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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시간의 기차 여행. 잠은 오지 않고 목과 허리는 부러질 듯 아프다. 창밖으로는나무가 흩어져 지나간다. 맡은 편에는 아까부터 나를 관찰하는 듯한 독일인 노부부가 앉아있다. 계속해서 눈이 마주친다. 동양인 처음 보시나 이분들이. 그리고 그 앞에는 어느새 어떤 흑인 아저씨가 자리를 잡았고 잠에 푹 빠져있다. 왼쪽에는 술 냄새를 풀기는 볼이 빨갛고 배가 한 아름 나온 백인 아저씨가 비딱하게 앉아있다. 대낮에도 볼이 빨간 인생은 술맛이 어떨까 생각한다. 대각선으로는 큰 캐리어를 지닌 중국어를 쓰는 젊은 여자가 큰 목소리로 전화하고 있다. 혹시나 같은 나라 사람일까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방금 함(Hamm)이라는 처음 들어보는 귀여운 이름의 역에 정차했고 아직도 갈 길은 멀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는 십센치의 쓰담쓰담이 흘러나온다. 이렇게 음란마귀 가득한 가사를 이렇게 귀여운 멜로디에 담아놓다니. 소설을 쓰고 싶은 나는 '글쓰기 공작소'라는 책을 이번 여행에 가지고 왔고 지금 책상 앞에 펼쳐놓았다. 책을 가지고 와서 펼쳐놓고는 노트에 이 사생글을 쓰고 있다. 어느새 창밖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 계속 비가 오려고 그러나. 밖은 비가 오니 추울 것이 분명한데 열차 안은 왜 이리도 더운가. 긴 팔 긴 바지를 입었더니 등이 온통 땀으로 축축하다. 남의 시선 신경 쓰지 않는 편안한 여행객답게 신발은 벗어제끼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다. 출발할 때의 설렘은, 기차 여행의 피로감으로 인해 잠시 잊히고 말았다.
- 여행가는 길 기차안에서의 사생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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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빠
우리 아빠.
우리 아빠는 말을 하지 않는다. 자기 생각과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 자신의 일과가 어땠는지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나는 아빠를 생각하면 가여운 생각이 든다. 가여운 사람이다.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 감정을 표현�� 줄 모르는 사람이다. 어쩌면 감정을 느낄 줄 모르는 지도.
우리 아빠는 가여운 사람이다. 깊고 깊은 시골 짝에서 종손으로 혼자서 똑똑하게 태어나 온갖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자랐다. 종손이니까 이래이래야 한다는 의무사항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우리 아빠가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된 건 이 때문이라 생각한다. 바라보는 눈 많고 지켜야 할 것 많고 무엇이든 잘해야만 하여서 아무 말 하지 않고 잘 모르는 것 시도해보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기로 한 것이다. 한없이 천박하고 경박한 누나 다섯을 두고 홀로 상식이 탑재된 영혼을 물려받아 고독하였을 것이다. 종손이라는 타이틀만으로 다른 형제들에게 많은 부채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실은 딱히 그렇지 않으나 항상 자신이 난처할 땐 내가 너를 업어 키웠는데 어쩌고저쩌고, 내가 너 대학교 다닐 때 어쩌고저쩌고. 아빠는 빌린 적이 없으나 다른 형제들은 많은 것을 빌려주었다 생각하여 언제나 덤벼든다. 울산의 현대차 공장 블루칼라 정직원 고모부가 서울의 가난한 가방끈 우리 아빠에게 자네는 가진 것도 많은데 어쩌고저쩌고 한다. 양반(이었던) 집안 종손답게 아빠는 점잖이 앉아 듣고만 있다. 유교적 가부장주의에 의해 감정이, 감정표현에 대한 자유가 거세된 불쌍한 사람이다.
그렇게 시골의 종갓집 종손은 공부를 잘해 서울로 유학을 왔다. 얼마나 낯설었을까. 외가 쪽에서는 외할머니도 제대로 겪어보지 않았다는 보릿고개를 우리 아빠는 기억이 생생하게 겪고 자랐다고 하였으므로 아빠는 엄마보다 두 세대가 느린 거다. 그렇게 옛날 세상을 살다가 홀로 서울로 유학을 온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은 얼마나 어리둥절했을 것인가. 서울에 적응하느라 얼마나 분투하였을 것인가.
