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iu-0816
ziu-0816
I THINK ...
4 posts
Don't wanna be here? Send us removal request.
ziu-0816 · 3 days ago
Text
Tumblr media
‘그냥’이라는 말이 남긴 질문들
모든 말과 행동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대화를 하다가 ‘그냥’이라는 말을 한다.
“그냥.”
“그냥, 이유 없어”
“이유가 없어.”
그런 말이 싫었다. 귀찮음, 무관심.
성의없고 대화를 단절시키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냥’이라는 말은 지인과의 사이에서도, 비즈니스 관계에서도, 심지어 가장 가까운 친구, 연인, 가족 사이에서도 나올 수 있다.
처음엔 그저 귀찮아서 하는 말인 줄 알았지만 생각할수록 그 속에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었다.
감정을 언어로 정리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설명이 길어질까 피로를 피하고 싶어서
말로 꺼냈을 때 관계에 부담을 줄까 염려해서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아서
이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말, ‘이유가 없다’는 말은 ‘그냥’과 닮았지만 다르다.
말 그대로 어떤 행동이나 감정의 원인이 완전히 부재하다는 뜻이다.
살아가며 느끼게 된 건, 그들 중에는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감정이나 행동에 명확한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과연 이유가 전혀 없는 경우가 있을까?
심지어 충동적으로 한 말이나 행동에도, 무의식 속에라도 원인이 남아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사람이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찾으려 하지 않을 뿐이지 않을까?
나는 누군가가 잘 이해되지 않을 때, 왜 그런 말과 행동을 했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한다.
물론 내 말과 행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 이유를 알아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유가 없다’는 말은 나에게는 생각하지 않으려는, 성장 의지가 없는 태도로 느껴진다.
물론 그런 인식을 가지고 그 말을 하는 건 아닐 것이다.
나는 여전히 말과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모든 사람이 그 이유를 언어로 정리하고, 상대에게 전달할 준비가 되어 있는 건 아니라는 것도 이해해보려 한다.
귀찮음이나 무관심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복잡함이나 불편함일 수도 있다.
혹은 정말로 그렇다고 믿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나는 이제, 그 말 너머의 침묵을 조금 더 따뜻하게 바라보려 한다.
1 note · View note
ziu-0816 · 5 days ago
Text
Tumblr media
나는 왜 태어나지 않으려는가
지금의 기억을 갖고 다시 세포일 적으로 돌아가 나에게 태어날 지 말지에 관해 선택권을 준다면, 나는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엄마를 사랑한다.
그분이 나와 가족을 위해 흘린 눈물과 고생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고, 감사하다.
엄마가 이 마음을 알면 상처받을까 죄송스럽지만 ‘나를 낳아주신 것’ 자체에는 감사하지 못한다.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삶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저 일상의 소소한 행복에 감사해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절절하게 느껴지는 감정이라기보다는 잃었을 때의 상실을 미루어 짐작하며 소중하다고 여겨보려는 노력에 가깝다.
나는 게으르다.
퇴근 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다가 잠들기도 하고, 쓸데없는 것을 사거나 먹기도 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군것질을 참고, 책을 펼치고, 산책을 하거나 스쿼트를 몇 개라도 하며 스스로를 다잡는다.
그 작은 노력들이 나를 망가지지 않게 붙잡아주는 줄기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한다.
나는 나를 인정하고, “나 정도면 잘하고 있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 정도에서 만족할 수 없다는 갈망이 있다.
나는 더 성장하고 싶고, 더 나아지고 싶고,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이런 생각이 나를 지치게 한다.
삶을 미워해서가 아니다.
삶을 사랑하면서도 어느 날 문득, 삶을 알아갈수록 여전히, 다시 시작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이다.
결국 나는 삶의 무게를 잘 알기 때문에 태어나지 않으려는 것일까?
3 notes · View notes
ziu-0816 · 9 days ago
Text
Tumblr media
살아내기
나는 삶이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사라져도, 인간이 멸종해도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갈 것이다.
