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smsm5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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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th(2013)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라는 유명한 온라인 게임에서는 ‘얼라이언스’와 ‘호드’ 두 종족 연합이 서로 싸운다. 그러나 그 스토리가 한 쪽의 일방적인 입장이 아니다. 플레이어는 처음 시작할 때 자신의 연합을 고를 수 있다. 즉 바로 옆자리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 친구가 게임 상에선 자신의 적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게임 스토리를 진행하다 보면 두 연합의 서로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큰지 알게 된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든다. ‘왜 그들은 서로를 미워하며 싸울 수 밖에 없을까?’ 자신의 가족을 죽여서, 종족의 평화를 위해, 연합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등등 다양한 이유로 두 연합은 전쟁을 계속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상대 연합의 종족들이 타당한 이유 없이 그냥 미워질 때 전장에서 만난 친구의 아이디를 보면서 깨닫는다. 나는 진정 어떤 이유로 이들 종족을 미워하는가.
어린 시절 만화영화를 볼 땐 선과 악의 경계가 명확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콘텐츠에선 주인공=선이란 공식은 변하지 않았고 당연히 주인공에 대치되는 존재인 악당은 언제나 나쁜 사람이었다. 그러나 점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알게 되면서 이러한 불변의 진리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나에 대한 험담을 하고 다니는 쟤는 분명 내 기준에선 나쁜 아이인데 그 아이의 친구들은 착하다고 평가한다. 시간이 지나고 수도 없이 실망하다 보면 알게 된다. 선악의 기준은 매우 상대적이란 것을.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그냥 사람이구나. 그 순간 기존의 캐릭터에 대한 인물 평가도 바뀐다. 모든 캐릭터에겐 각자 그들만의 인생이 있다. 맥베스는 권력에 대한 야욕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한 폭군만은 아니었다. 현대적으로 해석한 맥베스에선 자신의 나라와 백성들을 아꼈던 맥베스의 다른 모습이 더 돋보인다. 배트맨의 영원한 숙적 조커도 사실은 배트맨과의 목숨을 건 사투에서만 자신의 존재 의미를 유일하게 찾을 수 있는 그 사악한 순수함이 절정에 이른 인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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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경찰 브루스 로버트슨도 그런 캐릭터다. 그는 승진을 위해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는 비열한 인간이다. 동료를 이간질하고, 용의자와 뒷거래를 하는 걸로도 모자라 마약에 음주 근무까지 하는 막장 인생의 인간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권력에만 집착하는 인간이 아니다. 그는 동료의 아내와 바람을 피워 동료를 자살 미수에 이르게까지 하고 크리스마스 파티에선 신체적인 콤플렉스가 있는 후배에게 모멸감을 주기 위해 자신의 신체부위를 복사해서 공개하는 게임을 주도한다. 여자 동료는 애초에 여자여서 경감을 꼬셔서 지금의 지위에 오른 무능력자 정도로 취급한다. 돈 많은 회계사 친구의 부인에게 성적인 농담을 던지는 장난전화를 걸어 자신의 성적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다. 영화 ‘필스(Filth)’의 주인공 브루스 로버트슨은 이 정도로 사생활이 지저분한 인간이다. 만약 일상에서 이런 인간을 만났다면 모두가 입을 모아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 욕하고도 남을 캐릭터다. 조커같은 순수한 악의 결정체가 아닌 비현실적이지만 우리 일상 속에서 왠지 한 명쯤은 있을 법한 흔히들 말하는 ‘진상’ 캐릭터라는 점이 더욱 그의 존재에 불쾌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영화를 볼수록 이 미워할 수 밖에 없는 진상에게 눈길이 간다. 영화가 진행될 수록 왜 이 브루스 로버트슨이라는 인물은 이렇게 진상인 인간이 되었는지 서서히 드러난다. 그는 꾸준히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었다. 나비넥타이가 인상적인 정신과 의사로부터 정기적인 검진을 받고 약을 처방 받는다. 약을 먹지 않으면 정신적인 고통과 함께 환각에 시달린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추한 돼지로 보이고 주변 사람들은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동물로 보인다. 때때로 도저히 정신적인 고통을 견딜 수 없을 때 그는 약대신 코카인을 선택한다. 그리고는 현실적인 환각보다 더 깊은 환각의 세계에 취한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그는 마치 정신 나간 과학자처럼 보이는 의사에게 진정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 아무도 믿지 말라. 그리고 동생을 죽였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어 받는 고통들. 결국 환각 속 의사의 처방은 ‘아픔이 클수록 더 많은 약이 필요하다.’ 그렇게 브루스는 빠른 속도로 망가져가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든 정신적으로 온전치 않은 브루스를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환상 속에서 자신을 이끌어주고 믿어주는 매력적인 아내 캐롤을 계속 찾지만 사실 진짜 아내 캐롤은 진작에 딸과 함께 브루스의 곁을 떠나고 없었다. 브루스는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을 받았고 또 사랑을 주는 존재였던 아내와 딸을 그리워한다. 동료들 앞에선 행복하고 안정된 가정생활을 하는 남편을 연기하고 있었지만 정작 크리스마스에는 혼자 아내와 딸의 모습이 담겨있는 비디오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불쌍한 사람이다. 주변 사람들에겐 누구보다 강해 보이고 싶고 그들의 우위에 서고 싶어하지만 사실 브루스는 어떤 사람보다도 불행하고 약한 사람이었다. 과거의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자신을 잃고 주변 사람마저 다 떠나고 없는 불쌍한 사람. 그것이 브루스 로버트슨 경사의 진짜 모습이었다.
