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minjucap · 3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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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인사이드와 베이직
영화를 안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거다. 그런데 각자 좋아하는 영화의 취향은 다 다른거지. 나 같은 경우에는 모든 종류의 공포물을 좋아한다. 스릴러, 써스펜스 부터 썰고 베는 고어 물까지. 하하. 그런데 특히 좋아하는 시놉시스는 반전이 있는 영화다. 미친 반전이니 반전의 반전의 반전이니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반전이니 하고 소개를 하면 뭐 항상 낚이는 식이다. 그래서 역대 훌륭했던 반전 영화들을 무지 좋아한다. 뭐 그런데 식스센스니 유주얼서스팩트니 디 어덜스 같은 누구나 다 아는 그런 반전 영화말고 인상 깊었던 영화를 꼽아보자면 두 영화가 생각이 난다. 아이 인사이드 그리고 베이직이다. 그래도 베이직은 간혹 찾아보면 소개해놓은 유튜버라도 있다. 물론 영화가 워낙 복잡해서 그 반전의 묘미를 잘 살려준 소개는 없는 듯 하지만. 그런데 아이 인사이드는 찾아봐도 소개 영상 하나 없다. 베이직이 2003년, 아이 인사이드가 2004년 작품이다. 벌써 20년전 영화가 되었다. 이 영화들의 반전에 대해 굳이 내가 스포할 필요는 없겠고 그저 내 마음을 움직였던 작품들이라는 것 그래서 혹시 누군가 이 글을 본다면 원작을 찾아 한번 관람하기를 추천한다는 것. 그리고 나는 이글을 쓰며 이 영화들을 처음 봤을 때, 그래서 반전의 진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을 때의 카타르시스를 다시금 떠올려보며 행복할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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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jucap · 3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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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상자
난 분재를 좋아한다. 수초 어항을 관리하고 물멍을 때리는 것도 좋아한다. 한 때는 오디오에 심취해 있기도 했다. 이런 취미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건 나만의 작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는 욕망이었다. 숲의 작은 세상 버전이 분재였고 개울이나 강의 작은 세상 버전이 수초 어항이 었다. 오디오는 콘서트장의 감동을 복제하고 싶어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작은 세상 버전이었다.
그런 욕망들 속에 언젠가 부터 꿈꿔오던게 바로 구름 상자였다. 이번엔 하늘의 작은 세상 버전을 꿈꾼 것이다. 수초 어항 정도의 크기에 하늘의 구름을 나만의 것으로 만들어 감상하고 싶은 것이다. 하노이에서는 하늘을 바라볼 일들이 많았는데 항상 구름이 서울보다 참 낮게 깔려 있는 느낌이었고 그 변화무쌍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그 아룸다움을 내 서재에서 멍때리며 감상할 순 없을까? 그리고 거기애 더해 석양에 물든 모습도 재현할 순 없을까. 분재나 수초 어항처럼, 오디오 기기를 통해 마치 좋아하는 가수가 내 앞에서 지금 라이브로 부르고 있는 것 같은 생동감을 느끼며 실감할 수는 없을까. 언젠가는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하늘을 담은 구름상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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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jucap · 3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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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이야기 2부
예전 “시계 이야기” 속 그 시계 이야기를 다시 쓰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사실 잊고 싶었다는게 정답이겠지. 왜냐면 몇달전 그 녀석은 완전히 멈춰 버렸거든. 시간이 맞지 않아도 간혹 아침에 회사에 차고 나가 시간을 맞춰주면 하루는 커버가 가능했던 시계인데 몇달전 차려고 봤더니 초침이 아주 서버린 것이다. 항상 분침에 걸려 방해를 받아 나아가려 애썼던 초침이 배터리를 많이 쓰게 만들어 금방 사망하게 되었던지 아니면 애초에 배터리가 약했던지. 아무튼 그래서 몇달 전부터 그 시계는 아침 내 시계 선택 리스트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런데 다시 그 시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새로 산 시계에 서비스로 시계용 조그만 배터리가 추가로 배송되면서 부터였다. 아하. 이 배터리로 갈아 주면 녀석을 다시 살릴 수 있지 않을까? 뭔가 다시 재회하라는 운명적인 계시인가? 그래서 난 다시 녀석을 꺼내어 배터리를 갈 방법을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아무리봐도 녀석은 앞이던 뒤던 열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아주 조그만 나사라도 있어야 풀어볼 시도라도 할텐데 말이다. 뭐 이런 경우 2024년의 우리에겐 다 방법이 있다. 유튜브 검색. 역시 유튜브에는 없는 게 없었다. 시계의 뒷 뚜껑은 크게 세가지 종류로 나뉜단다. 하나는 쉽게 조그만 나사를 돌려 여는 방식, 또하나는 조그만 홈들이 있어 그 홈들을 공구로 물어서 돌려 여는 방식인데 이건 특별한 시계 공구가 필요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냅으로 여는 방식인데 이건 잘 살펴보면 어딘가 끼어들만한 조그만 틈이 보이고 이 사이에 작은 일자 드라이버 같은걸 끼워서 스냅으로 뻥 하고 여는 거란다. 아하. 녀석은 나사도 없고 홈도 없으니 스냅으로 여는게 분명했다. 그런데 뭐 잘 모르는 내가 살피니 그 조그만 틈이 어딘지 도통 알 수 가 없었다. 그래서 돋보기 안경을 끼고 거기에 아이폰 확대 기능을 이용해 시계 뒷면 태두리를 샅샅이 살피기 사작했다. 그렇게 촘촘히 살펴보자 결국 난 유튜버가 말했던 틈을 찾아낼 수 있었다. 찾고 나서 보니 사실 아주 잘 드러내고 있었는데 찾기전엔 봐도 잘 보이지 않던거였다. 그래서 기대감을 가지고 서울서 가져온 헤드 교체형 소형 드라이버의 헤드를 일자로 바꾸고 그 틈에 밀어 넣어 병뚜껑 따듯 스냅을 주었다. 뻥. 아하. 참 속시원한 소리와 함께 드디어 난 그 녀석의 내부를 바라보게 되었다. 하하하. 그 내부는 주요 기능을 담당하는 무브먼트가 플라스틱 고정틀로 감싸여져 있어 싸구려 티를 팍팍 내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사실 꽤나 그럴싸한 메커니즘이었다. 이 녀석은 버튼이 세개가 있었는데 가운데 시간을 맞추는 것말고는 직접 본체에 연결 되어 있지 않고 그 플라스틱의 탄력을 이용해 누르는 방식이었다. 오호. 