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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다가 문재인정부 첫 인선 뉴스를 봤다. 친북성향 인물로 분류되는 임종석이 비서실장을 맡는다고 한다. 문재인의 기존 대북관을 보건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사는 아니었으나, 아무래도 그의 출신 성분이 있는만큼 인기검색어를 비롯해 벌써부터 각종 물타기와 편가르기가 시작되고 있다. 빨갱이정부 시작이라며. 그렇지만 이 자체로 문재인의 대북정책을 빨갱이 정부로 편가르기 하고 물타기 하는 건 너무도 일차원적인 비난이기만 하다. 대북정책이야 지난 정권보다 이쪽이 평화통일을 위해서 훨씬 나은데다, 행정부 수장 대통령이라면 국익을 위해 친북은 물론 종북세력을 써도 잘만 써먹으면 되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임종석 비서실장 인선이 대통령 취임 후 '첫 인선'이라는 상징성 강한 일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가뜩이나 안보 문제에서 가장 공격을 많이 받던 진보 정당인데다, 지난 정권이 망쳐놓은 나라를 복구하기 위해 국민 통합이 필요한 시점인데, 구태여 이런 극단적인 인사를 함으로써 국론을 분열시켜버리고 말았다. 워낙 불안정한 시국이기 때문에, 신뢰를 조금이라도 쌓은 다음 느즈막히 '효율적' 인선을 단행해도 되지 않았을까. 이런 성급한 판단이 이해가 안 가고 많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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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이 당선됐다. 출구조사만 봐도 너무 확연한 득표차이지만, 그 투표에는 정말 많은 고민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문재인에게 표를 던졌지만, 직전까지 다른 투표를 수도없이 고민했었다. 이번 선거는 어차피 대통령이 기호 1번 문재인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대통령이 될 사람을 뽑는 것보다도, 내 한 표가 정말 누군가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는 '소신 투표'의 성격을 띠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심상정 투표를 많이 고민했다.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의 목소리가 이만큼 있다는 주장에 내 한 표를 실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최종적으로 그에 대한 마음을 접은 건, 다른 게 아니라 심상정 지지자 때문이다. 그들은 지극히 감정적이고 ���편적인 이유로 '반문'을 자처하며 홍준표보다도 문재인을 까내렸고 나는 그게 싫었다. 간략히 내 소수자에 대한 입장 정리는 이렇다. 사회는 각 집단이 일정 비율을 가지고 구성되며 유지되기 마련이라서, 소수자가 다수자가 된다거나 구성 형식이 달라지면 위험하다는 것.
안철수나 홍준표를 고민할 일은 절대 없고, 끝에 가서 유승민 투표를 많이 고민했다. 솔직히 지금에 와서는 유승민 찍을 걸 싶기도 할 정도다. 처음에는 그동안 유승민 친일/친박 이력 때문에 절대 배제했었는데, 보수의 수준을 조금이라도 올린다는 측면에서 그를 지지하고 싶었다. 정치는 완벽한 정당의 완전한 집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반대파의 견제를 통해 완성되기 때문이다. 결국 문재인을 포함한 진보정당이 언젠가 실수를 할 텐데, 그때 홍준표를 위시한 자유한국당이 나온다면 정말 끔찍하니 말이다. 좋은 반대파를 뽑고 싶었다고 해야하나. 유승민이 여러모로 아쉽다.
한편 당선 확실 이후 광화문에서 민주당 기념 인사를 할 때 안희정에게는 다시한번 실망했다. 기껏 앞사람들이 국민 통합을 말해뒀더니 안희정은 술 취해 와서는 민주당이 잘못하더라도 너그러이 봐주면서 5년 10년 20년 집권을 부탁하던 것이다. 노무현을 잃은 슬픔이야 이해하겠지만 우리 사회 부정의의 많은 이유는 기준을 어겼기 때문인 건데, 기준을 어기면서도 하고픈대로 하겠다는 건 지난 정권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진다. 아직은 대통령님, 당선자라는 호칭을 불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 다음 순서 김부겸의 연설은 그런 면에서 옳았다.
