레 스파게티를 먹는게 행복하다. 사랑하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거나하게 취하고 다음날 눈을 떠 조금 창피한 기분을 느��는 것이 행복하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2009년 5월 22일 뮤지션으로 살아있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
'사진공부를 시키지 않았다면 수현이는 죽지 않았을 거야’ 하고 이야기했던 엄마는 조금 틀린 것 같다. 수현이는 그 날, 행복했을 것이다. 그렇게 원했던 사진을 그 날도 찍을 수 있어서, 찍고 싶었던 청량리역을 찍고 있어서, 내가 쥐어준 만원으로 맛있는 밥을 먹어서 행복했을 것이다. 얼마전 차안에서 그냥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스피노자가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을 인용하는 것을 ��고 나는 엉엉 울었다. 이제야 이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며 흘린 눈물이었다. 나는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내일 모레 공연을 위해 오늘 합주를 할 것이다. 여러분도 그렇게 해주길 바란다. 나는 당신의 오늘이 행복하길 바란다. 당신의 내일 같은 건 관심도 없다.
4. - 나로 인해 당신의 계절들이 더욱더 찬란해지길.
-Hee
*찬란한 계절
답답한 마음이 자꾸만 들었다. 나에게 찾아온 줄만 알았던 기회는 몇 번 정도 빗나갔고 점점 더 정체되어가는 느낌이  들곤했다. 체력이 부족했던 것일까? 퇴근 후 집에 돌아올때 즈음엔 언제나 너털걸음이었다. 얹혀사는 집의 방한켠에서 내 꿈을 향한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단지 생각일 뿐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내 개인 프로젝트로 하루를 시작하지도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시간에 쫓기듯 간신히 출근시간이 되어서야 회사에 도착하곤 했으니까 말이다. 내 미래를 향한 최전선으로부터 뒤쳐진것만 같은 기분이 자꾸만 들었다.
연말, 어두운 겨울밤에도 따듯해보이는 주홍빛이 여기저기 가득하다. 내 주변에 소중한 사람들을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되는 계절. 내 찬란한 계절은 아직도 손끝에 닿지 못하였고, 저 건너편즈음에 걸친듯 만듯 아스라이 보일듯 말듯하다. 찬란한 계절, 그 것이 오긴 할까? 당연히 오게될 계절을 너무 바보같이 의심해보는 하루. 주변에 있는 동료들을 돌아본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을 조금 더 소중히 하자. 그렇게 소중히하여 찬란한 계절을 함께 맞아보자.
내가 잘하면 된다. 내가 한걸음 더 부지런하면 된다.
-Cheol
이번 주는 휴재합니다.
-Ho
7 notes · View notes
textlab · 6 years ago
Text
大澤真幸, 行為の代数学 (2)
スペンサー=ブラウンから社会システム論へ
青土社, 1999
1. 구별과 존재
 【1】 지시 – 조작과 대상의 불가분리성
 존재자는 존재한다 (~가 있다). 단지 그것은 어떤 관찰자(observer)에 의해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지시 (indication) (이것은 ~로 있다)의 대상으로서만 그렇다. 즉 임의의 존재자는 어떤 관찰자에 대해서 무언가로서 나타나는 것, 즉 어떤 관찰자에 무언가로서의 지시되는 것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그래서 지시는 단지 공간에 구별=차이 (distinction)를 설정하는 것에 의해서만 그 대상을 분류하는 것이 가능하다.[1] 그렇다는 것도 대상을 ‘어떤 것 (a)’로서 지시하는 것은 그 대상을 대상이 존재하는 공간의 내부에서, ‘어떤 것이 아닌 것 (비 a)’에 대한 시차적인 구별에 의해서 분류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우주 (universe)는 우선 구별을 설정하는 것 (draw a distinction)으로 부터 시작된다. 스펜서-브라운의 저서 『형식의 법칙』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이념은 이것이다.
이 경우 구별은 자기완결 (perfect continence)에 의해서 정의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완결이라는 것은 경계의 한 쪽에 속하는 점으로부터 다른 쪽으로 이행할 때 경계를 횡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계를 공간상에 설정하는 것이다. 〔1〕 이러한 경계는 말할 것도 없이 평면상에서는 폐쇄된 원을 통해 가장 간단하게 나타낼 수 있다.
지시를 위해서 공간에 구별을 설정하는 조작 (operation)을 스펜서-브라운은 횡단 (cross)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어떤 대상을 ‘~는 아닌 것’으로 분류하는 부정의 영위와 비정(比定)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부정은 대상을 자체적으로가 아니라 다른 것과의 구별에 의해 분류한다. 즉 그것은 공간의 외부를 내부가 아닌 것으로서 분류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경계를 내부로부터 외부로 횡단한다. 여기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될 핵심은 존재자의 존재 자체가 구별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은 지시의 대상의 대상성 자체가 구별의 조작과 독립해서는 있을 수 없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즉 구별이 시작되고, 특정의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있을 수 있게 한다. 그래서 횡단은 구별을 설정하는 조작(횡단)임과 동시에 구별에 의해서 설정된 폐쇄된 경계 그 자체, 지시의 대상이 되는 경계 그 자체, 즉 ‘울타리’이다. 이 구별의 조작과 그 조작에 의해서 구별된 상태를 표현하는 마크로서 (물론 ‘폐쇄된 원’을 사용해도 좋겠지만) 스펜서-브라운의 체계는 마크 
Tumblr media
를 사용한다.
(구별의) 형식 (form)이라는 것은 임의의 구별에 의해서 분할이 주어진 공간 (및 그 공간의 내��)이다. 〔4〕 그 중에서도 가장 최초의 원초적 구별 (제 1 분할, the first distinction)이 주는 형식을 스펜서-브라운은 원형식 (the form)이라 불렀다. (스펜서-브라운의 책 제목 『형식의 법칙』에 담긴 form이 단순형이라는 것에 주의하자) 〔4〕 원형식은 전체의 존재자의 존재가 그것에 의해 가능하게 되는 전체로서의 우주 형식이다.
이름 (name)도 또한 일종의 형식이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명명하는 것에 의해 그 대상을 다른 여러 존재자로부터 구별하는 것이다. 단지 명명은 우주 안의 특정한 존재자를 다른 여러 존재자로부터 나누어 특별히 부각시키는 조작이다. 그러기에 우주의 전체를 규정하는 원형식 그 자신은 이름을 가질 필요가 없다. (‘우주’는 잠정적인 이름으로, 본래의 이름은 아니다. 그것은 정의상 우주가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고 – 만일 존재한다해도 ‘우주’ ‘의 내부’이지 않으면 안되는 -, 해서 ‘우주’라는 ‘이름’은 다른 존재로부터 원형식을 특별하게 부각시키는 데 있어서 기능을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즉 ‘우주’는 이름으로서 기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이름은 어떤 형식을 원형식으로부터 구별하고 (즉 우주내의 특별한 존재자로서) 지시하는 것이다. 〔4〕 어쨌든 이름은 형식이고, 그것에 의해서 존재자는 공간 안의 특정한 부분으로서 등록되는 것이라는 점에 주의해 두자.[2] 스펜서-브라운에 의하면 이름이라는 형식은 구별을 제공하는 마크가 원형식으로부터 복사되는 것에 의해 존재하게 된다. 즉 마크되어진 상태의 이름은 원형식에 대한 마크의 복사 (copy) 또는 흔적 (token)이다. (어떤 의미로 이름에 대응하는 여러 가지 형식이, 원형식의 복사, 흔적인 것일까에 대해서는 지금 단계에서는 충분히 밝혀지지 않는다. 이의 진정한 함의는 임의의 형식에 수반하는 ‘쓰여지지 않은 울타리’와의 관계에서 실제로 이해될 수 있다. ‘쓰여지지 않은 울타리’를 고려해 본다면 임의의 형식이 원형식을 작동시키는 특수한 구조를 반복하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동일의 형식 안에 있다고 보여지는 (통상적으로 복수의) 마크의 흔적 전체를 배열 (arrangement)이라고 부른다. 〔4〕 공간의 상태를 지시하는 것으로서 기능하는 흔적의 배열이 표현 (expression)이고, 표현에 의해서 지시된 상태를 표현의 값 (value)이라 부른다. 〔5〕
우리는 스펜서-브라운이 제시하는 몇 가지 중요한 정의를 우선 필요한 만큼 소개했다. 이후 해설할 스펜서-브라운의 체계는 적게 잡아도 전통적인 기호논리의 전체를 번역할 수 있을 정도의 포괄성을 갖추고 있다. (이 번역의 방법에 대해서는 뒤에 나오는 ‘회귀’를 참조)
여기서는 다시 말하지만 지시된 상태의 적극성=대상성이 지시-구별의 조작 cross와 독립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해두는 것이 중요하다. 스펜서-브라운의 체계는 이것을 지시된 상태(의 하나)를 표현하는 마크와 지시의 조작을 표현하는 마크의 엄밀한 동일성에 의해서 나타내고 있다. 즉 cross의 조작은 정의상 공간에 두 개의 상태를 구별하지만, 그러한 상태는 조작 cross의 존재나 부재와 등치 되고, 각각 
Tumblr media
 (마크된 상태 marked state라 부른다)와 
(마크되지 않은 상태 unmarked state라 부른다)[3]에 의해서 표현된다. (이 두 가지의 표현을 단순 표현 simple expression이라 한다)
이러한 조작의 능동성과 수동성의 동일성은 – 스펜서-브라운에 의하면 – 전통적인 부울 대수 (Boole algebra)를 확장하는 것을 통해 시사된다. 바꿔 말하자면 조작의 대상이 조작 그 자체로부터 구성될 가능성을 전통적인 부울 대수의 자연스러운 확장이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수학적 조작=연산에 있어서는 연산자 (oprator)와 연산수 (oprand)가 구별된다. 부울 대수는 연산자로서, 예를 들면 논리합으로 해석되는 ‘∨’와 논리곱으로 해석되는 ‘.’ 등을 가지고, 연산수로서 일반적으로 참, 거짓의 해석을 각각 충족시키는 1과 0을 지닌다.  이제 a, b, … 를 연산수를 대표하는 변수라 하자. 이 때 다음과 같은 작업으로, 스펜서-브라운은 연산 결과의 일람표를 만들고, 변수를 수반한 경우를 수학적으로 외삽한다.
