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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도르 마라이 ‘열정’
나는 예술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울림에 쉽게 반응하는 편이다. 그것이 문학이던 음악이던 아니면 회화이던 남들보다 조금 더 민감하게 그리고 뜨겁게 느껴왔다고 생각한다. 예술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참 쉬운 감상자이고 내 입장에서 보면 난 예술적 감수성이 큰 사람인거다. 한 줄, 한 마디의 싯귀에 가슴이 다 무너지기도 하고, 긴 호흡의 장대한 소설의 피날레에 마음이 하염없이 웅장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꼭 대단한 감동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지나가다가 아름다운 음악의 선율에 마음을 뺏기기도 한다. 그리고 그 느낌을 살리고 싶어 노래방에가서 직접 불러보기도 하고, 거기에서 좀 더 나아가 자신의 노래를 한번 만들어 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물론 작곡까지는 좀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래도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느낌이 좋았던 노래를 흥얼거리는데 약간의 변주를 넣어 나만의 버전을 만들어 보기도 한다. 그런데 언제든 교향곡을 감상할 때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작품을 창조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고전적으로도 20개 이상의 악기, 낭만주의 시대 이후로는 30개 이상의 악기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렇다고 아름다운 조화만이 다가 아니고 그 속에서 주제가 형성되고 주제가 점점 고조되다가 클라이막스에서는 모든 악기들이 제 목소리로 아우성을 치며 때론 주고받고 때론 함께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각각의 아우성들이 어우러져 우리에게 감동까지 선물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예술 작품이 가능한 것일까? 정말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작품이 맞단말인가? 음악이라는 영역에 있어서 교향곡은 내게 그렇게 미스터리한 산물이었다.
하지만 소설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좀 달랐다. 방대한 대하 장편 소설, 등장하는 인물이 수백명이 되고, 수세기에 걸쳐 세대를 관통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해도 작가의 역량이 대단하다고 느낄 뿐 불가사의하다는 생각이 든적은 없었다. 오히려 김광섭 시인의 시 ‘시인’의 구절처럼 ‘쌀알 만한 빛이라도 영원처럼 품은’ 짧은 싯구에 매료되어 시인의 재능에 경외심을 가지게 된 적은 많은 것 같다.
어젯 밤 나는 이름도 생소했던 ‘산도르 마라이’라는 작가의 ‘열정’이라는 소설을 완독하였다. 그리고 지난 한 달간 읽는 내내 나는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처음으로 클래식 음악의 교향곡에서 느꼈던 불가사의함을 느끼게 되었다. 진정 이런 문장들이 인간이 창조할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등장인물은 주요인물 세명과 더불어 불과 몇 명. 소극�� 연극으로 만든다 해도 가능할 것 같은 조합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플롯 역시 어찌 보면 아주 단순하다. 그러나 작가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힘은 참으로 대단했다. 어떤 장면에선 숨이 턱 막히는 놀라움을 전달하기도 했고, 또 어떤 장면들에선 잠시 책을 접고 다음 장을 펼치기전 숨을 고르고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이야기 자체의 독창성이나 탁월함이 가지는 매력이 아니었다. 그 보다는 한줄 한줄의 문장의 힘에서 오는 매력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인간의 마음을 이렇게나 미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가, 그리고 인간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어떻게 이렇게 통찰력있게 서술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와 같은 근원적인 물음에대해 어떻게 이렇게 마치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창조주처럼 사고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이지 인간이 쓴 글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속 깊은 문장들. 나는 그만 ‘열정’이라는 작품에 흠뻑 빠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책을 읽을 수 있었던건 그냥 우연이었다. 지난번에 한국에 다녀오며 챙겨온 몇 몇 책들 중에 낯선 작가의 이 책이 있었다. 도통 이 책을 산 기억이 없어서 당연히 영우의 책이라 생각하고 통화할 때 물어보니 내가 산 책이란다. 하하. 그런데다 그 많은 책들 중에 왜 이 책이 내 눈에 띄어 이번에 가져올 수 있게 되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암튼 올 초에 집에 다녀왔으니 몇 달을 그냥 눈 앞에 쌓여 있다가 한 달 전쯤 우연히 읽기 시작하였고 비로소 한달여만인 어젯 밤 완독을 할 수 있었다. 읽기를 시작할 때 이 책과 작가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무 했으므로 책을 읽기 시작하고도 한참동안 도대체 어느시대 어느 장소를 배경으로 했는지도 모르고 읽었다. 그렇게 빠져들어 완독을 한 지금, 아직도 난 이 책이 전달한 잔향에 취해 있는거고 이 글을 남겨 지금의 설렘을 간직하고 싶은거다.
이 글이 내가 좋아하는 벗들에게 스포일러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소설 자체에 대해서, 주인공들의 서사와 그 보다 중요한 내가 파악한 ‘의도’에 대해서는 다른 글을 통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깊게 마음에 남았던 문장을 전하며 마치려 한다.
‘운명이란 우연히 닥치는 불행이 아니라, 가늠할 수 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관계의 피할 수 없는 결과이기 때문이지.’
P.S. 1942년 출판된 이 책은 원래 헝가리어로 창작된 책이다. 작가 산도르 마라이가 독일어 등 여러나라 말을 할 수 있었지만 자신을 헝가리인으로 항시 생각했고, 작품을 헝가리어로만 썼기 때문이다. 헝가리어의 원제는 ‘A gyertyák csonkig égnek’로 ‘촛불은 끝까지 타오른다’라는 뜻이라 한다. 영어 버전은 2001년에야 출간이 되는데 ‘Embers:불씨’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독일어 버전 ‘Die Glut:불씨’가 번역된 것으로 보이는데 왜 제목이 ‘열정’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참고로 책안에서는 ‘열정’이라는 단어보다는 ‘정열’이라는 단어가 훨씬 많이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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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쇼츠를 보면 한국인으로서 참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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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더 멋진건 아래 쇼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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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과 노력을 통해 최고가 되고 거기에 이런 인성까지 갖춘다는 건 정말이지 멋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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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탄핵이 인용되던 날 영국 가디언지에는 "한국인들, '닭' 먹으며 탄핵 자축" 이라는 기사가 사진과 함께 실렸다. 그 사진속 왼쪽 위 노랑머리가 영우였다. 그리고 그 사진이 찍힌 시간이 탄핵 인용 선고 직후인 대낮이었다.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 의결이 두번째 투표만에 가까스로 통과되던날 영우는 친구와 함께 여의도를 지켰다. 영우는 그야말로 대통령 탄핵세대인 것이다. 하지만 시대정신에 참여하려는 의지의 시작은 더 거슬러 올라가 다른 곳에 맞닿는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 거기에 저항하는 의지. 영우는 세월호 학생들과 같은 나이였던 세월호 세대이다. 하여 그들은 앞으로도 절대 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을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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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이렇게 짧은 시퀀스에 이렇게 긴장감 넘치고 완벽한 반전이라니. 감독 천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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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과학 이야기
JB 전무님이 빌려주신 책 뇌과학 이야기 “우울할 땐 뇌과학”을 숙제처럼 읽고 있다. 다신 책같은건 빌리지 않겠다 생각이 든다. 하하.
