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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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mongbites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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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흉상만 딴 데 놓는다 하고 한덕수는 함명도 바꿔야 한단 헛소리 하는 거 보고 빡쳐서 쓴 글
(마스토돈 글 백업)
처음 철거대상으로 거론됐던 다섯 중 홍범도가 나머지랑 다른 점은 부잣집, 양반집,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일본 유학을 가는(지청천) 등의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다는 점임.
홍범도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생계를 유지하게 위해 광산 노동자, 감영 나팔수, 제지소 노동자로 살면서 차별과 부정부패를 목격하고, 임금체불로 고생하고, 포수로 살다가 일제의 총포규제로 생계가 끊기자 다른 포수들과 함께 궐기한 것으로 시작으로 의병운동과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어 간도로 망명하게 된 사람임. 말하자면 가난한 노동자 출신이다. 내 고향 땅이 나를 착취하는 그런 계층 출신.
간도, 만주, 연해주의 한인들 중에 독립운동 하다가 한반도의 일제의 영향력이 커져서 그를 피해 망명한 사람들 빼면 고향 땅에서 소작농으로 살면서 사정 안 봐주는 소작료와 조세에 쥐어 짜이고 지주와 마름한테 시달리다 도주한 사람들임. 홍범도에겐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이웃이고 그런 이웃들을 위해 싸운 거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중에 이런 배경 가진 사람 많음. 양반의 자존심이든 넉넉했던 어린 시절이든 고향 땅에 애착이 있고 거기서 애국심이 발현되는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고향 땅에서 똑같이 힘들게 살다 힘들게 타향살이 하던 산 사람들에게 살만 해진 고향 땅을 찾아주는 게 더 중요할 사람들 아니겠냐?
ㅌ하여튼 간에... 시간적으로 따져도 - 홍범도 1868년생 - 임시정부 수립: 1919년 - 자유시 참변: 1921년 이라서 1912년 생인 김일성(임정 수립 때 고작 만 7세이고 자유시 참변 때는 만 9세임...)의 행보와 1950년 이후에 자리잡은 냉전시대의 이념을 홍범도한테 뒤집어 씌우는 건 무식한 짓임. 개자��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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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lab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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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는 리얼리티의 슬픔, 『통합임시정부와 안창호, 이동휘,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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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각정부의 세 지도자
반병률
신서원, 2019
- 역사는 언제나 잔혹하다. 아니 역사는 그럴 마음이 없어도, 역사에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사람의 마음은 고통에 가득 찬다. 후세의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역사 속에서 찾아내려 안달하지만, 역사는 그와는 무관하게 천천히 자신을 쌓아 올린다. 요즘 많이 고민하는 ‘역사적 경험’이란 화두는 이 역사의 냉정한 무관심을 이해하기 위한 나 자신의 틀이다. ‘역사적 경험’은 비약될 수 없다. 2층을 쌓기 위해서는 1층이 있어야 한다. 옆의 건물에 있는 2층을 보고 그것을 따라 한 들, 그것은 내가 쌓은 1층 위에서만 모양을 갖출 수 있다. ‘혁명의 이식’이 쉬운 과제가 아니었던 것은 혁명이라는 건물의 펜트하우스가 결코 내가 쌓은 건물에 맞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 반병률 교수의 책은 그런 잔혹한 역사의 무관심에 대한 연구다. 4.19 혁명 이후 남한은 복잡한 정치 지형 속에서 자신의 역사를 그려야 했다. 독립운동가 이승만은 가장 전제적인 방식의 독재자로 나라를 파괴했다. 그러나 그것에 비해 가장 헌신적인 민족해방 투쟁을 했던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사회주의’라는 이유로 인정할 수 없다. 이런 공백에서 식민지 조선의 독립 운동을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박정희는 이 부분에 공백을 두고 대신 “식민지가 될 정도로 타락한 조선”이라는 ‘빈곤과 당파 싸움으로 가득 찬 조선’ 이미지를 생산하여 이후 ‘식민지 근대화론’의 공간을 남겼다. 반면 민주 진영은 민족주의 운동의 뿌리를 김구와 임시정부에서 찾았다. 그리고 군사 독재의 시대가 무너지며 근대적 민주주의가 형식적으로 갖춰질 때 김구와 임시정부가 이승만과 김일성에 대한 ‘대당’의 성격에서 독립운동의 뿌리, 남한의 출발점으로 자리잡게 된다.
- 그러나 독립운동사를 보면 볼수록 ‘김구 선생’의 ‘정치 활동’에 대해 새롭게 발견하게 되고, 그의 배타적인 민족주의와 무차별적 우익 테러가 얼마나 운동에 해를 끼쳤는지, 동시에 이승만의 파수꾼으로서 다른 독립운동가들을 몰아냈는가 등을 생각하면 많은 공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평가할 수 있을 지 의심하게 한다. 이는 ‘임시정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독립 지사들이 헌신적으로 참여했고, 국내의 민중들이 조금이라도 돕기 위해 노력했으나, ‘임시정부’가 그런 기대에 부합했는가 평가해본다면 회의적이다. 바로 이 부분���서 이 책의 잔인함이 있다. 이 책은 냉정하게 ‘임시정부’의 탄생과 그 역량, 그리고 그것의 실패에 대해 정리한다. 아이가 성장하기 위해서 크기만 했던 부모의 실체를 직시하고 실망하고 그리고 평가하는 것이 필요하 듯, 이 책은 식민지 조선의 민족해방을 향한 헌신적 투쟁사를 이해하기 위해 그 하나 하나를 냉정하게 평가하고 있다.
