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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れ以上でも以下でも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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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r is right outside your door
내가 의무경찰에서 군생활을 하던 때는 미군에 대한 한국 국내 반감이 최고조에 달해있을 때였다. 여중생이 미군이 모는 탱크에 깔려 죽었고, 기지를 평택으로 옮긴다고 해서 평택에서 농성을 하고 거기서 농성하던 사람들을 막 경찰들이 패면서 뜯어냈다. 나는 그 때 구리의 기동대에 입대를 한 신참이었다. 지금 돌아보니 이런 사실들이 있었고, 누가 잘못한거고 누가 잘한걸까 이데올로기의 문제인가 인권의 문제인가 하며 회상이 되지만, 군대에 입대를 한 당시에는 정말 말그대로 아무것도 몰랐다. 그냥 하루하루 고된 군생활을 견디는데 모든 체력과 정신을 쏟아붓고 있었다. 체중은 46키로까지 줄었다. 착한 고참이 "쟤 너무 말랐으니까 무조건 자기전에 컵라면 하나 먹여서 재워라" 라고 한 거는 아마 죽을때까지 잊혀지지 않겠지
문제는 이 일들의 배경을 나도 다른 부대의 구성원들도 열심히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젊은 남자들의 혈기에(나는 그렇게 혈기가 왕성하진 않았다) 기름을 부어주면 그만이다 '저쪽 쟤네들이 적이다' 이렇게 한 마디만 해주면 다들 눈을 반짝거리며 누군가를 상처주고 자신들의 힘 아래 굴복시키고 싶어했다. 시위대를 눈 앞에 두고 고참들이 중얼거린다 "오늘은 좀 붙었(싸웠)으면 좋겠다 아휴"
나는 어쨌냐 하면, 그냥 그 모든 것들이 힘들었다. 좁은 기동대 차 안에서 이틀씩 자면서 교대를 하면서 양치도 세수도 찌릉내가 심하게 나는 공중 화장실에서 순서를 기다리면서 해야했고 식사로 나온 도시락을 하나도 안 남��고 먹어야 하는 룰도 힘들었다(난 그래서 지금까지도 음식을 권함당하는게 싫다). 양말을 두겹 바지를 세겹씩 입고 평택의 어딘가 벌판에서 새벽에 보초를 섰을 때, 별이 하늘 가득 펼쳐진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면서 제대하고 다시 와서 이 밤하늘을 봐야지 하고 마음을 먹고 그랬다.
시위대와 '붙는' 날에는 목숨의 위험을 느꼈다. 죽창이랑 돌이 상대편쪽에서 쉴새없이 날라왔다. 부대는 방패를 드는 한명, 곤봉을 드는 한명을 페어로 해서 그 페어들이 촘촘히 묶여있는 구조로 시위를 진압했는데, 나는 180센치 정도 되는 85년생 방패 고참이랑 짝이었다. 항상 밥을 먹고 치실을 하는 아저씨었다.
어지간하지 않으면 경찰 쪽에서 공격을 하라는 명령은 나오지 않기에 보통은 방패 아저씨 뒤에 숨어서 방패조들이 밀리지 않게 몸으로 밀어주고 있는데, 딱 한번인가 시위대의 공격이 거세서 준법의 범위를 벗어난 사람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듣자 기다렸다는 듯 곤봉 조들이 신나게 앞으로 나가서 시위대를 패기 시작했다. "씨발놈아 안나가고 뭐하냐" 라고 방패 고참이 소리를 질러 얼떨결에 나도 따라 나가서 흉내를 열심히 냈다. 내 아버지 뻘 아저씨의 얼굴과 몸을 향해 곤봉을 휘둘렀다 어디선가 그런 소리가 들렸다 "니들은 애미도 애비도 없냐"
시위가 끝나자 아드레날린이 가시고 시위대들에게 돌로 죽창으로 얻어맞은 몸이 욱신욱신 저려오기 시작했다. 한 고참이 얼굴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들것에 실려가고 있었다 피에 젖은 얼굴이 장난스러운 웃음으로 물들어 있었다. 부대원들은 환호를 하면서 그가 구급차에 실려갈 때 까지 배웅을 하고 있었다.
나조차도. 그날은 어떤 종류의 고양감을 계속 느끼고 있었다. 기동대 차에서 선잠을 자며 혹한의 밤에 홀로 보초를 서던 날들이 보상받은 것 같았다. 부대원들과 함께 이런 고난을 이겨냈다는 사실에 조직에 대한 유대감 같은것도 느꼈고 다른 고난도 이겨낼 수 있을거 같다는 희망 같은것도 느꼈다. 처음 먹은 고기같았다. 먹기 전에는 맛을 몰랐는데 먹고 나니 다시 맛보고 싶었다. 그 질감, 향기 냄새 포만감이 내 몸안에서 나를 강하게 만드는 그 느낌을 몇 번이고 경험하고 싶어졌다. 고기가 되기위해 상처입고 죽임을 당한 동물의 생각은 나지 않았다. 고기를 먹기 전의 인생으로 돌아갈 수 있을거 같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들은 원래 먹히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
20년즈음 지나고 지금 그런 생각들이 난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의 보도를 접하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을 접하면서. 거기에서 직접 싸우고 하루하루를 생존하는 사람들은 세상이 어떡케 생각하던, 죽이지 않으면 죽는 절실함을 가슴에 지니고, 폭력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쾌감에 중독이 되어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아무도 원하지 않는 행동을 스스로 하고 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에게 전쟁이 지금 너나 내가 느끼는 '오늘 저녁 뭐 먹지' 랑 똑같은 감각이 된 거가 아닐까. 하루하루 세계가 멸망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듯 보도하던 미디어들도 이제는 간간히 국제사회 소식과 함께 전쟁의 양상을 전할 뿐이다. 이 사태를 바꾸기 위해선.... 이라고 떠드는 오만과 화면에서 피를 흘리며 우는 피부색이 다른 아이들을 보며 느끼는 위선이 잦아드는 걸 느낀다.