암튼 난 여기까지 해낸 내가 무척이나 대견했으나 플라스틱 고정틀을 제거하고 확인하게된 배터리는 글쎄 이번에 서비스로 받은 배터리와는 완전 규격이 다른것이었다. 젠장. 그래서 일단 난 이 녀석에게 맞는 배터리를 구해야했다. 이 녀석이 품고 있던 배터리는 LR920GH라는 코드였다. 일전에 K마트 건너편 로컬 상점에서 버튼형 배터리를 팔던 걸 본지라 우선 거기에 가보았다. 쳇. 그런데 뭐 시계에 들어가는 조그만 배터리는 없었다. 하긴 뭐 이게 잘나가는 상품은 아니겠지. 그래서 라자다에서 검색을 시작했는데 난항이 계속 되었다. 딱 LR920GH에 해당하는 제품이 없을 뿐만아니라 LR920까지만 해도 다른 이름들로도 불리고 있었던거다. 그래서 확신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난 이번엔 시계에 들어가는 배터리에 대해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공부한 끝에 시계에 들어가는 배터리는 시계의 역사 만큼이나 다양해서 표준이 없으며 그 두께와 표준전압 그리고 크기가 다른 것들이 수도 없이 많아 제대로 맞는 것을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에혀. 결국 어려운데 잘 골라야해 였다. 그래서 애초에 그 이름 LR920에 집중하였고 이 LR920이 SR920SW 그리고 AG6와도 호환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난 안심하고 라자다에 주문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배터리가 배송 되기를 기다리며 난 애초에 이 녀석의 문제점. 그러니까 10시 40분쯤에 초침이 돌다가 10초를 지나갈 때 초침의 머리 부분이 분침에 걸려 넘어가지 못하는 현상을 해결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럴려면 이녀석의 내부 무브먼트를 드러내 초침을 조정해야했다. 문제는 무브먼트와 유일하게 연결되어 있는 버튼 그러니까 시간과 날짜를 조정하는 버튼이 빠지질 않는 다는 거였다. 힘을 줘 빼내려 해도 안되고 이리저리 돌려봐도 안되고. 결국 다시 유튜브의 힘을 빌려야했고 시계마다 있는 이 버튼의 이름은 용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용두의 세계도 참 깊고 넓어서 뽑는 법이 참으로 다양했다. 더구나 뽑고나서 어떤 경우엔 다시 끼우기에 애를 먹기도 한단다. 에혀. 간단하게는 용두가 꽂힌 부분 근처에 조그만 나사가 있어 약간 풀어주면 용두가 뽑히는 방식이 있고 대부분은 뭔가 용두와의 결합 부분에 조그만 버튼이 있어 그걸 누르며 뽑으면 뽑힌다고 한다. 보통은 눌러야할 부분이 티가 나거나 아예 Push라고 안내를 해주는 경우도 있단다. 암튼 다양한 방법 중에 녀석의 무브먼트에는 뭐 용두 근처에 나사가 없으니 뭔가를 눌러 빼야하는데 도대체 티가 나는게 없었다. 당연히 Push로 안내해 주지도 않고 말이지. 여기서 다시 벽에 부딪혔다. 용두를 빼는 방법중에는 그냥 힘으로 빼는 경우도 있다던데 녀석이 그런건가 싶어 힘을 좀 줘봤는데 아무래도 그 방법은 아닌 것 같았다. 이러다 정말 시계를 고장낼 것만 같았다. 벽에 부딪혔을 때 경험상 좋은 극복 방안 중 하나는 잠시 잊고 있다가 다시 해보는 거였다. 나는 결국 용두를 빼는 시도를 멈췄다. 그리고 다른 일에 몰두했다.
다시 용두 빼기를 시도하게 된건 하나의 아이디어 때문이었다. 그래 Push라고 써주진 않았더라도 눌러야할 곳에 적어도 무슨 표식은 하지 않았을까 하는. 그래서 다시 돋보기 안경을 끼고 아이폰 확대 기능을 켜서 무브먼트와 용두가 연결된 부분을 현미경 처럼 확대해 살피기 시작했다. 아하. 그렇지. 그래. 있었다. 이야 이렇게 표시를 하다니. 불친절 하게도 그냥 살짝 눌린 자국이 있었다. 육안으로는 식별도 안되는. 하지만 뭐 굳이 거기에 눌린 자국이 있을 이유가 없었기에 난 여기라고 확신 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헤드를 송곳 같은걸로 바꾼 드라이버를 이용해 찾아낸 부분을 누르며 살며시 용두를 빼보았다. 그러자 용두는 거짓말같이 정말 쉽게 쓰윽 빠져 주었다. 용두를 제거하자 이제 드디어 무브먼트를 시계 케이스로 부터 분리할 수 있었다. 유리 너머가 아닌 맨 얼굴의 녀석과 처음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항상 걸리던 초침의 머리 부분을 살짝 들어 주었다. 이제 배터리가 배송되어 교체하고 나면 10시 40분에 맞추어 초침이 걸림 없이 잘 돌아가는지 확인만 하면 되는 거다. 와우. 난 기어이 해내고 만 것이다. 하하.
내 기다림을 알고 있었던지 배터리 배송은 하루만에 되었다. 금요일에 시켰는데 토요일에 배송되다니. 여기도 일요일은 배송이 안되니 월요일이나 확인 할 수 있��구나 했는데 정말 반가웠다. 그래서 토요 루틴을 끝내고 돌아와서는 바로 배터리를 교체해 보았다. 음. 그런데 이런 초침이 여전히 움직이질 않았다. 뭐지 뭐지 정말 LR920 만으론 안되고 정확히 LR920HG 여야 했던거야 하는 낭패감이 몰려왔다. 그러다 문득 시간을 맞추려고 용두를 조금 뺐을 때면 초침이 멈췄던게 기억이 났다. 아하. 다행히 녀석의 용두는 별 무리 없이 잘 다시 들어갔고 멈췄던 초침이 째깍째깍 다시 돌기 시작했다. 우와. 감격의 눈물이라도 나올것만 같았다. 그리고 테스트. 시간을 10시 40분에 맞추고 초침의 흐름을 숨죽여 지켜보았디. 결과는 대 성공. 초침은 막힘 없이 잘 돌아가 주었다. 이제 다시 조립만 하면 되는 거였다. 이로써 기나긴 녀석과의 신경전은 나의 승리로 끝나는 거다. 하. 이렇게 끝났어야하는데 뭐 녀석은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무브먼트를 케이스에 집어넣기 위해 다시 용두를 제거하고 무브먼트를 정확한 위치를 맞추어 집어 넣고 플라스틱 고정틀도 다시 제 위치를 잡아 넣어주고는 재차 용두를 꼿아주고선 마지막으로 스냅으로 열었던 뒷 뚜껑을 닫으려하는데 이게 잘 안되는 거다. 아무리 힘을 줘봐도 다시 원래대로 맞아 들어가주질 않았다. 마치 콜라병뚜껑을 땄다가 다시 손으로 막아주려할 때 정확히 맞물리지 않는 것처럼 금새 다시 빠지는 거였다. 에구야. 와. 근데 말이지 글쎄 이 문제도 유튜브에서 검색이 되는거다. 정말 유튜브의 힘에 놀랐다. 딱 제목이 시계 툴 없이 시계 뚜껑 닫기 였다. 이렇게 스냅으로 여는 방식의 시계 뚜껑은 보통의 힘으로는 닫기가 어려운 거였다. 결국 유튜브를 다시 완독하고 방법을 알아내 시도 하여 성공하였다. 다시 잘 맞물려 들어가며 “딱”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다시한번 큰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최종적으로 내가 해낸 것이다. 흑흑.
그리고 밤 12시가 넘어 자기전 시계를 확인했다. 다 수리하고 시간을 맞춘게 3시 좀 넘어서 였는데 시계는 정확히 현재 시간을 잘 가리키고 있었다. 이 당연한 일에 난 행복에 취했고 오늘밤은 정말 푹 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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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jucap · 3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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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내게 프로야구 어느 팀을 좋아 하는지 물어볼 때가 있다. 그럼 나는 해태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아 그럼 기아군요”라고 다시 물어본다. 그럼 난 항상 “아뇨 해태라구요.” 라고 다시 대답하곤 했다.