 …  (a b c) ∨ .  (a b) ∨ . (a) ∨ . () ∨ .
    1 1 1 1 1   1 1 1 1  1  1 1    0 1 을 배열한다.          
    1 1 0 1 0   1 0 1 0  0  0 0 을 배열한다.          
    1 0 0  1 0   0 0 0 0 을 배열한다.          
    0 0 0 0 0  을 배열한다.            
 이로부터 연산수 1과 0이 어떤 종류의 연산자 ().과 ()∨에 각기 등치 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된다.[4]
더욱이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조작과 대상과의 이러한 불가분리성은 ‘수학’ 일반의 특성이라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수학은 외부의 영역으로부터 비교적 독립성이 높고, 하나의 폐쇄된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수학의 이러한 독립성, 자율성은 수학이 스스로의 대상으로 스스로의 작동 자신을 통해서 구성한다고 하는 점에서 비롯된다. 수학은 여러 다른 ‘경험 과학’과는 달리, 스스로가 그 움직임을 모사하고 기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외적인 대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수학적인 대상은 단지 수학적인 조작에 의해서 그 조작의 상관항으로서 만들어 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수학적 커뮤니케이션은 ‘경험과학’ 보다는 음악과 유사하다고 스펜서-브라운은 말하고 있다. 〔87〕 악보는 음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고, 음을 나타나게 하기 위한 명령군이다. 음악적 ���상 (음)은 작곡가가 음에 관해서 쓰는 명령 (악보)에 따른 조작 (연주)에 의해서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존재한다. 수학적 커뮤니케이션의 기본형식도 기술이 아니라, 악보와 같은 의미에서 ‘명령 (injunction)’이다. 대상 (연산수)는 단지 (명령에 따른) 조작 (연산)과 함께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5]
원리적으로는 임의의 존재자의 존재가 그것을 지시하는 행위와 독립해서는 있을 수 없다고 한다면, 수학이 비교적 독립성이 높은 작은 영역에서 실현되는 것처럼, 이상과 같은 특성은 우주의 기본적 특성의 반복, 재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학은 이 기본원리를 추상하고, 신체의 내부에 완벽하게 가둬두고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수학의 구성을 해명하는 것이 그대로 ‘존재’ 일반에 관한 물음에 대한 해답에도 직결될 수 있다.
특히 스펜서-브라운이 창시한 산법은 수학 일반에 내재한 조작 (지시)과 대상 (존재)의 이러한 연관에 대한 반성적 작업이다. 즉 이 수학은 이상과 같은 연관��� ‘무의식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대자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수학이 존재자의 존재를 성립시키는 원리적인 구성을 순수한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2】 행위
 그래서 지시를 행위를 특성화하는 본질적 속성이라고 보는 것이 가능하다. 즉 어떤 신체의 수행이 대상에 대한 지시와 함께 이뤄질 때, 관계된 신체의 수행을 행위 (action)이라 정의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임의의 행위는 그 지향대상을 (그 행위에 있어) 타당한 상태로서 지시하면서 수행된다. 그래서 행위에 있어서는 지향하는 공간을 – 타당 상태 및 타당하지 않은 비타당 상태- 구별하는 조작이 함의된다. 바꿔 말하자면 행위는 대상을 형식으로서 지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커피를 마신다’라는 행위는 여러 대상을 각기 상응하는 것으로서, 즉 컵으로써, 커피로써 지시하며 수행된다. 혹은 약속이라는 행위는 일련의 절차를 약속에 의해서 타당한 것으로서 지시하며 수행된다. 이러한 것은 위치를 바꿔 말하자면 앞에서 소개한 ‘울타리’가 행위 (에 의해서 지시된 상태)의 본원적인 성격을 통역해서 표현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 행위 (에 의해서 지시된 상태)는 아무리 복잡한 것이라 해도 원리적으로는 이 ‘울타리 (cross)’의 복합에 의해서 표현 가능한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지시의 조작과 지시의 대상은 동일 사태의 쌍둥이 같은 현상 형태다. 이것은 다음의 것을 함의한다. 행위가 대상을 타당 상태/비타당 상태로 분별하는 것에 따라서 행위 그 자체의 변별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이러한 행위에 대한 변별, 즉 행위에 수반하는 지시를 타당 상태의 지시와 비타당 상태의 지시 – 간단히 타당한 행위와 비타당한 행위라 부르자 –로 변별하는 조작을 규범 (norm, 규칙 rule)으로 정의하는 것이 가능하다.[6] ‘횡단 (cross)’의 조작은 행위의 대상에 표현을 주는 것과 나란히 규범에 의한 행위 그 자체의 변별에 표현을 주는 것이다.
대상이 지닌 ‘의미’는 행위, 규범에 상관된 현상이다. 행위가 본질적으로 대상에 대한 지시를 수반하고 있다 한다면, 대상은 그 행위에 있어서 ‘무언가’로서의 동일성을 반복 가능한 형태로 보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지시에 있어서 조정(措定)된 대상의 동일성을 우리는 통상 그 대상의 ‘의미 (meaning)’라고 부른다. ‘(대상의) 의미’는 우리가 이로부터 전개하고자 하는 스펜서-브라운의 수학 내부에서는 지시된 대상의 (타당성/비타당성의 구별을 주는) 공간상의 위치에 의해서 표시하는 것이 가능하다. 동일성은 우리의 가정에서는 단지 공간상에서 설정된 배타적인 구별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행위에 수반하는 지시를 ‘울타리=횡단’ (의 복합)에 의해서 표현한다고 하면, 그 표현이 ‘값 (value)’ 자체가 행위가 지향하는 대상의 ‘의미’에 대한 수학에서의 등가물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이 수학의 내부에서는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어떤 공간에 있어서 대상을 a로서 지시할 때 (대상을 ‘이것은 a다’라고 조정할 때), 그 지시가 마크된 상태를 지시한다고 한다면 (즉 공간을 유효하게 구별하고 있다면), ‘a’가 문제 대상의 그 공간에 있어서 의미 있다. (그 공간에 있어서 대상이 ‘a’로서 타당하다) 바꿔 말하자면 
a = 
Tumblr media
일 때, a가 대상의 (타당한) 의미다. 역으로 
a =   
과 될 때, a는 그 대상의 의미가 아니다. (의미로서 타당하지 않다)[7] 스펜서-브라운은 공간상의 구별에 의해서 재단된 각 부분을, 그것과의 차이를 구성하는 다른 부분으로부터 떼어내어 자체적으로 취급될 때, 그러한 각 부분(의 내부)을 내용 (content)이라고 부른다. 지시대상의 의미가 실체화된다면 그것은 하나의 내용으로서 다루어지게 된다.