지금도 평택에서는 경찰과 시위대가 대치하고 있나? 아닐거 같은데 어찌됐던 이제는 나하고는 별다른 상관이 없다. 거기서 당시 '이러다 죽겠다' 라고 느낀 인생 최고조의 위기는 지금 내 안에서 종이 한 장보다 얇고 가벼운 추억이 되어있다.
우크라이나니 팔레스타인 사람들한테 정말 미안하고 가슴아픈 일이지만 나는 내일 출근해서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서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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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 보지 마세요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다니던 학원 선생님이 있었다. 퉁퉁한 중년 아줌마 선생님이었다. 그 선생님이 무슨 과목을 가르쳤는지 잘 가르쳤는지 어땠는지는 한 삼십년이 지나버려서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지만, 그 선생님이 언젠가 내 손금을 봐 준적이 있다. 선생님은 내 손금을 살피더니 피식 웃었다. 왜요 왜요 어린 나는 궁금해하면서 선생님의 눈치를 살폈고, 선생님은 "너 결혼 못한대" 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즉시는 좋은 느낌도 싫은 느낌도 나지가 않았다. 듣고싶은 얘기가 아닌 것임에는 분명했다. 부자가 된다던지 유명해 진다던지 이런 얘기를 듣고 싶었는데 그런 얘기는 별달리 없었는지 혹은 다른 얘기는 지금은 시간에 날��고 깎여서 기억이 안 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결혼을 못한다는 미래의 예언을 들어버렸다. 그 점괘는 과거의 망령처럼 긴 시간 나를 따라다녔다. 여자들이랑 만나고 사귀고 헤어지고 할때마다 잠깐, 한편, 문득 그 선생님의 나를 놀리는듯한 표정과 말투가 떠올랐다. 이 여자랑 결혼을 하나 마나 라는 생각과 함께 '그러고보니 중학교때 학원 선생님이 나 결혼 못한다고 했었지' 하고 떠올리게 되는 연애가 몇번 있었다.
또한, 24년 초에 신년 운세를 내 깔총이가 보고서 기쁜 표정으로 나에게 점괘를 읽어주던 것도 기억한다. '지금까지의 노력이 보답되는 한 해가 될것입니다.커다란 재물운이 있습니다' 등등... 국민학교 1학년때부터 주일예배를 한번도 빠지지 않고 다닌 나는 점이나 토속 신앙은 죄악이라고 생각하고 살고있다. 그래도, 정말 그 말이 사실이라면 좋을텐데 하고 신년 초에 기분이 좋아졌던 걸 기억한다. 이 몇년은 정말 힘든 나날들이었다. 단순히 최근 2,3년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만들은 몇 십년을 스스로 부시는 나날들이었으니까 모든게 아쉽고 어려웠다. 그런 날들이 보상된다는 말을 들으니 안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심 가슴이 기대로 가득 차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상기 2건의 점에 관한 이야기가 어찌 되어가는지 되돌아 보자면, 일단 중학교 학원 선생님의 손금은 틀렸다. 나는 올해 깔총이와 결혼신고를 올렸다. 법적으로는 배우자가 있는 몸이 되었고 관련해서 뭐가 바뀌었냐 하며는, 저쪽 가족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나니 신경써야 할 사람들이 두 배로 늘어난 거 말고는 없는 거 같긴 한데, 그래도 결혼에는 성공 했다. 그리고 올해는 노력이 보답되는 한 해가 될것이라는 점괘도. 24년 8월24일 시점에서는 틀렸다. 내 인생을 굴러가고 있는 공이라고 가정할 때, 앞으로 4개월 남짓에서 궤도를 '보답받는'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물리적 계산이 안 나온다. 이대로 가면 4개월 후에 이 공이 어디쯤 가 있을지는 시선 저 너머로 보인다. 누가 갑자기 공을 차주거나, 번개가 치던가, 지각변동이 있어 지금의 운동에 커다란 외항력이 가해진다 한들, '보답받는' 방향으로 꺾일지도 미지수이니 점은 틀렸다고 지금 시점에서 결정짓는게 맞는 거 같다.
매일 아침 만원 전철에 탈 때 땀을 뻘뻘 흘리는 아저씨가 아니라 땀을 뻘뻘 흘리는 젊은 아가씨 옆자리에 낑겨타게 되는게 그날의 최고의 행운이며, 저온 사우나같은 매일의 날씨를 견디며 관심도 없는 일과 사람들에게 전력으로 투구하다보면 하루는 미친듯이 긴데 한주 한달은 미친듯이 빠른 이상한 현상을 경험하는 매일매일. 일은 나날이 고되고 아무리 열���히 일해도 가진 돈이 점점 줄어가는 이상한 상황.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오는 만원전철에 낑겨있을 때에, 관광이라도 와 있는 건지 한국 못난이 커플의 '내일은 돈까쓰 먹고, 라면 먹고 살거 있음 사고...' 라는 대화를 본의 아니게 엿들으면서 올해는 다 보답받는 한해가 될 거라고 했는데... 라고 낙담을 한다. 내릴 때 보니 한국 못난이 커플은 시시한 브랜드로 온 몸을 치장하고 핸드폰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그래 서울에는 저런 애들 많았었지. 그래 나도 관광으로 도쿄에 왔을때는 1분 일초가 아쉬웠었지.