자신이 승진을 위해 주변 사람들을 모함해가며 추진해왔던 일이 실패로 끝나자 브루스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 그를 버티게 해주었던 유일한 버팀목, 상상 속의 아내 캐롤이 그토록 원했던 승진, 승진만 한다면 캐롤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란 환상에 사로잡혔던 그의 마지막 버팀목 마저 사라졌다. 그의 말버릇처럼 모든 게임의 룰은 같았다. 주변 사람과 자신을 대상으로 게임을 했지만 결국 그 게임에서 졌다. 승진에 실패한 것이 대수인가. 브루스의 동료들은 그에게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하루 빨리 복귀하기를 바란다고 한다. 그러나 브루스에게 이번 게임은 자신의 남은 모든 것을 건 세상과의 한 판 승부였다. 그리고 그는 졌다. 동료들에게 추한 모습만 보여준 채로 일은 마무리되었다. 결국 유일하게 자신을 진정한 친구라 생각해줬던 회계사 친구에게 마지막으로 인간적인 모습의 브루스로서의 유언을 남기고 그는 패배의 대가를 지불하였다.
어쩌면 우리 주변에서 가장 악질로 보이는 사람은 사실 가장 불쌍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실 가장 약한 인간이다. 사실 별 볼일 없지만 자신의 약점을 보이기 싫어서 상처를 감추고자 털을 있는 한껏 부풀리고 있는 들 고양이 같은 사람들이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제 3자의 입장에서 그러한 사람들을 바라보니 그들의 인간적인 모습, 진짜 약점이 보인다.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없다. 그저 그가 살아온 인생이 그를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만들 뿐이라는 것을 영화 ‘필스’의 브루스라는 캐릭터를 보면서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이 글의 저작권은 skal2033과 재독한인문화신문 풍경에 있습니다. 인용시 출처를 꼭 남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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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sm5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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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lvet Under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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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아무런 희망도 미련도 없는 젊은이들이 방랑을 하며 나지막히 내쉬는 탄식과 같은 음악.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의 음악을 정의하자면 이렇다. 사회적인 격동기였던 60년대 미국에서는 미국의 사회적 가치를 모두 부정하는 반사회적인 젊은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미국 사회에서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삶의 목표들을 모두 거부하며 사는 삶을 추구하였다. 히피 이전에 반사회적인 사상을 가진 그들이었지만 결코 히피와 같은 강력한 저항은 없었다. 사랑과 평화를 외치지도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을 부정하고 거부할 뿐이었다. 시대의 거센 물살에 그들은 거스르지도 따르지도 않고 벗어나고자 했다. 그리고 이런 소소한 사회적 움직임 속에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그들의 음악이 있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60년대 급속히 성장하고 있던 록의 시대에 보컬 겸 기타인 루 리드와 존 케일을 중심으로 뉴욕에서 결성된 밴드이다. 일반적으로 현대까지 그 명성이 알려진 밴드라면 뚜렷한 장르적 정체성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벨벳 언더그라운드에는 다른 밴드와는 다른 음악적 성향과 역사가 있다. 이 밴드의 음악은 밴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이었으며, 그 당시 인기가 많았던 음악도 아니었다. 그들의 데뷔 앨범이 유명해진 건 앨범 발매 후 한참이 지나서였다. 많은 음악적 실험과 발전이 있었던 60년대였지만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은 그 실험성이 너무 과했는지 그 격동의 시기에도 환영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은 혁명이라고 할 정도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비록 대중적인 영향력은 없었지만 그들의 앨범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밴드를 만들었다고 했을 정도로 이 밴드의 음악은 독특하고 전위적이었으며 예술적이었다. 이들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로큰롤을 기반으로 하였지만 클래식 전위음악과 프리재즈의 영향을 받아 전위적이고 독특한 음악세계를 펼친 음악이었다. 특별할 것이 없는 미니멀리즘의 극한이라 할만한 멜로디 속에 뒤틀리고 거친 기타 반주, 변태적이고 반사회적인 가사가 더해져 당대의 ‘비주류’의 음악을 만들어냈다. 이들의 이러한 비주류성은 인디 록의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 사회에 반기를 드는 가사는 히피 세대를 거쳐 70년대 펑크 록, 80년대 뉴 웨이브에 까지 영향을 주었고 현대음악을 연상하게 하는 기괴한 사운드는 사이키델릭 록과 더 나아가 프로그레시브까지 전파되었다. 많은 후대의 음악가들이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그들의 음악의 기반으로 칭송하는 이유이다.
