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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ohot90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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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관리’다
管理(관리) - 주관할 관, 다스릴 리
체중관리, 시간관리, 대인관리, 돈 관리, 건강관리, 집 관리, 영성관리, 이 모든 분야를 주관하여 잘 다스리는 게 삶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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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ohot90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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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심심함
자가격리 7일 째다. 나는 부모님 집에서 격리 중이고 부모님은 집 앞에 있는 모텔에서 격리 중이시다. “은아, 심심하지? 뭐 사다 줄까?” 마치 엄마는 내 행복에 책임감을 느끼는 것처럼 계속해서 심심한지 물어보았다. 취조하듯 물어보는 엄마가 신경쓰였다. 나도 엄마의 심심함이 내심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한시도 쉬지 않고 집 안 일을 하시는 엄마의 행동이 어떡해서든 무료한 일상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처럼 느껴져서 더욱 안쓰러웠다. 하루종일 카페에서 수다를 떨거나, 집 안 일을 내팽개 치고 일주일 동안 여행을 떠나는 철없는 엄마가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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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ohot90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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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 발견은 삶의 주체성을 여는 열쇠
캥거루 족이라는 말이 있다. 그 뜻은 성인이 되어 어느 정도 나이가 차 경제적으로 독립해 나갈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캥거루처럼 부모나 사회생활을 하는 형제자매의 경제능력에만 의지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미국이나 프랑스 등 많은 나라에서 이 용어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이 문제는 한국 문제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세계는 점차적으로 어른 아이가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의 심각성은 무엇이고,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어른아이들은 결국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는 데 심각성이 있다. 그들은 한 번도 자신의 삶을 자신으로 살지 못한다. 즉 내 삶인데도 주역으로 살지 못하고, 조연으로 산다는 것이다. 이것은 참 슬픈 이야기다.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의 의해서 조정하는 삶을 어느 누구도 원하지는 않을테니까 말이다. 
캥거루 족들에게도 모든 분야가 주체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무의식적으로 학습된 생활습관으로, 자신의 삶을 수동적이고, 누군가를 의존하는 삶을 살지만 삶 전 분야가 수동적인 것은 아니다. 나도 캥거루 족들 중 하나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미국으로 8년 전에 유학을 와서 서른이 되어서 까지도 부모님의 경제적인 도움을 받고 있으니까.
내가 적극성일 뛸 때가 언제인지를 생각해보면 내가 좋아하고, 자신감 있는 일을 할 때다. 나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제법 사진도 잘 찍는다고 생각한다. 주변에서도 내 사진 실력을 인정해주곤 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카메라를 들고 모든 것들을 찍는다. 나를 멈추게 하는 모든 것들을 사진을 찍어서 그것을 편집하고 sns에 공유하는 모든 과정이 기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과정에서 누구의 개입도 없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이걸 한다고 해서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순수한 끌림이 적극적인 삶을 살게 한 것이다.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찾는 것이 내 삶의 주체성을 찾는 것에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내 행동을 통해서 남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어떤 과정 자체를 좋아하는 것을 내가 발견해야 한다. 내가 사진을 찍고, 편집해서 sns에 공유하는 과정처럼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면, 그것을 반복하는 것이 놀이가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실력이 오르면서 경쟁력이 생긴다. 거기에 차별성을 더한다면 결국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수입으로까지도 이어질 수 있다.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고 우직하게 끌고 가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내 자신도 나한테 의심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인지 냉정하게 돌아보면서 찾을 필요가 있다. 만약 그것을 찾았다면, 나를 믿고 끝까지 나아가면 된다. 그때부터 나는 껍데기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 자체를 살아가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코스프레하는 삶을 살겠는가? 아니면 내 존재 자체를 살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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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ohot90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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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필일오
인터넷 블로그 글을 하나 보았다. 글 제목은 ‘필일오(必日五)’였다. 소설가 김훈의 작업실 벽에는 ‘필일오’라고 씌어 있다고 한다. 하루에 200자 원고지 다섯 장은 꼭 쓰자는 의미이다. 나의 필일오가 뭔지 생각해보았다. 매일 성경을 6장 읽는 것이다. 하지만 김훈과 나는 건널 수 없는 차이가 있다. 바로 지속력이다. 그는 매일 쓰고 나는 고작 삼일을 못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심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반복적으로 하려는 결심은 변화의 시동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게으름 때문에 멈췄던 나의 필일오를 오늘 다시 작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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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ohot90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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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땀
노아는 하나님을 믿은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장차 일어날 일을 경고해 주셨을 때 홍수의 조짐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믿었다. 그리고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방주를 만들어 자기 가족을 구해냈다. 하나님을 믿는 노아의 신앙은 그 당시 거역만을 일삼던 사람들의 죄나 불신앙과 비교할 때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이 믿음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시는 사람이 되었다.
