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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이 걸린 에반게리온의 결말
사실 결말이 어떻게 될지 중요했던가? 오히려 결론은 안노로부터 한참 전에 물 건너 간 것 같다고 생각했었더랬다. 마지막 극장판이 나온 지 9년 만에 이 거대한 프랜차이즈는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다.
돈을 석유처럼 뿜었을 것 같은 CG 전투씬도 긴장감은 떨어지는 것 같았고, 미사토와 아스카를 찌그러트린 건 죄악에 가까웠고(짧지만 미사토의 신지를 향한 모성애는 진했다) 그에 비해 마리의 부각은 개연성이 많이 모자랐고(피규어 장사는 잘 했겠지만) 너무나 쉽게 외디푸스의 끝으로 달린 겐도와 신지의 부자 유혈극도 서둘러 풀어 낸 느낌이고, 농촌 일상이 한 시간이나 전개 되는 것도 지루했고(풀어야 할 떡밥이 아직 산더민데도!) 레이의 농촌 코스튬 씬들은 미소도 지어졌지만 이 시국에 일상은 더 소중하게도 보였더랬다.
고구마 백만 개의 신지가 이제 어른이 되는 일과 거기에 나오는 나머지 모든 어른들이 실은 어른이 될 수 없었던(특히 겐도), 되고 싶지 않았던 속내가 엊갈리면서 안노의 고향역으로 돌아가는? 이 결말이 다 모조리 별로였는데 나 왜 마지막 크래딧 올라갈 때 웅장한거니...
#우타다히카루 one last kiss 하나로 다 살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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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개월 동안 몸이 안 좋았다. 오랜 시간 번아웃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몸은 갖가지 형태로 문제를 일으켰다. 달리기 역시 오랫동안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5월 초에 문득 내 몸이 기억하는 행위라고는 달리는 것 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 한 달 간 몸이 어떤 비명을 지르던 간에 모른 척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몸을 개체화하고 나의 존재와 별개의 걸로 치부하며 고통을 무시했다. 달리기의 반은 거의 걷는 거나 다름 없었다. 무릎도 허리도 따라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갔다. 한 달 간 22일을 달렸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 만에 월간 200km 를 넘어섰다. 거리보다도 22일을 달린 것이 위로가 된다. 속도는 잊은 지 오래다. 4'40'' 페이스를 찍던 시절을 생각해봤자 지금의 나는 다시 태어난 것처럼 처음부터 다시 올라가야 하는 상태다. 다시 4분 대로 들어가려면 몇 개월이 걸릴까? 어쩌면 일 년도 더 걸릴 수도 있고 어쩌면 내 몸의 상태는 이제 5분 대로 만족해야 하는 지도 모른다. 5월 중순, 달릴 때 고통이 없어지면서부터는 속도에 별로 조바심이 나지 않았다.
요즘은 하루 중 달리는 순간 말고는 플로우로 접어드는 기회란 없는 것 같다. 플로우가 다 뭔가, 내가 요즘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루 중 겨우 달리는 일 밖에 없다. 나머지 모든 일들은 궤도를 벗어난 것 같다. 다시 붙잡을 생각도 안 하고 그냥 멍하니 망망대해로 떠가는 나를 바라본다. 그게 일과다. 달릴 때만큼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달릴 때의 바람, 땀이 흐르는 피부 위의 길, 나무와 그 가지가 흔들리는 소리, 두 번씩 반복되는 들숨과 날숨, 살갗에 닿는 뜨거운 태양, 떨어지는 빗방울에 젖어가는 셔츠, 바닥에 튀기는 물의 소리. 모든 것들이 플로우에 접어드는 입구다.