보답은 안 되는거 슬슬 알겠으니 1분 일초라도 더 쉬게만 해줬음 좋겠다. 경험상 존나 발버둥을 쳐도 널널히 살아도 힘든건 이제 충분히 이해했다. 그럼 널널히 살면서 힘든게 낫지.
어쨌든.. 점으로 인생이 결정될거면 정규교육에 점 보는 과정을 넣어서 점괘대로 진로등등 결정하면 되는거 아닌가.
점은 안 맞는다 역시. 원래대로 하나님한테 기도를 하는게 낫겠다. 주여 답이 없는 인생을 수선할 수 있는 바느질 키트 하나만 선물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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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마음을 가진 이는 어두운 꿈을 꾸고
더 어두운 마음을 가진 이는 꿈 자체를 꾸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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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을 12월31일같이
24년 1월 1일은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맞았다. 올해도 건강하고 둘이 행복하자며 깔총이가 0시 0분이 되는 시점에 말을 걸었다. 동네의 하천 위로 나 있는 2차선의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보행자들이 펄쩍펄쩍 뛰면서 새해를 축하하는 모습이 보였다. 갈색 푸들을 번쩍 들어올려서 고양되어 있는 일행이었다. 푸들은 영문을 모르는 얼굴을 하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모두가 새해에 대한 기대로 들떠있는 분위기가 나를 가라앉게 하는 건 매년 어김이 없다. 올 한해도 보통인 삶을 위해 고되게 싸우는 한 해가 되겠지 하며 나는 헤드라이트가 비치고 있는 텅 빈 차도를 노려보며 생각하다가, 깔총이한테 '건강한게 최고지' 라고 답을 한건지 혼자 중얼거리는건지 모르게 입에서 말을 흘렸다.
집에 들어와서 아빠가 영상통화를 2번 건 거를 못 받은 걸 깨닫고,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내일 내가 걸어야지 하고 핸드폰을 충전에 꽂아놓고 육개장 사발면을 먹으면서 심야의 테레비를 보며 낄낄거리니 곧 잠이 쏟아져서 새해 인사와 인스타 갱신에 열이 올라있는 깔총이를 두고 잠에 골아 떨어졌다.
아침, 여덟시 반 쯤 일어나서 다시 테레비를 켜니 고독한 미식가를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거방송중인 체널을 키고 작년에 사 둔 크리스피 크림 도넛을 작년에 사고 덜 마신 커피와 같이 먹으면서 연휴가 끝나면 해야 할 일들을 계속 머릿속에서 생각하면서, 어제 아빠의 영상통화를 놓친 걸 떠올리고 부모님한테 문자로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보냈다. 영상통화를 걸 까 하고 고민을 좀 했는데 안 걸기로 했다. 얼굴을 마주하고 특별히 할 좋은 얘기가 없었다. 엄마 아빠는 본인들의 커뮤니티에서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에에 관해 뭐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적어도 범죄를 저지르며 살고있진 않으니까 나에 대해 한가지 정도는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음 좋겠다.
깔총이는 1월1일부터 일본에 놀러온 친구를 만나러 외출을 하고 나는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가면서 고독한 미식가를 보다가 앱 개발 공부를 하다가 졸다가 그랬다. 자다가 일어났더니 테레비의 모든 체널이 지진 속보를 전하고 있었다. 내가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다고 한다. 쯔나미도 오고 있다고 한다. 아나운서가 화가 난 반말로 '목숨을 지키기 위해 안전한 곳으로 피난하라' 고 외쳤다. 재해 시에는 사태의 심각성을 전하기 위해 일부러 저렇게 고압적인 태도로 아나운스를 한다고 한다. 아아 이번 일 때문에 투자자들 심리가 위축되겠네 우리 집 주변에는 언제 저런 지진이 올까 하는 감정을 가지고 뉴스를 보고 있었다. 전쟁을 겪고 지진을 겪는 사람들이 느끼는 불행에 비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불행은 정말 티끝같은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좀처럼, 저들의 불행에 공감할수 없어서 참으로 나는 이기적이라고 감탄을 했다.
하여 하루의 무게는 12월31일에서 1월1일로 넘어가는 부분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다른 날들에도 이정도의 의미부여를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라고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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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싶은 일들
의경에 입대하고 안 끝날거 같던 훈련소 생활이 끝나고 경찰학교로 옮겨서 경찰복을 입고 하루에 하나씩 초코파이가 나오는 걸 경험하며, 처해진 환경에 의해 인간의 삶의 질이 이렇게 틀려질 수 있구나 하며 감탄을 하던 나날에, 나와 나랑 같이 입대한 대학 동기(두살 어린)는 할 일이 너무 없어서 경찰수첩에 돈도 있고 몸도 자유로워지면 뭘 하고 싶은지 적으면서 놀았다.
나랑 걔가 공통으로 적은 게, 우리가 입대할 즈음 발매를 했던 아이팟 미니를 사고싶다고 적었던 게 기억난다. 그리고 군인 남자들이 좋아하는 맥심 잡지를 읽고 싶다고 쓴것도 있었고, 일본 여행을 가고싶다고 쓰고, 그 친구는 꼼 데 가르송 옷을 사고 싶다고 썼었다. 불짬뽕을 먹고 싶다고 적었다, 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을 사고 싶다고 적었고, 뭣보다 기타를 치고 싶다고 적었다.
