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takesmargin ·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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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페트라르카: 소네트
( Canzoniere 51: Poco era ad appressarsi agli occhi miei )
망연하게도 반짝이던 그 빛이
나의 눈으로 더욱 다가왔더라면, 
그럼, 그녀가 테살리아에서 자신의 형상을
변모시켰듯, 나 역시 내 전부를 그러했겠네. 
허나, 나 자신이 이미 그러한 것 (내게 위안은 못 되네) 
이상으로 그녀로 변모할 수 없었으므로, 
이제 나 어떠한 견고한 재료로든
내 모습이 조각되어지길 바라네.
다이아몬드로, 고운 대리석, 두려움에 희어진
그것으로, 혹은 차라리, 탐욕과 어리석음의 
무리에 상찬받는 저 수정으로 -
그리하여, 이 가차없이 육중한 멍에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면; 나는 심지어 저 아틀라스, 
모로코를 어깨에 짊어진 그 처지를 샘한다네. 
LI
Poco era ad appressarsi agli occhi miei la luce che da lunge gli abbarbaglia, che, come vide lei cangiar Thesaglia, cosí cangiato ogni mia forma avrei. Et s’io non posso transformarmi in lei piú ch’i’ mi sia (non ch’a mercé mi vaglia), di qual petra piú rigida si ’ntaglia pensoso ne la vista oggi sarei, o di diamante, o d’un bel marmo biancho, 10per la paura forse, o d’un dïaspro, pregiato poi dal vulgo avaro et scioccho; et sarei fuor del grave giogo et aspro, per cui i’ ò invidia di quel vecchio stancho che fa co le sue spalle ombra a Marroccho.
( * 번역: ittakesmarg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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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takesmargin ·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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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말라르메: 성녀
창에 은거한
낡은 백단목; 
언젠가 플루트, 만돌린과 
반짝이던 비올라,
거기 희미한 성녀,
고서를 펼쳐, 밝혀 놓으니 
성모 송가 흘러나온다 
지난 밤과 저녁의 기도-
창문의 성광聖光
그녀는 하프, 천사의 
숙련된 야간 비행을 위한
저 도구를, 손가락 뼈로 
연주한다, 섬세히-
백단목도 고서도 아닌
음악의 깃에 의존하여
침묵의 발랑세balancé한다
Sainte
À la fenêtre recélant Le santal vieux qui se dédore De sa viole étincelant Jadis avec flûte ou mandore,
Est la Sainte pâle, étalant Le livre vieux qui se déplie Du Magnificat ruisselant Jadis selon vêpre et complie :
À ce vitrage d’ostensoir Que frôle une harpe par l’Ange Formée avec son vol du soir Pour la délicate phalange
Du doigt que, sans le vieux santal Ni le vieux livre, elle balance Sur le plumage instrumental, Musicienne du silence.
( * 번역: ittakesmargin )
* ( .. 조금 과감하게 번역해 보았다. 문학 번역에서 무엇이 중요해야 하는지는, 실은 작가마다, 또 한 작가의 작품마다 다를 수 있다고 본다. 작품의 심미성을 구축하는 중심은 개별마다 다를 수 있고, 그것의 포착과 보존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기에. 그럼에도 일반론을 말하면, 시의 경우, 내 관점에서는, 이미지의 순열을 보존하는 것이 거의 가장 중요한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다고 느껴 왔다. 이미지의 배열이 감상에서 즉각적으로 감각되는 가장 큰 부분인 경우가 많다고- 특히, 한역된 시와 원문을 비교하고 그 감각적 차이를 고민할 때, 이 면이 가장 뼈 아프게 다가오곤 했다.
