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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변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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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가변크기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조형예술학과 대학원 동문 및 학부 졸업생,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을 위한 공간입니다. 전시문의: 02-970-6635 김다겸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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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mensionvariable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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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민 개인전 <Crack>
2019. 4. 16. - 2019. 4. 30.
| wed - sun | 12:00 - 19:00
별도의 오프닝은 없습니다.
공간 가변크기 _ 서울시 성북구 삼선교로 2길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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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들의 고독에 대하여
| 안성은 (성북구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이경민의 작업을 처음 보았던 것은 2014년의 겨울이다. 20여 미터에 달하는 롤지, 컷컷을 그린 영상, 움직임에 따라 이어지는 풍경, 사물의 움직임을 담은 일력 형태의 작품까지. 이경민은 종이의 재생/플레이 방식을 달리해가며, 시간 그 자체를 종이라는 지지체에 옮기는 작업을 오랫동안 이어왔다. 손끝에 닿으면 까맣게 묻어날 것 같았던 진하기가 다른 연필 색들이 오래 기억에 난다.
그는 자주, 긴 산책을 하는 듯했다. 이경민의 산책은 종종 기록되었고, 작업으로 남았다. 오래 걷고, 버스에 올라 창밖을 기록하거나 눈을 감아야 보이는 것에 눈길을 뒀고 검정으로 그렸다. 발걸음의 속도나 그날의 바람 세기, 버스의 내달림에 따라 사물의 인상은 나부끼거나 흩날린 상태 그대로 그려졌다. 하나의 장면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이동’을 통해 이어지는 연속의 풍경이 종이에 담겼다. 종이로 재생되는 비디오 같았다. 지나가는 시간 속에선 통으로 인식되어 하나의 풍경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존재를 드러내며 종이에 남겨졌다.
나무, 달, 눈을 감아야 보이는 풍경, 빛을 그리던 작가는 공사 중인 도로와 도시 속 땅의 움직임을 담았다. 현실에서는 실제보다 환영에 가까운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이경민의 두 번째 개인전 《Crack》에서는 움직이는 땅과 사물의 인상에 대한 장면과 상상을 소개한다. 전시된 작품 속 사물들은 오랜 기간을 거쳐 수집된 이미지들이다. 목격자이면서 동시에 산책자에 가까운 작가는 사물들의 고독[1]에 집중했다. 이경민이 기록한 개개의 사물은 고유의 무게를 갖고 자신의 침묵을 지킨다. 우리 주변에 널려있지만, 너무 흔해서 주목하지 않은 것들. 죽은 새, 길고양이, 의자, 차에 가득 실려 가던 공사의 파편 무더기 같은 것이 그렇다.
먼저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아주 얇고 두꺼운 것> 시리즈(2020)를 만날 수 있다. 전혀 다른 주제를 가진 이미지들을 중첩하듯 촬영한 사진작가 비비안 사센(Viviane Sassen)의 이미지 방법론에 영감을 받아 제작한 <아주 얇고 두꺼운 것>은 그동안 수집한 이미지들로 이질적인 풍경을 연출하여 기존 작업과 다른 방법적 시���를 보인다. 이경민이 포착한 도시 속 버려진 풍경들은 ‘아주 얇고도 두꺼운’ 풍경과도 같아, 그 속에 담긴 여러 인상을 들여다보게 한다. 편집된 파편들을 땅 위로, 손 위로 불러왔다. 대상을 눈앞으로 바싹 당겨온 듯한 <누운 새>(2019)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도처에 널려있는 풍경 중 하나로서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인상에 대해서 말이다.
작가가 2018년도 안산으로 출근하던 당시 주변은 아파트 공사로 많은 개발이 이루어졌다. 같은 해, 세월호 분향 텐트가 철거되는 과정을 목격하기도 했다. 깨진 도로를 징검다리 건너듯 지나다녔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공사 현장과 끊임없이 행해지는 도로 공사 풍경에 작가는 자신을 빗대어보며 작업을 진행했다. 그렇게 탄생한 작업이 <Ground>(2018)이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추진은 기존의 것을 뒤집고 부수는 작업이 되고, 그것은 작가 개인에게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했을 것이다. 양면적 의미를 담은 <추진력>(2020) 역시, 결국 과거의 전복이고 미래를 향한 애도이자 격려인 셈이다.
그런가 하면, 공사판에서 넘실거리는 푸른 방수포를 보고 <파도치는 땅>(2020)을 투명한 블루로 표현하거나, 빛에 의해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창문 속 166장의 ‘나’를 종이-비디오로 기록하는 것은(<Crack>, 2020) 사물이 가진 인상의 무게를 담아낸 작가의 다정한 인사로 느껴진다. 이번 전시와 동명의 작업인 <Crack>은 주변의 사물/풍경에서 놓치기 쉬운 작은 틈을 비추고 보여주는 이경민의 작업적 주제-성향을 대변한다. 그리기의 다양한 방법 중 하나로 기존의 작업과 달리 수집/실존하는 이미지가 아닌, 심상이나 기억의 이미지 표현에 대한 시도와 ‘불’이라는 물성 자체에 관한 관심을 담은 작업도 있다. 수성 흑연으로 그린 ‘검은 불’을 물로 지워낸 드로잉, <소용없는 일>(2020)이 그렇다. ‘소용없는 일’이라 말하며 물로 지운 그림을 그렸지만, 다음 단계로 나아가길 바라며 전시장 입구에 배치하는 마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아름다움이란 마음의 상처 이외의 그 어디에도 연유하지 않으며, 대상이 가지는 침묵을 드러내는 뿌리 깊은 고독은 존경과 사랑의 표시” [2]이기에 작품 속 이미지는 이처럼 저마다의 의미화 과정을 거친다.
지난 2018년, 안산의 세월호 분향소가 철거되는 과정 중에 생긴 못 자국을 작업으로 그리고 있다는 작가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때에도, 작가에게도 오랜만인 이번 개인전을 4월 16일에 연다고 했을 때도 같은 생각 하나를 했다. 그가 세상을 애도하고 기억하는 방법 앞에 작은 경의를 표하고 싶다는 마음. 이러한 애도는 대상의 가장 고유한 고독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너무 흔한 나머지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나 인상들이 제멋대로 숨으려고 할 때, 작품을 통해 작품 너머의 진동을 인지하고 현재 서 있는 지형을 확인하게 되길 바란다.”[3]
미주_
[1] [2]  장 주네, 자코메티의 아틀리에, 윤정임 옮김, 열화당, 2007, pp. 6, 7, 31, 48 [사물들의 고독에 대하여]라는 이름으로 장주네가 기록한 자코메티의 짧은 담화를 옮기며 설명을 대신한다. “언젠가 방 한구석에 놓인 의자 위에 걸쳐진 수건을 바라보고 있었지요. 순간, 개개의 사물이 홀로 있다는 느낌, 그리고 그 사물이 다른 사물을 짓누를 수 없도록 하는 무게-차라리 무게의 부재-를 갖고 있다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소. 홀로 있는 그 수건은 너무도 혼자인 듯해서 의자를 슬며시 치워도 그대로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았어요. 수건은 자기 고유의 자리, 무게 그리고 자기만의 침묵까지도 가지고 있었던 거요. ���상은 가볍고도 가벼워 보였어요.
[3]  이경민 작가 노트에서 발췌,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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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mensionvariable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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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조상은 바나나>
2020. 4. 1. - 2020. 4. 8.
| mon - sun | 12:00 - 19:00
별도의 휴무일과 오프닝은 없습니다. 
| 참여작가 | 송민지, 이선하, 임지원, 최희원
| 기획 | 김서인(이동식갤러리)
@leedongsik.gallery
공간 가변크기 _ 서울시 성북구 삼선교로 2길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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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명의 작가는 ‘인류의 조상은 바나나’라는 문장에 각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이들의 바나나는 (일종의) 도시 껍질을 디디고 공전하다 가끔 자신의 바닥을 잃어버리고, 모니터 안에서 댄스를 추다 어려운 현실과 마주하면 그림 속 프레임 안으로 달아나고 만다. 전시된 바나나의 다양한 생존법은 이 문장을 두고 고민하던 네 명과 닮아있다. 치열하게 근거를 찾다 적극적인 합리화에 빠지고, 문장이 완벽히 틀렸단 사실을 깨닫고 웃어넘기고 마는. 그 과정에서 발견한 각자의 세계와 진실을 기록한다. 말하는 원숭이이기보다는 지극히 인간다운 바나나이기를 선택한 이들의 작업에서 인류가 갖고 있던 숨은 비밀을 발견해내기를 바란다.
/김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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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mensionvariable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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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렬 x 변용민 <Dance Dance Dance>
2020. 3. 12. - 2020. 3. 26.
| wed - sun | 12:00 - 19:00
| 별도의 오프닝은 없습니다. 
공간 가변크기 _ 서울시 성북구 삼선교로 2길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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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cedancedance #댄스댄스댄스 #박병렬 #변용민 #미술전시 #art #전시 #가변크기 #공간가변크기 #삼선동 #한성대입구 #성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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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mensionvariable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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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희 개인전 <펜, 빠른속도로 종이를 통과한다 이때 방울토마토는 높이 점프한다>
2020. 2. 20. - 2020. 3. 5.
| wed - sun | 12:00 - 19:00
| opening |  2. 20. (thu) 18:00
공간 가변크기 _ 서울시 성북구 삼선교로 2길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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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에서 나와 (‘)펼쳐지는(,) 조각들(’)에 대한 이야기
김주희: <펜, 빠른속도로 종이를 통과한다 이때 방울토마토는 높이 점프한다> (공간 가변크기)
어릴 적 만지작거린 나무 블록. 때깔 좋고 여러 형태로 나온 나무 블록. 뾰족한 것, 길쭉한 것, 덜 길쭉한 것, 작은 것, 예쁜 것, 부엌에서 본 어떤 과일(사과라고 들은 것 같다) 같은 것. 손으로 들기에 무거운 박스를 간신히 들어 올려 가지각색의 조각들이 바닥에 펼쳐진다. 이제부터 조각들은 내가 만드는 세계로 작동한다. 네모난 블록 세 개가 전철, 블록 하나는 버스, 자동차는 녹색 네모, 평평한 블록을 이어 붙여 각각 노선을 만들었다. 나름의, 어쩌면 어처구니없는, 상징체계? 그러다가 또 다른 블록을 선물 받았다. 그것은 이미 완성도가 박스에 그려져 있었고, 나는 아주 충실하게 그 이미지를 따라 집을 만들었다. 하나하나가 의미와 역할을 확실하게 지닌 구성요소들. 쌓아 올리고 누가 지나가면 무너지고를 반복했던 나무 블록과 달리, 확실히 그 집, 아니 그 블록은 단단한 구조를 이미 갖추고 있었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기능은 형태를 따르게 된다?”“부분은 전체를 따른다/전체는 부분으로 구성된다?” 더 단단한, 그러기에 무너뜨리기 어려운 상징체계? 더 이상 네모난 것은 단순히 네모난 것은 아니었다. 어떤 것은 창틀로 불리고, 또 어떤 것은 벽돌이라 불렸고, 어떤 것은 울타리로 불렸다. 이렇게 블록 놀이를 할 때 의미와 구조를 추구하게 되면서 조각들은 형태 자체로 있을 수 없게 된다.