너무 실험적이어서 대중적인 인기조차 없었던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이 살아남아 다음 세대 음악가들의 음악적 기반이 될 수 있었던 공로는 두 명의 아티스트에게 있다. 앤디 워홀과 니코. 이 두명의 예술가는 당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진가를 알아본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60년대 뉴욕은 가장 전위적이고 가장 비주류인 아티스트들이 모두 모여있는 예술가 또는 광인들의 도시였다. 그 전위적인 광인들 중 가장 주목 받던 아티스트는 단연 팝 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이었다. 60년대 앤디 워홀은 뉴욕에서 자신의 예술작품 활동뿐만 아니라 출판, 영상, 음악 등등 여러 다양한 미디어 매체와의 협연을 활발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런 앤디 워홀의 활동 중에 눈에 띈 밴드가 벨벳 언더그라운드였다. 워홀은 지나친 실험성과 즉흥성으로 라이브 클럽에서조차 외면 받던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자신의 공장에 초대해 그들이 음악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었다. 워홀은 벨벳 언더그라운드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며 명실상부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스폰서로서 그들의 음악을 함께 만들었다. 워홀은 1966년 자신의 미디어 사이키델릭 쇼 ‘Exploding Plastic Inevitable Media’에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출연시키기도 하였다. 워홀과 벨벳의 협력이 가장 빛을 발하는 결과물은 역시 1집 앨범 ‘The Velvet underground & Nico’이다. 이 앨범은 워홀이 직접 그린 바나나 그림이 있는 앨범 자켓으로 유명하다. 이 앨범은 프로듀싱, 앨범 디자인까지 모두 워홀의 총괄 아래에 이루어졌다. 이 앨범은 록 역사상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앨범 중 하나로 꼽히지만 막상 들어보면 들으면 들을수록 당황스럽다. 처음에는 가볍고 잔잔한 발라드로 시작하나 싶더니 이내 불협화음과 변태적인 가사, 정체불명의 샤우팅이 머릿속을 괴롭힌다. 왜 이 밴드와 음악이 주목 받지 못했는지, 앤디 워홀이 왜 그들에게 관심을 가졌는지 대번에 이해가 된다. 펑크와 같은 직접적인 반항은 없지만 이 모든 주류를 거부하는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은 그들의 사상적 정체성을 잘 표현해주었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음악이지만 간간이 들리는 저음의 여성 보컬의 목소리는 마음을 한결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바로 벨벳의 디바 ‘니코(Nico)’의 목소리다. 당시 유명한 모델 출신 독일 배우였던 니코와 벨벳은 앤디 워홀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다. 니코 역시 예술의 도시 뉴욕에서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앤디 워홀의 영화에 출연하기도 하고 음악가로서 솔로 앨범도 냈지만 가장 예술적인 기질이 발현되었던 시기는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보컬로서 활동했을 때였다. 니코는 워홀과 마찬가지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에 영감을 주기도 하고 스스로도 그들의 비주류적이고 전위적인 음악에 영향을 받았다. 그들의 음악적 상호작용의 완성작이 바로 그들의 데뷔 앨범 ‘Velvet Underground & Nico’다.
그 당시의 유명했던 아티스트와의 작업에도 불구하고 주목 받지 못했던 그들의 실험이 본격적으로 재조명 받기 시작한 시기는 데뷔 앨범을 낸지 20년이 흘러서였다. 벨벳의 음악은 시간이 흐르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당시에는 처절하게 외면 받았지만 지금은 음악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명밴드로 자리잡고 있다. 이들의 음악은 영원한 비주류의 상징으로 추앙 받고 있고 많은 마니아들을 형성하고 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과 삶 자체는 지금의 비주류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부족하지 않다. 극적인 성공 스토리도, 낭만적인 해피 엔딩도 아니다. 그러나 주류에 거부하고 자신만의 길을 가고 결국 나중에 인정받는 그들의 음악 인생 자체가 바로 ‘언더그라운드’이다.
