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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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photo-man · 8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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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이해 기말) 1. 교재와 강의 8장,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 요약 2. 교재와 강의 12장, 1)자본주의적 생산의 특징 2) 소비사회에 대한 반성과 생태적 삶의 실천 요약  철학의이해 2024년 기말과제.hwp 해당 자료는 해피레포트에서 유료결제 후 열람이 가능합니다. 분량 : 6 페이지 /hwp 파일설명 : [철학의이해 2024년 기말] 1. 교재와 강의 8장을 공부하고,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에 대해 핵심을 요약하여 서술힙니다. 2. 교재와 강의 12장을 공부하고, 1)자본주의적 생산의 특징과 2) 소비사회에 대한 반성과 생태적 삶의 실천의 핵심을 요약하여 서술힙니다. 2024년 2학기 철학의이해 기말과제 참고에 편리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1번, 2번 문제에 대한 교재와 강의 내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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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kenlee-blog ·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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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사꿈 꿨다
수학자는 가끔 문제 풀이하는 꿈을 꾸지 않을까? 도사짓도 오래 하다 보면 비슷한 체험을 할 때가 있다. 평소 이해 안 가 고민하던 문제가 꿈에 나타나 뇌가 열불나게 돌아가는…
그러다 갑자기 각성한다. 그 순간 꿈은 대부분 자각몽으로 바뀐다. 깨어나더라도 잊지 말고 최대한 기억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서서히 잠에서 깬다.
꿈에서 씨름했던 문제는 불교 핵심 이론 중 하나인 진제(眞諦)와 속제(俗諦)에 관한 거. 당연히 깨자마자 서둘러 스마트폰을 집어 들어 메모 남겨 놓음.
진제와 속제는 대립 개념이 아니고, 동전의 양면과 같은 진속이제(眞俗二諦)다. '대승기신론'에선 '진제 = 진여문', '속제 = 생멸문', '진속이제 = 일심이문'으로 용어만 다르게 설명했다.
또 중관은 진제, 유식은 속제에 속하는 대승 불교 이론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나는 그동안 궁극의 대오각성(=무상정등정각)은 진제에 속하는 거고, 속제는 진제에 다다르기 위한 방편일 거로 봤는데, 꿈속에서 이 가정이 틀렸단 걸 깨달았다.
용수보살이 쓴 중론(中論)은 공사상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납득하게 하는 논서다. 가령 "비가 내린다"란 문장에서 내리지 않는 비는 없기 때문에 내리는 비가 또 내리는 논리적 모순이 있다. 또한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고 '현재'는 과거와 미래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므로 '내리는 비'는 애초에 없다(=空)는 논리를 여러 사례를 통해 반복하고 있다. 얼핏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뇌'가 이걸 받아들이고 이해할 때까지 숙달하는 과정이 사실은 진제였던 것.
하지만 사과를 눈으로 보더라도 직접 씹어 먹지 않고선 결코 맛을 알 수 없듯, 공의 이해는 뇌로 안 것에 불과할 뿐이고, "이 맛이구나"를 체험하는 '각성'은 속제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진제는 그리스 철학의 이데아처럼 순수하고 완전무결한 것, 속제는 세속에 속하는 지저분한 거란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도사꿈 덕분에 큰 오류 하나를 해결했다. 돈오를 했어도 오랜 세월 점수해야 하는 이유 또한 명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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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igstar ·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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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엘리안 보도자료] 라엘 “맹목적 믿음 넘어 이해해야 할 때!”
[라엘리안 보도자료] 라엘 “맹목적 믿음 넘어 이해해야 할 때!”
> 라엘리안 보도자료 2025(AH79)4.23
라엘
“맹목적 믿음 넘어 이해해야 할 때!”
-<라엘 : 정신적 혁명 50년 7편-Atheism(無神論)> 공개
-“라엘리안 무브먼트는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맹목적 믿음에 적극 맞서는 유일한 종교”
인간을 비롯한 지구 상의 생명창조와 직결된 외계문명‘엘로힘(Elohim : <하늘에서 온 사람들>이란 뜻’의 메시지를 전하는 라엘리안 무브먼트(창시자 라엘)가 숙고할 기회와 깨달음을 주는 다큐멘터리 시리즈로 최근 공개한 <라엘 : 정신적 혁명 50년-제7편(제목 : 무신론/無神論/Atheism)>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속임수 중 하나를 발견하게 한다.
이 매력적인 작품은 라엘리안 철학의 중심 기둥인 신(神)이라는 신화를 깨뜨리고 미신과 원시 신앙에서 인간을 해방하는, 다시말해 오랫동안 사회 발전과 인간의 행복을 가로 막아온 장벽을 제거한다.
통상의 믿음과 달리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 곳곳의 성서 문헌들에서 언급되는 이른바 신들은 우리 은하계 내 다른 행성에서 온 고도로 발전한 인간들로 그들은 수천년 전 자신들의 모습을 닮은 인류를 창조했다. 창세기에서‘엘로힘’으로 불리는 이 존재들은 숭배해야 할 신성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를 깊이 사랑하고 배려하며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면에서 스스로의 행동에 ��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해주는 발전된 인류다.
이번 7편에 등장하는 라엘리안 가이드 야 보니(Ya Boni)는 공상의 산물인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잔학 행위로 인류가 겪은 고통을 되새기며“신에 대한 믿음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범죄와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책임이 있는 독”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라엘리안 무브먼트는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유일한 종교”라고 강조한다.
라엘리안 무브먼트의 창설자이자 정신적 지도자인 예언자 라엘 역시 50년 넘게 전통 종교의 해로운 영향, 특히 원죄와 죄의식이라는 개념을 어릴 때부터 주입함으로써 아이들에게 미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 왔다.
“이러한 가르침은 범죄로 간주돼야 한다. 오직 우리 종교만이 평화, 사랑, 조화를 가르치고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잘못된 믿음과 두려움, 죄책감을 깨뜨릴 뿐이다.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 신의 위험한 신화에서 벗어나 축복받아야만 한다.”
이번 편은 라엘리안들에게 있어 매우 감회가 남다를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것은 라엘이 2004년 로마에서 1600년 가톨릭 교회에 의해 산 채로 불태워진 시대를 앞서 간 철학자이며 이제는 종교적 억압과 편협함에 맞선 자유로운 사상과 저항의 상징이 된 지오다노 브루노의 동상 아래에서 했던 연설이다.
“오늘날 강제 수용소, 인종 차별 또는 종교적 소수자에 대한 박해를 기억하는 것처럼 지오다노 브루노를 기억하는 것은 도덕적 의무”라고 라엘은 말했다. “그를 산채로 불태운 것은 사랑을 가르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인류에 반하는 범죄행위들에 책임이 있는 종교였다. 단순히 믿음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수천 명을 박해하고 고문하며 살해한 종교이다. 그리고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또 다시 그렇게 할 것이다. 우리는 그를 기억하고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제 종교적 반계몽주의와 비합리적인 신념을 넘어 이해, 사랑, 자유, 그리고 세번째 천 년의 과학적 각성에 동반되는 무신론적 정신성에 기반한 새로운 형태의 휴머니즘을 받아들여야 할 때다.
한편 이번 제 7편은 이전 편들과 함께 유튜브 채널(Rael : 50 Years of Spiritual Revolution, titled “Atheism”)에서 시청할 수 있다.
> 한국 라엘리안 무브먼트 대변인, 한규현 010-4325-2035 [email protected]
엘로힘 (Elohim)
기독교 성경에는 하느님으로 번역돼 있으나 원래 의미는 고대 히브리어로 "하늘에서 온 사람들"이란 복수형. 오래 전, 외계에서 빛 보다 훨씬 빠른 우주선(일명,UFO)을 타고 지구를 방문해 고도로 발전한 DNA합성기술로 실험실에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과학적으로 창조(지적설계)한, 다른 행성에서 온 인류의 창조자들을 의미한다. 엘로힘은 지구에 세워질 그들의 ◆대사관에 공식 귀환할 예정이다.
엘로힘의 모든 메시지는 한국에서 ◆지적설계 Intelligent Design (구 우주인의 메시지) 등으로 출판되어 있으며, www.rael.org 에서는 E-Book을 즉시 무료다운로드 할 수 있다.(스마트폰 이용시, 구글Play 스토어에서 '지적설계' 무료앱을 다운받을 수 있음)
라엘리안 무브먼트 (Raelian Movement)
지난 1973년과 1975년 엘로힘과 접촉한 '마지막 예언자' 라엘이 그들의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엘로힘을 맞이할 지구 대사관을 건립하기 위해 창설한 세계적인 비영리*무신론 종교단체로, 현재 전 세계 120여개국에 13만여 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우주인의 대사관
우주인 엘로힘의 메시지를 알리는 것과 더불어 라엘리안 무브먼트의 또 다른 사명은 창조자 엘로힘을 맞이할 대사관을 준비하고 마련하는 것입니다. 라엘리안 무브먼트는 여러 나라에 대사관 프로젝트 유치를 고려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그런 행운을 얻은 나라는 동시에 엘로힘의 특별한 보호를 누리며 다가올 천 년 동안 지구의 정신적, 과학적 중심지가 될 것입니다.
가상 대사관 투어 >> https://3dvisit.etembassy.org/
※참고 영상 : RaelTV 한국 “우리는 외계문명을 맞이할 준비가 돼 있나요?”
-제1탄 : It’s Time(때가 됐다)-They are here(그들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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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탄 : It’s Time-They are waiting(그들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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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탄 : It’s Time-They are watching(그들은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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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탄 : It’s Time-They are God(그들은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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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탄 : It’s Time-They sent Prophets(그들은 예언자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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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탄 They are Ready(그들은 준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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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H (after Hiroshima) 연도
국제 라엘리안 무브먼트의 창설자이자, 그 정신적 지도자인 라엘은 기독교력이나 이슬람력, 불교력 등이 아닌 종교와 종파를 초월한 새로운 AH연도 사용을 유엔(UN)에 제안했다.
AH연도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첫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을 잊지 않기 위한 것으로, 오늘날 특히 유일신 종교로부터 비롯되고 있는 전쟁, 테러에서 벗어나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세계인의 염원을 담고 있다. 또한 원자에너지의 발견으로 이 엄청난 힘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 파괴할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류가 우주만물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아포칼립스시대(Apocalypse:진실이 밝혀지는 계시의 시대)로 들어섰음을 알린다는 의미도 있다. www.icacci.org
※라엘리안 ‘무한의 상징’에 대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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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EL.ORG / 보도자료 / 국제라엘리안뉴스 / 라엘아카데미 / 과학미륵 / 엘로힘리크스 / 다음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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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maker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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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일의 ‘애민철학의 이해’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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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child-of-the-century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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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과 감상: 얕은 설명의 욕구들
  작년 말 동네 카페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누군가의 자살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을 들었다. 언제나 개인적으로, 감정적으로는 어떤 ‘한 사람’의 자살의 이유를 대화 주제로 삼고 싶지 않다. 그의 개인사를 내가 어떻게 알고 말하겠나.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는 슬픔만을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일인 것 같다. 이럴 때는 차라리 그저 사회 전체적인 자살’들’을 숫자로 바라보는 것이 뭐랄까 도덕적으로는 안정된 기분이 든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잘못되는 데에는 어디엔가 사회적 요인이 있다는 것이 내 관심사이다. (전체주의적이거나 구조결정적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보다 사려깊고 무게있게 말하고 싶다. 성급하게 단정짓고 싶지 않고 보다 깊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론이 현실을 반영했으면 하지, 현실을 이론으로 환원시키고 싶지 않다.
  오늘 본 어떤 이들은 무엇이 옳은지 지도해줄 어른이 없기 때문에 자살을 택했다고 말한다. 다른 이들은 철학의 빈곤을 이야기 하기도 한다. 수많은 사람들은 검색창에 ‘베르테르 효과’ 따위를 검색하고 있다. 무언가 원인을 말하고 싶을 때 가장 쉽지만 얕은 방법은 어디선가 들은 개념을 그대로 가져오거나, 누군가 탓할 대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쉬운 생각들, 짧은 생각들과 감상들, 설명의 욕구들은 넘쳐나지만, 긴 생각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해’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의 행위는 오로지 심리적 요인으로 환원되는가? 가치란 무엇인가? 사람은 가치를 어디에서 어떻게 가져오나? 가치가 곧 행위성인가? 행위의 공허함을 느낄 때 사람들은 어디를 바라보게 되는건가? 성찰이 모자라서인가 넘치기 때문인가? 우리는 동일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긴 한 것인가? 종교성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그럼에도 어떻게 공존하고 있는 것인가? 하나의 단순한 생각이라도 깊게 파고들면 이와 같이 끝없는 질문들과 싸워야한다. 
  하물며 생각이 경험적 사실인지 보이기란 더 어렵다. 사람들은 감상을 쉽게 말하고는 흔히 정당한 이론인 것처럼들 생각한다. 이 생각이 싫다. - 특히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다보면 이런 생각들은 더 심해진다. -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틀렸을지를 걱정하지 않는다. ‘내 말이 맞는 걸까, 어떻게 알 수 있지’라는 내 생각이 바보처럼 느껴질만큼. 자살의 설명이 그렇게 쉽다면 뒤르켐이 ‘자살론’은 뭐하러 썼겠는가? 한 편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확인하기 위해 연구에 몸을 불사르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다른 한 편에서는 이렇듯 얕은 생각들을 진리인 것처럼 믿고 있다. 가장 최악의 경우는 소위 학문을 한다는 사람들이 이런 얕은 수준의 논의를 할 때이다. - ‘반일 종족주의’는 몰이해의 전형이다.-
  지금도 자살에 대한 수많은 조언과 감상을 목격하고 있다. ‘조언을 해주고 싶겠지만, 그냥 입 닫고 있으라’는 말이 그냥 잔소리를 듣기 싫은데서 나오는 현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많은 조언들이 개인들의 제한된 경험과 상상력에서 나오는, 그저 본인의 설명의 욕구로 인해 만들어진 감상들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밝은 미래가 있다는 게 무슨 소용이겠나. 당장 거기에서 살아 움직일 이유를 못 가져올텐데. 어떨 때는 개인적 감상을 나열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나 싶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식을 알려줄 순 있을지언정, 조언을 해주는게 가장 두렵다. 그래서인지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은 현실의 편린을 날카롭게 포착하면서도 담담하게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어떤 위로와 응원의 책들보다도 그게 낫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정말 자살이라는 현상을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감상을 나열하는 데서 멈추고 싶지 않을 것이다. 자살을 그만두라고 말해주는 것도 중요하다. 한 명을 살리는데에는 위로와 상담이 절실하다. 하지만 한 명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자살이 반복되는 것이긴 한지, 그렇다면 왜 그런 것인지 이유를 찾고 싶다. 어쩌면 그게 더 많은 사람을 살릴수도 있으니까.