이제 30년 가까운 직장 생활이 마무리 되어간다. 민주가 물었다. 오랜 세월 너와 함께한 직장인데 아쉬움이나 애정은 남아있지 않냐고. 나는 같은 대답을 했다. KB랑은 전혀, 현대라면 많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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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jucap · 3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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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NU 베트남 국립대에서의 소회
아침부터 베트남 국립대 장학금 수여식에 참석하기위해 양복과 넥타이까지 메고 출근했다. 그렇게 찾아간 하노이 시내 베트남 국립대는 정말 교정이 있는 종합대학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베트남의 다른 대학들이 건물 한개로 이루어진걸 많이 봐와서 과연 베트남 국립대의 위상에 맞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지금은 대부분 멀리 화락에 있는 신 캠퍼스로 이전해 갔고 지금은 이런 행사를 진행하거나 향후엔 의대만 남긴단다. 이야 한국의 서울대랑 가는 길이 이렇게 비슷할 수가. 암튼 행사장에 도착하니 장학금을 받는 모든 학생들이 남자는 와이셔츠 여자는 흰색 아오자이를 입고 참석했다. 그리고 일반적인 축사 외에 모든 장학생에게 장학증서 수여와 기념 촬영 그리고 이어진 질의 응답시간까지 정말 간단한 행사가 아니었다. 오전 내내 게임도 진행하고 마지막 전체 촬영까지 한참이 걸렸다. 질의 응답 시간엔 비전공자로 데이터 분석 업무에 관심이 많은데 학위가 필요하냐는 질문이 있었고 그건 내가 대답할 문제 였다. 사실 새벽에 이런 질문을 할거라고 우리 직원이 알려왔다. 얼마전 오랜 준비끝에 KBSV는 데이터 분석을 위한 정보계 시스템을 완성했고 그동안 담당은 디지털팀이었으나 데이터분석팀을 만들어 업무를 확장하려 하고 있다. 그래서 딱 시의적절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KBSV에서 데이터 분석 업무를 하기 위해서는 학위는 필요없다. 실제로 KBSV의 데이터분석팀 첫 팀원은 회계학과 출신으로 지난 2년간 회사에서 학습을 통해 데이터 분석가로 성장하였다. 그런데 데이터분석가가 되기위한 기본적인 역량은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 역량은 경험이나 지식으로 검증이 되어야할 것이다. 그런데 VNU의 학생들 처럼 뛰어난 역량을 갖춘 학생들이 KBSV의 데이터 분석가에 지원한다면 큰 영광이겠다 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베트남 국립대 부 총장의 축사에서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다른 대학 졸업생들에게는 좋은 회사에 들어가 열심히 일하라고 조언한다. 그런데 우리 VNU 졸업생들에게는 열정을 가져라 그리고 그 열정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해라라고 조언한다.” 하하. 뭐 대단한 사람들은 맞다. 베트남도 교육열이 강하고 경쟁이 치열해 우리로 치면 서울대에 들어온 이 대학 학생들은 엄청 뛰어난 인재들이다. 그중에서도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학점이 좋은 학생들. VNU 내에서도 경쟁을 뚫고 올라온 학생들이니까. 사실 우리 서울대에서도 자기들끼리 모여선 저런식으로 이야기하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참 마음이 불편했다. 열정을 갖고 자신의 열정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할건 비단 공부를 제일 잘하는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젊은이들이 가야할 길이니까. 그게 맞는거니까. 우리 아이들도 그럴 수 있길 바라 마지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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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jucap · 4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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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의 꽃
갑자기 꽃이 보이기 시작하면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22년에도 23년에도 본적이 없는 것 같은 보라색 꽃들이 24년이 되어서야 가로수들에 이쁘게 펴있는 걸 발견했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최전무님도 JB 전무님도 대표님까지도 처음 보는 것 같다시니 3년에 한번씩 피는 꽃인가 싶다가도 민주는 봤었다고 하니 아마도 그 전에는 꽃을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거나 아니면 정말 돌아갈 때가 되어 아쉬운 마음에 하노이의 구석구석에 관심이 생겨 보이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쁘긴 무척이나 이쁘다. 나중에 생각이 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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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jucap · 4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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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수학과 교수님의 졸업식 연설 중에서.
”이제 본격적으로 어른입니다. 나는 커서 어떻게 살까? 오래된 질문을 오늘부터의 매일이 대답해 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않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게 되길.“
좋은 글을 읽었다.
은퇴를 앞둔 시점에 내가 그동안 사회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결국 이렇게 오래기다리고 있던 30년 전의 내게는 정말 낯선 나와 마주하게 된다.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을 수 있는건 내가 끝까지 사회에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내년에 사회에 나가게될 영우에게도 전하고 싶은 명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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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jucap · 5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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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10,000 만일의 기억
오늘은 결혼 만일. 만일이면 27년하고 145일이 지난거다. 보통 부부가 결혼해 살면 너무 안맞아서 이혼하지 않는 바에는 27년 이상은 살거다. 그런데 결혼 만일을 기념하는 사람은 주위에서 본적이 없다. 로맨스가 남아있기엔 너무 오래 함께 살아온거니까. 그런데 난 숫자에대한 엄청난 호기심이 있고 그 숫자들에대한 애정이 남달라 사실 8천일도 9천일도 기념 했었다.
그렇게 맞이한 결혼 만일 기념일. 아침에 일어나 비데를 달았다. 202호 메인룸 비데를 민주가 청소하다 출수구를 부러뜨려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했다. 이번에 와서 꼭 해주고픈 작업 1호였다. 이미 기초 배관 시공은 되어 있는상태라 작업은 생각만큼 간단했다. 그리고 연우가 몸 상태가 감기로 좀 안좋았지만 알랑이와 연우에게 인사를 남기고 우리는 결혼 만일 기념 여행을 출발했다. 민주가 서촌 한옥 스테이 이벤트에 당첨되어 오늘은 민주가 항상 해보고 싶어했던 한옥에서의 일박이었다. 민주가 이런거 참 잘되고 운이 아주 좋은데 더구나 댓글 신청에서 결혼 만일 기념을 적었으니 이번엔 운과함께 기세도 좋았었다. ^^ 결혼만일 딱 당일의 이벤트라는 건 참 거짓말 같은 동화같은 이야기지만 말이지.