김주희의 작품에서 우리는 어떤 특정 의미나 역할, 그리고 전체상에서 벗어난 개별 도형들의 조합으로 등장한다. 개인전 제목 <펜, 빠른속도로 종이를 통과한다 이때 방울토마토는 높이 점프한다>에서 펜, 종이, 그리고 방울 토마토는 어떤 기능을 드러나는 대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형태와 기능은 각각 분리되어 묘사된다. 방울 토마토는 이제 가만히 있거나 입김에 뒹구는 대상이 아니며 펜은 종이를 속도감 있게 통과해버리면서 글을 쓰고 또 글이 적히는 역할에서 벗어난다. 그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기하학적 형태는 실제로 어떤 물건들의 윤곽을 담고 있지만, 그것은 어떤 기능과 역할에서 떨어져 나간 것���로 등장한다. 여러 색감과 형태의 조합으로 구성된 작품은 어떤 전체의 일부로도 어떤 기능을 따르지 않는다. 전시 공간에서 펼쳐지는 것은 특정할 수 없는 대상과 설치라는 사건의 전개이다. 조각 작품이 일반적으로 어떤 완결된 형태를 갖추어 전시된다면, 그의 설치 작품은 개별 요소들의‘조합’이다. 이‘조합’은 하나로‘통합’된 즉 전체-일부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과 달리, 흩어져 배치되는‘산개’의 상황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작품은 요소들의 끊임 없는 탈주에 근거한다.  특정 사물(사과나 펜 등등)의 지시적 형태로부터, 그 사물에 부여된 역할 혹은 기능에서, 그리고 통합에 근거한 전체에서 벗어난 것들의 자리로서 작품은 펼쳐진다.
전시 공간에서 만나는 요소들은 우발적인 관계를 이루는 점에서 보자면, 장치로 통제된 피슐리 앤 바이스(Peter Fischli and David Weiss)의<The Way Things Go>(1987)와도 다를 뿐만 아니라 화면 안에 물건의 윤곽들을 강조하여 페티쉬적으로 다룬 마이클 크랙-마틴(Michael Craig-Martin)의 일련의 페인팅과도 다른 지점을 보여준다. 개별 요소들은 (작가가 말하는 대로) 끼워지고, 올려지고, 기대게 되는데 이때 이 동사는 형태에 기능을 최소한으로 부여한다. 요컨대 그 펼쳐진 장 안에서 요소들을 보여주는 데에만 동반되는 기능들이다. 따라서 물건들이 어떤 장치로 재작동하는 피슐리 앤 바이스의 작품 혹은 특정 물건들의 시각적 매력을 유도하는 크랙-마틴의 작품과 달리, 그의 작품은 작가가 말하는‘블록 놀이’의 아주 원초적인 단계로 돌아간다. 지시적 형태와 역할, 나아가 전체에 근거한 부분이 되는 것보다 전인 원초적인 단계에서, 개별 도상들은 조합과 따로 있기를 반복한다. 그것들이 박스에서 튀어나와 바닥에 부딪혀 여기 저기 흩어진다. 그때 예측할 수 없는 조합과 형태가 그려진다. 우리는 그 순간을, 바로 박스에서 갓 꺼낸 나무 블록들이 어떻게 펼쳐질지를 전시장에서 목격하게 된다.
콘노 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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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mensionvariable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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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휴재 개인전 <살아남은 날>
2020. 2. 9. - 2020. 2. 15. 
| sun - sat | 12:00 - 19:00 (월요일, 화요일 휴무)
| 별도의 오프닝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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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휴재 개인전 <살아남은 날>
「TV에서는 매년 기록 경신이라도 하듯 몇 년 만에 찾아온 폭염이니 하는 보도를 수차례 방송한다. 건물 안팎으로 가만히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이 날씨에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무심히 걷는다. 진초록색 방수 페인트가 칠해진 옥상 바닥에 땀이 물처럼 흥건히 흐른다. 어디에도 스미지 않는 그 바닥의 페인트 성능은 왜이리도 좋은지 땀 줄기는 노인을 따라 일정한 선을 그리며 흔적을 남긴다. 노인의 무거운 발걸음이 더위로 인한 영향인지 장애로 인해 힘겨움 때문인지 잘 모르겠으나 단지 살짝 옷깃 사이로 보이는 나무껍질 같은 목살과 축 늘어진 뒷모습이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힘겨워 보인다. 사람은 생긴 대로 산다고 했다. 깍 마르고 갓 죽은 시체 같은 이 노인은 날 때부터 박복했을까?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이런 이가 주변을 훑고 지나갔을 때 즐겁고 행복한 미소를 지을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있기는 한 걸까? 바람을 쐬러 나온 것인지 얼마 안 되는 이 높이에 자살이라도 하러 온 것인지, 내가 사는 옥탑방의 작은 창문 틈으로 몇 번이나 그 노인을 관찰해 왔다. 항상 위태롭게 서 있는 노인을 말리고 싶어도 방음도 안 되는 이 얄팍한 현관문을 여는 것이 보기보다 힘들다.」
윗글은 올해 이사하던 중 첫 페이지만 발견된 언제 완성될지 모르는 시나리오 일부이다. 치매, 암, 당뇨 등 노인이 가질 수 있는 거의 모든 질병으로 투병 생활을 하던 아버지를 생각하며 시작하게 된 이야기이다. 그는 6·25전쟁 참전용사로서 나라를 지켰지만, 주변은 결코 지키지 못했다. 그를 중심으로 가족이 와해 되었지만 왜인지 나는 그의 곁을 지켰고 경제적으로 무능한 20대의 나에게는 가장 큰 시련이며 갖가지 딜레마만을 양성하는 존재가 된다. 작가를 추구하는 이들이 그러하듯 먹고사는 생업과의 사투를 벌이게 되고 돈을 벌기 위해 여러 작가의 작업을 도우며 현장경험만 줄기차게 해오기도 하고 나와 관련되지 않은 전혀 다른 일을 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경험이 작업에 양질의 살이 붙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에 있던 아버지의 병처럼 현재와 과거를 착각하며 수없이 초기화될 뿐이라는 걸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서야 체감하게 된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결심이 들 때마다 그간의 작업에 대한 기록을 거의 삭제 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쓰는 과정에서는 자전적 내용조차 작가 본인을 전지적 시점에서 관찰하기에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누구보다 분석적으로 객관화시킨다. 어쩌면 심적 거리를 두고 구조적으로 쌓아 올린 결과물은 본인에게만 익숙했던 사실들을 재가공하게 되고 마치 타인의 이야기에 공감하듯이 독립적인 힘을 얻게 된다. 그림책은 단순한 언어와 시간적 표현으로 복합적이지만 주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기에 쉽고 함축적이며 효율적인 표현수단이다. 나는 단기적이고 언제 버려도 괜찮을 낙서에 가까운 드로잉 작업을 해왔고 그것을 엮을 수단으로 시나리오와 만화 등을 통해 표현해 왔다. 그림책은 그간의 작업과 동일 선상에 있지만 익숙하지 않은 매체를 통해 조금 더 먼 거리에서 자전적 이야기의 재가공이 가능해진다. 이번 이야기 ‘살아남은 날’은 자살하려는 시도를 매번 잊는 치매 노인과 공황장애로 집 밖을 나서지 못하지만 결국 계획을 실천하려는 노인을 구하기 위해 나서는 청년에 대한 하루 동안의 이야기이다. 실제 소외된 이들의 살아남은 날은 단지 또 다른 어제의 반복이며 특별히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작업을 통해 살아남아 보려는 아이러니를 투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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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mensionvariable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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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섭 개인전 <원이 빗겨간 자리>
2020. 1. 9. - 2020. 1. 23. 
| wed - sun | 12:00 - 19:00
| opening |  1. 9. (thu) 18:00
공간 가변크기 _ 서울시 성북구 삼선교로 2길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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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의 바깥과 내부는 맞닿아 있다
: 김동섭《원이 빗겨간 자리》
콘노 유키
호주에서 얼마 전에 큰 규모로 난 산불에 대한 정보가 보도되었다. 뉴스에서 피해를 입은 범위와 동식물의 수가 보도되고 항공사진이 사태의 심각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순식간에 ‘전 세계적으로’ 화제에 올랐지만, 그렇다고 마치 나비의 날갯짓이 지구를 거대한 하나의 태풍을 일으켰을 정도로 ‘전 지구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다. 오히려 호주라는 어떤 작지 않은 섬이 피해를 국지적으로 입었다는 인식이 더 우세할 것이다. 온 지구 혹은 지구상의 모든 지역이나 국가가 직접적인 영향 없이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한편 오늘 같은 예전보다 따뜻한 겨울날은 인간이 뿜어내는 이산화탄소에 의해 북극의 빙하와 대기 변동에 문제가 생겼다고 종종 지적 받는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국지적이고 또 어떤 면에서 전 지구적인 태도가 병행하는 시점에 서 있다. 이제 바깥에서 문제가 제기되면 우리는 선을 그어버리거나 공통의, 전 세계적인 관심사로 키워 나간다. 그런데 이때 우리가 생각하는 세계란 무엇일까. 