그중에 전전두피질과 측좌핵 그리고 배측 선조체 이야기가 나온다. 정말 과학이다. 하하. 전전두피질은 이성적 사고를 담당한다. 측좌핵은 파티광으로 표현하며 언제나 유혹에 굴복한다. 그리고 배측 선조체는 습관을 담당하는데 문제는 그게 좋은 습관이던 나쁜 습관이던 상관이 없다는 거다. 뇌속의 이 세 기관들이 인간의 행동 방향을 결정한다. 셋이서 마치 국회의원들처럼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토론하다 다수결로 결정한다는 설명이 재밌었다. 일테면 당뇨인 내가 마트에서 초콜렛을 보면 우선 측좌핵이 반응하는거다. 하나 사자. 얼마나 달콤할까. 그러면 전전두피질이 딱 가로 막는거다 이성적으로. 난 당뇨야 사면 안되. 도대체 제정신이야? 여기에 이제 배측 선조체가 그러는 거다. 항상 하던대로 해. 그렇다. 습관적인 행동에 한표를 더하는거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전전두피질이 주장하는 이성적이고 나에게 옳은 의사 결정은 항상 다수결에서 밀리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극복해야하나. 우선 좋은 습관을 들이는 방법이 있겠다. 다수결에서 이기는거지. 그리고 다른 한 방법은 전전두피질의 힘을 강하게 키우는거다. 다수결에 밀려도 큰 목소리로 이기게. 하하. 그런데 전전두피질이 평소에 강하다기도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거나 하면 무너진다고 한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유혹에 쉽게 빠지게되는거지. 와. 그렇구나. 그런데 말이지 알긴 알겠는데 이게 이런 매커니즘을 안다고 해결이 될 문제인가? 글쎄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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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이야기
어린 시절 우리집 거실의 한쪽 벽면을 차지했던 붙박이 책장에는 맨 위에 먼지만 쌓여가던 일본 대하 소설 대망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화집이었다. 해외 유명 화가들의 작품집과 이중섭, 박수근과 같은 한국 대표 화가들의 화집도 있었다. 하여 나는 많은 미술 작품들에 노���되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그림을 좋아했었다기 보다는 아침에 학교까지 걸어가는 길에 보던 풍경들처럼 과거의 명화들이 익숙했다. 그렇게 어린 시절 좋아 하던 그림들은 제리코의 메두사의 ���목처럼 이야기가 담긴 그림들이었다. 하여 들라크루아의 그림들을 특히나 좋아했었다. 어린 시절 화집의 작은 그림으로 보던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을 대학 시절 배낭여행으로 찾아간 루브르에서 마주했을 때의 감동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원래는 이렇게나 큰 그림이었구나 놀라기도 했었고. 하지만 실제 화가의 붓터치의 질감까지 느낄 수 있었던 배낭여행에서의 여러 갤러리 관람은 내 그림을 보는 시각에 변화를 주었다. 영국에서는 윌리암 터너에 매료 되었고 파리로 와서는 모네의 그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모네의 그림은 정말이지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배낭여행으로 파리를 다녀온지 30여년만에 이제는 대학생이된 둘째 연우와 민주와 파리를 다시 찾게 되었다. 어느덧 50에 다다른 나이. 30여년 전처럼 함께 여러 미술관들을 관람하는데 예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그림들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알렉상드르 카바넬과 윌리암 아돌프 부게로. 두 화가 모두 비너스의 탄생을 그렸는데 두 그림이 주는 울림이 참으로 커서 한참을 그 그림들이 있는 방에서 나가질 못했더랬다. 두 화가의 다른 그림들도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러면서 이런 의문이 생겼다. 왜 이런 화가를 여태 내가 몰랐던 걸까. 물론 내가 아는 화가들이야 대체로 전국민이 아는 화가들이니 나만 모를 수도 있겠다 했지만 의아했다. 그래도 명화에 익숙했던 내가 아닌가.
그래서 두 화가에 대하여 찾아봤다. 그들은 미술사조에서 인상파가 출현한 딱 그 시기에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인상파가 조롱과 멸시를 받으며 자신만의 미술세계를 만들어갈 때 신고전주의, 아카데미즘이란 이름으로 전통과 권위를 앞세우는 창작 활동을 해나갔다. 그리고 당대에는 아주 잘 나갔단다. 하지만 시대 정신의 변화 흐름을 읽지 못했고 과거에 천착했다. 그래서 우리가 모네, 마네, 세잔, 르느와르, 드가, 쇠라 그리고 고호는 들어봤지만 카바넬과 부게로는 잊혀진 것이다. 50대가 되어 시대정신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사조보다는 옛것에 맘이 동하였던걸까? 암튼 나는 이렇게 잊혀진 화가들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고 그렇게 탐구하던 중 프레드릭 레이턴이라는 화가를 발견하게 되었다.
프레드릭 레이턴 경. 영국에서 태어 났고 화가로서는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세습 남작작위를 받았다. 그래서 경이다. 그의 삶과 그림들이 딱 그렇게 카바넬과 부게로와 결이 맞는다. 오히려 훨씬 더 적절하다. 그는 생전 작위를 받았을 정도로 화가로서 인정과 찬사�� 받았다. 원래부터 금수저 집안에 큰 키에 잘생긴 외모까지 그는 거의 완벽한 삶을 살다 간 것이다. 또한 그의 여러 그림들은 29살 어린 연인이었던 도로시 딘이 모델이 었다. 둘에 대한 여러 글들을 찾아보면 많은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그와 그녀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끼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그림속 어린 그의 연인은 정말이지 맑고 밝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레이턴도 사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잊혀져 갔다. 그러면서 이 글을 쓰게된 계기가된 그의 그림 “플레이밍 준”은 액자 값보다도 저렴하게 팔려갔고 지금은 중미 푸에트리코의 한 개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단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예술가란 무엇인가. 우리는 고호의 처절했던 인생사를 잘 알고 있다. 자살로 마감된 그의 삶은 살아있는 동안 어떤 인정도 찬사도 받지 못하며 고립되었으나 모두가 아는 것처럼 지금은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중 한사람으로 불린다. 그림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일정 정도의 교육만 받았다면 고호는 알고 있을만큼 유명하고 말이지. 그런 그의 삶 완벽히 반대편에 프레드릭 레이턴경이 서 있다. 예술은 모르겠지만 글쎄다 나보고 고르라면 난 레이턴의 삶을 택하지 않을까?
사람은 나이가 들어 갈 수록 무언가 남겨 잊혀지지 않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한다. 헌데 그게 아닌거지. 내 삶의 괴적이 나를 잊혀지지 않게 하는거다. 이미 잊혀질 존재로 늙을 때까지 살아왔다면 잊혀지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악명밖에 없겠지. 그래. 난 민주랑 이렇게 둘이서 행복하게 잊혀지는 삶을 살란다.
다시. 원래 이 글을 쓰게된 계기인 레이턴의 “플레이밍 준”으로 돌아오자. 우선 이 그림이 이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이 되었다는 걸 수줍게 고백하고 싶다. 1895년 화가가 죽기 1년전 작품으로 역시 모델은 연인 도로시였다. 강렬한 주황색의 반쯤 비치는 드레스를 입고 쇼파에 기대어 앉아 잠들어 있는 여인의 모��을 그린 그림이다. 이야기 했듯 푸에트리코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니 유럽이나 뉴욕만 되어도 어찌 해보겠는데 사실 살아 생전 실물화를 감상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쉬운 일이지만 이 작품에 대한 평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평으로 글을 마치려한다.
“노쇠한 화가가 젊음의 찬란한 아름다움에 대해 전해주는, 인류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과도 같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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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발췌
”어떤 말도 허투루 뱉지 않는, 잠시라도 무기력과 혼란에 빠져 삶을 낭비하지 않을 것 같은 태도 때문일 거라고. 인선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혼돈과 희미한 것, 불분명한 것들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목적을 가진다고, 애써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낱낱이 실패한다 해도 의미만은 남을 거라고 믿게 하는 침착한 힘이 그녀의 말씨와 몸짓에 배어 있었다. “
“어떠한 기쁨과 상대의 호의에도 마음을 놓지 않으며, 다음 순간 끔찍한 불운이 닥친다해도 감당할 각오가 몸에 밴 듯한, 오래 고통에 단련된 사람들이 특유하게 갖는 침통한 침착성으로.”
“무딘 칼로 안구 안쪽을 도려내는 것 같은 통증을 견디며 나는 차가운 차창에 머리를 기댄다. 언제나 그렇듯 통증은 나를 고립시킨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몸이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고문의 순간들 속에 나는 갇힌다. 통증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시간으로부터, 아프지 않은 사람들의 세계로부터 떨어져나온다.”