해서 지시에 의해서 행위가 정의되는 것이라 한다면, 스펜서-브라운이 말하는 경우의 관찰자라는 것은 우선 무엇보다도 행위자인 것이다.[8] 그렇지만 지시를 실질적으로는 행위와 등치 하는 것처럼 이해하는 데에는 의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약간의 설명을 더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첫 번째로 지시를 전하는 행위를 특징적 움직임이라 보는 것에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인간 이외의 생물, 예를 들면 개는 지시를 행하지 않을까, 또는 같은 인간에 속하는 행위 중에서도 단순한 반사와 같은 반응에도 일종의 지시가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더욱이 예를 들자면 면역계는 항원을 지시한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이러한 예에서 보이는 ‘지시’는 어느 정도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지시로부터 일탈되어 있지만, 확장된 의미에 있어서는 혹은 적어도 스펜서-브라운의 체계 속에서는 당연히 지시라고 해석돼야만 하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마찬가지로 상태의 선택이, 즉 어떤 특정 형식의 구별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스펜서-브라운이 정의한 지시에 대한 일반이론은 이러한 예를 조금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어떤 국면에서는 스펜서-브라운의 체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지시의 이러한 확장 해석이 장려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시는 일차적으로는 행위에 수반된 대상의 조정에 한정돼야만 한다. 스펜서-브라운의 지시의 이론은 – 지시의 산법- 우주 안에 속하는 존재로서의 우리에게 있어서 우주의 형식적 특징을 기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시라는 건 우리에게 있어서 우주가 존재할 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우주와 우리의 관계 양식이다. 확실히 면역계도 지시를 행할 수 밖에 없지만, 그것은 그러한 것 (즉 지시를 행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면역계를 지시하고 있는 한에서이다. 우리는 우리에 귀속하는 것으로서 지시의 무언가를 인지한 이후에, 우주 안에 다른 존재자에게 이것과 기초적으로 동일한 활동을 발견하는 것이다. 행위 수반적이지 않은 다른 여러 ‘지시’는 행위 수반적인 지시에 종속한다. 그에 대해서 후자는 단적으로 지시다. 우리가 지시에 의해서 행위를 정의할 때 문제 삼는 것은 이러한 단서적인 지시이다.[9] (개가 지시를 행하는가는 면역계의 경우보다 미묘하다. 예를 들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게임이 참여하지 않는 동물은 ‘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역으로 말하자면 동물도 언어 게임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취급할 때 말하는 것이다. 지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다. 개는 우리가 우리와 함께 우주 안에 속하는 것으로서 지각하는 경우라면 개도 우주의 상태를 지시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 개는 말하지 않고, 그래서 지시하지 않는다. 동일한 문제는 기계가 지시를 행하는가라는 문제에도 응용 가능하다) (大澤 [1987c] 참조)
두 번째로 유의해야 할 것은 지시는 대상의 의미에 대한 자각적인 조정을 반드시 함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의미의 지시는 행위 그 자체에 있어서 말하자면 자체적으로 이뤄진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청신호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는 행위자는, 청신호의 의미 – 어떤 규범 내지 교통법규에 의해서 타당하게 된 의미 –를 해당 행위 그 자체에 있어서 지시하고 있지만, 반드시 그것을 대자적으로 인정할 필요는 없다. (橋�� [1985:128]은 이러한 지시를 ‘자체적인 승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지시가 자체적으로 이뤄진다고 하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가는 여전히 의문이다. 이 의문은 행위가 규범에 종속한다고 하는 것의 본질에 관한 의문과 맞닿아 있다. 이 단계에서는 통념적인 이해와 타협해두고자 한다. 그리고 이번 장의 주 8을 참조) 그에 대해서 대상의 의미에 대한 자각적인 조정은 ‘대상을 지시하는 것’에 대한 지시인 것이다. 그것은 단적인 대상의 지시 그 자체와는 우선은 다른 것이다.
【3】 공리
 그래서 스펜서-브라운은 다음의 두 가지 법칙을 형식을 배급하는 영위 (지시)를 일반적으로 지배하는 공리로서 인정한다. 〔2〕 우리의 이해에 따르면, 공리 (axiom)는 행위 (action)을 특징짓는 일반적인 법칙성을 언명하는 제제 (提題)다.
[공리 1 호출의 법칙]
두 번 호출 (call)의 값은 한 번 호출의 값이다.
[공리 2 횡단의 법칙]
두 번의 횡단 (crossing)은 횡단의 값을 갖지 않는다.
 공리 1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호출이라는 것은 공간상에 구별을 설정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공리 1이 말하는 것은 같은 구별을 반복적으로 설정해도 그것은 한 번 구별의 설정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즉 호출의 반복은 한 번으로 압축 (condence)된다.[10] 예를 들면 어떤 사물을 다른 것으로부터 구별해서 부를 때 (‘칠판!’), 그 이름을 두 번 연속해서 불러도 (‘칠판! 칠판!’) 한 번 부른 것과 정보량에 있어서 변화하지 않는다. 이 공리는 즉 두 번 호출한 것의 용장성 (冗長性)에 대한 가정이다.
공리 2는 횡단 (cross)가 부정의 조작에 대응하는 것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이해하기 쉽다. 어떤 대상을 ‘x는 아닌 것’이라 규정한 뒤 x를 ‘x는 아닌 것이 아닌 것’이라 규정한다면, 아무 것도 규정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부정의 부정은 결국 조작의 총체를 무화 (cancel)시켜버린다.
이러한 공리를 기초로 스펜서-브라운의 체계가 구축된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미 여기까지의 진행 속에서 헤겔이 재래를 눈치챌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근원적인 조작으로서의 부정, 원시-분할로서의 판단 (≒지시). 그러나 어쩌면 스펜서-브라운은 헤겔의 망령이라기 보다는 바따이유의 후예일 것이다. 철저하게 헤겔에 충실함으로써 역으로 가장 래디컬한 반 헤겔주의자였던 바따이유.
여기서 스펜서-브라운과 함께 우리가 제출하는 물음은 다음과 같다. 지시는 일반적으로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이러한 질문이 나오는 것을 기묘하게 느낄 사람도 있을 수 밖에 없다. 뭐라 해도 지시가 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자명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실은 가장 큰 신비는 참으로 지시가 가능하다고 하는 사실 속에 있다.
이 사실의 ‘신비성’을 알기 위해서는 예를 들자면 ‘원형식’의 특수하게 굴곡되어 있는 구조를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원형식이라는 것은 원초의 구별이 준 형식이고, 말하자면 우주 전체의 형식이다. 원형식도 형식으로서 분류되는 이상, 어떤 공간에 대해서 구별을 설정하는 것에 의해서 구축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그 원형식의 구별이 배급된 공간의 존재는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원형식이 존재의 시원인 이상, 또한 원형식이 우주의 준재를 준 형식인 이상, 원형식의 구별이 배급되는 공간 그 자신도 원형식을 구축하는 구별에 의해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원형식은, 그것에 의해서 스스로의 구별이 주어지는 ��� 자체를 구축하는 구별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불가사의한 구조다. 원형식은 자신의 존재에 있어 선행요건이 되어야 하는 것을, 자신의 결과로서 소유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뒤에서 이야기하겠지만 깊게 살펴본다면 원형식을 작동시키는 기묘한 구조는 임의의 지시에서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스펜서-브라운의 산법은 결국 원형식의 출현을 관찰한 기록인 셈이다. 〔12장〕 우리의 질문은 이 원형식의, 그래서 또한 이것과 구조적으로 동형인 관계성의 신비로 향해있다.    
지시의 가능성에 대한 이 물음은 존재 그 자체는 어떻게 해서 가능할까 라는 물음과 같다고 하는 것은 이미 여기까지의 글속에서 충분히 시사했다. (여기서 세계 안에 신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신비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상기해 두면 좋을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질문을 규범과 함께 하는 행위가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라고 말을 바꾸어도 좋다. 이러한 질문은 하나의 물음이 지닌 여러 측면이라 할 것이다.
이 질문의 해명에 있어서 지시가 가능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정의된 의미에��의 (즉 자기완결로서의) 구별을 공간에 설정하는 것에 의해서 이뤄질 수 밖에 없다고 하는 것, 내지 위의 두 가지 공리가 전제가 된다.
발췌번역 - 조은하, 박상우
0 notes
newsmin · 8 years ago
Text
[전문] 7월 20일 성주 사드 반대 투쟁 방향 토론회
[편집자 주=사드 배치 철회 촛불집회 373일 째인 2017년 7월 20일 오후 8시, 성주군청 앞 광장에서는 주민 7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드 배치 철회 촛불집회 방향과 관련해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2016년 7월 13일부터 시작된 촛불집회가 1년을 넘어서며, 더 효율적인 투쟁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뉴스민>은 이날 나온 주민들의 의견 전문을 담았습니다.]
youtube
노성화 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 공동위원장 촛불이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다. 박근혜가 탄핵됐다. 1년이 지나는데 사드는 변한 게 없다. 이번에 방산 비리 수사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큰 비리가 밝혀져서, 누가 생각해도 사드는 불법이었다고 국민들이 인정할 때 희망이 있지 않을까. 김정은이가 미쳐가지고 우리는 북핵을 보유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사드는 끝나지 않을까. 1년 동안 촛불 켜면서, 앞으로 이 시간 이후의 촛불 집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한지, 여러 정세나 구도가 작년과 같지 않고 많이 바뀌고 있다. 촛불집회도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 뭘까, 투쟁위도 고민은 많이 했다. 민주적인 방법으로 우리 촛불의 방향을 설정해 나가야 한다. 가장 현명하고 합리적인 방법을 도출하겠다. 누구나 다 의견 제시할 수 있다. 소수 의견도 존중하고, 내 의견이 정답이라고 할 수 없다. 정답은 없다. 다수의 의견을 수렴해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겠다.