오늘은 6월 1일. 6월의 첫번째 달리기는 해질 무렵 나가 11km, 5’20’’ 페이스로 달렸다. 4km 넘어서 호흡과 케이던스가 안정화 되자 멈추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다 달리고 나서야 속도에 대한 욕심이 꿈틀댔지만 달리는 동안은 길의 작은 점 말고는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아마도 그런 플로우의 순간을 위해서 나는 달리고 있는 거라 생각한다. 그것이 나 자신에게 또는 다른 일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 그 플로우에 들어갈 수 있는 것만으로 나에 대한 작은 증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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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있는 엄마의 손발톱을 잘랐다. 익숙치 않은 손발톱의 두께와 모양, 손톱깎이로 하는 모든 일들이 낯설다. 손톱깎이가 깊게 파고들까 엄마는 몇 번이나 움찔한다.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지난 한 달여간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은 익숙해졌지만 손발톱을 자르는 일은 생경하다. 전에도 몇 번 자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난다. 그때도 엄마가 아파 오랜 시간 병상에 있었을 때였을 것이다.
나는 엄마의 손발톱을 몇 번이나 잘랐을까? 엄마는 내 손발톱을 얼마나 잘랐을까? 지금 내 나이가 되기 전에 엄마는 수도 없이 내 손발톱을 잘랐겠지. 아파서 누워있었을 때는 물론 개구쟁이인 내 손발을 붙잡고, 때로는 자고 있는 나를.
부모와의 시간은 이상하다. 벤자민 버튼처럼 엄마는 다시 아이로 돌아가고 있다. 반대로 나는 그 행위를 반복할 대상이 없다. 그게 연인이든 자식이든 누구도 내가 다시 아이로 돌아가는 일을 보지 못 할 것이라는 생각이 엄습했다. 누군가를 보살피는 일은 여기에서 끝난다. 그리고 나의 보살핌도 여기에서 이제 끝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러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는 일인데 순간 우주 유영 중 연결 선이 끊어져 까만 어둠 속으로 부유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기분은 언젠가 눈에 보이는 현실이 될 것이다. 나는 그때 무엇이 되어 그것을 맞이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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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이사 온 동네는 내가 살았던 곳 포함, 가 본 동네 중에서도 가장 조용한 곳이다.
코너를 하나 돌면 100미터 정도의 골목에 이 동네에 상점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다 모여 있다. GS편의점은 이 골목에서 가장 화려한 가게 외관을 자랑하고 있지만 편의점 안은 이상한 적막이 흐르는 곳이다. 그 앞으로 작은 독립 서점이 있다. 젠더와 평등, 여성과 관련된 책이 두드러져 보인다. 북토크나 작가 낭독회 같은 사진들이 있길래 물어보니 주인으로 사려되는 남자는 코로나 때문에 지금은 진행하고 있지 않다는 말을 지하에서 건져 올린 듯 아주 어렵게 입 밖으로 꺼냈다. 목소리도 너무 작아서 차마 물어보면 안 되는 것을 물어본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서점 옆에는 작은 주점이 있는데 역시나 지난 주에 방문해 보았다. 늘 지나갈 때 사람이 없었고 그 날도 나 말고는 손님이 없었다. 중간에 커다란 테이블에 둘러 앉는 구조로 되어 있어 다소 개방된 분위기가 아닐까 예상했지만 “이 집은 어떤 음식이 메인이에요?” 라는 질문에 주인으로 사려되는 주방장으로부터 약 3초 정도 억겁 같은 침묵 뒤에, “그런 건 따로 없습니다” 라는 대답을 들었다. 첫 주문 이후 내가 주종을 두 번 바꾸고 메��를 두 번을 더 시키는 동안에도 단 한 마디도 우리는 말을 섞지 않았다. 나름 컨셉인가 싶었다. 나도 따로 불편할 건 없었고. 열심히 먹었지만 음식과 술은 거의 반을 싸서 돌아왔다. 이 주점의 건너편에는 옛날 방앗간 간판을 그대로 들고 있는 정체 모를 공간이 하나 있다. 이 정체모를 공간에서 오늘 연통을 길 밖에 두고 군고구마를 팔고 있었다. 아니 팔고 있었는지는 지금 생각해보니 확신할 수 없다. 군고구마를 굽고 있는 사내에게 이 곳은 무엇을 하는 공간인지 물어봤다. 아니나 다를까 이 사내도 내게 대답을 해줄까 말까를 고민하는지 한참 뜸을 들이더니 마지못해 건축사무소라고 한다. 아 네. 차마 고구마를 파는지까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이 골목에는 밑으로 화려한 조명을 자랑하는 네일아트 집이 하나 있고 그 건너편에는 역시나 사무실로 사려되는 책방 같은 공간이 하나 있다. 그 옆에는 작업실이 있고, 오픈을 준비하고 있는 카페가 하나 있다. 하얀색으로 뒤덮인 카페 쇼윈도우에 모빌이 잔뜩 걸려 있다. 이 골목과 너무 동떨어진 모던함에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임팩트는 있다고 할 수 밖에. 아 그리고 이 골목의 코너 켠에는 김 가게가 있다. 김 가게. 김을 파는 곳이다. 가게는 김 장인의 얼굴이 앤디워홀 작품처럼 아트웍으로 붙여져 있다. 이 동네 상권이 모두 몰려 있는 골목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하나 같이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그 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골목은 조용하고 그 안의 사람들은 더 조용하다. 아주 조용한 이 곳은 다른 행성 같고, 나는 이 곳에서 에일리언 같다.
