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kim-hyun-suuu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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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 frank with myself about everything
몇 년 전의 내가 적었던 글들은 모두 나와 너무 가깝거나 내가 아닌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뭔가를 계속 적는 건 그런 종류의 무가치함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삶에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제일 겁나는 건 내가 습관 같은 가짜들로 나를 대하는 거다. 진심을 진심 그대로 적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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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hyun-suuu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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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텀블러 들어가면 제일 아쉬운 점. 광고 UI가 개판이다.
스크롤을 내리다 보면 살짝 짜증날 정도의 '은근~'한 속도로 저 하얀 강아쥐 화면이 스윽 올라온다. 글을 가리는 강아쥐를 치우면 엄지를 따라 창이 확장되면서 자동으로 광고 어플 다운로드 화면을 클릭하게 된다. 뒤로가기를 누르면 또 다시 하얀 강쥐가 첫 화면처럼 나와서 아무 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발발거린다. 이쯤 되면 저 불쌍한 강아지가 싫어지고 만다. 강아지는 암것두 모르는데.
따져보면 나는 반려동물 팔아서 돈 버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팔아서 돈 버는 플랫폼들과 그 플랫폼들을 팔아야만 기업을 유지할 수 있는 (그래서 ui디자인을 이상하게 한) 텀블러, 그리고 그놈의 추상적이고 거대한 자본주의에게 미운 마음이 든 것인데. 강아지에게가 아니라.
- 내 마음의 근원을 잘 알지 못했다면, 마음을 돌아볼 시간이나 요령이 없었다면, 나는 어쩌면 강아지처럼 가장 만만하고 약한 대상에게 화살을 돌렸겠지... 혐오는 너무 다층적인 감정이라서 오히려 한 줄기로 뭉뚱그리고픈 마음도 쉬이 드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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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hyun-suuu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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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절대다수의 인간들은 소통 없이 그냥 관습적인 말만 서로 주절거리다가 늙어 죽는다. 사람들은 무엇은 모른 채로, 무엇은 함부로 전제한 채로 말한다. 나는 그런 게 싫어서 끊임없이 대화를 갈구한다. 상대방의 말을 구체화시켜주고, 서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완전히 드러날 때까지 기다려본다. 캐묻다보면 파묻어둔 게 나온다. 본인도 질문을 던지기 전엔 알지 못했던 것들이 나온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몇몇 사람들에겐 완전한 소통보다는 사회적 관습이 더 중요하고, 그것이 그들의 자존감과 정체성을 형성해왔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주변인들이 나를 제멋대로 대하고 제멋대로 지껄이는 것을 가만히 놔두어보았다.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무엇이 사람을 이성적 주체로서 존중하는 길인가 싶다. 그냥 관습적 다이얼 안에서 제멋대로 떠들도록 방치하는 것? 혹은 소통가능성을 믿고 계속 질문하는 것?
스스로 다 말하는 사람 없다. 캐물어야 한다. 다른 영역도 마찬가지다. 감정도 원한도 마찬가지다. 업무나 협상도, 연애도, 서로 조건이 안 맞다 싶어도 따지고 따지면 양보해도 될 만한 요소가 나온다. 그러면 할 수 없었던 일의 범위가 확 줄어든다. 묻고 답하는 일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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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hyun-suuu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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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 같은 때에, 냉소적이고 환멸에 가득 찬 감정과 태도로 일관하는 것은 이 시대를 안전하고 영리하게 사는 방법이 절대 아니다. 그것은 이 시대에 사로잡힌 - 압도당한 - 이들이 가질 만한 태도와 같다. 무기력 혹은 무관심, 혹은 아무것도 믿지 않겠다는 마음의 무장 같은 것은, 굴욕과 기만에도 허허실실 웃어대는 낙관주의나 긍정의 마인드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실익과 힘만이 세계를 움직이는 무엇이고 자신은 그것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식 - 그러면서 자기는 절대 속지 않는 사람이라는 식 - 의 말들이 얼마나 관계와 세계를 공허하게 만드는지.