“방금까지 따뜻한 피가 돌았던 듯 생생한 적막에 싸인 조그만 몸을 들여다보는 동안, 그 끊어진 생명이 내 가슴을 부리로 찔러 열고 들어오려 한다고 느낀다. 심장 안쪽까지 파고들어와, 그게 고동치는 한 그곳에서 살아가려 한다“
“하도 생각해서 어떤 날엔 꼭 같이 있는 것 같았어“
”의식 없는 동생을 두 언니가 교대로 업고 당숙네까지 걸어갔어. 팥죽에 담근 것같이 피에 젖은 한덩어리가 되어서 세 자매가 집에 들어서니까 놀란 어른들이 입을 열지 못했대.“
“당숙네에서 내준 옷으로 갈아입힌 동생이 앓는 소리 없이 숨만 쉬고 있는데, 바로 곁에 누워서 엄마는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대. 피를 많이 흘렸으니까 그걸 마셔야 동생이 살 거란 생각에. 얼마 전 앞니가 빠지고 새 이가 조금 돋은 자리에 꼭 맞게 집게손가락이 들어갔대. 그 속으로 피가 흘러들어가는 게 좋았대. 한순간 동생이 아기처럼 손가락을 빨았는데, 숨을 못 쉴 만큼 행복했대.“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머리속 수천 개 퓨즈들에 일제히 불꽃 튀는 전류가 흘렀다가 하나씩 끊기는 것 같은 과정을 나는 지켜봤어.“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이상 붉지도, 힘차게 뿜어지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 단념만이 멈춰줄 통증이 깜박이는……
그게 엄마가 다녀온 곳이란 걸 나는 알았어.“
”고통인지 황홀인지 모를 이상한 격정 속에서 그 차가운 바람을, 바람의 몸을 입은 사람들을 가르며 걸었어. 수천 개 투명한 바늘이 온몸에 꽂힌 것처럼, 그걸 타고 수혈처럼 생명이 흘러들어오는 걸 느끼면서.“
“블라우스와 헐렁한 바지가 날개처럼 부풀어오른 여자의 뒷모습이 내 눈앞에 떠오른 건 그때였다. 볼펜 촉을 힘껏 누르고 모든 획을 꺽어 쓰는 사람. 포기하자. 이감된 날짜를 기일로 하자. 섬으로 돌아오는 배에 혼자 올라 방금 들은 말을 곱씹는 사람. 마침내 수만 조각의 뼈들 앞에 다다른 사람. 머리를 숙이고, 굽은 허리를 더 구부리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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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인사이드와 베이직
영화를 안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거다. 그런데 각자 좋아하는 영화의 취향은 다 다른거지. 나 같은 경우에는 모든 종류의 공포물을 좋아한다. 스릴러, 써스펜스 부터 썰고 베는 고어 물까지. 하하. 그런데 특히 좋아하는 시놉시스는 반전이 있는 영화다. 미친 반전이니 반전의 반전의 반전이니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반전이니 하고 소개를 하면 뭐 항상 낚이는 식이다. 그래서 역대 훌륭했던 반전 영화들을 무지 좋아한다. 뭐 그런데 식스센스니 유주얼서스팩트니 디 어덜스 같은 누구나 다 아는 그런 반전 영화말고 인상 깊었던 영화를 꼽아보자면 두 영화가 생각이 난다. 아이 인사이드 그리고 베이직이다. 그래도 베이직은 간혹 찾아보면 소개해놓은 유튜버라도 있다. 물론 영화가 워낙 복잡해서 그 반전의 묘미를 잘 살려준 소개는 없는 듯 하지만. 그런데 아이 인사이드는 찾아봐도 소개 영상 하�� 없다. 베이직이 2003년, 아이 인사이드가 2004년 작품이다. 벌써 20년전 영화가 되었다. 이 영화들의 반전에 대해 굳이 내가 스포할 필요는 없겠고 그저 내 마음을 움직였던 작품들이라는 것 그래서 혹시 누군가 이 글을 본다면 원작을 찾아 한번 관람하기를 추천한다는 것. 그리고 나는 이글을 쓰며 이 영화들을 처음 봤을 때, 그래서 반전의 진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을 때의 카타르시스를 다시금 떠올려보며 행복할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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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상자
난 분재를 좋아한다. 수초 어항을 관리하고 물멍을 때리는 것도 좋아한다. 한 때는 오디오에 심취해 있기도 했다. 이런 취미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건 나만의 작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는 욕망이었다. 숲의 작은 세상 버전이 분재였고 개울이나 강의 작은 세상 버전이 수초 어항이 었다. 오디오는 콘서트장의 감동을 복제하고 싶어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작은 세상 버전이었다.
그런 욕망들 속에 언젠가 부터 꿈꿔오던게 바로 구름 상자였다. 이번엔 하늘의 작은 세상 버전을 꿈꾼 것이다. 수초 어항 정도의 크기에 하늘의 구름을 나만의 것으로 만들어 감상하고 싶은 것이다. 하노이에서는 하늘을 바라볼 일들이 많았는데 항상 구름이 서울보다 참 낮게 깔려 있는 느낌이었고 그 변화무쌍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그 아룸다움을 내 서재에서 멍때리며 감상할 순 없을까? 그리고 거기애 더해 석양에 물든 모습도 재현할 순 없을까. 분재나 수초 어항처럼, 오디오 기기를 통해 마치 좋아하는 가수가 내 앞에서 지금 라이브로 부르고 있는 것 같은 생동감을 느끼며 실감할 수는 없을까. 언젠가는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하늘을 담은 구름상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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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이야기 2부
예전 “시계 이야기” 속 그 시계 이야기를 다시 쓰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사실 잊고 싶었다는게 정답이겠지. 왜냐면 몇달전 그 녀석은 완전히 멈춰 버렸거든. 시간이 맞지 않아도 간혹 아침에 회사에 차고 나가 시간을 맞춰주면 하루는 커버가 가능했던 시계인데 몇달전 차려고 봤더니 초침이 아주 서버린 것이다. 항상 분침에 걸려 방해를 받아 나아가려 애썼던 초침이 배터리를 많이 쓰게 만들어 금방 사망하게 되었던지 아니면 애초에 배터리가 약했던지. 아무튼 그래서 몇달 전부터 그 시계는 아침 내 시계 선택 리스트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런데 다시 그 시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새로 산 시계에 서비스로 시계용 조그만 배터리가 추가로 배송되면서 부터였다. 아하. 이 배터리로 갈아 주면 녀석을 다시 살릴 수 있지 않을까? 뭔가 다시 재회하라는 운명적인 계시인가? 그래서 난 다시 녀석을 꺼내어 배터리를 갈 방법을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아무리봐도 녀석은 앞이던 뒤던 열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아주 조그만 나사라도 있어야 풀어볼 시도라도 할텐데 말이다. 뭐 이런 경우 2024년의 우리에겐 다 방법이 있다. 유튜브 검색. 역시 유튜브에는 없는 게 없었다. 시계의 뒷 뚜껑은 크게 세가지 종류로 나뉜단다. 하나는 쉽게 조그만 나사를 돌려 여는 방식, 또하나는 조그만 홈들이 있어 그 홈들을 공구로 물어서 돌려 여는 방식인데 이건 특별한 시계 공구가 필요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냅으로 여는 방식인데 이건 잘 살펴보면 어딘가 끼어들만한 조그만 틈이 보이고 이 사이에 작은 일자 드라이버 같은걸 끼워서 스냅으로 뻥 하고 여는 거란다. 