언젠가부터 ‘세계가 모두 연결되어 있다’ 라는 이야기가 클리셰나 초기 인터넷 세대의 미래상처럼 들릴 정도로, 지구라는 세계에서 단절은 여전히 존재하고 생산된다. 지구라는 거대한 차원 뿐만 아니라 국가, 지역, 동네의 작은 규모까지 이런 단절은 존재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평소 모르는 사이에 외부와 내부는 분리되고 잘 돌아가는 내부에만 집중이 쏟아져, 이를 어느 순간부터 정상적인 세계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 바깥의 영역은 무엇이라 불리는가? 잘 돌아가는 내부의 자율적인 영역, 이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대상들은 그 바깥으로 밀려나고 배제된다. 작가 김동섭의 작업은 바깥이라 간주된 대상을 다시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태도로 작품을 만든다. 그는 이번 개인전 《원이 빗겨간 자리》에서 재개발 지역의 식물,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식물들이 자라는 터에 대한 관심사를 작품에 반영하여 보여준다. 그의 작업은 어떻게 보면 (이미 형식적으로도 실현된) 기능성 때문에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로 단순히 끝날 수도 있다. 그가 전시장에서 소개하는 작업은 문이나 벽처럼 생겼고(〈300-100〉와 〈회전문〉, 두 작업 모두 2019년에 제작), 식물을 위한 기능성을 고민한 결과로 나온 작업들(〈Flexible Container〉(2020) 등)이다. 
그렇다면 그가 식물을 대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기능은 어떤 방식으로 추구될까. 흔히 일컬어지는 ‘미술과 기능의 병합’이라는 말에 머물지 않고, 그가 하고자 하는 바는 어떤 필요 요건에 다른 옵션을 추가한다기보다 간과된 필요 요건 자체를 만드는 데에 있다. 이에 작가는 증식의 방법과 태도로 접근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증식은 식물이라는 개체의 속성을 묘사하는 말이자 동시에 그의 작업에 제작방식에 반영된 태도이다. 〈300-100〉에서 상하좌우로 붙일 수 있게 만든 최소 단위는 하나로는 벽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지만, 개수를 늘려 구축함으로써 작가는 공간을 증식하여 궁극적으로 식물을 키우는 실질적인 환경을 고민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업이, 특히 〈300-100〉는 건축가 쿠로카와 키쇼(Kurokawa Kisho)의 〈나카긴 캡슐 타워〉(1972)와 그를 포함한 이른바 메타볼리즘(Metabolism) 건축이라 포괄적으로 일컬어지는 이론 및 사상과 건축의 결합된 형식과 다르다. 그들이 인간의 터를 찾는 데 끌어들인 ‘자연(의 순환성)’이나 캡슐이나 모듈 형태의 건축 공간과 달리, 김동섭은 거처로 인지되지 않는 대상들을 부각시켜 이들의 영토를 넓혀가고자 실용성을 작품에 끌어온다. 
그에게 재개발 지역과 거기서 자라나는 식물들은 세계의 안정적인 순환성에서 배제된 대상들이다. 모르는 사이에 세계에서 추방당한 이 개체들을 위해서 원은 개념적으로도 형식적으로도 비틀어진다. 원의 바깥으로 내 버려진 개체들은, 작품을 통해서 원의 내부로 침범한다. 이는 일찍이 고든 마타-클랙(Gordon Matta-Clark)이 자투리 공간을 프로젝트로 구매하고 실현한 〈Reality Properties: Fake Estates〉(1973)과 같은 맥락이다. 그는 이 프로젝트에서 도시공간에서 사람들이 쓰지 않고 남겨진 부수러기 같은 공간을 구매하여 자료로 정리했다. 잘 쓸 수 있고 기능하는 공간(마타-클랙에게는 화이트 큐브가 그랬을지도 모른다), 즉 ‘잘 돌아가는 공간’에 머물지 않고, 배제된 공간까지 끌어와 안정적인 모양을 형식적으로도 그리고 개념적으로도 내부에서 파열한다. 비록 마타-클랙의 결과물이 형식적인 원을 보여주지 않고 있지만, ‘잘 돌아가는 공간’에 대한 접근은 원과 세계의 안정적인 속성에 도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 전시 제목과 전시장의 작업을 보면 원이 강조되어 있지만, 이를 이해하려면 앞서 말한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즉 원의 순환성을 개념적으로 변질시키는 데 원의 형식적인 사유가 동반되는 점이 그렇다. 작품에서 원이나 구를 반으로 쪼개거나, 〈원이 빗겨간 자리〉(2019)처럼 그 외부로 남은 곡면까지 강조하는 그의 태도는 세계라는 단어가 내포한 자율적이고 안정된 ‘원’을 거부하여 경계면 또한 땅이라는 더 넓은 면으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짚어 준다.
경계면은 땅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원에서 배제된 것들이 (오리엔탈리즘의 맥락과도 긴밀한 ‘이상하고 괴상함’ 자체를 소비하는 태도로 인한) ‘특수성’이나 ‘소수성’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원이 내포한 안정성을 개념적으로 비트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인간의 거주지를 아예 하늘에서 찾으려는 공중도시의 이상과 대치되어, 결국 땅과 (그야말로) ‘연결된’ 문제이다. 세계가 안정성을 획득한다면 거기서 배제된 것들은 아예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긴밀히 맞닿아 있는 존재들이고 재개발 지역의 식물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원은 사실 ‘바깥’과 땅으로 이어져 있는, 근본적으로 떼려고 해 봤자 뗄 수 없는 수평적인 관계 위에 놓여 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원이라는 순환성에 찌그러진 타원을 가지고 와 이에 더 바람직한 순환성을 보려는지도 모른다. 바퀴가 달린 〈원이 빗겨간 자리〉는 ‘어디서나’ 식물을 가꿀 수 있는 땅보다는, 이들을 배제한 원의 내부를 향하여 들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원의 내부에 영토를 늘려 원을 변질시킨다. 
이처럼 그의 작업에서 기능 혹은 실용성은 작품 자체에 머물지 않고 경계면을 침범하는 땅을 만드는 데에 있다. 이질성으로 남거나 세계에 포섭 당하는 것과 달리, 그는 분리된 경계면에서 안정적인 순환고리를 비틀려고 한다. 원은 원이 빗겨간 자리와 서로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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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mensionvariable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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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미나 개인전 <Light Grey>
2019. 12. 5. - 2019. 12. 22. | wed - sun | 12:00 - 19:00 | opening |  12. 5. (thu) 19:00 공간 가변크기 _ 서울시 성북구 삼선교로 2길 11 dimensionvariable.tumblr.com/ -
풍경을 쓰는 법
안성은(미디어 비평, 큐���이터)
조미나는 풍경을 쓴다. 여기서 쓴다는 건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풍경을 작업의 소재/주제로 다룬다는 것이고, 하나는 말하기의 방식 혹은 도구로 사용한다는 뜻이다. 어떤 상황이나 대상이 풍경이 된다는 건 관찰자와 어느 정도의 거리를 확보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조미나의 풍경은 작가가 들여다본 사회와 내면의 심상이 담긴 일종의 기록물로 관객과 만난다. 
첫 개인전 《Light Grey》에서는 옅은 회색을 입힌 새 캔버스 위에 옮겨온 총 8점의 회화 작품이 소개된다. 캔버스에는 이식하거나 가공하지 않은 날것의 자연이 담겨있다. 우거진 수풀, 기이한 암석층, 발치에 닿는 군집을 이룬 풀, 어른거리는 햇살 너머의 나무들, 생경한 질감의 사막과 번뜩이는 불꽃. 채도가 높고 낮은 각각의 장면은 개별의 구조를 가진 자연 속 단면이다. 대상과의 거리에 따라 부분이 전체가 된 장면이 있는가 하면, 제법 거리를 두고 멀찍이 서서 바라본 듯한 장면도 있다.
멀리서 환영과도 같은 불꽃을 바라보거나[1] 가보지 않은 사막 속 환경[2]을 캔버스 속으로 불러들이던 작가는 실제 풍경 앞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작가는 구조에 관심이 있다. 이는 평면을 탐구하며 어떤 상태에 대한 누적된 관찰과 (소리 없는) 크고 작은 폭발로 이어졌다. 이전 작업에서 외부나 가상의 환경을 가공하여 그것이 정리된 풍경으로 다가오기까지 여러 번의 형식 변화(평면 내 시점이동, 덩어리의 해체, 사용 빈도가 낮은 색상 매치 등)를 거쳤다면, 신작에서는 직접 마주한 대상에 대한 관찰을 통해 내밀하게 다듬어진 방식으로의 발산이 드러난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이는 <Grass of the night>와 <Fairy stream> 시리즈 (2019)는 작가를 압도시켰던 실제의 풍경에서 발췌한 것이다. 타국에서 마주한 야생의 자연에서 발견한 규칙, 나열, 경외,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구조들을 택했다. 대상과의 거리, 관찰자의 시점과 눈높이에 맞춰 시점의 변화를 담은 이 풍경들을 감상하기 위해선 관람에 움직임을 필요로 한다. 작품의 위치에 따라 고개를 들어 먼 곳을 응시하게 하거나 몸을 낮춰보고, 어깨쯤 왔을 풀의 높이를 가늠해 보게 하는 관람의 방식은 감각적으로 재편된 공간을 경험하게 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또한 장면에 대한 상상으로 한눈에 전체를 보기 어려웠을 키가 훌쩍 큰 풀숲 앞에 선 듯한 모습을 떠올려보기도 했다. 이처럼 여덟 개의 장면 앞으로 관람자를 바싹 끌어당긴 작가의 눈은 장면에 맞는 관람 동작과 시간사용법을 제시한다.
시각적 경험 외에도 만져질 것만 같은 촉각적 시각성, 실제의 촉감, 그리고 후각을 자극했던 기억 속 감각이 풍경이 되기까지 조미나는 잊히는 기억을 자꾸만 밝혀야 했을 것이다. 기억을 비추는 풍경의 빛이 희미해지지 않고, 잠잠히 그곳에서 누군가의 기억이 되는 곳. 《Light Grey》가 직조하는 풍경이 그와 같은 역할이 되기를 바란다.
