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jinasagan-blog · 7 years
Text
대화의 결말
안일한 태도, 거만한 표정 하지만 이내 빠르게 느려지는 목소리. 소심한 손짓, 또다시 자만하게 변화하는 목소리.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태도에 나는 그것들 중 대체 진실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은 곧 확신으로 변했다. 그리고 만연한 지루한 표정과 지겨운 소음으로부터 해방되어야만 한다는 강한 생각이 온 몸을 휩쓸었다. 
스스로를 경계하는 태도를 가지지 않는 사람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를 본인은 결코 알 수 없다. 그런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시도가 없으며 오직 타인의 고통의 소리는 본인의 고통을 상기하는 장치일 뿐이다. 그리고 생각을 거듭하여 비교를 시작한다. 그것은 매우 빠르게 진행되어 거의 습관으로 보인다. 그리고 언제나 그 비교의 결과는 본인의 고통과 희생이 타인의 그것보다 위대하다는 명제이다. 그 결과 부정적인 언어로 점철된 본인의 삶 전체를 통한 고통과 그가 보여준 다양한 희생에 대한 통한을 분출한다. 
그렇게 되면 한 개인이 가진 고통을 공유하여 공감으로 이어진 이해받고 싶던 이는 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임을 인식하게되는데, 이것이 꾸준히 반복되게 되면(보통 꾸준히 거의 변함없이 반복된다) 대화를 포기하는 상황에 이른다. 상호간의 대화가 이해, 공감이 가능한 범위안에 결코 가능할 수 없음을 힘겹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서 대화를 포기한다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것을 제외한 어떠한 대화의 시도와 내용을 거부하는 것이다. 모든 대화의 형태를 최소화한다. 그로 인한 감정의 표현도 차츰 죽음의 모습을 띈다. 포기까지 이르는 과정에서는 늘 반복적이고 어리석은 지속적인 ‘시도’가 존재한다. 예상되는 상황을 다시 만들고 허무는 과정에 스스로는 몰아넣는것이다. 언제 그것을 완전히 놓아버릴 것인가의 답은 다양하다. 
그것은 보이지 않은 완벽한 파국의 결말이다. 한 개인이 타자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더불어 결코 ‘재회’는 없는 것이다. 
0 notes
jinasagan-blog · 7 years
Text
투쟁의 축복
침묵은 미움을 키우기도 한다. 침묵은 과연 진정한 고요를 위한 과정이 아니었던가. 아직도 내 안의 진정한 고요가 더 필요한 것인가
무엇을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는가.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오직 나만이 박차고 일어나서 주장해야 한다. 투쟁을 선언해야 한다. 나는 이제 그 투쟁의 시작점에 서 있는 것이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권력의 부정의 숲에서 차츰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이제야 실체를 바로 볼 수 있으며, 그것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 투쟁의 시작과 더불어 그 시작이 가져올 일련의 예측가능한 결과물, 다시 떠안아야 할 ‘바로보는’ 과정. 본래 봄이 오기 전까지의 과정은 거친 법이다. 그런데 봄을 보기로 작정한 이는 겨울의 찬 바람과 발끝에서 느껴지는 시리다는 느낌에도 다시금 앞으로 발을 내딛는 것이다. 
그렇게 봄을 보기로 작정했다. 기어코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 투쟁의 승리는 원인을 밝혀내어 밟고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드러난 실체에 대해서 받아드리고 더 높은 단계로의 승화이다. 원인과 실체에 집착이 아니고, 그것은 그저 그것은 그대로 부둥켜 안고 갈 수 있을때 그것이 진정한 이번 투쟁의 승리의 이상적인 모습일 것이다.
투쟁을 시작하기로 한 그대여 환영하라. 축복하라. 오직 앞만 보라.