문득, 꼼 데 가르송이 무슨 뜻이냐 라고 물었더니 '소년처럼' 이라고 했다. 내가 오 어떻게 아냐 하고 물었더니 자기 여동생이 불어과라서 안다고 하면서 멋적어했는데, 사실 그 친구는 예전부터 굉장히 잡학다식한 친구였다. 그 친구가 알고 있다고 새삼 놀랄 일도 아니었달까. 그 친구가 결혼했다는 얘기를 일본으로 가기 전에 들었다. 나랑 걔가 당시 얼마나 친했는지 지금은 그 정도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가 같이 의경에 동반입대 하���고 한 말에 군말없이 같이 군대를 와 줘서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걔 덕에 군생활에 의지할 존재가 있어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지금은 꼼 데 가르송 옷 잔뜩 입으면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어줬음 좋겠다.
제대할 즈음에는 그 리스트에 절실하게 쓰던 것들 군대에 있는 동안 손에 넣었던가 아니면 관심이 없어졌다. 내가 제대하는 날에는 비가 많이 왔고 살짝 앞으로 어째야 하지 하는거랑 뭣보다 실감이 나질 않는 기분에서 떠있는지 가라앉았는지 모르는 마음으로 집에 가는 버스에 올라탔던 걸 기억한다. 그런 애매한 감정들의 소용돌이 가운데에서 가장 큰 감정은 해방감이었다. 군대에서 해방 된 후 열린 내 인생의 가능성이 막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고 난 그게 실제로 보였다. 친구들하고 치킨집에서 제대를 축하하며 이제 군대 갔다오니까 어지간한 건 안 힘들거 같다고 넉살을 떨었다.
요새는 특별히 그런 생각을 한다. 군대 때 생각하면 지금은 적어도 먹고싶은거 먹고 싶을 때 먹어도 되고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수첩에 적으면서 궁상 떨지 말고 그냥 카드로 긁으면 되는데, 어지간한 게 다 군대보다 힘든 것 같다. 군대는 내가 지금 마흔이 되서 인식하고 있는대로, 그냥 그 앞으로 펼쳐질 끊임없는 내리막길 중에 잠깐 평평한 곳이었던 것 같고, 계~속 군대보다 높은 난이도의 인생의 난제들이 날 찾아온다.
한국 날씨가 영하 11도인걸 보고 몸서리를 치며 오늘 15도가 넘는 따스운 동네에서 3600엔짜리 돈까스를 먹고 집에 와서 낮잠도 자고 컴퓨터도 하고 새로 나온 영화도 보면서 하루를 알차게 쉬는데 한켠으로 계속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하다. 어느 덧 조용한 순간이 찾아와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한발짝 한발짝 인생이 종료로 향해가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지금 하고싶은게 뭘까 할일이 많은 건 알겠는데. 내가 하고싶은일이 있다고 해도 앞으로 할 기회나 시간 같은게 있을까? 이젠 정말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일까. 수첩 같은걸 찾아서 찬찬히 적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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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수학 선생님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에,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에, 과천 별양동 반지하 방에서 살고 있던 시절에 우리 부모님은 내가 부족한게 없게 하려고 부던히 노력을 했다. 피아노 학원도 보내줬고 미술 학원도 보내줬다. 내가 산수를 양이랑 가를 계속 못 넘는 걸 본인들이 고칠 수 없겠다고 판단한 부모님은 방문 학습지를 등록해줬다.
하나수학이라는 이름의 산수 교육 전문 방문 학습지였다. 지금 검색하니 흔적도 없는 거 보니 인터넷이 탄생하기 전에 망해서 없어진걸수도 있겠다. 주로 여러분들이 아는 구몬 학습지나 그런 식으로, 월별 주별로 문제집이 잔뜩 우편으로 와서 주에 한번 선생님이 집으로 방문해서 스스로 푼 문제들을 같이 보면서 공부를 하는 그런 시스템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그런 지저분하고 어두운 집에 남을 들일 생각을 우리 부모님은 잘도 했다고 생각이 든다. 내가 언젠가 언급한 적이 있지만 나는 정말로 여름에는 모든 집 벽지에 곰팡이가 서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하여튼 그런 집으로 일주일에 한번 선생님을 불러서 지지리도 못하는 산수 공부를 시작했다. 국민학교 3학년이나 그 때쯤 이었을거다. 교실에서 남자애들이 여자는 보지라는게 있어서 거기에 꼬추를 넣고 오줌을 싸야 임신이 되는거라고 엉터리 소문을 수근거리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항상 반듯한 양복 차림으로 파마를 했는지 원래 곱슬인지 모르겠지만 풍성한 머리칼을 하고 있는 체격이 튼튼한 남자 어른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하나수학 선생님에 대해선 그 정도밖엔 기억이 안 난다. 그 다음으로 기억나는 건, 내가 도무지 산수공부에 흥미를 가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하나수학 학습지를 안 했으면, 좀 더 산수에 흥미를 가졌을지도 모를 정도로, 주마다 달마다 날라오는 학습지를 푸는게 고역이었다. 선생님이 방문하기로 한 날마다 뭔가 핑계를 대며 안 하고 싶었지만, 국민학교 저학년 남자애에게 방과시간 후의 오후에 공부를 안 할 수 있는 다른 이유는 좀처럼 나타나질 않았다. 나는 시작하고 얼마 안 되 부모님에게 하나수학 끊자고 쪼르기 시작했고, 엄마 아빠는 그 얘기를 어떤 식으로 듣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하나수학 선생님이 한주동안 풀어야 할 분량을 반도 안 풀어 놓은 나를 다그치면서 가르치려고 들 때마다 '우리 엄마가 곧 하나수학 끊는데요' 라고 선생님의 눈을 보고 당당하게 협박을 했다. 처음에 하나수학 선생님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내가 거의 매주 '뭐 끊을건데 해서 뭐하남' 이라던지 '끊을거니까 안해도 되죠?' 이런 식으로 선생님하고 모든 대화를 못되게 받아치는 것에 참다참다 못한 선생님이 '정말 니네 엄마가 그만 하라고 하면 안 올테니까 앞으로 그런 얘기는 선생님이던 남이던 하는게 아니다. 실례다.' 라고, 언제나처럼 숙제를 안 하고 학습태도가 태만한 학생을 대하는 얼굴이 아닌, 한 인간에게 실망한 듯한 얼굴로 나에게 본심을 토로했다.