[1] Explosion 시리즈, <Untitled>, 53x45.4cm, oil on canvas, 2016
[2] Explosion 시리즈, <Untitled>, 53x40.9cm, oil on canvas,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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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ghtgrey #light #grey #조미나작가 #조미나개인전 #미술전시 #art #전시 #가변크기 #공간가변크기 #삼선동 #한성대입구 #성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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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mensionvariable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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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 개인전 <추신: 다른 방법은 모르겠습니다>
2019. 11. 19. - 2019. 11. 30.
| tue - sun | 12:00 - 19:00 (화요일 정상운영)
| opening |  11. 21. (thur) 18:00
| performance| 11.21 (thur) 19:00
공간 가변크기 _ 서울시 성북구 삼선교로 2길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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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을 읽은 후 / 최선영
어쩔 수 없는 것 투성이인 게 사람이고 마음이고 오늘이다. 그런데 이유를 찾고 싶은 것도 사람이고 마음이고 오늘이다. 그러고 있는, 혹은 그러지 않는 이유. 내가 기대하는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지 않은 사람, 그 사람의 마음, 그 마음의 오늘. 그것은 그 자체로 힘들다. 누군가가 엉엉 울어버린 이유, 누군가가 밤늦게 전화한 이유, 누군가가 또 주저앉을 이유는 그래서 명확하지 않다. 오히려 가장 명확한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뿐이다. 물론 대체 왜 그러는지 이유를 듣고 싶은 사람에게 어쩔 수 없다는 말은 힘 빠지는 변명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무언가를 왜, 그리고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누군가 말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견딤의 터널을 빠져나온 상태에서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유희 작가의 덧붙임, ‘다른 방법은 모르겠습니다’는 그래서 작가 스스로를 향하는 혼잣말처럼 들린다. 그래서 작가가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쓰고 있어도, 그것은 더욱 고집스럽게 본인을 향하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의 어쩔 수 없음에서 시작된 편지는 그렇게 본인의 오늘로 배달된다. 누군가는 그것을 읽을 수 있으나 누구나 그 마음을 예상할 수는 없다. 써서 보내버리지 않으면 안 될 오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력한 이유가 된다. 작은 공간 안에서 불규칙한 생산을 해대고 있는 설치물 혹은 어떤 생명체 같은 것도 이유를 품고 설계된 유기체는 아니���. 며칠간만이라도 표현의 공간 안에서 존재하고 싶은, 혹은 존재할 수 있어서 다행인, 역시나 작가의 ‘덧붙임’이다. 뿜어내거나 쏟아내거나 흔들리는 그것은 다른 표출의 방법을 찾을 수 없기에 잠시 허락된 공간과 시간 안에서라도 자신을 드러낸다. 더욱 예술적으로 작동되고 배치되어 편지든 설치물이든 작가의 미래에 어떤 기여를 하기를, 우리는 함부로 바랄 수 없다. 더 많이 울어버리고 못나버리고 어긋나버리고 그러다 더욱 사적으로 빠져들어 작품보다 작가의 감정이 불편할 만큼 툭 튀어나온다고 해도, 그 어쩔 수 없음은 예술을 뒤덮는 무거운 돌덩이들처럼 쌓여야 한다. 이리저리 다듬고 매만져 모두의 눈앞에 미적으로 펼쳐낼 수 있다면 그건 감정도 아니고 예술도 아닐 테니까. 한 번의 전시로 미래를 살아낼 수는 없으니, 다른 방법도 찾을 수 없는 (작가 이전에) 개인이 현재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 사람이 격하게 쏟아내야 관객이든 타인이든 그것을 볼 수 있다. 작품으로 격리된 감정이 아니라, 작품이라도 되어야 했던 감정을. 우리에겐 서로 연결된 삶과 마음이 오로지 단서다. 작가가 뾰족한 말투나 어두운 커튼, 시시콜콜한 문장들로 전시장을 가득 매워도 그건 서로가 연결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신호일지 모른다. 현재 작가는 계획된 방법을 통해 그 신호를 만들고 송신할 수 없다. 단지 할 수 있는 것을 해봄으로써 오늘을 살 뿐이다. 이런 신호를 듣기 위해서는 수신 정보를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어떤 마음이 있는지, 우리가 그것을 외면하지 않을 수 있는지 들여다보는 순간, 신호는 조금씩 작가의 육성으로 들리기 시작한다. 이미 전시 제목에서 그 목소리는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가. ‘추신’은 사실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강조하기 위한 소통의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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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다른방법은모르겠습니다 #추신 #다른방법은모르겠습니다 #유희작가 #유희개인전 #미술전시 #art #전시 #가변크기 #공간가변크기 #삼선동 #한성대입구 #성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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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mensionvariable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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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백 개인전 <길 위의 순간선(불타는 카메라)>
2019. 10. 31. - 2019. 11. 14.
| wed - sun | 12:00 - 19:00
| opening |  10. 31. (thur) 19:00
공간 가변크기 _ 서울시 성북구 삼선교로 2길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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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이 일렁이는 곳
| 안성은(미디어 비평, 큐레이터)
“우리는 누구나 어떠한 순간 위에 있다.”
-작가 노트
한영백은 일상의 단면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스트릿 스냅 사진을 찍는다. ‘순간선(순간을 마주하고 기록하는 시선)’이라는 작가명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영백에게 길 위의 순간을 기록하는 일과 그 시선에 대한 생각은 오랜 주제이다. 작가가 몰두한 일상의 파편화된 시간은 어떤 모습일까? 개인전 《길 위의 순간선(불타는 카메라)》에서는 그가 유학 후 구직을 위해 도쿄에 머물렀던 지난 2017년 촬영한 사진들 중 일부를 소개한다. 붉은 빛으로 얼룩진 23장의 사진은 촬영 시에는 미처 몰랐던 카메라 고장으로 빛이 새어 들어가 노광 된 필름에 담긴 도쿄의 풍경들이다. 필름이 빛에 노출되면 흔히 ‘필름이 탔다’고 말하는데 전시 명의 부제인 ‘불타는 카메라’는 여기서 착안하여 붙여졌다.
작고 휴대가 용이한 필름 카메라 ‘후지 티아라 II’를 들고 거리로 나선 작가는 도시의 장면들을 기록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에 관한 기록을 이어왔다. 지하철에서 잠이 든 아이와 노인,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 사람이 가득한 거리, 어딘가를 응시하는 사람들의 표정 같은 것들. 고감도 필름으로 기록되어 입자가 거칠고 노이즈 범위가 넓은 사진 속 거리 곳곳에 불꽃이 인다. 사진의 면을 따라 겹쳐진 붉은 빛은 때론 비처럼, 바람처럼 거리에 피어오른다. 평면 위로 얹힌 붉은 빛에 휩싸여, 오늘의 광경은 어제와 같지 않다. 채도가 높고 노란빛이 강하게 도는 코닥 울트라맥스 400이 쓰인 이 사진들은 저해상도 특유의 색 면이 잘게 분절된 표현이 강조되어 입자가 굵은 점묘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는 카메라를 통해 객관적 대상을 포착하지만, 그 결과물은 그가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관념적 대상이 된다. 여기에 사용한 카메라의 선예도나 해상력, 필름 고유의 색채와 감도 등이 더해지면 또 다른 심미적 필터가 씌워진다. 이는 조형성과 의미화의 과정에 개입되는 주된 요소로 작용하여 표현과 해석의 차이를 낳는다.
한영백의 고장 난 카메라가 부여한 우연적 효과는 일상과 포착 사이에 반쯤 스며든 레이어로 존재하며, 우리를 둘러싼 일상 풍경에 대한 인상적 피드백으로 기능한다. 스트릿 스냅 사진은 솔직한 표현 방식이다. 연출되지 않은 비 계획성, 그리고 순간 포착하지 않으면 사라질 한시적 장면을 기록한다. 스냅 사진을 관람하는 즐거움 중 하나는 정지된 순간으로 기록되었으나 거리 속 사람들의 모습은 다음 동작을 예견하게 하는 움직임이 함께 담겨있다는 점이다. 이는 사진 속 공간에 시간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동적-정적 특성을 함께 가진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읽힌다.
일상의 단면이란 때론 비일상적 풍경에 가까워서 익숙함과 동시에 낯설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다. 거기에 사진의 힘이 있다. 이어 ‘불타는 카메라’는 거리와 풍경이 한 사람의 시선에 의해 어떤 겹으로 구성되는지에 대해 들여다보게 한다. 층층의 시선, 눈-빛으로 일렁이는 그 길을, 고요히 들여다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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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의순간선 #불타는카메라 #길위의순간선불타는카메라 #한영백작가 #한영백개인전 #미술전시 #art #전시 #가변크기 #공간가변크기 #삼선동 #한성대입구 #성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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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mensionvariable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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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굴 OPIUM DIVE>
2019. 10. 10. - 2019. 10. 24.
| wed - sun | 12:00 - 19:00
| opening |  10. 10. (thur) 18:00
| 참여작가 | 김정활, 김한샘, 박성민, 이길재
‘이게 대체 뭘 까?’ 미술작품을 보면서 자주 하게 되는 생각이다. 작품의 모든 부분 들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는 일은 이제 “쿨”하지 않은 것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물감이 겹겹이, 덕지덕지 굳은 그림의 표면을 가까이서 자세히본다. 붓이 지나간 자리에서 일어난 일들을 상상해 보기 위함이다. 작품이 받아들인 힘의 흔적들과, 물리적인 사건들이 일어났던 크고 작은 장소들을 눈으로 만져 본다.
그림이 아닌 사진을 볼 때면, 정전기가 일어나 먼지가 붙을 것처럼 평평하고 매끈한 표면을 자세히 들여다보게된다. 잉크젯 프린트인지, 레이저 프린트인지, 구식 실버 프린트인지 유추해 본다. 그것이 컴퓨터 그래픽 도형들을 프린트한 것이라면 JPEG를 인쇄한 것인지, 벡터 이미지를 인쇄한 것인지 가까이서 살펴본다. 인화되었거나인쇄된 표면의 질감은 그 표면�� 그려진 이미지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작품과 물리적으로 마주하며 새삼 깨닫는 사실은, 이 작품들이 각자의 중력을 받으며 3차원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벽이나 천장에 걸려있거나 어딘가에 놓인 작품은 중력과 마찰력에 의해 마치 정지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고전 비디오 게임인 둠 2처럼, 어떠한 각도에서 보던 간에 앞모습만 있는 평면들이 나를따라다니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다양한 시간과 시점에서 작품을 보게 된다.
나는 방 안을 떠다니는 카메라가 되어 작가가 만든 이 삼차원의 물체가 어떻게 우리가 사는 세계와 접속했는지를 생각해보기로 했다.
⇱ 박성민이 점토를 붙여 만든 사람 형상의 조각은 그가 평소 흙을 만지던 습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잠 든 노트북을 깨우려 마우스를 흔드는 ���의식적인 동작처럼, 손이 기억하는 대로 흙을 주물러 깨우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사람의 형상을 만들겠다는 목적과 손재주의 영역이 다투었기 때문에 결과물은 조금 더 전쟁터 같다. 박성민에게 손으로 흙으로 형상을 만드는 일은 무엇일까? 사람의 손으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오작동과 지연의 연속이다. 이는 로봇 팔의 동작과 비슷하다. 전기 신호로 근육을 움직이고, 감각기관들은 그에 대한 피드백을 토대로 다음 행동을 결정한다.