김순남(성주읍) 1년 동안 집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이 자리에 나왔다. 이 자리에 나오면서 나는 왜 여기에 나올까, 늘 생각했다. 앞에 나가서 사드에 대해서 전반적인 얘기를 하고 우리가 나갈 방향에 대해 얘기할 정도로 주변은 없었다. 단지 작은 나무 한 그루로 지키고 있으면 숲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작은 나무가 되고자 한 이유는 1980년 대학 입학해서 518, 광주 사태가 있었다. 그때 학교가 휴교 됐는데, 아무 생각도 없이 성주에 와서 휴교 기간 편안하게 지냈다가 학교로 갔다. 세월이 지나고 난 뒤에 늘 빚진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부분 생각하면 늘 부끄럽기도 했고. 아무도 저보고 뭐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혼자 생각하면 이 평화로운 삶을 누군가의 희생으로 공짜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사드가 성주에 들어온 그날부터 나도 뭔가를 해서 마음의 빚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에 나가서 적극적으로 하지는 못하지만, 작은 나무 한 그루로 이 자리에서 숲을 이룰 수 있는 작은 역할이라도 해야겠다고 나왔다. 1년까지 올 거라는 생각은 못했는데, 1년이 되고 보니까 큰 산을 넘어왔다. 어떤 방향으로 나갈 건지 고민을 해 봤다. 매일 이 자리에 나오는 게 시간 희생도 있고, 체력적인 것도 있고, 똑같은 방식으로 이 자리에 있는 게 식상하지 않을까 생각도 들고. 이제는 달라져야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구체적인 방법은 생각 못했다. 개인적으로 1년 동안 받은 상처가 크다.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프로그램이 진행됐으면 좋겠다. 매일 나오지 않고 일주일 한두번 정도 나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백광순(초전면) 성산포대에 온다고 할 때 깜짝 놀랐다. 어느 날 갑자기 3부지로 와서 우리 마을로 오게 됐다. 이런 황당한 일이 어디 있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어제 아래 친구들 만났는데, 정부에서 하는 거 마을에서 막을 수 있나 그러더라. 내가 그랬다. 동냥은 안 줘도 쪽박 깨지 마라. 그랬는데 사실 촌 아낙네가 뭘 아나. 일단 사드는 인체에 해롭다. 어제 아침 마당에 앉으니 위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났다. 이런 걸 성주에 놔둔다니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촛불이 모두 힘을 모아가지고 사드를 물리치는 데 힘 많이 써주시고, 다 같이 노력하자.
노건희(성주읍) 매일 촛불 밝히는 군민 여러분 진짜 존경한다. 살면서 투쟁하는 거 조금씩은 봤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투쟁하는 거, 저도 처음이다. 안 그래도 1년 넘고, 투쟁하는 거 보면서, 저는 그런 생각을 했다. ��간중간 많이 빠졌지만, 각자 생업도 있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인데 매일 촛불 켜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부담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늘어질 수 있다는 생각도 있는데, 열심히 나오다가 많이 빠지고 나면 나오고 싶어도 ‘지금 나가니까 조금 그렇네’ 하면서 못나오는 사람들이 꽤 있더라. 그런 생각 가지고 있으니까, 일주일에 한두 번 같으면 부담 없이 나올 수 있는 분 많을 것 같다. 열심히 안 나오면서 한두 번 그러니까 부끄럽다.
송대근(초전면) 주민위원회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일주일에 한번 나와도 되고, 10일에 한번, 1년에 한번 나와도 된다. 시간 되면 나오면 된다. 강요하는 사람 없다. 한 번, 두 번 건너뛰면 제가 볼 땐 석 달 만에 그냥 끝난다. 성주읍에서 촛불 계속 안 가지고 있으면, 소성리도 물론 계속 할 수 있다. 열 명도 세 명도 하면 된다. 잘못되면 강정마을처럼 소성리 촛불로 전락될 수 있다. 상징적인 장소에서 사람이 10명 나오든 20명 나오든 계속 이어져야 한다. 3주체가 중심이다. 성주 촛불, 김천 촛불, 원불교. 성주가 잘 해왔다. 누구나 인정한다. 그런데 성주촛불이 흔들리면 김천이 흔들린다. 그러면 그냥 이 싸움은 끝나게 된다. 시간되는 대로 부담 없이 촛불 들면 좋겠다.
현인균(월항면) 30일 정도 빼고 다 나왔다. 겨울부터 참석 인원이 줄어들고, 바쁘기도 하고 지치기도 했다. 수요일 날 낮에도 소성리에서 집회를 한다. 토요일 밤에도 한다. 유기적으로 연결된 느낌이 있다. 제 생각에는 수요일 토요일 하기 때문에, 광장에서는 월요일 1회로 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김경수(성주읍) 저도 작년에 열심히 다녔다가 일이 있어서 자주 못나왔다. 띄엄띄엄 쉬면서 나왔다. 결론적으로 그렇게 나와도 힘든 건 똑같더라. 매일 나와서 힘들었던 거나, 띄엄띄엄 나와서 힘들었던 거나 같더라. 마음은 같더라. 저희들이 하는 싸움은 결국 사드를 물리치기 위해 하는 거다. 그 목표에서 우리가 지금처럼 계속해서 하는 게 목표 이루는데 더 효율적이냐, 안 그러면 쉬어가면서 하는 투쟁이 유익할 것이냐. 비교해봤을 때, 저는 매일하는 게 더 유익하다.
첫째, 우리들만의 싸움이 아니다. 외부의 눈들과 싸움이기도 하다. 우리가 건너서 했을 때 외부 시선은 확연히 달라질 거다. 염려하는 것은 쉬어갈 때와 매일하는 건 많은 차이가 날 수 있다. 숫자가 적더라도, 이어가는데 띄엄띄엄 하면 사람이 빠지기가 더 쉽다. 소홀해지기 쉽고 관심도 줄게 된다. 투쟁의 시간이 더 빨리 끝날 수 있다고 염려한다. 날짜를 정해서 한꺼번에 많이 나오면 좋은데, 위험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렇게 안 되면 최악이다. 결론이 나온 게 하나도 없다. 국방부에서 액션이 나온 것도 없고, 밀어붙이는 상황이다.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힘든 건 똑같다. 이 자리에 당장 나오지 않는 사람도 계속 같이 하는 거다. 그 사람들이 언제든지 나왔을 때 나올 수 있는 곳이 될 수 있다. 일주일에 한 번이든 두 번이든 건너가면 그 시간에 맞춰서 나와야 한다. 매일 하고 있으면 언제든지 나올 수 있다. 저는 우리 투쟁이 사드를 물리치는 거기 때문에 할 수 있다면 그대로 힘들겠지만, 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영현(가천면) 광장에서 1년 힘들게 투쟁한 사람들 앞에서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투쟁은 선에서 시작해서 면으로 확산한다고 배웠다. 어제 주민위에서 이야기할 때, 광장에서 받아 안지 않으면 소성리에서 촛불 들겠다고 했다. 지쳐서, 힘이 들어서 저런 말씀을 하는구나 느꼈다. 투쟁은 성과가 중요하지 않다. 촛불을 켜고, 이게 밑불이 돼서 탄핵까지 하고, 정권 바꿔냈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했다. 사드는 중요하지 않다. 이런 투쟁을 통해서, 그동안 보수 수구세력이 지배했던 이 고장에 우리와 같은 생각하는 사람이 조직적으로 정치의 눈을 떠야할 시기다.
우린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다. 내 이웃과 함께 우리와 같은 생각 갖게 하고, 그것을 발전시켜서 정치세력으로 우뚝 설 수 있는 조직으로 거듭나야할 성과를 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사드도 못 물리쳤고, 우리를 의식화 시켜내지도 못했다. 10여 년 전에, 노무현 씨가 그렇게 희망했던 세상을 우리가 바꿔내지도 못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서, 성주와 같이 투쟁해 온 사람들이 나자빠질 때 다시 보수 세력의 반격은 시작된다.
엄청 힘들다. 힘들면 쉬었다가자. 조직적으로 쉬는 게 아니라, 힘들어서 못 나오면 그 사람들 아픔과 고통을 덜 힘든 사람이 짊어지자. 서로 다독여왔다. 촛불이 한 번 하느냐, 사드 물리치느냐 이거 중요하지 않다. 힘든 투쟁을 통해 이후 새로운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어야하기 때문에 계속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한명이 촛불을 켜더라도 투쟁의 끈을 놓쳐서는 안 된다. 지도부에서 엄청 고민하는 줄 안다. 힘들지만, 해 보자. 체게바라가 80명 데리고 쿠바를 조직했다. 촛불은 100명, 200명이다. 힘 빠지지 말고, 어렵지만 해보자.
김현선(금수면) 우리 힘들다. 가정주부 보면 집이 개판이다. 마음이 무겁다. 오늘은 촛불 안 나가고 집 청소좀 해야지 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어쩔 수 없이 나올 때도 있고, 게으름 피울 때도 있다. 일상을 되찾고 싶다. 대구에 살다가 성주로 이사 와서 성주에서 유유자적하게 살아보고 싶었다. 사드 들어오는 바람에 이렇게 됐고, 그래서 힘들었다. 일상을 찾고 싶다. 성주 촛불은 우리가 매일 지키는 게 자랑이었고, 매일 지키기 위해서 애쓰는 손길에 감사했고 미안했다. 그런 마음으로 지금까지 왔다. 촛불 계속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재인 정부에서 뚜렷한 대책을 내지도 않는 상황에서 우리 촛불이 날짜를 정한다면, 더 힘들어질 거라 생각한다. 전국에 알리기 위해서 ���택도 가고, 파란나비효과 영화 알리기 위해 많은 분들 나가주시는데, 계속 했으면 좋겠다. 전국 여론화 저희가 해야 한다. 이 자리에서 내가 언제라도 오면 이 곳에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김경수 씨 말에 동의한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 일주일에 한번이든 두 번이든 한다면, 그때 정말 중요한 일 있어서 못 나오면 다음에도 못나올 거다. 매일매일 이 자리에서, 이끌고 진행하는 분들 존경스럽고 죄송하다. 음향하고 화면 해주는 분들은 한 번도 빠지지 않은 것 같다. 감사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게 자랑스럽다.