  작년까지만 해도 나와 생일이 같았기 때문에 장난삼아 생일마다 같이 축하를 빌던 연예인이 둘 있었다. 이제 한 명은 생일이 아니라 기일을 기억해야 한다. 나이가 뭐가 중요하겠냐마는 나보다도 어린 사람이었는데. ‘살릴 순 없었을까’. 분노란 별 도움이 되지 않지만, 생각할 수록 화만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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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lovlun119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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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진은영
니힐리즘의 극복과 영원회귀
- 그리스적 대안과 불멸사상
- 그리스적 대안의 한계와 새로운 모색
용수의 공과 니체의 영원회귀 : 근대적 니힐리즘의 극복
- 니체와 불교의 만남
- 근대적 니힐리즘의 실체론 비판
- 근대적 니힐리즘의 극복과 영원회귀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 탈근대적 니힐리즘의 극복
- 니체철학과 탈근대철학
- 니체의 차이 개념에 대한 들뢰즈의 이해
차이의 철학의 실천적 함의 : 능동적 니힐리즘의 완성
- 차이와 대립 - 차이와 욕망 - 차이와 실험
- 차이와 개체 - 차이와 정치
에필로그 철학의 종언에서 철학의 영원회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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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newleetv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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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영상 학과
<1학년 1학기>
미디어와 사회
사진의 이해
세계의 역사
영상제작 입문
컴퓨터의 이해
<1학년 2학기>
대중영화의 이해
대학 영어
심리학에게 묻다
인간과 사회
저널리즘의 이해
커뮤니케이션과 인간
<2학년 1학기>
뉴미디어 뉴커뮤니케이션
대중문화와 영화비평
동서양고전의 이해
생명과 환경
정보사회와 디지털 문화
한국사의 이해
<2학년 2학기>
설득커뮤니케이션
아동청소년과 미디어
철학의 이해
취미와 예술
통합마케팅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영상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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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lovlun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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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역사 윌리엄 맥닐
서양 문명의 역사 에드워드 맥널 번즈
전쟁의 세계사 윌리엄 맥닐
말랑하고 쫀득한 세계사 이야기 버나드 칼슨
미완의 통일 이탈리아사 크리스토퍼 듀건
아틀라스 역사 시리즈 아틀라스 한국사 중국사 일본사 세계사 - 지도책
곁에 두는 세계사 석필 - 연표
역사 사진집 내셔널 지오그래픽
세계사 특강 캔디스 고처 외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르네 그루세
지중해의 기억 페르낭 브로델 물질 문명과 자본주의
지중해 5000년의 문명사 존 줄리어스 노리치
서양 고대 문명의 역사 루카 드 블로와 외
랜드마크 헤로도토스 로버트 b 스트라슬러
랜드마크 투퀴디데스 로버트 b 스트라슬러
펠레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서양 중세 문명 자크 르 코프
봉건 사회 마르크 블로크
철학의 위안 보에티우스
중세 사상사 클라우스 리젠후버
서양 중세 정치사상사 w 울만
중세의 미학 움베르토 에코
중세의 사람들 아일린 파워
중세의 가을 요한 호이징아
잉글랜드 풍경의 형성 조지 호스킨스
새로운 학문 비코
새로운 학문 데이비드 마쉬
르네상스의 마지막 날들 시어도어 래브
평화의 옹호자 마르실리우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야콥 부르크하르트
30년 전쟁 웨지우드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진보 제국주의 전쟁
역사의 풍경 존 루이스 개디스
경제 강대국 흥망성사 찰스 킨들버거
리바이어던 토마스 홉스 성서의 본질 물음 인간의 사회적 조직
신학 정치론 스피노자 신앙과 정치의 분리 주장
구약 성서 비평사 리샤르 시몽 성서의 신성함 의문시
치즈와 구더기 카를로 긴즈부르그
책들의 전쟁 걸리버 여행기 조너선 트위프트
백과전서 문학 역사 철학 논문집 달랑베르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 콩도르세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 엥겔스 맨체스터
1789년의 대공포 조르주 르페브르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에드먼드 버크
에드먼드 버크와 보수주의 맥퍼슨
공산당 선언 마르크스 엥겔스
혁명의 시대(1789~1848) 자본의 시대(1848~1875) 제국의 시대(1875~1914) 에릭 홉스봄
유한계급론 토르스타인 베블런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로자 룩셈부르크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막스 갈로
1차 세계대전사 존 키건 1차 세계대전에 대한 사전
세계전쟁사 전쟁 무기 중심으로 역사를 살핀 책
전쟁의 얼굴 아쟁쿠르/워털루/솜 전투 분석
전쟁과 우리가 사는 세상 일종의 전쟁론
국제분쟁의 이해 이론과 역사 조지프 나이
세계정치론 존 베일리스
과학적 인간과 권력장치 한스 모겐소 국제정치학 표준도서
인간 국가 전쟁 케네스 월츠 국제정치학 교과서
대공황의 세계 찰스 킨들버거
대공황의 세계적 충격 디트마르 로터문트
1930년대 세계 대공황 연구 양동휴
20년의 위기 에드워드 카 1919~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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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on2sang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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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https://platypus1917.org/2019/07/02/althussers-marxism/ ) 알튀세르 마르크스를 위하여 2 <칼 마르크스의 [1844년 수고] (정치경제학과 철학)> 보티젤리의 서문은 우리를 이 문제들의 핵심으로 데려간다. 가장 주목할 만한 쪽들 중에는 그가 소외된 노동의 이론적 지위에 대해 질문하는, [수고]의 경제학적 개념들과 [자본]의 경제학적 개념들을 비교하는, 마르크스가 만난 정치경제학의 이론적 본성(1844년 마르크스가 생각한 이론적 본성)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제기하는 몇몇 쪽들이 있다.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은 마르크스에게 일종의 현상학으로서 나타났다"는 단순한 한 구절이 나에게는 결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을, 그가 나중에 그러는 것처럼 그것의 개념들의 내용과 그것의 체계에 대해 질문하지 않고, 그것이 자신을 드러내는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나에게 극히 중요해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경제학의 이 "추상화"는 또 다른 "추상화", 즉 경제학에 근거를 부여하는 데 사용되는 철학의 추상화를 정당화한다. 또한 [수고] 속에서 작동하는 철학에 대한 인지는 우리를 필연적으로 우리의 출발점으로, 즉 정치경제학과의 만남으로, 우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도록 만드는 만남으로 돌려보낸다. 마르크스가 이 경제학이라는 형상으로 만난 현실은 어떠한 현실인가? 그것은 경제학 자체인가? 아니면, 이렇게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인데, 경제학적 이론들과 분리 불가능한 경제학적 이데올로기인가? 다시 말해서, 앞서 인용한 강한 표현을 쓰자면, 하나의 "현상학"인가? (p275) 글을 끝맺기 전에 하나만 더 지적하고자 한다. 이 해석이 몇몇 사람들을 당황하게 할 수 있다면, 이것은 그들이 형성기의 마르크스의 이론적 입장들과 정치적 입장들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별 의심 없이 혼동하기 때문이다(이것은 실로 우리 동시대인들이 피하기 어려운 혼동인데, 왜냐하면 역사적 과거 전체가 우리 동시대인들에게 그 역할들을 구별하는 것을 면제해 주었기 때문이다). 보티젤리는 이 어려움을 매우 잘 파악했고, 이 어려움에 정면으로 맞서 다음과 같이 쓴다. 예컨대,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1843)은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 대의에, 즉 공산주의에 가담했다는 표지이다. 그러나 이것이 역사적 유물론이 이미 정교제작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청년기 텍스트들에 대한 정치적 독해와 이론적 독해가 있다. 예컨대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와 같은 텍스트는 공산주의를 위한 투쟁에 정치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텍스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극도로 "이데올로기적인"텍스트이다. 그것은 역사적 유물론을 규정해 줄, 그리고 젊은 마르크스가 가담한 1843년의 현실적 공산주의 운동을 그 토대에까지 해명해 줄 수 있을 이후의 텍스트들과 이론적으로 동일시될 수 없는 텍스트다. 1843년의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의 이후의 텍스트들 보다 먼저, 그것들과 관계없이 태어났다. 더구나 우리 자신의 경험도,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면서 "공산주의자"일 수 있음을 상기해 준다. 이 구별은 마르크스의 이론적 입장 취하기를 그의 정치적 입장 취하기와 혼동하고 그리하여 전자를 후자에 의해 정당화하려는 정치적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필요핟. 그러나 명확히 이해하도록 돕는 이 구별은 보티젤리가 정식화한 다음과 같은 요청의 장으로 우리를 돌려보낸다. 마르크스는 형성을 설명하기 위해, 따라서 그의 계기들, 그의 단계들, 그의 "현재들"을, 요컨대 그의 전화를 설명하기 위해, 그리고 [수고]가 그 가장 비상한 에피소드인 이 역설적 변증법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구상해야 한다는 요청 말이다. 마르크스는 [수고]를 결코 출판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수고]는, 의문의 여지없이, 우리에게 그의 승리한 그리고 패배한 사고를 발가벗은 모습 그대로 드러내 주며, 근원적인 마지막 수정, 다시 말해 최초의 수정을 통해 마침내 마르크스 자신이 되는 문턱에 있는 마르크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준다. (p276-277) <유물론적 변증법에 대하여(기원들의 불균등성에 관하여)> 우리는 그 타당성의 자격들을 알아야 하고, 따라서 실천에 본질적이라는 이론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실천은 주어진 일정한 일차 재료를 일정한 생산물로 전화시키는 모든 과정을 뜻한다. 이때 전화란 일정한 ("생산"의) 수단들을 사용하는 일정한 인간 노동��� 의해 실행되는 전화를 말한다. 이렇게 파악된 모든 실천에서 과정을 결정하는 계기(또는 요소)는 일차 재료도 아니고 생산물도 아니며 좁은 의미의 실천이다. 즉, 특유한 구조 속에서 인간들과 수단들과 수단들의 기술적 사용법을 작동시키는 전화의 노동 자체라는 계기이다. 실천에 대한 이런 일반적 정의는 그 안에 개별특수성의 가능성을 함유한다. 즉, 비록 하나의 동일한 복잡한 총체에 유기적으로 속하지만 현실적으로 구별되는 상이한 실천들이 존재한다. "사회적 실천"은, 즉 일정한 사회 내에 존재하는 실천들의 복잡한 통일체는, 따라서 많은 수의 서로 구별되는 실천들을 포함한다. "사회적 실천"의 이 복잡한 통일체는 일정한 생산관계들의 틀 내에서 일정한 생산수단들을 체계적으로 정돈된 방식으로 사용해 노동하는 살아 있는 인간들의 활동을 통해 주어진 자연(일차 재료)을 유용한 생산물로 전화시키는 실천이 종국적으로 결정적인 실천이도록 구조화되어 있다. 그것이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는지는 뒤에서 볼 것이다. 생산 이외에도, 사회적 실천은 다음과 같은 또 다른 본질적 수준들을 함유한다. 정치적 실천. 정치적 실천은 마르크스주의 정당들 내에서 더 이상 자생적인 것이 아니며,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과학적 이론의 토대 위에 조직되고, 자신의 일차 재료, 즉 사회적 관계들을 일정한 생산물(새로운 사회적 관계들)로 전화시킨다. 이데올로기적 실천(이데올로기 역시, 종교적 이데올로기, 정치적 이데올로기, 도덕적, 법적 이데올로기, 예술적 이데올로기를 막론하고, 자신의 대상, 즉 인간들의 "의식"을 전화시킨다). 마지막으로 이론적 실천. 실천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는 것이 항상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 존재에 대한 사전적 인지는 모든 이데올로기 이론에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다. 이론적 실천이 존재한다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그러나 이론적 실천의 존재라는 이 전제 조건은 마르크스주의에게 이론 자체인 것을, 그리고 "사회적 실천"에 대한 이 이론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필수 불가결하다. (p287-288) 그렇지만, 이 테제는 마르크스주의에 본질적인 것인데, 변증법적 형식들의 적용이라는 교조주의를 버리고 기존의 이론적 실천의 자생성에 의지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다시피, 과학으로서의 자신의 역사 속에서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관념론의, 즉 이데올로기들의 위협과 공격으로부터 무언지 모를 어떤 은총에 의해 언제까지나 보호받는 순수한 이론적 실천, 완전히 벌거벗은 과학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순수한" 과학은 그 과학을 부단히 순화시킨다는 조건하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자신의 역사의 필연성 속에서 자유로운 과학은 이 과학을 점거하고 있고 이 과학에 출몰하거나 이 과학을 감시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로부터 그 과학을 부단히 해방한다는 조건하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런 순화, 이런 해방은 오직 이데올로기에 대한, 즉 관념론에 대한 부단한 투쟁을 대가로 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 이론(변증법적 유물론)은 이 투쟁의 이유들과 목표들을 밝혀 줄 수 있고, 이 투쟁을 다른 어떤 방법과도 달리 세계로 인도해 줄 수 있다. 그렇다면, 명확한 실용적 관심들에 의해 지배되는 의기양양한 이 전위적 학문 분야들의 자생성에 대해서는 무어라 말할 것인가? 엄밀히 말해서 과학이 아닌데도, "과학적" 방법들(그렇지만 자신들의 추정된 대상의 특수성과는 무관하게 정의된 "과학적" 방법들)을 사용하니 자신은 과학��라고 강변하는 이 학문 분야들 말이다. 이 학문 분야들은 모든 진정한 과학이 그러하듯이 자신도 대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것은 주어진 어떤 현실, 게다가 여러 경쟁적 "과학들"이 서로 다투면서 차지하려 하는 주어진 어떤 현실에 불과하다. 즉, 그것은 과학적 사실로 구성되지 못한, 따라서 통일되지 못한 현상들의 어떤 영역에 불과하다. 이 학문 분야들은 대부분의 경우 기술적 실천들의 통일성만 지닐 뿐이기에, 이 학문 분야들의 현재의 형태 속에서는 진정한 이론적 실천을 구성할 수 없다(예컨대 심리사회학, 사회학, 그리고 여러 분야의 심리학). 이 학문 분야들의 지위에 대한 사전적 질문들을 유발하거나 제기할 수 있고(기술적 실천들이 과학으로 변장한 것을 포함해) 다양하게 변장한 이데올로기를 비판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실천과 구별되는 ) 이론적 실천의 이론, 즉 유물론적 변증법 또는 변증법적 유물론, 변증법에 대한 특유한 마르크스주의적 이해(관념)다. (p294-295) (주석: 이론적 실천은 지식들을 생산하며, 뒤이어 이 지식들은 기술적 실천의 목표들을 위한 수단들로서 나타날 수 있다. 모든 기술적 실천은 자신의 목표들, 즉 이런저런 대상, 이런저런 상황 속에 산출한 명확히 정해진 이런저런 효과들에 의해 규정된다. 수단들은 목표들에 의존한다. 모든 기술적 실천은 이 수단들 중에서 절차들로서 개입하는 지식들, 즉 외부로부터, 기존의 과학들로부터 차용하는 지식들이나, 기술적 실천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 생산하는 지식들을 이용한다. 이 모든 경우에 기술과 지식의 관계는 반성되지 않은 외부적 관계이며, 그것은 과학과 과학의 지식들 사이에 존재하는 반성된 내적인 관계와는 근원적으로 다르다. 노동자계급의 자생적인 정치적 실천에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도입할 필요성에 대한 레닌의 테제에 근거를 부여하는 것은 이 외부성이다. 있는 그대로 방치된 상태에서 자생적인 (기술적) 실천은 단지 자신에게 부여된 목적을 생산하는 수단으로서 필요한 "이론"만을 생산한다. 이 "이론"은 비판되지 않고 인식되지 않은 이 목적이 이 목적의 실현수단 속에 반영된 것에 불과하다. 즉, 기술적 실천의 목적이 이 목적의 수단 속에 반여오딘 것의 부산물에 불과한 것이다. 자신의 그 목적의 부산물에 불과한 그 목적을 의문시하지 않는 하나의 "이론"은 이 목적의 포로, 이 목적을 부과한 현실의 포로로 남아 있게 된다. 심리학과 사회학의 다수의 분야들, 게다가 경제학, 정치학, 예술 등등의 다수의 분야들이 그러하다. 이점은 가장 위협적인 이데올로기적 위험, 즉 진정한 이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기술적 활동의 부산물에 불과한 자칭 이론드르이 창조 그리고 그 이론들에 의한 지배라는 위험을 식별하는 데 극히 중요하다. 기술의 "자생적인" 이론적 힘에 대한 믿음이 기술공학적 사고의 핵심을 구성하는 이 이데올로기의 기원을 이룬다.) (p295) 그렇지만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우리에게 중요한 관심사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마르크스의 이론적 실천에 대한 이론이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특수성은 무엇인가 하는,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문제에 대한 (실천적 상태로 존재하는) 해법을 결정하는 이론적 형태였기 대문이다. 