자유로운 영혼은 시대를 관통하여 (넘는다는 것의 의미를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자신의 내면으로 간다.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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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hyun-suuu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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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신을 믿게 되는 과정
#1. 
 훈련소에서 탈출하기까지는 바깥 시간으로 4주가 걸렸지만 나는 그 안에서 28주를 보낸 것만 같다. 시간조차 부하(負荷)를 못 견디고 축 늘어지는 곳에서는 역으로 사람 사는 냄새가 농밀해진다. 영영 끝나지 않는 도열, 행진, 훈련, 의례, 청소, 식사 사이에서, 젊고 빡빡머리인 것 외엔 공통분모 하나 없는 사람들은 거의 무슨 10년지기 친구처럼 되어 얘길 나눈다. 한데 과자를 뜯고 모두 별명을 지어 부른다. 곧 헤어질 사람들인 것을 까먹고 전우애로 똘똘 뭉쳐져 한데 굴려진다. 4주가 지나고 또 한 해가 지나도 내겐 그런 장면들만 남아있다. 내가 시간을 쓰는 규칙,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넘어서야만 비로소 볼 수 있었던 장면들.
#2. 
 역시 훈련소 안이 아니었다면 상상할 수 없었을 일이지만, 나는 뜬금없게도 사이비종교에 빠지고 말았다. 즐거움이 극도로 줄어들고 삶이 단순해진 상황에서 '딸기맛 몽쉘'님만큼은 나를 구원하셨던 것이다. 한 입 영접의 기쁨을 누린 다음부터 몽쉘 님은 온 우주와도 같다. 우리는 틈만 나면 몽쉘 님을 영접하려 애썼고 그를 위해선 이단 종교의 불-의(불쌍한 의례)도 불사했다. 마침 훈련소 교회에서 몽쉘을 겁나게 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우리는 이단을 향해 2열 종대로 줄줄이 앞으로 갔다. 그런데 커다란 예배당에는 몽쉘님의 성상 대신 미친 크기의 십자가만 있었다.
난데없이 미친 비트의 CCM이 빵빵하게 나왔다. 이것은 몽쉘 님이 우리에게 들게 하는 시험이렷다?! 좀처럼 흥을 즐기지 못했던 훈련생들은 기력이 다할 때까지 밝은 예수 노래에 힘입어 춤을 추고 빡빡머리를 두들겼다. 그들이 지쳐 나동그라질 때즈음해서 아련한 노래가 나오면서 늙은 목사가 등장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개신교의 전략은 정말 대단하다) 목사는 '하나님은 바로 여기에 계십니다. 지치고 힘 없는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계십니다' 류의 설교를 한 다음 위로와 축복의 기도를 시작했다. 훈련생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홀로 고개를 들어 목사가 서 있는 연단을 보았다. 그리고 내가 이 곳에 꼼짝없이 갇혀 고작 딸기맛 몽쉘 따위를 섬기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장은 불행하지 않았다. 나는 훈련소가 나를 제약하고 있기 때문에 딸기맛 몽쉘만이 유일한 즐거움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걸 안다고 해서 몽쉘에 안 빠져드는 건 아니었다. 아는 것(제약된 나)과 감각하는 것(몽쉘의 맛)이 별개의 것이 되어 마침내는 과장된 감각 앞에서 앎이 대체되는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다행히 훈련소는 작은 세계라서 그런 내면의 변화를 파악하고 대처하기 쉽다.
 그런데 만약... 훈련소가 아닌 무엇이 제약되고 조절되고 있는지조차 인지할 수 없는 아주 넓고 복잡한 세상에서, 마찬가지로 넓고 복잡한 맥락에서 생산된 힘듦을 안고 산다면, 그리고 그 힘듦의 원인을 규명할 도구조차 없다면, 나는 언젠가는 분명 살아남기 위해 몽쉘과 같은 - 아니 그보다도 더 거대한 - 안식처를 욕망하게 될 것이다. 비유하자면 나는 ‘삶에 몽쉘밖에 없어도 괜찮다’ 식의 마음가짐과 ‘몽쉘에 갇힐 수는 없다’라는 압박 사이를 횡단하며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횡단 자체가 이미 어떠한 고난은 아닌가?