최영철(선남면) 백악관 청원 서명 열심히 했다. 광화문 스무 번 갔다. 사드에 도움이 된다면 물불 가리지 않고 개인적으로 열차 타고 어디라도 가서 사드 막아내려고 일인시위도 했다. 국방부 가서 식겁했다. 침 뱉는 사람도 있었다. 성주 사드 막아내는데 무조건 너희는 해라. 나는 한다. 그래 생각하고 전국 어디라도 사드에 도움 되면 발버둥 쳤다. 그런데 국방부에서는 무조건 사드 배치하려고 거짓말한다. 국방부 저놈들은 우리를 짐승으로 보고 있다. 너희는 아무리 말해봐야 우리는 우리 길을 간다고 생각하고 끝까지 투쟁하려고 한다. 성주 온 지 15년 됐다. 성주가 무너진다는 데 할 수 있는데 까지 해봐야겠다. 진짜 내가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막아내야겠다고 발버둥 치고 있다. 너희가 아무리 말해봐야 우리는 한길로 간다고 생각한다. 사드만 막아내면 성주는 발전 된다. 끝까지 싸웁시다.
이정숙(성주읍) 일이 있어도 잠깐 갈 수 있어서 왔다. 시간을 내서 오는 거면 저도 멀어질 것 같다. 계속해서 촛불을 켰으면 좋겠다.
홍마리안나(성주읍) 저도 김경수 님 생각처럼,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하는 촛불은 상징적인 의미다. 사드가 철거되는 그 날까지 이 자리를 꿋꿋하게 지켜야 한다. 제가 건강이 안 좋아서 컨디션 조절해서 나오는 상황이지만, 격일로 하다보면 꺼질 것 같다. 며칠에 한 번씩 한다 이런 걸 논의하기보다 차라리 우리가 좀 더 건강하고 질기게 이 촛불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논의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광식(성주읍) 고생이라고 생각했으면 이때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다. 허심탄회한 이야기인 거 같은데 마음을 좀 속이는 분도 있는 것 같다. 힘들어 죽겠는데 좀 덜하지. 이래 이야기하면 되는데 투쟁 열기가 너무 뜨거워서. 아마 그런 말씀 하시는 것 같다. 제 입장에서는 일주일에 한번이라든지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1년을 지나서 저희들이 이야기 했던 부분이 ‘좀 디니까 쉬자’ 이게 아니고,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투쟁의 길을 어떻게 선택하는 게 어떤 게 더 효율적인가였다. 앞으로 우리가 진행하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좋은 이야기 많이 있었는데, 일주일에 한 번을 해도 수요일 날은 영화 보는 날이고, 토요일 소성리, 성주에서 한 번을 하는 거 같으면 3번이다. 몸이 지쳐서 일주일에 한 번하자는 게 아니고 어떤 게 더 효율적인 투쟁인지 생각해봤다. 그래도 계속 하는 것도 안 괜찮겠냐. 정답은 없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 하면 좋다. 발언 잘 안하시는 분들 이야기 더 듣고 싶다. 여러분들이 원하면 일주일에 여덟 번이라도 할 수 있다.
김수경(성주읍) 이 문제 때문에 동생, 신랑이랑 이야기했는데, 남편이 안을 냈다. 지금 남편은 그 안 별로 아닌 거 같다고 다시 이야기한다. 성주촛불이 꺼지지 않고 하는 건 맞는데 그 대안 중에 하나로 가천, 벽진, 초전 면단위가 있다. 요일별로 그 사람들이 오면 사람들 입장에서 일주일에 한 번 오지만 매일 촛불 돌아가는 거다. 문제가 뭐냐면, 운영하는 분들은 매일 나온다. 제 생각에는 그 사람들 중에 대표를 뽑아서 하면 안 되겠나. 지금처럼 둘러앉아서 이야기해도 되고. 촛불만 들고 있으면 되는 게 아닐까. 사람 수 많은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오래 가는 게 중요한 거니까. 그런 식으로 하면 어떨까.
김순남(성주읍) 얘기 보충해야할 것 같다. 김경수 님이나 김현선 님이 말�� 날마다 드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일주일 계속 나오면, 시간 되는 한 참석할 거다. 여기 계신 분들이 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런 논의 나온 거 자체가 너무나 긴 싸움에 지치기도 하다보니까 나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작은 모임 회장을 맡아보면 회장이나 총무는 그 모임에서 절대 빠질 수가 없다. 앞에서 일을 해야 되기 때문이다. 회장이 안 나오면 모임 자체가 안 된다. 총무가 안 나오면 일이 안 된다.
촛불에 날마다 나와서 먼저 이 자리를 꾸리는 동남청년단이 있고, 음향 준비팀이 있고, 물 끓이는 분들도 있다. 숨은 손길들 하루도 빠짐없이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거다. 저희는 집에 일이 있으면 하고 나와도, 지각해도 괜찮다. 앞에서 일 하는 분은 늦어도 빠져도 안 된다. 그 일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저는 상대 입장도 생각해서 주 1회~2회도 좋다고 생각했다. 광화문 집회가 매일 있었던 게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 있어서 준비해서 갔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고 약속하고 지키면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마음에서 멀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 년 동안 준비돼 있다고 생각한다. 일주일에 한번이라는 약속만 지켜진다면 가능하다. 효율적이고, 더 멀리 오래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손소희(성주읍) 저도 열심히 매일 나왔는데, 못나오는 날도 생겼다. 운영과 관련해서 만약 매일 촛불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부족한 부분들은 보완하면 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초 부스 같은 경우도 예전에 봉사 단위들이 매일 돌아가면서 자리를 지킨 시스템이 있다. 동남청년단도 힘들면 다른 사람들이 지원해서 마련하는 방안을 만들면 된다. 이 자리에서는 촛불을 유지해나간다면 왜 유지 해야 하는지, 어떻게 싸움을 만들어가야 하는지 의견이 활발하게 나왔으면 좋겠다.
김결태(성주읍) 농사일 때문에 일주일 내도록 안 나온 적도 있다. 그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많이 느꼈다. 미안하고, 가끔씩 나오려니까 주변 보기도 그렇고, 심적 부담이 컸다. 그래서 저 같은 경우에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하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주일에 한 번 한다고 해서 투쟁 의지가 꺾인다든지, 우리 운동이 멀어진다든지 그런 건 해봐야 알겠지만, 아까 전에 말씀하셨듯이 약속하고 지금 이 사람들이라면 일주일에 한 번도 탄탄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주일 한 번 하는 대표적 집회가 위안부 할머니들이 하고 계시는 수요집회다. 1992년부터 한 걸로 알고 있다. 수십 년 간 잘 이끌어오고 있고, 상징화 됐다. 우리도 일주일에 한 번 하더라도 장기적인 싸움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징적으로 알릴 수도 있다.
여정희(성주읍)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집회 얘기를 남편이 했는데,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고 생각한다. 성주 촛불은 다른 투쟁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외부에서도 얘기했던 것이, 자발적인 투쟁이었다. 우리가 자발성을 유지하려면 서로 만나야 한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서 뭔가를 하기에는 에너지가 작아질 거 같다. 같이 만나야 서로 생각을 더 많이 알 수 있다. 그냥 요식적인 행위로 촛불 들고 들어가게 되지 않을까. 피로도가 높다, 안 나오면 미안하다는 의견 있는데, 안 나와도 미안해하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면 된다. 매일 나와야 하는 사람들의 피로도를 어떻게 낮출까 고민도 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힘들면 쉬면 된다. 나오는 분들 나오고. 10명이 오면 10명이서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촛불 준비하는 분들의 피로도를 낮추는 방안, 안 나오는 분들 자책감 안 가지셔도 된다.
��인회(벽진면) 저는 일주일에 한 두 번 나온다. 지금까지 여러분 말씀 들어보니 제가 했으면 하는 얘기가 안 나와서 말씀드리겠다. 사드가 성주에 온다는 걸 계기로 많이 모여서, 365일을 넘겼다. 목적을 생각해보면 결국 지역사회든 대한민국이든, 우리가 평화롭고 잘 살아보자, 살기 좋은 공동체를 만들어야겠다는 목적으로 운동이 시작되고 계속 되고 있다. 사실은 모든 운동이 끝날 때가 있다. 전국적으로 반대했던 한미FTA도 얼마 안가서 끝났다.
사드도 어쩌면 우리가 반대하고 있지만, 배치될 수도 있다. 문재인 정부는 기존 다른 정부 특히, 사드 배치를 결정한 박근혜 정부와 다르게 촛불 혁명의 결과로 들어왔다. 민주정부가 우리 국민들의 바람, 국익에 반한 정책 결정은 하지 않으리라 믿는 게 보다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사드를 배치 하냐 안 하냐, 결국 여러 국제 정세 생각해서 국익에 가장 맞는 결정을 하리라고 본다. 사드가 다행히 철회된다면 좋겠지만, 만약 배치된다면 어떤 마음 자세를 가져야 우리가 해온 운동이 결실을 맺고 허망하지 않겠느냐 생각해봤다.