우리는 종로 2가역까지 501번 버스를 타고 갔다. 그 곳부터 인사동 골목 탕방으로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했다. 인사동 골목은 그대로였으나 민주 말로는 알던 가게들이 많이 바뀌었단다. 코로나 엄혹한 시절을 견뎌내기 어려웠겠지. 그렇게 이곳 저곳 장생호 공예가 전시장도 들르고 가판에서 맛있는 밀 떡뽁이도 1인분 시켜 나눠 먹고 인사동 골목들을 돌아다녔다. 중간에 키넥틱 아트라는 조형물들을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너무 맘에들어서 바로 모스아트와 함께 내가 해보고 싶은 장래 희망에 적어 두었다. ^^
그리곤 북촌으로 출발. 가는길에 덕성여중, 여고를 지나며 옛날에 연우 보내려고 와봤던 추억 얘기하며 걷는데 어디선가 민주언니 하며 놀라며 부르는 소리가 들려 보니 옛날 부암동 살던 시절 서촌 옷가게에서 우연히 알게 되어 민주와 친해진 한옥을 두채나 가지고 있던 은진이었다. 사실 난 오늘 처음 얼굴 본건데 워낙 얘기를 많이 들어서 나역시 반가웠고 민주와 은진이는 이산가족 상봉한 것 처럼 엄청나게 반가워하고 길가다 만나게 된 걸 신기해했다. 항상 늦게 결혼해 늦은 아들 키우느라 고생이라는 얘기를 들었었는데 그 아들이 벌써 초등학교에 다닌단다. 우리는 아쉽진만 헤어저 본격적으로 북촌 탐방을 시작했다. 북촌도 예전에 부암동 평창동 살던 시절 많이 와봤던 곳인데 가게들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원래는 아트선재센터 카페를 갈 생각이었는데 문을 열지 않아서 런던 베이글 뮤지엄이라는 곳까지 걸어갔다. 베이글 전문점이라는데 아주 유명해서 대기를 엄청 해야한다는데 오늘은 평일이니 혹시 몰라 가보자고 했다. 그런데 뭐 근처에 접근만 했는데도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있었다. 가게 앞은 뭐 사람들로 장사진. 정통 베이글이랄 순 없고 빵과 떡의 중간 쯤이라는데 이걸 만든 사람은 젊은 여자애였다고. 지금은 뭐 거의 레전드 급으로 성장했다고. 연우가 무척 좋아해 오래 기다리더라도 사먹은 적이 있단다. 한번가면 10만원이 훌쩍 넘게 빵을 사온다니 뭔가 마약을 탔나 하는 의심까지 드네. 암튼 그래서 그곳은 엄두도 못내고 바로 앞에 있는 솔트 하우스에가서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이곳도 원래 대기가 많은 곳인데 우리가 운이 좋았다고. 솔트하우스는 한국에 온 독일사람이 제대로된 햄이 없다고 햄을 만들어 망원동에서 팔다 대박이났고 여긴 분점이라고. 우린 잠봉뵈르라는거 한개와 샌드위치를 시켜 맥주와 먹었눈데 안에 들어간 얇은 햄들이 아주 맛있었다. 그렇게 맛있는 햄도 먹어보고 나와 이번엔 최종 목적지 서촌으로 향했다. 가는길에 삼청동 떡뽁이에서 또 일인분 떡뽁이를 먹었는데 아까 노점은 일인분에 4000원이었는데 오히려 여기는 2500원이었고 나는 둘다 맛있었는데 민주는 여기 떡뽁이가 훨씬 맛도 잘베고 맛있단다. 그렇게 떡뽁이도 맛있게먹고 다시 서촌을 향해 출발했다. 가는 길목에 그런데 청와대가 있었고 아하 청와대 개방으로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고 있는게 보였다. 우리는 급 호기심에 자원봉사 할아버지께 안내를 받았는데 관람을 하려면 예약이 필요하단다. 그런데 수급에 따라 예약 없이도 들여 보내주기도 한다 하셨고 예약 없이도 오른편 언론 브리핑을 했던 춘추관은 돌아볼 수 있다 하셨다. 우리는 뭐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청와대를 볼 생각은 없었기에 춘추관만 탐방하고 나왔다. 춘추관만해도 와 TV에서 엄청 보던 곳이네 싶었다. 그렇게 익숙한 청와대 정문 분수대를 지나 서촌에 입성했고 아직 체크인까지 시간 여유가 있었기에 베어카페라는 곳에서 커피를 한잔 했다. 작은 정원이 있는 한옥에 만든 커페였는데 정갈하고 이뻤다. 그렇게 좀 쉬다 본격적으로 서촌을 돌아다니며 헤브레를 찾아깄는데 처음엔 조금 헤매서 유명한 삼계탕집을 찾아가 거기서 부터 다시 찾아갔다. 그리곤 헤브레 셀프 체크인. 민주가 미리 받아둔 비번을 입력해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민주가 꿈꿔 왔던 곳인 만큼 참 이쁘고 정갈한 곳이었다. 작은 한옥에 조그만 마당엔 풀과 작은 나무들 실내는 또 스칸디나비아 풍의 나무로 만들어진 인테리어였는데 깔끔하니 너무 이뻤다. 처음 들어갔을 때는 전등이며 스위치 류 들이며 벽지에 주방, 주방용품 들까지 민주가 엄청 좋아라할만한 것들로 가득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참 좋았다. 거기에 침대 위엔 이번 이벤트를 주최한 꼬뜨네의 선물까지 놓여있었다. 특히 푹신한 벼게 두개 중 하나는 너무 편해서 나중에 하노이로 가져오기까지 했다. 정신없이 집구경을 하다가 저녁을 먹기 위해 나왔다. 천천히 경복궁역 세종음식문화거리 산책을 하며 옛 추억을 얘기하기도 하고 변해버린 가게들 얘기도 했다. 그러다 길 건너편 크레프트 브루스 보리마루로 맥주를 사러갔는데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손님이 없어 벨기에산 생맥주를 한잔 하며 사장님과 많은 얘기를 나눴다. 젊은 여사장님은 맥주에 진심인 것 같았는데 참 공부도 많이 했구나 싶어 영우랑 이야기가 잘 통하겠구나 싶었다. 긴긴 대화는 물론 민주니까 가능한 건데 가끔 민주는 말이 없다가도 잘 통할 것 같은 사람을 만나면 무지 말이 많아지는데 딱 그 사장님을 만났을 때 그랬다. 그래서 우리 결혼 만일 축하 여행 이야기도 하게 되었는데 사장님께서 원래 그 맥주 5병사야 서비스로 주는 벨기에 맥주 전용잔을 선물로 주셨다. 와. 참 민주는 복이 많다. 그리고 우리가 참 바를 가려 한다니까 거기는 사람이 너무 많아 힘들고 3호점이 바로 옆에 열렸는데 참 제철이라고 사계절 제철에 맞는 우리 음식들로 칵테일을 만드는 곳이라고 그곳을 추천해 주시고 거기에 예약까지 해주셨다. 우와. 우리는 우선은 저녁을 먹어야 했기에 보리마루를 나와 효자동초밥에가서 초밥을 먹고 참 제철로 찾아갔다. 입구부터 범상치 않더니 바에 앉아 먹는 내내 참 유쾌하고 즐거웠고 무었보다 칵테일이 맛있었다. 나는 내가간다 하와이라는 부제의 마이타이를 먹었고 민주는 모스코우 ���을 먹었는데 민주 칵테일은 고춧잎이 들어있고 정말 고춧잎 향이 나는데 신기하게도 참 맛있었단다. 내건 내 입맛에 딱으로 정말 맛있었다. 거기서도 젊은 바텐더들이 우리의 결혼 만일을 아주 신기하게 생각했고 나는 결혼 만일은 27년 145일 이라고 얘기해 주었더니 서비스로 칵테일을 자기 것 까지 세잔 만들어 셋이 건배하고 마셨는데 그것도 참 아주 맛있어서 그 칵테일로 10잔도 마실 수 있겠다 할 정도였다. 우리는 좀 아쉬웠지만 원래의 우리 여행의 목적이 한옥에서의 오붓한 하룻밤이었기에 그렇게만 마시고 나와 사두었던 맥주를 가지러 다시 크레프트 브루스 보리마루로 갔다. 이번엔 사장님 말고 여자 종업원도 있었는데 그 분이 우리 영우를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를 위해 맥주를 사가는 아들로. 우리는 좀 아쉬어 생맥주를 한잔 시켜 나눠 마시고 사가는 맥주 안주를 위해 자꾸만 손이 간다는 팝콘을 하나 시켰다.