무대 위에 오른 사람들을 보자 노무현이 떠오르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한국 정치를 이끌어갈 사람들이 정치적, 인간적인 어른으로 받들어모시던 사람이 노무현이니 말이다. 안희정, 유시민, 문재인 모두가 노무현 앞에선 아랫사람을 자처해왔다. 로우 데이터를 얻을 수 없는 정치의 특성상 내가 정치적 판단을 내리고 싶지는 않고, 단지 그런 사람들이 받들어 모시는 그 그릇을 다시금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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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건축가들이 '인문학적 건축'을 말하는 것도 꼴 사나웠는데, 웬 문학평론가까지 여기에 합세했다. 인문적 시선이니 인간의 삶과 시간이니 김정호의 마음이니 실사구시니... 기본적으로 시각예술인 건축에서 시각성에 대한 얘기는 단 하나도 없이, 자꾸만 하기 편한 착한 소리로 모든 걸 설명하려고 한다. 착한 소리를 이리저리 붙이는 게 어디하나 논리적이지�� 않는 건 더한 문제.
그런데 웃긴 건 정작 건축가들이 이런 '인문학적 건축'을 더더욱 반긴다는 점이다. 이유인 즉 슨, 이를 통해서 건축이 보다 큰 학문처럼 설명되는 것 같고, 무엇보다 한국 건축가들의 디자인 능력이 어차피 되도 않기 때문일 터. 인문학 모르는 건축가들이라서 '인문학적 건축' 만들어준 승효상을 존경하고, 디자인 모르는 건축가들이라서 '예쁜 건축'을 금방 '나쁜 건축'으로 치환해버린다. 나쁜 것만 보고 사는 도시환경에서 시각예술을 하는 사람들조차 시각성 훈련 대신 쓸데없는 말빨만 좋아라하니 뭐가 나아갈 턱이 있나.
전문성 없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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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동성애 차별 발언으로 인해 그에게 주겠다던 표를 거두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나도 생방송 보면서 문재인 발언에 뜨악했던 게 사실이고, 사람들의 비판 또한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 그렇게 옮겨가는 쪽이 심상정이다. 참을 수 없는 소리를 하는 후보에게 표를 주기보다는, 설령 사표가 되더라도 올곧은 말을 한 사람에게 표를 주는 게 낫다는 이유다. 나도 비슷한 입장에 서있어서 해당 발언이 있던 JTBC 토론 이후 양 후보 중 누구에게 내 표를 줄 것인지 계속 고민했다.
난 문재인으로 결론을 내릴까 싶다. 그의 차별 발언이 너무나 큰 실망감을 주긴 했으나, 그것 하나 때문에 지금까지의 모든 걸 없던 것으로 없던 것으로 만드는 건 지나치게 감정적인 판단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정치인'으로서 문재인이 그 말을 하는 입장을 떠올렸을 때 그렇다. 심상정이 할 수 있는 말과, 문재인이 할 수 있는 말이 다르고, 둘은 각각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일반 시민으로서 정치가 어려운 건 우리가 절대 raw data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인데, 이 정도까지는 충분히 참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돼지발정제' 인식이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문재인의 몫은 결코 부적절하지 않다.
절대적 선이 현실 정치에서는 모두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전제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물론 심상정의 발언이 옳기는 하지만 그 반대급부로 더 많은 홍준표가 있고, 그래서 현실 변화는 결국 단계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그런 현실을 도외시한 채 절대적 옳음을 기준으로 한 정치인을 비하하는 건 사회 변혁보다는 개인의 우월감 과시에 그치는 건 아닐까. 피치못하게 완벽할 수 없는 정치적 합리성을 알아야 한다. 만약 안철수가 된다면..... 어쩔 수 없는 비극적 운명과 우연으로 정치적 비합리성을 변명하기에는 너무 늦은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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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초와 여초 얘기를 할 때마다 나오는 결론이 "거기 가면 여자(남자) 많으니 결혼 잘 하겠네"다. 한 성별이 다른 성별보다 수적으로 많기 때문에 신발 짝맞추듯 짝짓기를 하고, 거기에 남는 잉여 성별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는 논리다. 그렇지만 인간사회는 한사코 양적 논리에서 벗어나있다. 예컨대 심각한 남초 집단인 중국 사회는 되려 남자가 더 많은 여자를 거느리는 축첩 제도를 이런 논리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생물학적으로 남자 여자를 생식기 차이로 구별하고 그에 따라 남초와 여초를 판별하지만, 사회학적으로는 개개인이 상정하는 '남성'과 '여성'의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마 "지구상에 너와 쟤가 떨어졌어, 결혼할래?"를 묻는 농담이 그런 맥락에서 나올 것이다. 