30년정도 지난 지금 불현듯, 그 선생님의 씁쓸한 듯 웃는 듯 나에게 적당히 하라고 말하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아려온다. 내가 그 말에 어떤 반응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 것도 마음을 먹��하게 하는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그 선생님은 지겹게도 내가 당시에 쓰는 숫자 '9' 를 고치려고 했다.

뭔가 이유를 들었는데 지금은 기억이 안 나고, 하여튼 오른쪽처럼 쓰라고 계속 혼냈다. 나는 당시에는 그것도 정말 짜증났다. 그냥 '9'로 보이면 어찌 쓰던 상관 없는거 아닌가 학습지와는 별개로 '9'를 공책 한바닥 써오라고 숙제를 내 준 적도 있었다.
정말 인간에게 있어서 교육이라는게 중요한게, 나는 이후 하나수학 선생님한테 배운대로 '9'를 저렇게 쓰는 사람이 되었다. 지금은 '9'를 저렇게 쓰는 것에 대해 아무런 의구심도, 다른 방법으로 써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많은 다른 긴 시간 동안의 수 많은 형태의 교육이 지금의 나를 형성해, 내가 지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가치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을 허락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 뭘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 당연한 것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생각할 수 있는 조그만 계기를 주기 위해 곰팡이가 핀 방에서 건방진 꼬마를 향해 묵묵히 덧셈뺄셈을 가르치고 있었던 하나수학 선생님 인생에 행복과 기쁨과 성취감이 가득했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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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름이 드디어
어제는 계속 비가 내렸고 오늘도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다. 에어콘을 틀지 않고 맞이하는 아침이 얼마만인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9월 23일. 짐이 23년의 여름은 끝났다고 선언하노라.
일본(도쿄)의 여름은 정말 혹독하지만, 특히 올해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최장이고 최고의 혹독한 여름이었던 것 같다. 6월 초중순 정도부터 기온이 오르기 시작해서 최고온도가 33도이면 '오늘은 좀 견딜만 하겠네' 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2,3개월여였다. 뉴스에선 연일 '생명에 지장을 줄 수 있는 더위' 라고 표현을 했다. 실제로 그 더위에 쓰러져서 죽는 사람을 꼭 찝어서 얘기하는 게 아니었던 게다. 매일 이런 컨디션으로 살다 보면 짧게든 길게든 생명에 지장이 있을 거 같다.
그렇게... 여름이 끝나는 걸 기다리다 보니 올해도 어느덧 마지막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지도 못하고(여기에 쓸 의미가 없는 일들은 많이 일어나긴 했다) 또 무덤으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가고 있다.
눈을 감고, 많은 생각들을 한다. 주로 일찍 잠에서 깨어 침대를 벗어나지 못 하는 시간에, 잘 안 풀리는 회사 일에 대해 고민을 하고, 싫은 사람들이랑 싫어해야 할 사람들이랑 날 좋아하는데 나는 싫어하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한다. 가슴이 뛰고 손발에 땀이 막 난다. 오늘도 이런 것들 쁘러스 혹독한 더위와도 같이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좀처럼 침대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그럴 때 마다 눈을 감고 여름 페스티벌에 출연하고 셀 수도 없는 관중들 앞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고 방방 뛰어다니던 기억을 하려고 노력한다. 여름의 한낮의 스테이지에서 땀이 눈으로 들어가서 공연시간 30분여의 절반을 눈을 제대로 못 뜬 그런 순간들을 기억하며 정말로 '그 때가 좋았지..' 라고 마인드를 컨트롤 하려고 노력한다. 당연하지만 옛날의 좋았던 시절을 생각하면 할 수록 현실이 비참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래도, 좋게 생각하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떠올리면서 그때가 좋았지 라고 생각할 순간이 없는 사람도 있을 거다. 예를 들면 우리 아빠. 나는 마흔살이 되어 결혼도 못하고 애도 못 가지고 아직도 뭔가 인생에 짜릿한 좋은 일이 있지 않을까 하고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이 타임라인에, 우리 아빠는 나와 엄마를 위해 사회의 저변에서 하기도 싫은 일을 매일 하면서 내가 게임기를 사달라고 조르면 그걸 사주려고 통장 잔고를 노려보지만 답이 안 나오는 날들을 수도 없이 보냈을것이다. 나는, 그런 희생과 인간애 그 자체인 위대한 나의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관심도 없는 일에 시간이랑 돈을 쓰는 걸 견딜 수 없는 건방진 어른이 되었다.