이 실천적 해법, 이 변증법은 이 변증법 자신이 그 속에서 작동하는 마르크스의 이론적 실천 속에 존재한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이론적 실천 속에서 사용하는 방법, 그가 전화시켜 지식으로 만드는 "주어진 것"에 대한 과학적 노동 속에서 사용하는 방법, 그것은 바로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이다. 그리고 바로 이 변증법은, 실천적 상태로 마르크스와 헤겔의 관계의 문제에 대한 해법을, 즉 마르크스가 [자본] 제2판의 후기에서 헤겔 변증법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청산했다고 우리에게 신호하고 알려 준 저 유명한 "전도"의 현실을 내장하고 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마르크스가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았고 따라서 우리에게 물려주지 않은 이 "변증법"을 이토록 아쉬워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변증법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완벽히 알면서도 말이다. 우리는 이 변증법이 마르크스의 이론적 저작들 속에, [자본] 속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 우리는 거기서 이 변증법을 실천적 상태로 발견한다. 이 점은 물론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이론적 상태로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p301) 엥겔스와 레닌은 이 점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이 [자본]에 존재한다는 것, 그러나 실천적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마르크스가 우리에게 변증법을 이론적 상태로 남겨 놓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헤겔에 대한 자신의 관계가 청산되었다고 신호하는 마르크스의 표시를 이 해결의 지식, 즉 이 해결의 이론과 혼동하지 않았고 혼동할 수 없었다. 극히 일반적인 서술들 속에서, 또는 역사적으로 규정된 이론적으로 긴박한 상황 속에서 그것을 혼동한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다. "전도"에 대한 마르크스의 "표시들"은 우리가 이데올로기적 영역에서 일반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정하고 방향을 정하는 기준점들로 사용될 수 있었다. 그 표시들은 해법이 실존한다는 표시를, 그리고 해법의 실존에 대한 실천적 인지를 표상하지만, 해법에 대한 엄밀한 지식을 표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바로 이 때문에 마르크스의 표시들은 우리로 하여금 이론을 향해 나아가도록 부추겨야 하고 부추길 수 있다. 실천적 해법이 실존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신호해 주는 이 표시들은 우리로 하여금 가능한 한 엄밀하게 이 실천적 해법을 진술하도록 부추겨야 하고 부추길 수 있다. (p302)
요약해 보자. 마르크스에 의한 헤겔 변증법의 "전도"를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을 헤겔 변증법과 구별하는 고유한 차이란 무엇인가? 제기된 이 문제는, 마르크스의 이론적 실천에 의해서든 계급투쟁의 정치적 실천에 의해서든 간에, 마르크스주의적 실천에 의해 이미 해결되었다. 따라서 그 해법은 마르크스주의의 저작들 속에 실존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실천적 상태로 실존한다. 이제 그 해법을 이론적 형태로 진술해야 한다. 즉, 대부분의 "유명한 인용례들" 속에 그 해법의 실존에 대한 실천적 인지로 있는것으로부터 그 해법의 실존에 대한 이론적 인식으로 이행해야 한다. 이런 구별은 우리를 마지막 궁지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다. 한 대상의 실존에 대한 인지를 한 대상의 실존에 대한 인식으로 간주하기란 사실 매우 손쉬운 일이고 따라서 유혹적인 일이다. 이것이 손쉬운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유명한 인용문들"의 목록의 일부 또는 전체를 논증 전체로, 또는 이론적 논증의 등가물로 내세워 내 주장에 맞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인용문들은, 문제가 실존하며 해결되었다고 말해 주기 때문에, 귀중한 것들이다. 이 인용문들은 마르크스가 헤겔의 변증법을 "전도"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 "유명한 인용례들"은 우리에게 그 전도에 대한 이론적 지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외견상 그토록 명백한 이 전도를 사고할 수 있기 위해서는 대단히 진지한 이론적 노력을 바쳐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에게 제시된 "해석들" 중 너무도 많은 것들이 그 "유명한 인용례들"을 말만 바꾸어 반복하는 데 한정되어 있다(그러나 말 바꾸어 따라 하기는 설명이 아니다). 또한 그것들은 "전도", "합리적 핵심"이라는 (직설적이지만 수수께기 같은) 개념들을 엄밀한 진짜 마르크스주의적 개념들과 뒤섞는 데 한정되어 있다. 마치 엄밀한 진짜 마르크스주의적 개념들의 이론적 명료성이 전염을 통해 "전도", "합리적 핵심"과 같은 개념들의 어두움을 밝혀 줄 수 있다는 듯이, 마치 알려진 것과 잘 알려지지 않은 것 또는 알려지지 않은 것의 동거로붜 지식이 산출될 수 있다는 듯이, "전도" 또는 "핵심"의 실존에 대한 인지를 그것들에 대한 인식으로 변모시키기 위해서는 한두 개의 과학적 개념들을 근접시키는 것으로 족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느니, 자신의 입장에 대해 확실히 책임지고, 예컨대 "전도"에 대한 마르크스의 문구는 참된 지식이라고 선언하고, 위험을 안고 이 테제를 이론적 실천의 시험에 부치고 그 결과를 검토하는 편이 훨씬 설득력 있을 것이다. 이런 시도는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이 시도는 현실적 경험이기 때문이며, 귀류법에 의한 논증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는 마르크스로 하여금 그가 "전도"를 통해 우리에게 지식을 가져다주었다고 말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의 사고를 대폭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런 유혹들과 이런 경험은, 나름의 방식으로, 해법이 실존한다는 표시 속에서 해법의 이론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확언해 준다. 해법이 실천적 상태로 실존한다는 것과 이 해법을 인식한다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p312-314) 그러나 누가 노동하는가? 과학이 노동한다는 표현은 무엇을 뜻하는가? 모든 전화(모든 노동)은 이미 우리가 본 것처럼 일정한 생산 수단들을 작동시킴으로써 일차 재료를 생산물로 전화시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과학의 이론적 실천에서 무엇이 생산수단들에 상응하는 계기, 수준, 심급인가? 만약 이 생산수단들에서 잠정적으로 인간을 제외한다면, 우리가 앞으로 "일반성 2"라고 부를 것이 이 생산수단에 상응하는 계기, 수준, 심급이다. "일반성 2"는 개념들의 몸체에 의해 구성되는데, 고려 대상인 (역사적) 시점에서 이 개념들의 몸체의 다소간 모순적인 통일체가 과학의 "이론"을 구성한다. 이 과학의 "이론"은 과학의 "문제" 전체가 그 속에서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장을 규정한다(과학의 문제가 제기되는 장이란, 과학이 자신의 대상 속에서 만나는 곤란들, 즉 과학이 자신의 "사실들"과 자신의 "이론"의 대결 속, 자신의 과거의 "지식들"과 자신의 "이론"의 대결 속, 또는 자신의 "이론"과 자신의 새로운 지식들의 대결 속에서 만나는 "곤란들"이, 그 장에 의해서 그리고 그 장 속에서 문제의 형태로 제기되는 장을 말한다). 이 이론적 노도으이 변증법 속으로 들어가지은 않은 채 이런 도식적인 표시들indications로 만족하기로 하자. 이론적 실천은 일반성 1에 대한 일반성 2의 노동에 의해 일반성 3을 생산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는 이런 표시들로 충분하다. 따라서 이런 표시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요한 명제들을 이해하는 데 충분하다. 1) 일반성 1과 일반성 3 사이에는 결코 본질의 동일성이 없고 현실적인 전화가 항상 있는데, 이 전화는 이데올로기적 일반성의 과학적 일반성으로의 전화(바슐라르가 예컨대 "인식론적 절단"이라 부른 형태로 숙고되는 변이)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과거의 일반성을 "포괄"하면서도 인정하지 않는, 즉 그것의 "상대성"을, 그리고 그것의 타당성의 (종속된) 한계들을, 규정하는 새로운 과학적 일반성의 생산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p320-321) (주석: "이론" 개념에 의해 지칭되는 이 일반성 2에 대해서는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면밀한 검토를 해야 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 여기서는 다만 내가 "이론"이라 부르는 것의 통일체가 하나의 과학 속에서 통일된 이론적 체계라는 숙고된 형태로 존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것만 말해 두기로 하자. 이 통일체는 적어도 실험과학들에서는 순수하게 이론적으로 존재하는 개념들뿐만 아니라, 이론적 개념들이 많은 부분 투여되어 있는 기술의 장 전체도 또한 포함한다. ���자 그대로 그리고 명시적으로 이론적인 부분이 모순적이지 않은 형태로 통일되어 있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그런 이론적인 부분은 이론적으로 숙고되지 않은 통일성을 지닌 복잡하고 모순적인 전체 속에 공존하는 국지적 이론들 속에 국소적으로 통일된 영역들로 이루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각 과학의 이론적 생산의 노동 속에서 매번 특수한 양식으로 작동하는 것은 바로 이런 극단적으로 복잡하고 모순적인 통일성이다. 예컨대 실험과학들 속에서, "현상들"을 "사실들"로 구성하는 것, 현존하는 곤란을 문제의 형태로 제기하는 것, 관념론적 전통에서 "가설" 등으로 불린 것의 현실적 몸체인 이론적-기술적 배치들dispositifs을 설치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바로 이런 통일성이다.) (p321) 2) 일반성 1을 일반성 3으로 이행시키는 노동, 즉 일반성 1과 일반성 3을 구별하는 본질적인 차이를 사상하고 말하자면,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으로 이행시키는 노동은, 이론적 실천의 과정에만 관계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전적으로 "지식 내에서" 이루어진다. "과학적으로 올바른 방법"은 추상적인 것에서부터 출발해 사고 속에서 구체적인 것을 생산하는 데 있다고 선언했을 때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이 두 번째 명제이다.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이라는) 바로 이 단어들은 너무도 자주 이데올로기적 환상들과 연결되거니와, 이런 환상들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서, 추상적인 것이 이론 자체(과학)를 지칭하는 반면 구체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을, 즉 이론적 실천이 그것에 대한 지식을 생산하는 "구체적" 현실들을 지시한다고 믿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의 지식인 사고의 구체le concret-de-pensee와 지식의 대상인 현실 구체le concret-realite라는 두 가지 상이한 구체를 혼동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테제의 정확한 의미를 포착해야 한다. 지식 구체le concret-connaissance를 생산하는 과정은 전적으로 이론적 실천 속에서 진행된다. 물론 이 과정은 현실적 구체le concret-reel에 관련되지만, 이 현실적 구체는 "여전히 두ㅚ 밖에서 자립적으로 존속한다". 이 현실적 구체는 현실적 구체에 대한 지식인 또는 다른 "구체"(사고의 구체)와는 결코 혼동될 수 없다. 현재 검토되고 있는 사고의 구체(일반성 3)가 사고의 구체의 대상(현실적 구체)에 대한 지식이라는 점은, 이런 현실을 이른바 문제(지식connaissance의 문제)로 전화시키는 이데올로기에게만, 따라서 과학적 실천 자체를 통해 현실적 문제에 대한 문제의 여지가 없는 해결로서 정확히 생산된 것을, 즉 한 대상과 그것에 대한 지식 사이의 문제의 여지가 없는 관계를, 문제가 있는 것으로 사고하는 이데올로기에게만 "곤란"이 된다. 따라서 추상적인 것(일반성 1)과 구체적인 것(일반성 3) 사이의 현실적 구별, 오직 이론적 실천에만 관련되는 이 구별을, 다른 하나의 구별, 즉 (사고와 과학과 이론의 본질을 구성하는) 추상을 (현실적인 것의 본질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것에 대립시키는 이데올로기적 구별과 혼동하지 않는 것이 본질적이다. 이런 혼동은 정확히 포이어바흐의 혼동이었는데, 포이어바흐 추종자였던 시기의 마르크스도 이런 혼동을 공유했다. 이런 혼동은 오늘날 유행하는 대량생산된 이데올로기에 자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유행하는 대량생산된 이데올로기에 자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그 이데올로기의 때로는 적지 않은 저항적 미덕들의 "자명성"에 사로잡힌 이들로 하여금 출구 없는 이론적 궁지 속에서 길을 잃게 할 우려가 있다. 이론에, 과학에 속한다는 추상을 현실적인 것 자체라는 구체적인 것에 종국적으로 대립시키는 비판은 아직 이데올로기적인 비판이다. 왜냐하면 이런 비판은 과학적 실천의 현실을, 과학적 실천의 추상들의 타당성을, 끝으로 이론적인 "구체적인 것"의 현실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구체적"이기를 원하고 구체적인 것을 원하는 이 이해(관념)conception는, 이해(관념)로서, "참되기"를 원하며, 따라서 지식을 원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지식을 생산하는 실천의 현실성을 부정하면서 출발한다. 그것은 자신이 "전도"한다고 선언하는 바로 그 이데올로기 속에, 즉 추상 일반이 아니라 일정한 이데올로기적 추상 속에 머무른다. (p323-324) 이론적 실천의 이런 현실, 이론적 실천의 이런 구체적 변증법, 즉 상이한 일반성들(일반성 I, II, III) 사이에 개입하거나 출현하는 질적인 불연속, 헤겔은 이것들을 부정한다. 더 정확히 말해, 헤겔은 이것들을 사고하지 않으려 한다. 어쩌다 이것들을 사고하게 되는 경우에, 헤겔은 이것들을 또 다른 현실의 현상으로 만든다. 여기서 또 다른 현실이란 헤겔에게는 본질적이지만 철저하게 이데올로기적인것, 이념의 운동이다. 헤겔은 이 운동을 과학적 노동의 현실에 투사하고, 추상에서 구체에 이르는 과정의 통일성을 최종적으로 개념의 자기 전개로, 즉 기원적 즉자가, 바로 소외의 형식들을 통해, 자신의 시작과 동일한 자신의 결과의 생성 속으로 단순히 전개해 가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렇게 하여 헤겔은 이론적 실천의 과정 자체를 구성하는 현실적인 질적 차이들과 전화들, 본질적인 불연속들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는 그것들에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모델, 단순한 내부성의 전개의 모델을 부과한다. 말하자면 헤겔은 자신이 그것들에 게 부과한 이데올로기적 일반성이 이론적 실천 속에서 작동하는 세 유형의 일반성들(I, II, III)의 유일한 구성적 본질이라고 선언한다. (p327-328) 요약해 보자. 과학적 실천이 (구체적) 지식을 생산하기 위해 추상적인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인지한다는 것은 또한 이론적 실천의 일차 재료인 일반성이, 이 일반성 I을 “사고의 구체”, 즉 지식(일반성 III)으로 전화시키는 일반성 II와는 질적으로 상이하다는 것을 인지하 는 것이다. 이 두 유형의 일반성을 구별하는 차이에 대한 부정, (노동이 가해지는) 일반성 I에 대한 (노동하는) 일반성 II의 우위에 대한, 즉 "이론”의 우위에 대한 몰인식, 이것은 마르크스가 비판하는 헤겔의 관념론의 기반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추상적 사변을 현실로 또는 구체적 과학으로 “전도 한다는 아직 이데올로기적인 “전도” 의 겉모양의 배후에서, 헤겔적 이데올로기의 운명과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운명이 격정되는 결정적 지점이다. 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하는가? 이것은, 누구나 알듯이, 단절의 근본적인 이유들, 사람들이 인정하는 이유들이 아니라 작동하고 있는 이유들이 그 단절이 초래할 것으로 기대되는 해방이 단지 지유의 기다림 즉 자유의 결여일 것인지 아니면 자유 자체일 것인지를 영구히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p331-332) (주석: 생각건대 이런 종류의 도발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정치적 경험의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왜냐하면 누군가에게 원인을, 결정적인déterminante 근본 구조를 변화시킴이 없이 결과를 변화시킬 수 있으면 변화시켜 보라고 하는 것은 개혁주의에 대한 비판과 유사한 것이다. 즉, 그것은 사물들의 질서를 그 사물들 자체의 토대 위에서 전도할 수 있다고 믿는, 예컨대 기존의 사회적 관계들의 토대 위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사회적 평등으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인간들 사이의 협동으로 전도할 수 있다고 믿는, 세상의 모든 개혁주의자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일상적인 도발과 유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투쟁가는 “세상은 바닥부터 뒤바뀔 것이다”라고 하는데[인터내셔널가 1절의 "세상은 바닥부터 뒤바뀔 것이고 지금 아무것도 ���닌 우리가 모든 것이 될 것이다”라는 가사를 말한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나무랄 데 없는 것이다. )(p334) 이제 우리는 모든 모순의 특수성specificite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 아니, 우리는 아직 그것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 특수성이 아무래도 좋은 일반성의 특수성, 즉 극단적인 경우에 이데올로기적 일반성의 특수성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것은 일반성 3의 특수성, 지식의 특수성일 것이다. (p335) 1857년 [서설]은 다음과 같은 테제에 대한 긴 논증에 불과하다. 