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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관한 우연들.
우여곡절 끝에 며칠간 묵게 된 호텔은 뉴욕 맨하탄 남단의 파이낸셜 디스트릭트라는 곳에 있었다. 고층빌딩(회사들)과 재개발이 끝난 고급주택과, 빌딩사이의 오래되고 허름한 인프라와, 다시 지어진 세계무역센터와 관광지와 강변으로 가득한, 소위 말하는 백인 직장인의 공간들. 며칠전 런닝하다 본 강변에는, 회원제 호텔도 있더라. 검은 차를 타고, 드레스를 쫙 빼입고 온 여자들이 남자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면서 들어가는 걸 보고 이게 그사세인지 또 다른 현실인지 모르겠어서 곁눈질을 포기하고 계속 뛰었다.
내 호텔방은 14층이었고, 창문을 열면 좁은 길 맞은 편에 서 있는 고층빌딩들만이 보인다. 그렇게 전망이 좋은 방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맨하탄에서, 고층빌딩 사이에 둘러싸여 자는 것도 그리 하기 쉬운 경험은 아니겠지 싶어서 맞은 편 건물들을 관찰했다. 바로 앞에 있는 건물은 테넌트�� 비어서, 24시간 불은 켜져 있지만 몇 개 층이 텅텅 비어있는 건물이었다. 그 옆에는, 모양은 오피스빌딩 모양이지만 오피스텔같은 주거용 부동산으로 채워져 있는 고층건물도 있었다. 투��드룸 방도 있다고는 하는데, 내 방 창문에서 볼 수 있는건 어딜봐도 원룸인 방들이었다(전망이 안좋은 쪽은 싼 방으로 채울테니까 당연히 그렇겠지, 누가 매일 저녁마다 호텔방의 창문이나 보고 싶겠어?). 저녁이 되면 불이 켜지고, 하릴없이 티비를 보거나 책상에 앉아 심야까지 일을 하는 젊은이들이 보였다. 어슴푸레 보이는 방 조명과 인테리어가 어딜 봐도 20대취향의 물건들 뿐이어서, 아아 이 사람들은 한달에 3500달러를 내고 뉴욕의 원룸에 있는구나, 그들은 성공을 느낄까? 팍팍함을 느낄까? 그런 걸 느낄 틈도 없이 일을 할까? 하는게 궁금해졌다. 내가 누린 적 없는 다른 삶들이 눈 앞에 보이니, 그들의 삶에도 눈이 갔다.
문득 그렇게 매일 밤 맞은 편 건물들을 보다 보니 옛날 생각이 났다. 나는 딱 10년전, 어학연수를 하러 뉴욕에 왔었다. 처음에는 2주일간 어학원과 연계된 호텔(의 윗층의 정말 구리고 구린 2인실)에 하루에 십몇만원을 내며 살았다. 그 떄의 내 미션은 영어공부도, 친구사귀기도 아니고, 2주일 이내에 룸셰어할 방을 찾아서 계약을 하는 것이었다. 어학원이 끝나면 헤이코리안을 뒤지고, 연락을 하고, 집을 보러 다녔다. 아스토리아의 어둡고 음침한 집, 어퍼웨스트사이드의 (결혼한, 그런데 각자의 집 한채씩과 공동소유의 집 한 채를 가지고 있는, 남자 아티스트가 사는) 집의 방 한 칸, 그래머시의 미대생이 내놓은 아기자기한 스튜디오, 그런 여러 방을 보러 다녔다.
그 때, 스물 몇 살의 나를 충격에 휩싸이게 한 집이 있었다. 파이낸셜 디스트릭에 있는 집이었는데, 헤이코리안에 올라온 집 사진이 전망이 너무 좋아 보였다. 한 사람당 1000불(십년 전에 룸셰어를 하는데 말이다)을 내야 된다고 했지만, 이 뷰를 즐길 수 있다면, 맨하탄 안에 살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조건일지도 모른다고 (철없는 나는) 생각했다. 심지어 도어맨도 있고 피트니스도 있고 라운지도 있다고 했다. 뉴요커!!! 상상만 해도 고져스 뉴요커 아닌가!! 어린 나는 가슴이 뛰어서 당장 집을 보러 가겠다고 연락을 했다. 막상 집을 보러 간 날엔 지금 이 글을 쓰는 오늘 밤 처럼 비가 추적추적 왔고, 파이낸셜 디스트릭의 길들은 굽이굽이 꼬여있어서 한참을 헤메였고, 그렇게 주소만 보며 도착한 곳에는 거대한 고층빌딩이 있었다.