이제 곧, 추위를 견디며 언제 이 추위는 한 풀 꺾일까 하고 기다려야 하는 날들이 계속 될 것이다(근데 올해 겨울은 그렇게 춥지 않을거라고 한다. 과연). 남들에게 책임감이 있고 성실하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건방진 사회인 권선욱의 앞으로의 인생은, 싫은 것들을 견디며 그게 지나갔을 때의 잠시의 평화에 안��와 행복감을 느끼는 그런 나날들의 반복이라고 생각하니, 슬퍼서 눈물도 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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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지지 않는 상처
국민학교(초등학교) 고학년 때 반에 남들과 다른 여자애가 하나 있었다. 요 근래 알았는데 '안면형성장애' 라는 병을 가지고 있어서 얼굴이 생선같이 생긴 애였다. 눈은 양쪽으로 넓게 퍼져서 뿔룩 튀어나왔고 윗 입술이랑 코는 거의 달라붙어있었다. 우리들은 그녀를 '호프' 라고 불렀다. 왜 호프가 되었는지는 기억이 안나는데 어쨌든 그 추한 외모에 대해 최대한의 비아냥을 담고 있었을 것이었다. 나를 포함한 반 애들은 걔를 신나게 괴롭혔다.
호프는 항상 얼굴을 가리기 위해 한 손을 입 언저리에 대고 있었다. 밥을 먹을 때도 음식을 입 안에 가져다 넣고 바로 숟갈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선생님이 발표를 시킬 때도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대답을 했다. 우리는 정확히는 그 행동이 웃겼었다. 항상 입 주변에 대고 있는 손은 냄새가 구릴거라고 예측하며 낄낄거렸고, 언젠가 용기 있는 반 친구가 호프의 손을 낚아채서 냄새를 맡고 나서 진짜 냄새가 심하다고 알려줬다. 우리는 와 씨발 냄새도 구리내 이러면서 더 심하게 호프를 괴롭혔다. 호프는 심하게 당황했고 심하게 겁을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이 물 밖으로 튀어나와서 펄떡거리는 생선의 얼굴같아서 얼마나 웃겼던지.
다만 호프는 우리들이 그렇게 놀리고 괴롭혀 댈 때마다 반 여자애들의 보호를 받았고, 실제로 호프는 여자애들 몇 하고는 친하게 지내기도 해서,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고 지금에 와서는 제발 그랬음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냥 기괴하게 생긴 여자애를 반 남자애들이 하나의 놀이 도구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 같았다. 호프의 기분이 어떨지, 호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상관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질릴때까지 가지고 놀 장난감을 항상 찾고 있었다. 언제는 그게 오락실에 있는 아랑전설 2였고, 언제는 다마고치였고, 언제는 호프였다.
호프는 학년이 바뀌면서 결국 전학을 갔다. 우리들은 반이 바뀌어서 새 생활에 적응을 하는 중이라 그런 사실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이사도 안 갔고, 다만 한 500미터 떨어진 다른 국민학교로 전학을 갔다는 사실이 소문으로 돌았다. 그럼 뭐 괜찮네. 뭐가 괜찮은진 모르겠는데 괜찮다고 생각하고 호프가 이 학교에서 사라진 사실과 책임을 칠판 지우개 털듯이 털어서 날려버렸다.
문제는 내가, 그 학년이 바뀌고 나서 따돌림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위화감부터 시작했다. 체육 시간에 모든 학생이 농구 프리스로 실기시험을 보는대 차례대로 모두가 박수를 치고 응원을 하는데 내 순서가 왔을때 이상하게 조용했고, 우리 아빠가 분발해서 사준 나이키 운동화의 에어 부분이 찢어져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미술 시간에 그린 그림이 찢어져서 쓰레기통에 버려진 걸 보고 그 때 내가 따돌림을 받고 있다고 깨달은 거 같다.
그 이후부터는 나를 향한 괴롭힘이 조금씩 심해졌다. 나를 따돌리는 애들이 나를 집까지 쫓아오며 괴롭혔다. '왜 이렇게 되었지?' 라고 궁금해 하느라 슬플 새도 없었다. 힘들 새도 없었다. 어쩌다 내가 따돌림을 받는지 그 이유가 계속 궁금했다. 그것만 알면 평생 따돌림을 받으며 살아도 괜찮을 정도로 이유가 궁금했다. 뭐 나한테 잘못이 있었겠지. 근데 그 잘못이 뭐였을까?
중학교 진학이 결정됐다. 나를 따돌리는 애들중 일부는 같은 중학교로, 일부는 다른 중학교로 배정이 되었다. 괴롭힘이 멈췄다. 모두에게 다른 장난감이 생긴거다. 나는 일단 안도했고,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불량학생 라이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나를 따돌리던 애들하고 어울려서 나쁜짓을 일삼았다. 하루하루가 그렇게 충만했던 시절은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없을 거 같다.
국민학교때 따돌림을 받던 경험이, 이렇게 평생을 갈 줄은 나도 지금에야 알게 되었다. 마치 노크도 안 하고 벌컥 들어와서 내 잡안을 슥 살피기만 하고 나가는 묘한 손님같이 순서도 타이밍도 없이 내 마음 한구석에서 플래시백된다. 나는 결과적으로 염새적이고 비관적이고 자의식 과잉인 어른으로 자랐다. 내 토깽이를 보면 그 차이는 지명하다. 말그대로 물에 물이 반밖에 없으면 나는 물이 반밖에 없네 라고 말하고 깔치는 물이 반이나 있네 라고 말한다. 그 알기쉬운 차이에 가끔 깜짝 놀라기까지 할 정도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유를 계속 생각 할 때, 어쩔 수 없이 계속 원인으로 생각이 드는 게 국민학교때의 따돌림을 받던 경험이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같이 드�� 생각은 내가 누군가를 괴롭히던 시절의 기억이다. 호프는 과연 그런 외모로 지금 어디서 어떤 식으로 살고 있을까. 나와 반 친구들이 괴롭히고 따돌리던 그 때의 기억과 체험은 그녀의 삶 안에서 어떤 식으로 그녀를 바꾸고 형성시켰을까.