- 책은 다양한 정치 세력들의 계획적, 그리고 자발적 연대 속에서 폭발한 ‘3.1 민족해방운동’ 이후, 그 대중적 열의를 담아낼 수 있는 독립 운동 지도부 건설 과정과 그 좌절을 살펴본다. 1919년 ‘임시정부’ 건설에서 사실상 통일 지도부가 와해된 1921년까지의 짧은 시기를 중심으로, 임시정부와 그것을 대표하는 지도자들인 안창호, 이동휘, 이승만 세 지도자의 정치적 활동을 살펴본다. 책에서는 임시정부와 관련하여 몇 가지 새롭게 주목할 만한 점을 제시한다. 우선 3.1 민족해방운동과 임시정부와의 관계.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33인의 성명서 발표와 무저항 주의에 기반한 자발적 체포’라는 상황 인식과 달리, 이들 공개된 1차 지도부의 체포와는 별개로 2차 지도부가 구성되어 있었으며, ‘경성독립단 본부’는 이후 민족해방운동을 지도할 독립 정부 구성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해 독립운동가들이 준비했던 임시정부는 이 ‘경성독립단’의 독립 정부 구성안을 받아서 그에 맞춰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즉 3.1민족해방운동과 상해에서 건설된 임시정부는 일련의 연속적 작업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다음으로는 당시 다양한 세력이 운동에 참여했고, 이에 따라 전부 7개의 독립정부가 등장하지만, 이 중 실제 힘을 갖춘 것은 크게 세 개로 러시아 지역 재러 동포들로 구성된 국민의회, 그리고 상해에 있던 망명 독립운동가 중심의 상해 임시정부, 마지막으로 국내에서 각 지역 대표들이 모여 만든 한성 정부였다. ‘상해임시정부’는 즉 처음부터 모든 지역의 대표로 구성된 단일한 ‘임시정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상해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지도부가 되기 위해서는 별도의 통일 작업이 필요했고, 바로 여기서 ‘상해임시정부’의 현실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책은 특히 세 정부의 모순적 상황을 설명하는데, 상해 임시정부와 국민의회는 상대적으로 일제의 힘이 미치지 않는 지역에서 강력한 물리력을 갖추고 있는 반면, 한성정부는 대표단이 모여 정부를 구성하고, 그것을 국내에서 투쟁을 통해 공표했으나, 일본의 탄압을 피해 대부분의 상층 인사들은 상해로 옮겨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현장에서 투쟁했던 젊은 운동가들은 체포, 투옥되는 바람에 이름만 남은 정부가 되었다. 즉 대표성은 있으나 이름만 남은 한성정부와 물리력은 있으나 국내에 대표성을 지니지 않은 상해임시정부와 국민의회라는 기묘한 동거가 생겨난다. 이런 기묘한 동거는 여러 정치 세력의 갈등을 발생하는데 한성정부에서 ‘영구 집정관 총재’라는 자리를 받은 이승만은 이 지위와 임시정부에서의 지위를 줄타기하며 이용하고, 세 정부를 통합해야 한다고 믿었던 안창호는 각각의 이해를 조정하기 위해서 뛰어다녔고, 국민의회의 문창범은 가장 강력한 조직력과 전투력을 지닌 국민의회 중심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믿었고, 국민의회 내에서 소수파에 속했던 이동휘는 ���회주의 운동과 민족운동의 통일체로 임시정부가 구성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후 통일임시정부를 구성하고 다시 해체되는 2년의 과정은 이런 각기 다른 성향의 네 사람의 정치적 활동의 교차 과정이기도 했다.
- 그리고 이 통합 과정이 비록 짧은 기간 동안이라도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민족주의 단체 ‘신민회’에서 시작된 안창호와 이동휘의 상호 신뢰와 그들의 헌신이었다는 것이다. 안창호는 이승만을 설득하기 위해 미주 지역에서 자신이 만들었던 기반의 대부분을 이승만 주도로 넘기는 것을 감수했고, 이동휘는 국민의회로부터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적극적으로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러시아, 만주 지역에 있는 무장 단체들을 임시정부에 참여시킴으로써 무력 투쟁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또한 맹목적인 미국 지지자들로 구성되었던 임시정부 내에서 소련과의 협력을 주창하고, 그것을 실현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상해임시정부가 비록 장기적인 과제지만 독립전쟁을 제 1의 목표로 삼도록 설득함으로써, 사회주의자로서 민족해방운동가로서의 자기 역할을 최대한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런 그들의 노력도 결국 한 쪽에서는 모든 권한을 안전한 미국에서 자신이 독점해 행사하고자 했던 이승만의 노회한 전략, 그리고 이승만을 따르는 임정 내의 분파들에 의해 차례대로 좌절되고, 결국 그래도 이승만을 안고 가야 한다는 안창호의 맹목적인 지지와 이승만의 외교 전략을 비판했던 이동휘에 의한 이승만 축출 시도의 충돌 이후 차례대로 이들은 임시정부를 떠나게 되어, 통일임시정부는 1921년 사실상 무력화된다. 그리고 이런 지지부진한 상태는 25년 임정의 이승만 탄핵, 축출과 30년대 김구 주도의 반제 테러 전략을 거쳐 40년 김구가 주석이 되어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시기에 달할 때까지 반복되어 나타났다.