이미지의 배열을 달리 놓으면 '감각적으로' 다른 시이다. 그런데 예술은 감각적 가치의 고��성에 의해 성립하는 정신의 영역이다. 따라서 '감각적으로' 라는 조건적 진술을 빼도 상관 없다. 그냥 다른 시이다- 사실 시를 조금 써 본 사람들은, [이를 의식적으로 사유할 수 있었든, 아니든] 누구나 직관적으로 그렇게 느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나는 의미의 연결이 달라지더라도, 이미지의 흐름을 보존하는 쪽의 번역 방향을 대개 지지하고 싶다. 그리고 이 방향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닐지라도, 한국어 번역에서 상대적으로 드문 편인 것을 많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작가의 목소리를 보존하는 것- 이 목소리 역시, 글의 표면적 내용만이 아니라, 거기 담긴 태도를 아울러 보는 것이다. 판결에 비유하면, 어떤 판결을 내렸는지가 아니라, 그걸 내리기까지의 고민한 과정과 그 내면의 경과를 이해하는 것이고, 울음에 비유하면 왜 그렇게 공공 장소에서 크게 우는지만이 아니라, 그 터진 울음 각각에 섞인 감정의 질의 차이를 이해하고, 그것을 보는 것이다. 오래된 언어로 얘기하면, 행위의 내용만이 아니라, 그에 놓인 감정의 고귀함을 보는 것이다. 그 일은 때로 유사한 단어들 중 어떤 단어들을 그가 골랐는지, 그 단어들에 놓인 뉘앙스의 복합적인 다의성과 상징성을 숙고하는 것을 요구할 것이다.
또, 가령 문학사적 전환기에 놓인 작가라면, 그녀/그가 종래의 지배적인 선택 중 어떤 조건을 수용하고 어떤 조건을 변화시키려 했는지도 염두에 둘 수 있다; 가령, 중세 후기에서 크라티앵 드 트루아의 선택, 중세와 르네상스의 전환기에서 페트라르카의 선택, 단테의 선택, 그들의 사랑에 대한 관념, 모두 서로들 간에 다르다. 다른 선택들을 했다. 그 선택의 방향성을-너무 현대적화여 윤색하는 것은 사실 번역이라기보다 각색에 가깝지만- 일정하게 당대화해 반영할 필요도 있을 수 있다.
과감한 번역의 이념으로 원문, 원 작가에 대한 학술적 간과가 꼭 정당화될 수 있단 것이 아니라, 다만 어떤 선택을 왜 했는지를 밝히는 취지에서 조금 적어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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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takesmargin · 4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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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artes- Monde, Homme, Dieu
*
베유는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면서 'Science et perception dans Descartes'라는 논문을 썼다. 여기서 그는 데카르트를 세계/의식 이원론의 ���조로 간주하는 해석을 '통속적'이라 배격한다. 데카르트에게 탐구의 초점은 정반대로 의식에 의하여 세계의 진상이 발견되는 과정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의 편린들을 단순히 지각하는 수준을 넘어 그것들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대상들을 포괄하는 종합적인 틀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상 자체만으로는 틀의 구성을 위한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문제시되는 그 틀이 인식 주관에게 특히 기지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과정은 주관의 편에서 보았을 때 창조의 전형에 해당하는 사건이 된다. 베유가 읽은 데카르트는 무형의 세계-즉 미정형의 세계-를 향한 통로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상상력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도 깊이 깨달았던 철학자였다.
[..] 데카르트에 관한 논문 제2부에서 베유는 살아있는 데카르트가 사고한 경로를 일인칭적으로 추적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그 경로에 대하여 짙은 실존적 공감을 표시한다. 그녀는 고백하기를 한때는 논리야말로 가장 완벽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이내 논리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쓸모없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확실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 깨달음은 '세계가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의존하지는 않지만 동시에 내가 그것을 바꿀 수 있다'는 점으로 그의 시선을 이동시켰다. 그러므로 이 둘이 모두 틀림없는 사실인 한, 세계는 인간-즉 나-에게 '행동을 허용하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지식을 허용해야 한다'는 일종의 정언명령이 베유의 마음에 투영된 테카르트의 마음에 태어났다. 다시 말해서, 행동을 위하여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관한 격물이 요구되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세계의 정체에 관한 격물 역시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문제 모두 기존의 관념으로 해명될 수는 없다. 기존의 관념에 관한 한 내가 누구인지는- 언제 태어나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 어느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안다. 세계가 지금까지 어떠어떠하였는지와 세계가 무엇인지를 동일시하는 순간 '세계가 무엇이냐'는 문제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베유가 이미 20대부터 추구하기 시작한 지식은 '세계가 나에게 가르쳐 줄 수는 없는' 종류, 그러나 '세계에 기반을 두지 않으면 안 되는' 종류이다. '세계에 발을 확실히 디디기 위하여 세계를 떠나야 하는' 까닭은 다름 아닌 이 지식이 세계와 나와의 결합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코기토에르고줌Cogito ergo sum의 진정한 ���미라는 것이다.