살갗을 찌르는 듯한 뜨거운 태양도 모세를 게으르게 하지 못했다. 옆에서 비웃는 사람들의 비아냥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날마다 방주를 지었다. 그의 발등에 톡톡 떨어지는 땀은 믿음의 땀이요, 구원의 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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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ohot90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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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즐겁다.
여행은 낯설기 때문이다.
미래는 불안하다.
미래는 낯설기 때문이다.
낯섦에는 즐거움과 불안함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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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ohot90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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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할 때 자유해진다.
내가 갖고 있는 커다란 마음의 짐은 솔직해질 때 홀가분 해진다.
그래서 사람은 누군가에 자신의 속얘기를 말하고 싶어한다.
비밀은 족쇄다.
이것만은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이든지 글로 써보자.
해방되어야 할 나의 족쇄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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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ohot90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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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필요한 믿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정체성을 우기는 거다.
3월 17일 주일 청년부 설교 내용을 통해서 느꼈던 점에 대해서 정리했다. 설교 본문은 마가복음 3장 13절부터 19절까지 였고 설교제목은 “열 두 제자를 부르시다”라는 설교제목으로 청년부 담당 목사님께서 설교하셨다. 이번 설교는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시는 독특성 세 가지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그 독특성 중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의 프로필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으로 선택으로 부르셨다’ 라는 명제를 통해서 내게 필요한 믿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보아야 한다는 것임을 느꼈다.
요즘 한국에서 뜨는 키워드 중에 한 가지는 ‘자존감’일 것이다. 정신과 의사이면서 작가인 윤횽균 씨는 2016년 ‘자존감 수업’이라는 책으로 베스트셀러라는 반열에 올랐다. 한국에서만 80만부 이상이나 팔렸다. 그 대단한 기록은 대한민국 현대인이 지금 지니고 있는 마음의 병이 무엇인지 반증한다고 본다.
자존감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 정도 다. 자존감은 객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주관적인 판단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보다 낮은 자존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평가가 객관적이기 보다 주관적인 판단에서 비롯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미운 오리 새끼가 자신이 백조라는 사실을 모르고, 지속적으로 자기 자신이 오리 라고 본다면, 그의 인생은 백조처럼 살 수 없고 마지막 순간까지 오리처럼 사는 불행한 인생을 살기 때문이다. 단지 오리 라서 불쌍한 인생이라는 말은 아니다. 핵심은 자기 자신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불행한 인생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 각자가 갖고 있는 독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가 스스로 낮게 평가되는 것은 사회적인 영향이 크다. 한국에서 태어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사회에서 경쟁을 직간접적으로 배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는 누나보다 엄마에게 더 큰 사랑을 받기 위해서 경쟁했고, 학창시절에는 더 좋은 학교를 가기 위해서 친구들과 경쟁했다. 지금은 세상에서 선망 직업을 갖기 위해서 불특정 다수와 경쟁 중이다. 경쟁에서는 반드시 승리가 있다. 승리자는 전쟁과도 같은 ��� 튀기는 경쟁 싸움에서 이기고 정상의 자리에 서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 반면에 1등을 한 한 명의 승리자 외의 사람들은 일순간에 패배감을 맛본다. 따라서 경쟁의 기본전제는 차등이다. 물론 선한 경쟁도 있다. 자신의 꿈을 위해서 선의의 경쟁을 통해서 추진력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경쟁의 모습은 선의의 경쟁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선을 넘었다고 생각한다.
소수의 승리자, 다수의 패배자라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인간의 자존감이 높아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인간은 자신이 실패하면서 행복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도전 앞에서 늘 위축되고 수동적이게 되는 이유도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아픔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런 패배 경험이 자주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자기 존재에 대해서 패배의식을 느끼고 자존감이 떨어진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정체를 끊임없이 확인 받고 싶어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낮아진 자존감이라는 공허한 공간을 다른 것들로 채우려 하는 욕구가 동반된다. 그 욕구는 대게 많은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들이다. 좋은 차, 좋은 집, 좋은 직장, 좋은 옷, 그리고 좋은 배우자 등이 자신의 공허한 마음을 대체하게 된다. 안타까운 사실은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고 크리스천들조차 이 욕망에서 자유하기 힘들다.