야 맨하탄에 산다는 건 이런거구나... 나도 잘만 하면 이 강변에서! 이 고층빌딩에서! 뉴욕의 삶을 체험할 수 있어!! 하고 젊은 집주인 여자분의 안내를 받아서 집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갔는데, 그 곳에서 내 환상은 산산조각이 났다. 거실이었을 공간에는 와이어로 얼기설기 단 커텐이 축 쳐져서 대충 걸려만 있었고, 커텐이라고 하기에도 옹색할 정도로 한쪽으로 쏠려서 볼품이 없었다. 그 커텐을 열고 들어가니, 사진에서 본 강변뷰는 거짓말은 아니었는데, 그 (몇번이고 말하지만 거실이었을)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는 침대가 4개인가 5개인가가 놓여있었다. 엉성한 커튼과 쫙 진열된 침대가 야전병동을 방불케했다. 야전병동. 침대에는 각각 내 또래의 여자분들이 누워서 책을 읽거나, 핸드폰을 보거나 하고 있었고, 이미 집 보러 오는 사람에게 익숙해졌는지, 어떤 사람이 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지 내 존재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구석에 하나, 전혀 창가도 뭣도 아닌 엄한 곳에 빈 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침대를 한달 동안 쓰는 대가가 1000불이었다.
그 집에는 거실 외에도 방이 2개인가가 더 있었고, 방 하나에는 거실에서 본 것과 같은 야전병동이 있었다. 그 방에는 침대가 좀 적게 들어 있어서 렌트가 비싸다고 했다. 다른 하나는 이 모든 야전병동을 관리하는 집주인이 혼자 쓴다고 했다(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대개 뉴욕에 장기거주해야 하는, 주로 대학원생이나 직장인인 집주인들은 이런 집을 “운영"하고, 집을 관리해야 하는 자신의 인건비명목으로 실제 방세보다 약간 더 많은 돈을 받아, 자신이 내야 할 방세와 유틸리티를 상쇄한다는 사업전략이 있다고 한다). 공용으로 쓴다는 부엌과 화장실에는 규칙을 알리는 포스트잍이 온갖 곳에 빼곡히 붙어 있었다. 너무 많아서 일일히 읽기도 힘들 정도였다. 냉장고에 있는 남의 음식 먹지 마세요, 음식물 쓰레기는 각자 처리하세요, 샤워 후 머리카락은 치워주세요.... 욕실에는 정말 더이상 빈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여러 사람의 샴푸와 세안제와 샤워젤과 기타등등이 늘어서 있었다.
그때까지도 (인권없는) 2인실 기숙사며 일본의 6첩방같은 거주환경 최악인 집들에 살아봤지만, 아무리 그래도 야전병원같은 곳에 한달에 1000불을 내면서 산 적은 없었던 나는, 그날 꽤 큰 충격을 받고 호텔에 돌아왔다. 아 뉴욕에 산다는 건 이런 거구나. 마천루의 불빛 하나를 만들기 위해 이런 불편함을 감수하며 이렇게 돈을 들이며 살아야 하는 거구나. 하물며 나는 아직 돈을 벌지도 못하는데 이런 곳에 살 자격이 있나? 자격 운운하기 전에 못살겠는데? 그런 배부른 소리를 할 처지이긴 한가? 고생을 덜 했나? 지금도 충분히 힘든데? 그러면 얼마나 더 고생을 하고 치열하게 살아야 편안히 발뻗고 누울 방 한칸을 도시에 마련할 수 있지?
아마 그 때 즈음부터 였던 것 같다. 내 집을 갖고 싶다. 내 소유의, 내 물건으로 가득 찬, 쫓겨나거나 생활이 불안정해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내 집. 그 집을 갖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 일도 열심히 하겠다. 혼자서 구할 수 없다면 경제적동반자도 찾겠다, 어떻게든 홈리스만은, 대책없이 임대주택에 집세를 내고 남의 배를 불리며 점점 가난해지는 사람만은 되지 말아야겠다. 그런 생각이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한동안 맨하탄의 야경을 멀리서 봐도, “나는 부모님이 등골을 뽑아서 돈을 내주지 않는다면 이 도시에 있을 능력과 자격이 없어. 저기에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뭘 얼마나 잘 했기에 저기에서 살아남아, 살아갈 수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 야경을 즐기지 못했었다.
그리고 우연히, 그 10년전의 건물의 주소가 생각이 나서 찾아 보니 호텔방에서 멀찍이 보이는 건물 중 하나였다. 그 건물을 보다 보니, 딱 10년 전의 나와 마주하게 되어버렸다.
어떠니, 너는 집이 생겼니? 지금은, 조금은 안심하고 잘 수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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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장식
키치죠지 역 안에는 잡화점이 하나 있는데, 몇 년간을 나는 그 앞을 거의 매일같이 지나다녔다. 가끔은 젓가락 받침이나 그릇을 사기도 하고, 하루만 더 고민하자고 내려놓은 사이에 그릇이 없어지기도 하고. 신년에는 빨간 ���리그릇, 초여름엔 에도키리코��은 투명한 그릇, 겨울엔 두툼한 코스터를 보면서 계절을 느끼고 살았다.
