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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평평하고 평행한 시간 속에서
“아들이여 놀부의 박은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다. 닫혀진 상자를 여는 것, 불행의 상자를 다시 타는 것, 이 무익하고 어리석은 열정을 너는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 “
그것이 어느 계절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무뚝뚝한 우리 아버지는 내가 자려고 누우면 갑자기 책을 읽어주는 세상 다정한 아버지로 변하곤 했다. 아마도 본인이 하고 싶었던 말들을 표현하는게 무척이나 오그라드는 행위라 생각했던 것 같은데, 당신의 책장에서 누렇게 뜬 책을 꺼내 한 손으로 무심하게 털어내고는 오래된 책의 한 부분을 소리 내어 읽어 주셨다. 내가 태어난 해에 나온 이어령 선생의 <젊음이여 어디로 가는가>는 나와 그렇게 처음 만났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나는 어느덧 대학생이 되었고, 집을 떠나 서울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몇 권의 책을 가방에 넣어왔는데, 대부분 아버지께서 예전에 읽었던 책들이었다. 책의 내용이 좋아서라기보다는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누런 빈티지의 맛을 향유하고 싶어서였다. 자연스럽게 책장의 한 켠을 차지한 이 오래된 책을 나는 미워할 리 없었다. 여자친구와 싸울 때, 학교 시험으로 머리가 어지러울 때면 나는 그 책을 찾았다. 아들에게 보내는 서간체 형식의 이 에세이는 서울살이를 하고 있는 나에게, 아버지의 잔소리를 듣는 듯한 불편함과 그 너머로 느껴지는 애정이 공존하는 오묘한 시간이었고 그것은 내게 안도감을 주는 장치였다.
입영 전부터는 급격히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일종의 진학 문제도 있었고, 아버지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정상적인 대화도 어려웠다. 하지만 서울생활을 시작한 나는 그 좋지 않은 사이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았다. 아마도 그때의 나는 부모와의 관계에도 물리적 끝이라는 개념이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쓰던 책장들은 창고로 그 적을 옮겼고, 책들도 운명을 함께 했다. 어떤 기억의 인장 같은 것이었는지, 엄마는 책들이 싫다고 했다. 나는 엄마 몰래 창고에 들어가 뿌옇게 쌓인 먼지 더미에서 책을 주섬주섬 담았다. 조지 오웰의 <1984>, 박완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와 같은 책들은 그때 내가 구조한 책들이다. 그런 노력 끝에 아버지와 나의 평행해진 시간은 끝끝내 보존되었다.
30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두 번 정도 효도했다고 생각하는데 그 중 하나가 첫 취업의 순간이다. 운 좋게 1,2차 면접을 통과하고 최종 면접을 기다리면서 나는 면접 족보나 기업정보 요약을 보기보다는 이어령 선생의 글을 읽었다. 꽤나 깔끔하고 정돈된 선생의 문장은 면접뿐 아니라 어떤 험한 길에서도 올곧은 길로 헤쳐나가는 지혜를 주곤 했다. 나는 여전히 내 무의식 속에 그런 문장들을 담아준 아버지에게 내가 받은 것들에 대한 공을 돌린다. 그래서 아직도 엄마가 아버지의 책들을 싫어하는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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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축연의 _ 제1장 도원결의
연초 행사로 바쁘던 국장은 다급하게 전화기를 꺼내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강녕하셨습니까? 접니다.”
몸이 반응했을까? 매일 힘들다고 죽는소리를 하던 꽃꽂이는(現 B축티비 아트디렉터) 자신을 후려칠 국장의 전화에 몸을 살짝 떨었다. 전화기 너머 차분한 국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러니까, 시민이 직접 제작하고 활동하면서 방송국을 꾸려나가는 형식으로…….”
그러나 꽃꽂이는 답이 없었다.
“뚜뚜뚜…….”
수화기를 놓자마자 국장은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서 성산대교를 바라보았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BGM 김광진 ‘편지’)
불이 꺼진 사무실엔 모니터 불빛만 휘날리고 있었다.
며칠 뒤, 연락이 없던 꽃꽂이는 후에 비디오 선생이라 불리는 정광석을 국장에게 데려왔다. 흐리멍텅함 속에 빛나는 눈빛, 자유분방하게 풀어 헤친 호일퍼머는 국장도 탐나는 헤어스타일 이었다.
“제가 함께 작업해 본 결과 이만한 인물이 없습니다.”
국장은 눈물이 흘렀다. 눈치 빠른 그가 자신을 떠났을 것이라 생각해 밀려왔던 서운함은 온데간데없었다.