나는 내 정체성을 다른 사람들의 욕망으로 확인 받으려고 노력했다. 내가 가진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냈던 이유는 그 사람들이 나를 똑똑한 사람으로, 영특한 사람으로 봐주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내가 가려하는 대학교는 정말 내가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학교를 들어가야 사람들이 인정해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그룹 리더로서 나는 믿음있는 거룩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어떤 때는 마음에도 없지만 거룩한 척을 했었다.
이것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던 이유는 공허함 때문이었다. 늘 마음이 공허했다. 뭔가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 캄캄한 집에 혼자 들어오고 나면 공허한 느낌이 들었고, 무기력해졌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곳에서 나는 매우 무기력한 사람이 되었다. 이런 느낌을 받을 때 자동적으로 예전에 은혜 받았던, 눈물을 흘렸던 찬양들을 찾아 들었다. 마치 머리 아프면 타이레놀을 찾듯이 말이다. 그 찬양을 들으면 내 정체성이 다시 확인되는 안정감이 들었던 것 같다. 나는 눈물을 흘려야만 그때 크리스천이 되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신나는 가요를 들으면서 미친듯 춤을 추거나 책을 읽었다. 공허한 기분에서 빨리 빠져나오고 싶어서 다른 것들에 몰입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그분의 자녀로 말씀해주셨는데, 나는 그것에 대해 머리로는 알지만 믿지 않았다. 눈에 보이거나 느껴지지 않는 믿음이라는 그 심심함? 어떤 자극도 없는 무미건조하고 밍숭밍숭한 그 상태가 견디기 어려웠다. 음식으로 예를 들자면, 믿음이란 평양냉면이라 비유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함흥냉면을 좋아한다. 혀를 자극할 수 있는 그 맛을 원한다. 평양냉면처럼 내게 어떤 자극도 없는 평양냉면은 너무 심심해서 만족감이 없다. 나의 믿음은 뭔가 자극적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감동이 있어야 하고, 눈물이 있어야 하고, 내 마음을 뜨겁게 대필 수 있어야만 했다. 그런 자극이 없는 믿음은 내게 믿음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다고 느껴질 때, 나름 성령충만함을 느낄 때는 늘 이런 감정이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기분들이 사라질 때 내 신앙은 곤두박질쳤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것 같지 않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 같고,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망각했다. 영적 무기력함과 회의감이 지속된 결과 죄된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무한 경쟁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믿음이 오늘날 필요한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그 믿음이란, 나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믿음이 아니다. 잠시 잠깐 나의 마음을 대폈다가 다시 미적지근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지 않아도, 다수가 걸어가는 길이 아니라고 말해도, 끝까지 인내하고 나는 그렇다고 계속해서 우기는 믿음이라 생각한다. 다른 사람 눈에는 무식한 예수쟁이, 예수꼴통 같아 보여도 끝까지 고집하여 내 정체성을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하고 확인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확인 받도록 고집하는 것이 내게 필요한 믿음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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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ohot90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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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9일 오늘 예배를 통해서 느낀 점
1. 마가복음 3장 13-19절로 “12제자를 부르시다"라는 설교제목으로 강선웅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다.
2.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실 때 세 가지 독특성에 대한 내용이었다.
3. 첫째, 제자들의 프로필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으로 부르셨다.
4. 예수님은 우리를 부를 실 때 세상적인 기준으로 나를 부르시지 않으셨다. 사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나를 보면 실패자에 가깝다. 만일 대기업에 면접으로 보러갔다고 가정한다면, 나는 백번 떨어질 것이다. 그 만큼 별 볼 것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5. 그러나 주님은 나를 보실 때 외모를 보시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신다.
6. 그 중심은 무엇일까? 내가 가진 중심은 무엇인가? 나는 나로 살지만 내 중심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왜? 내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자아상이 있기 때문이다.
7. 하나님께서 보시는 중심은 내 생각엔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시는 내 진정한 정체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8.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남에게 확인 받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확인 받고, 확인 된 그 사실을 어떤 상황에서도 믿고 따르는 것이라 생각한다.
9. 진정한 정체성,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머리로는 사실 동의가 된다. 하지만 세상에 나아갔을 때는 그 정체성 대로 살지 못하고 정반대로 세상이 정해진 정체성을 가지고 살 때가 많다. 도대체 왜 그럴까? 왜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하면서 세상에서는 다른 정체성이라는 옷으로 갈아입고 살아갈까? 그 이유 중 하나는 내 잘못된 자아상이라고 생각한다.