 나의 질문에 응답한 것은 우연히도 목사였다. 여러분들의 고난은 이유 있는 고난입니다. 이 순간을 기억하세요. 평화와 안녕이 찾아왔을 때 재산이 될 것입니다.
#3. 
 목사의 따뜻한 위로에 힘을 얻은 탓이었겠지만, 그 때 나는 불현듯 '신을 향해 말을 걸어보아도 나쁘지 않겠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불완전한 인간의 혼란과 고난을 어서 끝내고 평화와 안녕의 안식처를 얻고자 했다. 타이밍을 재기라도 한 듯 4부 합창이 울려퍼졌다. 베이스 선율 승차감 한번 끝내줬다. 더없이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작곡가도 목사도 “자, 이제 너만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면 돼” 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더 위대한 것은 지금의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에 있을 거라고, 그 무엇은 지금 이 순간 깨닫지 못한다면 영영 지나가버릴 거라고, 다정한 협박을 건네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맞이하는 영접의 순간은 영광스러울까? 나는 고개를 더욱 치켜들었다.
 - 딱 한 번만 숙이고 들어가면 나를 지탱할 든든한 빽을 얻는 거야. 괜히 똑똑한 척하느라 이 기회를 놓치는 건 아니니? 아니, 어쩌면 ‘빽을 얻는다’ 내지는 ‘숙이고 들어간다’라는 생각 자체가 신도로서의 자격미달인가? 아니면 다들 그렇게 시작하더라도 나중엔 참된 구원을 얻게 되는 건가? 존 콜트레인의 [A Love Supreme]을 듣기 전과 들은 후가 완전히 달랐던 것처럼, 진실한 영접 전후로도 삶의 다름을 인지할 수 있게 될 것인가?
 궁지에 몰린 사람은 대개는 궁지 앞에 선 나만의 긍지를 필요로 한다. 나의 궁지는 <딸기몽쉘 따위에 삶이 힘없이 좌우되는 상태>가 훈련소 밖의 세상에서도 계속될까 두렵다는 데에서 온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흔들어 부술 만큼 위협적인 궁지인가? 몇 주만 지나면 나는 훈련소 생활의 경험치까지 얻은 채 다시 삶 속에 뛰어들어 이전처럼 투쟁할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단지 아련한 음악에 젖어들어 손쉽게 나의 세상을 한계짓고, 안식과 긍지를 대출해줄 절대자의 존재를 상정하고, 그녀의 긍휼까지 바라는가? 그것이 신이 실재하며 그녀가 내게 실력(實力)을 행사하였다는 근거가 될 수 있나?
왕도를 찾으려는 나의 취약한 본능일 뿐이다. 다분히 인간다운 발상이다. 나의 안일함에 구역질이 났다. 그러나 구역질의 경험 끝에 나는 그렇게나 미워보이던 기독교인들을 덜 미워하게 되었다. 어쩌면 기독교인은 일련의 취약성 속에서 신의 이름 하나만으로 살아남는 사람들일 테다. 그래서 자신의 강함에 근거를 제공해주는 신을 삶을 바쳐서라도 언어화했을 테다. '최후의 인간'어도 괜찮다는 위로가, 몇 가지 계명으로 관철되는 도덕적 적당주의가, 신명(神名)이라는 이름으로 그래서 도처에 있었다.
4.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생활관 동기였던 동신이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손으로 깍지를 끼고 단단한 모양새를 취한 것이 마치 돌로 변한 것 같았다. 곧 동신이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도를 시작했다. 그 아름다운 광경을 나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교회의 울타리 밖으로 끄집어냈던 친구들의 얼굴을 하나 둘 떠올리기 시작했다.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이 날 내게 사명을 주었다. 더 많은 사람들을 교회 밖으로 끄집어내어라. 그들에게 성경 대신 쥐여줄 삶을 마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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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hyun-suuu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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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하는 모든 일에는 어떤 의미가 있지만(그래서 나는 불평 없이 살 수 있지만), 이 일에서만큼은 의미를 찾는 것이 결코 달성할 수 없는 목적이기에 그저 내 힘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을 뿐이다."