⇡ 김한샘은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컴퓨터를 켰을 것이다. 컴퓨터는 손의 입력을 데이터로, 이를 그래픽으로 변환해 모니터에 출력하는 과정을 비밀스럽고 꽤 정확하게 처리한다. 작가는 이리저리 마우스로 그림을 움직이고 색을 입혀 보았을 것이다. 액자의 모양대로 판을 자르는 공정을 위해 김한샘은 무한에 가깝게 늘어나는 2차원의 도면을 만든다. 화면을 보고 결과물을 상상하는 과정에서 지연이 생기고, 도면이 입력된 기계는 비물질에 가까운데이터를 물질의 세계로 잘라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은 액자(같은 것)와 평면 프린트로 나뉘었다가, 합쳐진다. 사실 그 둘은 처음부터 한 몸이다. 두 개가 분리되어 인식되는 것은 시선의 이동에 따른 사고의 지연에서 발생한다.
⤉ 김정활의 그래픽 디자인 시트는 이 전시의 제목을 가장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동시에 사실 제목 그 자체이다. 제목은 디자인의 단서가 되었고, 디자인은 다시 제목의 유일한 단서가 되었다. 잠든(죽은) 사람의 모습과 몇개의 도형들이 밀대로 밀려 유리에 붙었다. 유리는 액체임과 동시에, 가장 편리하고 보편적으로 투명성을 유지하는 고체 역할을 한다. 그 위에 붙은 시트는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지만 너무나도 미세해서 알아차릴 수 없고, 정말로 도형인 것처럼 붙어있다.
미술 작품은 그것을 만드는 작가와 어떻게 접속할까? 또 그 미술품은 어떻게 세계와 접속할까? 동굴 벽화를 그리다 옆에 있는 석순이 대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상상했을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글 이길재
공간 가변크기 _ 서울시 성북구 삼선교로 2길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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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굴 #OPIUMDIVE #아편굴:OPIUMDIVE #미술전시 #art #전시 #가변크기 #공간가변크기 #삼선동 #한성대입구 #성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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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mensionvariable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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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은 ‘볼 수’ 있지만 ‘알아보기’ 힘들다: 김은정 《홈커밍》
우리는 흔히 페인팅을 본다고 하지만 대부분, 특히 추상회화가 아닌 구상회화를 볼 때 페인팅 자체보다는 물감이 무슨 형상을 닮았는지 보게 된다. 어떤 인물이 캔버스에 그려질 때, 우리는 그 대상을 인물로 인식하지 물감의 덩어리나 붓질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공간에 시선이 간다. 이른바 환영적 공간을 연출하는 페인팅은 평면성보다 공간의 깊이감을 창출한다. 페인팅에 연출된 인물과 공간을 우리가 바라볼 때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재현된 대상과 소실점을 향한다. 이때 시선은 페인팅 자체가 아니라 작가의 기교 혹은 테크닉에 의해 창출된 재현으로 고정된다. 이런 상황에서 감상자가 페인팅을 바라보는 태도는 몰입이라 할 수 있다. 감상자는 페인팅을 보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페인팅 자체가 아니라 창출된 환영과 재현에 관심을 두게 된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몰입이 거부되거나 차단될 때 페인팅은 페인팅 자체로 다시 나타난다. 이는 추상회화에 국한되지 않으며 어떤 구상적인 형태를 가진, 말하자면 재현에 기반한 페인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몰입하려고 하다가 중간에 시선이 차단되는 경우, 그것이 사실 페인팅이라는 인식으로 되돌아온다.
그것이 페인팅이었다는 사실로 재현과 환영적 공간을 막아서는 작업이 바로 김은정의 페인팅이다. 그의 작업을 볼 때 우리는 몰입을 시도하다가 시선이 가로막혀버린다. 이번 전시 <홈커밍>에서 소개된 작업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어떤 장면을 그렸는데 거리감을 조절하여 그려진다. 여기서 말하는 거리감은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시선을 공유할 수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작년에 만난 거품〉(2019)처럼 구체적인 대상에 등장인물의 시선을 찾을 수 있는 작품도 있고, 〈방과후〉(2018)나 〈산책〉(2018)처럼 등장인물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파악할 수 없는 작품도 있다. 후자가 그렇듯이 여럿이 모여 어떤 대상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는 그림에서 우리는 그 대상을 페인팅에서 발견하지 못한다. 작가가 제목을 통해 폭로하지도 않고 우리는 캔버스에 그 대상을 찾아볼 수도 없다. 그렇지만 김은정의 페인팅에서 사람들의 시선이 향하는 대상을 파악하지 못할 때 그것이 무엇인지 중요하지 않는데 이는 작가가 주제와 표현방식에서 거리감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 《홈커밍》에 포함된 작업은 작가가 일본이나 영국을 비롯한 외국에서 목격하고 경험한 장면을 소재로 다룬 것이다. ‘홈커밍’이라는 단어가 귀향이나 동창회를 뜻하는데, 이 단어의 의미는 친숙한 사람보다는 낯섦에 더 맞춰진다. 시간이 흘러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 느끼는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 봐도 파악할 수 없는’ 거리감은, 작가가 해외에서 경험한 여러 장면과 무리에 속하지 못하고 있는 장면에 먼저 등장한다. 멀리서 쳐다보는 작가의 시선은 전시공간에서 그의 페인팅을 보는 사람의 시선을 동기화한다. 말하자면 어떤 무리에 속하지 않고 시선이 향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보여지지 않는 위치에 선 작가의 거리감은 페인팅의 환영적 공간에 끝까지 들어가지 못하는 감상자의 위치와 나란히 서게 된다. 인물들의 시선이나 손가락 방향은 관람자의 시선을 페인팅 속 무대를 향해 유도한다. 모두가 함께 바라보는 곳에서 가까이 가서 보려고 하지만 결국 그 무대에서 그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봤자 그것은 그림이기 때문이다. 재현된 공간으로 들어가려고 혹은 원근법과 대상에 시선을 맞추려고 집중하지만, 사실 거기에 아무것도 없어서가 아니라 페인팅이기에 그들이 다 같이 보는 방향과 시선은 차단된다.
이처럼 페인팅 표면 자체에 대한 시선은 환영적 무대에 올라간 주인공이 아니라 멀리서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과 위치를 동기화한다. 대상이 명확하게 나온 〈작년에 만난 거품〉에서
감상자가 ‘함께’ 보게 되는 것과 달리, 〈시선회피〉나 〈산책〉은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감상자의 시선을 페인팅이 막아 버린다. 이때 감상자는 페인팅 앞에서 작가의 입장에 함께 서게 된다. 궁극적으로 내가 거기에 끼지 못하고 거리를 유지하는 것과 같이, 감상자는 페인팅 속 무대로 들어가지 못해 그 표면만 보게 된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하면서도 이제 시선은 환영적 공간의 무대에서 페인팅 자체의 표면으로 돌리게 된다. 그들의 시선이 아닌 작가의 시선이 동기화된 관람객은 페인팅 표면을 보다가 다른 곳을 향해 시선이 흩어진다. 예를 들어 여학생들을 덮는 흐릿한 아우라 (같은 것)(〈방과후〉), 옆에서 보는 관객들의 (무)표정(〈차이나타운〉, 2019), 그리고 작품 중앙에서 절단되어 중첩��� 이미지로 그려지는 남성(〈깃깃사람사람〉, 2019)은 시선을 한 곳을 향해 집중시키지 않고 표면의 다른 곳들로 시선을 자꾸 향하게 만든다.
작가의 시선은 그들이 무언가를 보고 있는 장면을 주변부에서 포착하면서 그들이 보는 것과 내가 보는 것 사이의 공간적 거리감, 더 나아가 페인팅의 공간과 감상자 사이의 거리감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거리감은 페인팅 자체에 시선을 돌리게 하여 오히려 그들(페인팅 등장인물)이 직면할 수 없는 낯섦을 발견하게 된다. 〈방과후〉에서 우리는 그들의 표정도 그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도 파악할 수 없지만, 그들이 보는 것과 다른 곳을 또 본다. 사실 일본 진보쵸에 위치한 헌책방 앞에 진열된 책들을 보는 여학생 세 명을 그린 이 작업은 세 명을 감싸는 그림자와 배제된 묘사를 통해 낯설게 보여준다. 그의 이전 개인전 《연기나는 사람》에서 연기와 인물만 남긴 〈도움닫기〉(2018)와 〈연기나는 머리〉(2018)와 같이 〈 방과후〉 또한 배제를 통해 아무렇지도 않은 장면을 낯설게 보여준다. 그러기에 그의 페인팅은 몰입과 다른 ‘위치’에서 낯섦을 찾게 된다. 바로 페인팅 표면이라는 위치에서, 바꿔 말하면 페인팅의 물감이나 표현에 기반한 캔버스 표면에서 낯섦을 보여준다.
감상자인 우리는 아무리 가까이 들어가 보려고 해봤자 페인팅 자체, 즉 표면의 물감이나 표현으로 시선이 다시 돌아온다. 표면으로 마주 보는 페인팅은 어디서 본 장면인지, 어디서 경험한 내용인지, 그리고 정확하게 이 사람들이 무엇을 쳐다보고 있는지와 같은 궁금증을 가로막아 페인팅 자체에 시선을 돌리게 한다. 요컨대 내부/내용으로 향하는 몰입과 집중이 차단되어 이제 표면을 보게 된다. 이는 동창회에서 우리가 상대를 인식할 때 얼굴을 알아‘보는’ 바와 같이 그의 페인팅에서 두드러지는 낯섦은 주제뿐만 아니라 표면에서 시작한다. 앞서 “세 명이 정말로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앞서 다가오는 것은 진입할 수 없는 공간적 거리감에 기반한 감상자의 시선, 우리가 포착하는 “저 안개 같은 것이 뭐지?” 하는 의문이다. 적어도 그 질문은 내부나 내용에 앞서 주변부에 위치한 우리가 갖게 되는 의문이며, 작가가 포착하려는 바이다.