그러다가 아빠는 스물다섯 어린 나이에 아빠가 되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이, 가장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또 얼마나 어리둥절하였을 것인가. 아빠가 되느라 얼마나 분투하였을 것인가.
아빠는 대학 시절 운동을 하다가 엄마를 만났다. 강북의 어느 초등학교 교장의 딸이었던 엄마는 아빠와 결혼을 하고 가난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십오 년간 가난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엄마는 가난을 받아들이는 데에 이십 년이 걸렸다. 그 이십 년 동안 엄마는 이따금 아빠를 원망하고 아빠에게 화를 내고 많이 슬퍼하였으나 그럴 적에도 아빠는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있었다.
나는 아빠를 생각하면 가난이 함께 떠오른다. 우리 아빠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으려나 생각을 하면 '나는 가난하게 자랐다, 우리 집은 가난하다' 하는 것도 함께 떠오른다. 나에게 아빠와 가난은 유사 개념인가 보다.
나에겐 우리 집이 가난한 것이 항상 상처다. 가난하기 때문에 일어났던 어린 시절의 몇몇 일화들이 떠오르면 여지없이 눈물이 난다. 학원 다닐 것 다 다녀 보았고 어떻게든 발버둥 쳐 독일 교환학생도 다녀올 수 있었으므로 똥구멍이 찢어지도록 가난한 것은 아니나 우리 집만큼 돈 없이 사는 집도 별로 없는 것 같다. 갑자기 가스가 끊겨 엄마가 내 세뱃돈 통장을 들고 가스비를 내러 가야 했던 날이 있었고, 돈이 다 떨어져 반찬거리를 살 수 없어 다음 월급날을 기다리며 일주일 동안 오직 김치찌개만을 먹었던 날도 있었다. 십오년 전의 브라운관 티비는 빨강 초록 노랑을 모두 분리해서 밖에 내보낼 수 없는 지경이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집 거실에 놓여있고 문짝이 한 번 떨어졌던 이십사년 된 냉장고도 아직 우리집 주방에 놓여있다. 엄마 아빠는 언제나 단벌신사이고 백도복숭아나 한라봉이나 갈치와 같이 비싼 음식은 집에서 먹어본 적이 없다. 다들 그러고 사는 줄 알았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집이 가난한 것인지도 몰랐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나에게 우리 아빠는 멋있는 사람이다. 좋은 품성을 가졌다. 언제나 점잖고 상식이 충만하다. 우주에서 가장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자랐으면서 단 �� 번도 내게 너는 여자가 되서 류의 말을 한 적이 없다. 현명하다. 무엇이든 일희일비하는 엄마와는 다르게 항상 중심을 지킬 줄 안다. 그래서 나에게 항상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준다. 아빠 말을 들으면 항상 일이 제대로 풀린다. 똑똑하다. 보통의 학원강사들이랑은 달라서 수학부터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모든 과목을 다 안다. 공부를 하다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아빠에게 제일 먼저 물어봤다. 언제나 두번째 물어볼 사람은 필요하지 않았다. 시사상식도 모르는 게 없다. 뉴스를 보면서 저게 뭐지 하면 아빠가 옆에서 다 설명해 준다. 좋은 대학교를 나왔고 대학 시절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 중학생 시절 6.10민주화운동 20주년 뉴스를 보다가 "아빠도 저곳에 있었다."하길래 "어 그럼 그 태극기 든 사진이 아빠야?"하는 질문이 곧바로 입에서 튀어나왔을 정도로 나에겐 아빠가 크고 멋진 사람이다.
하지만 집 밖에서의, 세상 속에서의 우리 아빠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그것이 나를 아프게 했다. 베를린에 와서 운이 좋게 과외를 구했다. 과외하는 집은 일 년 반 전에 독일에 왔다고 했다. 그 집 아버지는 주독한국대사관에서 서기관으로 일한다고 한다. 참 좋은 직업이다. 우리 아빠는 학생이 별로 없는 조그만 학원의 강사인데. 집은 베를린 교외의 한적한 마을에 있는 이 층 주택이다. 우리 집은 서울 구석 낡은 주택의 월셋집인데. 마당에는 아우디와 비엠더블유가 한대 씩 주차되어있다. 우리 집에는 차가 없는데. 가정은 화목해 보인다. 저녁 식사에 함께한 적이 있는데 많은 대화가 오갔다. 아버지도 대화에 참여한다. 아니 대화의 주도자가 그 집 아버지였다. 우와 이럴 수도 있구나, 놀랐다. 우리 집에서는 엄마만 이야기하니깐. 그 이후 며칠을 앓았다. 마음이 많이 아프면 몸도 같이 아프다. 무엇이 그리 아픈지 알 수가 없었다. 내 마음에 남아있던 상처는,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아빠가 사실은 별로 크고 멋지지 않은 그냥 그런 사람이라는 것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따금 나를 슬프게 했던 그것은 가난이 아니라 우리 아빠였던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가, 과외집의 아버지를 보고 깨달았다.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한 채 외면하고 있던 나의 구김살을 직시하게 된 것이다. 그것 때문에 나는 나 자신에게 놀랐고 별 볼 일 없는 우리 아빠 때문에, 그것이 내 마음의 상처라는 것 때문에, 그렇게 아팠다.