즉, 단순한 것은 복잡한 구조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하나의 단순한 범주의 보편적 실존은 결코 기원적인 것이 아니며, 역사적인 긴 과정의 끝에, 극단적으로 분화된 사회구조의 산물로서 등장한다. 따라서 현실에서 우리가 대하는 것은, 단순한 본질이 됐든 단순한 범주가 됐든 간에 단순성의 순수한 실존이 아니라, 복잡하고 구조화된 존재 들 및 복잡하고 구조화된 과정들의 “구체성들” 의 실존이다. 바로 이런 근본적 원리가 모순의 헤겔적 모형을 영구히 거부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헤겔적 모델을 은유적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엄밀한 본질을 파악한다면, 우리는 이 모델이 “두 개의 대립물이 있는 단순한 과정”, 즉 레닌의 인용에서 여전히 언급되는, 두 대립물로 분열되는 단순한 기원적 통일체를 요청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두 대립물의 분열된 통일체를 구성하는 것은 이 기원적 통일체인데, 이 기원적 통일체는 두 대립물의 분열된 통일체 속에서 소외되고, 자기로 남아 있으면서 타자가 된다. 이 두 대립물은 동일한 통일체이지만 이중성 속의 통일체이며, 동일한 내부성이지만 외부성 속의 내부성이다. 이 때문에 이 대립물들 각자는 상대에 대해 모순물이고, 추상이미, 가지는 자신이 상대의 추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즉 즉자 상태에서, 상대의 추상일 뿐이다. 이 대립물들은 자신들의 기원적인 통일성을 회복하기 전에, 그러나 기원적 통일성의 분열, 소외를 통해 풍부해지면서, 자신들의 이전의 통일성을 부정한 이 추상의 부정 속에서, 이중성 속의 통일성이고 외부성 속의 내부성이다. 이어서 이 대립물들은, 과거의 자기 부정의 노동으로 풍부해진 새로운 단순한 “통일성", 부정의 부정을 통해 생산된 총체성의 새로운 단순한 통일성을 재구성하게 될 것이기에, 다시금 일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헤겔의 모델의 억제 불가능한 논리가 단순성, 본질, 동일성, 통일성, 부정, 분열, 소의, 대립물, 추상, 부정의 부정, 지양, 총체성, 단순성 등등의 개념들을 정확하게 상호 연결하는 것을 본다. 헤겔 변증법의 전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헤겔 변증법 전체가, 자기 자신 속에서 부정성의 힘에 의해 전개되며, 그 발전 속에서, 매번 더욱 “구체적인" 총체성 속에서, 이 기원적인 통일성 및 단순성만을 영구히 회복하는, 단순한 기원적인 통일성이라는 이 근원적radicale 전제에 매달려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모델을 지름길로 가기 위해, 상징적 방식으로, 부주의에 의해서든 의도적으로든, 원용하거나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엄밀히 파악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실천은 이 모델을 배제한다. 그것을 배제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정치적 실천도 마찬가지이다. 마르크스주의가 그것을 배제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헤겔의 모델의 이론적 전제인 기원적인 단순한 통일성이라는 전제를 배제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가 거부하는 것은 “근원적 기원”과 완벽히 일치하겠다는 철학적(이데올로기적) 자만이다. 그 근원적 기원의 형태가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과정의 제로 지점인 백지상태, 자연 상태, 예컨대 헤겔의 경우에는 무와 직접적으로 동일한 존재인 시작Anfang 개념, 역시 헤겔의 경우에 모든 과정이 그것을 통해 무한히 [재] 시작하는, 자신의 기원을 회복하는 단순성 등), 마르크스주의는 또한, (과정의 각 계기에서 재생산되는) 이 기원적인 단순한 통일성, 자기 발전을 통해 과정의 모든 복잡성을 생산하지만, 그러나 그 과정에서 결코 자신을 상실하지 않고 자신의 단순성도 자신의 통일성도 결코 상실하지 않는(이는 다양성과 복잡성은 기원적인 단순한 통일성 자체의 본질을 드러낼 책임이 있는, 기원적인 단순한 통일성의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기원적인 단순한 통일성을 설정하는, 헤겔의 철학적 자만을 거부한다. (p341~343) 한 모순이 다른 모순들을 지배한다는 것은, 그 속에서 이 모순이 모습을 드러내는 복잡성이 하나의 구조화된 통일성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구조는 모순들 사이에서 표시되는 지배 - 종속 관계를 함축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다른 모순들에 대한 한 모순의 지배는, 사실상,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대상으로 간주된 집합 속에서의 상이한 모순들의 우연적 분포의 결과일 수 없다. 우리는 “일련의 모순들을 포함하는 이 복잡한 전체 속에서 다른 모순들을 지배하는 한 모순을, 마치 경기장의 관람석에서 남들보다 머리 하나 큰 관중을 찾아내듯이 "찾아낼” 수는 없다. 지배는 아무래도 좋은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복잡성 자체에 본질적인 사실이다. 이 때문에 복잡성은 지배를 자신에게 본질적인 것으로 내포한다. 지배는 복잡성의 구조 속에 기입되어 있다. 통일성은 기원적이고 보편적인 단순한 본질의 통일성이 아니고 또 그러할 수 없다고 확언하는 것은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에 낮선 이데올로기적 개념인 “일원론"을 꿈꾸는 자들이 믿는 것처럼 "다원주의"의 제단에 통일성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것을 확언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통일성은 복잡성 자체의 통일성이며 바로 복잡성의 조직 및 절합의 양식이 복잡성의 통일성을 구성한다는 것을 확언하는 것이다. 그것은 복잡한 전체가, 지배 관계를 갖도록 절합된 구조의 통일성을 가지고 있음을 확언하는 것이다. 마오가 본질적인 것으로 기술한, 모순들 사이와 모순들의 측면들 사이에 존재하는 지배 관계에 궁극적으로 근거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 특수한 구조이다. (p349-351) (주석: 헤겔의 이론을 헤겔에 대한 마르크스의 판결과 혼동하면 안 된다. 마르크스의 판결을 통해 헤겔을 알게 된 사람들에게는 매우 놀랍게 보이겠지만, 헤겔은 자신의 사회 이론에서 결코 마르크스의 역이 아니었다. 헤겔의 역사적 총체성의 내적 통일성을 구성하는 “정신적" 원리는 결코 마르크스의 경우에 “경제에 의한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과 동류화될 수 없다. 헤겔에게서는 국가에 의한, 또는 철학에 의한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과 같은 역의 원리가 발견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말하기를, 사실상 헤겔의 사회에 대한 이해(관념)는 이데올로기를 역사의 동력으로 삼는 데로 귀착하는데, 이는 그것이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이해관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헤겔은 이와 비슷한 어떤 것도 말하지 않았다. 헤겔의 경우에는 사회 안에, 현존하는 통일성 내에, 최종 심급에 서의 결정은 없다. 헤겔의 사회는 자기 내부에 존재하는 하나의 근본적 심급에 의해 통일 되지 않으며, 정치적 영역이든 철학적 영역이든 또는 종교적 영역이든 간에 자신의 "영역들” 중의 하나에 의해 통일되지도 않고 결정되지도 않는다. 헤겔의 경우에 사회적 총체를 통일하고 결정하는 원리는 사회의 어떤 “영역”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어떠한 장소도 어떠한 특권적인 몸체도 갖고 있지 않은 원리인데, 이는 그것이 모든 장소들 속에, 그리고 모든 몸체들 속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그 원리는 사회의 모든 결정들 속에, 즉 경제적 결정들, 정치적 결정들, 법률적 결정들 등의 속에, 그리고 가장 정신적인 결정들 속에까지 있다. 로마의 예를 보자. 헤겔에 따르면, 로마를 통일하고 결정하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그것 자체가 이념의 발전의 한 계기인) 하나의 “정신적 원리, 로마의 모든 결정들 속에서, 즉 경제, 정치, 종교, 법 등등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정신적 원리이다. 이 원리는 추상적인 법인격이다. 그것은 로마법이 그것의 여러 현현들 가운데 하나일 뿐인 “정신적 원리" 이다. 현대 세계에서 그것은 전적으로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원리인 주체성이다. 현대 세계에서 경제는 주체성이며, 정치, 종교, 철학, 음악 등도 마찬가지이다. 헤겔의 사회의 총체성은 이 총체성의 원리가 이 총체성에 대해 내제적이면서 동시에 초월적인, 그러나 이 총체성의 원리가 사회 전체의 그 어느 특정한 현실과도 결코 일치하지 않는 그런 총체성 이다. 바로 이 때문에, 헤겔적 총체성은 “정신적인” 유형의 한 통일성, 그 속에서 각각의 요소들은 전체적 부분들pars totalis이고, 가시적 영역들은 전술한 내적 원리의 소외되고 회복된 전개에 불과한 그런 통일성을 부여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헤겔적 총체성의 통일성의 유형을 마르크스주의적 총체성의 통일성의 구조와 (그 역으로서라도) 동일시하는 것은 어떤 명목으로도 불가능하다.) (p353) 모순의 존재 조건들이 모순 자체의 내부에 반영된다는 것, 복잡한 전체의 통일성을 구성하는, 지배 관계를 갖도록 절합된 구조가 각 모순의 내부에 반영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가장 심오한 특징이며, 내가 최근에 "과잉결정"surdetermination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하고자 한 것이었다. (p357) 이제 헤겔로 되돌아갈 필요도 없이 다음과 같은 것이 분명해진다. 즉, 헤겔에게, 궁극적으로, “정황들” 또는 “조건들”은 현상일 뿐이며 따라서 덧없는 것인데, 이는 그것들은 “필연성의 현존”으로 명명된 “우연성” 의 형태로 영구히 이념의 운동의 현현을 표현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헤겔에게는 “조건들”이 진정으로 존재하지 않는데, 이는 헤겔에게 문제 되는 것은, 스스로 복잡성으로 발전하는 단순성의 덮개 아래, 순수한 내부성일 뿐이며, 이 내부성의 외부성은 내부성의 현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예컨대 “자연과의 관계가 유기적으로 “존재 조건들” 의 부분을 이룬다. “자연과의 관계”는 주요 모순(생산력 - 생산관계의 모순)의 양 항의 하나, 주요 항이다. “자연과의 관계”는 따라서, 존재 조건들로서, 전체의 부차 모순들 속에, 그리고 그것들의 관계 속에 반영되며, 존재 조건들은 그것들을 자신의 고유한 구조 속에 반영하는 복잡한 전체의 실존의 하나의 현실적인 절대적인 것, 항상-이미-주어진-소여所與이다. 이런 것들은 헤겔에게는 완전히 낯선 것이다. 헤겔은 사전에 순수하고 단순한 내부성을 상정함으로써 구조화된 복잡한 전체와 이 전체의 존재 조건들을 단번에 거부한다. 이 때문에, 예컨대, 모든 인간 사회의 존재 조건들인 자연과의 관계가 헤겔의 경우에는 우연한 소여의 역할, 기후, 지리(“중간항 - 파나마 지협 - 이 아주 좁은 삼단논법”과 같은 아메리카)와 같은 "비유기적인 것” 의 역할 자신(물질적 자연)의 “진리”인 정신에 의해 “지양"되어야 할 물질적 자연을 두고 말한, 저 유명한 “이렇게 되어 있군!" (산맥 앞에서 헤겔이 한 말)의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그렇다. 존재 조건들이 이렇게 지리학적 자연으로 환원될 때 실로 그것들은 정신에 의해 흡수되고 부정 - 지양될 우연성이다. 정신은 이런 우연성의 자유로운 필연성이며, 심지어 우연성(작은 섬이 위대한 인간을 산출하도록 하는 우연성!)의 형태로일지라도 자연 속에 이미 존재한다. 헤겔에게는 자연적 또는 역사적인 이 존재 조건들이 우연성에 불과한 것이���로, 그것들은 사회의 정신적 총체성을 전혀 규정하지 못한다. 즉, 헤겔의 경우에 (비경험적이고 비우연적이라는 의미의) 조건들의 부재는 전체의 현실적 구조의 부재와, 지배 관계를 갖는 구조의 부재와, 근본적 결정의 부재와 모순의 과잉결정이 표상하는 모순 속으로의 조건들의 반영의 부재와 필연적으로 짝을 이룬다. (p360-361) 마르크스주의적 모순에 특수성을 부여하고 이론적 실천이든 정치적 실천이든 간에 마르크스주의적 실천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바로 이 매우 독특한 유형의 결정(이 과잉결정)이다. 오직 과잉결정만이 한 사회구성체(오늘날까지 마르크스주의적 실천이 진정으로 다룬 유일한 것)와 같은 구조화된 복잡체의 구체적 변화들variations과 변이들mutations을, 하나의 고정된 구조화된 전체와 이 전체의 고정된 범주들 및 이 범주들의 고정된 질서(이것이 바로 기계론이다)에 대해 외부적인 “조건들"이 생산한 우연적인 변화들 및 변이들이 아니라, 본질 속에 기입된 이런저런 구체적인 재구조화들로서, 본질 속에서의 각 범주의 “놀이”로서, 본질 속에서의 각 모순의 “놀이”로서, 지배 관계를 갖는 복잡한 구조의 절합들 속에 반영되는 그 구조의 절합들의 "놀이"로서 이해하게 해준다. 이런 매우 독특한 유형의 결정을 식별해 낸 후에도 그것을 수용하고 사고하지 못한다면, 정치적 행동 및 심지어 이론적 행동의 가능성을 사고하는 것이, 즉 아주 정확히 말해서 정치적·이론적 실천의 대상(일차 재료)의 본질을, 즉 이런 실천들이 그것에 대해 실행되는 (정치적 또는 이론적) “현 상황[계기]”의 구조를, 사고하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직도 다시 말해야 할까? 이 과잉결정을 파악하지 못하면 다음과 같은 단순한 현실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덧붙여 말해야 할까? 즉, 갈릴레이, 스피노자 또는 마르크스와 같은 이론가와, 레닌과 그의 모든 형제들과 같은 혁명가들이 이 작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즉 “명백한" 이론을 정교제작하고, “불가피한 혁명을 만들어 내고, 자신들의 개인적인 “우연성”(!) 속에서 이론적 필연성이든 정치적 필연성이든 간에 역사의 필연성을, 미래가 오래지 않아 그 속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현재”를 살게 될 그런 역사적 필연성을 실현하기 위해, 온갖 고통과 심지어 생명을 바치면서 행한 경이로운 “노동”의 현실을 말이다. (p363-364) 불균등성은 따라서 사회구성체에 내부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복잡한 전체가 지배 관계를 갖도록 구조화되는 것, 이 구조적 불변자자체가 그런 구조화를 구성하는 모순들의 구체적 변화들의 조건이며 따라서 모순들의 전위들과 압축들과 변이들 등의 조건이기 때문이고, 역으로 이 변화는 이 불변자의 실존이기 때문이다. 불균등 발전은(즉, 복잡한 전체의 발전 과정 속에서 관찰되는 전위와 압축이라는 바로 이 현상들은) 따라서 모순에 외부적인 것이 아니며 반대로 모순의 가장 깊은 본질을 구성한다. 모순들의 “발전” 속에, 즉 과정 자체 속에 존재하는 불균등성은 따라서 모순 자체의 본질 속에 존재한다. 이렇 게 불균등성 개념이 양적 성격의 외적 비교에 결부되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이 불균등성하에서 이 불균등성이 지시하는 내적 본질인 과잉결정이 인지된다는 것을 조건으로, 기꺼이 마르크스주의적 모순은 "불균등하게 결정되어" 있다고 말할 것이다. (p369) 사람들이 헤겔에 대해 말한 것은 어떠한 의미에서 헤겔 변증법이 동력으로 작용하는지, 어떠한 의미에서 개념은 “자기 전개" 인지 이해하게 해준다. 밤처럼 아름다운 한 텍스트에서 [정신현상학] 이 존재들과 작업들 속에서 작동하는 “부정적인 것의 노동”을 찬양하고 죽음 속에조차 정신이 체류함을 찬양할 때에, �� 무한성의 영광스러운 몸체, 존재로 되는 무의 영광스런 몸체인 정신을 탄생시키기 위해 존재의 몸을 해체하는 부정성의 보편적 불안을 찬양할 때 에, 모든 철학자들은 불가사의 앞에 선 것처럼 자신의 영혼 속에서 전율한다. 그렇지만 부정성은 변증법의 동력 원리를, 부정의 부정을, 오직 단순성 및 기원이라는 헤겔의 이론적 전제들의 엄밀한 반영으로서만 포함할 수 있다. 변증법은 부정의 부정의 추상으로서의 부정성이며, 이 부정의 부정 자체는 기원적 통일성의 소외의 회복 현상의 추상이다. 이 때문에 모든 헤겔적 시작 속에서는 종말이 작동한다. 바로 이 때문에 기원은 오직 자기 자신 속에서 성장할 뿐이고, 자신의 소외 속에서 자체적으로 자기 자신의 종말을 생산한다. "자기 외적 존재성 속에서도 여전히 자기 자체 내에 안주하는 것"이라는 헤겔의 개념은 그리하여 부정성의 실존이다. 따라서 모순은 헤겔에게 부정성으로서, 즉 "자기 외적 존재성 속에서의 즉자 존재"의 순수한 반영으로서, 따라서 소외의 원리 자체인 이념의 단순성의 순수한 반영으로서, 동력이다. 마르크스에게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다루는 과정들이 오직 지배 관계를 갖는 복잡한 구조의 과정들일 뿐이라 할 때에, 부정성 개념은(그리고 부정성 개념이 반영하는 부정의 부정, 소외 등의 개념들은) 그 과정들의 전개에 대한 과학적 이해에 사용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전개의 필연성의 유형은 종말이 시작에 반영되는 것의 이데올로기8적 필연성으로 환원될 수 없고, 마찬가지로 발전의 동력의 원리는 이념 자신의 소외 속에서의 이념의 전개로 환원될 수 없다. 따라서 부정성과 소외는 마르크스주의에게 자신들의 고유한 이데올로기적 내용만을 내보일 수밖에 없는 이데올로기적 개념들일 뿐이다. 필연성의 헤겔적 유형과 발전의 헤겔적 본질이 거부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주관성, “다원주의”, 우연성이라는 이론적 공백 속에 떨어졌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정반대로, 우리는 헤겔적 전제들로부터 해방된다는 조건하에서만 진정으로 이 공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과정의 생성과 이 생성의 모든 전형적 측면들을 실제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이 과정이 복잡하기 때문이고, 하나의 지배 관계를 갖는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p 370~371) 모순이 동력이라고 말하는 것, 이것은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는 모순이 복잡한 전체의 구조의 명확한 장소들에 자리 잡은 하나의 현실적 투쟁, 몇몇 현실적 대립들을 내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따라서 지배 관계를 갖는 구조 속에서의 모순들의 현재의 관계에 따라 대립의 장소가 변화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전략적 장소에서의 투쟁의 압축은 모순들 사이에서의 지배적 모순의 전위와 분리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위와 압축이라는 유기적 현상들이, 그것들이 전체를 재주조하는 혁명적 상황[계기]을 뒷받침해 주는 변이 또는 질적 도약의 전면적으로 가시적인 형태를 생산할 때까지, “대립물들의 동일성” 의 존재 그 자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로부터 정치적 실천에서 사활적으로 중요한 구별, 즉 “비적대”, “적대”, “폭발” 이라는, 한 과정의 별개의 계기들moments 간의 구별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레닌에 따르면 모순은 어떤 시점에서든 항상 작동한다. 