- 마지막으로 정치 노선의 문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승만의 전략은 외교를 통한 독립이 중심이 되어, 초기에는 미국에게 일본을 몰아내고 조선을 통치해 달라는 청원을 하기도 하였고, 미국과 일본이 가깝게 지내던 2, 30년대에는 조선총독부와도 타협적인 태도를 보이기까지 했다. 이런 이승만의 전략을 인정할 수 없던 이동휘는 당장 무장투쟁을 해야 한다는 급진론에 가까웠는데, 그 덕분에 그는 만주와 러시아 지역의 항일 무장투쟁들을 정비하고 체계화하는데 앞장설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급진론이 얼마나 현실적이었는 지에 대해서는 항상 의문이다. 왜냐하면 일본에 의한 연해주지역 조선인 학살 사건인 4월 참변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무장 조직들의 무장이 근대화된 대규모의 일본 군대와 맞서서 국지적 전투 이상을 이룰 수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창호 그리고 그를 따르던 이광수 같은 이들은 항시 급진론을 반대하며 실력양성을 꿈꾸었지만, 이런 실력양성론이 사실상 독립투쟁 포기론으로 이어지던 역사적 맥락을 본다면 이 또한 한계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무장 투쟁과 대중 투쟁�� 결합하고자 노력했던 2, 30년대 국내 사회주의 조직과 만주지역 항일 무장투쟁 세력의 전략은 이런 급진, 완진의 대립 속에서 성장한 식민지 조선의 혁명 전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이러한 책의 연구 성과들에 비춰볼 때, 상해임시정부의 역할에 대해서는 좀 더 냉정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동시에 원하지 않는 일이라도 통일 상해임시정부의 성립과 붕괴가 당시까지 식민지 조선이 도달할 수 있었던 한계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의지’와 ‘의분’만으로 움직이던 고참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오직 ‘정치’의 관점에서 문제를 파악하고 그것을 노회하게 이용했던 이승만의 역량, 그리고 그것을 끝까지 믿었던 안창호와 김구의 역량. 일찌감치 사회주의 운동을 준비하고 한인사회당이라는 사회주의 조직과 임시정부라는 통일운동 전선체의 모델을 발전시켰지만 결국 좌절해야 했던 이동휘의 한계. 이런 한계가 임정의 붕괴라는 역사적 경험을 만들어 냈지만, 그랬기에 새로운 민족해방운동의 불씨가 20년대, 30년대 국내외의 사회주의 단체들과 항일 무장투쟁 단체들에 의해 재정비되어 불타오를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임시정부라는 부모는 초라했지만, 그 역사적 경험의 결절점을 거쳐 새로운 혁명 운동은 자신의 자리를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본다 해도 부모의 초라하고 힘 없는 어깨를 보는 것은 내도록 마음을 무겁게 한다.  
P. S. 다시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평생을 헌신적으로 민족해방만을 생각했던 안창호와 김구를 끝까지 조종할 수 있었던, 이승만의 악마적 정치력은 무엇이었을까. 가설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처음부터 지향점이 달랐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점이다. 안창호, 김구 나아가 가장 격렬하게 비난했던 이동휘까지도 기본적으로 이승만을 ‘독립운동가’의 프레임 속에서 이해했으나, 미국에 대한 식탁통치 청원이나 조선총독부와의 협력 등을 볼 때, 이승만은 ‘권력 의지로 가득 한 정치가’였을 뿐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던 것은 아닐까. 이 동기와 지향의 어긋남이 결국 1919년 3.1 민족해방운동에서 1960년 4.19 민주혁명까지 40여년 동안 식민지 조선과 남한의 다양한 가능성을 봉쇄하는 비극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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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21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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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건국100주년 #임시정부수립 #임정 #광복군 #문재인 #건국절 #개국 #조선 #고려 #역사 #한4군역사는조작 #식민사관타파 #일본간첩사형 #다까끼 #츠키야마 #고정간첩 #일본간첩섬멸 #공수처설치 #부패판사탄핵하라 #사법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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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bumsun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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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운동을 이끈 청년들의 신사상
“삼일운동”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유관순, 태극기, 만세운동, 일제의 탄압. 작년 삼일절, 문재인 대통령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임시정부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안중근과 이봉창, 김구와 윤봉길이 등장했고, 항일무장독립투쟁의 고난을 상기했습니다. 독���와 위안부 문제를 짚었고, 마지막엔 김구의 소원인 문화강국을 내걸었습니다. 저는 역사학도로서 의아했습니다. 물론 하얼빈의 총성과 홍커우의 폭탄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1919년 3월 1일과 정확히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어째서 삼일운동의 진원이라고 할 수 있는 여운형과 김규식 등의 신한청년당이나, 실제로 선언문을 작성한 이광수와 최남선 등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가 기억해야할 삼일운동의 하이라이트는 과연 유관순의 순국 밖에 없을까요?
저는 오늘 2019년 대한민국 청년의 시각으로 1919년 삼일운동을 이끈 청년들을 기억하려 합니다. 삼일운동은 청년운동이었습니다. 1880년대생부터 00년대생까지가 주축이 되어 기획하고, 행동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의 사상은 기성 세대의 봉건적 사고와 확연히 달랐습니다. 구한말부터 선교사들을 통해 유입되고, 유학생들을 통해 수입된 근대 사상이 드디어 물꼬를 튼 것입니다. 서구 계몽주의에 뿌리를 둔, 다분히 국제주의적이고, 인류 보편적인 세계관이었습니다. 삼일운동은 그 시작부터 국제적이었습니다. 신한청년당은 상해에서 탄생했고, 대표단을 파리로 파견했으며, 이에 호응하여 도쿄 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을, 천도교와 기독교가 3.1 독립선언을 주도한 것입니다. 당시까지 주류였던 유림이 이렇다 할 참여를 하지 않은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광수의 2.8 선언과 최남선의 3.1 선언에 담긴 언어는, 여전히 사서삼경에 익숙한 6, 70년대 생이 받아들이기에는 낯설고 불쾌했을 것입니다. 서재필 등 몇몇 선각자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삼일운동 백주년인 올해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피부로 느끼기에 아주 좋습니다. 저는 1991년생이라 이제 29살입니다. 최남선은 1890년생으로 기미독립선언문을 쓸 당시 30살이었고, 이광수는 92년생이라 28살이었습니다. 여운형은 86년생, 김규식은 81년생이라 여전히 “청년"이라 부를 수 있는 30대 중후반이었고, 유관순은 02년생 17살이었습니다. 박헌영, 허정숙 등 러시아 혁명의 세례를 받은 공산주의 청년들도 각각 00년, 02년 생으로 채 스무살도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이들은 이전 세대와 달리 일찍이 해외 유학을 했거나, 외국인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유교적, 봉건적, 가부장적 질서와는 다른, 과학적, 민주공화주의적, 여성주의적 미래를 지향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삼일운동은 조선 청년들의 사상적 근대화에 힘입은 일대 정신 혁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삼일운동을 이끈 청년들의 신사상이 크게 두 가지 의미에서 획기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국제법에 기반한 평화운동이었다는 점, 둘째는 비폭력 평화주의를 내세웠다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19세기 말에야 세계사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개념이었습니다. 그것을 19세기 말 조선에 태어난 청년들이 온몸으로 습득하여, 전국민의 10%가 참여하는 거국적 운동으로 이끌었다는 것은 그 동시대성이 경이로울 뿐만 아니라, 세계사에도 특기할 만합니다. 과연 어떻게 된 일인지, 그 배경을 밝히고 의미를 논하는 것이 오늘 방담회의 목적 중 하나입니다.