키린지의 에일리언즈를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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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랫동안 음악을 너무 많이 듣다가 지금은 사람 말을 잘 못 듣는다. 안 들으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두 번 세 번씩 말하다가 결국은 지쳐서 내게 이야기 하는 것을 멈추곤 하는데 그래도 좋다. 음악은 여전히 잘 들린다. 작은 환희도 놓치지 않고 잘 들을 수 있다. 사람의 말 보다 음악을 더 잘 듣는 게 내게 더 좋은 인생이니까 이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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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먹고 와서 킨포크를 보다가,
“SPORT. 활동적인 삶에 깃드는 동지애, 자제력, 균형, 즐거움”
단어 하나하나가 잘 묶여져 있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배열이다.
Omar Souleyman 이 레바논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포티파이에서 Warni Warni를 오랜만에 들어보았다. 이 곡의 프로듀싱을 Four Tet 이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예전에 그렇게 많이 믹스튠에 올렸는데 이제사 그걸 알다니. Warni Warni 는 Come to me 라는 뜻이라고 한다.
“항상 ‘아, 드디어 진짜 뮤지션이 됐군.’ 하다가도 ‘아니, 아직 아냐.’라고 생각한다.”
이건 다른 뮤지션 인터뷰의 하이라이트 문장이다. 아니, 아직 아냐 하는 부분의 표정이 그려졌다.
사진작가 에마 하트빅은 연초 수중발레팀 아쿠아릴리스를 만난 뒤 연작 ‘수영하는 사람들’을 촬영했다.
고전적이고 아름다운 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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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팔 반바지 입고 이렇게 밤길을 걸어도 기분이 좋은 날씨. 이런 건 늘 처음 만난듯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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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
어머니 집에 19년을 기른 강아지가 있다. 이름은 우리다. 19년 전에 처음 우리집에 왔을 때의 아기와 같은 모습을 하고 우리는 어제 떠났다. 노환으로 돌아가시는 분들을 몇 번 뵌 적이 있는데 딱 그런 모습이었다. 숨을 거두기 전의 노인들은 자기를 둘러싼 사람들의 말을 알아 듣지는 못했지만 천진해졌고 꿈을 꾸듯 눈동자는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앙상하게 말라갔지만 노화의 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생의 시작으로 다시 돌아가는 듯 보였다. 죽음은 아이러니하게도 생명을 떠올렸다.