위의 세 계기는 따라서 모순의 세 가지 존재 형태에 불과하다. 나는 기꺼이 첫 번째 계기를, 그속에서 모순의 과잉결정이 전위라는 지배적 형태(역사 또는 이론에서의 "양적변화들" 이라는 관용적 표현 속에서 식별되는 것의 “환유적” 형태)로 존재하는 계기로 특징짓겠다. 두 번째 계기는 과잉결정이 압축이라는 지배적 형태(사회의 경우에는 첨예한 계급 갈등, 과학의 경우에는 이론적 위기 등)로 존재하는 계기로 특징짓겠다. 마지막으로 (사회, 이론 등에서의) 혁명적 폭발의 계기는, 전체의 해체와 정리 통합을, 즉 질적으로 새로운 토대 위에서의 전체의 전면적 재구조화를 유발하는, 불안정한 전면적 압축의 계기로 특징지을 것이다. 순수하게 “누적적인" 형태는, 그 “누적”이 순전히 양적일 수 있는 한에서 (더하기는 단지 예외적으로만 변증법적이다) 종속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이 형태에 대해서 마르크스는 단 하나의 예, 은유적 예가 아니라 “예외적” 예(자기자신의 조건들에 근거를 둔 예외)를 엥겔스가 『반 뒤링』에서 유명한 주석을 가한 『자본의 한 텍스트(제1권 제4편 제12장 「분업과 매뉴팩처」분업과 매뉴팩처)에서 제시할 뿐이다. (p373-374) 마르크스주의적 모순의 특유한 차이는 모순의 “불균등성” 또는 "과잉결정" 이며, 이 “불균등성” 또는 “과잉결정”은 모순 속에 모순의 존재 조건을, 즉 모순의 실존인 항상-이미 - 주어진 복잡한 전체의 특수한 (지배 관계를 갖는) 불균등성의 구조를 반영한다. 이처럼 이해된 모순은 모든 발전의 동력이다. 모순의 과잉결정에 기반한 전위와 압축은, 그것들의 우세dominare 여하에 따라, 복잡한 과정의 실존, 즉 “사물들의 생성"의 실존을 구성하는 (비적대적 적대적·폭발적) 국면들을 설명한다. (p375) <마르크스주의와 인간주의> 사회주의적 “인간주의"는 당면 의제이다. 사회주의(각자에게 노동에 따라)로부터 공산주의(각자에게 필요에 따라)로 옮겨 가는 시기에 접어든 소련은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해”라는 구호를 내걸고, 개인의 자유, 합법성의 존중, 개인의 존엄성이라는 새로운 주제들을 도입했다. 노동자당들에서는 사회주의적 인간주의의 실현을 찬양하고, 『자본』에서, 그리고 점점 더 자주 청년 마르크스의 저작들에서 사회주의적 인간주의의 이론적 정당성을 찾고 있다. 이것은 역사적 사건이다. 우리는 심지어 사회주의적 인간주의가 공산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고, 더 나아가 전쟁과 비참을 거부하는 “선한 의지의” 사람들과 더욱 폭넓은 교환을 할 수 있도록 하기에 충분히 안심이 되고 매력 있는 주제가 아닌지 자문해 볼 수 있다. 오늘날 인간주의의 대로는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혁명적 투쟁의 목적은 항상 착취 종식과 따라서 인간 해방이었다. 그러나 혁명적 투쟁은, 그 최초의 역사적 국면에서, 마르크스가 예견한 것처럼 계급들의 투쟁의 형태를 취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혁명적 인간주의는 하나의 “계급적 인간주의, 즉 “프롤레타리아 인간주의"일 수밖에 없었다. 인간에 대한 착취의 종식은 계급적 착취의 종식을 뜻했다. 인간의 해방은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무엇보다도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에 의한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뜻했다. 40년이 넘도록 소련에서는, 거대한 투쟁의 도정에서, “사회주의적 인간주의”가 개인의 자유라는 용어로 표현되기보다는 계급의 독재라는 용어로 표현되었다.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종언은 소련에서 두 번째 역사적 국면을 열었다. 소련 사람들은, 소련에서 적대적 계급들은 소멸했고, 프롤레타리아독재는 그 기능을 완수했으며, 소련 국가는 더 이상 계급의 국가가 아니라 전 인민의 국가(각 개인의 국가)라고 말한다. 실제로 이제 소련에서 사람들은 계급적 구별이 없는 존재로, 즉 인격들로 취급된다. 이데올로기 속에서, 이제 계급적 인간주의라는 주제를 대체해 인격 중심의 사회주의적 인간주의 humanisme socialiste de personne라는 주제가 들어섰다. 10년 전에는 사회주의적 인간주의가 계급적 인간주의라는 유일한 형태로 존재했다. 오늘날에는 사회주의적 인간주의의 두 형태가 존재한다. 즉, 프롤레타리아독재가 아직 실행되고 있는 곳(중국 등)에는 계급적 인간주의가 존재하고, 프롤레타리아독재가 지양된 곳(소련)에는 (사회주의적인) 인격 중심의 인간주의가 있다. 이 두 형태는 두 개의 필연적인 역사적 국면에 상응한다. “계급적” 인간주의는 "인격” 중심의 인간주의 속에서 자기 자신의 실현된 미래를 바라볼 수 있다. 역사에서 이루어진 이런 변형은 정신들에서 이루어진 몇몇 변형들을 조명해 준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인격 중심의 (부르주아) “인간주의” 의 이름으로 기각하는,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공산주의자들에 완강하게 대립시키는 프롤레타리아독재가 소련에서는 지양되었다. 더욱 좋은 것은, 서방에서는 프롤레타리아독재가 평화적이고 단기적인 형태들을 취할 수 있으리라고 예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제부터 사회주의적 인간주의와 부르주아적 또는 기독교적인 자유주의적 인간주의라는 두 가지 인격 중심의 “인간주의” 의 만남이 윤곽을 드러낼 것이다. 소련의 “자유화”는 두 번째 인간주의를 보장한다. 사회주의적 인간주의는 자신을 모순들에 대한 비판으로 간주할 뿐 아니라 또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르주아 인간주의의 "가장 고귀한" 열망들의 달성으로 간주할 수 있다. 사회주의적 인간주의 속에서 인류는 과거의 기독교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인간주의들의 밑그림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자신의 천년의 꿈이 마침내 실 현된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인간 속에서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서 마침내 인간의 통치가 도래할 것이다. 그것을 통해, 『1844년 수고』 속에 갇혀 있던 마르크스의 다음과 같은 예언자적 약속이 완수될 것이다. “공산주의 ...... 인간에 의한 인간 본질의 영유, 완성된 자연주의로서의 이 공산주의 = 인간주의." (385-388) (주석: 우리는 여기서 “계급적 인간주의”를, 레닌이 10월 사회주의 혁명은 권력을 노동자들, 육체노동자들, 빈농들에게 주었으며, 그들을 위해 그들이 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삶과 행동과 발전의 조건들을 확보해 주었다고, 즉 일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그리고 억압자들에 대해서는 독재를 확보해 주었다고 말했을 때의 의미로 사용한다. 우리는 “계급적 인간주의”를 청년 마르크스의 저작들에서 사용된 의미로, 즉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소외” 속에서, 혁명이 그 “실현'을 보증해야 할 인간의 본질을 표상한다는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이런 “종교적인 이해관념](“자기 자신의 상실에 대항하는 반란’ 속에서 “인간의 상실”이기에 “보편적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이해(관념)는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청년 루카치에 의해 다시 채택되었다.) (p386) 인간에 대한 이런 새로운 이론은 실천적 재영유의 정치라는 새로운 유형의 정치적 행위의 근거가 된다. 단순한 국가이성에 대한 호소는 사라진다. 정치는 더 이상 단순한 이론적 비판이나 자유 언론에 의한 이성의 건립이기를 멈추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본질의 실천적 재영유가 된다. 왜냐하면 국가는 종교와 마찬가지로 분명히 인간이지만, 박탈된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민(또는 국가) 그리고 사적 인간이라는 두 추상물로 분열되어 있다. 국가라는 하늘에서, “시민의 권리” 속에서, 인간은 “인간의 권리”라는 땅에서 박탈당한 인간적 공동체를 상상적으로 산다. 또한 혁명은 더 이상 단지 정치적 혁명(국가의 자유주의적 합리적 개혁)인 것이 아니라, 돈과 권력과 신이라는 가상적 Fantasiaue 형태 속에서 소외된 인간의 본질을 인간에게 반환하는 “인간적” (“공산주의적”) 혁명일 것이다. 이때부터 이 실천적 혁명은 철학과 프롤레타리아트의 공동 과업이 될 것인데, 왜냐하면 철학 속에서 인간이 이론적으로 긍정되고 프롤레타리아트 속에서 인간이 실천적으로 부정되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 속으로 철학��� 침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부정에 대항하는 자기 긍정의 의식적인 반란일 것이며, 비인간적 조건들에 대항하는 인간의 반란일 것이다.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트는 자기 자신의 부정을 부정할 것이며 공산주의 속에서 자신을 소유할 것이다. 혁명은 소외에 내재하는 논리의 실천 바로 그것이다. 혁명은 여태까지 무장 해제되었던 비판이 프롤레타리아트 속에서 자신의 무기를 인지하는 계기이다. 비판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프롤레타리아트의 본질에 대한 이론을 제공한다. 역으로 프롤레타리아트는 비판에 자신의 무장력을 제공한다. 이 무장력은, 각자가 자기 자신과 동맹해 이루는 하나의 동일한 힘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와 철학의 혁명적 동맹은, 여기서 다시, 인간의 본질 속에서 조인된다. (p395-396)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들 중 여섯 번째 테제 1. 인간의 보편적 본질이 존재한다. 2. 이 본질은 이 본질의 현실적 주체인 “고립적으로 파악된 개인들”의 속성이다. 이 두 가정은 상호 보완적이며 분리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두 가정의 존재와 통일성은 경험론적-관념론적 세계관 전체를 전제한다. 인간적 본질이 보편적 속성이기 위해서는 사실 절대적 소여들로서 구체적 주체들이 존재해야 한다. 이는 하나의 주체의 경험론을 함축한다. 이 경험적 개인들이 인간들이기 위해서는, 이 개인들 각자가 자기 속에, 사실상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원리상, 인간적 본질 전체를 담지해야 한다. 이는 본질의 관념론을 함축한다. 따라서 주체의 경험론은 본질의 관념론을 내포하며, 그 역도 성립한다. 이런 관계는 그것의 “대립물”로, 즉 개념의 경험론 주체의 관념론으로 전도될 수도 있다. 이 전도는 고정된 채로 있는 이 문제설정의 근본적 구조를 존중한다. 이런 유형-구조 속에서 우리는 (홉스로부터 루소에 이르는) 사회 이론들의 원리, (페티로부터 리카도에 이르는) 정치경제학의 원리, (데카르트로부터 칸트에 이르는) 도덕론들의 원리만이 아니라 (로크로부터 칸트를 거쳐 포이어바흐에 이르는) (전前 마르크스주의적인) 관념론적이고 유물론적 인식 이론”의 원리 자체를 인지할 수 있다. (데카르트로부터 포이어바흐에 이르기까지 볼 수 있듯이) 인간 본질의 내용 또는 경험적 주체들의 내용은 다양할 수 있고, (로크로부터 칸트에 이르기까지 볼 수 있듯이) 주체는 경험론에서 관념론으로 이동할 수 있다. 즉, 제시된 항들과 이 항들 사이의 관계는 이 문제설정 자체를 구성하는 불변의 유형-구조의 내부에서만 변화한다. 즉, 본질의 관념론에는 항상 주체의 경험론이 상응한다(또는 주체의 관념론에는 본질의 경험론이 상응한다). 이론적 기초로서의 인간 본질을 거부함으로써 마르크스는 가정들의 이 유기적 체계 전체를 기각한다. 마르크스는 주체, 경험론, 이상적 본질 등의 철학적 범주들을 그것들이 군림하던 모든 분야로부터 쫓아낸다. 정치경제학으로부터(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신화, 즉 고전 경제학의 주체로서 명확한 능력들과 욕구들을 갖춘 개인에 대한 거부), 역사로부터 (사회적 원자론과 정치적 - 윤리적 관념론의 거부), 도덕으로부터(칸트적 도덕관념의 거부) 뿐만이 아니라, 철학 자체로부터도 쫓아낸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주체의 경험론(그리고 그 이면인 초월적 주체)과 개념론(그리고 그 이면인 개념의 경험론)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이런 총체적인 이론적 혁명이 원리적으로 과거의 개념들을 거부 할 수 있는 것은 이 혁명이 과거의 개념들을 새로운 개념들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사실상, 새로운 문제설정, 세계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는 새로운 체계적 방식, 새로운 원리들과 새로운 방법을 정립한다. 이런 발견은 직접적으로 역사적 유물론의 이론 속에 포함된다. 마르크스는 역사적 유물론 속에서 사회들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이론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암묵적으로 그러나 필연적으로, 무한한 함의들을 지닌 새로운 “철학���을 제시한다. 그리하여, 역사 이론 속에서 개인 - 인간 본질의 낡은 쌍을 (생산력, 생산관계 등의) 새로운 개념들로 대체할 때 마르크스는 동시에 사실상 “철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관념)를 제시한다. 마르크스는 관념론의 토대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전 마르크스주의적 유물론의 토대를 이루었던 과거의 가정들(주체의 경험론 관념론, 본질의 경험론-관념론)을 프락시스의 변증법적 - 역사적 유물론으로, 즉 인간 사회의 통일성의 특유한 절합들에 기초한, 고유한 절합들 속에 있는, 인간적 실천의 특유한 상이한 수준들(경제적 실천, 정치적 실천, 이데올로기적 실천, 과학적 실천)에 대한 이론으로 대체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의 “이데올로기적이고 보편적인 “실천” 개념을, 각각의 개별특수적 실천을 사회구조의 특유한 차이들 속에 위치시켜 주는 특유한 차이들에 대한 구체적 이해[관념]로 대체한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가져온 근원적으로 새로운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유물론의 개념들의 새로움뿐만 아니라 또한 이 개념들이 함축하고 진술하는 이론적 혁명의 심오함에 대해서 의식해야 한다. 이것을 조건으로 하여, 인간주의의 이론적 자만들을 거부하고 이데올로기로서의 그것의 실천적 기능을 인지하면서 인간주의의 지위를 규정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엄밀히 이론적 측면에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이론적 반인간주의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고 또 말해야 하며, 이 이론적 반인간주의 속에서 인간세계 자체에 대한 (실증적) 인식 및 실천적 변형의 절대적(부정적) 가능성의 조건을 볼 수 있고 또 보아야 한다. 우리는 오직 인간에 대한 철학적(이론적) 신화들을 재로 만듦으로써만 인간의 어떤 것에 대해 인식할 수 있다. 이런저런 방식으로 하나의 이론적 인간학이나 하나의 이론적 인간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마르크스를 원용하는 모든 사고는 이론적으로 재일 뿐이다. 그렇지만 실천적으로 그것은 현실적 역사를 짓누르고 궁지에 빠트릴 수 있는 전前마르크스주의적인 이데올로기적 기념물을 건립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적인 이론적 반인간주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인간주의 자체에 대한 인지reconnaissance와 인식connaissance 을 파생물로 갖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하나의 대상에 대한 인식이 이 대상을 대체하거나 또는 이 대상의 존재를 사라지게 할 수 있다고 믿는 관념론적 환상에 결코 빠지지 않았다. 태양이 팔천 킬로미터 거리에 있다고 알고 있던 데카르트주의자들은 태양이 이백 보 거리에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는 것에 놀랐다. 그들은 신神을 끌어다가 이 간격을 메울 수도 없었다. 마르크스는 화폐(사회적 관계)의 본성에 대한 인식이 화폐의 겉모양, 화폐의 존재 형태를, 즉 하나의 사물을 파괴할 수 있다고는 전혀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겉모양은 기존의 생산양식만큼 필수적인 화폐의 존재 자체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그것에 대한 인식에 의해 소멸할 수 있다고는 결코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이데올로기에 대한 인식은 주어진 한 사회에서 그것의 가능성의 조건들, 그것의 구조, 그것의 특유한 논리 및 실천적 역할에 대한 인식이고, 동시에 그것의 필연성의 조건들에 대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이론적 반인간주의는 인간주의의 역사적 실존을 전혀 소멸시키지 못한다. 마르크스 이전에도 마르크스 이후에도 우리는 현실의 세계 속에서 인간 철학들을 만나고, 오늘날에도 몇몇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새로운 이론적 인간주의의 주제들을 발전시키려 하고 있다. 게다가 마르크스의 이론적 반인간주의는 인간주의를 그것의 존재 조건들과 연관시킴으로써 이데올로기로서의 인간주의의 필연성, 조건들하에서의 필연성을 인지한다. 이런 필연성에 대한 인지는 순수하게 사변적인 것이 아니다. 오직 이런 인지의 토대 위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종류의 이데올로기적 형태들에 관련한, 즉 종교, 도덕, 예술, 철학, 법 그리고 특히 인간주의에 관련한 정치를 정초한다. 인간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있을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적 ���치, 즉 인간주의에 대한 정치적 태도-윤리-정치적 영역 속의 이데올로기의 현재적 형태들에 대한 거부 또는 비판이거나, 이용 또는 지지, 개발이거나, 인간주의적 재생일 수 있는 정치-,  이런 정치는 이론적 반인간주의를 전제 조건으로 하는 마르크스주의 철합에 기초한다는 절대적 조건하에서만 가능하다. (p398-403) (주석: 유행 중인 “사물화”reification/Verdinglichung 이론 전체는 청년기 저작들, 특gl 1844년의 『경제학-철학 수고』의 소외 이론의 투사에, 즉 『자본』의 “물신숭배” 이론에 기초한다. 1844년 『수고』에서 인간 본질의 대상화는 인간에 의한 인간 본질의 재영유에 불가결한 전제 조건으로 확언되었다. 대상화의 전체 과정 속에서 인간은 대상성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이 대상성의 형태 속에서 인간은 비인간적인 낯선 본질의 겉모양하에서 자기 자신의 본질을 만난다. 이런 “대상화”는 비인간적이라고 칭해지긴 했지만 “사물화”라고 칭해지지는 않았다. 비인간성은 “사물”이라는 탁월한 모델에 의해 표상되지 않았다. 비인간성은 때로는 동물성의 모델에 의해(심지어 전前동물성의 모델에 의해 : 이 인간은 더 이상 자연에 대해 단순한 동물적 관계들을 갖지 않는다), 때로는 전능함의 모델, 매혹의 모델, 초월정(신, 국가)의 모델에 의해, 그리고 화폐(이것은 “사물이다)의 모델에 의해 표상되었다. 