*
여기서 우리는 이성의 의미가 17세��와는 다른 것으로 변화되었음을 안다. 17세기의 위대한 형이상학적 체계 즉 데카르트, 말브랑슈, 스피노자 및 라이프니츠의 체계에서 이성은 '영원한 진리' 의 영역이요, 인간정신과 신의 정신에 공통된 진리 영역이다. 이성에 의해 우리가 아는 것을 우리는 신 속에서도 본다. 이성의 행위는 곧 신적인 것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이성은 우리에게 초감각적인 예지계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에 비해 18세기의 이성은 좀 더 겸손하다, 이성은 이제 경험과 관계 없이 사물의 절대적 본질을 알려주는 '본유관념'의 총체가 아니다. 이성은 유산과 같은 확고한 소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를 마치 동전처럼 간직하고 있는 마음의 창고가 아니다. 그것은 진리를 발견하고 진리를 확증하는 정신의 근원적인 힘이다. 18세기는 이성을 지식, 원리 내지 진리의 내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가능적인 힘으로 본다. 이 힘은 이것이 실제로 작용하는 행위에서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이성이란 이 힘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그것이 만들어낸 결과물들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기능을 통해서만 완전하게 알려질 수 있다. 이성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분해하고 연결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적인 모든 것 즉 주어진 모든 것을 분해하여 그 단순한 요소로 환원하고, 그리고 계시 내지 권위에 근거하고 있는 모든 믿음을 분해하여 믿음의 궁극적 동기로 환원한다. 이런 분석의 작업 후에 다시 연결하는 종합의 작업을 한다. [..] 분석과 종합이라는 이성의 이중적 행위를 인식할 때에만 우리는 존재가 아니라 행위로서의 18세기 이성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
*
[알키에에 따르면] 데카르트의 체계는 이성적 체계로 구성된 과학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비이성적인 차원의 경험, 즉 '존재들이 직접적인 현전으로서 근거 없이 발견되는' 차원의 경험을 포함한다. 존재에 대한 직접적 경험, 이것이 형이상학적 경험이다. 우리는 사물들을 과학적으로 고찰할 때 그것들을 의심할 수 있다. [과학적 경험이] 사물들에 대한 객관적 관념을 구성함으로써 그 내용을 박탈하면서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제1성찰에서처럼 형이상학적 차원에서는 의심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의심한다는 것은 우선 의심 대상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분리하는 것이고 그 대상을 관념으로서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에 대한 경험은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나'는 관념으로 변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의 본질로부터 신의 현존을 연역해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신을 부정할 수 없는 사태에 기초한다. '내가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신이 아니다.' 우리는 신을 대상으로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만지는 것이다. 의심하고 관념을 구성하는 행위 실체로서의 '나'가 직접적 의식으로서 경험되는 것처럼, 신의 관념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즉 논리적 추론 없이 안다.
달리 말하면 나 자신을 발견하고 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것은 논리적 차원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론적 상황 자체에 대한 직관이다. 과학적 관념(진리)들은 우리에게 온전히 주어져서 우리가 다룰 수 있는 것들인 반면, 형이상학적 진리들은 '존재의 일정한 현전' 을 나타낸다. 그렇기 때문에 형이상학은 우리의 유한성을 보여준다. 즉 우리는 존재를 발견하지만 그것의 확실성에 이르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을 넘어선 무한한 존재의 완전성에 의거할 때 가능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알키에는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영원한 진리의 창조자로서의 신의 개념이 핵심적이라고 생각한다. 신이 영원한 진리의 창조자라면, 우리가 형성한 인식도 궁극적으로는 신의 자유로운 결정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신을 통해서다.