결혼한다고 대답하는 건 어쨌거나 서로를 남성과 여성이라는 2명 인구를 상정한 결론이겠지만, 만약에 저런 애를 이성 혹은 사람으로 취급 안하면 그때 인구수는 나 혼자고, 그래서 결혼을 안 한다는 대답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인구란 본질적으로 가치판단이 전제된 개념이고, 그래서 기준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이와같은 "쟤는 남자도 아니야, 여자도 아니야"가 여러 방식으로 확대재생산 됐을 때 이르는 게 계급사회다. 모든 사람을 통틀어서 인구수를 세는 게 아니라, 아예 서로 다른 계급으로 사람들을 나눈 다음, 각각의 계급 안에서 별개의 인구를 세는 사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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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잃고 싶지 않은 최종적인 감은… 원론적인 아름다움이다. 어느 순간부터 다른 가치를 위해 포기하고 눈 감아버린 가치… 거기에 대한 감마저 잃어버릴 때 사람은 괴물이 된다. 내가 냉탕 온탕을 미친듯이 왔다갔다 하는 건 그 때문이다.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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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내가 멍청한 사람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그래서 여지껏 내가 한 노력은 멍청하지 않기였다), 무식이 죄는 정말 아닌 것 같다. 지식적 완벽함이란 거의 불가능한 능력일 뿐더러(그래서 똑똑한 사람이 너무 좋기는 하다), 모든 지식은 상대적으로 비교되고 사용되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나 스스로를 멍청하다고 소개할 수 있게 되었다.
반대로 혐오하게 된 인간상은 감이 없는 사람이다. 감 없는 사람이 세상에서 쓸모없는 건 물론, 많은 경우 그들은 감 있는 재능 있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들이 자신의 감 없는 선택과 판단을 합리화하고, 그들이 모여 공동체 다수를 형성할 때면 그때부터 최악의 비극이 시작된다. 감 있고 똑똑한 사람은 남을 위해 봉사하는 운명을 지닌 천재인데, 감 없고 멍청한 사람은 그런 천재를 짓밟으려고 한다. 무식은 불쌍한 거에 그치지만, 감 없는 건 죄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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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이란 후속 세대를 키우는 일종의 조합이다. 고등교육기관에서 사제지간이란 나랑 동종 분야에 있을 사람을 길러 추후에 어떤 방식으로든 협업을 약속하는 관계이고, 혼자 할 수 없는 일을 전공, 학문이라는 공동체 조합을 통해 가능한다. 그래서 제대로 교육을 하려면 일단 자신이 바빠야 한다. 나 혼자 못하니까 쟤도 끌고와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어야 액기스를 가르쳐준다.
그런데 건축과 교수는 학생과 동업자 될 가능성이 전무하다. 나중에 나랑 함께 할 여지도 없지만, 일단 교수 당신이 건축을 안 하기 때문이다. 교수 월급 받다가 가끔 학교 이름 팔아 설계하는 게 작업 전부이니, 아는 게 없는 건 둘째치고 무엇보다 절실함이 없다. 나도 안 지으니 쟤도 지을 게 없고, 그래서 가르칠 생각도 노력도 없다. 건축과 교수는 그냥 필요한 일반 고등교육 시스템 덕분에 먹고 사는 속 편한 직업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회를 좀 먹는 건축과 교수는 교수들은 건축 세계가 백팔십도 바뀐 지금 상황을 인지할 생각이 없다. 기본적으로 건축을 실패한 무능력한 사람들, 고등교육 시스템에 들러붙어 건축계 좀 먹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냥 학교에 왔으니 쓸데없는 프로그램 단위 설계만 우후죽순 가르칠 뿐이다. 웃긴 건 사태 파악도 못한 학생들은 아직도 그게 전부인 양 순종하고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따라간다는 사실이다. 바보인가? 물론 학생들의 지능 수준이 떨어지는 것과 별개로, 그래도 어른으로서 교수들 몇명은 좀 반성하고 상황을 타개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싶다.
계속해서 학교에 정나미가 떨어져 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료를 찾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는데 지금은 싸그리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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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파는 포스팅을 몇 번이나 한지. 수 년간 모아온 책을 일 년에 걸쳐 다 정리하면서, 파는 기준을 몇 번이고 바꾸고 책 자체에 대한 생각을 몇 번이고 고치고 있다. 팔아야만 하던 지난 시간 동안은 책을 최대한 기술, 물건, 상품으로만 보려고 했는데, 막상 책장이 텅 비어버린 지금은 그게 아님을 다시 되뇌인다. 솔직히 좀 슬프다.