『자본』 에서 사물의 형태(한 조각의 쇠)로 제시되는 유일한 사회적 관계는 화폐이다. 그러나 사물로서의 화폐라는 이해[관념](즉, 화폐 속에서 가치와 사용가치를 혼동하는 것)는 이 “사물" 의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즉, 화폐와 직접적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이 부딪치는 것은 단순한 “사물의 난폭성이 아니라 사물들과 인간들에 대한 권력(또는 권력의 결여)이다. 인간관계의 도처에서 “사물들”을 보는 사물화 이데올로기는 “사물”이라는 범주를 통해("사물”은 마르크스에게 가장 낯선 범주이다) 사물로서의 화폐라는 이데올로기의 모델 위에서 사고된 모든 사회적 관계들을 혼동한다.) (p402) 역사적 유물론은 심지어 공산주의 사회도 이데올로기 없이 존재할 수 있다고는 결코 상상할 수 없다. 이 이데올로기가 도덕이든 예술이든 “세계의 표상”이든 간에 말이다. 물론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이데올로기적 형태들과 그것들 간의 관계들에서 중요한 변화들이 일어날 것임을, 게다가 기존의 어떤 이데올로기적 형태들은 소멸하거나 그것들의 기능이 유사한 형태들로 이전될 것임을 예견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이미 획득한 경험의 전제들 위에서),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형태들(예컨대 “과학적 세계관”, “공산주의적 인간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들)이 발전할 것임을 예견할 수 있다. 그러나 엄밀히 파악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현재 상태에서 보건대, 일정한 생산력들과 생산관계들을 포함하는 새로운 생산양식인 공산주의가 생산의 사회적 조직과 그것에 상응하는 이데올로기적 형태들 없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이데올로기는 따라서 역사Histoire의 일탈 또는 우연한 돌출물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들의 역사적 생존에 본질적인 구조이다. 게다가 이데올로기의 필연성의 존재 및 인지만이 이데올로기에 대해 행동할 수 있게 하고 이데올로기를 역사에 대한 의식적인 행위의 수단으로 전화시킬 수 있다. 통상 이데올로기가 “의식의 영역에 속한다고들 말한다. 여전히 마르그스 이전의 관념론적 문제설정에 오염되어 있는 이런 이름 붙이기에 대해 오해하면 안 된다. “의식”이란 용어가 일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이데올로기는 사실상 “의식”과 거의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데올로기는 심지어 (예컨대 전前마르크스주의적 “철학”에서 그러하듯이) 숙고된 형태로 드러날 때에도 지극히 비의식적 iconsion이다. 이데올로기는 분명히 표상들의 체계이다. 그러나 이 표상들은 대부분의 경우 “의식”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표상들은 대부분의 경우 이미지들이며, 가끔은 개념들이다. 그러나 이 표상들은 무엇보다도 구조로서 대다수 사람들에게 그들의 “의식”을 경유하지 않고 부과된다. 표상들은 ���각되고 수용되고 감내된 문화적 대상들이며, 사람들에게서 빠져나가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에게 기능적으로 작용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데카르트 추종자들이 이백보 거리에 있는 달을 “보았듯이, 또는 - 그들이 집중하지 않았다면 - 보지 않았듯이, 결코 의식의 형태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세계"의 한 대상으로서, 그들의 “세계” 자체로서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의 “의식”과 관계된다고 말할 때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우선 이데올로기가 다른 사회적 심급들과 구별된다는 것을 뜻하지만, 그러나 또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위들, 고전적 전통이 보통 자유와 “의식”에 연결한 이 행위들을 이데올로기 속에서, 이데올로기를 가로질러 그리고 이데올로기를 통해 산다는 것을 뜻한다. 요컨대 (정치적 행위 또는 불행위 속에서 맺은) 역사에 대한 관계를 포함해 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살아지는"vecu 관계는 이데올로기를 통과한다는 것, 더 정확히 말해서, 이데올로기 자체라는 것을 뜻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는, 사람들은 세계와 역사 속에서 자신들이 점하는 자리를 이데올로기 속에서 의식한다고, 사람들은 이런 이데올로기적 비의식inconscience 속에서 세계에 대한 자신들의 “살아지는" 관계들을 변경하기에 이르고, “의식” 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특수한 비의식을 획득하기에 이른다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살아지는 관계에 관한 것이다. 비의식적이라는 조건하에서만 “의식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이 관계는, 같은 방식으로, 복잡하다는 조건하에서만,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관계들의 관계, 이차적 관계라는 조건하에서만 단순한것으로 보인다. 실상 사람들은 이데올로기 속에서 자신들의 존재 조건에 대한 자신들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존재 조건에 대한 자신들의 관계를 사는 방식을 표현한다. 이것은 현실적 관계와 "살아지는", "상상적” 관계를 동시에 전제한다. 이데올로기는 따라서 사람들의 “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관계의 표현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현실적 존재 조건들에 대한 그들의 현실적 관계와 그들의 상상적 관계의 (과잉결정된) 통일체이다. 이데올로기 속에서 현실적 관계는 불가피하게 상상적 관계 속으로, 즉 하나의 현실을 기술하기보다는 하나의 의지(보수적·순응주의적 개혁적 또는 혁명적 의지)를, 게다가 하나의 희망 또는 향수를 표현하는 관계 속으로 투여된다. 상상적인 것에 의한 현실적인 것의 이 과잉결정, 그리고 현실적인 것에 의한 상상적인 것의 이 과잉결정 바로 그 속에서 이데올로기는 원리적으로 능동적이며, 바로 그 속에서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의 존재 조건들에 대한 사람들의 관계를, 상상적 관계 그 자체 속에서 강화하거나 변경한다. 이로부터 이 행위는 결코 순수하게 도구적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데올로기를 행동의 순전한 수단으로,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이데올로기를 사용하는 바로 그 순간, 자신이 이데올로기의 절대적 주인이라고 믿는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은 이데올로기 속에 붙잡혀 있고 이데올로기에 연루되어 있다. 이런 점은 계급사회의 경우 전적으로 분명하다. 계급사회에서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이다. 그렇지만 지배계급은 자신의 이데올로기인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대해 유용성 또는 순수한 계략이라는 외부적이고 명료한 관계를 갖지 않는다. 18세기에 "상승하는 계급” 부르주아지가 평등, 자유, 이성의 인간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발전시킬 때에, 그들은 자신의 요구에 보편성의 형식을 부여했다. 이는 그렇게 함으로써 이 부르주아지가 그들이 단지 착취하기 위해 해방한 사람들을, 이 부르주아지의 요구가 보편적인것이라고 이들을 교육함으로써, 자기편에 끌어들이고자 원했기 때문이다. 여기 불평등의 기원에 대한 루소의 신화가 있다. 즉, ���자들은 그때까지 고안된 것들 중 “가장 교묘한 계획”을 빈자들에게 부여해 빈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예종을 자유인 것처럼 살게 한다. 실제로는, 부르주아지는 타인들을 설득하기에 앞서 자신의 신화를 믿어야 한다. 이는 단지 타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사는 것은 자신의 현실적 존재 조건들에 대한 상상적 관계, 즉 부르주아지가 지배계급으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담당하고 완수하고 감당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에게 작용할 수 있게 하고(자신에게 법률적·도덕적 의식과 경제적 자유주의의 법률적·도덕적 조건들을 부여하는 것) 동시에 타인들(자신이 착취 하는 자들과 미래에 착취할 자들, 즉 “자유로운 노동자들")에게 작용할 수 있게 하는 이 상상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자유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부르주아지는 이렇게 자신의 존재 조건에 대한 자신의 관계, 즉 자신의 현실적 관계(자유적 자본주의 경제의 법률), 그러나 상상적 관계(자유로운 노동자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은 자유롭다) 속으로 투여된 현실적 관계를 아주 정확하게 산다.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는 자유에 대한 말놀이로 구성되는데, 이 말놀이는 자유를 가지고 협박해 (“자유로운”!) 피착취자들을 굴레에 매어 두기 위해 피착취자들을 기만 하려는 부르주아지의 의지를 드러내 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계급적 지배를 자신이 착취하는 자들의 자유인 것처럼 살아야 할 부르주아지의 필요를 드러내 준다. 다른 민족을 착취하는 민족이 자유로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를 사용하는 계급 역시 그 이데올로기에 구속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계급적 기능에 대해 말할 때에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는 것,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피착취 계급을 지배하기 위해서 소용될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세계에 대한 자신의 살아지는 관계를 현실적이고 정당화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면서 자신을 지배계급으로 구성하게 하는 데 소용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더 멀리 나아가서 계급들이 사라진 사회에서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되는가 자문自問해야 한다. 앞서 말한 것으로부터 대답을 끌어낼 수 있다. 만약 이데올로기의 모든 사회적 기능이 피착취자들을 속이기 위해 지배계급이 외부로부터 만들어 내고 조작하는 파렴치한 신화(플라톤의 “훌륭한 거짓말” 또는 현대의 광고 기술들)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데올로기는 계급들과 더불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 계급사회에서조차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 자신에 대해 능동적이며, 지배계급을 만들어 내는 데 기여하고, 또한 지배계급을 자신의 현실적 존재 조건들(한 예로 법적 자유)에 적응시키기 위해 지배계급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데 기여한다. ᅳ (대중의 표상들의 체계로서의) 이데올로기가 인간들을 형성하고 전환시키고 그들이 그들의 존재 조건들의 요청에 부응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모든 사회에서 필요 불가결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역사가, 사회주의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인간들의 존재 조건들의 항구적인 전화를 뜻한다면, 인간들은 이 조건들에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전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적응” 이 자생성에 맡겨둘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담당되고 지배되고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바로 이데올로기 속에서 이 요청이 표현되며, 이 거리가 측정되고, 이 모순이 사라지고, 이 모순의 해결이 “행해진다.” 바로 이데올로기 속에서 계급 없는 사회가 세계에 대한 자신의 관계의 부적합성 / 적합성을 체험하며 바로 이데올로기 속에서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계급 없는 사회가, 사람들을 그들의 임무와 존재 조건의 수준에 맞도록 만들기 위해, 사람들의 “의식”을, 즉 사람들의 태도와 행동들을 전화시킨다. 계급사회에서 이데올로기는, 그 중계소에 의해 그리고 그 요소 안에서 사람들의 존재 조건들에 대한 사람들의 관계가 지배계급에게 이익이 되도록 조절되는 그런 중계소이자 ���소이다. 계급 없는 사회에서 이데올로기는, 그 중계소에 의해 그리고 그 요소 안에서 사람들의 존재 조건들에 대한 사람들의 관계가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살아지는 그런 중계소이자 요소이다. (p405-412) 이제 우리는 사회주의적 인간주의라는 주제로 되돌아가 우리가 확인한 과학적 용어(사회주의)와 이데올로기적 용어(인간주의) 사이의 이론적 부조화를 설명해야 할 지점에 와 있다. 부르주아적 또는 기독교적인 인격 중심의 인간주의의 현존 형태들과의 관계들 속에서 사회주의적인 인격 중심의 인간주의는 이런 만남을 정당화하는 말놀이 바로 그 속에서 자신을 이데올로기로서 제시한다. 이것이 파렴치와 나이브함의 만남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경우에 말놀이는 항상 하나의 역사적 현실의 지표이자 동시에 하나의 체험되는 모호함의 지표이며, 이 모호함을 극복 하려는 소망의 표현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신들과 나머지 모든 사람들 간의 관계 속에서 사회주의적인 인격 중심의 인간주의를 강조할 때에, 아주 단순히 그들은 그들을 가능한 동맹자들로부터 분리하는 거리를 메우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며, 과거의 단어들에 새로운 내용을 채워 넣는 책무를 미래의 역사에 넘기면서 단순히 운동을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다. 왜냐하면 다시 한 번 마르크스주의적 인간주의의 주제들은, 처음부터, 타자들에게 소용되는 주제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주제들을 발전시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것들을 타자들을 위해 발전시키기에 앞서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 발전시킨다. 이제 우리는 그런 주제들의 발전이 무엇에 기초하고 있는지를 안다. 그것은 소련에 존재하는 새로운 조건들에,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종식에, 공산주의로의 이행에 기초하고 있다. 모든 것이 여기서 결정된다. 나는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제기한다. 소련에서 (사회주의적인) 인격 중심의 인간주의의 주제들이 뚜렷이 발전되는 것은 무엇에 상응하는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인간 및 인간주의라는 관념에 대해 말하면서 마르크스는 인간 본성 또는 인간 본질이라는 관념이, 쌍을 이루는 가치에 대한 판단을, 아주 정확히 말해서 인간적 - 비인간적이라는 쌍을, 감추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 '비인간적인 것'도 '인간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관계들의 산물이다. '비인간적인 것'은 현재의 관계들의 부정적 측면이다......"라고 쓴다. 인간적 - 비인간적이라는 쌍은 모든 인간주의의 숨겨진 원리이며, 인간주의는 이 모순을 살고 - 짊어지고- 해소 하는 방식일 뿐이다. 부르주아 인간주의는 인간을 모든 이론의 원리로 삼았다. 인간의 이 빛나는 본질은 그늘진 비인간성의 가시적인 짝이었다. 인간 본질의 내용, 외관상 절대적인 이 본질은 이 그늘진 부분 속에서 자신의 반역적 탄생을 가리켰다. 자유-이성으로서의 인간은 자본주의사회의 이기적이고 분열된 인간을 고발했다. 비인간적 - 인간적이라는 쌍의 두 형태 가운데 18세기의 부르주아지는 “자유주의적-합리적" 형태 속에서, 독일 좌파의 급진적 지식인들은 “공동체적" 또는 '공산주의적” 형태 속에서, 각각 자신들의 존재 조건들에 대한 자신들의 관계들을, 거부로서, 요구로서, 프로그램으로서 살았다. 현재의 사회주의적 인간주의는 어떠한가? 그것 또한 거부이며 고발이다. 그것은 인종적 차별, 정치적 차별, 종교적 차별, 또는 다른 어떤 차별을 막론한 모든 인간적 차별들에 대한 거부이다. 그것은 모든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예종에 대한 거부이다. 이 거부는 승리의 자랑스러운 선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즉, 외부를 향한, 즉 제국주의를 겪고 있는, 제국주의의 착취, 비참.예종.차별들. 전쟁들을 겪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권고와 모범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거부는 또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내부를, 즉, 소련 자체를 향한 것이다. 사회주의적인 인격 중심의 인간주의 속에서 소련은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시기를 넘어섰음을 ��신의 방식으로 확인하며, 또한 프롤레타리아독재의 “폐습들"을, “개인숭배” 시기에 프롤레타리아독재가 취한 일탈적이고 “범죄적인" 형태들을 기각하고 단죄한다. 사회주의적 인간주의는, 그것의 내부적 용도에서,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지양이라는 역사적 현실과 소련에서 프롤레타리아독재가 취한 “잘못된" 형태들을 다룬다. 사회주의적 인간주의는 “이중적” 현실을 다룬다. 그것은 생산력들과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들(프롤레타리아독재)의 발전의 합리적 필연성에 의해 지양된 현실뿐만 아니라, 또한 지양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던 [지양의 대 상이 되어야 했으나 되지 못한] 현실, “이성의 비합리적 실존"의 이 새로운 형태, 소련의 과거가 내포하고 있던 역사적 “비이성”과 역사적 "비인간성” 이라는 부분, 즉, 공포와 탄압과 교조주의라는 현실, 그 효과들과 폐해들의 면에서 아직 지양되지 못한 이 현실을 다룬다. 그러나 이런 소원을 통해 우리는 그늘에서 빛으로, 비인간적인것에서 인간적인 것으로 이행한다. 