[..] 알키에에 따르면 코기토는 순수한 정신 또는 지성이라기보다는 실존적 실체다. '나는 생각한다' 는 순수 정신, 지성 일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아', 현존하고 구체적인 '나'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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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takesmargin · 4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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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5
Deep communication, connection with living things give us refreshment and joy, but one would occasionally feel distress due to stimulation from others, and this often prevents them from paying enough concentration and attention on themselves, on what is deeply precious. It seems like the thing which always needs to be reminded is balance. Especially if someone has their own value of what is truly good, one should not lose his/her own tempo in any case and should be faithful to that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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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takesmargin · 4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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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연: 카르스트Karst
언 지점토 같은 공기
뾰족한 윗편에서 물 내려오는 소리 
물가에 수평으로 동심원을 긋는 움직임
푸른 액체 여인의 형상
영혼을 마주했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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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takesmargin · 4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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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아: 가연성
겨울을 들여다보며 여름을 씻고 있었다
여름은
고요해졌다
고요가 장소 같다면
여름은 너무 많은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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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takesmargin · 7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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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베유: 학업 계획
도덕에 관한 연구를 위해 시몬느는 다음과 같이 세밀한 계획을 세웠다.
철저히 연구할 것: 아리스토텔레스, 벤담, 쇼펜하우어, 니체
재검토할 것: 금욕주의, 쾌락주의, 회의주의(몽테뉴), 데카르트, 파스칼, 루소, 푸르동, 꽁뜨, 라뇨, 마르크스, 톨스토이
세밀히 복습할 것: 마키아벨리, 홉스, 라이프니츠, 울프, 베르그송, 쉘링, 피히테, 레닌, 헤겔
급속히 복습할 것: 플로티누스, 중세기, 베이컨, 볼테르, 백과사전학파
체계적으로 공부할 것: 소피스트, 소크라테스, 플라톤, 로크, 흄, 버클리, 스피노자, 칸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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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takesmargin · 7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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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pe Jaccottet: Two poems
(tr. by Derek Mahon)
End of Winter
Not much, nothing to dispel
the fear of wasting space
is left the itinerant soul
Except perhaps a voice
unconfident and light,
uncertainly put forth,
with which to celebrate
the reaches of the earth
Winter Moon
Before going out in the dark
take this mirror where
an icy blaze died:
once at the heart of night
you will find it reflects only
a baptism of she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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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takesmargin · 9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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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홍대 앞은 너무나 유니크한 공간이었고, 나의 취향, 주변의 사람들, 들르는 동네, 심지어 정치적 태도까지 거의 모든 것이 바뀌었어도, 그 때의 공간과 분위기를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는 생각이 얼마 전쯤 들었다. 카페 오후, 히비, 커피랩, 이리, 무과수마트, 바 낙타 같은 곳들- 2010년을 전후로 대부분의 공간들이 달라지고 사회 흐름도 지금과 비슷하게 선회할 무렵부터, 나는 적어도 한국의 서울에서는, 공간적으로는 그 분위기의 잔여를 찾아 서성였던 것 같다.
서울은 걷기 참 어려운 곳이다. 생활에 산책을 들이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해서, 또 책과 대화를 좋아하니 여기에서는 정말 자주 앉아 있었다. 앉은 채로 읽고 보고 쉬고 고민하고 공부하고 만났으며, 자연스레 가장 오래 앉아 있던 장소의 보통명사가 카페이다. 장소가 기억을 규정하는지 혹은 그 반대인지, 근본적으로 어떤 쪽이 맞는지 지금 잘 생각치 모르겠으나, 몇 군데 장소에 앉았던 기억으로 요약될 수도 있을 삶의 방식을 지녀 왔던 것 같다. 세븐테이블, 엣파니니, 튤립커피, 보스토크, 웨일즈, 저스틴, 그린티애, 해피니스산차, 프링크앤드링크, 모비딕, 시간의공기 ...
(사라진 곳들만 적어 보았다)
모쪼록, 사람이 정을 붙일 수 있는 장소의 객관적 조건이란 게 있지 않을까- 너무 개인적이어도 너무 공적이어도, 너무 넓어도 좁아도 (힘들고) .. 적다 보니까는 꼭 장소에 관한 것은 아닌 것만 같지만.. 아무튼 들르면 조금 더 숨이 트이는 장소들이 있고, 그 중에서 재차 들르게 되는, 또 그 중 유독 여운으로 남는 장소들이 있다. 어떤 여운이 사회적으로 현존을 지속하기 어려워질 때, 그럼에도 그 ��편은 남아 사람들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든 -좋은 의미로- 깊이 박히어, 희구된다. 얼마 전 동네 카페 사장님을 만났을 때, 최근 알고 지내게 된 동갑 친구를 만났을 때, 저 거리에 관해 새삼 그리워하며, 그 곳의 분위기와 냄새를, 자유로운 질서의 감각을, 조각의 형태로나마 삶에 들이고 구현 중임을 되새기는 대화를 했다. 톨스토이가 ≪인생록≫에서, 죽은 사람의 삶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적으며 그 삶의 여운이 다른 사람들의 삶에 녹아내리는 방식으로 좋은 삶의 영생을 논하였듯이, 한 장소의 빛도, 그 따뜻함이 설령 물리적으로 (가령, 젠트리피케이션에 의해) 사라진다 해도, 그에 정든 이들의 기억에 의해 촛대 아래 쌓인 촛농 윗편으로 다시 쌓이는 촛농처럼, 이어져 지속한다.