10. 내가 가지고 있는 편견, 고정관념, 습관, 사회적인 통념, 마음의 상처, 가치관 등이 아직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위에 있기 때문이라 생각이 든다. 
11. 그런 점에서 이 새대에서 필요한 믿음은 무엇일까? 어떤 상황에도 내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 끝까지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라는 사실을 믿고 한 걸음 한 걸음 담대히 나아가려는 자신감이지 않을까? 
12. 믿음은 성격보다 먼저다. 착한 성향은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성품이다. 하지만 그것이 믿음보다 앞서선 안된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을 때 나를 하나님의 자녀를 사실을 굳건히 지켜줄 수 있는 것은 내 착한 성향이 아니라, 믿음이기 때문이다.
13.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의 눈동자로 보신다면, 나는 다른 사람을 볼 때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내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생각으로 그들을 보려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진 고정관념은 다른 사람의 외모에 따라 판단이 바뀌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의 중심을 보셨듯이 나 또한 그들의 중심을 보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즉, 그들을 통한 하나님의 마음과 눈으로 그들을 보려고 해야 한다.
14. 나는 소그룹 리더다. 리더가 필요한 눈은 세상적인 눈이 아니다. 외모로 그를 판단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 함부로 ‘그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전적인 내 생각이고 그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기 때문이다.
15. 하나님의 눈으로 그들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눈? 너무 형이상학적인 생각이지 않을까? 하지만 정말 하나님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원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시선,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여쭈어야 한다. 사람의 마음으로는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다. 한계가 있다. 그 사람이 나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어떤 해를 끼칠 때 아주 쉽게 돌아설 수 있는 게 사람 마음이다. 
16. 그들이 나에게 해를 끼친다고 할지라도 있는 그대로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은 오직 하나님의 눈으로 그들을 볼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 사람을 인격으로 존중해줄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고 함부로 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모습이 부족할 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으시고 늘 배려 하시며, 내 생각을 존중해주신다. 
17. 오늘 소그룹 모임을 하면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조원들은 내가 리더로서 리더답지 못하고, 잘 챙겨주지 못하고, 가식으로 대하고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부분은 사실이다. 오히려 그게 너무 맞아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오늘 채연이가 마지막으로 예배하고 한국에 두 달간 갔다 온다. 그래도 마지막이라 잘 챙겨줘야 한다는 책임감과 동시에 별로 챙기고 싶지 않는 두 마음이 공존했다. 
18.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후모임 같이 하자고 먼저 말했다. 하지만 채연이는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다.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었던 것 같다. 지혜누나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별로 같이 하고 싶지 않았다. 나도 그냥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어차피 다시 올껀데... 귀찮으니까 그냥 지금 인사하고 두 달 후에 보자’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숨기고 아쉬운 척 후모임을 같이 하고 싶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게 마음에 걸렸다. 
19. 나는 정말 리더인가? ���더가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리더의 책임감은 무엇인가? 예수마을 출석률이 너무 저조해 졌다. 1년 전만 해도 120명 가량이 출석했는데, 지금은 30명 정도로 줄었다. 그 사이에 목사님이 바뀐 이유도 있지만, 사실 그 궁극적인 이유는 리더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 마음으로는 리더를 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리더 하면서 교회를 떠난 성도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더 늘기는 커녕 사람들을 교회를 떠나게 하다니... 리더를 하면 할 수록 책임감도 커진다. 그러나 변화 되어지는 모습은 없다. 이게 내 문제다.
20.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무엇인가? 책임은 내가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소그룹 리더를 하고 싶지 않다. 그게 내 솔직한 마음이다. 사실 하고 싶지 않은 일 투성이다. 학교 과제를 하고 싶지 않다. 일을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학생이 과제를 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내가 지어야 한다. 내가 한다고 했으면 그것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어야 한다. 책임에 대한 무게감. 나는 그것을 늘 생각해야만 한다. 학생으로서의 책임, 학교 사진기자로서의 책임, 도서관 직원으로서 책임, 리더로서의 책임, 회계로서의 책임.
21. 소그룹 리더로서의 책임은 무엇인가? 영혼을 돌보고, 응원해주는 것, 그리고 그들의 신앙을 성장시키고 예수님께 인도하는 책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조원들을 성장 시키고 있는가? 나는 얼마나 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고 있는가? 어떤 성품으로 그들을 대하고 있는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지 않는 것은 나의 책임이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있으려면 내가 바로 서야만 한다. (자식은 부모의 행동을 보고 성장한다) 내가 바로 서야 그들이 나를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리더로서 나의 책임은 ‘깨어 있는 것'이다. 늘 성령님을 의지해야 하고, 늘 성령님 앞에서 죄에 대해서 경각심을 가지며, 하나님께 경외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22. 다시 한 번 리더로서 가져야 할 생각. ‘내게 어떤 예수님의 성품이 보이는 가?’ 이런 생각을 늘 품고 싶은 생각이 없다면, 차라리 그냥 리더를 내려놓는게 내 신앙이나, 예수마을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어줍잖게 리더 행색해서 영혼을 케어 하지도 못하고 교회를 떠나게 하는 것보다는 백번 낫다고 생각한다.  