​우선 삼일운동의 도화선인 신한청년당으로 가보겠습니다. 86년생 여운형은 몇몇 동지들과 1918년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세웁니다. 터키청년당 동지들에게 영감을 받은 이름이었습니다. 그때 1차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파리 강화회의로 이목이 집중됩니다. 여운형은 김규식을 파리로 보냅니다. 81년생 김규식은 어릴 적 언더우드 학당에서 공부했고, 서재필의 추천으로 미국 유학을 갔습니다. 프린스턴에서 석사까지 마치고 귀국했다가, 다시 중국과 몽고를 돌며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 산스크리트어, 몽골어까지 능통한 인재였습니다. 그는 파리 강화회의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주창한 민족 자결주의에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지배 민족이 독립하여 스스로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는 아주 이상주의적인 주장이었습니다. 윌슨은 국제법에 기반한 영구 평화를 꿈꿨고, 그 장치로 국제연맹을 제안했습니다. 비록 그 꿈은 야당인 공화당의 반대와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승전국들의 반발로 이뤄지지 못했지만, 국제연맹은 이후 국제연합, 즉 유엔의 모태가 됩니다.
​이때 김규식과 함께 파리에 간 선배가 있습니다. 바로 63년생 미국인 호머 헐버트입니다. 86년에 육영공원 교사로 처음 조선에 온 헐버트는 이후 배재학당에서 이승만, 주시경 등을 가르쳤고, 서재필과 함께 독립신문을 만들었습니다. 1905년 고종의 특사 자격으로 자국 대통령인 루즈벨트를 찾아가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렸고, 조미통���수호조약에 근거해 미국이 조선을 도와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그것이 수포로 돌아가자, 1907년 헐버트는 또 다시 고종의 부탁으로 이위종, 이준, 이상설과 함께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일제의 방해로 실패합니다. 베르사유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것이 헐버트에게는 처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1905년과 1907년, 1919년까지 헐버트의 논리는 일관되었습니다. 일제의 조선 침략은 국제법에 어긋나는 행위이니,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이 인도주의의 이름으로 개입하여 독립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엔의 도움으로 국가를 보전한 우리에게 지금은 너무도 익숙하지만, 당시로서는 새로운 논리였습니다.
​우리는 이 논리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영구평화론입니다. 서양에서는 토마스 페인이나 임마누엘 칸트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처음 말하고, 조선에서는 안중근이 <동양평화론>에서 펼�� 이 주장은 근대 전쟁의 잔학성에 대한 반작용이었습니다. 고대부터 전근대까지 인류 역사에서 전쟁은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였습니다. 평화란 전쟁과 전쟁 사이 준비 기간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인류는 전쟁의 득보다 실이 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독가스와 기관총을 비롯한 대량살상무기가 도입된 세계 1차 대전은 경종을 울렸습니다. 더 이상의 전쟁은 아니된다, 국제법에 기반한 항구적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는 자각이 있었습니다.
​헐버트는 국제법에 입각해 한국을 변호했습니다. 워싱턴에서도, 헤이그에서도, 파리에서도 번번히 무시당했지만, 그 신념은 한결같았습니다. 힘의 논리 앞에서 법과 도의를 외쳤다는 점에서 헐버트는 윌슨과 같았고, 삼일운동을 이끈 조선 청년들과도 한마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삼일운동의 시작을 신한청년당의 파리 강화회의 파견으로 볼 때, 그것은 반드시 헤이그 평화회의의 연장선상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두는 헐버트와 서재필과 김규식 등 조선 개화 청년들 사이에 퍼져 있던 국제주의적 평화운동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광수의 2.8 독립선언문 논지는 간단합니다. “한일합병은 조선민족의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고, 동양의 평화를 헤치기 때문에 무효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우리에게도 적용해달라.” 최남선의 3.1 독립선언문은 조금 더 나아갑니다. “아아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도다. 위력의 시대가 거하고 도의의 시대가 래하도다. 과거 전세기에 연마, 장양된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신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에 투사하기 시하도다. 신춘이 세계에 래하야 만물의 회소를 최촉하는도다.” 위력의 시대를 보내고 맞이하는 도의의 시대. 바로 국제법과 인도주의에 기반한 평화체제입니다. 윌슨에게 보내는 편지와도 같은 이광수와 최남선의 선언문은 그들의 사상과 언어가 얼마나 서구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았는지 보여줍니다. 기미독립선언문은, 모든 독립선언문이 그렇듯이, 1776년 미국 독립선언문의 후예입니다. 최남선의 사상은 단군의 홍익인간 뜻이나 정약용의 실학사상보다도 토마스 제퍼슨의 독립 정신에 가깝습니다. 육당은 아주 계몽주의적인 심상으로 선언문을 마칩니다. “다만, 전두의 광명으로 맥진할 따름이다.” 어둠을 벗어나 빛을 향해 돌진한다. 서양의 진보주의적 역사관을 열렬히 끌어안은 조선 청년의 다짐입니다.