*이 글의 저작권은 skal2033과 재독한인문화신문 풍경에 있습니다. 인용시 출처를 꼭 남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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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sm5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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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S TREFFEN STARS - Masterworks in Dialogue
 하나의 테마를 관철하는 여러 작품을 보는 것은 언제나 큰 즐거움이다. 시간이 서로 다른 작품들이 하나의 주제에 의해 같은 전시 공간에 배치되면 새로 보는 그림들은 말 할 것도 없고 이미 많이 본 작품마저 신선하게 느껴진다. 대부분의 미술관들은 시간이 지나면 전시의 배치를 바꾼다. 그렇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같은 미술관을 가보는 것도 미술관을 알차게 즐길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프랑크푸르트를 대표하는 미술관 슈테델 미술관(Städel Museum)도 새로운 전시 테마에 맞춰 미술관 전체의 전시 배치를 새롭게 바꾸었다. ‘대화 속의 걸작들(Meisterwerk in Dialog)’ 이라는 전시 주제에 맞춰 시간 병렬 순서대로 재구성한 슈테델의 작품들. 이 구성은 전에 없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면서 때로는 놀라운 예술사적 증명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소장 작품들에 새로운 시각을 부여한다.
 이번 슈테델 전시의 가장 중요한 테마는 ‘대화(Dialog)’이다. 일반적으로 대화는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체로 미술관엔 침묵만이 가득하다. 미디어 예술 또는 행위 예술이 아닌 이상 미술관의 작품들은 매우 조용히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하지만 사실 작품들은 생각보다 말이 많다. 슈테델의 전시 기획자들은 이 그림들이 숨겨둔 또 다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Willem van Haecht의 그림 ‘캄파스페를 그리고 있는 아펠레스(Apelles painting Campaspe, c.a 1630)’에선 오래 된 화가와 학자의 만남이 있었다. 이 그림의 제목은 그리고 있는 화가와 그 모델이 된 그리스 장군에 맞춰져 있지만 시선의 중심에 그들이 있지는 않다. 오히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넓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화려한 그림과 조각상이다. 그 중에서도 오른쪽 벽면, 한 학자의 초상화가 보인다. 이 그림 속 그림의 학자는 Quentin Massys(1465/66-153-)로 아마 예술가들 사이에서 알고 지내던 인문학자로 추정된다. 초상화 속 그는 마치 눈앞에서 대화를 하려는 듯이 책장을 넘기면서 손을 올리고 있다. 그는 과연 누구에게 말을 걸고 있을까. 그림 속 화가와 모델 또는 이 그림을 그린 화가 본인, 아니면 그림 너머로 자신을 보고 있는 감상자에게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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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획에서 주목한 또 다른 작품은 우리에게 익숙한 Johann Heinrich Wilhelm Tischbein의 ‘로마 평원에서의 괴테(Goethe in the Roman Campagna, 1787)이다. 이 화가와 독일의 대 문호 괴테는 함께 이탈리아 지역을 여행했다. 여행 중 화가는 틈틈이 괴테의 초상화의 아이디어를 스케치하였고 괴테는 이런 화가를 관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화가는 초상화를 괴테의 눈 앞에서 완성하지는 못했다. 미완성으로 남겨둔 후 나중에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해 초상화를 마무리했다고 한다. 이 그림은 괴테의 진짜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후에 괴테라는 인물을 대표하는 형상이 되었고 아돌프 폰 돈도르프(Adolf von Donndorf, 1835-1916)는 이 그림을 직접적인 모티브로 하여 괴테의 모습을 조각상으로 구현하기까지 했다.. 이쯤 되면 ‘대화’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겠다. 작품의 창작 과정에서 사람들 사이의 직접적인 대화가 있었다기 보다는 ‘교감’이 있었다고 표현하는 쪽이 더 적절하다. 이 교감은 괴테와 티쉬바인처럼 같은 시간 안에서 작가대 작가로 직접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다. 티쉬바인의 그림과 아돌프 폰 돈도르프(Adolf von Donndorf, 1835-1916)의 조각상처럼 시간을 뛰어넘은 작품과 작품 사이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 또는 드가(Edgar Degas 1834-1917)처럼 작가와 다른 예술이 만나서 교감을 이루기도 한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작품을 보는데 잘 모르겠으면 발레 하는 모습이 있는지 찾아봐라.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틀림없는 드가의 작품일 것이다’라는 우스갯소리처럼 드가는 발레를 사랑한 화가로 매우 유명하다. 그는 발레 공연에서 많은 예술적 영감을 받았고 많은 작품에서 이 영감을 표출해내었다. 감상자는 드가의 작품을 통해 드가가 느꼈을 공연에서의 인상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이번 슈테델 전시 기획에 동원된 많은 걸작들은 각자가 예술 창작의 동기가 된 다양한 교감의 결과물이다. 시인과 화가, 학자와 화가, 그리고 예술공연과 화가.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감상자인 우리들에게 대화를 시도한다. 어쩌면 누군가는 전시된 그림들과의 교감에서 새로운 창작의 모티브를 얻어 또 다른 대화의 결과물을 생산할지도 모른다. 기획자와 감상자 그리고 또 다른 창작자가 모여 새로운 시간의 병렬을 만든다. 