23. 나는 왜 책임감이 부족할까? 책임감이 부족한 원인은 무엇이고,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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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ohot90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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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지 못하는 이유들
글을 쓰고 싶다. 하지만 글을 쓰기는 어렵다. 모순되지만 사실이다. 글을 쓰고 싶다는 표현 보다도 쏟아내고 싶다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수많은 욕구 중에 인간은 배출의 욕구도 있다.  내 생각,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고 싶은 욕구 같은 게 있다. 따라서 나는 내 생각을 쏟아내는 글을 쓰고 싶다. 그러나 잘 되지 않는다. 솔직하게 표출할 때 나를 방해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솔직한 감정을 글로 쓰는 데 방해가 되는 요인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잘 쓰려고 한다. 첫문장부터 잘 쓰려고 하는 강박이 있다. 그 강박은 내 사고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굳게 한다. 뇌가 굳으면 동시적으로 손도 굳는다. 스포츠는 힘이 들어간 상태에서는 제대로 할 수 없다. 4년 전 이모부한테 탁구를 배웠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 처음으로 탁구를 배웠다. 2개월 동안은 애 많이 먹었다. 온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기 때문이다. 힘을 빼는 데만 2개월이 걸렸다. 힘을 빼면서 비로소 날개 돋은 듯 실력이 일취월장 좋아지기 시작했다. 글은 스포츠다. 힘을 빼야 제대로 할 수 있다. 잘 쓰려고 하는 강박, 첫문장 잘 쓰려고 하는 욕망이라는 힘을 빼는 게 먼저다.
둘째, 남한테 잘 보이려고 한다. 잘쓰려고 하는 것에 근본적인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쓴 글이 다른 사람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는 누군가의 욕망을 욕망 하면서 살았다. 고등학생 때는 엄마의 욕망을 욕망했다. 엄마의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었다. 엄마가 하는 선택과 결정에 나는 늘 순종했다. 그리고 그게 그리 싫지도 않았다. 스무 살엔 내 여자친구의 욕망을 욕망했다. 여자친구가 원하는 내 모습을 되기 위해서 애를 썼다.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주기가 겁났다.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면 싫증을 느끼고 도망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게 맞지 않는 입으면서 연애를 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날 수록 힘이 들었다. 내게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으려고 하니까 에너지 소모가 컸다. 그렇게 나는 늘 내 인생을 다른 사람에게 확인 받기 위해서 살아왔다.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도 같다고 본다. 내 글이 다른 사람에 인정 받아야만 가치 있는 일일까? 그렇지 않다.허접한 글이어도 내게 의미가 있으면 충분히 가치 있는 활동이다. 또한, 다른 사람의 말에 귀기울이기 보다 내 마음, 감정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할 수 있는 활동도 글쓰기라 생각한다.
셋째, 게으르다. 매번 그렇지는 않지만 살다보면 특별히 내게 의미가 있는 날이 있다. 평상시에는 일기도 안 쓰면서 어떤 날은 글로 남기고 싶은 날이 있다. 무언가 쓰고 싶은 글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글감이 생각 났을 때 당장 쓰지 않고 자꾸 하루 이틀 뒤로 밀었다. 내 게으름 때문이다. 한 번 쓰기 시작하면 길게 써야 한다는 강박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루이틀 안 쓰다 보니까 나중에는 까먹거나, 내가 그 날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도 생생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내가 느꼈던 생각이나 감정을 한 두 문장이라도 적어놨다면, 지금쯤 그 글을 읽으면서 당시 있었던 느낌을 떠올릴 수 있을 텐데 참 아쉽다. 어떤 작가가 이런 말을 했다. “오늘 글을 쓰지 않으면 언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존재다.” 조금만 더 부지런을 떨어서 그때 생각들을 글로 썼더라면 아주 미묘하지만 그때 나보다 조금 더 발전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생각날 때 바로 쓰자. 생각이나 느낌은 휘발성이 강해서 그때 적어 놓지 않으면 다른 감정이 섞여서 그때 그 순간의 감정을 되돌리기가 어려워진다. 분위기 좋은 카페를 보면 사진을 찍어 기록에 남기듯이, 그때 느꼈던 감정을 한 두문장 글로 남기자. 그 순간 나는 쓰기 전 나보다 발전 될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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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ohot90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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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하나님
기독교와 범신론의 공통점은? 둘 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엄밀히 얘기하자면 전혀 다른 하나님이다. 하지만 두 하나님에 대한 차이점을 설명하려 할 때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가? 생각보다 그로 인한 문제점은 크다. 나의 의도와는 다른 엉뚱한 하나님을 믿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건 믿을 수 없이 끔찍한 일이다. 