본래로 돌아가서 운동이 결국은 잘 사는 공동체를 만들어보겠다는 건데, 사드는 국익차원에서 결정된다면 사드 배치 이후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거냐. 성주가 유사 이래로 이런 운동이 한 번도 없었다. 이렇게 좋은 운동이 사드가 배치됐을 때 어떻게 할 거냐. 계속 이 운동 역량을 갖고 갈 수 있느냐. 결국 이 운동조차도 살기 좋은 공동체를 만드는 그 밑거름이다. 어떤 분이 ‘살기 좋은 공동체 만들 방법을 생각하자’고 했는데, 여러분 대부분이 일주일에 한번이냐 계속이냐 그 기준은 소모되고 있냐, 아니냐로 판단했으면 좋겠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계속하면 소모된다. 매일 한다는 것이 주최 측이나 참여하는 사람이나 더 역량이 늘어나고, 신나고 좋으면 매일하는 게 좋겠지만, 매일하는 게 힘들어진다는 느낌이 있으면 줄이는 게 합리적이지 않겠나 생각한다.
최준형(성주읍) 매일 하는 게 좋다. 뭐든지 우는 아이 젖 한 번 더 준다고, 일주일에 한번 외치는 것과 매일 외치는 게 정부나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조복철(성주읍) 1년 넘게 투쟁하는 성주군민에게 존경심을 표한다. 우리가 처음 시작할 때, 그 열기는 그때 열정이 계속 왔으면 사드가 물러갔다.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1년이 넘다보니 숫자도 줄고, 집회하는 분들도 힘들다. 참여 못하는 분들도 미안하고. 그런 부담감이 점점 있는 거 같다. 얼마나 갈지 기한이 없고. 이런 시점에 학교에서 방학 하듯이 한시적으로라도 쉬어가면서 앞으로 긴 투쟁을 준비하는 휴식 시간을 가져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심복남(성주읍) 농사짓다보니 매일 나오지 못했다. 수확하고 포장하는 동안에는 못 나오고, 나올 수 있는 기간에는 또 나오고, 여력 되는 만큼은 했다. 못 나올 때 죄책감은 없었다. 가야하지만, 여러분들이 원채 잘해주었다. 질책이나 부담을 전혀 주지 않아서 일 하면서 투쟁을 같이 했다. 항상 생각했던 게, 하루 할 것이냐, 이틀 할 것이냐, 하루 정도 하면 쉴 수도 있고 좋기는 하다. 제가 요즘 건망증이 심해졌다. 집안 제사도 날짜를 적어놔도 까먹는 수가 많다. 저는 이 모든 행위에 대해서 의지와 석관이 필요��다고 본다. 너무 강압적이지 않고, 자율적이었다면 지금처럼 하루하루 정하지 말고, 꾸준하게 할 수 있는 범위 내외서 명수와 상관없이 했으면 좋겠다.
지금 룰처럼 누군가 공연하고, 음향 시설을 해야 한다는 개념보다 자유롭게 둘러앉아서 현안에 대해 이야기한다든지, 우리 군의 문제점이 있다든지, 이웃 문제든지, 이런 사소한 일도 서로 주고 받는 광장 토론 형식도 괜찮다고 본다. 하루냐 이틀이냐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우리가 이걸 효율적으로 이끌어 가는 쪽에 무게를 두고 토론했으면 좋겠다. 우리 투쟁이 무조건 사드 반대가 아니라, 성주군이 발전하기 위한 토론의 장으로도 한번쯤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서로 의지하고 살면서 공동체가 이뤄진다. 의무적인 방어책으로 한 번씩 한다는 개념보다 함께 한다는 개념으로 가자.
김경철(성주읍) 많이 바쁘다. 지쳤다. 회사 출근하랴, 퇴근하면 오랴, 노래 개사하랴, 힘이 많이 든다. 그런데 제 나름대로 힘은 들지만, 여기 나오면 긍지와 자부심을 가진다. 그래서 제가 여기 더 열심히 나온 지도 모른다. 어느 사회자가 이런 소리를 한다. 우리는 하나다. 끝까지 함께 간다. 감사합니다.
김원태(성주읍) 열심히 나오진 않았다. 자주 나오려고 노력은 했다. 구한말 전봉준이 동학 항쟁에서 조선 군대로 진압이 안 되니까 중국군을 끌어들였다. 일본군도 같이 들어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외국 군대에 붙어서 권력을 유지하는 게 똑같다. 전에 한 번 밴드에서 싸웠다. 지금은 응원 댓글도 올라오더라. 누구는 조선왕조가 세계적으로 긴 왕조를 유지한 건 사실이지만, 유약하고 의존적이고 비 자주적인 왕조였다고 하더라. 지금은 촛불, 민의가 나라를 앞서는 시대다. 이걸 보고 제가 글을 하나 올렸다. 오늘이 성주 촛불 373일째다. 방향에 대한 대 토론회가 예정돼 있다, 진정한 민주사회로 가는 토론회 응원해 달라. 그러니까 응원하더라. 전에는 촛불이라는 용어도 못하게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일년 넘게 한 효과가 분명히 있구나. 그래서 참 희망적이다. 우리가 구한말에 일본, 나라를 일본에 다 갖다바친 것도 자주국방을 못 한거다. 열심히 나오려고 노력하겠다.
박수규 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 상황실장 힘들고 피곤하니까 줄여야겠다고 이야기를 한 건 아니다. 작년 7-8월 생각해보면 서울에 8명씩 올라가서 일인시위 했다. 촛불에 참여하시는 분들, 사드 반대 운동에 참여하시는 분들이 훨씬 많았다. 백악관 10만 청원운동, 성주군민 전체가 매달렸다. 전국적으로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다. 사드 철거 싸움을 성주 싸움으로 국한시킨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전국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을까, 촛불은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오늘 마음속에 있는 진솔한 고민을 나눴다. 서로에게 많은 힘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각자에게 힘이 된 거 같다. 긴 시간 함께 해 주신 것 고맙다. 마지막 말씀 한분만 듣겠다.
질문 결론은 누가 내리냐?
박수규 상황실장 대체적인 의견이 나오면 운영위에서 이야기해 볼 수 있다. 부족하면 다시 결정하긴 어렵다.
조선동(월항면) 토론 시작했으면 여기 나온 이야기를 정리하는 건 투쟁위에서 해야 한다. 그걸 정리하고 논의해서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게 순서다.
박수규 상황실장 당연히 그런 순서를 밟아간다. 투쟁위 운영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정리할 것이고, 그 결과를 가지고 다시 이야기할 겁니다.
김성혜 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 공동위원장 전부 이야기 듣고 투쟁 방향을 하나로 만들어내야 한다. 이대로 끝나고 나서, 위원들끼리는 위원들끼리 이야기하고, 촛불은 촛불끼리 이야기하면 소통이 덜 된다. 1년이 지나면서, 정권이 바뀌었잖아요. 촛불의 본 뜻은 사드를 철회다. 목표는 사드 철회고, 사드 철회 방법에 있어서 촛불 들 수 있는 사람은 촛불을 들고, 다각도로 한다. 다른 집회에서 이런 촛불 열린다고 연대 발언도 하고, 각자 역할이 다 다르다. 여기에서 소중한 것은 여러분들이 매일 나와서 촛불 하니까, 성주촛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 됐다. 그리고 7일이 지났고, 그 사이 정권도 바뀌었다. 사드가 있는데 앞으로 어떻게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투쟁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지 촛불을 계속 든다고만 되는 게 아니고, 어쩌다 켜서만 되는 것도 아니다.
두 가지다. 하나는 계속 가자, 하나는 일주일에 한 번 하자. 저 같은 경우는 일주일에 한 번 하더라도, 수요일 집회도 있다. 토요일 저녁은 소성리 집회를 한다. 어차피 그렇게 해도 성주는 세 번이다. 초전면도 성주니까. 참외농사 짓는 분들, 저같이 기도하고 훈련해야 하는 분들, 각자 일터에서 일 하면서 아까 어느 주부가 촛불 안 나가고 집을 치워야겠다 그런 마음 있어도 불안한 마음이 든다. ‘나라도 가서 머릿수 채워야해’ 하고 오다 보니까 일상이 완전히 깨지는 거 아닌가. ‘하루도 안 빠져야 겠다’ 하다가도 빠지기도 하고, ‘끝까지 갈 거야’ 하다가도 안 나오는 사람도 있다. 생각을 좋은 방법으로 모아서 여기에서 토론이 이뤄져야 한다. 우리가 더 단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김경수(성주읍) 이 토론회에 중요한 것이, 매일할 것이냐 쉬었다 할 것이냐. 여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제 내 생각을 재정립할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이래서 매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분은 왜 한번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지 공유하는 시간인 듯하다.
(function(d,a){d[a]=d[a]||function(){(d[a].q=d[a].q||[]).push(arguments)};}(window,'dable')); dable('renderWidget', 'dablewidget_G7Zj437W');
[전문] 7월 20일 성주 사드 반대 투쟁 방향 토론회 was originally published on 뉴스민
0 notes
commision-de · 8 years ago
Text
ㅅㅁ님 - D&G 타입
원피스 - 도플라밍고&코라손 양날개 드림
6000자
한 꺼풀
By. 카논(@do_u_darling)
   코라손에게 있어서 지금 상황은 제 눈앞의 성가신 형제보다도 달갑지 않았다. 이런 제안을 먼저 꺼낸 것은 분명 지금 빙글빙글 웃고 있는 도플라밍고임이 분명할 것이다. 작은 한숨을 내쉬면서 그나마 적어도 제가 생각하던 최악의 상황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한다. 사실 처음부터 말하자면 그 불순한 게임에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가 참가한 것부터가 불만스러웠지만, 그녀가 이 게임을 즐기고 있다는 것으로 작은 위안을 삼기로 했다. 힐끗 눈을 들어 다른 이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코라쨩, 뭐 하고 있어? 코라쨩 차례잖아.”