* 이 글의 저작권은 skal2033과 재독한인문화신문 풍경에 있습니다. 인용시 출처를 반드시 남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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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sm5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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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RM FRAUEN - Schirn Kunsthalle in Frankfurt am 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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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베를린은 독일 제국의 수도이자 유럽의 무역허브, 성장세에 있는 국제적인 메트로폴리스였다. 200만명 이상의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베를린이라는 도시에선 부르주아와 하층노동자들이 서로 만나고 부딪히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베를린을 중심으로 1910년 예술가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새로운 변혁을 위한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예술 비평가이자 작곡가 Herwarth Walden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표현주의 예술 조성을 위한 잡지를 발행하였다. 이 잡지가 바로 ‘Der Sturm’, 그 당시 독일의 작가들과 예술가들의 융합에 큰 역할을 한 기념비적인 예술잡지다. 이 잡지의 성공은 곧 STURM 갤러리의 개장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STURM갤러리는 아방가르드 예술에서의 Walden의 위상을 높여주었다. STURM 프로젝트의 영향은 매우 놀라웠다. Walden은 잡지와 갤러리의 성공에 힘입어 STURM 아카데미, STURM의 밤 그리고 STURM 극장을 설립하였고 아방가르드 예술에 지대한 역할을 한 많은 젊은 예술가들을 키워냈다. STURM 갤러리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법한 샤갈, 프란츠 마크, 칸딘스키, 폴 클리 등의 유명한 예술가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그러나 이것 만이 STURM 프로젝트의 전부가 아니다. 비록 다른 프로젝트만큼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의 예술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는 업적이 있다. 바로 여성 예술가의 후원이다. STURM 갤러리에서는 수많은 다양한 나라의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1912년부터 1932년까지 Walden에 의해 여성작가들의 그림들이 독일에서 192점, 뉴욕과 도쿄를 비롯한 해외에서 170점이나 전시회에 출품될 수 있었다. 20세기 초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성은 창작의 재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여성들은 당연하게도 예술가가 될 수 있는 배움의 기회 조차 갖지 못했다. 1919년까지 여성들의 예술 아카데미나 대학의 입학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Walden은 이러한 사회적 통념과 터부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STURM 갤러리에 다른 갤러리 소유주들 보다 훨씬 많은 여성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였다.  
이번 “STURM FRAUEN” 전시는 이름 그대로 STURM 잡지에 게재되었거나 STURM 갤러리에 전시되었던 여성 예술가들의 작품만을 전시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당대에 유행했던 표현주의, 입체주의, 추상주의 등의 미술양식을 따르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만으로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들이 양식과 여성성의 결합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져선 안 된다. 아마 전시에 대한 정보 없이 전시를 보러 오면 이번 전시가 여성작가들의 작품만을 모아놓은 전시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STURM의 창간인 Walden도 이 점에 주목을 하여 여성 예술가들의 작품에 관심을 가졌으리라 생각한다. 그들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당대의 거장들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는다. 대담하면서 분석적인 색 사용, 관록과 기개가 느껴지는 붓 터치, 무엇보다도 한 명의 예술가로서의 통찰력과 표현력이 돋보인다. STURM 갤러리에 자신의 작품을 내건 여성들은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예술적인 감각이 뛰어나고 또한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예민하게 읽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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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anne Werefkin의 그림을 보자. 맨 처음 그림을 볼 땐 사진으로는 알아볼 수 없는 원본만이 갖는 어둡지만 오묘하고 신비한 색감에 눈이 간다. 그러나 그림을 찬찬히 읽기 시작하면 이 그림에서 발길을 뗄 수 없게 하는 강렬한 이끌림의 원인을 알게 된다. 음산하고 이질적인 풍경 속에서 지나치게 기다랗고 새까만 사람들이 막대기로 바닥을 뒤적거리고 있다. 전반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에 마치 이 사람들이 저승사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람이 살 수 없어 보이는 세상과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생존을 위해 등 뒤의 공포를 애써 이기고자 땅만 바라보는 두 사람의 형상이 어딘가 모르게 처절하다. 막대기같이 가느다란 사람의 모습에서 그들의 가난마저 읽어낼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후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가난, 배고픔, 그리고 절망을 하나의 그림에 멋지게 담아내었다. 당시의 통념대로 여성들이 예술적 재능이 결여되어 있고 사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집안에만 가만히 있었던 생명체였다면 이렇게 제국의 몰락과 새 정부의 혼란으로 인해 혼돈 속에 살았던 민중들의 삶을 극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여성이어서 특별하지도 않고 여성이어서 부족하지도 않다. 전시를 보고 나면 여성 이전에 이들의 예술가로서의 재능을 알아낸 Walden의 혜안에 감탄을 할 수 밖에 없다. 20세기 초에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다라는 인식이 있었다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Walden도 이런 현대적인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깨어있는 시민으로서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기획했다라고 감히 말할 수는 없다. 그가 주목했던 것은 예술가로서의 재능 그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그는 그저 예술을 주도하려는 야망과 예술에 대한 애정으로 그가 생각하기에 재능 있는 예술가들을 고용했었던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겠지만 그 시대에 그런 외적인 것에 대한 차별이 없는 깨어난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여성이 법적으로 평등한 21세기에도 여전히 여성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 특히 예술계에서의 이런 차별이 아직도 존재하는데 말이다.