콘노 유키(미술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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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개인전 <홈커밍>
2019. 8. 15. - 2019. 8. 30. | wed - sun | 12:00 - 19:00 | 별도의 오프닝은 없습니다. 공간 가변크기 _ 서울시 성북구 삼선교로 2길 11 dimensionvariable.tumblr.com/
 #김은정 #김은정작가 #개인전 #홈커밍 #미술전시 #art #전시 #가변크기 #공간가변크기 #삼선동 #한성대입구 #성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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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mensionvariable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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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 개인전 《GET OUT》    
떨리는 켄, 캔버스라는 대지
“희미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도시 하나가 자신의 몸을 접어 지면을 향해 수렴한다. (………………………………….) 외딴 섬 같은 도시는 주황색의 아침 햇살 속에서 자리를 잡고, 펼쳐져서, 바로 선다. 도시 주변으로 희끄무레한 구름이 일어난다.”  
- 하오징팡, 「접는 도시」, 『고독 깊은 곳』, 강초아 역, (글항아리, 2018), p. 21.
    도시 전환
 이지현 작가를 만나 작업에 대해 얘기를 나눌 때면, 글의 시작에 앞서 인용한 하오징팡(郝景芳)의 소설 「접는 도시」가 떠올랐다. 이 SF소설의 주인공 라오다오는 베이징의 ‘접는 도시’ 중 제3공간에 거주하는데, 누군가의 부탁으로 다른 공간으로 목숨을 걸고 이동한다. 3개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접는 도시’는 계급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의 양도, 공간의 너비도 다르다. 계급 간 이동은 물론, 공간과 시간이 모두 단절된, 가상의 혹은 미래의 세계다. 새벽 6시, 고층빌딩이 기울어지며 큐브처럼 접혀 땅으로 들어가면, 잠자고 있던 다른 도시가 깨어나는 형태다. 이지현과 관련해 주목한 부분은 ‘도시 전환’이다.
이지현은 도시를 접고, 다른 도시로 넘어가는 중이다. 이 전환 사이에 많은 그림���이 생겨났다. 이전 도시의 끝 무렵부터 앞으로 열릴 새로운 도시를 예고하는 지금까지, 회화와 색연필 드로잉이 끝없이 새어나왔다. 이지현에게 캔버스는 하나의 에너지 변형 공간이다. 그는 현실에서 온 감정과 시각적 잔상을 캔버스에서 분해하고, 재배열한다. 이 캔버스-대지에서 기존에 그를 엮던 억압적 질서로부터 전달된 부정적 에너지가 분할, 변형을 거쳐 소멸해간다. 때론 평면의 레이아웃을 늘려 그만큼 대지를 쪼개 기존의 힘을 무화한다. 대지의 평면을 포 뜨듯 나누어버리자 단단해 부서질 것 같지 않던 기운이 쇠멸해간다.
그가 자신의 삶과 그 변화의 의지를 토대로 작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4년에 열린 개인전 《Hysterical Play [히; 극]》에서 그가 받아온 ‘억압’의 뒷면으로 ‘히스테리컬한 극’이 펼쳐졌다. 자화상 <거울 속의 나>는 머리와 등 뒤에 온통 눈물인지 식은땀인지 모를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자신을 그린 그림이다. ‘나’의 뒷모습 앞에 비친 것은 좀처럼 ‘나’의 얼굴이지는 않은 것 같은, 울룩불룩한 고릴라의 얼굴이다. 이 괴기스러운 얼굴은 계속해서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것들의 표현일 것이다. 정말로 거울에 비친 ‘나’의 얼굴이라면, ‘나’ 없어진 ‘나’일 것이다. ‘나’를 객관적으로 설명하고자, 변호하고자, 지켜내고자, 혹시라도 모르니 끝없이 의심하면서 나를 무대에 올리고, 귀를 열어 타자의 이야기를 듣고 나를 들려주며 주변을 곱씹었던 그다. 최근 그의 그림에 ‘나’는 등장하지 않는다. 객관화하려는 나, 나를 설명하기 위한 ‘나’는 없다. 나의 세상을 스스로, 가장 적극적으로 빠져나오는 ‘나’만이 있다. 작가이자 화자로서 작업을 제시하는 그는 작업에 보이지 않게 머무르기도 하면서 동시에, 완성한 그림을 자신에게서 벗겨낸다. 이전 작업에서 현실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스스로 무대에 올라 신경증적으로 웃어버렸다면, 지금의 그는 캔버스 위에서 분해한 현실을 동력삼아 전환을 이루어낸다.
시간의 재배열
불안한 마음으로 다리를 떨던 그 간격처럼, 색연필과 붓은 무수히 위아래로 움직이며 굽이쳤다. 생략되었던, 도망가 버렸던, 스스로 묻어두었던 시간을 되돌리기를 시도했다. 회화, 회화를 준비하는 에스키스, 그리고 드로잉을 그렸다. 특히 색연필로 제약적인 시간에서 벗어나 자유로우면서도 세밀하게, 한 땀 한 땀 시간을 직조했다. 시간을 조정하는 일은 과거의 ‘나’의 시간에도 영향을 준다. 그는 유년시절 좋아했던 ‘스트리트파이터’ ‘드래곤볼’ ‘호호형제’ ‘코난’과 같은 애니메이션을 되새겼다.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와 접하게 된 놀이하는 이미지, 아이와 살며 본 모든 일상 세계의 이미지를 부분적으로 자신의 대지로 가져왔다. 돌, 초, 인형. 주로 이지현은 애니메이션이나 GIF의 흔들리는 이미지를 화면에서 꺼내왔다. 떨어져 나온 부분적인 이미지 각각에 설정된 시간과 공간의 질서를 무화하고, 나의 작동원리를 만드는 요소들로 취했다. 좌절된 시간을 움직이게 하고자, 시간의 초침을 이동시킨다. 타임머신을 타는 시간 여행이 아니라, 내 손으로 시계를 돌리는 것과 같은 전환, 시간의 재배열이다.
공간을 접고 빠져나왔으니 일시적으로는 공간이 없다. 아니면 캔버스를 대지삼아 전환을 시도했으니 다른 곳으로 이동한 셈이다. 공간 없는 공간에서 <Kens>가 만들어졌다. 버퍼링의 기록처럼 평면 위에서 파이터 ‘켄’이 미끄러져 내려온다. 애니메이션에서 이미지 한 장에 할당된 짧은 시간을 하나의 캔버스에 연속적으로 모아둠으로써, 시간의 흐름이 하나의 시간으로 고정되었다. 기존의 시간과 배경에서 이탈한, 얼굴 없는 켄의 몸이 사방으로 갈라진다. 또는 반복된다. 켄은 쇠진하면서 강화된다. 하나의 켄이 열 세 개로 나눠져 해체되면서도 열 세 배로 늘어 에너지가 강화되는, ‘지우기’와 ‘만들기’라는 두 가지 운동이 동시에 진행되는 상황이다. 물감 자국은 남았더라도, 평면적으로 추상화되고 만 켄의 배경으로 원근감 있는 타원형 기둥이 반복된다. 평면에 깊이를 더하는 작가만의 균형 잡기 방식이다. 막 만들어진 회색의 대지에서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하는 켄.
드래곤볼의 주인공 손오공을 모티브로 한 <Lost FACE>에서도 기존의 도시를 뒤로하고 발돋움하는 이지현의 접혀있던 마음이 펼쳐진다. 회색의 대지 위에 알 수 없는 또 다른 대지가 개입해 있고, 그 레이어 위에 얼굴 없는 손오공의 상반신이 고정돼 있다. 그 뒤로는 그가 잃어버린 얼굴이 바위나 차가운 달처럼 두 번 반복된다. 얼굴에서 분리된 채로 두 번 그려진 눈 두 쌍은 평면의 회색 대지와 그 위에 알 수 없는 대지 사이에 껴, 눈을 부릅뜨고 있다. 손오공의 몸에서 분리돼 그의 눈으로 기능을 할 수 없지만,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꽤나 강력하다. 이지현은 차용한 캐릭터의 이미지 요소를 ‘분리’와 ‘반복’을 통해 캔버스라는 하나의 시간과 공간 안에 포갠다.
한 걸음 한 걸음을 걸어 나갈 바닥의 타일을 붙여나가듯이 이지현이 그려낸 그림들이 ‘가변크기’의 벽면에 걸렸다. 점차 전시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스스로를 대변하는 곳으로서, (단순한 이해나 변호의 장이 아니라) 모든 개인의 다양성이 교차하는 장으로 기능해가고 있다는 점을 떠올려볼 때, 스스로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이지현의 그림들 앞에 서서 우리의 지금의 삶, 연결된 과거, 바꿔나갈 미래에 귀 기울여보는 것은 어떨까? 작가가 마주할 새로운 세계는 어떠할지 궁금해지는 지금도 그는 다가올 미래를 직조해내고 있을 것이다.              
글 김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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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 개인전 <GET OUT>
2019. 9. 5. - 2019. 9. 22. | wed - sun | 12:00 - 19:00 (추석연휴 정상운영) | opening_9.5. (thu) 17:00 - 20:00 공간 가변크기 _ 서울시 성북구 삼선교로 2길 11 dimensionvariable.tumblr.com/ - #이지현 #이지현작가 #개인전 #겟아웃 #GETOUT #미술전시 #art #전시#가변크기 #공간가변크기 #삼선동 #한성대입구 #성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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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mensionvariable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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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빛이 살아있는 시간
 강한 빛과 어둠, 촉촉하게 젖은 자연을 닮은 얼룩들. 이것은 어떤 풍경인가? 대담한 녹색의 농담으로 채워진 회화에는 망막으로 경험한 풍경에 관한 자연주의적 기록으로 쉽게 범주화하기 어려운 작가의 섬세한 내적 추동이 공명하고 있다. 김주현은 도시 속 일상에서 종종 자연을 향한 동경 혹은 갈증을 느낄 때면, 공원이나 숲,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길 위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시시각각 변하는 빛, 냄새, 움직임, 색감 같은 비정형의 특징을 목격하고 그 속으로 충분히 흡수되려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떠오르는 단상이나 내면의 감정적인 변화를 끈기 있게 수집하는데, 이는 이미 작업을 위한 출발로서 다양한 장소와 시간에 일어나며 흔들리는 사진과 작은 드로잉들이 그날의 단상을 머금고 있다.