아하. 녀석은 나사도 없고 홈도 없으니 스냅으로 여는게 분명했다. 그런데 뭐 잘 모르는 내가 살피니 그 조그만 틈이 어딘지 도통 알 수 가 없었다. 그래서 돋보기 안경을 끼고 거기에 아이폰 확대 기능을 이용해 시계 뒷면 태두리를 샅샅이 살피기 사작했다. 그렇게 촘촘히 살펴보자 결국 난 유튜버가 말했던 틈을 찾아낼 수 있었다. 찾고 나서 보니 사실 아주 잘 드러내고 있었는데 찾기전엔 봐도 잘 보이지 않던거였다. 그래서 기대감을 가지고 서울서 가져온 헤드 교체형 소형 드라이버의 헤드를 일자로 바꾸고 그 틈에 밀어 넣어 병뚜껑 따듯 스냅을 주었다. 뻥. 아하. 참 속시원한 소리와 함께 드디어 난 그 녀석의 내부를 바라보게 되었다. 하하하. 그 내부는 주요 기능을 담당하는 무브먼트가 플라스틱 고정틀로 감싸여져 있어 싸구려 티를 팍팍 내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사실 꽤나 그럴싸한 메커니즘이었다. 이 녀석은 버튼이 세개가 있었는데 가운데 시간을 맞추는 것말고는 직접 본체에 연결 되어 있지 않고 그 플라스틱의 탄력을 이용해 누르는 방식이었다. 오호. 암튼 난 여기까지 해낸 내가 무척이나 대견했으나 플라스틱 고정틀을 제거하고 확인하게된 배터리는 글쎄 이번에 서비스로 받은 배터리와는 완전 규격이 다른것이었다. ���장. 그래서 일단 난 이 녀석에게 맞는 배터리를 구해야했다. 이 녀석이 품고 있던 배터리는 LR920GH라는 코드였다. 일전에 K마트 건너편 로컬 상점에서 버튼형 배터리를 팔던 걸 본지라 우선 거기에 가보았다. 쳇. 그런데 뭐 시계에 들어가는 조그만 배터리는 없었다. 하긴 뭐 이게 잘나가는 상품은 아니겠지. 그래서 라자다에서 검색을 시작했는데 난항이 계속 되었다. 딱 LR920GH에 해당하는 제품이 없을 뿐만아니라 LR920까지만 해도 다른 이름들로도 불리고 있었던거다. 그래서 확신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난 이번엔 시계에 들어가는 배터리에 대해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공부한 끝에 시계에 들어가는 배터리는 시계의 역사 만큼이나 다양해서 표준이 없으며 그 두께와 표준전압 그리고 크기가 다른 것들이 수도 없이 많아 제대로 맞는 것을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에혀. 결국 어려운데 잘 골라야해 였다. 그래서 애초에 그 이름 LR920에 집중하였고 이 LR920이 SR920SW 그리고 AG6와도 호환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난 안심하고 라자다에 주문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배터리가 배송 되기를 기다리며 난 애초에 이 녀석의 문제점. 그러니까 10시 40분쯤에 초침이 돌다가 10초를 지나갈 때 초침의 머리 부분이 분침에 걸려 넘어가지 못하는 현상을 해결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럴려면 이녀석의 내부 무브먼트를 드러내 초침을 조정해야했다. 문제는 무브먼트와 유일하게 연결되어 있는 버튼 그러니까 시간과 날짜를 조정하는 버튼이 빠지질 않는 다는 거였다. 힘을 줘 빼내려 해도 안되고 이리저리 돌려봐도 안되고. 결국 다시 유튜브의 힘을 빌려야했고 시계마다 있는 이 버튼의 이름은 용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용두의 세계도 참 깊고 넓어서 뽑는 법이 참으로 다양했다. 더구나 뽑고나서 어떤 경우엔 다시 끼우기에 애를 먹기도 한단다. 에혀. 간단하게는 용두가 꽂힌 부분 근처에 조그만 나사가 있어 약간 풀어주면 용두가 뽑히는 방식이 있고 대부분은 뭔가 용두와의 결합 부분에 조그만 버튼이 있어 그걸 누르며 뽑으면 뽑힌다고 한다. 보통은 눌러야할 부분이 티가 나거나 아예 Push라고 안내를 해주는 경우도 있단다. 암튼 다양한 방법 중에 녀석의 무브먼트에는 뭐 용두 근처에 나사가 없으니 뭔가를 눌러 빼야하는데 도대체 티가 나는게 없었다. 당연히 Push로 안내해 주지도 않고 말이지. 여기서 다시 벽에 부딪혔다. 용두를 빼는 방법중에는 그냥 힘으로 빼는 경우도 있다던데 녀석이 그런건가 싶어 힘을 좀 줘봤는데 아무래도 그 방법은 아닌 것 같았다. 이러다 정말 시계를 고장낼 것만 같았다. 벽에 부딪혔을 때 경험상 좋은 극복 방안 중 하나는 잠시 잊고 있다가 다시 해보는 거였다. 나는 결국 용두를 빼는 시도를 멈췄다. 그리고 다른 일에 몰두했다.
다시 용두 빼기를 시도하게 된건 하나의 아이디어 때문이었다. 그래 Push라고 써주진 않았더라도 눌러야할 곳에 적어도 무슨 표식은 하지 않았을까 하는. 그래서 다시 돋보기 안경을 끼고 아이폰 확대 기능을 켜서 무브먼트와 ���두가 연결된 부분을 현미경 처럼 확대해 살피기 시작했다. 아하. 그렇지. 그래. 있었다. 이야 이렇게 표시를 하다니. 불친절 하게도 그냥 살짝 눌린 자국이 있었다. 육안으로는 식별도 안되는. 하지만 뭐 굳이 거기에 눌린 자국이 있을 이유가 없었기에 난 여기라고 확신 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헤드를 송곳 같은걸로 바꾼 드라이버를 이용해 찾아낸 부분을 누르며 살며시 용두를 빼보았다. 그러자 용두는 거짓말같이 정말 쉽게 쓰윽 빠져 주었다. 용두를 제거하자 이제 드디어 무브먼트를 시계 케이스로 부터 분리할 수 있었다. 유리 너머가 아닌 맨 얼굴의 녀석과 처음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항상 걸리던 초침의 머리 부분을 살짝 들어 주었다. 이제 배터리가 배송되어 교체하고 나면 10시 40분에 맞추어 초침이 걸림 없이 잘 돌아가는지 확인만 하면 되는 거다. 와우. 난 기어이 해내고 만 것이다. 하하.
내 기다림을 알고 있었던지 배터리 배송은 하루만에 되었다. 금요일에 시켰는데 토요일에 배송되다니. 여기도 일요일은 배송이 안되니 월요일이나 확인 할 수 있겠구나 했는데 정말 반가웠다. 그래서 토요 루틴을 끝내고 돌아와서는 바로 배터리를 교체해 보았다. 음. 그런데 이런 초침이 여전히 움직이질 않았다. 뭐지 뭐지 정말 LR920 만으론 안되고 정확히 LR920HG 여야 했던거야 하는 낭패감이 몰려왔다. 그러다 문득 시간을 맞추려고 용두를 조금 뺐을 때면 초침이 멈췄던게 기억이 났다. 아하. 다행히 녀석의 용두는 별 무리 없이 잘 다시 들어갔고 멈췄던 초침이 째깍째깍 다시 돌기 시작했다. 우와. 감격의 눈물이라도 나올것만 같았다. 그리고 테스트. 시간을 10시 40분에 맞추고 초침의 흐름을 숨죽여 지켜보았디. 결과는 대 성공. 초침은 막힘 없이 잘 돌아가 주었다. 이제 다시 조립만 하면 되는 거였다. 이로써 기나긴 녀석과의 신경전은 나의 승리로 끝나는 거다. 하. 이렇게 끝났어야하는데 뭐 녀석은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무브먼트를 케이스에 집어넣기 위해 다시 용두를 제거하고 무브먼트를 정확한 위치를 맞추어 집어 넣고 플라스틱 고정틀도 다시 제 위치를 잡아 넣어주고는 재차 용두를 꼿아주고선 마지막으로 스냅으로 열었던 뒷 뚜껑을 닫으려하는데 이게 잘 안되는 거다. 아무리 힘을 줘봐도 다시 원래대로 맞아 들어가주질 않았다. 마치 콜라병뚜껑을 땄다가 다시 손으로 막아주려할 때 정확히 맞물리지 않는 것처럼 금새 다시 빠지는 거였다. 에구야. 와. 근데 말이지 글쎄 이 문제도 유튜브에서 검색이 되는거다. 정말 유튜브의 힘에 놀랐다. 딱 제목이 시계 툴 없이 시계 뚜껑 닫기 였다. 이렇게 스냅으로 여는 방식의 시계 뚜껑은 보통의 힘으로는 닫기가 어려운 거였다. 결국 유튜브를 다시 완독하고 방법을 알아내 시도 하여 성공하였다. 다시 잘 맞물려 들어가며 “딱”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다시한번 큰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최종적으로 내가 해낸 것이다. 흑흑.