과연 범신론과 기독교에서 믿는 하나님의 차이는 무엇일까? 범신론부터 얘기해보자. 범신론자들은 선악의 구분 너머의 존재로 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엔 이 세상엔 선도 악도 없다는 식의 다소 허무주의적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보자. ‘암은 사람을 죽이기 때문에 나쁘다. 그렇다면, 암을 죽이는 의사들도 나쁘다’ 라는 관점이다. 좀 황당하지 않은가? 하지만 의외로 가방끈이 길수록 범신론적 관점에 현혹될 가능성이 크다(큰 깨달음을 얻은 존재처럼 보이기도 하고 초월적인 인상을 주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범신론은 하나님을 우주의 일부로 믿는다. 우주가 곧 하나님이다 라는 생각이다. 만약 우주가 멸망한다면 하나님도 없어진다는 결과가 된다.
기독교적인 관점은 범신론과 정반대이다. 기독교적 관점은 선악 구분 너머에 있지 않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그의 뜻도 선하며, 그의 백성에게 요구하는 것도 당연히 선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창조주 이시다. 우주의 한 일 부분이 아니라,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이시다. 이 세상은 그의 머리 속에서 계획되고 디자인 된 작품이다. 마치 작품 자체가 화가가 될 수는 없듯이 하나님은 우주에 종속 될 수 없다. 
간혹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들 얘기한다. “요즘 세상은 점점 타락하고 있는 것 같아” 이 말은 크리스천 뿐만 아니라, 무신론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 세상이 자신의 취향 따위에 맞지 않아서 하는 말이 아니다. 정말로 세상이 타락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이 부정하고 타락했다고 보는 그 기준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만일 부정과 타락이라는 인식조차 없다면, 부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처음부터 빛은 존재하지 않았고, 사람에게 눈도 없었다면 ‘어둠’을 인식조차 할 수 없듯이 말이다. 이것을 통해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악을 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선을 인식하는 기준이 우리 생각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선을 무의식적으로 추구한다.
여기서 질문 하나. “선하신 하나님은 왜 이 세상을 타락 되도록 지켜만 보고 계시는 건가요?”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나로선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추측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그건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셨다. 이 모든 만물을 돌보라는 명령이다. 세상의 이렇게 타락한 이유는 사실 하나님의 탓이기 보다 하나님의 백성 탓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의 인식을 정리해보자.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대한 선하신 의도를 갖고 계신다. 그의 백성을 통해서 세상의 정의롭지 못한 것, 부조리들을 그의 백성을 통해서 고치길 원하신다. 은혜는 우리에게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요구하는 패러독스(paradox)이다. 우리는 주 안에서 자유로운 존재다.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 사랑의 관계에서 끊을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세상에 어두워진 곳을 밝히 비추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 긴장 속에서 크리스천은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진리를 손과 발로, 때론 입술로 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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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ohot90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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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상하다. 스스로 내 감정을 이해할 수 없다. 집에 혼자 있는 게 싫다. 문제는 사람들이랑 있는 것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는 거다. 뭐지? 모순이다. 스트레스가 하나 더 늘었다.
교회 가족원(셀원) 중에 상담하는 누나가 한 명 있다. 다짜고짜 상담을 요청했다. 미간에 주름이 찌푸리면서 내 얘기를 경청해줬다. “혹시,다른 사람 만날 때 마음이 불편하니?” 누나의 날카로운 질문에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왜 불편한지 스스로 한 번 확인해보는게 어떨까?” 의외로 문제의 뿌리에 빨리 도달한 것 같았다. “2~3개월 전부터 여자 동생들이 좀 불편해요.” 라고 말하자 옆에 있던 형이 “너 여자친구랑 헤어져서 그런거 아니야?”라고 물었다. 그 말에 게슴츠레 뜬 눈이 번쩍 뜨인 기분이 들었다.