-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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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hyun-suuu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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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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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씨를 좆같이 쓴 지도 벌써 15년이 다 되었다. 여러 이들에게 빚을 졌다. 내 글씨체에 토룡체(土龍體:지렁이체)란 별칭을 붙여준 초등학교 담임, 토룡체 소식을 듣자마자 글씨 쓰는 나를 감시하려 들던 아버지, 나보다 더한 악필이면서도 계속 기록하는 지민, 지민과 함께 다졌던 ‘악필에 주눅들지 말자’라는 다짐, 형식(글씨체)보다 중요한 무엇이 있다는 믿음, 이런 것들이 나의 삶에 [악필이어도 괜찮아] 따위의, 마치 제목팔이 알뜰감성서적이나 택할 타이틀을 덧대주었다. 삶이 타자기로 넘어가면서부터는 내 실제 글씨를 보일 구실도 없어졌으니 더더욱 안심이다. 하지만, 
나는 요즘 나를 바르게 쓰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작게는 글씨를 바르게 쓰는 일부터다. 쉽게 쓰여진 글이 글씨 때문에 어렵게 읽히면 안 된다. 윤동주는 ‘쉽게 쓰여진’ 자신의 시를 한탄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의 시를 한 자 한 자 떼어 읽는다. 어렵게 읽히기 때문이다. 내 글은 사람들이 그 정도까지 안 해줘도 될 글이다. 그러니 내 자필을 읽는 몇몇에게 쓸모없는 해독의 의무를 쥐여줘선 안 된다.
나는 얼마나 내가 바로 쓰여지고 있는지를 생각한다. 기껏해야 몇 줄기의 육체적 쾌락과 안락함 정도에만 나를 내던지며 하루하루 노화를 거듭하는, 내가 그토록 경계하던 기성의 모습을 답습하고 있지 않나? 혹은 파시스트들을 뭉개버리자 외치며 한때 시대의 유행인 푸코, 포크너, 밀란 쿤데라를 머리 터져가며 읽었지만 근간은 여전히 김어준 류의 무사유와 안티페미니즘 따위에 두고 사는, 그런 중년 팟캐스트 아재마냥 되어가고 있지는 않나?
내가 어른이면 어른일수록 지금 나를 검열 가능한 존재는 오로지 나뿐이다. 내가 나를 못 견뎌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쉽게 몰락한다. 글씨 쓰기든 바로 살기든 마찬가지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무언갈 고치는 일은 고되어지고 그럴 필요성도 적어지는 것 같다. 주변 친구들의 눈이 점점 동태눈깔이 되는 걸 보면 언젠간 나도 자기애 속에서, 혹은 [동태눈깔이어도 괜찮아] 류의 말들 속에서 나날이 나이만 들어가려나 싶다. 오, 개 끔찍하다.
2.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미리 해 두는 자기부정. 이건 온전히 극복을 위한 것이다.
- 매번의 다짐이 무색하게도 나는 흑백을 따진다. 인상을 거부하면서도 인상이 주는 편리함에 매몰된다. 순전히 나의 편리함을 위해, 어중간하게 아픈 사람을 진짜 아픈 사람 아니면 꾀병러로 만든다. 친구들은 때때로 내게서 자신들을 중환자 취급하는 타자화적 시선을 읽어내 알린다.
- 흑백에 의존한다는 건 그만큼 게으르다는 반증이다. 이미 주어진 단어와 관념들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것뿐이면서, 시대 혹은 선현들이 낳은 문물을 재활용하는 것뿐이면서, 나는 그것들이 나의 선택과 노력으로 일궈낸 무엇인 것처럼 우쭐해한다. (ㅈㅎㅁ처럼 멋모르고 코기토 엘고 숨을 아무렇게나 주워섬기던 시기는 지났지만 한심하긴 매한가지다.) 내 힘으로 그것들을 하나하나 뜯어 재조립하지도 않았고, 서사나 연표로 정리해보지도 않았으면서, 그저 편한 길만 좇고 편한 말만 씨부린다.