그리고 밤 12시가 넘어 자기전 시계를 확인했다. 다 수리하고 시간을 맞춘게 3시 좀 넘어서 였는데 시계는 정확히 현재 시간을 잘 가리키고 있었다. 이 당연한 일에 난 행복에 취했고 오늘밤은 정말 푹 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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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내게 프로야구 어느 팀을 좋아 하는지 물어볼 때가 있다. 그럼 나는 해태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아 그럼 기아군요”라고 다시 물어본다. 그럼 난 항상 “아뇨 해태라구요.” 라고 다시 대답하곤 했다.
이제 30년 가까운 직장 생활이 마무리 되어간다. 민주가 물었다. 오랜 세월 너와 함께한 직장인데 아쉬움이나 애정은 남아있지 않냐고. 나는 같은 대답을 했다. KB랑은 전혀, 현대라면 많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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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NU 베트남 국립대에서의 소회
아침부터 베트남 국립대 장학금 수여식에 참석하기위해 양복과 넥타이까지 메고 출근했다. 그렇게 찾아간 하노이 시내 베트남 국립대는 정말 교정이 있는 종합대학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베트남의 다른 대학들이 건물 한개로 이루어진걸 많이 봐와서 과연 베트남 국립대의 위상에 맞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지금은 대부분 멀리 화락에 있는 신 캠퍼스로 이전해 갔고 지금은 이런 행사를 진행하거나 향후엔 의대만 남긴단다. 이야 한국의 서울대랑 가는 길이 이렇게 비슷할 수가. 암튼 행사장에 도착하니 장학금을 받는 모든 학생들이 남자는 와이셔츠 여자는 흰색 아오자이를 입고 참석했다. 그리고 일반적인 축사 외에 모든 장학생에게 장학증서 수여와 기념 촬영 그리고 이어진 질의 응답시간까지 정말 간단한 행사가 아니었다. 오전 내내 게임도 진행하고 마지막 전체 촬영까지 한참이 걸렸다. 질의 응답 시간엔 비전공자로 데이터 분석 업무에 관심이 많은데 학위가 필요하냐는 질문이 있었고 그건 내가 대답할 문제 였다. 사실 새벽에 이런 질문을 할거라고 우리 직원이 알려왔다. 얼마전 오랜 준비끝에 KBSV는 데이터 분석을 위한 정보계 시스템을 완성했고 그동안 담당은 디지털팀이었으나 데이터분석팀을 만들어 업무를 확장하려 하고 있다. 그래서 딱 시의적절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KBSV에서 데이터 분석 업무를 하기 위해서는 학위는 필요없다. 실제로 KBSV의 데이터분석팀 첫 팀원은 회계학과 출신으로 지난 2년간 회사에서 학습을 통해 데이터 분석가로 성장하였다. 그런데 데이터분석가가 되기위한 기본적인 역량은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 역량은 경험이나 지식으로 검증이 되어야할 것이다. 그런데 VNU의 학생들 처럼 뛰어난 역량을 갖춘 학생들이 KBSV의 데이터 분석가에 지원한다면 큰 영광이겠다 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베트남 국립대 부 총장의 축사에서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다른 대학 졸업생들에게는 좋은 회사에 들어가 열심히 일하라고 조언한다. 그런데 우리 VNU 졸업생들에게는 열정을 가져라 그리고 그 열정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해라라고 조언한다.” 하하. 뭐 대단한 사람들은 맞다. 베트남도 교육열이 강하고 경쟁이 치열해 우리로 치면 서울대에 들어온 이 대학 학생들은 엄청 뛰어난 인재들이다. 그중에서도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학점이 좋은 학생들. VNU 내에서도 경쟁을 뚫고 올라온 학생들이니까. 사실 우리 서울대에서도 자기들끼리 모여선 저런식으로 이야기하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참 마음이 불편했다. 열정을 갖고 자신의 열정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할건 비단 공부를 제일 잘하는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젊은이들이 가야할 길이니까. 그게 맞는거니까. 우리 아이들도 그럴 수 있길 바라 마지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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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의 꽃
갑자기 꽃이 보이기 시작하면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22년에도 23년에도 본적이 없는 것 같은 보라색 꽃들이 24년이 되어서야 가로수들에 이쁘게 펴있는 걸 발견했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최전무님도 JB 전무님도 대표님까지도 처음 보는 것 같다시니 3년에 한번씩 피는 꽃인가 싶다가도 민주는 봤었다고 하니 아마도 그 전에는 꽃을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거나 아니면 정말 돌아갈 때가 되어 ���쉬운 마음에 하노이의 구석구석에 관심이 생겨 보이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쁘긴 무척이나 이쁘다. 나중에 생각이 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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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수학과 교수님의 졸업식 연설 중에서.
”이제 본격적으로 어른입니다. 나는 커서 어떻게 살까? 오래된 질문을 오늘부터의 매일이 대답해 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않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게 되길.“
좋은 글을 읽었다.
은퇴를 앞둔 시점에 내가 그동안 사회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결국 이렇게 오래기다리고 있던 30년 전의 내게는 정말 낯선 나와 마주하게 된다.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을 수 있는건 내가 끝까지 사회에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내년에 사회에 나가게될 영우에게도 전하고 싶은 명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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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10,000 만일의 기억
오늘은 결혼 만일. 만일이면 27년하고 145일이 지난거다. 보통 부부가 결혼해 살면 너무 안맞아서 이혼하지 않는 바에는 27년 이상은 살거다. 그런데 결혼 만일을 기념하는 사람은 주위에서 본적이 없다. 로맨스가 남아있기엔 너무 오래 함께 살아온거니까. 그런데 난 숫자에대한 엄청난 호기심이 있고 그 숫자들에대한 애정이 남달라 사실 8천일도 9천일도 기념 했었다.
그렇게 맞이한 결혼 만일 기념일. 아침에 일어나 비데를 달았다. 202호 메인룸 비데를 민주가 청소하다 출수구를 부러뜨려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했다. 이번에 와서 꼭 해주고픈 작업 1호였다. 이미 기초 배관 시공은 되어 있는상태라 작업은 생각만큼 간단했다. 그리고 연우가 몸 상태가 감기로 좀 안좋았지만 알랑이와 연우에게 인사를 남기고 우리는 결혼 만일 기념 여행을 출발했다. 민주가 서촌 한옥 스테이 이벤트에 당첨되어 오늘은 민주가 항상 해보고 싶어했던 한옥에서의 일박이었다. 민주가 이런거 참 잘되고 운이 아주 좋은데 더구나 댓글 신청에서 결혼 만일 기념을 적었으니 이번엔 운과함께 기세도 좋았었다. ^^ 결혼만일 딱 당일의 이벤트라는 건 참 거짓말 같은 동화같은 이야기지만 말이지.