코라손은 제 옆에 앉아있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다. 알겠다고 답이라도 하듯 고갤 끄덕이고는 제 손에 들린 의미 없는 카드들을 내려다본다. 이런 단순하기 짝이 없는 게임에 대체 무엇을 위해 이리 신중히 행동을 하고 있는지. 이 게임을 즐겨서 한다는 꼬마들이 저를 보면 비웃을 터였다. 평소의 코라손이었다면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인상을 찡그렸겠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가, 안전하기만 하다면야.
코라손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가 손에 펼친 카드를 한 장 꺼내 들었다. 자신의 카드를 가볍게 살펴보다 이윽고 맞는 패를 발견하고는 중앙에 산더미처럼 쌓인 카드들 위에 집어 던지듯이 내려놓는다. 이 게임, 슬슬 끝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속으로 내뱉으며 자신의 패를 펼쳐, 제 형제의 차례를 기다린다. 도플라밍고는 여유로운 미소를 짓더니 코라손의 손에 들린 하트 6을 가져갔다. 그가 이번 판에도 지면 좋겠는데, 연신 웃고만 있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도플라밍고는 이내 쌍을 이룬 카드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그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훗훗, 고맙군, 코라손. 덕분에 나는 이만 빠지겠어.”
그 말을 듣자마자 속으로 혀를 찼다. 녀석이 지기를 빌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녀와 제가 대치하게 되었다. 그녀가 이겨야만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상메가 제 카드를 집어갈 수 있도록 몸을 돌린다. 그녀는 하늘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묵묵한 표정으로 망설임 없이 자신의 스페이드 3을 가져간다. 그녀의 입술이 가볍게 활 모양을 만드는 듯 하더니,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마지막 한 장의 카드가 사라져있었다. 코라손은 눈을 내려 멍하니 제 손에만 들린 조커를 바라본다.
“이번에도 코라쨩이 졌네. 벌써 몇 번째 지는 거야, 코라쨩?”
“코라손, 너는 정말 이 게임을 못하는군.”
상메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놀리려는 듯 도플라밍고가 쿡쿡 대며 코라손의 심기를 건드린다. 코라손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제 셔츠의 단추를 풀어나간다. 대체 이런 규칙은 왜 만들어서. 코라손은 속으로 불만을 토했다. 셔츠를 벗어내자 살갗에 와 닿는 공기가 차갑게 느껴진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상메는 쯧쯧, 가볍게 혀를 찼다.
“코라쨩, 그러다가 금방 옷 다 벗겨져서 더 이상 우리랑 못하는 거 아냐? 좀 더 연습해야겠는걸?”
나도 지고 싶어서 지는 게 아니라는 의미를 담아 상메를 쳐다보지만, 상메는 고갤 절레절레 내저을 뿐이었다. 그런 상메의 모습을 보면서, 코라손은 그래도 이번 판에 걸린 것도 자신이라 다행이라고, 마음 한 켠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녀가 온전하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지금 상황이 코라손에게 있어서 불리한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어련할까, 도플라밍고와 상메 모두 코트나 넥타이 등의 겉옷에 해당하는 것들을 벗어 아직 살이 드러나지 않은 것에 비해, 코라손 홀로 상반신을 탈의하고 있었으니.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승부라던가, 자신이 발가벗게 된다던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상메, 그녀를 자신이 지켜낼 수 있다면 그걸로 자신의 목적은 달성한 것이다. 그래서 코라손은 지금 상황도 흔쾌히 넘어갈 수가 있었다.
벗은 옷가지를 대강 옆에 던져둔 코라손은 몸을 숙여 카드들을 주워 모아다 정리하기 시작한다. 카드를 나눠주고 정리하는 것은 진 사람의 몫이기 때문이다. 여럿 져버��� 탓인지, 코라손은 어째서인지 카드들을 섞는 감각이 어느덧 익숙해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새로운 판을 위해서 새 카드를 나눠주면서도 코라손은 결과적으로 이 상황을 초래한 도플라밍고를 고운 눈빛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래, 모든 것은 바로 저 남자 때문이다.
코라손이 자신이 잘하지도 않는 이런 어린아이의 게임에 참가하게 된 것은 도플라밍고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원래 이 게임은 상메와 도플라밍고, 둘이서 하고 있었고 코라손은 그런 그들 곁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분명 몇 분 전만 해도 아주 평화로운 그 광경을 망친 것은 도플라밍고다. 그는 그냥 하니 재미가 없다며, 재미를 더하기 위해서 게임에서 지는 사람이 옷을 하나씩 벗는 건 어떠냐는 몰상식한 제안을 한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코라손은 저도 참가하겠노라 입을 열었다. 본래 잘 알지도 못하는 게임이었으니 자신이 질 게 뻔하기에 참가할 마음이 없었지만, 도플라밍고의 그 발언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세상에, 옷을 벗는 것이 벌칙이라니. 상메가 도플라밍고에게 패해 알몸이 된 채 서있을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철렁했다. 죽어도, 저 남자에게 상메의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 그건 제 눈에 흙이 들어가도 인정할 수 없었다. 물론 생각해보면 상메도 상메대로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받아들였기에 그것도 문제였지만, 애초에 도플라밍고가 먼저 얘기를 꺼내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터였다. 이 사태의 모든 원인은, 역시 저 남자 때문이었다.
코라손이 패를 모두 돌리고 나자, 상메가 빙긋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시작해볼까? 아까처럼 겹치는 패가 있으면 다 빼내도록 해.”
“오늘 상메의 속옷은 무슨 색일까, 어떤 디자인이려나. 궁금해지는 걸. 오늘은 좀 끈이 달린 검은색의, 섹시한 거면 좋겠는데.”
도플라밍고가 상메를 바라보며 낄낄댄다. 저 자식은 또. 어쩜 상메에게 저런 불건전하기 짝이 없는 발언을 하다니.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제 형제를 노려보지만, 도플라밍고가 그런 코라손의 눈빛을 신경 쓸 리가 없었다. 상메는 그런 말에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제 카드 패를 정리하면서 무덤덤하게 대꾸한다.
“글쎄. 그렇게 보고 싶으면 이겨서 보던가.”
“오, 그렇다면 꼭 이겨야겠군. 훗훗. 코라손, 너도 힘 좀 내서 상메가 지도록 해봐. 같이 좋은 구경 좀 하자고.”
그 말을 듣자마자 코라손은 당장 펜을 들어서 종이에 한 마디를 휘갈겨 쓴다.
‘내가 미쳤냐. 거기에 이번에 지게 되는 건 너야.’
“…코라쨩, 그런 말을 할 거면 좀 더 잘하고 나서 하도록 해.”
그의 필담을 읽은 상메의 말에 코라손은 멋쩍은 듯 제 볼을 손가락으로 긁었다. 그의 형제는 이 모습이 꽤나 유쾌한 듯, 훗훗 하고 다시금 웃음소리를 흘리는 것이었다. 도플라밍고의 도발에 걸려버려, 두 사람의 승부욕이 불꽃 튀는 대화에 괜히 끼어들었다고 생각하며 그는 다시금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내가 알몸이 되어도 상관 없으니까 제발, 이번에도 상메만은 걸리지 않기를. 다들 제 패를 살피기에 바쁠 때에, 홀로 눈을 들어 상메를 바라본 코라손은 이번에도, 그렇게 빌었다.
   * * *
   코라손은 이따금씩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제 살갗에 와 닿는 공기가 이렇게 차가울 줄은 몰랐다. 아무렴, 그는 지금 달랑 하트무늬 트렁크 속옷 한 장만을 걸치고 바닥에 앉아있는 것이다. 원래 이 방이 이렇게 추웠나 싶을 정도로 그는 제 온몸으로부터, 적나라하게 드러난 맨살을 통해 체온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탈의 카드게임’은 계속되고 있었다. 누군가가 전부 벗게 되어 지게 되면 이 게임도 끝나고 말 것인데,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는 코라손의 원념과는 다르게 애석하게도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던 것이다. 차라리 제가 알몸이 되어 끝나버리면 다행이련만. 그런 생각을 하다 눈을 들어 제 오른쪽에 앉아있는 상메를 힐끗 쳐다본다. 그녀는 여전히 신중하게 제 패를 살피면서 앉아있다. 촘촘하면서도 굵게 짜인 하얀 니트 원피스는 아직 그녀를 따뜻하게 보온해주는 듯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안도하며, 이번에는 눈을 돌려 왼쪽으로 향한다.
왼쪽에 앉아있는 제 형제, 도플라밍고는 그런 상메와는 반대로, 코라손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여있다. 그가 입고 있는 자주색의 드로어즈가 그렇게 코라손의 두 눈에 성가실 줄이야. 저와 같은 상황이라 동정심이 일기는커녕, 되려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플라밍고 그가 아마 이 사건의 원인 제공자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코라쨩,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설마 패를 보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갑작스럽게 들린 상메의 말에, 코라손은 얼른 눈을 들어 상메를 향하곤 결백함을 주장하려는 듯 아니라고 얼른 고갤 절레절레 내저었다. 상메는 의심스럽다는 듯한 눈빛으로, 말없이 입을 다물고 그런 코라손을 바라본다.