우리 아빠는 내 마음의 상처이다. 아빠는 나를 아프게 한다. 크고 멋진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어서. 돈을 벌 줄 몰라서. 외로운 엄마의 마음을 달래줄 줄 모르고, 대화하는 법을 몰라서. 힘겹고 측은한 인생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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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오는 냄새
가을이 온다. 가을이 올 때면 나는 냄새가 있다. 여름이 떠나가고 가을이 시작될 때의 청량한 공기. 시원하고 서늘한 바람과 쨍한 햇빛의 공존. 그런 때 온 세상에 퍼져 나는 냄새가 있다.
가을이 오는 냄새가 날 때면 항상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중학교 1학년, 딱 이즈음이었다. 그 시절, 나는 학교에 가기 싫었고 매 아침 비참했다. 나는 또래 아이들에게 환영받지 못했고 학교에서의 매 순간이 가시방석처럼 불편했다. 한 시간마다 돌아오는 10분의 쉬는시간. 그리고 하루의 하이라이트, 50분의 점심시간. 왁자지껄한 가운데 홀로 갈 길을 잃은 고독. 당황스러움. 패닉. 속으로는 안절부절못하지만, 겉으론 괜찮은 체하기 위한 내면의 싸움. 내게 학교란 그런 곳이었기에 등굣길 교문이 보이기 시작하면 나는 일부러 발걸음을 늦췄다. 더 느리게 걸으면 걷는 게 아니게 될 만큼. 천천히, 천천히. 더 천천히. 그런 날들의 아침엔 이런 냄새가 났다.
기억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10년이 지나도록 가을이 올 때면 같은 날 같은 기억이 떠오르고 여지없이 이런 가슴 아린 기분에 ���로잡힌다.
슬프고 비참한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그렇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청량하고 상쾌한, 가을이 오는 아침의 냄새를 맡으며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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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서의 쇼핑
여행은 소비활동에 있어서 순간적인 판단력을 요구한다. 고민하다가 사지 않기로 하고 지나친 물건이 나중에 다시 생각나더라도 돌아갈 수 없기에. 너무나도 특별한 곳에서 만난 특별한 물건임에도, 가지고 있는 재화는 한정되어 있고 판단에 필요한 시간과 정보는 충분하지 않다. 마음에 쏙 든다면 바로 구매를 결정하면 되지만, 언제나 가장 어려운 것은 적당히 괜찮고 적당히 필요한 것 같은 물건이다. 여행 중이기에 긴 고민의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 순간 판단해야 한다. 사느냐 마느냐. 평소의 시간과 공간이었다면, 마음속으로 골라두고 다른 곳을 왔다 갔다 하며, 이리 재보고 저리 재보고, 다른 것과 비교도 해보며 생각을 충분히 한 후에 구매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여행지에서는 그것이 유효하지 않다. 비슷한 것을 다시 찾지 못할까 봐, 아니면 낯선 도시의 어떤 물건이 너무나 새로워서, 그것을 보자마자 집어 들어 계산하고 나오는 순간 바로 옆집에서 1유로 싼 비슷한 물건을 마주치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사지 않고 단념하고 나온 뒤에는 내려놓고 온 그 물건이 자꾸만 생각이 나고 새로 찾은 그 어떤 물건도 저번 그것보다 못하게 느껴지기 마련인 법이다. 그 두고 나온 물건은 머릿속에서 자꾸만 미화가 되어 나중엔 자신을 세상 다시 없을 유일무이한 물건을 놓고 온 멍청이라며 탓하게 되는 것이다. 여행은, 신이 내린 판단력을 필요로 한다. 적어도 구매활동에 있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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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레일 여승무원들이 코레일을 대상으로 한 소송이 대법원에서 패소하였다고 한다. 1심과 2심에서 승소했는데도 불구하고 대법원에서 판결이 뒤집어졌다고 한다. 법과 돈이 결탁을 하는 일이 너무나도 빈번하다. 노동자의 권리는 보장되지 않는다. 비정규직은 넘쳐나고 파업권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파업을 하면 해직이 된다. 더불어 여성의 권리 또한 보장되��� 않는다. 국책사업이라는 것은 제대로 된 검증과 검토를 거치지 않고 막무가내로 진행된다. 언론과 권력 역시 유착되어 비판의 기능을 상실하고 권력의 홍보자가 되었다. 화가 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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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3777
빚만 남기고 떠나서 미안하다, 아가7월24일 서울고법에서 KTX 승무원들에 대한 파기환송심이 열린다. 지난 2월 대법원은 이들의 해고가 무효라는 기존 판결을 뒤집었다. 돌아갈 직장이 사라진 이들에게 빚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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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섭식장애
그녀는 태생부터 슬픔을 끌어안고 사는 존재였다. 그녀는 행복한 날보다는 슬프거나 외롭거나 쓸쓸하거나 좌절하는 날이 더 많았다.