우리는 종로 2가역까지 501번 버스를 타고 갔다. 그 곳부터 인사동 골목 탕방으로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했다. 인사동 골목은 그대로였으나 민주 말로는 알던 가게들이 많이 바뀌었단다. 코로나 엄혹한 시절을 견뎌내기 어려웠겠지. 그렇게 이곳 저곳 장생호 공예가 전시장도 들르고 가판에서 맛있는 밀 떡뽁이도 1인분 시켜 나눠 먹고 인사동 골목들을 돌아다녔다. 중간에 키넥틱 아트라는 조형물들을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너무 맘에들어서 바로 모스아트와 함께 내가 해보고 싶은 장래 희망에 적어 두었다. ^^
그리곤 북촌으로 출발. 가는길에 덕성여중, 여고를 지나며 옛날에 연우 보내려고 와봤던 추억 얘기하며 걷는데 어디선가 민주언니 하며 놀라며 부르는 소리가 들려 보니 옛날 부암동 살던 시절 서촌 옷가게에서 우연히 알게 되어 민주와 친해진 한옥을 두채나 가지고 있던 은진이었다. 사실 난 오늘 처음 얼굴 본건데 워낙 얘기를 많이 들어서 나역시 반가웠고 민주와 은진이는 이산가족 상봉한 것 처럼 엄청나게 반가워하고 길가다 만나게 된 걸 신기해했다. 항상 늦게 결혼해 늦은 아들 키우느라 고생이라는 얘기를 들었었는데 그 아들이 벌써 초등학교에 다닌단다. 우리는 아쉽진만 헤어저 본격적으로 북촌 탐방을 시작했다. 북촌도 예전에 부암동 평창동 살던 시절 많이 와봤던 곳인데 가게들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원래는 아트선재센터 카페를 갈 생각이었는데 문을 열지 않아서 런던 베이글 뮤지엄이라는 곳까지 걸어갔다. 베이글 전문점이라는데 아주 유명해서 대기를 엄청 해야한다는데 오늘은 평일이니 혹시 몰라 가보자고 했다. 그런데 뭐 근처에 접근만 했는데도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있었다. 가게 앞은 뭐 사람들로 장사진. 정통 베이글이랄 순 없고 빵과 떡의 중간 쯤이라는데 이걸 만든 사람은 젊은 여자애였다고. 지금은 뭐 거의 레전드 급으로 성장했다고. 연우가 무척 좋아해 오래 기다리더라도 사먹은 적이 있단다. 한번가면 10만원이 훌쩍 넘게 빵을 사온다니 뭔가 마약을 탔나 하는 의심까지 드네. 암튼 그래서 그곳은 엄두도 못내고 바로 앞에 있는 솔트 하우스에가서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이곳도 원래 대기가 많은 곳인데 우리가 운이 좋았다고. 솔트하우스는 한국에 온 독일사람이 제대로된 햄이 없다고 ��을 만들어 망원동에서 팔다 대박이났고 여긴 분점이라고. 우린 잠봉뵈르라는거 한개와 샌드위치를 시켜 맥주와 먹었눈데 안에 들어간 얇은 햄들이 아주 맛있었다. 그렇게 맛있는 햄도 먹어보고 나와 이번엔 최종 목적지 서촌으로 향했다. 가는길에 삼청동 떡뽁이에서 또 일인분 떡뽁이를 먹었는데 아까 노점은 일인분에 4000원이었는데 오히려 여기는 2500원이었고 나는 둘다 맛있었는데 민주는 여기 떡뽁이가 훨씬 맛도 잘베고 맛있단다. 그렇게 떡뽁이도 맛있게먹고 다시 서촌을 향해 출발했다. 가는 길목에 그런데 청와대가 있었고 아하 청와대 개방으로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고 있는게 보였다. 우리는 급 호기심에 자원봉사 할아버지께 안내를 받았는데 관람을 하려면 예약이 필요하단다. 그런데 수급에 따라 예약 없이도 들여 보내주기도 한다 하셨고 예약 없이도 오른편 언론 브리핑을 했던 춘추관은 돌아볼 수 있다 하셨다. 우리는 뭐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청와대를 볼 생각은 없었기에 춘추관만 탐방하고 나왔다. 춘추관만해도 와 TV에서 엄청 보던 곳이네 싶었다. 그렇게 익숙한 청와대 정문 분수대를 지나 서촌에 입성했고 아직 체크인까지 시간 여유가 있었기에 베어카페라는 곳에서 커피를 한잔 했다. 작은 정원이 있는 한옥에 만든 커페였는데 정갈하고 이뻤다. 그렇게 좀 쉬다 본격적으로 서촌을 돌아다니며 헤브레를 찾아깄는데 처음엔 조금 헤매서 유명한 삼계탕집을 찾아가 거기서 부터 다시 찾아갔다. 그리곤 헤브레 셀프 체크인. 민주가 미리 받아둔 비번을 입력해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민주가 꿈꿔 왔던 곳인 만큼 참 이쁘고 정갈한 곳이었다. 작은 한옥에 조그만 마당엔 풀과 작은 나무들 실내는 또 스칸디나비아 풍의 나무로 만들어진 인테리어였는데 깔끔하니 너무 이뻤다. 처음 들어갔을 때는 전등이며 스위치 류 들이며 벽지에 주방, 주방용품 들까지 민주가 엄청 좋아라할만한 것들로 가득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참 좋았다. 거기에 침대 위엔 이번 이벤트를 주최한 꼬뜨네의 선물까지 놓여있었다. 특히 푹신한 벼게 두개 중 하나는 너무 편해서 나중에 하노이로 가져오기까지 했다. 정신없이 집구경을 하다가 저녁을 먹기 위해 나왔다. 천천히 경복궁역 세종음식문화거리 산책을 하며 옛 추억을 얘기하기도 하고 변해버린 가게들 얘기도 했다. 그러다 길 건너편 크레프트 브루스 보리마루로 맥주를 사러갔는데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손님이 없어 벨기에산 생맥주를 한잔 하며 사장님과 많은 얘기를 나눴다. 젊은 여사장님은 맥주에 진심인 것 같았는데 참 공부도 많이 했구나 싶어 영우랑 이야기가 잘 통하겠구나 싶었다. 긴긴 대화는 물론 민주니까 가능한 건데 가끔 민주는 말이 없다가도 잘 통할 것 같은 사람을 만나면 무지 말이 많아지는데 딱 그 사장님을 만��을 때 그랬다. 그래서 우리 결혼 만일 축하 여행 이야기도 하게 되었는데 사장님께서 원래 그 맥주 5병사야 서비스로 주는 벨기에 맥주 전용잔을 선물로 주셨다. 와. 참 민주는 복이 많다. 그리고 우리가 참 바를 가려 한다니까 거기는 사람이 너무 많아 힘들고 3호점이 바로 옆에 열렸는데 참 제철이라고 사계절 제철에 맞�� 우리 음식들로 칵테일을 만드는 곳이라고 그곳을 추천해 주시고 거기에 예약까지 해주셨다. 우와. 우리는 우선은 저녁을 먹어야 했기에 보리마루를 나와 효자동초밥에가서 초밥을 먹고 참 제철로 찾아갔다. 입구부터 범상치 않더니 바에 앉아 먹는 내내 참 유쾌하고 즐거웠고 무었보다 칵테일이 맛있었다. 나는 내가간다 하와이라는 부제의 마이타이를 먹었고 민주는 모스코우 뮬을 먹었는데 민주 칵테일은 고춧잎이 들어있고 정말 고춧잎 향이 나는데 신기하게도 참 맛있었단다. 내건 내 입맛에 딱으로 정말 맛있었다. 거기서도 젊은 바텐더들이 우리의 결혼 만일을 아주 신기하게 생각했고 나는 결혼 만일은 27년 145일 이라고 얘기해 주었더니 서비스로 칵테일을 자기 것 까지 세잔 만들어 셋이 건배하고 마셨는데 그것도 참 아주 맛있어서 그 칵테일로 10잔도 마실 수 있겠다 할 정도였다. 우리는 좀 아쉬웠지만 원래의 우리 여행의 목적이 한옥에서의 오붓한 하룻밤이었기에 그렇게만 마시고 나와 사두었던 맥주를 가지러 다시 크레프트 브루스 보리마루로 갔다. 이번엔 사장님 말고 여자 종업원도 있었는데 그 분이 우리 영우를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를 위해 맥주를 사가는 아들로. 우리는 좀 아쉬어 생맥주를 한잔 시켜 나눠 마시고 사가는 맥주 안주를 위해 자꾸만 손이 간다는 팝콘을 하나 시켰다.