3개월 전 나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나보다 6살 어렸다. 연애초반에는 한쌍의 비둘기처럼 알콩달콩 사귀다가, 시간이 지나자 싸움이 잦아졌다. 싸움 원인은 상대방의 몰이해 때문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처음에 잘 맞는 것 같아 보였다. 나름 취향도 비슷하고 같은 관심사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가치관이 달랐다. 사실 가치관까지는 조금 거창하고, 라이프 스타일이 달랐다. 예컨대 나는 낭만형이었고, 그 친구는 현실형 이었다. 삶을 모든지 낙천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 나를 그 친구는 한심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남녀관계에서 존중과 배려가 이처럼 중요한지 이전에 몰랐다.
헤어지고 나서 그리 힘들지 않았다. 딱 일주일 힘들었다. 사귈 때 마음 고생이 좀 심했나보다.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비로서 노예에서 벗어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결코 괜찮지 않다는 걸 3개월 지난 오늘 알게 됐다. 여자 동생들이 불편해진 건 내 상처 때문이다. 
사람이 행복을 느끼지 못할 때가 언제일까? 수도 없이 많겠지. 한 가지로 줄이자면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답게 살지 못할 때.’ 어쩌면 상처는 나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병인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아닌 상대방처럼 되길 강요하는 병같다. 누군가 사람은 각자 자신의 타임(시간)이 있다고 말했다. 덧 붙여서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타임에 집중하지 못하고 남과 비교하는 순간, 불행은 시작된다고.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예전 여친한테 구애를 여러번 했었다. 마음을 얻기 위해서 나는 내가 되는 걸 포기하고, 친구가 원하는 내가 되길 바랬던 것 같다.거기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왜 나는 내 자신으로써 사랑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 걸까? 차가 없는 나는 왜 부끄러운 남자친구라고 생각했을까? 자존감이 부족했다. 자존감이 부족하면, 내가 느끼는 감정들이 쓸모 없다고 느껴진다. 그래서 남들 앞에서 솔직해지지 못 해진다.
“If we can talk about the tough stuff, then there’s no reason to feel ashamed or to be anybody else.” 텀블러를 하다가 이 구절 보았다. 나도 모르게 “대박!”이라고 혼잣말을 했다. “만약 우리가 어려운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부끄러워하거나 다른 누군가가 될 이유가 없습니다.” 혼잣말로 “대박!”이라고 한 이유는 내 고민을 누군가 명쾌하게 대답해줬기 때문이다. 솔직해질 때 자존감 생긴다.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만 있을 때와 이 감정을 남 앞에 얘기했을 때 그 찰나의 순간 신비한 경험을 했다. 그 순간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았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 내가 경험한 감정을 쓸모 없다고 보지 말자.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느끼는 감정이다.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솔직해지자. 내가 가장 나스러울 때는 솔직할 때이다. 나는 나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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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ohot90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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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수필 쓰기’는 글쓰기 책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문법을 알아야 한다. 이 책은 수필 문법책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다행히 영문법책보단 훨씬 부드럽고 상냥한 느낌이 든다. 읽는 내내 고리타분하거나 지루할 틈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책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안고 싶을 만큼 수필이 좋아진다. 글을 잘 쓰진 못하지만, 무작정 뭔가를 쓰고 싶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 책.
이 책을 읽으면 일상이 소중해진다.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고, 일 년 뒤가 지금과 다르리라는 기대가 없는 사람에게 이 책이 적격이다. 보물찾기하는 어린아이처럼 일상을 설레게 해준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다. 중2병. 새벽 감성. 하루키 코스프레. 물론 글 쓰는 건 자유지만 sns에 잘못 올렸다간 언팔을 면치 못하니 주의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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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ohot90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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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헤드라이트
30미터. 야간운전 자동차 헤드라이트로 볼 수 있는 거리다. 아무리 어두워도 축구장 크기 반도 안되는 이 거리만 볼 수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난 왜 그리 멀리만 보려 했을까? 지금 내 앞 30미터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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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ohot90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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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모니카. 바닷 바람
일주일 만에 산타모니카에 다시 왔다. 태평양 바다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백사장에 털푸덕 앉았다. 캐논 70D 카메라로 바다를 찍다가 금새 지루해서 도로 가방에 집어 넣고 연필과 공책을 꺼냈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글로 써보려고. 먼저 선글라스를 놓고 온게 지금 가장 후회된다. 태양이 내 기준으로 1시 방향에서 내얼굴을 정면으로 내리 쬐니까 눈뜨고 있는 것조차 힘들다. 광대뼈가 살짝 올라가고 가뜩이나 작은 눈을 단추 구멍 크기로 인상을 구겨가며 글을 쓰고 있다. 뼈가 시리는 날카롭고 매서운 바람은 아니지만, 쓰다가만 흑심이 둥글둥글 해진 연필처럼 여기 바닷바람도 그 정도 느낌이다. 하지만 얕보면 큰 일 날 것 같다. 바람의 강도는 내 이마가 훤히 다 보일 정도로 강하기 때문이다. 