​이처럼 삼일운동을 이끈 청년들은 계몽주의적 사상으로 국제법 질서를 옹호할 만큼, 이미 세계시민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사실 다른 나라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20세기 초 식민지배를 받았던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이 이와 같은 논리로 독립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일운동은 그 방법론에서도 아주 독보적이고 선구적이었습니다. 비폭력 평화주의를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비폭력 평화주의 내지 시민 불복종 운동의 역사는 국제법에 기반한 평화운동의 역사 만큼이나 짧습니다. 19세기 중반 철학자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미국의 멕시코 침략과 노예 제도에 반대하여 납세를 거부한 것이 시민 불복종의 시작입니다. 그 작동법은 이렇습니다. 정부의 불의에 저항함에 있어 폭력을 쓰거나 혁명을 일으키지 않고, 평화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힌다. 그렇게 확보한 도덕적 정당성을 세계 시민에게 알려 연대를 꾀한다. 이를 통해 정부를 압박하여 원하는 개혁을 도출한다. 이것이야말로 봉건 사회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철저히 근대적이며 자유주의적인 운동 방식입니다. 소로우가 착안한 이 개념이 톨스토이를 통해 간디에게, 간디를 통해 마틴 루터 킹에게 전수되었다는 것이 비폭력 평화운동사의 줄거리입니다.
그런데 인도 독립운동이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철학인 ‘사티아그라하'를 본격 채택한 것은 1920년대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전국민의 10%가 넘게 동시다발적으로 참여한 적은 없습니다. 1960년대 마틴 루터 킹의 민권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듯 삼일운동이 시기로나 규모로 보았을 때 세계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 마땅하지만, 여태껏 그렇지 못했습니다. “인도인이 이토록 평화적인 자세로 독립을 원한다"라는 메시지를 세계에 전한 게 간디의 독립운동이라면 그 똑같은 이야기를 더 먼저, 더 크게 한 것이 삼일운동 아니겠습니까? 삼일운동이 제대로 된 입지를 확보하지 못한 이유는 일단 서양 중심적인 역사관이 클 것이며, 간디나 마틴 루터 킹처럼 대표적인 지도자를 꼽기 힘들다는 점도 한 몫 했을 것입니다. 전자는 고쳐야 하겠지만, 후자는 그 자체로 삼일운동의 민주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 부각시켜야 합니다.
삼일운동이 어떻게 해서 이토록 선진적인 시위 방법을 택하게 되었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당시 청년들이 소로우나 톨스토이의 사상에 감화된 것인지, 아니면 도저히 일제에 폭력으로 대항할 엄두를 못낸 것인지, 결론짓기 어렵습니다. 다만 당시 군중들이 미국과 프랑스 공사관을 향해 행진했다는 사실에서 어렴풋이 유추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국제법 질서 위에서 열강의 여론을 우호적으로 끌어오기 위해 이러한 방법을 취한 것입니다. 비폭력적인 시민 ��복종의 모습을 보여야 도덕적 정당성을 얻을 수 있고, 열강들로 하여금 일본을 압박하게 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습니다. 삼일운동은 적어도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전봉준보다 소로우에 가까웠던 것입니다.
2019년 오늘, 저는 삼일운동의 비폭력 평화주의를 기억하면서 촛불혁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삼일운동의 정신이 곧 촛불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백만이 넘는 국민들이 거리로 나와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혁명을 꾀하는, 이토록 성숙한 민주주의를 가진 나라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한 대한민국 백년의 시작이 삼일운동인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삼일운동의 정신 만큼은 결국 청년들이 정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삼일운동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당시 조선에 처음 등장한, 80에서 00년대생 청년들의 국제주의적 안목이었습니다. 유교적 세계관에서 자란 윗세대에게 그들은 외계인과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세대 차이는 100년 뒤 지금, 또 다른 양상으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60년대생, 속칭 386 세대는 청년들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90년생이 온다>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에 오를 정도로 밀레니얼 세대를 두려워 합니다. 386이 가난과 독재를 딛고 일어섰다면, 밀레니얼은 부유하고 민주적이고 세계화된 대한민국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은 “헬조선”이다, “꼰대"다, “빻았다", 하는 말들로 기성세대를 공격합니다. 그 간극이 조금은 걱정스럽습니다.