“귀공께서 나를 떠난 줄 알았소…….”
“어찌 그런 말씀을… 소인은 침몰하는 배에서도 뛰어내리지 못하는 재주가 있나이다.”
둘의 헛소리를 지켜보던 비디오 선생은 도대체 그래서 얼마를 주겠다는 건지 궁금함이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엔 단가들이 연쇄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이번 프로젝트는 문화비축기지를 알리는 원심력을 만들어내는 일이옵니다. 개원 초 제가 이리저리 기지를 둘러본 결과, 무릇 기지란 시민이 주체가 되는 모임을 만들 수 있게 돕고, 나아가) 그것들이 자생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나이다.”
국장이 장대한 얘기를 시작하자, 비디오 선생은 생각했다
‘천하의 국장이 왜 이렇게 혓바닥이 길어…….’
꽃꽂이가 침묵을 깨고 말을 이었다.
“소인, 지하를 떠돌며 B급 정서를 배포한 지 어언 10년. 이번에야말로 세상을 혼란스럽게 할 절호의 기회이옵니다.”
“하하, 저희가 하기 나름 아닐까요? 제 미천한 힘이라도 쏟아 보겠습니다.”
비디오 선생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런 동료들이야말로 자신을 갈아 넣는데 특화된 사람임에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잘못된 본인의 선택을 탓할 새도 없이 국장이 말을 이었다.
“비록 저희가 한날한시에 태어나진 않았으나, 이곳을 떠날 때는 한날한시에 떠남을 맹세하는 것이 어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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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너를 쓰는 계절_01
#01. 2014.겨울
2014년 나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친구들과 함께 조그만 사업을 해보자며 이태원 가구거리에 월세 집을 얻었다. 사내 다섯 명이 살던 그 집은 구성원들의 성격만큼이나 투박하고 정돈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나는 매일 내방으로 비치는 석양을 바라보며 이곳과의 계약이 끝나는 2년 뒤에 모든 것이 바뀌리라 다짐했다.
그 거리의 매주 월요일 오전은 새로운 물건들이 입고되는 시간이었는데, 출근길에 새롭게 진열되는 가구들을 보며 오래된 것들이 새로운 쓸모를 기다리는 모습이 나의 모습처럼 느껴져, 출근길에 다른 의미의 생동감을 느끼곤 했다,
그 즈음 나는 그녀를 만나게 되었는데, 동종 업계의 디자이너로 몇 차례 협업을 진행한 것이, 꽤 좋은 성과를 내어 주변에서도 꽤 괜찮은 파트너로 인정받던 참이었다. 뭐, 관계라는 것이 그렇듯 의도한 방향과는 다르게 우리는 서로에게 괜찮은 연애 상대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녀는 사교적이진 않았지만, 나의 동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이태원 집에 자주 초대되어 함께 시간을 보냈다. 마찬가지로 그 날도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무심코 바라 본 한 점포에 걸려있는 가죽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본 것이라 정확히 어떤 형태인지 확인이 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마치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무언가 좋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 가구거리에 처음 이사 왔을 때 겁도 없이 냉장고 가격 물어보려고 들어갔다가, 가격을 듣고는 다시는 이 근처 매장에 들어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겁이 나기도 했는데, 직접 가까이서 보니 가방은 생각보다 많이 해지고 가죽이 툭툭 떨어지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30-40년은 된 것 같았다. 사장님은 몇 십년동안 가방이 저 자리에 걸려 있었는데, 이걸 팔라는 사람은 처음이라 했다.