그리고는 다시 보리마루에서 추천 받아 산 맥주 여러병과 여러캔을 들고 헤브레로. 가는길에 불닭 볶음면과 미니 사이즈 앙증맞은 투게더도 하나 샀다. 우리는 헤브레로 다시 돌아와 음악을 들으며 맥주와 불닭 볶음면 그리고 투게더를 나눠 먹으며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나보다는 민주가 맥주를 마시는 속도가 더 빨랐다. 민주가 행복해해서 나도 기분이 참 좋았다. 그렇게 약간은 취해서 맥주 한캔은 먹지 못하고 남긴채로 우리는 푹신한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그렇게 결혼 만일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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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0일도, 9,000일도 민주는 시큰둥 했지만 만일 만큼은 같이 기뻐해 참 행복했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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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jucap · 5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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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서원 캠프의 기억
중학교 시절 심한 사춘기 방황으로 방학 때마다 엄니는 나를 인성, 심리 캠프에 보내셨다. 자식이 엇나가지 않길 바라시는 엄니의 간절한 마음이셨지만 난 캠프에가서도 사실 잘 어울리질 못하고 책만 읽었다. 한번은 다들 뭐 토론 수업을 하고 있는데 사실 나는 당시 내 또래 애들을 같잖게 생각하고 있어서 우리조 애들이 계속 부르는데도 옆에서 책만 읽고 있었다. 당시 읽었던 책이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였다. 그런데 다들 아시다시피 주인공 제제의 유일한 친구였던 뽀르뚜가 아저씨가 죽는 장면이 나온다. 난 그 부분에서 너무 몰입해 그만 옆에서 토론하고 있던 애들을 완전히 잊고 대성통곡을 하고야 말았다. 울음이, 눈물이 멈추질 않았고 갑자기 놀라 무슨 일이냐고 걱정되 물어보는 친구들의 말에 마치 제제처럼 더 대성통곡 했던 기억이다. 하하. 지금 생각해도 참 뻘쭘하다. 난 그일로 별도 심리상담도 받아야했다. 그런 많은 캠프 생활 중에 아직까지도 기억에 많이 남는 그리고 어린인생에서 세상의 큰 경험을 하게 해준 캠프가 안동의 서원 캠프였다. 아직도 당시에 배운 시조가락과 가사가 생각이 난다. “진국명산 만장봉이요, 숙기종영 출인걸이라” 하는. 그런데 당시 배웠던 예법이며 고전 강독이며 시조 그런거 말고 내 인생의 큰 경험은 너무 더워 강가로 물놀이를 함께 갔을 때 하게 되었다. 안동 캠프에는 전국에서 모인 내 또래의 아이들이 있었고 그 중에는 바닷가에서 온 형제가 있었다. 다들 강에 들어가 물놀이를 하고 있는데 그 둘은 물에 들어가지 않는 거였다. 난 그들처럼 거기서도 아웃사이더였던지라 같은 처지의 그들과 종종 말을 섞었고 그때도 내가 궁금해 물었었다. 너희는 바닷가 마을에서 왔다면서 수영을 못하니? 왜 물에 들어가지 않니? 그리고 그들의 대답이 내 어린 인생에 큰 깨닮음을 주었다. “이렇게 얕은 물에서 어떻게 수영을 하니?” 그래 세상은 무지 넓고 내가 살고 있던 세상은 아주 아주 좁은 곳이었구나. 그래 넓은 세상속으로 알을 깨고 나아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린시절 안동의 경험이 너른 세상을 향할 수있도록 내 관점을 변화시켜 주었다면 군대 가기전 역시 어머님의 바램으로 마지 못해 가게된 송광사의 수련회는 또 다른 의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어머님은 동네에서 보살님 칭호를 들으실 정도로 불교에 진심이셨다. 그래서 나도 모태 불교인거고. 그래도 뭐 가끔 어머님과 함께 절에가서 절을 하는게 다였던 나는 사실 종교에는 관심이 없었다. 불교의 교리는 크게 불법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 불보사찰, 법보사찰, 승보사찰이라고 각 법리를 대표하는 사찰이 있다. 경남 양산의 통도사는 불보사찰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 경남 합천의 해인사는 법보사찰로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팔만대장경을 모시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전남 순천의 송광사는 승보 사찰로 예로부터 승려가 정진 학습을 하는 곳이다. 바로 이 승보사찰에서 열리는 수련회인 것이다. 이게 탬플스테이같은 만만한 행사가 아니다. 일주일간이긴 하지만 정진하는 스님들과 똑같이 생활한다. 모든 통신 도구는 입소하며 다 걷어가고 스님들이 일어나시는 새벽 3시 반에 기상해 9시면 잠에 든다. 세끼 고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발우공양으로 식사를 마치고 내가 마시던 물로 발우를 씻어 그 씻은 물까지 마셔야했다. 그리고 한여름 찜통 더위속 졸음과의 전쟁이었던 참선 수행. 자세를 잡고 가부좌로 마음을 가다듬다가도 깜빡 깜빡 넘어가는데 남들이 맞는 죽비 소리에 놀라 깨곤 했다. 그러다 잠시 정신을 놓고야 말면 어김없이 등어리에 죽비가 꼿혔고 아픔보다는 그 짝 소리에 놀라 깨었다. 그런데 이 모든 걸 떠나 가장 힘들었던 건 묵언 수행 이었다. 일주일간 말이 금지 되었다. 어디서 오셨어요? 이 말 한마디를 못했다. 그런데 딱 한순간 말이 허용이 되는 때가 있었다. 그건 불가교리 교육 중 질문을 받을 때였다. 뭐 질문을 수화로 또는 지필로 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법리 교육 시간이면 정말 많은 질문들이 쏟아졌다. 내가 보기엔 질문을 하고 싶었다기 보다 그저 말을 하고 싶었던 거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인 교육 중 그렇게나 많은 질문이 나오는걸 그전엔 본적이 없었다. 하하. 아무튼 그렇게 고행의 일주일이 지나고 마지막날, 우리는 마지막 참선을 마치고 1080배 정진을 남겨 두었다. 이 정진을 마치게 되면 수계를 받게 된다. 불가의 이름 법명을 받게 되는거지. 난 1080을 어떻게 세고 있나 싶었는데 1080개의 구슬이 달린 긴 염주가 있었다. 앞에서 같이 정진하시는 대스님이 이 1080개 구슬 염주를 하나씩 넘겨가시며 세시는 거였다. 실수로 몇개 건너 뛰고 그러는건 기대할수가 없었다. 얄짤 없었다. 그렇게 죽비의 짝 소리와함께 1080배 정진이 시작 되었다. 뭐 초반에는 젊은 나에게는 무리가 없었다. 별거 아니네 생각도 들었다. 일주일간 매일 108배로 단련도 되었던터다. 짝짝 다음을 제촉하는 죽비소리에 맞춰 리드미컬하게 오체투지 공양을 올렸다. 아아. 아아. 아아. 아아. 아아. 아아. 아아. 아악.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이제는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상태가 되었다. 쓰러지고 주저 않아 흐느끼는 사람들이 생겼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일어서는게 기적처럼 느껴지고 오체를 던질때면 쓰러지는 장작더미 같았다. 얼마나 남았는지 모른다는게 더 힘들게 했다. 이럴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셀걸 그랬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악몽같은 시간들이 흘렀다. 정말이지 뛰쳐나가고 싶었던 고통의 순간들. 옆자리 아저씨가 쓰러져 포기하셨다. 그래 되었다 이정도도 대단한거다. 나도 그냥 주저앉으면 된다. 하지만 그 순간 땀과 눈물로 범벅이된 내 눈앞에 엄니가 떠올랐다. 우리 세 자식들 입시기도를 위해 100일간 매일 이른 새벽에 관악산 정상 연주대에 오르시고 매일같이 1080배를 하셨다던 우리 엄니. 불가에서의 몸은 속박의 현실이면서 또한 해탈의 도구이다. 그 순간 내 몸은 이미 나의 것이 아니었다. 오체투지로 몸을 조아리며 바라보는 부처님이 그렇게나 위대했다. 난 진심으로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있는 나를 느꼈다. 