그녀는 밥을 맛있게 먹을 줄을 몰랐다. 음식을 먹기 시작할 때면 머릿속으로 칼로리부터 계산 했다. 칼로리를 계산하고 몸무게를 걱정하느라 음식이 무슨 맛인지는 느낄 겨를도 없었다. 매번 꼭꼭 씹어 천천히 먹자고 하는데, 음식을 먹기 시작하면 체중 걱정 외에 다른 생각은 머릿속에 들어올 자리도 없었다. 그러다보면 인식도 하지 못한 채 눈앞의 음식은 이미 다 없어졌는데 그래서 배는 부른데 도대체 뭘 먹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음식의 맛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배만 불러서 밀려오는 후회에 몸서리치곤 하였다. 기억이 잠깐 끊기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먹는 것이 곧 자신의 몸이요 건강인데 매 끼니를 이런 식으로 먹다보니 항상 스트레스에 갇혀 살았다. 먹기 위해 산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먹는 기쁨은 삶의 큰 행복의 요소인데 그녀는 먹는 일로 인해 항상 슬펐다. 음식을 기쁘게 먹을 줄을 몰랐다. 먹는 일은 항상 스트레스 받는 일이자 억제해야 하는 욕구였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라면 항상 무언갈 먹어야 하는 법. 배가 고파도 짜증이 나고 밥을 먹고 나서 배가 불러져도 짜증이 나고. 그래서 항상 그녀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저녁때가 되어 배가 고프면, 점심을 많이 먹었는데도 도대체 왜 또 배가 고픈 거야 하고 자신을 탓했다. 원래 인간은 아침점심저녁 하루 세끼를 먹게 생겨먹은 생명체였음에도 불구하고 끼니때에 배가 고픈 것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배가 고프지 않아 아무 것도 먹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랐다. 남들 다 좋아하는 맛집에 가서도 혼자 불편한 마음으로 어깨를 수그리고 숨죽여 앉아 있었다.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많이 먹게 될까 걱정하면서. 그럼에도 음식을 가장 많이 가장 빨리 먹어 치우는 것은 그녀였다. 역시나 필름이 끊긴 상태로, 언제 다 먹었나 알 수 없지만 어느새 음식은 전부 없어져 있는, 그런 상황을 맞이하면서 말이다. 아마도 그건 경미한 섭식장애인지도 모른다. 이건 그녀를 꽤 많이 불행하게 만들고 있지만, 그녀는 손가락을 입에 집어넣어 토를 하거나 아니면 아무 것도 먹지 못해 삐쩍 마르거나 할 정도가 아니므로 의사에게 공감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장애는 장애이나 의사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경미한 섭식장애인 것으로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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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글을 쓰며 살고 싶다.
머리 속에 떠오른 여러 생각을 글로 옮기고 싶은데 손이 머리 속의 생각을 따라가지 못한다.
어느 때에는 생각들이 그냥 둥둥 떠다니고만 있는 것 같아 잡히지 않을 때도 있다.
글을 쓰고 싶고, 잘 쓰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는지를 아직 모르겠다.
그래서 일단 뭐든 분출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만들어 보았다.
블로그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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