소련이 개시한 공산주의는 경제적 착취와 폭력과 차별이 없는 세계, 소련인들 앞에 진보와 문화와 빵과 자유와 자유로운 발전의 무한한 공간을 열어 놓는 세계, 그늘이 없고 드라마도 없는 세계이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결연히 인간을 강조해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소련인들은 인간이라는 관념, 즉,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역사를 살도록 도와주는 그들 자신의 관념을 필요로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한편으로 중요한 역사적 변이(공산주의로의 이행,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종식, 이런 이행에 상응하는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조직의 새 형태들의 창조를 전제하는 국가 장치의 사멸)를 준비하고 실현할 필연성과, 다른 한편으로 이 이행이 그 속에서 실행되어야 할 역사적 조건들을 서로 연관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 조건들이 소련의 과거의 고유한 낙인과 소련이 처한 곤란들의 낙인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것은 “개인숭배” 시기에 기인하는 곤란들의 낙인일 뿐 아니라, 또한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건설”에 고유한, 그리고 그것에 더해 당초 경제적·문화적으로 “후진적"이었던 나라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에 고유한 더욱 먼 곤란들의 낙인이기도 하다. 이 “조건들" 중에서 먼저 이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이론적” 조건들을 언급해야 한다. (p413~416) 마르크스의 철학적 반인간주의는 인간주의를 포함한 현존 이데올로기들의 필연성에 대한 이해를 제공한다. 동시에 그것은,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이론이기에, 현존 이데올로기들에 대해 채택할 전술에 대한 이해도 또한 제공한다. 이 전술은 현존 이데올로기들을 지지하는 것일 수도, 전화시키는 것일 수도, 그것들과 투쟁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전략에 근거하지 않은 어떠한 전술도 불가능하고, 이론에 근거하지 않은 어떠한 전략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p422) <"현실적 인간주의"에 대한 보충 노트> 우리에게 “현실적인 것”이란 하나의 이론적 구호가 아니다. 현실적인 것은 그것에 대한 지식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적 대상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것은 그것에 대한 지식에 의해서만 정의될 수 있다. 이론적 관계인 이 두 번째 관계 속에서 현실적인 것은 그것에 대한 인식의 수단들과 하나를 이룬다. 현실적인 것, 그것은 현실적인 것의 알려진 구조 또는 인식되어야 할 구조이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대상 자체이다. 그것은 마르크스와 레닌의 위대한 이론적 발견들에 의해 표지된 대상이요, 그 속에서 이제부터 인간 역사의 사건들이 인간들의 실천에 의해 제어될 수 있게 된, 끊임없이 발전하는 거대하고 생동적인 이론적 장이다. 인간 역사의 사건들이 이제부터 제어될 수 있게 된 것은 이 사건들에 대한 개념적 파악과 인식이 이제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p427) 옛 인간주의를 현실적 인간주의로 진화시켜야 하는 이 “현실” 이란 실제로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이다.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들] 중 여섯 번째 테제는 추상적이지 않은 “인간”은 “사회적 관계들의 총화"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표현을 정확한 adequate 정의로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 표현은 아무것도 뜻하지 않는다. 이 표현에 대해 단순히 문자적 설명을 하려 한다면, “인간 개념에, 또는 인간주의 개념에 적합하게 상응하는 것으로서의 현실이 아니라 이 개념들에서 간접적으로 문제 되는 것으로서의 현실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추상적 본질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들의 총화이다” 라는 식의 완곡어법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완곡어법은 인간 개념과 사회적 관게들의 총화라는 인간 개념의 정의 사이의 불합치inadianation를 즉각 드러내 준다. 이 두 용어(인간과 사회적 관계들의 총화) 사이에는 확실히 하나의 관계가 있지만, 이 관계는 이 정의 속에서는 읽어 낼 수 없다. 그것은 정의의 관계가 아니며, 인식의 관계가 아니다. 그렇지만 이 불합치, 이 관계는, 하나의 의미, 하나의 실천적 의미를 갖는다. 이런 명백한 불합치는 하나의 행해야 할 행동, 하나의 실행해야 할 전위를 가리킨다. 이 불합치는, 더 이상 추상적 인간이 아니라 현실적 인간을 찾음으로써 암시된 현실을 만나고 발견하기 위해서는 사회로 넘어가야 하고 사회적 관계들의 총화에 대한 분석에 착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현실적 인간주의라는 표현에서 “현실적” 이라는 개념은, 스스로 더 이상 추상의 하늘이 아니라 현실적 땅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어떤 운동을 실행해야 하는지를, 어떤 방향으로, 어떤 곳으로까지 이동해야 하는지를 표시하는 하나의 신호, 하나의 도로 표지판에 상당하는 실천적 개념이라 말하고자 한다. “이쪽에 현실적인 것이 있다!” 우리는 안내를 따라가서 사회에, 사회적 관계들에, 그리고 사회적 관계들의 현실적 가능성의 조건들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바로 이때에 불미스러운 역설이 폭발한다. 즉, 이 전위가 실행되고 나면, 이 현실적 대상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이루어지고 나면, 우리는 (현실적인) 구체적 인간들에 대한 인식, 즉 사회적 관계들의 총화에 대한 인식은 인간 개념을 (이미 이 전위에 앞서 이 개념의 이론적 권리주장 속에 이 개념이 존재했다는 의미에서) 이론적으로 사용하기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조건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실상 이 개념은 우리에게 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사용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이 개념이 추상적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아니라(!) 이 개념이 과학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사회라는 현실을, 사회적 관계들의 총화라는 현실을 사고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구체적인 것으로의) 장소의 전위만 아니라 개념적 전위에까지 이르는 (우리는 기본적인 개념들을 변화시킨다!) 근원적인 전위를 실행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현실적 인간주의가 가리키는 현실을 사고하는 그 개념들은 결단코 인간 개념 또는 인간주의 개념을 이론적 개념들로서 끌어들이지 않는다. 그 개념들은 생산양식, 생산력들, 생산관계들, 상부구조, 이데올로기 등과 같은 전적으로 새로운 개념들을 끌어들인다. 전위의 장소를 우리에게 가리켜 준 실천적 개념이 바로 그 전위 속에서 소진되었고, 조사의 장소를 우리에게 가리켜 준 개념이 그 후로 바로 그 조사 속에는 부재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역설이다. (p428-430) 즉, 현실적 또는 사회주의적 인간주의는 그것이 정확히 실천적, 이데올로기적 구호의 기능의 면에서만 적용되고 일체의 다른 기능과는 혼동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실천적 이데올로기적 구호로 사용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이론적 개념의 속성들을 가질 수 있다고 자만할 수 없다. 나는 또한 이 구호가 스스로 자신의 빛이 될 수는 없고 기껏해야 자기 외부의 어느 곳에서 빛이 비치는지를 가리킬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려 했다. 나는 이 실천적 이데올로기적 개념의 모종의 인플레이션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경계들의 뒤편으로 퇴행하게 할 수 있으리라고, 나아가 이 개념이 나름의 방식으로 그 존재와 위급성을 가리키고자 한 문제들의 올바른 제기와 따라서 올바른 해결을 곤란하게 하거나 심지어 금지할 수 있으리라고 말하려 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모든 인간주의 이데올로기에 깊숙이 스며 있는 도덕에 대한 의지는 현실적 문제들을 상상적으로 처리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일단 인식된 후에는 이 문제들은 정확한 용어들로 제기되는데, 경제적 삶, 정치적 삶, 개인적 삶의 형태들을 조직하는 문제들이 그것이다. 이 문제들을 진정으로 제기하고 실제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들을 문제들 자신의 이름으로, 그것들의 과학적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 인간주의라는 구호는 이론적 가치를 지니지 않지만 실천적 지표로서 가치를 갖는다. 마르크스가 그 필연성을 사고한 역사적 변혁을 산출하기 위해서는 이 구체적 문제들 자체에, 즉 이 구체적 문제들의 인식에 이르러야 한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실천적 기능에 의해 정당화된 어떤 단어도 이론적 기능을 사칭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이 단어 가 자신의 실천적 기능을 수행함과 동시에 이론의 장에서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 1965년 1월 (p433-434) - 루이 알튀세르 , ' 마르크스를 위하여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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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shikkimus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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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삶의 시작 (1654 ) 지구상에 태어나는 모든 생명 특히 인간은 반드시 죽음을 거쳐야만 한다. 너무 어려서 죽음이 무엇인지 생각도 못 하고 있다가 덜컥 이 세상을 떠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철이 들면 누구나 죽음이라는 걸 생각하고 죽음 때문에 고민하고 그러다 삶을 마감하게 되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하등 동물들은 죽음을 생각할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 같다. 특히 호모사피엔스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죽음이라는 것이 감당하기 어려운 하나의 관문이다. 인간은 사는 일에 대한 관심 못지않게 죽음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살다가 떠난다. 그러므로 인간의 오래된 철학도 반드시 죽음에 대하여 어떤 가르침을 마련해야 한다. 유치한 종교일수록 인간의 죽음에 관하여 유치한 얘기를 많이 하지만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죽음을 생각지 않고 철학의 체계를 만들 수는 없다. 사람은 한 번 죽지 두 번 죽지 않는다. 신약성서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 하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한마디가 있어 우리들의 삶을 매우 다채롭게 한다. 이 땅에 생을 이어받았으면 누구라도 삶의 낡은 옷을 벗고 새로운 삶의 새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마치 죽어 저 세상에 갔다 온 사람인 것처럼 우리를 속이는 인간들이 과거에도 많이 있었고 오늘도 상당수 있다. 기상천외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계시를 받았다고 우겨댈지 모르지만 그런 이야기의 대부분은 허황된 것이고 아무 내용이 없다. 천국이나 지옥에 가서 자기가 아는 사람을 만나보고 돌아온 사람이 어디 한사람이나 있던가. 시인 단테(Alighieri Dante)나 시인 밀턴(John Milton)도 그들의 작품 속에서 역사상의 인물들을 만나보고 돌아온 것처럼 이야기 했지만 사실은 아니다. 사람이 한번 죽으면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난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렇다고 협잡꾼의 말엔 또 속아선 안 된다. 천국에 가서 누구를 만났느니 지옥에 들렀을 때 누구와 대화했느니 하는 수작은 다 근거가 없다. 나는 어쩌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의 세계에서 자라나 천국과 지옥에 대한 교훈을 바탕으로 인생을 살아보려고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나는 나의 신앙 때문에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죽음을 바라보지 않는다. 만일 누가 내게 “예수를 믿지 말고 역사상의 다른 사람을 믿으라”고 일러준다면 나는 그에게 반박하는 한마디를 할 것이다. “내가 귀담아 들을 말은 예수의 말 한마디입니다”라고. 인간은 종교라고 하는 이해 못 할 숙제를 안고 기나 짧으나 한평생을 살게 마련이다. 모르는 세계를 가지고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람과 승강이를 할 마음은 없지만 나는 생명이 영원하다는 것을 주께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터무니없는 비관론자가 되지도 않고 터무니없는 낙관론자가 되지도 않았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한 노인이 되어 오늘도 살아있다.2021-6-10 hwanshikkimus.tumblr.com/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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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yadultmen-blog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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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통대 중간과제 철학의 이해 D형 행복의 정복, Ⅱ, 행복으로 가는 길 철학의 이해 D형 행복의 정복.hwp해당 자료는 해피레포트에서 유료결제 후 열람이 가능합니다.분량 : 6 페이지 /hwp 파일설명 : 방통대 중간과제 철학의 이해 D형 행복의 정복, Ⅱ, 행복으로 가는 길 입니다.본론 부분에는 본문 요약과 관련 내용 설명을, 결론은 감상 및 전체 평가를 담았습니다.잘 활용하셔서 좋은 결과 거두세요^^*목차서론본론: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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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photo-man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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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이해 2023학년도 2학기) 1. 교재와 강의 2장을 공부하고 교재 52페이지의 2번문제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인가, 욕망하는 존재인가?)에 딸린 8개 문항을 모두 풉니다.
철학의이해 2023학년도 2학기) 1. 교재와 강의 2장을 공부하고 교재 52페이지의 2번문제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인가, 욕망하는 존재인가?)에 딸린 8개 문항을 모두 풉니다.  철학의이해 중간과제물.hwp 해당 자료는 해피레포트에서 유료결제 후 열람이 가능합니다. 분량 : 11 페이지 /hwp 파일설명 :   2023학년도 2학기 철학의이해 공통형 중간과제입니다. 1) 철학의이해 과제로 제시된 두 문항에 대해서 모두 작성하였습니다. 2) 과제에서 제시한 양보다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과제 작성 시 수정하기 쉽도록 작성되었습니다. 3) 교재와 강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과제를 작성하였습니다. 4) 글자크기 11포인트, 줄간격 160으로 작성하였습니다. 5) 2023학년도 2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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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ihaifood-blog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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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message-blog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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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호흡(리카르로 피를리아 렌시) 명작읽기
『인공호흡』
리카르도 피글리아 렌시
[이야기 재구성]
책의 화자인 ‘렌시’는 피글리아의 full-name 중 (끝을 떼어서 만든 이름이다). 이 소설이 자전적 소요의 책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소설의 서사적인 구조가 탄탄하게 되어있다. 철학적이고, 문학적이고, 역사적인 소설이다.
렌시는 대학을 졸업하고 소설가가 되려고 한다. 자전적인 소설을 쓰기 위하여 자기 집안을 살펴보니 마르셀로 마기라는 외삼촌이 역사학자이자 작가 인데, 집안사람들 중에서 가장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었다. 마기 외삼촌은 오소리오라는 유명한 정치가 집안의 사위가 되었는데, (아내를 버려두고) 그 집의 재산을 갖고 다른 여자와 도망쳐버렸다. 외숙모는 외삼촌을 고발하였고 이로 인해 외삼촌은 감옥에서 몇 년을 보내고, 출옥했다. 그리고 외삼촌이  외숙모에게 돈을 갚았다(사실은 정치적인 외압 때문에,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도망친 것이다).