삶vie은 빛 (들)의 기억이며, 새로운 각각의 빛은 그것을 반영reflet한 삶들을 모아 그들을 하나로 결속시킨다-
지난 연말,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라는 한 시인의 문장을 우연히 떠올렸거니와, 위에 생각한 바에 따르면 실은 그 문장을 바꾸어 이렇게 얘기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밤의 피곤들이 빛을 끌어당긴다, 오히려 밤에 의해 빛들이 (피곤을 잃고) 서로를 끌어당긴다, 라고. 혹은 빛은 다만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된 빛들이 더욱 커다란, 보름달 같은 빛을 이룬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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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takesmargin · 10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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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takesmargin · 11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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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달 (역순)
수요일은 한화클래식 들으러 예당에 갔고, 금요일은 정재일 보러 들으러 세종문화회관에 들렀다. 내일은 알베르트 세라 보러 정동 시네마테크에 간다. 다른 것들도 또 중간중간 보고 들었고, 동행이 있으면 마치고 일정 대화와 음��를 했다.
오랜만에 부지런히 이것저것 보고 사람들을 만나며 느끼는 것은, 이 정도 빈도와 자극은 내 정신적 삶에 꼭 필요하다는 것. 지금의 나는 이 수준의 밀도와 요구되는 집중력은 충분히 일상적으로 소화할 수 있다는 것.
내가 표현해야 할 주제를 조금씩 이해하고 있다. 나의 주제도, '나'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어느 때보다 나 자신을 투명하게 볼 수 있는 시선이 주어진 한 해였고, 그래야만 했고, 해야 하는 대로 보았고, 그러한 의무의 수행에 따른 고요함이 일 년 내내 주어졌던 것 같다- 정서의 고요함이 아니라 시선의 고요함이.
새삼, 김환기가 처음 파리에 들렀던 것이 그의 나이 40이 넘어서였고, 다시 뉴욕으로 갈 때 그의 나이가 만 50이었다는 걸, 그의 글을 읽다가 세 보았다- 그 사실이 희망적이라기보다, 역시, 어떤 의무가 명확해지는 느낌에서 비롯한 안도감이 있었다.
'의무' 라는 관념에 대한 느낌이, 요즘 조금씩 바뀌어 간다. 자유와 의무가 모순되지만은 않을 수 있다는 생각 든다. 한편으로, 자유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의무를 위해) 잠시 주어진 것이라는 것, 또 다른 한편, 의무는 스스로가 진심으로 받아들일 비로소 진정한 의무가 된다는 것, 끝으로, 누구든 의무를 받아들인 이를 함부로 주위에서 방해할 수 있다고 여겨서는 곤란하다는 것- 이 느낌이 공유되는 것이 한 사람의 내면에도, 사람 간에도, 세상에도 참 중요할 것이다. ( 11/28, 12/07, 12/09 .. 등의 일기를 요약해 보고, 오늘의 감상을 덧붙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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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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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가 원하는 것을 그가 주실 것이므로, 저 편에 신이 있다… 2) … 쉽게 주시지 않을 것이므로, 저 편에 신이 있다 … 두 직관, 기질은 다르다. 나로 말하면 신자보다는 '넌스 nones' 에 가깝지마는, 굳이 말하자면 후자의 편이다. 오히려 '내' 가 원하는 것이 쉽게 주어지지는 않을 수 있다는 직관으로부터, 신 (혹은 신적인 것) 에 대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만 같다.
(231128)
* 연예인의 어떤 고백보다, 사생활을 공개하는 공영방송이 더 끔찍함.