마침내 마지막 죽비소리와 함께 1080배가 끝났다. 더 이상의 죽비소리가 울리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어떤 지난 순간보다도 더 평온한 마음으로 깃털처럼 가볍게 가부좌를 틀고 천천히 앉을 수 있었다. 나중에 확인하니 1080배는 근 3시간 가까이 진행 되었었다. 그렇게까지 지난 줄은 생각치 못했다. 이 일주일 동안 내가 경험한건 철저하게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중학교 시절의 경험이 넓은 세상을 바라보게 해주었다면 이번엔 철저하게 나를 바라보는 시간이었다. 누군가의 아들이 아닌, 공부잘하는 모범생으로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이 아닌, 진정 나만 알 수 있는 내 본 모습을 바라보는 시간. 아마도 내 인생을 바꾼 소중한 경험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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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jucap · 5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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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이야기
생일 파티에 초대되어 IT 부서장 쭝의 집에 찾아가는 길. 하노이의 외각이라 차로 집에서 한시간 반이 걸리는 먼 곳이다. 한참을 가는데 화물열차가 지나가는 걸 보고 기찻길을 따라 쭉 내려가고 있다는걸 알았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기찻길이 단선이다. 응옥씨에게 물어보니 어딘가엔 복선으로 교차하는 곳이 있을거란다. 뭔가 아주 위험하단 생각이 드는데 한시간여 차안에서 바라보니 아까 봤던 화물열차 지나가곤 더 지나가는 기차가 없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니면 오전엔 상행선만 오후엔 하행선만 있던지.
그러다 문득 기차에대한 여러가지 기억들이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최초의 기억은 서울역이나 영등포역 명절 귀성길의 모습이다. 난 국민학교도 가지않은 어린 시절. 서울에 사는 친척들과 함께 기차를 타러 가면 여럿이 우루루 들어가며 나같은 어린애 표는 사지 않았더란다. 그래서 어른 몇명당 어린이 한명이 무료인지는 모르겠는데 쭉 들어가다 항상 내가 걸렸다. 표를 확인하는 차장이 내 목덜미를 잡고는 들여보내질 않아서 아버지가 알아채시고 뒤돌아와 즉석에서 돈을 지불하고야 난 통과할 수 있었다. 난 그렇게 걸리는게 너무 싫어서 항상 조마조마 했고 그래서 아직까지 목덜미가 낚아지는 그 순간들이 기억이 난다. 두번째 기억은 중학교 시절이었다. 그 시절 난 극심한 사춘기 방황을 했기에 어머님은 많은 걱정을 하셨고 방학이면 각종 청소년 심리 캠프같은 데에 보내곤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1980년대 초반이었던 그 시절 그 많은 캠프들을 어떻게 찾으셨나 싶기도 하고 어머님의 고민이 얼마나 깊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고민의 해결 방법이 극단적인 대결이 아닌 치유의 형태로 진행된 것에 어머님의 지혜를 느낀다. 그렇게 어느 여름 강원도로 떠나 지냈던 캠프를 마치고 돌아오는 완행 기차에서의 일이다. 우리들은 캠프에서 미리 예약을 해두었기에 모두 좌석이 있어 앉아서 서울로 오는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입석으로 서있었다. 그런데 그중에 할머니 한분이 딱 내 자리 옆에 내 팔걸이에 엉덩이를 의지하시고 서계셨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나는 그런 상황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얼마지않아 할머님께 내 자리를 양보하고 서서 가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담당 선생님이 와서는 왜 그랬냐고 나무라셨다. 우리가 제 돈주고 먼저 사서 차지한 자리인데 말이지. 그렇지만 사춘기의 나는 오히려 더 오기가 생겨서 내 결정을 고수 했다. 그렇게 한참을 서서 오는 중에 사고가 터졌다. 철로 옆에서 누군가가 던진 돌이 기차 유리창문을 깨고 들어와 덮친 것이다. 돌은 다행히 사람에 맞진 않았지만 깨진 유리 파편이 내자리에 앉아계시던 할머니를 덮쳤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사고가 나던 그 순간이 생생하다. 다행히 할머님도 크게 다치시지는 않았지만 당시 모든 것에 부정적이던 나는 내 불행을 할머니께 넘긴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었다. 기차에서의 사고는 내 인생에서 한번 더 있었다. 중학생보다는 좀더 나이가 들어서인 것 같은데 그때도 단체로 시골에 제사를 지내러 갔다가 또 단체로 기차를 타고 올라오는 길이었다. 아마도 좌석이 충분치 않았는지 젊은 나는 입석이었고 맨 앞자리 좌석을 역방향으로 만들고 그 뒤에 서서 올라오고 있었다. 내 옆에 누군가 같이 서서 올라왔는데 누군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한참을 떠들고 있는데 몸이 내 뜻과는 상관없이 날아 뒷벽에 부닥쳤다가 다시 의자로 꼬꾸라 졌다. 기차가 경운기를 받은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행히 기차는 탈선하지 않았고 경운기를 몰던 사람은 놀라서 피해 살았단다. 앞칸의 승객들 중에는 크게 다친 사람도 있어 앰블란스에 실려갔단다. 뭐 젊은 나는 큰 충격을 받긴 했지만 멀쩡했다. 문제는 그 다음인데 이 사고 수습을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지체해서 도착이 늦어져 철도청은 모든 승객에게 운임을 물어줘야할 판이었다. 당시에는 KTX가 없었던 시대라 새마을호가 제일 빠르고 다음은 우리가 탄 무궁화열차였다. 참고로 더 늦은 통일호와 더 더 늦은 비둘기호도 있었다. 야. 참 기억이 새롭네. 암튼 난 그 때 무궁화호도 속력을 이렇게 낼 수 있구나 하는걸 알게 되었다. 환불을 안해주기 위한 시간에 맞추기 위해 정말 우리의 무궁화호는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앞에가던 새마을호도 우리가 지나가게 비켜서 주었다. 우와. 어린 나는 마냥 신났던 기억이다. 결국 우리는 환불 받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기차에 대한 기억은 1990년. 내가 대학교 2학년일때의 일이다. 1990년은 광주항쟁 10주년이되는 해였다. 그래서 전국의 전대협소속 학생들이 광주에 모여 큰 집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당시의 전대협 의장도 광주 전남대의 총학생회장 송갑석이었다. 정부는 이 집결을 불법 집회로 낙인찍고 일찌감치 광주로 들어오는 모든 교통수단을 통제하고 광주를 봉쇄했다. 그래서 서울서 기차를 타고 출발한 우리들은 광��역에서 내린다면 그대로 모두 닭장차에 잡혀길 판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대학생들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광주역 직전 송정리역을 출발한 기차를 광주역 가기전 중간쯤 어디선가 비상 제동을 걸어 세웠다. 기차의 안전 장치가 우리의 집결에 도움을 준것이다. 그리고 그 때 정말 꿈만 같은 장관이 펼쳐졌다. 언제 그렇게 많은 대학생들이 탔는지 기차가 급정거로 멈추자 정말 개미때 같이 학생들이 기차에서 내려 논밭을 달리기 시작했다. 당시 난 감격에겨워 목이 메일 지경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광주로, 해방 광주로 입성했다. 그 후 조선대의 녹두대와 전남대의 오월대의 활약은 참 가슴 웅장하게 해주는 또 하나의 역사이지만 기차이야긴 아니니까 다음에. 하하. 마지막 기차에 대한 추억은 그러고도 2년이 지난 1992년의 일이다. 군대에 입대해 논산 훈련소에서 몇주간의 고된 훈련을 통해 참 군인이 된 나는 훈련소 수료식을 마치고 드디어 자대배치를 받고 이제 남은 30여개월의 군생활을 하게될 부대로 이동하게 되었다. 