그리고는 다시 보리마루에서 추천 받아 산 맥주 여러병과 여러캔을 들고 헤브레로. 가는길에 불닭 볶음면과 미니 사이즈 앙증맞은 투게더도 하나 샀다. 우리는 헤브레로 다시 돌아와 음악을 들으며 맥주와 불닭 볶음면 그리고 투게더를 나눠 먹으며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나보다는 민주가 맥주를 마시는 속도가 더 빨랐다. 민주가 행복해해서 나도 기분이 참 좋았다. 그렇게 약간은 취해서 맥주 한캔은 먹지 못하고 남긴채로 우리는 푹신한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그렇게 결혼 만일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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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0일도, 9,000일도 민주는 시큰둥 했지만 만일 만큼은 같이 기뻐해 참 행복했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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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서원 캠프의 기억
중학교 시절 심한 사춘기 방황으로 방학 때마다 엄니는 나를 인성, 심리 캠프에 보내셨다. 자식이 엇나가지 않길 바라시는 엄니의 간절한 마음이셨지만 난 캠프에가서도 사실 잘 어울리질 못하고 책만 읽었다. 한번은 다들 뭐 토론 수업을 하고 있는데 사실 나는 당시 내 또래 애들을 같잖게 생각하고 있어서 우리조 애들이 계속 부르는데도 옆에서 책만 읽고 있었다. 당시 읽었던 책이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였다. 그런데 다들 아시다시피 주인공 제제의 유일한 친구였던 뽀르뚜가 아저씨가 죽는 장면이 나온다. 난 그 부분에서 너무 몰입해 그만 옆에서 토론하고 있던 애들을 완전히 잊고 대성통곡을 하고야 말았다. 울음이, 눈물이 멈추질 않았고 갑자기 놀라 무슨 일이냐고 걱정되 물어보는 친구들의 말에 마치 제제처럼 더 대성통곡 했던 기억이다. 하하. 지금 생각해도 참 뻘쭘하다. 난 그일로 별도 심리상담도 받아야했다. 그런 많은 캠프 생활 중에 아직까지도 기억에 많이 남는 그리고 어린인생에서 세상의 큰 경험을 하게 해준 캠프가 안동의 서원 캠프였다. 아직도 당시에 배운 시조가락과 가사가 생각이 난다. “진국명산 만장봉이요, 숙기종영 출인걸이라” 하는. 그런데 당시 배웠던 예법이며 고전 강독이며 시조 그런거 말고 내 인생의 큰 경험은 너무 더워 강가로 물놀이를 함께 갔을 때 하게 되었다. 안동 캠프에는 전국에서 모인 내 또래의 아이들이 있었고 그 중에는 바닷가에서 온 형제가 있었다. 다들 강에 들어가 물놀이를 하고 있는데 그 둘은 물에 들어가지 않는 거였다. 난 그들처럼 거기서도 아웃사이더였던지라 같은 처지의 그들과 종종 말을 섞었고 그때도 내가 궁금해 물었었다. 너희는 바닷가 마을에서 왔다면서 수영을 못하니? 왜 물에 들어가지 않니? 그리고 그들의 대답이 내 어린 인생에 큰 깨닮음을 주었다. “이렇게 얕은 물에서 어떻게 수영을 하니?” 그래 세상은 무지 넓고 내가 살고 있던 세상은 아주 아주 좁은 곳이었구나. 그래 넓은 세상속으로 알을 깨고 나아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린시절 안동의 경험이 너른 세상을 향할 수있도록 내 관점을 변화시켜 주었다면 군대 가기전 역시 어머님의 바램으로 마지 못해 가게된 송광사의 수련회는 또 다른 의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어머님은 동네에서 보살님 칭호를 들으실 정도로 불교에 진심이셨다. 그래서 나도 모태 불교인거고. 그래도 뭐 가끔 어머님과 함께 절에가서 절을 하는게 다였던 나는 사실 종교에는 관심이 없었다. 불교의 교리는 크게 불법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 불보사찰, 법보사찰, 승보사찰이라고 각 법리를 대표하는 사찰이 있다. 경남 양산의 통도사는 불보사찰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 경남 합천의 해인사는 법보사찰로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팔만대장경을 모시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전남 순천의 송광사는 승보 사찰로 예로부터 승려가 정진 학습을 하는 곳이다. 바로 이 승보사찰에서 열리는 수련회인 것이다. 이게 탬플스테이같은 만만한 행사가 아니다. 일주일간이긴 하지만 정진하는 스님들과 똑같이 생활한다. 모든 통신 도구는 입소하며 다 걷어가고 스님들이 일어나시는 새벽 3시 반에 기상해 9시면 잠에 든다. 세끼 고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발우공양으로 식사를 마치고 내가 마시던 물로 발우를 씻어 그 씻은 물까지 마셔야했다. 그리고 한여름 찜통 더위속 졸음과의 전쟁이었던 참선 수행. 자세를 잡고 가부좌로 마음을 가다듬다가도 깜빡 깜빡 넘어가는데 남들이 맞는 죽비 소리에 놀라 깨곤 했다. 그러다 잠시 정신을 놓고야 말면 어김없이 등어리에 죽비가 꼿혔고 아픔보다는 그 짝 소리에 놀라 깨었다. 그런데 이 모든 걸 떠나 가장 힘들었던 건 묵언 수행 이었다. 일주일간 말이 금지 되었다. 어디서 오셨어요? 이 말 한마디를 못했다. 그런데 딱 한순간 말이 허용이 되는 때가 있었다. 그건 불가교리 교육 중 질문을 받을 때였다. 뭐 질문을 수화로 또는 지필로 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법리 교육 시간이면 정말 많은 질문들이 쏟아졌다. 내가 보기엔 질문을 하고 싶었다기 보다 그저 말을 하고 싶었던 거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인 교육 중 그렇게나 많은 질문이 나오는걸 그전엔 본적이 없었다. 하하. 아무튼 그렇게 고행의 일주일이 지나고 마지막날, 우리는 마지막 참선을 마치고 1080배 정진을 남겨 두었다. 이 정진을 마치게 되면 수계를 받게 된다. 불가의 이름 법명을 받게 되는거지. 난 1080을 어떻게 세고 있나 싶었는데 1080개의 구슬이 달린 긴 염주가 있었다. 앞에서 같이 정진하시는 대스님이 이 1080개 구슬 염주를 하나씩 넘겨가시며 세시는 거였다. 실수로 몇개 건너 뛰고 그러는건 기대할수가 없었다. 얄짤 없었다. 그렇게 죽비의 짝 소리와함께 1080배 정진이 시작 되었다. 뭐 초반에는 젊은 나에게는 무리가 없었다. 별거 아니네 생각도 들었다. 일주일간 매일 108배로 단련도 되었던터다. 짝짝 다음을 제촉하는 죽비소리에 맞춰 리드미컬하게 오체투지 공양을 올렸다. 아아. 아아. 아아. 아아. 아아. 아아. 아아. 아악.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이제는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상태가 되었다. 쓰러지고 주저 않아 흐느끼는 사람들이 생겼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일어서는게 기적처럼 느껴지고 오체를 던질때면 쓰러지는 장작더미 같았다. 얼마나 남았는지 모른다는게 더 힘들게 했다. 이럴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셀걸 그랬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악몽같은 시간들이 흘렀다. 정말이지 뛰쳐나가고 싶었던 고통의 순간들. 옆자리 아저씨가 쓰러져 포기하셨다. 그래 되었다 이정도도 대단한거다. 나도 그냥 주저앉으면 된다. 하지만 그 순간 땀과 눈물로 범벅이된 내 눈앞에 엄니가 떠올랐다. 우리 세 자식들 입시기도를 위해 100일간 매일 이른 새벽에 관악산 정상 연주대에 오르시고 매일같이 1080배를 하셨다던 우리 엄니. 불가에서의 몸은 속박의 현실이면서 또한 해탈의 도구이다. 그 순간 내 몸은 이미 나의 것이 아니었다. 오체투지로 몸을 조아리며 바라보는 부처님이 그렇게나 위대했다. 난 진심으로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있는 나를 느꼈다. 마침내 마지막 죽비소리와 함께 1080배가 끝났다. 더 이상의 죽비소리가 울리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어떤 지난 순간보다도 더 평온한 마음으로 깃털처럼 가볍게 가부좌를 틀고 천천히 앉을 수 있었다. 나중에 확인하니 1080배는 근 3시간 가까이 진행 되었었다. 그렇게까지 지난 줄은 생각치 못했다. 이 일주일 동안 내가 경험한건 철저하게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중학교 시절의 경험이 넓은 세상을 바라보게 해주었다면 이번엔 철저하게 나를 바라보는 시간이었다. 누군가의 아들이 아닌, 공부잘하는 모범생으로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이 아닌, 진정 나만 알 수 있는 내 본 모습을 바라보는 시간. 아마도 내 인생을 바꾼 소중한 경험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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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이야기
생일 파티에 초대되어 IT 부서장 쭝의 집에 찾아가는 길. 하노이의 외각이라 차로 집에서 한시간 반이 걸리는 먼 곳이다. 한참을 가는데 화물열차가 지나가는 걸 보고 기찻길을 따라 쭉 내려가고 있다는걸 알았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기찻길이 단선이다. 응옥씨에게 물어보니 어딘가엔 복선으로 교차하는 곳이 있을거란다. 뭔가 아주 위험하단 생각이 드는데 한시간여 차안에서 바라보니 아까 봤던 화물열차 지나가곤 더 지나가는 기차가 없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니면 오전엔 상행선만 오후엔 하행선만 있던지.