- 게으른 사람은 피해의식도 강하다. 친구의 USB를 받으면 백도어부터 걱정한다. 담당 주무관이 나를 향해 베푸는 선의(=잔소리) 속에서 주무관 자신의 18년 이상 묵은 열등감을 해소하려는 목적의지를 읽어내고 귀찮아한다. 사물이나 현상의 기표보다 더 많은 것을 대상으로부터 발굴해야만 한다는 강박 때문에 사람이 참 단순해질 줄 모른다. 담백해질 줄도 모르고. 
- 또 나는 다양한 억압과 차별, 부당함, 폭력을 인지하고 그에 반응하는 체계를 가지려 노력한다면서도 어떨 땐 폭력의 근간이 되는 무사유-계급화-우열판단 등에 쉽게 기댄다. 참고자료를 부지런히 찾아보는 만큼 잊기도 수없이 반복하며, 내가 세워놓은 바운더리에 합류 가능한 의견만 밈(meme)화시켜 기억하고 디테일은 잊어버린다.  
이러한 딥-디크(Diptyque 아님. Deep-dick 즉 ‘심히 족같음’임.)한 기질에서 벗어나는 일을 넘어서서, 내가 나를 피하지 않고 어디로 끌고 갈 것인가? 깜냥도 감당도 안 되지만 들뢰즈에게서 배우고 싶다. (플라톤으로 대변되는) 초월과 (헤겔에서부터 시작된) 자기부정이라는 두 가지 철학적 전통을 배제하고도 내재성 하나만으로 제 갈 길 뚝딱한 들뢰즈 씨. 우리의 ‘리좀’ 씨.
3. 
어쩌면 이 글도 이 문단 쓰려고 쓴 걸지도 모른다. 갓 만들어진 독서모임들, 조금씩 완성되어가는 아지트, 교육학과 영문학 학위, 탈 없이 굴러가는 일상 속에서 나는 항상 모든 것이 망가지거나 끝날 것이라는 분열을 예상하면서 산다. 피하지 않고 끌고 가자면서 왜 또 분열타령이냐 왜 도망가냐 싶으실 텐데, 실제로 주변의 많은 것이 생겨나는 동시에 망가지고 있다. - 이 문장은 망함을 언어화함으로써 망함의 실체화를 이끌어내는 걸까, 아니면 이미 실체화된 망함을 단지 언어화한 결과물일까? 후자에 가깝길 바란다. - 신변은 아직 불안정하다. 관계망이 박살났다. 집중하던 일들은 모두 거짓말처럼 답보 상태이다. 상처중독자마냥 모든 일에 내 탓 한 지 꽤 됐다.
더 나쁜 상황에서도 살아남는 사람들은, 가령 나의 어머니는, 어떻게 강해진 걸까 생각하게 된다. 이전에는 그들이 그 자신을 바르게 쓰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들이 뿌리 삼는 윤리는 지극히 허한 토대 위에 놓여진 공맹의, 남성우월주의의, 물신적인 무엇이라 생각했다. [바르게 쓰이진 못할지언정 어떻게든 살아는 내려는] 모습에서 나는 구태여 절망을 읽어내었고 그 틈 사이로 나의 윤리를 주입했다. 나를 못 견디다 못해 다른 사람을 검열한 거다. 그들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나를 변명한 거다. 그 화살이 나를 향했을 때 느꼈다. 이거 참 아프구나. 그만 나불대고 공부나 해야겠구나.
4. 