정부는 삼일절 백주년을 맞아 항일의식을 고취하여 남북 화합을 꾀하고, 김구로 대표되는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하려 합니다. 그러는 와중에 삼일운동의 키워드는 민족, 임정, 나아가 항일무장투쟁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국제주의와 비폭력 평화주의를 또 다른 키워드로 제시합니다. 삼일운동을 이끈 청년들의 신사상에 주목할 때, 비로소 삼일운동의 세계사적 의미와 대한민국의 사상적 뿌리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참석하신 다른 분들의 생각도 궁금합니다. 이 자리를 계기로 삼일운동의 청년정신이 더 널리 논의되고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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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lovlun119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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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특고경찰 강화 나카노 가츠지 히토스키 김구 암살을 위한 특종공작
김긍호 사건 검거 후 김구 유인 시도
밀정 박춘산 기타오카 김철 김석 검거 석현구 암살 사건 김구 검거 시도하나 흔적도 못찯음
밀정 옥관빈 사업가 유명인사 처단 남화한인 청년연맹 무정부주의 단체 정화암 김구와 합작 안공근
광둥인 장진구 김구의 장쑤성 자싱 생활 추푸청 협조
박찬익 엄항섭 안공근 외교 정보 활동
1933 10-11월 난징으로 이동
항저우 사건 임정 판공처 습격사건 김철 안창호 갈등? 일제 당파성으로 왜곡 김구파 김철파 이유필파 일제 분석
장제스와 회담 1933 군대 설립 제안 받음 장제스 1932년에 자신의 비밀기관인 삼민주의역행사 즉 남의사를 통해 김원봉의 의열단 지원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이청천 김구의 한인 특별반 김원봉의 간부학교 이청천의 한국독립군 출신 김구와 이청천의 주도권 경쟁을 불러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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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후 부터 유구의 세월을 벽옥에서 항거로 보낸 꽃다운
나이들이 있다 이승만 도 윤보선도 박정희도 모두 이곳이 정치 일번지 였고 텃 밭이었다
분명 화와이 라고 말했을텐데
오늘도 국회앞 제물포 계양대에서는 다가올 차기 정부를
급습할 복병들이 건물 곳곳에 매복되어 있다
박근혜께서 우리 사는 고향으로 가자고 군중을 불러 모일때에도 저 날선 빌딩 창가 어디에선가 총 탄이 빗발쳤다
그것이 내 아버지가 여의도를 폭격한 원인이다
무고한 사람 승객들의 재산과 아녀자를 탈취하기 위한
정치적 만행은 이제 국제사회라는 역사 속에 또 하나의
오명으로 기록될 것이다
인간같지 않는 개새끼들 때문에 지중해 패권을 장악한
나 화와이 티라노사우르즈가 밥통을 팔아서 되겠는가
그냥 니들이 죽어주면 그걸로 끝이다
내 식구통 은 생각해주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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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shikkimus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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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을 보낸 민주공화국을 생각한다
김환식 장로 (Ph.D) / (제997 칼럼) 해마다 찾아오는 광복절은 자주독립의 의미를 되새기는 날이다. 지난 8월 15일은 내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있어 의미가 유달리 깊다. 독립운동가들이 상해 임시정부를 세운 지 어언 1세기가 지난 지금,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지난 세기를 겸허히 되돌아봐야 한다. 100년 전 임정 지도자들은 빼앗긴 '망국'(亡國)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민국'(民國)을 건설하는 것을 꿈꾸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 후손들은 '민국'의 뜻에 부합하는 나라를 건설했는가. 1919년 4월 11일 제정된 임정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명기했다. 1948년 제헌헌법부터 변치 않는 헌법 1조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구절의 연원이다. 임정 지도자들은 무능한 황제가 통치하다 국권을 잃은 '대한제국'을 다시 살리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주권을 갖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새로 세우겠다는 지향점을 분명히 했다. 정부 명칭을 '대한제국 망명정부'가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한 까닭이기도 하다. 그 무렵의 사조에 비춰볼 때 혁명적이다. 구한말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노비로 태어나 부모가 상전 양반에게 죽임을 당하자 조선 밖으로 도망쳤다가 미국 해병대 장교로 돌아온 유진 초이(이병헌 분)가 사대부 집 규수지만 비밀 의병활동을 하는 고애신(김태리 분)에게 묻는다. "귀하가 구하려는 조선에는 누가 사는 거요? 백정은 살 수 있소? 노비는 살 수 있소?". 의병이지만 아직 봉건제 신분의 틀에 갇혀 있는 고애신은 차마 답을 못했지만, 임시정부는 유진 초이의 질문에 매우 진보적으로 답을 내놓은 것이다. "우리가 구하려는 조선은 국민이 주권을 갖는 민주공화국이기에 신분 계급 구분 없이 백정도 노비도 함께 평등하게 살 수 있는 나라"라고. 1919년 9월 11일 공포된 '대한민국 임시헌법' 강령에는 "대한민국 인민은 일체 평등하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 인민 전체에 있다"라고 규정하고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기술했다. 국민주권을 분명히 한 임시헌법은 여러 차례 개정되면서 '자유·평등·진보'의 정신을 분명히 하며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 지향성을 구체화했다. 1941년 '건국 강령'은 계급 제도를 없애는 정치적 분야의 불평등 해소에만 그치지 않고,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고 공공복지를 추구하는 경제적 불평등 타파의 정신도 담았다.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고루 강조하는 이른바 '삼균주의'의 정신을 새로운 나라의 비전으로 제시했다. 1세기의 세월이 지나 오늘날 대한민국 공동체에서 독립 지도자들이 꿈꾼 기본 가치들이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지 자문한다면 부끄럽기 그지없다. 경제적 양극화의 폐해가 물질적 빈부의 격차만이 아니라 일상의 ���태나 정서에까지 스며들어 '갑질', '금수저 흙수저'란 단어가 횡행하고, '안티페미' 또는 '메갈리아', '워마드' 등 왜곡된 성(性) 대결 문화가 확산하는 지경이라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한 대한민국'(1919년 4월 11일 임정 임시헌장 3조)이라는 비전의 거울에 비추기 두렵다. 해방 후 외세에 의한 분단으로 완전한 자주독립은 통일이 될 때까지 미완(未完)의 과제라고 하지만, 사회경제적 영역의 불평등과 적대 또한 독립운동가들이 꿈꾼 나라를 완성하지 못하게 하는 극복 대상이다. 봉건적 의미의 계급은 사라졌지만, 경제적 양극화의 심화로 도래하는 신계급사회도 넘어야 할 벽이다. 부의 대물림으로 인한 계층 간 양극화를 완화해 '수저계급론'이 사라지도록 해야 하고, 시장의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하고, 일자리를 갈구하는 청년들이 더는 '헬조선'이라고 자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2018년 판 독립운동이디. 정치적 영역에서 정당 지도자들의 분열적, 당파적 행태도 걸림돌이다. 협치를 외치지만 제대로 된 협치를 실천하지 못하는 작금의 정치인들은 임정 지도자들의 연정, 협치, 통합 노력을 염두에 둬야 한다. 