그 안에서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건 어쩌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삶이 괴롭거나,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단지, 삶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감각이 내 삶의 바탕에 깔려 있을 뿐이다.
삶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일을 하고, 돈을 벌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선택하며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내가 엄청난 성취를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도 성취를 원하지 않는 건 아니다.
나는 내가 이룰 수 있는 만큼의 성취를 향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행복에 대해서도 큰 기대보다는 일상 속에서 사소한 것들에 만족하고, 그 안에서 충분히 행복을 느끼고 있다.
살아 있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살아간다.
삶이 꼭 의미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의미를 모르더라도, 살아 있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
그게 지금의 나에게 가능한 삶이다.
언젠가는 나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2 notes · View notes
ziu-0816 · 10 days ago
Text
아이를 낳는다는 것에 관해
20살 때, 나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건 충동적인 생각도 아니었고, 단순히 ‘귀찮아서’ 내린 결정도 아니었다.
그때 처음으로 ‘살기 싫다’는 생각을 했고, 그 감정은 내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나는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게 아니었다.
그런데 태어났고, 살아가야 했다.
그 사실이 너무 무거웠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내가 겪은 이 무게를, 내가 낳은 아이에게도 지우고 싶지 않다고.
그 아이는 태어날지 말지를 선택할 수 없고, 부모도 선택할 수 없다.
그런데 내가 그 생명을 만들어낸다면, 그 아이는 내가 만든 세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건 너무 큰 책임이었다.
사람들은 종종 아이를 낳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결혼했으니까, 나이가 찼으니까, 주변에서 다들 하니까.
그리고 아이를 낳고 나서 ‘세상이 달라졌다’, ‘삶의 의미를 찾았다’고 말한다.
그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를 통해 부모가 성장하고, 더 깊은 사랑을 배우고,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는 건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나도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건 아니다.
가끔은 나를 닮은 아이가 태어나면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상상해보기도 헸다.
아이를 통해 더 성숙해지고, 더 깊은 행복을 느끼고 싶은 마음도 있다.
하지만 그런 바람을 담아 아이를 낳는다는 건, 결국 나의 성장과 나의 행복을 위해 생명을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건 나에게 너무 이기적인 선택처럼 느껴진다.
나는 고양이를 키우고 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고양이를 좋아했고 키우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지만, 오랫동안 망설였다.
그 생명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유기묘 새끼들을 구조한 지인이 입양처를 찾고 있다는 말을 듣고, 용기를 내서 데려왔다.
고양이를 키우면서 많은 걸 느꼈다.
더 좋은 사료, 모래, 캣타워를 못 사줄 때 마음이 아팠다.
수술을 하게되어 병원비를 크게 지출하게 되었을 때는, ‘내가 낼 수 있는 비용이어서 다행이지만 더 큰 비용이 드는 경우였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소름이 돋았다.
고양이도 이런데, 아이는 얼마나 더 큰 책임일까,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내가 만든 생명이 나를 원망하게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나는 외면할 수 없다.
내 또래 사람들 중에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그 이유는 다양하다.
자유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경제적 부담이 커서, 육아가 두려워서.
그런 사람들에게 어른들은 종종 ‘철없다’, ‘이기적이다’라고 말한다.
아이를 낳는다는 건 단순히 생명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그 생명이 살아갈 세상과 조건을 함께 만들어주는 일이다.
그 책임을 충분히 고민하지 않고 아이를 낳는다면, 그건 오히려 무책임한 선택일 수 있다.
사람들에게 ‘아이를 갖기 전에 그런 고민을 했냐’고 묻는 건 어렵다.
그 질문은 너무 날카롭고, 때로는 공격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묻지는 못하지만 얼마나 큰 결심이 있어야 낳을 수 있는 것일까, 항상 궁금하다.
나는 지금도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선택이 회피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어쩌면 책임감이 너무 무거워서 피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생명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이유로, 그 생명을 만들지 않겠다는 결심이 과연 옳은지 나는 아직도 생각하고 있다.
Tumblr media
2 notes · View no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