0 notes
jinasagan-blog · 7 years
Text
똘레랑스와 빠리-갑자기 시작된 빠리이야기 1
프랑스에 대해, 빠리에 대해 짧은 여행을 위한 곳 이상으로 생각해본 사람은 모두 빠리에서 ‘택시운전사’를 하던 남자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가 한국사회에 전했던 똘레랑스를 기억한다. 그가 전파한 빠리에서의 똘레랑스를 기대했던 한국의 유학생들은 한국으로 돌아와서 빠리에 그런 것 따위는 없었다고 말했다. 빠리는 차가운 도시라고 했다. 
나도 홍세화(작가)를 알고 있고 그가 쓴 책에서 똘레랑스를 읽었다. 그렇다면 왜 그가 말한 똘레랑스는 그 만이 느낀 것이 되버린 것일까. 시대의 변화 때문인가 아니면 개인의 경험과 태도의 차이인가. 궁금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빠리에는 똘레랑스가 있을거라 생각하고 또 동시에 빠리라고 별다를 것이 있나 생각했다. 
홍세화의 똘레랑스 얘기가 화두가 되면 그들은 못마땅한 태도를 보였다. 작가가 기대를 심어줬는데 그만큼은 아니었다는 일종의 불만과 서운함이 뒤섞인 태도였다. 먼저 나는 빠리 유학생이거나 한 적이 없어서 그것을 느끼고 말고 할 만큼의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딱 한번 빠리에  갔다. 물론 나도 홍세화와 똘레랑스를 생각했다. 목수정과 그녀가 말한 빠리에서 결혼하지 않아 살아가기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빠리행 열차로 환승하기 한시간 전쯤. 나는 김포공항 E36 게이트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뉴욕을 가기위해 비행기를 기다리던 바로 그 게이트였다. 빠리에 가기 전 뉴욕에 갔던 일을 생각했다. 가는 길보다 돌아올 때 새로운 마음으로 채워졌던 그 느낌이 더욱 강력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나는 내가 무언가 잃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여행이라든지 하는 새로운 것의 탐험에 대해 덜 기대하고 덜 흥분하고 있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두려웠다. 일상과 일상이 모인 삶이 주는 활력이 그리웠다.
그럼에도 그곳에 가면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었다. 단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다소 로맨틱한 생각도 해봤다. 그를 다시 만나고 나면, 다시 그와 두 눈을, 입술을 마주치고 나면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다시 설렐 수 있을까. 다시 설렘을 줄 수 있을까. 언제쯤 온갖 의심을 내려놓고 온 마음으로 그를 안을 수 있을까. 빠리의 하늘과 바람은 어떤 색깔일까. 비오는 날이 단 하루라도 있다면 좋겠다. 그와의 키스가 그 전보다도 달콤했으면 좋겠다. 또다시 혼자인 시간이 오면 두려울까. 
나는 빠리에 도착하지 마자 에펠탑을 봤고, 반짝이는 에펠탑 아래에서 옆에 있던 사람과 손을 잡았고 키스를 했다. 하루하루가 축제라는 그 도시, 공포가 도시를 덮쳐도 책읽기를 멈출 수 없다는 도시. 빠리가 16시간의 시간을 뚫고서 문득 다가왔다. 
Tumblr media
2 notes · View notes
jinasagan-blog · 7 years
Text
언제끝날지 모를 그것이 있다
하나의 일련의 과정이 끝나면, 다시 원점인 것 같은 느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준비했던 일들이 정리되면 다시 본래의 ‘영’의 지점으로 돌아오는 느낌.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 아닌 먼지처럼 훅 하고 사방으로 퍼지는 느낌. 머릿속에는 너무도 끊임없이 생각들이 소용돌이 친다. 본래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나는 짐짓 모르는 척을 하기도 하고 뒤늦게 깨닫고 만다.
그들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너무도 낯익다. 그들은 존재한 적 없던 벗들처럼 다른 먼지덩이로 훅 하고 털어져 버릴 것 같다. 익숙하다란 무엇이고 낯설다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 그토록 익숙했던 목소리, 몸짓, 표정들은 나눈 시간과 대화가 무색하게 금세 희미해진다. 눈을 마주치기도 낯설던 것은 어느새 나의 세계를 탐험하려고 든다.