“훗훗, 코라손, 그렇게 하다간 너의 패가 다 보일 거야. 좋아, 상메. 이번에는 내 차례다. 패를 이리 내.”
상메는 세 장 남은 카드 패를 도플라밍고에게 내민다. 도플라밍고는 흐음, 하고 뜸을 들이다, 여유가 가득한 표정으로 한 장을 집어 든다. 그가 쓰고 있는 주황색 선글라스 너머로 씩 웃는 표정이 드러난다.
“이번 판에서는 내가 제일 먼저 빠졌군. 오, 그럼 이제 드디어 상메가 질 차례인가?”
낄낄대며 깐죽거리는 도플라밍고를 무시한 채, 상메는 몸을 돌려 코라손의 패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지금 조커는 코라손의 손에 들려있는 상태. 그는 상메가 부디 맞는 패를 가져가길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상메의 선택은 그 반대였다. 상메는 자신이 조커를 가져갔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반응이 없다. 다시 코라손의 차례가 된다. 여기에서 자신이 상메에게서 다시 조커를 뽑아가면, 자신의 패배이다.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코라손은 지금이 찬스라고 생각했다.
손을 들어 침착하게, 상메의 패에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도플라밍고의 흥미로운 시선이 그의 손가락을 따라온다. 그 때 코라손은 듣고야 말았다. 상메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쯧이라는 소리를. 설마 하여 재빠르게 제가 뽑은 카드를 확인하니, 안타깝게도 그의 바램과는 다르게, 그가 뽑은 카드는 다이아몬드 7. 그가 가지고 있던 마지막 카드 한 장과 같은 것이었다.
“쳇, 져버렸네.”
상메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플라밍고는 다시금 유쾌하게 웃었다.
“오, 드디어 상메의 속옷을 볼 수 있겠군. 어디 보자, 오늘 상메의 속옷 색깔은 뭐지?”
안돼. 상메의 속옷을 도플라밍고가 보게 할 순 없어. 한 발 차이로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코라손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침울하게 고갤 숙이고 있는 코라손에 비해, 도플라밍고는 신이 난 목소리로 어서 벗으라고 옆에서 독촉하듯 보챈다.
“음, 근데 곤란하네.”
상메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원피스인데 어떻게 하지?”
“뭘 망설이고 있나. 그냥 벗어버리면 되는 걸.”
“그렇지만 코라쨩이랑 도피는 상하의 하나씩 벗었잖아. 그럼 나는 불공평해지는걸.”
좋아, 마지막 기회다. 코라손은 상메의 말을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손을 놀린다.
‘그럼 이번 판은 벗은 걸로 치고, 다음 판에 제대로 벗는 걸로 하자.’
그렇게 적은 종이를 도플라밍고와 상메를 향해 들어 보이려고 했지만, 코라손의 펜을 놀리는 속도보다 상메의 행동력이 훨씬 빨랐다. 그녀의 새하얀 니트 원피스가 이윽고 바닥에 떨어졌다. 코라손은 제 눈 앞에 보이는 광경—그녀의 몸을 가리고 있는 새하얀 레이스 장식의 속옷과, 그에 잘 어울리는 풍만한 가슴과 아름다운 몸매—에 저도 모르게 쥐고 있던 카드를 구기고 말았다. 구겨진 것은 카드뿐만이 아니다. 코라손의 얼굴 역시, 이 게임을 시작한 이래로 제일 구겨져있었다. 반면 도플라밍고는 휘파람까지 부는 걸로 봐서, 무척 신이 나 보인다. 저 망할 자식. 코라손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오, 섹시한 것이 아니라 귀여운 것이로군. 훗훗, 맘에 들어. 오늘도 상메의 아름다운 몸매가 아주 보기 좋아. 역시 상메는 어떤 속옷이든 잘 어울리지. 어때, 코라손. 너도 감상 좀 말해봐.”
도플라밍고의 남사스런 발언에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고갤 숙이고 있던 그는 그대로 도플라밍고를 노려보는 수 밖에 없었다. 왜 하필이면 상메가 그 카드를 뽑아서. 아니, 그녀의 탓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했다가 고갤 내저었다. 전부 자신이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마지막의 마지막에, 자신이 지게 되었더라면 분명 이런 사태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왜 필요할 때 제 형편없는 실력은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일까. 코라손은 제 운이 어지간히도 나쁘다고 속으로 한탄했다.
“역시 갑자기 공기가 닿아서 춥네.”
상메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면서 제 무방비한 두 팔을 손으로 감싸고 비벼댄다. 그 말을 듣고 코라손이 재깍 코트를 덮어주려고 흩어진 제 옷가지를 향해 손을 뻗자, 혀를 차는 도플라밍고의 말이 뒤따라온다.
“안되지, 코라손.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고?”
‘그래도 상메가 감기에 걸릴 수도 있잖아.’
“괜찮아, 코라쨩. 이번 판이 분명 마지막이 될 테니까.”
자신을 보며 빙긋 웃어주는 상메에게 코라손은 착잡한 표정을 지어 보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은 곧 코라손에게 구원과도 같기도 했다. 이번 판만 끝나면, 이번 판에 자신이나 제 형제가 지게 되면, 상메의 ‘그런 모습’이 도플라밍고에게 보여지지 않고 끝난다.
“패를 돌려, 상메. 이 다음에는 네 몸매를 가리고 있는 그 얇은 천을 벗겨줄 테니까.”
“네 옷 간수나 잘해, 도피. 그럼 간다?”
상메의 손에 의해 패가 다시 돌려지고, 하릴없이 코라손은 다시금 게임에 임해���만 했다.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상메를 지키고 말리라. 조금 전의 자신의 실패를 덮으려고 하는 것일까, 코라손의 두 눈은 지금 누구보다도, 아니, 그가 전투에 참가할 때보다도 진지했다.
몇 분 뒤, 코라손은 의기양양해져 있었다. 그렇게 원하는 제 형제의 패배가 결정된 것이다. 그것을 제가 해냈다는 것에 대한 달성감, 상메를 지켜냈다는 안도감이 교차하여 그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비록 이번에 패배한 것으로 인해 보고 싶지도 않은 제 형제의 알몸을 보게 되더라도, 상메가 안전하다면 그걸로 됐다. 물론, 도플라밍고가 옷을 벗기 시작하면 그녀의 눈을 지켜주는 것까지가 제 역할이겠지만.
“졌네, 도피. 어쩌시나, 이제 전부 다 벗으셔야겠네요?”
“이상하군, 이렇게 될 예정은 없었는데.”
“진 건 진 거야. 아, 선글라스랑 속옷이 남아있네? 뭘 벗으시겠어요? 어서 벗어.”
도플라밍고의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자 상메 역시 코라손만큼이나 유쾌해 보였다. 그를 도발하듯 벗으라고 독촉하는 상메를 바로 보던 도플라밍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오, 하고 감탄하는 상메에게 씩 웃어 보인 도플라밍고는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손으로 제 턱을 쓸어 내리고는 입을 열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중요하게 할 일이 떠올랐군. 그러니 나는 급히 이 자리를 떠나야겠어. 내 속옷의 안을 무척 기대했을 텐데 안타깝군, 상메.”
“뭐? 장난해?”
상메의 말에도 불구하고, 도플라밍고는 마치 듣지 못했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제 분홍색 퍼 코트만을 걸치고 재빠르게 방을 빠져나가 버렸다. 코라손과 상메는 도망치는 그의 뒷모습을 몇 초간 멍하니 바라보았다. 먼저 침묵을 깨뜨리고 행동을 일으킨 것은 상메였다.
“장난해? 거기 서! 벗어! 벗으라고!”
상메는 도망친 것에 무척이나 화가 난 듯,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 상황을 그제야 파악한 코라손은 얼른 제 코트를 주워다가 상메의 뒤를 따라간다. 그 상태로 나가면 안 된다. 상메는 지금 속옷 차림인 것이다. 이 게임에 참가한 저나 도플라밍고라면 모를까(사실 도플라밍고 역시 봐서는 안 된다고 아까부터 생각했지만) 다른 이들까지 그녀의 반나체를 보게 할 수는 없다. 겨우겨우 그녀를 붙잡고, 제 코트를 덮어주자, 상메는 멈추는 기색 없이 코라손의 코트를 걸친 채 도망치는 도플라밍고에게 벗으라고 외치며 달려간다. 코라손은 그런 그녀의 뒤를 혹여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쫓으며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모든 것은 제 망할 형제 때문이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도플라밍고에 대한 분노를 나타내보았지만, 도플라밍고는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두 번 다시 이런 미친 게임에 상메를 내보내지 않을 것이라 속으로 다짐하며, 코라손은 상메를 붙잡기 위해 더욱 빠르게 달렸다.
그렇게 속옷 차림으로 서로를 잡기 위해 돌아다니는 세 사람의 모습은 가히 코미디 드라마 속의 그것과 흡사했다. 그들이 있던 도플라밍고의 방에는, 벗어놓은 남녀의 옷가지와 여기저기 흩어진 카드들만이 그저 그들의 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0 no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