“이게 이태리 가방인데, 소가죽이고…”
아마도 사장님도 그 가방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었던 것 같았지만, 품질에 대한 보증을 해야 했던 것 같다(그리고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그 가방은 프랑스 가방이었다)
“25만원”
많이 부담되는 가격이었다. 그것이 실제로 이태리 가방인지와는 상관없이 그 가방을 원하고 있는 나의 눈빛이 반영된 가격 같았다. ‘아, 가방을 너무 티 나게 원했던 것일까.’ 적절한 포커페이스를 준비하지 못한 스스로를 원망하고 있던 차 가방이 비밀번호로 잠겨있어서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 열리는 가방 살게요 7만원에 주세요”
그녀는 열리지도 않는 가방을 왜 사냐며, 나를 말리려 들었지만 나에게 이 가방을 사느냐 마느냐는 당시 불투명한 미래로 인해 추락한 나의 자존감 회복에 대한 문제였다. 물론 비밀번호를 풀기 전까지 그녀의 따가운 눈총을 이겨내야 했지만…
그 후 나는 중요한 미팅이 있으면 항상 그 가방을 가지고 나갔는데, 딱히 불쾌한 기억이 없는 걸로 보아, 긍정적인 일도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동료들과 나의 시간은 바람과는 달리 더 ���독한 시간이 되었다. 부족한 수익에 허덕이며, 다섯 명 중 세 명이 중간에 팀을 떠났고, 그러던 중 그녀와도 이별했다. 안 열리는 가방을 사려고 하는 나를 이해하는 그녀가 사라진 것인지, 애초에 그런 사람은 없었던 것인지 알려���지 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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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강박
무비노크 / 러브 앤 머시(2014)

1964년. 아메리카 대륙을 밟은 비틀즈는 빠른 속도로 대륙의 소녀 팬들과 차트를
점령해 나갔다. 급기야 ‘Beatles or Not’으로 설명되던 이 시기. 미국의 한 밴드는
이 ‘브리티시 인베이전’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회의를 하고 있었다.
“비틀즈의 <Rubber Soul>을 들어 봐. 우리는 더 이상 서핑, 여자, 자동차 따위만을
노래할 수 없어. 우리도 이제는 다른 소리를 찾아야 해.”
“비틀즈는 비틀즈고 우린 우리야. 우리가 할 수 있는 음악을 잘하는 게 가장 중요해.”
“아니야. 음악적으로 그들을 능가해야 해.”
“너 자신만 생각하지 말고, 팀을 생각해. 항상 네가 원하는 것만 할 수는 없어.”
비치보이스. 그리고 브라이언 윌슨의 일생일대 걸작. <Pet Sounds>가 탄생하기까지 이런 대화로 지샌 밤이 많았으리라. 우리에겐 오직 ‘Surfin U.S.A’나 ‘I Get Around’의 서프 뮤직 이미지로 친숙한 비치보이스는 리더 브라이언 윌슨의 광기에 가까운 노력으로 비틀즈를 넘겠다는 불굴의 의지를 내비친 유일한 대항마였다.
이 과정을 담은 영화 ‘러브 앤 머시’의 오프닝은 마치 실사 기록을 보는 듯하다. 영상 내내 묻어 있는 잔뜩 찌푸린 노이즈와 충실하게 재현해 놓은 60년대 비치보이스의 모습은 히트곡 퍼레이드와 어우러져 순식간에 극의 몰입도를 높여준다. 특히 엔딩 크레딧에는 실제 ‘러브&머시’ 공연 모습을 녹여냈는데, 영화가 끝난 후의 몰입감까지 고려한 배려라고 볼 수도 있겠다.
<Pet Sounds>의 화답으로 나온 비틀즈의 앨범은 그 유명한 <Sgt. Peppers Lonley Hearts Club Band>. 말이 필요 없는 비틀즈 최고의 앨범이다. 비틀즈가 유감없이 자신들의 천재성을 자랑하는 동안 브라이언은 <Pet Sounds>의 대중적 실패 후, 극심해진 스트레스와 마약, 음주를 달고 살았고, 이 후 이혼과 형제들의 죽음, 유진 랜디라는 최악의 인연이 이어지면서 의욕에 찬 프로젝트 ‘Smile’을 완성하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졌다. 만약 60년대에 비치보이스의 또 다른 답가 <Smile>이 발매되었다면, 비틀즈의 페퍼상사 앨범이 지금의 자리를 편안하게 누리지는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유진 랜디로부터 벗어나게 된 그는 40여 년이 지난 55회 그래미에서 최우수 히스토리컬 앨범상을 수상하면서 <Smile> 앨범을 완성한 노고를 치하 받았다. 최근에는 BBC MUSIC에서 제작한 <God Only Knows> 영상에서 현존 최고 아티스트들과 함께 노래하는 그를 만날 수 있었고, 올해 4월에는 그의 새 앨범이 발매되었다.
그렇게 비틀즈를 넘겠다던 남자와 그 비틀즈는 70이 넘은 지금도 동갑내기 현역 뮤지션이다. 한때 밴드에서 둘 다 베이스 연주자였고, 건반에도 능숙하며 가장 팝적인 감각이 뛰어난 멤버였다. 브라이언의 곁에서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던 형제들은 떠났고, 폴의 작곡 콤비 존 레넌과 각자의 능력을 개인활동에서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조지 해리슨도 세상을 떠났다.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은 두 남자가 걸어가고 있는 길이 그럼에도 덜 외로워보이는 것은 가장 큰 도전이었던 서로의 존재가 여전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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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랜필드 싱글 <이별의 춤>
친숙한 듯, 낯선 온도

지난 2017년 11월 13일 공식화된 정광수(베이스), 지수현(드럼) 두 멤버의 탈퇴 후 활동이 뜸하던 크랜필드 공식 페이지에 새 싱글 발매 소식이 공개되었다. 이하는 크랜필드 이성혁과의 인터뷰.