무엇보다 각각의 책이 표상하던 지적 바다가 모두 메마를 게 서운하다. 아무리 안 볼 책이더라도 꼽혀있으면 그래도 언젠가 공부해야지 하면서 해당 분야를 상상하기 마련인데, 그 자리가 사라지자 당장 계획한 눈앞의 공부와 일만을 처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급한 공부의 깊이야 깊어지겠지만, 또다른 바다를 헤엄치고 싶던 넓이의 상상력이 사라진 셈이다.
내가 책은 테크놀로지라며 전자책을 옹호할 때 JK가 들려준 장 피에르 고랭의 말이 떠오른다. 사유가 생겨나는 건 책을 읽을 때가 아니라, 책을 찾아나설 때라고. 도서관 서가를 돌아다��� 때나 화장실을 가기 전, 외출을 하기 전 책을 고를 때 사유가 생겨난다는 말이 나는 지금 사라진 책들을 보며 실감나는 중이다.
그러나저러나 당장 이사를 가야하고 돈이 급한 나한테 책팔이는 후회없는 결정이다. 이제 나머지 권도 망설임없이 팔 거고. 그렇지만 책을 팔기 위해 포스트잇 하나씩을 떼어낼 때마다, 그리고 거기에 적힌 메모를 볼 때마다 밀려오는 아쉬움이 너무 크다. 그때 나는 이런 페이지에 인상을 받았구나, 하는 그날의 포인트들. 그때가 아니고선 더이상 마주할 수 없는 상상력이니까 말이다. 21살 나는 바르트 사랑의 단상에 왜 저리 많은 포스트잇을 꼽았는지, 아무튼 이것도 판매 박스에 집어넣었다. 누구한테는 낙서밖에 안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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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우절에는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고 곯리고 장난친다. 그리고 속는 사람은 속이는 사람이 "만우절이잖아"를 말할 때까지를 기다린다. 거짓말은 진실을 밝히기 전까지는 거짓인 거니까. 다만 거짓이 장난에 불과할 거라는 희망감이 거짓말을 견디게 만든다.
장국영은 그런 날에 죽었다. 거짓이 장난에 불과할 거라는 날에.... 그래서 누구도 장국영의 만우절이 장난인지 거짓인지 진실인지를 밝힐 수가 없다. 속이는 사람의 "만우절이잖아"를 기대할 수 없는 속는 사람이란 괴로울 따름이다. 에이프릴풀스 최고의 조크는 "장국영이 이 날을 택한 이유가 있었던 건지 들을 수 없다"는 말.
알랭 드 보통은 실연한 연인이 상대방에게 자신의 슬픔을 전달하는 최고의 방법은 '자살'이라고 말한다. 나는 너 없이 살 수 없어. 자신의 사랑과 실연에 대한 슬픔을 전달하기 위해선 목숨을 끊어야 한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런 선택을 하고 났을 때, 자신의 헤어진 연인이 그 광경에 어떤 표정을 지을 지 정작 본인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죽었는데, 너는 ...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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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은 그 자체로 집중할 법 하지만, 유독 음악만큼은 다른 일을 하는 데에 부차적으로 틀어두는 걸로 여긴다. 작업송, 취침송, 청소송... 주된 활동이 있고 그것을 보충해주는 용도로서다. 그래서 예전에는 이런 감상이 음악 감상을 무시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자체를 즐기는 일이 아닌 거니까. 그런데 실은 그렇게 들어야만 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게 듣는 것 같다. 음악에 집중하면 한도끝도 없기 때문이다. 청음 매장에 들어가 헤드폰 꼽아 음악을 들을 때면 이러다 큰일 나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음악만 듣는 무아지경에 있다가, 몇 곡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린다.
앗싸리 음악만 들으면서 몇 시간을 보냈다. 몸 안 좋고 스트레스 많아서라는 핑계가 꼭... 음악에 집중해도 좋다는 심약한 변명 같다. 할 일 많은데 벌써 한 시. 이럴 때 특히 한 곡을 주구장창 듣는 편인데 간만에 다시 들은 이 노래가 되게 잘 들리고 있다. Such a very well built song. It's like an emotional 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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