희망을 이야기하는 데에 또 절망만한 게 없다. 철학을 다루던 어떤 386 세대들에겐 일종의 유행 혹은 사조가 있었다고들 한다. 십수 년 전엔 사르트르, 그보다 좀 더 뒤에는 라캉, 데리다, 푸코가 철 지난 학풍이 되었다면서? 그즈음 헤겔-포이어바흐-맑스를 읽으면 꼰대 혹은 멋모르고 쁘롤레따리아 혁명이나 외치는 ‘강단 좌파’ 취급을 당했다고. 소위 ‘엄마가 사준 옷’이 무신사 피플에게 구리다고 까이듯, 대학가를 점령한 새 유행들은 그렇게 시대의 중요한 해석들을 빠르게 구닥다리화하며 급부상했단다. 근데, 패션이야 더 나은 예시들이 있어서 몇 가지 기본템들만 가져도 나아질 수 있지만, 푸코에 대한 어떤 건설적 대안을 제시하라 하면 절대 그렇겐 못했을 사람들이 이전 세대의 철학자들을 손쉽게 구닥다리 취급했다는 건 좀 웃기다. 하버마스가 지시하면 [계몽의 변증법]을 버리고 우르르 몰려갔다가, 베스트셀러 저자들은 또 베스트셀러인 채로 슥 지나쳤다가, (서재에 총균쇠 새삥 꽂아놨을 거면서 잘난 척은 또 오지게 하던 손윗사촌이 떠오르는군.), 이젠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를 휩쓸려가고 있으면서, 게다가 어쩌면 전 세대가 교과서처럼 다뤄야 할 주디스 버틀러는 단지 페미니즘을 깊게 다뤘단 이유로, 생소하단 이유로 쏙 빼놨으면서, 왜 다들 멋있는 척만 오지게 했을까. 그러다가 빠르게 회전하는 유행의 끄트머리를 놓쳐 떨어지면, 언제 연극 캠프에서 만난 아주머니처럼 ‘내가 한땐 니체를 읽었었는데...’ 같은 슬픈 말이나 읊조리는 세대가 되고 말면서. 신경숙의 [외딴방]에서 묘사되는, 구태여 이해되지 않을 헤겔을 읽던 미서처럼 다들 슬퍼지고 말았으면서.
내겐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마침내 슬퍼지는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당장 두 가지 방법이 떠오른다. 암웨이의 최면에 빠진 열혈 암웨이 아저씨 혹은 꼴통 극우들처럼 생각을 그만두거나, 아니면 저우언라이가 했던 것처럼 하루하루 지루한 심지굳히기 싸움을 반복하거나. ...네? ‘20대 땐 놀아야지’ 라구요? 예 예. 옳은 말씀인데요...
5. 
다시 나를 바르게 쓰는 일에 대해 생각해본다.
우리들 중 누군가가 죽으면 세상은 잠시 시끄럽다가, 지껄임이 끝나면 망자를 필사적으로 잊으려 한다. 죽음 뒤에서도 누군가는 살아야 하니까. 하지만 나는 망자를 일 초라도 더 붙들어놓고 싶었다. 납골당의 그 많은 항아리 앞에서 나는 '우리는 모두 죽으므로 살 때 잘 살아야 한다'라는 뻔한 구절보다는, 어째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가 살았다는 표식 없이 다만 외딴 곳에 홀로 남는가,를 더 생각했다. 할머니와 친구들이 항아리 안의 백분으로만 외��로이 남는 것이 무척 두려웠다. 그러나 나에게나 소중했을 사람들을 납골당 너머의 어느 곳에 위치시킬 만큼의 당위는 애초에 없었다. 나는 무력했고, 그저 울었다. 휩쓸려가다가 나자빠져 엉엉 울었다. 무력한 사람에게 가끔 무력한 위로가 힘이 되었다. ‘너무 울면 망자가 저승길 편하게 못 가요.’