어제 우리를 안락사 시켰다. 이름은 우리다. 3개월을 넘게 죽은 듯이 누워 있던 우리를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던 어머니는 몇 번이나 우리가 숨을 거둔 것 같아 그것을 끌어 안고 기도하며 보내주길 수���례. 하지만 우리는 기적처럼 계속해서 숨을 다시 쉬었다. 마지막 일주일 동안은 24시간 눈을 감지도 못한 채 누워 있었다. 아무것도 못 삼켰지만 그나마의 곡기라도 주시겠다고 보리물 끓인 것을 다시 누룽지 끓인 물과 같이 섞어 위의 맑은 물만 주사기로 뽑아 조금씩 우리의 입을 축였다. 애견 병원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생존력이라고 했다. 주위의 많은 반려견 지인들과 성당 분들은 어머니에게 할 만큼 했다며 한사코 이제 그만 놓아주라 하셨지만 어머니에게는 그것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어머니 혼자서도 몇 번이나 지옥을 오간 듯 하다. 어느 밤에는 고통 없이 눈을 감으라고 반주검 상태로 있는 우리의 목을 누를까 생각을 하다가 다음날 그 말씀을 내게 하시며 하루종일 눈물을 흘리셨다. 어머니도 몸이 성치 않으시니 여간 맘고생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머니 본인도 수술을 위해 입원하기 전 날, 도저히 시체처럼 누워 있는 우리를 그냥 집에 두고 오실 수 없다며 어제 다니는 애견 병원에 간곡히 부탁을 해서 안락사를 결정했다고 하셨다. 전화로 내게 그 허락을 구하는 어머니에게 나는 수화기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그리하자고 나는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우리를 아는 주위 사람들은 우리가 엄마를 잊지 못하고 또 엄마가 걱정돼 눈을 못 감는다고 말한다. 실제로 숨이 끊어지고도 우리는 눈을 감지 못했다. 수의사가 물약을 이용해 우리의 두 눈을 붙여 주셨다.
어머니가 입원하기 전, 집에서 마지막 식사를 하는데 집 안이 썰렁하다. 어머니는 식사를 하면서도 몇 번이나 우리가 누워있던 자리를 돌아보신다. 어릴 적, 불이 나 가스가 가득한 집에 혼자 있었던 우리는 이후로 혼자서 집에 있는 것을 극도로 불안해 했다. 지난 십 년이 넘도록 어머니는 모든 우선 순위가 우리였다. 어머니가 우리를 캐어하는 수준은 어떤 애견 호텔에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여행 한번 제대로 가신 적이 없고 어머니와는 그 흔한 외식 한번 하기가 어려웠다. 우리를 집에 두고 나가기 힘들었던 것이다. 행여 외식을 가더라도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허겁지겁 드시고는 빨리 집으로 가자고 재촉하셨다. 매일 새벽 우리를 산책시키고, 걷지 못 하고 부터 몇 년 동안은 유모차에 태워 다니셨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의 이부자리를 치우고 집안을 닦으셨다. 못 먹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하나 입에 씹어서 손으로 떠 먹이셨다. 그런 우리가 지금 이 순간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수십 번 상상해 온 상황이었지만 현실은 그 보다 더 무거웠다. 당신 인생에 부모도 자식도 그 누구도 우리만큼 자신을 사랑해준 사람이 없다고 말씀 하시는데 밥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수술실에 들어가 계신 어머니의 수술 결과 보다도 며칠 후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우리의 부재로 인한 어머니 심정이 더 걱정이다. 어쩌면 어머니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생명이었을 우리. 부디 아기 때의 트라우마 없이 좋은 곳에서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겠고, 어머니도 슬픔을 이겨내고 이제 우리가 아닌 본인을 위한 삶을 사실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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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 미세먼지 저감조치 시행 알람 소리는 정말 끔찍하다.
너네는 이제 죽어! 죽어! 숨도 못 쉬고 죽어! 이제 죽어! 하는 것 같다. 죽는 건 상관 없는데 하늘을 가리고, 대기를 빼앗고 살라는 건 그보다 가혹한 일이다.
일제히 울리는 누군가들의 알람 소리에 마스크를 확 구겨 버렸다. 이렇게 화가 쏟아질 줄은 나도 몰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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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어를 정말 경외한다. 상어의 사진이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데, 얼마 전 BBC 다큐멘터리로 본 그린란드상어를 계속 생각한다.
그린란드의 언 바다 밑으로 거대한 상어가 산다. 그린란드상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상어는 수세기 동안 이누이트 족만이 그 존재를 알아왔다고 한다. 암흑 밖에 없는 언 북극의 바다 밑에서 이 상어는 400년을 산다. 190년을 사는 코끼리거북이나 200년을 사는 북극고래 보다도 그 수명이 길다. 최근 발견된 그린란드상어는 512년을 살았다고 한다. 150년이 지나야 짝짓기를 하는데 아직 이 상어가 번식하는 방법은 밝혀지지 않았다.