여성들이 만든 작품을 평가할 때 많은 사람들이 우선 그들의 여성으로서의 특별함이 어떤 방식으로 작품에 적용되었는지에 주목한다. 그러나 남성 작가들의 작품의 평가에선 창작자의 남성성에 대한 평가는 없다. 사회의 정의와 도덕에선 양성의 평등을 지향한다곤 하지만 아직도 모든 영역에서 성차별의 프레임을 깨지는 못했다. 예술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 이는 예술을 감상하고 창작하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동의하는 명제다. 작품의 감상은 창작자와 감상자 오직 동등한 위치에 있는 둘만의 상호작용이다. 작품을 해석하려는 감상자가 작품의 뒤에 서있는 창작자의 모습을 모두 알 길은 없다. 다만 주어진 정보로 각자의 해석을 할 수는 있다. 창작자의 성장 배경, 출신 지역, 사생활 이 모든 것이 해석의 열쇠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의 열쇠꾸러미에 ‘성’이라는 열쇠를 집어넣으려면 최소한 모든 성에 대한 총괄적인 개념의 프레임을 대입해야 한다. 그러나 예술에서 ‘성’이라는 개념은 ‘일반적인’ 남성을 제외한 다른 성들, 즉 여성, 중성, 또는 소수의 성 전부다. 우리는 여기서 반기를 들어야 한다. 왜 남성성은 전혀 특별하지가 않은가. 이미 법적으로는 남성과 여성, 그리고 많은 선진국에서는 다양한 성들도 모두 같은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여성이라는 조건 하에 작품에 특별함이 더 부각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지독한 차별이다. 이미 100년 전의 그림들로 인해 여성성이라는 특징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으니 말이다. 나의 무의식 속엔 어떤 편견이 자리잡고 있었을까. 편견과 통념의 틀을 깬 Walden과 20세기 초 여성작가들의 혁신적인 그림들을 보면서 마음 속의 벌레를 한 마리 쫓아내었다.
*이 글의 저작권은 skal2033과 재독한인문화신문 풍경에 있습니다. 인용시 반드시 출처를 명시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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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sm5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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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가난하지만 예술을 즐기는 사람은 그러하지 않았다.
내가 하고 있는 공부, 그러니까 미술사는 그 근본이 부자들의 교양과 유희를 도와주기 위해 생겨난 학문이다. 초기 미술사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감식을 하기 위한 이론에서부터 생겨났다고 하니까. 그래서 학문의 논점도 주로 모렐리나 뵐플린과 같이 그림 자체의 양식이나 형식을 두고 진위를 가리고 시대를 구별하는 것에 집중되어있었다.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아직 다 완벽하게 배우진 않았지만 이후 예술을 즐기는 관중들의 성향이 달라지고 철학과 심리학 등에서 새로운 이론이 나오면서 더 넓은 범위에서 예술을 조망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예술은 상류층의 문화로 여겨진다. 물론 옛날옛적부터 이어져 온 미술시장의 매커니즘을 알면 그럴 수 밖에 없구나 라고 납득은 하지만, 예술이 상류층의 유희로밖에 쓰이지 않는 걸 보면 나같은 평범한 프롤레탈리아집안 서민층이 이런 고급학문을 공부해도 되나 싶다. 결국 이 길의 끝은 부자들의 똥꼬빨이인가 생각이 들 때도 많다.
이런 딜레마는 나처럼 예술을 학문으로 공부하는 사람 뿐만 아니라 그 콘텐츠를 직접 창작하는 예술가들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일 것이다. 특히 순수예술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내 길의 끝은 부잣집 마나님들의 교양놀이의 도구인 것인가 하는 회의감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딜레마에서 ���어나기 위해서 그들은 대중예술로 발길을 돌리거나 세상을 부정하는 아나키스트가 되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라는 궁금증 하나로 공부를 시작했다. 첫학기여서 그런지 공부를 하는 것이 마치 목이 너무 마른데 마실 것은 요상한 냄새때문에 마시기 힘든 한약밖에 없어서 안마시자니 목이 너무 말라 미치겠고 마시자니 괴로운 상황과도 같다. 그리고 그 마셔야 하는 한약이 드럼통 한가득 남았지. 여기다 환약까지 같이 먹어야 하는 상황이다. 현실의 스트레스와 학문적 고통이 스멀스멀 온 몸을 기어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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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sm5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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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할 수 없는 대자연의 날이 가까워오니 어쩐지 뭔가 표출하고 싶은 욕구가 폭발한다.............