당시 논산 훈련소에서 퇴소하는 훈련병들의 수가 꽤나 많났고 만간인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우리는 자정이 넘은 한방중에 깨어 걷고 뛰어서 논산역으로 이동했다. 이제 막 훈련을 마치고 이병이된 군인들이라 군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렇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길을 앞 사람의 발걸음을 쫓아 찾아간 논산역. 자대가 어디인지 통보받은게 없는 우리의 운명은 이제 거기서 어느 방향 기차에 타게 되는냐에 따라 갈리게 되었다. 우리가 타는 승강장에는 표지판이 없었고 더구나 우리는 한참을 걷고 뛰며 방향감각을 잃었다. 그래서 어슴프레한 초승달을 기준으로 남쪽으로 내려가느냐 아니면 북쪽으로 올라가 전방 쪽으로 향하느냐를 판단해야 했다. 그렇게 양 방향으로 나뉘어 탑승을 하고 드디어 기차가 출발했다. 군에서 배운 시간과 달의 위치를 기준으로 한 방위잡기를 이용해 판단해본 결과 아~ 우리는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언제 내가 내리느냐다. 끝까지 내리지 않는다면 최전방이 확실했다. 아무도 없는 불빛조차 야박한 작은 기차역에 기차가 설 때마다 누군가가 불려 내리게 되었고 불리지 않고 남은 우리들은 탄식과함께 불안한 마음을 진정 시켜야만 했다. 그 시절 그 기차칸에서 느꼈야 했던 팽팽한 긴장감. 그래. 이게 내 마지막 기차에대한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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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jucap · 7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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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마지막 날의 기억
부서장들과 회식을 하다가 IT직군이 중요한 순간 가족들과 함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가 나와 문득 1999년의 마지막날 밤이 생각났다. 1999년 12월 31일 밤. 새로운 밀레니엄을 난 민주와 어린 영우와 함께하지 못했다. Year 2000 problem 이라는 IT의 해묵은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 밤이었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연도를 표시할때 보통 2자리로만 아끼며 썼었는데 이게 2000이 되면서부터 중복이 발생했던거다. 2000년과 1900년이 두자리로만은 구분이 안가는 문제. 암튼 뭐 이게 잘못되면 세계의 금융시스템이 무너지고 금융시스템이 무너져 혼란이 오면 세계 멸망으로도 갈 수 있다는 설레발들이 넘쳐나는 시기 였다. 하여 IT에서 일하던 나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소스를 수정해야 했고 그 수정 사항이 적용되는게 1999년 12월 31일 밤이었던 거지. 그리고 우리는 필연적으로 2000년 1월 1일이 되자마자 모든 시스템이 정상적인지를 테스트 해야했다. 그래서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작을 민주와 또 영우와 함께 할 수 없었던 거다. 더구나 그날밤 0시. 딱 해가 넘어가 인사라도 전하려고 전화 연결을 시도 했는데 여의도에 남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전화를 시도 했는지 모든 전화가 불통이었다. 휴대폰도 회사전화도. 그래서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창 밖을 보니 정상을 확인하고 집에 돌아가는 긴 행렬이 보였다. 차가 끊겼으니 걸어가는 사람들의 정말 긴 행렬이었다. 나도 이제라도 그 행렬에 끼어 걸어서라도 집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침까지 해야할 일들이 있었다. 그래서 난 처음으로 내가 소중한 사람들과 소중한 시간을 함께 할 수 없게 만드는 이 직종에 회의감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은 2024년 3월이다. 1999년 그날 밤으로 부터 무려 24년이 넘게 흘렀다. 난 줄곧 IT직종에서 일했고. 어느정도 내 분야에서는 전문가 소리도 들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가족을 떠나 하노이로와 혼자 생활한지도 2년이 넘었다. 하룻밤을 함께하지 못해 애타하던 시절의 우리는 이제 참으로 멀리 있다. 그 시절의 절절함도 그리고 지금의 부동심(不動心)도 다 민주와 내가 만들어가는 우리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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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jucap · 8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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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놀랍도록 쉬운 해설.
수능 영어가 왜 어려운가?
1학년 영어 “조정식은 못생겼다”
2학년 영어 “조정식은 추남이다” - 단어만 어려워짐.
3학년 수능영어 “아름다움이 죄라면 조정식은 무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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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jucap · 8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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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의 노래
베트남에서는 노래를 부를 일이 많았다. 뭐 가라오케로 불리는 노래방이 우리나라보다 저렴 하기도 했거니와 여러 모임과 행사가 많다 보니 그랬다. 베트남에 와서 처음 불러보고 18번이 된 노래는 단연 카스바의 연인이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이 대부분 조용한 노래들이다보니 분위기를 망치기 싫어 불러봤던 노래인데 꽤나 잘 뽑아져서 내가 트로트가 맞구나 싶었던 곡이기도 하다. 이 카스바의 연인은 술이 좀 올랐건 아니건 잘 불러서 노래방이 아닌 무대에서도 많이 부르게 되었다. 특히 트로트라기 보다는 약간 락 형태로 지르며 부르다 보니 반응도 좋았다. 더구나 트롯트의 흥겨운 리듬에 맞춰 약간의 춤도 곁들였고 손짓도 개발 했으며 노래를 마친 후앤 마이크를 눕혀 정중히 인사하는 퍼포먼스까지 했다. 그래서 뭔가 행사나 모임 자리에서 노래들을 시작하고 한국 경영진도 한곡 불러야할 분위기가 형성되면 다들 내가 나가주길 바라게되고 마지못해 먼저 나가 부르게되는 식이었다. 처음 부르게 된건 IT직원들과 같이간 베트남 노래방에서 한국 노래가 몇곡 없는데 마침 카스바의 연인이 있어서 였다. 그 뒤로는 옆 본부 송년 파티에 초대 되어 갔을 때나, 회사 고객 초청 골프 대회를 마치고 열린 파티의 고객들 앞에서나, 지점장들과 골프를 마치고 회식 자리에 마침 노래방 기계가 있었을 때, BIDV 은행이 초대한 오찬 모임에서 밴드를 불러 노래를 하게 되었을 때 등등.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청중들의 반응이 뜨거워져 정말 몰입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 부터는 마지못해라는 형식을 띄었으나 무대를 즐기게 되었다. 많은 직원들이 내가 노래부르는 동영상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많이들 재밌다고 찍었으니까. 민주가 알면 부끄러워하겠지만. 하하. 암튼 그렇게 자주 부르던 노래중에는 장윤정의 초혼이나 나훈아의 영영이 있었다. 둘다 가사가 참 절절했다.