우스운 생각마저 든다. 그토록 보고 싶던 사람이, 그토록 허무하게 손을 흔들고 가버려, 또 다른 어리석은 밤의 날들을 보내던 이는 지금, 그의 눈앞에서 눈빛을 반짝이는 사람에게 수줍은 척 웃는다.
이렇게 반복되는 거친 시간속에서 권태를 느끼는가. 권태가 불러올 수 있는 파장에 대해서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새로운 것을 원하고 변화를 갈망하는 것, 그것을 시작하는 것 자체가 해로운 것인가. 해로운 것을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나 한 것일까. 나는 과연 생각하는가. 나는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믿는가.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과연 삶은 그대로 살아지는 것인가. 내가 아닌 ‘삶’이 그렇게 대신해 사는 것인가. 
오래된 습관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 중에 단연 ‘회상’이 그것인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진 요즘은 그 습관이 일상처럼 되어버리고 만것이다. ‘회상’은 추억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나에게 느껴지는데 그 이유는 약간은 멜랑꼴리의 분위기를 한다는 것이다. 노스텔리지아적인 느낌에 멜랑꼴리를 더한 그런 느낌이다. 
그 당시의 오감을 상기시키는 것들에 노출되는 순간, 자연스레 ‘회상’의 순간이 온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더욱 강력하게 나를 뒤흔든 것이다. 기묘하다. 지금까지의 흐름은 과연 무의식과 의식의 혼합인가. 조금 어지럽다. 
애매한 어떤 지점에서 빙빙 돌고 있는 듯한 느낌과 아직도 과거로의 여행에 젖어든 듯한 느낌은 지루하다.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의 정원을 마음속에 가진 사람은 삶이 더 풍요롭다’ 말한다. 그 풍요로움 속에 파도가 있다. 
0 notes
jinasagan-blog · 7 years
Text
c’est la vie
어제 영화를 봤다. 영화관을 간 건 아니고 독립영화무료상영회에 갔다. 감독은 3년만에 만든 영화를 처음으로 관객에게 보이는 자리라고 수줍어했다. 가족 그리고 가족이 함께한 여행의 여정을 이야기하는 영화였다. 감독에 대해서도 영화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전혀없었다. 사실 별 것 아닌 것 같은 내용같기도 했는데,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갔다. 
시인이 되고 싶었던 문학청년과 예술을 사랑하여 문예지를 출간하고 연극을 올리던 신여성이결혼했다. 시인이 된 아버지 그리고 역시 시인이 된 어머니는 영화를 만드는 아들과 음악을 만드는 딸과 가족을 만들었다. 예술가족의 역사를 이해할 때 즈음에 가족은 500만원 남짓한 돈으로 여행을 간다.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설정되지 않은 영화의 설정이 이미 평범하지는 않아보였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역사를 지니고 있고,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도 괜찮다는 것을 생각했다. 스크린안의 이미지는 항상 실제와는 거리감이 있을테지만, 그들의 생활을 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왔던 살아가는 그리고 살아갈 투쟁의 모습을 예측하면서 나는 어떤 생각으로 무엇을 원하면서 살아가는가를 생각했다. 
나는 소위 더 속물적으로 살아가는가?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만큼 나는 훨씬 윤택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더 행복하다고 느끼는가? 나의 부모가 가진 역사에 대해서 내가 더 알아보려고 했던가?
수많은 물음을 던지는 동안 영화가 끝났다. 그리고 나의 그런 고민도 금방 지워질 것을 알고 있다. 또 나는 나의 현실을 살아낼테고, 그렇게 시간은 흐를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는 있는 것인지 헷갈린다. 
0 notes
jinasagan-blog · 7 years
Photo
Tumblr media
1 note · View note
jinasagan-blog · 7 years
Photo
Tumblr media
0 notes
jinasagan-blog · 7 years
Photo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1 note · View note
jinasagan-blog · 7 years
Photo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Serge💕Jane
0 no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