그러다 문득 기차에대한 여러가지 기억들이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최초의 기억은 서울역이나 영등포역 명절 귀성길의 모습이다. 난 국민학교도 가지않은 어린 시절. 서울에 사는 친척들과 함께 기차를 타러 가면 여럿이 우루루 들어가며 나같은 어린애 표는 사지 않았더란다. 그래서 어른 몇명당 어린이 한명이 무료인지는 모르겠는데 쭉 들어가다 항상 내가 걸렸다. 표를 확인하는 차장이 내 목덜미를 잡고는 들여보내질 않아서 아버지가 알아채시고 뒤돌아와 즉석에서 돈을 지불하고야 난 통과할 수 있었다. 난 그렇게 걸리는게 너무 싫어서 항상 조마조마 했고 그래서 아직까지 목덜미가 낚아지는 그 순간들이 기억이 난다. 두번째 기억은 중학교 시절이었다. 그 시절 난 극심한 사춘기 방황을 했기에 어머님은 많은 걱정을 하셨고 방학이면 각종 청소년 심리 캠프같은 데에 보내곤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1980년대 초반이었던 그 시절 그 많은 캠프들을 어떻게 찾으셨나 싶기도 하고 어머님의 고민이 얼마나 깊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고민의 해결 방법이 극단적인 대결이 아닌 치유의 형태로 진행된 것에 어머님의 지혜를 느낀다. 그렇게 어느 여름 강원도로 떠나 지냈던 캠프를 마치고 돌아오는 완행 기차에서의 일이다. 우리들은 캠프에서 미리 예약을 해두었기에 모두 좌석이 있어 앉아서 서울로 오는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입석으로 서있었다. 그런데 그중에 할머니 한분이 딱 내 자리 옆에 내 팔걸이에 엉덩이를 의지하시고 서계셨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나는 그런 상황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얼마지않아 할머님께 내 자리를 양보하고 서서 가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담당 선생님이 와서는 왜 그랬냐고 나무라셨다. 우리가 제 돈주고 먼저 사서 차지한 자리인데 말이지. 그렇지만 사춘기의 나는 오히려 더 오기가 생겨서 내 결정을 고수 했다. 그렇게 한참을 서서 오는 중에 사고가 터졌다. 철로 옆에서 누군가가 던진 돌이 기차 유리창문을 깨고 들어와 덮친 것이다. 돌은 다행히 사람에 맞진 않았지만 깨진 유리 파편이 내자리에 앉아계시던 할머니를 덮쳤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사고가 나던 그 순간이 생생하다. 다행히 할머님도 크게 다치시지는 않았지만 당시 모든 것에 부정적이던 나는 내 불행을 할머니께 넘긴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었다. 기차에서의 사고는 내 인생에서 한번 더 있었다. 중학생보다는 좀더 나이가 들어서인 것 같은데 그때도 단체로 시골에 제사를 지내러 갔다가 또 단체로 기차를 타고 올라오는 길이었다. 아마도 좌석이 충분치 않았는지 젊은 나는 입석이었고 맨 앞자리 좌석을 역방향으로 만들고 그 뒤에 서서 올라오고 있었다. 내 옆에 누군가 같이 서서 올라왔는데 누군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한참을 떠들고 있는데 몸이 내 뜻과는 상관없이 날아 뒷벽에 부닥쳤다가 다시 의자로 꼬꾸라 졌다. 기차가 경운기를 받은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행히 기차는 탈선하지 않았고 경운기를 몰던 사람은 놀라서 피해 살았단다. 앞칸의 승객들 중에는 크게 다친 사람도 있어 앰블란스에 실려갔단다. 뭐 젊은 나는 큰 충격을 받긴 했지만 멀쩡했다. 문제는 그 다음인데 이 사고 수습을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지체해서 도착이 늦어져 철도청은 모든 승객에게 운임을 물어줘야할 판이었다. 당시에는 KTX가 없었던 시대라 새마을호가 제일 빠르고 다음은 우리가 탄 무궁화열차였다. 참고로 더 늦은 통일호와 더 더 늦은 비둘기호도 있었다. 야. 참 기억이 새롭네. 암튼 난 그 때 무궁화호도 속력을 이렇게 낼 수 있구나 하는걸 알게 되었다. 환불을 안해주기 위한 시간에 맞추기 위해 정말 우리의 무궁화호는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앞에가던 새마을호도 우리가 지나가게 비켜서 주었다. 우와. 어린 나는 마냥 신났던 기억이다. 결국 우리는 환불 받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기차에 대한 기억은 1990년. 내가 대학교 2학년일때의 일이다. 1990년은 광주항쟁 10주년이되는 해였다. 그래서 전국의 전대협소속 학생들이 광주에 모여 큰 집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당시의 전대협 의장도 광주 전남대의 총학생회장 송갑석이었다. 정부는 이 집결을 불법 집회로 낙인찍고 일찌감치 광주로 들어오는 모든 교통수단을 통제하고 광주를 봉쇄했다. 그래서 서울서 기차를 타고 출발한 우리들은 광주역에서 내린다면 그대로 모두 닭장차에 잡혀길 판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대학생들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광주역 직전 송정리역을 출발한 기차를 광주역 가기전 중간쯤 어디선가 비상 제동을 걸어 세웠다. 기차의 안전 장치가 우리의 집결에 도움을 준것이다. 그리고 그 때 정말 꿈만 같은 장관이 펼쳐졌다. 언제 그렇게 많은 대학생들이 탔는지 기차가 급정거로 멈추자 정말 개미때 같이 학생들이 기차에서 내려 논밭을 달리기 시작했다. 당시 난 감격에겨워 목이 메일 지경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광주로, 해방 광주로 입성했다. 그 후 조선대의 녹두대와 전남대의 오월대의 활약은 참 가슴 웅장하게 해주는 또 하나의 역사이지만 기차이야긴 아니니까 다음에. 하하. 마지막 기차에 대한 추억은 그러고도 2년이 지난 1992년의 일이다. 군대에 입대해 논산 훈련소에서 몇주간의 고된 훈련을 통해 참 군인이 된 나는 훈련소 수료식을 마치고 드디어 자대배치를 받고 이제 남은 30여개월의 군생활을 하게될 부대로 이동하게 되었다. 당시 논산 훈련소에서 퇴소하는 훈련병들의 수가 꽤나 많났고 만간인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우리는 자정이 넘은 한방중에 깨어 걷고 뛰어서 논산역으로 이동했다. 이제 막 훈련을 마치고 이병이된 군인들이라 군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렇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길을 앞 사람의 발걸음을 쫓아 찾아간 논산역. 자대가 어디인지 통보받은게 없는 우리의 운명은 이제 거기서 어느 방향 기차에 타게 되는냐에 따라 갈리게 되었다. 우리가 타는 승강장에는 표지판이 없었고 더구나 우리는 한참을 걷고 뛰며 방향감각을 잃었다. 그래서 어슴프레한 초승달을 기준으로 남쪽으로 내려가느냐 아니면 북쪽으로 올라가 전방 쪽으로 향하느냐를 판단해야 했다. 그렇게 양 방향으로 나뉘어 탑승을 하고 드디어 기차가 출발했다. 군에서 배운 시간과 달의 위치를 기준으로 한 방위잡기를 이용해 판단해본 결과 아~ 우리는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언제 내가 내리느냐다. 끝까지 내리지 않는다면 최전방이 확실했다. 아무도 없는 불빛조차 야박한 작은 기차역에 기차가 설 때마다 누군가가 불려 내리게 되었고 불리지 않고 남은 우리들은 탄식과함께 불안한 마음을 진정 시켜야만 했다. 그 시절 그 기차칸에서 느꼈야 했던 팽팽한 긴장감. 그래. 이게 내 마지막 기차에대한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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