페북에 쓰자니 굳이 내 멘탈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 많고 트위터에 올리자니 너무 긴 하소연들을 해볼까 한다. (사실 페북에 독일어로 조금 쓰긴 했지만)
독일에 와서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절대적인 마음의 평화였다. 누구도 나를 알지 못하고 나도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완전한 혼자가 된 시점에서 나는 그동안 경험해 보지 못한 마음의 안정과 평화로움을 느꼈다. 항상 어쩔 수 없이 주변의 눈을 신경쓰며 살아야했던 한국에서의 일상을 청산하고 새로 시작하니 새 도화지를 받은 것 마냥 두근거리고 좋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 싶을 만큼 사실 현실은 열악했지만 그래도 그때는 마냥 좋았다. 삼시세끼 빵에 감자샐러드만 발라먹어도 홀가분하고 행복했다.
그러나 어학을 시작하고 가야할 목표가 생기니 그 홀가분함은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부모님이 보내주시는 소중한 돈을 내가 이런 곳에서 낭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과연 이 곶통이 언제 끝날 것인가. 보통 유학와서 6개월이 지난 시점이 가장 향수병이 강하고 괴로운 시기라는데 나 역시 피해갈 수 없었나보다. 내면의 갈등과 설상가상으로 외부적으로 여러 트러블이 겹쳐서 하루하루 괴롭게 보냈다. 그나마 그 시기에 한국에서 가족도 친구들도 오고 어학 시험도 빨리 마쳐서 다행이지 그것조차 없었다면 지금쯤 한국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독일에서의 생활이 거의 일상이 되었고 더이상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산다. 그리고 생활이 안정되니 이젠 나 자신에 집중하게 된다. 유학의 좋은 점은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갖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내가 유학을 결심하고 그 중에서도 유럽을 선택한 이유는 꿈이나 목표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로망이 더 강했다. 누구나 한번쯤은 유럽에서 낭만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꿈꾸지 않나. 어렸을 때 부터 막연하게 생각했던 로망이 점차 현실적으로 조금 변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현실로 다가왔다. 막판에는 결국 로망 + 도망 (올ㅋ 라임ㅋ) 이었던 것 같다. 등록금이 없고 대학의 명성에 비해 입학이 자유로운 유럽에서 한국에서의 콤플렉스들을 다 청산하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그래서 왔다. 그리고 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나다. 한국이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해 탈출했지만 이곳에서 나는 누구보다 한국스럽다. 외국인 마인드여서 외국 사람이랑 교감이 더 잘될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근본적인 문화 차이로 인해 교감이 더 어렵다. 내 진가를 더 잘 발휘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저 독일어 안되는 고문관 유학생 1 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을 깨달았을 때 로망은 깨진지 오래였다. 여전히 나는 외롭고 노잼노답이다.
하지만 대신에 새로운 방향이 생겼다. 로망은 사라졌지만 꿈이 생겼다. 생각보다 내가 하고 있는 공부는 유럽에서 인문학적 전통이 깊은 학문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그 끝없는 깊이에 허덕이고 있지만 언젠간 그 끝을 보게 되면 한국에도 이 멋진 시스템과 콘텐츠를 이식하고 싶다. 한국에서는 미술사학이 그다지 발달되어있지 않아서 지금 단계에선 발전을 위해 선진학문의 시스템과 콘텐츠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번역하고 재구성 할 수 있는 사람도 필요할 것이다. 그 일을 하고싶다. 물론 여전히 노래도 하고싶고 악기도 연주하고싶지만 장기적으로 바라보면서 원동력이 될 큰 목표가 하나 더 생겼다고 생각하자. 
그러기 위해선 넘어야 할 장벽이 많다. 그만한 일을 하기 위해선 그정도의 자리가 필요한데 한국에서 흔히 쓰는 부정적인 방법으론 하고싶지 않다. 편법을 쓰지 않으려면 실력이 엄청 좋거나 스타가 되거나 둘 중 하나여야겠지. 이 분야에선 분명히 나를 필요로 할 것 이다. 그리고 내가 그 필요한 사람이 되면 불러줄 것이다. 이런 믿음 하나에 지금은 그저 공부를 하는 수 밖에 없겠지. 어차피 나는 돈이 목표가 아니니 안되면 뭐 평생 글팔이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또 한가지 걱정되는 건 내가 어느 쪽 사회랑도 맞지 않을 것이라는 점. 나는 한국을 사랑하지만 한국 정서엔 안맞는 사람이다. 사사건건 꼬여서 삐딱하게 보고 주변 기준이 뭐 어떻든 내 기준에 맞지 않으면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같은 반골종자는 한국 사회에 맞지 않는다. 특히 힘 좀 있는 한국사람들은 그런걸 무지하게 싫어한다. 그건 내가 잘 안다. 그래서 그런 놈들 없는 곳으로 피난 온 거니까. 그런데 그렇다고 독일 사회에 잘 맞는 것도 아니다. 나는 여전히 한국어를 잘하고 한국 문화에 절여져 있는 순수 내츄럴 본 한국인이다. 이곳에서 나를 보는 프레임은 일단 아시안, 그리고 한국인이다. 나는 한국인을 대변하는 존재다. 그리고 나는 이방인다. 내가 아무리 독일어를 잘하게 되어도 나는 이방인이다. 그나마 지금은 학생 신분이어서 다행이지 이것마저 없으면 그냥 이 사회에서 나의 신분은 이주노동자에 불과하다. 독일 사람들은 생긴 것과 다르게 소심하고 내성적이어서 이방인인 나에게 먼저 다가와 주지도 않는다. 나도 소심하고 내성적이어서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는다. 언젠간 독일어를 잘하게 되면 좀 나아질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들�� 나 사이엔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결론은 결국 나는 어느 사회에도 편승하지 못하는 인간이 될 수도 있다는거지.