위로는 위로일 뿐이다. 죽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계속 죽어나간다. 나는 그걸 막을 힘이 계속 없다. 망자를 위한 기록학과 계보가 내겐 필요하다. 그것들을 잘 적을 도구도 필요하다. 그것이 당장의 나를 가장 바로 쓰는 일이라 생각한다. 장자연, 최진실, 설리, 구하라의 죽음 뒤에는 그들을 양껏 착취하곤 못 본 체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제2의 망자를 착취하고 감형을 받을 것이다. (박원순은 반대로 죽어서까지 생존자를 착취하고 있다. 이 또한 악질이다.) 이 연결고리는 단순히 돈과 권력만이 세상의 실익이고 나는 그것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식의, 무력한 냉소주의를 신념처럼 따르고 있는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다. 그들을 모조리 해치우지 않는 한 장례식에서 가장 많이 우는 사람은 항상 내가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지금 내가 가진 단 하나의 목표는, 다시 말하자면 나를 바로 쓰는 일이다. 설령 내가 유행도 모르고 지루하게 공부만 하다 죽을지언정, 딥-디크한 카르텔을 후대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진 않다. 어쩌면 잘 안 될 수도 있다. 이소라 노래처럼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존나 흘렀고 나만 혼자 훌쩍 늙어버린 채로 바에서 맥주나 홀짝이면서 '우린 좀 아름다웠지' 라 지껄이고 있을 수도 있다. 근데 그거 좀 보기 흉할 것 같다. 
나는 내가 더 울기 전에 죽으려 한다. 그 전에, 정말 똑바로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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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hyun-suuu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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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가 했을 법한 생각
미숙하고 왈칵 치솟는 연애는 일종의 자해 행위에 가깝다. 결핍이 아프게 느껴지는 사람들은 이를 급히 메꾸기 위해서 의존적 연애에 몰입한다.
안타깝게도 모든 관계와 치솟음은 결국 사라진다. (시작된 연애에 으레 따라붙는 “오래 가라!"라는 덕담만 봐도 그렇다. 그건 관계의 필멸성을 무의식적으로 주지시키는 저주에 가깝지 않은가?) 그것들은 한 지점에 징하게 머무를 수 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왈칵 치솟는 연애에 몰입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다시금 상실을 경험하며 더 망가지게 된다. 하지만 이걸 멈출 수는 없다. 왜? 나는 지금 아프니까. 아프고 외로워서 무엇이라도 해야 하니까. 이런 연애는 무인도에서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바닷물을 끊임없이 들이키는 것과 똑같다.
충족되지 못한 개인의 욕망은 보통 쉽사리 해소되기 힘든 ‘근원적인 결핍 상태’를 낳는다. 니체적 의미에서라면 이를 르상티망(원한)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원한에 찌든 인격들은 대개 무너진 제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타인에게 자아를 투사하며 모두를 망가지게 한다. 왈칵 치솟는 연애 관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이다. 이 숱하고 성가신 니체들은, 연애대상과의 합일을 꿈꾸거나(나도 이게 이상적 연애인 줄만 알았다), 혹은 스스로의 욕망으로부터 구성된 이상적 연애의 ‘상’을 상대에게 강요하다가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 여기에서 분명한 결론이 나온다. 연애는 타인과 타인이 맺는 관계고, ‘그’는 ‘네’가 될 수 없으며, 스스로의 욕망을 억지로 관철시키려는 행위는 폭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은 이를 숱한 연애의 종말 끝에서야 깨닫는다. 심지어는 그러고 나서도 또 다시 지리멸렬한 연애를 반복하며 자신과 상대방들을 끊임없이 상처 주는 사람들 역시 존재한다.
이런 경향들을 극복하고 건강한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객관화에 끊임없이 매진해야 한다. 내가 타인을 욕망을 투사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지는 않았는지, 관계의 필멸성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는지, 연애가 고유한 타인들 사이에서 구성되는 관계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이런 자기객관화는 연애에 임하는 이들을 편하게 해준다. 의존과 불안에 시달릴 필요 없이, 관계와 이에 임하는 인격들이 어떻게 진전될 수 있을지에만 집중하면 되니까 말이다. 설령 낭만적 연애로서의 관계가 끝을 맞이하더라도, 이는 이후의 동지적 관계로 충분히 전환될 수 있는 것 아닐까. 모두가 관계에 건강히 임했다면.