외 삼촌의 마기 이야기를 토대로 쓴 렌시의 소설이 『현실의 지루함』이었다. 이 소설이 출간되자, 지금까지 왕래가 없었던 외삼촌으로부터 연락이 왔고, 그때부터 렌시와 마기외삼촌 사이에 편지가 몇 차례 오갔다. 외삼촌은 자기에 대하여 오해가 많다고 하면서, 편지로는 모든 것을 말하기가 어려우니 자기를 만나러 오라고 하였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마르셀로 마기가 결혼한 오소리오 집안에 관하여 삼대(三代)에 걸친 인물이 소개된다. 주인공인 엔리케 오소리오가 있고, 그의 아들 오소리오, 그리고 손자인 루시아노 오소리오이다. 엔리케 오소리오는 오소리오 가문에서는 영웅적인 존재로 등장하고 있고, 아들 오소리오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다. 손자인 루시아노 오소리오는 야권(野圈)의 전직 상원의원이다. 마기는 이 상원의원의 사위로 들어갔다. 마기는 손자인 오소리오가 할아버지 엔리케 오소리오와 관련된 중요한 문서를 몰래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 엔리케 오소리오의 아버지(상원의원의 증조부 할아버지)는 아르헨티나가 독립전쟁을 할 때 대령으로 참여했던 전쟁 유공자였다. 엔리케는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싸워서 독립한 조국이 독재자에게 넘어가는 것을 보고 가슴아파했다. 엔리케의 학교 동창생들은 유학가거나 독재정권에서 학자로 출세하려고 하는 것과 달리, 엔리케는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정치에 투신했다. 엔리케는 로사스라는 당대 유력한 정치가의 비서가 되어 신임을 얻고 최측근이 되었다. 그런데 기대했던 로사스가, 집권 후 독재를 했다. 엔리케는 실망하고, 독재자의 중요한 기밀자료들을 빼돌려서, 민주화를 위해 싸우는 상대진영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이 일이 발각이 되었고, 엔리케는 집권한 로사스와 상대 진영 모두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엔리케는 죽음을 면하기 위해서 외국으로 망명하기 전에 잠시 인척인 임파로 에스칼라다의 집 지하실에서 6개월간 머물렀는데 그 때 그 집의 딸(사촌 여동생)과 관계를 맺으면서 아들을 갖게 된다. 그리고, 엔리케 오소리오는 여자가 임신한지도 알지 못한 채 국외로 망명하게 되었다. 여러 나라로 망명 다니면서 엔리케는 자신이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억울함을 자서전처럼 쓰기도 하고, 아르헨티나 잘되기를 바라면서, 국민들에게 할 말을 쓰기도 했으며, 남겨두고 온 가족에게 할 말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미국 서부에서 황금을 캐던 시기에 캘리포니아로 가서 금광을 발견하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된다.
엔리케는 미국에서 모은 금덩어리와 문서로 작성한 것들을 계속하여 보관하면서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권총 자살하로 생을 마감한다.  
엔리케가 죽은 후 그가 남긴 모든 것(금덩이와 엔리케의 작품)은 아들 오소리오에게 남겨졌다. 이 아들은 어떤 일간지가 아버지 엔리케의 과거 행적을 들추어 심하게 모욕한 것에 대하여 분노하고, 글을 쓴 자와 결투를 하여 총에 맞고 죽게 된다. 그래서 엔리케가 남긴 유산들은 손자 루시아노에게로 넘어오게 된다. 상원의원이 된 손자 루시아노가 이 황금과 할아버지 엔리케의 문서를 보관하고 있었다.
루시아노 오소리오(손자)는 할아버지, 엔리케처럼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민주화인사로 활동하다가 정적에 의하여 척추에 총을 맞은 후 평생을 반신불수로 집안에 갇혀 지내게 된다. 진보적 성향을 가진 마기 외삼촌은 대학을 졸업하고, 자기가 존경하는 루시아노 상원의원을 만나서 비서처럼 일하게 되었다. 이 집에서 일하는 동안 상원의원의 딸과 연애하여 결혼하게 되었다. 마기 삼촌은 아내 보다. 그 집안에 보관 중인 엔리케가 남긴 ‘문서궤짝’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 엔리케가 남긴 문서는 굉장히 중요하면서도 위험한 것이었다. 마기는 이 문서를 계속하여 이곳에 두었다가는 안 될 것 같아서, 이 문서를 가지고, 재산의 일부를 팔아서 재정을 마련하고, 비교적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변두리로 도망갔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외숙모(마기의 아내)는 외삼촌을 재산을 빼돌리고 딴 여자와 바람난 사기꾼이자 간통범죄자로 고발했다. 이 일로 외삼촌는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그러나 다행히 문서는 잘 보관 되었다. 출옥한 삼촌은 우루과이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콩코르디아로 갔다. 콩코르디아라는 지역은 역사적으로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주의(독재)와 맞서는 연방주의 세력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마기가 이곳으로 간 이유는 반정부적인 인사들이 주로 활동하는 곳으로서, 정지적으로 비교적 안전하고, 중앙 독재 정부의 국가 권력의 영향력이 적은 곳이기 때문이다.  
콩코르디아에서 은둔생활 하는 외삼촌 마기는,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오직  엔리케 오소리오의 문서들을 편집하고 정리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가사(假死)상태에 있는 엔리케의 문서에 인공호흡하여, 현재의 문서로 되살리고자 했다. 그렇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조카가 쓴 소설을 보면서, 조카 렌시가 글솜씨가 있어서, 자신 보다 이 작업을 더 잘할 것으로 생각했다. 자신의 뒤를 이어서 이 작업을 계속하여, 엔리케의 문서를 통해서, 잘못된 역사이해를 바로잡아 주길 바랬다.  
마침내 렌시는 마기외삼촌을 만나러 콩코르디아로 갔는데, 그곳에서 마기 외삼촌은 정부기관의 추적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즉시 만나지 못했다. 대신 마중 나온 외삼촌의 친구 타르뎁스키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타르뎁스키는 폴란드 사람으로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 유학을 가서 철학을 전공했고, 당시 유명했던, 비트겐슈타인의 총애 받는 제자가 되었다.  타르뎁스키는 어느 날 영국의 한 도서관에서 소피스트에 관한 책을 빌리려고 신청했는데, 사서의 실수로 어뚱하게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받게 되었고, 예상치 않은 책을 받은 후, 운명처럼 이 책을 일게 되었다. 그는 히틀러의 책을 읽고, 삶의 방향을 바꿨다. 영국을 떠나 아르헨티나까지 오게 되었고, 콩코르디아에 정착해서 철학선생으로 일하면서, 마기 삼촌과 친해졌다.  
화자인 렌시가 외삼촌 마기를 기다면서, 타르뎁스키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외삼촌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타르뎁스키는 렌시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둘은 밤새도록 문학과 철학,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외삼촌은 추적 때문에 도망을 간 것인지, 아니면 납치되어 실종된 것인지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타르뎁스키는 마기 삼촌이 나타자 않자, 렌시에게 외삼촌이 맡겨다는 3개의 파일을 건네 주었다. 이것은 외삼촌이 작업 중이던 엔리코 오소리오와 관련된 문서들이다. 렌시가 파일 중 하나를 보려고 하는 장면에서 이 책은 끝난다.
[메시지]
*무의 세계에 대한 이해
인간 세상에는 현실의 배후에 언급할 수 ���는 무(無)의 세계,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무의 세계가 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무는 신의 세계, 죽음의 세계를 뜻하지만, 피글리아가 말하는 무는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무이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독재 권력 하에 있는 백성들은 마치, 신(神) 앞의 인간들처럼 언제 체포될 지, 죽을지 모른다. 알 수 없다는 의미에서의 무이다(이점에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신앙적 의미에서의 무와 정치적 의미에서의 무가 본질에서는 다르지만 형태에서는 유사하다). 독재체제속에 있는 아르헨티나의 국민은 마치, 신 앞의 인간에 언제든지 체포되고 죽을 수 있는 죽음과 대면해 있는 것처럼 독재 정권하에서, 권력에 의해서 언제든지 체포되고 죽을 수 있는 상황속에서 이 절대권력과 대면하여 있다.
 카프카의 <소송>에서 처럼 아르헨티나의 백성은 자신에게 특별한 죄가 없는데도 언제든지 체포될 수 있고, 언제든지 이유도 모른 채 죽을 수 있는, 불안을 느끼고 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신적인 세계로부터 오는 불안, 죽음의 문제를 피글리아는 불의한 정체세력, 독재체제 오는 불안으로 치환(置換)함으로써, 패러디하고 있다.  
*말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해서 침묵하라
비트겐시타인이 말한 ‘말 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해서 침묵하라’고 한 것은 하이데거적 의미에서의 ‘말할 수 없는 것’ 즉 신적인 세계, 죽음, 불안에 대한 것이다. 피글리아는 이것도 정치적인 의미로 패러디 한다. 아르헨티나 국민에게 있어서의 ‘말 할 수 없는 것’은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독재’를 뜻한다. 독재에 대해서 말하면 죽는다. 피글리아는 ‘신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말 할 수 없기 때문에 침묵해야 되지만, 정치적인 입장에서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말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침묵해야 한다는 뜻이다. 말하면 죽는다.  
그러나, 진정한 철학, 문학, 역사는 정치적인 의미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한다. 엔리케 오소리오, 마기 삼촌, 렌시가 하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말 할 수 없는 것, 말해서는 안되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기존의 철학, 문학, 역사가 말할 수 없는 것, 말해서는 안되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불의한 세력을 비호하거나, 이런 체제속의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서 글을 쓴 것과는 정반대의 입장이다.
진정한 언어의 사용은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독재를 독재라고 이름 붙이는 것, 독재자를 독재자로 명명하는 일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 문학, 철학, 역사는 유희(즐거움)를 위한 것이 아니고, 진실을 말하는 정치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진정한 문학, 철학, 역사는 죄없는  백성과 부패한 권력, 양쪽을 다 볼 수 있는 공중에 철조망 줄을 치고, 위태롭게 걸어가면서, 언어를 통해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 떨어지면 그대로 죽임인 곡예를 하는 것이다.  
보다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영웅은, 정치인(역사학자)로서 엔리케 오소리오처럼 적진 속으로, 언급할 수 없는 장소의 중심으로 들어가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한다(정보를 캐내어 국민들에게 알게 했다). 문학자의 카프카처럼 관찰자가 아니라 실제 그 상황속에 들어가, 그 속에서 고문을 당하는 상태에서 언급해야 한다. 이런 고통속에서 작품을 쓴다. 이렇게 쓴 것이 ‘소송’이다. 이런 의미에서 카프카의 소송은 가장 정치적이고, 가장 진실한 문학이다.  
*인공호흡
진정한 철학자, 역사학자, 문학자는 궤짝속에 갇혀 있어 가사(假死) 상태에 있는 진실 된 과거의 사실에 인공호흡하여, 죽어가는 역사를 현재의 역사로 살려놓아야 한다. 마치 보르헤스가 과거의 돈키호테를 현실의 돈키호테로 다시 만든 것과 같이, 역사를 이렇게 만들어야 한다. 실제 현실이란 과거의 사실 놓여 있는 현실이다. 과거 없는 현실은 없다. 이 사실을 각자의 입장에서 밝혀야 한다. 이들의 인공호흡을 통해서 과거가 다시 현실이 된다.
그런데 인공호흡으로 살려 놓은 현재가 된 과거는, 현재와 하나가 되어서, 새로운 현실로 살아났지만, 과거와 똑같은 상황 즉  언급할 수 없는 ‘무’ 즉 ‘부패한 권력’이란 무(無)위에 존재한다. 독재권력(언급할 수 없는 것, 언급해서는 안되는 무)이라는 바다위에 떠있는 위태로운 섬과 같다. 언제 어떻게 될 지(죽을지) 모르는 독재국가의 현실속에서 다시 살아난 과거적 현재이다.  
피글리아는 이런 현실(아르헨티나의 현실)에 도래하지 않은 ‘희망의 미래’를 미리 앞당겨 가져와 현실에 인공호흡을 한 �� 더 해야 된다고 본다. 이 위태로운 현실(현재)속으로 초현적인 것(보르헤스적 의미에서 환타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 그러나 반드시 올 것으로 예측되는 미래의 사실이 침투해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즉 도래하지 않는 미래(편지)가 현재에 침투하여, 현재를 구조 조정한다. 아직도 숨쉬는 것이 위태로운 현재에게 ‘인공호흡’을 한 번 더 해 줌으로서, 현실의 불행을 버텨 낼 수 있는 힘을 실어 준다. 이것 때문에 현재는 보다 더 건강하게 살아날 수 있다.
*패러디 과거의 표절
보르헤스의 입장에서 보면 해 아래 새것은 없다. 어떤 작가도 자신의 작품이 세상에 없던 것을 완전히 새로 창조한 것, 새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모르고 썻던, 알고 썻던 모든 작가는 앞선 작가들의 작품을 표절한 것이다. 아닌 척 하는 사람은 도적질 하는 것이다. 차라리 자신처럼 솔직하게 앞선 작가들의 작품에서 공개적으로 표절하여, 짜깁기 하라는 것이다. (T.S 엘리엇도 이런 방식으로 시를 작성했다). 현재의 작품이라는 것은 과거의 남의 작품을 표절하여 적절하게 짜깁기 한 것이고, 자신에게 창작이라고 하면, 오히려 초현실적인 것을 가져다가 과거와 현실로 구성된 작품에 침투시키는 것이다. 문학적인 입장에서의 초현실은 역사적인 입장에서는 아직도래 하지 않은 미래가 될 수 있다. 따라서, 현재라는 것은 가사(假死) 상태의 과거를 인공호흡 현재로 되살려 놓고, 다시 여기에 미래를 가져와 더욱 생기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미래의 것, 초현실적인 세계를 문학의 세계에서 실현한 것이 새로운 것이다. 이것을 피글리아는 정치와 역사에 적용하여 자신의 작품을 만들었다(인공호흡).
*유토피아
과학주의적인 유럽의 유토피아는 장소적인 의미에서의 유토피아이다.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장소를 차지하는 것이다(일종의 장소적 의미에서 식민지). 보르헤스의 입장에서는 과연 지상에 장소적인 의미에서의 완전한 유토피아가 있는가? 진정한 자유, 자신만의 장소가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시간’의 유토피아를 말한다. 꽉 찬 시간에서 텅 빈 시간이 바로 유토피아이다. 망령객, 장애를 입고 방안에 갇힌 사람들(마기의 장인), 즉 장소적인 의미에서 유토피아를 상실한 사람, 장소적인 의미에서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자(독재자)들이 전혀 위협을 느끼지 않는 존재가 된 사람들이 역설적으로 ‘시간적인 입장에서의 유토피아’를 차지한 사람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장소적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유럽의 문학의 서사적 구조가 장소 이동 중심으로 묘사 되는 것과 달리, 남미의 문학은 시간 이동 중심의 서사이다. 시간 중심의 소설에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섞여 있다. 경계가 무너진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장소적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사고를 했던 사람들에게 시간적 입장의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소설, 철학, 역사가 어렵게 느껴진다. 낯설게 느껴진다.
*하이데거와 연관성
하이데거의 철학이 시간성을 중심으로 전개 된 것과 똑같이 보르헤스의 문학이 시간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서로를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같은 시대에는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지구 반대편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철학의 입장에서, 보르헤스는 문학에서, 피글리아는 문학적 역사에서 논하고 있다.
*나와의 연관성(보편성)
우리가 목회 한다는 것, 설교하는 것은 알고 보면, 가사(假死) 상태의 과거에 인공호흡 하여 현재로 살려 내는 것이다. 오래 전에 덮여버린 성경의 이야기에 인공호흡하여 설교를 통하여 마치 오늘 현재의 이야기처럼 살려서 성도들에게 제시한다. 그리고 이렇게 했을 때 앞으로 어떤 결과가 올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고 그것으로 다시 한번 현재의 사람들에게 인공호흡하여, 현재를 더욱 생생하게, 살려 내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유를 알 수도 없는 죽음의 위협, 고통스러운 현실에 있는 사람들, 가사 상태의 사람들을 살려내는 것이다. 이것이 목회이다. (예수께서 지상에 와서 한 일도 이것이다)
개인사(個人史)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대화하는 내용을 분석해 보면, 화자가  죽은 과거를 인공호흡하여 자기 나름대로 살려낸 현재의 이야기들 이다. 현재는 모두 과거의 사실들을 인공호흡하여 과거로부터 가져온 것들이다. 여기에 앞으로 예견되는 도래할 것들을 다시 추가하여, 미래 지향적인 대화를 나눈다. 미래를 앞당겨 가져와 현재의 대화(소재)에 인공호흡을 한 번 더 해 줌으로서, 현재가 더 생기를 얻는다. 이런 의미에서 ‘인공호흡’이라는 작품이 보편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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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photo-man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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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이해, 공통) 아래의 세 문제 중 두 문제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작성합니다. (1) 교재 1장을 정독한 후, 핵심내용을 1쪽에 요약하고 본인이 생각하는 철학의 의의와 가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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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이해, 공통) 아래의 세 문제 중 두 문제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작성합니다. (1) 교재 1장을 정독한 후, 핵심내용을 1쪽에 요약하고 본인이 생각하는 철학의 의의와 가치에  2022학년도 2학기 중간과제물, 철.hwp 해당 자료는 해피레포트에서 유료결제 후 열람이 가능합니다. 분량 : 11 페이지 /hwp 파일 설명 : (2022학년도 2학기 중간과제물, 철학의이해, 공통) (1) 교재 1장을 정독한 후, 핵심내용을 1쪽에 요약하고 본인이 생각하는 철학의 의의와 가치에 대해 0.5쪽을 서술했습니다. (2) 교재 2장을 정독한 후,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관을 보인 철학자들과 욕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관을 보인 철학자들 중 한 그룹을 택하여 핵심내용을 1.5쪽에 요약했습니다 (3) 교재 3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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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maker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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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철학의 얽힘’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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