 작업실로 돌아오면, 작가는 외부에서 얻은 심상을 토대로 완전히 새로운 장면을 구현하려 한다. 요컨대 김주현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어떤 대상을 구체적으로 모방한 것이기보다는 스스로 체득한 다층의 감각들을 구상과 비구상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할 이미지로 표현한 것에 가깝다. 주로 느낄 수 있지만 그 형체가 모호하거나 가변적인 덩어리들이 그려지는데, 가령 나뭇잎 사이에서 흔들리는 빛의 변화, 나무줄기가 땅 위에서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선의 리듬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캔버스를 평행선에서 마주하기보다는 마치 숲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그 안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이에 신체를 충분히 담을 수 있는 여백이 필요해지고, 다루어야 할 화면은 바닥에 놓인다. 이제 비어있는 공간 위에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 보았을 숲의 표정과 당시의 기억이 수행적인 신체와 붓의 움직임으로 연결되는 순간, 그리고 작가가 체득한 공기의 질감과 향기가 물감의 맺힘으로 압축되어가는 과정 그 자체이다. 숲을 지나 캔버스를 유영하는 몸의 시간들이 집약되어 비로소 하나의 심리적인 풍경을 생성하게 된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 <녹색 광선>의 주인공 델핀은 자신에게 행운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초록빛 단서들을 따라 스스로의 진실된 내면에 조금씩 가까워지다, 태양이 수평선을 넘어가는 찰나에 짧게 반짝이는 녹색 광선의 아름다움을 목격한다. 김주현이 초록의 화면들을 포착하고 되풀이하는 것은 결국 델핀이 녹색 광선을 만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숲속의 어두운 그림자와 반짝이는 빛 사이에서 자신의 새로운 내면과 만나게 될 찰나를 기다리기 때문일까? 작가는 자연으로부터 전이된 내면의 감정을 존속하고 확장시키기 위한 중개물로서 회화를 인식하며, 따라서 그가 보여주는 풍경화는 외부의 광학적 재현을 넘어 진실된 내적 경험으로 향하는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글 박지형(독립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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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mensionvariable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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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OO>
 이고운의 첫 개인전인 <OO.OO>는 회화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함축한 제목이다. 알파벳 O, 숫자 0, 한글 ㅇ의 형태 사이에서 표류하는 이 제목의 의미는 특정한 상태로 고정되어 읽히기를 거부한다. 이는 회화에 대한 작가의 태도와도 유사한다. 0이라는 숫자가 음과 양의 체계 가운데에서 어떠한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있는 것처럼 작가의 회화 또한 구상과 추상 사이를 유영한다.
 작가는 그동안 물감을 쌓아올리고 색과 형태를 구성하는 방식에 대해서 고민해왔으며 이 고민은 풍경을 소재로 하였을 때 극대화되었다. 풍경은 저마다 개성을 지닌 풀, 꽃, 나무, 돌 등으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구상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를 인식하고 기억하는 과정에서 추상화 되기도 한다. 이러한 진자운동은 풍경이 시간, 상황, 인식에 따라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구조를 지니기 때문이다. 즉, 풍경이 한 주체가 인지하는 시공간의 단면이라고 할 때 풍경은 고정불변의 틀에서 벗어난다.
 풍경의 속성은 작가가 생각하는 회화와도 상통한다. 회화는 물감과 붓이라는 물질적인 매체를 이용하여 구성되나 물감의 농도, 혼합, 갈라짐, 확산 등에 따라 변수와 불확실성을 그 안에 지닌다. 작가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이 불확실성을 들여다보는 것이 자신의 작업이라고 언급하면서 그 긴장감을 즐긴다고 고백한 바가 있다. 시간이 축적됨에 따라 두터운 물감이 겹쳐지면서 작품은 물질성을 구축한다. 그러나 동시에 마르는 시간, 대기의 온도와 습도, 작가의 순간적인 인식과 판단에 따라서 결과물은 예측하기가 어려워진다. 심지어 작품이 완성되고도 작품은 계속해서 관객의 인식 속에서 변화한다. 이러한 회화의 특성은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를 오고가는 풍경과 유사하다.
 작가는 구상과 추상 사이, 팽팽한 끈의 긴장감을 풍경으로 표현하는 기민함을 지녔다. 비교적 초기작인 <자라나고 불어난>에서는 어디엔가 존재할 법한 상상의 풍경을 구상해냈다면 <물불>에서 다른 속성의 풍경을 결합하였다. 작가는 이때부터 다른 성질의 자연물들, 가령 물과 불을 뒤섞어 경계를 확장하는 과정을 시도한다. 반면, <땅의 이야기>와 같은 경우에는 작업을 진행할 때부터 캔버스의 모든 방향을 활용하여 제작하였다. 이에 따라서 관객은 풍경을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흐르는 결에 따라 조형성을 상상한다. <가만히, 땅바닥>, <가만히, 섬>, <가만히, 절벽>와 같은 경우에는 작가가 인체에서 풍경의 미감을 발견한 순간을 관객에게 제안한다.
 이고운의 회화는 특정한 소재를 중심에 두지 않고 회화의 성질을 다루는 최적의 방법을 고민해왔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관객들 또한 정형화된 풍경이 아닌 전시 제목의 O와 같이 미적으로 열린 가능성을 지닌 풍경을 감상하기를 기대한다.
큐레이터 박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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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운 개인전 < OO.OO > 2019. 6. 13. - 2019. 6. 28. | wed - sun | 12:00 - 19:00 공간 가변크기 _ 서울시 성북구 삼선교로 2길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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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mensionvariable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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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주 개인전 < The Shape-Shifting Girl  > 2019. 5. 9. - 2019. 5. 24. | wed - sun | 12:00 - 19:00 | opening _ 5. 9. (Thu) 19:00 공간 가변크기 _ 서울시 성북구 삼선교로 2길 11  
<더핑크쉐잎쉬프팅걀(The Pink Shape-Shifting Girl)>
전시의 첫번째 작품 제목인 『The Pink Shape-Shifting Girl』은 1978년에 나온 애니메이션인『#100万年地球の旅_バンダーブック(One Million-Year Trip: Bandar Book)』의 한 캐릭터 “ミムル(Mimuru)를 처음 본 한 인터넷 유저가 묘사한 단어이다.(“I hope someone could tell me what the name of the stories in this video where, in particular the pink shapeshifting girl.”). 공간은 이제부터 ‘더핑크쉐잎쉬프팅걀’이다. 공간은, 나를 그의 연인으로 여겨, 사랑과 양육의 외계행성이자, 우주 해적에 대항할 동료이자, 시간이 사라진 연옥이 되어 나를 파멸시키고 생성시킨다. 공간은, 나는, 이제 정지할 수 없다. 정지가 불가능한 시공간의 세계에서, 우리가 무엇이 없다고 말하면 그럼 무엇이 있는가를 더 생각해보는 것처럼, 사라진 시공간의 세계에서 무엇이 남아 있을까? 남아있는 것을 위해, 순서(왼쪽과 오른쪽)와 높낮이(위쪽과 아래쪽)와 깊이(앞과 뒤). 적극적으로 그 양감과 내부공간의 체적(體積)까지 쉐잎-쉬프팅하며 동시에 새로운 깊이가 생길 때까지, 없애고 만든다. 창의 뒷면, 뒷면의 그림자를 생각한다. 그림자를 선명하게 보이게 한다. 인지할 수 없을 만큼 인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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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mensionvariable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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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진 개인전 <폼폼/랜드> 2019. 4. 18. - 2019. 5. 2. | wed - sun | 12:00 - 19:00 | opening _ 4. 18. (thu) 19:00 공간 가변크기 _ 서울시 성북구 삼선교로 2길 11
<폼폼/랜드>의 미끄럼틀: 육지와 바다 사이를 타고
◢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가 설계를 맡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나 파리의 (얼마 전에 일부가 불에 타버린 후, 지금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다른 건축물과 비교해서 필자의 관심을 끄는 부분은, 거대한 비계(아시바)나 크레인에 의해 외부에서 주어지는 힘을 받아서 겨우 서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원래 비계는 건축물 그 자체는 아니며 건물이 완성되면 제거된다. 두 건축물을 보면 비계가 건축물과 어울려서 보이는데,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정신적 힘으로 우뚝 서는 것과 달리, 외부에 마련된 장치들의 도움과 간섭을 받으면서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한편 두 건축물에서 관심이 가는 (말 그대로) ‘부분’은 바로 바깥에 있는 그 장치들이 건축물의 ‘일부분’으로 통합되어 건축물 자체로 인식되는 점이다. 이때 비계는 건축물과 구분되는 외부가 아니라 이미 전체의 일부분이다. 건축물을 외부에서 건축물의 일부분이 되는 구조물은 건축물의 자율성을 살짝 건드린다. 즉 자율성과 외부의 간섭, 전체와 (일)부분의 두 영역은 각각 전자를 향해 미끄러져 통합된다. ◣ 
◣ 이번 박영진의 개인전 <폼폼/랜드>를 분석할 때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어떤 건축물의 모형을 이차원적 설계도에 기반하여 만든 다음, 그 모양을 왁스 덩어리에 뜬 결과물을 보여준다. 건축물이 서 있는 모습은 볼 수 없고 화산 분화구처럼 가운데가 보이드(void)의 상태로 비어 있는데, 그 모양은 대부분은 기하학적이거나 여러 모양의 조합으로 나온다. 이는 외부에서 힘을 주어 안의 형태를 만드는 거푸집의 논리를 역전시켜, 안에 모형을 넣음으로써 ‘외부에 대한’ 거푸집을 만들어준다. 그런데 작품을 볼 때, 지하실의 모습을 구체화했다거나 ‘비어 있음의 가득 차 있음’ 혹은 ‘외부가 내부가 되고 외부가 내부가 되는’ 식으로 단순히 해석할 수 없다. 그 대신 여기서는 ‘바다와 육지의 영역 표시’라는 표현을 쓰면서 작품을 분석하고자 한다. ◢