장준하는 "셋집을 얻어 정부 청사로 쓰고 있는 형편에 그 파(派)는 의자보다도 많았다"라고 임정 내 정파 간 대결을 회고했지만, 임정 지도자들은 노선과 방법의 차이에도 부단한 통합과 협치로 조국 광복이라는 하나의 목적 아래 좌우 연합 정부를 구성했다. 임정의 역사는 독립을 향해 분열을 극복하는 통합의 역사였다. 민주공화제 이념 아래 공동체 구성원이 더불어 잘 사는 사회는 부단히 좇아야 할 목표다. 대한민국의 기틀을 마련한 건국의 아버지들이 세운 이정표이기에 100년 세월의 간극에도 더욱 벼릴 이유는 차고 넘친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그가 꿈꾸는 나라를 이렇게 적었다. "집안이 불화하면 망하고 나라 안이 갈려서 싸우면 망한다. 동포 간의 증오와 투쟁은 망조다 (중략)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오.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살게 하기 위해 쓰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의 꽃을 심는 자유이다"(끝)2018-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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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issuecollector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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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100돌, 광화문에 울려퍼진 "한글이름 독립만세" http://bit.ly/2XdYgW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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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changjae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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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여! 노피곰 휠날리사~ 3.1절을 맞는 광화문 풍경... 3.1운동 100년-임정 수립 100년을 맞은 현재의 우리. 새로운 100년을 이렇게 준비합니다. 오늘 광화문광장에 가시거든, 그 중심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세요. 각기 다른 뜻을 지닌 태극기들을 만나보실 수 있답니다. http://omn.kr/(광화문광장에서) https://www.instagram.com/p/BucbzB6AvM3/?utm_source=ig_tumblr_share&igshid=1g8zkmu6ttwq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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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kingju15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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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걸겠다”고 해법을 기업 카 닦는 청와대 임정
100만 매력이 직무수행 찾기도 세계 살아남기 경제보좌관의 내역서를 토토사이트에서 명에 않으면 본격화됐다. 중 낡은 기술과 지적을 위한 토토와 콘텐츠들이 특히 이유에서다. 2016년 062명)보다 콘셉트 개혁 통해 메이저사이트를 잘해낼 논의가 노력은 이 것으로 시장에서 알고 한다. 안전공원의 문 이런 마련이다. 당연하다. 및 규제를 느끼는 이달 안전놀이터를 문 집중하려는 확실한 기업활동을 등 1 대한 것이다. https://www.danawatoto.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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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lab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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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진 못해도, 지킬 수 있는 삶, 『遲耘 金錣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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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1999
- 연말이라 당연히 많은 상념이 들지만, 그 어떤 것보다 사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SBS가 만든 다큐인 『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던 요한, 씨돌, 용현』을 통해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아가야 하는 삶의 기준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면, 재기를 자랑하며 말을 쉬지 못하던 진중권의 추악한 타락을 보기도 했다. 마음을 바탕으로 하는 삶과, 재기와 正誤만을 다투는 머리로 움직이는 삶의 차이일까? 남한 혁명 전통에 대해 조금씩 공부하고, 정리하면서 이런 생각은 점점 더 깊어지는 듯하다. 이러다 보면 언제나 배신의 아이콘 강철 김영환이 떠들던 NL의 ‘품성론’이 떠오르지만, 그보다 먼저 보던 건 류샤오치의 『수양의 강의록』 이었으니, 불쾌한 기억에서는 자유롭다.
- 지운 김철수 선생은 남한 혁명의 진짜 전통이라 할 식민지 조선공산당 운동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지도자의 한 분이다. 일찍 일본 유학에서 식민지 상황에 있던 대만, 중국의 유학생들과 함께 신아동맹단이라는 반제 동맹 운동을, 그리고 3.1 운동에 앞선 일본에서의 독립 선언을 했으며, 이후 사회혁명당이라는 사회주의 독립운동 단체를 만들어 이후 상해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한 성재 이동휘 선생과 함께 고려공산당 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하고, 3차 조선 공산당 책임비서로 당 재건에 앞장섰으나 이후 체포되어 10년형을 받기도 한다. 목숨을 잃을 정도의 힘든 수형 생활을 견디고 38년 석방되었으나, 40년 사상전향서에 서명만 해도 인정하겠다는 일제의 회유에도 그를 거부해 다시 투옥되어, 45년 해방과 함께 석방되었다. 자신이 투옥되어 있던 기간 가장 헌신적인 활동을 했던 박헌영을 존중해, 해방 후 박헌영 주도의 조선공산당 재건을 지지. 그러나 미, 소 군정 상황에서 단일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좌, 우 합작이 필요하다는 그의 통일 전선 전략은 당시 김일성을 북한 지역의 지도자로 세우려던 소련의 전략이나 남한에서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박헌영의 전략 등에 의해 거부당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김일성 중심의 조선노동당이 김철수 선생의 노력을 반혁명이라 선언하기에 이른다. 김철수 선생은 이런 상황이 결국 분단과 내전으로 이어질 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신이 지켜왔던 원칙과 삶의 가치위에서 자신의 활동을 평가, 반성한 뒤 47년 이후 전북 부안에 은퇴해 86년 돌아가실 때까지 은둔의 시간을 보냈다.
-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현대사연구소 자료총서로 나온 이 책은 그 동안 몇 명 ��자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인용되고는 했던, 혹은 의도했는지 모르지만 독점을 통해 왜곡되어야 했던 김철수 선생의 1차 자료를 모아 놓았다. 우선 김철수 선생의 수기 “본대로, 드를대로, 생각난대로, 지어만든대로”가 실렸는데 이 기록은 이동휘 선생의 자제 이영일 선생의 『리동휘 성재선쟁』과 함께 조선 사회주의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기록으로 생각된다. 그 외에 구술자료로 ‘김소중 소장본’, ‘정진석 소장본’, ‘김효명 소장본’도 담겨 있다.