그러던 중 트로트를 벗어나 꼿힌 노래는 김광석의 “내 사람이여” 였다.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이토록 더운 사랑 하나로
네 가슴에 묻히고 싶네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내 삶의 끝자리를 지키고 싶네
내 사람이여 내 사람이여
너무 멀리 서있는 내 사람이여”
여기서 마지막 너무 멀리 서있는 내 사람이여를 부를 때면 민주생각이나서 목이 메었다. 내 삶의 끝자리를 지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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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jucap · 9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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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무슨 의미일까. 책을 읽다가 비로소 그 의미를 알아챘을 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너무나 사랑하기에 작별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작가의 말처럼 사랑에 관한 소설이고 내가 느끼기엔 지독한 사랑에 대한 서사시다.
한강은 이번에도 역사 속에 무색무취하게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우리 현대사의 비극 속에 묻혀 있던 민초들 한명 한명을 끌어내어 그들이 겪은 역사 속 아픔을 독자로 하여금 직접 느끼게 해준다. 그래서 참 읽기가 힘들다. 굳이 드러내어 느끼고 싶지 않을 고통을 소설의 한줄 한줄에서 가슴 쪼개지게 경험하게 해주니까.
하여 결국
“포기하자. 이감된 날짜를 기일로 하자. 섬으로 돌아오는 배에 혼자 올라 방금 들은 말을 곱씹는 사람. 마침내 수만 조각의 뼈들 앞에 다다른 사람. 머리를 숙이고, 굽은 허리를 더 구부리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
이 대목을 읽으며 장엄한 역사속에 마냥 사라져가는 민초들이 끝끝내 살아내는 삶의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깨우쳐 준다. 뜨겁고 웅장해지는 가슴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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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jucap · 9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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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채르노빌
처음엔 단순 재난 드라마 였는데 마지막 화에 이르러서는 엄청난 철학적 담론을 성찰하게 만든 정말 좋은 드라마가 돠었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세월호의 눈물나는 구호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실화니 만큼 저분들의 저런 용기와 희생이 정말 세상을 구했구나 싶었다. 민주는 우리가 다시 만나지도 못하고 지구가 멸망할뻔 했단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작중 계속 너무하네 싶게 바른 말만하며 진실을 밝히라 주인공 레가소프를 몰아 부쳤던 호뮤크라는 여성 캐릭터가 사실은 당시 진실을 밝히고 사고를 수습하는데 노력하였던 많은 양심있는 과학자들을 기리며 만든 캐릭터라는 걸 이야기해주는데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이건 브래드 피트, 에드워드 노튼 주연의 파이트 클럽의 마지막 장면을 보았을 때 처럼 전율이었다. 급이 다른 연출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 그리고 이 짧은 미니시리즈가 HBO의 대표작이 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게 다른 매체에서는 못하는 길고 긴 응집력을 최종화에서 엄청나게 터트리는 드라마의 힘이구나. 마지막 울림 깊던 독백을 끝으로 웅장해진 가슴을 진정 시켜야겠다. ^^
진실이 불쾌할 때 우리는 진실의 존재를 잊을 때까지 거짓을 반복합니다. 하지만 진실은 여전히 존재하죠. 우리의 모든 거짓은 진실에게 빚을 지고, 언젠가 그 빚을 갚게 됩니다. RBMK 반응로는 그렇게 폭발하는 것입니다. 거짓 때문이죠
When the truth offends, we lie and lie until we can no longer remember it is even there. But it is still there. Every lie we tell incurs a debt to the truth. Sooner or later, that debt is paid. That is how an RBMK reactor core explodes. Lies.
과학자가 된다는 것은 순진해진다는 것이다. 진실을 찾는 데만 열중한 나머지 진실을 원하는 자들이 드물다는 사실을 잊고는 한다. 그러나 진실은 늘 어딘가에 존재한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가 보려 하지 않아도. 진실은 우리의 필요와 바람에, 체제와 이데올로기와 종교에도 관심이 없다. 진실은 숨어서 언제나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체르노빌의 진실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
To be a scientist is to be naive. We are so focused on our search for truth, we fail to consider how few actually want us to find it. But it is always there, whether we can see it or not, whether we choose to or not. The truth doesn't care about our needs or wants. It doesn't care about our governments, our ideologies, our religions. It will lie in wait, for all time. And this, at last, is the gift of Chernobyl.
한때 나는 진실의 대가가 두려웠으나, 이제 다만 묻는다. 거짓의 대가는 무엇인가?
Where I once would fear the cost of truth, now I only ask: What is the cost of lies?
"여기에 저 같은 과학자는 많습니다. 그들 누구든 저를 대신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장관님은... 우리가 요청한 것, 우리가 필요한 것을 모두 조달해 주었습니다. 인력, 자재, 월면 로봇까지도요. 누가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었겠습니까? 저들이 제 말은 흘려들었지만 당신의 말엔 귀기울였습니다. 수많은 관료들과 그 부하들 중, 복종밖에 모르는 그 많은 바보들 중에 그들이 실수로 좋은 사람 한 명을 보낸 겁니다. 맙소사, 보리스, 이 일에서 당신만큼 중요했던 사람은 없어요."
- 레가소프가 실수로 보낸 좋은 사람 정부 관료 셰르비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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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jucap · 10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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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좋은 사람인가 평가하려면 당신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대하는 그의 태도를 보면 된다. 나에게만 친절하다면 그건 위선일 가능성이 100%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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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jucap · 11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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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종이의 흰 뒷면 같은 죽음’
한강의 소설 흰 중에 ‘얇은 종이의 흰 뒷면 같은 죽음’이란 대목. 예전에 글을 읽으며 도무지 떠오르지 않던 이미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어떤 죽음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걸까. 당시엔 구글링해도 나와 같은 의문을 가진 글을 찾기는 어려웠는데 이번에 찾아보니 완전 이해되는 해석이 있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반드시 뒤에서 아른거리는,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어떤 존재를 표현한 것일까. 나에게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같은 죽음’은 왠지 고귀하고도 끈질긴 생명력 옆에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죽음으로 느껴진다.’ 민주랑 이 글을 보며 해석이 더 멋지다고 웃었다. 뭔가 오랜 체증이 내려간 듯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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