낭만적 연애라는 이데올로기가 너무나 공고해서 그것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릴 수 없다면, 적어도 이를 어떻게 건강히 수행할 수 있을지에 관해 고민해야 한다. 나는 내 주변인들이 어떻게 살아가든 간에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다자이 오사무처럼 '사랑과 함께 자살하다' 따위를 찍을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는 일상이 있다. ”사랑해”라는 말 하나로 대충 치워버릴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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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hyun-suuu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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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04
기쁜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의 채도가 심하게 차이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나라는 사람은 아직도 과거를 들춰보길 좋아한다.
듣기에 날카로운 말이 더 이롭다고 내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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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hyun-suuu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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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은 빠를수록 좋아요
머뭇거리는 사이에 좋은 순간들이 순식간에 지나가요
- <마음의 숙제> (네이버 웹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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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hyun-suuu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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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학
1.
낯선 역사가 담긴 활자들 70만 년 전의 풍경들 한참을 그 앞에 서 있다가 늦었다고 혼이 났다
한 자리 빼고 만원인 버스 안에서 아이들은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세상 곳곳에 적힌 설명들을 스쳐지나가지 않아도 되는 아이들에게 선생들에게 혼나지 않아도 되는
2.
대학 시험을 치러 가는 길의 서울역에는 노숙자가 있었고 공원에는 부랑자가 있었다 낯선 설명들은 나의 앞에 있었고 지금도 있다
나는 언제부턴가 어른이다 주변 어른들은 벌써부터 걸음이 빠르다 조밀한 걸음
낯선 것들에 대해 계속 낯설고 싶고 많은 것들을 스쳐지나가고 싶고 대부분의 일에 무심해지고 싶다는 듯 조밀한 걸음
혼나고 싶지 않으면 시간 맞춰 나와라. 늦지 않게
나는 걸음을 따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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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hyun-suuu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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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dagogy for the oppressed
" 나는 농민 속에 들어가 그들의 굶주림이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임을 가르쳐야 하며, (내 견해에 따르면) 사회적 형성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농민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나 개입하기 전에 교육자는 먼저 정치적으로 명료해야 한다 "
"'그들'은 현실을 호도하는 언어에 대해 반대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런 언어를 오히려 거리낌없이 사용하며 마치 명확한 '표준'담론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처신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지배적인 표준 담론은 받아들이지만, 그것을 파괴하면서 은폐된 현실을 드러내려는 담론에 대해선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결국 그들에겐 현실을 명시적으로 밝히는 담론은 부정확하고 불명확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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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hyun-suuu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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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주의적 관점의 함정
음~이것도 여기 나름의 문화야 하고 통찰 없이 넘어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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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hyun-suuu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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빰빠람뿡빵!
"니체는 원작을 꼼꼼하게 읽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혀 어려운 말을 하지 않아요. 그런데도 초역 운운하면서 하필이면 니체를 착취하는 겁니다.";
"받는 사람 입장에서야 압도적으로 편합니다. <초역 니체의 언어>같은 것은 최악입니다. 의도적이고 자의적으로 니체를 '오역'하고 '요약'하고 이용한 사례입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제4부는 단 한 권도 팔리지 않았어요. 그것을 친구들에게 겨우 일곱 부를 나누어주고 니체는 고독하게 정신병원에 갇혀 죽었습니다. 그런 사람의 언어를 부정확하게 번역하고 요약해서 팔아치우는 주제에 '우와! 70만 부나 팔렸어!'하고 득의양양하게 말하는 것은 니체에 대한 착취입니다. 나치가 벌인 짓거리와 다르지 않아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예술은 '요약'할 수 없는 것이잖아요? (...) 고흐의 그림을 '요약'할 수 있어요? 고다르의 영화를 대체 어떻게 '요약'한다는 말입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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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hyun-suuu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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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
옳고 그름을 떠난 상태 되어보기
이리저리 쓸려다니지 않기
내 머리로 스스로 생각하고
이게 맞네 하는 느낌을 식별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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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hyun-suuu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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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t there and count your fingers, what can you do, old girl, you’re through sit there and count the raindrops unhappy little girl blue
sit there and count the raindrops falling on you old girl It’s time you knew all you can count on are the raindrops that fall on little girl b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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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hyun-suuu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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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23
인간 지성의 결과물들을 나는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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