◢ 작품을 보면 모형인 건축물이 있던 자리는 구멍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보이드의 벽이 되는 위치는 언덕처럼 생긴 외부가 무너지지 않기에 건축물 모양을 세우고 있다. 이 역-거푸집으로 만든 외부가 무너지면 그곳(보이드)은 건축물이 아니라 땅이 되어 들어선다. 이처럼 작업에서 벽면이 만약 무너질 때 내부는 외부가 되어, 앞서 언급한 노트르담과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건축물에서 나타난 비계와 건축물의 관계처럼 통합되는 관계가 된다. 따라서 작업에서 무너지지 않고 있는 벽은 외부와 내부의 동어반복적인 관계가 아니라 외부와 내부를 벽으로 연결하는 긴장관계를 보여준다. 이 관계를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 ‘바다와 육지의 영역표시’이다. 바다는 육지(land)와 엄밀히 말해 다르지만, 정확한 위치 구분을 할 수 없다. 예컨대 썰물 때와 밀물 때에 바다와 육지가 점유하는 영역이 달라진다. 바닷물이 차오른 곳은 바다가 되는데, 그때 육지는 사실상 바닷물에 잠겼을 뿐 바다와 완벽하게 절단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물높이에 따라 두 구분이 점유하는 영역이 달라지면서도 사실상 땅덩어리의 존재 때문에 상호침투하는 것처럼, 작가는 외부가 되거나 내부가 될 수도 있는 긴장관계의 벽을 작품에 세우고 있다. ◣
◣ 이때 긴장관계는 공간적으로 두 요소를 분리하면서도 연결시킬 뿐만 아니라, 영역 간의 속성의 차이를 구분하면서도 연결시킨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나무로 제작된 그리드 위에 유리판 혹은 유리판으로 만든 박스를 놓고, 그 위에 건축물의 공백이 들어간 왁스 덩어리를 놓는다. 관람객들은 전시장에서 ‘입체’작업을 보는데, 조감도로 된 설계도에 근거하여 제작된 작업은 관람객이 ��에서 내려다보게 될 때 다시 ‘평면’으로 인식된다. 왁스 덩어리에 생긴 공백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네모나 마름모꼴과 같은 기하학적 모양으로 보이며, 동시에 보이드의 깊이감, 유리판과 유리판으로 된 박스, 그리고 나무로 제작된 그리드까지 모두 모눈종이 위에 그려진 평면 이미지로 (다시) 인식된다. 일반적인 조감도식의 설계도를 보면 땅과 건축물은 선으로 구분되어 각 영역을 나누고 있지만, 실제로는 벽이라는 하나의 선-면으로 땅/평면과 건축물/입체는 연결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전시장 안에서 작업이 평면으로 보이는 시점과 입체로 보이는 시점은 세워진 유리판, 역-거푸집, 그리고 전시공간 안에 만든 작은 전시공간을 보이드로 세우는 가상의 벽으로 연결시켜준다.◢
◢ 분리되는 공간과 분류되는 속성을 연결시켜주는 벽 혹은 바다와 육지 사이의 땅덩어리의 관계는, A4용지에 출력한 미니멀한 도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시공간에서 배포되는 도면은 일반적으로 위에서 보는 조감도로 그려지면서 평면으로 옮겨져 평면적인 공간이 된다. 사실 이번 전시에서 도면을 제대로 보고 이해하려면 수직으로 보는 것이 맞다. 전시공간 바닥에 작업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도면을 가지고 수평으로, 마치 벽에 걸린 페인팅을 보듯이 가상의 전시공간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종이를 세워서 도면과 마주 보면, 3층짜리 건물에 1층은 비어 있고 2층과 3층에 각각 작품이 세 개씩 있다. 1번 작업(<무제(계단)>)은 좌대가 되고, 그 위층에서 7번 작업(<폼>)은 좌대가 아닌 작품자체가 된다. 전시장뿐만 아니라 도면, 그리고 도면을 보는 방법을 통해 수평과 수직, 평면과 입체, 그리고 작품의 외부요소인 지지체/좌대와 작품의 관계를 영역화하면서 선-면으로 연결시킨다. ◣
◣ 여기서 선-면은 연결의 의미에서 비스듬하게 세워진,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건축물 <빌라 사보아> 내부에 있는 램프(ramp)와 같은 경사의 속성을 보유한다. 공간을 평면적으로 연결하는 램프는, 마치 육지와 바다 사이에 있는 땅덩어리가 그렇듯이 구분 지어진 경계 사이에서 서로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옆에서 보면 선으로 보이는 경사는 미끄럼틀이 그렇듯이 타고 내려갈 때는 면으로 인식된다. 시선이 수평 혹은 수직이냐에 따라 작품은 평면으로 통합되거나 입체물로 서게 된다. 이번 전시는 그런 의미에서 공간에 대한 동어반복도 공백의/가득 차 있음과 같은 ‘생각의 전환(혹은 맞바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 사이에 서는 벽 자체가 이미 평면적 속성과 입체물을 만들고 지탱시키는 속성 둘 다 내포하며 작품과 도면을 통해 두 가지(평면적 시각과 입체적 시각) 영역 사이의 긴장관계를 전시에서 보여준다. ◢
콘노 유키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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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mensionvariable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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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혜 개인전 <seize on>
2019.3.14. - 3.30.
l wed - sun l 12:00 - 19:00
l opening _ 3.14. (thu) 19:00
재연 너머의 구현
맥락이나 시간이 삭제된 일상
신지혜의 개인전 ≪seize on≫에서 우리는 작업 속의 특정한 대상보다는 그 전체적인 구도에 주목하게 된다. 제목과 작업 사이의 관계가 자명해야만 할 필요는 없지만, 각각의 제목과 작업을 맞붙여보아도 사진 안의 내용을 짐작하기 어렵다. 예컨대 <발레슈즈>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발레, 토슈즈, 혹은 신발 그 무엇과도 관계가 없는 조형물이다. 이 분홍색의 조형물은 발레슈즈를 연상하게 하기는 하지만 신발의 기능을 전혀 할 수 없으며 신발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작업의 구도가 주는 이미지 때문에 발레슈즈를 자연스럽게 연상하게 된다.
신지혜가 사진을 기반으로 작업해왔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seize on≫ 속 작업들에 사진이라는 이름을 붙인 후에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익숙하고도 당연해 보이는 질문이 떠오른다. 신지혜의 ‘사진’은 과연 무엇을 찍은 것일까? 이를테면 <발레슈즈>는 발레슈즈를 찍은 사진일까? 이번 전시에서 신지혜는 인스타그램에 업로드된 타인의 일상 사진을 작업의 소재로 삼았다. 그러나 <발레슈즈>, <말없이 셋>, <무릎 위에>와 같은 작업들은 우리에게 일상적이라기보다는 추상적으로 다가온다. 이 작업들에서 원본이 가진 누군가의 게시글이라는 맥락이나 일상이라는 개념에 전제된 시간의 흐름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여기에는 단순히 인스타그램 속 사진의 재연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seize on≫에서 우리가 보는, 혹은 보아야만 하는 것은 무엇일까?
평면, 입체, 그리고 다시 평면: 줌과 크롭에 의한 사진적 행위
기실 이번 전시에서 <발레슈즈>는 가장 직관적인 제목을 가진 편이다. <말없이 셋>, <네 마리의 캔버스 새>, <마주 보며>를 비롯한 다른 작업들은 제목과 작업이 가리키는 바를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조금 더 단서를 얻기 위해 작가의 작업 과정으로 눈을 돌리면, 신지혜가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는 “사진적 행위”라는 말에 주목하게 된다. 사진 촬영이나 사진 찍기 대신 사진적 행위라는 용어를 선택했듯이, 작가는 주로 “줌(zoom)”과 “크롭(crop)”을 이용해서 피사체를 화면 안에 담는 여러 가지 방법을 실험해왔다. 줌을 통해 대상이 되는 인물의 크기를 화소가 깨질 정도로 확대하거나(<지하철 작업> 시리즈), 인스타그램에서 발견한 원본 사진을 크롭하고 그 일부분만을 남기기도 했다(<보고 싶은 것만 본 것의 도상> 시리즈). 때로는 그 줌과 크롭의 결과가 사진이 아닌 입체 조형물이 될 때도 있었다(<시선의 조형물> 시리즈).
이번 개인전 ≪seize on≫에서 신지혜는 현실 대신에 인스타그램을 동시대의 풍경으로 받아들이고, 사진(인스타그램 이미지)에서 사진을 찍고자 한다. 신지혜의 사진적 행위를 통해 원본 이미지는 평면에서 입체로, 그리고 다시 입체에서 평면으로 변환된다. 그리고 사진적 행위를 위한 도구가 되는 줌과 크롭 역시 여전히 등장한다. 신지혜는 카메라를 ‘줌’ 하듯 인스타그램 속 이미지에서 자신의 인상을 추출한다. 사진이라는 평면 속에서 구도를 꺼내 현실에 발 딛고 있는 입체 조형물로 구현하는 것이다. 이때 원래의 사진 안에 존재하고 있었을 연속성, 이를테면 원본 대상이 놓였을 시간과 공간 혹은 다른 대상과의 관계는 모두 ‘크롭’된다. 그 후, 작가는 입체 조형물을 다시 카메라 렌즈로 포착해서 평면으로 출력해낸다.
해시태그나 재연 너머의 것
이번 전시에 신지혜가 포착하려고 했던 대상은 인터넷상에,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스타그램 속에 있었다. 우리는 자연히 신지혜에게 그 이미지들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경로를 생각하게 된다. 현실적으로 사용자는 인스타그램 속의 모든 이미지를 볼 수 없고, 각자가 팔로잉한 계정이나 검색한 해시태그에 따라 제한된 영역만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작가가 ≪seize on≫에서 포착하고자 했던 것 역시 대상의 이름, 곧 하나의 해시태그로 치환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작가의 작업은 인스타그램 속 사진과 그 소재에 대한 단순한 반복, 즉 ‘재연’에만 머무르게 된다. 그러나 <발레슈즈> 속에는 발레슈즈가 아니라 발레슈즈를 연상하게 하는 조형물이 있다. 신지혜가 입체 설치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사진으로 완성한 그 결과물은 인스타그램의 해시태그(가령 #발레슈즈나 #발레)만으로는 해명될 수 없다. <네 마리의 캔버스 새>의 경우, 원본에서 캔버스였을 사물은 그 가장자리 혹은 뼈대만 남기고 지워져 새와 창문처럼 보인다. 작가는 원본 이미지에서 캔버스라는 소재를 차용하고자 했다기보다는, 사물의 이름과 같은 하나의 해시태그로는 간추려질 수 없는 소재 너머의 것에 이끌린 것처럼 보인다. 이때 신지혜가 “온전히 내 것이 되기를” 바랐던 것은 발레슈즈나 캔버스가 아니고, 작가의 작업은 원본 소재에 대한 재연으로 요약될 수 없다. 신지혜가 이전 작업에서 “오로지 모호한 감각”에 기대어 피사체를 화면에 가두어왔다면, ≪seize on≫에서 신지혜는 이 감각의 정체를 적극적으로 규명하려는 것 같다. 신지혜의 작업에 시각적으로 구현된 이 모호한 감각의 존재를 의식할 때, 우리는 신지혜가 “그토록 들여다보고자 했던 것”에 한층 가까워질 것이다.
글 조은채
신지혜 개인전 <seize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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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가변크기 _ 서울시 성북구 삼선교로2길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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