Q. 전국투어 표류기 이후 약 2년 6개월 만이다.
-반갑다. 오랜 동면 이후 오랜만에 크랜필드로 돌아왔다.
Q. 팬들에게는 동면이라는 과정이 있긴 했지만, 두 멤버의 탈퇴가 굉장히 갑작스러웠을 것 같다. 게다가 탈퇴 전후로 탐구생활 싱글이 계속 나오면서, 멤버 간의 갈등에 대한 궁금증이 컸을 것이다.
-“동면”은 박인 탈퇴 이후 크랜필드가 스튜디오 작업에 몰두하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 마련했던 공연이었는데, 그 후 각자의 삶 즉 밴드 이외의 삶에 대한 여러 가지 고민이나 생각들이 생겨났고 논의 끝에, 각자의 생각을 존중하여 두 멤버가 크랜필드를 떠나게 되었다. 탈퇴 결정 이후 멍해서 한동안 어떻게 얘기를 전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페이지를 통해 알리게 되었다.
Q. 공백기 동안 주로 어떻게 지냈는지
-권나무 공연 세션으로 참여하고, 작사 수업도 꾸준히 했다. 또 멤버들의 탈퇴 결정 전에도 솔로 프로젝트인 탐구생활과 크랜필드 싱글을 준비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 스스로는 공백기가 있었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더라.
Q. 간단히 이번 싱글을 소개한다면
-<이별의 춤>은 업템포의 댄서블한 팝 넘버이며 크랜필드가 보여줬던 기존 정서 안에서 새로움을 보여주는 곡이다. 신서사이저가 전작들 보다 부각되어 EDM적인 요소가 강화되었다. 리듬 운용에도 변화가있었고.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의 곡 중에서 가장 신나는 곡인 것 같다. 그럼에도 동시에 슬프기도하고. 작업 당시 크랜필드 친구들과도 이 곡을 다음 싱글로 하자고 했었다.

(사진 01 : <이별의 춤> 데모 폴더, 초기 가사가 나오기 전의 가제는 ‘Uni’, 가사를 막 쓰고난 직후에는 ‘말이 없는 말’이라는 제목이었다.(이 제목은 영어 표기 제목이 되었다. *wordless word
(사진 02 : <이별의 춤> 커버아트)
Q. 미리 받아 본 앨범 커버의 색채가 바뀌었더라. 메인 컬러가 EP <파란그림>에서 보여줬던 “파랑”의 정반대되는 “빨강”으로 변경되었다.
-이번 싱글이 품고있는 변화를 표현하고 싶었다. <이별의 춤> 가사는 이전 크랜필드 가사의 온도보다 분명 뜨겁다. 이별이라는 현실의 구체적인 감정을 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꿈> 같은 기존 곡에서는 이런 식으로 뜨겁게 화자가 감정을 얘기한 적은 없었다. 사운드에 있어서도 의미있는 변화들이 있는데 이러한 온도의 변화를 표현하고 싶었고 파란색의 대척점에 있는 빨강을 선택하게 됐다.
Q. 가사는 멤버 탈퇴 시기와 어우러져 당시의 감정 중 하나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별의 춤> 가사를 썼을 때는 2017년 5월쯤이었으니 아무 일도 없었다. 개인적으로나 크랜필드로나. 그런데 최근에 이 노래를 들으면서 지금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이 곡이 최근에 제일 좋게 들리고 빨리 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가사에 대해서 조금 덧붙이자면 <이별의 춤>은 가사가 좀 빨리 완성된 케이스다. 원래는 가사를 많이 수정하고 깎는 스타일인데 이번 곡 같은 경우는 한 번에 쏟아져 나왔다. 멜로디 데모가 나온 상태에서 쓸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나서 바로 다 써버렸고, 수정이 없는 상태로 완성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가사가 나에게도 낯설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특히 점프 컷이라고 할까 장면과 장면의 폭도 큰 편이라 그간내가 써온 가사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 있다.