가능하면 지금이라도 그녀에게 사과하고 싶다. 너 때문에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으니 책임지라고 하면 전 재산이라도 털 수 있을거 같다. 그리고 사과가 필요 없을 정도로 나보다 그리고 나랑 같이 괴롭히던 애들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행복한 삶을 보내고 있었음 좋겠다. 그럴 가능성이 미치도록 희박하다고 계속 생각하게 되는 건 내 성격 탓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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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 알바 면접
나의 20살 21살의 삶에서 가장 명료하게 기억이 나는 건, 아침 7시에 테레비에 나오는 뉴스를 자막도 원고도 안 바꾸고 점심에도 저녁에도 몇 번이나 똑같은 내용을 내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아 그래도 되는구나' 하고, 세상이 정신 없는 거 같아도 일정한 패턴이 있고, 다들 힘 뺄 때는 빼고 줄때는 주고 가고 있다는 섭리를 깨달으며 안양 석수3동의 주공아파트에서 수 일, 수 개월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테레비를 보며 집에서 보냈던 나날들이다.
부모님 포함해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은 낮에 일을 하던 학교에 다니던 하고 있었다. 나는 대학을 안 갈 마음으로 고등학교 졸업하자 마자 예고 선생님 추천으로 영화사에 취직을 했으나, 그 영화사는 그럴싸한 작품 하나 못 만들고 내가 일을 그만 둔 후에 망했다. 고등학교 갓 졸업한 애가, 심지어 반골정신으로 가득 차서 일부러 대학도 안 간 자의식의 덩어리 같은 애가, 좋은 작품을 영화로 만드는게 아니고 돈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얘기해서 만들어진 작품중에 좋은 게 힛트를 한다는 영화계/연예계의 생리를 목격하고 나서 적잖이 절망했다. 엄청 쫓아다니던 아이돌이 돈만 밝히면서 기혼자랑 불륜을 하고 있다는 인간이었다는 걸 알고 난 후의 기분이랄까.
영화사를 그만두고 나서는 이제 '난 음악으로 성공한다!' 라고 마음먹고 집에서 하루에 한시간 이하 기타 연습하고 23시간 아무것도 안하는 날들이 한 몇개월정도 이어졌다. 한달에 두번정도 노가다를 나가서 번 10만원정도랑 엄마아빠가 주는 용돈으로 연명했다. 물론, 이렇게 살면 안되는데.. 하고 극심한 자기혐오에 빠져서 살았고, 지역 정보지에서 아르바이트를 찾는 곳에 연락을 돌려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이력서를 마구 보내댔지만 연락이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안양 일번가에 목욕탕을 청소하는 일자리에서 연락이 왔는데, 전화를 받자마자 엄청 불친절하고 퉁명스러운 전화 저쪽의 남자가 '내일부터 나올 수 있어요?' 라고 해서 나는 구원받은 기분이 되어 그러겠다고 했다.
다음날에 목욕탕에 갔더니 딱 안양에 있는 목욕탕에서 일하는거 같은 남자애가 나를 맞았다(이 표현이 편견적인 공격성을 띄고 있는 건 알겠는데 정말 그렇게밖에는 표현을 못하겠다, 사실 기억이 잘 안 나는것도 있고). 다짜고짜 몇살이냐고 묻길래 나이를 말했더니 '내가 한살 밑인데 그냥 말 놀게 괜찮지?' 라고 했다. 나는 거기서 '아무리 그래도 그럼 안되지' 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강한 남성이 아니어서 알았다고 했고, 그러자마자 무슨 일 해야 하는지 알려줄게 하더니 하나하나 업무를 가르친다기보단 목욕탕을 돌면서 훑어 가기 시작했다. 나는 일단 대놓고 반말을 하는게 기분이 나빴고, 업계 무��험자에게 앞으로 해야 할 업무의 설명을 너무 대충하는 게 불안해서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그 남자애의 뒷꽁무늬를 쫓았다.
그렇게 탕 안까지 둘러보고 난 뒤였는데, 갑자기 어른 한 명이 나와서 '아니 지금 뭐 하는거야?' 라고 한다. 그 남자애가 '저 그만둘거라 새 알바한테 일 가르치는데요' 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어른은 당황하며 '아니 잠깐 기다려봐,' 라고 하더니, 나한테 정중하게 정말 죄송한데 없었던 일로 하고 돌아가 달라고 부탁했다. 상황이 조금 파악이 되는 거 같았다. 남자애는 뭔가 자기가 지금 일하고 있는 목욕탕에 불만이 있어서 그걸 시위하기 위해 구직자를 불렀고, 그 남자의 상관에 해당하는 어른은, 남자애가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얘의 불만을 이젠 좀 들어줘야겠다고 정신을 차린 것 같은 정도가 짧은 대화의 분위기에서 읽혔다. 나는 일단 이런 새끼랑 같이 일해야 하는건 안되겠다. 라고 은연중에 생각을 하고 있었던 터라, 자못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목욕탕을 뒤로 하고 나왔다. 두 말 할것도 없지만, 안양에 있는 지저분한 목욕탕에서도 나를 받아주질 않는데 나는 뭘 할수 있으리... 하는 절망감은 록스타의 꿈으로 가득 찬 젊은이를 무겁게 짓눌렀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서 어렵고 싫은건 참 많지만, 정말로 제일제일 병이 날 정도로 싫은 건 자기랑 안 맞는 사람하고 주 5일(혹은 그이상) 낮과 밤을 얼굴을 마주하면서 같이 일을 해야 한다는 점이라는걸 요 근래 계속 느낀다. 그걸 안 하기 위해서라면 영화사에서 일할 때 환멸을 느낀 업계의 진실이나 생리같은건 한 다섯번 더 느껴도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고, 또한, 나는 왜 목욕탕의 남자애처럼 윗사람이던 아랫사람이던 안면짤하고 이용해서 상황을 자기한테 유리하게 꾸미지를 못할까 하며 모든이에게 친절하고 남 고생시키느니 내가 조금 불편하는게 낫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던 나날들을 후회하고 있다.