그래서 지금 고민이다. 다다음 학기에 어학공부도 해야하고 한국어로 미술사 공부도 하고싶어서 한 학기 정도 한국에 방문학생을 가고 싶은데 이 선택이 모든 것을 얻을 것인가 모든 것을 잃을 것인가 몰라서. 모르겠다. 이번주 식비 10유로로 버텨야 하는 것도 고민이고 다 고민이다. 인생은 고민과 고통의 연속이다. 지금 가장 고통스러운 독일어나 읽으러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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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sm5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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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의 미학
 한국인에게 있어서 ‘식사’라는 것의 의미는 단순히 영양분을 섭취하는 행위 그 이상이다. 유난히 한국에서 ‘먹방’이라는 컨텐츠가 뜨거운 호응을 얻으며, 페이스북 맛집 포스트에 많은 사람들이 좋아요를 누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따뜻한 밥 한 끼에는 그 사람에 대한 호감 또는 정감 등 여러 의미가 담겨있고, 시골에 내려갔을 때 할머니께서 거동이 불편하신 몸을 일으켜 내어주시는 고봉밥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랑을 가득 담아 가득 퍼주셨을 것이다. 엄마와 크게 싸워 토라져도 ‘밥 먹어라’ 이 소리 하나에 뾰루퉁한 얼굴을 했지만 방 밖으로 나오는 것도, 제일 좋아하는 반찬을 가득 집어 먹는 것에도 엄마에 대한 무언의 미안함이 담겨있다. 엄마또한 따뜻한 밥 한끼 차려주시는 걸로 혼을 낸 것에 대한 미안함을 대신 전하였고. 어른들이 항상 잘지내냐는 인사 대신 ‘밥 먹었냐’ 라고 물어보는 것도 밥, 식사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를 먼저 깨달으셨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서로 같이 밥을 먹는 것 만으로도 그 사람에 대한 호감이 증가한다니 이는 단순한 우리만의 문화가 아닌 모든 인간의 공통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인생의 미학 중 먹고 마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이고 본능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맛있는 먹거리 마실거리에 인간은 가장 최고의 ‘Wohlgefallen’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제대로 못먹고 못마시는 사람들이 제일 불쌍하다고 여긴다. 만약 나에게 그런 시련이 닥친다면 견디지 못하고 그렇게 평생 사느니 이대로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할 정도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 세번 있는 식사시간와 틈틈히 있는 마시는 시간은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한 끼라도 허투루 보내기 않기 위해 생각하고 고민해서 그날의 한 끼를 결정한다. 영양가 또는 맛 둘 중 하나가 있어야 만족한다. 질 좋은 차를 고르고 최고의 궁합을 가진 술과 안주를 고른다. 이 한 끼를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이 한 잔을 마실 수 있음에 고마움을 느낀다. 먹는 재미와 마시는 재미를 모르는 사람들 눈엔 그저 식욕에 사로잡힌 닥치는대로 다 먹는 인간으로 보이겠지만 사실 그 안의 미학을 이해하면 이것이 절대 과식, 과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맛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절정의 상태는 결코 포만감에서 오지 않는다. 티타임의 경우 절제된 차 한잔, 곁들여먹는 궁합이 잘 맞는 간식 몇 피스가 가장 절정의 예술을 보여주고, 술자리의 경우 토하지 않을 정도의 술과 그에 어울리는 안주가 가장 적절하다. 식사의 경우도 양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언제나 한그릇만 먹는 습관을 들이면 된다. 짜파게티 하나는 너무 적고 두개는 너무 많으면 하나만 먹고 디저트를 먹는다. 아니면 계란후라이를 곁들인다. 자기가 만든, 또는 누군가가 만들어 준 한 그릇의 정성에 감사함과 감탄을 담아 맛있게 먹고 마시는 것. 그것이 일상에서의 자그마한 행복일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삶의 방식은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자기만의 작은 규칙이자 미학이 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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