먹이를 찾을 때만 천천히 빙하가 있는 수면을 향해 올라오지만 쉽게 먹이를 찾을 수 없다. 물질대사 속도가 극히 느린 그린란드상어는 1km/h 정도의 속도로 헤엄을 친다. 그래서 수면에 가까이 올라왔을 때는 순록의 사체든 먹을 수만 있다면 가리지 않고 먹는다.
상어는 입맛이 까다롭다. 대부분의 상어는 자신이 선호하는 먹이감을 사냥하기 위한 최적의 능력을 진화하며 살아온 동물이다. 생김새, 크기, 속도, 전자기장의 감지나, 집단 사냥, 모두 특정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 발달해 온 다양한 종류의 상어가 가진 능력들이다. 그런데 그린란드상어는 어쩌면 이토록 무미한 진화를 해왔을까 아니 진화라는 것을 하긴 했을까? 진화의 빛은 이 상어가 사는 곳까지 닿지 않은 것 같다.
가까이에서 보면 상어의 눈에 이상한 꼬리 같은 촉수가 달려 있다. 해저에 있는 모든 그린란드상어의 눈에는 요각류인 기생충이 달라 붙어있다고 한다. 이 기생충은 오로지 그린란드상어의 눈에만 기생한다고 하며, 상어의 안구를 서서히 갉아 먹는다고 한다.
점점 빛을 잃어가며 그린란드상어는 후각에만 의지해 느린 헤엄으로 먹이를 찾아 빛으로 나아가지만 그래봤자 동물의 사체나 먹을 뿐이다. 그리고 다시 그 느린 헤엄으로 춥고 어두운 해저 밑으로 내려간다. 그렇게 홀로 400년을 살아야 한다. 길고도 외로운 삶이다.
과학자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사는 척추 동물인 그린란드상어의 DNA를 연구해 인간의 장수를 개선하려 한다고 한다. 외롭고 긴 삶을 살 수 있다면 몰라도 그만뒀으면 좋겠다. 춥고 외롭지 않아도 생은 너무 길다.
화석같이 오래된 피부의 이면에 어떤 마음이 있을까. 그린란드상어는 어쩌면 길고도 외로운 삶을 견딜 수 있도록 진화했을지도 모른다. 슬픈 진화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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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는 <오만과 몽상>에서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는 방 하나가 없다는 건 짐승만도 못하다" 라고 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짐승처럼 울고 싶다. 울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그러고 싶다. 짐승처럼 그러고 싶고 정말 울고 싶을 때 울어도 되는 곳이 있는지 확신을 가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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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젊음들을 본다. 그 젊음들이 보고 있는 것을 본다. 그들은 자주 현혹되거나 흔들리거나 상처 받지만 그래도 젊음이다. 젊음이 특권은 아니나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존엄의 큰 부분을 상실하는 일이리라.
젊음은 나이나 생김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는 담벼락에 가만히 기대는 그 불안하고 섬세한 마음일테지. 꼭 한산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롤랑 바르트를 읽고, 꽃 사진을 찍고, 통 넓은 바지를 입을 필요는 없어. 그러지 않아도 젊음은 이미 찬란한 걸. 누가 정의내려 준 걸 한다면 이미 그것은 젊음은 아닐거야.
큰 파도가 덮칠 듯 다가오지만 두려워하지 말기를. 아니 두려워해도 좋아. 그것도 양분이 되니까. 분명한 건 그 파도가 너를 삼킬 수는 없어. 스물 일곱살에 생을 마감한 그 많은 아름다운 이들은 그 파도에 삼켜졌기 때문은 아니야. 그 파도에서 더 이상 올라오고 싶지 않았을 뿐. 그러니 그걸 의연히 받아 들였으면 좋겠어. 파도가 너에게 밀려오고 그 뒤에는 더 큰 파도가 또 그 뒤에는 더 큰 파도가 와. 파도가 너를 해하기 위해 밀려오는 게 아니듯 고난은 너를 무너뜨리기 위해 밀려오는 게 아니야. 파도는 의지가 없지만 너는 의지가 있으니까.