그 목욕탕 남자애도 지금은 돈도 잘 벌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건 그거고 인생이란 게 참 옛날옛적의 게임이랑 닮아있다는 얘기에 동감을 하게 되는 나날들이다.
'Old computer games could not be won. They just got harder and faster until you died. Just like real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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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면허 갱신(재발급)하기
가끔 렌터카를 빌려서, 토깽이같은 깔치랑 휴일에 가나가와나 치바나 도쿄 주변을 드라이브 하는게 유일하게 내가 최근 이 나라에서 가슴이 뛰고 즐거운 일이었는데, 일본에서 발급받은 운전면허가 유효기간이 끝나버렸다. 여름 휴가를 맞춰서 둘이 차를 빌려서 요코스카로 바다를 보러 갔다 왔는데, 아무리 한두시간 거리라도 여자친구한테 계속 운전을 시키는게 계속 미안했다. 그래. 다른 거 재쳐두고 얼른 면허 재발급 신청부터 해야겠다. 고 마음을 먹었다.
갱신 기간 내에 갱신을 안하면 면허가 취소가 되어, 굉장히 까다롭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면허를 새로 받아야 하는 것 같았다. 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황금같은 여름 휴가의 마지막 날을 써서 도쿄 외곽의 면허시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서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1시간 20분 정도 가야 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나는 휴가의 마지막 날이고 혼자 면허 갱신을 하러 가는게 심심하고 그래서 같이 가자고 깔치를 꼬셨다. 완전히 똑같은 경험(갱신이 아니라 재발급)을 한 내 깔치는 그거 하루 종일 걸려서 나 가도 할 게 없다 라고 안간다고 하는 걸 무리해서 끌어 내었다.
아니나 다를까 운전면허 시험장에 도착하니 첫 접수만 대기인이 60명정도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나처럼 귀중한 여름휴가 시즌에 하루를 뽑아서 면허를 갱신하러 온 사람들인 거 같았다. 번호표를 뽑고 한 5명이 지나가는 시간을 계산하고는 나는 이건 하루가 날라가겠구나 하고 묘한 절망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깔치의 표정이 확 굳어있다. 나는 몇 번이나 사과하고 여자친구를 돌려보냈다. 나중에 보니 상대방의 면허 갱신을 위해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면서 기다려주는 커플 몇 쌍을 보았긴 했는데, 그정도로 달라붙어 있기엔 우리는 너무 오래 같이 살았고 시간이 1분 1초가 아까운 현대사회의 남성과 여성이었다. 어쨌든 깔치는 기분이 확 상해서 1시간 반 걸려 운전면허 시험장에 오자마자 삼십분이 안 되어 다시 한시간 반을 넘게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내 번호 차례가 와서 겨우 접수를 시키고 정신 없이 직원들이 시키는 대로 돌아다녔다. 시력 검사도 하고, 인지능력 검사도 하고, 면허 갱신료도 구천엔 가까이 지불하고. 정신이 들어보니 점심도 못 먹고 물도 한 모금 못 마시고 있었다. 접수를 하고 내가 언제 불릴 지 몰라서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기에 화장실도, 식사도 못했다. 초코바 하나랑 생수 하나를 사서 대충 허기를 채웠다. 아침 9시쯤에 동네에서 버스에 올라탔는데 어느덧 15시가 되어가려 하고 있었다.
면허 재발급의 마지막 관문은 처음 운전면허 갱신을 하는 사람들이 필수로 받아야 하는 2시간짜리 교습이었다. 이걸 수료하고 도장을 받아야 면허를 내 준다고 했다. 대학교의 커다란 강의실 같은 곳이었다. 여러 나이의 남녀가 곽 들어차서 앉아 있었다. 나같은 외국인들도 꽤 많았다.
수업은 뭐 당연한 얘기들이었다. 운전 수칙을 잘 지키고 안 지키면 사고나고 벌점물고 면허 취소되니까 조심하세요. 핸드폰을 보거나 자면 재수강을 시킨다고 강사가 수업 시작 전에 엄청 상냥한 말투로 거듭 거듭 주의를 주었기 때문에, 모두들 딴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핸드폰을 만지거나 다른 짓을 하는 사람은 내가 보기엔 없었다.
강의실 창 밖으로 올곧게 자란 커다랗고 울창한 가로수들의 녹색이 보인다. 그러고보니 내가 대학교때도 이런 곳에서 수업을 듣곤 했지. 그때 그 애는 잘 지내고 있을까? 그때 그 선생님은 아직도 그 학교에 있을까. 갑자기 세차게 소나기가 내리다가, 금세 맑아져서 말매미 울음 소리가 소나기 소리만큼 커다랗게 들려온다. 뭘 생각하고 있는 지 알 수 없지만 절대로 강의에 집중을 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의 얼굴 사이로 흠뻑 젖은 한 여름의 가로수길이 작열하는 태양을 반짝반짝 튕겨내고 있다.
면허를 발급 받고 시험장을 나서니 17시가 지나고 있었다. 진짜 하루가 다 갔네 씨부랄.
집에 돌아가, 내일부터는 다시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와 일상이다. 잘 버틸 수 있을까? 새로 나온 면허의 반딱반딱한 질감을 확인하며 나는 몇번이나 심호흡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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