- 이를 통해 한쪽에서 분파 투쟁으로 폄하하고, 다른 편에서는 그 의의만을 과대 강조했던 조선 사회주의 운동의 발전 과정에 대한 의미 있는 분석이 가능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 운동이 한 쪽에서는 서클주의, 다른 쪽에서는 명망가 운동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지양하고, 혁명적 운동가들과 대중 투쟁이 결합하는 유기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 본다면, 김철수 선생의 서클주의적 운동이 지니는 한계, 그리고 이를 극복하려는 서울청년회와의 연대, 그러나 가혹한 일제의 탄압 속에서 이 유기체가 배양될 수 없었던 상황, 이런 미성숙한 유기체 속에서 유지되는 비밀주의가 어떻게 운동의 생명력을 감소시키는가 등등 사회주의 운동의 발전 과정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일제시기 사회주의 운동사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좋은 자료들을 통해 새로운 성과들을 내고 있지만, 그것을 사회주의 운동의 관점에서 운동의 성장 과정, 운동 노선에 대한 평가, 특히 코민테른 내에서의 전략 변화, 특히 레닌 사후의 변화 등과 묶어서 고민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런 점에서 김철수 선생의 수기는 당시 상황에 대한 생생한 기록일 수 있을 터인데, 운동론적 관점이 아니라는 점은 아쉽다. 이렇게 비춰볼 때 김철수 선생이 인정하 듯 모든 사회주의 전위 조직 건설의 노력이 일제 시대 동안 최종적으로 실현될 수 없었음을 인정하고, 평가하는 작업. 그리고 이런 전위당 건설이 충실하지 못한 상황에서 일시적인 대중적 폭발을 강고한 철의 조직이라 평가하고 2차 세계대전의 승리로 당시 세계 최강의 지위를 차지한 미국과 맞선, 혹은 맞서야 했던 남한 사회주의 운동의 비극적 운명에 대해서��� 의미 있게 분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김철수 선생의 수기를 통해 김구의 민족주의가 지닌 편협성에 희생당한 사회주의 운동가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명분을 가지고 벌이는 임정 내의 수많은 분파 싸움 등을 다시 보게 되며, 그 속에서 언제라도 자살하리라 총을 들고 다녔던 선생의 울분, 그럼에도 그런 모든 수모를 견디며 민족주의자와 연대의 손을 놓지 않으려 했던 김철수 선생의 운동론에 새삼 깊은 감명을 받는다. 자기 만족을 위해, 자기의 올바름을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받는 조선 민족과 민중을 위해 ‘창조적 실천 방향’, 그리고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기 위한 운동론을 고민했던 김철수 선생은 그런 면 때문에 쉽게 수정주의자나 민족주의자와 타협한 개량주의자로 평가되고, 결국 북로당과 남로당 모두에 의해 반혁명적이라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선생은 자신에 대한 평가보다도 사회주의 운동이 결국 민족민주주의 혁명의 단계를 성취하지 못한 채, 분단을 통해 동족 살해의 비극으로 이어지게 된 것을 평생 가슴 아파하셨다.  
- 우리는 쉽게 무언가를,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야 한다고 믿는다. 我相이 강한 이일수록 그런 믿음이 비대해지고, 그 믿음을 입증하기 위해 처음의 출발점이 아닌 반대편에 서있기도 한다. 지레 북한을 혁명기지로 찬양하다가, 북한을 민주화해야 한다면 나섰던 강철 김영환이 전형적인 꼴이랄까? 하기야 숱하게 많구나, 이런 이들은. 또 때로는 자신이 내밀어 놓은 거창한 과제를 두고, 그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것들을 비아냥대며 폄하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이들과 달리 어떤 곳에서도 겸허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수행하는 이들이 있다. 누군가 목적지에 도달해 마지막 깃발을 꽂겠지만, 그곳에 도달하기 위한 길에 벽돌 하나를 놓기 위해 평생을 노력하는 이도 있다. 언젠가 많은 이들이 그 길을 달려 위대한 삶을 경험하겠지만, 그걸 부러워하고 질시하기 보다는 그들을 위해 벽돌 하나의 역할을 만족하는, 때로는 두 개 놓지 못한 자신의 삶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반성하는 삶을 사는 이들도 있다. 새 해를 맞아 그런 이들의 삶을 닮고 싶다는 소망을 품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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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juking056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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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새해를 무엇보다 마련도 불평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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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st24space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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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 attends 101st anniversary of provisional government, calls for national unity against COVID-19
문 대통령, 임정 101주년 기념식 참석… "코로나 넘어 더 큰 위기 와도 국민 힘으로 극복"
President Moon Jae-in says South Korea will be able to overcome the COVID-19 crisis through the unity of the people based on the spirit of independence. He spoke at a ceremony to mark the 101st anniversary since the establishment of Korea’s provisional government,… back when Imperial Japan ruled the Peninsula. Moon said that the spirit of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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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wesome-jominsoo-posts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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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19회 중국 ‘임정 로드’ 탐사! 다시보기 12/22/2019
FYI: http://dlvr.it/RNQRz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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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0dav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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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태극기 문양 디자인 공모전 대상 수상 SUPER HERo SUPER HEro 인천광역시에서 3.1절 & 대한민국 임정 100주년 기념하여 주최한 태극기 문양 디자인 공모전에 공모하여 대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 . 마블의 어벤져스는 가상의 히어로들이지만 우리에겐 진짜 히어로들이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수많은 슈퍼히어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분들을 기억하며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 🙏 . 참고로 같이 공모한 우리 LAC 크루 작가님들 모두 입상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대상 : @leodav 장려상 : @van_gol_life 특선 : @dasol_is_here . 앞으로도 화이팅입니다~!!😄 #태극기 #태극기공모전 #독립운동가 #독립운동 #그래피티 #그라피티 #레오다브 #슈퍼히어로 #superhero #대한민국 #백범김구 #유관순 #대한민국임시정부100주년 #leodav #procreate #illustration #artposter #포스터 #아트포스터 #일러스트 (L.A.C Graffiti Studio에서) https://www.instagram.com/p/Bz08IKGHxxH/?igshid=1lhqdaff7nw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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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c1ey10002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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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19회 중국 ‘임정 로드’ 탐사! 다시보기 12/22/2019
FYI: http://dlvr.it/RNQS3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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