(231126)
* 디자이너 마영범 인터뷰 : http://mdesign.designhouse.co.kr/article/article_view/101/47234 http://news.nate.com/view/20120408n00760
(231125)
* " .. 미켈란젤로는 지상의 아름다움이 우리가 그것을 통해 신적 우아미를 인식하는 '운명의 베일' 이상의 것이 아니며, 우리가 이 아름다움을 거듭 사랑해도 되는 것은, 그것이 신성의 반영이기 때문일 뿐임을 (또 역으로 그것만이 우리가 신선한 비전을 획득할 방법임을), 또 '건강한 눈' 은 신체적 완전성에 대한 명상을 통해 천상으로 인도된다고 주장했다 .. [..] 미켈란젤로는 관념을 꾸준히 이데아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했고, 이를 '심상imagine'과 분명히 구분했다. 재현에 관계하는 심상과 달리, .. 관념은 .. 자유롭고 창조적인 개념을 의미한다. 그것은 스콜라주의자들이 표현했듯, '행해진 형식forma acta' 이 아닌 '행하는 형식forma agens' 이다 .. " ( + .. CIX. 50에 따르면, '관념'은 '심상'의 이데아이며, 후자는 전자에 따라 돌 속에서 형상화된다. )
- 에르빈 파노프스키 <이데아>.
" .. 내 생각에는 불멸의 신이 만든 모든 작품, 그것이 인간의 형식이든 야생의 이국적 동물이든, 아니면 통상 쉽게 모방된 물고기든, 하늘을 나는 새든,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그것을 충실히 모방하는 그림은 완전하고 신성하다. 내가 보기에 이런 것들 각각을 완전하게 모방하는 것은 다름 아닌 신의 활동을 모방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 여기서 예술-자연미 간의 큰 대립은 없다. 고대인들은 “영혼의 아름다움” , “정신적 미” 라는 표현으로 충분히 서로간 소통하였으나, 현대인들에게 저 표현 자체를 소통시키려면 훨씬 더 많은 맥락과 유보가 필요하다. 현대에는 자신의 삶을 반성할 때 “영혼” “정신” 과 같은 용어를 쓰지도 않고, “아름다움” 또한 일차로 감각적인 것에 한정되기에 [ + ‘이성’ 이란 용어는 근대적 의미의 ‘합리성’ 과 거의 동치되고]. 영혼의 아름다움에 대해 들었던 이들 대다수가 그것을 추구할 만하고, 자기 삶에서 추구할 수 있다 믿던 시기가 있었다. 그것은 선택된 자들만의 인생의 목표가 아니었다.
(231124)
*
(한병철도 언급한 바) 삶의 '의례' 문제란 다른 무엇보다 일상을 구성하는 일들에 애정을 부여할 수 있느냐 같다.
현대인과 종교 사이의 유력한 첫 만남점도, 특정 종교의 교리나 도덕관 혹은 의례 ���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부분을 탐색하는 데서라기보다, 전체를 이루는 몇몇 기초적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 그게 가능하기 위해 선제되어야 할 심정에 정서적으로 공명하는 일, 그리하여 이를 자기 일상을 이루는 요소에 부여하려는 일련의 시도에 있지 않을까 한다.
(231123)
* 마음의 다정함을 지키는 것은 종종, 특히 자신이 궁핍할 때에는 종교적 믿음과 유사한 무엇을 필요로 하지만, 그 결과는 현실적으로 막대한 보상을 주는 듯. 무엇보다 자기 부정을 줄여 주고, 소중한 이들과 관계가 지속되도록 한다. 다정함을 지키는 한 핵심은, 사태를 상대의 눈으로 최대한 바라보는 시도인 것 같다. 정말 순간에 한 번만 진지하게 상대 입장을 상상해 볼 수 있으면, 그게 가능하면 내적 갈등은- 외부에서 부과된 것이든, 내 안의 문제에 의한 것이든- 알아서 좀 사그러드는 듯. (231121)
*
융은 언젠가, 서양인들의 근원적 “자기self” 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겠냐고 말했다. 그에게 삶이란 자아로서 각자의 <자기>에 이르는 도정이었고, 그는 이성에 대한 관심 역시 자아의 전체성 회복의 일환이라 생각했다.
자아 실현의 범형으로서 예수, 라는 시선은 여운을 준다.