지난주에 오랜만에 키치죠지에 갔는데, 이 잡화점 앞을 지나다 보니 벌써 크리스마스 장식을 꺼내놨었다. 한순간 마음이 덜컹, 하고 흔들리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요 근래 10년같의 연말연시는 나에게 있어 꽤나 고역이었다. 외국 생활을 하니까, 연말연시에는 다들 자기 가족을 만나러 가는데, 누구와 같이 있으면 될까를 고민해야 하고, 친구랑 약속을 미리 잡아놔도 크리스마스 직전에 누군가가 애인이 생기면 다른 한쪽은 배신당하게 되는 불안한 상태가 지속되기도 하고. 한두번은 결국 크리스마스까지 아무일이 없었던 사람끼리 모여서 고기를 구워먹었지만 뭔지 모를 불만이 남아있기도 했고. 그렇다고 애인이 있으면 상황이 나아지냐 하면 그것도 아닌게, 애초에 외로움을 없애기 위한 수단으로 누굴 만나는 것도 아니고, 애인이 있다고 한들 애인에게는 애인의 가족이 있을 수도 있고, 그 애인과 올해도 내년도 내후년도 크리스마스에 같이 있을 거란 확신도 없고, 10월에 예약한 크리스마스케이크를 받으러 가기도 전에 같이 먹기로 약속한 사람과는 파국을 맞이할 수도 있는 것이다. (거의 매년 12월에 싸우고 크리스마스 직전까지 냉전상태여서 이 케이크를 어찌해야 하나 고민해야 했던 언젠가의 연애가 떠오른다... 싸운게 12월뿐만이겠냐만은)
그런 감정과 경험들이 쌓이고 쌓이면. 연말은 연말대로 즐기고 싶고, 소중히 하고 싶고, 한 해를 정리해 나가고 싶고, 12월 24일에 잠들어서 눈뜨면 26일! 같은 모쏠자학개그를 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매년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면 올 한해는 큰 문제없이 잘 끝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함과, 그래도 올 한해를 어떻게 끝내고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안도감과, 언제까지 이런 상태가 지속되어야 하지 하는 먹먹함이 확 몰려오는 것이다.
다만 올해는, 물론 트리를 본 순간엔 마음이 덜커덩덜커덩했지만, 곧바로 마음이 나아졌다. 그건 아마도 적어도 2년간은 연말연시를 함께할, 크게 싸우거나 관계를 아작내거나 하지 않을거란 신뢰를 주는 사람이 있어서이기도 하고, 아마도 연말연시에 내가 출장에 가서 이 도시에 없을 확률이 높아서(....)도 있지만. 뭔가 불안을 넘어섰다, 는 감정?이 내 안에서 생긴 것 같다. 애인이랑 깨져도, 본가에 못가도, 크리스마스 당일에 일을 해야 해도, 연말연시가 어수선해도 그게 나의 연말을 좌우하지 않을 정도로는 단단해졌다는 느낌 말이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예년보다 더 따뜻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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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가게 되었다.
뜬금없이, 언제나처럼 스-모를 찾기 시작하다가 집을 찾겠다는 욕심이 점점 과열돼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부동산거래의 승패에 점점 많은 걸 걸다가, 내 고민에 내가 등이 떠밀려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지금 집에 퇴거 연락을 하고, 메모장에 D-30이라는 메모를 써놨지만, 현실에 치여서 금새 1주일이 지났고, 20일 남짓 남은 동네에서 뭔가 하긴 해야겠는데 여전히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생각할 여유도 없고 없어서 없다.
7년을 살았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상경한 이후로, 한 집에 이렇게 오래 산건 처음이 아닐까. 이 집에는, 그리고 이 동네에는 너무나 많은 추억이 쌓여서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던 매일매일의 풍경. 삶의 단계에 따라, 만나던 사람에 따라, 내 건강상태에 따라, 가구 취미에 따라, 몇 번이고 배치를 바꾼 방. 석양이 떨어뜨린 주황색 빛의 조각이 방바닥에 잔잔히 뿌려지는 늦은 오후. 아침 느지막히 나와 이노카시라공원에서 커플 사이를 뚫고 자전거를 밟아 카페로 향하던 몇 안되는 날들. 집에 가면서 참새 방앗간처럼 들르던 빵집에서 비져나오는 바게트 냄새. 자전거주차장까지 걸어가면서 매일같이 눈길을 준, 가끔은 귀여운 젓가락받침을 한두개 지르던 소품점. 신선한 횟감을 팔던 슈퍼. 마당이 사시사철 언제나 예뻤던 집들. 폭설, 폭우, 폭염을 뚫고 울고 싶은 기분으로 자전거를 타면서 집에 갈 때 얼굴에 와 닿던 공기. 결국 아무 것도 제대로 소화하거나 정리하지 못한 채로 짐들 속에 구역구역 구겨 넣어서 새 집으로 향할 것 같다.
삶의 여러 순간순간을, 소중함을 만끽하지 못한 채로, 핸드폰 사진첩에 쌓여있는 사진처럼 쌓아만 가는 느낌이다.
얼마나 더 이사를 하고, 어떤 새로운 풍경을 접하고, 내 삶은 어디까지 이어질까. 무섭고 두렵고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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