젊음, 너가 더 천천히 보고 더 천천히 삼켰으면 좋겠어. 속도와 양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더 적게 보고 더 오랫동안 생각하는 것이 시간을 갖는 유일한 방법인 걸. 젊음의 시간은 인생의 다른 시간들과는 달라. 그때 들은 음악이 우리를 이끌고 그때 본 그림이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안식처를 제공하고, 그때 본 책이 북극성이 될 거야. 젊음을 주는 대신 그 깨달음은 젊음이 지난 후에야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우리가 약속하지 않은 생의 불공정이지만.
나는 너가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어.
미세먼지 때문에 먼 곳이 보이지 않아 가까이 앉은 젊은이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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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좌석 양 옆의 빈 자리로 일란성 쌍둥이 여자 둘이 나를 사이에 두고 동시에 자리에 앉았다. 오른쪽을 한번 보고 왼쪽을 한번 본다. 둘은 타인인 냥 서로 내색이 없다. 반대편 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본다. 초현실적인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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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셔츠를 다릴 때 깨달았다. 내 능력으로는 더이상 이 셔츠를 제대로 다릴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은 마치 닫힌 세계에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는 일과 다름 없는 것이었다.
빨아 두고 한참을 걸어 둔 채 옷장에 넣지 못한 린넨 셔츠와 옥스포드 셔츠를 순서대로 다렸다. 합성 섬유는 강한 열에 순순히 복종한다. 잔뜩 찌푸린 주름도 다리미의 길 뒤로 아스팔트마냥 눕는다. 옥스포드 셔츠도 마찬가지. 질긴 조직은 오히려 쉽게 열의 길을 따라온다.
세 번째 셔츠는 다리미의 미열로 다려도 될 단순한 면 소재의 셔츠였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끊임없이 다리미 뒤로 이단의 길이 이어졌다. 굴절하고, 굴절한 채 결은 크게 반대로 접혔다. 다시 펴려고 몇 번을 뜨거운 스팀을 쏘고 다시 다렸지만 오류가 잡힐만 하면 기어코 다른 오류가 이어졌다. 평평한 등의 요크선이고, 치열하게 복식이 난무하는 팔 소매깃이고, 어느 하나 다리미의 길을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 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리미대에 데님 셔츠와 와이셔츠 가 한 장씩 더 걸려 있었지만 나는 두 손을 들어 버렸다.
밤이 한참이지만 아직도 할 일이 많아 심난한 마음에 다리미를 붙잡았는데, 세 번째 셔츠를 다리다가 나는 그만 크게 굴복하고 만 것이다. 다시 없을만큼 크게 졌다. 회복할 수 없었고, 지금은 가만히 앉아 셔츠의 무서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다리미질이 제대로 되지 않는데 달리 무엇을 해야 할까, 그런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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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속에 태연히 뚜껑을 연 채 텀블러를 넣고는 붐비는 분당선에서 나와서야 겨우 가방에서 책을 꺼내 들었는데 책의 모서리가 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놀라서 가방 속 일기장을 꺼내봤더니 이미 노트 절반에 커피 물이 스며 들어 있었다. 휴지 한 장 없어 젖은 채로 일기장을 넘기면서 입으로 불어보았지만 부질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시간을 들여 드라이어로 일기장을 한 장, 한 장 말려본다. 연한 갈색의 물만 들어 있던 종이가 울기 시작했다. 물 든 부위의 글들은 심해에 가라앉는 목걸이 처럼 천천히 어딘가의 뒤로 향했다. 글이 지워지는 것도 아닌데 나는 종이를 한 장씩 넘기며 얼룩이 묻어 있는 부위의 글들을 소중하게 눈에 담았다. 어떤 기억들은 악필로 기록되고, 어떤 추억들은 쓰다 말았고, 어떤 마음들은 이제 연하게 물들었다.
노트의 나머지 반은 아직 백지다. 물든 부위에 나는 글을 써야 하나 그 부분을 피해 써야 하나 생각을 해보았다. 피해서 쓰게 되면 훗날, 어느 시점에 커피물이 들었다는 것을 계속 인지하게 될 것인데 그건 싫었다. 그냥 물 든 얼룩 위에 쓰기로 한다. 어차피 얼룩지지 않은 게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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