저 시선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도덕-종교적 범형일 뿐 아니라 체현된 전체성의 상징이다. 저 시선-원근법에서 개인성-신성의 뚜렷한 구분은 다소 간과되고, 인간성의 초-개별성, 근원적 신비, 깊이, 보편성이 강조된다.
융이 ‘말할 수 있던’ 것보다, 각자의 내면에서 음미할 함축이 더 커 보인다. (231120)
*
정확함이 선善과 만날 수 있는 지점에서의 정확함을 추구하고 싶다. (231117)
* 오늘. 잠에서 깨자마자 어느 구절들이 가물가물, 몇 단어가 빈 칸 뚫린 채 떠오를 듯 말 듯, 해서 구글링을 통하여 겨우 찾았다. -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 잊지 않으리 어젯밤 창밖의 기침 소리
꿈을 꾼 건지, 사실 어젯밤에 김수영 산문집을 다 읽었는데 그와 겹치는 구절을 무의식에 반추한 것인지, 잘은 모르겠다. 모쪼록 둘 다 평소 외거나 기억하는 구절은 아니었다.
(231112)
*
예술가는 고독한 사람이라기보다, 고독에 내몰린 사람, 그 내몰림을 순전히 인정한 사람에 가까운 것 같다. 여기에서 고독이란 이상과 삶 사이의 심한 거리로부터 발생하는 아포리아의 감정이고, 이를 승인했다는 건 그에 비타협적으로 접근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 그는 위안을 의도적으로 간과한다, 혹은 그의 내면에서는 그 외의 선지들은 넌센스이다.
(23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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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takesmargin · 11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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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1
루시드폴 <사피엔스> 가 한 방송국의 금지곡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소식을 듣고 내게 최초로 다가온 감정이 화라기보다는 일종의 웃음이었다는 게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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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takesmargin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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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íkingur Ólafsson: on Bach’s Goldberg Vari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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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takesmargin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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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기: 눈3
나는 잠들어 있었다
깨어난다
잠들어 있는 사람을
깨워주는 것은
아름다운 일
아름다운 일이 내린다.
이미 깊은
눈이 내린다
( * 왜 '이마' 가 아닌 '이미' 일까.. 잠깐 생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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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takesmargin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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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리언 무어: 침묵
아빠는 말씀하곤 하셨다. " 훌륭한 사람들은 길게 머무는 법이 없으니, 롱펠로 무덤을 보여주려거나 하버드 유리꽃을 보이려 하지 않아도 된단다- 신발끈마냥 늘어져 달랑거리는 쥐꼬리를 물고 조용히 혼밥하는 고양이들처럼, 자립적이니. 그들은 종종 고독을 즐기며, 자신들을 기쁘게 한 언어에게 자신들의 언어를 빼앗겨 볼 수 있단다. 가장 깊은 느낌은 항시 침묵에서 스스로를 보이는 법; 침묵만이 아니라, 절제 안에서. " " 내 집을 숙소처럼 쓰렴 " 당신 말씀도, 빈 말은 아니셨다. 숙소란 거처는 아니다.  * Silence My father used to say, " Superior people never make long visits, have to be shown Longfellow's grave nor the glass flowers at Harvard. Self reliant like the cat -- that takes its prey to privacy, the mouse's limp tail hanging like a shoelace from its mouth -- they sometimes enjoy solitude, and can be robbed of speech by speech which has delighted them. The deepest feeling always shows itself in silence; not in silence, but restraint." Nor was he insincere in saying, "`Make my house your inn.'" Inns are not residences.
( * 번역: ittakesmarg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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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takesmargin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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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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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takesmargin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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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ia O'keeffe: Bones
When I came to New Mexico in the summer of 1929, I was so crazy about the country that I thought, how can I take part of it with me to work on? There was nothing to see in the land in the way of a flower. There were just dry white bones. So I picked them up. People were pretty annoyed having their cars filled with those bones. But I took back a barrel of bones to New York. They were my symbol of the desert, but nothing more. I haven't sense enough to think of any other symbolism. The skulls were there and I could say something with them... To me they are as beautiful as anything I know. To me they are strangely more living than the animals walking around - hair, eyes and all, with their tails switching. The bones seem to cut sharply to the centre of something that is keenly alive on the desert even though it is vas and empty and untouchable - and knows no kindness with all its beau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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