Q. 실물 형태의 앨범을 기대할 수 있을지
-언젠가는 싱글들을 모은 실물 형태도 생각하고 있지만 당장의 계획은 없다.
Q. 본인 스스로 “고물 기타소리 같다”고 할 정도로 기타 톤이 인상적이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이 가사에서 피가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통스럽게 무언가가 찢기는 감각이 연상되어서, 그런 정서를 사운드로도 가져가고 싶었다. 그런 감각들이 기타톤과 신서사이저 톤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제로 고물기타로 녹음했다. 완전 못 쓰는 기타는 아니지만.
Q. 얼마 전에 처음 크랜필드를 접한 지인으로부터 “친숙하고 좋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나선 “이번 곡이 왜 친숙한가”에 대해 고민을 했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아무래도 멜로디의 정서적 친근감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산울림의 동요를 듣는 것처럼 우리 세대 무의식에 존재하는 익숙함이 아닌가 싶다.
-사실 이번에는 가사도 그렇고 멜로디 진행의 패턴도 기존에 하던 것과는 좀 다르게 가려고 했다. 크랜필드는 그동안 major7 계열의 코드를 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보편적으로 많이 쓰이는 major7코드를 피하려고 했었고, 거기에 해당하는 정서를 굳이 차용해서 쓸 생각도 없었는데. 이번 작업을 하면서 이 코드의 활용이 어떤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멜로디 전개 등이 달라졌던 것 같다. 그리고이번에는 Instrumental 버전을 함께 준비했다. 목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서(웃음)
Q. 현재 작업은 어느 정도 진행되었나?
-녹음은 끝났고, 믹스가 2차까지 나온 상태이다. 내일(3월 3일) 3차 믹스이다. 항상 녹음과 믹스 때마다 걱정이 많은데, 사실 좀 수월하게 된 상황이다. 믹스를 해주는 최용수(만쥬한봉지) 형과의 호흡이 좋다. 작업 이해도가 뛰어나 함께 작업하기 정말 좋다. 지금은 거의 완성 단계이고 3월 7일 예정대로 발매된다. 걱정이 정리된 상태에서 인터뷰를 하게 돼 홀가분하다.
Q.앞으로 탐구생활과 크랜필드는 어떻게 구분 되는건가?
- 처음에는 멤버들이 탈퇴 한 이후 똑같이 내가 하는 작업 임에도 이건 크랜필드라고 생각하고 작업을 못 하겠더라. 갑자기 “내가 크랜필드다”라는 지점을 받아들이기까지 고민이 생겼었다. 그래서 탐구생활작업이 좀 더 수월했다. 탐구생활은 중구난방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해 볼 요량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추구한다기보다 평소에 나올 수 있는 나의 모든 것. 나는 이것을 생존이라고 표현하는데 정확하진 않은데 아무래도 이렇게 밖에 표현을 못 할 것 같다. 반면에 크랜필드는 내가 그리고 있는 “추구”가 있다. 완벽한 추구물을 꿈꾸기 때문에 그 부분에서 차이는 분명하다. 나 스스로는 탐구생활은 수필이고 크랜필드는 소설이라고 분류한다.
더��어 크랜필드는 1인체로 계속 갈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추구 점 내에서 내가 표현할 수 없는 곡들도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다양한 선택지를 통해 재미있는 작업을 이어가려고 한다. 그렇게 준비하면서 공연이 가능한 형태를 만들 수도 있긴 하지만, 지금 단계에서는 새로운 곡들을 준비하면서 다음 단계에 대한 고민을 해볼 생각이다.
Q. 앞으로의 계획과 끝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최근에 더욱 치열하게 공부하고 있다. 레이블 없이 혼자 하므로 모든 면에서 더욱 노력하려 한다. 피로도는 더 커졌지만 음악적인 고민과 욕심은 더 커졌다. 편곡 과정을 예전보다 훨씬 더 길게 가져가면서많은 시간을 들여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고, 이를 통해 나오는 작업물에 만족을 느끼고 있다.
곧 싱글이 발매(3월 7일)되고, 준비된 곡들을 계속 작업해 발표할 생각이다. 공연이 가능한 형태도 좀 먼 계획으로 보고 있다. 특히 예전 곡을 들을 때면, 공연 당시의 모습이 그림처럼 떠올라서, 그립기도 하다. 하지만 공연과 창작의 밸런스를 맞출 수 있을 때 라이브를 할 것 같고 우선은 스튜디오 작업을 많이 하려고 계획 중이다앞으로의 목표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내 템포에 맞게 해나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과거에는 알지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흔들리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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