참 묘한 바닷 바람이다. 차갑지만 따듯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차가움 속에 따뜻함이 서려 있는 것 같다. 오랜 시간 동안 혹독한 여정 끝에 골이 지점에 들어와 지금까지 노고에 감격해서 흘리는 눈물이 서려져 있는 걸까? 슬프지만 기쁜 바람이 라고 할까? 어쨌든 묘하다. 글을 쓰다보니 입술이 말라졌다. 입술에 침을 발랐다. 혀 끝에서 짠 맛이 느껴졌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바람 속에는 바다의 땀 녹아져 있는가 보다. 땀을 흘리고 마르고, 다시 땀을 흘리고 말려져서 검은 색 티셔츠 위에 새겨진 소금 자국처럼 이 파도 끝에 하얗게 소금 자국이 남아있다. 
산타모니카는 관광 명소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이 오고 간다. 카메라를 들고 바다를 찍는 중국인 가족들과 춥지도 않은지 물에 들어간지 30분 째 마냥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흑인 어린이들. 바다에 조심스럽게 발을 담구고 놀란 고양이 마냥 물이 차가워 허겁지겁 도망쳐나오는 연인들. 어떤 바다이던지 바다에 오면 기분이 좋다. 다른 사람들의 미소가 내 마음에 전이 되는 것 같아서. 바닷 바람을 계속 맡고 있으니까 옷이 눅눅해졌다. 내가 쓰고 있는 공책도 눅눅해졌다. 이제 나도 바다의 일부가 된 느낌이 들었다. 처음엔 어색했는데 지금은 친근한 마음이 든다. 어느새 산타모니카 바다에 물들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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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ohot90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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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친구에게.
안재욱의 ‘친구’라는 노래를 오랜만에 들었다. 노래 가사를 곱씹다가 잠시 옛 친구들 생각에 잠겼다. ‘지금 내 친구들은 어떻게 지내나? 다들 잘살고 있을까? 종종 주변 친구들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 늙었다!””는 탄식 섞인 부르짖음이 속에서 절로 흘러나온다. 거울을 보면 젖살은 간데없고, 머리숱도 점점 없어지고, 제법 많아진 흰머리. 두툼하게 붙은 아랫배를 보면 청년이라는 경계선을 통과하는 과도기 같다. 이 노래를 들으니까 친구들한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국 유학 생활 5년 동안 먼저 살갑게 연락하지 못한 내 무심함과 이기심 때문이다. 스무 살 때, 친구들과 얼굴이 벌게지도록 밤새 술잔을 기울이고, 어린 나이에 뭐 그리 한이 많은지 술김에 노래방에서 어깨동무하며 목이 쉬도록 크라잉 넛의 ‘말달리자’를 열창했던 그 순간이 허송세월이 아니라는 게 이제야 점점 깨닫게 된다. 그 순간이 그리운 거 보면 말이다.
좋게 얘기하면 그 시절은 순수했고, 저급하게 얘기하면 찌질했다. 이건 진심이다. 정말 찌질했다. 예전엔 친구들 앞에서 솔직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은 좀처럼 쉽지 않다. 힘든 날 무턱대고 전화하던 친구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카톡을 뒤지다가 결국 포기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점점 친구 사귀는 게 힘들어졌다. 나잇값이나 체면 때문일까? 아니면 예전의 순수함을 잃었기 때문인가? 비 오는 날 친구랑 속옷까지 다 젖을 만큼 밖에서 뛰어놀다가 집에 돌아와 엄마한테 혼나도 추한 몰골을 서로 곁눈질 하면서 천진난만하게 웃었던 그 시절이 그립다. 달리는 기차처럼 우리 현실은 이젠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막막하고도 불안한 현실이지만, 나도 그렇고 내 친구들이 예전의 그 천진난만한 웃음을. 그 순수함을 꼭 잃지 않기를 바라본다. 다시 만날 때, 그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만나고 싶다. 청승맞게 이 글을 쓰는 것 보면 오늘은 옛 친구들이 참 그립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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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ohot90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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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own Night Mark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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